택배로 도착한 물품을 보고 후배가 몹시 궁금한 눈초리다.
- 별거 아니야. 일회용 깔판이랑 최소형 호스 연결 가스버너랑...........
- 장비는 이미 다 갖추고 있으면서 뭐하러 또 사?
- 작고 가벼운게 필요해서. 백패킹(Backpacking) 다시 시작해 보려고.
- 형이 백패킹을 다시 다닌다고? 이런 이런......... '청백중캠장오' 라는 말도 몰라?
- 그게 뭔데?
- 형 지금 나이가 몇이니? 청년 때는 백패킹, 중년 때는 그냥 캠핑, 장년들은 오토캠핑장으로 가라는 말이야.
- 임마. 그럼 너는 시방 이 헝아가 장년이란 말이니? 미친넘. 헝아는 엄연히 청년 같은 중년이다.
- 점점 미쳐가는 헝아.............
아무튼.
일률적으로 고급화 내지는 정형화되고 있는 요즘의 캠핑문화에서 조금은 옛시절로 돌아가는 그런 캠핑에 어느정도의 그리움을 가지고 있던 중, 굳이 신세대의 표현에 맞춘 백패킹이라는 초기 내지는 원시의 초창기의 캠핑으로 회귀하기로 작정을 했다.
텐트라기 보다는 군막이라 해야 할 군용 A형 텐트를 둘러메고 사방으로 쫓아다니던 시절로 회귀를 뜻함이다.
백패킹이란, '짊어지고 나른다'는 뜻이다. 야영에 필요한 최소한의 필수 장비만을 갖추고 산과 들판과 골짜기로 자유롭게 떠돌아 다니는 여행을 의미한다. 차량에 장비란 장비는 모두 모아 바리바리 싣고, 마치 아파트 한채를 싣고 이동하는 수준으로 잘 정비된 캠핑장을 찾는 요즘의 캠핑을 거부한다는 의미로도 볼 수 있겠다.
그렇게 그렇게 해서 백패킹을 아무때고 떠날 수 있는 만반의 준비를 갖추어 차에 싣고 다녔다. 일주일 넘게.
아무때고 목적지만 정해지면 가까운 슈퍼에서 마실 물이랑 라면 정도만 구입하면 아무때고 떠날 준비가 모두 끝났다.
그런데........
요즘 시즌이 월드컵 시즌이요. 월드컵이라면 사죽을 못쓰는 내가 이었던가.
어제까지의 거의 모든 경기를 라이브(생중계)로 시청했다. 물론 하루에 한 경기 정도는 꾸벅꾸벅 졸면서........
뉴스를 통하거나 재방송도 있는데 나는 기어코 생중계를 보아야 직성이 풀린다. 생각해 보라. 앞으로 내가 살면서 과연 몇 번의 월드컵을 더 볼 수 있을런지. 매일도 아니고 4년에 한번씩 열리는 월드컵 시즌이니 그냥 올인을 해 버릴밖에......
하여, 생활리듬도 신체리듬도 모두 균형을 잃고 많이 망가져있는 상태다.
온 중일을 월드컵과 백패킹 사이에서 고민을 하다가........ 심신이 너무 지쳐 있어서 하루쯤은 월드컵을 재방송을 통해 보기로 하고......... 멀리 까지는 가지 못하고 아주 가까운 곳으로 백패킹 연습이라도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현장일을 마치고 귀가하여 사워를 마치니 밖이 어둑어둑해지고 있다. 내일은 오전까지 비가 예보되어 있다.
비는 문제가 될것 없다. 내 지난 시절의 백패킹에 관해서는 그 내용이 이미 모두 비와 충분히 연관이 있었기에......
차를 몰고 안림동의 마즈막재에 올랐다.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배낭을 둘러메고 후레쉬를 켜들고 금봉산의 임도를 따라 올라간다.
초입까지는 가로등이 잘 설치되어 있으나 산에 오를 수록 칠흙같은 어둠이 세상을 고요속으로 잠재우고 있다.
후드득 흐드득 빗방울이 출발부터 떨어지고 있다.
