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는 욕망이 없는 사람에게는 욕망을 주고, 스스로 소중함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자신에 대한 소중함을 준다. 그리고 삶의 목표가 없는 사람에게는 진지한 목표없이 살아가는 삶이야말로 진정 아름다운 삶이라는 가르침을 준다.'
이탈리아의 작가 루이지 바르치나가 이탈리아의 매력에 대해 다소 자기애가 넘치는듯한 표현을 쓰긴하였지만, 다소 이 애매모호한 표현속에서도 나는 '어디까지나 로마 이니까' 하는 어떤 나름의 로마적 정취를 느낀다.
수많은 여행자의 발걸음이 로마를 향해 끊이지 않고 이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흔한 표현처럼 서양 문화의 보물 창고이기 때문일까? 로마가 남겨준 위대한 유산 때문일까? 르네상스가 물려준 찬란한 예술작품들 때문일까?
물론 그런 이유들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는 사실을 결코 부인하지는 못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기에다가 적극적이면서도 친절하고 낭만적인 사고로 뭉친, 어쩌면 지구상에서 가장 로맨틱한 이탈리아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첨부하고 싶다. 생동감 넘치는 활기찬 생활태도에서부터 베르디의 오페라 <아이다>와 <리골레토>를 우리나라 유행가처럼 읊조리는 모습들을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속에서 보고있노라면 그들의 핏줄속에 흐르고 있는 역사와 예술과 문화에 대한 매우 독특한 유전인자를 단편적으로나마 충분히 느껴 볼 수가 있다.
어찌 그렇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연중 300일 이상의 햇볕이 쨍쨍한 맑고 화창한 날씨를 가진 나라 이탈리아, 완만한 산과 계곡들 사이로 펼쳐진 드넒은 초원에는 밀과 보리와 포도가 자라고 산자락이나 돌밭에는 올리브가 자란다. 거기에다 지중해의 눈부신 태양과 에메랄드빛 푸른 바다는 그들에게 도전정신과 예술적 상상력을 안겨주었다.
참으로 오묘한 사람들이 열린 마음으로 더불어 살아가는 그곳에서는 진한 사람사는 냄새가 풍겨온다.
그게 바로 이탈리아요, 이탈리아 사람들의 삶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로마가 있다. 우리가 흔히 로마인이라 부르는 사람들 말이다.
독일의 문호 괴테의 인생이 '이탈리아를 방문하기 이전'과 '이탈리아를 방문한 이후'로 나뉘어 구분되어진다는 이유만으로도 이탈리아엔 뭔가 그럼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렴풋하게나마 짐작해 볼 수가 있다고 하겠다.
'남편 몰래 사두었던 주식을 팔아가지고 흔히 남들이 말하는 명품이란것을 이번에 하나 장만했거든? 역시 명품은 다르긴 다르더라고, 괜히 터무니 없을만치 비싼것이 아니더라고. 써보니깐 단박에 명품이 왜 명품인지 알겠더라고. 이탈리아산 가죽이 좋으니 어떻니 하더니만 직접 만져보니 역시 이탈리아께 달라도 너무나 다르더라고...........'
커피숖 한쪽에서 돈 쏟아부은 폼이 티가 팍 나는 아줌씨가 일행인듯한 여성들 사이에서 명품 설명에 열을 찬참 올리고 있다. 그 이야기에 열광하는듯한 아줌씨들의 표정을 가만히 살펴보니 부러움에 감탄사를 연발하는 사람들이 전부는 아닌것 같다. 적어도 절반 이상은 내심 다른 생각들을 하고있는 표정들이 역력하다.
'그런데 말이야. 바다 건너 온 오리지날이래서 그런가보다 하고 비싼 줄을 알면서 구입하기는 했는데........ 지난 주에 이탈리아 다녀 온 친구한테 들었는데 말이야. 로마에서는 이것하고 똑 같은 신상을 이십퍼센트나 싼 가격에 팔고 있다는것 아니겠니? 우리나라에서만 바가지를 옴팡 씌운다는거야. 그래서 다다음달쯤 남편 들볶아서 이탈리아나 한 번 다녀올려구 생각중이야. 이십프로면 어디니? 비행기 값이 빠지고도 남을것 아니니? 쫌 칼라풀 한걸로 아무래도 하나 더 장만해야 할까 봐..........'
점점 점입가경이다.
저 자리에 같이 있는 아줌마들 중에서도 속이 뒤집혀도 팍 팍 뒤집히는 아줌마들이 여럿이겠고.........
하이고....... 저 여파가 틀림없이 열심히 살려고 노력하고 있는 누군가의 남편들에겐 또 어떤 영향를 미치게될지.........
내가 생각하는 이탈리아는 절대로 이런 이탈리아가 아닌데 말이다.............. 미티미티........
이십 프로가 아니라 오십프로가 비싸다고 확인이 되었어도 그 아줌마는 제 돈 다주고 명품을 샀을것이다. 그 비싼만큼 비싸게 자랑질을 하고 싶어서 말이다. 무슨 놈에 팔자인지는 몰라도....... 죽어라 열심히 일하는 남편의 한 달, 아니면 두 달치 봉급 이상을 싹 쓸어 넣여야 만져 볼 수 있는 명품을 구경만 해야하는 아줌마들 속은 또 어땠을까?
가만....... 똑 같은 시기에 출시된 같은 신상인데 어떻게 이십 프로씩이나 가격이 차이가 날까? 시방 그게 리얼리여?
아무리 곱씹어 생각해 보아도........... 파는 놈은 도둑놈이고....... 사는 분(?)은 바보 천치나 호구잖어?
안 사면 될것을........... 기어이 사겠다고 너도나도 달려드니까....... 파는 놈이 가격 가지고 장난질을 하는것이 아니겠어?
헐!!!!!
내가 이탈리아를 쫌 다녀보았는데........ 멋진 이탈리아인들 중에 그렇게 고가의 명품을 들고 다니는 사람들 전혀 보지를 못했다. 모델이나 영화인이라면 모를까? 최상류층은 별로 어울려 보지를 못해서 모르겠고.......
이탈리아 멋쟁이들은 대부분 중저가 브랜드를 선호하는데....... 워낙 물려받은 기럭지나 신체적 유전인자들이 뛰어나서인지는 몰라도 얼핏 명품으로 도배한 사람들처럼 보이기는 했다. 허긴....... 나 같은 근로자가 명품으로 도배한다고 이탈리아 멋쟁이를 따라갈 수 있을것 같지도 않고........ 명품에 올인하는 부류를 나는 잘 모르겠다.
우리나라에서 명품 가격이 본산지에 비해서 터무니 없을 정도로 비싼 이유를 나는 적어도 한 가지 정도는 알겠다.
최고 몫이 좋은 상권에다가 아주 넓은 매장을 갖추고, 세계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의 최고급 인테리어를 하고, 아주 다양한 신상품 전시 품목을 왁벽하게 갖추고, 최고급 쇼윈도우와 어마무시하면서도 휘황찬란한 간판을 내걸고, 최고 세련미와 섹시함으로 중무장된 판매직원을 그것도 아주 여럿 두어 장사(?)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로마나 피렌체의 세계적인 명품회사 본점을 둘러 보았다. 해마다 신상은 이곳의 본점을 중심으로 뉴욕. 파리. 로마. 밀라노. 런던. 서울을 연계해서 발표하곤 한단다.
그런데, 세계적 명품사의 본점 크기가 우리나라 매장의 1/4. 1/5 정도 밖에 안된다. 가히 구멍가계 수준이다. 워낙 비좁다 보니 인테리어도 심풀을 기본으로 한 특성화에 집중했다. 전시품목도 최신상품 약간이 쇼윈도우쪽에 전시되어 밖에서 들여다 볼 수 있을 정도뿐이다. 입에서 절로 '에게게게....... 이게 본사라고?' 라는 말이 저절로 터져 나온다. 섹시함이나 늘씬 보다는 오랜 경륜이 잔뜩 묻어나는 사람들이 매장을 지킨다. 본사임에도 전시상품이 별로 보이지 않아서 문의를 하고 요청을 하면 안쪽의 창고에서 꺼내다 보여준다. 밖으로 나오면 쇼 윈도우에 그 해당하는 명품 회사의 로고와 이니셜 등이 간략하게 꾸며져 있다. 외부에 간판은 일제 없다. 그러기에 멀리서 간판보고 찾아갈거라는 기대는 아예 접어야 한다. 쇼 윈도우를 살펴보면서 '아! 여기는 샤넬' '아! 여기는 입생 로랑' '그리고 여기는 루이비통' 하면서 찾아가야만 한다. 우리나라 강남 생각하면 큰 코 다친다. 천 년씩된 돌덩어리로 만든 건물들이라 아무리 세계적 명품회사라 해도 제맘대로 헐고 넓히고 할 수가 없다.
