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테(Sete)는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의 서쪽인 스페인 국경에 인접한 옥시타니아 (Occitania)주에 속하는 작은 항구도시다. 시간이 좀 지난 여행안내서나 과거 기록에서는 곧잘 랑그독 지방의 항구도시라고 알려져 있는데, 2016년 프랑스 행정구역 개편에 따르자면 랑그독-루시옹 (Languedoc-Roussillon)지역과 미디 피레네 (Midi-Pyrénées)지역을 합쳐서 옥시타니아(Occitania)주에 편입시켰고, 주도는 바로 몽펠리에다. 하지만 현지에서는 여전히 이 지역을 과거처럼 랑그독-루시옹 지역이라고 부른다. 그러니 굳이 틀린 표현은 아니라고 해야겠다. 역사 속에서 옥시타니아주를 찾아본다면 12세기 13 세기경에 봉건영주였던 툴루즈 백작이 통치하던 지역과 아주 흡사한데, 그 기원 또한 툴루즈 백작 가문의 휘장에 그려졌던 ‘옥시탄 십자가’ 형상에서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스페인 역사에서 마드리드를 중심으로 왕국을 다스리는 카를로스 스페인 왕국이 있는가하면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늘 대립과 마찰을 빚으며 독립을 추구하는 카탈루냐 왕국이 있었듯이, 프랑스 역시 파리를 중심으로 한 프랑크왕국의 부르봉 왕조가 있는가 하면 늘 거기에 맞서 저항하고 대응하던 서남부 산악지대의 툴루즈 백작이 지배하는 봉건왕국이 존재했던 것이다.
어쨌거나 프랑스 남부 지중해 연안을 여행한다면 굳이 새롭게 개편된 행정구역을 염두에 두지 않고서라도 얼마든지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며, 파리에서 남쪽 지중해 연안으로 내려오면 중앙에 프로방스 지방의 마르세유(Marseille)가 프랑스 제 2의 도시로 자리를 잡고 있고, 동쪽으로 이탈리아 방향에는 코트다쥐르 지방에 니스(Nice)가 있고, 서쪽 스페인 방향 랑그독 지방에는 바로 세테(Sete)가 위치해 있는 것이다.
현지인이나 프랑스 사람들은 세테를 가리켜 ‘랑그독 지방의 작은 베니스’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이는 좀 심한 과장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솔직히 베네치아에는 한참 못 미친다고 해야만 할 것 같다. 내 주관에 의해서 솔직하게 표현하자면 ‘우리나라 통영에다가 베네치아 물감을 좀 칠해서 항구도시의 규모를 조금만 더 키우면 아마도‘작은 베니스 세테’라 해도 되지 않을까 싶다. 통영과 베네치아의 중간 정도라고나 할까?
하지만, 프랑스의 지중해 항구도시답게 아름답고 깨끗하고 도시계획 정리가 썩 훌륭하리만치 잘 되어 있는 멋진 도시다. 곳곳에 프랑스 특유의 멜랑꼬리한 멋과 아름다움이 아로새겨져 있다고나 할까. 중세의 항구도시 역사에서 시작해 오늘날의 항구 재개발과 확장의 결과까지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세테는 기꺼이 여행자들이 찾아갈 만한 아름다운 지중해의 항구라고 추천해주고 싶다.
중세시대 7세기경에 세테에서 동쪽으로 가까운 인근에 이 지역에서 처음으로 어촌마을이 생겼다. 바다를 생활터전으로 삼고자하는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어 소도시가 형성되자 그 도시의 이름을 마겔로네(Maguelone)라 불렀다.
스페인 지역인 리베리아 반도를 점령하고 780년간 지배했던 이슬람 세력 후기 우마이야 왕조가 피레네 산맥을 넘어 유럽 본토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서로마제국 멸망 후 서유럽을 다스리던 프랑크 왕국의 재상 샤를 마르텔이 눈부신 활약으로 전쟁을 이끌어 마침내 이슬람의 침략을 막아냈다. 다시 리베리아 반도로 쫓겨간 이슬람은 훗날 이사벨 여왕이 주도하는 레콩키스타에 의해서 종국엔 아프리카로 쫓겨나게 된다. 이슬람을 쳐부순 샤를 마르텔은 서기 737년 이곳의 항구도시 마겔로네를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아프리카로 쫓겨난 이슬람의 잔존세력들이 지중해 바다를 누비며 해적질을 일삼으면서 호시탐탐 유럽 본토에 재침략을 위한 거점마련을 노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프랑크 왕국의 해군이 아직 약한 상황에서 드넓은 해안선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대부분의 해안 마을과 소도시 항구들을 완전히 파괴시켜 해적들이 차지해 이용할 수 없게 만들었던 것이다.
파괴된 마겔로네의 주민들이 내륙으로 옮겨와 돌무더기 산언덕을 중심으로 새롭게 모여살기 시작한 것이 바로 몽펠리에(montpellier)라는 도시의 시작이 된 것이다. 파괴된 미겔로네 항구에서 몽펠리에 도심까지는 약 10km에 이른다. 거주지는 옮겨왔어도 여전히 바다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은 매일 이 거리를 마차를 타고 오가면서 숨겨 두었던 배를 이용해 어업을 꾸려나갔다.
시간이 흘러 중세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을 무렵엔 프랑크 왕국의 군사력과 해군력이 눈부시게 성장하여 더 이상 해적들을 두려워하지 않는 세상이 도래했던 것이다. 바닷가 여기저기에 새롭게 항구도시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몽펠리에 인근의 사람들은 과거의 마겔로네 항구 보다 훨씬 입지조건이 좋은 장소를 찾아냈다. 하여 그곳에 본격적으로 새로운 항구도시를 건설하게 되었으니 그것이 바로 세테(Sete)였던 것이다.
세테는 과거에 마겔로네가 그랬던 것처럼 몽펠리에라는 도시와 함께 성장했던 것이다.
세테는 몽펠리에로 가는 바다의 관문이자 위성도시로 오랜 시간을 함께했다.
그랬으면서도 역사 속에서 몽펠리에에 속한 위성도시가 아니라, 세테라는 독집적인 항구도시의 이름을 제대로 각인 시키는 굵직굵직한 사건을 여럿 간직하게 되었다.
첫 째는 아무래도 (카타리파)를 꼽아야만 될 것 같다.
카타리파(Cathari)는 알비파라도 불렸으며,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로마에 의한 기독교의 탄압과 예루살렘의 완전 파괴를 피해 아타톨리아 평원 깊숙한 곳으로 도망쳐 숨어살던 초대교회의 한 교파라고 할 수 있다. 십자군 전쟁이라는 세기의 대립과 전쟁을 통해 세상에 다시 모습을 드러낸 카타리파의 일부가 배를 타고 지중해를 건너 처음 유럽에 상륙한 곳이 바로 세테였다. 세테에 도착한 카타리파는 당시에 세상을 쥐락펴락하고 있던, 종교제도를 확립해 강력한 절대권력으로 성장한 교황청(로마 가톨릭)을 거세게 비판하고 부정하기 시작했다. 예수께서 함께 지내면서 당부하시고 몸소 실천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에 따르자면, 로마 가톨릭이 만들어 낸 강력한 통치 지배 권력인 교황청과 교회가 빚어낸 타락과 부패와 폭정은 거짓이고 위선이며 사악한 짓이라고 공격하기를 서슴지 않았던 것이다. 위기를 느낀 교황청은 카타리파를 이단으로 낙인찍었다. 하지만 초대교회의 모습으로 더불어 사는 공동체를 추구하면서 아무런 종교적 강요를 하지 않고 나눔과 배려를 기반으로 하는 그들의 신앙생활은 프랑스 남부지역을 넘어 내륙으로 급속하게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심지어 교황청 인근인 이탈리아 중북부의 오르비에토에 카타리파 신자들이 모여서 공동체 생활을 하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던 것이다. 교황은 허겁지겁 카타리파를 제거하기 위한 알비 십자군을 결성해 7만의 군대를 파병시키기에 이르렀다. 알비 인근에 주로 모여 살던 무저항주의자들인 카타리파를 십자군이 급습하여 일거에 약 2만 오천 명의 신자들을 무차별 학살하는 만행을 벌였다. 카타리파와 그 어떤 연관이나 구실이 생기면 무조건 모조리 학살해 버렸다. 알비지역에 주둔지 막사까지 설치해 십자군을 그 후로 20 년간이나 상주시키며 카타리파를 뿌리 채 뽑아버리는 저주에 가까운 만행을 교황청(로마 가톨릭)이 저질렀던 것이다. 카르카손의 낡은 성채에 그날의 흑역사가 고스란히 담겨져 있다. 역사에 기록된 인류 최초의 집단학살이었다. 물론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예루살렘에 입성해서도 이와 비슷한 집단학살을 자행한 적이 있었다.
보다 못한 툴루즈 백작이 카타리파 잔존세력을 받아들여 숨겨주었다. 파리에 근거를 둔 프랑크 왕국의 정규군대와 랑그독 지방 툴루즈에 기반을 둔 봉건영주 사이에 세기의 내전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엔 교황의 지원을 받은 가톨릭 연합군대에게 툴루즈 왕국은 함락되고 말았다. 산속으로 도망쳐 깎아지른 벼랑 위에 바위 성을 쌓고 끝까지 저항하던 툴루즈 군대와 카타리파 생존자들도 모두 처형되고 말았다. 극소수의 카타리파가 살아남아 포위망을 뚫고 영국으로 도망쳤다고 한다. 수많은 성 유물을 가지고서 영국으로 도망친 이야기가 영화 <다빈치 코드>에 배경처럼 곳곳에 그려진다.
두 번째는 17세기에 여기 세테를 기점으로 17세기에 건설했던 미디운하(canal-du-midi)를 빼놓고는 세테라는 도시의 이야기가 성립될 수 없겠다. 하지만 미디운하 이야기는 지금의‘세테 여행기’곳곳에서 거듭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겠기에 일단은 이대로 넘겨두기로 해야겠다.
세 번째는 20세기 중반에 들어서 (이스라엘의 건국)과 연관된 사건이다.
로마에 의한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 민족에게 두 번째 디아스포라(유랑민족, 민족의 집단 이주)를 경험하게 만들었다. 바빌로니아에 멸망당해 민족이 강제로 끌려갔던‘바빌론 유수’를 다시 겪게 된 것이다. 이번에 온 세상으로 뿔뿔이 흩어지게 되었다. 가장 많이 유대인들이 달아난 곳이 러시아와 부근의 동유럽이었으며, 그중 폴란드로 가장 많이 유대인들이 몰려갔다. 이유는 그리스 정교회가 비교적 유대종교에 대해 우호적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으로 유대인이 많이 몰려간 곳이, 유대교에 탄압보다는 공존을 모색하던 이슬람의 배려에 따라 스페인 지역의 우마이야 왕조 치하에 유대인들이 많이 살았다. 하지만 이사벨 여왕은 레콩키스타 성공 이후에 종교재판소를 만들었고 로마 가톨릭이 아닌 다른 모든 종교를 이단으로 낙인찍고 배교 아니면 스페인을 떠나라고 칙령을 발표했다. 가톨릭이 아닌 이단은 무조건 종교재판에 회부하여 화형이나 참수형에 처했다. 유대인을 포함한 이슬람인과 개신교인과 정교회인들이 허겁지겁 스페인을 탈출했다. 스페인을 겨우 탈출해 처음 찾아든 도시가 바로 몽펠리에였던 것이다. 그들이 그곳에 대학을 만들었다. 상당수가 몽펠리에에 둥지를 틀었고, 학자와 예술가들이 이탈리아 피렌체로 몰려갔고, 장사꾼들이 폴랑드르(네덜란드. 벨기에) 지역으로 몰려갔다. 2차 세계대전과 맞물려 (이스라엘 건국) 사건이 등장하면서 세계도처에 흩어져 살던 유대인들이 예루살렘으로 너도나도 몰려가기 시작했다. 서유럽에 거주(몽펠리에)하던 유대인들이 모금을 통해 귀국선을 마련해서 예루살렘으로 향했던 첫 귀국선이 바로 이곳 세테 항구에서 출항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보자면....... 세테는 결코 한적하고 조용한 아주 작은 항구가 아니라, 역사 속에서 나름으로 제 몫을 톡톡히 해내 온 기념비적인 항구도시라고 해야만 하겠다.
