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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스페인) 최고의 '가우디'를 찾아가는 소도시 여행 <콜로니아 구엘>

by 피안재 2019. 12. 6.

 

 

 

 

 

 

 

 

 

 

 

 

 

 

 

 

 

 

 

 

 

 

 

 

 

 

 

 

 

  바르셀로나에 대한 최고의 매력이 무엇이냐고 여행자들에게 묻는다면,  아마도 대부분 '아름다운 건축물' 이라고 대답할 것이다.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대답일 수 있겠다.

  독창적인 아이디어와 빼어난 아름다움으로 하나의 건축물에서 벗어나 위대한 예술작품으로 까지 승화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구엘 공원 외에도 아름답고 기념비적인 건축물들이 도심의 곳곳에 즐비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중심에 한 도시의 얼굴을 바꾼 '안토니오 가우디'가 있다.

  100여년 전에 가우디는 여기 바르셀로나와 도심의 인근에 약 12개의 건축물을 남겨 놓았다.

  아마도  건축이 표현할 수 있는 동심과 자유분방함의 극치를 만나볼 수 있는 곳은 바르셀로나가 유일하며,  이곳에서 그 건물 하나하나를 찾아 길을 걷는다는 것은 바르셀로나의 최고이자 첫 번째 매력과 조우하는 지극히 현명한 선택이자 방법일 것이다.

  바로 그런 매력때문에 한 해(2006년 통계 기준) 1.700만명 이상의 여행자들이 바르셀로나를 찾는다.(오버 투리즘으로 인한 대표적 피해 여행지)

  그러다보니 바르셀로나를(많은 바르셀로나 출신 건축가들은 억울하겠지만서도)  '거대한 가우디의 나라'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는 '죽은 가우디가 후세의 바르셀로나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라는 표현까지 등장하기도 한다.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해서 '도시'라는 공간이 얼마나 아름답고 새롭게 재창조 될 수 있는지를 많은 사람들은 파리의 '에펠탑'에서 보고 느꼈다.  절대다수의 극심한 반대속에서 '쿠스타프 에펠'은 끝내 에펠탑의 공사를 마무리 하였다.  파리라는 낭만적인 최고의 여행지로 꼽히는 파리는 에펠탑이 들어서기 이전과 이후로 나뉜다.  에펠탑 때문에 파리가 생겨난 것은 아니지만,  에펠탑이 없는 파리를 우리는 생각조차 할 수가 없다.

  이곳 바르셀로나에서도 '안토니오 가우디'의 역활과 평가는 '쿠스타프 에펠'의 경우와 별반 크게 다르지 않다.

  가우디 역시 한 사람의 건축가에 의한 노력과 헌신이 바르셀로나라는 한 도시의 공간을 차원이 다른 세계로 거듭나게끔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가 열의를 다해 작업에 열중했을 때 처음부터 모두에게 호평을 받은것은 결고 아니었다.  비판을 넘어 배격을 받았고 카톨릭으로부터 징계위원회에 회부되기도 했고, 방화와 테러의 위협에 시달리기 까지 했다.  하지만 그는 멈추거나 자신의 신념을 굽히지 않았다.

  직선(인간의 영역)을 배제하고 곡선(신의 영역)을 주로 사용하면서 건물의 안정성에 최우선을 둔 그가 추구하는 구조역학적인 건축방법은   당시로서는 파격이었다.  아니 파격도 넘어서서 충격과 혁명이었다.  건축물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기능은 유지하되 나머지 모든 구조와 모양은 인간의 상상력을 극한으로까지 끌어올리는 가우디만의 고유한 스타일이 건물 하나하나마다 고스란히 투영되고 반영되었다.

  보편타당한 건축의 영역에서 벗어나 한 차원 높은 이상적이고 환상적인 새로운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다.

