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에 간다고 하면 적어도 스페인을 여행해 본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이렇게 말한다.
'가슴을 울리는 천재 건축가 가우디의 작품에 푹 빠졌다 돌아오셔'라고 입을 모은다.
그러면서도 무엇인가가 아쉬운듯.......... '몬주익 언덕에서 내려다보는 바르셀로나의 풍경도 빼놓으면 안돼'라고 덧붙인다.
'카탈류냐 음악당에서 펼쳐지는 클래식 공연도 잊지못할 추억이 될거야' '지중해의 맛과 향이 가득한 해산물 요리를 빼놓으면 절대 안돼' 라는 당부가 쉬지않고 이어진다.
그런 당부들을 들으면서 스페인으로 떠났던 내가......... 이제 바르셀로나를 다녀온 입장으로 다른 누군가에게 한 마디 조언을 한다면........ '람블라스 거리와 고딕지구에서 여행의 즐거움과 낭만을 실컷 즐겨보길 바래. 그곳이 바로 바르셀로나야.' 라고 말해주고 싶다.
이제 발걸음을 바르셀로나의 람블라스 거리로 옮겨가고자 하는 여행자가 있다면 간단명료하게 다음처럼 정리 조언을 해주고 싶다.
바르셀로나의 랜드마크이자 중세 이후의 오랜 역사를 느껴보고 싶다면 시계도 지도도 모두 내팽개치고 무조건 (람블라스 거리)로 가라. 그리곤 시선이 쏠리고 발길이 향하는대로 어디든무조건 실컷 걸어라. 시간이 지나면 알게 되리라. 바르셀로나를 모두 그곳에서 만나보았었다는 것을........
바르셀로나의 현재와 젊음을 느껴보고 싶다면 무조건 (라발 지구)로 가라. 현대 미술관들이 즐비하고 흡사 우리네 대학로를 연상시킨다. 패션숖. 갤러리. 퓨전 레스토랑들이 몰려있고, 바와 클럽들이 즐비한 저럼은이들의 아지트가 바로 이곳이다.
바르셀로나의 전통과 품격이 살아있는 (고딕 지구)는 여행자의 발걸음을 마구 끌어당기는 묘한 마력이 숨쉬고 있는 곳이다. 대성당과 왕궁, 그리고 귀족들의 저택이 주변에 산재해 있다. 오랜세월 바르셀로나가 가졌던 모든 시간과 공간의 한복판이었던 곳이다. 쉽사리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그런 곳이다.
상큼한 낭만과 이국적인 정취에 흠뻑 취해보고 싶다면 (보른 지구)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흡사 우리나라 삼청동 같은 분위기라면 쉽게 이해가 될까? 젊은 디자이너들의 감성과 재치가 번뜩이는 매력적이며 대단히 독특한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는 곳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피카소 미술관이 자리하고 있다.
스페인을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콜럼버스를 바르셀로나에서 만나보고 싶다면 (바르셀로네타)로 가면 된다. 아름다운 해변과 산책로가 지친 여행자를 반갑게 맞이해 준다. 바다를 향해 열려있는 분위기 짱나는 레스토랑과 카페와 쇼핑몰들이 들어서 있다. 그리고 파란 지중해가 그곳에 넘실대고 있다.
굳이 황영조 선수를 떠올리지 않더라고....... 바르셀로나의 전경이, 특히 지중해에 안겨있는 구시가가 한눈에 들어오는 (몬주익 언덕)은 흔히 바르셀로나의 테라스라고 불린다. 언덕의 숲속에 자리한 '미로 미술관' 또한 이곳을 찾는 여행자의 가슴을 설레이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그리고 구시가지를 벗어나......... 가우디와 모디니즘을 대표하는 건축가들을 만나고 싶다면 (에이삼플라 지구와 신시가)를 돌아보기로 하자. 19세기 이후 도시재개발로 새롭게 탄생한 신도심의 그라시아 거리를 중심으로 가우디를 비롯한 모더니즘 건축가들의 작품이 사방에 산재해 여행자의 방문을 기다리고 있다.
