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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스페인) 카탈루냐 지역 카톨릭의 성지 <몬세라트>

by 피안재 2019. 12. 20.

 

 

 

 

 

 

 

 

 

 

 

 

 

 

 

 

 

 

 

 

 

 

 

 

 

 

 

 

 

 

 

  " 자연에 순응하고

  신(神)에게 자신의 욕심에 대해서 요구하지 않아도 되는 삶을 사는 영혼들아.  모두 이곳으로 오라.

  내가 그대들의 영혼을 어루만져 주리라.

  지친 심신을 추스를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으니 소중한 사람들과 손을 잡고 함께 오라.  너희들을 위하여 내가 준비한 곳이니라. "

 

 

 

 

  몬세라트의 산세가  가우디 건축에 어떤 영감을 주었다고 들었을 때도 나는 그저 그랬으려니 했다.

  이름 처럼  풀 한포기 나무 한구루 없는 암봉 덩어리를 '톱으로 뚝 잘라서 옮겨놓은' 듯한  독특한 풍광과 몬세라트에 얽힌 많은 이야기들과 사진들을 보면서,  바르셀로나에 가게되면 꼭 한번은 다여와야 하겠다고 마음먹었었다.

  '우리 절대로........  사진빨에는 속지 말자'라고 여행하면서 늘 다짐에 다짐을 거듭하던 우리였다.

  너무나 멋진 풍경에 현혹되어 멀고 먼길을 힘들게 찾아갔는데........  '아뿔싸. 이게 뭐야?'  하는 경우가 간혹 있기 때문이다.

  챠밍여사는 이미 금강산 만물상과  장가계를 다녀온 처지였고,  나는 코카서스 지역의 험준한 산악과 협곡을 충분히 경험하고 난 처지였기에.........  '몬세라트가 별거 아니면 어쩌지?' 하면서 찾아나선 길이었기 때문이다.

  카탈루냐 지역민들의 매우 독특한 심성과 불굴의 저항정신과 개척정신에 대해서 어느정도 잘 알고 있기에,  그런 그들에게 카톨릭 신앙에 대해 절대적 성지로 인식되어지고 있는 성산(聖山)  몬세라트와  몬세라트 수도원은 무엇인가가 달라도 특별히 다를것이라는 기대감에 충만해 나선 발걸음이었다.

   "짜~~~~~ 쟌 (두두둥 둥둥) ~~~~~~~~~  빠~~~~ 방~~~~~~~~~"

   "짜~~~~~ 쟌 (두두둥 둥둥) ~~~~~~~~~  빠~~~~ 방~~~~~~~~~"

  연실 차창 밖을 두리번 거리는 내 귓전에는  부르투스를 이용해 장엄하고 웅장한 선율이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R. 스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였다.  참으로 기가막히게 절묘한 선곡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바르셀로나 에스파냐 역에서  카탈루냐 전철로 갈아타고 (몬세라트)로 향한다.  '콜로니아 구엘 서민 예배당'을 찾았을 때와 같은 장소 같은 방향이라 전혀 낯설지가 았았다.  차창밖을 통해 바르셀로나 외곽 농촌지역의 풍경을 감상하면서 나는 한참동안 속으로 웃었다. (참으로 가당치않은 짓거리들이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  '몬세라트 수도원'을 책에서 찾아보거나 인터넷에서 검색해보면,  대부분의 소개에서 (세계 4대 성지)라고 적혀 있다.  참으로 기가차고 어이없는 표현이다.  도대체 어느만큼 어떤 지각있는 양식인(?)들의 헛소리들인지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그 한심한 인간들은 왜 (세계 3대....)  (세계 4대.......)  (세계 7대.......)  등등의 나부랑이에 그토록 매달리는지 나는 도대체 알 수가 없다.  성지(聖地) 라면 어떤 종교적이던 토테미즘적이던..........  암튼 '신성한 땅'이라는 말이겠다.  그런데 거기에 왜 (세계 4대)가 꼭 붙어야 하는가?  방금 내가 어떤 안내 책자에서 '세계 4대 성지 --  예루살렘. 로마. 산티아고. 몬세라트'라는 설명을 읽다고 그만 폭소가 터져나온 때문이다.  아주 조금만 따져들어 본다면........ 다분히 '카톨릭 입장에서의 4대 성지' 쯤으로 보아야만 할것 같다.  어떻게 '세계'라는  전제가 붙은 선정에 오로지 카톨릭의 중요한 유적지만 꼽는단 말인가?  거기에다가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나 에디오피아의 '사르트르 지하 예배당' 이나........  실로 어마무시한 여타의 카톨릭 유산들을 생각해본다면.......  참으로 웃기는 씨츄에이션이 아니겠는가?  '세계 4대 종교의 대표적 최고 유적 각 4개씩' 이라고 선정한다면.........  거대 기독교 문화유적에 위에 열거한 카톨릭 입장에서의 4대 성지 쯤은 단칼에 일부 탈락할 수도 있지 않겠는가?  (세계 *대  **) 하고 정하려면.......  적어도 언제. 누가. 무엇에 근거해서 어떻게 선정했는지가 명확하게 전제되어야만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세계 4대 종교'에는 (카톨릭)이 들어갈까?  혹시......  '세계 4대 종교' 라고 하면서..........  '불교. 이슬람교. 힌두교. 기독교(카톨릭은 기독교 내 여러 종파중의 일부)'  라고 한다면.........  '기독교'를 다시 '개신교. 유대교. 정교회.  그리고 카톨릭'으로까지 세분화 한다면.............  글쎄다.  예루살렘. 로마. 산티아고. 몬세라트 등은 대충 어림잡아도...... (세계 100대 성지)에는 모두 살아남을 수 있을까?  에라........  단정짓지 말면서 살자.   속세엔 이런 말이 있지 않은가?  '오래 살아남는 놈이 승리자여.  그것이 정당성이고 가치인 것이여.' 라고.......  앞으로 한 1만년쯤 흐른 후에.......  그때까지 살아남을 유적이 가치있는 것이 아닐까?  그때 달랑 4개만 남게된다면.......  그게 '4대 유적'이 아니겠는가?  '사라지고 나면 모두가 개뿔인 것이여'.
  이런 쓸데없는(?) 생각에 골몰하다보니 기차가 어느새 몬세라토 역에 도착했다.  (몬세라토 수도원)에 올라가는 방법은 대략 세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차량을 가지고 가파르고 꼬불꼬불한 언덕을 올라가는 방법이다.  둘째는  몬세라트 역 한 정거장 전에 내려서 케이블 카를 타고 오르는 방법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몬세라트 역에 내려서 푸니클라(산악 궤도열차)로 갈아타고 올라가는 방법이다.  우리는 당연하게 푸니클라를 선택했고,  역시나 최선의 선택이었다.  그리 오래지 않아  발아래로 펼쳐지는 장엄한 대자연의 위용과 풍광에 감탄하다보니 푸니클라는 어느새 우리를 수도원 앞마당에 내려 주었다.
  '몬세라트 수도원'의 정식 명칭은 '베네딕트 산타 마리아 몬세라트 수도원'으로,  바로 엄격한 수양과 철저한 금욕주의자 생활로 유명한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기도하고 학문을 연구하고 정진하는 수행처인 것이다.  굳이 카톨릭 교도가 아니라해도 '베네딕트회'나 '제수이트회'에 대해서는 역사속에 자주 등장하였던 것을 쉽게 기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 수도원의 탄생 기원과  이곳이 카탈루냐 지역 카톨릭 신앙의 절대적 성지로 의미와 가치를 부여해주고 있는 '라 모레네타(La Moreneta)'라 불리는 '검은 성모상'을 보관하고 있는 장소로 너무나 유명한 곳이다. 






