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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조령(小鳥嶺)에서의 산막생활.
소조령은 참으로 매력적인 산골이다.
날아다니는 새도 힘에 겨워 쉬어서 넘어간다는 새재(조령)의 서쪽 자락이라 할까나.
수안보면의 은행정에서 부터 시작되어 고사리마을까지 이어지는 오리를 조금 넘지싶은 꾸불꾸불한 가파른 고갯길을 이르는 이름이다.
교통이 좋아져서 오지라 하기는 좀 그렇겠지만, 그래도 첩첩산중이니 심산유곡이니 하는 그런 풍광과 운치를 가득 머금고 있는 곳이다.
그 고개의 딱 중간쯤에 정남향의 아늑한 산막을 하나 떡하니 차지하고 들어앉았으니, 가히 무릉도원이 어디 따로있겠느냐 싶었다.
문경새재의 제3관문이 한 7리 정도 거리요, 수옥정 폭포가 5리 정도 거리에 있다. 또한 대원미륵사지가 있는 송계계곡도 시오리 정도만 가면 있고, 심신이 피로에 젖었다 싶으면 수안보 온천욕을 가는데 그 거리가 대략 8리 정도에 있는 기가막힌 곳에 위치한 산막이었다.
나의 생활중에서 자주듣는 질문중에 하나가 흔히 말하는 '혼자 들어앉아 있으면 도대체 뭐하고 노냐?'라는 질문을 자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참 혼자서 잘 논다. 아니지. 논다가 아니라 잘지낸다. 그 도를 넘어서 아주아주 잘 지낸다.
혼자 산속에 있으면 무섭지 않느냐 하는데, 나라는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면서 부터 그딴 무서움 같은 것은 아예 안중에도 없었다. 그렇게 태어났다.
컴퓨터나 핸디폰으로 게임들을 즐기는데, 난 아예 그런 프로그램을 찾아 본 적도 없다. 아주 가끔 인터넷으로 바둑은 아주 조금 두는 편인데, 그외에 게임이라고는 해본적이 없다.
모처럼 산막에서 사나흘간의 휴가라도 생기게 되면, 어떤때는 며칠간을 아예 문밖 출입을 한번도 안할때도 있다. 남쪽향해 마당으로 난 커다란 창문을 통해 햇쌀이 들어오고 창을 열면 시원한 바람이 들어오니 굳이 밖에 나갈 이유가 없을때도 있었다.
간혹, 우체부아저씨 오시면 문 열고 우편물 받고, 먹거리 떨어지면 수안보 하나로마트 다녀오고, 새벽비라도 내리면 우산쓰고 소조령 고갯길을 걸어보고, 낙동강까지 자전거로 국토종단하는 사람들이 곧잘 들려서 사진 찍고 가고, 물 뜨러 들리고, 화장실 좀 쓰자는 경우가 종종 있기는 하다. 그럴때만 빼끔 밖을 내다본다.
그럼 도대체 뭐하냐고?
인생의 첫째 도락이 무엇인가? 책 읽으면서 지낸다. 신문 찌라시나 광고지에서 부터 고문서나 연구논문, 또는 전문서적까지 닥치는 대로 읽는다. 이 세상에 양서나 악서가 따로 없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사람은 스스로 그 모든 읽은것(지식.정보. 가치관)들을 소화시키고 정화시키는 능력을 갖추고 태어난다고 믿기에.
책 읽고, 떠오르는 생각들을 메모하고, 기분이 내키면 글을 쓴다. 신이나면 하룻밤을 꼬박 지새면서 소설을 쓰기도 한다. 칼럼도 쓰고 수필 비슷한 것을 쓰기도 하고......... 커피잔이나 쏘맥(?)잔을 들고 창밖을 내다보며 멍한 시선으로 잡다한 생각들을 하면서 지내기도 한다.
기분내키면 방바닦 가득 물감을 늘어놓고 유화를 그려보기도 하고...........
정히나 몸이 찌뿌등해 지면 카메라 들고 여기저기 사방으로 쏘다니기도 한다.
또는 왕짜증여사 명으로 냉이나 쑥 씀바귀 캐러 들에 나가보기도 하고...........
아마도 나의 유년시절의 체험이 내 핏줄속에 이런 생활을 나름으로 즐기게 하는 유전인자를 만들어낸것이 아닐까 싶다.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 나의 부친은 과수원의 가장 높은 언덕에 가로 세로 5m씩 정도 크기의 원두막을 지어주셨다.
