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을 여행한다면 우리는 주로 어떤 이야기들을 접하거나 나누게 될까?
만약 안달루시아 지방을 여행한다면....... 우선 피부 속까지 따갑도록 파란하늘에서 가득 쏟아져 내리는 눈부신 태양의 가시광선과 하늘빛을 꼭 빼닮은 지중해의 파도를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안달루시아의 파란하늘과 날씨 이야기에 지쳐갈 때쯤이면, 그제야 어쩌면 유럽에 버젓이 존재하는 이슬람 문화와 유럽의 가톨릭 문화의 차이에 시선이 쏠릴 것이고, 그 두 개의 문화가 참으로 절묘하게 뒤섞여 만들어내는 매우 독특한 문화에 새삼 놀라게 될 것이다. 그러다보면 군데군데 남아있는 풍차들 사이로 삐쩍 말라 참으로 쓸모가 없어 보이는 말을 타고 달려오는 어설픈 중세 기사를 마주치게 될지도 모르겠다. 그렇게 안달루시아에 부는 바람소리에는 로시난테의 거칠고 힘겨운 숨소리가 담겨있다.
하지만, 안달루시아 여행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스페인의 어디를 가던 항상 두 도시의 비교되거나 상반되는 이야기를 듣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이다. 레알 마드리드와 FC 바르셀로나가 맞붙은 라리가 결승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는 것처럼 말이다. 그것은 마치....... 한국과 일본, 영국과 프랑스, 이란과 이스라엘의 맞대결처럼 자못 치열하다 못해 극한의 상상을 초월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스페인의 역사는 영국. 프랑스. 독일 등과 아주 심하게 얽혀있어서 대단히 복잡하다. 그런데 어처구니없게도 같은 스페인 안에서 있으면서도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의 역사적 부침 또한 심각할 정도로 대단히 복잡하다.
암튼, 그랬음에도 요정도 상황이 되면 아내인 챠밍여사는 이상하게도 무게 중심이 은근슬쩍 바르셀로나로 기울어 버린다. 참 신기하다. 그런데 더 신기한 것은...... 나도 은근하게 아내를 쫓아 한 쪽으로 기울어버리니 말이다. ‘바르셀로나에는 뭔가 사람을 편하게 하고 은근히 사람을 잡아끄는 묘한 매력이 있어. 최고의 여행지 하면 무조건 파리고 다음이 바르셀로나야. 로마가 그 다음이고.....’
바르셀로나에겐 뭔가 특별한 매력이 있다?
인정!
일단 바르셀로나가 마드리드에 비하자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점수를 더 따고 있다는 것에 무조건 동의를 한다. 딱 하나만 빼고 말이다.
나에겐 아주 확고하게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 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 있다. 이제부터 차차 그 이야기를 꺼내 보기로 해야겠다.
스페인의 역사와 예술과 문화를 공부하다보면 곧 잘 이런 질문을 받고는 한다. 혹 어쩌면 어디 시험문제에 출제되었을 지도 모르겠다.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궁정화가는 누구인가?’
아는 사람에게는 결코 어려운 문제까지는 아닐 수 있겠지만, 평소 미술에 관심이 적은 사람에게는 무척 어려운 문제일 수도 있겠다. 어쩌면 답을 이야기 해 주어도 ‘그게 누구야’ 하는 경우나 ‘생전 처음 들어 보는데’ 할 수도 있을 수 있겠다.
해답은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와 (고야)다. 굳이 여기서 그들의 소개나 작품을 논할 필요까지는 없다 생각되어 이하는 생략하기로 한다.
다만 문제에‘스페인을 대표하는 궁정화가’라는 설명에 있어서, 스페인 왕실이 오랫동안 마드리드에 위치해 있었으니 나름 이해는 되겠지만, 바르셀로나 사람들 입장에서 보자면 차라리 ‘마드리드 왕실을 대표하는 궁정화가’라는 설명이 더 적절하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하는 우려가 되기는 한다. 묘하게 본래의 문제 설명에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라는 뉘앙스가 풍기기 때문이다. ‘마드리드 왕실을 대표하는 3대 궁정화가’와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화가’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가 나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스페인을 대표한다고 생각하는 세 명의 화가’를 늘 아끼고 사랑해 마지않는다. 거기에는 (엘 그레코)나 (벨라스케스)나 (고야)가 들어가지 못한다.
그렇다면 바르셀로나 사람들이 그토록 사랑하는 ‘스페인을 대표하는 3대 미술가는 누구일까?’
어쩌면 이번 문제도 쉬운 사람에게는 아주 쉬울 수 있고, 어려운 사람에게는 사법고시 문제만큼 어려울 수 있겠다.
해답은 (피카소)와 (미로)와 (달리)다. 이들 역시 여기에서 부연 설명은 생략하겠다.
다르다.
달라도 너무 다르다. 단 한 명의 미술가도 겹쳐지지가 않을 정도로 완전히 다르다.
(엘 그레코)와 (벨라스케스)와 (고야)가 있는 마드리드 갤러리와 (피카소)와 (미로)와 (달리)가 있는 바르셀로나 갤러리로 나뉘어 있다면, 여러분은 스페인 대표 미술작품을 보러 어느 갤러리를 찾아갈 것인지 궁금해진다.
그것이 마드리드와 바르셀로나가 가진 서로 다른 일면일지도 모르겠다.
(엘 그레코)나 (벨라스케스)나 (고야)를 보려면 무조건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을 찾아가야만 한다.
바르셀로나에서도 (피카소)를 만나려면 <피카소 미술관)>을 가야하고, (달리)를 만나려면 <피게레스 달리 미술관>을 찾아가야 하지만....... (미로)의 작품은 그냥 길거리에서 공짜로 얼마든지 만날 수가 있다.
혹시나 (미로)의 작품을 공짜로 보고 싶다면...... 그냥 람블라스 거리를 터덜터덜 걸어서 찾아가면 된다.
람블라스 거리를 걷다보면 자연스레 마주치게 되는...... 어쩌면 혹 모르고 벌써 지나쳤을지도 모를 미로(Joan Miró i Ferrà)의 작품이다.
광장 82번지에 있는, 과거 우산을 팔던 가게의 간판(?)을 미로가 용 모양으로 특이하게 만든 조형물 간판이 현재에도 버젓이 걸려있다. 딱 봐도 거기는 우산 가게가 틀림없다.
두 번째는 람블라스 거리 중간 보케리아 시장 인근 바닥에 커다란 원형으로 그려진 미로의 모자이크 타일 장식이다. 땅바닥에 그려놓은 미로의 추상미술 작품이라고 보면 되겠다.
핵심은 두 작품 모두가 미로가 직접 만들어서 설치한 진품이라는 사실이다.
간판을 달랑 떼어들고 배에 선적해 가져 오거나, 타일을 파내서 컨테이너에 선적해 들여오기만 한다면........ 그 다음은....... 그냥 부르는 게 값이다. 아마도 떼돈을 벌어도 수십 번 수백 번 버는 정도는 되고도 충분히 남을 것이다.
그런 돈 덩어리를 보는 데는 그냥 공짜다. 드러누워 올려다보고 있던, 드러누워 아예 깔고 앉아있던 무조건 공짜다. 바르셀로나가 여행자에게 주는 웰컴 드링크인 것이다.
고개를 돌려 여기까지 걸어온 길을 되돌아본다.
바르셀로나는 천천히 걸으면서 눈이 마주치는 사람들과 환한 미소로 인사를 나누고, 아무데나 기대거나 엉덩이를 걸치고 잠시 앉아 쉬면서 호흡을 가다듬고, 나름 분위가가 넘쳐난다고 생각되면 무턱대로 들어가서 커피 한 잔이나 생맥주 한 잔을 걸치고, 다시 거리를 걸으면서 느껴지는 옛 사람들의 숨결과 그들의 역사를 떠올리면서 한 걸음 두 걸음 옮기기에 참으로 좋은 사랑스런 도시라는 생각을 잠시도 떨쳐낼 수가 없다.
바르셀로나는 참 걷기에 좋은 도시다. 걷기에 마냥 편안한 도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것은 거리나 광장 사방으로 뻗어나가 있는 그 수많은 골목들을 다 돌아볼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아쉬움이다. 골목길 마다 다 다른 사연과 다 다른 사람들의 발자국이 새겨져 있을 터인데....... 우리에게 허락된 여행의 시간은 점 점 줄어들고 있다.
아직 가보지 못한....... 가보고 싶은 여행지가 빼곡히 버킷 리스트에 아직 남았는데......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아 올 수가 있을까?
1900년부터 시작된 미슐랭 가이드(Guide Michelin) 역사를 통 털어 엘 불리(El Bulli)만큼 놀라운 신화를 써내려간 레스토랑이 또 있을까 싶다. 바르셀로나에서 북동쪽으로 60km 떨어진 카탈루냐 지방의 작은 해안마을 코스타 브리바에서 1964년에 처음 영업을 시작했다.
엘 불리의 모든 악평은 레스토랑이 언제나 문을 여는 것이 아니라는데 있었다. 처음엔 1년 중 9개월 정도 장사를 하더니, 아예 비 상설 레스토랑으로 전환하여 시즌별로 특별한 시기를 한정하여 문을 열었다 닫았다 반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기 수요자는 언제나 상상을 초월할 정도였다. 한 시즌이 종료된 다음날 하루 만에 다음해 1년 치 예약으로 25만 명이나 몰려들 정도로 상상을 초월하는 인기를 누렸다. 더하여 엘 불리의 평균 식사비용은 1인당 2.000유로(300만원 정도) 정도였다. 아마도 미슐랭 가이드에 등장했던 최고의 뜨거운 감자였을 엘 불리는 안타깝게도..... 그랬음에도 재정적자로 2011년 문을 닫고 말았다.
