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문제는 (궁핍)이 아니라 (과잉)이라는 기사를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다.
지금 현실의 본질적인 문제는 못 먹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이 잘 먹어서 탈이 나고 있다는 말이다. 현대문명을 가장 잘 나타내는 단어를 세 개만 고른다면 (과잉) (과소비)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이는 결국 인간이 어느새 쓰레기 더미 위에서 쓰레기처럼 살아가기 시작했다는 뜻이기도 하다.
엘리아스 카네티가 말했던 대로 ‘군중속에 늘 섞여 있으면서도 심각하게 고독감을 호소하는 현대인들이 점점 늘어만 간다’는 이야기야말로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 인간들이 당면하고 있는 정신영역의 심각성을 가장 절실하게 잘 대변해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무리를 지어 생활하면 위험에 노출될 확률이 줄어들고, 일에 대한 협력이 가능해 지고, 주변과 교류할 기회와 범위가 넓어지기에 인간은 혼자 놓여있지 않기 위해서 무리를 이루며 생활해 왔다. 그랬던 인간들이 지금 함께 일하고. 늘 모여서 왁짜지껄 파티를 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며 다양한 취미생활을 공유하면서 항상 무리속에 갇히듯 생활하고 있으면서도, ‘이게 지금 뭐지?’ ‘이게 전부는 아니잖아?’‘진짜 나 자신은 어디에 있는거지?’ 하는 (군중 속의 고독)을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류 역사가 ‘고대 시대’ ‘중세 시대’ ‘근현대 시대’를 거쳐 지금에 이르렀다면...... 이제 우리는 누구도 예견하지 못했던 ‘우울의 시대’를 새롭게 시작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싶다.
내가 지극히 개인적인 생각과 가치판단아래서 이런 현대적 질병에 대한 해결책으로 생각하는 것은 대략 두 가지라고 하겠다.
첫 째는 책을 많이 읽는 것이다. 책을 통해서 철학과 인문학으로 돌아가는 것이 가장 좋은 치료법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질병들을 마냥 먼 남의 일처럼 방관하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제의 근원에 대해서 나름 관심을 가져보고 고민을 해보라는 말이다. 반드시 해결책을 찾을 필요는 없다. 어쩌면 그것은 당신의 몫이나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할 수 있는만큼만 해보라는 뜻이다. 당신이 세상을 구원하거나 치료하지는 못하겠지만, 그런 노력으로 당신 스스로를 치료할 수는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철학과 인문학이 그저 막연한 머리 아픈 골칫덩어리는 결코 아니다. 교회에서 이야기하는‘인간은 탄생과 동시에 이미 영원한 죄인이 된 것이다’는 새빨간 거짓말일 수 있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모든 인간은 태어나면서 동시에 이미 모두가 철학자요 인문학자다’라는 나의 주장은 절대로 거짓말이 아니다. 마음의 여유가 생기면 고전을 읽으라고 말해주고 싶다. <햄릿>이나 <죄와 벌>만이 고전은 아니다. <아라비안 나이트>나 <어린 왕자>나 황순원의 <소나기>도 모두 고전에 속한다. 그런 책들을 읽은 다음에 거기에서 얻은 느낌이나 정화된 당신의 생각과 고뇌가 담긴 말 한마디가 다른 누군가에게 커다란 위로와 자극이 되어, 그가 세상을 구하고 인류를 구하게 될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책을 통해 (선한 영향력) 얻게 되고, 그것이 다른 누군가에게 놀라운 기회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를 일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둘 째는 자연으로 돌아가라 말하고 싶다. 우리가 늘 대하고 살아가는 일상적인 모든 것에서 잠시라도 벗어나 내 안의 진짜 내가 자유롭게 쉴 수 있고 생각할 수 있고 무엇인가 안 해본 것을 즐겨 볼 수 있는 새로운 기회를 가져보자는 뜻이다. 현실 도피가 아닌 긍정적인 일탈을 과감하게 감행해 보자는 말이다. 등산. 캠핑. 여행 등이 좋은 예일 수 있겠다. 내 자신을 위한 오붓한 시간을 가져보자는 뜻이다. 남들이 다 하는 여행, 유명한 여행지. 예쁜 핫 플레이스. 이름난 맛집과 고급호텔이나 리조트. 그런 것 말고, 오로지 내 마음속에서 원했던 나 스스로만을 위한 여유롭고 느긋한 그런....... 행복한 여행을 말이다. 길거리 노숙이나 낯선 간이역 대합실에서 춥고 썰렁한 하룻밤이면 또 어떻겠는가?
어쩌면 우리는 책과 자연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연습을 통해서....... ‘더 이상 혼자 있어도 결코 외롭거나 두렵지 않은’ 놀라운 변화를 찾을 수 있고, 우리 스스로의 것으로 습득할 수 있을지도 모르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이유는 이미 내 자신은 그런 노력들을 꾸준히 해오고 있으며, 나름 많은 평안과 여유를 찾았기 때문에 경험에서 하는 말이다.
- 책 많이 읽으렴.
- 친구 많이 사귀렴.
- 여행 많이 하렴.
우리집엔 선대로부터 내려오는 특별한 가훈이나 가르침 이런 것은 아예 없다. 하지만 내가 정한 당부는 있다.