그런데 이 원두막이 시골에 흔한 그런 원두막이 아니었다. 정사각형의 작은 원두막이지만 천장이 유독 높았다. 그리고 출입문이 달린 뒷벽을 제외하고는 나머지 3면에 커다란 대형창틀을 달았다. 앞과 양옆으로 무척이나 아주 빼어난 풍광이 그대로 드러났다. 그 뿐이 아니었다. 방바닦에서 한뼘도 안되는 높이로 삼면에 세숫대야만한 동그란 쪽창문을 내었는데, 방바닦에 누워서도 밖의 풍경이 그대로 보였다.
처음에는 부친께서 한동안 사용하시다가 집에서도 제법 떨어져 불편하셨는지 등한시하시는것을 보고, 사춘기에 접어든 내가 나만의 비밀공간으로 접수해 버렸다.
집에서 오르내리기가 불편했고, 당시의 건축기술이 형편없어서 높은 천장에선 윗풍이 강하게 불고, 이중창이 아니어서 찬바람이 술술 들어오고, 한겨울엔 두번이나 군불을 때야 겨우 밤을 지샐 수 있었지만 나는 기어코 그곳을 사수했었다. 타지로 대학을 갈때까지 그곳은 오직 나만의 성지였다.
내가 무섭다는 생각을 해본것도 그때였을 것이다.
한여름 무섭게 내리퍼붓는 폭우속에 귀를 찢는 굉음과 함께 사방으로 벼락이 내려치는 날, 산억덕에 겨우 놓여있는 원두막의 삼면가득 시퍼런 섬광들이 밤새도록 번쩍이고 천둥이 귓전가득 밤새 울어재끼는 날, '이러다 정말 벼락맞고 죽는거 아닐까' 라는 걱정을 했던 기억이 생생하다. 이 세상의 그 어떤 입체 파노라마 영상도 유난히 큰 삼면의 유리창 가득 쏟아지던 그날의 그 시퍼런 벼락을 더 생생하게 담아내지는 못할 것이다.
한겨울밤, 깊이 잠들었다 스며드는 한기에 놀라 버티고 버티다가 더는 버티지 못하고 '아무래도 일어나서 아궁이에 군불을 다시 지펴야겠다'고 마음고쳐먹으며 뒤척이는데........... 방바닦 바로위로난 둥근 창으로 내비치는 풍경.
겨울하늘엔 환한 달빛도 시퍼렇게 가라앉고 있었는데, 수북히 쌓인 과수원 눈밭 위로 어미노루가 새끼인 듯 저보다는 조금 작은 노루(고라니)를 데리고 산책을 다니고 있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온다. 나는 그들이 놀랠까봐 이불만 더 뚤뚤 말아안고서는 한참을..... 한참을, 마침내 그들이 언덕을 넘어설때까지 바라보았다.
또 한가지 내가 혼자 놀면서 잘하는 짓거리 중 하나가 꽃을 가꾸는 것이다.
여건이 좀 좋았던 시기에는 내 방이 웬만한 화원이나 온실보다 더 예뻤다.
살아있는 동물을 기르는 것은 끔찍히 싫어하지만, 꽃과 화분은 무척이나 좋아한다.
예쁜 꽃이나 식물을 각각의 예쁜 화분에 옮겨 벽이며 천장이며 매다는 것을 너무너무 좋아한다.
하지만 산막생활의 시기는........ 호시절에 찾아든 곳이 아니었다.
심신을 좀 쉬고 추스르고 싶어서 찾아간 것이었다. 산막에 들던 첫해엔 화분이 거의 없었다. 그렇게 한 해 겨울을 지내고..........
심신이 좀 나아졌다 싶어지니 또 다시 주변의 풍광이 영 맘에 들지않게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지방출장이 잦아 실내에 화분을 기르는데는 한계가 있고 해서...........
해바라기를 심기로 했다.
해바라기는 정확히 심은 뒤 80일이 지나면 꽃이 핀다.
산막을 뺑 돌려서 이른 봄에 해바라기 씨를 심었다. 아니 뿌렸다.
봄이 지날 무렵 2차로 다시 씨를 뿌렸다.
두번째 씨앗이 틀 무렵이 되자 처음 심었던 해바라기가 쑥 쑥 자라나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 해엔 유독 봄 가뭄이 심했다.
