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내가 글쓰는 특별한 재주를 가졌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어려서 부터 유독 책을 좋아했고, 나름으로는 무척이나 많은 책을 읽었다.
많은 것들에 관심이 많았고, 많은 것들에 대해 수많은 생각들을 해왔다.
또한 그런 생각이나 느낌들을 메모처럼 기록하는 것을 좋아했다. 그런 기록들이 무척이나 수북하게 쌓여갔다.
그 중 역사는 내가 그 무엇보다도 관심을 갖은 흥미있는 세계였다.
고등학교 때 시인이셨던 국어선생님을 만나 글쓰기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 시 ' 라는 것을 써 보았는데, 무엇인가를 함축하여 쓴다는 것이 내게는 참으로 힘겨운 일이었다.
대신, 한 편의 영화를 보듯이 이야기를 서술하고 늘여 쓰는것에 더 커다란 재미를 붙이게 되었다.
좀 더 자라서는 지역 향토사학자인 교수님을 만나면서, 더욱 여러가지 다양한 역사에 대해서 새로운 생각의 눈을 뜨게되었다.
그 후론 알게 모르게, 드러내놓고 감추고 나름으로 이런저런 글을 여러곳에 썼던 기억이 내게는 분명히 있다.
하여, 신문 잡지 라디오 TV 방송도 조금씩은 모두 경험을 했다.
지나간 젊은 시절에는 내 가슴과 영혼을 잡아 흔드는 다른 관심거리와 즐길거리가 너무 많아서, 정신없이 다른 일에 정신을 팔다보니 글쓰기와는 너무도 동떨어진 삶을 살고 있었다.
여전히 책을 읽는 것에는 익숙해 있었으나 글을 쓰는 일에는 등한시 하였던 시절이었다.
그러다 세상이 변하여 인터넷이라는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그 와중에 (피플475)라는 인터넷 모임을 알게 되었다.
부팅을 해서 컴을 시작하던 컴퓨터 초창기의 모임이 아니고, 컴퓨터와 인터넷이 대중화를 비로소 이루던 시기에 생긴 새로운 문물의 효시격인 모임이었다.
피플475는 MBC 9시 뉴스에 소개될 정도로 새로운 문화를 대변하기도 했고 , 여러 인터넷 대중문화를 이끌었던 선도적 표본이었다. 창립 1년이 안되어서 전국에 2만 5천여명의 회원이 활발히 활동하던 명망이 있던 인터넷 카페였고, 나는 그 카페의 거의 초창기 멤버였다.
다양한 연령과 직업과 가치관의 사람들이 모여 다방면에 대해 글을 통해 자신의 식견을 피력하곤 하였는데, 나는 그곳에서 회칼방(회원 칼럼방)의 어설픈 칼잡이로 다양한 사회 이슈에 대해서 많은 사람들과 글을 통해 토론을 했다. 직업이나 지위가 사회적으로 높은 사람, 정치적 색채가 분명한 사람, 장당에 몸 담은 사람........ 때론 아주 격렬한 토론이 오고갔다. 심지어는 쓴 글에 대해서 고소고발이 설왕설래 한 적도 있었다. 칼럼란에 많은 사회 정칙적인 글을 썼다.
시간이 지나자 나도 그곳에서 나름으로 지명도가 조금은 있는 논객이 되어 있었다.
의기가 투합되는 몇몇 사람들이 가끔씩은 오프로 모여서 모임도 하면서....... 우리 모임 사람들이 점차 피플 475 안에서는 꽤나 무서운 칼잡이로 소문이 나 있었다. 나는 그 집단의 막내 칼잽이 였다.
피플 475에는 여대 학장님도 계셨고 수필가 시인 소설가도 계셨는데, 내가 남과 논쟁하는데 있어 은유적 표현을 하든가, 핵심을 삥하고 휘둘러 돌아오던가, 역사속의 다른 이야기들을 댓귀시키는 글재주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이분들이 어느날 모처럼 함께 만난 오프모임 에서 내게 다른 글을 써 볼것을 권유해주셨다.
하여 475 안의 다른 방에 들어가 이번엔 수필을 쓰고 단편소설을 써 올렸다.