엘 불리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던 요리 책임자는 ‘분자 요리의 창시자’이자 세계 최고 셰프 중의 한 명으로 불리는 아드리아 아코스타(Fernando Adrià Acosta)로 그는 여전히 세계를 누비며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그만큼 호황을 누렸음에도 재정적자라는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문을 닫은 그에게 기자들이 물었다. ‘당신 요리의 맛의 비결은 무엇인가요?’라고 말이다. 그러자 아코스타가 대답했다. ‘수시로 보케리아 시장에 직접 나가서 싱싱한 해산물과 농산물과 과일과 온갖 향신료들의 언제나 최고급으로 엄선하여 구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라고 말이다.
아코스타의 한마디 덕분에 가뜩이나 바르셀로나 관광 명소로 손꼽히던 보케리아 시장이 또 한 번 세계 여행자들에게 확실하게 눈도장을 찍히는 사태를 맞이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Mercat de la Boqueria)은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 발렌시아 중앙시장(Mercado Central de Valencia)과 더불어 스페인 3대 재래시장으로 꼽힌다.
바르셀로나 현지인들은 보케리아 시장을 가리켜 ‘바르셀로나의 부엌’ ‘리베리아 반도의 먹거리 천국’이라고 까지 극찬을 아끼지 않는다. 덧붙여서 우리나라에서도 남대문 시장 등을 칭찬할 때 꼭 따라나오는 말처럼 ‘보케리아에서 구하지 못한다면 스페인 어디에서도 구할 수 없다’는 말이 심심찮게 따라다닐 정도이다.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를 걸어가다가 미로의 타일 조각이나 바르셀로나 FC의 팬들이 정대 성지로 꼽는 식수대에서 길 건너를 살펴보면 이내 전혀 어렵지 않게 골목안쪽을 가득 채우고 있는 보케리아 시장의 입구를 발견할 수 있다.
호기심에 보케리아 시장을 찾는 많은 여행자들은 연실 셔터를 눌러대고 간식거리를 사거나 과일을 사는 정도가 대부분이지만, 이곳은 말 그대로 바르셀로나 모든 시민들의 식탁을 책임지고 있는 오랜 전통의 재래시장이자 온갖 식재료의 보관창고나 마찬가지다. 시장의 중심부는 풍부하고 싱싱한 지중해산 해산물들이 넘쳐나고, 그 주위로 간단하게 스페인 방식으로 식사와 와인을 즐길 수 있는 바르(타파스)가 둘러서 있다. 관광 안내소가 있고, 온갖 제철 과일과 다양한 채소들이 싱싱함을 한껏 뽐내면서 현지인들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하몬. 소시지. 치즈. 과자. 향신료를 판매하는 특화된 전문 판매점들이 늘어서 있고, 생과일주스와 컵에 여러 과일을 섞어 담아 판매하는 가계와 초밥집과 태국 음식점도 눈에 띈다. 닭이나 돼지고기 쇠고기를 파는 정육점도 보이고 가축의 내장과 부산물을 파는 상점도 시장 안쪽 골목에 들어서 있다. 생굴을 좌판에 늘어놓고 레몬과 함께 즉석에서 먹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좌판도 있다.
명성으로만 치자면 아마도 스페인 최고의 시장이 아닐까 싶다.
보케리아 시장의 순수한 가치에 바르셀로나 여행이 주는 호감도와 기대감이 덧붙여져서 보케리아 시장의 이미지가 잔뜩 부풀려진 것이 아닐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지극히 내 주관적인 판단 하에서 (재래시장)의 이미지나 가치로만 따진다면 보케리아 시장은 발렌시아 중앙 시장에 한참 못 미친다는 것이 나의 솔직한 심정이다. 크기나 규모나 활력성에서 보케리아는 감히 발렌시아 중앙시장에 한참이나 못 미친다. 유럽여행 호감도 1위라는 바르셀로나의 명성이 보케리아 시장에 그럴싸한 멋진 포장을 더해준 셈이라 하겠다.
보케리아 시장의 단점을 더 꼽는다면....... 일단 시장이 골목 안쪽에 꼭 닫혀있는 듯 갑갑함을 우선 꼽겠다. 통행이 불편하고 전체적으로 어둡다. 한 바퀴를 돌아보면 시장에 입점해 있는 점포의 20~30% 정도가 휴업이거나 폐업으로 닫혀있다. 이런 풍경은 3년 전이나 현재나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 보인다. 시장 가장 깊은 안쪽의 한국식당 경우도 3년 전에도 닫혔고, 여전히 닫혀 있다. 굳게 닫혀 진 가계의 숫자가 일정 이상이면 그 시장은 결코 건강한 시장이 아니며, 본래의 기능을 어느 정도 잃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시장의 주변으로 항상 여기저기 공사 중이다. 그 또한 3년 전이나 지금이나 똑 같은 풍경이다. 이런 정도의 시장상황을 바르셀로나의 명소 보케리아 시장이라고 우르르 찾아오는 단체여행객의 행렬을 지켜보고 있는 것도 참 어처구니가 없다.
여기 보케리아 시장이 바르셀로나 여행의 명소가 아니라, 이래나 저래나 바르셀로나 현지인들의 식생활을 책임지고 있는 그냥 재래시장이었다면 굳이 내가 이런 부연 설명을 더하면서 질질 부여잡고 늘어지지도 않았을 것이다. 웬만하면 보케리아 시장은 그냥 패스하시라 권유드리고 싶을 정도이다. 차라리 다른 시장을 소개해 드리고 싶을 정도니까 말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성 가족 성당)에서 다섯 블럭 정도 떨어져 있는 세인트 존 가로수 공원(Pg de st. joan) 끝자락쯤에 신선식품 시장(Mercat de l'Abaceria)이 있다. 현지인들은 간혹 산업단지 시장(entrada Indústria)이라고도 부른다.
근대화 시대에 이곳은 철강. 화학 등의 신 공업 단지였다. 수많은 노동자들이 이곳으로 몰려들었다. 그러자 인근의 농촌에서 생산한 농산물을 농부들이 직접 이 자리에 가져와 공장 근로자들에게 판매하면서 자연히 농산물 재래시장이 형성되었다. 공단은 모두 사라졌지만 이곳에 터전을 잡은 현지인들에게 여전히 인근의 농부들이 직접 생산한 농산물을 가져와 이곳에서 판매를 한다. 그 재래시장을 아케이드가 설치된 현대식 농산물 시장으로 말끔하게 탈바꿈 시킨 것이다. 규모는 작지만 농부들과 현지인들의 직거래가 이루어지고 그 소박한 모습들을 고스란히 피부로 직접 느껴볼 수 있다. 특히 계란 판매 가계가 인상적이다. 이런 지극히 현실적인 아름다운 재래시장이 바르셀로나 곳곳에 다섯 군데만 버젓이 존재한다면...... 나는 굳이 보케리아 시장이 바르셀로나를 대표하는 재래시장이라는 소리를 지워버리겠다.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 진정한 '전통 재래시장의 개혁은 이런 모습'이라고 아주 인상적으로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작고 예쁘고 아름답고 가슴속에 담아두고 싶을만큼 정겨운 재래시장이다.
첫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우연히 이 부근에 숙소를 얻어 지냈는데, 체류 기간 내내 아주 행복하고 즐겁게 여기 신선식품 재래시장을 이용했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혹여, 다시 바르셀로나를 가게 된다면, 이 시장 때문이라도 이 부근에 숙소를 마련하고 싶다. 식사를 직접 해결하고픈 자유여행자에겐 가히 최고의 시장이었다. 팔레르모. 니스. 이스탄불의 재래시장과 함께 말이다.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스페인 전역에서 대대적인 재래시장의 현대화 내지는 재개발 사업이 활발하게 벌어졌다. 그 거대한 프로젝트의 효시이자 롤 모델은 바로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Mercado de San Miguel)이다.
우리 부부여행자의 경우 딱히 왜 라고는 하지 못하겠지만, 묘하게도 모든 면에 있어서 마드리드 보다는 바르셀로나에 상당한 친근감 내지는 만족감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그런 상황에서 나에게 딱 한 가지, 마드리드가 바르셀로나 보다 훨씬 좋고 월등한 만족도를 가진 것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재래시장이다.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이 아무리 유명한 관광명소가 되었다고 해도,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이 훨씬 매력적인 명소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여기에는 현재의 상황이나 운영 상태에 상당한 차이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고 말이다.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은 분명 재래시장이다. 하지만 과연 전통 재래시장일까? 최고의 전통 재래시장이라면 당연히 발렌시아 중앙시장을 전통적 재래시장의 전형이라고 하겠다. 그렇게 보자면 보케리아 시장은 전통적인 재래시장 이라기보다는 관광명소로서 꾸려가고 있는 어설픈 재래시장쯤이라고 해야만 할 것 같다.
이런 관점은 산 미구엘 시장과 비교해 보면 아주 간단하게 설명할 수 있겠다.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을 지금 당장 재래시장이라고 보기에는 다소 무리가 있다. 아주 미미하게 과일 가게와 야채 가게와 향신료 가게를 제외하면 전통방식의 재래시장 분위기를 전혀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산 미구엘 시장은 현대식으로 잘 지어진 멋진 건축물 안에 멋지게 들어선 푸드 코트라 하는 것이 가장 정확한 표현일 것이기 때문이다. 깔끔하고 간편하게 현대인들의 취향에 맞춘 다양한 음식 문화가 접근이 용이하고, 가격이 저렴하고, 모든 요리의 구색이 골고루 잘 갖추어진 멋진 푸드 코트가 바로 지금의 산 미구엘 재래시장 모습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름은 여전히 재래시장을 표명하고 있다.