나는 아들에게 어려서부터 귀가 따갑도록 세 가지 당부를 해왔다. 그런데 이제부턴 그 이야기를 우리 병아리들에게 해 주어야겠다.
‘아들, 그렇게 하면 네 인생이 결코 외롭지는 않을거야.’
‘아빠. 두 가지는 잘하겠는데, 책 읽는 것만은 잘 안돼. 요즘 SNS로 요약집이 다 나오는데 누가 책을 읽어?’
아들 생일에 회사로 택배를 보내주었다. 부피가 제법 크고 무거웠다. 호머의 <일리어드와 오딧세이> 전권을 말이다. 이게 내가 아들을 사랑하는 방법이다. 그러면 아들은 우리가 만나고 헤어질 때 늘 하는 인사인 ‘부자간의 포옹’에서 특별히 더 힘이 들어가 살포시 아빠를 안아준다. 참 많이 나를 닮은....... 내가 이 세상을 다녀가는 이유이며 남겨놓은 흔적이다. 소유권 등기는 엄마를 거쳐 이젠 며느리가 보유 중이지만 말이다.
‘아덜...... 다 그렇게 사는 거야.’
그렇다면 ‘정말로 행복한 여행’은 과연 어떤 여행일까?
어떻게 하면 ‘행복한 여행’을 실행에 옮겨볼 수 있을까?
런던.파리.로마.베네치아.스위스 알프스.프라하.산토리니를 모두 엮는 오성급 호텔 숙박과 멋진 조식과 루프탑에서의 무한 와인 바가 제공되는 그야말로 럭셔리한 여행일까?
토스카나 사이프러스 길이 보이는 밀밭 농장이나 보르도의 포도밭 농장에서의 주말 휴가와 중세의 고성에서 한 달살기를 해보는 영화같은 여행일까?
파리의 샹젤리제에서 시작해 밀라노와 피렌체의 세계적인 유명 패션브랜드의 본점과 매장을 돌아보는 호화로운 쇼핑 여행일까?
그것도 아니면 두브로브니크와 몰타와 나폴리와 마요르카 등을 잇는 멋진 쿠르즈여행일까?
글쎄다. 과연 저렇게 하면 정말로 행복한 여행일까?
뭐 일단 그렇다고 치자. 그럼 다음으로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과 내가 낼 수 있는 시간적 여유와 그 수준에 걸맞게끔 준비할 여행준비물 등은 언제고 떠날 수 있게 사전 준비가 가능할까? 스케줄이야 여행사에서 하라는 대로 어차피 따라다녀야 하겠지만, 그래도 최소한 다녀와서 ‘카드 빚만 남았네’‘여행 아니면 아무데고 쓸모가 없네’하는 후유증이 생기면 안 될 텐데 말이다. 쿠르즈 여행에서는 선상파티 때문에 턱시도와 이브닝 드레스가 필수라는데 평생 입어본 적이 없어서 나는 포기해야 할까 보다.
나는 내 경험을 통해서 하나의 단편적인 예가 되겠지만, ‘정말로 행복한 여행이 어떤것인지’에 대해 자신있게 말할 수 있다.
나는 아주 오래전에 내가 가졌던 ‘아주 행복한 여행’에 대한 기억을 지금도 너무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행복한 여행’을 다른말로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나는 이렇게 다르게 표현하고 싶다.
(행복한 여행)이란 (선물 같은 여행)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선물 같은 여행)에는 ‘예상치 못했는데 어느 날 뿔쑥 나타난 것 같은 약간의 당혹스러움’과 더불어 ‘로또 당첨과 비슷한 공짜 내지는 공짜에 가까운’이라는 느낌이 꼭 들어가야 제맛일 것 같은 생각이 든다. 다른 것은 아무래도 좋겠다.
그렇게 되면 그 여행은 틀림없이 무척 행복한 여행이 된다. 어찌 그렇지 아니하겠는가?
혹, 누구라도 이보다 더 행복한 여행이 있다면 댓글로 제보를 주시면 감사하겠다.
한 때, 직장 생활의 재미에 빠져 정말 열심히 노력했던 적이 있었다.
한국 경제 현대사에서 큰 획을 그으신 분으로부터 직접 상패와 금메달과 상금을 수여했었다. 며칠 지나서 예정에 없던 부상이 도착했다. ‘동경 모터쇼 관람 3박4일 여행권 두 장’이 도착한 것이다. 부부동반으로 전 일정 교통과 숙박과 식사를 제공받는 풀코스 옵션이었다. 받는 순간은 기뻤지만 정작 아내에게 알리거나 자랑도 하지 못했다. 초등학생 아들 생각 때문이었다. 여행사에서 일정 조율 때문에 전화가 계속 왔는데 결정하지 못하고 미루기만 하자 본사를 통해 여직원에게 상황을 물었고, 여직원이 그만 내 생각을 전해버리고 말았다. 얼마를 더 부담하면 아들까지 갈 수 있느냐고 오히려 물어봤다는 것이다. 다른 직원에게 양보를 하던 아니면 포기를 할 생각이었는데, 여행사에서 새로운 제기를 해왔다. 내 마음을 백번 이해해서...... 동경 모터쇼 티켓 두 장을 제주도 가족여행 티켓 석 장과 바꾸면 어떻겠느냐 하는 제의였다. 물론 제주도 역시 3박4일의 항공권과 교통과 숙식이 제공되는 풀 옵션 티켓이었다. 대한항공에다 kal 호텔이 포함되었었다. 아들 방학이 시작되는 다음 날 우리 가족은 출발했다.