가우디의 작품이 아니라도 좋다.
굳이 그것을 따질 이유도 없다.
초대형 간판이나 화려한 네온싸인에 휩싸이거나 가려지지 않은........ 건물의 뽀얀 진면목이 고스란히 잘 드러나 있다.(부럽다)
우리나라 도심에선 이런 건축물이 눈에 띄지 않는다는 것이 아쉽고........ 혹, 가우디의 여기 작품을 압구정으로 옮겨본들........ 수일내로 간판과 네온싸인과 현수막으로 뒤덮인다면...........
내가 유럽여행에서 느꼈던 부러운 점 3 가지만 꼽아본다면.........
1. 1년 365일의 대부분의 날씨가 우리나라의 어쩌다 맑고 공활한 가을하늘 같다는 점.(미세 먼지로 인해 애국가의 3절 가사를 바꾸어야만 하지 않을까?)
2. 돌을 다듬어 깔은 보도 블럭의 수명이 천년이 지났어도 여전히 그대로 쓰고 있다는 점.(연말이면 으례히 연례행사처럼 새로 보도블럭을 깔고있는 재정이 넘칠대로 넘치고 풍요롭기가 이세상 최고인 우리나라 지자체의 그릇된 행태와 비교해 볼 때)
3. 유럽에서 가장 흔하게 눈에 띄는 녹색 네온싸인 간판은 오로지 (약국)이었다. 유럽 각지의 대부분 건물은 애초의 의도와 완성된 본 모습대로 건축물의 얼굴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덕지덕지 덧칠한 간판과 네온사인이 마치 세월의 흔적과 못생긴 진면목을 감추기 위하여 회칠하듯 분장을 넘어서 가면을 쓴 과부의 씁쓸한 모습을 억지로 불유쾌하게 쳐다보아야만 하는 우리네 길거리 분위기와는 차원이 다르게 느껴진다.
한국인의 정서 속에는 '여백의 미'가 숨겨져 있다고 누가 말했나? 대한민국의 밤거리에서 '여백의 미'란 과연 어떤것일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Christopher Columbus)'.
그의 이름은 이탈리아어로 '신(神)의 부름을 받은 비둘기)'라는, 벌써 어딘지모르게 선입견 처럼 신성스러운 느낌을 듬뿍 안겨주는 그런 멋진 이름이다.
하지만 그의 내면이....... 그가 시간과 역사속에 남겨놓은 삶과 업적도 그렇게 신성스러웠을까?
굳이 공(功)과 과(過)를 따질 필요가 있을까 싶다.
세비야의 카데드랄 안에 있는 '콜럼버스의 묘'를 보았을 때, 그는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선각자요 탐험가이며 개척정신으로 똘똘 뭉친 위대한 영웅이었다.
그라나다 거리에서 커다란 그의 동상을 만났을 때도 그는 여전히 성공하여 위대한 업적을 남긴 훌륭한 인간승리자였다.
그라나 이곳 바르셀로나에서 높이 50m나 되는 거대한 탑 위에 위풍당당하게 서 있는 그의 동상을 보고있노라니...... '정말로 저렇게까지 지지와 추앙을 받을만큼 성스러울 정도의 위대한 업적을 이룩한 승리자였을까?' 하는 강한 의문과 함께 '이건 너무 심하잖아?' 하는 적지않은 식상함 마저 들었다.
이쯤에서 한번쯤은 많이 드러나지 않은 그의 진면목을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는 침략자요, 광포한 약탈자였으며 파렴치한 노예사냥꾼이었다.
그가 신대륙 발견에 성공하고 그곳으로부터 수많은 물자와 금은보화를 들여 와서 에스파냐의 부흥에 크게 공헌한 것은 사실이고, 이는 곧 그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이사벨 여왕에게 커다란 영광이었겠으나........ 실은 그런 긍정적인 시간과 사건들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얼마지나지 않아 파국으로 치닫게 되기 때문이다.