스페인 전체에서 재래시장이 변모해 갈 미래 진행형 모습이 바로 그곳 산 미구엘 재래시장이라고 보면 틀림없을 것 같다. 이 말에는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이 점차 산 미구엘 시장의 모습으로 변형되어갈 것이 자명해 보이고, 발렌시아 중앙 시장 역시 언젠가는 보케리아 시장의 모습을 거쳐 산 미구엘 시장처럼 변모해 갈 것이기 때문이다.
지금 당장, 스페인을 찾는 여행자의 입장에서 반듯이 찾아가서 스페인만의 독특한 음식문화(바르)와 타파스를 경험하고 매력에 빠져보기 위해서는 무조건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시장을 찾아가라고 강력하게 추천하겠다. 보케리아 시장에서도 경험을 할 수는 있겠지만 많이 부족하다. 그럼 무엇이 어떻게 부족하냐?
스페인의 수도 마드리드의 중심은 마요르 광장이다. 마드리드는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사방으로 퍼져나가 세워진 도시다. 산 미구엘 시장은 마요르 광장의 뒷골목에 해당하는 하천변의 너른 공터였다고 할 수 있다. 수많은 현지인들이 마드리드로 모여들었고 그들의 모든 생산활동이 마요르 광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뒷골목인 산 미구엘 광장엔 재래시장이 들어섰다. 수도 마드리드에 사는 모든 사람들의 식생활을 산 미구엘 재래시장을 통해서 해결해 왔던 것이다. 역사가 오래된 전통 재래시장의 전형은 어디나 똑 같다.
곡식과 야채와 과일과 꽃과 향신료가 이곳으로 쏟아져 들어오고 또다시 팔려 나갔다. 거기에 자연스럽게 공산품을 포함하는 생필품 시장이 들어섰고, 대장간이나 목공소도 들어섰다. 그 시장은 외곽 변두리로 자연스레 가축시장이 들어섰고, 소와 돼지와 닭과 양과 말을 포함해 수로를 통해 온갖 해산물들이 들어왔다. 그러다보면 자연스럽게 가축시장의 외곽으로 도축장이 들어서기 마련이었다.
이런 전통 재래시장의 전형적인 모습은 지구상 어디나 비슷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이런 한정된 공간 속에서 서로들 간에 똑같은 직업적인 행위들이 수도 없이 반복되고, 그 과정에서 부득이하게 파생되는 쓰레기와 악취와 수질오염 등의 환경적인 악영향이 점점 악화 일로를 걷게 된다는 점이다. 당연히 이런 결과는 전염병으로 번져나간다. 중세 이래로 유럽은 온갖 전염병에서 비교적 자유롭게 해방되었던 시기가 별로 없었다. 거기에 흑사병까지 창궐했으므로 유럽인들의 생활은 늘 전염병과 질병 아래서 허덕이는 아슬아슬한 삶의 연속이었던 것이다.
그 유명한 오스만 남작 주도의 프랑스 파리 재개발이나 바르셀로나 재개발이 모두 이런 이유에서 생겨난 것이다.
1850년까지 마드리드 산 미구엘 재래시장의 모습은 질척거리는 비포장 시장거리에 야채며 온갖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도축장에서 나오는 오염수로 파리와 모기는 물론 온갖 벌레가 창궐했고, 악취와 수질 악화로 숨쉬기조차 힘이 들 정도였다. 마요르 광장에선 연일 귀족들의 축제가 벌어졌지만, 한 블록 너머의 산 미구엘 시장 일대는 그야말로 악취가 풍기는 시궁창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연일 시민들이 온갖 질병으로 쓰러져 갔다.
결국 스페인 마드리드 정부가 칼을 빼 들었다.
가축 시장을 먼 외곽으로 완전 이전시켰고, 도축장을 현대화된 설비를 조건으로 보다 전문화 시켰다. 산 미구엘 재래시장 일대의 도로망을 완전 재정비하고 야채시장과 과일 시장과 생필품 시장과 공산품 시장 등으로 세분화 시켜 구역 정리를 했다. 비로소 현대적 모습의 재래시장이 새롭게 등장한 것이다. 이 전통적 모습이 바로 지금 발렌시아 중앙시장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겠다.
하지만 20 세기에 들어서 산업문명이 발전하면서 시장의 모습 또한 또다시 변하기 시작했다. 곡식과 야채 시장의 수요와 규모가 줄어드는 반면에 새롭게 등장하는 신물물의 수요와 시장 규모가 급속도로 커져갔던 것이다. 귀금속 가계. 모자나 가방 전문점. 전기 조명기구 전문점. 책방. 의류 가계 확산 등이 이루어지면서 상권이 변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골목 안에 현지인을 위한 허름한 백반집이나 선술집이나 분식집은 이제 더이상 설자리마저 빼앗길 형편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거기에다 점차 초대형 매장에다가 백화점까지 인근에 들어서기 시작했다.
결국 스페인 정부는 터전을 빼앗긴 영세 소상인을 위한 구역을 따로 만들게 되었다. 한 블록을 정해서 현대식 아케이드 건물을 세우고, 그 건물에는 현지인과 시장 상인들을 위한 로컬 음식점인 분식집. 김밥집. 순대국집, 대포집. 거기에 쌀가게. 향신료 판매점. 과일가게. 식육점. 해산물 판매점 등등의 실생활에 꼭 필요한 영세 상인들만 입주할 수 있는 특별한 재래시장 특화 사업을 벌인 것이다.
그런데 그게 성공을 거두었다. 실로 놀라울 정도의 엄청난 성공을 거두었다.
산 미구엘 재래시장의 현대적 재개발 사업의 성공에 힘입어 유럽 전역에서 이런 재개발 사업이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따라 한 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이었다. 보케리아 시장의 이전 모습 또한 과거의 산 미구엘 시장 모습과 똑 같았던 것이다.
마드리드 시당국의 산 미구엘 재래시장의 운영 정책은 여전히 영세 사업자에 우선을 둔 지원 사업 정책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런데 그 시장 안에서 실제로 장사를 하는 사람들에 하나 둘 의식과 지각을 가진 젊은이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자체적으로 산 미구엘 시장의 변화를 꾸준히 주도하면서 바로 지금의...... 대단히 매력적인 푸드코트로 변화를 정착시킨 것이다.
최고급 요리를 정통 레스토랑에서 아주 비싼 비용을 지불하고 즐기는 사람도 있겠지만, 산 미구엘 시장에서는 자리도 없이 서서 돌아다니면서 아주 다양한 요리를 즉석에서 보면서 골라 주문하고, 함께 이곳을 찾아 온 수많은 사람들과 부딪히고 이야기 나누면서 다양한 방법으로 골라 먹을 수 있는 전혀 색다른 매력이 가득한 곳이 지금의 산 미구엘 재래시장이기 때문이다. 지중해의 굴 요리나 문어 요리는 물론 리베리코 하몽에서 다양한 스페인의 전통 포도주까지, 일본 쓰시나 베트남 쌀국수에서 파에야와 연어와 참치와 정어리 요리까지...... 그야말로 음식문화의 천국이 아닐까 싶다. 저렴한 다양한 요리를 구경하면서 골라 담아 어디에서든 어떤 방법으로든 그냥 즐기면 되는 곳이다.
바르셀로나의 보케리아 시장은 결코 마드리드 산 미구엘 시장의 매력을 따라갈 수가 없다. 지극히 내 주관적인 생각이지만 말이다.
우리 부부의 버킷 리스트에 스페인 하면 무조건 안달루시아 지방 여행이 으뜸이고, 혹시나 바르셀로나를 다시 갈 수는 있어도, 마드리드를 다시 가고 싶다는 생각은 없었는데...... 혹여 다시 가게 된다면....... 그것은 아마도 산 미구엘 재래시장 푸드 코트 때문일 것이다.(그래서 3년 전의 마드리드 여행때 산 미구엘 재래시장 추억 사진 몇 장을 다시 꺼내 보았다.)
자리가 없으면 어때?
아무렴, 길바닥이라도 좋다.
하몽 몇 조각에다 바게트에 올려진 정어리랑 와인 한 잔이면 마냥 행복한 산 미구엘 인것을.........
이런게 자유여행의 묘미 아니겠어?
우리만의 방식으로 하는 배낭여행.......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배짱뿐인 여행........ ㅎㅎㅎㅎㅎ
이젠 어쩔 수 없이 이전 페이지에서 마무리 짓지 못한 (성모 마리아 신앙)에 대한 상당히 거북한 이야기를 나름 짧게 마무리 지어야만 하겠다.
