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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두 번 째 바르셀로나 3 (바르셀로나 시민의 절반은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는데)

by 피안재 2024. 6. 2.

 

 

 

 

​‘우리가 영화관에서 외화를 보려면 열심히 자막을 읽어야 하잖아. 만화영화나 더빙을 하니까 말이야. 그런데 지금 우리가 스페인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면 스페인 사람들은 열심히 스페인어로 된 자막을 읽어야 할 것 아니야. 혹 이들이 아직도 더빙을 즐기는지까지는 모르지만. 그렇다면 우리가 이 시점에서 스페인 영화관에서 한국영화를 본다면........ 느긋한 표정에 우아한 폼으로 한국어 특유의 은유나 깊이 있는 감정 표현까지도 세세하게 이해하며 충분히 즐길 수 있지 않겠어? 이참에 우리 영화나 한 편 때리고 갈까?’

‘Oh. No! Please........’

'왜? 스페인에서 한국영화 한 번 보자는데 안되냐? 쪼잔하게스리........' 삐진 표정으로 벤치에 털썩 주저앉아 버린다.

깜짝 놀라서 아내에게 통 사정을 해본다.(세상에..... 하다하다 어쩌자고 이젠 저런 생각을 다....... 헐!!!!) 저녁 7시 35분 상영이면, 나중에 걸어서 숙소가면 밤 열시가 훌쩍 지날텐데........

' 에이 씨. 이참에 나도 (*** 결심)을 한 번쯤 팍 해버려? 내질러? 아니면 뒷감당을 어떻게 하지?'

<헤어질 결심> 이란 영화에 대해서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관심을 가지고 개봉을 기다렸었기에 망정이지 그냥 우연히 영어 제목 <DECISION TO LEAVE>를 보았다면, 또 죽어라 머리 굴려서 ‘떠나기로 한 결정’이라고 굳이 해석했을 것이다. 뭐 그렇다고 해서 잘못된 번역이나 의미가 퇴색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우리가 받았던 정형화된 영어 교육의 한계를 또 한 번 잠시 생각해 보게 된다. 아울러 한글이 아름다우니 훌륭하니 어떠니 해도...... 디지게 어려운 게 한글인 것은 틀림이 없다. 한국에 태어났으니 영어를 쬐끔 써먹고 있지만, 영어 국가에 태어났으면 한글은 쳐다보지도 않았을지도 모른다. 뻔했을 끔찍함에 적어도 나로서는 말이다.

결과적으로 말해서...... 그때 안보길 잘했지...... 박찬욱 감독의 영화가 <웰컴 투 동막골>이나 <범죄도시> 처럼 대충 쉽게 웃으면서 볼 수 있는 그런 영화는 절대로 아니잖아? 그렇다고 앞의 영화가 대충 보아도 좋은 쉬운영화라는 뜻으로 받아들이지 않았으면 좋겠다. 박찬욱 감독의 영화들은 무엇인가 여운이 많이 남는 영화들이 대부분이다. 그래서 실제로 두 번, 세 번 보는 경우들이 허다하다고 한다. 왜 다시 볼까? 좋아서? 그렇수도 있겠지만 좋아서 보다는 어려워서라고 나는 생각하는 부류이다. 다른 영화들도 다시 보면 또 새로운 느낌과 감동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런 상황에서 결과적으로 <헤어질 결심>은 '다시 보고 싶은 필요성'을 가장 강하게 관객에게 떠맡기는 영화가 아닌가 말이다.

여행에서 돌아 와 상영관을 찾았던 우리는 관람을 마치고 나오면서 한참동안 서로 말이 없었다. '이게 뭐지? 이 묘한 여운같은 개운치 않음은 말이야?' '이렇게 끝나야 하나?' '뭐든 뒷 이야기가 더 없어?' 이런 느낌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이다.

'언제고 <헤어질 결심>과 <파묘>는 다시 한 번 제대로 봤으면 좋겠어.'라고 속내를 털어놓는 마누라님을 보면서....... '어디서 스페인어로 더빙된 것을 한 번 구해볼까?'하는 어깃장이 뭉실뭉실 피어난다.

엑삼플레(Eixample) 지역을 열심히 걸어서 지나가고 있는데 플라타너스 숲길 옆으로 아주 익숙한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 아닌가?

‘해일아! 니가 거기서 왜 나와?’

‘탕웨이 누이는 또 웬일이신가?’

두 사람과는 태어나서부터 일면식도 없는 처지인 것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우리는 까만 머리에 까만 눈을 가진 먼 동쪽에 사는 사람들이 아닌가? 거기다가 우리는 사촌지간이 틀림없잖은가? 이웃사촌도 한국에선 엄연히 사촌이니까 말일세. 내가 쬐금 연장자니까..... 말을 쓸쩍 놓았음일세.

거참 이상하다.

자그마한 영화 포스터를 보았음일뿐인데 왜 이리 반가운 것일까? 내가 이래뵈도 한 영화 하는 매니아여서 일까?

“동시대 관객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미래의 관객을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요. 제가 다른 것도 아니고 영화를 하는 것은, 오래 살아남는 작품을 만들고 싶어서거든요. 100년 후에도 시네마테크에서 사람들이 볼 수 있는 영화를 만드는 것이 목표기 때문에, 미래의 관객도 즐길 수 있는 영화를 만들고 싶어요. 그게 실제로 될지 안 될지는 모르지만 그걸 목표로 하고 있어요.”라고 영국 개봉을 앞둔 박감독의 인터뷰를 봤었다.

산 정상에서 한 남자가 추락해 사망하는 변사 사건이 일어났다.

사건 수사를 맡은 형사 해준(박해일)은 죽은사람의 미망인 서래(탕웨이)와 만난다.

‘산에 가서 안 오면 걱정했어요. 마침내 죽었을까봐.’라고 서래가 대답한다.

아무런 동요없이 마치 남의 일처럼 태연하게 대답하는 서래를 해준은 용의선상에 올려 놓는다.

의혹은 짙어만 가는데 드러나는 증거는 아무것도 없다.

알리바이를 캐고, 탐문한 것을 가지고 직접 신문을 하고, 거기에 잠복수사까지 하면서 묘하게 점점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용의선상에 올라있는 의문투성이의 서래에게 관심과 마음이 끌려들어 가고 있다는 불길한 예감에서 헤어져 나오지 못하는 해준은 혼란스럽다.

모든 진실을 숨기려는 용의자.

그런 용의자에게 의심과 관심을 동시에 가져가는 형사의 마음은 분명 불륜임이 분명한데......

어차피 그들에게 남아있는 것은 <헤어질 결심> 뿐이다.

바르셀로나를 다녀왔거나, 아니면 여행을 준비하는 사람들에게 ‘바르셀로나를 한 줄로 표현한다면’하고 물어보았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의 도시’가 주로 공통된 대답이다.

언젠가는 스페인을 가야지 하면서 아주 오래전에 구입한 여행 안내서의 바르셀로나 표지엔 분명 내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다.

‘바르셀로나는 네모로 만든 도시’라고 말이다.

적어도 나에게는 바르셀로나 하면 가장 먼저 떠올랐던 것이 다른 것이었던만큼, 가우디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가장 인상적이진 않았나 보다.