오늘의 목표는 7부 능선쯤의 전망대 데크 위에서 1인용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하거나 정상 성루에 올라가는 목재계단 데크 위에서 야영을 할 생각이었다.(표지 사진의 목재 테크 위가 애초 목표였다.)
그런데....... 중간쯤 오르자 갑자기 하늘에서 거센 소나기가 내리 퍼붓기 시작하고 있다. 갑자기 세찬 비바람이 몰아쳤다. 그리고 이어서 갑자기 뇌성벽력과 함께 사방에서 벼락이 치기 시작하였다.
더 이상은 아무래도 무리이지 싶었다.
나의 비박 캠핑에 징크스처럼 따라 다니는 폭우는 이번에도 틀림이 없었다. 이십여년이 지났어도 그 징크스는 여전히 떠나질 않고 있었다.
결국 우비를 뒤집어 쓰고 허겁지겁 서둘러 주차장을 철수를 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네 이대로 집으로 돌아가기에는 너묻 억울했다.
하여 차량 씨트를 풀로 넘기고 임시 거처를 마련했다. 트렁크를 조금 열고 기어코 가스버너를 켜서 닭가슴살로 만든 떡갈비를 구어서 비를 퍼붓는 하늘을 원망하며 폭탄주를 마시고......... 산등성이의 가로등 불빛과 퍼붓는 폭우를 실컷 감상하다가 침낭속으로 들어갔다.
새벽에 일어나니 주변으로 운무가 가득하고 비는 멈추었으나 간간히 몇방울식 떨어지고 있었다.
'산정상에서 맞이했어야 할 이 아침이었는데......' 하는 아쉬움을 속으로 삼키고 터덜터덜 새벽 산길을 올라간다.
금봉산(錦鳳山)자락 정상의 금봉산성을 향해서............
충주고을에서 동쪽으로 약 3km 쯤을 올라가면 마치 병풍처럼 길게 가로막고 선 가파른 언덕길이 나온다. 마즈막재 이다. 본래의 옛 이름은 심항현(心頂峴) 고개이다.
이 고갯마루의 왼쪽으로 해발 775m의 계족산(계명산. 또는 심항산)이 우뚝 솟았고, 우측으로 해발 636m의 금봉산이 길게 늘어서서 충주고을을 굽어보고 있다. 이 금봉산이 오늘날 모두가 흔히 남산(南山) 이라고 부르고 있는 지역의 명소다.
고을 중심의 남쪽에 있다고 해서 지은 남산이건만, 지금의 남산은 충주고을 중심인 관아골에서 볼 때, 남쪽이 아니라 남동쪽에 위치해 있다. 남동쪽이란 말도 무색하게 거의 동쪽으로 치우쳐 있는 산이다. 이 산을 남산이라고 부르려면 적어도 안림동의 어림에 고을의 중심이 있다면 모르겠다. 하니, 이 산을 남산이라 이름 지은 시기가 백제 개로왕의 명을 받은 태자 문주(훗날 문주왕)가 어림에 백제의 도읍을 옮기려 기초공사를 하던 때라면 가능한 이야기일 것이다.
충주고을의 중심 관아골에서 보면 정남향의 방향엔 바로 대림산이 있다.
충주고을 남산(南山)의 본래 옛 이름은 금봉산(錦鳳山) 이다.
그러나 남산성(南山城)이 충주산성(忠州山城)은 결단코 아니다.
남산성은 그냥 금봉산성(金鳳山城)일 뿐이다.
충주성(忠州城)은 충주읍성(忠州邑城. 관아골 일대) 이며, 충주산성(忠州山城)은 바로 대림산성(大林山城)을 말한다.
천제(天帝)가 살고 있는 천상(天上)에 너무도 아름다운 산이 있는데, 그 산의 이름이 금단산이었다. 하루는 천제가 지상을 내려다보시고 있는데, 이 나라 한 지역의 산이 마치 금단산에 비단을 걸쳐놓은 것 같이 곱게 물든 단풍이 아름다웠단다. 뿐만 아니라 골짜기마다 하늘을 향해 우뚝 솟아오른 오동나무 가지에 한마리 봉황이 내려앉아 쉬고 있었으니 가히 천상에서도 보기 힘든 절경이었다 한다. 하여 그 산의 이름을 금봉산이라 지어 내려 보냈다 한다. 바로 우리가 남산이라 부르고 있는 산이다.