콜럼버스 중심의 위인전기에서는 그가 신대륙으로부터 엄청난 재화와 물자를 들여와 에스파냐 제국 형성과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점차 황금과 향락과 사치에 눈이 먼 왕족과 귀족들의 배척과 음모로 엄청난 시련을 격으면서 급격하게 쇠토의 길로 접어듯었다고........ 연민과 위로를 자아내게 꾸며져 있다.
하지만, 분명 역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급격한 성공에 도취된 콜럼버스는 곧 인간말종으로 변질되어 간다. 신대륙의 황금과 은을 싹쓸이 한 콜럼버스는 (그가 꿈속에서 상상했던 인도와 중국처럼 금은보화가 넘쳐나지 않았다) 더 많은 금은 보화 착취를 위해 수많은 원주민을 학대하고 살륙했다. 그럼에도 더 이상 금은보화가 나오지 않자...... 이번엔 (노예 장사)로 눈을 돌렸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을 유럽으로 데려다가 노예로 팔았다. 그가 퍼트린 '엘도라도의 꿈'은 유럽의 상당수 부유층들을 신대륙으로 이동하도록 만들었다. 원주민 노예 장사에서 큰 이득을 본 콜럼버스는 이번엔 아프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을 잡아다가 신대륙에 정착하고자 하는 유럽의 상류층과 부유층에게 팔아 막대한 이득을 얻었다.
그의 파렴치한 만행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마침내 그의 혐오스런 소문들이 스페인(에스파냐) 왕실에 까지 흘러들어갔다.
스페인 카톨릭은 경악했고, 이사벨 여왕은 치를 떨었으며, 로마 교황청은 그를 파면시키기로 하는 논의까지 벌어졌다.
마침내 이사벨 여왕은 신대륙에 체류하던 콜럼버스의 본국 송환을 명령했다. 부적절한 소행으로 소환당하는 처지이면서도 콜럼버스의 황당한 위세와 만용은 그칠 줄을 몰랐다. 결국 그는 송환되는 배에서 체포되어 수갑에 채워져 선상 창고에 갇히는 신세로까지 전락한다.
그래도 그는 믿는 구석이 있었다. 이사벨 여왕만큼은 자신을 내치지 못할 것이라는 자신이 있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이사벨 여왕이 사망한 것이다. 스페인의 카톨릭계와 귀족사회가 끝끝내 콜럼버스의 파행과 차마 인간으로서 하지 말았어야 할 과오에 대해서 정식 재판을 청구했다. 스페인의 영웅에서 스페인의 망신단지에다 애물단지로 전락하고 만 것이다.
하루아침에 비참한 신세로 전락해버린 콜럼버스는 이래저래 화려했던 과거에 도취된 채 재기를 도모하다가 쓸쓸하고 비루한 모습으로 스페인 땅에서 사망한다. 죽는 순간까지도 그는 자신을 내버리다시피 냉대한 이사벨 여왕과 스페인 카톨릭과 스페인 정치계를 증오하고 저주했다.
그런 그를 죽은 후에도 모든 스페인 사람들이 냉대하고 질시하고 무덤에 침을 뱉었다.
이를 견디다 못한 그의 후손들이 그의 유해를 거두어 대서양을 건너...... 그가 처음 신대륙에 말을 내딛었던 바하마 제도의 한 섬에 이장 안치시켰던 것이다.
세월이 지나고........ 역사도 재평가 되듯이...... 콜럼버스에 대해서도 재평가가 이루어지고........ 한 개인이나....... 혹은 국가나 왕조나...... 공이 있고 또한 과가 있다는 전제하에서......... 콜럼버스에 대한 복권 아닌 복권이 이루어지고.........
결국은 지금의 스페인 여행자들이 알고 인식하고 있는 정도에서 콜럼버스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진 결과로......... 바하마에서 미국을 거쳐서 스페인으로 돌아와 세비야 카데드랄에 아주아주 멋진 장소와 방법으로 잠들어 있는 것이다.
유럽의 시각에서는 신대륙을 발견한 개척자이겠지만, 아메리카 원주민의 입장에선 악마와도 같은 침략자였다.