오늘 내가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나 고딕지국의 좁은 골목길을 열심히 쫓아다니면서 하나도 빨리 가서 만나보고 싶다는 가우디 건축에 대한 강한 이끌림이나 호기심이 생기지 않는 것만 보더라도 막연히나마 내가 아주 오래전부터 이미 바르셀로나를 남들과는 좀 다르게, 이미 다른 매력 내지는 다른 관심에 초점을 맞추고 있지 않았었나 싶다. 적어도 나에겐 가우디가 전부는 아니었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일까? 내가 오래전에 책자에 낙서처럼 써 놓았던 ‘네모의 도시’는 무슨 뜻일까?

흔히 남의 말 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을 통해 ‘바르셀로나는 가우디로 시작해서 가우디로 끝난다’라거나, ‘바르셀로나 시민의 절반은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은 적이 있다. 사람들의 반응은 ‘뭐 그리 틀린 말은 아니잖아?’라면서 대체적으로 수긍하는 태도를 보인다.

정말로 그럴까? 과연 그 말이 사실일까? 괜히 궁금해진다.

그렇게 된다면 피카소. 미로. 달리.카잘스 등이 억울해 하지는 않을까?그들의 예술이 남아있지 않는 바르셀로나를 가우디Antoni Gaudi)하나로 채울수 있을까?

​아침 산책을 나서보니 어제와는 기온이 아주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티끌 하나 없는 쪽빛 하늘이 무한대로 펼쳐져 있다. 빈 액자 틀을 하나 머리위로 치켜들어 올린다면 바르셀로나의 하늘은 미술관 벽에나 걸려있는 하나하나의 예술작품이다. 우리나라 <애국가> 3절에 등장하는 ‘공활한 가을하늘’을 이제 우리나라에서는 미세먼지 때문에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바르셀로나에서는 연중 300일 이상이 그냥 마냥 공활한 파란하늘이라니 어찌 부럽지 않을소냐? 아침부터 부럽기가 그지없을 뿐이다.

그런데 오늘따라 아침 기온은 뚝 떨어져 어제보다 5도나 낮았다. 그럼에도 우리나라로 치자면 1월말의 한겨울이라고 치면 아침 온도가 영상 9도쯤 되면 거의 봄 날씨가 아닐까? 어제는 한낮에 18도까지 올랐다고 한다. 어쩐지 훌러덩 벗고 속옷 바람으로 돌아다니더니만.....

현지인들 아침 차림새도 대부분 패딩이나 겉옷을 하나씩 더 걸치고 있다. ‘어제 겨우 패딩에 대해서 용서를 받았는데, 이거 하루 만에 다시 원상복구 하는 것은 아닐지 모르겠다.’는 은근한 걱정 속에 그래도 옷차림을 좀 단단히 하라고 일러준다.

오늘은 어제처럼..... 다시 아무런 준비나 계획 없이 그저 눈길이 가고, 맘이 쏠리고, 발길이 닫는 대로 바르셀로나를 느릿느릿 휘젓고 다니는 날이다.

옛 생각이 나서 먼저 4년 전에 머물렀던 세인트 존 거리공원으로 발길을 옮긴다.

모든것이 옛 모습 그대로다.

한산하고 깨끗하고 정겨움과 여유로움이 넘쳐나는 어린 시절 고향의 동구 밖 놀이터에 다시 찾아온 느낌이다.

완벽한 사전 설계에 의해서 만들어진 계획도시 바르셀로나의 모든 도로는 폭이 50m의 횡으로 가로지르는 도로와 폭이 80m의 종으로 가로지르는 도로로 만들어져 있다. 모든 도로의 전제조건은 교차로를 제외하고는 공원을 포함하는 보행자 도로의 넓이가 자동차 전용도로의 넓이보다 반듯이 넓어야만 한다. 우리나라 같은 형태의 도로가 많이 있기는 하지만, 차도 위주의 우리나라 도로사정과는 다르게 보행자 인도가 두 배 이상 훨씬 넓다. 심지어는 도로의 2/3가 공원을 포함하는 일직선의 보행자 전용도로로 한가운데로 거대한 숲길을 이루고 있다. 그 숲길에 잔디 공원과 벤치와 노천 카페가 늘어서 있다. 공원 양쪽으로 좁은 2차선의 일방통행 차로가 있는데, 하나의 차로는 도로주차장이고 당일차로의 일방통행 차량 전용 도로가 전부다. 반대편엔 반대방향으로 가는 일방통행 1차 주행로가 전부다. 까마득히 자란 플라타너스 숲길은 도시 전부를 일직선상의 바둑판 형태의 공원을 조성하고 있다. 여기 세인트 존 거리공원에서 바르셀로나 독립문까지 거의 폭이 약 40m가 넘는 숲길이 약 2.5km를 일직선상으로 뻗어나 있다. 우리나라의 창원이나 광양처럼 나름 사전 도시계획에 의해 건설된 도시들이 있기는 하지만, 감히 말하건데....... 바르셀로나라는 바둑판 도시와의 비교는 절대로 섣불리 하지 말라. 감히 말하건데....... 그 차원이 다르다.

바르셀로나는 세상에서 유일한..... 그리고 너무나 아름답고 멋진 ‘네모의 꿈(sueño cuadrado)’이 가득 펼쳐져 있는 꿈의 도시이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는 레고 블럭으로 만든 미니어처 세계에서나 가능한 ‘네모의 도시’다.

 

 

1​백 70년 전에 건설된 도시지만 거리의 레이아웃은 이미 보행자의 동선과 말이 그는 마차와 새롭게 등장한 자동차와 트램의 운송 수단은 물론 대용량의 상하수도 시설과 전기 가스 공급망과 외곽의 철도 노선까지를 염두에 두고 계획되었다. 공공 기관 설치와 기상이변에 따른 홍수방지까지 염두에 두었을 정도였다.

하나의 변에 길이가 정확히 113.3 x 113.3 평방미터의 정사각형 블록이 주거지역의 정형화된 규격으로, 이는 바르셀로나에 거주할 시민 1인당 최소 평균 6 평방 미터의 생활 공간을 보장해야만 한다는 전제로 설계되었다. 이 불럭 3개에 해당하는 약 300m 거리마다 개인 혹은 공동의 녹지 공간이 필수로 들어서도록 했다. 별도의 공원이 어려우면 도로의 상당부분을 공원으로 만들어서라도 말이다. 그래야만 사람이 거주하는 모든 공간에 자연스럽게 자연풍이 통하고 채광이 제한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런 기본 계획으로 도시는 홍수 피해를 줄일 수 있고, 전염병을 예방할 수 있다. 정사각형의 블록은 빌라나 아파트 형태로 건설되며 중앙의 공간을 마련하여 주차장과 정원과 공동의 편의 시설로 만들어 사용하도록 한다. 하나의 블록이 자연스레 중세시대 하나의 성채처럼 되는 것이다.