봉황은 우는 소리가 퉁소를 부는 소리와 같고, 살아 있는 벌레를 먹지 않으며, 살아있는 풀을 뜯지 않고, 무리 지어 머물지 않으며, 난잡하게 날지 않고, 그물에 걸리지 않으며, 오동나무가 아니면 내려앉지 않고, 대나무 열매가 아니면 먹지 않으며, 아무리 배고파도 조 따위는 먹지 않는다고 한다. 이러한 특성과 아울러 임금의 정사가 공평하고 어질며 나라에 도가 있을 때 나타난다.
아무튼, 그런 전설 때문인지 이 금봉산엔 오동나무가 많이 자라고 있다.
이제껏 많은 곳을 돌아다녀 보았지만 이곳 금봉산만큼 한 지역에 오동나무가 많이 집단적으로 서식하고 있는 곳은 보지 못했다. 마즈막재에서 성터에 이르는 임도 옆으로도 심심찮게 우람한 오동나무를 발견할 수 있다. 하지만 가장 많은 분포지역은 남쪽으로 난 석종사 인근의 골짜기에 서너아람씩 되는 우람한 오동나무들이 많이 산재해 있는 모습을 직접 목격한 나로서는 이곳에 봉황의 전설이 서려있다는 사실이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전설에 의하면 이 금봉산성(남산성)의 다른 이름이 있는데 그 이름은 바로 (마고산성) 이다. 애초에 이 산성을 쌓은 사람이 마고할미 라는 전설에 따른 것이다. 내용은 이렇다.
천상세계의 금단산 수정봉에 살고있던 마고할미는 일상에서 천상의 계율을 자주 어기고 잔혹하게 살생을 즐겨 마침내 천제의 진노로 하천산루독봉(두꺼비류) 모습으로 쫓겨나 거칠고 험난한 생활을 5백년이나 이어나가야만 했다. 어렵게 천제를 다시 대면하게 된 마고할미는 잘못을 뉘우치고 참회하였으니 금단산으로 다시 돌아가 살게 해 줄것을 청하였다. 마고할미가 개과천선한 것은 알겠으나 그렇다고 하루아침에 다시 천상으로 불러 올리기에 난감해 하던 천제는 '금봉산에 들어가 성채를 쌓고 그곳을 네 거처로 삼아 한동안 지내도록 하라. 단, 성채는 북두칠성을 따라 하루에 한 별의 거리만큼 꼭 칠일 안에 성채를 모두 축성토록 하라' 명하였다. 할미가 금봉산에 이르고 보니 과연 그 경치가 이루말할 수 없이 절경이라 매우 흡족해 하며 꼭 칠일만에 성채를 모두 완성하였다. 성채의 완성을 전해들은 천제는 곧 도감을 시켜 성채의 완성을 점검하도록 하였다. 성채를 둘러보고 온 도감의 보고는 훌륭하였는데........ 성채의 수구문(水口門)이 서쪽으로 나 있다는 대목에서 불같이 노하더니, 금봉산 성채를 마고할미의 처소로 삼으려던 계획을 취소하고 그 성채의 문지기로 삼아 버렸다. 이유는 단 하나. 천제가 머무는 곳이 그 성채의 서쪽에 있었으니....... 마고할미의 처소인 성채의 모든 불순한 것들과 쓰레기가 서천(西天)쪽으로 흘러 내리게 되었으니, 이 모든것이 본래 마고할미가 작정하고 꾸민 못된 음모였다고 천제는 생각하였던 것이다. 마고할미는 단순히 지형을 이용해 편리한대로 서향하수(西向下水)를 한 것이라 통사정을 해 보았으나 천제의 진노를 수그러들지 않았고, 이곳 성지기로 살다가 마침내 천명을 다했다는 전해오는 이야기이다.
새소리만이 너무도 청아하게 울려퍼지는 새벽 숲속.
