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양사를 거론함에 있어서 비잔틴(Byzantine Empire) 빼놓고는 도무지 역사적 맥락을 이어나갈 수 없다. 바로 그 비잔틴을 이야기함에 있어서 결코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 빼어놓고는 생각할 수 없는것이 모두 같은 이유이다. 시대가 변하여 1453년 술탄 메흐메트 2세는 이곳을 점령하여 오스만 제국의 수도로 삼고 '이스탄불'(Istanbul)이라 새롭게 이름을 붙여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서양사 속에서 비잔틴과 콘스탄티노플을 거치고나서 그 다음으로 찾아 갈곳은 딱 한군데 밖에 없다. 바로 하기야소피아 이다. 영어식으로는 '하기야 소피아'라고 부르지만, 오스만식 표기는 어디까지나 '아야소피아(Ayasofya)'로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동방 정교회에서는 '말씀이신 성자 예수'를 나타내는 의미로 쓰인다. 흔히, '하기야 소피아는 비잔틴의 전부'라는 표현을 쓴다. 그만큼 비잔틴 역사와 미술사를 논함에 있어서 소피아 성당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의미일 뿐더러, 다른 한편으로는 소피아 성당을 제외하면 이렇다하게 비잔틴을 나타낼 수 있는 남아있는 역사나 유적이나 유물이 많이 부족하다는 뜻도 내포된다. 누가 뭐래도 '하기야 소피아'는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의 랜드 마크이다. 수많은 여행자들이 터키의 이스탄불을 찾는 이유는 상당히 여러가지가 있겠으나......... 만약에 딱 한가지만 골라서 볼 수 있다고 하면 상당수나....... 절대다수의 사람들은 그 한가지로 기꺼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선택할 것이다. 하지만........ 이 선택과 결정이 과연 탁월한 것이었을까? '하기야 소피아'가 정말로 이스탄불을....... 혹은 비잔틴을 대표하는 그런 의미있고 환상적인 여행지였을까? 그 대목에 있어서 나는 '글쎄올시다'를 부연 설명처럼 덧붙여 주고 싶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내려 이야기 해주고 싶다. '애초 여행이라는 것이 아는만큼만 보인다고 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하기야 소피아라고 나는 말하겠다.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공부하고, 또 더 알려고 하고, 시공을 초월하여 역사의 숨결을 느껴보고자 한다면 소피아 성당만큼 매력적인 곳이 세상에 그렇게 흔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없이 하도 유명하다니까 인증 샷이나 찍으려고 인솔자의 뒤만 졸졸 따라다닌다면....... 하기야 소피아는 그저 그런 커다란 돌덩이를 쌓아올려 만든 음산하고 공허한 높고 커다란 돌덩어리 공간에 불과할 뿐일 것이다. 얻을것도 느낄것도, 더 나아가 배울것이 하나도 없는 금방 식상하게되는 유명 관광지 일뿐이다.'
애초의 소피아 성당은 지금의 모습이 아니었다.
그리고 술탄 마호멧 광장에서 바라보는 소피아 성당의 모습도 진정한 앞모습이 아니다. 측면을 바라보며 정면처럼 생각되고 있는 것이다. 소피아의 정면 모습을 보기는 좀 난해하다. 입장을 하게되면 각종 기둥 잔해등 석조물들이 늘어서 있고, 표검사를 지나 왼편으로 마주치게되는 카페테리아가 있는 방향이 소피아 성당의 정면 방향이다. 시대의 변화속에 정문의 위치와 도로가 변하여 지금의 모습을 만들어 냈다.
'비잔틴이 하기야 소피아이고,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곧 비잔틴이다?'
그렇다면 지금 보여지는 상태로의 소피아 성당은 기독교 건축물일까? 아님 이슬람 사원일까? 이도저도 어려우면 그냥 '소피아 박물관'이라 치자.
성지순례로 소피아 성당을 찾는 기독교인들이나, 먼 길을 찾아 온 여행자들의 마음속에는 대부분 비잔틴의 옛영광과 향수를 찾는다. 과거의 영광과 눈부시게 빛나던 화려함을 모두 잃거나 빼앗겨 버린 기독교 성당을 그리운 시선으로 찾고자 애를 쓴다. 복원중인 군데군데의 모자이크 벽화를 보면서 그 그리움은은 간절한 열망으로 자연스레 승화하기 시작한다. 머지않은 훗날에 과거 번영하던 비잔틴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 모습으로 복원될것이고, 그 모습을 꼭 보고말리라는 염원을 가슴에 담게 된다.
하지만......... 비잔틴 멸망 후 600여년의 세월동안 이곳은 분명하게 이슬람 사원이었다. 벗겨진 일부의 모자이크를 제외하고는 지금 엄연히 이슬람 전통에 준한 사원의 모습을 하고 있다.
복원을 말하고....... 비잔틴 시대로의 회귀를 열망하지만.......... 그동안 이슬람이 가꾸고 설치한 지금의 모습도 위대한 유산이기도 하다는 뜻이다.
기독교 문화유산을 되찾기 위해 이슬람의 문화유산을 훼손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하고 정당한 일인가?
이 성당을 차지하게 된 이슬람 사람들은 이교도인 기독교의 종교적 유산을 폄하하거나 훼손하지 않았다. 그네들의 종교 교리에 따르고자 성화가 그려지고 모자이크가 설치된 벽면과 천장에 회칠을 해서 덧씌우고 그 위에 이슬람식 문양으로 장식을 했던 것이다. 어쩌면 숭고한 타종교에 대한 배려와 존중에서 였을 것이다. 그때 모두 파괴되었다면 아예 '복원'이라는 생각조차 갖을 수가 없게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 회덧칠 속에 성화와 모자이크 등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게되니까 이제와서 기독교 유산을 위해서 버젓이 존재하는 이슬람의 유산을 지우고 걷어내고 파괴하자?
왜 그런 일이 필요한것일까?
누구를 위해서? 무엇을 위해서?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이교도이고, 저쪽에서 보면 이쪽이 또 이교도이다.
이쪽의 신성이 저쪽에서 보면 우상이고, 저쪽의 신성이 또 이쪽에서 보자면 우상이 된다.
차라리 이쪽 저쪽 따지지 말고 아예 폭파시켜 없애버리면 될까?
'오로지 비잔틴만을 찾고 기독교 성지를 방문하고자 한다면 하기야 소피아 보다는 차라리 다른곳을 찾아라.' '사실 하기야 소피아에서 찾을 수 있는 비잔틴은 그렇게 많지 않다. 지극히 적은 편이다.' '동로마와 비잔틴의 역사를 찾고 오스만의 역사를 이해하면서 문명과 종교의 충돌을 넘어 화해하고 화합하는 미래를 지향하고자 한다면 그때는 죽어도 하기야 소피아에 꼭 가라.' '그리고........ 가기전엔 꼭 충분히 공부하라.'
12명의 신하를 거느린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행차와 시녀들을 거느린 테오도라 황후의 행렬을 그린 모자이크 벽화를 보게되면 곧바로 하기야소피아 성당과 비잔틴 문화를 떠올리게 될것이다. 풍부하고 선명한 위 사진의 모자이크가 비잔틴 미술인것은 맞지만, 하기야소피아 성당에 있는 미술품은 단 한점도 없다. 이것들은 모두 이탈리아의 북부도시 '라벤나'에 남아있는 비잔틴의 문화유산이다. 라벤나는 본토의 북쪽으로 치우쳐져 피렌체와 베네치아의 중간쯤에 위치한 항구도시이자 해군 기지로 발달한 도시였다. 인근에 이탈리아 최고의 미식도시 볼로냐와 이웃해 있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탈리아 남부의 섬 시칠리아를 거쳐도 한참을 거쳐 지중해를 건너 소아시아 지역이랄 수 있는 콘스탄티노플로 대표되던 비잔틴 문화가 이 멀고 먼 북쪽에 가장 화려하게 존재하게 된 것일까? 그러하기에 나는 이렇게 이야기 해주고 싶다. 현재 남아있는 '비잔틴 문화예술'을 제대로 만나보고 싶다면........ 터키 여행이 주요 일정이라면 하기야소피아를 방문해 비잔틴을 맛보기라도 해 보시라 권하겠다. 하지만 이탈리아 여행이 주요일정이라거나, 피렌체나 베네치아 아니면 볼로냐를 여행 일정에 넣고 있다면....... 기꺼이 라벤나를 방문해 보시라 적극 권장하겠다. 지상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비잔틴 문화예술의 진정한 보고는 바로 라벤나이기 때문이다. 고대에 라벤나는 주로 아드리아해로 진출하려는 민족이나 국가들의 해군 보급기지로 생겨났다. 로마가 동서로 나뉘자 라벤나는 한때 서로마 황제의 거주지이자 수도로 탈바꿈한다. 이때에 이르러 제대로 된 도시의 기능을 갖추게 되었다. 5세기 말엽 서로마를 멸망시킨 동고트족의 테오토리쿠스 왕은 이곳을 수도로 삼았는데 그에게는 한마디로 대단히 독특한 취미가 하나 있었다. 당시 비잔틴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지배아래 최고의 전성시대를 구가하고 있었는데(흔히 이 시기를 황금시대라 부른다) 테오토리쿠스는 콘스탄티노플을 너무도 흠모한 나머지 수도인 라벤나를 콘스탄티노플을 완전하게 닮은 도시로 변모시키기에 이르렀다. 작은 콘스탄티노플이 이탈리아의 북부도시에 새롭게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어렵게 완성한 테오토리쿠스의 독특한 취미는 그렇게 오래 지속되지 못한다. 몰락한 서로마 제국의 영토회복을 선언한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곧 이곳을 점령해 버렸기 때문이다. 참으로 신통하고 방통하다 못해 기특하고 감격할 노릇이었다. 신의 영광과 자신의 명예를 위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콘스탄티노플을 힘들게 건설해 놓은 황제 앞에, 나름 번듯하고 화려하고 깜찍하게 아름다운 짝퉁도시가 선물처럼 저절로 안겨들어왔기 때문이다. 매우 흡족해 한 유스티니아누수 황제는 이곳을 보다 더 장엄하고 화려한 '리틀 콘스탄티노플'로 만들것을 명령한다. (산 비탈레 교회) (갈라 플라치디아 영묘) (산타폴리나레 인 클라세 교회) ( 산타폴리나레 누오보 교회) ( 네오니아노 세례당)이 차례로 건설되었다. 비잔틴이 몰락한 이후 수많은 민족들이 이것을 거쳐가며 전쟁을 치루었지만, 어찌되었건 그들 모두가 기독교 세력들이었다. 하여 그 덕분에 파괴의 수난을 격지않고 이 도시의 문화재들은 고스란히 살아남아 오늘날 우리에게까지 무사히 전해지게 되었다. 지구상에 가장 많은.......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비잔틴의 문화예술이 이곳 라벤나에 고스란히 남아있다. 어찌되었건 비잔틴은........ 라벤나로........