정사각형 네 모서리의 블록을 조금씩 다듬어 놓은 것은, 마차나 자동차가 회전하면서 보행자에게 가해질지도 모를 위험을 사전에 대비하고자 처음부터 그렇게 계획하고 만든 것이다. 지금은 고스란히 보행자의 안전지대로 자연스레 환원된 여유 공간이다. 1백 7십년 전에 이미 그런 것 까지 염두에 두고 도시 건설을 계획한 바르셀로나 사람이 있었던 것이다. 진심으로 나는 그 토목기사가 안토니오 가우디 보다 더 훌륭하면 훌륭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건물의 높이는 20m에 한하며, 외관은 시와 정부에서 제시하고 허락하는 선에서의 건축이 가능하며, 함부로 개축을 할 수 없다. 도시 전체의 외형을 통일토록 한 것이다. 이 부분에서는 당시 사회주의를 추구하거나 지향하는 방식이라 하여 논란이 끊이질 않았으나 결국 지금의 모습으로 완성 되었다. 바르셀로나의 도로망과 도시계획은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대각선의 도로망을 그대로 살리면서, 해안선에 맞추어 북쪽 외곽지역까지 도시 전체를 완전한 사각형 바둑판 형태의 도시로 완성된 것이다.

모든 사람이 모나지 않은 둥근 세상을 추구하며 살아가고 있을 때, 일데폰스 세루다 소니에르(Ildefons Cerdà Sunyer)는 '네모의 꿈(sueño cuadrado)'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그의 꿈이 지금 이렇게 '네모의 도시' 바르셀로나로 활짝 피어난 것이다.

바르셀로나 건축업계에서는 실제로 아주 오래 전부터 꾸준히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가 있다. 가끔은 그런 글들이 잡지의 사설란에 올라오기도 한다.

'바르셀로나는 세르다의 네모의 꿈이 실현된 세르다의 도시다. 가우디는 세르다가 만들어 놓은 네모난 공간에 점을 몇 개 찍었을 뿐이다' 라고 말이다.

어디까지나 지극히 개인적인 주관에 의한 표현일 수 있고 어느 정도 비약이 담겨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나는 그 이야기 또한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표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다. 바르셀로나의 기틀이 된 초현대적 도시 디자인에 네모의 꿈을 담아 실현시킨 사람이 세르다인 것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세르다가 가꾼 토양에 가우디가 나무를 심었고 거기에서 꽃이 활짝 피었다고 해야할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세르다(Cerdá) 하면 ‘저주받은 위대한 토목 엔지니어’ 라는 수식어를 늘 그의 이름 뒤에 따라 붙이곤 한다.

세르다는 라스 칼다스 데 베사야(칸타브리아)의 한 공중목욕탕에서 1876년 홀로 사망했다. 사람들은 그가 오갈데 없는 길거리 노숙자로 알았다.

바르셀로나 재개발 프로젝트에 매달리게 되는 순간부터 그는 저주받은 사람으로 그의 인생 전부가 뒤바뀌게 되었다. 그는 주변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비판을 받았고 심지어 심학 경멸을 받아야만 했다. 그가 만약 건축가였다면 받지 않아도 될지 몰랐을 차별과 냉대를 기술자(엔지니어)라는 이유 하나로 힘들게 겪어야만 했다. 그의 프로젝트가 민주적이고 평등한 사회 구현을 위한 계획이었음에도, 기득권을 가진 부자들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냉대와 멸시와 모략을 받아야만 했다. 부자와 사업가와 부패한 정치인과 고위 관리와 건축가들이 그를 무차별 공격하기 시작했다.

프로젝트 막바지에 이르러 그는 더 이상 버틸 수 없었고, 끝내 그는 모두에게서 버려졌다. 오로지 한 사람 시의회의 자문위원이었던 경제학 교수 파비안 에스타페(Fabián Estapé)만이 끝까지 세르다와 세르다의 프로젝트를 지지하고 옹호했다. 그가 유일한 후원자였다.

세르다는 도망치듯 바르셀로나를 떠났고 노숙자로 연명하다가 끝내 쓸쓸하게 타지에서 사망했다.

바르셀로나는 세계 최고의 여행지이자 스페인 최고의 경제도시로 성장했지만, 어디에서도...... 그 누구도 세르다를 기억해 주지 않았다.

파비안 교수의 후학들에 의해서 1970년에서야 그가 칸타브리아 주에서 사망했으며 유해가 그곳에 남아있다는 사실을 알아냈을 정도로 그는 잊혀진 사람이었다. 정부의 허가로 1971년에서야 세르다의 유해가 바르셀로나로 돌아와 몬주익 언덕을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에는 그의 이름(Ildefonso Cerdá Sunyer)만이 적혀 있을 뿐, 다른 묘비명은 따로 없다. 가만 그가 세운도시 바르셀로나를 닮은 ‘네모의 꿈’을 형상화 시킨 뚜껑이 무덤에 올려져 있을 뿐이다. 그의 정확한 이름은 일데폰소(Ildefonso)다. 우리가 그를 가리켜 부르는 이름인 세르다는 아버지에게서 따온 가문의 성씨(Cerdá)이고, 소니에르는 어머니의 성씨(Sunyer)에서 따 온 것이다.

세르다가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고, 또 세르다가 세운 현대적 대표도시인 바르셀로나에서 그에게 남아있는 것은 오로지 이 작은 무덤 뿐이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 보다도, 피카소 보다도 , 오히려 세루다에게 더 크고 더 많은 빚을 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혹, 다시 한 번 바르셀로나를 찾아가게 된다면 꼭 몬주익 언덕의 공동묘지를 찾아가 세루다의 무덤에 꽃 한 송이라도 바치고 싶다.

‘세르다는 건축가가 아니라서 더 빛나고 위대한 바르셀로나를 건설한 엔지니어였다.’

 

​바르셀로나는 무척이나 아름다운 도시다.

도시의 곳곳에 우리나라나 다른 여행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매우 독특한 형태의 건물을 자주 볼 수 있다. 그러다보니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이런 낯설지만 예쁘기도 한 건물을 대할 때마다 무조건 ‘가우디 건축’을 먼저 떠올리게 되는 해프닝이 아닌 해프닝을 자주 벌이게 된다. 바르셀로나의 건물들을 모두 가우디가 세운 것은 결코 아닌데도 말이다. 그의 건축이 나름 톡톡히 유명세를 치르고 있기 때문이지, 사실 그가 직접 만든 건물은 그리 많지 않은 것이 엄연한 사실일진데 말이다. 대표작으로 여겨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경우만 해도 140여년이나 공사를 벌였으면서도 아직 미완성으로 남아있는 형국에, 절반 정도인 74세에 사망한 가우디가 아무리 열심히 일만 했다 손 쳐도 40여년 남짓한 그의 건축가 삶에서 과연 몇 개의 건축물을 남길 수 있었겠는가를 좀 생각해 보아야 하지 않을까 싶다.

바르셀로나의 외곽지역에서 도시 중심의 카탈루냐 광장을 향해 걸어가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무엇인가 도시의 풍경이 다르게 느껴지고, 조금만 가만히 살펴보면 비로소 ‘네모의 도시 바르셀로나’가 시작되었음을 느낄 수가 있다. 그리고 그 사이사이에 가우디를 연상시키는 바르셀로나 특유의 아기자기하고 예쁜 건물들이 하나 둘 나타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이제 여행자의 발걸음이 바르셀로나 여행의 핫 플레이스 에이샴플레(Eixample) 지역에 들어섰음을 확신해도 좋겠다.