그렇지만 점점 거칠어지기만 하는 나의 거친 숨소리를 느껴가면서 열심히 걸어오른다.
풀숲을 걷노라니 새벽이슬이 아닌 밤새 내린 빗방울들이 풀숲에 맺혀있다가 등산화를 적시고, 마침내는 발목부위를 넘어서서 양말이 젖어드는것을 느낄 수 있었다. 괜히 반바지 입었나봐.
그렇게 그렇게 얼마를 더 오르자니....... 바로 지난밤 목전에 두고 내려서야만 했던 전망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 웬만 했으면 정상은 아니더라도 여기서 둥지를 틀었을텐데....... 충주의 야경을 구경하면서 멋드러지게 한 잔 쭉.............?
아쉽다.
산 아래를 내려다 보니 여전히 축축한 비내음이 시가를 온통 내리짖누루고 있다.
아마도 이제야 사람들이 깨어나고 있을 시간이리라.
다시 걸음을 재촉하다 약수터에서 목도 축이고 새벽세수도 하고........ 이 임도에 이런 약수터가 2 곳이 있다.
빗방울을 잔뜩 머금고 있는 꽃들도 잠에서 깨어나고 있고.......
하늘을 올려다 보니 여전히 잔뜩 찌프린 하늘엔 먹구름이 흘러가고 있다.
말라죽어가는 소나무가지위로 산까치들이 모여 비록 흐린날씨지만....... 어제와 다른 새 하루가 시작되고 있음을 찬양하고 있다.
점점 가파라져 가는 가파른 언덕길이 굽이 굽이 산모퉁이를 만들고..........
그 모퉁이를 돌아서면 무엇이 나타나는 지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마침내........
마침내 산성으로 가는 목책을 두른 나무계단이 모습을 드러냈다.
이 계단을 올라 약간의 산등성이를 오르면 비로소 금봉산성의 북문터가 나타난다.
물론 최근에 복원된 북문의 골목 같은 터이다. 팔작지붕의 이층 문루는 복원되지 못했다. 산성에는 각각 네 방향으로 네 개의 성문과 문루가 있었으나 지금 남아있는 곳은 한군데도 없다. 네 개의 성문 중 북문과 동문의 기본 골격이 복원되었다 보는 것이 타당하겠다.
아마도 이 북문이 금봉산성의 가장 중요 통로였을 것이다. 네 개의 교통로 중 그나마 진입성이 가장 수월한 곳이 바로 북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는 이 계단을 오르지 않고 그대로 숲속으로 난 임시도로를 따라 약 500m 가량 더 나아갔다. 그리고 마침내 또 하나의 성문이 나타났다. 바로 동문터이다.
산성의 위용을 그대로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동문의 터가 마침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목책과 같은 나무계단이 설치되어 마치 성벽에 매달려 있는 듯 그런 모습이다. 천천히 나무계단을 오르노라면 일천 몇 백 년의 세월과 풍상을 그대로 견딘 이끼의 그림 같은 자태들이 성벽에 그대로 새겨져 있다. 이 바윗돌 하나하나마다 누군가의 땀과 눈물과 누군가의 애환이 얼마나 많이 서렸을까?
그리고 성벽 하단으로 눈을 돌려보면 군데군데 커다란 돌구멍들이 보인다. 바로 수구문(水口門) 이다. 성내의 배수시설인 것이다. 마고할미가 서천을 향해 수구문을 냈다가 천제의 진노를 샀던 것을 알았음일까? 이승의 누군가는 어떻게 알고 많은 수구문을 동쪽과 남쪽으로 내어 놓았다.