거듭 전제하는 바이지만, 이런 주장은 어디까지나 지극히 주관적인 내 관점에서 보고 이해하는 선에서의 주장이라는 바이다. 세상의 일부 역사학자나 성서학자들 중에도 내게 영향을 끼쳤고 같은 시선과 생각으로 기독교를 이해하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신실한 가톨릭 신자나 일부 성령주의 개신교 일부에는 신성불가침을 넘어서 신성모독이나 불경을 꺼낼지도 모르겠지만....... 인류의 역사 전부를 오로지 기독교적인 사관으로만 옳다고 주장하는 것 또한 엄청난 무리수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르네상스는 신 중심의 중세사관(로마가톨릭 사관) 1천년의 오류를 바로잡고 인간 본연의 시선과 가치관으로 올바르게 바라보고 재해석 하자는 운동이었다. 로마가톨릭의 신관(神觀)이나 기독교적 가치관은 인류역사에서 보자면 다양한 생각이나 시선중에서 하나의 시선일 뿐이다. 인류역사에는 여러 종교가 있고, 종교를 떠나 인간에게는 인간 스스로의 의지와 가치관과 정의관과 선택의 자유라는 존엄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세 시대 1천 년의 역사에서는 오로지 신학(神學)만이 전부였다. 다른 모든 학문은 신학을 위한 보조학문이었을 뿐이었다. 거기에다가 철학, 인문학 등의 인간의 본질에 대한 고민과 학업은 신성모독이나 이단의 죄로 종교재판에 회부되어 참수나 화형에 처해질 정도였다. 그렇게 1 천년 동안 저질러진 오류와 잘못의 결과가 여전히 현대의 기독교인 사이에서도 신성함으로 치장되어 버젓이 강요되고 있는 것이다.
거듭 거듭 재삼 주장하는 바이지만........ 로마가톨릭(교황)에 의해 역사사상 최초로 집단 학살을 당한 카타리파의 주장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들과 함께 생활하셨던 초대교회의 모습과 교회의 본질은 지금의 기독교(로마가톨릭. 성공회. 정교회. 개신교)의 교리와 신앙생활과 모든 면에서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로마가톨릭의 성 아우구스투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해서 지금의 교리와 제도와 신앙생활의 방식으로 개편된 것이다. 어느 누구도 그 개편이 옳거나 정당하다고 주장할 수 없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자 주장이다. 누가 그것이 신
께서 지시하셨거나 허락된 개편이었다고 주장할 수 있겠는가?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기록된 책'이라는 사람들에게 물어보자. 어디에 누가 그런 개편을 하락하고 승인했는지 말이다. 무엇이 영지주의이고 무엇이 이단인가? 로마 가톨릭의 시작이 바로 이단이었으면서 말이다. 이단에서 시작된 로마가톨릭이 어떻게 다른 종파를 이단으로 몰아 참혹한 죽음으로 몰살시킬 수가 있는가? 가장 죄가 많은 자가 돌을 들어 죄가 적은자를 내리친 꼴이다. 왜? 저들의 죄를 감추고 덮으려고 말이다.
카타리파가 주장한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운동의 핵심은........ ‘교회가 종교세를 걷을 권리가 없다. 교황이 황금 성전에 머물며 온 세상의 이권과 권력다툼에 참여하고 교황령이라는 명분으로 교회가 땅을 소유하고, 결국 부와 권력에 취해 참 신앙생활은 뒷전이고 돈놀이를 하고 유부녀와 창녀들과 놀아나고, 자신의 무덤과 고향에 궁전이나 짓는 등의 탐욕과 방탕을 일삼는 잘못을 질타했던 것이다. 세상에서 가장 더러운 악질적인 인간들이 온갖 악행을 저지르면서 교회 안에서 제멋대로 세금을 거둬들이고 권력을 행사했던 것이다. 그 모든 더러운 짓에 명분은 항상 ’거룩한 그분의 뜻‘이라면서 말이다. 이것이 로마가톨릭의 역사 대부분에 걸쳐 자행되어 왔다. 그것이 참 거룩한 진실이다.
(성모 마리아 신앙)의 핵심 요지는 바로 그런 그릇된 로마가톨릭 역사의 일환으로 모든 것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신실한 로마가톨릭 신자이던, 개신교의 성령주의 믿음의 신자이던, 아니면 종교인을 꿈꿔 성경을 100번 이상 읽어본 분이던 개의치 않고 나는 먼저 이렇게 묻고 싶다.
‘성모 마리아는 어떤 분이십니까?’
아마도 백 명이던 천 명이던 수만 명이던 들려오는 대답은 서로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이고, 그 내용들 또한 뻔히 보일 정도로 몇 가지 단편적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왜냐?
아무리 성경을 열심히 읽고 또 읽어보아도 성모 마리아가 등장하는 이야기가 별로 없기 때문이다. 별로 없는 것이 아니라 거의 없다고 하는 편이 더 정확한 편일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을 기록한 거룩한 책’이다. 그런데 그 거룩한 성경에 미미하게 느껴질 정도로 기록된 이야기가 없다는 말이다.
어디 우리방식으로 좀 쉽게 풀어서 이해하기 좋게 성경에 등장하는 마리아의 이야기를 요약해 보기로 하자.
‘참한 유대부족의 처녀 마리아는 요셉이라는 유대 청년과의 혼사를 앞둔 시점에서 느닷없이 천사 가브리엘이 등장해 곧 구세주를 잉태할 것이라는 통보(수태고지)를 받는다. 처녀가 혼사 후에 초야를 치르지도 않고 임신을 하고 사내아이를 낳을 것이라는 이야기는 하나의 해프닝이 아닌 것이다. 엄격한 유대사회에서도 금기를 넘어 결코 있을 수 없는 희대의 사건이었을 것이다. 혼인 신고를 하러 간 베들레헴에서 사내아이를 낳았으니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인 것이다. 구세주가 태어날 것이라는 계시에 로마와 유대왕인 헤롯이 위험을 감지하고 어린 사내아이를 죽여 버리기로 하자, 허겁지겁 아이의 엄마 아빠는 이집트로 피신을 한다.
그리고는 더이상 아무런 부연 설명이나 이어지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
불쑥 성경에 다시 등장한 그 사내아이는 어느새 나이 서른의 남자로 성장해 있었고, 그동안 어디서 무엇을 했으며, 언제 나사렛에 돌아왔는지에 대한 이야기도 전혀 없다.
그 사내가 나이 서른에 시작해 비교적 짧은 공생의 길(구도자의 길)에 들어선 것이다.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12 사도와의 이야기가 비교적 소상하게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함께 자고 함께 먹고 함께 선교활동을 다녔으면서도 한 자리에 있었던 사건에 대해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제각각 딴판이다. 예수께서 좀 수준이 떨어지는 지각이 없는 제자들을 거두어 들였거나, 스승님 전기를 쓰면서도 나름 자신들의 존재감을 부각시키거나 권위 비슷한 영향력을 염두에 두었던 것은 아닐지 궁금할 따름이다.
예수의 활동에서 파생되는 영향력이 유대사회를 심각하게 뒤흔들 정도가 되자 유대 종교지도자들은 설득을 하려 노력하였으나 여의치 않게 되자, 헤롯과 로마의 무력을 통해 예수와 초대교회를 와해시키기로 음모를 꾸몄다.
예수는 내란음모죄(선동죄)로 체포되어 로마 법정에 섰고, 빌라도의 선고로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골고다 언덕으로 끌려가는 예수의 행렬에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오랜만에 다시 등장한다.
예수는 자신의 십자가형을 통하여 모든 인류가 구원을 허락받았음을 다시 선포했고,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겼다. 그리고 제자 요한에게어머니 마리아의 노후 보살핌을 부탁했다.
예수는 처형되었고 부활 승천하여 사흘 뒤에 막달라 마리아 앞에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그게 전부다.
더도 덜도 아니고........ 거기까지가 전부다.
그 후에 수많은 이야기와 요사스런 사건들이 첨가되고 부풀려지고 했지만, 기실 진짜 이야기는 그냥 거기서 무심하게 끝나버렸다.
참 요상하다.
성경을 나도 좀 읽기는 읽어보았는데........
성모 마리아를 저렇게 화려하고 요상할 정도로 숭배하는 지경에 이른다면.......그럼 요셉은 뭐지? 성경에 요셉은 왜 다시 안 나오지?
이집트에서 언제 돌아왔는지, 요셉이 언제 어디서 죽었는지......... 최소한 신약성경 전체를 통 털어 어딘가 한 구석에서는 ‘예수가 요셉을 아버지라 불렀다' 던지 '요씨 아저씨'라 불렀다든지. ' 세속의 아재'라고 불렀다든지....... ’인간 아버지 요셉이 죽어서 슬퍼했다‘ 던지 하는 이야기 한 줄 정도는 있어야 하는 것이 도리가 아닐까? 이건 숫제 '바지 아버지 수준' 이거나, 일당 받고 잠간 등장하는 '용역 아저씨'가 아니고 무엇인가?
예수께서 말하시길 ’하나님은 하늘의 아버지‘라 불렀고,’‘마리아는 내 어머니’라 불렀고, ‘야고보는 내 형제’라고 불렀으면서....... 요셉은 왜 한 번도 부르질 않았을까?
그럼 이 대목에서 성모 마리아는 요셉을 ‘여보’ 아니면‘내 낭군님’ 이라고 불렀을까?
그 역시 ‘글쎄 올시다’라고 생각되는 것은 왜 일까?
‘예수와 요셉의 관계는 무엇?’
‘예수와 마리아의 관계는 어떤 모자지간?’
‘마리아와 요셉의 관계는 과연?’
르네상스 시대를 대표하는 3명의 천재화가들이 ‘성모 마리아(성가족)’을 소재로 하는 그림을 남겼다. 이런 소재의 그림을 가장 많이 그린 화가는 이들 중에선 압도적으로 라파엘로가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그린 화가이다. 당연히 그가 교황의 총애를 가장 많이 받은 교황청 전속화가라는 명칭에 어울릴만한 업적을 남긴 이유라 하겠다.
첫 번째 그림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수태고지>라는 아주 유명한 그림으로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림의 내용은 ‘혼사를 앞둔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이 나타나 성령에 의해 귀한 생명이 잉태되었으며, 그렇게 태어날 아기가 장차 구세주가 되리라는 예언을 전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는 것으로, 이 소재는 성화(聖畵)를 좀 그린다는 화가들에게는 반듯이 거쳐 가야 할 정도로 유명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어쨌거나 이 <수태고지>에서 기독교 역사가 시작되었다고 하겠다. 기독교(로마가톨릭. 정교회. 성공회. 개신교 모두 포함)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구원의 역사가 완성’되었다는 믿음에서 시작된 종교이다.