 

로마시대 이후로 도시로 급성장한 바르셀로나의 핵심지역은 당연히 고딕지구였다. 신전(훗날 대성당)과 관공서와 통치자의 궁전이 그곳에 건설되었다. 귀족과 기사와 성직자와 부자들이 그곳에 터전을 닦아 자신들이 차지하고 들어앉았다. 그 외곽으로 철옹성 같은 성벽을 쌓고 요새화 시켰다. 인근의 많은 사람들이 이 성벽(고딕지구) 안팎을 드나들며 살아왔던 것이다. 중세를 거쳐 근현대에 들어서 산업화가 이루어지고 더욱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대도시로 몰려들게 되자 바르셀로나 역시 인구 포용의 한계를 훌쩍 뛰어넘고 말았다. 산업발전은 빈부의 격차를 벌이고 빈민가를 양산시켰다. 몰려든 사람들로 바르셀로나 성벽은 허물어져 버렸고, 도시를 가로지르던 하천은 오물로 넘쳐나고 축대가 무너져 내려 함몰되기 시작했다. 주택은 턱없이 부족했고 열악한 도로망은 늘 정체되기 일쑤였다.

바르셀로나는 역사적 도시의 소멸이냐 재개발이냐를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어디에서부터 시작해 어디까지 갈 것인가에 대해서 아무도 나서서 설명조차 하지 못했다.

바로 그때, 40세의 한 젊은 토목 엔지니어가 나서서 몰락해 가는 바르셀로나에 놀라운 비 젼을 제시했다. 바로 ‘네모의 도시 바르셀로나 재개발 프로젝트’였으며, 그가 바로 일데폰스 세르다 소니에르(Ildefons Cerdà Sunyer)였다. 그는 나머지 인생 전부를 이 프로젝트에 걸었다. 정부의 허가를 받은 다음에 공권력까지 투입하며 강제 철거와 이주를 집행했다. 사회주의 추종자라는 비평을 받아야 했고, 부정 축재자로 몰리기도 했다. 공정이 지연되고 정부의 자금 지원이 원활하지 않게 되자 세루다 본인이 가문에서 물려받은 재산을 끌어다 쏟아붓기 시작했고 결국 가족들까지 모두 파산하게 되었다. 종국에 그 자신까지도 거의 길거리 부랑자나 노숙자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다. 끝내 그는 ‘네모의 꿈’이 피어나는 것을 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그의 업적을 비슷한 시기에 ‘파리 재개발 프로젝트(renovation of Paris)’를 수행한 오스만 백작(Georges-Eugène Haussmann)에 비교하곤 하는데....... 오스만 백작의 경우는 ‘파리 재개발’의 성공을 보았고, 엄청난 부와 명예를 얻어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말년을 살았던 것으로 유명한데 반해, 세르다의 경우는 가문의 전 재산까지 모조리 끌어다가 투자하고도 모자라 길거리 노숙자의 신세로 전락해 끝내 프로젝트의 완공도 보지 못하고 비참하게 사망하고 말았다.

이제 걸어가면서 무언가 달라지는 도시의 풍경을 느끼기 시작했다면...... 이제부턴, 세르다가 자신의 모든 것을 받쳐가면서 열정적으로 헌신했던 ‘네모의 꿈’이 처음 그려졌던 에이샴플레에 들어섰다는 뜻이다.

바르셀로나에게 세르다가 전부는 결코 아니다. 가우디도 있고, 피카소도 있고, 달리도 있고, 미로도 있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기억해주면 좋겠다. 세르다에겐 바르셀로나가 전부였다는 사실을 말이다.

 

그렇게 에이샴플레의 거리를 걷다보면 처음으로 만나게 되는 아름다운 건물의 벽면에 카사 테라다스(Casa Terradas)라는 안내판이 걸려있다. 부제로 하우스 오브 레 퐁크스(House of Les Punxes)라고 적혀있는데, 이는 ‘테라다스 가문의 주택’이라는 뜻이며, 달리는 그냥 쉽게 ‘핑크색 집’이라는 부연 설명인 것이다.

아름다우면서도 웅장하기 까지 한 건물을 보는 사람에 따라서는 바르셀로나를 상징하는 가장 이색적인 건물로 꼽는 사람이 있을 정도다. 카탈루냐 모더니즘 건축의 백미이자 그 변화의 흐름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열쇠에 해당하는 건물이라고 까지 한다.

원뿔형 고깔모자 같은 여섯 개의 탑을 덮은 뾰족 지붕이 매력적인 중세 시대의 고성을 연상시키는 건물은 당시 상황에서는 다양한 기술 혁신이 반영된 바르셀로나 건축역사의 중요한 자료로서 현재 ‘역사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모더니스트 건축가 푸이그 파달카흐(Josep Puig i Cadafalch)의 작품이다. 가우디의 작품이 아니다.

‘이것도 가우디의 작품이야?’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아주 많이 있다고 한다.

푸이그 역시 가우디와 동시대에 함께 활동한 바르셀로나가 자랑하는 훌륭한 건축가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건축업계를 벗어나면 가우디에 비견될 수 없을 만큼의 지명도가 낮은 무명에 가까운 건축가 대접을 받고 있다. 아는 사람은 아는데..... 대부분의 세상 여행자들은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하면 무조건 가우디’만을 연호하는 현실에 대해서 푸이그로서는 당연히 서운하고 억울하지 않을까?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작품으로 유명한 몇 개의 건물을 제외하고 지나가다 마주칠 때마다 일일이 하나하나 부연 설명을 하기도 그렇고...... 또 안하자니 또 당연한 듯 가우디로 인식되는 것도 그렇고....... 일단은 여기 ‘테라다스 주택(Casa Terradas)’은 가우디 작품이 아니라 푸이그 작품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 확인시켜 드리면서 가던 길을 마저 가기로 해야 하겠다.

그렇게 한참을 걷다보면 비로서 가우디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건물을 마주하게 된다.

벌써 그 앞에 많은 인파가 몰려있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거기는 가우디가 있다.

카사 밀라(Casa Mila). 그리니까 지금 ‘밀라네 집’에 마실을 온 것이다.

‘그나저나 재들은 다 누구지?’

‘아니 페드로 재가 또 여기서 왜 나와? 여보야. 저기 페드로 있다?’


​페드로가 열심히 ‘밀라네 집(Casa Mila)’을 가우디 투어를 신청한 사람들에게 설명하고 있다. 진지하면서도 열정적인 그의 강연을 우리는 이미 어제 고딕지구에서 들었던 적이 있었다. 투어 참가자는 물론 아니었지만 말이다. 사실은 페드로가 그의 이름도 아니다. 우리는 그의 진짜 이름도 알지 못한다. 그냥 내가 지나는 말로 붙여준 임시 별명 정도였을 뿐이다.

어제 고딕지구(Barri Gotic)를 돌아다니던 중 왕의 광장(Placa del Rei)의 계단에 앉아서 멍 때리기를 하고 있을 때였다. 줄을 지어 도심투어를 하는 여행객 무리가 몰려들어왔다가는 나가고, 또 몰려왔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그중에 빨간 고깔모자를 쓴 젊은 남자 가이드가 매우 인상적이었다.

‘저 사람 좀 봐. 딱 보기에 전형적인 스페인 매력남이네. 잘 생겼다.’하는 것이 아닌가? 아니 서방이 버젓이 옆에 버티고 서있는데..... 혹 ‘아들이 잘 생겼다’고 하면 얼떨결에 대충 넘어가 주겠지만....... 첨보는 외국 남자를 잘 생겼다고? 라고라고라고라고라?

