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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멜랑꼴리 오딧세이) 파리의 향기, 그리고 파리의 역사

by 피안재 2023. 3. 5.

 

 

  파리(Paris)가 이번 여행의 목적지는 분명 아니었다.

  비행 스케줄 때문에 여러개의 경로 중에서 고르고 골라 선택한 경유지였을 뿐이다. 우리의 목적지는 오로지 프랑스 남부의 지중해 연안이었다. 코트다쥐르와 프로방스를 거쳐서 랑그독 지방으로 가는 노선을 택하다보니 그중에서 파리로 들어가서 국내선 비행편이나 고속열차(TGV)를 이용해 니스로 이동하는 노선을 택했던 것이다. 나오는 장소로 바르셀로나를 염두에 두다보니 니스로 들어가서 마르세이유와 몽펠리에를 거쳐 스페인으로 넘어가는 23일 간의 여행 노선을 택하게 된것이다.

  사전 스케줄에 따라 파리로 들어간 것인데 아! 글쎄........ 겨우 여행을 시작하고 이틀이 지나 사흘째 아침에 막 구워낸 빵에다가 커피를 마시다 말고 사단이 나고 말았다. 실로 어처구니 없기도 하고 대략 남감하기도 하고 어찌해 볼 도리가 없는 탈이 생기고 만 것이다.

  '파리에서의 시간이 순식간에 절반이나 벌써 지나버렸다는 말이네. 어쩔까나? 한 일주일쯤 잡았을것을.......... 열흘 이래도 괜찮았을텐데..........'

  뜬금없이 혼자 중얼거리듯 흘려내는 챠밍여사의 푸념이 식전 댓바람부터 내 비위를 아주 예리하게 할퀴고 지나가는 것이 아닌가?

  '스케줄을 내가 짜기는 했지만....... 충분히 설명했고 당신도 분명히 동의했기에 여기까지 온 것이잖아.'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지........ 나 보단 당신이 훨씬 해외여행 경험이 풍부하니까 틀림없이 잘 알아서 할 거라 믿은거지. 파리가 이럴 줄 알았나?'

  '파리가 어때서? 지금 파리 여행을 잘 하고 있잖아?'

  '시간이 너무 빨리 지나가니까 안타까워서 하는 말이지. 파리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파리가 그렇게 마음에 들어? 연일 하루종일 이렇게 춥고 바람이 사나운데도? 그렇다면 혹시........ 로마 보다도 더?'

  '응. 어떻게 해? 지금 당장은 로마 보다 파리가 훨씬 좋은것 같애. 날씨만 빼고........ 아니, 지금 보다 더 추워도 파리가 좋아.'

  헐!!!!!

  이정도면 지금 상황이 대단히 심각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지금까지 챠밍 여사가 가장 좋아하는 여행지는 바로 로마(Roma)였기 때문이다. 그래왔는데 지금 느닷없이 로마가 후위로 밀려날 상황에 처한 것이다.

  '꼭 방법이 없는것은 아니야. 니스로 가는 항공편은 시간상으로 포기해야만 할 것이고........ 니스 숙소에 연락해서 숙박 기간을 절반으로 줄여달라고 요청하면 가능하지. 대신 당장 며칠 더 파리에 체류하고 나서 니스로 내려가는 떼제베(고속열차) 예약을 해야하고, 지금 호텔에서 체크 아웃을 하고나서 새로 이 삼일 머물 숙소를 찾아서 예약을 하면 충분히 가능하지. 파리에서 연장 체류하는 것이........'

  '그럼 얼마나 손해가 날까?'

  '사전 예약분은 어차피 이미 지불을 했는데 사용을 못한다면........ 떼인다 생각하는게 편할것이고.......... 새로 예약하는 기차표와 호텔비 만큼 손해가 되겠지?'

  '그럼 그냥 애초의 계획대로 갈래. 아쉽지만..........'

  '두고두고 아쉬움으로 남을것 같으면 바꿔도 괜찮아. 이번 여행은 경비에 대한 여유도 많이 있으니까. 바꾸고 싶으면 지금 결정을 해야만 해.'

  '아냐? 이렇게 속마음을 털어놓기라도 했으니까 이젠 괜찮아질꺼야. 그냥 아쉬움으로 남겨둘래...........'

  '그래. 아쉬움으로 남겨 두었다가 다음에 다시 오면 되지 뭐.'

  '이그잭틀리(Exactly)! 그래. 내 말이 꼭 그말이야. 다음에 다시오면 되지. 나 있잖아. 다음에 꼭 파리에 다시 올래. 나머지 여행은 아직 시작도 안했지만, 어찌되었던 간에 나 파리만은 꼭 다시 오고 말거야. 너~무 너~무 좋아. 어쩜 이렇게 좋으니? 무슨 도시가 이렇게 장남감 나라 같을까? 예쁜 도시를 미니어처로 만들어서 길게 늘어놓은것 같애. 그런데 그 미니어처들이 똑 같은게 하나도 없어. 어쩜 이렇게 예쁠 수가 있을까? 우리 태리랑 세리 손잡고 마냥 걸어다녔으면 좋겠어. 여긴 사방이 그냥 놀이 동산이야.'

  순간 나는 깨달았다.

  이제 확실히 로마는 후 순위로 밀려났다는 사실을 말이다. 이제 챠밍여사에게 최애 여행지는 누가 뭐라해도 파리가 되었다는 사실을.........

  해외 여행에 대한 서적이나 자료나 SNS 등을 검색하다 보면 '죽기전에 꼭 가봐야 할 여행지 10' '내가 사랑하는 여행지 20' '나만 알고싶은 여행지 20' '자녀와 함께 가볼만한 여행지 100' 등등의 제목으로 수많은 기사들이 쏟아지듯 나와있는 것을 쉽게 접할 수 있다.

  그것들을 살펴보다 보면 항상 최상위 레벨에 가장 먼저 등장하는 것이 프랑스 혹은 파리 라는 사실도 쉽게 확인할 수 있게된다. 그렇게 보자면 해외여행의 주류라 할 수 있는 젊은 여행자들에게 언제 어디서나 항상 가장 사랑받는 여행지는 아마도 파리(프랑스). 뉴욕(미국). 런던(영국)이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 해외여행을 시작 할 때부터도 이들 파리. 뉴욕. 런던이 생각에 없었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제서야 파리를 겨우 찾게되었던 것이다. 물론 왜 그렇게 되었을까에 대해서 몇 번 생각해 본 적도 있다.

  아마도 그것은 내가 카파도키아 여행을 하면서 고백했던 내용이 솔직한 생각이자 고백일 것이다. 수없이 많은 여행지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나름의 공부를 하고 나서 좀 더 구체적인 가시권에 나의 여행 버킷리스트를 작성한다. 적어도 다섯 개 정도의 여행 프로그램은 늘 새롭게 만들어 장착하며 지낸다고 해도 무방 할 것이다. 카파도키아 만큼이나 파리. 뉴욕. 런던에 관해서도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했었다. 하지만 언제나처럼 실행 단계인 버킷 리스트에는 올리지 않았다. 모든 이유는 아니겠지만 그곳들 모두가 상당히 강력한 임팩트를 가진 아주 특별한 장소일것이라는 약간의 거부감 내지는 두려움 내지는 불편함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카파도키아에 도착하는 순간 가졌던 그런 엄청난 위력으로 다가오는 압박감 같은것을 말한다. 이틀만에 나는 카파도키아에서 뛰쳐 나왔다. 더 이상 체류하면서 카파도키아의 독특함에 빠져든다면 앞으로 더 이상 그런 부류의 여행지는 모두 시시하게 느껴질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맛보기 정도에서 카파도키아를 빠져 나왔다. 쉽게 말해서 '누구나 일생에 한 번은 꼭 카파도키아를 가 보아라' 라고 나는 말한다. 거기에 '아주 잠깐만' 이라고 덧붙이고 싶다.

  여러 자료에서 '파리에 한 번 깊게 빠지게 되면 도저히 빠져 나올 수가 없게 된다' '다만 빠져들기 까지 시간이 좀 필요하고, 그 결과에 따라서 아주 사랑하는 파리와 혐오하게 되는 파리로 나뉘게 된다' 라는 글을 자주 접할 수 있었다. 그래서 파리에서의 체류를 4박5일로 정했던 것이다. 혹시나 후자에 속하게 되면 어떻게든 서둘러 파리를 빠져나와야 했으며, 빠져들게 되면 누가 말려도 기어코 다시 찾아가게 될테니 말이다.

  그런데 고작 이틀만에 챠밍여사가 '파리지엔느'가 되기로 작정한 사람처럼 되어 버렸다. 불쌍해진 로마........ 안달루시아는 또 어떻게 하지?

  헐!!!!!!!

  그렇다고 헐만 외치고 있으면 어떻게 해?

  파리의 시간이 아까우면 더 일찍 서둘러 파리의 도심속으로 나서야지........... 아껴야지. 바둥바둥 매달려서 라도........

  숙소가 있는 갈리에니(Gallieni) 역은 메트로 3호선의 종착역이다.

  종착역이란 어감은 '아주 외지고 먼 막다른 곳'의 느낌을 안겨주지만 실상에서는 나름으로 유리한 점이 많이 있다.

  일단 굳이 시간표를 일일이 확인하거나 서둘러 뒤어 갈 필요가 없다. 어차피 모든 시작은 정해진 시간에 종점에서부터 서서히 시작되기 마련이니까 말이다. 그냥 느긋하게 길을 나서면 그만인 것이다. 아울러 종점에서는 항상 자리 확보가 가능하다. 언제든 빈 자리가 아무데나 골라서 앉으시라고 반겨준다. 반대로 돌아 올 때는 혹시나 내릴 역을 그냥 지나칠까 하는 두려움에서 완전 해방된다. 노선과 방향만 확실한것을 확인했다면 마음 턱 놓고 기다리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가령 사람들이 썰물처럼 순식간에 모두 빠져나가고 마지막으로 덜렁 남겨졌다면 그곳이 바로 당신이 내려야 할 종점인 것이다. 갈리에니에 제대로 도착한 것이 틀림없다.

세계 어디를 가나 대도시에 빼곡하게 얽히고 섥혀있는 지하철 노선들은 7 정거장을 가나 13 정거장을 가나 시간 차이는 별반 거기서 거기라 해도 될것이다. 더우기 파리 처럼 지하철 역들이 아주 지근거리에 붙어있다시피 놓여있어서 삽시간에 지나쳐도 못 느낄정도인 도시에서는 사실상 거리나 역의 숫자가 거의 무의미하다고 보아야 하겠다.

