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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아내와 함께 떠나는 '르네상스 산책'

by 피안재 2020. 1. 28.

































  '어찌되었건 들어오긴 들어왔는데, 입구만 있고 출구가 없는 집에 갖혀버리고 말았다.'


  세월은 무심하게 흘렀고.......  어느새 나이줄은 길어질만큼 길어졌다.

  육십갑자의 ‘갑(甲)’이 또다시 제자리로 되돌아왔다고하니.........  남의 속도 모르는 남들은 나에게 축하를 건네온다.(還甲) 

  나 역시 사람인지라.......  어찌 회한인들 없을소냐?

  어느날 문득 멈추어 서서 뒤를 돌아다 보니.........  이 길은 애시당초 내가 걸어가고자 했던 그 길이 아니었다.  이미 나는  본래의 길에서 너무도 멀리 떨어져나와 있었다.  몸도 마음도 많이 망가지고 헝클어져 있는 중년을 훌쩍 넘긴 한 사내가  어느 낯선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마음이야 서둘러 되돌아가고 싶지만..........  그제서야 '시간은 되돌릴 수 없다'는 옛 사람의 말씀이 생각난다.

  그래도......  예쁜 손녀 태리가 있고,  반듯한 아들에다가 그를 끔찍히 아껴주는 딸(며느리)도 얻었겠다,  거기다가 두번째 손주까지 잉태된 처지이고 보면.......  나름은 '아쉬울것 하나도 없는 내 나름의 삶이 분명히 있었지'라며 스스로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보기도 한다.

  물론 그 이면엔 딱 한사람.........  마눌님에게 상처주고 아품주고 했던 시간들도 고스란히 배어있겠지만........

  어찌되었건,  '이만하면 내 삶도 그럭저럭 그런대로............'  아닐까?

  아직은 내가 할 일이 많이 남아있다는 사실을 자각하고, 건강하고 생활의 의욕이 넘쳐나고  젊은날만큼은 아니겠지만 불타는 투지가 아직은 남았으니......

  그런데......

  그랬음에도......  하루하루 지날수록 답답해져만 가는 이 가슴속은 왜일까?



  TV를 보고 신문과 잡지를 보고 SNS를 둘러보아도......  세상은 온통 캄캄한 암흑천지다.

  눈을 들어 생활의 주변을 둘러보아도 사방을 통털어 어디나 매한가지다.

  60년 동안 저만치 앞쪽의 파란 하늘을 향해 달려왔건만.........  파란 하늘 아래 산넘어 남쪽에는 따스한 봄바람이 불고 있을것이라 믿었었건만........

  정의의 여신이 들고있는 칼은 녹슨지 오래이고  다른손의 저울은 무게 중심이 오래전부터 서서히 어긋나 있다.

  이 세상에 과연 정의가 있을까?

  선출되면 합심해서 이 세상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겠노라고 썰을 풀던 작대기들은  둘이 만나면 양대 분파요,  셋이 만나면 삼국지파로 나뉘어 죄다 눈깔을 까뒤집고 박이 터지게 싸우는게 일이다.  정의의 신이 아니래도 좋겠다.  요새 귀신은 뭐 잡아먹고 사나?  저런 작대기들 좀 잡아먹어주면 내가 신전이라도 지어주고 받들어 모시고 싶은데 말이다.

 일제 식민사관에 입각한 피교육생의 처지와 국가외 민족의 미래를 걱정하던 시기가 나에게도 있었다.  아주아주 잠시였지만 말이다.

  그때의 교육을 바탕으로 우리는 적어도 한 세대 이상을 살아왔고,  다시 우리 세대들에 의해서 교육되고 사회생활을 시작하는 우리의 아들들의 세대를 조금은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 것이 얼마였던가?  그리고.......  그 아들들의 세대가 가르치고 있는 현실과,  그 아들세대의 가치관과 교육속에서 배출되어 이제 다시 세상으로 나아가야만 하는 후세들을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지극히 어둡고 암울한것이 솔직한 나의 고백이다.

  '너  나중에 커서 도대체 모가 될려고 그러니?'라고 아버지는 내게 간혹 따지듯이 묻곤 하셨다.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되려고 이러는지 도무지 모르겠다'라고 혼자 중얼거리면서도........  나는 아무에게도 그런 말을 되묻지 못한다.

  크리스마스 이브에 씁쓸한 심정으로 친구와 술 한잔 거나하게 나누고  도시의 밤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가는데........

  어디에서도 크리스마스 캐럴이 울려퍼지지 않는다.

  교회뿐만이 아니라  빵집에도 서점에도 레코드 가계에도 심지어 구두닦이의 오두막이나 논두렁을 막아 설치한 스케이트장에도 놓여있던 크리스마스 트리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성탄 특별 찬양예배나 학생부 발표회의 연극이나  새벽송 돌기는 이제 추억을 너머 까마득히 먼 과거속으로 사라졌다.

  힘들고 못살던 시절에도 겨울이면 구정이 지날때까지 여기저기서 크리스마스 트리가 뻔쩍거렸는데.......  저작권료 때문에 캐럴을 못 들려준다고?

  개뿔!!!!!!

  크리스마스 캐럴이 들려오지 않고  크리스마스 트리가 없는 대한민국 교회는 현재 고사(枯死)가 진행중이다.

  그넘의 저작권은 부자 대형교회가 먼저 나서서 해결해야만 했다.  십일조로 모자라면 감사헌금을 땡겨서라도,  그것도 안되면 건축헌금이나 특별헌금을 땡겨서라도,  아니면 전교인 서명운동을 벌여 국가 지원금이라도 끌어다가 트리를 장식하고 캐럴 송을 울려퍼지게 하여야만 했다.  그게 살아있다는 증거니까.