그리하여 조금만 더 깊이있게 생각해 본다면 아마도.......... 하기야소피아 성당에는 저렇게 온전하고도 아름답게 남겨져있는 작품이 없다.
하기야소피아 성당에는 여기저기에 그저 약간씩의 어느정도 복원에 의해서 형상을 드러낸 부분적인 모자이크들이 있을 뿐이다. 어째서 그렇게 되었을까? 누가 기독교 성화들을 파괴했을까? 더 나아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이슬람이 성당의 벽면 성화에 회덧칠을 해서 그림을 가린것을 파괴라고 할 수 있을까? 어쩌면 어쩔수 없는 상황에서 선택한 나름의 보존방법은 아니었을까?
'성상파괴운동(Iconoclasm)'이 시작되었다.
조각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가 잘려나갔고 수많은 부조상에서 성인들의 얼굴이 깨지고 부숴지고 벽화를 훼손 시켰다.
하지만 이 모든 파행을 이교도(이슬람)이 저지른것이 결코 아니었다.
같은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모두 자행된 일이었다.
두 번에 걸쳐 일어난 이 사태는 기독교의 문화재는 물론이고 기독교인들의 정신세계에도 커다란 타격을 입히게 되었다.
단순히 교리의 차이에서 생겨난 기독교의 내분이라 하기에는 그 충격과 여파가 너무나 컸다.
오늘날 흔히들........ 대부분의 '기독교 유산을 파괴한 것은 이슬람' 이라는 인식이 상당히 팽배하게 어떤 확정적인 고정관념처럼 인식되고들 있다.
물론 (십자군 전쟁)에서 발단이된 종교의 대립과 동서문명의 충돌 여파로 적지않은 문호유산이 소실되거나 파괴된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굳이 종교문제라 하지 않아도........ 정치와 권력이 맞붙는 전쟁사에서는 인류 역사내내 약탈과 파괴가 뒤따랐듯이 필연적으로 생겨날 수 밖에 없었던 가슴아픈 결과물일 뿐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대결이 아니더라도......... 인류사의 모든 전쟁에서 반듯이 파생되었던 피할 수 없는 비극적인 결과라고나 할까?
하지만......... 진실은........ 더 상당수의 파괴와 소실은........ 기실은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의도적이고 철저하게 파괴되었다는 진실에 있다.
'성상파괴' 문제는 급기야 기독교를 분열시키기에 이른다.
이미 그전에 초대교회를 지나면서 기독교 내에서 새롭게 파생되는 교리를 정착시키는 문제에서 부터 심각한 대립의 연속이 시작되었다. '어느 교리가 하느님의 진실이고 정의이냐'를 논하기 이전에....... 이기면 부유하고 영화롭게 살 수 있고, 싸움에서 지면 교회에서 파문 당하고 유배를 당하고 심하면 화형에 처해지는 하나의 교회 내부적인 전쟁이었다. 늘 상 싸움은 벌어졌고, 이기느냐 지느냐만이 최대 관심사이자 문제였다. 입으로는 신성함과 정의를 주장하고 부르짖지만 내면에는 당장 내일 태양을 볼 수 있느냐 볼 수 없느냐의 문제였다.
7차에 걸친 공회의가 열리고 토론을 넘어 목숨을 건 대결이 벌어졌다. 한결 같이 모두가 (존엄한 신의 뜻)을 주장했다. 결과엔 늘 참혹한 처형과 살륙이 뒤따랐다. 혹여, 하늘 높은곳에 계신 분께서 내려다 보신다면......... 한마디로 저들끼리의 밥그릇 싸움으로 비춰졌을 것이다.(혹 오늘날은 아닐까?)
성상 파괴운동은 그 기독교 내부의 치열한 다툼과 전쟁 중에서 지극히 작은 한 사건이었을 뿐이다.
그리고 그 흔적들을 우리는 (하기야소피아 성당)에서 발견 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럼 이제........ 본격적으로 하기야소피아 성당과 비잔틴의 문화예술을 만나보기로 하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입구에는 언제나 길게 줄을 서서 표를 사려는 사람들로 붐빈다. 언제나 한결같은 풍경이다.
새벽부터 세찬 빗줄기는 언제였느냐는 듯이 다시 퍼붓기 지시작했고, 우리가 개관 시간에 앞서서 일찍 나섰던 까닭에 성당 입구에는 아주 적당한 정도의 사람들만이 모여 있었다.
여타의 유럽 관광지들 처럼 이스탄불에서의 관광명소 입장은 꽤나 성가시고 까따로왔다. 주변에 사방으로 널려있다시피 한 것이 실탄을 장전한 채로 중무장한 군인과 경찰들이 항상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삼엄한 경계태세를 유지하고 있다. 터키는 지금 분명하게 테러(IS)와의 전쟁을 벌이고 있는 전시국이다. 거기에다 유럽의 유명 관광지들 처럼 문화유산을 보호하기 위하여 짐검사까지 대단히 철저하게 벌이고 있다.
공항 검색대 처럼 모든 짐을 X-Ray 투시로 검사하고 여행자의 신체검사도 세밀하게 진행한다. 예외란 없다.
그렇게 검색대를 통과해서 안으로 들어가면 비로소 길게 줄을 서기시작하는 매표소가 나온다. 유럽의 여행지에 비하면 그나마 싼 편이라 하겠지만, 이스탄불에서 가장 비싼 요금의 입장료를 내고 표를 끊는다. 지하철 입구를 연상시키는 검표기에 표를 넣었다 빼고나면 이제 비로소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경냉 들어오게된 것이다.
자갈이 깔린 길을 따라 들어가다보면 왼편으로 사방에 부서진 기초석들과 기둥들이 널려있다. 그리이스의 신전 기둥 같아 보이기도 하고 로마 신전의 기초석을 빼다 놓은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들은 애초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던 본래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으로 부터 나온 부서지고 부러져서 쓸모없게된 건축자재들이다. 지금 우리라 찾아가는 하기야 소피아는 처음부터 지금의 모습이 아니라...... 적어도 2번의 소실을 겪은 후에 새롭게 건설된 3번째 교회라는 것을 사전에 확실하게 인지하고 이해할 수 있어야 하기야 소피아의 역사나 비잔틴 문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처음 만들어진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과거 모습을 찾아내기는 거의 불가능하다. 또한 2번째 성당도 마찬가지다. 상당수의 초석과 기단과 석재 기둥들이 남았고, 다만 니카 반란 폭동시의 기록등으로 미루어 미온적이나마 부분적인 예전 성당의 모습을 추측하고 있을 뿐이다.
분명한것은....... 지금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3번째로 지어진 건물이며,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에 의해서 새롭게 건설되었다는 사실뿐이다.
아눌러 지금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비잔틴 제국의 황금시대를 대변하는 기념비적인 건축일 뿐더러, 건축사에 있어서도 현존하는 가장 위대하고 중요한 작품중의 하나이다. 시대를 초월하는 위대한 창조물인 동시에 한없이 소중한 인류의 문화유산이다.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대성당의 입구가 보이고, 안으로 들어서면 거대한 통로처럼 상당히 넒은 공간이 여행자를 반겨준다.
건축학에서는 이런 공간을 '나르텍스(Narthex)'라고 부르는 성당의 현관이랄 수 있는 장소가 되겠다.
내부벽들은 대부분 이슬람의 전통이랄 수 있는 당초문양이 수려하게 그려져 있는데, 그 중에서 유독 본당으로 들어가는 중앙문(제국의 문) 위에 그려져있는 한 점의 성화가 이방인의 눈길을 강하게 잡아끈다. 수염이 덥수룩하게 자란 왕이 예수 앞에 엎드려 존경과 복종의 예를 받치고 있는 모자이크 벽화이다. 예수가 펼쳐든 두루마리에는 성경 귀절이 적혀 있는데 ( '너희에게 평화가 있기를.....' - 요한복음 20:19) ('나는 세상의 빛이다' - 요한복음 8:12)의 말씀이다. 예수의 왼편으로 기도하는 성모 마리아가 있고 우편으로 대천사가 이를 지켜보고 있다. 또한 엎드려 무엇인가를 청원하는 사람은 비잔틴의 황제 (레온 6세. 재위기간 886~912')로 보고있다.
세상을 모두 가진 대제국의 황제는 지금 무엇을 저토록 간절하게 갈구하고 있는 것일까?
아마도 이 작품은 시기적으로 보아 아마도 (성상파괴운동)이 막 끝나는 시점에서 제작된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이 현관에 지금 보여지는 모습이 초기의 소피아 성당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는 뜻이 된다. 애초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자못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시간을 되돌려 확인해 볼 수는 없겠지만............