생각해 보라. 그렇게 매장을 운영하면........ 20% 이상 싸게 팔아도 남지 않겠는가?
도시 여행의 묘미중에는 틀림없이 쇼핑 이라는 놈이 포함되어 있다.
거기에다가 로마의 중심 쇼핑가는 가히 세계적이 아니겠는가?
로마 도심을 둘러보고 있는 중이니만큼 이참에 로마의 쇼핑중심가를 한 번 슬쩍 돌아보기로 하자.
로마 시내의 중심가는 코로소 거리(Via del Corso) 이다.
코로소 거리는 로마 도심의 북쪽에 있는 포폴로 광장에서 베네치아 광장에 이르는 직선도로를 일컷는다. 로마를 있게한 대동맥이라 할 수 있겠다. 여기 코로소 거리의 중간부분에 콘도티 도로가 교차되어 스페인 광장으로 연계되는데, 이곳이 바로 로마의 핫 플레이스이자 로마의 명품 거리로 불리는 곳이다. 미국의 타임 스퀘어나 우리나라 압구정이라 생각하면 되겠다. 하지만......... 여행자들과 현지인 외출자들이 붐비는 저녁시간이 아니라면....... 을씬년 스럽기까지 하다. 잘 믿기지 않겠지만........ 우선 요란하면서 화려한 간판들이 일체 없어서 본래 건물의 외관이 고풍스럽게 고스란히 드러난다. 내가 유럽의 도시들을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쇼핑과 선물은 이세상 모든 여성들의 영원한 로망임이 틀림이 없다.
질주하듯이 달려온 짧지않은 여행으로 인하여 심신의 피로가 적지않았을 터라, 오늘 로마 도심 투어의 여정으로 코로소 거리를 산책삼아 걷기로 계획했고, 특별히 콘도티 거리라는 로마의 명품거리이자 핫 플레이스를 느긋하게 거닐 수 있는 시간을 마련했기 때문이다. 구찌. 프라다. 입생 로랑 등의 명품점을 지날때마다 가슴을 조리면서 저만치 앞서 나가거나 한참 뒤떨어져서 딴 시늉을 하느라 영 죽을 맛이다. 깐깐한 성격에 지극히 검소한 여자인것은 분명한데...... 우리마누라가 나에 비해서 배짱이 두둑하고 손(?)이 엄청나게 크다.
자칫 필(feel)이 꽃히면.........
'제대로 둘러보지 못한것 같아. 저기 옆 골목도 한번 가보자. 몇 군데 들어가봐도 되지? 무론 구경만 하겠지만 말이야' 라고 운을 떼더니만 돌아서서는 다짜고자 프라다 매장 안으로 들어가 버린다.
'이를 어째? 이러다가 혹시..........'
다급한 마음으로 급하게 지갑을 열어보고 머릿속으로 여행 경비외에 비상금으로 남겨논 금액을 산정해 본다. 어느정도 여유는 있지만....... 명품이라는 복병에 대해서는 대비해 놓은바가 전혀 없다. 울마눌은 외상이 없다. 빚을 끌어안고 있으면 마음이 편치않은 유별난 체질을 가지고 있다. 모조건 일시불이고 당장 지급이다. 돈이 없으면 차라리 안사고 말지 외상은 절대 안한다. 단 한가지 상황만이만 예외인데....... 아들에게 큰 돈이 들어갈 일이라면 일단 있는 현금을 톡톡 털어넣고 나서 나머지를 카드로 분할한다. 고녀석에게만 예외가 적용되고 나머지는 얄짜루 없다. 암튼 손은 무지 크다.
한참을 가슴 졸이고 서성이는데 실실 웃으면서 나오더니 한마디 한다.
'구경만 한다니까? 실컷 구경이라도 해야겠으니까 어디 카페에 가있던지 같이 들어가든지 하셔, 걱정하지 말고.'
'걱정은 무슨........ 여성 위주 매장이니까 어색할까봐 밖에 있는거지...... 신경쓰지 말고 천천히...... 천천히........'
'명품이 좋기는 좋네. 핸드 백을 보니까 며느리 생각나고, 구두 보니까 아들 사주고 싶은데........'
'컥. 미티미티..........' 갑자기 현기증이 올라오고 가슴이 막 답답해 지기 시작한다.
홱 돌아선 마눌님이 이번엔 크리스찬 디올 매장 안으로 들어간다. 에고에고 여행이고 뭐고 당장 집에 가고 싶어진다.
명품거리를 실컷 돌면서 기특한(?) 마눌님이 빈손으로 돌아왔다.
'어~~~~~휴.'
골목을 돌아서니 꽤나 이름이 나있는 중저가 브랜드 골목이 나타난다.
여기저기 둘러보던 마눌님이 들어가서는 도무지 나올 생각을 안하는 매장이 바로 망고(Mango) 였다. 망고는 이미 익숙한 경험이 있다. 지난 스페인 여행에서 바르셀로나 람블라스 거리 쇼핑하면서 야시시한 옷을 하나 선물로 사준 곳이 바로 망고였다. 그래서 다짜고짜 쫓아 들어갔다. 스웨터 종류를 서너개 놓고 이리저리 재고 있는 모양새다.
'이것 중에서 어느게 가장 좋아보여? 다 괜찮은것 같아서 고르기 힘드네?'
'고르긴 뭘 골라? 맘에 들면 다 사면 되는거지?'
'뭐하러 다 사? 하나면 기념으로 되는거지. 어떤거 할까?'
'저거하고..... 저거하고....... 두 개 사줄께.'
까짓....... 구찌나 크리스찬 디올도 아니고 망고쯤이야........... 휴.
모든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이탈리아는 고대와 중세의 역사가 고스란히 살아 숨쉬고 있을뿐만 아니라 예술적 신비감으로 가득한 인류 문명사의 원천으로 추앙받고 있다. 거기에는 다분히 콜로세움이나 판테온에서 볼 수 있듯이, 멀고 먼 고대의 시대에 특별한 장비도 없이 오로지 인간의 힘과 능력에 의해서 건설된, 마치 수수께끼나 미스테리와 같은 수많은 이야기들을 이면에 담고있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로마의 도로망이나 수도교나 그들이 세운 도시와 성곽들 또한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적어도 '로마스럽다'고 표현되는 신비감은 모두 그 위대한 건축물과 예술작품들에게서만 나오는 것일까?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우선 로마의 웅장하면서도 장엄하기까지한 수많은 건축물에서 '이것이 바로 로마다' 라는 느낌을 강하게 받을 것이고, 예술로 대표되는 중세와 르네상스의 미술품에서 로마에 취하곤 할것이다. 학문에 조예가 있는 사람들은 로마의 정치체계나 시대를 앞서간 로마의 법률과 제도를 꼽을지도 모르겠다.
그렇다면 어설픈 떠돌이 여행자 중의 하나 일뿐인 나에게 있어서 로마가 위대하고 신비롭게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나는 왜 로마를 사랑스러운 도시라고 생각하고 있는가? 내 가슴속에 새겨져 있는 로마는 과연 어떤 모습일까?
내가 내 자신에게 그런 질문을 던지게 된다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아마도 위의 마도넬리(madonnelle) 였을 것이다. 세상이 모두 공인하는 로마의 위대함 보다는......... 나는 그 시대를 살아간 당시의 로마인들 삶속에서 늘 일상처럼 함께했던 위대함이야 말로 진정 로마스러운것 이라고 생각한다.
로마의 도심을 걷다보면 길목 곳곳에 성모 마리아를 주로 주제로 하는 조각이나 그림들이 걸려있고, 그 아래에 신문이나 잡지를 팔고있는 노점들을 종종 볼 수가 있다. 사람들은 이 '신문 가판대'를 '마도넬리'라고 부른다. 르네상스와 시기를 같이해서 등장한 이 마도넬리야 말로 '진정한 로마스러움' 이며 '로마의 위대함'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절대로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있지만, 나는 그 시대를 살다간 로마인들의 생활속에서 마도넬리가 차지했던 영향력이나 중요성과 함께 그것들이 얼마나 아름다운 시절의 산물인가에 점점 빠져드는 나 자신을 발결할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마도넬리에서 나는 로마인들의 아름다운 생활과 마음을 엿볼 수 있다.
테라코타나 대리석에 모자이크로 만든 벽화나 캔버스에 그려진 성모자상이 주를 이루고, 같은 주제로 만들어진 부조상이나 조각상도 많이 있다. 작품들의 내면에는 성모 마리아에 대한 헌신과 무한한 사랑을 나타내고자 함이며, 성모 마리아께서 그곳에서 기도하는 사람들에게 마치 어머니 품속과도 같은 따스함과 온정어린 자비를 베풀어 주십사하는 간절함이 고스란히 담겨져 있는 것이다.