  이슬람 세계와 빈민국에 전도를 한다고 선교사를 파견하는데 혈안이 될것이 아니라,  수많은 옛어른들이 앞서 헌신과 봉사와 희생으로 여기까지 교회를 이끌어오셨음에 감사하기 위해서라도  크리스마스를 기독교 최대의 명절로 성대하게 치루었어야만 했다.

  크리스마스 행사를 모두 없애니........  목회자도 신자도 한없이 편해졌다.  행사준비에 시간 경비를 절감하게 되었고.......

  크리스마스 이브에 길가에 번듯이 놓인 교회를 살피니........  달랑 십자가에 불 하나만 켜져있고 철문마저 육중한 자물쇠로 단단히 잠겨져 있다.

  문을 굳게 걸어잠근 교회라........  '교회는 과연 뭐하는 곳이지?'

  밤늦게 길을 잃거나 길거리 노숙자나  부랑자는  하느님이 굽어 지켜보시는 길 잃은 양이 아니고........  정해진 예배시간에 십일조와 감사헌금만 들고 찾아오는 사람만이 순한 양이라면...........  종교 개혁은 왜 했지?  그곳도 그들만의 리그인가?

  어쩌면 머지않아 교회의 모든 예배를 통털어 금요일 저녁에 단 한번만 하게될지도..........  교회 가는게 번거로우니까?  휴일은 다른일이 더 중요하니까?

  그러다 좀 더 나아가면.........  SNS를 통해서 예배 보지 뭐.  홈 쇼핑처럼  유명 강사가 인도하는 인터넷 교회가 대안으로 떠오르겠지 뭐.

  이쯤이면.........

  도대체 출구가 어디란 말인가?

  신은 여전히 침묵만을 고수하시고...........

  세상은 점점 아비규환 속으로 치닺고 있는 느낌이다.

  이럴땐 어떻게하면 좋을까?

  이런 암흑기가 오늘에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마냥 신(神)만을 오매불망 기다릴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종국에........  신을 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어쩌면 그 누구도 신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인류가 멸망하는 그 순간까지도........

  신이 있고 없고를 논하는것은 결코 아니다.(나는 부족하지만 분명 세례를 받은 현재 진행형 기독교인이다)

  우리는(인간은)  되돌아가야만 한다.

  스스로를 다시 진지하게 돌아보아야만 한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 이 문제를 해결하고 난관을 극복해 나가야만 한다.

  어떻게?

  글쎄다.  뭐라고 답을 해야 할까?

  아마도.......  그 답은 당신 스스로 찾아야 하고,  당신 스스로 노력해나가야 하지 않을까?


  이제 나는........  나 자신의 방법으로 그 해결을 위한 발걸음을 내딛으려 한다.

  이것은 어디까지나 나만의 방법이겠지만.........

  내가 진정한 한 인간 존재로서의 내 자신에게로 돌아가고........

  당신이 진정한 한 인간존재로서의 당신에게로 돌아가고.......

  우리 모두가 진정한 존재로서의 참 가치를 깨닫고 나서 다시 만난다면..........  아마도 그쯤된다면 우리손으로 해결되지 않는 문제는 없으리라.

  나와.......  우리 자신을 찾고자 다시 길을 떠난다.



  2019년 12월 26일(목) 새벽 4시.

  우리는 각자 커다란 배낭을 하나씩 둘러메고 집을 나섰다.


  '고귀한 존재로서의 인간을 만나고 싶어서.......  르네상스로 간다.'

 

 



























  ' 우리가 보는 물결이나 파도는 바다의 제일 위에 있는 것일뿐, 결코 그것이 바다의 전부는 아니다.

    파도의 아래에는 해류라는 흐름이 있고,  그 해류 아래에는 심해라는 거대한 물의 층이 존재한다.

    심해는 거의 움직임이 없어 보이고 햇볕도 들지 않는다.

    높은 물결이나 성난 파도가 아무리 장대해 보여도  그것은  한 차례 폭풍우가 지나가면 다시 잠잠해 진다.

    하지만 심해는 아무런 미동도 없이 언제나 그자리에 그대로 있다. '

                                                                                                        --- Fernand Braudel, (1902~85)












  세상은......  혹은 우리가 지금 당면한 사회는 문화적인 위기를 넘어서 이미 사회구조 전체가 붕괴직전의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

  가치나 이념보다 실리를 먼저 따지고,  사색보다는 감각을 추구하고, 지나온 역사의 중요성이나 인간의 미래 내지는 세상에 대한 걱정이나 어떤 공감대 같은 공동체적 운명에 대한 모색보다는 나 자신의 지극히 개인적인 행복이 더 최우선으로 중요시되는, 인류가 이제껏 경험하지도 예축해보지도 못했던 뜻밖의 새로운 시대에 속해 있는 것이다.

  오래전부터 일부 진보적 지식인들은 잘못된 사회를 뜯어고치고 잘못된 역사를 수정하고 재편해야만 비로서 참다운 미래가 생겨날 수 있다는 신념으로 가득찼고,  그 신념을 달성하기 위해 물불을 가리지 않고 뛰어들었다.

  하지만,  그들이 신념을 다바쳐 그 숭고한 과업을 달성하기도 전에.......  그들의 뒤를 이어 또다시 새롭게 등장한 신진세대들은 앞서 뛰어다닌 그들 또한 어느새 부패와 타성속에 안주한 타파해야할 낡고 어긋난 구세대로 몰아세우기 시작했다.

  그것은 시대의 충돌이었고 세대간의 갈등이었고 영원한 대물림의 연속이었다.

  그네들은 모두가 하나 하나의 시지프스였다.


  '아무리 우겨봐도.......  어쩔 수 없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나 역시도 패기 넘치던 젊은 시절에는 '우리는 어버이 세대로부터 무엇하나 제대로 변변하게 물려받은것이 없는 불행한 세대'라며 쓴 소주잔을 입안에 털어넣던 시절이 있었다.