성당의 입구를 들어서면 벌써 여기저기에서 '성당파괴 운동'이 할퀴고 지나간 흔적들이 여기저기에서 선명하게 드러나기 시작한다.
회반죽이 떨어져나가기 시작하는 곳에서 그 속살이 은근히 내비치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 이부분은 이슬람이 종교적 교리에 따라 우상숭배를 금지하기 위하여 기독교의 성화를 회칠로 덮어버린것이 아니다.
이 훼손은 같은 기독교인들인 성상파괴 주의자들에 의해서 조각상이 부서져 나가고, 벽화와 천장화가 심하게 훼손된 흔적들이다. 이 광풍이 몰려나간 뒤에 성상옹호론자들은 너무도 심하게 훼손된 벽화와 천장화를 온전하게 복원할 수가 없게되자, 그들 스스로 훼손된 부분을 회반죽으로 덮어서 가리고 그 위에 푸른 십자가나 식물 덩굴을 그려넣었던 것이다. 나름의 수선이자 복원이었던 것이다. 이 소피아 성당 초기에 자행된 훼손과 파괴행위마저 이슬람의 소행이라고 단정짓게된다면......... 그것은 역사의 오류를 범하는 일이 될것이다. 당시의 심각한 훼손과 파괴는 같은 기독교인들에 의해서 벌어졌다.
본당에 들어서면 두개의 대리석 항아리가 여행자를 반긴다.
페르가몬 지역의 밭에서 농부가 발견한 헬레니즘 시대의 항아리 세 개중에서 두 개가 전시되어 있다. 발견 당시 세 개의 항아리에는 은화가 가득차 있었다고 한다. 발견한 농부는 이슬람의 종교지도자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종교지도자는 그 신실한 믿음의 농부에게 보상으로 항아리 한 개를 주었고, 나머지 두 개를 가지고 와서 당시 이슬람 사원으로 쓰이던 이곳에 전시하게 되었다. 지금 이 아름다운 항아리는 텅 비어있다.
안에서 밖을 내다볼 때, 입구 왼쪽으로 청동판으로 감싼 기둥 하나가 보인다. 청동판의 가운데로 구멍이 하나 뚤려있고 그 주위는 황금색으로 변했을만큼 반질반질하게 닳아있다. 이 구멍에 엄지손가락을 넣고 한바퀴를 온전하게 돌리게되면 훗날 다시 이스탄불에 오게된다는 속설이 전해지고 있다. 하여 소피아 성당을 찾는 사람들은 단연코 길게 줄을 서서 이 성스러운 의식에 참여하게 되는데....... 실은 어느정도 요령이 필요하다. 하여 제대로 성공하는 사람은 그리 많지가 않다. 그런데 그날......... 챠밍여사가 완벽하게 단번에 성공을 해 보였다.(마지막이라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이스탄불에 또 가게되려나 보다)
본래 이 기둥은 비잔틴 시대에 성 그레고리우스 성인께서 신통한 치유의 기운을 불어넣으신 기둥으로 특히 눈병에 효험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탈리아의 성 루치아 성녀와 비슷한 경우라 생각하면 되겠다.
이제 좀 더 깊숙히 안으로 들어가면 본당이다.
107개나 되는 기둥들의 숲이 낯선 이방인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 끈다. 장엄함이 시야 가득 흘러 넘친다.
이곳에 있는 일부의 기둥들은 인근의 그리이스 로마의 신전에서 가져다 쓰기도 하였고, 또 일부는 페허가 된 앞전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 기둥중에서 온전한 것을 재활용하기도 하였지만, 거의 대부분은 새롭게 제작된 기둥들이다.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겨 천장을 올려다보면........ 비로소 왜 소피아 성당이 당시에 신기원을 이루었다고 했는지를 저절로 실감하게 된다.
시대와 한계를 초월한 비잔틴의 신세계가....... 그리고 천상과 지상......... 신과 인간 사이의 엄숙하고 성스러운 공간이 그곳에 존재하고 있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하였고 수도를 로마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콘스탄티우스 2세에 의해서 처음으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건축되었다. 당시에는 이 교회를 '메갈리 에클리시아(위대한 교회)'라 불렀다. 당시의 시대적인 건축 흐름으로 볼 때 당연히 교회는 전형적인 목조 지붕의 바실리카 양식이었을 것이라 추정하고 있다. 로마 시내의 '포로 로마노' 중에서 가장 웅장한 건물인 '콘스탄티누스의 바실리카'가 그 전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 건물은 약 40여년이 자나 비잔틴의 에우도키아 황후가 총대주교인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를 박해하고 추방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폭동으로 인해서 불에 타버리고 말았다.
메갈리 에클리시아의 소멸 뒤 11년이 지나 테오두시우스 2세 황제는 2번째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재건하게 된다.
이 역시 첫번째 교회와 비슷하게 바실리카 양식으로 지어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멀지않은 곳에 있는 이즈닉의 대성당(니케아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 그 원형모형에 가깝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된다. 이곳에서 기독교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니케아 종교회의'가 열렸으며, 교회의 이름 또한 같은 (하기야 소피아 성당)이다. 하지만 이 성당 역시, 비잔틴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만든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시절 히포드로모스(대전차 경기장)에서 벌어진 (니카으이 반란) 결과로 콘스탄티노플 도심이 불탔을 때 일어난 대화재로 인하여 완전하게 불타버리고 말았다. 그 두번째 성당의 주춧돌이나 기둥들이 현 성당의 정문 앞에 널려있는 석재들이다.
니카의 반란은 황후 테오도라가 놀라운 기지를 발휘해 진압되었다. 하지만 반란은 콘스탄티노플에 약탈과 방화로 인한 참혹한 결과를 낳게되었으며 ㅣ잔틴 역사에 일대 변혁을 예고했다.(니카의 반란만으로도 여행기 2회 분량은 채우고도 남음이 있기에...... 이번 기회에는 생략.....)
소피아 대성당이 불에 타 전소딘지 열흘만에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새로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건설을 천명한다. 성전이 불타버렸다는 백성들의 피폐해진 마음도 어루만져야 했고, 가라앉은 비잔틴의 분위기와 역량을 한 곳으로 모아서 새로운 것으로 집중시킬 필요를 통치자는 원했던 것이다. 전화위복이라는 말을 넌지시 기억하지 않았을까? 그는 이전의 소피아 성당을 능가하는........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역사적인 건축물을 완공해서 겉으로는 신에게 영광을 돌리면서, 내심으로는 역사에 이름으로 영원히 남겨질 위대한 자신의 업적을 꿈꾸었다. 현재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어쩌면 고난속에서 겨우 끄집어 낸 유스타니우스 황제의 야심에 소산물일지도 모르겠다. 물론 그 야심에 불을 지핀 사람은 테오도라 황후였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소피아 성당의 재건을 위해서 두 명의 그리이스 인에게 총공사의 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아이러니 하게도 두사람 모두 전문적인 건축가가 아니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과 무슨 배짱이었을까?
당시에도 이탈리아 본토인 로마와 비잔틴에는 능력이 입증된 훌륭한 건축가들이 많이 있었다.
하지만, 정작 황제에게서 소피아 대성당의 건축 총책임자로 임명된 사람은......... 물리학자인 밀레토스의 이시도로스(Isidoros)와 수학자인 트랄리스의 안시미오스(Anthemios)였다. 거기에다가 그동안의 영토 정복사업에서 보여주었듯이 황제는 성질이 대단히 급한 사람이었다. 황제는 공사 기일을 촉박하게 주었으면서도 수시로 재촉하고 닥달을 해댔다. 그 결과로........ 어찌되었던 532년에서 부터 537년 까지 채 6년도 걸리지 않은 상황에서 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장엄하고 웅대한 대성당이 마침내 완성되었다. 대부분의 자재는 공사현장 인근에서 자체제작해서 충당하였지만, 황제의 공사기간 단축에 대한 닥달이 극에 달하자 어쩔 수없이 다른 곳에서 이미 완성되어 있는 자재들을 일부 조달할 수 밖에 없게되었는데....... 이 과정에서 시리아 디오니소스 신전과 그리이스 델포이 신전의 기둥과 인류의 위대한 유산이자 당시 세계 7대 불가사의에 속하던 에페소의 아르테미스 신전을 허물고 그 기둥의 일부를 가져다 쓰는 등의 비극적인 일이 벌어지게 되었다.
여하튼, 537년 12월 27일에 하기아 소피아 대성당의 축성식이 원대하게 거행되었다.
대성당의 웅장함에 감동한 비잔틴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구약성경에 나오는 솔로몬 왕이 지은 성전을 능가했다고 스스로 생각해 '솔로몬이여, 내 그대를 이겼노라!'라고 외쳤다.(아르키메데스의 '유레카' 외침만큼이나 유명한 일화)
펜덴티브에 돔을 얹는 새로운 건축기술이 정확이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그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그 기술이 모뉴멘틀한 규모로 정식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은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이 처음이었다.
사각형의 기본건축물 위에 돔을 설치하자면 받침을 위하여 당연히 돔은 사각형 보다 커야만 한다. 그래야 올라앉을 수 있으니까. 그렇게 되면 사각형의 모서리 밖으로 삐져나가괴 되는 외접한 큰원의 짜투리를 펜덴티브라고 한다.
기어코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해내고야 말았다.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 평평하다.'
당시 기독교가 가지고 있었던 우주관이 현실로 완벽하게 지상에 펼쳐지게된 것이다.
하기야 소피아는 동양과 서양, 고거와 미래, 그리고 신의 세계와 인간의 세계를 하나의 공간에서 새로운 또 하나의 종합적인 단일체로 승화시킨다.
장엄하고도 웅장한 외관은 마치 거대한 동산처럼 땅 위에 튼튼하게 뿌리를 밖고 서서 층계에 의해서 56.1에 이르는 천상의 세계와 연결되어있다.
