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주 관내에서 북서쪽으로 십리에 탄금대가 있다.'
탄금대의 본래 지명은 대문산(大門山)이다. 간혹, 아주 드물게는 견문산(犬文山)이라 부르는 기록도 있다.
일설로 엎드려누운 개의 형상을 닮았다는 설도 있으나, 누군가 기록을 남길 때 대(大)를 표기하다 먹물을 흘렸는데 그로하여 점 하나가 생겨 견(犬)이 된것은 아닐까 하는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이다.
이 대문산의 북쪽 바위벼랑위에 흡사 누대를 닮은 바위가 있는데, 가야에서 신라로 귀화한 우륵이 이 남한강변 바위벼랑위에서 망국의 한을 달래며 가야금을 탔다고 해서 그때부터 이곳을 탄금대(彈琴臺)라 부르게 되었다는 이야기를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때부터는 이곳을 그저 탄금대라 부르게 되었다.
탄금대에는 우륵에 관한 이야기만큼이나 널리 알려진 역사기록이 있으니, 임진왜란 당시 명장 신립장군이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택한 후 몰려오는 왜군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전장터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지난주 내내 너무도 따뜻한것이 흡사 봄의 한복판에 들었던 듯 하던 날씨가 오늘은 또다시 겨울로 되돌아 가는 듯한 느낌이다.
날씨도 쌀쌀하고 강하게 몰아치는 바람은 송곳끝처럼 날카롭게 전신을 콕콕 찔러왔다. 미세먼지로 인해 종일토록 하늘마저 뽀얗기만 한 겨울의 끝자락에서......... 오후에 예정에 없던 짬이 나기에 무작정 탄금대에 올랐다.
대문산은 충주의 관문(關門)이다.
요즘이야 연립이다 아파트다 오피스텔이다 하다보니 대문(大門)의 개념대신 출입문(出立門)으로 통용되는 시대가 되었지만, 그리 오래되지 않은 시절까지 대문의 의미는 대단히 큰 것이었다.
대문은 그 집안의 영역을 드러내는 표시이자 외부의 침입을 막아주는 방어막이요, 그 안에 거하는 사람들의 지위와 생활수준을 가늠하게 해 주는 어떤 의미로는 하나의 잣대 구실까지 하였던 것이다.
한 집안의 내력을 그대로 대변해 주는것이 대문이라면, 그런 집안을 이룬 사람들이 모여서 고을을 이루는것, 즉 고을을 관할하는 관아가 있는 곳의 대문 역활을 하는것이 바로 관문(關門)이다. 성곽의 성문이나 도성의 동대문 남대문 등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또 굳이 부연 설명을 하자면.......
대문산이 충주의 관문이 된것은 이성계에 의해 조선이 건국되고 도읍지를 한양(지금의 서울)으로 정하고 난 후부터라 해야 옳겠다.
충주와 한양의 교통로라면 바로 탄금대 옆을 흐르는 남한강 물길을 따라 여주와 이포를 지나 북한강과 합수가 되고 더 흘러내려가 마포나루에 다다르는 수운(배를 이용해 물길을 오르내리는)이거나, 충주 읍성을 벗어나 탄금대 합수머리에서 달래강을 건너서 탑평리(중앙탑)을 지나 입석리(중원고구려비)에서 왼편을 꺾어들어 노은의 구갯길(북충주 IC)를 지나 감곡과 이천을 지나 경기도 광주땅의 남한산성길을 넘어서야 한양에 들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거의 유일한 대표적인 한양을 오가는 길이 바로 그곳이었다.
하니, 육로를 택하던 수로를 택하던 남쪽으로 내려오다 보면 눈앞에 떡하니 가로막듯이 대문산이 나타나고........ 그러면 비로소 실질적으로 충주땅에 들게 되는 것이었다.
그러던 이 대문산의 충주 관문 역활은 기찻길이 생기로 차가 다니는 도로가 새로 생겨나면서 그 역활과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이제 호흡을 가다듬고 말발굽처럼 생긴 대문산으로 가는 언덕길을 올라가 보기로 하자.
탄금대 라고 적힌 교통안내판에 새겨진 안내표시를 따라서.......
충주 관내의 모든 초.중등학교의 봄 가을소풍의 최적지는 바로 탄금대였다.
고등학생이 되면 좀 더 먼 중앙탑까지 행군을 하곤 했다.