그리고 성벽에 매달리듯 설치되어 있는 나무계단은 근자에 들어 탐방객이나 등산객의 편의를 위해서 임시 설치한 구조물일까? 아니다. 그것은 그 옛날의 당시에도 약간의 모양이나 형태는 달리했어도 지금과 그리 크게 다르지 않은 형태의 구조물로 만들어 실제 사용하였다. 나무 사다리나 층계를 둔 목책을 이용하지 않고서는 성문을 드나들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이런 것을 다락문 형태의 성문이라 한다. 사람과 물자가 드나드는 성문에도 비록 성벽의 높이에는 못 미치지만 어느 정도 높이의 벽을 쌓아올리고 그 위에 성문과 문루를 만들었다. 평시는 사다리나 목책을 이용하여 드나들다가, 전시가 되면 사다리를 걷어 올리거나 목책을 불태워 없애는 방어술의 일종이었다. 이 같은 다락문 형태의 성문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 경합을 벌이던 삼한시대의 말기에 성행하던 축성술이었으나, 고려와 조선을 지나면서는 축성술의 발전이나 격성술의 발전으로 점차 필요가 사라져 어느 때부터인가 자취를 감추어 버렸다. 이런 흔적은 자연히 그 성의 최초 축성 시기를 밝혀내는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그렇다면 이 금봉산성의 축성 시기는 언제일까?
아직까지 분명하게 밝혀진 것은 없으나, 마고할미가 단 칠일 만에 축성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만은 분명하다.
우선적으로는 신라 진흥왕 12년쯤으로 추론하는 이론이다. 고구려의 10군을 빼앗고 왕이 직접 낭성(娘城. 충주)을 행차하였다. 신라의 북진정책이 바야흐로 절정을 이루고 있던 때였다. 16년에 북한산에 순행하였고, 국원을 소경으로 삼아(경주에 이은 제 2의 도시) 귀족과 6부의 호민을 국원소경에 이주시켜 살게 하였다. 신라가 한강유역으로 본격 진출을 시도한 이 시기에 금봉산성을 축성하였을 것이라는 설이다.
다음으로는 고구려 장수왕의 남진정책에 한강유역의 위례성을 수도로 삼고 있던 백제의 개로왕은 적지 않게 위기감을 느끼게 되었다. 하여 수도를 좀 더 안전한 남쪽으로 옮기기로 하고, 태자 문주를 시켜 중원의 어림(충주시 안림동)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다. 궁궐의 기초공사가 마무리되어 가고 있을 즈음에 마침내 장수왕이 침입하였고 위례성 함락과 더불어 개로왕이 전사하였다. 이에 놀란 문주는 위례성에서 비교적 가까운 어림으로의 천도는 여전히 장수왕의 세력권 안이라 판단하여 서둘러 웅진(부여)로 수도를 옮기고 그곳에서 즉위하였다. 하여 어림에 궁궐을 조성하던 시기에 도읍의 궁성을 곧바로 내려다보며 방어 할 수 있는 진지로 금봉산성을 축성하였다는 또 하나의 설이다.
최근까지의 성터의 발굴조사에서 신라와 백제의 유물이 골고루 출토되기는 하였으나, 고려나 조선의 유물은 없었으며 여전히 축성시기와 나라는 알 수 없다.
금봉산성은 비교적 협소한 성이다.
성벽의 길이가 1.120m로 성의 면적은 약 46.524 제곱미터이다. 지척에 축성된 대림산성에 비하면 1/4 정도이다.
타원형 모양의 민둥산 같은 모양새라고 하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겠다.
마치 몽골족의 변발처럼 민둥산 정수리 부분을 밀고 성곽을 축성한 모양이라 하겠다.
하여 전쟁사를 두루 살펴 본 지극히 내 소신에 따른 금봉산성은 화공(火攻)에 치명적 약점을 지녔다고 하겠다. 동서남북을 가리지 않고 어느 산자락 아래에서든지 바람을 등지고 불을 지르기만 한다면 산 정상의 성채를 태우기는 너무도 쉬울 것이라 추측된다. 삼국지에 나오는 병법에서처럼 화공에 취약한 진세의 더할 수 없는 표본적인 모습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는 성채가 바로 금봉산성인 것이다. 단지 역사서의 그 어느곳에서도 이 금봉산성이 실제 전투에 쓰인 기록이 없었기에 화공에 대한 평가는 오로지 내 개인의 견해일 뿐이다. 입증이 어렵기 때문이다. 누가 씨믈레이션이라도 해 주신다면.......