  그것은 꼭 금전적인것을 뜻하는 것이 결코 아니었다.

  불합리하고 불완전한 사회,  독재정권과 빼앗겨버린 인권, 질식당한 민주주의,  그리고 기회를 대부분 박탈당한 자본주의에 대한 반감이었을 것이다.  우리는 모여서 틈만나면 다짐을 했었다.  '이 시기를 절대로 잊지 말자고......  어떻게든 이 세상을 뜯어고쳐서 반듯이 우리 후손에게는 보다 나은 민주주의와 선택의 기회가 자유로운 자본주의를 만들어 물려주자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었다.

  끊임없이 스스로를 채찍질 해서 중도에 안주하지 말고  깨닫는것에 그치지 않고 반듯이 수정과 교정을 거듭하고 실천해서 세상을 바꾸자고 다짐했었다.

  그 열의와 함성과 채찍질은 시간이 지나면서 내 주위에서 언제부턴가 사그라져 갔다.

  그래도 우리는........  그리고 나는........  그 다짐과 각오를 잊지않았고.........  어떤식으로든 지금까지 살아온 내 인생이 그 시절의 연장선상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과연 그랬을까?

  험난한 여정을 헤치고 겨우 지금 이자리에 서있는 나는?

  개혁으로 무장했던 친구가 교직으로 가서 수많은 후학들을 가르치고 길러냈는데  과연 그는?

  민중의 지팡이가 되었고,  혹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된 친구들은 지금 스스로를 어떻게 바라볼까?

  정치판에 들어있는 친구에게.......  그 젊은 시절의 잣대를 들이댄다면........  너무 잔인한 일일까?

  누군가에게 손가락질 당하지 않고 일가(一家)를 이루며 나름 대견스럽게 살아온 친구들은 많아도........  그 시절의 다짐과 약속을 성실하게 지켜낸 자랑스럽고 존경스러워 할 친구는 과연 누가 있을까?


  '친구들아.  그렇다면 그동안 우리는 도대체 무슨짓을 한거니?'






























 

  아시아나 항공 직항편을 이용해서 11시간만에 우리는 마침내 터키 이스탄불에 도착했다.

  그런데 왠지 낯설다.

  챠밍여사는 첫방문이고,  나로서는 여섯번째 이스탄불 방문이지만........  이스탄불 신공항은 처음이다.  그동안은 아타튀르크 공항이나 국내선 이용시 사비하 공항을 이용해 왔었다.  정말 무지무지하게 크고 넓은 신공항이다.  하지만,  아직 모든 건물과 시설이 제대로 모두 들어선것이 아니라서 어딘지 모르게 조금은 허술해보이고 썰렁한 느낌이다.(나는 항상 우리나라 인천공항의 시설과 편리성에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주로 여행자들이 이용하는 (하비스트) 공항버스를 이용해 약 1시간 후에 우리는 이스탄불의 핵심이랄 수 있는 올드타운의 술탄 마호멧 광장에 도착했다.

  이번 여행에는 처음으로 손님을 한 분과 동행을 했다. 조카(챠밍여사의 작은언니의 작은딸)이 우리의 여행에 동행을 하게 되었다.  열심으로 살아온 조카가 이번에 어떤 커다란 전환기를 맞아서 재충전의 기회로 기어코 우리의 여행에 동참했던 것이다.(기대 반,  걱정 반,  ㅎㅎㅎ)



  '르네상스를 찾아간다면서 뜬금없이 이스탄불은 뭐야?  이탈리아로 곧장가야 하는것 아니야?'



  정년퇴직을 목전에 두고,  오매불망 나와 단 둘이서 이탈리아 배낭여행을 오랫동안 열망해 왔던 절친이 나의 여행계획을 살피면서 던진 물음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활짝 꽃을 피웠던 르네상스가  오로지 피렌체의 토양 위에서만 오로지 시작되고 피어난 것은 아니야.  그렇게 오래 지속되었다고는 할 수 없겠지만, 르네상스의 마지막 시기 또한 베네치아를 거쳐 온 유럽에 번져나갔다가 새로운 사조의 등장으로 수그러진 것이라 볼 수 있지.  그런 관점에서 볼 때.........  나는 르네상스가 오로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다고만 보지는 않고있어.  르네상스의 시작은 어쩌면 오리엔트(동양)였다고 해야되지 않을까 하는 나름의 견해를 가지고 있지.  그 중에서도 (이슬람 문화)가 없었다면..........  어쩌면 르네상스는 훨씬 뒤에 등장했거나,  아니면 없었을 수도 있었을 거야.'

  친구 녀석은 쉽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표정이 역력했다.

  이번 여행은 오래전부터 계획해왔던 여행이었다.

  언제고 친구가 성실하고 모법적인 직장인으로 정년퇴직을 하게되면, 꼭 한번 단둘이서 배낭여행을 떠나자고 아주 오래전부터 약속이 되어 있었다.  대상지역은 무조건 (이탈리아)가 들어가야 했고,  (조지아) (아르메니아)에다가 (그리이스)를 넣던가........ (터키)와 (그리이스)를 묶어서 가보고 싶어하는 녀석이 있다.

  정년을 앞두고(2020년 1월 말 정퇴) 부부동반으로 이탈리아를 계획하였기에  부득이 2019년 5월의 챠밍여사와의 유럽여행을 이탈리아에서 스페인으로 목적지를 변경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아마도 지금쯤(2020년 2월) 부부동반으로 이탈리아를 향해 출발했어야 할 시점인데........  친구의 부득이한 가정사 문제로 부부동반 이탈리아 여행을 한동안 뒤로 미루어야만 하는 상황이 발생했던 것이다.