현재 로마의 도심에는 약 500개의 마도넬리가 남아있다. 18세기와 19세기 초엽에는 로마에만 약 3.000 여개의 마도넬리가 설치되어 있었다고 한다. 더러는 훼손 상태가 심해서 기능을 완전히 상실했고, 좀 조잡해 보이거나 심지어 유치해 보이기까지 하는 마도넬리로 상당수 존재한다. 그런가하면 범상치 않은 작품을 뛰어넘어 국립박물관에 전시 봐관해야만 하는 정도의 걸작들도 버젓이 내결려 있다. 바로 위의 사진에 등장하는 마도넬리의 경우 교황 알렉산더 7세가 직접 의뢰하여 설치한 훌륭한 조각가의 진품 작품이다. 서민에서 시작하여 커다랗게 부를 이룬 부자와 왕족이나 귀족에서 최고 성직자들과 마침내 여러 교황에 이르기까지 로마에 거주한 수많은 사람들에 의해서 만들어진 '마도넬리'는 과연 로마인들의 삶 속에서 어떤 의미였을까?
왜 로마인들은 이렇게 마도넬리에 집착하고 매달렸을까?
마도넬리가 '신문 가판대' 라고? 그저 단순하게 신문을 파는데 그쳤었던 말인가?
'마도넬리'의 지정한 의미와 그것이 아름다운 이유에 대해서 잠시 살펴보고 여행을 계속하기로 하자.
그러자면........ 이제부터 나의 이야기는 거의 천 년전으로 돌아가야만 하겠다.(어디에도 없는 이야기라고 하겠다)
나보나 광장을 나와서 판테온으로 방향을 잡고 안내표지판을 따라 고풍스런 중세의 건물숲으로 들어서면 카네스트라리 11번지(Via dei Canestrari, 11)가 나온다.
골목길에 들어서서 채 몇 걸음 떼어놓기도 전에 우측으로 좁은 골목이 시작되는 아주 낡은 연분홍빛 건물의 모서리에 역시나 몹시 낡은 아주 커다란 팬던트 목걸이가 하나 걸려있다. 팬던트 목걸이 형태의 마도넬리가 설핏하게 매달려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아랫쪽 옆에 (Edicole Sacre - Vergine Maria e Vergine con il Bambino) 작게 안내 표지판이 붙어 있다.
동네에 사는 어느 심심한 손재주가 있는 사람이 무료함을 달려기 위하여 만들어 내걸은 듯한 풍경이다.
하지만 그런 어긋난 선입견은 서둘러 다시 불러들여야만 할 것이다. 이 작품은 '마도넬리'의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있는 비교적 초기의 작품으로 여전히 처음의 모습을 고스란히 담고 오백 년 가까이 같은 자리를 지켜오고 있는 것이다. 오래된 낡은 건물에 전기 시설이 들어와 벽면을 타고 지나도, 도시 가스가 들어와 배관이 바로 옆을 타고 지나가도 그저 무심한듯 제자리에 그냥 그렇게 걸려있다. 있어서는 그렇게 두드러지거나 눈에 확 띄지 않지만....... 사라지면 생겨날 빈 공간은 이세상의 그 무엇으로도 다시 채울 수가 없을것만 같다.
약 500개가 넘는 마도넬리들이 나보나 광장과 판테온과 트레비 분수 주위의 도심에 여전히 내걸려 있다.
세계의 여러 여행지들이 벽화를 그려서 여행자들을 불러들이고 있다면, 로마는 적어도 오백 년 전부터 도심의 골목들을 그림과 조각과 모자이크로 가득 넘쳐날 정도로 장식을 해왔던 것이다.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페낭 여행에서 처음 경험하였고 이제는 벽화 여행지의 지극히 일상적인 모습이 되었지만, 관광 안내소나 인터넷에서 해당 도시의 벽화 사진을 쭈욱 내려받은 뒤에 도심 투어를 하면서 그 벽화 하나하나를 찾아다니며 체크하는 재미가 하나의 유행 상품이 되어 버렸다. 적어도 여행중에 그런 재미를 아시는 분이시라면 로마에서는 '마도넬리 탐험 투어'를 꼭 한번쯤 해보시라고 강추하고 싶다. 왜냐면 그냥 나붙어 있는 인테리어 소품들이 절대로 아니기 때문이다.
'도대체 마도넬리가 무엇이간데? 남들은 모두 그냥 '신문 가판대' 라고만 하던디?'
로마 여행에 대하여 나름 어느정도의 지식을 가지고 있거나 꼼꼼하게 공부를 한 여행자들은 '로마의 신문 가판대(마도넬리)에 대해서 어느정도 알고 있는 분들이 많이 있다. 그분들중 상당수는 최초의 로마 신문 가판대가 바로 '폰테의 이미지(Image of ponte)'로 잘알려진 <성 처녀의 대관식> 이라는 사실까지를 알고있는 분들이 제법 많다. 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이론적인 문제의 일부일뿐, '폰테의 이미지' 위치를 알거나 실제로 찾아가 만나본 분들은 또 그렇게 많지가 않은 편이다. 로마 최초의 마도넬리로 알려진 '폰테의 이미지'는 산탄젤로 성 앞에 놓여진 천사의 다리에서 아주 가까운 건물의 벽면에 놓여있다.
나보나 광장이나 판테온이 있는 로마 도심의 심장부를 지나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가고자 한다면 반듯이 여기 코로나리 대로(Via dei Coronari)를 지나 천사의 다리를 건너야만 했다. 로마에서 가장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중요 대로의 양편으로 묵주 상인(코로네)들이 많이 모여 시장을 벌였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곳에 설치된 최초의 마도넬리인 '폰테의 이미지(성 처녀의 대관식)'이 너무도 유명해지자 한동안은 이곳을 '비아 델 이마진(이미지 웨이)' 이라 부르기도 했다.
로마 교황청의 실세로 떠오른 알베르토 세라 디 몬페라토 추기경은 자신의 위상을 드러내고 널리 알리기 위하여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길목인 코르나리가에 궁전과도 같은 건물을 구입하여 대대적인 공사를 벌였다. 동시에 추기경은 좀 더 확실하게 자신의 이름과 업적을 외부에 드러내기 위하여 고대 로마왕국 이래로 민간사회에 널리퍼져 있던 작은 사당 형태의 외부장식물을 만들어 건무의 외벽에 부착하기로 하였다.
몬페라토 추기경은 이 작업을 당시 최고의 건축가라 할 수 있는 안토니오 상갈로에게 맡겼다. 상갈로가 이 작업을 맡았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몬페라토 추기경의 위상을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상갈로는 바로 교황청을 설계하고 건축을 시작한 브라만테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받은 제자였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의 건축가 상갈로가 교황청의 건설과 마도넬리의 설치를 동시에 하게되었다는 사실 하나로도 몬페라토 추기경의 위상이 어느정도였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는다. 이렇게해서 '폰테의 이미지'는 판테온의 측면 제단에서 영감을 얻은 상갈로에 의해서 만들어졌다. '폰테의 이미지'의 핵심이자 중앙에 놓일 <성 처녀의 대관식> 그림은 페리노 델 바가(Perino del Vaga)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바가는 교황청의 '라파엘로의 방' 작업에 참여한 능력있는 화가이자 라파엘로에게서 많은 여향을 받은 제자이자 동료라고 할 수 있는 르네상스와 바로크의 이름난 화가이다. 라파엘로가 요절하자 그의 그림작업 마무리 대부분을 바가가 맡아서 했으며, 사실은 라파엘로의 작품들 중에 상당 부분이 바가가 직접 손을 댄 사실들이 점점 밝혀지고 있는 실정이다.
완성된 마도넬리는 한마디로 매우 '우아한 작은 사원' 이었다. 신문 가판대의 명칭과 용도를 갖게 된것은 한참 후의 일인 것이다. '폰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작은 사원' 혹은 '길거리 예배당' 이었던 셈이다.
완성된 '폰테의 이미지'는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엄청난 센세이션을 불러 일으켰다.
<성 처녀의 대관식> 그림을 보려는 사람들로 코르나리 대로는 그야말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더하여 여기 '폰테의 이미지' 앞에서 간절하게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소문이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몰려드는 인파에 어쩔줄 모르는 상황에서 이런 기적에 대한 소문들까지 생겨났으니 그 다음은 그저 상상에 맡겨볼 수 밖에......
결국 이 모든것은 애초 알베르토 세라 디 몬페라토 추기경이 의도하고 바랬던 대로 이루어진 결과라 하겠다. 하지만...... 몬페라토 추기경은 이런 상황은 물론 완성된 폰테의 이미지도 보지 못하고 말았다. 교황청 내에서 벌어진 내분과 세력간의 암투로 몬페라토 추기경은 멀리 달아나야만 했으며, 끝내 살아서는 로마에 돌아오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현재에 이르기까지 '폰테의 이미지'는 심각한 훼손과 복원을 끊임없이 반복해야만 했다.
