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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멜랑꼴리 오딧쎄이> '샤갈의 마을' 이라 불리는 (생폴 드 방스)

by 피안재 2023. 9. 4.

 

 

 

 

  참 닮아도 많이 닮았다.

  항공사진이나 멀리서 찍은 마을 풍경사진을 얼핏 보노라면 나는 태연하게 ‘오르비에토’라고 대답했을 것이다. 마을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교회의 종탑 자리에 있어야 할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웅장한 자태가 왜 갑자기 쪼그라들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그제야 생겨났을 것이다. 이탈리아 중북부의 바위벼랑 위에 건설되어 이따금 교황의 은신처로 활용되던 성곽도시이자 요새인 오르비에토와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지방의 세인트 폴드 방스(이하 생폴)의 첫인상은 ‘참 닮아도 너무 닮았다’는 느낌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좁고 가파른 언덕길의 작은 버스정류장에 내리면 저만치 마을을 에워싸고 있는 성채가 눈에 들어온다. 시원하게 뚫려있는 방스로를 따라 띠욀 광장(Pl. du Tilleul)을 지나면 이제 비로소 생폴(St.Poul de Vence) 방문이 시작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자꾸만 시선이 뒤로 쏠린다. 방금 지나온 정류장 건너편의 아담한 하얀 건물이 묘하게 우리의 관심을 잡아끄는 것이다. 흡사 우리나라의 한적한 시골마을을 방문하다보면 초입에 커다란 느티나무 아래 아담하게 꾸며진 마을회관을 대하는 느낌이었다.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기어코 도로를 건너 찾아가 보니 그것은 작은 교회였다. 아니지, 여기가 프랑스니까 아주 작은 시골 성당이라고 불러야겠다. 생폴의 수호성인인 클라라 성녀에게 헌정된 생 클레어 성당(Chapelle Sainte Claire)은 현재 내부공사 중이라 안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었다. 아담하니 작고 예쁘게만 보였는데 알고 보니 17세기에 지어진 나름 역사를 가진 생폴의 소중한 문화재이자 유산이었던 것이다.

  버스정류장에서 띠욀 광장에 이르는 이 공간이 사실은 해외의 유명 보도사진에 종종 등장했던 아주 유서 깊은 명소임을 아는 사람은 그렇게 많지 않아 보인다. 다만 그 일부라 할 수 있는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톡톡히 타고 있는 한 호텔을 겸한 레스토랑에 대해서만 시시콜콜한 것까지 관심을 가지고 있을 뿐이지 싶어 보일 뿐이다.

  육중한 성문을 지나 성채 안의 마을에 들어서면 온통 꾸불꾸불 미로처럼 얽혀있는 좁고 가파른 골목길과 계단길이 나온다. 생폴은 그만큼 현지인들이 살아가기에는 대단히 불편한 곳이다. 성벽을 따라 마을의 외곽으로만 소수의 차량들이 다닐 수 있고 주차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성내의 모든 생활 수단은 들거나 지고 나르거나, 작은 손수레를 이용하거나 당나귀 등의 등짐을 이용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그것은 예나 지금이나 별반 크게 다를 것이 없다. 그러다보니 버스 정류장에서 띠욀 광장에 이르는 너른 공터는 자연히 마차들이 사람과 짐을 내리고 기다렸다가 다시 사람과 짐을 싣고 떠나는 공용터미널이었던 것이다. 분수대가 있어서 행인과 말들에게 물을 마실 수 있는 장소였으며, 짐을 쌓아두는 창고와 말을 쉬게 하는 마굿간과 마차를 수리하는 대장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그 사이에 음식점과 숙박업소가 드문드문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오늘날에야 여행이 자유로워져서 프로방스니 코트다쥐르니 하면서 니스가 어떠니 모나코와 칸이 어떠니 쉽게 말하지만, 생폴 드 방스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아마도 20 세기가 시작되면서부터였다 말할 수 있겠다.

  결국, 수많은 여행자들을 알 수 없는 매력으로 무수히 잡아끄는 생폴 드 방스의 역사는 또 하나의 명소인 ‘황금 비둘기’라는 이름의 레스토랑 역사와 같이한다고 해도 별반 그리 무리는 아닐 것이다.

  나는 이제 그 황금 비둘기의 역사를 아주 짧게나마 살펴보고 넘어가는 것으로 코트다쥐르 여행의 백미라고도 일컬어지는 생폴 드 방스 여행을 시작해 보려고 한다.

 

 

  두 번의 세계대전을 계기로 사람들은 새로운 소식(정보)에 많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그 새로운 정보가 놀라운 힘을 발휘한다는 사실과 그것의 활용에 따라 생활이 달라지고 나아가 돈이 된다는 사실까지 알게 되자 이때부터 신문과 라디오 활용에 적극적으로 매달리기 시작했다. 세계 곳곳의 보다 신속하고 정확한 정보 파악이 금은 시장은 물론 석유시장과 주식시장의 성패를 가르게 되자 점차 언론은 모든 인간들의 생활 패턴까지 바꾸게 만들기 시작했다. 하지만 자나 깨나 정치. 경제. 재난. 전쟁 등의 정보만이 홍수처럼 쏟아지는 상황에서는 모두가 곧 정신병자가 될 처지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이럴 때 새롭게 등장한 것이 이른바 스캔들이었다. 스포츠. 영화. 유명인들의 사생활. 감추어진 비사 등등이 획일적인 정보 시장에서 청량음료로 등장했던 것이다. 파파라치가 등장하고 비밀스런 스캔들이 하나씩 터질 때마다 세상 사람들은 웃고 울고 떠들고 소리치며 화풀이 혹은 대리만족 또는 스트레스를 날려버리곤 했다. 어느새 사람들은 해외토픽을 손꼽아 기다리는 정도가 되어버린 것이다.

  멀고먼 동아시아 대한민국 안에서 벌어지는 동족상잔의 전쟁 소식이 해외토픽을 온통 장식하고 있던 1951년 어느 날, 프랑스의 모든 신문과 주간지에 실린 몇 장의 사진이 온통 파리 거리의 가판대를 채우고 있었다.

  ‘프랑스의 자존심 시몬 시뇨레가 생폴 드 방스에서 이브 몽땅과 비밀리에 결혼’이라는 소식이었다. 이는 곧 해외토픽 뉴스로 온 세계로 타전되었다.

  ‘그게 누군데?’

  ‘결혼했다는데 그게 어째서?’

  사실 그랬다. 시몬 시뇨레라는 프랑스 여배우와 이브 몽땅이라는 이탈리아 출신의 프랑스 남자 배우가 결혼식을 했다는데 그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하는 해프닝 정도라 모두가 생각했다. 세상 대부분이 아예 그들에 대해서 잘 알지 못했다는 것이 맞았을 것이다. 오늘날의 인터넷 세상이 아니었고, 정작 텔레비전도 등장하기 이전이었으니 말이다.

  그나마 영화 음악 시장이 활성화된 미국이나 영국 정도에서 이들 토픽에 약간의 관심을 가졌을 정도였을 뿐이다.

  하지만 프랑스의 사정은 절대 달랐다. 달라도 너무나 달랐다.

  그것은 스캔들의 대상이 시몬 시뇨레라는 사실 때문이었으며, 하필 그 상대가 이브 몽땅이라니....... 이건 그야말로 최악의 시나리오였기 때문이다.

 

에디트 피아프와 이브 몽땅(좌) 시몬 시뇨레와 이브 몽땅(우)

 

 

  흔히들 프랑스 사람에게는 다른 나라 사람들과는 다른 프랑스인 특유의 정서가 따로 있다고들 말한다. 똘레랑스를 꼽는 사람들도 있지만........ 뭔가 딱 꼬집어서 무엇이라 딱 말할 수 없는 그런....... 묘한 무엇인가가 있기는 있다.