  우선 내가 시간적으로 자유로운것이 겨울이고,  챠밍여사도 이미 금년 겨울여행을 준비했었고 해서........  우리만의 이탈리아 여행을 감행했던 것이다.  나로서는 세번째 이탈리아 방문인데..........  여행사 직원도 아닌처지로 또 이탈리아를 찾아가기에도 그렇고........ 아마도 언젠가 친구는 제가 스스로 알아서 이탈리아 여행을 가야하지 싶다.  대신 우리는 곧 다른 지역을 택해 단 둘이 배낭여행을 떠날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나의 친구야.  정년퇴직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다음 여행에서 제대로 축하해 줄께. ㅋㅋㅋㅋ'





  이스탄불에 오게되면 내가 숙소를 선택하는데 있어서 가장 주안점은 우선 '시르케지 지역'을 최우선으로 염두에 둔다.

  첫방문 때에만 술탄마호멧 광장 인근이었고  그 후로는 줄곳 시르케지다.

  위치. 시설. 교통. 모든면에 있어서 시르케지 지역이 여행자의 입장에선 최고의 선택이라고 나는 늘 생각한다.

  그래서 이번 여행에서도 숙소는 당연히 시르케지에 얻었다.

  유럽여행에 있어서 한겨울은 최고의 (비수기)다.  우기에 접어들어 비바람이 잦은 계절이기도한 겨울 시즌은  여행자들에게 가장 저렴한 여행경비를 보너스처럼 선물로 안겨주는 그런 시기였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젠 절대로 아니다.  여행자 물가는 급속도로 올라가고,  성수기와 비수기의 구분이 사라져 버렸다.

  지난 번 여행에서 4만원대에 머물렀던 두 군데 호텔은 지금 당장 13만원과 17만원을 요구한다.(그러고보니 지난번 여행은 횡재였었나보다)

  국내 물가의 변동에는 다소 무감감한 나였는데........ 여행지(이스탄불)에서의 물가상승은 아주 강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놀라울 따름이다.  모든게 올랐다.

  시르케지 중심가에 위치한 이번 숙소도 나름 썩 괜찮은 편이라 하겠다.  다만......  예전 여행과 비교하자면 좀 좁은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가성비로 따지자면 나름 훌륭한 숙소라 하겠다.

  춥다.

  한국.......  아니 내 고향 충주에 비교해도 훨씬 춥게 느껴졌다.

  마호멧 광장에 내려서 배낭을 둘러멜때만 해도 주변 풍광에 취해서 잘 느끼지 못했었는데........

  시르케지를 향해서 전철길을 따라 언덕길을 내려서는 도중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거기다가 이곳이 바닷가가 아닌가.  성난 세찬 겨울바람이 사정없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이제 막 도착한.......  이스탄불의 첫인상치고는 대단히 고약했다.

  이스탄불이라면 내 고향 충주 싸돌아다니듯이 손바닥 들여다보듯 익숙한지라 쉽게 숙소를 찾아 체크인을 했다.  비바람을 피하게 되어서 다행이긴 한데........

  밤은 깊었고........  우리는 아직 저녁 식사를 하지 못했다.

  거기다가 챠밍여사와 조카는  티비와 책이나 말로만 듣던 이스탄불에 대한 호기심이 덜 충전된듯한 표정들이다.  하긴 허겁지겁 짐보따리 챙겨들고 비바람 피하느라 (불루 모스크)니 (하기야 소피아)니 (지하 궁전)이니 (귤하네 공원)이니 제대로 살필 겨를이 없었을 것이다.

  짐보따리를 내려 놓고,  옷매무새만 새롭게 고치고나서 우리는 여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세찬 바람이 요동치는  이스탄불의 밤거리로 나왔다.

  '오리엔탈 특급열차'가 출발하던 시르케지 역사를 지나 갈라타 다리에서 성단 파도가 일렁이는 보스포러스 해협을 바라다 본다.

  그제야 비로소 '여기가 말로만 듣던 이스탄불이구나'라는 표정들이 역력해 보인다.  갈라타 타워가 건너다 보이고,  이처럼 성난 추운 날씨에도 갈라타 다리위의 낚시꾼들은 고기잡이에 여념이 없다.  갈라타 다리 옆 고등어 케밥집은 이 굿은 날씨에도 그야말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고등에 케밥이 도대체 어떤것이기에..........  하지만 우리는 빈자리가 없고 차가운 바람이 사정업시 쏟아져 들어오는 관계로  그 호기심의 해결을 다음으로 미루고 발걸음을 돌렸다.

  낯선 도심의 골목길을 돌아보면서.........  '이게 이스탄불의 모습이구나'를 느끼면서 숙소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도중에 나름 깔끔한 레스토랑을 골라 찾아들어 '피자와 스파게티'로 첫 터키식 식사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다.


  '메르하바  이스탄불.'












































  언제나 처럼 새벽산책을 나선다.

  시르케지에서 트램길을 따라 얕은 언덕을 오르면 올드타운의 한복판인 (술탄 마호멧 광장)이 나온다.  지난밤에 공항버스에서 내렸던 장소다.

  후~~~~~~~~~~~~~~~.

  잔뜩 찌프린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페부 깊숙한 곳까지 이스탄불의 새벽공기를 한웅큼 가득 들이마신다.

  오스만 투르크의 역사와 숨결이 들이마신 공기와 함께 내 페부속으로 스며들어오는것을 느껴지면서, 동시에 어떤 짜릿한 전률이 전신 마디마디의 끝까지 퍼져나간다.  그 뿐만이 아니다.  들이마신 공기와 함께 코끝으로 진한 여운처럼 풍겨나는 비잔틴의 향기가 나를 황홀한 감동으로 잡아 이끈다.

  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그러자 이번에 탄성으로 인해 벌려진 내 입술 사이로 르네상스의 한줄기 숨결이 휙 하고 스치듯 솟아올라 하늘 저편으로 사라진다.