그렇게 우리 세 가족의 첫 제주도 여행이 성사되었다.
아내를 제외하고 아들과 나는 그 때 비행기를 처음 타 보았다. 호텔에서 자고, 아침 조식은 유럽식으로, 저녁은 뷔페식으로, 낮의 일정은 어디를 가든 당시 봉고 버스를 개별 배당받아 전용으로 타고 다녔다. 점심 식사와 주점부리 간식 정도만 개인 부담이었다.
느닷없이 다가 온 여행. 포기하려까지 했던 여행, 거기다과 풀 옵션을 모두 제공 받는 거의 완전 공짜여행이 우리 가족에게 정말 현실로 벌어진 것이다. 무척 많이 사진을 찍었는데, 그때의 첫 제주도 가족여행을 나는 지금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여행이야말로 (행복한 여행)이었으며 (선물 같은 여행)이었고, 두고두고 (소중한 여행) 이었던 것이다.
정말로 (행복한 여행)을 하고 싶다면 그런 (여행을 선물로 받으면) 된다. 여기에서의 (선물)은 ‘남이 나에게 주는 선물’에 국한되는 것이 결코 아니다. ‘내가 나에게 여행을 선물’할 수도 있고, ‘내가 남에게 선물’할 수도 있는 것이다. 당신이 받고자 염원하는 그 이상만큼 그런 행복한 여행이 당신의 배려로 다른 누군가가 소중한 선물로 받을 수 있다면 그 또한 소중하고 행복하지 않겠는가?
웬일로 이 사람이 벼룩 시장을 그냥 지나친다?
'사고 싶은게 다 거울이나 유리제품 아니면 도자기류야. 막판에 깨지면 속만 상할테고 이번엔 그냥 참을래. 배고프다. 람블라스 거리로 돌아가자.'
그래서 발걸음을 돌려 재촉을 하는데......... 햐!!! 야들 봐라. 야들 봐.
시방이 분명 1월말이니 아직 엄동설한이 분명한 판에 이 꼬락서니들 좀 봐라. 봐. 니들 시방 벗어도 너무너무 심하게 벗은거 아니니?
정신이 번쩍 든다. 왜 파리가 바르셀로나를 못 이기고 2등인지 단박에 이해가 팍하고 든다. 파리엔 이런 파란 하늘과 눈부신 햇살이 아주 드물다.
‘몽펠리에 하고도 또 다르네. 하여튼 스페인은 하늘만 올려보고 있어도 그냥 예술이야. 여행의 말미를 바르셀로나로 정한 건 당신의 선택이 역시나 탁월한 것 같네. 이제 패딩 안 가져온 것은 용서해 줄게.’
헐!!!!
등줄기에 싸늘한 한기와 함께 소름이 싹 돋았다가 순식간에 사라진다.
바르셀로나가 마지막이었길 망정이지...... 거꾸로 이런 바르셀로나 날씨에 있다가 몽펠리에. 마르세유. 니스. 파리까지 역순으로 여행했으면 지금쯤 파리에서........ 내가 몽둥이로 맞아 파리처럼 박살이났던가, 아니면 샤넬이건 어디건 명품 매장에 가서 패딩 산다고 카드로 북 긁고 집에 가서 두고두고 나에게 화풀이를 해대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기 때문이다.
하여튼.....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일요 미사가 나를 살려준 것이 되었다. (할렐루야. 아멘!!!!!!)
‘저기 카페 사람이 많이 앉아 있네. 당신이 말한 스페인식이면 빠에야? 오징어 먹물 빠에야?’
‘뭐야? 그냥 이대로 쫄쫄 굶어볼래? 뭐든지 다 돼도 먹물 빠에야만은 절대로 안돼.’(ㅋㅋㅋ. 코르도바에서 된통 당해본 기억이 아직 생생한가?)
'예전에 우리가 갔던 콧수염할아버지(KFC)도 저기 보이는데?'
'싫어. 미국 식 닭튀김이 아니라 우아하게 폼 내면서 스페인식으로 먹고 싶다니까?'
'유럽식이면 유럽식이지 뭐 스페인이라고 다르고 프랑스라고 다르고 이탈리아라고 다르나? 스페인 식당도 이탈리아 요리사고, 파리 식당은 스페인 요리사고, 이탈리아 식당은 프랑스 요리사고 그런거지........'
'오늘따라 이 양반이 왜그러실까? 밥 먹기 싫어? 그런 난 여기서 파스타 먹을 테니까 당신은 KFC 가서 치킨 시켜 먹던가?'
'더워서 실성을 했나봐. ㅎㅎㅎ. 갈증때문에 헛것이 보여서...... 생맥주 한 잔 사주면 안그럴텐데.......'
'마셔. 마시고 싶으면 마시는거지. 언제는 내 생각 해주셨나? 새삼스럽게.'
'그럼 나는 피자 한 판에다 생맥주 1.000.'
'나도 1.000에다 파스타.'
'당신도 대낮에 1.000 이라고?'