  그런 프랑스인들의 정서 안에서 ‘적어도 프랑스 여성’ 하면 어떤 확고하게 고정된 여성상 같은 이미지를 가진 두 명의 여인이 등장한다. 메스미디어가 활성화된 현대에 이르러서까지도 유명세를 톡톡하게 떨치는 코코 샤넬이나 카트리느 드뉴브에 이르기까지 여성 스타는 수없이 많이 존재하지만, 프랑스인의 정서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두 여성에게는 감히 비교대상이 되지 못한다.

 

  에디트 피아프(Édith Piaf)는 세계 대전이라는 참혹한 전쟁의 상흔과 황폐화된 경제 복구의 시련기에 프랑스인들의 영혼을 위로해준 실로 위대한 가수이다.

  파리의 가난한 노동자 구역인 베르빌에서 거리 가수인 어머니와 거리 곡예사인 아버지 사이에 태어났으나 부양할 수 없는 생활형편으로 알콜 중독자인 할머니 손에서 창녀촌에서 자랐다. 15세 무렵부터 생계를 위해 이 골목 저 골목을 누비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가 그녀의 노래 솜씨를 눈여겨보던 사람에 의해 카바레 가수의 길로 접어들었다. 오랜 무명의 시절을 보낸 끝에 자신이 직접 작사한 <장밋빛 인생> <사랑의 찬가>를 불러 실로 어마어마한 히트를 시키며 명실상부 위대한 가수의 반열에 올라섰다.

  여기까지의 모든 것이 참으로 묘하게 ‘포르투갈의 영혼’으로 추앙받는 <검은 돗배>를 부른 아말리아 로드리게스(Amália da Rodrigues)와 너무도 닮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아마도<목포의 눈물>을 부른 이난영 여사를 나는 꼽겠다.

 

  그렇게 최정상 가수의 반열에 오른 피아프가 마르세유에 체류하는 동안에 한참 연하의 한 남자에게 시선이 꼽혔다.

  이탈리아 이민자의 아들로 태어나 어려서 마르세유로 이주한 이브 몽땅 이었다. 워낙 어려운 생활 형편으로 어려서부터 빵집에서 심부름하고 누이의 미용실에서 일하기도 했으며, 청년이 되어 마르세유 항구에서 부두노동자로 일하며 밤이면 인근 카바레에서 노래하던 고난의 시절이었다. 피아프는 그런 이브 몽땅에게 노래를 부르는 것과 가수가 되는 것에 관하여 이런저런 조언을 해주다가 이내 연인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처절하게 가난 속에서 힘들게 성장해야만 했던 두 사람의 공통분모는 이내 쉽게 두 사람을 하나로 엮이게끔 만들어 주었다. 피아프는 이브 몽땅에게 진심이었다. 그의 후견인이자 헌신에 가까운 전폭적인 지지자였다. 그러자 점차 이브 몽땅의 처지도 나아지기 시작했다. 무대에 올라 노래했고 영화로 데뷔도 하였다. 3년 정도 지났을 때 이브 몽땅이 <밤의 문>이라는 영화에 출연하면서 주제가로 <고엽>을 불렀는데 그만 공전의 대히트를 기록하고 말았다.

  거기까지였다.

  이제 스타의 반열에 오른 이브 몽땅이 작별의 인사도 없이 파리로 가버리면서 피아프를 차버린 것이다. 피아프가 받은 상처는 컸고 아주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혔다. 많은 사람들이 그런 이브 몽땅을 비난했지만, 이상하게 비난이 커지면 커질수록 그의 인기는 상승하는 기현상을 낳고 말았다. 그런 그에게 다시 몇 년이 지나 새롭게 그의 눈에 쏟아져 들어오는 한 여자가 있었다.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는 사람이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이미 모두 가진 금수저 출신의 프랑스 국민여배우이다. 육군 장교출신으로 국제연맹에서 일하는 통역관 아버지와 폴란드 유대인 출신의 매우 부유한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파리는 불타고 있는가> <침묵의 살인> 등으로 승승장구 하였으며, 그녀에게는 비영어권인 프랑스인 최초로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한 명실상부 국민배우로 추앙받고 있은 대배우이다. 영화 감독인 이브 알레그레와 결혼해 슬하에 1남 1녀를 두었는데 느닷없이 1949년 이혼 소식이 널리 알려졌으며, 당시 그 배경에 이브 몽땅이 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국민가수 에디트 피아프를 꼬득여 실컷 단물만 모두 빼먹고는 차버린 천하의 거랑말코 이브 몽땅이 또 이번엔 국민배우 시몬 시뇨레를 꼬득였단 말이야? 그건 안되지. 절대로 안될 일이지. 암 절대로 있어서는 안 될 일이고말고.’

  어디를 가든지 프랑스인들이 모이기만 하면 이번 스캔들에 대해서 험한 말들을 늘어놓았다. ‘설마....... 피아프야 그놈이 불쌍해 보여서 뒷바라지 해주다가 당한거지만...... 시몬이 뭐가 아쉬워서 한참이나 연상인 그런 거랑말코에게 관심을 갖는단 말이야? 이혼까지 해가면서 말이야. 아닐 거야. 말도 안 돼.’

  그런 상황에서 빼도박도 못 하는 증거가 대서특필 신문 일면에 등장했던 것이다.

  ‘프랑스의 자존심 시몬 시뇨레가 생폴 드 방스에서 이브 몽땅과 비밀리에 결혼’

  프랑스인들이 받은 상처는 컸으며 이 휴유증은 한참 시간이 지나도 가라앉을 줄을 몰랐다. 온갖 억측과 소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나갔다.

  ‘그런데 왜 하필 생폴 드 방스야? 거기가 도대체 어디야? 사진에 나오는 결혼식 장소가 어디야? 배경에 나온 액자가 클림트의 그림 아니야? 그럼 생폴 드 방스가 갤러리야?’

  이브 몽땅의 스캔들은 이번엔 전혀 엉뚱하게 번져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생폴 드 방스가 도대체 뭔데? 어차피 들통 날 결혼식을 왜 거기까지 가서 하냐고? 파리에 넘쳐나는 게 성당인데? 생폴 드 방스에 가면 뭔가 다른게 있나?’

  ‘생폴 드 방스가 엄청난 사랑의 도시래. 적당히 좋아하는 사이도 생폴 드 방스에만 가면 갑자기 사랑병이 돋아서 열정이 타오르고 결혼하고 싶어서 미치게 만드는 묘약이 그곳에는 있대. 누군가를 미치게 사랑한다면 무조건 생폴 드 방스로 데려가면 된대.’

  이제 스캔들은 전혀 엉뚱한 상황으로 변질되기 시작하면서 뭇 사람들의 가슴속에 신비한 사랑의 지상낙원으로 자리 잡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러자 이제껏 드러나지 않았던 피카소며, 샤갈이며, 피츠제럴드며, 찰리 채플린 등 수많은 화가와 유명인들은 언제부터인가 수도없이 생폴 드 방스에 드나들고 있었다는 사실들이 하나 둘 드러나기 시작했던 것이다.

  ‘나 생폴 드 방스에 가고 싶어.’

  ‘죽어도 생폴 드 방스에서 죽고 싶어.’

  ‘신혼 여행은 무조건 생폴 드 방스야.’

  '생폴 드 방스는 그 자체로 이미 사랑의 도시야.'

  그렇게 전혀 엉뚱하게 요상한 열풍이 생겨났고......... 그 요상한 열풍은 지금 이 순간에도 여전히 진행형이다.