‘돈키호테의 시종 산초 같이 생겼구먼. 페르디난도 산초니까 페드라고 불러주지 뭐.’해서 페드로라 별명을 붙여주었고, 영어와 스페인어를 섞어서 가이드 하는 내용을 계단에 앉아서 귀동냥을 통해 이 계단 위에 이사벨 여왕과 페르디난도 왕이 서있고, 계단의 아래에 콜럼버스가 무릎을 꿇고서 신대륙 항로 개척과 탐험을 보고 드렸다는 내용의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가이드 비용 안내고 정보를 훔친 것이 절대 아니다. 내가 먼저 계단을 차지하고 앉았는데 느닷없이 몰려와서 그런 내용을 떠들어대기에 어쩔 수 없이 듣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우연하게 하루 지나서 또 카사 밀라 건너편에서 다시 만났을 뿐이다. 마눌님 표정을 보니 환하게 웃는 것이 디지게 좋아 죽겠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헐!!!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배신감은 또 뭐지?

하지만 어쩌겠어? 늘 있는 일인걸. 바르셀로나에서 잘생긴 녀석이 페드로 하나뿐이면 내가 말도 안하겠다. 또 있어. 또. 하나도 아니고 둘이나 더 있어. 다니다 보면 또 다 만나게 될 거야. 아마도. 차차 다 일러주기로 하겠다. 암!!!!

카사 밀라는 아마 모르긴 몰라도 파밀리아 대성당 다음으로 온갖 바르셀로나의 홍보물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건축물로 유명하다. 울룩불룩한 건물의 외형으로 인하여 돌을 캐는 채석장 이라는 뜻을 가진 ‘라 페드레라(La Pedrera)’라고 불리기도 한다. 가우디의 건축에 매료된 부유한 사업가 밀라의 요청으로 중산층을 대상으로 하는 6층 높이의 빌라(아파트)로 가우디가 건축하였다. 카탈루냐 지방의 성지인 몬세라트 산의 기암괴석에서 염감을 받아 그렇게 지었단다. 처음 건축 당시에는 엄청난 혹평 속에 시련을 겪기도 했다는 가우디 건축에 대한 이야기들은 이미 4년 전 여행에서 나름 어느 정도 충분하다 할 만큼 살펴 본 적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기에서는 세세한 건축물 하나하나에 대한 이야기들은 과감하게 생략하고 넘어가기로 하겠다.

그냥 에이 샴플레 지역을 걸어서 지나가다 보니 건너편으로 카사 밀라가 여전히 건재하다고 뽐을 내며 우리에게 손을 흔들어주었을 뿐이다.

챠밍여사가 루브르 박물관에서 <모나리자> 앞을 힐끗 눈길 한 번만 주고 무덤덤하게 지나쳐 버렸듯이, 오늘 우리는 카사 밀라 앞을 꼭 그런 시선과 발걸음으로 무덤덤하게 지나치고 있었다.

‘카사 밀라 보다 우리에겐 바르셀로나의 가로수 길과 미로같은 고딕지구의 골목길이 더 소중한 오늘이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리 스타일이지. 이게 우리 방식의 여행이여!’

 

그런데 말이다.

카사 밀라를 지나면 머지않아 어김없이 곧 다시 나타나는게 무엇이지? 바르셀로나를 다녀 본 사람은 안다.

Suites Avenue apartments . 프리츠커 건축상을 수상한 현대 건축의 미래로 추앙받는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Toyo Ito)의 작품이다.

가우디(Antoni Gaudí i Cornet)를 지나쳤다고 생각했는데 또 가우디가 나타났다. 이번엔 '카사 바트요(Casa Batllo)'다. 어김없이 이곳에도 가우디 투어를 하고있는 수많은 여행자들이 모여있고, 안으로 들어가려는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다.

지중해를 테마로 하여 푸른 색조의 유리와 타일 모자이크가 무척 인상적으로, 멀리서 바라다 보면 '지중해의 물결처럼 흘러가는 집'이라고들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는 가우디만의 독창성이 돋보이는 훌륭한 작품이라고 해주어야만 할 것같다. 아니 해주고 싶다.

'어디, 가우디를 마주치지 않아도 되는 바르셀로나 투어는 없을까?'

​카사 밀라를 건너편에서 바라보던 횡당보도의 가로등과 보도 불럭까지도 모두 가우디의 작품이다. 가르시아 거리 전체가 그런 것으로 보인다.

헐!!! 정말로 ‘바르셀로나는 가우디가 먹여 살린다’가 아니라 ‘가우디가 유명해 지니까 바르셀로나를 온통 가우디로 도배해 버린 꼴’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다. (가우디) 이름만 붙이면 관광객들이 눈에 불을 켜고 쫓아오고, 상속인이 없던 가우디였으니 저작권료 지불 없이 고스란히 바르셀로나의 부수입으로 골인해 버릴 테니까 말이다.

새삼 파리여행 중에 실감했던 에밀 졸라의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에펠탑이 꼴도 보기 싫어서 파리에서 에펠탑이 없는 장소를 찾았더니 지하도 아니면 에펠탑에 올라가니 안 보이더라’는 이야기가 말이다. ‘가우디 없는 아름다운 네모의 도시 바르셀로나를 오로지 보고 싶으면 어디를 가야하지?’

돌아서서 길을 재촉하다 독특한 건물이 있어서 잠시 멈추고 카메라 셔터를 눌러댄다.

온통 가우디를 비롯한 모더니즘 건축가들로 빼곡한 여기 이 가르시아 거리에 이렇게 독창적인 실험 정신으로 가득한 초현대적 건축물이 버젓이 서있지 않은가? 4년 전에는 미처 발견하지 못하고 그냥 지나쳤었던 듯싶다.

나는 건물이 특이해서 카메라를 들이댔을 뿐인데, 챠밍여사는 배경으로 예뻐 보여서 사진 찍어주려고 하는 것으로 알았는지 잽싸게 쇼 윈도우 앞 쇠기둥 임시 벤치에 날름 앉아버린다. 어쩌겠어? 찍어 달라고 하시면 찍어드려야지.

이 건물의 이름은 스위트 애비뉴(Suites Avenue apartments) 라는 주상복합 아파트 건물이다.

펜디(FENDI).

에비뉴 아파트먼트 1층에 입점해 있는 펜디는 우리에게는 좀 낯선 브랜드명으로 느껴지지만, 꽤나 유명한 이탈리아 하이엔드 명품 패션 브랜드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현대에 이르러서는 프랑스 LVMH 그룹이 인수해 운영하는 이제는 프랑스 회사 소속이지만 말이다.

건너편에 보이는 가우디의 (카사 밀라)에서 영감을 받아 현재적으로 재해석 했다고 건축가는 설계의 배경을 설명했다. 흡사 이 건물은 두 개의 파사드를 겹쳐서 만든 아주 독특한 구조로 되어 있다. 건물 전체를 유리로 뒤덮는 1차 파사드가 있고, 여기에 2층이 시작되는 부분에서부터 울룩불룩한 강철 파사드가 태양의 위치와 대기의 조건에 따라 빛을 받아들이고 여러 가지 색상으로 다시 빛을 발산하는 유기적인 변화를 연출해 내고 있다. 모더니즘으로만 가득한 이 거리에 이런 초현실주의적 건축물이라니.......