 

 



 




 

 

 

 

 

 

 

 

 

 

 

 

 

 

 

 

 

 

 

 

 

 

 




 

 

 

 

 

  중세시대였던  서기 880년.

  카탈루냐의 한적한 산골마을에 아버지를 도와 양을 몰고 이곳저곳으로 풀을 찾아다니는 양치기 소년이 있었다.

  이따금씩 양이 한마리씩 사라졌다.   인근 '산 제로니모 산(1.229m , 몬세라트 산의 주봉)'에 서식하고 있는 늑대와 이리떼로 부터 양들을 지키는 것이 소년의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날도 어김없이 어린 양 한마리가 사라졌다.  소년은 가파른 바위산의 골짜기 이곳저곳을 쫓아다녔다.  길 잃은 양을 찾던가 아니면 차라리 늑대를 마주쳐서 지팡이로 호되게 앙갚음이라도 해 줄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하늘이 열리면서 찬연한 빛줄기가 저만치의 다른 골짜기를 향해 쏟아져 내렸던 것이다.  이루 형용할 수 없는 놀라운 광경이었다.

  늦은 시간에 집으로 돌아 온 소년은 아버지에게 자신이 이날 목격한 일을 이야기 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반응은 냉담했다.  아들이 양을 잃어버린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어쩌다 보았던 일을 부풀려 과장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데 며칠이 지나서 또 같은 일이 소년 앞에 펼쳐졌다.  소년은 아버지에게 이 사실을 알렸고,  역시나 아버지는 이날도 이 이야기를 무시했다.

  며칠이 지나서 이번엔 아들과 함께 아버지가 양을 돌보고 있었는데 이날도 양 한마리가 사라지고 없었다.  아들은 잃어버린 양을 찾으러 가파른 바위 벼랑 사이를 헤집고 다녔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산비탈을 뛰어내리다시피 달려오며 소리치는 아들을 발견했다.  늑대가 나타난줄 알고 아버지는 지팡이를 들고 뛰어갔다.  그리고 순간..........  아들의 뒤로 찬연하게 쏟아지는 거대한 불기둥 같은 눈부신 빛줄기를 보게된 것이다.

  아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목동은 아들을 앞세우고 그 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는 건너편의 바위 골짜기를 향해 달려갔다.  마침내 찾아낸 그곳에는  아주 작은 동굴이 하나 있었다.

  그리고 그 동굴 안에 불에 그을린 듯 검은 빛을 띤 작은 나무 조각상 하나가 놓여 있었다.

  그것이 바로 '검은 성모 마리아 상(라 모레네타)'이다.

  몬세라토 수도원에서 건너다 본다면 표고가 조금 낮은  저만치 건너편의 가파른 바위벼랑 위에 있는 '산타 코바' 동굴이 바로 그곳으로.......  벼랑 사이로 난  양치기들이나 다녔을법한 옛길을 따라 약 20분 정도 트래킹 하듯이 걷다보면 작고 아담한 '산타 코바 성당'이 나오는데  바로 그 장소이다.

  이곳에 아주 작은 기도처를 마련하고 베네딕트 수도회의 수도사들이 기거하기 시작하면서 생겨난 것이 '산타 코바 성당'이고,  이런 사실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고,  이곳에서 많은 성스러운 기적의 역사가 벌어지게 되자,  11세기에 들어서서  '검은 성모상'을  잘 모시고 보관하기 위하여 들어서게된것이 바로 '몬세라트 수도원'인 것이다.  현재에도 약 80명의 수도사들이 이곳에서 수양에 정진하고 있는 이곳은,  가히 카탈루냐 지방 카톨릭 신앙의 절대적인 성지라고 하겠다.

  그렇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양치기 소년이 처음 이 검은 성모상을 발견한 것이 서기 880년 경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성모상의 보존을 위하여 조치를 취하던 중에 실시된 탄소 연대 측정에서는.........  조각상이 12세기에 만들어졌을 것으로 측정 결과가 나왔다.

  어떻게 된 일일까?

  소년은 왜 굳이 풀 한포기 없는 높디높은 그 바위벼랑까지  양을 몰고 다녔을까?

  발견 당시 이미 검은 빛갈을 띤 조각상은.......  전기 없던 시절 횃불의 그을림으로 검어졌을것이라 판단되고 있는데.......  그럼 원래 놓여졌던 장소는 어디였을까?  추측컨데 엄연히 버젓한 어느 교회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오랜 세월동안 사용했었다는 전제가 당연하지 않은가?  그리고 무슨 연유로  달랑 작고 허름한 나무 족가상 하나만을 이 깊고 험한 바위벼랑 위에 가져다가 숨겨놓았단 말인가?

  도대체 누가 왜?

 

  전설속의 위대한 군주인 '아더왕 이야기'에 성서속의  '잃어버린 성배'를 찾아가는 이야기에서 성배의 보관 장소로 여기 '몬세라트 기도원'이 등장한다.

  아더왕의 전설은 그가 '6세기 경 영국에 건설한 전설속의 왕국'에 기인한다.  6세기 이야기에 9세기에 성모상이 발견되어 수도사들의 은거지로 생겨난 수도원이 등장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검은 성모상에 대해서는 또 다른 전설도 등장한다.

  '검은 성모상'을 조각한 사람은 다름아닌 '신약 성서를 쓴 마가'라는 전설이다.  마가가 만든 이 조각상을  예수 사후 베드로가 가지고 이곳으로 피난을 했었다는 이야기다.  예루살렘을 떠나온 베드로가 바르셀로나를 거쳐서 로마로 향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그렇다고,  예루살렘을 빠져나온 베드로가 누군가에게 이 조각상을 주었고  그후로 여러곳을 옮겨다니다가 어찌어찌해서 여기 몬세라트까지 오지 말란 법 또한 어디에도 없다.

  다시 말해서.......  지극히 상식적이고 이성을 바탕으로 추론해 본다면........  언제 어디에서 누구에 의해서 조각상이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가 없다.  다만......  아마도 그 검은 성모상은 여기 카탈루냐 지방의 어딘가(몬세라토 인근)의 작은 예배당이나 수도원에 놓여져 있었을 것이다.  그러다가 지중해 건너 아랍인(이슬람)이 쳐들어오자 허겁지겁 서둘러 산속 깊은 동굴속에 나름 꽁꽁 숨겨놓았었을 것이다.  훗날 그것이 양치기 소년에 의해서 발견되었을 것이다.

  기록으로 남겨진 바가 없고......  타임머신이라도 생겨나기 전에는 확인 할 방법이 지금으로서는 없다.

  다만 지금 중요한 것은..........  그 과정이나 속내막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그 조각상이 지금.........  카톨릭 신앙에 의해서 거의 절대석인 신성(神聖)을 가지게 되었다'는 점이다.