  시선을 돌려 울퉁불퉁 세월에 깍이고 닳고 닳은 포장도로를 바라보면서 그 위를 씩씩하게 행군하던 붉은 로마의 전사들을 떠 올린다.  그 포장도로를 한꺼플 걷어내고나니,  그리이스의 전차길이 나타나고  저만치 나그네의 행색을 한 호메로스가 보인다.

  이스탄불 역사지구.

  나는 지금 그 수천년의 역사 위에 나그네가 되어 서 있다.

  이스탄불은 내게 있어서 최우선의 영원한 로망이다.  내 유년시절부터 시작하여 언제까지나...........









  (이쯤에서.........)

  이스탄불은 너무나 많이 알려진 아주 유명한 도시이다.

  나는 이스탄불을 너무나 좋아하고 사랑한다.  하지만.......  모두가 나와 같지는 않을 수 있다는 이야기를 이쯤에서 꼭 전해주고 싶다.

  어쩌면 이스탄불은 이 세상의 수많은 유명 도시(여행지) 중에서 가장 극명하게 호불호가 엇갈릴 수 있는 대표적 도시일수도 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왜 그럴까?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이스탄불이 이미 너무도 유명한 위대한 역사의 도시(관광지)로만 깊이 각인되었기 때문이다.

  '동 서양의 문명이 교차한 아주 특별한 지역' 이라는 표현으로 대변될 수 있는 뗄래야 뗄수없는 수식어가  (영원한 진리)처럼, 혹처럼 붙어있기에 더욱 그럴것이다.  터키를 가 보았건 아니건,  이스탄불을 가 보았건 아니건...........  사람들은 피상적으로라도  '동 서양의 교류와 다툼의 역사'가 대충은 어떨것이라는 것을 어느정도 알거나 쉽게 짐작한다.  그러한 역사의 중심에서 수천년의 세월을 지켜온 도시..........  문명의 거점..........  그곳이 바로 (이스탄불)인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여행자의 열망으로..........  마음속에  혹은 상상속에 그려지고 기대되는 도시 (이스탄불).

  과연 그럴까?


  (터키)라는 나라를 여행한다고 치자.  간추려서 아주 간단명료하게 이야기를 다시 꺼내본다면........

  터키 여행의 절반은 아마도 (이스탄불)이 아닐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 이스탄불 여행의 절반은 아마도 (하기야 소피아 성당) 아닐까 라고 역시 생각한다.

  물론 터키 여행에는 보는 관점에 따라  카파토키아나 파묵칼레.  예페소. 페티에. 산느우르파. 넴룻산. 아라라트 산. 이즈미르 등 얼마든지 더 있겠지만.

  이스탄불만 해도 불루 모스크. 갈라타 타워. 그랜드 모스크. 지하 궁전 등 수많은 볼거리가 많이 있겠지만.........  내 주관의 관점에서 보자면 말씀이다.

  티비에서  SNS를 통해서, 여행사 광고에서, 책자에서  그리고 이미 터키를 다녀온 사람들을 통해서.......  이미 터키에 대해서나 이스탄불에 대해서 수없이 많은 정보를 보고 듣고 해온 처지로 지금 바로 이곳..........  술탄 마호멧 광장에 당도했다고 치자.

  터키의 중심이자  이스탄불의 가장 핵심적인 심장부에 도착한 것이다.  주변을 돌아보시라.

  '와!!!!!!   이스탄불!!!!!!  역시나............'

  하지만...........  그 탄성은...........  그 감동은 그리 오래가지는 않을 것이다.

  저만치 광장의 왼편으로 웅장함을 드러낸 붉은빛을 띤 (하기야 소피아)가 우뚝 솟아있다.  시선을 돌려 중앙의 줄기차게 물을 내 뿜고 있는 분수대가 놓은 잘 정돈된 푸른 공원을 지나쳐 오른쪽으로 시선을 돌려보면 수리중인 첨탑이 돋보이는 푸른 지붕의 술탄 마호멧 사원(불루 모스크)가 멋진 자태를 한껏 뽐내고 있다.  이스탄불의 역사 중에서 하기야 소피아가 (비잔틴 제국)의 상징이라면,  불루 모스크는 (오스만 제국)의 상징이라 하겠다.  두 역사와 문명의 충돌이 지금 이자리에서 여전히 펼쳐지고 있는 느낌이 든다.

  여행자의 지친 발걸음을 좀 쉬어갈 겸 공원 벤치에 앉아서 성당과 사원을 번갈아 바라보면서 역사 멍때리기를 한다.

  시간이 좀 지나자..........  둘 다 서로 고만고만하다는 생각이 든다.

  하기야 소피아의 웅장함이나  불루 모스크의 셈세한 아름다움도 한참을 지켜보고나니.........  그저 그런........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싶어진다.

  '더 이상 뭐가 있겠어?'

  이스탄불을.........  터키를  웬만큼은 대충이나마 어느정도 보고 체험했다는 느낌이 서서히 생겨나기 시작한다.  이제 남은것은 인증샷?


  이렇게 되면..........  이스탄불은........  어쩌면 터키에서 가장 별 볼일 없는 도시로 전락할 수도 있게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그들이 보는것은 단순히 지금의 현실 위에 남겨진 보여지는만큼의 이스탄불의 유적과 유물과 시간을 바라볼 뿐이다.

  시간과 관심과 노력을 어느정도 들인 사람들이 그제서야 볼 수 있는 것이.........  1453년 이후의 600년의 이스탄불 이다.

  서기 324년에서 1452년까지 1.100년 이상의 시간이 바로 이곳에서 (동로마 제국)의 이름으로,  그리고 (비잔틴 제국)의 이름으로 버젓이 존재하고 번영했어다는 사실을 대다수는 잘 알지 못한다.  그저 타인이 들려주는 단편적인 이야기에 잠시 귀를 기울이곤 할 뿐이다.  많은 여행자들은 그저 (하기야 소피아)라는 건축물 하나로  1.100년의 역사를 써내온 한 왕조의 기억을 대체할 뿐이다.