 

 

 

 

  생폴 드 방스 여행이나 우리나라 젊은 여행자들이 그토록 오매불망하는 호텔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를 좀 쉽게 이해하고 접근할 수 있게 돕기 위하여 띠욀 광장에 설치되어 있는 좀 특별하고 이색적인 안내 표지판을 먼저 살피고 넘어가야만 하겠다.

  안내표지판의 흑백 사진 속에는 분명 겨우 두 량뿐인 기차가 지금의 이 자리로 보이는 띠욀 광장 외곽을 지나 언덕을 올라가는 사진이 게재되어있다. 위쪽의 표기를 보면 생폴 드 방스를 지나 방스가 도착지라고 선명하게 적혀있다. 그리고 우측 하단으로 1916에 촬영되었음을 알리고 있다.

  아무도 설명해 주지 않고 어떤 여행 안내서에도 나와 있지 않지만...... 일백년 전 이곳에는 분명히 철로가 개설되었고 기차가 운행되었었던 것이다.

  파리에서 출발해 제 2의 도시인 마르세유에 도착하는 기차가 있었는가 하며, 파리에서 마르세유를 경유해 칸과 니스와 모나코를 지나 제노아를 거쳐 밀라노를 통해 로마까지 연결되는 국제선 열차가 운행하고 있었다.

  국제선 열차가 다니는 그 중요한 노선 중에서 중요 거점인 니스의 인근으로 아주 가까운 앙티브와의 딱 중간 정도인 카디스 슈메르역(Cagnes sur Mer)에서 시작해 산언덕 위의 방스(Vence) 까지의 아주 짧은 구간에 간이 철도라 할 수 있는 지방철도가 1911년에 개통 되었던 것이다. 카디스와 생폴 드 방스와 방스가 간이 철도의 전부였고, 이는 다분히 이 지역의 관광사업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을 것으로 나는 생각한다. 1900년대 초의 열악한 도로사정을 감안하면 생폴이나 방스는 타지역 사람들의 접근이 결코 쉽지 않았을 테니까 말이다. 이 시골 간이역에 국제선 열차를 비롯한 모든 열차가 잠시 정차했다가 출발했다. 아마도 엄청난 특혜였을 것이다.

  로마에서 출발하던 파리에서 출발하던 유명인들은 카디스 슈메르 역에 내려서 굳이 꼬불꼬불 비포장도로를 마차나 택시를 타고 올라가기 보다는 비록 허접했을지언정 기차를 타고 생폴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을 것이다. 20세기에 들어서 생폴이 각광을 받기 시작한 이유에 가장 결정적인 것은 바로 저 허접한 기차였다고 나는 확신할 수가 있다.

  도로가 확장 포장되고 자동차 성능이 월등해지면서 그 허접한 기차는 활용도에 점차 밀려나면서 종국엔 20세기 중반에 중단되었다가 완전히 사라지고 만 것이다.

  하여..... 이쯤에서 생폴 드 방스 여행을 생각해 보면서....... 적어도 생폴 드 방스를 제대로 여행했다고 치자면 자가용이나 버스나 택시가 아닌 기차를 타고 다녀봤어야 제대로 생폴을 여행한것이라고 외친다면........ 미친X 소리 듣기 딱이 아닐까?

  흑백사진속의 허접한 기차가 가쁘게 숨을 몰아쉬며 부지런히 사람들을 생폴까지 실어 나르고 있었던 1920년에 제 1차 세계대전에 직접 참전했다가 막 돌아온 프로방스 출신의 농부 폴 룩스(Paul Roux)는 다시는 사랑하는 아내 티티(Titti)의 곁을 떠나지 않기로 결심하면서 함께 작은 카페를 열기로 작정한다. 여기저기 카페 터를 알아보고 다니던 룩스의 마음을 잡아 끈 장소가 바로 생폴 드 방스 기차역 옆의 마굿간 터였다. 생폴 사람이던 여행자들이던 어쨌거나 생폴에 왔다면 반듯이 거쳐 가야 하는 길목이었던 것이다.

  룩스와 티티는 직접 마굿간을 수리해 나름 프로방스의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아늑한 카페로 만들어 ‘로빈슨으로부터(Chez Robinson)’ 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영업을 시작했다. 사람 좋고 성실하고 허튼 일도 마다하지 않는 룩스와 프로방스 음식솜씨라면 일가견이 있는 티티의 카페는 개업과 동시에 엄청나게 성황을 이루었다. 늘 사람들로 가득차고 넘쳤던 것이다. 주말이면 의례히 주변 인근의 현지인들이 모두 몰려나와 야외 테라스에서 와인을 마시고 밤이 깊도록 함께 춤추는 일을 당연한 행사처럼 치르게 되었다. 점차 이 의식과도 같은 행사에 여행자들이 참여하기 시작했다. 리노 벤츄라와 이브 몽땅과 무하마드 알 리가 바로 그 초창기 멤버였다. 그들은 이곳에서 마을 사람들의 축제에 함께 참여했으며 그 추억을 주변 사람들에게 소개하기 시작했다.

  몰려드는 사람들에 비해 카페가 비좁다고 생각한 티티가 여행자들의 요청이 쇄도하는 숙소 문의에 대한 해답으로 확장을 요청하였고, 룩스는 주변 장인들의 도움을 받아 처음에는 방 세 개짜리 여관으로 확장했다가, 머지않아 다시 작은 호텔로 대대적인 확장 공사를 벌이게 된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지금의 호텔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가 탄생하게 된 것이다.

  폴 룩스는 각종 예술 분야에 대해 깊은 관심과 함께 꽤나 너른 안목과 지식을 가진 사람이었다. 하지만 늘 자신은 어느 한 가지에도 소질을 가져보지 못한 주변인일 뿐이라고 겸손한 태도를 경주했다. 프로방스의 농촌을 그대로 담고 있는 분위기와 룩스가 가진 예술에 대한 안목과 경지와 티티의 탁월한 음식솜씨 덕분에 수많은 예술가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찾아들었다. 너그러이 외상도 허락했고 이따금 밀린 숙박비나 밀린 식사비를 대신해 예술가들이 작품을 남겨놓기가 일상이 되기도 했다. 그런 작품들이 하나 둘 계단이나 카페의 벽면을 장식하기 시작하더니 점차 빽빽이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그리고 바로 그런 시기에 몽땅(Montand)과 시몬 시뇨레(Simone Signoret)의 생폴(Saint-Paul)에서의 결혼식과 피로연이 바로 이곳에서 벌어졌던 것이다.

  이어서 인근 앙티브에 머물고 있던 어니스트 헤밍웨이(Ernest Hemingway)와 친구들이 찾아들었고, 소설가 피츠제럴드(Francis Scott Fitzgerald) 가족이 동참하면서부터 소문이 나서 유명인이나 진정한 예술가라면 반듯이 찾아와야만 하는 명소로 급부상하기 시작하더니 이사도라 던컨 (Isadora Duncan)의 방문은 그야말로 최고 정점을 찍는 것이 되었다.

  그 후로도 제2차 세계대전을 치루는 동안에도 호텔은 브라크(Braque)와 레제(Léger)와 같은 고군분투하는 예술가들에게 한적하고 안전한 안식처가 되었고, 피카소(Picasso), 샤갈(Chagall), 르누아르(Renoir)가 자주 이곳에 들러 머물면서 휴식을 취하는가 하면 새로운 창작열의를 얻고는 했다.

