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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르네상스 산책) 그리움이 차면 떠나자. 한번쯤 이스탄불.....

by 피안재 2020. 2. 27.


























  혹여,  그리움이 나를 찾으면

  어쩌겠어?  그대로 따라 나설밖에.......

  개뿔!  상황은 무슨 상황?

  핑계는 항상 또 새로운 핑계를 만들어 낼 구실만 찾고있는거야.

  그리움이 언제까지고 마냥 우리를 기다려주진 않을것이라는 것은........  그게 인생인거야.

  만약 그리움이 너를 부르면

  그땐 무조건 떠나고 보는거야.

  돌아보면 보이는 그림자의 길이가 처음 너가 출발했던 자리에까지 닿기전에 말이야.

  이럴때 한 번쯤........

  이스탄불 어때?







  유럽대륙과 아시아 대륙을 연결하고 나누는 분기점에 위치한 이스탄불(Istanbul)은 인류역사에서 아주 보기드문 참으로 매력적인 도시라 하겠다.

  지중해와 흑해를 연결하는 이 해상교통로를 따라 유럽과 아시아의 문물이 오고가고 문명의 충돌이 일어났다.

  동서 문명의 충돌 내지는 교류로 일컬어지는 기독교(유럽 카톨릭)와 아랍 이슬람교가 만들어낸 대단히 독특한 혼합문화의 단면을 감상할 수 있는곳으로는 스페인의 안달루시아 지방의 몇몇 도시들과 이곳 이스탄불이 가장 대표적이라 하겠다.

  스페인의 도시들이  카톨릭 문명이라는 분명한 현실 속에서 과거 이슬람 문화를 은근하게 내포하고 있다면.  이스탄불은 분명 현실적인 이슬람의 문화 속에서 과거의 기독교 문화를 품고있는,  엄격하게 서로 상반되는 특징들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스페인을 여행하다보면 화려하고도 찬란하게 꽃피운 기독교 문명 아래로 은근하게 드러나는 이슬람 문화와 예술에 대해서 상당한 아쉬움과 갈증을 느낄 수 있다.  그런 여운은 스페인을 떠나오고 나서도 한참동안 쉽게 지워지지가 않는다. 

  그 여운은 이내 이슬람 문화에 대한 그리움으로 가슴 한구석을 차지해 버리고 만다.

  그럴때 찾아가기 가장 좋은곳이 바로 이스탄불이다.

  이스탄불은  고대에 그리스의 변방이었다.  아테네를 침공하려는 페르시아에게 정복당하기도 했지만,  그들은 곧 정식 그리스 연맹 가입국으로 번영을 함께 했었다.  지중해의 새로운 강자로 로마가 부상함에 따라 로마의 속국이 되었다.  로마 제국이 분열하자 동로마의 수도로 급부상하여,  인류 역사상 가장 부유하고 풍요로왔던 비잔틴 제국으로 발전했다.  그러나 소아시아 지역에서 급부상한 오스만 투르크에 의하여 1천년의 왕국은 문을 닫게되었고, 이슬람 역사상 가장 강력하고 드넓은 영토를 호령하던 오스만 제국의 심장으로 근대까지 이어져 왔다.

  이스탄불은 아랍(이슬람)의 문명이 너무나 잘 보존된 멋진 도시이다.  이슬람의 문화를 세세하게 가만히 살피다보면 그 사이사이에 끼워 넣은 듯,  혹은 부러 가려 감춘 듯 놓여있는 기독교 문화(비잔틴 문화)를 심심찮게 볼 수가 있다.  이슬람 문화를 한꺼플 벗겨보면 비잔틴이 나오고,  비잔틴의 발 아래를 파보면 로마가 나온다.  그 로마의 아래로 조금만 더 깊이 파들어가보면 그리스가 나타난다.

  어디 그뿐인가?  그리스와 로마를 구분한다고 여기저기를 조금만 더 파헤치다보면........  페니키아가 나오고 카르타고도 나온다.  이상하다 싶어서 이번엔 반대쪽으로 파고 들어가면........  메소포타미아와 페르시아가 나오고 심지어는 이집트가 나오기도 한다.

  지구상에서 어디에도 이런곳은 없다.

  인류 문명사에 한 장소에서 이렇게 다양한 문명을 만날 수 있는곳은  이스탄불이 유일하다.

  이스탄불을 거닐다가 (로마)를 만나면 절로 감탄이 터져나오고 거부할 수 없는 어떤 벅찬 감동에 사로잡히게 된다.  아무래도 나는 '로마군대'의 열렬한 팬이지 싶다.  그리스를 만나면 왠지 숙연해지고 겸손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뭐니뭐니 해도 이스탄불에서 가장 반갑고 사랑스러운 것은 (이슬람 사람들의 생활문화)이다.  그래서 나는 이스탄불이 좋다.

  굳이 문화재나 역사가 아니래도.........  나는 이 사람들(터키인)의 틈속에서 함께 먹고 마시고 떠들고 싸돌아다니는 지극히 일상적인 이 시간들을 한없이 좋아한다.  터키 이슬람은 아마도 이슬람권에서 가장 문호가 개방된,  여타의 이민족이나 타종교와의 사이에서 괴리가 가장 적은 민족이자 국가가 아닐까 싶다.  그들의 생활과 신앙활동은 보수적인 회교 전통주의에 입각한 이란이나 기타 아랍국가들과 상당히 다르다.  열려있고 개방적이다.  진정한 무슬림들의 생활을 보려면 이란이나 사우디나 예멘이나 요르단에 가보아야 하겠지만,  역사적으로 오랜세월 동서문명의 교착점에 위치하여 숱한 마찰과교류를 통하여 다소 변형된듯한(열려진) 터키만의 종교관이나 생활관은 나 같은 이방인에게 훨씬 다가가기 쉽고 친숙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이스탄불은 언제나 한없이 사랑스럽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박물관)에서 나와 광장에 섰다.

  잔뜩 찌프린 하늘에서는 여전히 겨울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다.

  고개를 돌려보면 저만치 '술탄 마호멧 자미(불루 모스크)' 저만치 서서 방금 소피아 성당에서 막 나온 여행자를 째려보고 있는것 같다.

  '하기야 소피아가 다가 아니야.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게끔 새롭게 만든것이 바로 나 라고.  이스탄불에선 내가 최고라고.'

  마치 나에게 따지고 드는듯한 불루 모스크의 시선을 지금 당장은 외면하기로 했다.

  왜냐면.......  거대한 유적이나 박물관을 구경한다는 것이  그리 만만히기만 하거나 호락호락한 일이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방금 소피아 성당을 막 구경하고 나온 처지에,  곧바로 다시 맞은편의 불루 모스크에 도전한다는것이........  비는 내리고........  소피아 대성당과는 다르게 무료 입장이 허락되는 모스크 관람이기에  길게 늘어선 입장객 행렬을 생각하자면........

  오늘은  여건이 허락되는 만큼 그냥  빗속을 쏘다니며  이스탄불의 이곳저곳을 맛보기로.........


  술탄 마호멧 자미의 담벼락을 따라 언덕 아래에 늘어선 '아라스타 바자르(Arasta Bazaar)'로 우선 발걸음을 옮겨본다.

  이슬람은 거점이 마련되면 우선 사원(자미)을 지었고,  그 사원의 앞에는 항상 사람들이 모여들 수 있게 광장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 광장의 한 켠으로 항상 시장을 만들었다.  교통이 극도로 불편했던 시절에  하루 혹은 사나흘씩 걸려서 도심의 커다란 자미를 찾는 사람들은 광장에 여장을 풀고 말이나 낙타를 매어놓고 천막에서 머물렀다.  사원에서 기도하고 집으로 돌아갈 때는 인근의 시장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조달해왔던 것이다.  공생이자 공존이었다.  아울러 이런 커다란 사원 옆에 조성된 시장은 그 수익금으로  사원의 운영비를 충당했다.  아라스타 바자르는 바로 불루 모스크의 경비 조달을 위해 사원에서 조성 운영한 시장이었다.  불룰 모스크가 너무도 유명해 지니까 이곳에 수많은 여행자들이 몰려들었다.  결과적으로 물가가 마구마구 올라갔다.  이곳을 이용하는 현지인들은 거의 없다고 한다.  거의가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기념품점 시장이 되었다.