  그러면 동로마와 비잔틴이 전부였을까?

  아니다.  로마가 등장하기 전,  1.000년 동안 이곳은 그리이스 였다.

  그 시기에 이스탄불 지역에 그리이스의 속국(도시)이 들어섰다고 하지만.........  서쪽의 에게해 연안에서 마르마라해를 거쳐 흑해에 이른는 모든 지역이 그리이스의 영토였다고 보야야만 한다.  당시 그리이스인들은  흑해 저편의 코카서스 지역 카즈베기 산이 인간에게 불을 전해 준 죄로 제우신의 형벌에 의해서 페르세우스가 독수리에게 간을 쪼여 먹히며 바위산에 매달려 있던 이 세상의 끝이라고 여겼던 것이다.

  이스탄불 서쪽 치낙칼레에 그리이스 제국의 연합국이었던 트로이가 실존했던것을 보더라도,  고대에 이 지역은 엄연한 그리이스 였다.

  신석기 시대에서 청동기 시대로 넘어가는 시기에 터키의 내륙에서 힛타이트라는 대제국이 있었던 사실을 끄집어 낸다면........  적어도 1만년에 가까운 역사가 이곳에 실제로 존재했던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지구상에 이처럼 다양한 문화와 문명과 역사가 모두 함께 서려있는 곳이 이곳 말고는 지구상 어디에도 없다.

  그야말로 유일무이한 역사와 문화의 보고이다.

  나는 그 깊은 매력의 바다를 유랑하고 있는 아주 어설프고 부족한 한 여행자일 뿐이다.

  그러나 많은 여행자들은  1453년 이후의 터키만을 보기에도 바쁜 모습들이다.  대부분은 지금의 (오늘날의 터키)만을 보고 다닐 뿐이지만........


  조금만 관심을 가지고 공부를 하게된다면..........  이스탄불은 대단히 소중하고 사랑스런 곳이다.  터키가 바로 그런 나라이다.

  이번 여행에선 그런 부분을 조금이나마 이야기 해보려고 한다.(이스탄불에만 국한해서)

 

 







































  술탄 마호멧 광장을 나와서 다시 옛길을 따라 시르케지 지하철 역사로 향한다.

  이스탄불 메트로 노선중에서 마르마라해 노선을 이용하기 위해서다.

  바다 밑으로 기차가 다니게 만든 해저터널이  영국을 유럽대륙에 잇게한 도버해협 해저터널만 있는것이 아니다.  이곳 이스탄불에도 보스포러스 해협의 바다 밑을 관통하는 해저터널이 있다.  우리나라의 S건설이 참여해 완공한 '마르마라해 지하철'이 바로 그것이다.  이 노선은 이스탄불의 유럽지역인 시르케지 역에서 바다건너 아시아지역의 위스큐다르와 연결된다.

  바다를 해저 깊은곳에서 관통해야만 했기에 시르케지 마르마라해 지하철 노선은 대단히 깊은곳까지 걸어서 내려가야만 한다.  물론 엘레베이터가 있지만 어디까지나 노약자나 장애자를 위한 시설이기에 우리는 걷고 또 걸었다.  '도대체 몬 지하철이 이렇게 깊어?'

  여타의 다른 지하철 처럼 요란한 굉음과 함께 기차가 들어오고,  유독 심한 소음과 함께 덜컹거리면서 내달린다.  시르케지에서 한 정거장이면  아시아 지역의 위스큐다르에 닿는다.  위스큐다르 역사를 나와 무엇인가 확 달라진 풍경을 확인할 때까지 나는 그때까지도 우리가 방금 바다를 해저로 건너왔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여기가 어디야?  저기 저 건너편에 보이는곳은 어디야?  올드시티라는데와 많이 닮았네?  톱카프 궁전이 쌍둥이야?'

  '아니야.  바로 봤어.  저게 톱카프 궁전이야.  그 뒤에 첨탑이  하기야 소피아고...........'

  '에이.........  저긴 바다 건너인데?'

  '응. 맞아.  우리 방금 전에 지하철을 타고 해저터널을 통해 바다를 건너 온거야.'

  '정말?  우리가 지금 땅 속으로 바다를 건너온것이라고?  여기에 그런게 있었어?  진즉에 얘길 해 줬어야지?'

  '별로 안 놀래네?  애써 놀래켜 주려고 그런건데............'



  바다를 건너오는 사이 그새 날씨가 급변했다.

  그동안의 나의 여행 이력에서 날씨때문에 고생을 한 기억은 별로 없다.  항상 날씨는 내 편이었다.  그런데 어제밤에도 버스에서 내려 도착하자마자 광풍에 소낙비가 쏟아지기 시작하더니만.........  찌프린 날씨 속에서 새벽 산책을 하고  이곳으로 바다를 건너오는 사이에 날씨는 너무나도 달라져 있었다.

  일기예보는 내일도 모레도 비와 세찬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오.마.이.갓.

  터키에 오면  다른데는 안가고 비행기만 갈아타드라도 이스탄불을 들려야만 했고,  이스탄불에 오면 위스큐다르는 다녀가고는 했다.  위스큐다르에 오면 아시아 지역에서 가장 유명한 빵집이 코앞에 있고,  올때마다 들르는 아주 전망이 빼어난 3층에 카페가 하나 있다.  갈매기와 가까이서 대화할 수 있는........

  빵집에 들러서 참으로 먹을 빵을 사고,  마트에서 생수를 사고.  3층 커피 숖에 자리를 잡고 앉는다.  잠시 비바람을 피해야만 하니까......