  50년대가 지나가기도 전에 이곳은 미로(Miro), 브라크(Braque), 샤갈(Chagall), 칼더(Calder), 세자르(Cesar)의 작품이 벽면을 채워나가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이웃마을 방스에 체류하던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의 그림이 벽을 장식하고 있고, 미로(Mirò)가 수영장 옆의 따뜻함 속에서 목욕을 하고 있으며, 레제(Lér)의 벽화가 테라스를 둘러보고 있고, 세자르 발다치니(César Baldaccini)의 유명한 엄지손가락 조각품이 입구에서 손님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은 여전히 카페이자 레스토랑이며 호텔이다. 유명세를 떨치는 미술관이나 갤러리가 결코 아니다.

  피카소 사진 아래서 마시는 에스페레소는 지난날 이브 몽땅이 담배 연기를 뿜어내며 마시던 그 커피와 같은 커피이며, 당신이 선택할 수 있는 생선구이는 지난날 피카소와 샤갈이 담소를 나누며 먹던 그 생선구이인 것이다. 이사도라 던컨이 마시던 와인을 주문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솔직하게........ 궁금하기는....... 이 호텔의 가치는 얼마쯤 갈까?

  때론 숙박비 대신, 때론 밥값 대신, 때론 다녀간 기념으로 벽면에 그냥, 체류 기간에 고마워서 선물로, 특별한 이유 없이 하나 둘 받다가 보니 이정도 쯤 되었는데........ 피카소나 마티스나 샤갈이 제대로 사인만 확인된다고 하면 한 작품에 수백억은 우습고 천억 원대를 넘는 작품도 수두룩한 판에....... 아이고야! 처음 내걸렸을 때부터 모조리 진품으로 항상 그 자리에 그 상태였다니........   그러니 음식 값이 조금 비싸다고 해도 그건 피카소와 달리와 샤갈과 마티스 이름값이자 눈 호강 값이라고 대충 이해해야만 할 것 같다.

  지금도 여전히 룩스와 티티의 가족이자 후손들이 가족경영을 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가 찾아갔던 시간이 하필 브레이크 타임 이었다. 이곳은 브레이크 타임 준수는 엄격하기로 아주 유명하다.

  거기에다 황금 비둘기에서 여행자들에게 신신당부하는 것이 바로 기본적인 매너 준수이다.

  호텔이자 레스토랑이자 카페인 이곳에 특히 동양에서 온 젊은 여행자들의 매너 때문에 심하게 골머리를 앓고 있다고 한다. 식당의 기본 매너는 예약과 웨이팅이라는 입장 매너에서 시작된다. 그런데 자신이 앉고 싶은, 혹은 목표로 삼고 있는 유명 미술품 아래 자리를 달라고 떼를 쓰는 것이다. 자리 선택권은 손님의 몫이나 권리가 아니다. 웨이터나 지배인의 고유 영역인 것이다. 그런데 원하는 자리를 주지 않으면 동양인에 대한 인종차별이라고 외친다. 그리고 이들은 음식을 즐기거나 향유하려고 찾아가는 여행자들이 결코 아니다. 이름난 명소에 왔음을 증명하는 인증샷은 필수이며 더 많은 작품을 사진에 담기 위하여 다른 사람들을 안중에 두지 않으면서 온갖 무리한 행동으로 적지 않게 불편을 끼치고 여러 가지 민원을 만들어내고 있는 상황이다. 그게 끊임없이 반복되다보니 운영하는 입장에서 동양인으로 보이는 젊은 여행자 무리를 보면 다소 긴장하는 표정이 역력해 보이는 것이 사실인 것이다. 피카소와 이사도라 던컨이 먹었던 음식을 즐기고 프로방스의 분위기를 향유해 보려는 마음이 아니면 굳이 억지로 찾아가서 비싼 음식 값 치르고도 남의 험악한 눈초리와 질책을 감수하면서까지 인증샷에 목숨 걸 필요가 있을까?

  그걸 굳이 문화의 차이나 소양의 차이라고 해야 할까?

  손님이 차서 문밖에서 대기를 해야 한다면, 현지인이나 다른 여행자들은 문이 열리고 관리자가 불러줄 때까지 그대로 서서 차분하게 기다린다. 그런데 동양의 여행자들은 수시로 창문 틈으로 안을 들여다보며 연실 무언가를 열심히 살핀단다. 그게 안에서 음식을 즐기고 있는 유럽인들에게는 엄청난 실례일뿐더러 더하여 공포감으로 다가온다고 한다. 심하게는 간접적 위협으로 받아들이게 된단다. 듣고 나서 가만히 생각해보니 나 역시도 기분 나쁠 것이 너무나 뻔하지 않은가?

  생폴 여행을 마치며 이곳을 다시 지나가면서 드는 생각도 역시....... '근현대사 속에서 생폴의 역사와 황금 비둘기의 역사는 그 맥을 함께 하였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방스에서 주전부리를 하며 다녔음에도 심하게 허기가 밀려온다.

  호텔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에서 다소 센 금액을 지불해서라도 프로방스식 해산물 요리를 피카소를 떠올리며 먹어보겠다고 해서 찾아왔는데 브레이크 타임으로 문이 닫혀버렸다. 아내의 표정을 슬쩍 살펴보면서 ‘이게 시방 다행이여 아님 불행이여?’라고 약간의 자조 섞인 물음을 자신에게 던져본다.

  ‘뭔가 먹기는 해야겠는데 어디서 무엇을 먹지?’

  띠욀 광장의 주변을 살펴보는데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 호텔을 지나쳐 우측으롤 시선을 돌려보니 눈에 들어오는 너른 공터에 보이는 초록색 천막에 황금색으로 카페 드라 팔라스(Café de la Place)라고 적혀있다. 야외 테라스도 길게 놓아져 있는데 손님이 하나도 없다. ‘별 볼일 없는 카페인가?’ 하지만 어쩌겠는가? 때는 지나고 있었고 허기는 왕창 느껴지는 판에 다른 음식점이 없는 마당에..... 그래서 무작정 들어갔다.

  웬걸? 안에는 손님이 제법 있었다. 하긴 날씨가 제법 쌀쌀한 편이기도 했고 때마침 찬바람이 제법 심하게 불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해가 되었다. 여기저기 테이블을 훔쳐보노라니 아무래도 이곳은 파니니 맛집인 것 같다. 대부분이 파니니를 먹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도 파니니를 주문했다. 뜨거운 커피를 시키려는데 기어코 생맥주가 마시고 싶다는 챠밍여사가 아닌가? 거기다가 바람도 세차고 추운 날씨에 야외테라스에서 드시겠단다.

  ‘추운데 왜 밖이야? 저기 난로 옆에 자리 있는데?’

  ‘프로방스라면서...... 햇살 한주먹이면 절대 안 추운 곳이라며....... 알코올 한 모금 들어가면 대충 견딜 수 있을 것 같아. 조용한 밖이 더 좋아.’

  헐!!!

  그래서 파니니에다가 맥주를 가지고 야외테라스의 햇볕이 드는 바람이 가로막힌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런데 얼씨구?

  갑자기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모여들더니 우리 주변의 야외테라스를 가득 채우는 것이 아닌가? ‘거봐. 우리가 사람 잡아 끄는 운이 있기는 있는 모양이야? 우리만 가면 사람들이 모여들잖아. 우리도 장사를 해야 하나?’

  다른 사람들도 대부분 파니니에 커피를 들고 나온다. ‘아무래도 이집 파니니 맛집이 맞나봐.’ 그래서 인터넷을 검색해 보았다.

  그런데 이 집, 라 콜롱브 도르(La Colombe d'Or)와 더불어 생폴에서 뿐만이 아니라 프로방스 전체에서도 알아주는 맛집이란다.    옛날엔 양조장이었던 곳을 카페로 바뀌었단다.

  또 헐!!!!!!