초등학교에서 족히 십리길이 넘는 먼거리를 꼬마들이 짝이랑 손을 잡고 아장아장 끝까지 걸어서갔다. 교문은 나서 한참까지는 손이라도 잡고 걷지만....... 나머지 대부분의 길을 하천둑방길이나 논둑길을 이리저리 돌고돌아서 마침내 탄금대까지 가게 되는 것이었다.
아마도 요즘시대에 그런 소풍이라면 아이들이 버티기도 힘들겠지만. 아동학대니 뭐니 열성엄마들이 벌써 교육청이나 문교부를 박살냈거나 폭파해 버렸을것이다.
당시의 선생님들은 탄금대 소풍을 산 역사의 교훈이나 자연탐구 등의 목적으로 우리들을 거기로 데려갔을까?
아님, 모처럼의 중대행사 소풍인데 달리 다른 갈곳이 없어서였을까?
거기에 대해서는 지금도 잘 모르겠다.
우륵이니 신립장군이니 들어보기는 했지만....... 그런 역사적 사실들이 우리들의 탄금대소풍과는 별반 상관관계가 적었거나 아예 없는 것으로 느꼈었다.
탄금대 하면 우선 가장먼저 떠오르는 것은 바로 위 사진의 (충주문화원)과 (야외음악당)의 이미지였다.
벽면에 하얗게 회칠을 한 벽면조각이 유난히 멋있었던........ 충주문화원 건물과 야외음악당 건물이 당시로서는 애주 빼어나게 멋있는 특색있는 멋진 건물로 여겨졌기 때문이었다.
여기 문화원 앞의 너른 주차장이 바로 탄금대 둘러보기의 시발점이 되는 것이다.
왼쪽을 택하나 오른쪽을 택하나 말발굽 모양으로 생긴 지형이기에 한바퀴를 돌아보는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다.
하여 나는 동편으로 난 숲길을 택하기로 했다.
대문산(탄금대) 전체가 거목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는 우거진 숲이다. 그 숲 사이로 산책길처럼 탐방로가 잘 가꾸어져있다.
사실 이 숲길은 성곽위를 밟고 걷는 것이라 생각해도 될지 싶다.
석축을 쌓아올린 성곽이나 둔덕처럼 높게 쌓아올린 흙벽은 흔적조차도 없지만, 사실 대림산은 토성이 있던 전략적 중요 거점이었다. 지형을 이용해 접근해 오는 적을 방어하기 위해 산자락을 삥둘러 토성을 설치하였으니, 대충 지금의 숲속으로 난 탐방산책로가 토성의 외벽이었을성 싶다.
숲속길을 조금 걸어 들어가다 보면 처음 나타나는 것이 충혼탑이다.
해방이후 충주 중원지역에서 내고장과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신 분들의 넋을 위로하기 위해 세운 조형물(탑)이다.
그리고 바로 옆에 나란히 임진왜란 당시 이곳에서 순국하신 신립장군의 동상과 조형물이 설치되어있다.
장군은 긴 칼을 빼어 높이 치켜들고 '돌격 앞으로'를 힘차게 외치고 있는 모습이다.
그 아래로는 왜군들이 참혹한게 조선의 백성을 참살하는 조형물이 놓였는데......... 왜소하고 추하게 생긴 왜구가 아니라 늘씬하고 용맹스런 잘생긴 왜구들을 조각해 놓아 조금 으아한 생각이 들기도 한다.
충혼탑을 뒤로하고 몇발자욱을 숲속으로 옮기다보면 그 유명한 '감자꽃 시비'가 모습을 드러낸다.
일제의 창씨개명에 반대하는 마음을 동시에 담아냈다는 독립운동가였던 권태응 선생의 시가 새겨진 시탑이다.
자주꽃 핀 건 자주감자.
파보나 마나 자주감자.
하얀꽃 핀 건 하얀감자.
파보나 마나 하얀감자.
참으로 간결한 동시 한 편이 아닐까 싶다.
때론 이런 간촐함이 사람의 마음에 더 잘 전달되는것 아닐까 싶다.
이어지는 숲속길을 거슬러서 돌계단 언덕을 오르노라면 새롭게 단장중인 탄금정이 나타난다.
남한강을 흘러내려가는 모습이 가장 잘 보이는 낭떠러지 벼랑위에 정자가 놓여있었는데 가까이 가서보면 온통 시멘트 덩어리로 지어진 건물이라, 많은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통하여서였는지 지금 전통 목조방식에 의한 새로운 탄금정이 개축중에 있다. 아무쪼록 늦은감은 있으나 이 유서깊은 탄금대의 정취에 걸맞는 아름다운 정자로 새로 거듭나기를 기원해본다.