영원히 불가능일것만 같았던 로마 판테온의 신화를 뛰어넘는 것이었다.
돔의 크기는 판테온 보다 조금 작지만, 높이는 판테온 보다 12.3 미터나 더 높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판테온에서는 이룩하지 못했던 건물의 뚜껑을 덮음으로써 진정한 완성을 이루어 냈다는 점이다. 더욱이 잦은 화재로 인해 인화성이 좋고 가벼운 목재를 유독 싫어하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고집과 당시까지 로마의 콘크리트 설치 기술이 제대로 비잔틴에 전수되지 못하였던 이유로,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지붕까지도 모두 돌로 마무리하는 신기원을 이루어내고야 말았던 것이다.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우뚝서서 높이 솟아나고자 하는 건물과 돔의 설치는 인간의 영역이었다. 그리고 그 최고봉이자 정수가 바로 판테온이었다. 하지만 판테온은 지붕의 끝이 열려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져왔다. 그런데 마침내 인간은........ 돔의 뚜껑을 덮게 되었다.
본당의 중앙으로 발걸음을 옮겨보면, 이슬람 성자들의 이름을 아랍서체를 크게 써 놓은 원판들이 사방에 걸려 있다.
본래는 기독교 성당이었으나 1453년 이후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의 이슬람 사원이었다는 현실적인 기억을 확실하게 떠올려주기에 충분하다. 하지만 이런 종교적인 아픈 과거역사를 보듬어주려는 노력이었을까? 지금 이곳은 비잔틴 시대의 기독교 문화와 오스만 시대의 이슬람 문화가 적절히 묻어나는 어엿한 (박물관)이 아니겠는가.
55.6m 높이의 돔이 드러내는 장엄한 위용은 이내 엄숙함을 가득 담은 어떤 압도적인 기운으로 여행자의 가슴을 사정없이 내리누르기에 충분하다.
'여기가 돔의 한복판쯤 이겠지?' 하고 천장을 올려다보면서 생각했다면, 그 발걸음은 지금 틀림없이 본당의 한복판에 그려진 작은 원들이 둘러싸고 있는 커다란 둥근 원의 어딘가에 발길이 머물고 있다는 의미가 되겠다. 이 위대한 건축을 담당했던 사람들이 누가 그리이스인 아니랄까봐......... 그리이스인들은 참 '배꼽'을 좋아했나 보다. 그리고 또 배꼽은 왜 그렇게 많은지......... 그리이스인들은 아주 커다란 건축물을 만들때마다 그 중심에 배꼽을 꾸며 놓았다.
'옴파로스(세상의 중심)은 이곳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한복판에도 어김없이 놓여 있다. 그리이스 장인들의 싸인이라고나 할까?
그리고 술탄의 개인 기도실로 만들게 된 정자는 한참 후대인 18세기에 들어서 만든것이다.
정자의 뒷편으로는 이슬람식 설교단(밈바르)가 설치되어 있다.
그 왼쪽에 약간 한구석으로 치우친 듯한 구석에 키블라를 가리키는 미흐랍(메카 방향으로 난 문)이 만들어져 있다. 본래 대성당에 붙어있던 문이 있었던 자리였으나, 키블라와 방향이 정확히 일치하지 않아 살짝 옆으로 새롭게 문(미흐랍)을 만들어 낸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에서 키블라란 '이슬람 신자들이 기도하는 방향'을 뜻하며, 이슬람 신자들은 모두 성소인 '메카의 카바'를 향해 기도하고 예배를 드리는 오랜 전통을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이곳에는 놓쳐서는 안되는 소중한 모자이크화가 한점 모습을 감추고 있는데, 흔히들 '설교단 모자이크'라 부르기도 한다.
성모 마리아가 아기예수를 안고 있는 이 모자이크화는 6세기 경에 그려진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훗날 성상파괴운동 당시에 실제로는 파괴가 되었으나, 워낙 높은곳에 감춰진듯 위치해있다는 점 때문에 그리 심하게 훼손당하지 않았다. 9세기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기에 모든 비잔틴의 모자이크와 중에서 가장 오래된 소중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작품이다. 제작과정에서 워낙 금을 많이 사용한 탓도 있겠지만 창문을 통해서 들어오는 자연광에서 드러나는 찬연함은 가히 일품이자 압권이다.
본당의 북서쪽에는 2층으로 올라가는 통로가 있다.
하지만 윗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계단은 대성당의 어디에도 없다. 그저 약간의 경사가 있는 비탈길을 놓여져 있을 뿐이다. 계단을 걸어 올라가는것 보다야 다소 수월하다고 할수 있겠는데......... 대성당의 2층 높이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열심히 뺑뺑이를 돌아야만 한다.
이는 흡사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의 '히랄다 탑'을 연상 시킨다. 히랄다 탑도 정상으로 가는 길이 계단이 아닌 경사로로 되어있다. 술탄이 말을 타고 탑 위에 올라가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소피아 성당은 그 이유가 달랐다. 소피아 대성당의 2층은 주로 여성들의 공간이었다. 여인들과 노약자들과 아이들이 오르내리기에 수월하도록 계단이 아닌 경사로를 설치한 것이다.
이제 이 경사로가 끝이나면 소피아 대성당의 2층인 것이다.
앞서 말했던 바와 같이 대성당의 2층은 여자들의 공간이다. 당시까지의 시대에는 아직 여성의 지위가 사회적 뿐만이 아니라 교회 안에서도 직분은 물론 장소에까지 적지않게 구분 내지는 제한을 받았던 것이다. 여자와 아이들의 공간인 2층 테라스의 중간부분에 커다랗게 원이 그려져 있었는데 그곳이 바로 왕비가 예배를 드리던 장소이다. 이렇게 2층은 성직자나 통치자를 비롯한 남성들에게서 밀려난 공간이었지만, 놀랍게도 이곳이 대성당의 지성소는 물론 아래층까지를 모두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최고의 명당자리이다. 이곳이 아니고서는 진정한 대성당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껴볼 수가 없을것 같다.
한결 가까워진 돔의 천장과 지성소를 둘러보고나서 테라스의 남쪽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하얀 대리석 문이 가로막고 서 있다. '천국의 문' 혹은 '지옥의 문'이라고 알려진 문이다.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금단의 문'이라고 하는것이 훨씬 정확할 것이다.
황족과 주교들만 드나들 수 있는 아주 특별한 문이기 때문이다.
혹, 문의 안쪽으로 천국이 있어서 황족과 귀족들만 드나들면서 천국의 열매를 따먹고 부귀영화를 누려던 것일까? 신께서 왕족과 주교들에게만 어떤 특별한 은총을 하사해주시는 장소가 아니었을까? 어쩌면 그 안에서 황족과 귀족들만이 숨어서 국가나 교회의 중대사를 논함에 있어서 세속의 사람들이 결코 알아서는 안되는 비밀이 그만큼 많았다는 반증은 아닐까? 도대체 그 비밀들은 무엇이었을까? 신과 인간 사이에서 특별한 부류만 가질 수 있는 비밀은 무엇이었을까? 신의 존재에 대한 비밀? 글쎄다. 그것보다는 신을 빙자하거나 신을 속여가면서 쟁취하고 높이 쌓아올리고자 했던 세속적인 권세와 황금에 대한 비밀이 아니었을까? 그 비밀의 분량은 또 얼마나 되는 것일까?
조물주가 인류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주신 특별한 은총인 (시간의 고른 흐름) 덕분에 이제사.......... 왕족이나 주교도 아닌 신분의 처지로 나는 지금 저 성스러운 금단의 문을 통과해 안으로 들어간다.
헐!!!!!!!
방금 지나 온 문밖의 상황이나 현실과 별반 다른것이 눈에 띄지 않는다.
'뭐야 이건? 성역이라더니 별반 다른게 없잖아? 도대체 왜 가로막아야 했던거야?'
'찬국과 지옥의 문'을 지나 모서리를 돌다보면 우측의 벽에 덧칠을 했던 회벽을 걷어내면서 모습을 드러낸 모자이크 성화가 나타난다.
1/3 정도만 걷어낸 회벽칠 위로 드러난 황금빛의 모자이크화는 대단히 성스럽고 황홀하도록 아름답다. 나머지 2/3나 되는 여백을 모두 걷어내고나면 과연 어떤 모습에 어떤 느낌일까? 물론 그 옆으로 작은 액자속에, 이 회칠을 모두 벗겨냈을 경우의 복원도가 놓여있어서 충분히 추측은 가능하다. X-RAY 투시 촬영을 통해 복원 공사가 진행중인데......... 회칠을 벗겨낸다는 것이 그렇게 간단한 작업만은 아니라는것이 문제다. 회칠에 모자이크 조각이 부서지거나 묻어 나오거나 변색이 되면 안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마음속 한편으로는........... 완전하게 드러내지 않고있기에 아쉬움과 애정을 넘어 간절함과 절실함에 이 벽화를 더 착고 아끼게되는것이지, 모두 벗겨내 완성된 모습이 공개되면......... 완전한 모자이크화는 소피아 대성당 말고도 볼 수 있는곳이 많지 않은가.
복원?
그냥 이 정도에서 멈추어 찾아오는 여행자에게 어떤......... 여지를 남겨 두는것이 더 나아보이는게 솔직한 나의 심정이다.
'데이시스(deisis).
즉, '간청. 탄원'의 의미를 담고있는 모자이크 성화이다.