  하여........  우리는 스치듯 바람결처럼 이곳을 지나쳐갔다.






























                                                                                                                   ***  술탄 마호멧 광장과 히포드로모스(대전차 경기장)








                                                                                      ***  동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천도를 기념하여 세운 기념탑(쳄벨리타쉬)




                                                                                                                   *** 오스만 제국 부의 상징 '카팔르 차르쉬(그랜드 바자르)'

























                                                                                                     *** 이스탄불 대학 영내에 있는 '베야줏 타워(그랜드 바자르 화재 감시탑)'


                                                                                                                     *** 이스탄불 대학교 정문 (콘스탄티누스 개선문)



















  오스만의 옛 정취가 가득한 올드시티 골목길을 걷는다.

  하염없이 내리는 비가 낯선 이국땅에서의  분위기와 참으로 절묘하게 어루러진다.

  이런 날씨에 쿰카프 해산물 시장을 찾아가기에는 좀 무리겠다 싶어서 발걸음을 베야줏으로 옮겨본다.

  하긴  매번 다른 느낌으로 다가오지만  이 골목길이 처음 방문도 아니고,  여섯번째 이스탄불 방문이니 적어도 이미 여섯번 이상은 다녀갔지 싶다.  하여 서둘러 올드 시티를 가로지르는 트램 길을 건넌다.  마침 빨간 트램이 양쪽에서 교차하면서 지나쳐간다.  지난번이나 지지난번의 방문때 보았던 트램의 디자인이 많이 바뀐 모습들이다.  호날두(축구선수)가 그려져있던 파란 트램도 자취를 감추었고,  엘란트라 라는 명칭으로 터키에서 판매되는 현대 소형 세단의 광고판이 그려진 트램 디자인도 사라져 이젠 보이질 않는다.  이스탄불의 올드시티를 가로질러 다니는 트램은 역시 빨간색이 제격인듯 보인다

  베야줏 자미를 지나면 '쳄벨리타쉬(Cemberlitas)'가 아주 심하게 훼손된 모습으로 여행자를 맞는다.

  동로마의 수도를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면서 세운 기념탑이다.

  처음에는 57m의 탑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조각상이 올려졌었다고 하는데,   재난으로 조각상이 쓰러져 부서졌고 그후에는 기독교 십자가를 세웠으나  오스만 제국의 점령 이후에 십자가도 내려졌다.  거듭된 이 지역의 화재와 부식으로 급격하게 붕괴되기 시작하여 지금은 약 34m 정도의 기둥부분만 남아 철판으로 감싸고 쇠사슬로 동여매 보존에 힘쓰고 있다.  하여 붙여진 이름인 '쳄벨리타쉬'는 (감사여 있는 돌)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탑의 가치가 그저 무너지다가 만 돌기둥의 잔해에 그치지는 않는다.

  이 돌기둥의 감추어진 의미는,  로마 이후에 지중해를 중심으로 소아시아 지역까지 명실상부하게 세상을 지배하던 비잔틴 제국의 수도가 콘스탄티노플이었으며,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새로운 로마'라는 의미로 (Nova Roma)라고 불렀다.  그 새로운 로마제국을 통치하는 원로원을 비롯한 공공기관들이 빼곡히 들어서서 세상을 다스리던 심장부가 있던 곳이다.  여기 이 베야줏 광장의 북쪽으론 개선문(현 이스탄불 대학 정문)이 있었고,  남쪽으로 히포드로모스(대전차 경기장)와 로마 신전과 궁전이 세워져 있었다.  이제 원형은 모두 흔적조차 모두 사라지고 없지만  이탈리아의 (포로 로마노)를 상상해 본다면 쉽게 이해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쳄벨리타쉬에서 몇걸음만 옮기면 이스탄불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이 꼭 들려가는........  특히 한국 여행자들에게 절대적인 명소로 인기있는 '카팔르 차르쉬(그랜드 바자르)'가 있다.  '지붕이 덮인 시장' 이라는 의미의 카팔르 차르쉬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메메트 2세의 명으로 비잔틴 군대의 마굿간이 있던 자리에 세운 이스탄불 최대이자 터키를 대표하는 시장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하나의 작은 도시를 방불케 한다.  80여개의 골목이 서로 얽혀있고 5.000여개의 상점이 들어서 있으며,  인근으로도 에워싸듯이 또 하나의 거대한 위성 시장이 형성되어 있는 곳이다.

  금은 보석에서 시작해 가죽제품과 카펫, 도자기 등등 터키에서 생산되는 거의 모든 물품들이 거래되고 있다.  과거에는 동방에서 들어 온 향신료까지 왕성하게 거래가 이루어지던 그야말로 이슬람 제국 최고이자 최대의 국제 무역이 이루어지던 시장이었던 것이다.

  그랜드 바자르의 외부 골목을 사이에 두고 오랜 역사를 간직한 (고서적 시장)이 위치해 있지만........  세월따라 시류따라 유행을 따르다보니 그저 겨우 명맥만 이어가고 있을 뿐.......  내가 기대하고 생각했던 '15 세기의 역사'를 찾을 수 있던 고색창연한 옛 '고서적 시장'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게되었다.

  이곳에 먼 옛날 실재했전  초기 고서적 시장이야말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 적지않게 기여했을 수 있었을것이다.

  아울러,  여기 이 '카팔르 타르쉬(그랜드 바자르)'는 과거 오스만 제국의 물산이 풍부하고 부유했던 시절을 상징하는 커다란 시장일 뿐만이 아니라,  인류 역사에서 대변화와 대변혁의 과정을 그대로 증명해 보여주는 산역사의 현장이기도 하다.

  동양과 서양의 사이에 실크로드라는 문명의 통로가 생겨났다.

  중국의 도자기와 비단과 인도 지방의 향신료가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동양에서 들어온 대부분의 물자는 실크로드를 지나 메소포타미아 평원을 가로지르거나 흑해 연안에서 보스포러스 해를 통해 거의 전량이 콘스탄티노플로 밀려 들어왔다.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 위스큐다르나 카드쿄이에 집산된 동방의 귀한 물자는 보스포러스 해를 건너 카라쿄이나 에미노뉴의 국제 무역상들을 통해 유럽의 각지역으로 팔려 나갔다.  4차 십자군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고 베네치아의 지배가 이루어졌던 시절에는 에미노뉴 지역을 차지한 베네치아 상당에 의해서 지중해 상권이 운영되었다.  57년 만에 비잔틴 제국이 수복되고 제노바 상당이 이스탄불의 실제 지배자가 되자 카라쿄이 지역(갈라타 타워 인근 항구지역)이 세계 국제무역의 중심으로 약 200년간 지속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오스만 제국의 메메트 2세는 카라쿄이의 제노바 상단이 지배하던 모든 무역시설을 철저하게 파괴해 버렸다.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하는 동양과 서양의 지중해 무역상권을 완전하게 해체시켜버리고 만 것이다.  동시에 이제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0로 들어오는 동양의 귀한 물자는 오직 이슬람 세력권에서만 쓰여지게 되었던 것이다.  그 방편으로 이스탄불 중심지에 새로운 이슬람 제국만의 국제 무역 거점으로  그랜드 바자르가 생겨난 것이다.  그리고  아주 철저하게 이슬람을 벗어난 교역을 통제하였다.

  유럽(기독교 세력)의 생활은 급격하게 피폐해 지기 시작했다.  이미 그만큼 동양의 문물과 물자가 유럽인들의 화려하고 사치스럽고 향락적인 생활에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던 것이었으며,  하루아침에 그 모든 영화의 물자 공급원이 철저하게 차단된 것이다.