그 탄금정의 발치 아래로 돌계단을 내려가다 보면 깍아지른듯한 바위벼랑이 나타나는데....... 이곳이 바로 그 유명한 열두대이다. 신립장군의 무용담과 연계된 숱한 전설들이 서려 전해내려오는 곳이다.
이 깍아지른 바위벼랑아래의 시퍼렇게 흐르는 남한강을 배수진으로 치고 밀려드는 왜군들과 장렬하게 싸움을 벌인 역사적 장소가 바로 탄금대이다. 그리고 이곳 열두대에서....... 뜨거워진 활 시위를 식히려고 이 바위벼랑을 열 두번이나 오르내리며 활을 쏘았다는 전설과, 치열한싸움중에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 열 두번을 오르내렸다는 설과, 어린시절에는 싸움에 진 신립이 자살을 하려고 열 두번이나 벼랑에서 뛰어내렸다는 이야기가 전해왔었다. 아무튼 모두가 열두번 씩 이루어졌다해서 여기가 바로 열두대 이다.
신립장군의 탄금대 전투에 대해서는 숱한 전설과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다.
그리고 이곳 탄금대와 연계된 많은 이야기들은 너무도 황당한 어무맹랑한 이야기가 많다.
임진왜란 발생 후 전쟁 초기의 너무도 중요한 탄금대 전투에서 신립은 패했다. 이 패배는 조선의 조정과 동아시아의 정세까지도 판도가 심하게 요동치도록 만든 전투였다. 신립은 싸움에 지고 이곳에서 한강에 몸을 던져 자살했다.
그러나 어디까지가 진실인 것일까?
신립의 탄금대 전투에 항상 따라붙는 '그는 왜 천험의 요새인 조령을 포기했을까' 하는 의문이 늘 따라다닌다.
신립의 펼친전투로 볼 때, 관연 탄금대에 배수진을 치고 사생결단을 냈던 것일까?
과연 조선군은 파죽지세로 몰려오는 왜군에 비해 절대적 열세였을까?
신립은 과연 한강에 투신하여 자결을 했을까?
많은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따라 붙는다.
결국 많지는 않으나 전해저온 우리 사료와 승자인 일본의 전해지는 사료에 따르면 항간에 전해져온 대부분의 이야기들이 허무맹랑한 낭설이 대부분이라는 사실에 대해 실망과 측은해짐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하여, 멀지않은 시간에 '신립과 탄금대 전투'에 대해서 내 나름의 식견을 곧 글로써 다시 올려보려 생각하고 있다.
열두대의 계단을 다시 되돌아 올라 보수중인 탄금정을 뒤로하고 산자락을 타고 내려서다보면 대나무숲 아래로 누각이 하나 나타난다. 그리고 바로 옆의 담장 너머로 단청이 아름다눈 절간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다.
작은 누각은 바로 충장공 신립장군의 비석을 모신 사당이다.
그리고 다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절간이 바로 대흥사이다.
근대에들어 새롭게 중창중인 작은 절간이지만, 실은 신라 진흥왕때 불사를 벌인 천년고찰 용흥사가 있었던 유래가 깊은 사찰인 것이다. 고려 무신정권 초기 거란의 침입시에 용흥사가 완전 소실되어 사라졌던 것을 새롭게 불사를 일으며 중창을 하고 있는 중이다. 이 전의 소설인 (아! 충주성)에서 양수척 무리들이 부응 기지의 한 거점으로 이곳 용흥사와 금휴포를 이용하는 내용을 이미 써내려간 적이 있었다. 하여 내가 자주 찾는 유서깊은 곳이다.
여기 대흥사를 지나 나시 가파른 숲속 언덕길을 오르자면 국궁터가 나오고, 발아래로 유유히 흘러가는 남한강과 달래강이 합치는 합수머리 풍경이 시야 가득 펼쳐진다.
그리고 좀 더 오르다보면, 처음 탄금대 여행을 시작했던 야외음악당과 문화원이 모습을 드러내면서 대충 탄금대 둘러보기를 마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숲속길을 더 거닐면서 옛정취를 접하고자 하면 서쪽의 숲길을 한참 더 들어가 볼 수도 있겠다.
탄금대 둘러보기에서 다 못다한 이야기는 곧 '신립과 탄금대전투'에서 다시 꺼내보기로 한다.
이제 탄금대 언덕길을 서둘러 내려가야만 하겠다.
약속 시간이 다 되어가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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