이제 세테(Sete) 여행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에 앞서서 매우 아름다운 풍경 사진을 먼저 여러 장 선보이려 한다.
이 풍경사진 모두는 세테와 아주 연관이 깊은 사연이 내포되어 있다.
만약 내가 몽펠리에에서 (한 달 살기)를 하게 된다면 나는 이 아름다운 강변길 트래킹을 (성지 순례길) 대신 (대자연 순례길) 삼아서 꼭 한 번 완주해 보고 싶은 욕심이 있다. 그럴 경우 내가 걸어야 할 트래킹 코스의 길이는 약 240km가 된다.
혹여, 여러분은 이 물길이 무엇이라고 생각이 드시나요?
매년 약 30만 명의 여행자들이 이 코스를 트래킹으로 즐기고 있습니다.
이 물길의 이름과 용도를 아시는 분이 계실까요?
몽펠리에 여행의 마지막 날, 오늘은 인근의 작은 항구도시 세테(Sete)를 방문하기로 했다. ‘랑그독의 작은 베니스인 세테’라기 보다는 ‘미디운하의 출발지인 세테’를 가까이서 구영하고 싶어서였다. 이번 여행을 구체적으로 계획할 때까지 몽펠리에에 대해서도 전혀 알지 못했던 처지라서 세테에 대해 알았을 가능성은 더 전혀 없지만, 몽펠리에를 결정하고 나사 세테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 과정에서 지난 날 내가 대한민국 ‘MB 정권의 한반도 대운하 계획’라는 흑역사에 대해 관심을 넘어 분노를 느꼈던 시점에서 우연히 ‘프랑스 운하’에 대해서 깊은 관심을 가졌던 기억을 다시 떠올리게 되었다. 당시 솔직한 내 심정을 글로 다시 옮겨본다면, ‘개**들. 여기가 무슨 17세기 프랑스인 줄 알아? 병신들. 기차가 다니고 고속도로가 뚫려 컨테이너 차량들이 씽씽 날라 다니는 마당에 내륙의 수상운송이라고? 봇도랑을 정리해서 1차선 도로를 내는 것도 한심할 판에 4차선 고속 수상고속도로를 만든다고? 만고에 없을 역적 놈들. 치수를 하면 하늘이 절대군주로 인정해 준다니까, 이젠 치수를 넘어 한반도의 강수량까지 다스리겠다고? 그게 바로 역적놈들이 하는 짓이여, 역모.’라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욕설을 퍼부었었다.
‘이래봬도 내가 우리나라 수운(水運) 역사의 가장 핵심인 충주 태생이여. 역적 놈들아 너희들이 경흥창 가흥창을 알어? 남한강에 조운선과 소금배들이 오르내리던 수운의 역사를 너희가 알기나 해? 한강의 황포 돗배가 언제 왜 없어졌는지 알기나 해? 짜슥들. 까불고 있어. 내가 바로 충주 사람이여. 운하? 나한테 물어봤어야지?’
MB 정권이 태동하는 과정에서 ‘한반도 대운하 구상’을 처음 떠올린 사람은 누구였을까? 또 그 무리들 중에서 누군가가 여기 세테와 몽펠리에를 거쳐 툴루즈를 갔을 테고, 다시 물줄기를 따라 대서양까지 처음 답사한 관료는 도대체 누구였을까? 그들은 이곳에서 과연 무엇을 보았고 어떤 과거의 사료들을 수집해서 돌아갔던 것일까?
그게 과연 가능한 국책사업이고, 가슴에 손을 얹고 그것이 국가의 미래와 자손들을 위한 나름의 국익차원에서 다루어 볼 만 하다고 생각했던 것일까?
지금이라도 그 현장실습 팀에 나를 포함시켜 준다면 정말로 양심과 목숨을 내놓고 최선을 다할 자신과 용기가 나에겐 여전히 남아있다. 최종 결정 시점에서 나는 기꺼이 MB 정권의 정책에 결사반대했을 것이고, 두 팀 중에 하나는 반듯이 역사의 심판을 받아야 하고, 그 결과로 광화문 대로에서 능지처참형에 처해달라고 주장했을 것이다. 그것은 식견이나 가치관의 차이나 양심의 차원을 넘어 분명히 역사에 반하는 반역의 행위였기 때문이다.
그 반역에 과연 누가 어떤 처벌을 정당하게 받았는가?
그래서 이번 몽펠리에 여행의 마지막 여정인 세테 나들이에서는 가슴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그런 이야기들도 허심탄회하게 다시 꺼내보려고 한다.
어김없이 오늘도 새벽에 일찍 산책을 돌았다. 몽펠리에 도심의 아침 산책은 정말로 황홀할 정도로 상쾌하다. 이른 아침 남들 출근하는 시간대에 물청소를 하고 있는 코미디 광장의 노천 카페테라스에 앉아 마시는 모닝커피라면....... 이대로 시간이 멈추어도 좋은 정도다.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에 어김없이 눈이 부시고 샛노란 가시광선들이 쏟아져 내리기 시작한다. 그것이 몽펠리에 도심의 일출이자 아침 맞는 풍경이다. 출근하는 직장인들과 학생들이 종종걸음으로 트램 정류장으로 향한다. 그런가 하면 출근할 생각은 하지 않고 느긋한 나 같은 여행자처럼 카페에서 커피부터 즐기려는 사람들이 제법 많이 보인다. 어디 그뿐인가? 식전 댓바람부터 카페에서 아침을 외식으로 하는 사람들도 보인다. 대한민국의 흔한 아침풍경과는 사뭇 다르다.
날씨는 더없이 푸르고 쾌청하기만 한데 쌀쌀한 바람결이 코끝을 스쳐지나가는 폼이 오늘 기온만큼은 조금 쌀쌀 할 것만 같다.
그래서 숙소를 나서면서 챠밍여사에게 나들이 옷차림새는 좀 쌀쌀한 날씨에 맞추어 준비하라고 당부한다. 하긴, 당부해 보았자 바람막이 외에는 겨울옷이라고 변변하게 갖추어 온 것이 하나도 없으면서 말이다. 패딩 하나만 챙겨 왔어도....... ㅎㅎㅎㅎ
트램 길을 따라 300m만 도심을 걸어가면 도시공원(Square Planchon)을 지나 맞은편에 몽펠리에 기차역(Gare de Montpellier Saint-Roch)이 나타난다. 보행자 전용지역이라 시내버스나 택시나 승용차가 이곳에 들어오지는 못하지만, 바로 근처를 지나가기에 이곳이 모든 대중교통의 중심이자 몽펠리에 여행의 시작이나 종점이 되는 장소이다, 코미디 광장이 100m 정도도 안 떨어져 있다.
1층 전면에서 바라보는 역사는 처음 몽펠리에 기차역이 생기면서 대중교통으로 마차들이 즐비하게 늘어서서 손님을 기다리던 먼 과거의 모습이나 지금의 모습이나 거의 변한 것이 없다. 늘어섰던 마차행렬이 트램 정류장으로 바뀐 것을 빼고는 말이다.
과거에는 이곳 1층 대합실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면 매표소가 있고, 표를 구한 뒤 검표를 하고 위험한 철길을 건너뛰어 건너서 해당되는 게이트에 서서 기다렸다가 기차가 들어오면 타고 떠나면 되는 것이었다. 지금도 실제로 열차를 타고 내리는 것은 1층의 해당 게이트가 같으나, 이젠 이곳에서 철길을 건너다닐 수도 없고 매표소도 없다.
몽펠리에 도심 재개발 사업과 맞물려 현대식 쇼핑몰을 건설할 때, 쇼핑몰의 높이에 맞춰 연결시켜 2층에 새로운 출입문과 대합실과 매표소를 만들었던 것이다. 트램을 이용해 과거의 1층 나무문을 통해 들어오게 되면 계단을 통해 2층에 올라와 표를 사고 나서 다시 해당 게이트를 찾아 1층으로 계단을 내려가야만 한다. 쇼핑몰의 2층 대합실을 이용하게 되면, 현대식으로 새롭게 건축된 투명한 유리 건물의 대합실 유리 출입문으로 들어와 표를 구하고 계단을 통해 1층의 게이트로 내려가 기차를 이용하면 된다. 1층 대합실로 직접 들어가면 옛정취가 묻어나고, 쇼핑몰을 통해 2층의 출입문을 통해 대합실로 들어가면 초현대식 기차역을 만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는 세테에 갈 때는 1층 나무문을 통해 옛정취를 느껴보았고, 올 때는 2층 유리문을 통해 그대로 쇼핑몰로 향했다.
‘와!!!! 바다다. 바다야.’
다르다.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할 수는 없어도, 확 다가오는 바다의 느낌이 그동안 니스나 마르세유에서 보았던 바다와는 무언가가 확실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몰타와 시칠리아 메세나 해협에서 마주쳤던 바다 같은 느낌이랄까? 지중해 가운데서 벗어나 아무래도 대서양에 가까워졌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어딘가 더 성나있고 보다 더 검푸른 더 깊고 거칠어진 심해의 느낌이랄까? 아무튼 세테의 바다는 여태의 프랑스 바다와는 사뭇 다른 느낌이다.
세테 역에서 나와 광장이 끝나는 지점에서 마주친 바다의 느낌이었다. 역 끄트머리에 바다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실은 역을 포함한 세테 자체가 바다에 폭 파묻혀 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몽펠리에 역에서 도시근교 열차를 타고 15분 정도면 세테 역에 도착한다. 트램이 아니라 지방 열차였다는 점만 빼고 나면 세테는 그야말로 몽펠이에와 붙어있는 한 도시라고 해도 무방했을 것이다.
세테의 첫 느낌은 어딘가 탁 트인 마냥 열려있는 상큼한 항구도시라는 처음 느껴보는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낯선 느낌이 강했다.
녹슨 고철덩이 배들이 여기저거 놓여있고, 어디선가 짠내가 풍겨오고 어수선하거나 지저분한 그런 항구도시의 느낌이 전혀 들지 않는다. 마치 싱가포르라고 해도 좋을 만큼 깨끗하고 항구도시 구획정리 자체가 깔끔하게 잘 정비되어 있는, 이제 막 새롭게 생겨난 신참내기 도시 같은 느낌이 강하게 전해져 왔다. 하늘도 바다도 티끌하나 없는 짙은 코발트빛으로 가득하고, 그 아래로 바다 풍경을 배경으로 삼은 전형적인 프랑스식 도시가 형성되어 있다. 베네치아에는 이탈리아만의 어떤 전형적인 도시풍경이 있는 반면에, 세테에는 어딘지 모를 프랑스만의 도심 풍경이 조화를 이루며 아름답게 늘어서 있다.
그런가 하면 도시 자체가 너무나 고요하다. 오가는 행인의 모습을 이따금씩 부러 눈을 씻고 찾아봐야 할 정도로 도시 전체가 너무나 조용하다. 지나치는 현지인 숫자보다 마린에 정박해있는 요트의 숫자가 훨씬 많아 보일 정도이니 말이다.
어느 쪽으로 가야 세테를 걸어서 즐길 수 있는 명소가 많은지, 어느 카페를 가야 커피가 맛있는지, 어느 레스토랑에 가야 세테 최고의 맛있는 로컬 음식을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고 싶은데....... 물어 볼 사람이 나타나지 않는다. 차라리 아까 역에서 매표구 아저씨에게 물어보고 나설 것을 그랬나?
거기다가 춥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싸늘하고 세찬 바람이 불어온다. 몽펠리에의 날씨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이다.
서둘러 다리를 건너 도심으로 향했다.
교차로 마주보이는 양편에 비슷해 보이는 카페가 있다. ‘어느 곳으로 갈까요? 알아맞춰 보세요. 탁!’해보니 왼편 모서리 카페가 당첨된다.
무조건 들어가니 현지인 노인들이 난로 옆에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있다가 일제히 모든 시선을 돌려 우리를 빤히 쳐다본다.
‘봉주르! 날씨가 무척 춥네요. 뜨거운 커피가 마시고 싶어서요.’라고 영어로 말했는데...... 신통하게 모두 알아듣고는 환하게 웃으며 인사로 답해주고는 의자를 당기며 난로 옆으로 가까이 오라고 손짓을 한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 우리에게 돌아오는 그들의 대답이 모두 프랑스어였음에도 우리들 사이에 의사소통엔 아무런 장애도 생기지 않는다. 참 신기하다.