이에 비하자면 충주산성인 대림산성의 경우를 보자면, 북쪽과 동쪽과 남쪽의 성벽이 깎아지른 벼랑위에 축성되었으며, 이들 삼면의 어느 곳에서 바람을 등지고 화공을 펼친다 하여도 성벽의 바깥쪽 벼랑을 태울 수는 있으나 그 불길이 성 안쪽으로 번져들 염려가 지극히 적은 포곡형으로 움푹 꺼진 골짜기 형태를 하고 있다. 이 대림산성의 경우 화공을 펼치자면 성의 서쪽 골짜기를 쳐들어가 안쪽에서 밖으로 직접 불을 지르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인다. 한데 성 앞으로 해자처럼 거친 급류가 흘러내리고 있어서 날쌘 기마병으로 단숨에 들이닥칠 수가 없고, 근대의 성채처럼 곳곳에 돌출부분을 뾰족하게 내어놓고 궁수를 배치하여 그 사이의 성벽으로 접근하는 적들을 물리치는 방책인 치(雉)를 닮은 십여 미터를 훌쩍 넘는 바위벼랑이 입구의 양쪽에 떡하니 버티고 서 있다. 그 바위벼랑의 일백 오십여 미터 안쪽에 주요통로인 서문을 화강암을 자르고 쌓아서 성벽을 만들고 그 위에 웅장한 위용의 누각까지 만들어 버티고 서 있었다. 허니 이 바위벼랑 사이로 성문 앞까지 접근하는 적은 단박에 그야말로 고슴도치의 신세가 되었다.
또, 금봉산성의 경우에는 우물은 있으나 식수원으로는 많이 부족하여 대다수의 인원이 장기전을 펼치기에는 치명적 약점을 가지고 있는 성이었다.
금봉산성이 협소하다는 문제는 아주 여러 가지의 문제점들을 고스란히 안고 있었던 것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금봉산성이 몽고와의 항쟁에서 김윤후가 승리를 쟁취한 전쟁터가 아니라는 견해를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 보자. 화공에 취약하다는 것 외의 다른 문제에 대하여서 제기해 본다.
금봉산성은 네 개의 성문이 있었던 만큼 네 개의 접근로를 가지고 있었다.
읍성에서 가장 거리상으로 가까운 서문의 경우, 지금의 충주 시민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는 주요 등산로이다. 그리고 그 등산로의 초입의 이름이 바로 (깔딱고개)이다. 금방 숨이 넘어갈 정도로 가파르고 험난하다는 뜻이다. 이런 통로를 택해 부녀자와 노약자가 낀 충주읍성의 유민들이 피난길을 택했을 리가 없다. 거의 불가능하다.
직동을 거쳐 발티재 쪽으로 아주 가파른 벼랑을 택해 산성의 남문으로 오르는 통로가 있었다. 이 길 또한 훈련받은 군사들이 작전상 이동이나 가능한 아주 가파른 협곡으로 난 길이다. 피난민의 행렬이 접근하기는 불가능한 길이다.
또 하나의 통로인 동문의 경우를 보자. 지금은 복원이 가장 잘 되어있고 임도를 따라 북문 근처를 그냥 좀 더 거슬러 올라 접근할 수 있지만, 당시의 이 통로는 삼남지방으로 통하는 재오개 쪽으로 난 길이었다. 충주의 유민이 이 통로를 이용하자면, 동쪽으로 마즈막재를 넘어 목벌과 재오개 쪽으로 난 언덕을 한참을 넘은 뒤, 다시 길을 고쳐 잡고 산성을 향해 아주 가파르고 긴 벼랑길을 언제까지고 한참을 올라야 하는 아주아주 먼 고난의 길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당연히 금봉산성의 중요 통로는 북문이었고, 고압선 설치를 위해 낸 임시도로는 바도 그 당시의 군사들과 유민들이 오르던 그 통로였을 것이다. 하지만 그 통로 역시 지금도 사륜구동이 아니면 차로조차 오르기 힘든 임도이다. 하니 당시로서도 중요 통로이기는 하나 우마차가 오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사람이 등짐을 지거나 소나 말의 잔등에 짐을 실어 앞에서 사람이 끌어 오르는 정도였을 것이다.