기독교 역사에서는 그 기원을 알리는 대단히 중요한 사건으로 거룩한 신성을 가득 담아 부여했다. 그런데 아무리 살펴보고 생각해 보아도, 솔직히 이야기해서 인간의 지혜와 상식과 모든 경험을 뛰어넘는 도저히 납득되지 못하는 사건이 바로 이것인 것이다. 인간다운 본질에서 본다면 <수태고지>는 환전한 허구다. 불가능 자체인 것이다. 하지만, 이제까지의 모든 세례나 영세를 받은 기독교 신자들은 모두 이 <수태고지>의 이야기를 종교적 진실이라고 믿고 인정한다는 선상에서 세례나 영세를 받은 존재들인 것이다. 그것을 믿고 참이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세례나 영세를 받을 자격을 부여받을 수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
그 부분에서 거듭 고민이 반복되고 회의가 일자 당시 성서 교리 인도를 맡으셨던 분이 내게 해주신 말씀은....... ‘일단 믿고 인정하고 나서 성경을 다시 보게 되면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 진실이 보일 것이다’라고 세세한 설명 겸 당부를 잊지 않으셨다. 그럼 <수태고지>를 믿는다고 고백하고 나서 정말로 새로운 시선이 생겨나고 그것이 진실이라는 것을 깨닫고 진리로 믿게 되었느냐 하면........ ‘여전히 글쎄올시다’라고 대답해야 할 것 같다.
하나의 신화나 허구적 전설일지라도 그것이 어떤 종교적 정통성에 꼭 필요하다면 좀 다른 방법을 이용하거나, 조금은 억지스럽더라도 이해하려 애쓰고 받아들일 수 있는 정도로 비중을 낮추었으면 안 되었을까?
내가 청소년들에게 우리나라 고대사를 이야기 해주면서, 고구려나 부여. 옥저 등에 관해서는 현실적 역사로 이야기 해주면서도, 단군 신화 등에 대해서는 한민족의 정통성에 기인하고 필요한 다분히 신화나 전설로 꾸며진 이야기라고 설명하는 것처럼 말이다.
그러나 기독교라는 성스러워야 할 종교적 정통성의 확립을 위해선, 이처럼 절대 불가능한 허구적 사실을 전면에 떡하니 내세워 놓고....... 무조건 거기에서부터 거룩한 진실이 시작되었으니, 오로지 믿음의 선한 시선으로 바라보고 진실로 받아들이라고 강요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장장 2천년 이상동안 그렇게 꾸준히 강요하고 있다는 말이다.
‘성령으로 동정녀가 사내아이를 낳았다. 그 사내아이가 바로 구세주이다.’
‘죽은 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 하늘나라로 올라갔다’
기독교는 이 같은 주장을 2천년 동안 똑같이 반복해 왔고, 아마도 이는 다시 지구상에서 모든 인류가 소멸되는 순간까지도 이 주장을 거두어들이지 않을 것이다.
혹시나, 먼 훗날 언젠가 약속대로 구세주께서 재림하셔서 쓰여 진 성경의 기록에 상당한 오류가 있다고 지적하시게 되면, 그 즉시 그분이 아무리 재림하신 진짜 구세주일지라도 ‘이단’으로 몰려 공개처형이나 화형을 당할지도 모를 일이다. 진짜 구세주에 대한 판가름 조차도 이미 로마가톨릭이 짜놓은 자기들만의 원칙에 어긋난다고 생각하면 언제든 무효를 선언하고도 남을 존재들이기 때문이다. 구세주가 약속하신 재림의 실재 여부와는 아무런 상관없이 로마가톨릭이 스스로 만들어 차지해버린 영원한 지상왕국이 이대로 천 년 만년 지속되는 것을 그들은 더 바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두 번째 그림은 천재 조각가 미켈란젤로 보오나로티가 그린 <성가족>으로 역시나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이 소장 전시하고 있다. 이 그림이 진짜 중요하고 귀한 이유는 그 희귀성 때문이다. 미켈란젤로가 남긴 단 하나의 유일한 회화작품이라고 해도 무방하리라 생각되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스스로를 조각가로만 생각한 희대의 장인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의 마찰 때 마다 ‘화폭에 물감이나 칠해서 사람들의 시야를 현혹시키는 하찮은 칠쟁이’라고 다빈치를 혹독하게 비판했었다. 그런 조각가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천재성을 질투한 브라만테의 치기와 교황의 심술로 인해 교황청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에 억울하게도(?) 4년에 걸쳐서 <천지창조>를 그리게 되는 수난(?)을 겪었다. 이 수난은 한 번으로 그치지 않아 또다시 한 번 이번엔 벽면에 <최후의 심판>을 그리게 되었다. 그러나 그 작품들은 교회라는 거대한 아주 특별한 공간의 천장과 벽면에 그려진 어마무시한 크기의 벽화와 천장화들로 우리가 쉽게 접하거나 흔하게 대하는 회화 작품과는 어느정도 별개로 구분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성가족> 작품은 미켈란젤로가 그려서 남긴 유일한 회화작품이라고 볼 자격이 충분하나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거기에다 흔한 소재를 표현함에 있어서, 역시나 미켈란젤로는 나를 실망시키지 않고 안정된 구도 속에 ‘아기 예수와 성모 마리아와 요셉’을 평화롭고 온화한 분위기의 소박한 가정으로 그려 넣었다. 중간부분에 목동 차림을 한 아직 어린 세례 요한의 모습도 귀엽다.
<성가족>이라는 제목이나 소재의 회화작품은 일일이 거론하거나 헤아리기가 부족할 정도로 많이 있다. 그런데 그 많은 <성가족>의 그림들을 들여다보면.......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이 함께 등장하는 그림들이 별로 없거나 찾아보기가 쉽지 않다는 사실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제목은 <성가족>인데....... 그림에 등장하는 인물은 상당수가 ‘마리아와 예수와 세레 요한’ 이거나, ‘마리아와 예수와 외할머니 안나’ 이거나 ‘마리아와 예수와 이모인 엘리자벳과 이종사촌인 세례 요한’이나‘마리아와 예수와 천사나 성인’들이 대부분이다. 요셉이 별도로 그려지거나 유명하지 않은 작품들 중에서는 간혹 요셉이 예수에게 목공일을 가르치는 소재의 그림도 있기는 하디만,
제목과 소재는 분명 <성가족>인데 정작 요셉이 빠지고 다른 인물로 채워 넣은 <성가족> 그림이 유난히 많은 것은 도대체 무슨 이유일까?
그런 상황에서 위대한(?) 미켈란젤로는 <성가족>을 소재로 그려야 한다면 최소한 이렇게 그려야 제대로 <성가족>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정석을 온 세상을 향해 외치고 있는 것이다. 고집불통 조각가 미켈란젤로가 이런 소재의 회화작품을 남기게 된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추측성 가설들이 엄연히 존재하지만...... 이 그림이야 말로 명실상부하게 주인공 중의 한 명인 요셉이 한 가정의 가장으로 버젓이 살아 숨 쉬고 있는 진짜 <성가족> 작품이라고 생각한다.
세 번째 그림은 우리에게 <시스티나의 성모>로 잘 알려진 라파엘로의 그림이다.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가 그려져 있는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있는 (라파엘로의 방)에 그려진 벽화 중의 일부이다.
라파엘로의 대표작 중의 하나로 널리 잘 알려진 그림이지만, 미술 큐레이터나 유명 미술관 가이드들에 따르면 정작 이 그림이 더욱 사랑받는 이유로는 성모자 부분이 아니라 우측에 그려진 성녀 바르바라(세실리아)의 관객의 서선을 압도하는 우아한 자태와 아름다움 때문이라는 이야기가 강한 설득력을 얻고 있다. 성녀 바르바라는 아버지에 의해서 높은 탑에 갇혔다가 참혹하게 죽음을 당한 순교자로 피첸차 수도원의 수호성녀다. 그리고 이 상황을 못내 궁금해 하면서 장난기 가득한 시선으로 올려다보고 있는 하단에 있는 두 명의 아기천사 푸토의 천진난만한 표정이 진정한 이 그림의 하이라이트라고 전해온다.
어쨌거나 이 시기까지의 그림들 속에 그려진 성모 마리아 이야기는 더도 덜도 아닌 신약성경에 짧게 등장하는 성모 마리아의 이야기에서 별로 벗어난 것이 없어 보인다.
<수태고지>에 부여된 거룩함이나, 그런 사실에 대한 어떤 의아함을 제외하면 그 아기 장차 어떤 인물이며 어떤 일을 하게 될지 하는 의문보다, 한 여인으로서 또 어머니로서 갖게 되는 자애로움과 온화함과 자식에 대한 지극한 모성이 가득 담긴 지극히 평범한 여성으로서의 마리아가 나름 잘 드러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랬다.
유대의 고귀한 처녀 마리아는 어쨌거나 실로 어처구니가 없는 ‘수태고지’ 사건을 겪었으며, 다음으로 마리아의 슬기로움 때문인지 요셉의 한없는 마리아에 대한 사랑과 신뢰 때문이었는지 평범한 한 유대 가정을 꾸렸고, 이후로 30년 동안을 나사렛의 목수의 아내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아무런 탈 없이 평범하게 살아왔던 것이다.
그게 전부다.
내가 아는 한 그게 전부이어야만 했다.