알롱제를 주문하면서 아메리칸 커피 스타일을 어쩌고 저쩌고 했더니만...... 큰 머그잔에 에스페레소 쬐끔에 아예 뜨거운 물을 작은 주전자 째로 가져다준다. 헐!!!!!!!
몸을 녹이면서 세테 길거리 여행을 검색하다보니...... 또 헐!!!! 이 레스토랑이 세테에서 맛있기로 소문난 유명한 레스토랑이었다. 또 또 또 헐!!!!!!
친절한 웨이터와 유쾌한 동네 어른들과의 만남을 뒤로하고 브라세리 바우반(Brasserie le Vauban) 레스토랑을 나와서 도심의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창립 120주년을 목전에 둔 시립극장(Théâtre Molière Sète National Stage and the Bassin de Thau)과 함께 공연 포스터들이 벽에 나붙어있다. 기회가 맞았다면 멋진 연극 무대공연을 볼 수도 있었으련만 하는 아쉬움을 품은 채 다시 걸음을 재촉한다. 날씨는 여전히 쌀쌀한편이다. 이어서 극장(Cinéma Le Palace)이 나오고, 건너편으로 비록 한겨울이라 낙엽이 모두 떨어지고 앙상하게 가지만 남은 플라타너스 나무숲이 매우 인상적인 위고 공원(Place Victor Hugo)이 꽤나 넓은 면적으로 조성되어 있다. 한여름에 숲이 우거지면 무척 멋지고 아름다운 공원이 될 것이 틀림없다.
그러고 보니 이곳은 세테의 중심 상권이라고는 할 수 없겠지만, 역 앞에 펼쳐진 마냥 드넓은 광장처럼 세테 주민들의 문화생활의 중심이 되는 지역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프랑스에서 문화생활의 성지라 할 수있는 몽펠리에를 비교적 지척에 두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작은 항구도시에 연극을 비롯한 무대공연을 할 수있는 전용극장을 가지고 실제 공연을 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세테 시민들의 생활수준과 문화수준을 충분히 가늠해 볼 수있는 척도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역을 통해 다른 도시로 나가거나, 아니면 세테의 중심이 되는 몽클레어 언덕의 주변으로 세워진 신도심으로 향하던지, 어디로 가고자 하던지 반드시 바다 위를 가로지르며 사방으로 설치된 다리를 반듯이 통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운하의 도시 암스텔담과 매우 흡사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암스텔담의 운하는 수심이 앝고 강폭이 매우 좁은 낭만적인 운하이지만, 이곳의 운하는 짙푸른 코발트빛 바다에 파도가 밀려와 방파제에 부딪쳐 하얗게 부서지는 거친 바다에 둘러쌓인 운하가 되겠지만 말이다. 그 바다를 가로막은 방파제들 위로 프랑스 특유의 은근한 푸른빛을 간직한 아름다운 건축물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항구 같기도 하고 휴양지 같기도 하고........ 영화 <시네마 천국>에 등장했던 체팔루 해변의 풍경을 연상케 한다. 프랑스풍으로 연출한 체팔루를 연상해 보면 딱 지금의 이런 모습일 것만 같다.
대단히 인상적인 남프랑스의 세테 모습을 가슴에 새겨넣기에 딱 좋은 그런 도심 산책길이 아닐 수 없다. 무척 아름답다.
세테(Sete)는 자연이 무상으로 제공해 주는 온갖 소중한 혜택을 고스란히 받아 누리고 있는 축복받은 도시가 틀림없다.
도시인지 섬인지...... 암튼, 어느 쪽을 향하던지 다리가 나오고 지나가는 도심은 온통 한산하고 조용하고 깨끗하다. 그리고 매우 추운 날이다. 사람 만나기가 어찌나 이따금씩인지 사람을 마주치면 무조건 ‘봉주르’하고 외쳐본다. 다리를 건너고 방파제 모퉁이를 돌아서고 나서 바다낚시를 하는 현지인을 만나볼 수 있었다. 그들도 이날은 매우 추운 모습이다. 소득은 전혀 없어 보인다. 왔던 발걸음을 돌려 조금 번잡해 보일 것같은 다리 건너 마을 중심지로 향하는데 방파제 어귀에서 로컬 장터를 만났다. 아마도 이날이 이곳의 장날인가 보다. 사람들이 제법 모여 있다. 어찌나 반갑던지 서둘러 그 장터 속으로 달려들고야 말았다.
이제야 세테에서 우리 방식의 제대로 된 여행을 만난 것처럼 매우 반가운 풍경이었다.
세테(Sete)여행을 계획하면서 나는 어떤 한 프랑스인을 만나보고 싶었다.
지난날 이스탄불을 여행하면서 미마르 시난(Mimar Sinan)을 만나고 싶어서 술레마니에 모스크를 샅샅이 뒤졌던 것처럼 말이다. 오스만투르크 역사상 최고의 재상이자 충신이었건 그가 오스만인이 아니라는 이유 하나로 그렇게 충성스럽게 모셨던 술탄의 사원 안에 묻히지 못하고 담장 밖 길모퉁이에 묻혔다는 사실에 정말로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게 했던 그 날을 지금도 결코 잊지 못하고 있다. 시난은 불가리아에서 서너 살의 어린이일 때 오스만 제국에 의해서 포로로 끌려간 출신은 엄연한 기독교 사람이었다. 애달픈 그의 인생은 한번 찾아보시길........
몽펠리에 역사지구의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나름 열심히 한 프랑스인을 찾았다. 그의 이름은 피에르 폴 리케 (Pierre-Paul Riquet)로 17세기 태양왕 루이 14세 치하에 살았던 공무원이다. 그를 만나보고 싶었는데...... 역사박물관에는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들릴 짬이 없었기에 결국 몽펠리에에서 폴 리케를 만나는 것은 포기해야 만 했다. ‘그렇다면 세테에 가면 있겠지. 그의 인생과 그가 세운 업적이 바로 이곳 세테에서 시작되었고, 끝을 맺었다고 할 수 있을 테니 말이다’라면서 세테 여행을 잔뜩 기대했었던 것이다. 그런데 세테 어디에도 폴 리케의 자취는 없었다. 폴 리케의 기념 동상과 업적을 찬양하는 조형물들이 베지에(Béziers)와 툴루즈(Toulouse)와 파리 루브르 박물관에 있는 것은 알고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아마도....... 폴 리케에 대한 안내나 설명은 툴루즈 여행이나 미디 운하 트래킹 여행상품에서나 가이드를 통해 들을 수 있을 것 같다.
프랑스 역사에서 피에르 폴 리케 (Pierre-Paul Riquet)를 이렇게 허접하게 취급해도 되는걸까? 나는 개인적으로 콜롬버스. 마젤란. 아문젠. 리빙스턴에 비교해도 전혀 손색이 없을 만큼 프랑스 역사가 폴 리케를 대단히 자랑스럽게 생각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몽펠리에가 해안가 어촌마을인 마겔로네(Maguelone)였다가 해적들의 무단 침입을 피해 약 10km 정도 내륙으로 옮겨서 새롭게 다시 생겨난 도시인 것처럼, 서쪽으로 그리 멀지 않은 인근의 해안가에 있던 어촌마을 아그드(Agde) 역시 해적들을 피해 내륙으로 옮겨 베지에(Béziers)라는 소도시로 탄생했다. 폴 리케는 바로 여기 베지에 출신이다. 그런 이유로 일찍부터 강과 바다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고, 당시 모든 선진문물이 모여들던 몽펠리에에서 많은 것을 보고 깨닫고 배웠다. 아버지는 지방의회 의원이자 변호사였으며 사업가였다. 아버지는 아들에게 변호사와 사업가가 되어주기를 바랐으나 아들은 주로 기계공학과 건축과 토목에 관심을 보였다. 지방 유지인 아버지의 만류로 폴 리케는 결국 공무원이 되었다. 폴 리케는 마르세유나 세테 항구를 통해 들어와 내륙의 강줄기를 따라 북쪽 내륙 깊숙이까지 오르내리는 소금을 비롯한 모든 왕국이 관여하는 품목에 대해 세금을 먹이고 징수하는 공무원이었다. 세금 징수의 주된 업무는 거의 소금에 대한 세금을 알차게 거둬들이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런 세금 징수원에게 반드시 필요한 계산의 꼼꼼함과 원칙준수가 그의 적성에 딱 들어 맞았던 것이다. 그는 초고속 승진을 거듭했다. 그의 업무 거점을 툴루즈로 옮겼다. 루이 14세 정부는 폴 리케의 사기도 진작시키고 그의 업무 성과도 높이고자 하여, 랑그독 지방의 세금 징수에 관한 전권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 국가가 제시한 일정한 금액의 세금만을 정기적으로 정부에 올려보내고, 나머지 잉여수입금 모두를 폴 리케의 영업이익으로 하는 랑그독 지역의 사업권 자체를 넘겨준 것이다. 그만큼 그동안 성실하게 징수해서 정부가 흡족할 정도로 성실납부를했다는 반증이겠다.
돈이 모이기 시작했다.
쏟아져 들어오다 못해 창고가 부족해 쌓여도 너무 쌓일 지경이 되었다.
사방에 워낙 지출이 많은 부르봉 왕조보다 어쩌면 폴 리케가 더 부자일지도 모를 지경이었다.
툴루즈 근처에 거대한 대궐같은 집을 짓고 파리의 귀족들 보다 훨씬 폼나고 풍족하게 살았는데...... 재미가 없어졌다. 속된 표현으로 돈 지랄(?)을 할 만큼은 해 보았는데..... 사는 것 같지가 않고 살 맛이 달아나 버렸다.
똑똑한 직원에게 사업을 맡기고 유랑을 떠났다.
폼나는 부자 여행이 아니라...... 작업복에 운동화 신고 배낭을 메고 노숙을 일삼으며 부러 험난한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그게 자신의 적성에 맞았다. 파리에 체류하면서 세상 돌아가는 구경도 하고 당시의 삶에 대한 이치도 깨달았고, 그의 관심은 유독 강줄기를 오르내리는 교역선들에 쏠렸다. 물길을 따라 소금배들이 오르내렸으므로 이제껏 숱하게 보아 온 것이 배들이 물길을 헤치며 오르내리는 장면이었는데, 이상하게도 그는 그런 물길과 배에 관심이 많았다. 그리고 파리의 세느강 상류에서 물길을 확장해 교역선들을 더 높고 먼 상류까지 올라가게 하기 위하여 운하를 확장한 현장에 유독 관심이 많았다. 그는 아예 그곳에 한동안 눌러앉아 살았다.
여행을 마치고 툴루즈로 돌아 온 리케는 그때부터 두문불출하며 들어앉아 연구에 매진하기 시작했다. 아예 미친 광인이 되다시피 변하게 된 것이다. 그의 연구실에 점차 수많은 학자와 엔지니어들이 드나들기 시작했다.
해가 두 번이나 바뀌고 나서 어느날 폴 리케가 자신의 궁전으로 귀중한 손님 한 분을 초대했다. 툴루즈의 대주교인 샤를 프랑수아 당뤼르 드 부르르몽(Charles Anglure de Bourlemont)이었다. 리케가 툴루즈로 옮겨올 때부터 지방 상류층과 파리 정부의 고위층과 연결시켜 주고 막후에서 크게 영향력을 행사해준 은인이었다. 리케 또한 주교를 위해 교회에 막대한 후원을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에 그리 홀딱 반해서 세상일을 모두 내쳐버렸단 말인가? 온갖 소문이 흉흉한 것은 아는가?’
‘사람이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아야지 그깟 소문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그건 또 그렇네만........ 자네가 그렇게 좋은 일을 혼자만 하는 것이라면 어디 나에게도 좀 알려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우리 사이가 그 정도가 안된단 말씀인가?’
‘어찌 그런 말씀을? 힘든 과정이야 제가 혼자 하면 될 것이고, 이제부터의 즐거운 여정을 주교님과 함께 나누어볼까 해서지요.’
‘그랬는가? 내가 성급했구만. 미안허이. 그래 내가 도와주어야 할 일이 어떤것인가?’
‘루브르에 들어갈 수 있게 사람을 소개시켜 주십시오.’