지금 당장 만나볼 수 있는 '폰테의 이미지'는 많은 마도넬리 중에서 그리 썩 돋보이는 상황이 아니다. 하지만 그 가치만은 로마의 도심에 마도넬리가 남아있는 한 영원할 것이라 생각된다.
'작은 사원' 혹은 '길거리의 예배당' 이라 할 수 있는 로마 특유의 시설물이 언젠가 부터 '마도넬리(Madonnelle. 신문 가판대)' 라고 불리게 된것은 한참이나 시간이 지난 후에 생겨난 일이다.
어떻게 작은 종교적 시설물이 유명한 로마의 신문 가판되가 되었을까? 이제부터는 그 이야기를 살펴보려 한다.
'폰테의 이미지'를 마도넬리(Madonnelle)의 시작으로 보는 시각이 있는것은 분명하지만, 이같은 형태의 예술적 혹은 종교 생활의 단면이 등장한 것은 그 보다도 아주 먼 고대 로마왕국에서부터 였다고 말할 수 있겠다.
일부 학자들은 마도넬리의 기원을 고대 로마왕국의 여섯번째 왕이었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Servius Tullius; BC 578~BC 535) 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것으로 보고있다. 적어도 2.500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이 내재되어 있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노예의 신분으로 태어나 왕위에 올라 불세출의 성공신화를 쓴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였지만 말년은 그와 정반대로 비참했다. 권력을 탐하는 딸의 사주로 사위가 암살을 시도했기 때문이다. 칼에 찔려 길거리에 내동댕이 쳐진 피투성이 툴리우스의 몸뚱이 위로 그의 사망을 확인하려는 딸이 마차로 밟고 지나가 버렸기 때문이다.
그 놈의 권력이 무엇이라고?
참으로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던 세르비우스 툴리우스였지만 그가 로마역사에 남긴 공적은 실로 엄청났다고 하겠다. 그는 로마를 건국한 라틴족 로물루스의 후예가 아니었다. 그는 바다를 건너와 로마의 역사에 흡수된 수수께끼 문명을 가졌던 에트루리아인 출신으로 두 번째 왕위에 오른 인물이었다. 하여 그는 로마가 생존하고 번성하기 위하여는 흡수 병합된 이민족들간의 단합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여 그는 우선 로마의 고대 법률을 제정하였고, 다민족의 고른 등용과 차별없는 사회를 위해 노력했다. 하여 모든 부족이 함께 어울려 생활할 수 있는 도시 공간 확보를 위하여 퀴리날레. 비미날레. 에스퀼리뇨 언덕을 한 구역으로 구획정리를 하여 대도시를 건설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로마 중심가라고 보면 되겠다. 퀴리날레 언덕의 디오클레니타누스 목욕탕에서 판테온과 트레비 분수를 지나 나보나 광장에 이르는 도시 건설을 처음 시도한 사람이 바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였다. 또한 그는 어느 부족 출신이거나 신분의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로마를 사랑하고 로마를 위하여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로마인'이 될 수 있는 열린 사회를 처음으로 만든 사람이다. 이것이야말로 일개 부족국가였던 로마가 대제국으로 성장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역활을 하게되었던 것이다.
또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잦은 천재지변과 전염병의 창궐과 연이은 전쟁으로 말미암아 통합된 부족들간에 저마다 이해관계와 풍속과 토속신앙이 저마다 제각각인것을 염두에 두고, 무엇보다 이들을 하나로 묶기 위하여 새로운 종교적 활동이 필요하다는 사실에서 착안하여 새로운 신전을 짓고 그 신전들을 통하여 사회적 빈민구제 사업에 박차를 가했다. 툴리우스는 모든 부족들이 저마다 떠받들고 믿는 토속신앙에 대하여 종교적 자유권을 보장하였다. 그런 한편으로 당시의 가장 보편적인 종교대상이었던 고대 그리이스에서 유래하여 전래된 신들을 찬양하고 신전을 건축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신은 포루투나(운명의 여신)와 다이아나(달과 사냥의 여신으로 그리이스 신화의 아르테니스 여신)를 가장 좋아하고 숭배하였다. 툴리우스는 캄피돌리아 언덕의 가장 높은곳에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다이아나 신전을 세웠다.
그러면서도 툴리우스는 로마의 제도권 안에서 생활하는 모든 로마인들이 자신처럼 포르투나 여신과 다이아나 여신을 믿고 따르는 가운데 모두가 하나로 뭉쳐지는 로마사회를 꿈꾸었다. 그 방편으로 세르비우스 툴리우스는 로마 도심의 공터나 골목 어귀나 도로의 교차로나 성문과 성벽에 포르투나와 다이아나를 모시는 작은 신전들을 무수히 많이 만들도록 하였다. 흡사 우리나라 시골의 서낭당이나 곳집 같은 형태라 이해하면 되겠고, 불교 문화권의 작은 사당이나 집집마다 설치되어 있는 가정용 제단 쯤으로 이해하면 될것이다.
이제 사람들은 심신을 잘 추스르고 재물이나 공양꺼리를 따로 준비해서 신전을 일부러 찾아가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집밖으로 조금만 나가면 사방 어디에서든지 작은 신전을 쉽게 만날 수 있고, 그곳에서 신께 기도를 올리면 되게 되었다.
어느 순간부터 사람들은 길거리의 작은 신전에서 기도를 올리게되면, 고대 그리이스 신화에서부터 전해내려온 들판과 교차로를 보호하는 수호자인 라레스(Lares Compitales) 신이 자신들을 보호해 줄것이라고 믿게 되었다.
그것이 곧 마도날레(madonnelle) 시작이었다고 하겠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국교로 공인되는 순간부터 고대 로마왕국에서부터 이어져 내려온 작은 신전(길거리 예배당)은 급격하게 변모하기 시작한다.
핍박받고 순교 당하던 초대교회에서 탈피하여 지배자인 로마제국의 기독교로 변모하게된 로마카톨릭의 달라진 위상과 권력은 마침내 이민족들의 종교를 탄압하기 시작했고, 우상숭배라는 미명하에 고대 그리이스의 신전과 수많은 다른 종교적 유산과 유물에 대해서도 무자비한 탄압과 파괴를 서슴치 않았던 것이다. 조각상이나 벽화들을 파괴하거나 지우고 나서 부장품들 까지 모두 없앤 후에 일부의 신전을 개조하여 기독교 교회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나머지 대부분의 고대 그리이스 신전이나 사원들을 철저하게 파괴되었다. 이런 우상파괴 운동의 일환으로 로마 도심 곳곳을 채우고 수놓았던 포르투나와 미네르바의 작은 신전들도 파괴되거나 철거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그동안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의 일부처럼 여겨졌던 종교활동에 아쉬움을 느낀 일부 사람들이 파괴되거나 허물어 트린 길거리 신전에 새롭게 십자가나 기독교 상징물을 올려놓으면서부터, 이제는 새롭게 기독교적인 종교활동의 일부로 다시 작은 신전과 길거리 예배당들이 지금의 모습으로 재등장하기 시작했다.
세르비우스 툴리우스 시대에 생겨난 로마 도심 곳곳의 작은 길거리 신전들은 기독교의 등장과 함께 대대적인 변신을 꾀하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방식의 포르트나와 미네르바를 모시던 작은 신전들은 이제 십자가나 기독교 상징을 모시는 기독교적 미니 사원으로 변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길거리 신전들이 마도넬리(신문 가판대)로 변신하기 까지는 적어도 두 번 이상의 변혁기를 더 맞이해야만 했다.
이제 이 길거리 신전들에게 엄청난 영향을 끼치게 되는 사건의 배후에는 모두 (십자군 전쟁)과 (이슬람 문화) 라는 '동서문명의 충돌'에서 파생되는 커다란 영향력들 덕분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
이백 년에 걸쳐 여덟 번이나 감행된 십자군 원정은 유럽사람들의 삶 전반에 걸쳐 엄청난 영향력을 끼쳤다. 비단 정치. 군사. 사회. 경제와 문화적인 측면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종교와 민간의 신앙에도 지대한 영향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은 십자군 전쟁의 어느 부분에서 부터인가 생겨나기 시작한 (성모 마리아 신앙의 급부상) 이라고 한마디로 저으이 내릴 수 있겠다. 이제까지의 기독교 신앙은 로마카톨릭이 주도한 바 대로 교황과 고위 성직자들에 의한 다분히 남성중심적인 상명하복식의 일방통행식 기독교관이었다. 교황과 교회는 세속의 권력이나 법 위에 군림했다. 인간이 큰죄인이 되고 안되고, 죽어서 천당에 가고 못가고는 모두가 교황과 교회에 달려 있었던 것이다. 인간은 본시 태어나는 순간부터 죄인이었고, 그 죄에서 구원받을 수 있는 방법은 오로지 교황과 교회의 가르침을 성실히 수행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하라고 교황이 명령을 내렸기에 유럽의 남자라면 의당 따라서 전쟁에 나서야만 했다. 그 이면엔 교황의 사면 약속이 있었다. 하지만 200년이나 계속된 전쟁기간동안 예루살렘 성지를 탈환한것은 1차 원정대가 전부였다. 200년 동안이나 교황은 군대를 모집해 계속 전쟁을 독려했고, 결과는 출정만하면 모두 패배하고 돌아왔다. 그동안의 노력과 인명과 천문학적인 전쟁 비용이 모두 물거품이 되었으니 교황과 교회의 분노는 잔혹할 정도였으며, 죽어나가는 것은 힘없는 서민들 뿐이었다.