30년이 지난 후에..... 어느 날 아들이 구도자의 길을 걷겠다면 고난이 시작되었거나, 혹 그가 젤롯당의 독립운동가가 되어 싸움을 일삼았거나, 그것도 아니면 부랑자가 되어 수시로 쫓기는 신세가 되었거나....... 어찌되었건 지극히 평범한 여인이다 어머니였던 마리아 입장에서 이때부터 그녀에게도 힘들고 험악한 고난이 닥쳐왔음은 부인할 수가 없겠다.
아들이 체포되어 끌려가고, 빌라도의 법정에서 선동죄(내란음모죄) 사형선고를 받고, 끝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형에 처해져 죽음을 맞았다.
이는 어떤 죄에 의해서건 사형선고를 받고 형장의 이슬로 떠난 모든 사형수들의 어머니와 마리아 역시 같은 처지이자 같은 심정이며 감은 고통이었을 것이다.
아들을 빼앗긴 여인 마리아.
고통에 절규하는 어머니 마리아.
그것이 마리아이어야 했고, 모든 것은 거기서 그래도 끝나야만 했다.
마리아는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슬픈 어머니이자 한 여인으로서 나머지 생 또한 그렇게 슬픔 속에서 살다가 떠났어야만 했다.
그 후에 아들에게 어떤 의미가 부여되고, 어떻게 신분이나 가치가 변하고, 그로인해서 세상이나 역사가 변했다고 쳐도, 마리아는 그대로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슬픈 어머니로서 남았어야만 했다.
그것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바에 준한 진정 올바른 발자취였고, 그것이 진리였어야만 했다.
하지만........
어처구니없게도....... 슬픈 어머니 마리아는 점차 신(神)이 되어갔다. 이야기가 더해지고 꾸며지고 온갖 치장이 뒤따랐던 것이다.
탐욕과 방탕한 생활에 빠진 교황과 교회는 점점 부패하고 타락해져 갔다. 온갖 수단과 명분을 이용해 금화를 끌어 모았고 성적인 향연에 깊게 취해갔다. 면죄부를 팔았고 성수를 팔았으며, 종교재판을 통해 이단과 마녀 사냥으로 억울한 사람들의 재산을 강제로 빼앗았다. 그런 범죄와 치부를 가리기 위해 도처에 대성당을 웅장하고도 화려하게 증축하였고, 일부 예술가들을 후원하여 거룩한 성스러움으로 교회를 치장하기에 혈안이 되었다.
교황과 교회가 권력의 최고 정점에 머물면서 온갖 음모와 술수로 부를 착취하고 세력을 확장하고 향락과 향취에 빠져들수록 세속의 왕들과 봉건영주들이 사사건건 반기를 들고 제동을 걸어왔다. 교권과 황권이 늘 충돌하기에 이르렀고, 그 핵심은 종교와 세속을 통 털어 최고의 권력을 차지하려는 야심으로 가득 찬 교황과, 이를 제재하려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끌고 있는 유럽 봉건국가들의 막강한 군사력의 대결이라고 할 수 있다.
오스만 제국의 세력 확장과 위기에 직면한 비잔티움의 시기적 타이밍에 맞추어 교황과 교회는 하나의 절묘한 계책을 마련했다.
바로 (십자군 원정대) 파견이다. 200년에 걸쳐서 대략 8차례의 십자군 원정대가 소집 파견되었다.
성스럽고 거룩한 명분은 ‘이교도들이 점령한 성지 예루살렘의 탈환’이 목적이었지만, 이는 말짱 거짓말이었다. 진정한 명분은 교황이 의도한 대로...... 사사건건 교황의 앞길에 제동을 거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이끄는 봉건영주들의 실질적 무기이자 파워라 할 수 있는 유럽의 강력한 군사력을 약화시킬 목적으로 ‘성지순례’를 핑계로 멀리 소아시아 지역의 예루살렘으로 파견해, 가능하다면 수많은 봉건 영주들과 기사들과 군사들이 전멸당하여 그 세력이 지극히 미미해 지거나, 아니면 거듭된 이교도와의 전투에 패해서 대부분의 전력을 잃고, 일부 살아남아 죄인 아닌 죄인의 신분으로 겨우 목숨만 부지한 채 살아 돌아와 교황 앞에 엎드려 빌며 목숨을 구걸하는 사태를 만들고 싶어서 벌인 전쟁인 것이다.
교황은 이 모순덩어리의 원정에 당근으로 (면죄부)를 내걸었다. 성지탈환 전쟁에 참여하는 모든 기사와 군사와 상인과 일반인에게 (면죄부)를 내주겠다고 한 것이다. 전투 중에 죽어도 면죄부를 통해 하늘나라 천국에 들어갈 것이며, 전투에서 공을 세우거나 성지 탈환을 이룩하면 면죄부에다가 수많은 포상이 더해질 것이라고 꼬득였다. 온 유럽이 들썩였다. 하지만 이런 교황의 음흉한 속셈을 눈치 챈 봉건 영주와 왕들은 한 명도 1차 원정대에 참여하지 않았다.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출발했다. 교황은 직접 축복 기도를 올려주었고 면죄부를 약속했다. 그리고 우연찮게도 큰 전력손실 없이 기적처럼 1차 원정대가 비교적 손쉽게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해 버리고 말았다.
이 얼마나 거룩하고 영광스런 승리의 소식인가? 어쩌면 (부활절)과 (성탄절) 다음으로 (성지탈환절) 이라도 만들어 영원히 역사적으로 크게 기뻐하고 축하해야 할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예루살렘 정복의 소식을 전해들은 교황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발광(?)을 해대기 시작했다. 전혀 기뻐하지 않았으며 목청을 돋우며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신성로마제국의 황제가 친히 참석하지도 않았고, 유럽 곳곳의 봉건 영주들 누구도 떠나지 않은 대충 얼기설기 끼워 맞춘 전쟁이었다. 그런데 얼떨결에 큰 전투도 없었고, 커다란 전력 손실도 없는 상태에서 비교적 쉽게 승리했고 예루살렘은 탈환되었던 것이다. 이제 그 원정대가 보부도 당당하게 승리의 찬가를 부르며 유럽 본토로 개선을 할 것이다. 그것은 겉으론 교회의 승리이자 기쁨이겠으나, 내실로는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권력과 봉건 영주들의 군사력이 한층 막강해 진다는 결과를 낳게 될 것이다. 교회의 승리가 아니라 봉건 영주들의 승리이며 자칫 이제부턴 교황도 한층 막강해진 저들의 군사력 앞에서 눈치를 살피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교황은 칙서를 통해 금의환향이 아니라 계속적으로 세상의 끝까지 쫓아가서라도 이교도의 씨를 말리라고 거듭 재촉했다. 그러면서 이번 전쟁을 통해 빼앗은 영토와 재물을 교황 자신에게 모두 바치라고 명령했다. 1차 원정대 지도부 4인방이 교황의 깊은 속내와 계략을 눈치 채고는 자신들끼리 예루살렘을 비롯한 점령지를 나누어 가지고 각자 봉건 영주에 등극하여 신분상승은 물론 소아시아의 새로운 권력자로 부상했다.
교황의 처지는 한 마디로 닭 쫓던 멍멍이 꼴이 되고 말았다. 세속의 표현대로 ‘몸 주고 마음 주고 돈도 주고 귀싸대기 얻어맞은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교황은 즉시 1차 원정대 전원을 교회에서 파문 시켜 버렸다. 면죄부가 취소되었다는 뜻이다. 면죄부를 비록 교황이 수여식을 통해 주었다고는 하나 그 상장의 수여 책임자는 분명 하나님으로 쓰여진 면죄부였다. 그런데 아이러니 하게도 하나님이 아닌 교황의 몇 마디 말로써 그 모든 효력이 상실되고 취소가 된다면...... 이는 곧 ‘개판’이라는 뜻이다. 달리 말하자면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을 내 건 거창한 희대의 사기극’ 이라는 이야기다.
그 멀고 먼 소아시아 예루살렘까지 가서 전쟁에 참여해 승리를 하였으므로 힘들게 얻어낸 면죄부였는데, 지도부 4인방이야 신분 상승으로 영주가 되고 땅도 차지하고 권력도 얻었다지만, 오로지 면죄부 하나만 취득하려고 여기가지 온 수많은 병사들은 이제 고향으로 돌아갈 기약이나 여행비용도 떨어진 처지에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고 면죄부가 취소되었으니 지치고 헐벗은 그들의 영혼을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교황은 1차 십자군 원정대를 모조리 처형시키고 상황을 원상복구 시켜 빼앗은 영토와 약탈한 재물을 교황 자신에게 헌납할 새로운 2차 십자군 원정대를 모집한다. 그러나 이 역시 지원 세력이 지극히 미미했다. 그러자 유럽의 모든 봉건 영주들에게 기독교적 파문을 경고한다. 하여 어찌어찌해서 또 면죄부를 당근으로 2차 원정대를 파견했으며...... 실패하자 거듭거듭 3차. 4차.5차.6차.7차.8차 원정대를 계속 꾸려서 보냈다.
모집에 응하지 않거나 안 간다고 파문 시켜 버리고, 가서는 제대로 싸우다 죽지 않는다고 또 파문시켜 버리고, 도저히 역부족인 상황에서 원정대 스스로 판단으로 서둘러 귀국한다고 또 파문시켜 버린다. 승리를 목표로 하는 것도 아니고, 오로지 몽땅 우르르 몰려가서 대충 싸우다가 몰살당하거나 치료 불가능 정도로 부상을 당해서 극소수의 앞으로 교황의 말을 잘 들을 놈들만 극히 일부 겨우 살아 돌아오라는 속내가 담긴 흉계였던 것이다.