  온 유럽은 패닉 상태에 빠져들고 말았다.

  향신료와 비단을 비롯한 동양의 귀한 물자가 오스만 제국의 차단으로  모든 공급이 끊겨버렸다.

  중앙아시아 지역의 험준한 산악지역과 사막지역을 뚫고 지극히 소규모의 향신료와 비단이 겨우  코카서스를 지나 발칸반도를 통하여 베네치아로 들어왔다.  워낙 멀고 험준한 교통로였는지라  물량은 절대적으로 부족하였고,  그만큼 가격은 천정부지로 치솟아 올랐다.  금덩어리를 싸들고 가서 한웅큼의 향신료와 겨우 바꿀 수 있을 정도였다.

  불어나는 수요와 치솟는 물가 폭등은........  결국 몇몇 사람들의 모험심와 용기에 불을 붙였다.

  그들은 오스만에 의하여 단절된 지중해 상권을 포기하고  새로운 탐험의 길로 나서기 시작했다.  그 시발점은 서유럽의 끝자락  포루투갈과 스페인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대항해 시대'라는 새로운 역사의 이정표를 세우게 되는 것이다.

  그 대변혁의 시대흐름을 나타내는 이정표에 바로 '그랜드 바자르'가 놓여있는 것이다.









  '여보야.  그리고 태리 할머니야.  여기는 이스~~~~우 라에~~~~~엘이 아니고,  이스타안 부울 이여.  거긴 '통곡의 벽'이 아니라니깐?'

  앞서서 씩식하게 걸어가던 챠밍여사가 느닷없이 아주아주 거대한 성벽에 머리를 찧는 시늉을 하고있다.

  갑자기 성심(聖心)이 작동을 해서 역사속으로 사라진 비잔틴 사람들을 위해 통곡의 기도라도 올리려는 씨츄에이션인가?

  내 딴엔 그렇게 조금은 거룩하게 나름 상상어린 추측을 해보는데.......  정작 툭 던지듯 들려오는 탄성소리.........

  '패키지 여행이 딱 좋은 한 가지는 말야.........  기가막히게 때가되면 밥을 챙겨 주거든?  전에 언니들이랑 치앙마이 같을 때만 해도.........'

  '난 학교다닐 때의 수학여행 빼고는 패키지를 못다녀본 소시민이라서 말이야.  끼니를 거르는 것은 늘 상 있는 일이라서......  진즉이 말씀을 하시지?'

  결론은 배가 고파서 더는 못가겠다는 엄포성 포고문이었다.

  헐.

  '그러기에 그랜드 바자르에서 군것질 좀 하지니깐...........'

  '내가 아침에 말했지?  제대로 된 터키 음식을 먹어보고 싶다고.  이거든 저거든 어차피 케밥이겠지만  터키 음식 전문점 같은 레스토랑에서 제대로 된 케밥이던 뭐던 먹어보고 싶다고?  오늘은 먹여 준다며?  새벽 같이 나와서 소피아 성당 둘러보고 또 한참을 죽어라 이골목 저골목을 얼마나 돌아다니게 했느냔 말이야?  뭐 수산물 시장 카페 간다더니 비가와서 안되겠다고 하고..........  하이고 야.  파업이야  파업.  자유여행 파업이야.'

  '사 준다니까?  아무렴 내가 태리할머니씩 되는 분한테  제대로 된 터키음식 한번 못 사드리겠냐?'  하면서 부리나케 머리를 굴려본다.  당장 어쩐다?

  '그래.  사준다고 했으니까 사주긴 하겠지.  다만.......  지금 당장 배가 몹시 고프다는 현실적 문제에 봉착했다는 사실을 아느냐고?'

  이럴 땐..........  내가 누군가?  임기 웅변의 대가 아닌가?  챠밍여사 말로는 '잔머리의 마왕'이 아니겠는가?

  '내가 어떻게 당신 마음을 모르겠느냐고?  알지.  암 다 알고도 남지. 그래서 지금 그리로 가는 중이잖아?  하이고.......  3분이면 갈 것을......  그새를 못참아서 나를 불신하고 힐책을 하냐?  이거야 정말......  슬 슬 기분이 엄청 나빠질려고 하네?'

  '정말이야?  우리가 지금 밥먹으러 가는 길이었다고?  정말이지?'

  '당신이 머리를 쳐 박는 이 담벼락이 이스탄불 대학교 담장이야.  이 언덕길을 조금만 올라가면 맞은편이 (슬레마니에 자미)라고.  오스만 터키 최고의 전성기를 이끈 슬레마니예 대제가 만들었고 묻혀있는 사원이지.  이스탄불에서 가장 높은곳에 위치한 가장 웅장한 복합건물 사원이지.  사원이기도 했고,  수도원이기도 했고,  학교와 도서관과 기숙사에 빈민구제소까지 갖춘   어마어마한 크기의 복합건물 단지라 하지. 무상으로 빈민들에게 급식을 나누어주던 장소(이마렛)를 레스토랑과 카페촌으로 변화시켜서 지금 여행자들이 즐겨찾는 명소가 되었다니까?'

  '그럼 우리가 지금 거기로 점심 먹으로 가는거야?'

  '아니?'

  '뭐야 그럼?  다 뻥이야?'

  '사원 정원 가운데에 한층을 아래로 내려가는 계단아래 사각형의 안뜰이 있고 야외테이블이 가득한 작은 카페구역이 있는데 툴립정원이라 부르지.  여자 화장실이 그 옆에 있어.  그런데 거기엔 커피와 차를 주로 팔아.  간단한 토스트나 햄버거 종류하고.......  사원 건너편 부속 건물의 분수가 있는 커다란 정원에 오스만 왕실의 정통 레시피를 갖춘 아주 고급 레스토랑이 있는데.......  당연히 좀 비싸지.  그러다보니 현지인들을 위해 부속 건물의 밖으로 건물을 내고 테라스와 야외테이블을 만들어 놓고 상당히 운치있는 새로운 레스토랑촌을 만들었는데........  이스탄불을 찾는 여행자들의 맛집 명소가 되자  이곳 역시 다른곳에 비하자면 가격대가 좀 쎄지.  하지만 충분히 그럴 가치가 있다고.......  나름 이스탄불 분위기가 제대로.......  슬레마니에 자미를 건너다 보면서.........'

  '그럼 거기 가는거야?  비싸다면서...........?'

  '어험.  제 아무리 비싸기로서니 내가 태리할머니에게 그깟.............'


  그래서 갔다.
  문제는 메뉴판이 우리가 알아서 해석하기엔 좀 무리가 따르는 정도로 만들어져 있고,  주변을 둘러보면서 현지인들과 여행자들이 먹고있는 음식을 아무리 살펴보아도.......  가지수는 다 제각각인데........  쉽게 구분이 되질 않는다.  웨이터에게 오늘의 추전 요리도 물어보고,  옆사람에게 조언도 구해보고........  터키 음식이라는게 어차피 케밥으로 시작해서 케밥으로 끝나는지라........  어찌어찌 주문을 했는데.......
  솔직히 잘 모르겠다.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맛도 아주 별로다.
  분위기만 그럴싸 했다.  가격은 다른곳 보다 훨씬 비싸면서 말이다.
  폭~~~~~ 싹~~~  망했다.



 







































  이스탄불의 갈라타 지역이나 보스포러스 해협에서 올드시티를 올려다보면 가장 높은곳에 가장 웅장하게 보이는  술레마니에 사원은 1557년에 완공된 오스만 제국 최고의 건축물로 꼽힌다.  메메트 2세 술탄에 의하여 비잔틴을 정복한 후에, 손자인 술레마니에 술탄은 비잔틴의 상징인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건물을 지으라 명령했다.  알라신의 오스만이 하나님의 비잔틴에 비해서 모든것이 월들하다는 것을 세상에 증명해 보이고 싶었다.  이것은 또한 위대한 자신의 업적을 후대에 자랑스럽게 남겨놓으려는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오스만 역사 최고의 건축가로 꼽히는 '미마르 시난'은 술탄을 위해서 이 같은 대역사를 이루어냈다.