이 독특한 주상복합 아파트는 일본 건축가 이토 도요((Toyo Ito)가 2009년에 완성했다. 이토 도요는 2013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일컬어지는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바르셀로나로 오기 직전의 여행지 몽펠리에에서 만났던, 경이롭기까지 하던‘하얀 나무((La Tour l’Arbre Blanc)’를 설계한 후지모토 소우 (Fujimoto Sou, 藤本壮介)의 17층짜리 하얀 건물이 새삼스레 떠오른다. 소우 또한 일본 건축가였고, 그 역시 프리츠커 상을 수상했다.

지구상의 모든 건축가의 꿈은 죽기 전에 프리츠커 상을 받아보는 것이라고들 한다. 아니 수상 후보에라도 이름을 올려보고 싶다고 한다. 건축가들에게는 노벨상에 버금가는 최고의 영예이기 때문이다.

2024년에 프리츠커 상을 수상한 건축가는 야마모토 린켄이다. 그 역시 일본 건축가로 일본은 이제 9명이라는 프리츠커 상을 가장 많이 수상한 국가가 되었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아직 대한민국에서는 수상자가 없다.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혹은 능력 있는 건축가가 많이 있다. 거기에다 대한민국의 건설 능력은 세계 최상위급이다. 다만 설계 능력 면에서는...... 프리츠커 상 수상자가 ‘0 명’인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왜 그럴까? 무엇이 부족한가? 아주 오래전부터 나는 끊임없이 그것이 궁금했다. 왜? 왜? 왜? 도대체 왜?

일본은 건축학도가 책상에 앉아서 스승으로부터 건축에 대해 배우며 입문하는 순간부터 이미‘건축가는 국가의 미래를 설계하는 싱크탱크다. 자부심과 책임감을 가져야 한다’고 가르친다고 한다. 대학마다 능력과 소신을 가진 교수진이 재능 있는 건축 학도를 발굴하고 전통에 따른 도제식으로 양성하며, 국가와 사회가 그들의 잠재적 창의력을 밀어주고 끌어주는 분위기 속에서 성장하도록 만들어준다고 한다. 그런 속에서 성숙하고 완성된 장인 내지는 마이스터로서의 성공한 건축가가 탄생하고 이들이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게 되는 것이다.

결코 이에 못지않은 능력과 자질을 충분히 갖추고 있는 것이 한국의 건축가라고 그들은 치켜세운다. 한국 건축가의 뛰어난 역량으로 아직 프리츠커 상을 수상하지 못하는 현실이 오히려 놀라울 뿐이라고들 말할 정도이다. 그리고 거기에 아주 뼈아픈 지적을 덧붙인다.

‘한국 건축가들의 개인 역량은 누구보다 뛰어나지만, 공동의 프로젝트를 실현함에 있어서의 헌신적 참여도나, 공동의 작업을 통해 선의의 경쟁을 하고 서로에게 긍정적인 영향과 창의성을 습득하고 개발하는 분야에서 많이 취약하다. 하나같이 모두가 각자도생하는 분위기가 강하다. 그들에게 교육과정은 단순하게 하나의 자격증 취득을 위한 방편으로 여겨지는 것 같다'고 상당히 고통스러울 정도의 뼈아픈 지적을 했다.

한국에선 건축이라는 분야가 대부분 아파트 위주로 돌아가는 까닭에 건물의 완성도·예술성보다는 실용성·효율성에다가 저비용으로 만들어 어떻게 하면 높은 수익성을 창출해 낼 것인지를 제일 먼저 따진다고 했다. 예술적 건축가가 아니라 단순 반복적인 건축 기능인을 양성해 내고 있는 것이라는 지적도 뒤따랐다.

심지어 ‘공모전이라는 방식조차도 학연. 지연. 혈연 등의 각종 이해관계가 우선으로 거의 유명무실하며, 공모전을 통한 당선작조차도 발주·시공 과정에서 공기와 비용 등을 문제로 수많은 입김이 들어가 처음과 완전히 다른 건물이 되는 경우가 거의 일상이 되다시피 흔하다. 그것이 대한민국 건축계의 엄연한 현주소다.’라는 냉정한 비판이 우리나라 건축가들 입에서도 툭하면 흘러나오고 있는 실정이 아닌가?

​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고궁이나 박물관 투어’ 못지않게 ‘건축물 투어’가 여러 곳에서 성황리에 벌어지고 있다. 제주도가 아마 대표적이지 않을까 싶다.

이런 프로그램들이 정말로 좀 더 내실 있게 진행되어지고, 건축에 대한 국민들의 정서와 소양의 변화와 발전이 토양이 되어서 좀 더 예술적이고 창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건물들이 우리 주변과 일상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다. 프리츠커 수상이야 자연스레 따라오게 되거나, 설혹 아니라도 우리나라 건축과 생활환경이 모든 한국인들에게 지극히 만족스럽고 행복하게 설계되고 만들어진다면...... 프리츠커 수상자가 단 한 명도 없는 전혀 뜻밖의 아주 이색적인 살기 좋은 나라면 또 어떻겠는가? 나라 전체가 초가집이라 해도 나는 문제될 것이 하나도 없어 보인다. 우리 모두가 좋다고만 한다면야........

​ '아니, 이건 또 뭐지?'

가우디의 장난감을 연상시키는 건물과는 완전 딴판인 아름답고 모던한 건물이 같은 불럭에 나란히 서있지 않은가?

그제서야 문득 생각이 떠오르는게 있었다. 가우디의 스승인 루이스 도메니크 몬타네(Lluís Domènech i Montaner)가 완공한 건물이 카사 바트요와 같은 불럭에 있다는 사실을 지난 여행이 끝나고 알았던 것이다. 당시에도 이 아름다운 건물이 인상적이라고는 생각했으나, 사방에 이색적인 아름다운 건물들이 지천에 널려있는 바르셀로나이다 보니 당시에는 그저 그런 정도로만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도메니크 몬타네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에 등재된 산 파우 병원(Hospital de Sant Pau)과 카탈루냐 음악당(Palau de la Música Catalana)이 바로 그이 작품인 것이다. 도메니크 몬타네를 빼놓고는 바르셀로나의 건축을, 모더니즘 건축에 대해서 논할 수가 없는 것이다. 더해서 가우디의 건축에 대해 이야기 할 때도 결코 도메니크 몬타나를 빼놓을 수 없는 것이다. 그가 가우디에게 건축에 대해서 가르쳤던 스승이기 때문이다.

바르셀로나를 여행하다보면 가르시아 거리에서 콘셀 정류장(Pg de Gràcia - Consell de Cent)을 만날 수 있다. 현지의 관계자들 끼리는 그냥 ‘182번 정류장’이라고 통한다. 바르셀로나 시내버스 노선으로 22번. 24번. N4번. N6번 시내버스가 이곳에 정차한다. 어쨌거나 위의 번호 시내버스를 타고 가르시아 거리에서 내리면...... 정면으로 딱 이런 풍경이 펼쳐진다. 스페인 바르셀로나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다섯 사람의 작품이 한 시선 안에 가득 담겨져 온다.

하나만 덧붙이자면...... 가히 돈으로 환산하기 힘들 정도의 가치를 지닌 건물이 지금 셑트로 당신을 마중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결코 틀린 표현은 아닐 것이다.

만약에....... 만약에...... ‘하나만 골라 가져라’고 하면 어떤 것을 고를까요? 알아 맞혀 보세요. 나는 벌써 골랐지만...... 비밀!!!!