'많이 걸었잖아. 갈증이 날만큼. 먹고나서 그만큼 또 걸을거고.'
'그럼 나는 이따가 중간에 또 맥주 1.000.'
'콜.'
그리고나서 40분 후에 아내는 이렇게 짤게 말했다.
'카페 주방장께서 요리 좀 하시는데? 배불러!!!!! 바르셀로나 또 오게되면 한 번은 무조건 여기다. 기억해 놔.'
혹시나 지인과 연락이 닿았는데 친구 가족이 지금 바르셀로나에 머물고 있다고 치자. 메일을 확인해보니 매형과 누나 가족도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사흘째 머물고 있다고 치자. 거기다가 지난 주일에 결혼한 처가댁 조카도 현재 바르셀로나에서 신혼여행 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한 번쯤 만나서 커피를 마시던 생맥주를 마시던 아니면 가볍게 식사라도 하긴 해야겠는데 낯선 이역만리 타국에서 어떻게 약속을 잡는단 말인가?
이 글을 읽게되는 분들이여. 걱정을 말아라. 바르셀로나에선 부러 약속을 잡거나 죽어라 찾아다닐 필요가 없느니라.
바르셀로나를 찾는 여행자들은 저녁무렵이 되면 저절로 람블라스 거리로 향하게 되느니라. 누가 시켜서도 아니고, 누가 잡아당겨서도 아니지만..... 저절로 발걸음이 람블라스 거리로 향하게 되는 것이 바르셀로나의 묘한 힘이자 매력이니라.
람블라스 길거리의 벤치나 아무 계단이나 차지하고 앉았거나, 그냥 이 골목 저 골목을 쏘다니다 보면 저절로 다 만나게 되어 있다. 걱정을 붙들어 매고 내 말을 믿어라. ㅋㅋㅋㅋ. 아님 말고....... 말이다.
바르셀로나의 한 복판에 놓여있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1km 정도 떨어진 콜럼버스 동상이 서 있는 포트 벨까지 사이에 놓여있는 일직선의 도로를 람블라스 거리(La Rambla)라고 부르는데, 이는 카탈루냐어로 ‘돌멩이들의 강’이라는 듯이 담겨 있다. 시내를 가로질러 바다로 빠져나가던 개울이 있던 자리인데, 세월이 흐르고 도시가 성장하면서 석축이 무너지고, 인근의 낡은 건물을 허물면서 석재들을 쏟아붓고 하다 보니 저절로 메워져서 우리나라의 복개천처럼 되어 버렸다. 그리고 그 위로 도로가 생겨났다. 도로의 양옆으로 바둑판처럼 좁은 골목길이 수없이 생겨나고 미로처럼 서로 얽혀있는데, 곳곳에 가우디가 살던 집이 있고, 구엘 저택이 있고, 레알 광장과 교회와 갤러리와 학교와 카페와 레스토랑과 의류 판매점과 기념품 상점과 관광 안내소 등이 숨어있다.
어떤 이들은 람블라스 거리를 파리의 샹젤리제나 런던의 피카딜리 서커스에 비유하지만, 결론적으로 이곳이 유명세를 톡톡히 치르고 있는 명소이니만큼 솔직히는 물가가 그만큼 비싸다는 뜻도 포함되어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다. 커피 한 잔에서 주전부리는 물론 음식과 술값과 기념품 값까지 다른 지역에 비해서 비싼 편이다. 살짝만 옆으로 골목 안쪽으로만 들어가도 럭셔리하거나 클래식한 분위기의 정식 레스토랑이나 카페가 증비하게 늘어서 있는데, 지척인 람블라스 거리에 비해서 훨씬 저렴하다는 사실을 쉽게 깨달을 수 있다. 그야말로 자릿세가 엄청 위력을 발휘하는 동네인 것이다.
그중에 사람들의 발길이 길게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골목길을 따라 들어가다 보면 야자수가 멋지게 늘어서있는 공원을 만나게 된다. 레이알 광장(Placa Reial)이다. 그냥 ‘스페인스럽다’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방법이 떠오르지 않는, 어찌 보면 적어도 스페인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공원에 지나지 않지만 이곳은 바르셀로나 여행에 있어서 또 하나의 명소다. 낮에는 현지 젊은이들이 휴식을 취하거나 데이트 장소로 주로 쓰이지만, 해가 질 무렵부터는 바르셀로나 최고의 밤문화가 이곳에서 가득 펼쳐진다. 수많은 클럽과 식당과 카페와 바들이 불을 밝히고 밤늦게까지 손님들을 유혹하는 전혀 다른 장소로 둔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작 이곳을 명소로 만든 것은 다름아닌...... 역시나 가우디 때문이다. 속된 말로 ‘바르셀로나 시민의 절반은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니까 말이다.
이곳에 모양이 좀 특이한 가로등이 서 있다.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신들의 전령사 헤르메스의 투구에서 영감을 얻어 만들었다는 레이알 광장의 가로등을 만든 사람이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í)였기 때문이다. 가우디가 대학 졸업 때 졸업작품으로 만들어 제출했던 작품이다. 지금 이 가로등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가로등 뒤로 ‘위대한 건축가 가우디 작품’이라는 후광이 조각상의 광배처럼 아른거린다. 시간이 좀 지났다는 전제를 깔고, 이 정도의 작품을 오늘날 대학 건축과 졸업작품이라고 제출을 하면 과연 얼마만큼의 평점을 받을 수 있을까?