  술메마니에 자미의 모든것은 하기야 소피아에서 나왔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이슬람 특유의 문화와 예술이 더하여 졌다.  미마르 시난은 하기야 소피아가 붕괴직전에 이른것을 보고 보수공사를 담당한 적이 있어서,  건축학상으로  하기야 소피아가 가지고 있는 높은 하중에 의한 붕괴위험에 미마르 시난 특유의 신기술로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하기야 소피아는 건설 된 이후로 이제가지 끊임없이 붕괴의 위험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술레마니에 사원의 경우는 한번의 화재와  2차 세계대전당시 무기고로 쓰이다가 폭격을 당한 외에는 현재까지도 완벽한 모습으로 건재하고 있다.

  이스탄불에 비잔틴을 대표하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기독교 식이라면,  이에 맞서는 진정한 오스만 건축물이라면 이곳 술레마니에 사원을 꼽을 수 있겠다.

  하지만.......

  오늘날 하기야 소피아를 맞대응하는 이슬람 건축으로는  소피아 대성당과 광장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술탄마호멧 사원(불루 모스크)'를 꼽는다.

  이즈닉에서 가져온 푸른 타일로 수를 놓듯이 꾸며진 웅장하고 화려하면서도 높은 문화 예술적 가치를 지닌 이 아름다운 사원은  사실  건축학적으로는 그렇게 썩 훌륭한 건물로 평가받지 못하고 있다.  술레마니에 사원 보다도 작고, 설계에 있어서도 다소 부조화를 가지고 있다고 본다.  더우기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 비하면 1천년 이상 후대의 건물이고,  술레마니에 사원에 견주어도 60년 정도 후대의 시대적 또는 건축학의 발전을 생각해 본다면.........  소피아 대성당이 비잔틴을 대표한다면........  진정한 오스만의 대표 건축은  술레마니에 모스크라 보는것이 더 타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다만 당장 눈 앞의 화려함이나 아름다움만을 생각해 본다면  불루 모스크를 꼽는다 해도 별 문제는 없을것으로 보인다.

  더우기,  이슬람 사람들에게 있어서  종교적인 사원의 권위는 미나렛(돔을 중심으로 설치된 첨탑)의 숫자로 서열을 정하곤 하는데,  이슬람 사원의 정형은 4개의 미나렛이 전부였다.  하여 미마르 시난은 술레마니예 사원에 4개의 첨탑을 완공했다.  하지만 1616년 오스만의 건축가 '마호멧트 아아'는 6개의 첨탑이 설치된 불루 모스크를 만들어 술탄에게 받쳤다.  파격을 넘어 신성모독의 경우에 해당되는 중대법죄였다.  예루살렘의 황금 모스크 처럼 눈부신 황금 사원을 만들라 명했는데  비슷한 언어 표현을 핑계로 6개의 미나렛을 설치했다는 전설이 이어진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발주자인  술탄마호멧 1세는 이 푸른 사원이 대단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건너편의 소피아 대성당에 견주어 전혀 손색이 없다고 판단했다.  하여 그는 지금 형태의 원형을 그대로 유지했다.

  이슬람의 절대 성지인 '메카의 카바 사원'만이 당시가지 유일하게 6개의 미나렛을 가지고 있었다.

  사방에서 불루 모스크의 6개의 첨탑을 신성 모독으로 규탄이 일어나자,  술탄은 자신의 기부금으로 메카의 카바 신전에 미나렛 하나를 더 세움으로써 이 사태를 마무리 지었다.  그때부터  사원의 서열은  미나렛의 갯수로 정해지기 시작했다.

  그 결과로,  미나렛 4개의 술레마니예 사원이나,  미나렛으로 보수 공사를 한 4개의 첨탑을 가닌 소피아 대성당 보다,  6개의 첨탑으로 중무장한  불루모스크가 훨씬.......  이슬람 사람들에게는 신성한 장소인 것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최고 전성기를 통치한 사람이 '술레마니에 대제'였고,  그를 오랜세월 보좌한 최고의 명재상이 '미마르 시난'이었다.  오스만 역사를 통털어 최고의 건축가로 추앙받고 있는 그가 바로 같은 사람이다.

  하지만 그는 오스만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아르메니아 출신의 그리스 정교회 사람이었다.(지난 여행기에서 다루었기에 생략하기로)

  시난에게  소피아 대성당은 교과서였고,  평생을 두고 극복하고 싶었던 경쟁 상대였다.

  그는 오스만의 영역에서만이 아니라  주군인 술레마니예 대제의 영토확장 전쟁터를 따라다니면서 수많은 걸작 건축물을 왕성하게 만들어 냈다.

  평생에 걸쳐서 94개의 이슬람 사원과 57개의 대학교를 지었고, 하맘. 수도원. 다리.수도교.신학교 들을 수없이 만들었다.  발칸 반도의 보스니아 헤르체코바에 있는  '모스타르 다리' 또한 그의 작품이다.

  그의 직위는 재상에 이르렀고 최고의 건축가였지만,  영원히 그의 신분은 (데브쉬르메)였다.  모시던 술탄을 위해서 술레마니예 사원을 짓고 그 안에 주군의 시신을 모셨지만,  죽어서 그는 결국  주군인 술레마니예 술탄의 영역에 들지 못하고 담장 밖 모서리에 겨우 둥지를 틀고 누웠다.

  그는 오스만 사람이 결코 될 수 없었다.  가슴아프고 눈물 겨운 인생사였다라고 할 밖에.......


  그러다 보니 술탄 마호멧 광장을 찾는 여행자들은 혹간,  최고의 비잔틴 건축물인 소피아 대성당을 능가하기 위하여 지어진 불루 모스크이기에 당연히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인 미마르 시난이 이를 지었으리라 생각하지만,  그것은 시난이 죽고 난 한참 후의 일이다.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도 하고  제자라고도 하는  '마호레트 아아'가 불루 모스크를 설계하고 만들었다.










































  길을 걷다보면 어디선가  '아잔(이슬람 기도시간을 알리는 코란 낭송 소리)'이 울려 퍼진다.

  처음 이슬람 문화권을 찾았을 때는 참으로 신기하기도 하고  낯설게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은 그저 담담하게 (기도 시간이구나) (나도 잠시 겸허함으로 묵상 기도라도 해야겠다) 아주 잠시라도 자신을 추스려보고  심신을 다독거리는 시간으로 자연스레 받아들이게 되었다.  그것은 여기가 이탈리아든지 스페인이든지 이스라엘이어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설혹 이란이면 어떻고 시리아면 어떻겠는가?  인간으로 잠시나마 본연의 자기자신을 추스르고 되돌아 본다는데 종교가 무슨 상관이겠으며,  교회든 자미든 절이든 무슨 상관이겠는가?  들려오는 아잔의 내용은 이러하다.


  Tanrı uludur
  신은 위대하다
  Şüphesiz bilirim ve bildiririm: Tanrı’dan başka yoktur tapacak
  의심없이 알고 증언하건대, 하느님 이외의 다른 기도할 대상은 없도다
  Şüphesiz bilirim, bildiririm: Tanrı’nın elçisidir Muhammed
  의심없이 알고 증언하건대, 무함메드는 하느님의 예언자로다
  Haydi namaza, haydi namaza
  예배하러 어서 오시라, 예배하러 어서 오시라
  Haydi felaha, haydi felaha
  성공하러 어서 오시라, 성공하러 어서 오시라
  Namaz uykudan hayırlıdır
  예배는 잠보다 더 유익한 것이니
  Tanrı uludur
  신은 위대하다
  Tanrı’dan başka yoktur tapacak
  하느님 이외의 다른 기도할 대상은 없도다


  코카서스 산자락의 허물어져 가는 작은 마을을 낡은 교회에서 울리던 새벽 종소리를 나는 결코 잊을 수가 없다.