세상살이에서 결과는 언제나 하늘의 몫이다.
하지만 그 과정은 언제나 우리 인간의 차지이다. 노력의 결과에 따라서는 언제든지 그 결과가 변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 만약 그러한 과정에서의 노력여하에 따른 변화가 불가능하다면...... 인간은 다른 미생물과 다를 바가 없게된다. 그냥 운명에 순종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노력의 과정에는 인간 스스로에 대한 존엄성과 더불어 사는 인류에 대한 배려와 책임이 반듯이 수반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야말로 생의 임무와 인간적 삶의 기본가치라고 적어도 나는 생각한다.
콜럼버스에겐 그런 배려와 책임이 없었다.
그는 지금 세비야 대성당에 4명의 스페인 왕들이 어깨에 둘러 멘 웅장하고 호화찬란한 묘지에 올려져 잠들어 있다.
그 광경에 수많은 여행자들이 탄성을 자아내고 그에게 한없는 공경을 표한다. 나 역시도 그런 한 여행자에 속한다. 그럼에도........
그 놀라운 광경의 이면에........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콜럼버스가 멋진 조각상들에 떠들려서 허공에 안장된것은......... '그가 가졌던 삶의 과정에서 저지른 죄와 만행이 너무도 엄청나서 그에게는 인간 누구에게나 기본적으로 허용되는 땅을 밟고 살고 땅속에 자유롭게 묻힐 수 있는 최소한의 기본 자유이자 자격을 박탈당했기 때문이요. 대성당의 깊숙한 곳에 안주하였음은 감히 맨얼굴로 태양을 당당하게 바라 볼 염치가 모두 사라졌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말해주고 싶다.
1926년 6월7일 저녁무렵, 바르셀로나의 디아고날 거리(대각선 도로)에 남루한 차림의 노인 한명이 도로 한복판에 서서 모든 신경을 건축중인 파밀리아 대성당의 첫번째 종탑에 쏟으면서 마냥 올려다보고 서 있었다. 그의 곁으로 수많은 행인들이 도로를 가로질러서 오고가고 있었지만 아무도 그에게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때 저만치에서 노면전차(트램)이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었다.
으례히 수많은 행인과 마차들이 대로를 가로지르며 다니던 시대인지라 전차의 운전기사는 그저 일상처럼 곧 알아서들 피하려니 하고는 별로 신경을 쓰지 않았다. 무엇인가가 쿵 하고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사람들의 비명소리가 울려퍼지기 전까지 운전 기사는 교통사고가 벌어졌다는 사실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사람이 전차에 치었다. 방금 전까지 도로 한복판에 서서 성당을 올려다보던 노인이었다. 아마도 귀신에 홀리기라도 한 모양이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전차가 움직이는 진동과 소움과 이따금씩 울려대는 경적소리를 듣지 못할 수가 어디있단 말인가?
지독하리만치 남루한 복장과 수염이 덮수룩한 길바닥에 나뒹구는 노인은 누가 보아도 가난에 찌든 병든 노숙자의 모습이었다. 술에 취한것 같지는 않았지만........ 어쩌면 고단한 삶에 지쳐서 일부러 전차에 뛰어들었을지도 모른다고 모여선 대부분의 사람들은 생각했다.
자살을 시도한 노숙자 노인 하나 때문에 전차의 운행에 차질을 빚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 전차 기사는 쓰러진 노인의 신체를 전차 길에서 옆으로 밀어내고 마치 아무일 없었다는 듯이 전차를 다시 출발 시켰다.
전차가 저만치 사라져가자 사고를 목격하고 몰려들었던 사람들도 하나 둘씩 자리를 떴다. 아직 숨이 붙어있을지도 모를 부상당한 노인은 그대로 대로변에 방치되었다. 어쩌면 머지않아 도로를 순찰하던 경찰이 발견을 하고 나름 조치를 취할것이라고들 지극히 당연한 일상처럼 생각하고 제 갈길을 갔다.
한참이나 시간이 지나서 한 젊은이가 쓰러져 방치된 노인을 발견하고는 경찰에 신고를 했다. 곧 경찰이 달려왔다.