  '신성(神聖)'이란 도대체 무엇일까?

 

  '무엇이 세속의 어떤 사물들에게 신성함을 부여하게 만드는 것일까?'

  정통적인 신성은 무엇이며........  비 정통적인 신성은 또 무엇인가?

 

  검게 그을린 나무 조각상의 무엇이........  이 험준한 바위벼랑 위에 이토록 웅장하고 장엄한 건물을 만들도록 한 것일까?

 

 

 

 

 

 

 

 

 

 

 

 

 

 

 

 

 

 

 

 

 

 

 

 

 

 

 

 

 

 

 

                                             ----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만났던 '수라비치'를 다시 만나다니........ '성 조르디 상' 또한 매우 인상적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이야기하자면 먼저 가우디가 떠오르고,  가우디를 이야기 하자면 가장 먼저 파밀리아 성당이따라 나온다.

  그렇다면........  이 대목에서 한 가지 질문을 하고 싶다.

  '만약에 지금 당신이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마주 대하고 서 있다면.........  가장 먼저 누가 당신 앞에 모습을 나타내는가?'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그 분'...........  아마도 당신은 너무나 형이상학적인 성령주의자가 아닐까?

  '안토니오 가우디'..........    ㅎㅎㅎ  허무맹랑하리만치 타인이나 사전적 지식에 의존도가 너무 과한........  수박 겉할기의 달인이라고나 할까?

  '요셉 마리아 수라비치'..........  당신이야 말로  이성적이고 현실적이며 진실한 사람이라고 나는 말하겠다.

 

  파밀리아 성당이 가우디이며,  가우디가 곧 파밀리아 성당이라는 선입견에서 우리는 빨리 벗어나야만 한다.  그렇다고 파밀리아 성당의 공사 시작에서부터 지금까지.......  그리고 훗날 모든 완공이 마치는 날까지.......  가우디의 공이 지대하였으며,  그의 정신이 고스란히 녹아들었다는 점까지 폄하하자는 뜻은 결코 아니다.

  파밀리아 성당을 건설함에 있어서  처음 설계를 하고 토목공사를 마친 후,  본격적으로 시공에 들어간 사람은 바로  가우디의 두 스승이었다.  그러니까 애초 파밀리아 성당 건축의 총체적인 공사 프로그램과 설계는 이미 가우디의 스승들에 의해서 완성되었고 그 시공이 추진되었었단 뜻이다.

  그러나 갑자기 두 스승이 고령으로 사망하게 되자  성당 건축 위원회는  촉망받는 31살의 젊은 가우디에게  공사 총감독의 지위를 맡겼다.

  그런데.......  이 젊은 건축가는.........  스승들의 건축관과 그들의 설계가 도무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가우디는 스승이 남겨놓은 완성된 설계도면을 쓰레기 통에 내던져 버렸다.  그리고 나서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 관한 모든것을 처음부터 모조리 뜯어 고쳐버렸다.  사방팔방에서 난리가 났다.  스승의 가르침과 존경을 헌신짝 처럼 내버린 희대의 망나니로 전락했다.

  하지만 그는 끝내 자신의 소신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파밀리아 성당의 모든것을 다시 처음으로 되돌리고 자신의 생각과 방식대로 다시 시작했다.  숱한 비난과 질타속에서도 오로지 자신의 신념을 관철해 나갔다.  하지만 그에게도 약점은 있었다.  그 약점이 그의 사후에 부메랑이 되어 그 자신에게 되돌아 오게된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총체적인 설계와 공사 총책임자는 분명 안토니오 가우디였으나.........  그 누그에게도 그 어떤 방식으로든.......  파밀리아 성당의 총체적이면서 완벽한 전체 설계도면을 제시하거나 본 사람이 이 세상에 아무도 없다.  대략적이고  지극히 부분적인 설계도면만이 있었을 뿐이다.

  완전한 설계도면은 오로지 가우디의 머리속에만 존재했다.  언제나 그랬다.  그리고 그의 머릿속에만 든 설계는  그가 느끼는 영감과 깨달음에 따라 수시로 언제든지 수정되고 보완되어 갔다.  스스로는 철저한 자기중심주의자였으나,  비판하는 사람들에게는 얼렁뚱당 주먹구구식으로 어쩌다 운이 잘 따라주는 사람으로 인식되어 갔다.  어찌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런것이 천재들만의 특성일까?  피렘체 두오모의 돔을 완성한  부르넬리스키에게서도 그와 비슷한 사례를 볼 수가 있다.

  가우디는 파밀리아 성당의  지하예배당을 완성 시켰다.  그리고 두번째 첨탑을 완성시키는 즈음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첨탑은 예수의 12 제자를 상징하는것으로 아직 10개의 첨탑이 더 만들어져야 했으며,  그 복판에 예수를 상징하는 보다 크고 화려한 대형 첨탑이 한복판에 새롭게 더해질 예정이었다.

  성당의 기초 공사를 막 넘어선 지점에서 가우디가 사망했다.

  그러자 아주 치명적인 문제점이 새롭게 부각되면서 오랫동안 공사가 중단되었다.  수많은 건축가들이 몰려들었으나  그 누구도 가우디의 뒤를 이어 성당 건설에 박차를 가할 수가 없었다.

  왜냐면......  세세하고도 완벽한 전체적인 공사 설계도가 어디에도 없었기 때문이다.  대충 열두개의 첨탑을 세우고 그 가운데 중심이 되는 대형 첨탑을 세우려 했다는 것이 전부였다.  이제까지 진행되어 온 공사의 부분적 시방서는 있었으나......  그 마저도 난해하게 가우디 자신만이 이해하고 기록하는 정도에 그쳐 있었다.

  가우디가 떠난 마당에........  이제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은 가우디와 함께 영원히 이대로 땅속에 파뭍혔다고 생각되었다.

  바로 그때 등장한 사람이 바로.......  '요셉 마리아 수라비치' 였다.

  그는 일류 건축가들과 기술자들과 팀을 꾸려서 성당 건축 공사를 재개하고자 노력하였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전체적인 설계 도면이 없을 뿐더러.......  가우디가 남겨 놓은 공사 기록 조차도 해석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은 불가능했다.

  가우디가 땅속에서 벌떡 일어나 되살아 오지않는 이상.........  파밀리아 성당 공사는 영원히 재개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그러자 수라비치가 책상을 내려치며 외쳤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은 계속된다.  전체적인 것은 가우디가 구상했던 것들을 존중하고 받들어서 계승 완공한다.  하지만 건축에 관한 그 모든것........  포괄적인 가우디의 구상만을 제외하고 나머지는 모두 폐기한다.  이미 부분적으로 가우디가 완성시킨것들은 그대로 살리고, 전체적인 외형은 가우디의 생각에 따르되........  이제부터의 모든 새로운 세부 설계와 시공은 모두 나의 방식대로 한다.  공사가 모두 끝나면  성당의 외형은 가우디가 생각했던 그런 외형으로 완공을 보게될 것이다.  하지만 이 순간부터 건축현장의 설계외 시공을 포함한 그 모든 분야에서  어제까지의 가우디 방식은 모두 버려라.  이제부터는 수라비치 방식의 새로운 성당 건축을 시작할 것이다.' 라고 외쳤다.