  그 종소리와  저 아잔 소리는 똑같이 신과 인간 사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아니겠는가?

  골목 어귀에 있는 작은 사원(자미)에 기도하려는 사람이 넘쳐나면 저들은 저렇게 길에서라도 길게 늘어서서 기도의 사간을 갖는다.  하루에 다섯번이나........

  이슬람을 들여다보면.........  신에 대한 그들의 전통은 6백년 전이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불변이다.  그 전통은 성역이자 금기이다.  언제나 한결 같다.

  시대의 흐름과 변모하는 인간들의 편리를 위해 전통을 서서히 바꾸어가는 기독교도들과는 전혀 다른 태도들이다.  제도가 바뀌면 거기에 따라 인간의 생활 패턴이 바뀌고.......  어쩌면 신앙에 대한 태도나 생각도 편리한 쪽으로 바뀌지 않을까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다.  하지만 이슬람은 불변이다.

  나는 이슬람의 신앙 태도와 전통과 역사가 기독교 보다는 더 오래오래 이어갈거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신과 인간의 관계는 한쪽의 이해관계로 바뀌기 시작하면 결코 다시는 되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물질 문명이 팽배해 질수록 전통의 고수는  보다 소중하고 긴 생명력을 유지할 것만 같다.

  신을 찾아 나선  겸허함을 가진 인간의 모습이란.........  힌두인이든 불자이든 기독교인이든 이슬람이든 아님 유대인이든 모두가 같은 존재이다.

  모든 신은 평화와 사랑과 자비와 공존을 우리들에게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분명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자칭 돌팔이 기독교인)이지만.........  알라에게 기도하는 이슬람 사람들 곁에 머물러서는 나역시 저들처럼  알라 신에게 기도를 한다.

  '인간들을 궁휼히 여기시고 부디 우리 모두에게 사랑과 평화를 내려주소서.'



  이슬람은 유일신 알라를 믿는다.  이는 기독교의 하나님을 이슬람 방식으로 일컬음이다.

  그들 또한 여타의 기독교와 똑 같이 가브리엘을 비롯한 천사들을 믿고 칭송한다.

  또한 여러 예언자들을 믿고 따른다.(마호메트. 아므라함. 노아. 모세. 예수는 모두 같은 예언자이다)

  그들도 성경(구약과 신약과 시편)을 믿는다.  여기에 코란이 첨가되어 모두 거룩한 성경으로 받든다.

  또한 카다르(인간을 위해 신께서 예비하신 계획)이 반듯이 존재함을 믿는다.

  최후의 심판일은 꼭 다가 올 것이며,  그때 올바른 믿음의 사람들이 부활할 것임을 믿는다.



  종파의 교리를 파고 들어가고 따지고 들다보면 종파간의 이해나 결코 양보할 수 없는 맹점들이 드러나겠지만........  하나에 뿌리를 둔 자손들끼리 영원히 반목하고 질시하고 다툼과 살륙을 자행할 이유가 과연 무엇이겠는가?

  내가 저들을 이교도라 능멸하면,  당연히 저들에겐 내가 이교도인것을.........  우리가 저들을 테러리스트라고 지목하면,  저들은 우리를 오만한 침략자라고 지목한다.  신의 이름으로 자행된 인류 역사상 수많은 참사가 있었지만,  신이 관여하고 신이 직접 지시한 일은 단 한번도 없었다 라고 나는 확신한다.

  평화와 공존에 태클을 걸고,  더하여 꼭 신을 끌어들며 명분을 삼는 파렴치한 인간들이 있을 뿐이다.

  하여,  나는 여행중에 이슬람 사람들을 만나면 이렇게 먼저 인사를 건네곤 한다.

  '앗살람 알라이쿰(아랍어: السلام عليكم)'

  그러면 그들은 이내 환한 미소로 내게 화답한다.

  '알라이쿰 앗살람'

  이 얼마나 아름다눈 소통인가?

  '신의 평화가 당신에게'라고 인사를 건네니 '당신에게도 신의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이라고 답해주지 않은가?

  영어권에서 나누는 'God bless you'라는 인사말과 같은 뜻이지만,  나는 이 아랍어 표현이 훨씬 정감이 간다.


  신이 제시하는 평화라는 의미는 인간세계에서 '서로 사랑하라'는 의미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스탄불의 가장 높은 언덕에 세워진 술레미마니예 사원을 나와  그랜드 바자르의 건너편으로 내리막길을 내려서다보면 '에레바탄 저수조(지하 궁전)'으로 물을 끌어오던 수도교의 남아있는 유적들이 심심찮게 곳곳에서 눈에 띈다.  주택이나 상가 건물과 서로 기대고 변형되고 틀어진 형태로 남아 있으나,  일부 구간이 지금도 수도시설과 전기시절 설치에 그대로 사용되고 있다니 그저 놀라울 수 밖에........

  골목 어귀를 돌아나서 여기저기 들어서 있는 이슬람 사원들을 지나면 커다란 대로가 나오고 건너편 저만치에 이스탄불 시청이 모습을 드러낸다.  시청사의 앞에는 폭탄테러로 숨진 경찰 군인 공무원들의 사진이 걸려있는 추모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테러는 가장 잔혹한 범죄다.

  시청을 건너다 보는 공원 잔디밭에 여러개의 텐트가 설치되어 있고 수많은 현수막들이 널려있다.  국민의 95% 이상이 이슬람을 믿는 엄격한 회교국가이지만  다수의 부족과 종교적 분파와 지역적으로 세습되어 온 문제점들에다가 현대적 생활에서 오는 가치관과 사회적 현상들이 충돌하는 모습은 우리네 모습이랑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인다.  대다수 국민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 있다고 황보하는 현 대통령의 극우 정책에 저항하는 소수의 주장들이 여러분야에서 대립을 넘어 충돌하고 있다.  거기에다 터키 국경의 최남동쪽에서는 IS와 전투를 벌이고 있는  터키는 현재 전쟁중인 국가이다.

  조금 더 걷다보면 커다란 공원이 나오고  1453년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킨 터키인과 터키 역사에 있어서 불세출의 영웅일 '메메트 2세' 기념 동상이 서 있다.  말을 타고 하늘을 날고 있는 그는 분명 신과 인간의 사이에 있는 독보적인 용맹이 넘치는 위대한 군주의 모습이다.   이 기념비는 배경으로 어마어마한 석조 건축물을 두고 있다.

  이곳을 지배하고 처음 이스탄불을 도시로 건설하면서 로마의 군인들이 만든 '발렌스 수도교(로마 수도교)' 이다.

  발렌스 수도교는 로마 인근에소 흔하게 보여지는 수도교의 전형을 그대로 닮았다.  세고비아를 비롯해 유럽과 소아시아에 퍼져있는 수많은 수도교에 비해서 별반 아름다움은 느낄 수가 없다.  다만  그 장엄함에 절로 고개가 숙여질 뿐이다. 

  여행을 하면서 로마가도나 수도교를 보면 나는 항상  로마 군대의 용맹과 기술력과 창의력 그리고 불가능에 도전한 그들의 기상을 절실하게 느껴보곤 한다.

  그들은 인류 역사상 최고의 강력한 군대이면서 또한 병사 한명 한명이 모두 미래지향적인 과학자요 기술자들이었다.  시대가 필요로하는 최고의 엘리트요 만능 엔터테이너들이었다. 

  발렌스 수도교를 지나  안내 이정표를 잘 살피거나  주변을 둘러보면 어렵지 않게 '카리예 박물관(Kariye Muzesi)'을 발견할 수 있다.  지척에 있기때문이다.  소피아 대성당과 비슷한 시기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세워진 '코라 성당(Khora)'이었으나,  오스만의 점령 이후에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되다가 현대에 들어 복원공사를 마치고 지금은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1453년의 참혹한 콘스탄티노플 공방전과,  점령 후에 벌어진 약탈과 파괴 사태에서도,  테오도시우스 성 밖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직접적인 화마를 벗어난 비잔틴 시대의 아주 중요한 문화재산이다.  비잔틴 역사에 관심이 있거나 비잔틴 미술을 넘치도록 충분히 감상하고 싶은 사람이라면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이스탄불 최고의 명소라 하겠다.