  그런 이유로 적어도 자유여행자라면 대도시에서는 환승역이나 종점이나 터미널이나 공항 등과 쉽게 연계할 수 있는 장소를 고르는 것도 좋은 한가지 방편이라고 볼 수 있다. 더하여 도심 중심에서 벗어나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숙소나 주변 환경이 시설면이나 쾌적함에서 월등해 지면서도 가성비가 훨씬 좋아진다. 이는 틀림없는 사실이다. 방향을 알 수 있고, 지도를 볼 수 있고, 대중교통 노선도를 이해할 수만 있다면 무조건 유명한 장소나 도심의 한복판에서 멀리 떨어지라고 나는 주장하고 싶다. 그것이 훨씬 자유여행을 유익하게 해 줄것이라고 나는 믿기 때문이다.

  파리(Paris)는 내가 그동안 다녀 본 도시중에서 최상층에 꼽힐만큼 대중교통이 아주 잘 발달되어 있는 도시다. 시내버스와 지하철이 도시의 어디든지 빼놓지 않고 여행자를 데려다 준다. 트램은 타 보지 못했지만 말이다. 또 우리의 경우에는 출발과 귀가할 때를 제외하고는 파리의 모든 지역을 대부분 걸어서 다녔다. 충분히 걷는것만으로도 파리 여행이 가능했다. 모든 대중교통은 출발하면서 티켓을 펀칭하는 순간부터 60분(지난해 까지는 70분 이었다고 함) 이내에서 무한 환승이 가능하다. 지하철에서 지하철이던, 버스에서 버스던, 아니면 지하철에서 버스던 간에 말이다.

  단 한 가지, 파리의 지하철 환경에 대해서는 어떤 기대도 갖지 말자. 적어도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말이다.

  서울의 지하철이 파리의 지하철에 비하자면 열 배 내지는 스므 배는 훌륭하다. 그 어떤 비교할 수 있는 모든 항목에 아무리 다 따져 보아도 대한민국의 지하철 환경과 화장실 문화는 세계 으뜸이며 최고급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곧 지하철 이야기는 다시 하겠지만........

  갈리에니 역에서 메트로를 이용해 아홉 정거장을 가면 레무르 세바스토폴(Reaumur Sebastopol) 역에 닿는다. 여기서 4호선 열차로 환승해서 5 정거장을 가면 마침내 생 미쉘(Saint Michel) 역에 도착한다. 바로 우리가 오늘의 여행을 시작할 장소이다.

생 미쉘(St. Michel)은 1853년 오스만 남작에 의한 '새로운 파리 건설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만들어 졌다.

  부르봉가로 알려진 루이 왕조는 프랑스의 국력이 번성해지자 이탈리아 로마에 버금가는 제국의 수도를 건설하고 싶어졌다. 하여 파리는 로마를 원형으로 해서 마치 짝퉁처럼 새롭게 형성되어 나가기 시작했다. 항공사진으로 보면 파리의 도시 구조가 영락없이 로마와 비슷하게 계획 건설되었다는 것을 볼 수가 있다. 하지만, 무조건 로마 못지않은 제국의 수도를 각지 위하여 온갖 노력을 다하였지만 도시라는 것은 하루 아침에 결코 이루어지거나 만들어 지는 것이 아니었다. 도시라는 것은 터전 위에 무조건 새로운 건물만 짓는다고 되는것이 아니다. 하지만 루이 왕조는 서둘러 거대한 건축물들을 지었고 농로제의 파산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꾸역꾸역 도시로 도시로 몰려들기 시작했다. 도시는 점차 가축 사육장 처럼 변해갔다.

  중세 이후로 파리는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어 거대한 도시가 되었지만, 우후죽순 생겨난 건물들이 모두 제각각 제멋대로여서 마차 한 대가 제대로 달릴 수 없는 도시 구조에다가 하수도가 취약하여 도심 전체가 진흙탕에 쓰레기가 산더미처럼 쌓이고 악취가 풍기며 쥐와 파리떼가 들끓었다. 이런 엉망진창 도심 환경에서 벗어나려는 노력으로 하이 힐이 탄생했고 프랑스제 향수가 발전하는 아이러니를 역사는 만들어냈다.

  제 2 공화국을 거쳐 쿠데타로 황제에 오른 나폴레옹 3세는 오스만 남작을 과감하게 등용하여 그에게 '새로운 파리 건설'을 명령함과 동시에 프랑스의 군대 동원령만을 제외한 전권을 넘겨주었다. 국고를 얼마든지 가져다 쓰고, 필요하면 공권력을 동원하고, 더 필요하면 법령을 개정하면서 까지라도 새로운 도시 건설을 간절히 원했던 것이다.

  어찌 되었건 파리는 완전히 새롭게 태어났다. 바로 지금의 파리가 그때 그렇게 해서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덕분에 프랑스의 국고는 텅 비게 되었고, 공권력을 동원하여 국민들을 강제 노역에 동원했고, 무자비하게 개인 재산인 기존 건물들을 부수고 빼앗고 하면서 민심은 극도로 흉악해진 상태였으며....... 어찌되었건 에투왈 개선문에서 사방으로 12 갈래의 직선 도로가 세상을 향해서 뻗어나가는 거대한 새로운 파리가 탄생하게 되었던 것이다. 샹젤리제 거리도 그때 태어났고, 세느 강변에 대대적인 토목공사를 벌여 지금 처럼 홍수와 가뭄에 대처하는 완벽한 치수 사업을 마무리 하였다. 더하여 가장 압권은 지하 3층으로 이루어진 역사상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하수도 시설을 완공한 것이다. 19세기 중엽의 상황으로 보자면 파리는 세상에서 가장 멋진 최첨단 근대화를 이룩한 도시의 표본이었다. 이제 시궁창 파리는 완전히 사라졌다.

  그런데 '생 미쉘이라니? 기독교 역사에 생 미쉘 이라는 성인이 있었나? 세인트(saint)가 붙었으니 틀림없이 기독교 성인을 가리키는 것 아닌가?' 미쉘 이라는 성인에 대해선 이제껏 들어보질 못했는데........'

  챠밍 여사의 이런 의문에도 충분히 일리가 있다. 파리에 오기 전까지는 나도 미쉘 성인이란 이름을 들어보지 못했으니까 말이다.

생 미쉘 광장에 도착해서 마치 병풍처럼 우뚝 서 있는 생 미쉘 분수대(Fontaine Saint Michel)를 보고 그제서야 나도 이해가 되었으니까 말이다.

  기독교 역사나 구약 성격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대천사 미카엘' 이라는 이름에 대해서 기억이 있을것이다.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하늘나라에서 벌어진 혼돈의 시기에 하나님의 명령을 받은 미카엘 대천사가 갑옷으로 무장하고 빛나는 칼을 들거나 길고 뾰족한 긴 창을 들고 백마를 타고 나타나 흔히들 용으로 상징되는 모든 사탄(악마)을 무찔러 버리는 사건을 말이다. 하늘나라의 최고위급 천사이자 정의와 승리의 천사가 바로 미카엘 대천사 이다. 영어 문화권에서 부르는 이름인 '미카엘 대천사'가 이곳 프랑스어 권역에서는 '생 미쉘' 이라고 불리게 되는 것이다.

광장 가운데 설치된 분수대의 중간에 칼을 뽑아 든 천사의 날개를 단 미카엘 대천사 청동상이 위엄과 용맹을 떨치듯이 놓여져 있다.

  너무나 잘 알려진 프랑스 북부 노르망디 해변에 있는 몽생미쉘(Mont Saint Michel)의 경우도 바로 이 '미카엘 대천사에게 봉헌된 수도원' 이라는 이름으로 지어진 것이다. 수도원의 종탑 꼭대기에 미카엘 대천사의 황금 조각상이 있다.

  광장 분수대 앞에는 한 가족으로 보이는 한국인 여행자들이 있었다. 아마도 이곳에서 가이드와 다른 여행자들과 합류해서 시테섬을 돌아보려는 사람들로 보인다. 생 미쉘은 파리 도심의 심장부를 여행하고 싶은 사람들의 약속 장소로는 최고가 아닐까 싶다.

모든 대중교통 수단들이 이곳 생 미쉘로의 접근을 아주 쉽게 만들어 주고 있을 뿐더러, 애초 오스만 남작이 파리 도심 재건사업을 시작하면서 부터 어떤 기념비적인 특별한 장소로 이곳을 계획하고 만들었기 때문이다.

  파리 개선문을 중심으로 12 방향으로 곧게 뻗어나간 도로를 바탕으로 파리가 재건되기는 했지만, 파리의 심장은 언제나 변함없이 시테 섬(I'le de la Cite) 이었던 것이다. 시테 섬이 제외된 파리는 곧 파리가 없는 프랑스 역사나 다름이 없기 때문이다. 프랑스의 역사는 파리에서 시작되었고, 파리의 역사는 시테 섬에서 시작되었다.

  갈리아인의 한 부족인 켈트족이 이지역에 나타나 처음으로 근거지를 마련한 곳이 바로 시테 섬이었다. 당시로서는 넓지도 좁지도 않은 적당한 크기의 섬이었던 시테 섬에서 외부로부터의 방어벽으로 강물을 삼고 움막 생활을 시작했다. 세력이 커지면서 외부의 침략이 잦아지자 섬의 외벽으로 목책을 두르고 토성을 쌓았다. 켈트 족의 마을은 점차 커져서 파리시(Parisi) 라는 고대 도시로 발전을 거듭하게 되었던 것이다. 연합 부족으로 발전한 켈트족은 당시 세계(유럽)를 지배하고 있던 고대 로마에 점점 위협적인 존재로 부각되었다. 로마를 제국으로 이끌려던 야심가 케사르(줄리어스 시저)에게 켈트족 문제는 해결해야 할 장애물로 판단되었고 마침내 갈리아 원정이 벌어진 끝에 파리시는 로마의 식민지가 되었다. 하지만 켈트족의 반란은 끊임없이 계속되었고, 현명한 황제였던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 황제는 다시 켈트족을 점령한 뒤에 그동안의 정책을 바꾸어 켈트족의 파리시를 로마 방식의 새로운 도시 문화권으로 개발하기 시작했다. 켈트족의 파리시는 이제 로마 제국의 루테티아(Lutetia)가 되었다. 로마는 세테 섬에 신전을 짓고 총독의 집무실과 관저를 짓고 군대를 주둔 시켰다.