  그라시아 거리에 있는 (카사 바트요)나 (카사 밀라),  영원한 가우디의 벗이자 후원자였던 '에우세비오 구엘'의 이름이 들어간 (구엘 공원)과 람블라스 거리에 있는 (구엘 저택)을 보고 있노라면, 하나의 건축물을 보고 있다는 생각 이면에  아주 상상력이 풀부하고 장난끼가 많은 어떤 개구장이 요정이 만들어 놓은 장남감 같은 생각마저도 든다.

 

  그렇다면 가우디가 만든 건축물 중에서 사람들로 부터 최고로 평가받는 건축물은 과연 어느것일까?

  단연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아닐까 생각된다.

  또 하나,  그렇다면 건축가 가우디가 추구했던 이상적인 건축에 가장 부합하는 (가장 가우디 다운) 건축물은 무엇일까?

  아마도.........  일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역시 선택할 것이고,  다른 일부는 '구엘 공원'을 택하지 않을까?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가우디 본인이 가장 사랑한'  또는 '후대에게 어떤 교훈이나 건축의 모범'으로 남기고 싶었던 건축은 어느것이었을까?

 

  후기의 가우디에게 있어서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그의 전부이자 마지막 목표였다.

  바르셀로나 시당국이 예고한 것처럼 '2026년까지 성당이 완공'된다면.......  혹 가우디의 명성은 한차원 더 높이 올라갈지도 모르겠다.  지하 예배당과 서쪽의 종탑이 가우디 본인이 직접 작업하여 완공한 부분이다.  하긴 어차피 성당의 완공을 모두 가우디가 마칠 생각은 아니었다.  인간의 수명이 200살쯤이 안되는 슬픈 현실속에선 말이다.  가우디가 직접 손을 댄 부분은(완공으로 기준하여)  약 18% 정도가 될 것이라 보고 있다.

  그런데 문득...........

  내가 알고 파악해 본 '안토니오 가우디'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 대한 카탈루냐 인들의 열망과  스페인 카톨릭과 바르셀로나 시당국의 기대와 지지속에서 최선을 다해 하나의 거대한 건축공사에 매진했을 뿐.........  그의 성격이나 성품으로 볼 때,  결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자신의 최고의 업적이나 대표작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파밀리아 성당 보다는 차라리 '구엘 공원'이  그의 사고나 성격에 적합하지 않겠는가?

  그런 시점에 섰을 때.......  나는 듣기만 하고 짐작으로만 여겼던  가우디의 한 작품을 직접 체험하게 되었다.

  이 건축물 또한 파밀리아 성당처럼 미완성인 채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지금........  가우디가 의도하고 생각햇던 바 처럼 온전하게 제대로 운용되고 있다.

  이 건축물을 직접 체험하고 나서 나는..........  '가우디가 가장 사람한 건축물이 과연 어떤것일까'하는 의문에 대해 확실한 답(나 만의 주관에 의한)을 얻었다.

  그가 진정으로 추구했던 '건축의 목적과 가치와 이상'이 그곳에 모두 고스란히 배어있었다.

  새로운 이상을 추구하는 수많은 건축학도들이 바르셀로나를 찾는다.  그들 모두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에서 원대한 이상과 포부를 꿈꾼다.  하지만 나는 그들에게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다.

  '진정한 가우디의 건축관(觀)은 파밀리아 성당에서 찾을 수 없어요. 너무 많이 변형되고 덧칠되어서.......... 만약에  진짜 가우디를 만나고 싶다면.......  주저하지 말고  콜로니아 구엘로 가세요.  가우디는 그곳에 있어요.'

 

 

 

 

 

 

 

 

 

 

 

 

 

 

 

 

 

 

 

 

 

 

  '안토니오 가우디'에 의해 만들어져서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 된 7개의 건축물 중에 하나이다.

  그런가하면 '세계에서 가장 방치된 결코 문화재 같지 않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이 바로 이곳 '콜로니아 구엘 서민 예배당'이다.