그런 와중에도 교황은 끊임없이 전쟁비용을 각출하였으며, 겨우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리길 식은 죽먹듯 하였다. 교황과 교회의 입에서 터져나오는 하나님은 인간을 어여삐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주시는 너그러운 하나님이 더이상 아니었다. 분노하고 광포하며 영원한 저주를 일삼고 끝까지 참혹한 복수를 요구하는 그런 광기서린 하나님이 있을 뿐이었다.
전쟁터에서 겨우 살아남은 상처입고 지친 십자군 하급병사들의 영혼은 이제 오갈곳이 없어진 것이다. 보급은 끊어지고 지원군은 오지 않는 상황에서, 성지 탈환을 요구하는 교황의 명령서만이 끊임없이 도착하고 있었다. 유럽으로 돌아가면 패배자와 배신자의 낙인 아래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는것이 뻔한 사실이었다. 하나님께 구원을 요청해보려 기도를 올려보지만......... 하나님은 이미 오래 전부터 모든 권한을 교황에게 위임하고 난 후였기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하나님까지도 그럴진대, 어느 선지자나 성인이나 사도들에게 매달려 본다손 치더라도 교황의 특별한 허가가 있기 전에는 모두 아무런 소용이 없는 상황을 맞딱뜨리고 만 것이다.
그때 어느 병사가 참으로 기가막힌 묘안을 떠올렸다. 하나님께서도 모든 권한을 이미 오래전에 교황에게 위임하셨고, 더 이상 그 어떤 선지자나 성인이나 사도들의 진언도 소용이 없어진 마당에, 하지만 교황으로서도 차마 이분에게만은 함부로 할 수 없는 아직 전면에 모두 드러나지 않은 존재가 떠올랐던 것이다. 그 대상은 바로 성모 마리아 였다.
만약 성모 마리아에게 간절히 기도를 드려서 따스하고 자애로운 어머니의 마음씨를 가진 성모 마리아께서 어떤 응대와 배려와 은총을 허락해 내려주신다면......... 그런 성모님의 행위에 제아무리 교황이라해도 감히 어쩌진 못할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렸던 것이다.
그 병사는 그날부터 밤낮으로 성모 마리아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참으로 신기하게도 그 병사의 간절한 바램들이 저절로 풀려나가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소문은 삽시간에 전 십자군 병사들에게 퍼져 나갔다. 이제 십자군 병사들은 더이상 하나님이나 예수 그리스도나 교황을 통한 기도를 올리지 않게 되었다. 그들은 모두 성모 마리아에게 간절한 기도를 올렸다. 이렇게 시작된 (성모 마리아 신앙)은 엄청난 효과를 보게 된다.
이렇게 십자군 전쟁에서 살아 돌아온 병사들에 의해서 새로운 (성모 마리아 신앙)이 온 유럽에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전유럽에 대형교회들이 수없이 건축(노틀담 사원이 대표적인 예)되면서 대부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되는 기현상을 낳게 된다. 이렇게 시작된 성모 마리아 신앙의 폭발력은 도를 넘어서 '성모 마리아의 신격화' 내지는 '우상숭배' 정도의 수준으로까지 치솟아 로마카톨릭 내에서도 자체적으로 많은 커다란 문제점을 양산시키게 된다.
이 시기에 성모 마리아 신앙의 파급 효과가 로마 거리 곳곳의 작은 사원(길거리 예배당)에 까지도 영향을 미쳐서, 대부분이 성모 마리아 그림이나 어린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 조각상이나 그림으로 모두 바뀌게 된다. 지금 남아있는 마도넬리의 대부분의 원형은 이때부터 비로소 만들어졌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이제 로마에 거주하는 모든 사람들은 굳이 육중한 교회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무겁게 짓누르는듯한 분위기 속에 진노와 응징의 하나님을 마주대하고 엎드려 빌듯이 기도하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억지로 과도한 성전세나 헌금을 내지 않아도 되게 되었다.
길거리 교차로나 성문 아래나 골목의 어귀마다 어디에나 작은 교회가 항상 열려진채로 맞이해 주었으며, 포근한 어머니의 품속 같이 자애로운 성모 마리아는 미천한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를 언제까지고 고스란히 경청해 주셨기 때문이다.
로마 곳곳에 빼곡히 만들어져 있는 성모 마리아의 작은 교회 이곳저곳에서 놀라운 기적의 역사가 이루어졌다는 소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뒤따랐다. 이제 두오모나 대형 교회는 고위 성직자들이나 기거하면서 부와 권세를 자랑하며 사치와 호사를 누리는 장소로 인식되기 시작했고, 진정한 하나님의 역사는 교황이나 대형 교회를 통해서가 아니라 성모 마리아를 통해서 길거리 골목 어귀에서 실현되는 새로운 세상이 등장했던 것이다.
이렇게 거듭해서 변모해온 마도넬리에 거의 마지막으로 파격적인 혁신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것은 스페인에서 벌어진 레콩키스타(Reconquista) 였다. 레콩키스타는 유럽의 본토라 할 수 있는 리베리아 반도를 점령한 아랍인(이슬람)들을 물리치기 위해 벌어진 스페인의 카톨릭 교회가 주도한 국토 회복운동을 일컷는다. 아랍인들이 711년 지중해를 건너 지브롤터에 상륙한 후에 1492년 그라나다 왕국이 함락되기까지 800년 가까이 리베리아 반도의 약 3/4 이라는 거대한 영토를 점령하고 호시탐탐 피레네 산맥 이북의 유럽 본토 공략을 꾀하였던 것이다. 아랍인들이 침략과 동시에 스페인 사람들은 카톨릭의 주도하에 꾸준하게 국토 회복운동을 벌여왔는데 그것이 바로 레콩키스타 이다.
유럽의 역사는 이 레콩키스타(국토 회복운동)를 '십자군 원정'의 일부분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레콩키스타가 꾸준히 이어지고 있던 1095년에 교황의 명령에 의해서 제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하여 장도에 올랐던 것이다. 애초 교황은 초월적인 권한을 이용하여 유럽의 모든 군주들에게 성지 탈환을 위한 총동원령을 발동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유럽은 황권과 교권이 치열하게 반목과 대립을 일삼던 시기였다. 교황은 자신이 세속을 초월한 이세상의 유일한 절대권자라고 스스로 인정하고 있었지만, 유럽의 군주들은 대부분 세속의 통치건자는 오로지 자신들이라고 생각하였으며, 교황은 어디까지나 교회 안에서만의 최고 지도자라고 격하 시키고 있었다. 이런 대립이 결국엔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 라는 사태를 낳게 되었던 것이다.
십자군 원정의 목표는 그럴싸하고도 거창하게 '예루살렘 성지 탈환' 이었지만, 그 안에 내재된 실제 교황의 속셈은 '교황권에 위협이 되는 군사력을 가진 유럽의 군주들을 멀고 먼 동방의 예루살렘으로 한동안 몰아냄으로써, 한동안 텅 빈 유럽 영토안에 교황의 권위를 확고히 하고 세속 군주들의 권위와 군사력을 저하시키려는 속셈을 가진 원정이었다.
교황의 칙령을 반포하고 종교적 파문을 앞세워 총동원령을 내렸지만, 교황의 음흉한 속셈을 눈치 챈 유럽의 군주들을 아무도 순순히 그 명령에 따르지 않았다. 자칫 이 멀고 오랜 원정길의 참여가, 군주들이 유럽의 자신의 영지를 비우는 동안에 교황의 흉계에 속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의심이 들었던 것이다. 결국 제 1차 십자군 원정대에 유럽의 실제적인 군주는 단 한 명도 참석하지 않았다. 봉건 군주와 영주에 속했던 기사들이 제 1차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은 분노했다. 자신의 의도가 간파되었고 의도했던 목표는 절반도 성공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교황은 거듭 거듭 후발 지원부대를 구성해 유럽의 군주들이 원정대에 참여할 것을 명령했다.