 

 웅장한 성벽 아래로 작은 구멍처럼 보이는 성문이 나타나고 이 진입로를 노려보고 있는 녹슨 대포가 덧없이 흘러가버린 세월을 노래해 주고 있는 듯 느껴진다.

  이 대포에는 내가 생폴 여행 중에 현지인에게 직접 전해들은 한 가지 전설이 서려있다.

  이곳 생폴 드 방스와 언덕위의 방스는 사실 사이가 썩 좋지 않았다고 한다. 가장 가까운 이웃일 수도 있었겠지만 속사정을 살짝 들여다보면, 상대가 잘되는 꼴을 절대로 가만히 두고 보지 못하는 견원지간 이었다 한다.

  그러던 중에 화포(대포)라는 무기가 등장했다. 니스 인근에서 벌어진 전투를 통해 양측은 모두 대포의 위력을 실감했다. 생폴은 서둘러 대포를 한 문 구입했다고 한다. 바로 지금 성문에 설치된 저 대포다. 경제 사정으로 대포를 구입할 수 없었던 방스 사람들은 긴급 대책회의를 열었다. 대포를 들여오는 날 밤을 이용해 몰래 습격하여 대포를 빼앗아 오기로 작전을 세운 것이다. 생폴에 대포가 들어왔다. 그리고 지금의 저 자리에 설치를 했다. 다만 대포와 화약은 도착을 했는데 아직 포탄이 도착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런 상황에서 밤이 깊었고, 인원수에서 절대적 우위에 있던 방스 군대가 은밀하게 침입을 해왔다. 이 작전을 눈치 챈 생폴 입장에서 믿을 것은 대포였는데...... 정작 이런 상황을 대처하기 위하여 마련한 대포인데 지금 포탄이 없는 것이다. 방스 군대가 갈퀴와 밧줄과 사다리를 가지고 성문을 향해 접근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이런 다급한 상황에서 생폴의 젊은 장교가 한 가지 계책을 들고 나왔다. 횃불을 환하게 켜든 포수들이 서둘러 대포에 화약을 장전했다. 그리고 포탄대신 체리나무 열매를 포탄 대신에 가득 쏟아 부어 채웠다. 방스 군대가 성벽 아래의 협소한 골목으로 밀려들자 대포에 불을 댕겨 요란한 뇌성과 함께 발사했다. 성벽위의 생폴 병사들이 횃불을 아래로 내던졌다. 횃불에 드러난 방스 군인들의 얼굴과 옷이 온통 피로 범벅이 되어 물들어 있었던 것이다. 공포에 사로잡힌 방스 군대가 허겁지겁 어둠속으로 줄행랑을 치기 시작했다. 다음날 날이 새면서 집합을 해본 후에야 그것이 피가 아니고 대포에 의해 손상을 당한 병사가 하나도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속았던 것이다. 즉시 다시 역습을 가하려는 상황에 파수병으로부터 생폴에 진짜로 포탄이 방금 들어갔다는 보고를 받게 되었다.

  이야기를 전해 듣고 나서 다시 녹슨 대포를 보노라니 혹 그럴싸한 장난감이 아닐까 싶어진다.

 

  생폴 드 방스(Saint-Paul de Vence) 여행은 이곳 북쪽 문(Porte de Vence)에서 시작해서 반대편 마을 공동묘지가 있는 남쪽 문까지 이어지는 생폴의 척추에 해당하는 루 그란데(rue Grande) 거리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는 것이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좁고 제법 가파르기까지 한 꼬불꼬불한 골목길은 곳곳에 계단까지 설치되어 있어서 그리 만만하게만 여길 편안한 산책길은 결코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길 양편으로 올망졸망 아기자기하게 늘어서 있는 작은 갤러리들과 기념품점들과 아트 스튜디오와 카페나 레스토랑과 구멍가계들이 풍겨 내주는 정취가 여행자들의 시름과 노고를 잠시 잊게 만들어주기에 충분하다.

  이 좁고 협소한 골목길 곳곳에 숨겨진 듯 자리를 틀고 돌아앉아있는 분수를 여기저기서 만날 수 있다. 도심의 중간쯤에서 만나게 되는 그랑드 퐁텐 광장(Place de la Grande Fontaine)의 분수는 실로 압권이라 할만하다.

  이제 생폴의 북문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여행을 시작하려하는데 시야 가득 쏟아져 들어오면서 계속 이어지고 발바닥으로 상쾌한 전율처럼 느껴지는 생폴만의 앙증맞은 골목길이 그렇게 예쁘고 정겨울 수가 없다.

  조약돌을 주워 다가 수를 놓듯이 펼쳐놓아 마치 모자이크로 만든 거리를 걷는 것만 같은 느낌이 든다. ‘어쩜 이리도 예쁘게 수를 놓았을까’하는 감탄이 절로 터져 나온다. 생폴의 성안에 펼쳐진 모든 골목길이 이렇게 만들어 졌다면 그것은 과연 어떤 광경일까? 우리는 거듭거듭 이 아름다운 골목길이 끊임없이 이어지기를 어느새 바라고 있었다.

  샤갈이 매일 이 길을 걸어서 황금비둘기로 진한 에스페레소를 한 잔 마시려고 지나다녔을 것이다.

  샤갈은 인생 말년의 19년을 바로 이 마을에 정착해 살았다. 그래서 생폴을 사람들은 '샤갈의 마을' 이라고 부른다. 지금 저만큼 앞쪽 휘어진 골목길로 방금 사라진 노인이 어쩌면 샤걀일지도 모른다. 만약 아니면 어쩌겠느냐고? 샤갈이 아니면 아마도..... 마티스가 아닐까? 윗마을 방스에 정착해 살던 마티스가 질좋은 와인을 한 병 얻게되어서 샤갈과 함께 마시려고 마실을 내려왔을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아닌것 같다고? 그렇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피카소와 모딜리아니였을 거야. 그들이 황금비둘기에 머물때면 곧잘 이 골목길을 따라 마을 공동묘지까지 산책을 했으니까 말이야.

  쫓아가서 확인해 보자고?

  좋아. 뛰어가서 붙잡고 민증 좀 보여달라고 하면 되지 뭐. 그런데 말이야. 만약에 허겁지겁 뛰어가 분수대 옆 골목길을 돌아가려는데 거기에서 산책중인......... 이사도라 던컨을 만나게 된다면 어떤 표정을 지어야 되지? 인증샷 좀 찍어야 한다고 부탁하면 들어줄까? 실은 그게 걱정이야.......

  이제 여기 아무런 치장도 되어있지 않은 낡고 오래된 우물터에서부터는 제법 가파른 계단과 언덕길이 펼쳐진다. 그렇다고 힘에 부칠 정도의 난코스는 결코 아니다. 아름다운 생폴까지 들어온 마당에 예서 발걸음을 되돌릴 수는 없지 않겠는가 말이다.

  잠시 숨고르기를 한 후에 골목길 양쪽으로 늘어선 갤러리와 기념품점과 아트 스튜디오에 시선을 두면서 이따금씩 고개들 들어 빼끔하며 겨우 드러나는 파란 하늘을 보노라면 어느새 계단을 올라와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아주 가끔 마주치는 현지인을 보면 먼저 구석으로 길을 비워드리면서 ‘봉쥬르’하고 말을 건네 본다. 그럼 이내 환한 미소와 함께 ‘봉쥬르’가 메아리가 되어 되돌아온다.

  알록달록한 스카프로 한껏 차림새의 포인트를 준 할머니가 손가락으로 언덕 위쪽을 가리키며 무어라 이야기를 하는데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다. 말씀 중에 나오는 ‘폰테인(Fontaine)’ 이라는 단어는 내가 이미 충분히 알아들을 수 있는 단어였기에....... 저쪽에 멋진 분수가 있다는 말씀이신 걸 눈치 챌 수 있었다. 이탈리아든지 스페인이든지 프랑스이든지 암튼 발음이 ‘폰테인’ 비스무리 하면 무조건 분수가 있다는 말이다.