  한적한 시골마을 한 구석에 위치한 예배당은  현재에도 주일이면 미사가 열리는 아주 작고 소박한 시골 예배당이다.  300m쯤 떨어진 여행안내소이자 기념관이자 매표소에서 티켓을 구매하고 터벅터벅 걸어서 찾아가면,  허름한 철망이 둘러쳐진 정문 앞 소나무 그늘아래서 무료하게 앉아있던 직원 한 명이 다가와서 체크를 한다.  그게 전부다.  고귀한 인류 문화재 주변을 통털어 관계자라곤 정문의 검표원 한 명이 전부다.  안내소에 걸린 표지판에 단체 여행자들이 요청하면 가이드가 동행해 준다는 이야기는 있었다.  우리가 예배당에 들어섰을 때,  스코틀랜드 부부 여행자가 여성 가이드의 안내를 받고 있었다.  그들은 곧 밖으로 나갔고.......  이 귀한 인류문화재가 고스란히 우리 차지가 되었다.

  세상에..........  어쩌자고 이런 일이........

  이 예배당의 하나에서 열까지  그 모든것이  가우디에 의해서 직접 디자인되고 만들어졌거늘........

  입구의 조가비 모양을 딴 세면대나  시골 노인들의 인체공학을 생각한 의자하며........  나비를 닮은 모자이크 창이며.......  소박하게 매달려 있는 십자가.......

  아무거나 하나쯤 기념품으로 가지고 갈까?

  한 눈에 딱 보아도 우리가 천상의 선남선녀 같은 여행객임을 알아채서 굳이 감시하듯 지켜볼 필요가 없어서일까?

  어쩌자고 지키는 사람도 하나 없고 흔하디 흔한  CCTV 조차도 없단 말인가?

  혹.......  이거 진짜 가우디가 만든 예배당 맞어?

  진짜는 어디 땅속에 숨겨두고 짝퉁 만들어서 이렇게 내놓은거 아녀?

 

 

 

 

 

 

 

 

 

 

 

 

 

 

 

 

 

 

                                                                                                           -- 콜로니아 구엘 방직공장 하늘 전경(구글 이미지에서 퍼 옮)

 

 

                                                                                                                ---  방치된 방직공장 내부 전경(구글 이미지에서 퍼 옮)

 

 

 

 

 

 

 

 

 

 

 

 

 

 

 

 

 

 

 

 

 

 

 

 

 

 

 