  서로마가 멸망하면서 유럽은 주인이 없는 무주공산으로 변해 버렸다. 로마 기독교(가톨릭)이 가진 종교적 유대감과 조직망으로 근근히 명맥을 유지하던 중에 봉건 왕조의 등장이랄 수 있는 프랑크 왕국이 나타나 바여 여기 시테 섬에 다시 둥지를 틀고는 도시의 이름을 파리(Paris)탄생이었고, 이는 곧 프랑스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신전이 있던 자리에 교회가 들어섰고, 왕궁이 건설되었고, 헌법재판소가 시테 섬에 들어섰다. 남쪽으로 페티 다리를 건너면 중세 대학이 들어서 인재들이 파리로 몰려 들었고, 북쪽으로 노틀담 다리를 건너면 시청을 비롯한 모든 관공서가 집결해 있다.

왕조가 바뀌면서 도시가 점점 커지게되자 마침내 왕궁을 루브르 궁전으로 옮기면서 파리 시청에서부터 서쪽으로 루브르궁전까지 일직선으로 쾌적한 도로(히볼리 가)망을 건설한다. 하지만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사람들이 도시로 몰려들자 파리는 점차 무질서하고 더럽고 불결한 도시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새로운 파리를 건설함에 있어서 오스만 만작은 파리의 뿌리이자 심장이었던 시테 섬을 위한 도시계획도 세워서, 시청에서 시작하여 루브르 궁전에 이르는 중심대로(히볼리 가)의 연장 선상에서 파리 도심의 척추라 할 수 있는 동서대로(콩코드 광장 - 파리 개선문 - 라 데팡스)를 건설해 마침내 오늘날의 파리를 완성시켰던 것이다.

  오스만 남작은 새로운 파리 도시재건을 기념하는 기념비를 세우고자 시테 섬이 한 눈에 건너다 보이는 상징적인 장소에 광장을 만들고 대천사 미카엘이 파리라는 새로운 도시를 영원히 지켜주는 의미를 담아 분수대를 세웠다.

  파리가 새롭게 건설되었고 그 기념비로 생 미쉘 분수대가 완성되어가는 즈음에 이곳을 둘러보던 황제가 그만....... 미카엘 조각상이 올라서야만 하는 자리에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조각상을 만들에 세우고 싶다는 욕심을 드러내는 통에......... 여러가지 수난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오스만을 비롯한 파리의 지식인들과 시민들이 거센 반발을 계속하자 결국 원안대로 미카엘 조각상이 올려지기는 했는데........ 지금의 분수대 모습이 애초에 계획한 건축물과는 약간 변형이 가해진 결과라는 사실이......... 황제가 꽤나 뒤끝이 있었다.

  어찌되었거나 '파리를 제대로 둘러보고자 한다면 무조건 파리 지하철을 타고........ 일단 생 미쉘 역에서 내려야' 한다. 에펠탑이나 개선문도 중요하겠지만, 파리에서 꼭 보아야 하는 여행 명소의 대부분은 바로 여기에 있거나 이 근방에 산재해 있기 때문이다.   그 핵심에는 뭐니뭐니해도 파리의 뜨거운 심장이자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인 노틀담 성당이 바로 여기에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생 미쉘 광장에 서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제도 그제도 그리고 오늘도 역시나 날씨다. 여전히 잔뜩 흐리고 매우 춥다. 남들은 패딩에 롱 코트에 털모자에 목도리로 똘똑 감싸고 있는데....... 우리는 아무런 준비없이 따뜻한 남쪽에서 얼떨결에 떠밀려 온 난민 차림이 아니겠는가?

  아!!! 야속하기만 한 파리의 날씨여. 누구를 원망하랴!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 파리에서 가장 멋지고 아름답고 아늑한 카페가 아닐까 싶다.

쪽유리창을 일부 천장까지 포함하여 가장 커다란 통유리창으로 바꾸었으면 어땠을까 싶어진다. 창문의 턱도 바닦까지 낮추면..... 그야말로 창문 밖 노천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길 건너로 노틀담 대성당을 바라다 보는 풍경을 그대로 느낄 수 있을텐데 말이다. 하지만...... 이 또한 아주 조금은 구닥따리 느낌이거나 나름의 옛스런 정취가 묻어나는것 같아서 이 정도 풍광만으로도 충분히 감격스러울만큼 아름답다고 하겠다.

매일 아침마다 이 자리에서 커피 알랑제 에다가 크로아상을 시켜놓고 노틀담의 경치를 누려볼 수 있다면 좋을것만 같다는 생각이 든다. 살짝 추위로 인해서 기분이 꾸리꾸리 해질 상황에서 허겁지겁 무작정 뛰어들어 온 카페(La Creme de Paris Notre-Dame) 였는데, 마침 막 손님이 나가는 자리가 딱 하나 비어 있었던 것이다. 자리를 차지하고 나니 그제서야 어느 잡지에선가 보았던 유명한 카페라는 것을 알아 차렸다. 그래 이런게 파리야.

'칫, 지까짓께 파리지앵도 아니면서.......'

 

'풍경이 아름다운 카페'가 있다.

그런가 하면 '아름다운 카페가 있는 풍경'이 있다.

이 두 가지 표현에 차이가 있을까? 그 말이 그 말인것 같은데 말이다.

카페를 나서서 길을 건너 뒤를 돌아다보며 문득 그런 쓰잘데 없는(?) 생각을 떠올렸다. 잠시 생각에 골몰하다가 그것도 모자라 심지어 메모를 한다. 왜냐면...... 이 생각을 아무때고 다시 해보기 위해서........

'풍경이아름다운 카페' 라고 한다면....... '전체적으로 아름다운 풍경으로 가득한 장소에 카페가 하나 달랑 놓여있다' 라는, 주체가 어디까지나 전체적인 풍경 이라는 느낌이 든다. 반면에 '아름다운 카페가 있는 풍경'은 '깜찍하게 아름다운 카페가 하나 있어서 전체적으로 그 거리의 풍경에 좋은 영향을 끼친다' 라는 의미로 해석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런데 지금....... 도대체 파리를 걷다말고 왜 이런 쓰잘데 없는(?) 생각에 골몰하는지 사실은 나도 잘 모르겠다. 내게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이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을 나는 '멜랑꼴리(melancholy) 하다' 라고 스스로 정의 내리고 있다. '이거 참 거시기(?) 하구만!'

 

페티 다리를 건너 대성당으로 향해야 하지만,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지역이 생 미쉘 이라고 한다면 아무리 노틀담 대성당이 급하다고 해도 절대로 그냥 지나칠 수 없는 명소가 아주 가까운 인근에 있다는 기억에 세느 강변길을 따라 한 블럭만 올라가 보기로 한다. 말이 한 블럭이지 길 모퉁이를 돌아서면 벌써 저만치 그곳이 보이기 시작한다.

파리를 배경으로 하는 영화는 수없이 많이 있다. 가장 근자에 아주 강력한 임펙트로 나를 이곳 파리로 잡아 끈 것은 <미션 임파서블.폴 아웃> 이었다. 파리 도심을 질주하던 에단 헌트(톰 쿠르즈)의 오토바이 액션 씬 때문에 어쩌면 내가 지금 이자리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챠밍 여사를 모시고 다녀야 하는 파리 여행이라면 적어도 영화의 장르가 바뀌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액션 스릴러는 가라. 지금은 아주아주 애틋한 표정과 감정이 잔잔하게 흐르다가 아련한 아쉬움이 가득한 채 앤딩으로 흐르는 서정적인 멜러물이 필요한 시간이다.

이런 날은 우디 앨런 감독이 만든 <미드나잇 인 파리, Midnight in Paris>나 에단 호크가 주연한 <비 포 선셋, Before Sunset>가 제격이 아니겠는가?

 

 

 

 

 

 

 
 

 

  언제나 수많은 여행자들로 가득 넘쳐나던 파르비스 노틀담 광장(Parvis Notre-Dame)은 지금 썰렁하다. 드넓은 광장의 절반 이상을 철제 장벽이 둘러쳐져 더 이상의 접근을 허락하지 않는다. 2006년 부터 광장의 이름을 장 폴 2세 광장(Place Jean-Paul 2)으로 바꾸었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예전처럼 편리하게 노틀담 광장이라고 부른다. 아마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방문은 그저 하나의 이벤트 정도로 여기는 듯 하다. 노틀담 대성당은 지금 굳게 잠겨져 있다. 그저 멀리서 바라볼 수 있을 뿐이다.

  노틀담 광장의 오른편에 거대한 청동 기마상이 하나 우뚝 서 있다.

  가까이 다가가서 받침대에 설치된 명패를 보지 않아도 단박에 누구의 동상인지 알아차릴 수 있다. 이 절대적인 교회의 성역에 황제의 관을 머리에 쓰고 떡하니 말 위에 올라탄 채로 버티고 설 수 있는 사람은 하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아니나 다를까? 확인해 본 명패엔 분명하게 샤를마뉴 기마상(Charlemagne et ses Leudes) 이라고 적혀 있다.

  샤를마뉴는 프랑스 역사에서는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아주 중요한 인물이다. 하여 왕(王)이었던 그의 이름 뒤에는 반듯이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아마도 교회(로마 카톨릭)가 그의 위상을 격상시키려 붙여준 새로운 직분의 명칭이지 싶다. 교회는 또다른 한명의 왕에게도 대제(大帝) 라는 수식어를 굳이 붙여준 적이 이미 있었다. 기독교를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바로 그다. 우리나라 역사에서 광개토 왕이나 세종 임금의 뒤에 굳이 대왕(大王) 이라는 수식어를 꼭 붙이는 것과 같은 이유이다.

  로마의 교황청(바티칸)에 가면 이런 사실을 보다 확실하게 확인할 수가 있다. 교황청의 파사드(정문)를 들어가 긴 주랑(복도)의 양쪽을 살펴보면 거대한 대리석으로 만든 기마조각상이 놓여 있다. 하나는 콘스탄티누스 대제이며 다른 하나는 바로 샤를마뉴 대제의 기마조각상이다. 이것은 그만큼 드 황제의 역활이 로마 가톨릭 역사에 크게 기여 내지는 공헌했다는 의미이기도 한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두 황제의 역활로 인해서 지금의 가톨릭이 굳건하게 반석위에 올라설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만약에 콘스탄티누스 대제나 샤를마뉴 대제가 없었다면....... 로마 가톨릭은 물론 그 이후에 탄생한 모든 기독교의 모습은 과연 지금 어땠을까? 도무지 상상이 되질 않는다.