가우디 하면 ‘세계적인 천재 건축가’라는 수식어가 늘 따라붙는데, 매우 독창적이었다거나 상상력이 풍부한 건축가, 혹은 어쨌거나 성공한 건축가 정도라면 어느 정도 이해를 하겠는데, 거기에다 ‘세계적’ 이나 ‘위대한’까지 붙이는 것에는 약간의 의문을 솔직히 나는 가지고 있다. 물론 이런 비평에 솔직히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은 제외시키고 말이다. 그의 건축에 대한 실력이나 능력이 정말로 위대했다면, 그 후로 더욱 많은 사람들에 의하여 가우디 방식의 건축이 꾸준히 계승되고 그의 아류 같은 건물들이 세상에 널려있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그의 건축에 환호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지만, 결과적으로 그의 건축기술이나 정신이 승계되고 발전되는 모습을 내 눈과 수준에서는 별로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 가우디에 대해서 사실 나는 지금도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끝이 보이지 않는, 그리고 끝날 것 같지도 않은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은 골목길을 걷고 또 걷는다. 설마 지금 보고 있는 이런 풍경들과 전혀 다른 풍경이 나타나면 아마도 거기는 고딕 지구의 끝이거나 아니면 다른 동네겠지 하면서 말이다. 어차피 바르셀로나 옛 도심(Old city) 안쪽일 테니 말이다. 그러다가 갑자기 환해지면서 너른 광장이 나타났다.
바르셀로나가 처음 시작될 때부터 바르셀로나의 심장이자 핵심 권력이 차지했던 산 자우메 광장(Sant_Jaume)이다. 고대 로마가 리베리아 반도를 정복하고 처음 세웠던 도시 바르시노(Barcino)의 중심이었다. 로마는 이곳에 로마 포럼과 아우구스투스 신전을 세웠고, 총독의 궁전이 이곳에 있었다. 중세에 기독교에 의해서 아우구스투스 신전 자리에 산 자우메 교회가 세워졌다.
노란색 바탕에 옆으로 길게 빨간색 줄이 그려진 카탈루냐 주 깃발이 건물의 지붕과 인근의 건물들 창과 테라스에 나부끼고 있다. 바르셀로나 시 청사이자 카탈루냐 자치정부 깃발이다. 오히려 어디에서도 스페인 깃발은 보이지 않는다.
카탈루냐 사람들은 자신들을 가리키며 '우리는 스페인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다. 오로지 카탈루냐 사람이라고 스스로를 칭한다. 자기들끼리는 카탈루냐어로 대화한다. 학교에서도 카탈루냐어를 정식 국어인 스페인어와 똑같이 공부하고, TV 채널도 별도로 카탈루냐 방송을 청취한다.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단히 오래 전의 역사에서부터 기인 된 일이라서 지금 당장 짧게 설명하기는 어렵겠다. 이 역시 언제 기회가 되면 좀 더 심도 있는 카탈루냐 문제와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논의 해보도록 하겠다.
분명 바르셀로나는 마드리드에 이른 스페인의 두 번째 강성한 도시다. 하지만 그들은 스페인에 속하기를 거부하고 있다. 이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가장 좋은 예가 바로...... 레알 마드리드와 바로셀로나의 축구 경기가 가장 좋은 사례라고 하겠다. 바르셀로나가 스페인 리그에서 레알 마드리드를 이기는 날이면 바르셀로나 시민들 대부분이 거리로 쏟아져 나와 밤이 새도록 축제를 벌인다. 리그 결승을 레알 마드리드와 붙어서 우승이라도 하면 나라가 독립을 한 국경일 보다도 더 성대하고 떠들썩하게 그야말로 광란의 축제를 벌인다. 도시 어디에서도 스페인 국기는 찾아 볼 수 없다. 대신 노랗고 빨간 줄의 카탈루냐 깃발이 온 도시를 뒤덮고 있을 뿐이다. 이곳이 바로 그 카탈루냐 역사의 시발점이자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성스럽게 여기는 장소이다.
주말이면 이곳에서 턱시도에 드레스를 입은 신랑 신부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네들의 결혼식은 우리처럼 예식장이 아니라 카탈루냐주 청사 건물의 주민등록 부서를 찾아 직접 혼인 서약에 사인함으로써 완성되기 때문이다. 신랑 신부의 지인들과 하객들이 멋스러운 차림으로 와인 병과 꽃을 들고 신랑 신부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모습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그들에게 창조주의 크신 사랑과 은총이 가득 내리시기를 온 마음으로 기도해 본다.
산 자우메 광장을 가로지르는 페란 거리를 따라가면 다시 람블라스 거리와 이어진다.