이제 교황 하면은 ‘오로지 무작정 시키는 대로 싸우다가 장렬하게 죽어서 서둘러 하늘나라에 올라가 교황이 약속한 상급(면죄부)를 하나님으로부터 수여 받아라’ 하면서 전쟁터로 무자비하게 내모는 전쟁광이자 24시간 진노함으로 광분하는 신의 또 다른 얼굴쯤으로 인식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이제까지 액면가 무한대로 평가받던 (면죄부)는 쓰레기 더미에서 삐져나온 멍멍이 뼈보다도 가치가 없어 보였다. 그렇게 남발된 부도수표의 발행인 란엔 ‘거룩한 하나님의 이름과 서명이 적혀’ 있었던 것이다. 늘 그래왔던 것처럼 말이다.
이 세상에 벌어지는 모든 죄악의 근원엔 항상 (교회)가 있었다. (교황)이야말로 바로 모든 ‘죄악의 축’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세상 사람들에게 다른 선택은 아예 존재하지 않았다.
하나님과 인간의 사이에는 매개체인 종교지도자(교회)가 반듯이 필요했으며, 그곳의 수장인 교황의 다른 이름은 ‘하나님의 합법적 대리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기가막힌 방어막이 바로 성 아우구스트스와 성 토마스 아퀴나스가 로마가톨릭을 위해 발명해 장착시킨 최신형 핵미사일(무오류성) 이었던 것이다.
로마가톨릭에 의해서 길들여지고 강요되어 온 기독교인들은 더 이상 다른 어떤 방법도 있을 수가 없었다. 온 인류의 운명은 다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죄를 대속하셔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신 ‘구원의 역사’ 이전으로 돌아가, 아담과 이부가 낙원에서 추방당하던 시점으로 모조리 한꺼번에 되돌아가 버리게 되고 만 것이다.
이 와중에 좌절하고 낙담하고 절망에 빠진 십자군 병사 하나가 ‘아니면 말고’하는 심정으로 고향의 어머니 같은 마음을 가지고 계실 것으로 추정되는 ‘성모 마리아’에게 매개체(종교 지도자. 고해성사)를 통하지 않고 직접 간절한 기도를 올리는 상황이 도래했다.
‘성모 마리아님이시여. 부상당해 낙오한 저를 고난에서 구원해 주시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게 해 주십시오. 자나 깨나 눈물로 저의 무사귀환을 기도하고 계실 고향의 어머니를 위로하여 주십시오. 이 밤을 적진에서 무사히 빠져나가 부대에 복귀하게 하여 주십시오. 살아서 고향에 돌아가게 된다면 나머지 생을 사는 동안에 늘 성모님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살펴 주셨음을 기억하면서 마을 입구에 분수대와 휴식처를 만들어 오가는 수많은 사람이 성모님의 놀라운 은총과 돌보아 주심을 영원히 기억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아멘.’
그런데 그만 놀라운 기적이 일어나고 말았다.
그 병사가 기적처럼 밤새 이교도 군대의 포위망을 헤쳐 나와 무사히 귀대하였고, 머지않아 고향의 어머니 품으로 무사히 돌아갈 수 있었던 것이다. 가히 기적이었다. 병사는 약속대로 고향마을 입구에 나그네 쉼터를 마련하여 관리하였으며, 그 쉼터의 이름에 성모 마리아의 보살핌을 새겨 넣었다. 이 소문이 퍼져나갔고........ 간접 종교인 로마가톨릭 역사에서 적어도 ‘성모 마리에께 드리는 기도는 개신교처럼 직접 교통이 가능하다’는 새로운 사조로 파생되어 무섭게 번져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수만은 전쟁터의 병사들이 이제는 주교를 통해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리지 않기 시작했다. 병사뿐만이 아니라 병든 자, 가난한 자, 과부와 어린이들이 엄마에게 간구하듯이 편한 마음으로 성모 마리아를 찾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러자 거기에서 놀랍게도....... 수없이 많은 기적 같은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유럽의 골목 투어를 하다보면 골목 곳곳에 우리나라 작은 사당처럼 성모 마리아 사진이나 인형을 놓고 마을을 드나들면서 사람들이 기도드리는 것을 쉽게 볼 수가 있다. 서민들 입장에서 보자면, 굳이 권력자나 부자나 고위성직자들이 화려하게 뽐내거나 거드럼을 피는 크고 웅장한 교회나 대성당에 찾아가야하는 이유가 점차 명분을 상실하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 이 작고 초라한 골목길의 작은 기도처에서도 얼마든지 기적이 일어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 품속 같이 자비로우신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말이다.
이를 어떻게 설명하거나 이해할 수 있을까?
‘성모 마리아 신앙’이 사회 저변을 통해 무섭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교황청이 긴장하기 시작했다. 로마가톨릭의 근간이 흔들릴만한 무서운 사태였던 것이다. ‘영지주의’가 다시 등장했고, ‘이단’이 또다시 제기되기 시작했다. 이는 초대교회부터 꾸준히 어어져 내려온 근원적 문제였다. 세례자 요한이 이단의 수괴로 지목된 적이 있었다. 요셉도 마찬가지였고, 막달라 마리아는 수차례 이단의 수괴로 지목되었었다.
누구나가 성모 마리아에게 직접 간절한 기도를 드림으로써 어떤 방식으로든 화답을 받거나 기적이 행해지는 것이 사실로 받아들여지게 된다면......... 사람들은 굳이 교회를 찾아갈 필요나 교황의 권위와 존엄에 존경을 표할 필요가 없어지게 되는 것이다.
바로 개신교의 본질에 해당하는 사태가 중세에 이미 시작되거나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두 번째로 위에 게시된 석 점의 회화는 모두 루벤스(Peter Paul Rubens)의 작품이다. 거의 움직이는 그림 공장으로 불렸을 만큼, 자신의 화법과 기법에 정통한 공인(기능인적 화가)들을 우르르 몰고 다니면서 루벤스풍의 그림을 마구마구 대량생산해 낸 그림공장장으로 적지 않게 악평을 받기도 했다. 루벤스의 그림 한 점이 등장하면 평론가들이 우르르 몰려들어서 과연 ‘어느 부분을 루벤스가 직접 그렸을까’하는 논의가 벌어질 정도로 수많은 파란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사실이다. 실제로 어떤 그림에서는 ‘그림의 전체적인 구상과 마지막 사인만이 루벤스 것’이라는 화제가 벌어지기도 했다. 기능인들을 모아놓고 ‘이번 그림은 이런 소재를 이렇게 표현하고 싶어’라고 루벤스가 연설을 마치고 외출을 했다가 돌아오면, 아침의 그 이야기기 루벤스풍의 회화작품으로 탄생해 있었다. 루벤스는 부분부분 수정을 지시하고는 하단에 자신의 이름을 적어 넣었다. 그런 작품들이 지금 세상에 값비싼 루벤스의 그림으로 널려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하지만, 아마도 위에 게시한 석 점의 그림은 거의 대부분을 루벤스가 직접 그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게시된 그림을 감상하려면 폴랑드르 지역인 벨기에에서 두 번째로 큰 도시인 플라데런 안트베르펀을 찾아가야만 한다. 구시가지 중심에 우뚝 선 고딕양식의 성모 마리아 성당을 찾아가야 만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안트베르펀의 성모 마리아 대성당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해도, 동화나 애니메이션 영화 <플란더스의 개>에 등장하는....... 네로와 파트라슈가 추위와 굶주림에 지쳐 쓰러진 루벤스의 <십자가에 걸리는 예수>와 <십자가에서 내려지는 예수>의 그림이 걸려있는 성당의 이야기는 의외로 기억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을 정도로 이미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네로가 숨을 거두면서까지 그토록 보고 싶어 했던 그림이 바로 위에 게재된 그림들이다.
지극히 개인적 생각에서 보자면...... 성모 대성당의 루벤스 그림의 그의 대표작에 들기는 하지만, 루벤스의 그림은 세상 곳곳에 너무나 많이 퍼져있어서 굳이 벨기에까지 찾아가서 볼 정도는 아니지 싶은 것이 솔직한 심정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플란더스의 개>가 뭇 세상 사람들의 가슴에 아련하게 새겨놓은 안타까움과 슬픈 사연에 대한 진한 감흥이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걸음을 설모 마리아 성당으로 끌어당기는 것이 아닐가 하는 생각이 든다.
‘루벤스의 그림을 보려고 굳이 벨기에까지 찾아 간다’라기 보다는, ‘네로가 숨을 거두면서까지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그림은 과연 어떤 것일까’하는 아픈 여운 같은 궁금증에 어떤 성지를 순례하는 마음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것이리라 생각된다.
정작 핵심 문제는 바로 그 다음이다.
마지막 그림 역시 루벤스의 작품으로 <성모 승천>이다.
남다른 공생의 길을 걷기 시작한 아들을 바라보면서 마리아는 한 어머니로서, 한 여인으로서 수많은 밤을 우려와 공포와 어떤 간절함으로 눈물 속에 뜬 눈으로 기도하면서 지내야 했다. 고난의 길을 격고 마침내 십자가에서 아들이 숨을 거두는 것을 지켜보아야만 했던 절망과 탄식으로 가득 찬 어머니였던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역사 속에서 모든 아픔과 좌절과 하늘이 무너지는 슬픔을 경험한 온 세상의 모든 어머니들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이다.
마리아는 지지리도 복이 없고 한이 많은 우리들의 어머니였을 것이 틀림없어 보인다.