예수를 중심으로 오른쪽에는 세례 요한이, 그리고 왼쪽으로는 성모 마리아가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은 제4차 십자군의 성스럽지도 정의롭지도 못한 기독교 역사 최고의 파행으로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여, 동로마에서 이어져 온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고 자신들의 탐욕을 위한 라틴 왕국을 세워 약 57년간 지배와 약탈을 거친 후에, 비잔틴으이 후예들이 회복운동을 벌여 라틴 왕조를 몰아내고 다시 비잔틴을 되찾던 1261년 복귀한 비잔틴의 새로운 황제 미하일8세에 의해서 제작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미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은 여러차례의 수난으로 심각하게 훼손된 상태였다. 대성당의 수난사는 곧 비잔틴의 역사 그 자체였다.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천도와 함께 세워진 하기야 소피아 성당은 성난 시민들에 의해서 전소되었다.
새롭게 만들어진 대성당 또한 유스타니우스 황제초기에 니카의 반란과 함께 또다시 화재로 소멸되었다.
반란을 진압한 황제는 호재가 난지 10흘만에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교회를 지을것을 명했고, 서기 537년 바로 지금의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건설했다.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은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하고 가장 호화롭고 가장 큰 보물창고' 였다.
하지만.........
서기 730년, 레온3세에 의해 벌어진 '성상파괴 운동'은 하루아침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흉물스런 창고로 둔갑시켜 버렸다. 모든 조각상들은 산산히 부서졌고, 성화들은 불태워지거나 칼날 세례를 받거나 덕지덕지 회칠을 선사받아야만 했다. 787년 비잔틴의 이레네 여제가 주도한 2차 니케아 공회의 덕분에 광란의 성상파괴 운동이 멈추어 졌다. 하지만 50년 이상 몰아쳤던 성상파괴 운동의 결과는 참혹했다. 온전하게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
기독교인들은 신에 대한 속죄와 거듭남의 의미를 담아 부지런히 부지런히 다시 교회를 치장하는데 주력했다.
30여년이 지나 그럭저럭 과거의 상흔이 어느정도 지워졌나 싶었을 때, 비잔틴의 새로운 황제 레오5세는 제2차 성상파괴 운동을 명령한다. 이는 812년에 시작되어 비교적 짧은 기간인 약 2년 정도를 넘겼는데........ 그 피해는 1차 성상파괴 운동 못지 않았다.
하지만 비잔틴은 새롭게 거듭났다. 그리고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도 옛 영화를 모두 되찾았다. '세계 제1의 보물창고'란 명성도 되돌아 왔다.
그러던 차에 1204년 4월 9일 베네치아 상단의 군대를 필두로 4차 십자군 원정대가 느닷없이 콘스탄티노플에 들이 닥쳤다. 교황의 지시로 다시 되찾아 오라는 '예루살렘 탈환'은 안하고 말을 돌려 같은 기독교 형제국인 비잔틴의 황금을 노리고 불쑥 쳐들어 온 것이다. 비참하게 비잔틴은 몰락했다.
약탈을 넘어 살인과 방화가 벌어졌다. 콘스탄티노플은 회복 불능의 페허로 하루아침에 전락했다. 비잔틴의 대부분의 금은 보화와 재물은 베네치아 군대에 의하여 약탈 당했거나, 십자군 군대에 의해서 유럽 전역으로 장물로 팔려나갔다.
먼 훗날, 오스만 투르크의 침공으로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무너지고 콘스탄티노플은 함락되고 비잔틴이 완전하게 멸망하게되는 때에도 약탈과 방화는 전쟁의 필연적인 악순환 처럼 뒤따랐다. 그 때에 역사가들은 이렇게 적었다.
'그래도 이슬람의 약탈은 양반이었다. 이슬람의 약탈이 인간이 벌일 수 있는 극단의 약탈이었다면....... 베네치아 군이 벌인 약탈은 악마의 저주 같았다.'
그렇게 침략자 베네치이 군은 (엔리코 단돌로)의 지휘하에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송두리째 털어 갔다.
그리고 그날부터 대성당에 주둔 본부를 차리고 들어앉아서 장장 57년간 이곳을 약탈 병참기지로 사용했다.
비잔틴 문명을........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약탈하고 파괴한 주범은 결코 이교도인 이슬람이 아니었다. 훼손은 성상파괴 운동을 주도한 기독교인이자 동시에 비잔틴 사람의 손에 의해서 직접 자행되었고, 파괴는 역시 같은 기독교도인 베네치아 상단에 의해서 모든것이 자행되어 졌다. 엔리코 단돌로의 치밀한 계략과 서슴치 않는 만행으로 말이다.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파괴는 베네치아 산 마르코 성당의 건설에 크게 기여했고, 콘스탄티노플의 약탈과 파괴는 베네치아의 번영에 지대하게 공헌을 하게 되었다. 그 모든 행위는 거룩한 '신의 이름'과 '신께 영광을' 이라는 미명하에서 벌어졌다. 고귀하고도 성스러운 기독교 역사의 단편이었다.
할렐루야!
아멘!
베네치아가 기독교 신의 이름으로 자행한 성스러운 파행과 수난속에 57년만에 돌아온 미하일8세의 눈에 비친 콘스탄티노플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그가 곧바로 대성당으로 달려가 비잔틴의 수복을 알리고 신에게 감사 기도를 드리고자 하였을 때...... 그 앞에 드러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은 과연 어떤 모습이었을까?
미하일 8세가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가장 먼저 시급하게 벌인 사업이 바로 대성당의 복구였다.
이제사 겨우 돌아온 미약한 기반의 처지에서 그가 백성들의 마음을 한곳으로 모을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었기 때문이다. 대성당의 복구는 곧 비잔틴 제국이 지난날의 영광을 회복하고야 말겠다는 상징적인 의미를 담고 있었다.
그 대성당의 성스러운 복구 사업의 하일라이트가 바로 지금 여기에 있는 (데이시스) 였던 것이다.
기독교적 신앙심의 안정과 비잔틴 제국의 재건을 바라는 간절함과 신에게서 그 모든것을 허락 받고자 하는 복종과 겸허함이 담긴 성화이다.
'주여! 부디 저희들을 궁휼히 여기시고 자비를 베풀어 주소서...........'
'데이시스'의 바로 맞은편에 '엔리코 단돌로'의 텅 빈 무덤이 있다. 영화 (다빈치 코드) 시리즈라고 할 수 있는 (인페르노)에 등장하는 장소이다.
어떻게 단돌로가 죽은 후 이곳에 감히 어떻게 무덤을 쓰게 되었을까?
하필 '데이시스' 앞이었을까? 생전에 저지른 죄를 사해달라고 간청했음일까? 그렇다면 이곳에 뭍히게 되었으니 죄사함을 받았다는 의미일까?
보이지는 않지만...... 그 무덤이 텅 비어있다는 사실이....... 이곳의 모든 분위기를 조금은 무겁게...... 쓸쓸하게 만들고 있다.
부질없음 이어라.
모든것이 덧없음 이었더라..........
'저는 오랫동안 동방 기독교 신앙의 보루였던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에 대해서 생각해 왔습니다. 그것은 성지회복이라는 성스러운 사명을 띠고 떠났던 십자군이 같은 그리스도교 형제들을 습격하고 약탈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었습니다. 특히 그들이 라틴 교회에 속한 기독교인들이었기에 카톨릭 교회의 수장으로서 이같은 고통과 아픔을 격은 동방 정교회에게 진심으로 죄송한 마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8백년의 시간이 흘렀지만 1204년에 저질러진........ 어찌 그들의 고통과 분노를 잊을수가 있으며, 그 아픔을 함께 나누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로마 바티칸의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선종하시기 전인 2001년과 2004년, 두 차례에 걸쳐 엔리코 단돌로의 주도하에 베네치아 군대와 4차 십자군 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약탈하고 살륙과 방화를 저지른 기독교 역사의 뼈아픈 과거에 대해서 거듭 사과하고 용서를 구했다.
*** 공사중으로 장막에 가려진 엔리코 단돌로의 묘(지난 여행 사진)
좀 더 깊숙히 2층 지성소의 안쪽으로 들어가면 남쪽으로 난 커다란 창문으로 눈부시게 쏟아져 들어오는 빛을 볼 수 있으며, 바로 그 창문의 양쪽으로 두 개의 모자이크 작품을 만날 수 있다.
먼저 만나게 되는 오른쪽의 모자이크는 (콤네누스 황제 모자이크)라 불리는 작품으로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통털어 유일한 12세기 작품이다.
아기 예수를 안은 성모 마리아가 가운데 서 있고, 왼편으로 돈주머니를 들고 있는 '요하네스 2세 콤네누스 황제'가 서 있고 오른편으로는 봉납물품 명세를 적은 문서를 들고있는 '이리니 황후'가 서 있다. 얼핏 보면 이들이 전부인 것처럼 보이지만, 꺽여진 모서리에 아들 알렉시우스 모자이크가 일부러 슬쩍 감추어 놓은듯이 그려져 있다.
창문을 사이에 두고 나란히 걸려있는 듯이 여겨지는 왼편의 모자이크 벽화는 (황후 조이 모자이크)라 불린다.
콤네누스 모자이크 보다 조금 앞선 11세기 경의 작품으로 예수를 중심으로 오른편에 '황후 조이'가 있고 왼편으로 남편인 '콘스탄니누스 9세'가 있다. 조이 황후 역시 정통 비잔틴의 황녀로 태어났고, 옆에 있는 콘스탄티누스 9세는 그녀의 세번째 남편이었다. 그리고 그 남편 세명은 모두 황제였다. 더하여 콘스탄티누스 9세가 사망하자 스스로 즉위하여 여제에 오른 아주아주 특별한 인물이다.
벽화를 살펴보면 조이 황후의 모자이크는 별반 추가로 손질을 가하였음에도 그리 변형의 티가 드러나지 않지만,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의 초상이나 글짜에는 어수선 할 정도로 여러번 수리가 가해졌음을 알아챌 수 있다. 미술 연구자들은 아마도....... 처음 그자리에는 조이의 첫 남편 로마누스가 그려졌다가, 그가 죽자 두번째 남편 미카일로 바꾸었고, 또 그가 죽자 세번째이자 마지막 남편인 콘스탄티누스 9세로 개작하여 오늘에 남겨진게 된 것으로 판단하고 있다. 언제든지 수정 보완 내지는 개작이 가능한 결혼기념 사진이 비잔틴 시대에 이미 존재했던 것이다.