아직 숨이 붙어있는 노인의 차림새를 살펴본 경찰의 표정엔 귀찮은 불편함이 가득했다. 정말 재수 없는 근무 날이라는 심사가 얼굴에 고스란히 묻어났다.
지나가는 차를 붙잡아 싣고는 인근의 큰 병원으로 갔다. 하지만 그 병원에서는 제대로 살펴 보지도 않은 채 이미 회생 불능 상태니 데려가서 장례절차나 준비하라고 쫓아냈다. 택시에 태워서 인근의 병원 두 군데를 더 돌아다녔지만 모두가 한사코 환자의 진단마저도 거부했다. 너무도 초라해 보이는 환자의 행색을 보아하니 진료비도 받아내기 힘들것이고, 나아가 입원 치료까지 시키게 된다면 엄청난 손해를 볼 수도 있다는 선입견에서 였다.
그때까지도 노인은 의식은 없었지만 다행히 아직 생명은 살아있었다.
결국 다시 멀리 떨어진 적십자 병원까지 가야만 했다. 다행히 그 병원의 젊은 의사는 양심과 책임이 살아있는 사람이었다. 젊은 의사는 구질구질한 노숙자 차림의 환자를 급하게 수술대에 눕히고 가까이 다가서는 순간............
'선생님께서 어떻게........... 이분은 안토니오 가우디 선생이십니다. 어서 파밀리아 관계자에게 연락을 취해주세요...........'
그 순간 병원에 난리가 났다.
아니 바르셀로나가 그야말로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온 스페인이 거대한 충격속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안토니오 가우디는 다시 깨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인생의 후반을 온통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 바치던 가우디는 그날....... 두번 째 종탑이 완성되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다음 공사에 대한 수많은 생각들과 상념에 빠져든 채 미처 전차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변을 당한것이다. 초기 두 개의 종탑과 지하 예배당만을 그의 손으로 직접 이루어 놓고 안타깝게 이승을 하직하고만 것이다.
그의 죽음과 관계된 많은 사람들이 줄줄이 법적인 책임을 넘어서 스페인 사회와 카톨릭으로부터 징계와 처벌을 받았다.
그는 수많은 위대한 건축 작품들을 남겼다. 세계 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7개의 건축물 외에도 말이다.(이는 영원히 불가능한 기록으로 남을 것이다)
한마디로 '바르셀로나는 가우디 건축의 전시장'이다.
스페인에....... 바르셀로나에 왔으니 '가우디의 건축 세계'를 보지 않을 도리나 방법은 없다.
그래서 열심히 우리도 돌아 보았다.
어깨에 부딪치고 발부리에 걸리는 사람이 대부분 한국 사람들이다. 이거야 원........ 순전히 광화문 광장 분위기다.
하여.........
대부분의 여행자들이 억지 춘향 격으로 퍼다 나르는 '가우디 건축에 대한 이런저런 이야기'는 웬만하면 나의 여행기에서는 이제 가능하면 생략하거나 줄여보기로 해야겠다. 줄이고 살펴서...... 덜 알려졌거나 새로운 이야기라면 모르겠지만........
하여....... 비센스 주택. 구엘 궁전. 카사 바트요. 카사 밀라는 그냥 여행사진만으로 대신하고 지나갈까 한다.
왜?
글 쓰는 사람 마음이니까.......... ㅎㅎㅎ
여행다녀 왔거나, 또 가려는 사람이거나, 스페인에 관심있는 사람들은 이미 가우디 건축에 대해서 물리도록 들어보았을 테니까 말이다.
혹, 아니라면........ 여행 전에 공부를 좀 더 하시던가......... 아님, 혹여 다음에 다시 이야기 해 볼 기회가 있지 않을까?
바르셀로나 도심을 걸어다니다가 사람들이 바글바글 모여있으면 그것은 곧 가우디의 건축물이 놓여있는 장소라 생각하면 된다. 거기다가 여행자들이 주로 이용하는 빨간 2층버스라도 서있다면 십중팔구 틀림없다.