그때, 스페인과 포루투갈에서 리베리아를 차지하고 있는 아랍인(이슬람)을 몰아내는 성스러운 전쟁에 지원을 요청하는 사자들이 유럽의 군주들에게 도착했다. 이 세상에서 이교도(이슬람)를 몰아내고 기독교 왕국을 건설하고 유지하는 것이 바로 교황이 내세운 십자군 전쟁의 캐치 프레이즈 였다. 교황의 흉계라 판단하여 십자군 원정대에 참여하지 않았던 유럽의 군주들에게 좋은 명분이 생긴것이다. 군주들은 연합군을 편성하고 일부 왕족들을 앞세워 레콩키스트(스페인 국토 회복운동)에 군대를 파견하고 군수물자를 지원하였던 것이다. 교황은 땅을 치며 분개했다.
어찌되었거나 유럽의 군주들 직속에 해당하는 실제적인 십자군 원정대가 참여한 레콩키스트는 엄청나게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마침내 리베리아 반도의 이슬람 세력의 중심지이자 수도였던 톨레도가 함락되었다.(1085년) 이어서 1149년 세비야와 코르도바를 탈환하는 커다란 성과를 올리게 된다. 그런데 오늘 이야기의 핵심은 바로 이 대목에서 였다.
십자군 원정대에 포함되어 출정한 기사나 군인들은 물론이고, 이들을 파견한 교황을 비롯한 유럽인들의 절대다수는 이번 원정이 아주 손쉽게 끝날것이라고 예견하고 있었다. 동쪽의 변방 지역인 소아시아를 차지하고 있는 이교도(이슬람)들이야 거의 짐승과 다를바 없는 미개한 종족들이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시고 은총을 내려주신 십자군 원정대 앞에 미천한 이교도들 쯤이야 십자가를 쳐다보기만 해도 두려움에 떨며 스스로 지옥의 구렁텅이로 뛰어들어 자살할 것이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다. 아무런 거칠것이 없는 십자군의 행보 앞에 이제 곧 예루살렘 성문이 열릴것이며 머지않아 자유롭게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다녀 올 수 있을것이라는 기대에 부풀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단것은 모두 신기루 같은 유럽인들만의 바램이자 열망이었을 뿐이었다.
비록 행운이 따라주었음인지 당시의 이슬람 사회는 왕조들간의 오랜 분쟁과 다툼으로 분열될대로 분열되었고 군사력이 완전히 소모되어 느닷없이 들이닥친 십자군 원정대를 상대할 최소한의 방어력 조차도 상실된 상태였다. 부실투성이로 급조된 어설픈 원정대가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얼떨결에 성지 예루살렘을 탈환하고 말았다. 정말로 기적같은 천우신조의 기회를 얻었던 때문이다.
하지만........... 선택받았다고 자부하는 유럽의 기독교 군대가 처음 맞닥뜨린 이슬람 세계는 그야말로 비현실적이었으며 유럽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선진 문명국이었던 것이다. 유럽인들이 미처 꿈에도 꾸어보지 못했던 세계가 그 동방의 이교도 사회속에 건설되어 찬란하게 문명의 꽃을 피우며 엄연하게 빛나고 있었던 것이다. 십자군이 받은 문명의 격차에서 오는 괴리감은 실로 엄청난 충격이었다. 이슬람 사람들은 별자리가 사라진 흐리고 어두운 밤에도 바다를 항해하였으며, 능숙하게 사막의 밤길을 헤쳐 나갔다. 유럽이 주술에 의해서 흑사병과 전염병에 매달리고 있었을때, 이슬람인들은 처방약을 만들고 심지어 뇌수술까지 시행하고 있었다. 그들이 만든 칼은 십자군의 칼보다 가볍고 강했으며, 대포의 사거리가 훨씬 멀리까지 날려보낼 수 있었다. 더군다나 어떤 마술을 부렸음인지 한여름의 사막에서 만년설에서 캐내어 온 얼음을 의료행위에 이용하기도 하고 음식에 사용하기도 했다.
성지 예루살렘 주위에 살고있는 이교도(이슬람)들의 선진문물을 보고 엄청난 충격을 받았지만, 그렇다고 이 문명을 격차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 곧바로 이어진것은 결코 아니었다.
제1 차 십자군 원정대를 이끌었던 지도부들(부용의 고드푸르아, 볼로뉴의 보드앵, 타란토 공작 보에몽, 툴르즈 백작 레이몽)은 뜻밖에 기회를 틈타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에, 이 성과를 비잔틴이나 교황에게 돌려주지 않고 새로운 예루살렘 왕국을 건설한 뒤에 자신들이 차지하고 들어앉아 버렸기 때문이다. 원정대 스스로가 교황이나 유럽과의 연결 고리를 끊어버리고 자치 독립을 선언했던 것이다. 교황은 이 원정대 자체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고, 이들을 징벌할 새로운 원정대를 꾸릴 계획까지 세웠다.
분열되어 흩어졌던 이슬람 세계가 적군(기독교)의 수중에 떨어진 예루살렘을 보고는 깨닫는 바가 있어서 다시 하나로 규합해 예루살렘 탈환을 위해 쳐들어 왔다. 2차 3차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결국에는 이슬람을 하나로 뭉치게 만든 살라딘의 등장으로 예루살렘은 다시 이슬람의 수중에 들어가게 되고....... 8차까지 이어지는 200년 가까운 십자군 전쟁동안 다시는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한다.(프리드리히 2세의 잠시동안의 무혈입성을 제외하고는)
길고 긴 십자군 전쟁을 통하여 유럽의 원정대가 경험한 수많은 이슬람의 선진문물을 바다를 건너 유럽으로 전하여지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반영이나 개혁의 발판까지는 이르지 못하고 말았다. 여전히 교황이나 유럽의 지배층은 이교도(이슬람)에 대한 배타심과 야만적이면서도 미개하리라는 선입견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이다. 십자군 원정대의 이슬람에 대한 경험은 훗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슬람으로부터 도망처 몰타와 시칠리아를 통해 유럽으로 들어오는 비잔틴 제국의 학자들과 지식인들에 의해서 본격적으로 유럽 사회속으로 도입되게 된다.
하지만.......... 스페인에서의 이슬람 문화와의 조우는 전혀 다른 상황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유럽 영토 안에서 벌어진 십자군 전쟁이라고 일컬어지는 레콩키스타에는 유럽의 실질적인 영주들과 왕족과 귀족들이 직접 전쟁에 참여하였던 것이다. 더군다나 그들이 하나하나 점령해 나가는 도시들은 실제로 당시의 아랍인들이 이슬람의 선진 문명을 향유하면서 생황했던 장소였다. 톨레도를 빼앗긴 이슬람 왕조는 코르도바로 도망쳐 새로운 수도로 삼았다. 리베리아 반도에 진출한 이슬람의 수도이자 왕궁이 있었던 톨레도에 입성한 유럽의 실질적 통치자들은 모두 가무라칠 지경이었다. 같은 유럽 안에서 그동안 하나님으로부터 선택받은 아주 특별한 백인 우월주의라는 자부심 하나로 기세등등했던 유럽의 군주들은 자신들이 얼마나 어리석은 우물 안 개구리였는지를 뼈져리게 깨닭았다. 유럽의 기독교 왕국을 지상 최고의 왕국이라고 친다면, 리베리아 반도를 오랫동안 차지했던 이슬람 세계는 지상에는 없는 찬상의 왕국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그곳에서 유럽에서는 아주 오래전에 모두 사라지고 없는 고대 그리이스의 찬란한 예술과 건축과 철학과 인문학과 천문학과 의학과 과학을 넘치도록 보고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모든것의 중심에 신학을 중심으로 하는 학문 교욱기관인 대학(College)이라는 기관을 목격했다.
이곳에서 얻은 이슬람 문명에 대한 충격과 고대 그리이스 문명에 대한 재발견이 레콩키스타에 참가한 실질적인 유럽의 영주를 비롯한 통치자들을 통하여 급속하게 유럽으로 전파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 결과는 르네상스의 등장으로 나타나게 된다. 더불어 유럽의 기독교 왕국에도 처음으로 이탈리아 볼로냐에 대학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볼로냐 대학은 이어서 옥스퍼드. 켐브릿지. 하이델베르크. 파리 대학 등으로 퍼져나가게 된다.
레콩키스타에 참전한 로마 출신의 지휘관들에게 코르도바를 점령하면서 유독 아주 강렬한 이미지로 각인되다시피한 이슬람의 선진 문물이 하나 있었다.
유럽의 모든 기독교 세계는 낮의 생활과 밤의 생활로 철저하게 구분되어져 왔다. 태양이 빛나는 낮 시간동안 상업적인 생활과 종교적인 생활 등 모든것이 이루어졌다. 어두운 밤은 악마와 마귀의 시간이었다. 긴 어둠의 시간동안 사람들은 신께 안전과 구원을 늘 기도하면서 지냈다. 그러다보니 프랑스의 상징 동물이 닭 인것 처럼, 어둠을 물리치고 새벽을 가져다주는 닭을 무척이나 신성시하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악마가 활보하기 시작하는 어둠이 내리면 가급적 사람들은 외출을 삼가해야만 했다.