이제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고 있는 당신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트로이 왕국의 둘째 왕자인 파리스(Paris)가 되었고, 지금 당신의 손에는 빨간 사과가 하나 들려있다고 상상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신탁은 당연히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이다.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는 세 여신이 지금 당신 앞에 우아하고 섹시한 표정과 표즈로 당신의 선택을 기다리고 있다. 헤라 여신은 지상 최고의 왕국에서 초월적인 절대 권력을 약속하고, 아테나 여신은 끝없이 솟아오르는 지혜를 약속하고, 아프로디테는 지상 최고의 여인을 약속한다.

그리스 신화속에서 트로이 전쟁의 발단이 되는 ‘파리스의 심판(The Judgement of Paris)’이라고 잘 알려진 이 사건은 신들의 파티에 유일하게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Eris)가 벌인 음모에서 시작되었고, 파리스는 그 사과를 아프로디테에게 줌으로써 결국 트로이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에리스의 음모는 멋지게 성공했다. 파리스가 그 사과를 아프로디테가 아닌 다른 여신에게 주었다고 해도 어차피 불행한 결과는 어떻게든 뻔하게 생겨났을 것이다.

헌데 말이다. 만약에 파리스가 총명함을 넘어서 신들의 뒤통수를 칠만큼 영민하고도 맹랑하여...... 그 사과를 초대받지 못한 유일한 여신인 에리스를 지목하고 택배로 보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혹 그랬으면 여신들이 몰려가 에리스를 처단함으로써 이후로 모든 불화가 사라지지는 않았을까? 하지만..... 어쨌거나 파리스의 선택은 최하 낙제점이었던 것은 분명하다. ‘짜슥. 쪼잔하게스리.......’

방금 버스에서 사과를 손에 들고 가르시아 거리에 내린 파리스(여행자)에게 똑같은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아름다운 건물에게’라는 신탁이 내려진다면 과연 당신은 어떤 건물을 택할 것인가?

당장 눈앞에 놓인 것은 다섯의 건물이기에 부득이 예선전을 거쳐서 신화속의 세 여신처럼 내 주관적 판단에 의해서 ‘바르셀로나 모더니즘 건축을 대표하는 3총사’를 먼저 추려놓았다. 건물의 맨 왼쪽에 해당하는 루이스 도메니코 몬타네 작품인 <카사 레오모레라>가 아무래도 헤라여신에 가깝다고 생각되어 정했고, 오른쪽에서 두 번째인 요셉 푸이그 카타팔치의 작품 <카사 아마틀러>를 아테나 여신에 가깝다고 나는 생각되어 결정했으며, 맨 오른쪽의 안토니오 가우디의 작품 <카사 바트요>를 아프로디테 여신에 해당한다고 결정했다.

트로이 왕자 파리스의 선택은 우리가 이미 익히 잘 알고 있는 결정이자만, 과연 지금 당신의 선택은 어떨까?

혹시나가 역시나 였다고....... 틀림없이 거의 대부분의 여행자는 파리스와 똑같은 결정을 내리고 말았을 것이다. 어디까지나 개인의 가치관과 선택을 나는 최대한 존중하고 싶다.

하지만...... 언젠가 영화 <트로이>를 보고나서 꿈속에 파리스를 만나 나는 이런 충고를 해준 기억이 있다.

‘이 바보 같은 놈아! 가장 하지 말았어야 할 멍청한 선택을 한 거야. 시방 네가.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 쭉쭉빵빵? 그 쭉쭉빵빵이 측천무후를 닮았을 정도로 표독스럽고 악랄하거나, 쑥맥에다 미련 공탱이라면 어쩔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데리고 살면서 간수하기가 얼마나 힘든지 아니? 왜 훔쳐 먹는 사과가 더 맛있는지 아니? 가장 아름다운 여인은 근처에만 있으면 되는 거지, 꼭 내 여자일 필요는 없는 거야. 그래서 영웅이 생겨나고 교회 오빠가 생겨나고 기둥서방이 생겨나는 것이라고. 이 멍청아. 차라리 지혜를 택하던가? 여자에게 멋있게 보이는 지혜를 모두 가진다면, 그게 곧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여자가 다 네 것일 수 있다는 걸 왜 몰라? 쪼다. 최고의 선택은 헤라였던 거야. 이 바보야. 최고의 국가와 최고의 절대 권력에는 이 바보야...... 권력과. 부와. 명예와. 세상의 모든 예쁜 여자들이 모두 포함되거나 부록으로 자연스레 따라오는 거라고...... 병신. 세상에 예쁜 여자가 어디 하나뿐이디? 그걸 가려서 딱 하나만 골라 선택한다고? 븅신. 그냥 이쁜 축에만 들면 싸그리 몰아서 인 마이 포켓이 되는 게 헤라여신 약속인데......... 하이고. 븅신.’

거기다가 헤라여신의 약속 어음은 올림포스 은행이 지불보증을 서는 최고 담보가 아닌가 말이다. 제우스신도 함부로 어쩌지 못하는 헤라여신의 든든한 후원을 보장 받는다면, 어떤 신들도 가히 두려울 것이 없을 테니 말이다. 아프로디테 믿고 헬레나를 훔쳐갔다가 그 난리를 만나고 트로이까지 쫄딱 망하느니, 헤라여신에게 부탁해 하디스로 하여금 메넬라오스를 당장 지옥으로 데려가게 해달라고 부탁하고, 과부가 된 헬레네를 왕에게 진상하라고 했으면 아무 일도 없었을 것을....... ㅋㅋㅋㅋㅋ

그렇다면 이제 어느 것을 골라야 한다고????????

그런 연유로 해서 바르셀로나의 호사가들은 이 동네의 여기 이 블록을 ‘일라 데 라 디스코르디아(Illa de la Discòrdia )’라고 부른다.‘불화의 블록’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바르셀로나 모더니즘 건축의 최고 삼총사로 불리는 루이스 도메니코 몬타네(Lluís Domènech i Montaner). 요셉 푸이그 카타팔치(Josep Puig i Cadafalch). 안토니 가우디(Antoni Gaudí)가 함께 나란히 서있다.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조합이 바로 이곳에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거기에다 더하여 이들 삼총사에 버금가는 동시대에 함께 왕성하게 활동한 훌륭한 건축가 엔릭 시니에(Enric Sagnier)와 마르셀리아노 고퀼라트(Marceliano Coquillat )까지 한곳에 함께 나란히 서있다는 사실은 어떤 이유에서건 기적이라고 밖에 달리 표현할 방법이 없어 보인다. 건축 역사에서 이보다 더 위대하고 아름다운 조합이 또 있을까 싶다.

이런 명소를 ‘불화의 블록’이라 부르는 것은 좀....... ‘공존의 하모니’라고 부르면 모를까 말이다. (파리스의 불화의 블록)이 아니라 (피안재의 공존의 하모니)로 바꾸어 달라고 청원이라도 보내볼까?????

 

어떻게 이번 여행은 데모로 시작해 데모로 끝나는 것인가?

파리에서는 연금제도 개혁에 불만을 가진 시민들의 데모로 모든 교통수단이 마비되는 초유의 사태를 경험을 넘어서 절실하게 체감을 하는 일생일대의 드라마틱한 상황을 겪었다. 아마도 민주주의와 자유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는 지구상의 모든 국가들에서 당면했거나 곧 들이닥칠 공공의 문제가 아닐까 싶다. 유럽 대부분의 국가들은 이미 아주 심각한 상태이며, 우리 대한민국의 경우도 곧 3년 이내에 벌어질 IMF 사태를 초월하는 불가피한 초유의 사태(악재)라고 생각하고 있다. 파리의 시위는 지방으로 확산되어 나갔는데, 우리가 아슬아슬하게 마르세유 파업을 피해 몽펠리에로 겨우 달아나듯이 탈출한 기억이 생생하다.