  공사를 포기할 수 없는 상황에서  수라비치는 가우디의 뒤를 이어 공사 총감독에 부임한다.

  그리고 그가 처음부터 최우선으로 생각한것은  가우디를 지우고 자신의 신념과 건축관을 새롭게 담아내는 일이었다.

  곡선을 사랑한 가우디는  자신이 시공한 성당의 모든 부분을 자연스러운 부드러운 곡선 위주로 만들었다.  수많은 조각상들 조차도 자신의 지인이나 고향사람들을 모셔다 실제로 그 소재에 맞는 모델을 찾아서 본을 뜨고 조각을 하듯이 하나하나 심혈을 기울였다.  사실주의적이면서도 소박하고 정감이 우러나는 자연스럼 표정과 모습들이다.

  하지만 수라비치는 전혀 달랐다.  그는 요즘에나 먹힐듯한 초현실주의적인 신념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가우디와는 너무도 극명하게 달랐다.  다소 추상적인듯 간단 명료하면서도 강렬한 표현력을  추구하는 수라비치는 지그히 현실적이면서도 과감한 이상주의자였다.  바로 여기 몬세라토의 '성 조르디 조각상' 하나만으로도 그가 얼마나 가우디와 상반되는 생각과 가치관을 가진 사람이었는지를 극명하게 느낄 수가 있다.  각지고 간결하게 처리된 표정과 자세는 어떤 알지못할 위압감 마저 느끼게 한다.  투박하게 각진 얼굴 부분이 음각되어 있고,  눈동자 부분은 더 깊이 움푹 파여져 들어가 있어서   마치 조각상의 눈동자가 보는 사람의 페부 속가지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는 듯한 착시현상 마저 일으킨다.  어느 거리 어느 방향에서 보더라도 째려보듯 조각상의 시선이 늘 따라 다닌다.  마치 초현실주의 추상조각을 대하고 있는 듯 하다.

  첫날 파밀리아 성당에서 유독 나의 시야를 잡아당긴 것이 바로  수리비치의 '유다의 입맞춤 조각상' 이었다.

  강렬한 인상을 넘어서 거의 충격으로 다가왔던 느낌을 나는 이 순간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런 수라비치가 현재가지 완공된 파밀리아 성당의 얼굴격이라 할 수 있는 '수난의 파사드'를 같은 형태 같은 방식으로 만들었다.  지금 파밀리아 성당을 찾는 대부분의 방문객들이 가장 오랜 시간을 머물고 가장 감탄하는 눈물과 탄성을 흘리게 만드는 장소가 바로 '수난의 파사드'이다.

  가우디가 지하와 성당의 뒷부분을 만들다가 떠났다면.......  수라비치는  성당의 가장 중요한 전면을 담당했던 것이다.  더하여 그가 손을 댄 부분이 가우디가 담당했던 부분보다 훨씬 넓다.

  이렇게 내막을 따져보고나서 생각해 보자면.........

  사람들은  파밀리아 성당 앞에서서  가우디의 이름을 외쳐 부르며 환호성을 지르지만.......

  그들이 지금 감탄하고 있는 파밀리아는  '가우디가 손을 댄 부분'이 아니라,  온통 '수라비치의 손길로 도배 된'  파밀리아의 전면을 대하고 있는 것이다.

  가우디가 스승의 건축을 뒤집어 엎어버렸더니만........  수라비치가 똑같이 가우디의 건축을 통째로 깡그리 무시해버리고 말았다.

 

 

 

 

 

 

 

   몬세라트 수도원에 커다란 상처를 남긴 사람으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를 꼽는다.

  그는 수도원의 보물들을 약탈하기 위하여 이곳을 철저하게 파괴했다고 기록으로 전한다. 

  러시아와 지중해를 포함해 아프리카까지 점령했던 나폴레옹.......  피라미드와 스핑크스까지 탐이나서 분해해 파리로 옮겼다는것은 알지만......  그가 정복한 나라들에 왕궁도 많고 보물 전시실도 많고 초대형 교회도 많은데........  이곳 몬세라트에서는 도대체 무엇을 약탈하기 위하여 모조리 부숴가며 샅샅이 뒤졌을까?  혹 검은 성모상의 불가사의하다는 그 신성(?)을 탐냈던 것일까?

  아뭏튼 나폴레옹은 끝내 검은 성모상을 가지지는 못했다.  수도사들이 서둘러 이 바위산 어디엔가 급하게 피난시켜 꽁꽁 숨겨버렸기 때문이다.

  프랑스도 카톨릭 국가였고  나폴레옹도 카톨릭 신자였다.

  코르시카 섬에서 나서 자라서 육사를 나오고 군인이 되어서 황제가 되기까지 그의 생활 속에서 카톨릭은 거의 전부였을 것이다.  대주교에 의한 절대 신성의 배려와 허락하에 황제에 즉위식도 거행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프랑스의 교회에서는 피조물로 겸허하게 기도를 올리고,  스페인의 교회는 무자비하게 파괴하고.......  혹 프랑스의 교회에 계신 그분과  여타 다른 유럽국가 교회에 계신 그분과는 전혀 다른 분이신가?   왜 죄 다 때려부숴?

  그야말로 권력과 탐욕이라는 광기에 눈이 먼 광인의 짓꺼리가 아니겠는가?

  그렇게........  그야말로 쓰잘데 없는 상념에 젖은 채 수도원 광장을 이리저리 돌아다니면서 카메라 셔터를 누루고 있던 차에........  그곳에서 뜻밖에 또 한명의 광인을 우연처럼 만났다.

  '광기에 서린 천재' '희대의 부랑자' '교황청의 도둑' 으로 불리던 그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아니,  이곳엔 어쩐 일이십니까?  카라바조 성님'이라고 내가 먼저 쫓아가 인사라도 건네고 싶었다.

 

 

 

 

 

 

 

 

 

 

 

 

 

 

 

                                                                                                                                                       ---  카라바조 作  (산 제로니모)

 

 

                                                                                                                                              --- 라몬 카르보 作  (젊은 여인의 타락)

 

 

                                                                                                                                                       ---  파블로 피카소 作  (늙은 어부)

 

 

                                                                                                                                                             ---  산티아고  루시뇰 作

 

 

                                                                                                                                ----  스페인의 대표 인상주의   소로야 作

 

 

 

 

 

                                                                                                                                                             ----  살바도르 달리 作

 

 

 

 

 

 

 

 

 

 

 

 

 

 

 

 

 

 

 

 

 

 

 

 

 

 

 

 

 

 

 

  몬세라토 수도원에는 '미술관(Museu de Montserrat)'이 하나 있다.

  스페인이라는 나라 자체가 거대한 하나의 문화 유산 창고일 뿐더러,  워낙 많은 박물관과 미술관이 즐비하였던 터라  이런 산골짜기에 제대로 된 미술관까지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조차 하지 못했었다.  그런데 그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착오이자 실수였다.

  몬세라트 수도원에는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전혀 손색이 없는 반듯하면서도 멋진 미술관(박물관 역활까지 포함)이 분명하게 자리잡고 있다.

  어찌 생각해 보면.......  검은 성모상이나  험준한 바위산 중턱의 이 거대한 수도원 보다,  거기 수도원에 속해있는  미술관이 더 경이로왔고 충격과 감탄으로 다가왔다.  적어도 나에게는 말이다.