그런데 짐승에 가까우리만치 덜떨어지고 야만적인 이교도(이슬람)이 살았던 코르도바에 들어가보니 아랍인들은 오래전부터 어둠을 떨쳐내면서 살아 온 것이 아닌가?
코르도바의 아랍인들은 해가 지면 자신의 집 대문 위에 초롱불을 밝혀 내걸었다. 이집저집 하나같이 아침이 밝아 올 때까지 자신들의 대문 위에 불을 밝혀 매달아 놓았던 것이다. 인류 최초의 가로등이 등장 한 것이다. 말이나 마차가 다니는 대로변에 모두 불이 밝혀져 있고, 어둠이 내리면 사람들이 다니기 조차 꺼리게 되는 골목 어귀에서부터 깊숙한 안쪽까지 초롱불을 밝혀 놓았던 것이다. 도시의 사방으로 초롱불이 밝혀지면 이제 악마들이 활보해야 할 어두움이 모두 사라져 버리고 만 것이다. 선진 문물을 자랑하던 유럽인들이 받은 충격은 상상을 초월하고도 남았다. 이교도들은 밤에도 낮처럼 외출하고 사원에 드나들고 광장에 모여 이야기를 나누었던 것이다.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교도들이 가로등을 만들게 된 이유가 모두 유대인의 탈무드에서 배운 가르침 때문이라는 사실이었다. 탈무드에는 '호롱불을 밝혀 들고 밤 길을 가는 장님의 이야기'가 나온다. 장님이 길을 가는데에야 밤이건 낮이건 안보이는 것은 매 한 가지임이 틀림없는데 어느 장님이 굳이 호롱불을 들고 밤길을 가는 대목에서........ '자신이 아닌 다른 누군가를 위해서 호롱불을 들고 간다'는 대목에서 깨달음을 얻어 집 앞에...... 아직 돌아오지 않은 가족을 위해서...... 그리고 내 집 앞을 지나가는 낯선 나그네의 안전을 위해서 내걸기 시작한 것이 처음 시작하게 된 이유였다는 이야기였다. 기독교는 유대인을 탄압하고 잔인하게 집단 살륙하기까지 하던 시기에, 이슬람은 그런 유대인들을 지켜보고 연구하고 배울것을 찾아냈다는 엄연한 사실 앞에서 부끄러울 수 밖에 없었다.
아랍인들은 자신들의 대문 위에 호롱불을 밝혀 놓았는데.......... 로마에서 온 십자군 지휘관의 머리에 번쩍 떠오른 생각은........ 자신의 고향 골목길마다 설치되어 있는 수많은 마도넬리 위에도 저렇게 호롱불을 밝히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부유한 교회는 밤새도록 비싼 양초를 태워 환하게 밝혀 놓았다. 양초로 환하게 밝혀진 교회는 어디까지나 교황이나 주교나 성직자들과 권력을 가진 영주와 기사들과 더한다면 부를 가진 부자들이나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가난하고 생활에 지들어 살면서 교회에 받칠 헌금을 엄두도 못내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겨우 도로변이나 성곽에나 골목 어귀와 골목안쪽 담장에 설치된 마도넬리의 성모 마리아를 향해서 간절한 기도를 올렸는데, 그나마 어둠이 내리고 악마가 활보하는 시간이 되면 두려움에 밖으로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코르도바의 이교도들 처럼 로마의 곳곳 마도넬리 위에 호롱불을 설치하게 된다면 가난하고 버림받은 서민들이 밤에도 마도넬리를 찾아와 성모 마리아께 기도를 올리고 찬양을 받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던 것이다.
레콩키스타를 마치고 로마로 돌아 온 지휘관은 곧바로 자신의 동네에 있는 마도넬리 위에 호롱불을 직접 매달았다. 그리고 그 필요성과 당위성을 주위사람들에게 적극적으로 홍보하기 시작했다. 이는 놀라운 효과를 발휘했다.
순식간에 로마의 모든 마도넬리 위에 호롱불이 매달리게 되었고, 로마의 밤길을 밝히게 되었다. 그만큼 서민들의 성모 마리아에 대한 어떤 간절함이 절실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이젠 누구나 낮이든 밤이든 언제든지 성모 마리아 앞에 달려가 기도를 올릴 수가 있게 된 것이다. 바로 지금의 마도넬리가 바야흐로 완성 된 것이다.
실크로드를 통해 중국에서 종이와 제지기술이 아랍인들에게 전해졌다.
발칸반도를 통해 이탈리아로 일부 전해지기는 했지만 거의 유명무실했다고 보아도 무방하겠다.
종이와 제지기술이 유럽으로 전파하게된 경위 역시 소아시아 지역에서 또다시 분파되는 실크로드를 따라 북아프리카와 지중해를 건너 리베리아 반도의 아랍인들에게 전하여졌고 한층 발전하게 된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의 문화와 학문에 심취한 아랍인들은 종이와 제지기술을 이용해 필사본으로 책을 만들었던 것이다. 인류 문명사에 있어서 커다란 혁명이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해서 아랍인들의 생활속에 녹아들어 있는 책문화를 접한 유럽의 통치자들과 지식인들의 놀라움은 대단한 것이었다. 레콩키스타를 통하여 유럽인들은 종이와 제지기술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아울러 이미 아랍어로 번역되어 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화려한 문화와 학문적 업적을 책을 통하여 새롭게 받아들이게 된 것이다.
르네상스는 이런 과정 위에 탄생하게 되었다.
종이와 제지기술이 발전하게 되자, 마침내 활자가 발명되었고 인쇄술이 급속도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필사본이 전부였던 시대에서 책자를 대량출판할 수 있는 시대로 발전하게 된 것이다. 바로 이 시기인 르네상스의 정점에서 드디어 신문(Newspaper)이 등장하게 되었다.
물론 초창기의 신문은 오늘날 같은 신문이 아니라....... 흔히 말하는 찌라시 수준이었을 것이다.
교통과 통신에 대한 개념조차 미미했던 시대였던지라 정보(소식)라는 개념이나 가치기준 또한 전무했다고 할 수 있었겠다. 자신이 살고 있는 동네와 매일 마주치는 사람들에 대한 소식이 아니면 도무지 세상에 무슨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수도 없었고, 굳이 알 필요도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상공업의 발달로 인하여 수많은 도시가 생겨나고 교류가 활발해 지면서 정보에 대한 중요성이 점차 중요하게 인식되기 시작했다. 생활이 이익이 되는 정보 뿐만이 아니라, 도시와 국가간의 분쟁이나 전쟁이 잦아기게 되자 정보를 알아야 전쟁같은 재난과 천재지변에 대처할 수 있는 시대로 점차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 확보와 인쇄술에 재주와 재능을 겸비한 사람들이 정보를 팔기 시작했다. 비록 조악한 솜씨였지만 종이에 새로운 정보에 관한 글을 써서 인쇄를 하여 길거리에서 팔기 시작한 것이다. 정보는 시간과 전파력이 생명이다. 당연히 짧은 시간에 많은 사람들에게 팔려 나가야 함과 동시에 끊임없이 새로운 소식을 발굴해 내야만 장사가 되는 것이다.
어떤 놀라울만한 소식이 생기면 즉석에서 활자화 해서 인쇄를 하고는 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거리에서 신문(찌라시)를 팔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이내 어떤 특정하게 지정된 장소에서 아무때고 사고팔수 있는 신문을 생각해 낸 결과가 바로 가판대의 등장이었으며, 그 최적의 장소로 찾아낸 것이 바로 마도넬리 아래였던 것이다.
마도넬리 앞에는 항상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찾아오는 장소였다. 아울러 이제 마도넬리는 밤에도 불이 밝혀져 있는 24시간 영업이 가능한 유일한 장소였던 것이다. 신문발행 업자들은 정보를 필요로 할만한 사람들이 주로 거주하는 마도넬리가 어느것이며, 사라들이 손쉽게 찾아올 수 있는 입지조건이 좋은 마도넬리가 어느것인가를 골라 선택한 다음에, 한 명의 신문발행업자가 대량의 신문을 인쇄하여 여러곳의 마도넬리 아래에 사람을 두고 신문을 판매하기(체인 마켓?) 시작했다. 로마에만 해도 수십명의 신문 발행인이 성업을 이루었던 것이다.
이때부터 마도넬리는 '길거리 작은 예배당' 혹은 '작은 신전'에서 근대적인 의미의 '신문 가판대'로 불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코로소 거리의 마도넬리' 또는 '콜로니아 거리의 마도넬리' 하면은 그 장소에서 몇시에 만나자는 약속이 가능한 시대로 변모한 것이다.
마도넬리(madonnelle)의 역사가 거기에서 그치는 것만은 또 아니었다.