하지만 약 100 미터 정도를 따라가다가 다시 왼편의 골목길로 접어들면, 거기서 부터는 다시 바리 고딕 지구에 해당하는 아비뇨 거리(Carrer d'Avinyo)에 들어서게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아비뇨(Avinyo)는 로마 교황청이 76년간 프랑스로 쫓겨나 있던 그 아비뇽을 가리키는 용어가 맞다. 카탈루냐어 표현으로 ‘아비뇽 사람’을 지칭하는데..... 상당히 폄하하는 거북한 표현으로 오늘날 인식되고 사용되어 온 것이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그 이유는 모두 피카소의 그림 <아비뇽의 여인들( Les Demoiselles d'Avignon)>에서 생겨난 문제이다. 세상에 아비뇽이란 도시는 남프랑스 프로방스에 있고, 아비뇽이 들어간 유명한 사건은 <아비뇽 유수> 아니면 피카소의 <아비뇽의 여인들> 뿐이 아닌가?
아기자기한 기념품과 소품점이 곳곳에 들어서 있고 스제 의류점이나 향수 비누가계등이 자주 눈에 띈다.
하지만 뭐니뭐니해도 이곳이 여행자들에게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최고로 사랑받는 이유는 최고의 멋진 사진을 찍을 수 있는 명소이기 때문이 아닐까싶다. 이 골목 안쪽에 왕궁과 대성당을 이어주는 셈세한 장식으로 무척이나 아름다운 구름다리(Pont del Bisbe)가 골목의 머리위를 가로질러 지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베네치아의 탄식의 다리를 닮았다. 아니 닮은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고대로 빼다 박았다는 표현이 더 적절할 것만 같다.
거 참!!!! 이 집 그렇게 장사가 안되나? 아니면 장사를 잘못하던가?
4년 전에 내놓았던 것이 아직도 그냥 있네? 딱 보아하니 팔고나서 새로 가져다 놓은 것이 아니네? 색이 바래진것 봐.
그 때도 세리 할망구가 쩌렇게 쪼그리고 앉아서 '나랑 영락없이 꼭 닮았느니 어쨌느니 해서 사람 속을 확 뒤집어 놓더니만....... 헐! 4년이 진난 오늘 어떻게 토씨 하나 안틀리게 또 사람속을 홀라당 뒤집어 놓는다.
헐!!! 내가 미친다. 미쳐!
'닮긴 어디가 닮어??????? 솜털 하나도 안닮았구만. 혹 아들을 닮았다면 모를까?'
'이 양반이 지금? 어디다 소중한 아들을 갖다 대는거야? 대기를? 우리 아들은 아빠한테 질려서 술을 별로 안하네요? 자기 관리도 철저하구요.......'
'저걸 정말로 사다가 아들에게 물어볼까? 닮았나 안 닮았나? '
'찔리는데가 있기는 하나보네? 저걸 다 산다고 하는 걸 보니?'
'당신이 귀여워 보인다고 하면 사 줄께?'
'하이고야. 됐네요. 집에서 맨날 똑같은 실물을 보는것도 지겨운데 저런걸 또 사서까지 가져가자구?'
'이 마누라가 시방? 해보자는 거여? 내가 이래뵈도 멋있는 태리 할아부지여. 할아부지.'
'그건 당신이 손녀를 자꾸 꼬시니까 얼떨결에 튀어나오는 멋진 할아버지지? 개뿔!!!'
'아이고 내 팔자야!!!!'
그래서 하도 억울해 4년 전의 사진을 정말로 찾아 보았다.
있다. 고대로 똑 같은게 있다.
하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가격표가 바뀌었다. 4년 전에는 286 유로였는데, 지금은 447유로니까 대충 환산해 보면 60만원이 훨씬 넘는다. 헐!
'저 잉간. 4년이 지났는데도 열심히 마시고 있구만. 연금 좀 받으시나보지? 여보시게...... 부러우이!!!'
'나랑은 영 판 다른데...... 영 안 닮았는데........ 에이. 변한것은 당신이네. 할망구가 많이 변했네?'
'4년 전에는 훨씬 보아줄만 했네? 여보야! 우리 이렇게 점점 빨리 늙어가고 있구나........ 미안허이. 미안혀.'
바르셀로나에는 특히 우리나라와 아시아권 여행자들에게 인기를 많이 끌고있는 약간은 멋쩍은 그런 장소가 있다. 다들 그냥 '키스 벽화(Kiss of Freedom)'라고들 부른다.
카탈루냐가 자치 독립을 빼앗긴 1714년을 기리기 위하여 바르셀로나의 카탈루냐 자치정부는 상징적인 기념물을 제작하기로 하고 예술가 후안 폰트쿠베르타(Joan Fontcuberta)에게 제작을 맡겼다. 작가는 이 기념물이 가지게 될 상징적 의미를 담아내기 위하여 지역 신문에 ‘당신에게 자유는 어떤 의미입니까?’ 하는 기사와 함께 독자들에게 ‘당신이 말하는 자유가 담긴 사진을 보내 달라고 공개 요청했다. 6.000장의 사진이 도착했고, 그중에서 4.000장의 사진을 타일에 옮겨서 그 사진들로 8 X 8.4 미터의 거대한 모자이크 벽화를 만들었다. 그 작품의 이름이 <세상은 모든 키스로부터 시작됩니다.(El món neix in cada besada)> 라는 작품이다. 유독 아시아권의 여행자들에게 크게 사랑을 받고 있다.
지난 여행에서 이미 가 본적이 있었다.
하여 굳이 다시 찾아 갈 생각은 없었는데, 미로같은 골목길 투어를 하다보니 저절로 그곳에 당도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까지 다시 오게 되었으니 어쨌거나 기념 사진 한 장은 찍고 가야지?’