그런 관점에서 따져본다면 바르셀로나의 수많은 건축가들은 상당히 속상할것만 같다. 가우디를 제외하고도 가우디 못지않은 훌륭한 건축가들이 바르셀로나에는 상당히 많이 있다. 산 파우 병원과 카탈루냐 음악당을 설계한 '루이스 도메니크 이 몬타네르'만 해도 스페인을 대표하는 건축가다. 하지만 적어도 이곳에서만은 모든 건축의 가치 기준이 오로지 가우디이기에 다른 그 어떤 건축가도 이곳에서만은 제대로 평가받고 인정받기가 사실상 불가능하게 생각된다. 길을 걷다가 눈에 탁 띄는 이색적인 건물이 보이면 '이것도 가우디 작품이야?' 하는 소리가 저절로 입밖으로 터져나오니까 말이다.
길 가다가 부딪치는 돌부리 만큼은 아니겠지만 바르셀로나 여기저기에 가우디의 작품들이 늘어서 있다.
하지만, 지하철을 환승해가면서 부러 찾아가야 하는 아주 유명한 가우디의 작품도 있다.
기실은 이것도 미완성인 채로 남겨졌지만 지금은 그냥 시민공원으로 개방되어 있다. 물론 지금은 다시 유료공원화 되었지만......
메트로 3호선 발카르카 역에서 내려섯가파른 언덕길을 아주 한참을 걸어올라가면(보행자용 에스컬레이터가 있지만 이날은 멈추어 서 있었다) '구엘 공원(Parc Guell)'의 후문이 나온다. 이곳은 바르셀로나 전경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멋진 전망대이기도 하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모습도 보인다.
'구엘 공원'.
가우디의 후원자였던 구엘은 이곳에 영국풍의 조용하고 전원적인 고급 빌라촌을 만들고 싶어 했다.
하여 가우디는 이곳의 설계와 시공을 맡았다. 제법 가파른 언덕과 너른 면적 위에 작업이라 여러가지 난항을 겪었지만 나름 공사는 순조로웠다. 그러다가 구엘이 사업적으로 어려움을 격으면서 자금난에 시달리게되고 또 구엘이 갑자기 사망함으로써 결국 고급 빌라촌의 공사는 중단되고 말았다.
오랫동안 방치되었던 이곳을 바르셀로나 시가 사들여서 도시 시민 공원으로 조성을 한 것이다.
형형색색의 타일과 모자이크가 유독 아름다운 앙증맞은 건축물들이 여기저기 숲속에 놓여있다.
파도가 넘실거리는 듯한 벤치며 스머프들이 튀어나올것만 같은 수위실이며 도마뱀 분수가 인상적이다. 86ㅏ개의 돌을 쌓아만든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공간은 애초 시장이 들어설 자리였다.
구엘 공원의 산책은 이곳을 찾는 여행자들에게 여러가지 상상력을 동원하게끔 만들어 준다.
온통 가우디의 발자취를 따라 하루를 보내고 숙소로 돌아가는 시간, 지하철을 환승하면서 가던 중에 문득........ '그래도 가우디의 대표작이라면 사그라다 파밀리온 성당 아니겠어? 성당의 야경은 어떤 모습일까?' 하는 의문이 생겨난다.
그러니 어쩌겠어?
거의 도착한 숙소 앞에서 다시 지하철을 바꿔타고 두 불럭 떨어진 파밀리온 성당으로 발걸음을 옮겨볼 수 밖에.......
달랐다.
낮에 보던 성당의 정취랑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솔찍히는 낮에 보는 성당이 훨씬 아름답다.
어느덧 제법 늦은 시간....... 하늘에선 빗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하는데.......
우리는 나란히 손을 잡고 이역만리 머나먼 타국의 밤거리를 터덜터덜 걷는다. 스페인이면 어떻고 포루투갈이면 어떠리...... 우린 걷고 또 걷는다.
--- 다음 이야기에서는 또 다른 덜 알려진 가우디의 작품들을 찾아가 만나 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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