쑥 쑥 자라나던 녀석들이 며칠 출장을 다녀오면 여기저기 쓰러져있었다.
하니 어쩌겠는가. 먹고사는게 우선이지.........
산막에 있으면 아침 저녁으로 호스로 물을 뿌려주고......... 일정 기간을 차이 두고 또 해바라기 씨를 뿌렸다.
장장 1천 5백 포기 싹을 티워서, 1천 2백 포기 정도의 해바라기가 자라기 시작했다.
산막주위로 일대 장관이 펼쳐질 즈음에...........
태풍이란 놈이 불어와서는 사정없이 절반 정도를 휩쓸고 지나갔다.
나의 심정은 태풍에 집이 날라간 이재민의 심정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이틀을 걸쳐 쓰러진 놈들을 일으켜 세웠지만............. 꼬라지(?)는 회복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참혹했다.
화가 나서 낫을 들고 다니며 시원찮은 놈들은 아예 싹뚝 잘라다 내버렸다.
시간이 얼마 더 지나서....... 다시 지나던 여행객들이 올라와 사진을 찍고 가곤 하는 모습이 눈에 띠었다.
그래서 시간나는 대로 틈틈이 그 아름답게 피어난 해바라기들을 향해 셔터를 눌러댔다.
산막에 들렸던 후배가 부탁을 해왔다.
자신의 컴퓨터 바탕화면 사진을 하나만 찍어 보내달라는 것이었다.
예쁜 사진 하나 액자로 만들어 주면 좋겠다는 말도 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생각끝에 좀 신경써서 그럴사한 사진을 좀 찍어봐야 겠단 생각이 들었다.
산막 마당에서 커피마시던가 고기 구워먹을 때 사용하는 하얀 무명천으로 만든 허름한 파라솔.
문득 쳐다보자니 나름 그 작은 공간마다 스며드는 빛의 느낌들이 제각각이기에 한번 찍어봤었다.
창문에 매단 화분의 부분 부분을 직어본 사진.
그리고 꽃을 찾아 날아드는 벌 나비와 곤충들.
그것은 정말이지 묘하게 타이밍이 맞아야만하는 일이었다.
그런만큼 그런 광경을 접하는 시간은 황홀한 시간이라 아니할 수 없겠다.
박꽃도 피었다 열매를 맺고
호박꽃도 피고 달맞이꽃도 피고
나팔꽃은 낙싯줄에 감고 올라가게 해서 전봇대에도 지붕 위에도........
그렇게 산막은 꽃동산이었는데.........
시골을 돌아다니다 보면
허름한 집을 나름 깔끔하고 운치있게....... 풍미가 있게 꾸미고 사는 분들이 있다. 좋다. 부럽다.
요즘은 시골도 다들 번듯하게 폼나게 집들을 너도 나도 짓고 살고 있다.
그런데 개뿔. - 개뿔 -
집을 폼나게 지으면 뭐해. 버릴건 버리고 들일건 드려서 새집에 맞게 꾸리고 살아야 하는데.......
어느날 쓰다만 비료포대가 출입문을 가로막고, 삽이며 괭이가 여기저기 놓여있고, 수확한 감자 포대며 마늘이 여기 저기 매다리고.......
건물만 새집이지, 생활이나 문화는 헌집과 다를게 없는 사람들을 본다.
개뿔.
짜증이 날 정도다.
하마 궁딩이에 비키니요, 코끼리에 썬그라스다.
며칠전에 지나는 길에 내가 살던 산막을 들려보았다.
한마디로 개뿔.
산막은 그새 움막으로 변해 있었다.
내가 머물던 산막생활 2년반의 흔적은 이제 찾아보기가 힘들었다.
부득이 먹고사는 문제로 타지 출장이 많다보니 접어야만 했던 산막생활.
이제 올해 아덜 짱구 장가 보내고 나면........ 어떻게 다시 한번 시도해 볼까나?
전원생활은 무슨 개뿔 같은 전원생활?
그냥 몸뚱이 건강할 때 바쁘게 움직여서 바지런 떨며 촌동네서 촌부로 살아보는 것이지.
그래야겠다.
담엔....... 절대 남이 훼손 할 수 없는 그런..........
아담한 시골집을 하나 꼭 가져야 겠다.
이젠 아득한 기억 저편의 꿈만 같은 산막생활.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
새롭게 하고 싶고, 아직은 할 자신이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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