남쪽으로 질주하는 몽골부대에 겨우 앞서 충주읍성에 도착한 방호별감 김윤후는 양반들이 읍성방어 군사들까지 데리고 이미 도망쳐 버린 후였기에 참으로 막막한 상황이었다. 몽고군을 대적한 변변한 군사라고는 아무리 찾아봐도 없고, 돌과 흙을 섞어서 쌓은 읍성으로는 몽골의 정예 기마부대를 막기에 역부족이라 판단했다. 하여 그는 주변의 성채를 살핀 결과 충주산성이 그나마 몽골군대에 대항할 수 있는 천혜의 요새라 판단되어 남아있는 유민......... 상민과 관아의 노비와 노인과 부녀자와 아이들을 모두 데리고 읍성을 포기하고 산성으로 입보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의 숫자가 어림잡아 2천5백 명이었다.
지금의 잘 정리 보수된 등산로가 아닌 당시의 산길을 급박하게 나서게 된 피난민을 이끌고 도망을 치게 되었는데 그 숫자가 자그만 치 이천오백 이라는 말이다. 때는 음력 시월이었다. 김윤후와 유민들은 산성에서 장장 70여 일간 거센 몽골군대의 공격에 대항하였다. 1253년 12월 8일에 저들이 포로를 풀고 물러났으며, 조정엔 18일에 보고되었다.
여기서의 날자는 음력이다. 800년 전의 혹한의 겨울 속에서 피난을 떠났고 한겨울의 혹한을 산성에서 견뎌내며 싸웠다는 것이다. 당시 피난을 나선다고 가정해 보자. 무엇을 가지고 갈까? 천민이요 노비였기에 소나 말을 끌고 가는 경우는 거의 없었으리라. 지게에 지고 등짐을 지고 머리에 이고 가는 것이 전부였으리라. 헌데 한겨울에 바깥에 나가 지내려면......... 가마솥이며 이불 보따리며 보리나 조 수수 자루라도 싸들고 가야만 했을 터인데......... 노약자와 아이들까지 데리고 서둘러 엄동설한에 그 금봉산의 가파른 언덕길을 쉬이 올라갈 수가 있었을까?
금봉산성의 경우 협소할뿐더러 우물이 하나라 더하여 몇 개의 웅덩이가 있다손 치더라도 많은 사람이 거주하며 생활하기에 불가능하다. 금봉산성에 한 오백 명 정도의 사람이 머문다면 그나마 가능하다 할 수 있겠으나, 한번 산성에 직접 올라서 지금 성벽 안으로 이천 오백의 사람이 들어섰다고 가정해 보라. 제대로 앉아서 쉴 곳으로도 부족한데 누울 자리를 만들 수가 있겠는가. 또한 민둥산 정상에 무슨 시설이 있어서 혹한의 겨울을 견뎌낼 수 있었단 말인가. 촌락이 있던 것도 아니고 토굴이 있던 것도 아니다. 또한 밥을 하던 난방을 하던 불을 피워야만 한다. 몽골군이 70여 일간 삥 둘러 포위를 하고 성채를 공격하였는데, 어디서 70일간 2천오백 명이 사용할 땔감을 구해낼 수 있었단 말인가? 만약 지금당장 금봉산성에 2천5백 명을 한겨울에 모아놓고 인근의 땔감을 구해 겨울밤을 지새보라고 한다면, 아마도 이틀 안에 성내의 땔감이란 땔감은 모두 바닥을 드러냈을 것이다.
충주읍성을 떠난 방호별감 김윤후와 2천5백의 유민은 서둘러 남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발티 쪽으로 직동에 다다른 무리는 다시 방향을 관주골의 언덕을 향했다. 도성에서 장군과 군관들이 타고 온 말에 마차를 연결하여 무거운 짐들과 병든 자를 노인들을 실었다. 싸릿재를 넘어 단월역참을 지나 강변의 벼랑길을 지나 대림산 자락의 산성에 들어가기 까지 서너 개의 언덕길은 있었으나 힘에 겨울만큼의 가파른 고갯길은 없었다. 모두가 추위에 시달리고 힘에 겨운 피난길이었으나 다치거나 낙오자 없이 모두가 무사히 산성으로 피난하였던 것이다. 유민들이 모두 들어가자 대림산성(충주산성)의 육중한 서문은 둔탁한 소리와 함께 다시 굳게 잠겼다.