  커피 맛이 정말 일품이다.




















































  위스큐다르(Uskudar)는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에서 교통의 중심지로서  넘쳐나는 사람들로 인하여 항상 혼잡함을 이룬다.  상당 부분의 생업을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다니면서 이스탄불이나 탁심지역에서 해결해야만 하는 서민적 향취가 물씬 풍겨나는 아주 오래된 주거지역이다.  지하철에서 내리거나 페리를 타고 바다를 건너 도착할 경우 가장 먼저 눈에 띄는것이, 오스만을 넘어 이슬람 세계의 가장 위대한 건축가 미마르 시난이 술레이만 대제의 딸인 마흐리마흐의 요청으로 지은 (마흐리마흐 자미)이다.  현지인들은  이 사원이 부두 바로 앞에 위치해 있기에 그냥 (이스켈레 자미)라고 부른다.  이스탄불 아시아지역의 시작점이자 종착점이라고 할 수 있다.

  바닷가를 따라 서쪽으로 쉠시 시난 거리로 발길을 옮기다보면 잠시 쉬고싶다고 생각되어질때쯤 '크즈 클램시(처녀의 탑)'이 나타난다.

  남녀가 데이트하는 것을 목격하면 죽어라 좇아다니면서 꽃을 사라고 졸라대는 노인이나 아이들을 보노라면 왠지 짠하게 안스러운 느낌이 들지만........  저것도 저들에겐 하나의 삶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해 걷다보면 대형 선박들이 드나드는 거대한 부두가 나타나고, 한참을 더 걸어내려가면 바로 카드쿄이(kadikoy) 지역에 도착하게 된다.

  카드쿄이는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의 문화 상업의 중심가이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카드쿄이의 상징은 '하이다르파샤 역(Haydarpasa gar)'이라고 하겠다.  유럽지역의 시르케지 역이 오리엔탈 특급열차의 시발역이라고 한다면,  아시아 지역의 하이다르파샤 역은 멀게는 이란의 페르시아 지역에서 시작하여 중동의 모든지역에서 오는 기차들이 최종적으로 종차하는 역이다.  한때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기차역'으로 뽑혀 명성을 날린적도 있다.  세월이 할퀴고 지나간 상처로  결국은 기차 역으로서의 현역에서 은퇴하여 박물기념관으로 재단장을 마쳤다.  카드쿄이는 바다건너 이스틱랄 거리 못지않게 젊의의 활기로 항상 넘쳐난다.

  이곳은 그리이스인들이 세운 최초의 거주지이자 도시였다.



  대략적으로 기원전 1.000년 전쯤부터 보스포러스 해협 근처에 사람들이 나타나 거주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소규모 부락민 수준인 당시에는 고기잡이와 목축,  그리고 지극히 간단한 농사를 지었다.

  기원전 8세기 무렵에 처음으로 메라가 출신의 그리이스인들이 모습을 나타냈다.  새롭게 나타난 그리이스인들은 소규모 부릭민으로 생활을 영위하고자 하는것이 아니라 보다 전략적이며 상업적인 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한세기 쯤 지나서야 비로소 이 지역에 그리이스인들에 의해서 본격적인 모습의 도시가 건설되었다.

  가장 처음 건설된 도시는 바로 여기 카드쿄이 지역에 들어선 '칼케돈(Khalkedon)'으로 기원전 685년 경의 일이었다.

  '황금 도시'라는 뜻의 칼케돈은 대단히 부유한 항구도시로 삽시간에 엄청난 번영을 구가하게 되었다.  바다 건너서 석양무렵에 바라다보면 도시 전체가 황금빛으로 눈이부실 정도였다고 한다.

  그로부터 정확히 25년이 지난 기원전 660년,  다른 한무리의 그리이스인들을 이끌고 나타난 '비자스(Byzas)'가 바다 건너편의 톱카프 궁전 자리에 새로운 도시를 건설하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Byzantion)'이라고 붙였다.

  이대목에서 아주 흥미로운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오고 있다.

  새로운 도시를 건설할 목적을 가진 비자스는 고향을 떠나오기 전에 '델포이 신전(Delphoi)'에 가서 어디에 도시를 세우면 좋은지 신에게 물었다.  그러자 그에게 돌아온 신탁은 그야말로 수수께끼 같은 대답뿐이었다.

  '장님들의 나라 반대편에 도시를 세우라.'가 전부였던 것이다.

  그때부터 비자스는 장님들의 나라를 찾아 온세상을 쫓아다녔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장님들의 나라는 찾을 수가 없었다.

  '신이 자신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으로 지쳐서 그가 마지막으로 도착한곳이 바로 번영을 구가하고 있는 신흥도시 칼케돈이었다.  하지만 칼케돈의 그 누구에게서도 비자스는 해답을 얻을 수가 없었다. 

  심한 좌절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지쳐 쓰러지기 직전의 비자스는 칼케돈의 바닷가에 주저앉아 버렸다.  이대로 포기해야만 한단 말인가?

  그때 그의 두 눈에 바다 건너의 한 언덕이 쏟아지듯 몰려 들어왔다.

  정신이 버쩍 든 비자스는 단숨에 바다를 건너 그 언덕으로 달려갔다.  도시를 건설하기에 더없이 좋은 장소였다.

  그 순간 그는 깨달았다. 

  눈 앞에 이렇게 훌륭한 전략적 요충지가 있음에도 알아채지 못하고, 이보다 못한 장소에 도시를 건설해놓고 저렇게 흥청망청 거리고 있는 칼케돈의 사람들이야 말로 신탁에서 말한 '눈먼 장님들' 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곧바로 비자스는 그곳에다 도시를 건설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비잔티온 이라고 불렀다.

  오늘날 아시아 지역의 상징적인 카드쿄이 지역이지만,  바다 건너편의 비잔티온 지역은 가히 세계적인 도시라 생각할 때.........  그 신탁은 실로 오묘했다고 밖에 달리.........