  이미 앞 페이지의 여행기에서도 (코라 성당)에 대해서 약간이나마 설명을 한 적이 있었고,  또 코라 성당의 비잔틴 미술에 대해서 이야기를 꺼내자면 1회 분량을 뛰어넘고도 부족할 것 같아서.........  (코라 성당의 비잔틴 미술)은 아쉽지만 이번 여행기에서는 생략해야만 하겠다.  (르네상스 산책) 여행기를 모두 마친 후에 혹 기회가 된다면 (중세와 비잔틴)에 대해서 다시금 기회를 만들어 볼 생각이다.


  풍랑이 심해서 금각만(골든 혼) 안쪽으로는 페리 운행이 중단되었다.

  하여 시내버스를 타고 금각만 가장 깊은 안쪽에 있는 (에윱 술탄 자미) 광장에 내렸다.  챠밍여사에게 좀 색다른 이스탄불의 풍경을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멈추었던 빗방울이 다시 떨어지기 시작했다.  바람도 다시 시작된다.  발렌스 수도교를 지날때는 하늘이 파랗게 벗껴지는듯 싶었는데 말이다.

  싸늘한 한기를 몸소 느끼면서  곤돌라(작은 케이블카)에 올라탄다.  피에로 로티 언덕까지는 2~3분이면 금방 당도한다.

  누가 공동묘지 언덕이 아니랄까봐 그런것인지 오늘따라 더욱 음산하고 무엇인가 피폐해진 느낌에다가 사늘한 한기가 옷깃을 사정없이 파고들기 시작한다.

  비가 다시 시작된다.

  '피에로 로티 언덕'이라는 이름에 걸맞는............  정말.......  정말 꼭 그런 날씨다.


  피에로 로티는 좀 증세가 심한 염세주의자 였다.

  그런 그가 이스탄불에 머무는 동안에 이 장소를 무척 즐겨 찾았었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스탄불을 찾는 여행자들이 역사와 문화에서 벗어나 잠시 색다른 분위기와 경치에 젖어들기에 안성맞춤인 장소로 크게 각광받고 있다.

 

  오늘,  피에로 로티 언덕에서는  진한 염세주의의 냄새가 풍겨난다.  거기에 날씨까지 딱...........













































 



  19세기 유럽인들은 '오리엔탈 특급열차'로 대변되듯이 이스탄불에 대하여,  또는 오리엔탈(동양)에 대하여 상당한 호기심을 가졌다고 한다.  아울러 그 호기심은 다분히 낭만적인 것이었다.  하여 유럽의 부자나 지식인들이 이스탄불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중에 프랑스의 소설가 '피에로 로티'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흔히 그를 염세주의 소설가라고 지목하는데,  '염세주의'란 철학 세계나 인생을 다분히 불행하고 비참한 것으로 보며, 개혁이나 진보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보는 경향이나 태도를 가리킨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는 페시미즘(Pessimism)이라고도 하며  비관주의로 쓰여지기도 한다.

  세상은 거대한 악(惡)이 지배하고 있으며  나약한 인간은 이 거대한 굴레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고 말한다.  죽음을 통하여 육신에서 벗어난 영혼이 신에게 다가가 합일을 이룰때에만 최선에 다다르게 된다고 주장한다.  이는 신화상에 전해내려오는 고대 그리이스의 시인 오르페우스에 의해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러한 사상은 특절 밀교에 의해서 오늘에까지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로마시대의 '자살 예찬론' 등이 그 좋은 예라 하겠다.  A.쇼펜하우어가 바로 현대에 페시미즘을 추앙한 대표적 인물이라 하겠다.

  중세 말기에 유럽 사회 전체에는  이런 페시미즘이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

  세상은 온통 '선(善)과 악(惡)' '빛과 어두움'으로만 가득차 있다고 여겼다.  거기에서 선과 빛이 뜻하는 것이 바로 신(神)이었다.  인간은 언제나 악과 어둠에 갇혀있으면서 영원이 벗어날 수 없는 존재였다.  인간에겐  악과 어둠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선택도 방법도 영원히 허락되지 않았다.  선과 악,  그리고 빛과 어둠의 사이에 교회가 생겨났다.  교회는 이 절망적인 굴레를 인간들에게 더욱 강력하게 주입시키고 굴복하게 만들었다.  중세 암흑기 1천년 동안  교회의 지도자들은 선과 악, 빛과 어둠이라는 두 개의 실재()를 극단적으로 대립시키는 이원론적() 신앙을 체계화 제도화하여 세상의 모든 인간들을 굴복시키고자 했다.  신을 벗어난 모든것이 악이요 어둠이요 죄악이라고 설파하면서  교회의 지도자들은 절대적인 복종과 헌신만을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이성(理性)은 신성(神聖)의 최대 적이었다.

  생각하고 따지려 드는것은 곧바로 신성모독죄가 성립되었다.  인간은 오로지 교회가 가르치고 지시하는 바 대로 복종하고 따르면 먼훗날 신의 곁에 다가설 수 있는 특혜를 누리게 되는것이라고 가르쳤다.  교회는 결코 신(神)이 아니며 대리자일 뿐이라 말하면서도,  교회는 마치 신 위에 군림하고 있는것처럼 행세했다.

  인간은 좌절했다.  이 영원한 굴레에서 벗어날 방법이 전무했다.  신의 자비와 은총이 절대적으로 필요했으나........  신과 인간의 사이에는 교회가 차지하고 앉아서 많은것을 요구했다.  하여 유럽 사회의 배후에는 자살 예찬론자 같은 부류가 널리 퍼져나갔다.  이 지옥에서 벗어날 방법은 죽음이 유일했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교회는 '자살은 최고의 죄악이다'라고 못을 박았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죄인인 인간은 수명이 다하는 순간까지 오로지 교회에 복종하고 시키는대로 따르라는 존엄한 명령이었다.

  이런 와중에 지극히 일부의 유럽 지성인들이 새로운 생각을 품게 되었다.

  고대의 문헌을 탐구해 보니 고대 그리이스 인들이 가졌던 사상 중에는 오르페우스가 주장한 염세주의만이 전부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들은 고대 문헌을 뒤지고 또 뒤져서 마침내 플라톤과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텔레스를 만났고 탈레스나 피타쿠스 등의 사상에도 심취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 속에서 이성(理性)의 새로운 가치를 깨닫게 되었던 것이다.  신과 인간의 관계를 재정립 해 볼 필요성을 느끼기 시작했던 것이다.

  고대 그리이스 문화속에서는 분명 신과 인간이 조화롭게 서로 돕고 나누면서 더불어 어울려 살았던 것이다.

  왜 중세시대에는 신과 인간이 조화를 이루는 삶이 존재 할 수 없단 말인가?  교회가 가르치고 주장하는 모든것들은 정말로 신께서 허락하신 일이란 말인가?

  사람들은 점차 스스로를 돌아보게 되었다.  신과 인간의 존재에 대해서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기 시작하게 되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인 것이다.


  19세기를 살다가 떠난 피에로 로티는 충분히 르네상스를 알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끝내 페시미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왜 그랬을까?

  신은 무엇인가?  그리고 인간은 과연 어떤 존재인가?  로티도 그런 생각들을 했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르네상스를 탐구하다 보면 반듯이 그리이스 문화가 등장하게 된다.

  그리이스 문화를 들여다보게되면  필히 신학. 철학. 인문학 등의 단어를 쉽게 접하게 된다.