  몬세라트 수도원에 관련된 자료는 오히려 지극히 미미했다.  고고학 관련 사료들에다가 여러 시대에 걸친 조각품. 금은 세공품들이 다수 전시되고 있을 뿐더러, 특히 근대 회화의 진수를 이곳에서 만끽해 볼 수가 있다.  프라도 미술관이나 피카소 미술관이나 달리 미술관이나 근대 회화 전시관을 굳이 찾아가지 않아도 여유롭고 풍성하게 근대 회화의 맛과 멋에 마음껏 듬뿍 취해 볼 수 있는 장소가 바로 이곳에 있었다.  피카소와 미로, 그리고 카라바조가 이곳에 있다.

  성서의 주요 무대가 되었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키프로스 등에서 발견된 고대 유물들을 찬찬히 살펴보다가 문득........ '검은 성모상을 가져다 여기에 섞어 놓으면 별로 사람들의 시선조차 안쏠릴것 같은데?  나에겐 검은 성모상 보다도  여기에 널린 유물들이 더 멋지고 귀중한 값어치가 있어 보여?  이를 어떻게 해? 내 신앙이 형편없이 부족해서인가?  나는 검은 성모상에서 전혀 아무런 감흥도 안느껴져.........' 라는 푸념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있었다.

  혹,  챠밍여사가 들었으면 혀를 찼을 것이다.  '교만이여.......  세속에 찌들어 진실을 구분하는 안목을 잃어버린것이여.  불경이여.  반성하고  엎드려 기도혀야 해'라고 불호령이 떨어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카라바조의 그림이 포스터에 나와있는 것으로 보아........  카라바조가 아마도 이 미술관의 상징처럼 내걸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피카소도 있는데 말이다.

  (카라바조)라...........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는  피렌체에서 형의 복수를 한답시고 대낮에 교황청 소속의 무관을 총으로 쏘아죽이는 살인을 저지르고 도망자가 되었다.  그런 그가 어찌어찌해서 교황으로부터 사면을 받고........  아이러니하게도 천재적 기질의 화가가 아닌 교황청 소속 음악연주가로 바티칸에 들어가 생활하다가 그만........  교황이 아끼는 보물들을 훔쳐서 달아나기에 이른다.(참으로 한다한다 가지가지로 한다)  몰타로 도망쳐서 '세례 요한의 참수'라는 위대한 걸작을 남김으로 써 먹고살기에 전혀 지장이 없을만 했는데.......  요한 기사단의 핵심 간부와 칼부림 끝에 치명상을 입히고 또다시 시칠리아로 도망친다.  참수형 판결을 받고 투옥중에 또 다시 탈출하여 이번엔 시칠리아 시라쿠사로 도망친다.  산타루치아 알라바디아 성당의 벽면에 '산타루치아의 순교'라는 또 하나의 위대한 걸작을 그려주는 댓가로 교회로부터 요한기사단의 추격자들에게서 보호를 받으며 숨어지냈다.  다윗을 소재로 한 성화를 그려서 헌납한다는 조건으로  교황청에 사면을 요청한다.  사면 교섭이 어느정도 성사되고  다윗의 성화가 완성되자  로마로 돌아가려 하던 중에.........  요한 기사단 추격대에게 붙잡히고 만다.

  추격대는 현장에서 카라바조를 척살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얼굴과 신체를 날카로운 칼로 난도질 해놓았다.  단칼에 죽음이라는 처분도 오히려 신의 자비로움일 수 있어서........  그동안의 인간답지 못함에 대한 댓가로써 고통과 처절함 속에 회개하라고 대신 죗값으로 생명연장만은 남겨주었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일단 자신의 생명이 붙어있다는 사실만 중요하게 생각했다.  로마에 가서 정식 사면을 받고나면 어떤 방식으로든 다시 새로운 삶을 이어나갈 수 있다고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하여 기어코 로마로 강행군 하던 중에 여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카라바조의 그림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그런 그의 광기와  파란만장한 그의 삶이 고스란히 배어있다. 

  카라바조는 내가 아주 아끼고 존경하는 화가 중에 한 명이다.  그의 그림을 마주하는것은 내 여행이 갖는 아주 커다란 즐거움 중에 하나이다.

 

 

 

 

  한 마디로 말해서 '곗돗 타고 돌아서서 나오는 기분'이었다.

  험준한 바위산에 힘들게 올라가서 웅색한 동굴 교회나 찾아다니면서 트래킹을 하다가  유명한 수도원에 잠시 들려서 검은 성모상이나 알현하고 돌아가려니 하고 나섰던 발걸음이었는데.......  이거야 원......  프라도 미술관. 우피치 미술관.  루우브르 박물관에 들려서 나오는 기분이었다.

  '완전 횡재한 날'이 되었으니 어찌 축배를 들지 않을 수 있겠는가?

  우리는 서둘러 발걸음을 옮겨서 수도원에서 유일한 휴계실이자 유일한 레스토랑이며 카페인 곳으로 갔다.  거기에서 줄을 서서 기다려 요기할 빵과 생맥주를 주문했다.

  영원으로까지 우리를 인도 할 것같은 시원한 생맥주가 우리의 목줄기를 타고 내려갔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이시여.  사랑과 존경과 찬양을 받으소서.  땡큐입니다.  땡큐.' (그러고 보니 어쩌다 터져나오는 '땡큐'는 주로 뭔가 먹을때 만?'

 

 

 

 

 

 

 

 

 

 

 

 

 

 

 

 

 

 

 

 

 

 

 

 

 

 

 

 

 

 

 

 

 

 

 

 

 

 

 

 

 

 

 

 

  푸니클라를 타고 다시 바위산 위로 올라간다.

  몬세라토에는  최고봉인 산 제르니모 바위봉우리에 있는 '산 제르니모 교회(기도실)'를 비롯하여 지도에 나와 있는것 처럼 약 15개의 크고 작은 교회(기도처)가 있다.   서두른다면  아마도 하루종일 걸어서 모두 둘러 볼 수 있을것으려 여겨진다.

  이들 교회는 가파른 산길이나 계단을 통해 힘겹게 접근을 허락하는 곳도 있지만,  상당부분은 잘 닦여진 포장도로 구간과 정감어린 비포장 구간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어디를 향해 어느 길을 걷든지 주변의 경관이 아주 빼어나다.  아마도 힘들어 할 겨를조차 없을것 같다.

  이곳을 둘러보는 길은  서너개의 트래킹 코스로 나뉘어져 전혀 불편함이 없도록 잘 정리되어 있다.  단 겨울엔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어 추울것 같다.

  바위봉우리에 올라서자마자 챠밍여사는 이미 주변 경치에 넋이 빠져나가 버리고 말았다.

  '어느 코스를 가볼까?'

  '아무데나.......  가본적도 없으면서 고르긴 뭘 골라?'  하고는 챠밍여사가 벌써 저만치 앞서 나아간다.

  이 할망구.  정말 걷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도대체 망설이거나 머뭇거리는게 없다.  저 앞에 뭐가 있는지도 모르면서........

  와!!!

  와아~~~~아!!