그런데 오늘은 미처 삼각대를 챙겨오지 못하지 않았는가? 그래서 누구에게 부탁을 하나 싶다가 한국인 젊은 아가씨들을 발견했다. 반갑게 다가가 사진을 부탁했다.
그래서 밀려있는 인파 뒤에서 잠시 기다렸다가 마침내 모자이크 앞에 서서 포즈를 취하고 찍었는데...... ‘한 장만 더 찍을 께요’ 하는 아가씨 음성에 다시 제자리에서 어색한 포즈를 취하는데......... 느닷없이 사진을 찍고있는 아가씨 뒤에 서있던 친구들이 일제히 ‘뽀뽀해’ ‘뽀뽀해’를 연발하는 것이 아닌가? 우린 이미 한참이나 올드한 노년에 속한 터라 우린 그런 신세대 문화에 전혀 익숙하지가 않아서 몹시 민망해 하고 있는데....... 이젠 외국인들까지 합세해서 무슨 신나는 볼거리라도 생긴양 엉성한 한국말로 ‘뽀뽀해’ ‘뽀뽀해’를 합창을 한다.
‘이쯤되면 그냥 못이기는 척하고 한 번 해보지 뭐.’라며 바짝 다가서는 울 마누라님의 도발적인 과감한 용기!!!!!
그냥 그래서 어떨결에 해 보았다.
공개 키스라는 것을........ 박수 세례까지 받으면서 말이다. 정말 별짓을 다 하고 돌아다니고 있다....... 미티미티.
헐!!!!!
'누가 왜 사냐고 물으면?'
'그냥 웃지요.'
원치않는(?) 불경스런 길거리 뽀뽀(?)를 했으니 서둘러 어디가서 입술을 닦고 입안을 헹궈야 하지 않겠는가?
해서 서둘러 다시 람블라스 거리로 부랴부랴 나선다.
해독에는 생맥주가 최고여!!!!!
'우리가 좀 전에 무슨짓을 한거지?'
'몰러. 그새 까먹었어.'
‘이렇게 날씨가 좋은데 버스킹이 벌어지지 않았을까? 해질녘 그늘이 찾아오기 전에 젊음의 거리를 먼저 가보는게 어때?’
새로운 여행지, 특히나 로마 같은 역사와 유적들로 가득한 도시를 가게되면 나도 모르게 저절로 가능한 빨리 모든 것들을 보야야겠다는 어떤 알 수 없는 사명감에 고취되어 땀을 흘리면서까지 뛰어다니곤 했었다. 힘들게 이 먼 곳까지 부러 찾아왔는데 ‘좀 피곤하면 어때? 집에 돌아가서 쉬면 되지’라고 늘 스스로를 달래곤 했다. 참으로 오랫동안 그래왔고, 그런 것이 내 방식의...... 혹은 우리 방식의 여행이라고 스스로 위안을 삼았다.
지구본을 돌려보면 ‘에게게. 내가 가 본 나라가 겨우 이거야?’하게되지만, TV에 방영되는 여러 여행 채널들을 보다보면 ‘우리가 이렇게나 많이 돌아다녔어? 맨날 다닌데만 또 나오네’하는 경우도 종종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데 말이다. 참으로 야속하게..... 되돌아 보는 시간들은 그렇게 빠를 수가 없었다.
매일 ‘난 아직은 현역이야’라고 너스레를 떨어보지만 이미 빠져나간 젊음은 어디론가 꼬리를 감춘지 오래된 것이다. 기운은 떨어지고, 특히 시력이 뚝 뚝 떨어지더니 이젠 비박 같은 등산은 과거처럼 그렇게 자신이 없다. 하루 정도는 산을 타겠지만, 이틀 사흘을 능선을 타고 오르내리라면 더는 버티지 못할 것이다. 여전히 걷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아내지만, 허리 수술 이후로는 후유증에 대한 부담 때문에 배낭을 캐리어로 바꾸게 되고 말았다. 나야 아직 배낭으로 버티지만 솔직히 무게감에 부담을 느끼는 것이 사실이다. 나이들면 비우고 덜어내라는데...... 왜 내 배낭은 점점 무거워지는지 도무지 잘 모르겠다.
세월은 무심하게 점점 빠르게 우리 옆을 스쳐지나갈건데.........
죽기 전날 까지는 열심히 일하고 죽어라 여행을 계속해나갈 우리인데........ 여행이 우리에겐 취미이자 특기이고 삶 자체인데....... 어쩌지?
‘어쩌긴 뭘 어째? 더디게 쉬면서 가면 되지!’라고 툭 던지는 아내의 말에서 다시 용기를 얻는다.
‘그래. 우리가 가진게 시간하고 배짱 밖에 더 있어? 이젠 놀이처럼 즐기면서 여유있는 여행을 하면 되지.’
아마도 그때부터였지 싶다.
한 줌의 따사로운 햇쌀을 대하는 마음이 달라졌고, 두 세시간을 노천 카페에 앉아서 멍때리는 것에 익숙해 지기 시작한 것이 말이다.