  신학(神學)이란 당연히 신(神)에 대한 학문이며 대단히 전문적인 분야라 할 수 있겠다.  나 역시 젊어서 한때 아주 심각하게 신학쪽으로의 학업에 대해서 생각해 본적이 있었다.  나머지 철학이나 인문학은 모두 인간에 대한 학문으로 인류학 내지는 인간학으로 불리기도 한다.  결국 사람에 대한 공부라는 뜻이다.  하지만 이 역시도 철학이니 인류니 인문이니 하는 단어가 들어가게 되면 괜히 머리가 갑자기 복잡해지기 시작하는 그 역시도 대단히 전문적인 분야라 하겠다.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수많은 분야중에서 전문적이지 않은 분야가 어디있으며,  또 따지고 들자면 머리아프지 않은 분야가 또 어디있겠는가?

  '인류학(Anthropology)'이란 말 그대로 '인간에 대해서 좀 더 알아보고자 하는 학문' 이다.  더도 덜도 말고 그저 인간이란 존재에 대해 관심을 갖는 분야다.  이보다 분명하고 간결한 대답이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데 여기에서 이를 좀 더 세분화 시켜서 파고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상황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한다.  인문. 사회과학으로 부터 시작해서 사람이 살아가는 주변의 모든 분야가 모두 인류학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철학 개론>의 첫 구절을 보면 '철학이란 과연 인간이란 무엇인가를 연구하는 학문'이라고 적혀있다.  그렇게 보자면 철학이나 인류학은 같은 분야라 하겠다.

  대학에 가보면 철학과는 인문대하가에 속하고,  인류학과는 사회과학대학에 속한다.  똑 같은 대상을 다ㅏ른 관점에서 보고 연구한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철학'에서는 '도대체 인간이란 무엇인가? 인간은 모두 이성과 감정을 가지고 있는데  도대체 그 이성이란 것이 무엇인가'가 주된 관심사이다.

  반면 '인류학'에서는 '인간의 행동' 관점에서 주로 연구한다.  하여 인류학을 행동과학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사람들은 왜 그렇게 살아갈까?'

  이 세상에 살아있는 모든 사람의 가치는 누구나 똑 같다.

  하지만 흔히 문화라고 하는, 그들이 태어나는 장소와 성장하면서 주어지는 공간과 조건, 경제적 뒷바침과 여러 합리적인 여건들은 제각기 모두 다르다.  하여 시간이 지난 후의 모든 사람의 가치는 절대 평가는 불가능할지 몰라도 사뭇 달라진다.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기여하는 조건(문명)의 정도차이에 따라 다른 가치로 드러나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문명(인간에게 필요한 여건을 마련해주는)은 분명 필요하지만.........  그 문명이 인간을 교만하고 교활하게 만들며,  스스로 그 인간가치의 평가기준을 심각하게 훼손시키기까지 한다.

  높은 문명속에 안주하며 남보다 고급의 많은 지식을 가진 인간은 우월하고 더 많이 행복한가?

  그렇다면 그 문명인의 한계는 어디까지인가?  혹 신의 영역까지를 바라는 것은 아닌가?

  무엇이 있어 그들의 의식을 또는 그들의 행동을 지배하는 것일까?


  다분히 그런 것들이었다.

  중세시대의 막바지에서........  새시대의 여명이 막 깨어나기 시작하는 즈음에 당대의 지식인들은 바로 이런 고민들을 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인간이란 어떤 존재인가?'

  '그럼 당장 나 부터........  나는 과연 누구인가?'

  르네상스는 이런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에서부터 시작되었다.

  현대인들이 등한시하고 미처 깨닫지 못한 채,  당면하고 있는 모든 사회적 문제와 초인류적 재앙에 과학적인 새로운 발견과 발전만이 해답이 아님을 자각하고 처음으로 되돌아가 다시 시작해야만 할 때,  비로소 찾게되는 가장 근원적인 해결책이 바로 '인간이란 존재 자체를 냉정하게 다시 되돌아보게 만드는 인류학'이라고 생각한다.

  우리는 모두 좀 더 냉정한 시선으로 스스로를,  우리를, 인간을 되돌아 보아야만 한다.

  앞으로 달려나가는 것만이 최선이 아니라는 것을 지금이라도 깨달아야만 한다.

  그것이 내가 이번에 (르네상스 산책)을 시작하게 된 이유이다.

  당장은 내게 소중한 한사람을 위해서........  한사람의 청중을 모시고 다니면서  (르네상스란 무엇인가?) (왜 지금 르네상스인가?)를 꼭 이야기해주고 싶어서이다.  아마도 이번 여행이 끝날쯤 되면........  우리는 다시금 한번쯤 '나를......'  '우리를......' '우리 나라를.........  그리고 세상을..........'  좀 더 이해하게 되고 사랑하게 되지 않을까?(혹,  안되면 어때?  노력은 했을테니까........  포기하지 않고 또 시도할 테니까 말이다)






  피에르 로티 언덕에서 공동묘지 사이로 난 길을 내려가다 보면 담벼락에 코란의 구절과 아랍의 좋은 문구들이 편액으로 많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이번 산책길에서 살펴보니 모두 철거되고 없었다. '왜 없앴지?'  가만히 생각해 보니  그때그대 잘 알아채지 못하여서 그렇지  여러분야에서 여러가지들이 끊임없이 변해가고 있는것을 느낄 수 있다.

  예윱 술탄 자미를 둘러보고(지난여행기 소개로 생략)  시내버스를 이용해 에미노뉴 선착장에서 내려  걸어서 숙소에 도착했다.

  그런데 '어쭈구리?'  비가 뚝 끊기더니 하늘이 반쯤 말짱하게 개이는것이 아닌가?

  이번 여행을 시작한 이후에 가장 좋은 날씨라 할만하다. 

  그런 상황이고 보니 이런 날씨와 상황을 이대로 숙소에 틀어박혀서 보낼 챠밍여사가 결코 아니다.

  어디든 더 돌아 볼 수 있다는 소리가 결코 허언이 아니다.  씽하고 되돌아서 갈라타 다리를 건너 언덕길을 올라간다.  정말정말 잘도 걷는다.  걷는것에 대해서는 통달을 해도 대통을 하신 걸음걸이다.  쏟아지는 폭우로 갈라타 타워에만 잠시 올라섰었을 뿐, 제대로 구경조차 못해본  이스틱랄 거리를 다시 돌아보고자  되돌아서 나선 발걸음이었다.

  오늘도 변함없이 앙증맞게 생긴 빨간 트램이 다가 온다.

  정겹고도 반가운 모습이다.

  어제 쏟아지는 폭우 속에서도 인파가 그리도 많았었는데  감쪽같이 언제그랬느냐 싶게 비가 그친 오늘 저녁 무렵이고보니 이스틱랄 거리에 인파가 넘쳐나지 않을수가 있겠는가?  언제나 이곳은 항상 초만원 사태다.

  이슬람 문화로 가득찬 이 복잡한 도심의 한복판에서 나는 챠밍여사에게 보여주고 싶은것이 있었다.  어제는 서둘러 숙소를 향하느라 그대로 지나쳤었다.

  이스틱랄 거리를 얼마쯤 걸었을 때 마침내 그곳에 나타났다.


  '성 안토니오 교회(St. ANTUAN Kilisemiz)'.

  흔히들 현지 여행안내자들은 '파도바의 성 안토니오 교회'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파도바'는 이탈리아의 지명을 가리키며,  성 안토니오는 포루투갈 리스본 출생으로 성 프란치스코회에 속한 수도사였다.  그가 사후에 이탈리아 파도바 교회에 뭍혀있기 때문에 그렇게 불리어 지고 있다.

  지금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낸 해거름녁의 교회에는 크리스마스 트리가 형형색색의 아름다운 빛을 발하고 있다.  지난날 우리나라에서 아주 흔하게 만날 수 있었던  크리스마스 직전의 풍경이 그대로 펼쳐져 있다.

  대한민국에서는 이제 용도폐기(?)된 '성탄절 축제 분위기'가 이역만리 타국의 한복판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더군다나 이 나라는 전체국민의 95% 이상이 이슬람교를 믿는 회교국가인 것이다.  회교 국가의 가장 번화가인 이스틱랄 거리 한가운데에 기독교 교회가 버젓이 존재하고,  버젓이 드러내놓고 이교도들의 종교와 신앙이랄 수 있는  크리스마스 기념 행사를 하고 있는 것이다.  커다란 감동이 사정없이 파고들어 온다.