  숙소를 나와 메트로 폰타나 역으로 향한다.  지하도에 들어서면 챠밍여사가 늘상 그렇듯이 나에게 손을 내민다.  그러면 나는 기다렸다는 듯이 작은 파우치 하나를 건네준다.  파우치 속에는 여행중에 모아놓은 유로화 동전이 한웅큼 들어있고,  오늘 하루 예상 경비로 준비해둔 소액권 지페가 들어 있다.  챠밍여사는 망설임 없이 승차권 자동판매기 앞세서 버튼을 눌러대기 시작한다.  뒤에서 지켜보고 있노라면.....  ㅋㅋㅋ......  스페인에서 한 일년 쯤 살고있는 완전한 현지인의 포스가 풍겨나온다.  마드리드에서 지도보는 법,  지하철 노선도 보는 법 등을 소상하게 가르쳐주고 한 두번 시범을 보여준 후로는 아예 그일은 알아서 척척 해 낸다.  환승 역도 기가막히게 찾아다니고,  지하도 계단을 내려가면서 표지판을 쓰윽 살피고 나면 어느쪽에서 타야 하는 하는지 방향까지도 척척 알아 낸다.  아주 오래전이지만......  신학을 전공했으니  라틴어 성경 공부를 한 경험의 잔존물이 아직 남아있음인가? 암튼 신통방통이다.  카탈루냐 역에서 환승을 하고  우리가 도착한 곳은 에스파냐 역이다.  스페인 광장이 있는 도심의 중심부이다.  지하 2층에서 내려 1층으로 올라가  매표소에서 카탈루냐 전철 승차권을 구입하고는, 다시 지하 3층까지 내려간다.  바르셀로나 도심 외곽으로 빠져나가는 일반 전철을 타기 위해서다.  카탈루냐 전철은 생각했던것 보다 한산했다.  어디까지나 잠시 동안만.......  지하 철도를 벗어나 지상철로 바뀐 후 부터 전철이 서는 역사마다 사람들이 쏟아져 들어왔다.  바르셀로나의 도심 외곽 풍경을 구경하면서 40여 분을 달리고나서야 전철은 '콜로니아 구엘 역'에 도착했다.  아주아주 한산하고 조금은 외진 그런 농촌의 풍경이 펼쳐지고 있었다.  아 참.........  그때는 전혀 알지를 못했었다.  다다음날 몬세라토 트래킹을 위해 길을 나섰을 때,  그때 타고가는 기차가 아로 여기 콜로니아 구엘을 거쳐 지나간다는 사실을 말이다.  '콜로니아 구엘'과 '몬세라토 수도원'은 모두 같은 카탈루냐 전철 노선에 있다는 것을 그때는 전혀 알지 못했다.  혹, 다시 바르셀로나를 갈 기회가 생긴다면은.......  '콜로니아 구엘'과 '몬세라토 수도원' 방문을  같은 일정에 포함시켜서  좀 일찍 서둘러 길을 나설것이다.  조금만 일찍 서둔다면 충분히 당일 여행으로 가능한 곳이다.  계단을 올라가면 인근을 가로질러 4차선 대로 위로 수많은 차량들이 씽씽 지나간다.  그리고  횡단 보도 옆으로 길 건너 보이는 언덕위에 옛 성채가 있다는 날고 허름하고 아주 조그만한 안내 간판이 눈에 띈다.  그래서 삥 돌아 올라가  보았다.  별 볼일이 없다.  작은 성채 하나가 방치되어 부서지고 허물어진 참혹한 모습으로 내팽겨쳐져 있을 뿐이다.  무성한 잡초더미 속에 사방으로 쓰레기가 나뒹구는  낙서투성이의........  옛 사진을 찾아보니 100년 전에 이 성채는 신흥 도시로 탈바꿈한 여기 콜로니아 구엘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담당하던 관청으로 사용되었던 중요한 건물이었다.  생겨난 것이야 그보다 훨씬 오래전인 수백년 전이었겠지만.......  용도와 가치를 상실한 참혹한 성채를 둘러보고 나서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내려가서..........  진짜 콜로니아 구엘을 찾아 발걸음을 옮겨본다.  대로변으로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규모가 상당한 공장 건물이 바로 (콜로니아 구엘 방직공장) 터였다.  과거의 번영을 짐작할 수 있겠끔 규모가 상당했다.  1800년대 중반에 등장한 방직공장은 근대화 산업단지의 표본으로 번영을 구가하다가  1900년대 중반이 가까워지면서 제1차 세계대전과 경제공황의 여파속에 급격하게 쇠락의 길로 접어들었다.  수십년 동안 이 공장의 폐쇄된 상태로 방치되었다.  1970년대가 지나서 비로서 시대적 문화적 가치와 중요성을 재평가와 인정받아서 보수와 재건을 거쳐서 새로운 사업자들에게 분할 매각되면서 서서히 활기를 되찾아가고 있는 중이다.  아직도 상당 부분은 빈 공장 건물과 부지로 남아있다.  