  바로 그 샤를마누 대제의 동상이 파리의 심장이자 상징인 노틀담 대성당의 광장을 차지하고 있는 것이다. 어쩌면 당연하다 하겠다. 콘스탄티누스야 당연히 로마인이니까 로마에 있어야 하겠고, 샤를마뉴야 프랑스의 뿌리인 프랑크 왕국의 황제였으니 당연히 프랑스 인이 아니겠는가?

  그런데 이 기마동상에서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샤를마뉴가 아니라 다른 것이었다. 앞 쪽에서 말고삐를 나뉘어 잡고있는 두 명의 부하이지 호위무사의 모습이 나의 시선과 극한의 호기심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샤를마뉴의 오른쪽에서 말고삐를 잡고 걷고있는 기사가 바로 롤랑(Roland le Preux) 이요, 반대편의 기사가 그의 친구이자 동료인 올리비에(Olivier)인 것이다. 중세 문학의 최고 걸작이랄 수 있는 '롤랑의 노래(La Chanson de Roland)'에 등장하는 두 주인공이 바로 이들이다. 이들은 샤를마뉴 대제가 위대한 업적을 달성하는데 절대적으로 공헌한 12명의 기사단의 일원이었다. 하지만 이 조각상에서 참으로 아쉬운것은..... 롤랑과 올리비에가 활약하던 시기는 샤를마뉴가 한창 정복전쟁을 벌이던 초창기에서 중기까지 활약한 인물들이었다는 점이다. 끝내 이들은 함께 샤를마뉴를 위해 전쟁터에서 장렬하게 목숨을 잃었다. 그 터전 위에서 한참이나 승승장구하면서 업적을 쌓은 후에야 샤를마뉴는 교황에 의해서 서로마 제국의 황제 자리에 오르게 되었던 것이다. 프랑크 왕국이 진정으로 유럽의 지배자가 되는 순간이다. 하지만 롤랑과 올리비에는 샤를마뉴의 황제 즉위를 끝내 보지 못하고 죽었다. 하긴........ 어떤 상징과 의미를 담기 위해서 저렇게 만들었다면........ 조각상을 만든 로셰 형제를 탓해서 무엇하겠는가?

  롤랑의 용맹함과 충성심은 시공을 초월하며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 구전으로 전해지다가 점차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로 꾸며지게 된다. <롤랑의 뿔피리> <아더왕과 원탁의 기사> <전설의 기사 베오울프> 같은 하나의 절설이었거나 구전되어 오던 이야기가 바로 중세 시대를 대표하는 새로운 방식의 서사시 형식으로 만들어진 대표적인 중세 문학으로 오늘에까지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정말로 샤를마뉴 대제가 그렇게 프랑스 역사상 최고로 존경받고 추앙받는 위대한 영웅일까?

  이 대목에서 솔직한 나의 대답은 '글쎄 올시다' 라고 답하겠다.

  지극히 내 주관적인 소견으로는........ 교회(로마 가톨릭) 입장에서는 고맙고 위대한 황제라 칭송하고 받들어 모시는 것이 타당 할 수도 있겠으나, 진정한 프랑스 역사로 따져보자면 샤를마뉴 대제 보다는 오히려 프랑수아 1세 황제가 떠받들어져야 하지 않을까 싶다. 물론 프랑수아 1세 경우엔 최악의 라이벌과 동시대에 같이 태어나 여러가지로 수모를 격기도 하지만 말이다. 그래도 프랑스 역사라면....... 적어도 파리의 역사에서는 샤를마뉴는 지울 수 있어도 프랑수와는 결코 지울 수 없을테니까 말이다.

  유럽의 역사는 엄청나게 복잡하다. 유럽 국가들의 연혁이나 계보를 확실하게 구분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도대체 뭐가 얼마나 복잡하기에 그러는 것이냐? 어쩌면 그것은 영원히 풀릴 수 없는 매듭과도 같다고 할 만 하다.

  그래서 한 가지 예를 들어서 (유럽 역사의 복잡성)을 간략하게 피력해 보고자 한다면.......... 바로 샤를마뉴 대제를 그 예로 택해 설명해 보겠다.

  샤를마뉴 대제의 널리 알려지고 사용되는 이름은 프랑스 역사에 기록된 바 대로 샤를마뉴 대제(Charlemagne) 이다. 그런데 이 이름이 영어권으로 넘어가게 되면 찰스 대제( Charles the Great)로 불려진다. 다시 독일로 넘어가게 되면 칼 대제(Karl der Grobe)가 되고, 다시 이탈리아나 스페인으로 넘어가면 카를로 대제(Carlo Magno)로 불려지고 기록되어 왔다. 프랑스 역사의 위대한 황제였으니 그냥 프랑스 식으로 샤를마뉴 대제라 부르면 되는것이 아니겠느냐?

  아니다. 절대로 아니다. 진실 앞에서 절대로 그렇데 될 수가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유럽 역사의 한 단면이라고 할 만하다.

  샤를마뉴 대제는 결코 프랑스 만의 황제가 결코 아니었다. 어디까지나 그는 프랑크 왕국(Francia Kingdom)의 왕이었던 것이다. 프랑스는 프랑크 왕국에 속할 수 있지만, 프랑크 왕국이 프랑스에만 속할 수는 없다는 문제가 있다. 프랑크 왕국에는 프랑스 외에도 독일과 이탈리아 반도 북부와 네덜란드와 벨기에 지역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프랑크 왕국이 곧 프랑스 왕국이다' 라는 방식의 해석은 옳지않은 것이다.

  프랑스 영역을 발판으로 세력확장을 꾀하며 승승장구한 샤를마뉴 왕은 스스로 프랑스 역사에 속하는 카를링거 왕조를 열었다.   로마 가톨릭의 재건을 꿈꾸던 교황 레오 3세는 샤를마뉴를 교회의 휘하에 두는 것이 꼭 필요하다는 음모를 꾸미고 기습적으로 샤를마뉴를 서로마 황제에 즉위 시켜 버렸다. 샤를마뉴에 의해서 유럽의 전역을 확보한 프랑크 왕국이 이제 새로운 신성 로마제국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는 순간인 것이다. 신성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가 바로 샤를마뉴 대제인 것이다. 프랑스는 유럽 전체를 차지한 신성 로마제국의 일부가 되었을 뿐이다. 뒤를 이어 등장하는 신성 로마제국 황제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카를 3세) (오토 1세) (하인리히 4세) (프리드리히 1세) (프리드리히 2세) (카를 5세) 등등의 역사의 일면씩을 떠들썩하게 담당했던 인물들이 등장하는데........ 하나 같이 프랑스를 대표하는 이름이나 인물들이 아니다. 주로 독일. 스페인. 오스트리아 출신의 황제들이 유럽을(신성 로마제국)을 다스리고 통치했던 것이다.

  샤를마뉴 왕이 파리에 기거하면서 프랑스를 발판으로 카롤링거 왕조를 세우고 정복사업을 펼치기 시작 할 때 까지는 분명 프랑스 역사가 맞다. 어느정도 세력 기반을 확복한 뒤 샤를마뉴 왕이 가장 먼저 선택한 일이 바로 '파리를 버리고 떠나는 것' 이었다. 그에게는 프랑스가 전부가 아니라 온 세상(유럽 전체)을 거머 쥐고픈 야심이 있었기에 파리를 버리고 유럽 전체를 다스릴 수 있는 새로운 유럽의 중심 도시를 건설해서 가지고 싶었다. 그는 오늘날 독일과 벨기에의 국경 지대에 위치한 아헨(프랑스 식 이름은 엑스 라 사펠)으로 옮겨서 새로운 수도를 건설한다. 프랑스의 새로운 수도가 아니라, 신성 로마제국의 초대 도읍지로 아헨을 선택한 것이다.

  하지만, 샤를마뉴 대제가 사망하고 오래지 않아 제국은 분열된다. 프랑스와 독일과 이탈리아 북부 지방들이 새로운 왕국으로 분열에 분열을 거듭하게 되는 것이다. 신성 로마제국의 지배자가 합스부르크 왕가가 되면서 제국의 수도는 오스트리아 비엔나(빈)으로 옮겨지게 된다. 이제 세상은 독일 혹은 스페인이 지배하는 시대가 되어버린 것이다. 프랑스는 밀려났고 외면당하게 되는 처지로 전락해 버린 것이다. 십자군 전쟁에서 루이 왕을 포함해 프랑스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등장하게 되지만....... 역시나, 프랑스와 상극인 영국이 이미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했었기에 프랑스는 언제나 들러리에 불과했다고 볼 수 있다.

  프리드리히 2세(스페인의 왕이자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4차 십자군 총사령관)와 카를 5세(스페인 왕이자 신성 로마제국 황제. 이사벨 여왕의 외손자)가 등장해 세상을 스페인이 차지하고 지배하던 시기가 되어서야 비로소 프랑스에도 걸출한 인물이 등장하게 되었다.

  프랑크 왕국이 분열해 독일 왕국. 이탈리아 왕국. 서 프랑크 왕국으로 분리된 상황에서 마침내 파리 출신의 한 영웅이 새롭게 등장해 프랑스 전역을 석권하더니 이내 자신의 카페 왕조를 열었던 것이다. 그가 바로 위그 카페(Hugues Capet)로 바로 지금의 프랑스를 만든 사람이라고 할 수 있겠다.

  위그 카페는 샤를마뉴가 아헨으로 떠나면서 버려지고 황페화된 파리의 재건에 새로 세운 왕조의 사활을 모두 걸었다고 해도 무방 할 정도였다.