  대한민국에서는 거의 사라진 추억의 풍경을 이스탄불에서 경험하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아뿔싸. 통재로다!'

  어제는 빗줄기속을 뛰다시피 지나치느라 살펴볼 수 없었던 교회 철문에 매달린 안내문을 이제서야 겨우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성탄 기념 크리스마스 캐럴 찬양 음악회) 안내문 이었다.   음악회 시간을 살펴보니  1919년 12월 29일 오후 3시 행사였다.

  그리고 지금 내가 이곳에 도착한 시간은 정확히........  2019년 12월 29일 오후 5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지금 분주하게 교회를 나서고 있는 인파는 성탄절 기념 음악회에 참석했다가 마치고 돌아가는 사람들이었다.  어찌 안타깝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어제 빗줄기가 조금만 적었더라면.......  아니면 오늘 스케줄이 조금만 달라서 조금만 더 일찍 이곳에 올 수 있었더라면.........  회교국가 이스탄불의 한복판에서 들려오는 생생한 크리스마스 캐럴을 들을 수 있었을 텐데.......   그리스 정교회의 성탄절은 새해 1월 7일이다.

  (혹, 26일에 떠나오면서  크리스마스를 잃어버린 대한민국의 기독교를 너무 험하게 힐난했던 때문은 아닐까?)


 

    












































  이스탄불 베이올루 지구 이스틱랄 애비뉴 거리 175번지에 위치한 (성 안토니오 교회)는 13세기 초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수도회에 의하여  제노아 상단이 차지하고 통치하던 갈라타 성 인근에 처음 세워졌다.  정식 명칭은 '성 프란치스코 성당' 이었으나  당시의 시대상황을 그대로 반영한듯 '라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라고 불렀다. 

  프란치스코 수도회의 기원은  아시시의 성자 프란치스코에서 부터 기원하며,  이들은 거리의 전도사이자 설교자일뿐만 아니라  실제 탁발 수행을 감행하면서 복음적 삶을 우선하면서도 필요에 따라 스스로 생계를 해결하고,  항상 가난하거나 병든 자들의 곁에서 자선에 힘쓴 사람들이었다.  하여 실제로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도사들이 이 교회에 머물면서 선교와 빈민구제 사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비잔틴의 몰락과 함께 오스만 제국이 들어서면서 대부분의 교회들이 파괴되거나 심지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이스람 사원으로 개축되는 상황에서도 성 프란치스코 성당만은 예외로  이후로도 약 350년간 기독교 교회로 살아남았고 빈민구제 사업을 계속해 나갔다.  수차례 화재로 인하여 복원의 위기를 격었으며, 17세기 말옆 복원 후 이슬람 사원으로 개조되었으나  또다시 화재의 참화로 이슬람이 손을 떼게되자 현지의 기독교인들이 이탈리아 본토의 프란치스코회의 지원속에 다시 교회로 복원하면서,  이때부터 (성 안토니오 교회)로 부르기 시작했다.

  1904년 이스탄불의 현대화 정책으로 전철(트램)이 들어오면서 철길을 확장공사하기 위하여 교회를 철거하게 되었다.  하여 부득이 하게 교인들은 도로에서 조금 비켜난 언덕 아래의 지금 위치에 다시 새롭게 교회를 건축(윗쪽의 건설현장 사진)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회교국가의 한복판에서 끈질기게 기독교의 명맥을 이어내려온 한편의 대서사시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것만 같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지극히 일부의 회교도들이 테러를 자행하고 이교도에게 폭력을 서슴치 않고 있지만,  원리주의적 회교관에서 보자면  무슬림 대부분은 어떤 종교 보다도 타인을 배려하고 상생과 공존을 모색하는 열린 사고를 가지고 있다.  성 안토니 교회의 존립과 오늘 같은 행사가 바로 그 증거라고 말할 수 있다.

  이 교회를 10년 동안이나 실제 거주하면서 이끌고  동시에 터키 주재 바티칸 대사를 역임했으며,  훗날 교황의 자리에 까지 오른 분이 바로 '요한 23세 교황' 이다.  출입구 전면 오른편에 조각상의 모습이 바로 교황 요한 23세이다.

  특히,  성 안토니오는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자들의 수호성인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혹시.......  이스탄불 여행중에 무엇인가를 잃어버렸다면  경찰서나 보험회사에 연락하기 전에 우선 교회부터 달려가 성인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간절히 간구 기도를 해보면 어떨까?(믿거나 말거나)


  그런데 이를 어쩔소냐?

  난데없이 다시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어디서 나도 몰래 부정이 탄 것일까?

  어쩌겠는가?  갑자기 내리는 비는 일단 피하고 보는것이 상책이라고 소시적부터 배웠는것을.........  우리는  이스틱랄 거리의 스타벅스로 달아난다.





































  세상 어디를 가나 스타벅스는 늘 사람들로 붐빈다.

  대부분이 청춘들이다.  그곳에서는 젊음의 풋풋한 향기가 풍겨난다.  그런 정취가 우리는 마냥 좋다.

  다만.......  지명도에 비해서 커피맛은 솔직히.......  좀 그렇다.

  하지만........  적어도 이스탄불의 스타벅스는 나름 이쁘게 보아줄만 하다.  분위기나 시설도 그럴싸 하지만.......  무엇보다도 가격이 너무나 착하다.

  이스틱랄도  베벡도.......  이스탄불 스타벅스의 커피 가격은  아메리카노 한잔에 10 TL........ 그러니까 우리나라 화페로 2천원 정도 되는 셈이다.

  일전에 모 앙케이트 조사에서 우리나라 카페 커피값의 적정 수준이 2천오백원 정도를 소비자 입장에선 가장 합리적으로 인정되고 바라고 있다는 조사 결과를 읽은적이 있었다.  지금 생각해 보니 터키보다 우리 소득 수준과 물가를 감안하면 지극히 타당하고 합리적인 적정선이라는 생각이 든다.

  건물세가 비싸고 인건비 때문이라고?????????

  과연 글쎄올씨다.  그럼 터키의 건물세와 인건비가 우리나라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상황이란 말인가?  어디  탁 터놓고 주판알 한번 튕겨볼까?

  커피의 원가 + 시급 아르바이트 인건비  털어내 볼까?    하긴 부동산 업자와 프랜차이즈 회사의 잘못만도 아니겠지........  허영에 들뜬 반쯤 눈 먼 소비자들의 거품으로 가득한 생활방식이 돈을 싸다 바치는것도 근본 문제일 수 있으니까...........


  차라리 다 때려치우고 챠밍여사 꼬득여서 여행 끝나면 바로 '베벡의 벅스처럼'이나 차릴까?

  아담한 공간 하나 빌려서........

  여행 갤러리 처럼 꾸미고........

  고급스럽진 않아도 아득하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면.......

  커피값은 무조건 이스탄불 카페 수준을 고집한다면........


 

  기다려도 기다려도 시작된 비는 멈출 기미를 보이질 않는다.

  우산도 비옷도 없는.......  갑자기 처량하게 느껴지는 신세 사이로 싸늘함이 엄습해 온다.

  어쩔것이여?

  가야지......  터덜터덜 걸어서.......  이런 일이 어디 한 두번이여?  우리에겐 그저 약간 불편한 일상인것을..........

  내리는 빗속에 보랏빛 화장을 하고 선 '갈라타 타워'는 또 어찌나 아름다운지.......  아무리 급해도 잠시 멈춰서서 찰칵 찰칵.

  갈라타 다리를 건너 예니 자미를 지나 시르케지 역사를 지나쳐 마침내 숙소에 돌아 왔다.

  '이스탄불의 하늘아.  언제 한번 따로 보자. 이건 정말 너무하는거 아니니?'

 












     ---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따끈한 홍차 한잔 하시고 가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