‘파리로 이사라도 가려는가? 갑자기 궁궐에는 왜?’
‘폐하를 만나 뵙고 운하 건설에 대해 설명을 드리고 정식으로 허가를 받고싶습니다.’
‘운하? 백 년 전에도 이백 년 전에도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운하 얘기를 꺼냈었지만 아무도 이루지 못했네. 만들지 못한 것이 아니라 아예 아무런 시작도 못 했다는 사실을 자네도 잘 알고 있지 않은가? 불가능한 일일세.’
‘저는 자신 있습니다. 폐하를 뵙고 직접 설명을 드리면 허락을 내려주실 것입니다.’
‘이보게. 지중해에서 대서양까지 물길을 연결한다는 것이 자네는 과연 가능하다고 생각하는가? 기껏 양쪽으로 얼마나 내륙 깊숙이까지 물길이 풍족하겠는가? 가운데 피레네산맥이 가로막고 있는 것일세.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인데 산정상에 배를 띄울만한 물이 어디에 있단 말인가? 메메트 술탄이 바닥에 통나무를 깔고 배를 끌어서 언덕을 넘었다고 하더니만 자네도 배를 끌어서 넘기려는가? 매번?’
‘해결할 수 있습니다. 물길을 내고 순차적으로 물을 가두었다 흘려보내는 장치를 갖추고, 또 그런 지역을 통과할 수 있게끔 지금까지의 배와는 다르게 새로운 용도의 배를 만들면 충분히 피레네를 넘어 대서양을 지나 파리까지 배를 보낼 수 있습니다.’
‘이사람 리케. 나야 그간 자네와 인연이 남달렀기에 자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겠지만, 물이 없는 산등성이로 배를 올려보낸다는 이야기에 누가 귀를 기울이겠는가? 텅 빈 나무배도 아니고 소금이나 짐을 가득 실은 배를 산을 넘기겠다고 하면 누가 믿겠는가?’
‘폐하께서 지금 베르사이유 궁전 공사에 온 국력을 쏟아붓고 계신 것을 직접 보았습니다. 상당수의 자재를 이탈리아에서 직접 가져온다고 들었습니다. 특히 베네치아산 유리와 거울로 궁전 공사의 마무리 하실 계획이라 들었습니다. 하지만 정작 불가능한 것은 베네치아에서 파리까지 유리를 가져오는 것이 더 불가능할 것입니다. 베네치아에서 유리와 거울을 배에 실었다고 쳐도, 아드리아해를 거쳐 메시나 해협을 건너면서 깊은 바다로 나오게 되면 손상될 수 있으며, 마르세유에 도착했다손 치더라고...... 어쩌겠습니까? 스페인이 바다를 장악하고 뱃길을 가로막고 있을 텐데요. 전쟁을 치뤄 돌파를 한다면 유리와 거울이 화포 공격에 안전하겠습니까? 리베리아 반도를 돌아오는데 걸리는 시간은요? 좋습니다. 어쩔 수 없이 마르세유에서 육로를 택했다고 치겠습니다. 마차에 유리를 얼마나 실을 수 있겠습니까? 험준한 여정에 과연 유리가 온전하겠습니까? 폐하께서 바라시는 사람 키보다 더 크고 넓은 크기의 유리를 과연 마차에 싣고 이동할 수 있겠습니까? 몇 년이 걸려도 궁전의 벽면 하나 채우기 힘들 것입니다. 베네치아 유리가 필요하다면 스페인에 엄청난 배상금을 주고 뱃길을 열어달라고 사정하거나, 아니면 베네치아에 사정해서 유리 장인과 재료들을 가져와 파리에서 작업할 수밖에 없을 텐데 베네치아가 기술 유출을 우려해 그렇게 해주겠습니까? 대주교님. 제가 해결할 수 있습니다. 베네치아에서 큰 배로 여기까지 실어 와서 운하를 통해 산맥을 넘을 수 있도록 제가 새로 고안한 배에 나누어 실으면 대서양을 지나 세느강을 따라 올라가 파리의 선착장까지 무사히 가져갈 수 있습니다. 폐하를 만나 뵙게만 해 주십시오. 제가 가진 모든 것과 저의 운명까지 거기에 모두 걸겠습니다. 주님께서 제가 그 길을 가게 이끌어 주시고 계십니다.’
아멘!!!!
부르르몽 대주교의 추천장을 가지고 폴 리케는 파리로 향했다. 마차 한 대 분량의 어마어마한 설계도와 수집한 자료들을 가지고 말이다. 그는 루이 14세 왕정의 재무장관인 장 밥티스트 콜베르 (Jean-Baptiste Colbert)를 찾아갔다. 리케의 프로젝트를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들은 콜베르의 결론의 단오했다. 충분히 가능성이 있는 사업이며 지금 프랑스에 꼭 필요한 사업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왕 주변에 있는 어느 관료도 그것이 지금 실현 가능한 사업이라고 판단하지 않을 것이라는 결론이었다. 그리고 운하를 국책사업으로 벌이자면 어마어마한 자금과 엄청난 시간이 소요될 텐데 지금 프랑스 왕정의 재정은 베르사유 궁전 건축으로 인해 완전히 바닥을 드러내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부자와 외국 은행에서 돈을 꾸어와야 하는 정도로 재정이 열악했던 것이다. 콜베르는 베르사유 궁전이 완공되고 시간이 좀 지나 국가 재정이 어느 정도 회복되는 다음 왕정인 루이 15세 시대를 기다려 보는 것이 좋겠다고 조언했다.
하지만 리케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 왕정이 되어도 중앙의 관료들은 미래가 불투명하고 오랜 시간동안 국가 자체가 매달려야만 하는 엄청난 국책사업을 벌일 용기와 능력이 없는 그저 차일피일 미루기나 하는 태만한 관료의 기질을 결코 버리지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태양왕은 거대한 야망을 가지고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역사에서 그 유래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위대한 건축물을 자신의 업적으로 남기고 싶은 것이다. 이탈리아의 르네상스를 그렇게 차지하고 싶었지만 가지지 못했다. 그래서 마구마구 수입을 해야만 했다. 르네상스를 소유한 이탈리아를 이기기 위해서 태양왕은 르네상스를 초월하는 바로코의 모든 정수를 베르사유 궁전에 담아 곷피우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로마롸 피렌체를 가질 수 없다면 그것을 능가하는 보다 화려하고 멋진 바로코를 프랑스에, 아니 새로운 베르사유 궁전에 가득 채우고 싶었던 것이다. 그 최고의 정점은 (거울의 방)이 될 것이다. 이 세상 어디에도 없는, 이 세상 어던 보석보다도 비싼 거울로 가득한 방을 만들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보석값 보다도 비싼 돈을 들여 베네치아에서 거울을 사서 배로 실어 마르세유까지 도착했다. 스페인이 가로막아서 결국 마차에 실어서 파리까지 운반을 했는데....... 6개월 만에 도착한 화물을 파리의 선착장에서 내려 검수해 보니 달랑 여자들 화장대에 놓아둘 만한 크기의 조각난 몇 장이 겨우 무사히 도착했을 뿐이다. 거대한 나무상자에서 꺼낸 샹들리에를 보니 여기저기 부서진 유리 파편들이 가득했다. 샹들리에란 마지막 유리 조각 하나까지 제자리에 모두 온전한 상태로 달려있어야 진짜인데 말이다. 그렇게 참혹한 결과였음에도 왕은 결코 베네치아산 샹들리에와 전신을 비추고도 남을 커다란 거울을 포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다.
리케는 자신이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열쇠를 쥐고 있다고 판단했다. 왕의 그런 야망이 불가능으로 남아있는 바로 이 시점에서만 운하의 허가가 떨어진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해결책을 마련하지 못하는 왕에게 운하 건설 계획은 그야말로 폴 리케가 칼자루를 쥐게끔 만들어 줄 수 있었던 것이다.
콜베르는 루브르 왕궁에서 베르사유 궁전 건설에 대한 비상대책 회의를 주관했다. 루이 14세가 직접 참여했다. 문제의 핵심은 바닥을 드러낸 국가 재정과 베네치아에서 유리제품을 어떻게 무사히 가져오는가에 대한 회의였다. 재정문제야 늘 하던 바처럼 더욱 국민들로부터 철저하게 세금을 더 거둬들이게 하는 것과 임시 방편으로 차관을 유입하고 상환 기일을 늘려나가는 것이다. 그리고 그 돈의 대부분을 베네치아에 지급해서 다시 새롭게 엄청난 물량의 유리제품을 수입해야 한다는 사실이다. 다만 핵심 문제인 운송에 대해서는 일체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때, 콜베르가 나서서 툴루즈에서 온 피에르 폴 리케를 소개했고, 그가 가지고 온 새로운 운송 사업에 대해서 운을 떼었다. 왕이 허락을 했고 리케는 프랑스 왕정의 최고 대신들과 관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장시간에 걸쳐 운하 건설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감행한 것이다. 커다란 지도와 연구 설계도와 다양한 모형물이 등장했고 실제로 시연을 펼쳐 보였다. 길고 장황한 설명회가 모두 끝났을 때 어디에서도 숨소리 하나 들려오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오로지 한 곳, 왕에게 쏠려있을 뿐이었다.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로군. 다만 지금으로서는 그렇게 많은 시간과 재정이 소요되어야 하는 건설에 국가가 여유가 부족하다는 것이 문제가 되겠네. 그래도 자네의 제안은 아주 훌륭한 것이었네.’
결국 왕까지도 불가능하다는 판단을 내린 것이다. 그러자 사방에서 고리타분한 전형적인 관료의 기질을 가진 자들이 일제히 폴 리케를 비난하고 헐뜯기 시작했다. 책임은 회피하고 자리는 지키고 싶은 야비한 관료들이 늘 해오던 그런 태도로 말이다. 회위병의 안내로 설명회에서 쫓겨나가던 리케가 루이 14세에게 예를 갖추면서 마지막 하소연을 쏟아냈다.
‘국가의 재정 지원은 필요 없습니다. 폐하께서 허락을 내리시면 운하 건설에 소요되는 모든 재정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아울러 새로운 궁전의 진척도에 맞추어 이탈리아에서 가져와야 하는 물품 조달을 위한 계획을 세우고 공사 기간을 최대한 앞당기겠습니다. 베네치아에서 꾸준히 들여오는 물품들이 보관하기 위한 별도의 창고를 세테와 마르세유에 짓겠습니다. 그때그때 도착하는 물품을 안전하게 보관할 것입니다. 공사의 정도에 따라 최소한의 구간만을 다른 방도로 운송을 하더라도 나머지 구간은 운하의 공정에 따라 구간별로 먼저 배를 띄울 것입니다. 저의 건설 계획이 새로운 궁전의 완공에 반듯이 크게 기여하게 될 것입니다. 운하 건설에 들어가는 기술력과 노동력과 터널 공사를 비롯한 모든 건설비용은 물론 배의 건조까지 모든 비용을 제가 부담하겠습니다. 저에게는 오로지 폐하의 허락이 필요할 뿐입니다.’
상황이 급변하기 시작했다.
왕의 입장에선 아주 매력적인 제안이었지만 당장 공사에 투입할 재정이 전혀 남아있지 않았던 것이었는데, 허락만 해주면 모든 비용을 스스로 부담해 모든 영광과 결과를 왕에게 돌려주겠다는 제안이 아닌가? 하늘이 왕에게 구세주를 내려주신 것이나 다름없지 않겠는가? 그래도 왕은 왕일 판에, 그가 태양왕이 아니었던가?
‘이틀 뒤에 회의에 참석하도록 하라. 그때 결정을 내려 주겠다.’
헐!!!!
결정은 무슨 결정? 이대로 단박에 허가를 내 주자니 대신들 앞에서 왕이 돈문제에 홀딱 넘어갔다는 쪽팔린 소리를 듣기 싫어서 그런거지...... 거기다가 리케가 왕 앞에서 스스로 한 약속을 취소할 리도 없으니 말이다.
이틀 뒤에 왕은 온갖 폼을 다 잡고 나서 리케에게 운하 건설 허가서에 왕의 직인을 찍어 내려주었다.