  가장 먼저 노틀담 대성당의 건립을 시작했고, 파리 외곽(현 순환도로)으로 요새를 구축해 수도 방위에 힘썼으며, 인재 양성을 위해 파리 대학(소르본 대학)을 건립하고 나서 루부르 궁전을 지었다. 아울러 십자군 원정에 프랑스가 참가하면서 오랜 시간 위축되었던 프랑스의 위상을 점점 확립해 나가기 시작하였다. 이런것들이 바로 지금의 프랑스를 있게 만들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카페 왕조는 후사(아들)를 얻지 못하여 결국 비운에 사라지게 되었고, 방계로 내려가 발루아 가문이 등장하면서 급격히 쇠락의 길을 다시 걷다가 끝내 영국의 침략을 당하게 된다. 이것이 바로 백년 전쟁이다. 풍전등화의 위기 앞에서 잔 다르크가 나타나 마침내 프랑스를 위기에서 기적처럼 구해 낸다. 커다란 역경이 지난간 뒤에야 비로서 또다시 걸출한 영웅이 등장해 프랑스를 전성시대로 이끌게 되었으니 우리나라로 치자면 (세종대왕 시대)에 해당하는 프랑스 역사상 최고의 전성시대를 프랑수와 1세가 열어가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따진다면 노틀담 광장의 샤를마뉴 대제 청동상은 차라리 위그 카페 왕이나 프랑수와 1세 동상으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프로이센(독일)과 프랑스가 벌인 보불전쟁(普佛戰爭,1870~71) 당시까지 영토 분할을 논하면서 실제로 샤를마뉴 대제가 (프랑스인 이다) (독일인 이다) 라고 상호간에 벌어진 논쟁은 역사적으로 아주 유명한 사건이다. 프랑크 왕으로 시작된 샤를마뉴는 과연 프랑스인 일까? 그의 출발이 시테섬이었으니 프랑스 파리에 근거를 두었음은 분명하지만 출생지는 결코 파리가 아니다. 독일인들은 샤를마뉴가 아헨에서 태어났으며, 그래서 신성 로마제국의 수도로 아헨을 택했다고 주장한다. 샤를마뉴는 아헨에서 분명하게 사망했다. 그리고 아헨은 현재 독일의 영토에 해당한다. 그렇게 따진다면 어찌되었건 샤를마뉴는 독일인이 분명하다고 해야하겠다. 그런데 여기에 샤를마뉴가 아헨 지역에서 태어난 것은 맞지만, 확실하게는 아헨의 변두리 지역인 에르스탈에서 출생했다고 여러 근거를 제시하는데, 에르스탈은 지금 벨기에 리에주 주에 속하는 소도시로 독일과 국경 경계에 해당하는 지역이다. 그럼 이번엔 샤를마뉴가 벨기에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인데........

  유럽이라는 데가 대충 이렇다. 유럽 역사도 실상은 대부분 이런 식이다.

  켈트 족이다. 게르만 족이다. 노르만 족이다. 이렇게 초장엔 어느 정도 구분이 가능했었는데..... 서로 영토를 뺏고 뺏기며 싸우더니만, 뒷 전에선 야합을 벌여서 툭하면 혼인 동맹을 맺어 버렸다. 그러면서 수도없이 주도권이 왔다갔다 하고, 왕조가 생겼나 하면 사라지기를 셀 수 없을만치 반복되었다. 그러다 보니 왕위 계승자들이 숱하게 죽어나갔고 더하여 신의 분노 때문인지 이상하게도 차차 아들을 낳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직계 혈통이 끊어진 왕조는 방계에서 후계 구도를 찾게된다. 그런데 유럽 전체 왕조치고 서로 혼맥으로 맺어지지 않은 나라가 없었을지니 이제 족보만 잘 살펴서 우선 순위에만 오르게 되면 아무때고 하루 아침에 왕이 될 수 있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이제 족보 만드는 신종 사업이 활성화 되기 시작했고, 족보 뿌리 찾기 운동이 전 유럽에 펼쳐졌다. 왕족들 끼리 인맥 쌓기에 혈안이 되기 시작했다. 왕위 서열에서 밀리면 서열이 높은 사람을 제거하기 위한 공작(?)이 심심치 않게 벌어졌다.

  유럽 사람들이 흔히들 백인 선민의식이 심하게 녹아있다고들 하는데........ 가만히 들여다 보면 이렇게 영락없는 '개판(犬世)'이다.

 
 

  2019년 4월 16일 새벽에 (파리 현지시간 15일 저녁 6시 50분 발생) 뉴스 채널에 긴급 속보가 등장했다. 동시에 이 슬픈 소식은 경악을 불러일으키며 전 세계에 긴급 타전되고 있었다.

  파리 노틀담 대성당의 지붕이 화염에 휩싸였으며 이미 상당 부분이 회재로 소실되었다는 소식이었다. 굳이 기독교인이 아니더라도 세상은 이미 이 슬픈 소식에 경악을 금치 못하고 있었다. 노틀담 성당이 어디 기독교인만의 성스러운 장소였던가? 그것은 이미 온 인류가 아끼고 경탄해 마지않은 우리 모두의 소중한 문화유산이었기 때문이다.

  '아무래도 노틀담 대성당의 진화가 불가능할 수도 있을것만 같습니다. 이미 손쓸 수 없을만큼 확대된 것으로 보여집니다.'

  새벽 5시 조금 넘어서 였나? 프랑스 내무부의 절망 가득한 공식 발언이 나왔다.

  '세상에....... 이를 어떻게 해?'

  그리고 나서 4년이 흘러 지나갔다.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 Dame de Paris)는 이 순간에도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중이다. 얼핏 보기에 천장 공사까지는 마무리가 된 듯 보여지는것이 나머지 지붕 작업과 소실된 첨탑 재건설 작업이 남아있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디 건축 공사라는 것이 보여지는 외부 벽면과 지붕 공사는 그 진척도가 대단히 빨라 보이지만, 기실은 잔손질과 마감에 더 많은 인력과 시간을 필요로 한다. 더군다나 귀중한 인류의 문화재 였던만큼 장미창으로 대변되는 스테인 글라스 등의 내부 시설과 인테리어 복원은 물론 귀중한 유물들이 복구작업을 거쳐서 원래의 위치에 다시 놓여지기까지는 아무래도 앞으로도 한참이나 시간이 걸릴 듯 보여진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2024년 파리 올리핌까지 복원 공사를 마쳐 다시 문을 열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또한 결과는 하나님만이 아시는 것이 아닐까 싶다.

  새로운 모습으로 탈바꿈해 복원되는 노틀담 대성당은 과연 어떤 모습일까? 하루빨리 그날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핸디폰 벨소리가 꼭뚜 새벽부터 울리기 시작한다. 나와 같은 일을 하고 있는 친구 녀석의 따지자면 국제 전화가 아닌가?

  '파리에 갔다고 하니까 자꾸만 물어보라고 닥달을 하고 난리를 부리네. 몇 년 전에 불에 탔다는 노틀담 교회 말이야. 그게 다 복원되어서 이번에 들여다 보았는지를 꼭 한 번 물어봐 달라네. 옛날하고 똑 같은 모습으로 복구된것을 티비에서 보았다나? 그리고 너가 지금 유럽에 있으니까 이참에 나도 하나 물어보자. <교회>랑 <성당>이랑 뭐가 다른거야? 집에서 물어보는데 절간에 다니는 처지로 뭘 알아야 대답을 하든지 말든지 하지. 번뜩 생각에 천주교에서는 성당이라 부르고 일반 교회에서는 그냥 교회라고 부르는 것라고...... 다 그게 그거라고 대답을 하기는 했는데 그게 맞는거야?'

  '지랄두.........'

  저는 현장에서 점심시간 한참 지나서 다시 열심히 일하다 짬을 내서 잠시 쉬는 틈에 전화를 한다고 하지만........ 정작 유럽의 시계는 대한민국 시간에서 8시간이나 늦게 돌아간다. 결론적으로 여기는 아직도 밖이 온통 캄캄한 새벽 댓바람이라는 말이다. 느닷없이 새벽에 국제 전화를 걸어서 불에탄 교회가 얼추 다 복구되었느냐고?

  헐!

  어차피 일어난 김에 커피를 타서 테이블에 걸터 앉고나니 뜬금없이 그넘의 <교회>와 <성당> 타령이 머릿속을 왔다갔다 하면서 아른거린다.

  그래도 참 신통하지 않은가. 절에 다니는 처지라 잘 알지 못한다면서도 정확하게 해답을 스스로 늘어놓지 안았던가 말이다. 참 똑똑한 친구다. 혹 내가 언젠가 '교회와 성당은 다 거기서 거기다'라고 가르쳐 준 적이 있었던가? 그런 기억은 도통 없는데..... 어쨌거나 정답은 나오지 않았던가?

  '기도드리는 예배당을 천주교에서는 성당이라 부르고 개신교에서는 교회라고 부르는데 아무런 이의 없지?' 라고 중얼거리면서 희뿌였게 밝아오는 숙소의 창문에 비치는 내 표정을 스치듯 바라보자니........ 얼핏, 이여야 숱제 단발성 특별 사기 강의를 마칙 돌아서는 돌팔이 강사의 표정이 아닌가?

  '거참! 알기는 확실하게 아는데 짧고 간략하게 설명할 방법이 없네? 이걸 절간 친구에게 다시 국제전화를 걸어서 세세하게 설명하자니...... 족히 삼십분은 걸릴것 같은데........ 거기다 좀 더 정확하게는 내가 아무리 딱뿌러지게 설명을 잘 한다해도 녀석이 제대로 알아 들을 레벨도 아니고......'

  나중에 이 여행기를 녀석이 보게되면 열심히 학습하는 기분으로 그때가서 이해하기를 바라면서 우선은 그냥 넘겼는데, 이제 다시 풀어내서 이해를 시켜주어야만 하겠다. 미안한 마음도 담아서 말이다. '칭구야. 내 맴 알지?'

  단도직입적으로 결론부터 낸다면 '천주교에선 성당이라 부르고 개신교에선 교회라고 부른다'는 말이 어느 정도는 보편 타당한 선에서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모두가 완벽하게 들어맞는다는 이야기는 결코 되지 못한다. 그 이유를 다시 아주 짧게 표현한다면 '성당을 편하게 교회라 부를 수는 있지만, 교회를 성당이라고 부를 수는 없다'는 것이 내가 해줄 수 있는 대답이다.

  국어사전을 찾아보면 성당을 (천주교의 종교의식이 행해지는 장소) 라고 적고 있으며, 교회(예수 그리스도를 주님으로 고백하고 따르는 신자들의 공동체 혹은 그런 장소) 라고 적혀 있다.