세명의 황제와 결혼했고 거기에다 스스로 여제에 까지 오른 '조이 황후'였지만....... 사실 조이 황후는 비잔틴 역사에서 (여장부)의 축에 끼지도 못한다.
비잔틴의 역사에서 '조이 여제' 같이 실로 기네스 북에서나 찾아볼만한 특이하고도 매우 경이적인 기록을 가진 여성들이 많이 있었겠지만 대략 아래 세명의 여성을 (여자 대장부)로 꼽는다. 물론 이는 긍적적인면 보다는 부정적인면을 살펴보고자 하는 시선에서의 판단이 전제된다.
첫째는 테오도라 황후로, 지금 우리가 논하고자 하는 테오도라는 (6세기의 테오도라)로 비잔틴의 최고 전성기를 이룩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황제의 황후를 지칭한다. 대단히 아름다운 미모를 가졌던 그녀는 명석함과 뛰어난 정치 감각으로 남편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가장 훌륭한 조력자이자 동반자가 되었으며 사후에는 동방 정교회에 의해서 부부가 나란히 성인의 반열에 올랐다.
그녀는 히포드롬(이스탄불 전차경기장)에서 써커스를 연기하는 곰조련사의 딸로 태어났으며, 기록에 의하면 확실하게 그녀의 직업이 매춘부로 기록되어 있다. 어린 나이에 이미 펜타폴리스의 총독 헤케볼루스의 정부가 되어 한 명의 자식도 있었다고 전한다
. 전 남편과는 함께 리비아로 갔다가 그곳에서 이혼하고, 무희가 되어 알렉산드리아를 거쳐 콘스탄티노플로 돌아와 그곳에서 황제 조카였던 유스티니아누스와 만났다.
진위야 어찌 되었든 미모와 총명함과 놀라운 기지를 가졌던 그녀가 매우 비천한 출신으로 원로원 의원인 유스티니아누스와 결혼한 것은 사실이다
527년 남편이 황제로 즉위하자 테오도라 역시 황후가 되어 ‘아우구스타’(Augusta : 여제 또는 황후)의 칭호를 얻었다.
테오도라는 오늘날 흔히들 정통 기독교 신앙이라고 하는것이 아닌 그리스도 단성론(Monophysitism)을 지지했으나 여기에는 어느정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아무튼 천한 밑바닥 신분으로 험한 삶을 헤치고 황후의 자리에 오른 그녀는 예전의 자유방탕한 모습을 버리고 특유의 영리함과 유능함으로 남편인 황제를 보좌했고 여러 가지 정치적인 활동을 벌였다.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재위 중에 제정된 법령들에는 거의 대부분 테오도라의 이름이 빠지지 않고 들어 있으며 외국 사절단을 접견하고 외국의 통치자들과 서신왕래를 갖기도 했다. 자주 남편의 조언자로서 국정에 관여한 그녀를 후세의 일부 역사가들은 '여제'로 칭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의 이름을 역사에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새겨넣게되는 사건은 뭐니뭐니해도 '니카의 반란'이라고 하겠다.
콘스탄티노플의 원형경기장에서 당시 시민들을 두 파벌로 나누어 놓았던 청색당과 녹색당이 폭동을 일으켰다. 폭동은 곧 트레보니아누스와 같은 관료들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으로 커졌고 황제에 대한 위협으로 발전했다. 성난 군중은 다른 황제를 옹립하여 황궁으로 몰려들었다. 유스티니아누스는 신하들의 설득으로 수도에서 급하게 대피하려고 하였는데 황후 테오도라가 이를 막아섰다. 프로코피우스의 '전사(戰史)'에 따르면, 반란에 당황해 항구에 배를 준비시키고 도망치려고 하는 유스티니아누스를 막아서며 테오도라는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만약 지금 폐하께서 목숨을 부지하시기 원하신다면 폐하시여, 곤란할 것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우리에게는 돈도 있고, 눈앞에는 바다가 있고 배도 있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주소서. 그렇게까지 해서 살아남은 뒤, 과연 (황제의 처지로 당당하게 죽는 것보다 구차하게 도망하여 목숨만은 부지했다)고 신과 역사 앞에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겠습니까? 소첩은 제가 지금 입고 있는 이 (자주색 옷이 가장 고귀한 수의)라는 옛 말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본연의 자리로 돌아가소서.'
용기를 격려하는 황후의 설득에 유스티니아누스는 도망치는 것을 포기했고, 벨리사리우스등 유능한 장군을 불러들여 반란을 진압하게 했다. 무자비하게 반란이 진압되었지만 반도들에게 황제로 추대된 인물들에 대해 유스티니아누스가 자비를 베풀려고 하자 테오도라가 다시 반대하여 처형되었다. 이 니카의 난으로 소실된 성 소피아 성당(하기아소피아)을 유스티니아누스는 반란이 종결되고 10일 뒤에 복구에 착수했다. 신학적으로 그녀는 그리스도 단성론을 옹호하여 단성론에 대한 탄압법을 완화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서방교회와 동방교회의 통합을 강조하는 남편의 종교정책을 바꾸지는 못했다. 총명한 여장부 테오도라는 남편인 유스니아누스 황제보다 17년 먼저 사망했다. 17년이 지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부터 빈잔틴은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된다. 혹, 총명한 6세기의 테오도라가 좀 더 오래 살았었다면........ 비잔틴의 역사가 조금은 달라졌을려나?
두 번째는 (이리니 황후)로서 그녀는 실제로 서기 797년에서 802년까지 비잔틴 제국을 다스린 여제였다. '콤네누스 황제 모자이크'에 등장하고 있으며.........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그녀가 남긴 발자취는 대단히 컸다. '성상 파괴운동'이라는 기독교 역사의 광풍에 맞서서 당당하게 지켜낸 여장부이자 권력욕에 눈이 먼 비정한 어머니의 대명사로 기록되고 기억된다. 이리니는 아테네 출신으로 집안과 조상에 대하여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매우 아름다웠다고 한다. 콘스탄티누스 코프로니무스 황제가 발탁하여 궁정으로 데려와 769년 자신의 아들인 레온과 결혼시켰다. 레온 4세가 제위에 올랐을 때 그녀는 남편을 통해서만 국정에 개입했고 별 존재감이 없었다. 그러나 레온이 점점 건강이 나빠지자 그녀는 조금씩 영향력을 키웠으며 780년 남편이 죽자 10살짜리 아들 콘스탄티노스 6세를 대신하여 제국을 통치하는 섭정이 되었다. 그녀는 여자로서 최초로 통치자 지위에 올랐고 성상옹호론자였으므로 성상파괴주의자들이 많은 아나톨리아의 군대는 폭동을 일으키고 레오의 동생을 황제로 추대했다. 반란은 곧 진압되었지만 이리니는 이를 기회로 군대 내의 반대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했다. 그러나 이 숙청의 결과 군대는 약해졌고 황제에 대한 충성심도 사라졌다. 시칠리아 총독이 독립을 선언하고 제국에서 떨어져 나갔다가 결국 무슬림에게 정복되었고 782년 이슬람의 10만 대군이 쳐들어오자 값비싼 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그리스에서는 슬라브족에게 승리하였다. 이리니는 아테네 출신답게 적극적으로 성상을 존중하는 입장이었다. 자신의 권력기반이 안정화 되자 그녀는 자신의 신념대로 교회정책을 밀고 나갔다. 784년 성상파괴론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가 물러나자 자신의 심복을 그 자리에 임명하였고 로마 교회와의 관계를 개선해 나갔다. 교황 하드리아노 1세와의 서신교환을 통해 관계를 회복하고 786년 로마와 동방의 교구들이 모여 공의회를 열었다. 그러나 성상파괴론자들이 이 공의회를 군대를 동원하여 해산시켰다. 이레네는 이듬해 9월 니케아에서 다시 공의회를 열었는데 이것이 제2차 니케아 공의회로 세계공의회로서는 일곱 번째 공의회가 된다. 이 공의회에서는 성상파괴론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성상을 단순한 흠모의 대상에서 경배하는 대상으로 끌어올렸다. 성상파괴론자가 많았던 소아시아의 군대는 이에 반발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진격하여 감옥에 있는 콘스탄티누스를 풀어주고 이레네를 황궁에 감금시켰다. 그러나 콘스탄티누스는 잇달은 대외정책의 실패로 인기를 잃었고 792년에 이리니는 다시 복위되었다. 복위된 이후 이리니는 끊임없이 아들의 입지를 약화시키는 데 주력했다. 797년 봄 콘스탄티누스가 사라센 원정을 떠날 때 이레네는 계략을 세워 사라센군이 철군했다고 황제를 속여 군대를 철수하게 했는데 이로써 황제는 겁쟁이라는 오명을 얻었다. 그해 6월에 이리니는 황제를 체포하려 했으나 실패하였고 황제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간신히 건너 도망쳤다. 그러나 이리니는 결국 아들을 콘스탄티노폴리스로 붙잡아 오는 데 성공하고 8월 15일 오후 3시 황궁에서 아들 콘스탄티누스의 두 눈알을 뽑아버렸다. 콘스탄티누스가 언제 죽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많지만 매우 잔인한 방법으로 눈을 뽑아버려서 곧 죽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록에 따르면 이러한 비정한 행위에 신이 분노하여 17일 동안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한다. 백성들의 원망과 신의 분노가 극에 달했음일까? 이리니에 대한 반감은 점점 노골적이 되었고 802년 10월 황궁에서 고위 관리들의 반란이 일어나 이리니는 제위에서 쫓겨나고 레스보스 섬으로 유배되었다. 결국 이리니는 유배지에서 이듬해에 죽었다.