바르셀로나 역사에 있어서 이곳 (Industrial Colonia Guell)은 대단히 중요한 곳이다.  이곳에는 시대를 앞서 간  선각자 중의 한 명인 '구엘(Eusebi Güell i Bacigalupi)'의 삶과 철학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이끔으로 해서 '안토니오 가우디'가 이곳에 오게되었고.......  그런 결과로 유네스코 세계 유산 중의 하나인 '콜로니아 구엘 서민 예배당'이 이곳에 탄생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1878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 국제 박람회' 스페인 전시장에서 운명적인 만남이 이루어 졌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32세의 장래가 촉망되는 대단히 부유한 젊은 사업가 '에우세비 구엘'은  스페인 전시관을 둘러보던 중,  한 장갑회사의 부스 앞에서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전시 중인 고급 장갑때문이 아니었다.  바로 그 장갑을 진열하고 있는 목재 진열장 때문이었다.  구엘은 곧 진열장의 제작자에 대해서 문의했다.  그러자 뒤쪽에서 한 아주 젊은 청년이 나타나 자신을 소개했다.  그가 바로 '안토니오 가우디'였다. 세상은 이 만남을 중세 시대 '코시모 메디치와 미켈란젤로의 만남'과 자주 비교하곤 한다.  구엘은 가우디의 절대적 후견인이자 후원자이면서 평생을 함께하는 친구로 삼았다.  구엘이 가우디 보다 6살 연상이었지만 이들에게 나이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가우디는 예술로 승화되기까지 한 많은 건축물을 남겼다.  그리고 그의 모든 작품의 이면에는 구엘의 지원과 헌신이 절대적이었다.  두 사람은 영광과 축복과 행복을 늘 함께하면서 같이 누렸다.  가우디의 거처는 항상 구엘의 저택에 있었다.  구엘이 사망했다.  가우디가 받은 충격과 좌절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가우디는 구엘의 저택을 나와서 자신의 거처를 파밀리아 성당의 작업실로 옮겼다.  일체의 대외적인 사회생활과 주변과의 친교와 왕래를 멀리했다.  자나깨나 오로지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에만 매달렸다.  구엘이 떠나간 마당에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들어앉아 건축에 매진하는 일 밖에 남아있지 않다고 생각했다.  철저한 카톨릭 신자이자 평생 독신이었던 가우디는  스스로 냉혹한 감옥속으로 스스로를 몰아 넣었다.  결국  그는........  아주 쓸쓸하고 비참하게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이제는 모두 떠나고 없는........  구엘과 가우디에게 삶의 어두운 장막이 서서히 드리우기 시작하였을 때...........  그 시기에 두 사람이 함께 한 곳이 바로 여기 '콜로니아 구엘'이다.  '콜로니아 구엘'은 곧 '에우세비 구엘의 삶' 그 자체이다.  에우세비 구엘의 인생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  그의 가치관과 이상과 선각자로서의 꿈이 가장 잘 스며있는 곳이 바로 여기 콜로니아 구엘이다.  콜로니아 구엘이 곧 에우세비 구엘의 삶이라면........  구엘이 있는 곳에 당연히 가우디도 함께 있지 않겠는가?  구엘이 다듬어 놓은 대지 위에  가우디가 멋진 건물을 지어 올려 놓았다.  '콜로니아 구엘 서민 예배당' 이다.  굳이 유네스코 세계 문화유산임을 강조하지 않아도..........  두 사람의 인생관 가치관 그리고 꿈이 가장 고스란히 담겨있는 소중한 장소이다.  지금 우리 앞에 놓여진 서민 예배당은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의 모습이다.  구엘과 가우디...........  그들의 꿈도 여전히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것일까?