아들이 부활 승천했다고는 하지만 이미 십자가에서 내려질 때, 죽음을 확인했고 초라하게 장사까지 지냈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어머니였던 것이다.
2000년 전........ 아들이 부활 승천했다고 하여 그 어머니에게 달라진 새로운 삶이 있었을까?
아니다. 비통함이 더해졌으면 더했지 달라진 것은 전혀 없었다.
헤롯과 로마는 더욱 초대교회를 탄압했고, 12 사도들은 물론 초대교회 교인들도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거나 지하세계로 숨어들었다. 로마는 끝내 예루살렘을 파괴하고 멸망시켰다.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 놀라운 소재로 등장하듯이, 이때부터 예수를 따르던 사람들의 행적은 대부분 각자도생이 되었다. 성모 마리아도 사도 요한이 에페소로 모시고 이주했다는 이야기에서부터, 막달라 마리아와 남프랑스로 이주했다 에서부터 수많은 가설과 추측이 소문을 넘어 전설이 되고 신화가 되어 온 세상에 퍼져나갔다.
이 시기는 12 사도 대부분이 살아있던 엄연한 현실적인 세계였다. 그런데 참 이상하게도 (신약성경)의 내용에 성모 마리아를 비롯한 초대교인들의 세세한 기록들이 제대로 기록된 것이 거의 없다. (외경)에 기록되어 툭하면 영지주의나 이단의 오류 날조된 기록으로 극혐을 받고 있는 기록 중에만 부분 부분적으로 자취가 남아있는 형국이다.
무엇이..... 어디까지가 사실이고 진실일까?
세상은 그렇게 흘러갔다. 무심하게 말이다.
사백년 가까이 지나서...... 그토록 무자비하게 탄압받던 기독교가 하루아침에 해방이나 신분 상승을 뛰어 넘어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었다.
그런데....... ‘로마제국의 국교’가 된 기독교의 지도자들이 오랜 세월동안 탄압을 피해 지하종교 신세의 기독교를 이끌어 오던 에페소나 알렉산드리아나 데살로니카나 예루살렘의 지도자들이 아니라, 파견되어 로마에 주재했던 사제들이 느닷없이 ‘로마제국의 국교인 기독교의 최고 종교지도자’자리를 차지하고 만 것이다. 그들은 ‘너의 반석.......’을 운운하면서, 이미 한참 전에 죽은 사도 베드로를 자신들의 수장으로 삼고 새로운 기독교의 중심으로 ‘로마가톨릭’을 주장하고 스스로 최고 종교지도자의 지위와 권위를 차지했던 것이다. 십자가 산건 이후로 오랜 세월 실제적으로 카타콤베의 기독교를 이끌어왔던 명망과 존경을 받아 온 기독교 지도자들이 이 사태에 분노하고 뛰쳐나가 세운 것이 바로 ‘그리스 정교회’인 것이다. 머지않아 이들은 콘스탄티노플로 이주한 동로마의 기독교로 최고 지위에 올라 ‘비잔틴 정교회’의 역사를 더 내려가게 되는데 그 핵심이 그리스 정교회인 것이다.
서로마의 몰락은 로마가톨릭의 몰락으로 연쇄작용을 일으키고, 비잔티 정교회 전성기에 로마가톨릭은 ‘비잔틴정교회 로마 교구’로 전락하고 만다.
비잔틴 제국의 몰락과 프랑크 왕국의 성립에 힘입어 로마가톨릭이 다시 권력의 정점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어쨌거나........ 십자군 전쟁 통에 벌어진 (성모 마리아 신앙)에 대한 재발견과 다시 분부해진 여론은 로마가톨릭의 정통성과 교리에 심각한 위협으로 다가왔다.
결국, 로마가톨릭인 내린 결론은 (성모 마리아의 신격화)였다. 성모 마리아를 삼위일체(성부. 성자. 성령)에 버금가는 절대 권위와 종교적 신성을 부여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라는 존재의 가치에 세속적인 ‘사람의 아들’ 이미지를 불식시키고, 이를 통해 이미 태고적부터 아주 특별한 성스러운 존재 내지는 핏줄에 대한 절대 신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당시의 로마가톨릭 최고지도자(교황포함)와 학자들은 이것으로 모든 논란이 끝날 줄 알았다. 이렇게 하면 더 이상 성모 마리아와 세례자 요한과 세속의 아버지 요셉에게 끝없이 따라붙던 이단이나 영지주의 신앙교리에 대해 자연스레 모두 벗어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게 과연 그렇게 간단한 문제였을까?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가 십자가 사건 이후에 어디에서 어떻게 살다가 언제 죽었는지에 대한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런데 로마가톨릭은 하루아침에 ‘성모 마리아가 죽어서 부활 승천했다’고 주장을 하고 나선 것이다.
무슨 근거로 그렇게 주장하는 것일까?
갑자기 11세기가 지나서 왜 성모마리아의 부활이 중요해진 것일까?
‘사람이 죽어서 신의 부름을 받아 그의 영혼이 하늘나라에 올랐다’라는 표현이나 설명은 내가 쓰는 소설에서도 그렇게 표현될 수 있겠지만........ 기독교라는 종교적 영향력 안에서 ‘부활’이라는 표현은 엄연한‘신의 영역’에 해당된다. 세속적인 인간의 시선이나 비종교적인 분야에서의 과학적 논리나 상식으로는 신약성경에 기록된 ‘예수가 죽은 지 사흘 만에 부활하여 승천했다’라고 적혀 있다. 그런데 1천 년이나 지난 시점에서 느닷없이 ‘성모 마리아가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했다’라고 로마가톨릭이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이런 로마가톨릭의 신앙에 대해 로마가톨릭을 제외한 모든 종교계와 학계에선 고개를 갸웃거리며 부정적인 결론을 내리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부활을 문제 삼는다면...... 그건 전체기독교의 정통성을 비롯한 모든 것을 부정하고 가짜라고 정의내리는 비난하는 행위가 된다. 속된 표현으로 ‘좀 벅차다’라는 한숨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인류 역사를 통 털어 이미 기독교 역사가 차지한 부분이 너무나 크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언젠가 타임머신이 발명되고, 그것으로 예수에 관한 역사적 시점으로 되돌아가서 그 사건들이 사실인지 아닌지 판단이 난다고 하여도....... 어떤 결과이든지....... 이제껏 기독교가 가진 역사와 사건들을 모두 부정하거나 떨쳐내기에는....... 자못 ‘인류가 감당할 수가 있을까?’ 하는 시선과 생각을 나는 가지고 있다. 그런 걱정에서 아마도..... 아예 타임머신 발명은 이루어지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그것은 인류가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자폭(수만 킬로 핵폭탄급)이 될 수 있을지도 무르겠다.
기독교라는 특정 종교의 가장 핵심적인 정통성에 벌써 이런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부활’이 세속적 관점에선 항상 논란이 있었던 것이 사실인 상황에서...... 느닷없이 ‘성모 마리아의 부활’이라는 또 하나의 충분한 논쟁 꺼리를 로마가톨릭이 꺼내 든 것이다.
급한 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출생과 부활’이 세속의 시선이 아닌, 어디까지나 종교적 시선 속에서 묵인되고 이해되고 오랜 세월 유지되어 온 만큼, 이 연장선상에서 ‘성모 마리아의 신격화를 위한 부활을 슬쩍 하나 덧붙이거나 끼워 넣는다 해서 파생될 문제가 얼마나 더 생기겠나’ 라고 당시의 가톨릭 지도부는 단순하게 생각했다.
람블라스 거리 끝에 있는 콜럼버스 타워에서 바다를 바라보면 하얀 요트가 빼곡히 정박해 있는 마리나 건너편에 있는 현대식 수상 건축물을 발견할 수 있다. 대형 수족관인 아쿠아룸을 포함하고 있는 매우 독특한 모습의 마레마그눔 건물이다. 최근들어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새롭게 각광받고있는 마레마그눔 쇼핑센터(Maremagnum)다. 마르세유 올드포트의 거울 천장을 연상시키는 쇼핑몰의 외관과 아치형 천장이 참으로 인상적이다. 초대형 현대식 쇼핑몰이 입점해 성업 중이고 건물의 뒤편으로는 다양한 해양 레저 시설이 들어서 있다. 영화관이 들어서 있고, 특히나 이곳의 바닷가쪽을 차지하고 있는 바와 레스토랑 등은 새로운 바르셀로나의 명소로 많은 현지인과 관광객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있다.
이번에 우리는 끈이 끊어진 챠밍 여사의 신발을 바꾸고자 이곳을 찾았다. 한참을 찾아다니며 고르고 다녔지만 결국은........ 한국에서도 늘 마찬가지였던...... 우리 스타일로 결론지어졌다. 스낵바에서 휴식 겸 주점부리도 하고 마리나 산책도 하고 돌아서려는데....... 관리자들이 불쑥 나타나 우리 발걸음을 제지한다. 주변을 살피니 모두가 이 상황을 즐기는 분위기가 아닌가?
정해진 시간이 되면 정박해 있는 요트들이 다리를 통과해 바다로 나가거나 되돌아 들어온다고 한다. 그런데 이제껏 보아 온 다리와는 전혀 다르지 않은가? 다리가 난간을 들어 올리는 것이 아니라 옆으로 회전해 비켜주는 광경이 전개된다. 처음 보는 광경이라 자못 신기하게 지켜보았다. 가장 에너지 소비가 적은 방식이 이것일까?
--- 여기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바르셀로나 여행)을 조금 더 이어나갈지, 다른 이야기로 바꿀지는 생각을 좀 해보아야 하겠네요. 아쉽기도 하고.......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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