세 번째는 다시 테오도라 황후로, 그녀를 6세기의 테오도라와 구분하여 (9세기의 테오도라)라 칭한다. 기독교에서는 그녀를 성인으로 추앙하지만, 역사학자들은 전혀 다른 시각에서 그녀를 조명하고 대단히 부정적으로 판단내리고 있다. 파플라고니아 출신으로 뛰어난 미모를 가지고 있었던 테오도라는 황제 미하일 2세에 의해 후계자이자 아들인 테오필로스의 아내로 발탁되었고, 나중에 테오필로스가 황제가 되자 황후가 되었다. 그리고 두사람 사이에서 아들인 미하일 3세가 태어났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테오도라는 본래 미하일 2세가 왕궁 밖에 숨겨논 정부였으며, 그녀를 합법적인 방법으로 왕궁에 불러들이고자 아들인 테오필로스와 결혼시켰다고 보는 시각이 엄연히 존재했다. 그들은 남몰래 왕국 안에 숨어서 시아버지와 며느리 사이에 정염을 불태웠다고 한다. 옹호론자들은 적극적으로 이를 부정한다. 패륜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제 남겨진 기록에 따르면......... 미하일 3세가 자신의 존재에 대해서 평생 고뇌했다고 적혀있다. 스스로 자신이 누구의 아들인지를 고민했다고 전해진다. 더하여...... 미하일 3세는 할아버지인 미하일 2세와는 원만하게 잘 지냈으나, 아버지인 테오필로스와는 서로를 극하게 혐오하는 사이였다고 한다. 왜 그랬을까? 미하일 2세가 죽자 테오필로스가 즉위하고 테오도라는 황후가 되었다.
테오필로스가 성상파괴주의자였던 반면에 황후인 테오도라는 성상옹호론자였는데, 그녀는 남편 몰래 성상을 공경했다고 한다. 842년 남편이 죽자 두 살짜리 아들 미하일이 황제가 되었고, 당연히 테오도라는 황제의 어머니로 섭정을 시작했다.
섭정이 되자 그녀는 신중히 성상 공경을 복권시키려고 삼촌 세르기우스 니케티아네스, 오빠 바르다스, 궁정신하인 테옥티스투스와 함께 작업에 들어갔는데, 843년 열열한 성상파고론자인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한을 몰아내고 3월 11일 성상 공경을 복원시켰다. 이 날은 지금도 동방 정교회의 축일로 기념된다.
테오도라의 섭정 기간 동안 또 하나의 주목할 만한 일은 바로 기독교 분파인 파울리키아파를 이단으로 몰아 대대적으로 박해한 일이다. 그녀는 궁정대신 테옥티스토스와 손잡고 박해에 나섰다. 성상파괴주의였던 파울리키아파는 성상 공경이 복권되는 과정에서 약 10만 명이 무자비하게 학살당했고, 모든 재산과 토지가 몰수 되었다.
이들은 대부분 금욕적이고 독실한 기독교인이었지만, 권력을 잡았고 또 그 권력의 활용방법을 터득한 테오도라에게 있어서 자비란 이미 없었다.
이는 비잔티움 제국 역사상 전무후무한 대대적인 학살로 이어졌고, 이 참사에서 도망친 기독교인들이 결국엔 이슬람 칼리파에게 넘어가게 되고, 결국엔 그들이 비잔틴 제국을 침략하는 이교도들의 날카로운 창 끝이 되고 말았으며, 나중에 보고밀파, 카타르파에 그 영향을 미쳤다.
한편, 성인으로 성장한 미하일 3세는 어머니와 테옥티스토스의 영향에서 벗어나서 삼촌 바르다스와 손잡고 855년 11월 20일 테옥티스토스를 제거하고, 이듬해에는 어머니 테오도라를 궁정에서 몰아내었다.
권력의 야욕 앞에서는 정의나 핏줄이나 여하한 그 어떤것도 모두 소용이 없었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출구로 사용되고 있는 남서쪽의 본관 통로를 나서다보면 부주의한 여행객이 그대로 지나치기에 딱 좋은 위치인 문 위에 또 하나의 소중한 모자이크화가 걸리어 있다.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성모 마리아에게 우편으로는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콘스탄티노 폴리스를, 왼편으로는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소피아 대성당을 받치고 있는 모습이 묘사되어 있는 성상파괴 운동이 휩쓸고 지나간 직후인 대략 10세기 경 초입에 만들어진 모자이크 작품으로 본다. 흔히 우리가 자리를 따질때 당사자의 오른쪽이 더 높은 자리라 여기는 기준을 적용시켜 본다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지어서 받친 유스티나아누스 황제의 공이 콘스탄티노플을 건설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공 보다도 더 크게 기뻐하면서 받아주셨을 것이라는 가설이......... 그리고....... 이 (남서쪽 문의 모자이크)를 보았다면 하기야 소피아 성당의 관람을 모두 마쳤다는 이야기가 된다. 복원 작업중이거나 장막에 가려진 채 여행자에게 보여주지 않는 것들이 많이 있다. 또 세심하게 잘 살펴보면 여기저기에서 더러 더 발견하게 되는 부분적이 모자이크화들도 더러는 있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더라도........ 여기까지다. 비잔틴 문화의 정수를 모두 본 것이다. 헌데......... 무엇인가가 허전한것은.......... 별반 본것이 별로 기억에 나지 않는것은.......... 혹....... '저 회덧칠을 모두 벗겨내면 볼 것이 훨씬 많아질텐데.........' 라고 생각 할 수도 있겠지만....... 지금 드러나 있는 저 상태만으로도 이슬람의 입장에서는 6백년 이상된 훌륭하고도 충분한 문화재이자 유산인 것이다. 거기에다 터키는 이슬람 국가라 칭해도 무방한 그런 나라이다. 기독교인의 시선으로 무조건의 비잔틴식 복원을 주장할 명분도 당연성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저렇게라도 완전 파괴도지 않은 모습으로 볼 수 있었다는 감사함과, 이슬람에 대한 공경과 배려도 잊지말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다.
그런 비잔틴 문화에 대한 못내 아쉬움이 크다면....... 가려져 있는 소피아 대성당을 나서면서....... 드러나지 않은 그 부분들이 너무나 간절해 진다면......... 방법은 없지 않다. 우선은, 북이탈리아의 '라벤나(Ravenna)'로 가라. 이스탄불에 남아있지 않은 비잔틴의 모습이 그곳에 있다. 다음으로, 소피아 대성당의 드러나지 않은 모자이크화에 대한 갈증이 너무도 크다면........ 인근의 발렌시아 수도교를 지나 있는 '키리예 박물관(Kariye Muzesi)'를 찾아 가보라. 비잔틴 시대의 본래 이름은 '코라 성당(Chora)'으로 '시골' '교외'의 의미를 담고 있다. 소피아 대성당과 같이 동로마의 천도 직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에 의해서 건축되었다. 다만 테오도시우스 성 밖에 위치해 있어서 그런 이름이 붙게 되었다. 또 도성 바까에 위치해 있다는 이유로 콘스탄티노플 함락 후, 약탈과 파괴에서 조금은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베네치아와 4차 십자군의 약탈과 지배를 벗어난, 미하일 8세의 비잔틴제국 복위 직후인 14세기 초엽에 지금의 모습으로 완전하게 보구된것으로 여겨진다. 이곳에 지금 찾아가면 진정한 비잔틴의 참모습을 쉽게 만나볼 수 있다. 소피아 대성당에서 갖게된 아쉬운 부족한 부분이 모두 이곳에 있다.(기회가 된다면 보완 설명할 기회를 만들어 보려 한다) 찾아가기도, 또 이스탄불 올드 시티에서 거리상으로도....... 결코 어려운 발걸음이 아니다.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예술은 지금........ 코라 성당(키리에 박물관)에 가면 만날 수 있다. 놀라운 일이다. 미술사의 다음 시대라 할 수 있는 '르네상스 양식'의 그림들이 버젓이 한 세기나 앞선 콘스탄티노플의 시골 교회에 등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인문학을 품은 원근법에 의한 미술은 '르네상스 시대'에 비로소 시작된 특징 중의 하나이다. 그런데 이 시골 교회의 벽화들을 살펴보다 보면........ 나는 마치 '르네상스 시대 미술관'에 들어온 것이 아닐까 하는 착각마져 생겨난다.(직접 가서 경험해 보시라) 코라 성당의 벽화 사진 몇 점을 르네상스 초기나 중기의 그림 몇 점과 섞어서 늘어 놓는다면........ 과연 그것들을 구분해 낼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하나나 둘이라면 모를까? 나는 도저히 구분을 할 수 없을것만 같다. 혹, 내가 다시 이스탄불에 갈 기회가 생긴다면......... 24시간 정도 코라 성당(키리예 박물관)에서 성화에만 푹 빠져 보고 싶다. '르네상스 미술 도감'을 들고 가서 하나하나 비교하면서 살펴보는 즐거움을 꼭 한번 누려보고 싶다. 오스만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벽화를 덮고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하면서도, 약 50여년 동안 코라 성당을 기독교식 교회의 역활을 수행할 수 있도록 그대로 내버려 두었다. 정복자의 아량이자 타종교에 대한 배려였다. 그래서 초기 점령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에서 비교적 온전하게 살아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50년이 지나서는 이곳도 역시 회칠로 덮어서 이슬람 사원으로 사용했다. 현대에 들어서서 상당부분 원형대로 복원작업이 이루어졌으며 바물관으로 전환 기독교 유산으로 보존되고 있다.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문화는 하기야 소피아 성당 보다도 코라 성당에 더 많이...... 더 원형을 유지한채 보존되어 있다. 놀랍지 아니한가?