처음 왕이 내린 허가서대로 하자면 이 운하의 정식 명칭은 랑그독의 왕립 운하(Canal Royal en Languedoc)였다. 완공 후 약 100년 이상 운하의 이름은 ‘랑그독 왕립 운하’로 불렸다. 그러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고, 혁명의 주체들은 모든 이름에서 봉건왕조의 이미지를 털어내고 싶어했다. 그냥 ‘랑그독 운하’로 하면 여전히 그 사이에 ‘왕립’이 남아있다고 생각하여 굳이 억지로 새로운 이름을 붙인 것이 ‘미디 운하(Canal du Midi)’가 된 것이다.
사실로 따지자면 지중해와 대서양을 잇는 랑그독 왕립운하(Canal Royal en Languedoc)를 다짜고짜 미디 운하(Canal du Midi)라고 부르는 것은 크게 잘못된 것이다. 그런데 지금 프랑스 정부를 포함해 이 운하와 연계된 도시들은 별반 이의 제기를 하지 않고 있다. 그런가 하면 우리나라의 경우 툭하면 지자체들이 이제까지 사용해 오던 명칭을 운운하면서 서명운동을 벌이고 시위를 벌이는 행위들을 나는 이해할 수가 없다. (충주호)와 (충주댐)을 다른 지자체의 명칭으로 바꾸어 달라는 청원과 같은 것 말이다. 고유명사처럼 되어버린 상황에 이제 와 명칭을 바꾼다고 해당 지자체 살림살이에 제법 보탬이 되겠습니까 하고 묻고 싶다. 적어도 지금 내가 제기하는 운하의 명칭 정도는 되어야 하지 않을까?
랑그독 왕립 운하(Canal Royal en Languedoc)는 대서양과 지중해의 분기점이 되는 가장 높은 지역에 위치한 대도시 툴루즈에서 모두 기인한다. 툴루즈에서 가까운 인근의 산봉우리에서 북쪽으로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이내 가론강이 되어서 종국에 대서양으로 들어간다. 하여 이 구역에 설치된 운하를 ‘가론 운하( Garonne Lateral Canal)’라고 불렀다. 다시 툴루즈에서 남쪽으로 흘러내리기 시작한 물줄기가 여러 지류를 받아들여 메롱강을 이루고 마침내 거대한 석호(소금호수)인 에탕(Étang de Thau)에서 지중해와 합류해 ‘미디 운하(Canal du Midi)’가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지금 이곳을 통 털어 미디 운하라 부르는 것은 대서양 지역의 나머지 절반을 탁 털어 내버린 꼴이 되는 것이다. 하여, 랑그독 운하 명칭을 다시 쓰는것이 탐탁지 않으면 차라리 메르 운하(Canal des Deux Mers)라고 부르자는 제안이 나왔으나, 세테나 몽펠리에나 베지에 사람들은 자기 지역을 가리키는 미디 운하를 그냥 사용하고 싶은가 보다.
대서양 쪽에는 육지의 아주 깊숙한 곳까지 바다 못지않은 수면이 펼쳐진다. 도르도뉴 강과 가론 강이 합쳐지는 지역까지는 그냥 바다라고 인식해도 좋을 정도이다. 하여 이곳 지롱드 포구에서부터 툴루즈까지 약 193km의 가론 운하가 건설된 것이다. 툴루즈에서는 가론강 물줄기와 메롱강 물줄기를 연결하기 위하여 길다란 터널을 뚫었다. 그 터널의 반대편에서 시작하여 에탕 석호까지 약 240km의 미디 운하가 건설된 것이다. 결국 지중해와 대성양을 연결하기 위하여 건설된 운하의 총 길이는 대략 433km에 이르는 역사를 모두 뒤져도 그 유래나 비슷한 사례를 찾아볼 수 없는 전무후무한 대 역사였던 것이다. 기자의 피라밋 건설에 결코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랑그독 왕립운하(Canal Royal en Languedoc)는 1666년에 시작하여 1681년에 완공되었다.
베르사유궁전(Château de Versailles)은 1682년에 루이 14세 태양왕에 의해 완공되었다.
그렇다면 분명...... 폴 리케는 왕에게 운하 건설의 허가권을 요청하면서 약속한 대로 새로운 궁전의 완공에 크게 기여했으리라고 생각한다. 다만 리케는 베르사유 궁전의 완공이나 랑그독 왕립 운하의 완공을 보지 못한다. 운하의 완공을 불과 14개월 남겨놓고 과로사하고 말았다.
그럼 피에르 폴 리케가 만든 랑그독 왕립운하(Canal Royal en Languedoc)가 얼마나 대단한 것이냐?
우리가 흔히 (운하)하면 먼저 떠오르는 것들과 비교해 생각해 보자.
수에즈 운하(Suez Canal)는 황해와 지중해를 연결하여 주는 약 192km의 운하로 1869년에 만들었다.
파나마 운하(Panama Canal)는 수에즈 운한 건설에 참여했던 엔지니어와 기술자들이 투입되어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해 주는 약 82km의 비교적 짧은 운하로 열강들의 재배권 다툼으로 지연되고 또 지연되다가 1914년에야 겨우 완공되었다.
키엘 운하1(Kiel Canal)는 많이 알려지지 않은 독일의 운하로, 제국으로 급성장하는 독일을 경계하기 위하여 영국을 비롯한 연합국이 해상 봉쇄령으로 독일의 해안을 가로막자 독일은 멀리 북쪽의 발트 해안까지 운하를 건설하여 봉쇄령을 피하려고 약 98km의 1895년 건설했다. 이는 2차 세계 대전에서 독일의 U 보트를 비롯한 해군전력의 비상 통로가 되었다.
그리스 여행을 통해서 널리 알려진 코린트 운하를 많은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의 역사유적으로 생각하여 인류 최초의 운하가 아닐까 하지만 코린트 운하는 1893년에 건설된 현대의 운하인 것이다. 고대 역사유물이 아닌 것이다.
이들은 모두 현대적 장비들이 등장하고 다이나마이트 사용이 일상화 되었으며, 운하를 오르내릴 선박 또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급성장 한 현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하지만 폴 리케의 랑그독 왕립 운하의 건설은 중세시대의 후기였던 것이다. 200년의 시차가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트럭과 중장비가 오르내리거 기차로 물건을 실어나르던 시대가 아니라 말과 마차가 전부이던 시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이다.
후대의 배들은 엔진을 통해 동력을 얻어서 스스로 운행이 가능했던 시대였지만, 중세엔 노를 젓거나 바람에 의존하는 것이 전부였던 시대였다.
그렇다면 세테를 출발한 배들이 메롱강을 어떻게 거슬러 올라가 피레네 산맥 위에 있는 툴루즈 까지 운항할 수 있었을까? 강폭이 좁으니 노를 저을수도 없었을 것이고, 장대로 강바닥을 내지르며 가거나 배의 후면에 노 하나만을 저어서는 그래도 화물선인데 꼼짝이나 할 수 있었을까? 1미터 나아갔다가 도로 2미터 떠내려왔을 것이다. 물은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르기 마련이고 지형의 생김새에 따라 경사도가 다 제각각인데, 배가 오르자면 어느 곳일지라도 항상 어느 정도의 수심이 보장되는 풍부한 수량이 필수적인데, 우기와 건기마저 따르게된다면 과연 그 물을 어떻게 충당했을까? 경사가 급한 지역의 수심 확보를 위해서는 어떻게든 물을 가두어야만 했을텐데 말이다. 또한 가장 높은 꼭대기의 터널에는 배가 지나갈 물을 어떻게 마련하고 공급했을까?
이걸 다 설명할 수는 없겠다. 하여 아주 약간의 힌트만 적어 올리는 것으로 통과를 하려 한다.
폴 리케는 대서양과 지중해로 갈라서는 가장 높은 꼭대기에 터널을 뚫었다. 그리고 그 터널보다 놓은 곳에 아주 커다란 인공호수를 만들었다. 주변의 더 높은 피레네 산맥으로부터 수원을 확보하여 늘 저수지를 충분히 채울만큼의 사전에 계산된 수원을 확보했다. 이 저수지의 물은 지하를 통해 터널의 중간 구멍을 통해 언제든 공급될 수 있었다. 그리고 터널의 양쪽을 시작으로 경사지마다 도크를 설치해 물을 가두었다. 남쪽으로 미디 운하에 65개의 도크를 설치했고, 가론 운하에 53개의 도크를 설치했다. 도크 수가 많다는 것은 그만큼 급경사가 많다는 것으로 해석하면 되겠다.
그리고 나서 시대가 변해 철도와 화물 운송이 발전하면서 배를 통한 사람과 물자의 운송 필요성이 적어지자 쇠퇴할 수밖에 없게되었지만, 그 덕분으로 지금 저렇게 아름다운 강변길 트래킹 코스가 남게된 것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처럼, 오늘날의 장비와 인력과 돈으로 저런 시설을 일부러 만든다는 것은 어쩌면 리케가 처음 운하를 건설했을 때 보다도 더 많은 비용이 들어갈지도 모를 일이다.
현재에 툴루즈에서 대서양에 이르는 운하 강줄기는 거의 훼손되고 사라졌다. 하지만, 세테에서 툴루즈가지의 미디 운하 코스는 저렇게 맑은 물이 흐르는 휴식처이자 최고의 트래킹 코스로 남게되었다. 폴 리케는 운하의 물줄기를 바로잡아 설치하면서 동시에 양쪽으로 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 숲을 가꾸었다. 왜 그랬을까? 아니 왜 그래야만 했을까?
올려놓은 사진들을 가만히 살펴보면 그 당시의 생생한 모스들을 자연스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폴 리케가 생각하는 운하를 올라가고 내려가기 위해선 바다에서 운행하는 선박처럼 수심에 잡기는 하단부인 용골을 없애야만 했다. 용골은 배의 척추와 같아서 튼튼하게 만들어주고 중심을 잡아준다. 선박의 방향성과 속도는 용골에 의해서 좌우된다. 하지만 운하를 오르내리는 배의 용골은 수심에 큰 영향을 받고 짐을 좀 실었다 하면 그만큼 가라앉게 된다. 혹, 이 상황에서 리케가 우리나라 이순신 장군의 함선 판옥선을 연구했던 것은 아닐까? 리케가 새로 고안한 화물선은 판옥선을 그대로 빼어 닮았다. 바닥이 평평하게 넓어서 많은 짐을 실으면서도 부력이 높아 수심에 거의 영향을 주지 않았다.
세테에서 새로 만든 화물선(판옥선)에 짐을 가득 실으면 다른 고기잡는 거룻배가 끈을 매달아 끌고 상류를 향해 나간다. 널판지 배는 아무런 저항없이 그대로 슬슬 끌려 올라간다. 그러다가 강폭이 좁아지면 노를 젓는 배는 빠지고 느닷없이 말이나 마차가 등장한다. 강의 양쪽으로 만들어 놓은 길을 따라 말이 밧줄을 연결해 배를 끌고 올라간다. 둑길의 양쪽으로 나무를 심어 숲길을 만든것은 처음부터 배를 끌어 줄 말과 마부에게 시원한 그늘을 만들어 주기 위함이었다. 연일 반복되는 배를 끄는 일이 뜨거운 뙤약볕 아래라면 얼마나 가능했겠는가? 리케의 탁월한 식견이 지금의 숲길을 남겨주었다.
툴루즈까지 도크를 만나면 물을 가두거나 빼서 배를 들어 올리거나 내려주고, 다시 도크를 열면 나뉘어진 구역에 따라 다른 말들이 인계를 받아 또 끌고 올라간다. 터널에서는 아마도 평지와 같았을테니 긴 장대를 이용해 바닦을 밀면서 통과를 했을것 같다. 그러고 나면 툴루즈 부터는 화물선 스스로가 긴 장대를 이용해 완만하게 흘러내리는 물길을 따라 방향을 틀면서 수월하게 흘러내려갔을 것이다. 가론강을 내려가 대서양에 이르면 실려있는 화물의 내용에 따라 커다란 다른 화물선으로 옮겨싣거나, 때에 따라선 그대로 대서양 기슭을 올라가 세느강을 통해 파리에까지 닿았다고 한다. 스페인 지역을 절대 통과할 수 없었던 시절에 여기 운하를 통하면 적어도 두 달정도의 시간과 비용을 덜 수 있었다고 한다.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산업혁명이 완성되기 전까지는 말이다.