  비잔티온은 동쪽에서 급격하게 세력확장을 꿰해 온 페르시아에게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  막말로 페르시아의 속국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지만 페르시아 다리우스 왕조의 그리이스 정벌이 연이어 실패로 돌아가고 쇠락의 길로 접어들자,  비잔티온은 독립을 되찾고  아테네가 주도하는 델로스 동맹의 회원국이 된다.  이는 이곳이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고대 그리이스 국가 연합에 속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보스포러스 해를 통과하는 배들로 부터 거둬들이는 통과세와 중계무역으로 비잔티온은 아테네 못지않은 번영을 구가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비잔티온의 지도자들은 슬슬 욕심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하여 결국은........  기원전 440년과 411년,  두 번에 걸쳐서 종주국 아테네를 상대로 반란을 일으켰다가 모두 실패한다.  그리이스 제국의 패권을 넘 볼 정도로 막강해졌었다는 이야기가 된다.  기원 전 394년에는  아테네의 쇠락으로 새롭게 등장한 종주국 스파르타를 향해서도 창끝을 겨누었으나 역시 실패한다.

  새롭게 세력을 확장해 오던 마케도니아의 필립 2세의 침공에도 용케 잘 방어를 해냈다.

  꾸준히 성장을 거듭해 온 비잔티온은 마침내 불세출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의 침공에도 결코 굴복하지 않고 끗꿋하게 이를 버텨낸다.  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리이스에서 인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한 알렉산더 대왕도 끝내 그리이스의 변방도시  비잔티온은 함락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알렉산더는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가 그리이스 원정시 건너온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현 보스포러스 다리) 아시아로 진격하고자 했다.  하지만  비잔티온의 끈질긴 저항으로 아침내 불세출의 영웅마저도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지 못하고  한참을 돌고돌아서 다르다넬수 해협으로 건널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알렉산더의 사망과 함께  마케도니아의 영광도.......  헬레니즘의 찬란함도 사라져 버렸다.

  그러자  (로마)가 새롭게 등장했다.

  기원전 146년 신흥강국 로마가 그리이스를 완전하게 정복했다.

  비잔티온은 로마의 속주로 전락했고,  서기 73년에  베스파니우스 황제에 의해서 완전한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그리이스의 비잔티온은 역사속으로 사라져 버린것이다.

  비록 비잔티온은 사라졌지만..........  이 지역의 가치가 사라진것은 결코 아니었다.

  로마인들은 결코 이 지역이 전략적 상업적으로 너무나 중요한 곳이라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로마인들은 이 자리에 영원히 존재할 로마의 도시를 건설하고자 했던 것이다.  또 다른 위대한 로마의 도시가 새롭게 이 자리에 건설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이스의 기반 위에 새롭게 로마가 건설되었다.


































































  더 이상은  무리이지 싶었다.

  점저 세어져만 가는 강바람과 세찬 바닷바람의 확실한 차이가 느껴졌다.

  챠밍여사는 우산을 접어야만 했고,  내 경우는 본래부터 비에대한 대비라는 것이 없었다.  우비라도 준비할걸 그랬나?

  거기다가 점차 옷이 젖어들어갈수록 추위가 엄습해오기 시작했다.

  이제 막 여행이 시작되었는데 말이다.  남은 기간 내내 감기 몸살은  여행자의 최대 적인데 말이다.

  결국 아시아 지역을 하루 온종일 싸돌아다녀보려던 애초의 계획은 이쯤에서 접어야만 하게 되었다.

  위스큐다르 부두로 돌아와 페리에 몸을 실었다.

  일단 유럽지역의 카바타쉬로 돌아간다.

  아늑해 보이는 카레를 찾아  우선 허기져오는 배고픔을 먼저 해결하고 컨디션을 추스른 다음........  날씨의 변화를 기다려 보기로 한다.

  카바타쉬 선창가의 나름 그럴싸한 카페에서 어쩔 수없는 여행자의 망중한을 즐겨본다.

  연실 창밖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면서 날씨를 걱정해 본다.  그러면서도 머릿속으로는 온통 '지금의 여건에서 허락할 수 있는 스케줄의 변경 생각' 뿐이다.

  얼마나 지났을까?

  하늘을 아직 잔뜩 찌프려 있고 바람은 몰아치고 있지만.........  분명 비가 멈췄다.

  우리는 서로의 얼굴만 빤히 쳐다보고 있다.

  빤히 쳐다보고 있으면 뭐해?  서로의 속내는 이미 잘 알고도 남으면서........

  ㅎㅎㅎ

  ㅋㅋㅋ


  부리나케 밖으로 나온 우리는 다시 버스에 몰을 싣는다.

  예측할 수 없는 날씨와 차가운 바람을 견디며  보스포러스 해변을 무한정 걸을 수은 없을것만 같다.

  그러자면...........  아쉽지만  (루멜리 히사르)까지 가기는 좀 무리인것 같고.........  (베벡)이라면   어떻게든 그때 그때의 상황에 대처가 가능하지 않을까?

  그렇다면..........

  우리는 일단 베벡으로 간다.

  베벡(Bebek).

  세계에서 가장 짱난다는 유명 커피브랜드 지점이 있는 곳이다.  물론 나는 이미 다녀 온 곳이지만.........  챠밍여사는 이곳에 큰 호기심을 가지고 있다.

  '도대체 어떻게 생겼길래........  도대체 어떤 분위기이길래.........'

  그러니 안 모시고(?) 갈 명분이 적어도 나에게는 없다.  무조건이다.  무조건........

  그곳에서 우리는 또 한번 엄청난 해프닝을 경험하게 되지만...........

  커피가격도 거진 국내의 절반 수준이라면...........  솔직히 놀랐다.  베벡의 커피가격에........  그리고 국내 커피값의 횡포에........


  'STARBUCKS  in  Bebek.'


 















 













     ----  오랫만에 올려보는 여행기가 되었네요.  찾아주시고 읽어보아주셔서 대단히 감사합니다.  다음에서 이어가겠습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