  본래 기독교에서 말하는 <교회>는 건물을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 예수를 주(主)로 고백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모여서 그 말씀을 실천하면서 살아가는 공동체적 생활을 가리키는 말이었다. 초대 교회 사람들이 로마의 박해를 피해 지하 공동묘지(카타콤베)에 숨어서 함께 공동체적 생활을 영위하던 모습 같은것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것이 기독교가 공인되고 점차 교회가 체계화 되기 시작하면서 부터는 오늘날의 의미와 같은 특정 장소가 건물을 가리키는 뜻으로 확대 발전해 나온 것이다.

  그러하기에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다가 대속의 죄를 위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사흘만에 부활 승천하신 초대교회에서 부터 지금 이 순간까지의 모든 기독교 역사를 (교회사) 라고 부르지 (성당사)라고 부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유라면 이유라 하겠다. 처음부터 기독교의 역사와 생활 그 자체가 그냥 (교회)였던 것이다.

  하지만 초대교회 이후로 교회사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교리의 변천사' 내용들과, 특히 교황의 파행과 교회의 타락에서 파생된 종교개혁을 통해 개신교가 등장하면서 부터 <교회>와 <성당>은 분명하게 구분되어야 하는 경우를 맞이했다고 볼 수 있다. 개신교는 교회(Church)라 부르게 되었으며, 천주교는 성당(Catholic Church) 이라고 구분짓는 싯점이 도래하고 만 것이다. 그것을 한자문화 권역이 통용되는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는 절표하게 한자 표기를 통해 차별화를 감행하게 되었는데, 교회(敎會)와 성당(聖堂)으로 나뉘어 불리게 된 것이다.

  '어차피 그게 다 그게 아니냐?' 라는 질문이 나올 법도 하지만...... 여기에는 성체성사(聖體聖事) 라고하는 대단히 중요한 교리상의 차이가 있기 때문에 어차피 차별화를 할 수 밖에 없게된 것이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1세기 경에서 시작하여 콘스탄티누스 황제에 의해서 기독교가 공인된 4세기는 물론 교황(로마 가톨릭)의 권위가 지상과 천상은 물론 지하세계 까지 모두 지배하던 중세 시대 까지도 기독교는 교리나 제도에 대해서 체계를 전혀 갖추지 못했었다. 그저 그때 그때 불어닥친 상황에 대하여 교황의 생각대로 땜질 처방식으로 대처하거나 주먹구구식으로 임시변통의 방법으로 겨우겨우 위기를 넘기기가 일쑤였다. 아우쿠스티누스나 토마스 아퀴나스 등의 선각자들이 있었고 여러차례의 종교회의를 통해서 거듭거듭 체계화를 갖춘 이후에야 지금의 로마가톨릭이 어느정도 반석에 오를 수 있게된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교회는 수없이 많은 난관과 위기에 봉착했지만, 지극히 내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두 가지 문제......... 삼위일체(三位一體), 그리고 성체(聖體)에 관한 교리상의 논쟁과 정립이 가장 크고 오랜 불화의 씨앗이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전체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교리를 바탕으로 해서 탄생한 종교다. 이 교리를 부정하거나 잃게되면 모든 기독교는 설 자리를 잃게된다. 다음의 '성체 교리'는 모든 교회에 어느 정도 연관이 있거나 외면하고 있지만, 가톨릭(천주교)의 입장에서는 '기독교적 정통성을 자신들이 가지고 있다'는 부동의 자부심만큼이나 뗄래야 뗄 수 없는 성스러운 진리인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성체성사'란 예수께서 최후의 만찬에서 남기신 말씀처럼, '지금 예수가 손에 들고 있으며 함께 나누어 먹고 마시는 포도주와 빵은 곧 예수 그리스도의 살과 피' 라는 말씀에서 기인한다. 가톨릭의 예배 의식인 미사는 곧 이 성체성사를 예배때 마다 반복해서 실현하는 것을 위한 의식인 것이다. 이것을 다시 표현해서, 성체(예수 그리스도의 피와 살인 빵과 포도주)를 보관하는 성스런 장소라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 바로 성당(聖堂)인 것이다. 반면 성체 의식에 별 의미를 두지도 않고 성체를 따로 보관하지도 않는 개신교 입장에서 교회(敎會)란 그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 함께 모여서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가는 생활'이 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개신교와 카톨릭의 예배장소를 한데 묶어서 그냥 '교회' 라고 부를 수는 있겠지만, 개신교의 예배 장소는 성체를 보관하는 장소가 결코 아니기에 '교회'를 '성당' 이라고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중세 고딕 양식의 최고 걸작으로 꼽히는 노틀담 성당(Cathedrale Notre-Dame)은 그 안에서 실제로 워낙 유명하고 중요한 역사적 사건들이 수없이 많이 벌어졌었기에 어찌보자면 성당 자체가 프랑스 역사의 축소판이라고 볼 수도 있을 정도이다.

초기 고딕양식의 정수가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어서 고딕 건축의 대표성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프랑스라는 국가 탄생의 기원인 '일 드 프랑스(ile de france)'의 한복판인 시테 섬에 세워졌다는 사실만으로도 프랑스인들의 무한한 사랑과 존경을 받는 명소 중에서도 가히 으뜸 명소였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에도 흔히 우리가 추측하는 이상의 실질적으로는 조금 다른 내막이 숨겨져 있다.

  파리 사람들의 진정한 자부심을 대표하며, 에펠탑을 찾는 여행자 숫자 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해마다 노틀담 성당을 찾는다는 사실은 조금은 예상 밖이라 하겠다. 그렇게 본다면 프랑스 사람들(파리인들)이 정신적으로 가장 존경하며 사랑하는 장소 또한 당연히 노틀담 성당이어야 한다는 사실인데....... 이 대목에서 노틀담 성당도 감히 넘보지 못하는 장벽이 하나 틀림없이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인들에게는 일 드 프랑스 지역(시테섬을 포함하는 파리의 핵심 지역으로 통상 2권역까지)을 진정한 파리의 본토 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으며 이곳이야 말로 진정한 성역(聖域)이라 여기며, 그 핵심에 노틀담이 우뚝 서 있게되었는데........ 감히 일 드 프랑스 지역도 아니고 파리의 외곽에 있으면서도 노틀담 대성당의 위엄과 존경과 사랑을 뛰어넘는 곳이 딱 한 군데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파리의 외곽지역인 생 드니에 가면 만날 수 있는 생드니 수도원(Basilique de Saint-Denis)이 바로 그곳이다. 노틀담 대성당이나 몽쉘미쉘 수도원까지 포함하는 그 어떤 프랑스의 대성당도 감히 생드니 수도원의 위엄과 존경은 뛰어넘지 못한다. 그 이유야 프랑스 인들에게 물어 볼 일이거나, 혹 기회가 된다면 언제 진지하게 이야기를 다시 꺼내 볼 수 있겠지만 말이다.

  이탈리아 로마를 한 예로 든다면........ 세계 가톨릭 교회의 중심이자 총 본산은 분명 바티칸이다. 교황이 사는 성스런 곳이다. 하지만, 그런 바티칸도 차마  라테라노 대성당의 권위와 존경을 뛰어넘지 못하다는 분명한 사실이다. 그런게 분명히 있다.

  그런가 하면........ 노틀담 대성당에 대해서 찬사와 감탄을 마지않는 처지의 나 이면서도, 마음 한 쪽으로는 인근에 있는 생트 샤펠(Sainte Chapelle) 성당에 아주 쬐끔 더 마음이 끌리는 내 자신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암튼 그런게 있다는 말이다.

  이토록 험악한 파리의 날씨임에도 광장 앞으로 모여드는 여행자들의 숫자가 점 점 늘어만 간다.

  노틀담 대성당의 무엇이 저토록 사람들의 마음을 끌어들이는 것일까? 지금의 내 심정을 딱히 뭐라 표현할 길이 없는 것처럼, 아마도 어쩌면 저들 모두도 딱 그런 내마음 같지가 않을까? '지금은 비록 복구 공사로 들어가 볼 수 없지만...... 여기가 분명 노틀담 대성당이야! 그래 바로 여기야!

  라틴 십자가 형태의 구조를 기본으로 하는 고딕 건축 양식에서 노틀담 성당은 하나의 교본 처럼 받들어지고 있으며, 이것을 기본으로 중세 이후로 전 유럽 전역에 이런 전형을 고수하고 따르는 고딕 성당들이 무수히 퍼져 나갔다. 그렇다고 노틀담 대성당이 고딕 성당들 중에서 규모나 높이 면에서 가장 크고 높으냐 하면 그것도 결코 아니다. 그리 크지도 높지도 않지만 하나의 건축 양식인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 중에서 가장 정통성을 가진 모범적인 사례라고 보는 편이 이해하는데 다소 용이하지 않을까 싶다는 이야기다. 고딕 양식과는 다르게 돔 양식을 선택한 르네상스의 종주국이랄 수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프랑크 왕국을 중심으로 생겨난 고딕 양식에 대하여 '야만족의 건축문화' 라는 용어까지 써 가면서 극도의 폄하를 하였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이탈리아 반도를 떠나거나, 아니면 이탈리아 반도 안에서 조차도 오히려 고딕 양식의 건축물들이 대세를 이루어 온 것이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흔히 사람들이 고딕 성당 앞에서 툭 내던지는 농담 중에 '하나님이 천국에서 내려다 보시고 구원의 사다리를 내려주시지 않으시니까 뾰족한 탑을 높이 세워서 하나님의 엉덩이를 찌르려는 것 같아' 라든가 '뾰족한 탑을 사다리 삼아서 하늘 나라에 올라가고 싶은가봐' 라는 약간은 비아냥이 섞인 푸념들을 늘어 놓고는 한다. 나 역시도 마냥 높고 크고 화려하게만 치장되는 교회 건축물에 대해서 적지않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중에 한 명이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主)으로 고백하고 그분의 가르침을 따르려는 사람들의 생활 공동체 이다. 그러다 보니 그런 공동체를 가꾸고 꾸려나가는 공간이 필요하다고들 말한다. 그곳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현되는 구원의 공간이라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 장소가 바로 교회이며 바로 성당인 것이다. 그런데 과연 저렇게 끝도 없이 높아져야만 하고 어마무시하고 커져야만 하고 더 없이 화려해 져야만 하는 것일까? 온통 황금으로 치장하면 진정으로 하나님이 더없이 기뻐하실 것이며 구원의 약속이 더 아름답고 달콤해지는 것일까? 내 주관적 소견으로는 공동체를 꾸리거나 구원이 실현되는 장소로서의 지금의 교회나 성당 모습은 절대로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아무래도 상관이 없는 것이다. 높고 크고 화려한 교회에서만 구원이 이루어진다면....... 감히 말하건데 그 구원의 약속은 가짜다. 그건 사기다. 진정한 구원은 궁휼하고 궁핍한 사람들이 머물고 있는 실질적인 현장........ 그것이 광야이던 빈민가이던 아니면 전쟁터이던....... 신실함으로 인간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고 이웃과 더불어 살기를 노력하고 신의 말씀을 진정으로 실천하려고 애쓰던 사람들의 생활 터전 위에...... 헛간이나 너덜너덜한 장막 하나 겨우 쳐져있는 그런곳에서 이루어 진다고, 아니 먼저 이루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바로 나 이다.