또 그런가하면 프랑스에는 역사적으로 아주 오래전부터(로마시대 이후로) 무척 많은 운하가 건설되었다. 지질학적인 특징 때문이리라. 시저의 갈리아 서에 보면 ‘갈리아 지방의 파리부터 사방으로 갈대가 무성한 습지’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프랑스의 평지는 호수나 습지가 무척이나 많이 널리 퍼져있다. 이 습지의 호수와 호수들을 연결하여 물길을 만들고, 그 물길을 통해 커다란 강줄기로 배수를 시키기 위해 수로 건설(운하)이 시작되었고, 그 수로를 통해 배를 이용해 사람과 물자가 오갈 수 있었던것이다.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은 아주 특별한 경우라 할 수 있는 석호지대(소금호수)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다. 우리나라에도 석호가 분포되어 있으니 경포호. 송지호. 화진포 등이다. 강도 아닌 것이, 바다도 아닌 아주 별난 것이다. 하지만 인공이 아닌 자연적 석호는 생태계의 보배일 뿐만 아니라 무한의 가치를 보유한 아주 소중한 것이라 하겠는데....... 우리가 흔히 석유 산유국을 부러워 했던 것처럼, 프랑스에는 석호(소금호수)가 지천에 널려있다. 물론 그들은 우리나라만큼의 좋은 갯벌을 가지지 못했지만 말이다. 우리와 프랑스 사이에 석호와 뻘을 좀 바꿔 가지면 안 될까?
어쨌거나, 운하(Canal, 運河)는 사람이나 물자를 배로 실어나르기 위한 인공수로를 가리킨다. 아주 너른 간척지에서 치수(관개.급수.배수) 등의 목적으로 벌이는 인공수로 사업을 운하로 부르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오늘날 운하 하면 수운(수상운송)을 위한 인공수로를 가리킨다고 해야 하겠다. 물론 바다를 뚫어 운하를 만들어 해상운송이 벌어지고 있지만, 그 경우의 해상운송 또한 육지에서 벌어지는 수상 운송의 범주에 속해야 한다고 본다.
폴 리케야말로 최초의 민자도입 국책사업을 시작한 사람이 아닐까?
국왕의 허락을 맏고 자신의 돈으로 저런 국책 사업을 완수한 결과로 대대손손 그 운하 통과료를 받으며 살았을 테니 말이다. 하지만, 그가 어마어마하게 돈이 많았다고 했지만, 국책사업이라는 것에 들어가는 돈은 그야말로 천문학적인 단위가 아닐 수 없다. 결국 리케 역시 재정난으로 전체지분을 가졌었지만, 공사의 중간을 넘어서자 결국 지분의 절반을 은행권에 팔아넘기게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얼마나 부자였을까?
내가 돈이 엄청 많아서 경부고속도로를 내 돈으로 만들어 나라 발전에 이바지 하겠으니, 추후로 고속도로 통행료를 영원히 징수하는 권리를 획득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뭐 거대 석유재벌 쉘이나 엑손 모빌 등을 하나 맹글어서 자식에게 물려주는 퍽 되지 않겠는가?
헐!!!!!!
프랑스의 랑그독 왕립 운하는 17세기에 실제로 실현 되었던 기념비적인 토목공사의 결과물이었다.
당시로서는 분명 신기원을 이룬 미래지향적 혁신이었다. 폴 리케는 진정한 개척자이며 선각자였다. 프랑스 왕정 보다는 프랑스 국민을 너무나 사랑했던 엄청난 부자 관리였다. 그가 평생을 운하 건설에 매달린 것은 결코 돈벌이 때문만은 아니었다. 이미 그는 돈이 썩어나갈만큼 부자였으니 말이다. 그는 자신의 능력과 자신에게 부여된 어떤 사명감과 국가와 국민에 대한 애정과 애국심으로 그 고난의 길을 기꺼이 걸어갔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그의 헌신과 노력도 사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2백 년도 가지 못해서 과학의 발달이라는 장벽에 부딪치고 만 것이다.
그 운하가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 이유은 단 하나 세상이 변했기 때문이다. 증기기관의 발명과 더불어 산업혁명이 일어났고, 과학의 눈부신 발전은 결국 자동차와 기차를 만들어내고 말았던 것이다. 철도가 놓이게 되고 자동차 도로가 거미줄처럼 퍼져나가자 이제 뱃길을 통한 수상 운송은 가성비와 효용성에서 육상운송에 비교가 되지 못했다. 하지만 바닷길의 경우는 좀 예외였다고 하겠다. 선박 제조기술의 발전과 항해술의 발달로 초대형 선박에 실을 수 있는 화물량은 기차나 자동차 보다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늘어났다. 다만 바다를 이용한 해상운송은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치명적 약점이 있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서 강대국들을 바닷길을 단축시켜 질러가는 방법으로 바다 운하를 건설했다.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가 대표격이다. 지금도 해상운송의 거리 단축을 위해서는 새로운 운하 건설이 더 필요하기도 하겠다. 홍해와 지중해를 연결하는 수에즈 운하의 경우 아라비아해를 차지하고 툭하면 분쟁과 테러를 일삼는 후티 반군의 경우를 보더라도, 어쩌면 인근의 최단거리로 돌파할 수 있는 새로운 운하가 필요할 지도 모르겠다. 다만 거기에 투자되는 엄청난 비용과 완공 후에 얻게되는 효용성의 문제를 심도있게 비교할 필요가 있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19세기 초반에 들어서면서부터 내륙의 수로를 이용하는 수상 운송은 종말을 고했다고 보는 것이 엄연한 역사적 현실인 것이다.
그랬는데...... 랑그독 왕립 운하가 만들어진지 350년 가까이 지난 시점인 21세기(2006년) 눈부신 발전을 거듭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느닷없이 뚱딴지같은 ‘대운하 건설’이 국책사업으로 등장했다.
이를 달리 어떻게 표현하면 보다 적절한 표현이 될 수 있을까?
가만히 앉아 있으면 좀이 쑤시는 건설현장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이라 무엇이든 만들고 허물고 또 새로 만들어야만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면 한 개인 회사의 오너로 서는 자기 마음대로 무슨 일을 저지르든지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 취미 생활의 비용을 순순하게 자신의 돈으로 즐긴다면 그 또한 개의치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그 양반은 자신의 취미 생활에 ‘국가의 미래. 국가의 운명’을 끌어들였다. 자신의 도락에 당시로서 국가가 감당하기에 벅찰 정도의 국비를 쏟아부을 생각을 하고 있었다. 오로지 그 거대한 기념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서 백년 천년 후대에 남기고 푼 생각이 차고 넘쳤을 것이다. 자신을 평범 이상의 왕이라 생각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혹여 그렇게 생각을했었다면, 나는 더없는 존경심으로 그분을 왕을 뛰어넘어 로마제국의 칼리큘라 황제와 꼭 닮았다고 해주고 싶다.
바다를 이용한 초대형 화물선들이 수에즈 파나마 운하를 통해 세게의 모든 항구에 엄청난 양의 화물들을 실어 날랐다. 곡식과 석유와 석탄과 가스와 광물들을 실어날랐다. 그러면 항구까지 연결된 화물 기차에 실어 지구상의 곳곳으로 실어나르는 시대가 돌입한 것이다. 대한민국에도 경부선과 중앙선이 한반도의 대동맥을 형성했고, 우리동네 충주에 천 오백 년을 이어 내려왔던 남한강 수운사업도 경부선과 중앙선을 연결하는 충북선의 개통과 함께 종말을 맞고 말았던 것이다. 지금 충주에서 서울 마포나루까지 배에 사람이나 화물을 실어 보낸다고 하면 들려올 대답은 오로지 하나 뿐이다. ‘병신. 지랄하고 있네.’ 고속버스를 타면 가만히 앉아서 멍을 때리면서도 1시간 반이면 서울에 도착한다. 배낭을 메고 자전거를 끌고 전철에 올라타고 쉽게 서울에 닿는다.
그런데 그 양반은 이 남한강 물길에 천문학적인 돈을 투자하여 운하를 건설하자고 국민을 선동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자연환경 개선과 수질 향상 등등 가지가지 명분과 비젼이라고 제시를 했지만......... 결과는 개뿔이었다.
나는 죽었다가 깨어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최초로 이 해괴망측한 생각을 꺼내 제의한 사람이 누구였는지 나는 아직도 궁금하다.
그리고 그 분이 추진하시고자 하는 ‘한반도 대운하는’ 바로 350년 전에 폴 리케가 추진하고 완공시킨 ‘랑그독 왕립 운하’의 복사판이자 완전 판박이다. 새로운 구상이라기 보다 프랑스의 운하 하나를 고스란히 한반도에 파다가 옮겨 놓는 것이라 해도 결코 무리가 아니지 싶다. 그렇다면 최고위 관리 중 누군가가 재정부와 건설부와 여러 학자와 엔지니어들을 거느리고 세테와 몽펠리에와 베지에와 툴루즈를 거쳐 보르도 지방까지 샅샅이 찾아다니면서 나름 연구활동을 활발히 펼쳤을 것이다.
(대운하 사업)은 결국 국민들의 거센 반발과 저항으로 무산되었다. 새로운 명분으로 (4대강 개발사업)으로 축소되었고, 무수한 여운과 여파를 남긴 채 정권이 바뀌었고, 이제는 결코 그리 개운치않은 지나간 흑역사가 되고 말았다.
그런제 문제는 정작 그 다음에 있는 것이다.
아무도 책임을지지 않았던 것이다. 높은 책상에 앉아 권력을 쥐면 무조건 제 마음대로 하려 든다. 공권력을 동원해 일단 펑펑 내지르고 본다. 하지만 끝까지 책임질 생각도 배짱도 없다. 한마디로 졸렬한 행동의 연속이다. 그것이 한국 정치 권력의 민낯이다. 수치를 모른다. 쪽팔림은 잠시뿐이고, 권력의 향유는 영원하기 때문이다. 금배지를 위해서라면 양심도 없고 조상도 자식도 언제든 내줄 수 있는 무리가 바로 그들이다. 그런 그들의 옆에서 그들로 하여금 자주 사고를 치도록 부추기는 무리가 바로 고위직 공무원들이다. 금배지들이 사고를 치고 수습에 혼을 빼앗기고 체면에 금이가야 그 다음 지위의 무리들이 활보할 여유와 공간이 더 많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해방 후에 일제 청산의 잔재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하고 연명해 온 대한민국 지배권력의 속사정이다.
그 과정에 파생된 ‘한반도 대운하 구상’은 아주 볼성사나운 추태의 하나였다.
대한민국은 지금 절대적인 물 부족국가다.
남한강은 그런대로 물이 조금은 풍족한 편이라 하겠지만, 낙동강은 그 형편이 사뭇 다르다. 지금 당장 김천 구미 지역의 하천을 보라. 드넓은 강폭에 모래사장만 끝없이 펼쳐져 있고 수풀만 가득하다. 그 모래사장 사이로 지렁이가 만들어 놓은 봇도랑처럼 겨우 시냇물이 졸졸 흐르면서, 그래도 여기가 분명 하천이라고 명맥을 이어주고 있는 것이다. 보를 막아놓은 인근에만 강줄기가 보인다. 가끔 폭우라도 쏟아부으면 하천이 범람할 정도로 강바닥이 낮다. 이제는 건기와 우기가 따로 구분되지 않을 정도로 낙동강 일대는 연중 내내 갈수기라 해도 무방할 정도이다. 폭우를 동반하는 태풍이 불어올 때를 오히려 반갑게 기다려야 할 정도이다. 구미를 비롯한 김천 외곽의 공장지대는 연일 물 부족으로 비상사태다. 생활용수도 부족한 마당에 공업용수까지 감당해야 하는 수자원 공사나 관련 공무원들은 그야말로 죽을 맛이다.
그런 낙동강에 물길을 정비하고 군데군데 보를 막아서 운하를 만들겠다고 했다. 지나가는 소가 웃을 일이고 개가 풀을 뜯어 먹으며 살아갈 개판의 세상이 도래한 것이다.