  ‘메르씨’‘멸치볶음’이라 답하고는 가던 발걸음을 다시 채촉해 본다. 힘들어도 분수까지는 가서 쉬어야겠다고 생각한 때문이다.

  역시나 프로방스 여행의 백미는 골목길 산책이라고 해야겠다.

  거기에 더하여 생폴 골목길 산책의 백미는 바로 여기 그란데 분수가 있는 폰테인 광장(La Grande Fontaine) 이라는 사실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아마도 없을 것이다. 이사도라 던컨뿐만이 아니라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 소피아 로렌(Sophia Loren), 카트린 드뇌브(Catherine Deneuve) 등 세계적인 은막의 스타들이 이곳 분수대 받침대에 걸터앉아 손으로 물을 떠서 마셨던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곳이다.

  분수가 저토록 아름다운 것은 설치되어 있는 주변의 풍광이나 빼어난 장인의 솜씨로 치장된 분수 자체의 아름다움이 전부가 아니다. 분수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이유는 분수의 존재 자체가 다른 사람들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탄생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의뢰인의 다른 사람에 대한 사랑과 배려에서 멈추지 않고 말이나 양과 같은 동물들에게 까지도 사랑과 배려를 나누어 주는 매우 신성한 일이었다.

  마을 중심 광장에 설치된 분수는 온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생명수나 다름이 없었다. 마을 사람 모두가 그 물을 마시고 길어다가 씻고 빨래를 하며 살아갈 수 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가장 많이 찾고 이야기를 나누는 장소가 바로 그곳이었다. 소소한 물건들이나 집에서 재배한 과일과 야채를 가지고와서 나누고 사고파는 작은 재래시장이 시작되었다. 작은 음식점이 생겨났다. 마을을 지나는 나그네는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쉬었다가 다시 길을 재촉했다. 마을에 짐을 날라주는 당나귀도 영주나 귀족들이 타는 말도, 들판에서 풀을 뜯고 집으로 돌아가는 양떼들도 모두 이곳에서 목을 축이고 물을 마셨다.

  이 성스러운 분수는 프로방스 공국을 다스리던 봉건영주의 아내인 마라왕비가 마을의 솜씨 좋은 석공인 마틴(Melchior Martin)에게 의뢰하여 1615년에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네 개의 뱀 주둥아리에서 지금도 시원한 샘물이 콸콸 쏟아져 흘러내리고 있다. 무척이나 인상적이라 오래 기억될 만큼 분수 자체나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게 아름답다.

  다만 여기에서 아쉬운 것은........ 그리고 이번 여행 전체에서 아쉬운 것은 지금이 가장 추운 한겨울이자 가장 비수기라는 사실이었다. 6월 쯤 이었다면 생폴 드 방스가, 그리고 프랑스가 얼마나 아름다웠을까 하는 아쉬움을 한시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누군가 이 여행기를 읽어주시는 분에게는....... 5월 말에서 6월, 아니면 10월에 프랑스 여행을 하시라고 권하고 싶다. 너무나 크게 아쉽다.

  중세 시대에 부자나 귀족들은 죽은 후에도 부귀를 누리기 위하여 온갖 방법을 동원해 교회에 헌신했다. 로마나 파리나 피렌체나 베니스나 마드리드나 바르셀로나나 런던 등 권력과 돈이 모이는 곳에서는 어디에서나 항상 교회에 순종하고 헌신해왔다. 그만큼 내세의 안락한 삶이 간절했기 때문이다. 천국이냐 지옥이냐를 오로지 교회가 판단하고 결정지었기 때문이다. 하여 그들은 교회(교황)에게 돈을 바치고 땅을 기증하고...... 나중에는 교회가 부자와 귀족들에게 교회건물을 나누어 분양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그 시기가 바로 르네상스가 되는 것이다. 분양받은 교회의 건물을 최고의 화가와 조각가들을 데려다 실로 어마무시하게 치장을 시작했던 것이다. 그것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일이라 생각했는데..... 속내는 교회(교황)을 기쁘게 하는 일이 되었고, 덕분에 엄청난 재화와 권력이 모두 교회(교황)에게 쏟아져 들어가는 결과를 낳았다.

  ‘그렇게 바리바리 싸다가 바쳐서....그래 사후에 하늘나라 생활은 좀 나아지셨습니까?’

  ‘다들 천국에서 만수를 누리고 계시지요? 양과 사자가 함께 뛰놀고 있는가요?’

  그것은 오로지 가진 자들이 오로지 가진 자와 그 가족들만 죽어서 까지 잘 먹고 잘살겠다는 오만과 욕심에서 벌어진 파행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그런 심리를 이용하고 그런 일을 조작해서 부와 권력을 맘껏 누렸던 교회의 높은 지도자들은 또 어떻게 되었을까? 단테가 <신곡>에서 말하기를........ 지옥의 깊은 곳에 그런 일을 저지른 사람들이 머물고 있으며, 요상하게 지위가 높으면 높을 수록의 교회 최고지도자들이 가장 깊은 심연의 지옥에 떨어져 고통스런 나날을 보내고 있다고 했다. 인.샬.라. 당연히 그렇게 되기를.......

  그러나, 그런 탐욕한 자들이 오로지 돈과 권력에 심취하는 대도시를 벗어나면...... 사랑과 배려를 베풀고 남과 나누려는 수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그들은 세상 곳곳에 옹달샘을 파고 분수를 만들었다. 나그네에 대한 배려를 넘어 가축과 동물들에게 까지 베풀고자 하는 사랑과 정성의 산물이었다. 마을사람들의 생활용수이자 먼 길을 떠나온 사람들에게 제공하는 작은 휴식처였으며 사방에 흩어진 샘이나 분수를 잘 연결하면 그것은 하나의 훌륭한 길안내 지도나 마찬가지였다. 성지순례를 떠나는 사람들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출발하는 곳에서 어떤 어느 도시를 지나야 하는지와 그 도시와 도시의 중간에 몇 개의 분수나 샘물이 있는지가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 도시와 도시가 너무 먼 사막이라면 샘이라도 찾아서 노숙을 해야만 살아서 여행을 계속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 험난한 과정을 성공리에 마친 순례자가 돌아오면서 다시 그 가장 험준한 지역에 자비를 들여 또 하나의 샘을 파서 뒤에 오는 다른 여행자를 배려하곤 했다.

  과연 누가 천당에 올라가야 하는 사람이라고 생각하는가?

  오로지 교회에 충성하는 사람인가? 아니면 대상이 그 누구일지라도 진정으로 최소한의 배려와 사랑을 나누고자 하는 사람인가?

  어느 곳, 어느 여행지에서건 한적한 길가에 설치된 낡고 오래된 샘이나 분수를 보면 나는 항상 그 누군가가 처음 샘이나 분수를 만들기 시작했던 당시의 모습을 떠올리곤 한다. 어디를 가나 늘 그렇다.

  로마라는 거대 도시이자 교회 역사의 중심을 치장하고 장식하는 트래비 분수나 나보나 광장 분수 보다도 나는 저렇게 시골마을 사람들의 생활에 반듯이 있어야만 하는 생활필수품과도 같은 오래되고 낡고 허접할 지언정 그런 지극히 일상적인 샘이나 분수가 훨씬 소중하고 아름답게 느껴진다.