  기독교 역사의 초기에서부터 이미....... 크고 화려한 교회는 '신께서 말씀하신 구원의 약속이 이루어지는 장소' 라는 지극히 아름다운 미명 아래, 실질적으로는 주교(성직자들)의 거쳐였으며 법정이었으며 심지어는 온갖 부패와 만행이 자행된 결단코 성스럽지 못한 일을 수없이 반복 자행하기 위한 지극히 은밀한 장소로 이용되어 왔던것이 엄연한 사실인 것이다. 보이기엔 번듯하고 화려하게 만들어 놓고 문패에는 하나님 이라고 써 붙였지만, 안으로 들어가 보면 고위 성직자들의 호텔이자 룸싸롱이며 카지노로 사용되었다. 구원의 약속은 벽면에 가훈 처럼 남들 보라고 액자에 넣어 걸어 놓았고, 성경은 먼지가 수북히 쌓인 채 장식장에 그저 장식용으로 놓여 있었다.

  누군가가 이를 지적하고 개선을 강력하게 요구하면......... 곧바로 종교 재판에 회부하고는 '교회의 무오류성'을 내세워 바른 소리를 한 사람들을 이단으로 몰아 처형장으로 보냈다.

  '하나님께서 진노하셨으니 머지않아 불의 심판이 내릴 것이다. 교회의 말에 순종하고 많은 것을 받치는 자들만이 심판의 날에 구원을 얻으리라' 라고 고래고래 악을 써 가면서 세상을 능멸하기에 전혀 꺼리낌이나 망설임이 없었다. 그들은 이미 신(神)과 자신을 동일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신 께서는 여전히......... 2천 년 가까이 시간이 흘렀음에도 언제나 처럼 침묵으로 일관하고 있다.

  '왜???????'

  '글쎄.......... 짐작은 가는데 딱 꼬집어 이거 때문이라고 명확하게 답변 할 수가 없네.'

  '왜???????'

  '교회에 물어봐. 모든 교회는 두루뭉실 어정쩡하고 더없이 애매모호한 답변을 교단(가톨릭. 개신교. 그리고 더 세분화 해서 갈라진 여러 교파들과 더하여 이단 교회들까지 모두 포함해서)에 따라서 모두 제각각 다른 이유를 수 천가지...... 아니 수 만 가지로 장황하게 설명을 내놓고 있지 않은가? 그 답변들이 그럴싸하고....... 그 시효가 무궁무진 오래 유효 할 수로 그네들이 자기들만의 세상에서 풍요롭게 살 수 있는 원천일 테니까 말이야.'

  만약에 내일 당장 신께서 직접 관여하셔서 세상의 구원이 모두 실현되었는데, 만약에 그 구원이 교회가 약속하는 방식의 구원이 아니라면....... 내일부터 당장 이 지구상에는 수없이 많은 실업자(성직자 포함 종교 관련 직업)가 쏟아져 나올 것이다. 역사적 교회는 박물관이나 미술관으로 재개장하면 되겠는데, 동네 골목골목까지 구멍가계 보다 더 많은 교회나 성당들을 또 어디에다 써먹여야 할까? 태권도 체육관이나 물류 창고? 헐!!!

  어쩌면....... 성직자 포함 모든 기독교 사역의 관련자들 입장에서는 입으로는 구원을 말 하면서도, 속으로는 실질적인 구원이 영원히 이루어 지지 않기를 간절히 바랄지도 모르겠다. 근자에 자주 목격하지 않았는가?

  '목회는 어떤 사명이 있어야 하는 아주아주 고되고 험난한 길이다'를 입에 달고 다니면서 대한민국 안에서 초대형 교회를 탄생 시켰던 훌륭하신 분들께서 하나같이 짜기라도 한 듯이, 어느날 부터 인가 자신이 만든 초대형 교회의 달콤한 열매를 자신의 자식들에게 상속(전수) 시키기 위해서 엄청난 사회적 파장을 똑 같이 벌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고난을 꼭 자기 자식에서 물려 주어야 겠다'는 그 분들의 존엄한 말씀(?)은 '장사꾼이 이문 없이 판다' 거나, 할미가 '늙으면 빨리 죽어야 한다' 든지 하는 공염불을 훨씬 상회하는 최고의 허풍이자 거짓말인 것이다.

  비록 어설푼 돌팔이 기독교인 이기는 하지만 속으는 어찌되었던 내 자신이 프로테스탄트 교인임에 나름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처지로....... 성스러운 장소에 찾아와 노틀담 성당을 올려다 보면서 머릿속에 떠 올리는 생각들이란......... 헐. 이게 다 교회랑 성당이랑 뭐가 다르냐고 묻던 그 녀석 때문이야. 그 녀석에게 불의 심판을 내려 달라고....... ㅎㅎㅎ

 

 

 

 

 

 

 

 

 

 

  노틀담 대성당을 높은 하늘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거대한 방주(木船. 노아의 방주)를 훌렁 뒤집어 놓은 모양을 하고 있다. 구약 성서에 기록된 것 처럼 노아의 방주 역활을 대신하는 성당이 바로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구원의 장소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라틴 십자가 형태의 구조를 가진 대성당은 서쪽의 파사드(정문)를 통해 안으로 들어가면 동쪽의 제단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있으며, 그 동쪽의 끝이 가리키는 방향이 바로 성지 예루살렘인 것이다. 성당의 외부와 내부에는 구약과 신약의 내용을 고스란히 묘사한 조각(부조)들로 빼곡히 채워져 있다. 중세 시대 당시에는 지극히 적은 숫자의 사람들만이(고위 성직자와 귀족들) 글을 읽고 쓸 줄을 알았기 때문에 문맹인 사람들에게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서 부득이 하게 선택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성직자 중에도 글을 읽지 못하는 사람이 허다했다. 심지어 샤를마뉴 대제 조차도 평생 글을 깨우치려 부단히 노력하였지만 끝내 성과는 겨우 자신의 이름을 읽고 쓰는 정도에 그치고 말았을 정도였다. 임종에 즈음하여 황제는 자신이 글만 일찍 깨우쳤다면 더 많은 업적을 이룰 수 있었을텐데 하고 몹시 아쉬워 했다고 한다. 하여 흔히들 성당을 다른 말로 '돌로 만들어진 성경' 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노틀담 대성당은 아주 귀중한 성 유물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 유명하지만 애초부터 그런 목적을 가지고 지어진 성당은 결코 아니었다.

  고대 시대에 처음 시테 섬을 근간으로 부족 사회(파리시)를 건설한 켈트족은 이 자리에 켈트 신전을 세웠다. 시저의 갈리아 원정을 통하여 파리시(Parisi)를 점령한 로마는 파리시를 페허로 만들고 새로운 로마 방식의 고대 도시 루테티아(Lutetia)를 건설하면서 켈트 신전의 자리에 로마식 쥬피터 신전을 세웠다.

  서기 250년, 로마 제국에 의해서 기독교가 극심하게 탄압을 받고 있던 시기에 로마의 기독교 교구는 갈리아 지역의 선교를 위하여 250명의 선교사를 파견하였다. 그 중에서 생 드니(Denis de Paris)와 생 루스티크(Rustique de Paris)와 생 엘레우테루스(Eleuthere de Paris) 세 명이 바로 지금의 파리 지역인 루테티아 지역을 배정받아 파견되었던 것이다. 열정과 헌신의 결과로 이들은 이곳에 기독교 신앙의 터전을 마련하게 되었고, 이 지역 초대 교회의 수장(주교)에 생 드니가 올랐다. 하지만 점점 집요해지는 로마 제국의 기독교 탄압정책으로 인하여 결국 세 명의 선교사는 체포되었고, 몽마르트 언덕에서 모두 참수형을 당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서 참으로 설명하기가 좀 그런.......... 가톨릭 안에서만 이해되고 있는 아주 놀라운 기적(?)이 등장하게 된다. 어쩌면 프랑스 가톨릭 신앙의 정통성은 바로 이 사건에서 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아도 무방하지 않을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어디까지나 가톡릭 신앙 안에서 벌어졌고 의미가 부여 된 일이라는 것을 거듭거듭 강조하고 싶어지는 것은 왜 일까?

  세 명의 선교사는 수많은 군중이 운집한 가운데 로마(도미티아누수 황제 재위)에 의해 몽마르트 언덕에서 참수되었다. 그런 와중에 생 드니 선교사의 머리가 잘려서 땅에 떨여져 나뒹구는 상황에서......... 무릎 꿇린 채 목이 잘린 생 드니의 몸이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쫓아가서 나뒹굴고 있는 자신의 목을 집어 들었다. 잘려진 목을 옆구리에 끼고는 북쪽을 향해서 달려가기 시작했다. 모여든 모두가 두려움에 떨었으며, 로마의 병사들 조차도 아무도 나서서 그를 제지하지 못하였다. 잘려진 채 옆구리에 끼워진 생 드니의 목은 두 눈을 부릅뜬 채 모여선 사람들에게 목청껏 그리스도의 복음을 외쳤다.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는 가운데 그는 계속 북쪽을 향해 달려나갔다. 잘려진 목의 두 부분에서 계속해서 피를 흘리던 생 드니가 마침내 어느 장소에 멈춰서더니 쓰러져서 그대로 숨을 거두었다. 몽마르트 언덕에서 북쪽으로 대략 5km쯤 되는 지역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이 기적을 생생하게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으며, 이를 근거로 성인으로 추대 되었다)

  생 드니의 기적을 우리는 어떻게 생각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프랑크 왕국을 재 통일한 메르빙거 왕조의 다고베르 1세는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간 기독교 신앙 위에 자신이 세운 왕국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싶어졌다. 하여 그는 생 드니의 무덤이 있는 자리에 예배당을 짓기 사작(632년)하여 636년에 생 드니 교회를 완공하였다. 또한 다고베르 1세는 사후에 처음으로 생 드니 예배당 지하에 묻히 최초의 군주가 되었다. 이 때부터 생드니 교회는 모든 프랑스 왕조의 왕실 무덤이자 최고 존엄의 정통성을 가진 교회가 되었다. 이는 다른 그 누구도, 다른 어떤 교회도 감히 넘볼 수 없는 프랑스의 절대 성역인 것이다. 이 후로 파리 전역에 수없이 많은 교회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연히 또 다른 성지인 일 드 프랑스 지역(시테 섬)에서도 로마의 쥬피터 신전을 헐어내고 생 테니엔 교회(Saint-Etienne)와 장 레 론드 세례당(Saint - Jean le Rond)이 건축되었고 파리 교구의 주교좌가 되었다.