  혹,  훗날 다시 이곳에 올 기회가 생긴다면.......  근처에서 일박쯤 하면서  여기저기 모조리 다녀보아야만 하겠다.  일출도 일몰도 보면서.......

  그날 우리는 전 구간 중에서 거의 절반 정도의 코스를 즐기면서 트래킹 했다.  충분히 줄겁고 행복한 시간이었다.

  '몬세라트 트래킹'  정말 압권이다.  끝내 준다.

  얼핏  조지아의 '데이비드 가레자 트래킹'이 떠오른다.  '거기도 이 할망구를 모시고 꼭 가보아야 할텐데'  말이다.

 

  "세상은 넒고 아직 가보고 싶은데는  많이 남았다.  오!!!!  지극히 높은곳에 계신 분이시여.  부디.......  굽어 살펴주소서."

  아멘!!!!!!

 

 

 

 

 

 

 

 

 

 

 

 

 

 

 

 

 

 

 

 

 

 

 

 

 

 

 

 

 

 

 

 

 

 

 

 

 

 

 

 

 

 

 

 

 

 

 

 

 

 

 

 

 

 

 

 

 

 

 

 

 

 

 

 

 

 

 

 

 

 

 

 

 

 

 

 

 

 

 

 

 

                                                               ---  '검은 성모 조각상'이 발견된  산타 코바 성당으로 가는 길을 '로사리오의 길' 이라 부른다'

 

 

                                      ---  '로사리오의 길'에 있는 여러개 동굴 기도실 중에 한 곳이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만든 조각상들이 이곳에 놓여있다.

 

 

 

 

 

 

 

 

 

 

 

 

 

 

 

 

 

 

 

 

 

 

 

 

 

 

 

 

 

 

 

 

 

 

 

 

 

 

 

 

 

 

 

 

 

 

 

 

 

 

 

 

 

 

 

 

 

 

 

  몬세라트 트래킹을 모두 무사히 마치고 다시 바르셀로나로 돌아가는 카탈루냐 기차 안에서 나는 다시 핸디폰에 저장된 음악을 찾는다.

  "빠~~~~~~ 밤!!!!!!!"

  역시 감동적이다.  이런 상황과 분위기에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선곡하는 나의 탁월한 자질에 스스로 갈채를 보내면서 말이다.

  '근데.......  무슨 말을 했다는거야?  니체가 뭐라 그랬느냐고?'

  '아!  글씨......  그렇게 어려운걸 시방 나에게 물으면 어떻게 하냐고?'

  혼자 묻고 혼자 대답하려니........  속에서 참지 못하고 웃음이 터져 나온다.

  이상한 낌새를 살피고 있는 챠밍여사를 느끼면서 얼른 곡선정을 다시해서 이어폰을 순순히 건네준다.

  크리스 디 버그의 (나타샤 댄스)로 나의 여행 BGM 이라 할 수 있는 곡이다.  챠밍여사가 시선을 다시 차창 밖으로 돌리면서 두 눈을 지그시 감는다.

  왜 뜬금없이 자구 짜라투스투라가 나타나지?

 

 

 

 

 

 

 

 

  나는 지금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방금 전까지 들었었지만,  처음 짜라투스트라를 등장시킨 사람은  '프리드리히 니체'로서,  그의 동명 저서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였다.

  그럼 '짜라투스트라'는 니체가 그의 저서에서 탄생시킨 가상의 인물인가?  아니다.  그는 실존한 인물이다.

  가장 쉽고 간단명료하게 소개를 하자면..........  '인류 최초로 유일신(有一神) 사상을 만들었고,  죽을 때까지 이를 세상에 널리 알린 사람'이라고 하겠다.

  '유일신' 이라고 하자면......  당연히 어디선가 많이 들어본 이야기라고 생각될 것이다.

  영화에 아주 자주 등장하는  무슬림 혁명전사들이 자살 테러를 할 때마다 '신은 하나다.  알라는 위대하다.'라고 외치면서 자폭 스위치를 눌러대는 장면에서 말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당연히.........  '가장 먼저 유일신 사상을 만들어 가졌고  목숨 받쳐서 수호하고 실천한 사람들인 유대인들이 처음이 아니었나?' 하는 의문이 생겨날 수도 있겠다.

  그렇게 따지자면 '신은 하나다' 라고 믿는 종교가 지구상에서는 실로 엄청난 신자를 가지고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유대교도 그렇고  카톨릭. 개신교. 정교회가 그렇고........  이슬람 교가 또 여기에 속한다.  이들은 모두 같은........  한 뿌리에 '유일신 사상'의 근거를 두고 있으면서도........  현실적으로 드러나는 상황을 보다면........  여럿이서 유일신을 여러 조각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는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생겨날 때가 솔직히 있다.  여러 파트로 분할된.......  온전체가 아닌 신(神)도 유일신이라 할 수 있나?  아님 신(神)의 세계에서는 나뉘어 진다는 개념이 아예 없는 것일까?

  삼총사에 나오는 대사처럼.......  '하나가 전부이고......  전부가 다시 하나인것 처럼".........

  그럼 여기에서 등장하는 '유일신(有一神)은 무엇이며 또 누구'를 일컬음인가?

  이들이 말하는 유일신의 전제 조건이자 필요 충분 조건은 오로지 한 가지다.

  '유일신'이란.........  '스스로 존재하는 자'를 일컬음이다.

  유대교.  카톨릭. 개신교. 정교회. 이슬람교가 믿고 따르는 유일신은 스스로를  ' I am I '라고 말씀하신 분이다. 

  그 분께서 스스로를  그렇게 지칭하셨고  스스로 유일신의 지위에 오르셨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께서는 성경에 나오는 바 대로 스스로를 그렇게 칭하셨다'는 이야기가 구전으로 전승되어 오다가 글자로 기록되기  훨씬 이전에...........   '유일신'의 존재를  똑같이 그런 의미를 담아서  똑같이 그렇게 표현하며 정의를 내렸고 주장했던 실존 인물이 바로 (짜라투스트라) 다.  하지만 그는 스스로를 그렇게 표현하고 신의 경지에 오르신 그 지극히 높으신 분과는 달리  그는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똑같은 평범한 인간이었다.

  니체는 (짜라투스투라)를 세상에 끄집어 냈고, 짜라투스트라는 (유일신)이라는 개념을 이 세상에 창조해 냈다.  <혹......  이런것이 불경??????>

  이런것이 와전 되어서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했다던가 '신은 인간의 창조물' 이라는 이야기들이 생겨났던 것도 사실이다.  그렇게 따지자면야 사실은.......  니체가 아니라 짜라투스트라가 그렇게 했다고 보아야 하지 않겠는가?

  짜라투스트라는 사람의 이름이다.

  영어 문화권에서 부르는 (조로아스터)의 본래 명칭이 페르시아어로 (짜라투스트라)다.

  우리는 이 (조로아스터)라는 명칭을  세계사 시간에 유프라테스 티그리스강 유역의 문명발달사를 공부하면서 자주 들었던 이름이다.  시험 문제에도  자주 출제되곤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짜라투스트라와 조로아스터를 전혀 상관이 없는 별개의 이름이라고 생각한다.  아지만 이는 한사람을 달리 부르는 호칭이다.

  그런 사람들이 은연중에 말하는 것을 가만히 들어 보자면..........