  분수 주변으로 서너 개의 갈림길이 나오는데 우리는 생폴에서 가장 지대가 높은 곳으로 향하는 왼쪽 길을 택했다. 그 정상에는 거대한 요새와도 같은 건물(Place du Chateau)이 떡하니 버티고 섰는데 지금 시청으로 사용된다고 한다. 아마도 중세시대에 이곳을 통치하는 봉건 영주가 기거하던 궁전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옆으로 뾰족하게 느껴질 정도로 높은 종탑을 가진 로마네스크 양식의 하얀 참회자 성당(White Penitents Chapel)이 아름다운 자태를 뽐내고 있다. 13세기에 건축된 오랜 역사를 간직한 성당은 근대에 이르러 벨기에 출신의 예술가가 성당의 내부를 대대적으로 개조 완성했다고 하여 그의 이름을 따 폴론 예배당( Folon Chapel) 이라고 현지인들은 부른다.

여전히 남쪽으로 연결되고 있는 루 그란데 중심 대로를 따라 남문까지 갈 수도 있지만, 그렇게 되면 되돌아오는 길이 갔던 길을 다시 돌아오거나 아니면 정남방향에서 왼쪽 혹은 오른쪽 성벽 길 중에 하나를 선택하여야 한다는 사실에 직면하게 된다. 우리는 지금처럼 갔던 길을 되돌아 다시 골목길 투어를 해야겠다고 결심한 후였지만, 그렇다고 성벽을 따라 외곽 풍경을 즐겨보는 것도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하여 발걸음을 서쪽 계단 길로 바꿔 잡아서 내려갔다. 빼곡히 밀집된 집들 사이로 마치 누군가의 집 마당을 비켜 지나가는 것처럼 생각될 정도로 아주 작고 협소한 가파른 계단 골목길을 내려서니 갑자기 환한 생폴의 주변 풍경이 시야가득 쏟아져 들어왔다. 서쪽 외곽 성벽 길에 도달한 것이다.

  여기 성벽 길의 이름이 ‘깨달음의 길’이다.

  성 안쪽으로 가파른 언덕에 얹혀있다시피 한 고풍스런 에 건물들이 정말 한 것 빈티지한 멋을 뽐내고 있다. 무척 아름답다. 고개를 돌리면 높은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생폴 주변의 자연 풍경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저만치 푸른 언덕과 숲 너머로 앙티브가 보이고 그 너머로 파란 지중해가 끝없이 펼쳐져 있다. ‘혹시 여기가 천국이 아닐까 싶다.’

  성벽 길 중간 중간에 테이블 몇 개 펼쳐놓을 공터라도 생겨나면(저들은 무조건 광장 이라는 이름부터 붙이고) 그 자리엔 무조건 카페가 들어선다. 그리고 그 작은 카페마다 현지인 손님들로 가득하다. 다들 음식을 나누고 와인을 마시며 제법 왁자지껄하게 무슨 마을 반상회라도 열고 있는 모양새들이다. 표정들을 보아 무척이나 즐겁고 행복한 표정들이다. 슬쩍 가까이 다가가 보았지만....... 파티에 진심으로 보이는 저들의 표정을 보니 어디 낯선 여행자가 끼어들 자리는 없어 보인다. 그저 지극히 일상적인 현지인들의 생활단면을 조금은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볼 뿐이다. 구름이 잔뜩 찌푸리고 손이 시려올 정도로 제법 쌀쌀한 바람이 불어오고 있지만 그들의 파티는 처음부터 ‘밖에서 반듯이 해야 하는 어떤 의식’처럼 보여 질 정도로 있는 그대로의 날씨와 상황을 누리고 즐기는 것으로 보인다.

  ‘재네들은 안 춥나? 재네들이 마시는 와인은 따끈따끈 한가? 허구헌날 저렇게 놀고 마시기만 하면 그럼 소는 도대체 언제 키우나?’

 

 

  성벽 길의 끝에 도달하면 생폴의 남문인 니스의 문(porte de Nice) 오랜 세월의 풍파를 고스란히 간직한 모습으로 나타나고 , 니스의 문에 올라서면 생폴 최고의 전망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진다.

  성문 밖으로 마을 공동묘지(Cimetière de Saint-Paul-de-Vence) 만들어져 있고, 이 공동묘지에 수많은 여행자들의 발길을 잡아끄는 이유인 화가 마크 샤갈(Marc Chagall)이 여기에 잠들어 있다. 그는 자신 인생 말년의 19년을 이곳 생폴에서 보냈다. 프로방스를 사랑했고 생폴 드 방스에서의 안락한 생활을 즐겼다. 피카소 못지않게 샤갈   또한 신으로부터 놀라운 삶의 축복을 받은 행운아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방스 여행에서 마티스에 대해 끝내 이야기를 꺼내지 못한 것처럼, 생폴에서 또한 샤갈에 대한 이야기는 일단 무조건 건너뛰기로 해야만 할 것 같다. 샤갈은 그래도 지난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을 소개하면서 일화를 소개한 적도 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닐까? 남은 이번 여행에서 미술 이야기는 아마도 몽펠리에 여행기쯤에서 쿠르베에 대한 이야기를 약간 해보는 정도로 넘어가게 되지 않을까?

  지난 이탈리아 여행기 편에서도 우피치 미술관을 살펴보다 중도에 접고 이번 여행을 떠나오게 되었다. 언제 되돌아가서 나머지 우피치와 베네치아 미술관을 돌아본단 말인가?

  이번 여행기에서도 루브르 박물관의 회화는 제대로 시작도 못해보고 허겁지겁 니스로 떠나오지 않았는가 말이다. 루브르와 오르세 미술관만 살펴본다 해도 아마도 긴긴 금년 겨울 내내 해도 다 못할 것만 같다. 그러다 보면 또 다음 여행이 다가올 것이고........

  하여 당장 눈앞의 샤갈에서부터...... 일단 미술관 투어는 대충 넘기기로 한다.

  아무리 그렇기로 그래도 샤갈이 등장을 했으니 잠시 쉬었다 가는 셈치고 이 이야기는 짧게나마 하고 지나가야만 하겠다.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시가 있다. 김춘수 선생님이 쓰신 시다.

  내가 채 아직 이십대의 끝자락에 서있을 때 (KBS TV 문학관)에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단막극을 방송했다. 그 방송에 전혀 관심이 없었던 사람이지만 제목이 주는 묘한 끌림에 모두 보았던 기억이 있다. 선우재덕. 김청 등이 한참 젊은 모습으로 등장했었다.

  그 드라마는 김춘수 선생님의 시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을 모티브로 해서 드라마로 제작되었다고 했다.

 

샤갈의 마을에는 삼월에 눈이 온다.

봄을 바라고 섰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이

바르르 떤다.

바르르 떠는 사나이의 관자놀이에

새로 돋은 정맥을 어루만지며

눈은 수천수만의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와 샤갈의 마을의

지붕과 굴뚝을 덮는다.

삼월에 눈이 오면

샤갈의 마을의 쥐똥만 한 겨울 열매들은

다시 올리브빛으로 물이 들고

밤에 아낙들은

그해의 제일 아름다운 불을

아궁이에 지핀다.

 

  -김춘수,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드라마를 본 후에 김춘수 선생님의 시를 찾아서 읽어 보았다.

  그런데 내 소양이 부족했음인지 적어도 나에게는 시와 드라마가 전혀 매치가 되지 않는 것이었다. 도대체 무엇을 모티브로 해서 무엇을 나타내고자 하는지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저 무언가 있어 보이는 제목 아니면 느낌을 그냥 도용해서 다른 상품을 하나 만들어 내고자 했던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였다.

  세월이 흘러 그 당시의 나이를 두 배나 넘게 먹은 후에 우연히 인터넷을 통해 (TV 문학관) <샤갈에 마을에 내리는 눈>을 다시 보게 되었다.