그것이 나름 커다란 반향을 일으며 475 운영자이던 마농성과 운영진의 권유로 본격적인 글을 쓰기로 하고, 정식으로 작가의 방에서 내 코너를 가지게 되었다. 모임 안에서 정식 작가 대접을 받게된 것이다. 나와 같은 처지이던 분들 몇몇이 정식 작가로 등단을 했고, 나름으론 나도 적게나마 그분들의 등단에 도움을 드렸다. 그러면서 또 다른 새로운 경험들을 했다.
나만의 작가방에서 나는 내가 평소 갈망하던 (역사소설)을 쓰기 시작했다. 그 첫작품은 (피안에 부는 바람)으로 약 2년간 연재했다.
평소의 꿈이자 희망이던 출판에 대한 이야기가 왔을 때에야......... 나는 아직 한없이 부족하고 부끄럽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썼던 것들을 모두 지워 없애버리고 싶었다. 그것은은 차마 세상에 내어놓기에 너무도 창피한, 아직 전혀 다듬어 지지 않은 한없이 어설픈 글재주에 지나지 않았다는 생각이었다.
그 후, 그 일로 약 2년을 넘게 475를 떠났고 글도 더 이상 쓰지 않았다.
여러가지로 개인적인 가족적인 어려움과 아픔도 있었다.
길에서 우연히 옛 지인을 만나 피플475가 아직도 나를 기억하고 있다고 들었을 때, 다시금 글에 대한 갈망이 강렬하게 피어올랐다.
다시 475에 역사 소설을 썼다.
내 소설은 다른 작가의 어떤 글들보다 열기는 덜했지만 꾸준하게 고정독자들에게 읽혀졌고 잔잔한 반응들이 전하여 왔다.
그 당시부터 일체의 475 오프 모임에는 나가 보지 못하였고, 생활권도 서울에서 고향인 충주로 내려왔지만........ 중간 중간에 몇달씩 글쓰기를 개인적 사유로 멈추어도........ 끈질기에 그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 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인터넷 카페의 효시겪이었던 피플475는 10여년의 나이를 먹으면서 부터 날로 급변하는 인터넷 세상에서 점점 힘겨워 하는 상황이 되었다.
여러 소규모 모임들이 각자 독립해서 나가기도 했고, 핵심을 이루던 분들도 하나 둘 떠나고 말았다.
그러다 급기야는 2013년 12월 (피플 475)는 해체되어 영원히 많은 이들의 기억속으로 사라져갔다. 태어난지 13년 만의 일이었다.
이제 (피플 475)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475가 문을 닫을 당시까지 약 3년에 걸쳐서 (아! 충주성) 이라는 역사소설을 연재해 왔었다. 이번에는 이 작품으로 출판을 해야겠다고 마음도 먹었었다. 그런데 475가 역사속으로 문을 닫은 것이다. (아! 충주성)은 아직 모든 이야기를 마무리 하지 못했다.
많은 열정과 정성을 다 해왔기에 기필코 마무리를 시키고 싶은 생각은 간절하나............ 475에 의해 475를 위해 썼었다는 생각에 한동안 가슴이 막혔던 생각을 하면, 지금 당장은 (아!충주성)의 이야기를 마무리 할 수 없을 것만 갔다.
하여, 암담한 생각으로 지내던 중, 요즘들어 다시 글을 쓰고 싶다는 생각이 부쩍 생겼다.
그래서 그동안의 모든 메모들을 다시 꺼내고 정리하였다.
사실은 (아! 충주성)을 쓰기 시작한 이전부터 먼저 생각하며 자료를 수집하였던 것이 바로 이번에 쓰고자 하는 이야기 였다. 당시 자료가 아직은 미흡하다고 생각하여서, 웬만큼 자료와 생각을 정리해 놓았던 (아!충주성) 이야기를 먼저 꺼냈던 것이다.
이번 이야기의 제목은 (탑평리야 탑평리야) 이다.
한반도의 역사중 가장 치열하고도 긴박했던 시기인 후삼국시대의 충주지역에서 벌어진 역사이야기를 써보고자 한다.
내 소설은 거의 대부분이 내 고향 충주 지역의 지난 시절 역사 이야기를 주로 다루고 있다.