  범 기독교와 이슬람이 말하는 유일신은 지극히 온당한 가치와 당위성을 실제의 역사성 위에 거룩하게 발자취를 남긴 현실적인 신성한 종교이자  불변의 신앙으로 여긴다.  그리고 그들 마음속에서 조로아스터 교는  비록 유일신을 말하고는 있으나,  그것은 지극히 원시적인 형태의 토템미즘 이라고 정의한다.

  정말로 그럴까?

  조로아스터는 대략적으로 기원전 6세기 쯤에 이란 지역에서 태어났으며,  나이 서른이 넘어서 신의 계시를 받았고  크게 깨달음을 얻어서 마흔 즈음부터 죽는 순간까지 당시로서는 다신교 사상이 주류를 이루던 현실세계 속에서 홀로 유일신 사상을 고수하는 인류 최초의 위대한 종교적 혁명을 불러일으켰다.

  이 세상은 선신(善神)과 악신(惡神)의 대결장이며......  종국엔 선신이 승리하도록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 과정에서 인간의 의무는 선신의 편에서서 끊임없이 악신에게 대항하는것이라고 주장했다.  최후 심판이 날은 꼭 오며,  그 심판의 날이되면 악신과의 싸움에서 자신이 한 일에 따라 심판과 상급을 구분되어 나누어 받게 된다는 주장이었다.

  어디서 많이 들어 본 익숙한 이야기가 아닌가?

  그는 일흔 살이 넘어서 조로아스터는  부족과 여러 다신교간의 치열하고 복잡한 다툼속에서 암살 당하게 된다.

  하지만 그가 남긴  조로아스터교 신앙은 급속도로 세상 각지로 펴져 나갔다.

  유대교 속에,  범 기독교 신앙속에, 이슬람교와 심지어는 불교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이 유일신 믿음의 영향을 받은 많은 종파들이 스스로 자주적이고 독립적인 종교적 안정체계를 잡아나감에 있어서.......  점차 조로아스터교는 쇠락의 길로 접어들게 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나 홀로  멍때리며 앉아있다보니 어느새 기차는  다시 에스파냐 역에 도착하고 있었다.

  헐.

  신성한 곳에서 싸돌아다니다가 슬쩍 피곤하다 느껴지기 시작하니깐.......  여기는 다시 세속의 현실.......

  까짓,  그래도 여기가 아직은 바르셀로나 아닌가벼.

 

 

 

 

 

 

 

 

 

 

 

 

 

 

 

 

 

 

 

 

 

 

 

 

 

 

 

 

 

 

 

 

 

 

 

 

 

 

 

 

 

 

 

 

 











  ' 그래, 바로 여기였어.  틀림없이 이 장소였어.'  나는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이미 꽤나 많은 시간이 흘러갔지만  1992년 그날의 감동을 나는 여전히 고스란히 느낄 수가 있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개막 축하 공연이 바로 이곳에서 열렸던 것이다.  검은 턱시도을 차려입은 콧수염을 기른 팝스타가 무대 위로 올라오자 사방에서 환호성이 울려 퍼졌다.  그릅 퀸의 리드보컬  프레디 머큐리였다. 그  뒤를 이어 세기의 위대한 소프라노라 칭송받는 이곳 카탈루냐 출신의 몽세라트 카바예가 등장했다.  주변은 온통 열광의 도가니로 변했다.  두 사람은 열창을 토해냈다.  감동의 무대였다.  그때 그들이 불렀던 올림픽 주제가가 바로 (비바 바르셀로나)였다.  하지만 상업적인 흥행에는 실패했다.  이곳은 유독 바르셀로나 사람들에게는 아주 커다란 의미를 부여해주는 장소이다.  카탈루냐 미술관을 배경으로 하고 발 아래로 스페인인 광장을 내려다보고 있는 몬주익 언덕의 중간에 위치한 여기 '카를레스 브이가스 광장'은 카탈루냐 지역의 중심이면서,  또한 오랜 세월동안 끊임없이 자치 독립을 추구하고 있는 카탈루냐 정신의 구심점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몬주익 언덕에 우뚝 서서 거대한 위용을 자랑하고 있는 카탈루냐 미술관이 얼마전까지는 카날루냐 주의 주청사였기 때문이다.  포루투갈이 에스파냐로 독립한 이후로,  오랜세월 카탈루냐는 마드리드 중심의 스페인으로 부터 분리 독립을 꾸준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그 자치독립 운동의 수많은 역사가 고스란히 이곳에 스미어 있는 것이다.  지금 이곳은 바르셀로나 여행에서 꼭 다녀가야만 하는 대단한 핫 플레이스인 것이다.  라스베가스 벨라지오 분수쇼와 두바이 분수쇼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유명한 '몬주익 맥직 분수쇼'가 이곳에서 열리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은 흔히 '바르셀로나 분수쇼'라 부른다.  규모나 내용면에서만 유명한 것이 아니라,  실은 역사적인 면에서도 실로 대단히 소중한 가치를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 겠다.

  바르셀로나에서는 1888년 개최에 이어서 1929년에 2번째로 세계 박람회(또는 만국 박람회)가 열리게되었다.   이미 박람회 개최는 한 도시나 한 국가가 한 단계 발전 도약하는 계기로 충분히 인정받고 있는 대단히 중요한 세계적인 행사였다.

  몬주익 언덕은 고대 로마시대의 아우구스투스 신전부터 현재의 성가족성당 건축까지 가장 중요한 재료인 질이 좋은 돌을 무한으로 끊임없이 제공하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든든한 버팀목이었다.  하여 현지인들은  몬주익 언덕을 바르셀로나의 어머니라 여기며 이끼고 신성시 하고 있다.  그 소중한 언덕을  도심과 연결해 줄 수 있는 가교 역활로 스페인 광장을 계획하게 되었고,  1929년 바르셀로나 세계 박람회의 개최식을 진행할 메인 건축물로 카탈루냐 주청사를 개축하여 지금의 카탈루냐 국립 미술관을 만들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 사람들은 이것만으로는 무언가가 조금 부족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때 '카를레스 브이가스'라는 건축가가 등장했다.  그는  '장엄하면서도 웅장하고 대단히 고급스러운 분수대를 이곳에 설치한다면 그야말로 완벽하게 조화를 이루는 최고의 명소가 될것'이라고 제안을 내놓았다.

  박람회 추진위원회는 그의 제안을 받아들이게 되었고,  카를레스 브이가스는 총 600m 길이의 수로에 120여개의 분수대를 설치하였고,  거기에다 65미터 축의 길이를 갖는 타원형에 3600여개의 호수가 장착된 메인 분수대의 집합군은 마침내 완성하였으니 사람들은 이를 '바르셀로나 몬주익 매직 분수대'라고 부르기 시작한 것이다.

  이 같은 초현대적인 분수쇼가 이미 100년 전에 설계되고 만들어졌다는 사실에 놀라 또 한번 절로 열려진 입을 닫을 수가 없다.

 

 ' 절정적인 여행자들과 마법 같은 바르셀로나의 밤.'

 '우아하면서도 장엄하고 더없이 화려한 분수쇼.'

 

  공연이 약속된 날이었고 날씨는 화창했고.......  충분한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우리는 이미 가장 좋은 위치에 자리를 잡고 앉아 기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몰려드는 사람들로 어느새 광장은 인파로 가득 차고 넘쳤으며  해가 기울자 사방으로 하나 둘 화려한 조명이 켜지기 시작했다.