집에서 일상으로 머그잔에 하루에 대략 다섯잔 정도 마시는 커피와 여행의 중간에 아무 카페나 아무 커피를 그냥 길을 걸으면서 마시기도 하고, 의자 없는 가판대에서 마시기도 하고, 아주 가끔 마셔보는 에스페레소의 진한 맛이 전부 다르다는 것을 말이다. 가장 맛있는 커피는 길을 걷다가 ‘저 집 커피는 아주 맛있을 것 같애’라고 생각되는 허름해도 아주 예쁜 카페를 발견하고 우리 마눌님 웃음짓는 얼굴을 바라보며 마시는 커피가 가장 맛있는 커피가 아닐까 싶다. 그런 카페를 하나 (베벡의 벅스처럼)이라는 간판을 달고 만들어 보고 싶은 생각은 여전히 진행형이지만 말이다.
그렇게 걷다가 카페에서 커피마시며 쉬었다가 다시 걷고 하다보면 우연히...... 또는 뜻밖의 만남으로 버스킹하는 아마추어 예술가들을 만나고, 춤추는 비보이도 만나고, 벽화를 그리는 그래피티 예술가도 만나고, 행위 예술가와 마술사의 매직 쇼를 보기도 한다.
그런데 여기 바르셀로나에 아주 유명한 길거리 문화 명소가 있다. 그곳이 인근임을 아는 챠밍여사가 지금 어두워지기 전에 그곳에 가보고 싶다고 말하는 것이다.
노바 광장(Placa Nova)은 바르셀로나 대성당의 앞마당에 해당하는 아주 크고 너른 언제나 모두에게 활짝 열려있는 공간이다. 오로지 걸어서 찾아오는 사람들을 위한 바르셀로나 시민들이 가장 사랑하는 쉼터이자 시민들 영혼의 안식처라고 하겠다.
14세기에 완공된 웅장하면서도 장엄한 대성당의 본래 이름은 ‘십자가와 성녀 아우렐리아를 위한 바르셀로나 대성당(Catedral de la Santa Creu i Santa Eulàlia)’이다. 기독교 탄압의 시대에 로마군에게 잡혀가 십자가를 부정하는 배교를 요청받았으나 끝내 거절하였고, 옷을 벗겨 알몸으로 광장에 민중들 앞에 끌어냈을 때, 갑자기 눈이 대려 그녀의 나신을 덮었다고(믿거나 말거나) 전한다. 오크통에 못을 잔뜩 박아놓고 그 안에 그녀를 넣고 언덕에서 굴려내리는 고문을 가했으나 당당하게 살아나와 십자가 찬양을 멈추지 않았다고 전한다. 결국 참수형을 당했고 지금 대성당의 지하에 묻혀있다. 성녀 아우렐리아는 바르셀로나의 수호성인이다.
보수작업 중인 대성당의 거대한 칸막이 휘장이 온통 우리나라 기업 삼성의 핸디폰 신제품 사진으로 꽉 차 있다. 광고 디자인이 아주 쌈박하다. 은근히 속으로부터 알 수 없는 자긍심 덩어리가 막 솟구치기 시작한다. 일제도 없고 중국제도 없다. 거기다가 지금 당장은 애플 광고까지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이 가슴 뿌듯함은 무엇이지?
외국에 나가보면 다들 애국자가 되어 있다.
그런데 인천 공항에 내리는 순간 TV 에나 너저분하게 방송되는 그런 혼탁하고 살기 힘들고 거북한 나라의 국민으로 전락하고 만다. 왜 그럴까?
광장에 도착하니 초록색 드레스로 한 것 멋을 부린 모델의 사진 촬영이 진행되고 있다. 보편적인 우리네 일상에서 볼 수 없는 광경이라 잠시 멈춰서서 지켜본다. 아마도 스페인계라기 보다는 동구권 어딜 것 같다는 느낌의 모델이 참 예쁘고 늘씬하다. 왜 늘씬하고 예쁜 모델을 챙기는 꾸며주는 담당자들은 하나같이 뚱뚱하고 별로 전혀 예쁘지를 않는거지? 공통점은 대부분 청바지를 입었다는 것 뿐으로 보인다.
이윽고 B-BOY 공연이 벌어졌다. 여러명이 팀을 이루고 있는 대단위 공연이었고 수준도 상당했다. 다만, B-boy계의 최상위 그룹 랭킹자들이 이미 대한민국이었고 국내에서 여러 차례 공연을 보았던 터라, 아무래도 수준은 영 우리나라 레벨에 비해 많이 떨어진다고 해야겠다.
하이고야.
정작 더 예술인 것은, B-boy들의 공연을 따라하려고 부단히 애를 쓰고 있는 두 꼬맹이가 펼치는 이색 공연이었다. 어지나 예쁘고 깜찍한지 k-POP의 안무를 따라하는 우리 큰손녀 태리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힘이 들 지경이었다.(우리 병아리들은 지금 뭐할까?)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는 것을 보며 발걸음을 숙소를 향해 옮기기 시작한다.
헐!!!!
여기서 숙소까지 거리가 얼마여?
'할망구야. 택시까지는 아니라도 지하철 한 번 타면 안되겠니?' 라고 입 속에서만 종알종알거려 본다.
'빨리 안오고 뭐 해? 마트에서 장 봐다가 저녁 해먹는다니까?'
'옛썰!!!'
--- 지면 관계로 여기서 마무리 하고, 다음 이야기에서 바르셀로나 여행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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