그 이유는 내 몸속으로 흐르는 핏줄 하나하나마다 이 지역에 살았던 그 많은 생명들이 차마 못다한 이야기들이 실타래처럼 매달리거나 흘러다니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그 사람들의 하나하나 못다한 이야기들을 하나로 엮어서 길다란 이야기로 늘어 놓고 싶다.
탑평리 7층석탑이 놓여진 남한강변 탑평리 너른 들에 서기 900년 전후의 시기를 살다간 사람들의 그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써내려 가려한다.
당시의 절대적 운송수단인 수로를 통하여 곡식과 나무들이 내려가고 소금과 젓갈이 올라오고, 이미 그 이전부터 한반도의 한복판이기에 서로들 차지하려고 싸우던 그 지리한 싸움이 다시 궁예와 견훤과 신라의 전장터가 되고, 여기에 기훤과 양길과 뒤에 왕건이 등장을 하고....... 이들의 싸움 속내엔 기름진 옥토만큼이나 이곳에서 나는 풍부한 철을 서로 차지해야만 했던, 그 와중에 벌어지는 사랑과 애증과 배신과 복수를 모두 그려내고 싶은것이다.
그 격동의 시대속에, 그 미친것 같은 격랑의 풍파속에 이곳에 살았던 사람들이 어떻게 살았는지를 들여다 보고 싶은 것이다.
예전에 이미 겪어보았던 일이지만 역사소설을 쓰다보면 때론 오해와 어려움을 겪는 일들이 있다.
역사의 기록속에 있는 실존한 인물들의 이야기가 나오게 되는데, 역사의 평가가 좋게 평가한 사람을 나름의 이유로 나쁘게 평가하면 심각한 문제가 될 때가 있다. 누군가 그와 관계된 후손이라는 사람이 따져오거나 시비(?)를 걸어온 경험이 있다. 소설은 그냥 소설이다. 쓰는 사람으로 책임성을 가져야 한다는 점도 충분히 공감한다. 하지만 새로운 해석 내지 궁극적으로 하고 싶은 지향점을 가지기 위해서 색다른 해석을 하는 정도의 자유는 그 또한 작가의 몫이라 생각한다.
고증에 의한 역사서를 쓰는 것이 아니라, 하고싶은 이야기를 써내려가는 소설이라면......... 구미에 맞지않는 부분에 대해서는 책장을 덮어 달라고 요구하고 싶다.
난 내가 하고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기 때문이다.
세상이 눈부시게 발전해 가고 있는 시점에서, 내가 꺼내는 이야기를 이제까지의 정설로 인정받는 역사에 근거해 폄하하지 않았으면 싶다. 어디까지나 가설이 섞이고 나의 개인적인 상상이 더하는 옛이야기 일 뿐이다. 나와 다른 이야기 해석에 대해서는 먼훗날 아무때고, 그 사람과 내가 함께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속으로 들어가 이야기의 대상자를 직접 만나보고 상황을 판단해 보고나서, 나의 생각과 판단이 그릇되었다면 그때 사과하고 오류를 시정할 용기와 뜻이 분명히 나에겐 있을을 밝혀두고자 한다.
언제고 기회를 얻어 그동안 내글에 깊이 관심을 보여준 많은 분들에게 이 글도 읽혀졌으면 하는 바램을 가지고 이제 시작하려 한다.
내 아내는 내가 다시 이런 글을 다시 쓰는 것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고 있다.
많은 시간과 열정을 담아내야 하고
많은 체력과 정신적인 고충도 수반되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만류를 한다.
내가 슬쩍 이번 글을 써볼 의향을 타진해 보자마자 되돌아 오는 말이........ 왕짜증 여사 왈.
- 무슨 이야기 쓸건데? 아! 그거? 그럼 쓰지마! 그런 글은 요즘 돈도 안되잖아. 요즘 시대에 누가 장황하게 긴 글을 읽냐? 길디 긴 역사소설을...........
짱구 모친아.
그래도 난 또 쓸거야.
바라기는........ 정말 바라기는....................
너와 아들이 정말 재미있게 읽어 볼 수 있늘 소설을 쓰고 싶어. 꼭 그렇게 쓸거야. 이해해라.
----- 2014년. 01월. 19일에.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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