여기에 더해 몽골군대가 마침내 포위를 풀고 물러갈 때의 정황을 보자.
몽골군대의 지휘부는 난공불락의 충주산성 앞에서 비상대책회의를 하였다.
70여 일간의 무차별 공격에도 끄떡없는 충주산성을 과연 포기할 것인가 하는 회의였다. 그리고 최종적 결론은 산성공격을 포기하는 쪽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 다음이 또 문제였다. 몽골군대의 애초 목적은 충주산성을 단숨에 격파하고 조령을 넘어서 삼남지방을 철저하게 유린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 남침의 가장 중요한 통로인 조령으로 가는 길목에서 발목을 잡힌 것이다. 충주산성을 포기하고 곧바로 조령을 넘어 남쪽으로 진격하자는 의견이 최선의 방책으로 제시되었다. 하지만 이는 아주 무시무시한 폭탄을 안고 넘어가는 것과 다를 바가 없었다. 바로 산성의 김윤후와 그의 군대가 성문을 열고 뛰쳐나와 조령으로 향하는 몽골군대의 후위를 치고 뒤따라오는 보급로를 차단할 경우에는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몽골군대가 모두 굶주린 채 포위망에 걸려든 꼴로 전락하게 된다는 두려움 이었다. 눈앞의 충주산성과 그 안에 스며든 유민과 군사들을 남겨두고서는 당장 눈앞의 그 어떤 계책이나 전쟁도 더 이상 수행하기가 불가능 하다는 결론이었다.
결국, 최종적으로 그들은 싸움을 포기하기에 이르렀다. 충주산성은 결코 함락시킬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들은 조선 조정에 전쟁의 종결을 통지했고 군사들의 말머리를 돌려 북쪽으로 올라갔다.
이 내용이 실로 모든 것을 그대로 잘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금봉산성(남산성)에서 어떻게 적의 후방을 치고 배후 보급부대의 진로를 차단하는 수시로 진격과 퇴각이 용이한 전쟁을 치를 수 있는 성채란 말인가?
그냥 소수의 병력이 들아 앉아 어떻게든 한동안 버텨볼 수 있는 정도의 성채일 뿐이다.
그리고........
아주 여러 번을 찾아보지만, 역사현장 이전에 산성과 금봉산은 아름답다.
나머지 무너진 성터가 복원되고 성루마저 복원된다면 더 할 수 없는 아름다운 역사 문화적 가치를 간직한 성터로 남게 될 것이다.
남산이나 남산성이 아닌, 금봉산과 금봉산성으로 말이다.
새로 시작하려 했던 백패킹은 일단 실패로 돌아갔으니 다음으로 기약을 하고 산을 내려왔는데 마스막재에 다다르니 눈앞얖언덕위에 '대몽항쟁기념탑'이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는 잠시 올라가 본다.
이 기념탑이 이곳에 서 있을 이유가 아무것도 없다.
마즈막재나 금봉산성과는 아무런 연관성이 없기 때문이다.
이 기념 조형물은 당연히 대림산성으로 옮겨져야만 한다. 그리고 충주산성의 제대로 된 복원에 매진을 하여야만 할것이다.
남의 조상의 분묘에 명절때마다 상차림을 거나하게 차려놓고 제사를 올리고 있는 느낌이다.
선열들이 피를 흘려 나라와 백성을 지킨 곳은 엄연히 다른곳인데 왜 엉뚱한 장소에 기념탑을 세우고 그릇된 역사를 전파하느냔 말이다.
서둘러 올바르게 정리되어야만 할것이다.
하늘은 여전히 찌프려 있고 나는 충주읍성을 향해 힘껏 페달을 밟는다.
다음 제대로 된 백패킹을 기대하면서..........
폭우속의 일탈을 접는다.
--------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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