  그런데 여전히 나는 도무지 알지 못하겠다. 그 드라마가 시의 어떤 이야기를 전하고자 했는지 말이다.(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일 뿐, 그렇다고 그 드라마를 제작하신 분들에 대한 폄하는 절대 아니라는 사실을 밝혀둔다)

  그저 등장하는 연기자들의 청춘 모습을 보고 있노라니..... 내 지나온 세월이 클로즈 업 되면서 허탈한 헛웃음만이 튕겨져 나왔을 뿐이다.

  시와 드라마의 관련은 그냥 그랬다 치자.

  그렇다면 김춘수 시인과 샤갈의 연관성은 또 어떻다는 말인가? 왜 하필 그대목에서 샤갈이냐고?

  선생은 이 시를 샤갈의 작품 <나와 마을(I and the Village)>에서 영감을 얻어 썼다고 했다. 샤갈이 1911년에 그렸으며 현재는 뉴욕 현대 미술관에 전시되어 있는 작품이다.

  그림이나 소설도 아니고 시를 이야기 하려니 적지 않게 부담과 한계를 느껴서 인터넷을 통해 김춘수 시인의 <샤  갈에 마을에 내리는 눈>에 대한 해설서를 옮겨보기로 한다.

  << 이 시의 시간적 배경은 삼월이고 공간적 배경은 샤갈의 마을입니다. '삼월'이라는 겨울과 봄이 공존하는 환상적인 시간에 '샤갈의 마을'이라는 현실에 존재하지 않은 환상의 세계에 내리는 눈과 다양한 색채 에너지를 가진 사물들의 대비를 통해 시인은 소생하는 '봄'의 아름다움을 드러내고 있습니다.

  눈의 흰색을 봄을 맞이하는 순수한 생명력을 나타내는 정맥(청색), 올리브빛(녹색), 불(붉은색)의 이미지와 대비시켜 서로를 강조함으로써 맑고 순수한 생명력을 강조하는 것이죠. 이렇게 이질적이면서도 색감 있는 이미지들을 병치하여 사용하였으며 이를 토속적시어의 사용으로 고향 마을을 떠올리게 하는 이미지로 전이시켜 고향 마을의 따뜻한 풍경에 대한 그리움도 형상화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하나의 그림을 보는 듯한 이미지의 표현으로 '봄을 맞이한 생동감과 고향 마을의 따뜻한 풍경에 대한 그리움'을 형상화한 작품이 '사걀의 마을에 내리는 눈'입니다.>>

  세세한 설명과 이해에 공감은 물론 감사를 전하고 싶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수없이 많은 샤갈의 그림 작품 중에서도 유독 이 작품에 자꾸만 눈길이 쏠리게 되는지도 모르겠다.

  언제였을까? 늘 샤갈의 작품세계가 나와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 오던 중에, 고호. 마티스. 모딜리아니 들을 살펴보다가 항상 곁에 붙어있는 샤갈과 피카소와 미로에게 관심을 가져 본적이 있었다. 그제부터였다. 샤갈의 인생 역정을 살펴 본 후에야 <나와 마을>이 충분히 이해가 되었고, 그제야 <샤갈의 마을에 내리는 눈> 이라는 김춘수 선생님의 시가 공감되기 시작했다.

  시에는 그렇게 시만의 모습과 향기와 매력이 있다.

  그런 시를 가슴에 담고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 모습처럼 말이다.

  우리는 다시 생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라 그란데 도로를 따라 골목길 투어를 계속하였고, 북문을 나오면서 생폴 드 방스 여행을 마칠 수 있었다.

  본래 오늘 여행 계획이 생폴과 앙티브 였는데, 친절한 아주머니의 소개로 예정에 없던 방스를 다녀오게 되었고, 생폴 드 방스를 돌아보다 보니 어느새 시간이 저녁을 향해 줄달음 치고 있었던 고로 부득이하게 앙티브 여행은 내일로 미루기로 하였다.

  띠욀 광장을 지나면서 고개를 돌려보니 이제 떠나야 하는 생폴 성채의 모습이 아쉽다.

  ‘프랑수아 1세가 잘한 것도 찾아보니 있기는 있네. 생폴드 방스는 참 잘한 거야.’

  프랑스 사람들은 프랑수아 1세에 대해서 명군이라 칭찬하면서 엄청나게 큰 의미를 부여하지만...... 참 이상하게도 나에게는 참 별 볼일 없는 그저 그런 군주라는 고정관념이 있다. 생폴 드 방스 성채를 건설해 지금의 모습으로 남긴 사람이 바로 프랑수아 1세다.

  중세 시대에 생폴은 니스 봉건국가에 예속되었다. 그런 니스 백국인 사보이 공국에 합병되었던 것이다. 사보이 공국은 이탈리아 북쪽 제노아와 밀라노 인근을 차지한 봉건영주 국가였다. 그러니까 여기 이지역까지가 모두 이탈리아 영토였다는 것을 가리킨다.

  그런 상황에서 힘을 기른 프랑스의 위대한 군주 프랑수아 1세가 생폴을 탈환했다. 여세를 몰아 프랑수아 1세는 이탈리아를 침공한다. 당시 이탈리아는 하나의 통일된 국가가 아니라 교황령의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등의 공화정, 사보이 등의 봉건영주 국가들로 나뉘어 극심하게 다투던 시기였다. 그런데 문제는 나폴리와 시칠리아 였다. 나폴리와 시칠리아가 당시 스페인의 식민지였던 것이다. 프랑수아 1세의 이탈리아 침공에 대해 스페인인 전면전을 선포하며 나섰다. 프랑수아 1세의 영원한 라이벌 카를 황제의 등장이었다. 훗날 신성로마제국의 카를로스 1세 황제가 되는 스페인 국왕 카를5세는 스페인의 국광이자 독일의 왕이었으며, 나폴리와 시칠리아의 왕이었다.

  프랑스 역사는 프랑수아를 카를 황제의 라이벌로 위대한 군주라고 평가를 하지만, 지극히 내 개인적 주관과 판단하에서 프랑수아는 다분히 명분만 앞세우고 폼만 재는 그저 멋있게 영웅으로 이름을 남기고자 하는 군주가 되고 싶은 사람이었다. 하지만 카를은 용의주도하고 기개가 넘치며 실제로 용맹한 혈기 넘치는 군주였다. 하여 거의 대부분이 카를의 일방적인 승리로 점철되었다고 보는 것이 옳겠다.

  그런 카를이 군대를 직접 지휘하며 이탈리아에 상륙했다. 교황청을 회복하고 프랑수아의 프랑스 군을 끝가지 추격했다. 어디까지 쫓아갔는가 하면...... 로마에서 출발하여 바로 여기 생폴 드 방스까지 추격해 왔다. 카를 5세는 1524년 생폴 드 방스 요새를 점령했고 1536년까지 차지했다. 스페인이 지배하는 영역이 너무나 멀고도 넓었고 사방에서 잦은 소요가 일어나자 실효성이 적다고 판단한 카를은 생폴에서 군대를 물린다. 스페인이 물러가자 프랑수아 1세가 다시 군대를 직접 대동하고 생폴에 나타났다. 즉시 그는 다시는 그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는 난공불낙의 요새를 만들라고 명령했다. 그래서 1538년에 탄생한 것이 바로 지금 모습의 생폴 드 방스인 것이다. 그 후로 정말로 생폴 요새는 난공불락의 역할을 충분하게 수행해 냈다고 한다.

 

 

--- 아쉬움 속에 생폴 드 방스 여행기를 마치면서 다음 이야기는 앙티브 여행으로 이어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