니스에서는 이란 출신의 체스 선수에 대한 살해압박과 여권 신장을 위한 집회 시위가 열렸었다. 다행히 그 시점에서 해당 여성이 스페인에 귀화가 받아 들여 졌다는 소식이 있었다. 페루의 인권회복과 여권신장을 위한 집회도 목격했었다.

그러다가 여기, 마지막 여행지 바르셀로나에서 또 집회 시위 장면을 목격하게 된 것이다. 이번 시위의 주인공은 바로 견공(犬公) 이었다. 견공에 대한 집회 시위 소식은 주로 프랑스 발신 해외토픽이 주류였고, 그 시위에 대상국이 주로 대한민국이었던 이유로 사실 나는 견공에 대한 관심이나 표현은 지극히 꺼리는 사람이다. 견공에 대한 뉴스라는 것이, 먼저는 식용으로 사용하는데 대한 생명존중 차원에서의 이의제기였는데 늘 한국 사람들이 그 뒤에 따라붙는 다는 것이 문제였고, 다음으로 영국에서 고위층들이 견공을 이용해 여우사냥을 즐기는 아주 특별한 취미 활동에 대한 비판이었고, 반대로 애완견으로 사람을 대하듯 기르다가 마음이 변해서 그냥 길거리에 내다버리는 유기견 때문에 발생하는 사회적 문제 등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지금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지는 집회 시위도 그런 이유 중의 하나 때문에 벌어지고 있다.

그런데 이 광경을 보노라니 참 난감한 생각이 든다.

시위라 그러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데모는 전혀 아닌 것 같고.

이거야 원. 어디 공원에서 견공들 데리고 축제라도 벌이다가 그냥 심심해서 가두행진을 하며 집으로 돌아가는 풍경이 아닌가?

앞뒤로 순경차가 있기는 한데..... 요건 그냥 시위 군중들이 도로를 무단으로 점령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잠깐 이동하면서 차지하는 최소한의 공간을 지정해 주기 위한 표지판처럼 보여 지니 말이다. 중간 중간 교차로에 오토바이 경찰들이 내려서 서 있는데 그들도 구경꾼처럼 자기들끼리 담소를 나누고 웃기만 하고 있다. 시위에 참여중인 어린 꼬마들과 서로 손을 흔들어주고 있으니..... 이 양반들 지금 여기서 뭐하는 거지? 저것도 근무인가?

대한민국에도 저런 시위가 있나? 저건 시위가 아니라 홍보 행진이라 해야 하겠다.

80년대 학생 시위랑 2.000년대 노동 시위를 직접 체험한 세대에게 저건 참으로 신기한 집회 시위이자 가두 행진이 아닐 수 없다. 참 신기하다.

지금 대한민국에는 오로지 하나뿐인 정치적 시위와 정치 데모 밖에 없지 않은가? 노동 시위도 완전 정치데모가 되어 버렸고, 학생 시위도 오로지 정치데모가 되어 버렸다. 모든 집회와 시위에 정치 브로커들이 연루되었고, 정치 시위와 데모는 한 마디로 더럽고 비열해졌다는 뜻이 된다. 그런 이유로 브로커들의 장난질에 질려서 결국 시위 현장을 떠났고 정치에 무관심해 졌다. 시위 꾼. 데모 꾼 정치꾼. 금배지 꾼. 노동쟁의 꾼. 의사 꾼. 변호사 꾼. 종교인 꾼. 교수 꾼. 이런 부류들에서 꾼(브로커 기질)은 떼어서 그냥 장사 꾼에게나 돌려주고, 도박 꾼. 사기 꾼은 붙잡아 가두고, 본연의 이름에 걸맞는 직업인으로 돌아 들 서시면 대한민국이 한층 아름답고 긍정적인 세상이 되지 않겠는가?

세상에나....... 시위나 데모도 이렇게 유쾌하고 행복할 수 있구나??????

참여하는 데모대나 시위대도 즐겁고 보는 사람들도 즐겁고 말이다. 헐!!!!

 

 

이번 이야기도 이쯤에서 지면 관계로(사진 게제 수량 제한) 접고, 나누어서 다음 이야기에서 다시 ‘다른 바르셀로나 이야기’로 이어가야만 할 것 같다.

그렇게, 그런 생각들을 하면서 바르셀로나 고딕지구를 걷다가 보니 문득 동요 같은 한 노래가 생각이 난다. 대한민국 영토 안에선 각진 구형 그랜저를 만나면 그때마다 자동으로 떠올라서 혼자 멋쩍게 웃고는 하던 바로 그 노래다. 이 동네 이름이 바로 고딕이 아닌가? 고딕 하면 뾰족한 높이도 높이지만 어쨌거나 깍두기하면 떠오르는 바로 그 '각'이 바로 고딕이 아니겠는가?

바르셀로나는 네모의 도시다.

세모는 너무 심하게 모가 나있고, 네모는 그래도 안정적이지 않은가? 오각형 부터는 둥근 원을 닮아가려는 짝퉁(?)은 아닐까?

 

 

​네모난 침대에서 일어나 눈을 떠 보면

네모난 창문으로 보이는 똑같은 풍경

네모난 문을 열고 네모난 테이블에 앉아

네모난 조간신문 본 뒤

네모난 책가방에 네모난 책들을 넣고

네모난 버스를 타고 네모난 건물 지나

네모난 학교에 들어서면 또 네모난 교실

네모난 칠판과 책상들

네모난 오디오 네모난 컴퓨터 TV

네모난 달력에 그려진 똑같은 하루를

의식도 못 한 채로 그냥 숨만 쉬고 있는걸

주위를 둘러 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난 아버지의 지갑엔 네모난 지폐

네모난 팜플렛에 그려진 네모난 학원

네모난 마루에 걸려있는 네모난 액자와

네모난 명함의 이름들

네모난 스피커 위에 놓인 네모난 테잎

네모난 책장에 꽂혀 있는 네모난 사전

네모난 서랍 속에 쌓여 있는 네모난 편지

이젠 네모 같은 추억들

네모난 태극기 하늘 높이 펄럭이고

네모난 잡지에 그려진 이달의 운수는

희망 없는 나에게 그나마의 기쁨인가 봐

주위를 둘러보면 모두 네모난 것들뿐인데

우린 언제나 듣지 잘난 어른의 멋진 이 말

'세상은 둥글게 살아야 해'

지구본을 보면 우리 사는 지군 둥근데

부속품들은 왜 다 온통 네모난 건지 몰라

어쩌면 그건 네모의 꿈일지 몰라

 

 

'네모의 꿈(the dream of a square)'은 싱어송라이터 유영석이 1996년에 만들어 .W.H.I.T.E(화이트)의 앨범 (Dream Come True)에 수록된 노래다. 그후로 꾸준한 사랑과 인기를 얻어 수많은 다른 가수들에 의해 꾸준히 리메이크 되고 있는 명곡이라 할만하다.

--- 다음 이야기에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일요미사)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