로마에만도 엄청난 숫자의 마도넬리가 설치되었는데, 그 중에 아주 특별하고 유명한 마도넬리들이 따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앞에서 살펴 본 '폰테의 이미지' 마도넬리 보다 훨씬 더 유명한 아주 특별한 마도넬리가 실제로 등장하게 된 것이다.
마도넬리의 역사중에서 가장 유명한 마도넬리를 꼽는다면 당연하게 누구나가 한목소리로 '아케토의 마도넬리(La Madonna dell Archetto)'라고 서슴없이 대답 할 것이다. 그런데 정작으로 이토록 유명한 마도넬리를 실제로 발견하고 참배하는 사람은 의외로 적다.
왜 그럴까?
그 이유는 아주 뜻밖이라고 밖에 달리 할 말이 없을 정도이다. 로마를 대표한다고 해도 가히 손색이 없을 정도의 유명한 관광지이자 위대한 문화유산이 바로 옆에 놓여있어서, 여행자들이 이곳까지 찾아간다고 해도 순간적으로 모든 시선과 마음을 온통 엉뚱한 문화유산에게 빼앗겨 버리게 됨으로써, 정작 옆구리쯤에 해당하는 골목의 담벼락에 슬쩍 내걸리다시피 한 작은 마도넬리에게는 정작 현지인이 아니라면 눈길조차 잘 가지지 않는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그 유명한 유적이 위치한 주소가 <Fontana di Trevi 00> 이며, 가장 유명한 마도넬리의 주소가 <Fontana di Trevi 41b> 이다. 관광객들로 늘 꽉차있는 분수대 앞 광자의 한 모퉁이 담벼락에 붙어있기 때문에, 트래비 분수에 영혼까지 빼앗겨버린 사람들의 시선이 채 마도넬리에 까지 미치지 못하는 것이다.
로마에서 오가는 행인이 가장 많기로 유명한 삼거리를 골라서 설치한 것이 바로 트래비 분수이다. 그러하였으니 이곳은 항상 수많은 인파로 붐볐다. 그런 요충지에 마도넬리가 들어 선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으며, 이곳의 신문가판대 또한 최고로 유명할 수 밖에.......... 수많은 사람들이 이곳의 마도넬리 앞에서 성모 마리아께 간절한 기도들을 올렸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기적이 일어났다.
사람들의 간절한 기도에 성모 마리아께서 응답해 주신것 뿐만이 아니라, 때론 그림속의 성모 마리아가 웃음으로 화답해 주고 눈을 움직여 허락을 해주는 일들이 벌어졌던 것이다. 거기에다 로마에 커다란 액운이 닥치거나 변고가 불어오면 이를 예고라도 해주는 듯이 그림속의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이 소문이 퍼져나가자 이제 이곳은 그 기적을 확인하려는 사람들로 문전 성시를 이루고 24시간 감시 카메라가 켜졌다 할 수 있는 상황으로 전개되었다. 실제로 나폴레옹이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 국경을 침범하기 하루 전날 성모 마리아가 눈물을 흘렸고 이를 여러사람들이 실제로 동시에 목격하기도 했다.
교황청은 이 사태의 진실을 확인하기 위하여 조사단을 꾸려 진상규명에 들어갔다. 그 후로도 이 같은 기적이 거듭 벌어졌기에 결국 교황청은 이곳에서 벌어진 놀라운 일들을 '성령의 은사'로 천명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카톨릭은 이 성스러운 마도넬리를 특별히 관리해야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 하여 바로 옆 골목 안쪽의 건물을 '아케토의 마도넬리'를 보관 보존하기 위한 작은 교회로 만들어 그곳으로 옮겼다. 외관으로 전혀 교회답지 않은 건물이어서 찾기가 쉽지 않지만........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작은 별도의 독립 예배당일지도 모르는 교회는 유독 현지인들의 간절한 발걸음이 끊이지 않는 절대 성소라 할 수 있겠다.
'아케토의 마도넬리'까지 살펴 봄으로써 이제 마도넬리(madonnelle)의 역사에 대해서는 나름으로 어느정도 심도있게 살펴 본 것으로 생각되는 바, 다시 가던 발걸음을 서둘러서 나머지 로마 도심 투어를 계속해 나가야만 하겠다.
혹여....... 로마를 여행하게 되신다면, 적어도 로마의 도심을 지나칠때는 일부러라도 골목길을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다양한 마도넬리를 만나보고, 각기 다른 솜씨와 장인들의 숨결과 당시의 현지인들의 간절한 염원을 한번쯤 살펴 보는것도 아주 멋진 여행일것이라고 강력하게 추천드리고 싶다. ~~~~ 강~~~~추!!!!!
마도넬리(madonnelle)를 더 찾아보려고 도심의 이곳저곳을 기웃거리면서 세디아르(Via dei Sediar) 거리를 지나간다. 고급스러운 양복점과 분위기가 다분히 로마스러운 레스토랑들이 저마다 독특한 개성을 뽐내면 들어서 있다. 기념품점과 테이크 아웃을 주로하는 스낵 바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그렇게 걷다보면 성 에우타치오 교회(Basilica di Sant Eustachio)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면서 그 앞으로 손바닥만하게 작은 마르지오 광장(Compo Marzio)을 만나게 된다. 국내에서도 여행을 하다보면 낙락장송이 무리지어 나타나고 주변의 풍광이 빼어나다 싶어지면 틀림없이 가까운 주변에 명승지나 사찰이 금방 나타날것만 같은 느낌이 생겨나는것 처럼, 여기 마르지오 광장에 도착하고나니 어딘지 모르게 중세의 궁전 같은 건물들이 빼곡하게 늘어서 있고, 사이사이의 골목길에서도 범상치 않은 분위기가 느껴지는것이 틀림없이 훌륭한 무엇인가가 불쑥 나타날것만 같은 느낌과 긴장감으로 다가오기 시작한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에서는 유독 강한 이탈리아의 짙은 에스페레소 커피 향내음이 코끝 가득 풍겨져 온다.
골목길 담벼락 위로 누군가가 하얀 페인트로 (Piazza della Rotonda) 라는 글자와 함께 화살표를 그려 놓았다.
올바르게 찾아왔다는 증거다. 지금 우리가 찾아가는 곳이 바로 '로톤다 광장' 이었기 때문이다. 이 유난히 좁은 골목길을 이리저리 돌아서 빠져나갈 무렵이면 우리는 틀림없이 초록색 표지판에 하얀 글씨로 쓰여진 (PLACE DU PANTHE'ON) 이라는 안내 표지판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판테온(Panthe'on) !!!
내가 로마(Rome)를 찾아서 여행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탈리아를 거듭 다시 찾는 이유는 피렌체라는 도시의 매력이 좋아서 이기도 하고, 또 피렌체에 피어난 르네상스라는 문예사조에 심취해 있는것이 주된 이유이겠지만, 그렇다해도 이탈리아를 통털어서 가장 감명 깊고 또 찾아가고픈 단 한가지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주저없이 판테온을 선택할 것이다.
인류 문명사적인 관점에서 볼 때, 이 세상에는 훌륭함을 넘어서 실로 위대한 문화유산들이 너무도 많다. 그 중에서 단 하나를 꼽으라면 역시나 나는 (판테온)을 꼽겠다.
판테온에 대해서는 앞의 이탈리아 여행기에서 나름 열과 성의를 다해서 이야기를 꺼낸 바가 이미 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도 상당히 많은 연구 결과물들과 다양한 학계의 의견들이 추가되었다. 건축에 관심이나 조예가 깊던가, 건축분야에 종사하는 사람치고 판테온을 경이로움 속에서 관심을 가지고 자료와 정보를 찾아보지 않은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여 이미 지나갔던 판테온 기행기를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오면서까지 예전에 다하지 못했던 이야기들을 이쯤에서 덧붙여 첨부하고 다음으로 넘어가고자 한다.
흔히들 판테온(Pantheon) 하면 만신전(萬神殿) 이라고 한다. 이는 곧 '모든 신들의 신전' 이라 하겠으며, 이는 '하나의 신이 아닌 다수의 신들을 모시는 성소' 였다는 의미이다. 이제까지의 신전들이나 이후로의 신전들도 모두가 하나 같이 특정 신전에는 특정한 '하나의 신'만을 선정해서 모시는 불문율이 어디에서나 존재했었다. 다신교인 힌두교를 제외하고는 말이다. 그런데 느닷없이 하나의 신전에 다수의 신을 모시는 신전이 등장하게 된 것이다.
그 같은 일이 처음으로 벌어진 곳이 바로 판테온인 것이다. 왜 그랬을까? 이는 과연 어떤 의미이며 어떤 의도에서 발생하였던 것일까?
-- 휴식기 삼아 국내 여행으로 여름 캠핑 좀 다녀와서 차차 이야기를 <판테온>에서 부터 다시 시작하겠습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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