물은 높은데서 낮은데로 흐른다. 아무리 보를 막고 최대한 물을 가둔다 해도, 배가 오르 내리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수심이 보장되는 수량이 필요하다. 뱃길을 위해 보를 열면 아무튼 아래서 올라가는 배를 윗 보의 높이까지 띄워줄 물이 필요하다. 그래서 보 위쪽의 물을 내려 채운다. 배가 한 단계 올라섰다. 그러면 다시 운행이 가능할 만큼 물을 채워야 한다. 미디 운하 사진을 살펴보면 어떤 과정이 끊임없이 반복되어야 하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 내려간 물은 다시 올라오지 않는다. 굳이 그 물을 다시 거꾸로 퍼 올려서 재사용하자면..... 그 과정에서 엄청나게 비효율적인 비용과 노동력이 필요해 진다. 매 구간마다 그렇게 물을 다시 퍼 올려 재사용 한다면........ 보의 하류에서 생활사는 사람들의 도시나 공장의 물은 도대체 어디서 충당할 것인가? 시대를 역행해 다시 과거처럼 우물물로 생활용수를 충당하고 도시에서 나오는 폐수를 걸러서 공업용수로 사용해야 할까? 그렇게 해서 물부족은 해결할 수 있을까? 암튼 어찌어찌해서 문경지역 대야산 인근까지 물길을 이용해 배를 끌고 왔다고 치자.
팔당댐을 헐어서 만든 물길로 마포나루를 출발한 배가 여주를 지나 충주에 오면서 보조댐도 헐어내고 합수머리(탄금대 우륵대로 아래)에서 우회전을 해서 괴산방향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괴산댐도 헐어내고 거슬러 올라가 속리산 골짜기 깊숙한 곳에 어쨌거나 도착을 했다고 가정하는 것이다. 문경의 대야산 기슭과 속리산 기슭의 골짜기를까지 죽어라 밀어 올릴 만큼 올리다가 힘에 부치는 지점에서 터널을 파서 남한강과 낙동강이 연결되게 만든다는 것이다.(그야말로 남프랑스 랑그독 왕립 운하의 완전 복사판인 것이다. MB 정권은 이것이 자신들의 신기술이며 신개념인 것 처럼 홍보했지만, 나는 이미 폴 리케의 작품을 고스란히 통째로 파 옮긴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다른 곳엔 없다. 오로지 미디 운하만 그렇게 만들어졌다)
폴 리케는 터널구간의 수위를 확보하기 위해 인근의 터널 보다 더 높은 지대에 커다란 저수지를 건설했었다.
그런데 속리산 기슭에 설치할 터널 위에는 저수지 설치가 불가능 하다. 혹시 속리산 꼭대기 문장대에 저수지를 세울까? 그러자 MB 정권은 터널 양쪽의 아래 지대에 저수지 못지않은 대형수조를 건설한 뒤에 양수기를 동원해 터널 내의 수위조절이 가능하다고 했다.
참 저질들이다. 발상 자체가 시궁창이면 그네들 머릿속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2006년 훨씬 이전부터 대한민국은 절대 물부족 국가였다. 해마다 생활용수와 공업용수의 수요는 늘어만 가는 현실을 저들은 아예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한반도 대운하가 완공되고 나면 느닷없이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그분께서 동남아의 스콜처럼 하루에도 한 두 번씩 꼭 풍부하게 비를 내려 주셔서 이 근본적인 물부족 문제를 말끔하게 해결해 주실 것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하긴 뉴스에서 보니 ‘장로님’이시라고 하더만.
다른 어떤 분은 ‘평화의 댐’을 만들어 국민의 쌈지돈을 싹쓸이 해갔다. 도적놈이다. 하지만 그들 역시 아무런 책임지는 작자가 없었다.
그런데 이번 분은 ‘한반도 대운하’를 만들어 또 다시 국민의 쌈지돈을 노렸다. 물부족 국가에서 대운하를 건설했는데 물이 부족해 배가 가지 못한다고 해 보자. 아주 이따금 태풍 소식이 전해지면 부랴부랴 출항 준비를 하는 대운하 말이다. 그렇게 되면 별 수 있나? 국민이 성금을 죽어라 걷어서 마트에서 생수 사다가 속리산 기슭의 터널에 부어서 배를 보낼 궁리를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러면 어느 금배지께서 또......... ‘삼다수 보다는 에비앙 샘물이나 보르조미 샘물로 배를 띄우면 훨씬 순조롭게 잘 나갈 것’ 이라고 대국민 선언을 하고, 돌아서서는 자식들로 하여금 수입생수 회사부터 만드는 것이 아닐지 말이다. 충분히 그러고도 남을 인간들로 여의도가 그득하니 어찌 아니 슬프겠는가?
이 헛지랄 발상에 참여하고 발광했던 인간들은 제발 반성하는 모습 좀 보여라. 그렇게 당당하게 국민들을 대상으로뻔뻔한 짓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으면, 사죄까지는 아니더라도 드러난 사실에 대해 인정하고 반성하고 새로운 국가의 미래에 손톱만큼이라도 기여 하는, 비록 한 때는 철이 없어 잘 나간다고 온갖 똥폼을 쟀지만 그래도 마지막엔 사과할 양심과 배짱 정도는 있는 최소한의 인간적 예의는 있어야 할 것 아니겠니? 싸가지들아!
더해서..... 두 눈을 질끈 감고 결과적으로 그래서........ 그네들이 하는 주장대로 한반도 대운하가 건설되었다고 치자. 국토의 대동맥이 뻥 뚫려서 원활하게 수상 운송이 가능해졌다고 치자.
‘그 뱃길로 뭘 할껀데? 뭘 실어 나를껀데? 비산 생수를 사날러서 배가 오가기는 하는데..... 도대체 뭘 실어나를건데.’
‘니들 혹시나....... 선박을 이용하면 최소한 정기 화물 운송업자는 이길꺼라 생각했나?’
‘병신들아. 시방은 택배회사의 시대여. 느그들은 당일배송이라는 말 들어는 봤나? 짜슥들아 단골이면 택배비까지 무료배송이여. 느그들 대가리는 아직도 17세기에서 못 벗어났냐?’
배로 무엇을 실어 나른다?
상시 소모품은 거대 시장이 곳곳에 초대형 물류 센터를 만들어 놓고 인근에 당일배송을 원칙으로 하는 세상이 도래했는데...... 만약 대운하가 완공되었다면 이제 도대체 그 운하를 어디에 쓸고?
내 어디 시골 면장이 동네에 운하 건설을 추진하다가 망했다면 이래저래 치기라고 해줄 수 있겠지만, 한 국가의 위정자가 국가의 미래를 놓고 국고를 탕진하면서 자신의 업적 타령을 했다면 이는 당연하게 아주 극도로 엄격하게 그 책임을 끝까지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 기발한 발상에 얹혀서 입신양명을 꿈꿨던 놈팽이들도 모조리 말이다.
그정도 수준밖에들 안되었나?
미국의 운송정책에 관심을 가진 바가 잠시 있었다. 미국에서는 운하라는 말이 굳이 필요가 없다. 미시시피 강의 예만 보더라도 물길을 정비하고 수위를 조절하고 할 필요가 없다. 세상에서 가장 긴 강이 미국 대륙의 중심까지 아주 드넓은 강폭과 풍부한 수심으로 마다 못지않은 수심을 가지고 잘 흘러내리고 있기 때문이다. 운하가 뭔 필요가 있겠는가. 바다에 떠다니는 초대형 콘테이너 선이 그대로 강줄기를 따라 편하게 다니는 판에 말이다.
국가 수립은 불과 250년이지, 세계 무대에 등장한 이후로 미국은 늘 최강국의 위치를 확고히 해왔다.
영국에서 증기기관이 발명되고 이어 자동차가 등장하고 기차가 등장하면서 산업혁명에 크게 기여하게되자 미국도 서둘러 철도의 중요성을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우리가 흔히 기억하는 서부개척시대인 1869년에 대서양과 태평양을 잇는 대륙횡단 열차를 건설한 것이다. 라틴계와 원주민과 중국 이민자들의 애환이 가득 서려 있는 역사적인 대륙횡단 열차 말이다. 태평양 지역인 캘리포니아 세크라멘토에서 6개 주를 관통하며 대서양 연안의 네브래스카주 오마하에 도착하는 2826KM의 철도를 6년 만에 완공하는 토목공사의 신기원을 이룩했다.
이 대륙횡단 열차의 개통으로 어메리카 대륙 동서간의 물류 운송이 활발해지면서 미국은 급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계 모든 나라에 철도사업 붐이 일어났던 것이다. 철도가 놓이기 이전의 세상과 철도가 놓인 다음의 세상은 비교가 불가능할 정도로 달라졌다.
이런 눈치는 한바도를 침략한 일본도 예외가 아니었다. 식민지 수탈을 위해 열강들이 앞다투어 세계 도처에 철도를 놓기 시작한 것이다. 기차에 군대를 실어 침략 점령하고, 다시 기차를 통해 수탈한 물자들을 본국으로 실어날랐다. 그야말로 수지가 딱 맞아 떨어지는 최고의 투자였던 것이다.
하지만 철도를 대하는 미국의 시선을 좀 달랐다.
가만히 한 번 생각해 보라. 유럽이든 아프리카든 남미든 동남아든 모든 세상의 여행은 기차로 가능하다. 다만 편리성과 시간 때문에 먼 국가 간이나 대륙 간 이동 때는 비행기를 주로 이용하게 되기 때문이다. 어느 나라든 기차여행으로 그 나라의 대부분 구석구석을 볼 수가 있다.
그런데 미국은 다르다. 미국에서 기차를 타면 6개 주를 지나 대서양이던 태평양에 도착한다는 사실 외에, 기차로 이동해 찾아 갈 수 있는 도시가 별로 없다. 왜 그럴까? 세계 최강대국 미국이지만 철도에 관해서만은 미국이 가장 후진국에 들어간다. 참 아이러니한 사실 중에 하나다.
영국 프랑스 독일등 열갈이 식민지 확장에 분주했을 때, 미국은 신흥 개발도상국 이었다. 국력은 막강했지만 굳이 해외 식민지를 개척해 그곳에서 무엇인가를 빼앗아 올 필요성을 못 느꼈던 것이다. 군사적으로 활용도가 높은 꼭 필요한 거점이 아니면 미국은 식민지 정책에 대체로 무관심 했다. 미국이라는 자기들 나라 자체가 너무나 컸고, 그 미국 자체가 아직 개발이 거의 되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이다. 내 땅 개발하기에도 바빴던 것이다. 하지만 나라가 너무 커서 동서의 대서양 연안이나 태평양 연안을 동시에 개발하자니, 말을 타고 죽어라 달려서 두 달 만에 반대편에 도착하는 상황에서, 배에 화물을 가득 실어서 바다로 보내면 멕시코. 서인도 제도를 지나 콜럼비아를 거쳐 한참 남쪽의 브라질을 지나 돌아서 칠레의 긴 해안을 거쳐 다시 멕시코를 지나 텍사스에 도착했다. 족히 서너 달이 걸리는 대항해였다. 미국 내에서의 거래가 다른 국가와의 거래보다도 더 멀고 험난했다.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침략 전쟁의 일환으로 수에즈 운하를 건설해 엄청난 이익을 보는 것을 목격하고, 미국이 비로소 파나마 운하 건설에 억지로 뛰어들어 열강의 식민지 정책에 관심을 가지고 참여하게 된 것이다. 파나마 운하 자체가 미국에게 큰 이익을 넘어 국가의 미래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될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그리고 나서 미국 정부의 정책입안자들의 내륙개발 계획을 수립하게 되는데...... 핵심은 운송망 확보였다. 운송망이란 당시로는 당연히 철도를 가리켰다. 대륙을 횡단하는 철도는 이미 한 노선을 완공시켰는데, 미대륙 전체를 골고루 개발하기 위해서는 기존의 횡단철도 외에, 동서를 가로지르는 철도노선 서너 개가 더 필요하고 연계해서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철도 노선 또한 서너 개가 당장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하지만 이를 완성시키기 위해서는 감당히기 힘들 정도의 천문학적 비용과 인력과 장비와 기술이 절실하게 필요했던 것이다. 미국은 이를 강당할 수 없었다. 개발은 필요한데 들어가는 비용과 물자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미국은 낙담에 빠졌다. 사방으로 온통 불가능한 현실 뿐이었다.
그때 한 젊은 관리가 전혀 다른 의견을 제시했다.