  카탈루냐 미술관 상층부 계단에 앉아서 길거리 음악가의 노래를 들으면서 건너다보는 바르셀로나의 야경은 충분히 아름다웠다.

  이젠 분수쇼만 시작되면 된다.  더도 덜도 아니고........  마법 같은 분수쇼만 이제 시작되면 되는데........

  헐......

  아뿔싸........

  10분이 지나고.......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어디에서도 작은 애기분수 하나 솟아오르지 않았다.

  모여든 사람들이 술렁대기 시작했다.

  '좀 늦어지는 거겠지.  펌프가 어디 고장이라도 났다 봐.  곧 고쳐지겠지 뭐.'  라고 스스로를 다독이며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러나 끝내 분수쇼는 시작되지 않았다.  어디에서 사전 안내 방송조차 없다.

  1시간반이 지나자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자리를 털고 일어나 계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내 불안한 예감은 왜 이렇게 늘 번번히 들어맞는 것일까?"  "머피가 뭔가 나한테 억한 심정이라도 있는것인가?"

 

  내 여행 이력에는 (행운)이라는 징크스와 (불행)이라는 특이한 징크스가 있다.  이제껏 거의 틀린적이 없다.

  나의 여행에서 '날씨에 대한 행운'은 항상 내 편이었다.

  우기에 태풍이 들이닥치는 여행지로 비를 맞으며 출발을 해도,  하루던 이틀이던 아님 일주일이던  적어도 내가 그곳에 있는 동안만은 날씨가 나를 항상 배려해 주었다.  천기를 살피는 재주도 없는데......  늘 그랬다.  내가 떠나오자마자 폭우가 들이닥쳐 침수가 되고,  내가 떠나오고 주말이 지나 60년 만의 한파가 들이닥치기도 했다.  그래서 난 아무리 일기예보가 어떻다고 해도....... 내 영행 스케줄 상의 날씨 걱정은 전혀 하지 않고 다닌다.  정말 신기할 정도다.

  (불행)을 예로 든다면........  이제껏 제대로 일몰을 본 적이 거의 없다.  더 구차하게 설명하지 않아도.......  나만 쫓아가면 멋진다는 그 유명한 일몰이 자취를 감춘다.  그래서챠밍여사에게도 나와 여행하는 동안에는  '일몰 풍경에 대한 기대'는 아예 버리라고 당부한다.

  그리고 거기에다 이번에 하나 더 보태게 되는것이..........  '나와 분수쇼는 인연이 없다'라는 새로운 징크스가 생기게 된 것이다.

  아르메니아 여행에서 이미 두번이나 분수쇼를 놓쳤는데......... 바르셀로나 까지.......  왜 나만 쫓아가면 멀쩡하던 분수쑈가 시작을 안하느냐고?

 

  '챠밍여사야.  일몰 풍경이나 분수쇼를 보고싶으면........  당신 혼자 가.  난 이미 포기했어.  알았지?'

 

 

 

 

 

 

 

 

 

 

 

 

 

                                                                                                             ----  위 4장의 분수쇼 사진은 (구글 이미지)에서 퍼 왔음. 

 

 

 

 

 

 

 

  분하다 못해 통분하다.

  실로 이런 어처구니가...........

  원안대로라면........  우리는 당연히 저렇게 아름답고 화려하고 품위있는 공연을 보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왜?

  지금까지도 우리는 그날 왜 공연이 없었는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  바르셀로나 당국에 질의 내지 보상을 요구하고 싶지만.......  스페인어를 못해서리.....

  우라질 놈(?)들........  콱........

 

 

 

 

 

 

 

 

 

 

 

 

 

 

 

 

 

 

 

 

 

 

 

 

 

 

 

 

 

 

 



  다음날 아침.

  오늘은 바르셀로나를 떠나는 날이다.

  길다면 길었고 짧다면 짧았을  근 한달간의 여행을 마치는 날이다.

  여러가지로 여운은 많이 남지만........  절박하리만치 아쉬움이나 미련은 또 없다.

  떠나옴도 여정의 한 단계였고,  이제 돌아감도 또 여정은 한단계일 뿐이니까.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에 함께 할 여정은 아직도 많이 남아있고.......  곧 또다시 새로운 시작으로 다가올테니까 말이다.

  그러자면 우선 중요한것은.......  쿨하게 이번 여행을 잘 마무리하는것이 우리에게 남은 최우선이라는것을 잘 알고있으니까 말이다.

  그리 많이 남아있지 않은 시간을 쪼개서 우리는 또 새벽 산책에 나섰다.

  우리가 며칠동안 머물렀던 동네를 돌아본다.

  시계를 살펴보니  짐 싸서 공항으로 가는 시간이 그리 넉넉치가 않다.  하지만........  조금만 더 바르셀로나를 느껴보고 싶다.

  우리는 발걸음을 서둘러 뛰다시피......... ' 바르셀로나 개선문'으로 향했다.

  '여기까지 왔는데  보고 가야지?  개선문 바로 옆에 있는 노천 카페가 인상적으로 느껴졌어. 스페인에서 마지막 아침은  그곳에서 커피랑 츄러스 어때?'

 

 

 

 

 

 

 

 

 

 

 

 

 

 

 

 

 

 

 

 

 

 

 

 

 

 

 

 

 

 

 

 

 

 

 

 

 

 

 

 

 

 

 

 

 

 

 

 

 

 

 

 

 

 

  지난번 여행에서 돌아와 여름 가을이 다 지나도록 무척이나 바쁜 시간을 보냈더랬습니다.

  준비된 자료나 사진들로 여행기를 1회나 2회 정도는 더 늘려서 연재 할 수가 있었는데  사정상 이쯤에서 지난 여행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2월 이탈리아 몰타 여행기를 절반도 소화하지 못한 상태에서 5월에 스페인 포루투갈 모로코를 향해 훌쩍 떠나야만 했던 기억이 새롭습니다.  이제 5월 여행기를 마쳤으니,  다시 2월 여행기로 돌아가겠노라고....... 일전엔 그렇게 말했었는데.......  그것도 .........

  암튼 이번 여행기나마 모두 마치게 되었음을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찾아주시고 읽어주신 분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전합니다.

  여행기를 갑자기 서둘러 마치는 이유는.........  시간이 부족해서랍니다.

  배낭을 다시 꾸려야만 해서입니다.

  당장........  지난 여행에서 돌아와 그대로 방치한 배낭과 작은 가방등을 오늘 중에 세탁해서 말려야 하고.........  최소한 오늘 중에  카메라와 써브 카메라를 청소 정비를 마쳐야 하겠네요.  내일중에는  각종 서류를 프린트하고  여행 준비물들을 하나하나 다시 챙겨야지요.  저녁에 배낭이 다시 꾸려져 있어야만 하겠기에 그렇게 되었답니다.

  모레 새벽에 출발 한답니다.  당연히 챠밍여사를 모시고 떠나지요.

  첫 목적지는..........  이스탄불 입니다.

 

 

 

 

 

   ----   한 달쯤 뒤에 다시 연재를 시작하겠습니다.   다음 여행기를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