  12세기 초엽 생 드니 수도원의 주교가 사망하자 후임으로 쉬제르(Suger)를 논란 끝에 임명하게 되었다. 그런데 이 쉬제르가 참으로 다방면에 재능을 겸비한 신기한(?) 사람이었던 것이다. 우선 그는 수도사이기도 했지만 또한 정치가 였다. 교권(敎權)과 황권(皇權)이 극심하게 맞부딪치던 시기에 양쪽을 오가면서 나름의 역활에 충실했던 사람이었다. 교황의 명으로 사제의 역활을 수행하는가 하면, 황제의 명으로 총독으로 파견되어 지역을 다스리기도 하였다. 그런가하면 그는 어느정도 확실한 역량을 갖춘 건축가 이기도 했다. 늘 어떤 이상을 실현하기를 꿈꾸는 건축가였다.

  그런 그가 프랑스의 정통성을 상징하는 왕실 예배당이랄 수 있는 생 드니의 주교로 부임을 한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당시의 생 드니 교회 건물 자체가 너무나 낡고 관리가 되지 않았었다. 그러니 쉬제르 주교가 당연하게 무슨 생각을 하였겠는가? 그것은 새로운 교회, 어디에서도 보지 못한 이제까지와 전혀 다른 교회를 꿈꾸게 되었던 것이다. 주위의 수많은 반대에도 불구하고 (1135년) 쉬제르는 생 드니의 재건을 위해 설계 작업과 함계 건축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모금을 시작한다.   1141년에 비로소 터를 다지고 주춧돌을 놓았다. 공사는 대부분 순조로웠으며, 본 건물이 높이 올라갈 수록 이제껏 보지 못했던 새로운 교회가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거대한 스테인 글라스가 벽면에 올려진 것이다. 눈부신 햇빛이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창을 통해 내부의 곳곳에 이후 형용할 수 없는 찬란한 빛이 쏟아지게 만들었던 것이다. 거대한 정면의파사드 양쪽으로 두 개의 첨탑이 올라가고 있었다. 하늘에 닿을 듯이 말이다.

  바로 고딕(Gothic) 양식이 이 세상에 처음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쉬제르의 생 드니 성당은 최초의 고딕 건축물로 역사에 이름을 올리게 된다.

  생 드니 대성당의 공사가 진척되면 진척될 수록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공사현장으로 몰려 들었다. 이제까지의 성당 건축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양식의 교회가 지금 눈 앞에서 한 계단 두 계단 올라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동과 충격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1144년 6월 11일 쉬제르 수도원장은 프랑스 왕 루이 7세와 왕비 엘레오노르 드 아키텐이 참석하고, 다섯명의 대주교와 수백 명의 사제단과 구름처럼 몰려든 신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이제 막 완성된 합창단석의 헌당 예배를 주관하였다. 교회(수도원)은 파리의 수호 성인인 생 드니에게 헌정되었다. 하지만, 이렇게 생 드니 대성당이 부분적 완공을 축하하면서 성인에게 헌정하기 이전에 이미 고딕 이라는 새로운 건축 양식의 열풍은 파리를 벗어나 유럽 전역으로 거세게 퍼져나가고 있었다. 생 드니 대성당의 헌정식이 1144년에서야 벌어지게 되었는데, 그 이전에 이미 사르트르 대성당의 건축이 1142년에 벌써 시작되었던 것이다. 생 드니 대성당의 산파 역활을 맡았던 쉬제르 대주교가 안타깝게도 1151년에 사망했다. 그러자 새로운 후임자들이 연이어 바톤을 이어받아 생 드니 대성당의 건설을 계속 이어 나갔다. 유럽에서 성당 건축 공사는 끝나봐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것이 나름의 정설이라면 정성이었다. 1 백년 공사는 너무나 흔한 아주 짧은 공사 기간이었다. 일단 벌어졌다 하면 2 백년을 훌쩍 넘기기가 일쑤로 오백 년이나 심지어 육백 년 이상 걸리는 공사도 허다분할 지경이었으니 말이다. 여기에서 사르트르 대성당은 건설 도중에 대형 화재를 겪어 완전 소실되는 바람에 1194 년 에서야 완전 새롭게 다시 재건하게 된다.

  파리의 심장부라고 할 수 있는 일 드 프랑스 지역의 한복판인 시테 섬에는 로마 가톨릭 파리 대교구 주교좌인 성 에티엔 성당(Saint Etienne)이 자리잡고 있었다. 성인 스테반에게 헌정된 이 성당은 당시 매우 작고 낡아 실로 보잘것 없는 교회 건축물이었다. 최초의 고딕 양식 건축물인 생 드니 성당의 외벽과 지붕 공사가 어느정도 마무리 되고, 마지막 남은 첨탑이 한참 올라가고 있는 즈음에 파리 교구에 새로운 주교로 모리스 드 쉴리(Maurice de Sully)기 부임해 왔다. 그런데 참으로 신기하게도...... 신임 주교 쉴리의 성정이 영판 생 드니 성당의 쉬제르 주교와 판박이 같이 닮은 꼴이었다. 거기에 매사에 있어서 둘 째로 뒤쳐지거나 지고는 못하는 성격이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부임한 파리 대교구의 주교좌 교회가 형평없이 낡고 비좁은 데다가 금방이라도 허물어질 까봐 걱정해야 하는 처지였으니........ 거기다가 세상을 경악시키고 있는 생 드니 교회가 북쪽으로 약 7km 쯤 떨어진 지척이었으니......... 쉴리 주교가 당장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안 봐도 파노라마 였다.

  쉴리 주교는 주변의 수많은 우려와 반대에도 불구하고 기어코 파리 대교구의 주교좌였던 에티엔 성당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될 새로운 교회를 짓겠다는 어쩌면 지극히 개인적인 야심(?)에서 시작된 일이었다는 사실까지 모두 떨쳐 낼 수는 없겠지만........ 아무튼 그는 결과적으로 실로 엄청난 업적을 이루게 된다. 1163 년에 그가 야심차게 시작한 새로운 파리 주교좌 성당의 건축 역사는 이후 약 700년 이상 동안, 20 세기에 이르기까지 가장 아름답고 합리적인 고딕 건축 양식의 표본으로 추앙받게 되기 때문이다.

  노틀담 대성당(Cathedrale Notre-Dame de Paris)은 그렇게 탄생하게 되었다.

  노틀담 대성당을 다년 온 많은 여행자들이 하나 같이 입을 모아서 '가장 아름다운 노틀담 대성당의 모습은 생 루이 섬의 다리 위에서 보는 대성당의 뒷모습 풍경이 가장 압권' 이라고들 흔히 말하지만(공중 부벽이 얽혀있는 모습이 아름다운건 사실이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노틀담 대성당의 백미는 아무래도 정면 파사드(정문)라고 나는 생각한다. 각 모서리를 모두 견고한 부벽으로 마감한 파사드는 세 단으로 나뉘어 구분되는데, 모든 벽면마다 이루 형용할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감동으로 다가오는 조각 장식들로 가득하다. 중앙 층에 매단 어마어마한 크기의 장미창이 양 쪽으로 두 개의 작은 장미창을 거느리고 있는 형국인데, 그 주위를 감싸고 있는 뾰족한 아치선들로 빼곡한 레이스 무늬 장식은 가히 황홀할 지경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어쩌겠는가?

  이렇게 먼 길을 찾아왔지만...... 지금 당장은 안으로 들어가 눈과 마음에 담고 만져보고 느껴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광장에 놓인 저지선인 바리케이트와 육중하게 들러 쳐진 펜스 너머로 채 아직 화마가 할퀴고 지나간 흔적을 다 털어내고 지워버리지 못한 모습으로 슬픈 모습의 대성당이 우리를 내려다 보고 서 있다.

  '오늘이 지나고....... 우리가 다시 여기를 찾을 수가 있을까?'

  프랑스 당국은 2024년 파리 올림픽까지 복구를 마치고 재개장을 하겠다고 약속했다. 그것이 내 년이다.

  얼핏 둘러보며 내린 생각으로는 '아직도 한참 걸려야 제대로 복원이 이루어 질 것만 같아' 보였다. 아무렴 어때? 시간이 얼마가 걸리던 제대로 복원이 되기를 기다릴 수 밖에.........

  노틀담 대성당에 대해서는 참 할 이야기가 많았는데.......... 훗날 언제고....... 파리에 다시 와서 복원된 대성당을 볼 기회가 있게된다면........ 그때 다시 세세한 이야기를 할 수 있겠지 하는 기대를 남기면서....... 이제 발걸음을 돌려야만 하겠다.

 

 

 

 

 

 

 

 

 

 

 

  우리는 이제 샤펠 성당(Saint- Chapelle) 으로 간다.

  애초 이번 파리 방문에서는 샤크레 쾨르 대성당과 샤펠 성당과 파리 인근에 있는 샤르트르 성당, 이렇게 세 곳을 꼭 보아야 하겠다고 기대를 가지고 왔었지만 끝내 샤르트르 성당은 방문하지 못하고 말았다. 다시 파리에 온다면....... 복원된 노틀담 성당과 샤르트르 성당이 최우선 여행 계획이 될 것만 같다.

 

 

 

 

 

 

 

---- 찾아 주시고 끝까지 읽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샤펠 성당'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