‘미국이 철도를 포기한다면 지금보다 훨씬 빠르게 성장할 수 있다’는 새롭다기 보다는 세상물정 모르는 엉뚱한 궤변이었다. 온 세계가 철도를 통해 급성장을 하고 있는 마당에 철도를 포기하자는 발상이 참으로 기가 차지 않았겠는가?
‘철도회사들이 운송을 놓고 엄청난 폭리를 취하면서 새로운 사회문제를 야기시키고 있습니다. 저마다 철도부설권을 달라면서 각지에서 농민들의 땅을 강제로 빼앗는가 하면 법령을 제멋대로 개정하는 등 국가가 이대로 민간운송업자들에게 시달리게 된다면 철도가 늘어나면 늘어나는 만큼 국가의 재정은 파탄 나고 국민들의 삶은 점점 피폐해져 갈 것입니다. 민간 개발업자 주도의 철도개설을 제한 내지는 철폐해야만 합니다. 철도는 국민을 실어나르고 국민들의 생활에 필요한 생필품을 먼저 운송하고, 유사시 군인들과 군수물자 수송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전제하에 제한된 일부 운영권을 민간에 양도했어야만 하는데, 지금은 극소수의 민간 철도 운송업자들이 미국 전체를 좌지우지 흔들어대고 있습니다. 저들의 사업권에 제재를 가하고, 정당한 세금을 징수하고, 저들에게 땅을 빼앗기고 일터를 빼앗긴 사람들에게 빼앗은 것을 돌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런 후에 온 국민이 동의하는 미래지향적 국가건설에 매진하여야만 하는 것입니다.’
누가 그걸 모를까? 하지만 지금 당장 저들이 철도를 멈춰버리면 어떻게 할래? 이권을 주지 않으면 저들이 새로운 철도사업도 벌이지 않을 텐데. 그렇게 막강한 저들에게 대통령이라고 별수 있겠어?
모두가 방금 전 세상물정 모르는 소리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제 막 워싱턴에 도착한 신출내기 공무원을 우려하는 시선으로 바라다 보았다.
그런 신참 공무원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이었다.
‘철도 없이 이 드넓은 미국의 고른 개발과 지속적 발전이 가능하겠는가?’
‘가능합니다.’
‘사람과 물자를 어떻게 실어나르는가?’
‘자동차가 대신 합니다.’
‘자동차가 대신한다? 겨우 사람 몇 명이나 실어나르는 자동차가 기차운송으로도 부족했던 그 엄청난 물량을 감당할 수 있을까?’
‘충분히 가능합니다. 자동차의 대수가 그만큼 늘어나면 그 이상의 물량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필요한 그 엄난난 숫자의 자동차를 국가 재정이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닙니다. 전 국토를 거미줄처럼 이어줄 고위험의 험준한 산악 지역의 도로 건설 외엔 국가 재정을 쓰지 않을 것입니다. 철도처럼 강을 건너는데 다리를 놓기는 하지만, 평탄한 길을 위해 길고 위험한 터널을 뚫는 초대형 공사는 하지 않을 것입니다. 차가 오를 정도의 언덕은 그대로 다듬어 도로를 낼 것입니다. 개발 초기에는 아주 드문드문 차에 기름을 넣을 주유소와 휴게소와 작은 숙박업소가 필요하겠지만 이 또한 머지않아 민간자본으로 대체될 것입니다. 상당수의 지방도로 또한 그 지역의 개발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민간업자 주도로 스스로 건설될 것입니다. 확실하고 분명한 기준하에서 입니다.’
‘그럼, 새로운 국가 건설에 필요한 운송 비용을 보통의 일반 국민들이 알아서 나누어 부담하게 된다는 말인가?’
‘비슷하지만 좀 다릅니다. 극소수의 거대재벌이 철도사업으로 국익의 대부분을 독차지해 버리는 상황에서, 이제는 평범한 일반인들이 차량으로 사람을 실어나르고 짐을 실어나르면서 그 사업을 통해 얻은 이익을 골고루 나누어 갖게 되는 것입니다. 차량이 늘어나면 주유소도 늘어나고 정비소도 늘어나고 도시를 오가면서 쉴 곳과 먹을 곳이 필요해 지는데 그 모든 것을 일자리를 찾는 사람들과 소규모로 장사를 시작하려는 사람들이 고르게 기회를 갖게 될 것입니다. 새로운 사업이 생겨날 것이고 사람들이 모여드는 곳에 스스로 새로운 도시가 형성될 것입니다.’
‘자동차가 과연 기차를 대신할 수 있을까?’
‘지금 사람들은 대부분 자동차를 신분이나 부를 과신하는 자랑거리로 여깁니다. 하지만 이제부턴 화물을 보다 많이 실을 수 있는 튼튼하고 큰 차량이 발전하게 될 것입니다. 근자에 석유 개발과 품질이 몰라보게 나아졌다는 시실이 이를 증명해 줄 수 있습니다. 포드에서 만든 차량을 개조해 군대에서 수송차량으로 사용하는 것이 보다좋은 사례일 것입니다. 군용차량을 조금만 더 화물용도로 개조한다면 머지않아 충분히 기차를 대신할 만한 힘과 용량을 충족시키는 대형수송차가 등장할 것입니다. 화물차가 쓰여질 용도가 많다는 것은 곧바로 생산자들로 하여금 화물자동차의 기술발전으로 이어질 것이고, 이것은 다시 커다란 국가 발전의 모태가 되는 미래산업으로 성장할 것입니다. 만약에, 지금 시점에서 미국이 철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게 된다면, 미국은 새로운 자동차산업의 부흥에 대한 기회를 잃게될 것입니다. 좋지 않은 상황, 불가능할 정도의 열악한 상황일 때, 그것이 하나의 기회일 수 있습니다.’
‘세상이 철도에 매달리는 상황에서 미국은 철도를 포기하고 자동차로 가자. 그것이 하나의 새로운 기회다?’
‘당장 투자해야 할 국가 재정의 부담과 시장의 독점에서 벗어나 일반 국민이 국가 곳곳의 개발에 직접 참여하게 하고 그 이익을 스스로 찾게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뉴 후런티어 정신이라고 생각합니다.’
‘내일부터 내게 잡혀있는 모든 일정을 취소해 주게. 저 친구와 함께 자동차 공장을 가야겠네. 자동차 회사의 경영진과 연구실에 내가 상의할 것이 있어 찾아간다고 미리 연락해 주게. 시간 약속은 못 정하겠네. 저 친구가 오는 대로 무조건 찾아간다고만 전하게.’
이야기를 마친 스티븐 그로버 클리블랜드(Stephen Grover Cleveland) 대통령은 자리를 떠났다.
그리고 그 순간부터 미국은 철도 대신에 자동차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 결과가 미국 로키산맥의 눈길에서 원목을 싣고 달리고, 안데스 고원의 바위 벼랑에 석유를 실어나르고, 알래스카 얼음 위로 가스를 실어나르는 집채보다도 더 커다란 초대형트럭 운송사업이 시작하게 된 것이다. 오로지 철도 운송을 대신하기 위해서...... 기차가 가지 못하는 지역에, 기차에 실을 수 없는 물품을, 기차보다도 더 빠르게 운송하는 것이 그들의 목표다. 우리나라에서는 컨테이너 운반 차량이 그중에 큰 차량이지만, 해외에 나가면 그 보다다 더 크고 튼튼해 보이는...... 그야말로 첫인상이 온통 비싼 돈덩이로 보이는 그런 트럭을 자주 볼 수 있다. 미국이 철도산업은 낙후되었지만, 자동차 전용도로와 고속도로망은 지구상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한반도 대운하 건설’에 참여했던 사람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고 싶다.
천일 정기화물이라고 아십니까?
대신화물은 들어본 적이 있으십니까?
경동화물 차량 지나가는 것 보셨나요?
건영 정기화물 대리점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 아십니까?
그렇다면 그 회사들이 하루에 소화해 내는 화물운송 능력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해 보시지도 못하셨네요?
롯데택배. 우체국택배. 로젠택배. 한진택배.cj 대한통은 택배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숫자의 택배회사를 이용은 하고 계시지요?
수화물을 집에서 받을 것인지 화물회사 대리점에서 받을 것인지 결정하고 수수료를 지불하면 정말 기똥차게(?) 잘 배달이 되는 것을 아십니까?
집에 사람이 없어도 물품을 배달해 주고 사진으로 도착을 알려주는 택배세상을 아십니까? 집에 와서 물품을 수거도 해주거든요? 당일 배송이라는 매력에 무료배송이라는 특혜도 있답니다.
자갈치 시장에서 곰장어 한상자 사서 충주로 부칠테니 안내 좀 부탁드립니다.(대운하 관계자님들) 설마 자갈치 시장에서 접수는 받고, 롯데 택배에 위탁 배송하는 것은 아닐 테지요? 중간중간 집하장 이동 때마다 물품의 위치 전송해주는 것 가능한가요? 지금 엠비 수송선에 싣고 구미 보를 지나고 있다고요? 사흘 걸린다고요?
요새 귀신은 도대체 뭐 먹고 사나?
이 때 생각만 하면 열불이 치솟는다. 우르르 몰려다니며 홍보하시던 그 전문가 집단 학자분들을 지금 다 어디서 무얼 하시나?
수치도 모르고 염치도 없는 인간들아!!!!!
세테(Sete)는 다리와 운하가 서로 교차하는 지역과 몽 세인트 클레어 (Mont St Clair) 언덕에 기대어 들어선 항구지역으로 나뉘어 진다. 항구 지역의 뒤편으로 몽 클레어 언덕을 따라 길게 늘어선 주거지역은 하이타운과 다운타운으로 구분하기도 하는데, 항구에 인접해 낚시활동을 자유롭게 즐기고, 운하를 배경으로 일출과 일몰 풍경이 아름다운 지역을 특별히 ‘마을 속의 마을(Pointe Courte)’이라고 불렀다. 바로 이 지역이 세테 여행의 명소로 개성있는 카페와 로컬 맛집으로 유명한 레스토랑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운하의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여기 이 ‘마을 속의 마을’을 산책하는 즐거움을 맘껏 향유할 수 있다. 골목을 다니다보면 여기저기에 정말로 솜씨가 뛰어난 인상적인 그래피티들이 마을을 더욱 아름답게 만들어 주고 있다.
옛날부터 세테는 긴 황금빛 모래 해변과 프랑스인들이 거의 환장하다시피 하는 굴로 가득한 석호, 그런 소금 호수로 둘러싸인 작고 아름다운 항구로, 몽펠리에를 비롯해 비교적 혼잡한 랑그독 지방의 여타 도시들에 비해서 비교적 조용하고 깨끗하고 안락한 휴양처로 인식되어 왔다. 운하 가득 정박해 있는 요트와 어선들 숫자만큼 앞바다인 지중해에서 풍부한 해산물이 넘치듯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이 포구에 해산물 전통시장과 해산물 전문 레스토랑들이 곳곳에 들어서 있다.
그동안 둘러 본 몽펠리에와는 또 다른 모습 또 다른 분위기의 세테 또한 무척이나 살기 좋은 곳이라 생각된다.
혹여, 훗날 언젠가 몽펠리에 한 달 살기를 하게 된다면 ‘미디 운하 240km 트래킹’과 ‘세테 일주일 체류하기’는 꼭 해보고 싶다. 그 일주일 세테 체류 중에서 반은 그림을 그리고 사진을 찍으며 보내고, 나머지 반은 마르세유에서 세테까지 길게 광야처럼 펼쳐져있는 석호(潟湖.lagoon)해변을 트래킹 삼아 마냥 걸어보고 싶다. 초간단 차림으로 백사장을 뛰다가 걷다가 물장난을 즐기다 운이 좋아 굴이라도 따게 되면 와인 한잔 하고...... 지중해 햇살에 까맣게 타게 되면 공항 검색대에서 사무실로 불려도 가고 짐 검사 따로 받으면 되는 거지 뭐.
하지만, 금강산도 식후경이라고 했다.
일단은 라 푸엥트 쿠루트오(Pointe Courte)에 가서 뭐라도 좀 먼저 먹고나서 생각해 볼 일이다. 마을 속의 마을이 자랑한다는 해산물 요리라도 먹어볼까?
-- 다음 여행기에서 (몽펠리에. 세테 여행)을 마치고 , 마지막 여정인 (바르셀로나 여행)으로 넘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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