그리고 내친김에 아예 (코라 성당)에 복원을 마친 비잔틴 예술의 진수라 할 수 있는 모자이크화와 벽화 사진도 몇장만 올려보기로 하자. 쉽게 비교가 될 수 있을것이다. 비잔틴 건축양식의 정수는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에서....... 그리고 비잔틴 미술의 정수는 인근의 (코라 성당)에서........ (키리예 박물관)을 찾아가면 모두 볼 수가 있다. 더하여 이탈리아 로마나 피렌체를 갈 계획이 생긴다면 볼로냐 옆에 바짝 붙어있는 (라벤나)를 찾아가면 비잔틴의 모든것을 체감할 수 있을 것이다. 부디 그런 기쁨을 맘껏 누리시기를.........
(코라 성당 모자이크 벽화)
(코라 성당 천장화)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내부를 감상하고 밖으로 나온다.
입장 할 때처럼 여전히 세찬 빗줄기만 내리 퍼붓고 있다. 챠밍여사의 표정을 보니 아직 벅찬 감동에 푹 젖어있는 표정이다.(금방이라도 주저앉아 펑펑 울음을 터트릴것 같았던 바르셀로나 성 가족 성당만큼의 감동적인 표정은 아니었지만)
무심한 하늘 한번 올려다보고 고개를 돌려 방금 나온 소피아 대성당을 올려다 본다.
'거 참!'
솔직한 심정으로 나는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이 대단한 건축물이라는 것에는 충분히 공감을 하지만........ 아름다운 건축물이라는 것에 대해서는 눈꼽만큼도 동의할 수가 없다. 물론 드론이라도 띄워 높은곳에서 내려다 보는 전경이나........ 아주 먼곳에서 포커스를 맞추어 주변 환경과 멋드러지게 어울리게 나온 사진을 보면 아름답다는 생각이 잠시 들기도 하지만 말이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가까이서 대성당을 올려다보면서 내 가슴속에서 툭 튀어나오는 솔직한 심정은............ '무슨 돌덩어리를 이렇게 흉측하게 쌓아올려 놓은 것이야? 이거 순 부실공사잖아. 제대로 서 있는게 용하고...... 저거 봐. 어떻게든 넘어가지만 않게 하려고 대충 얼기설기 대충 뚜드려 맞춘 흔적을........'
'ㅎㅎㅎ ㅋㅋㅋ 미티미티.'
내 속마음은 솔직히 그렇다.
처음 대성당의 설계를 시작했을때부터 엄청난 돔의 무게는 최대의 난제로 제기되었고 두고두고 이 문제로 파생될 결과는 충분히 예상되어졌다.
'하늘은 둥굴고 땅은 네모나다'는 당시의 기독교식 우주관에 입각한 사상 초유의 건물을 짓는데 있어서, 핵심은 과연 사각형 위에 둥근 돔을 얹을 때 파생되는 엄청난 지붕의 무게를 어떻게 견뎌내도록 만드느냐에 달려있었다. 로마의 건축가들이 판테온을 만들 때 사용한 콘크리트 생성 기술이 아직 비잔틴에는 제대로 전수되지 못하였고, 화재로 엄청난 시련을 격은바 있는 황제는 극도로 목재의 사용을 꺼려해 기어이 석재를 사용해 건물이 완성되어지기를 바랬다.
가장 안정적으로 무게가 배분되도록 설계를 해야했으며, 석재가 주재료였던 만큼 공사의 난이도도 최고의 수준이어야만 했다.
거기에다 성질이 급하기로 소문난 황제는 공사기간을 단축하여 한시라도 서둘러 대성당이 완공되기만을 재촉하고 있었다.
황제와 세상 사람들이 공사 관계자들에게 요구하는것은 한마디로 기적이었다.
반면 그들이 가진것은 최악의 조건과 불가능에 가까운 공사의 난이도였다. 1천명의 목수와 1만명의 노동자들이 밤낮으로 매달렸다.
마침내 5년 10개월 4일만에 대성당은 완공되었다.
로마 판테온의 건축가들이 끝내 완성하지 못했던 돔의 천장에 뚜껑을 덮은 완전하고 완벽한 실로 위대한 건물이 마침내 탄생한 것이다.
하지만, 완성됨과 동시에........ 예견된 시련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중심부의 높은 하중을 아치형태의 시스템에 의하여 외부로 분산시키는 돔형 건축물은 특히 지진의 충격에 취약하다.
서기 557년 콘스탄티노플을 강진이 휩쓸었고 대성당에 엄청난 충격을 가했다. 이듬해인 558년 지성소쪽의 반원형 돔의 지붕과 아치가 부서져 무너졌다. 하지만, 대성당을 설계하고 건축한 이시도로스와 안테미오스는 모두 사망한 다음이었다. 결국 같은 이름을 가진 이시도로스의 조카가 복구공사 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는 이 붕괴가 돔을 떠받치고 있는 원통형의 기반공사가 부실이라는 결론을 내렸다.
기반을 떠받치는 골조를 보강하고, 외부로 분산된 하중을 지탱하기 위하여 대성당의 외벽을 벽돌로 철저하게 감싸듯이 옹벽마감처리를 보완했다.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하여 돔의 높이를 약 7m나 끌어 올렸다.
그것이 지금 우리가 바라보고 있는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의 모습이다.
1453년 오스만 제국의 술탄 메메트 2세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 시켰다.
소피아 대성당의 아름다움과 위용에 매료된 술탄은 승리를 쟁취한 군대의 약탈과 파괴로부터 대성당을 보호하였고, 술탄 개인의 기도처로 삼았다.
십자가는 떼어졌고 조각상은 철거되었으며, 천장과 벽면의 아름답고 화려한 성화들은 두거운 회칠로 덮여졌다. 그리고 그 위에 독특한 기호와 문양들이 새겨졌다.
키블라(메카 방향)를 바로잡기 위하여 방향을 약간 틀어서 남쪽의 미흐랍(메카 방향의 문)을 조정 설치하였고 밈바르(성교단)가 만들어졋다. 2층의 갤러리 공간에 알라와 마호멧과 4명의 초대 칼리프 이름을 적은 방패를 걸어놓았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소피아 대성당의 건물이 안정을 찾은것은 결코 아니었다.
이스탄불 지역 자체가 화산대에 속하여 지진이 계속되었으며, 엄청난 돔의 하중은 시간이 지날 수록 점 점 여러가지 부작용을 드러냈다.
정복자 메메트 2세 시대으이 건축가들은 대성당의 보완공사에 나섰다.
돔의 높은 하중과 외장력을 보강하는 공사가 이어졌다. 그들은 대성당의 외벽에 목재를 이용해 지지대를 만들어 고정시키려 했다. 일시적 효과는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대성당 건물의 안정성은 떨어지기 시작했으며, 붕괴를 염려해야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스만 투르크 최고 전성기의 통치자였던 술레이만 대제는 마침내 그를.......... 이슬람 역사상 가장 위대한 건축가로 추앙받고있는 (미마르 시난)을 소피아 대성당의 복구공사 책임자로 임명했다.
시난의 진단 역시 중암 돔의 지나치게 높은 하중과 날로 증가하는 외장력의 삼각함을 찾아냈다.
시난은 돔의 무게에 의해서 외부로 떠밀려 나오는 하중을 커버하기 위하여 대성당의 위용과 조화를 이룰 수 있는 거대한 석조물을 만들어 외장력을 버텨내도록 설계를 마쳤다. 그것이 대성당의 외부를 둘러싸고 있는 4개의 미나렛(이슬람식 첨탑) 설치이다.
하여 지금 소피아 대성당의 외형은 갈색의 본래 대성당 건물과 회색의 대리석으로 추가된 이슬람식 건축이 하나로 융합되어 있는 형상인 것이다. 설계를 마치고 보완 공사를 시작한 시난은 한개의 미나렛을 완공하고나서 고령으로사망했고 보이내 완 공사는 중단 되었다. 시간이 좀 지나서 셀림 2세가 북동쪽의 미나렛을 완성시켰고, 나머지 미나렛 2개는 무랏 3세때 완공을 보게 되었다.
그 후........ 아슬아슬하게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은 고비를 넘기고 보완작업을 거듭하면서 지금에까지 무사히 유지되어오고 있다.
이런 내막을 어느정도 알고 내부를 좀 더 세세하게 살펴 본다면........ 1층의 대리석 기둥들 높이가 일정하지 않고, 2층의 대리석 기둥들도 교체 보완의 과정을 거치면서, 너무나 높은 하중을 다룰수가 없어서 본래의 위치에서 조금씩 삐뚤삐뚤 밀려나 겨우 끼워맞추듯이 설치된 것을 눈치챌 수가 있다. 그리고 그런 억지스런 작업의 결과는 여기 저기 균열이 생겼거나 생겨나고 있는 기둥들로 나타나고, 청동판을 접어 감싸 보완한 모습도 확인할 수 있다.
분명하게......... 부실공사와 날림공사의 휴유증이 역력하다.
하지만, 아무리 그렇기로.........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은 실로 어마어마한 위대한 기념물이다.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이 순간 우리는....... 그 신비로움을....... 그 성스러운 아름다움을....... 두 눈에, 그리고 가슴 가득 담아내고 있다.
지키고 보존해야만 한다.
우리 아들이....... 우리 태리가........ 그리고 대대손손 후손들이 거듭거듭 이곳을 찾아오고 큰 감동을 맏을 수 있도록........
'땡큐. 하기야 소피아!'
이제 또 다른 아름다운 이스탄불의 모습과 역사를 찾아서 발걸음을 새롭게 옮겨본다.
알 럽 이스탄불.
알 럽 트래블.
---- 다음 여행기에서 이어지겠습니다. 코로나 19 여파로 온 나라가 많이 어수선하네요. 모두모두 건강하시길........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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