 



 

 




 

  '공단이라는 것이 다 거기서 거기가 아닐까?  뭐 별거 있겠어?'

  사방으로 굴뚝마다 탁한 연기가 꾸역꾸역 피어 오르고, 여기저기 기계 돌아가는 소음으로 가득하고, 공터마다 지저분하게 물건들이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있고,  드나드는 대형 트럭들의 빵빵 소리에 놀라고,  매쾌하고 불쾌한 냄새와 함께 미세먼지가 코끝을 간지럽히기 시작하면 어느새 연실 역한 재채기가 자신도 모르게 터져나오는..........

  그랬었다.

  구엘 방직공장의 정문을 지나칠때까지 만해도 사실 그런 생각이 전부였다.

  70년대 말,  노량진에서 가리봉동을 지나 독산동에 이르기까지 지나치면서 보았던 그런 흔하디 흔한 풍경을 당연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데..........

  플라타너스 가로수로 빼곡한 호젖한 시골마을 진입로가 나타났다.

  어디선가 병아리떼(?) 재잘거리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와!!!!!  세상에서 젤 예쁜 병아리들이 그득하다.

  마을 입구의 플라타너스 나무 그늘 가득한 푸르른 공터에 여러가지 놀이에 열중하고 있는 어린아이들이 가득하다.  세상에나........

  도심의 빼곡한 건물들 사이에 겨우 놓인 인공적인 놀이터가 아니다.  그냥 푸르름으로 가득한 시골마을 너른 공터에 펼쳐진 지극히 평범한 옛날식 놀이터 운동장이다.  예쁜 병아리들의 그 재잘거림이란.............  '공단'에 대한 우리의 환상은 벌써 산산히 부서져나가고 있었다.

  선생님들의 안내에 따라 어디론가 재잘거리면서 쪼잘쪼짤 길을 따라나서고 있는 병아리들의 행렬.........

  호젓하고 조용하고 깨끗한 한가로운 시골마을..........  딱 그런 풍경이 우리 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나  어쩌면 좋아?  어떻게 이렇게 사랑스런 마을이 이곳에 있을까?'  '나 그냥 여기 이대로 살았으면 좋겠어.'









 



 






 




















 


























 

 

 

 



 

 

 

 

 


  구엘 가문은 바르셀로나 지역의 산업을 이끌어 온 부유한 사업가 집안이었다.  에우세비 구엘의 아버지인 '조안 구엘 아이페레르'는 중남미 쿠바에 진출하여 섬유산업을 통해 막대한 부를 일군 후 바르셀로나로 돌아왔다.  에우세비는 이런 아버지의 사업을 고스란히 물려받아 젊고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사업가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게 된 것이다.  파리 세게무역 박람회장에서 처음 만난 구엘과 가우디는 그 이후로 평생동안 친구이자 건축가와 후원자로, 또는 사업 동반자이자 조언자이며 절대적 지지자로 대부분의 시간과 일을 함께 하게된다.  눈부신 성공이 이들 앞에 그림처럼 펼쳐졌다.  빈센스 주택을 시작으로 카사밀라와 카사 비트요까지 그야말로 눈부신 성장과 업적과 명성을 가우디는 차곡차곡 쌓아 나갔고,  구엘의 사업은 날로 번창하기에 이르렀다.   두 사람은 이제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유명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러던 1890년 어느 날..........  구엘 저택의 집무실에서 커피를 마시면서 구엘이 넌지시 가우디에게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산츠의 공장을 옮겨야만 할까봐.'  '지난번에 자네가 언질을 해준 이후로 나름 생각을 해보기는 했는데........  공장 전체를 옮긴다는 것이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야.'  '그렇기는 하지만.......  바르셀로나 시당국에서도 계속되는 민원 발생에 이미 여러차례 의사타진을 해 왔어.  공장을 옮기게 된다면  부지 선정과 각종 세금이나 허가에 대해서 최대한 협조를 해주겠다고..........'  '어떤 민원들이 접수되는데?'  '부친께서 산츠에 공장을 지으실때는 바르셀로나 시 외곽의 한적한 벌판일 뿐이었어.  그런데 이제 산츠는 새내의 한복판이 되어가고 있단 말이야.  바르셀로나가 급속도로 팽창 발전해 나가고 있어.  주변에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공장 소음이 크게 문제가 되는거야.  분진도 날리고......  도로 정비가 안된 상태에서 도시가 팽창하다보니 공장의 수송로 확보도 어렵고........  근자에 수송차로 인한 교통사고도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어.  물류 비용이 눈에 띄게 증대하고 있는 것이지.  공업 용수 부족도 이제 현실적인 고민거리로 등장하게 되었고..........  공장 주변이 복잡해지니까   직원들의 출퇴근에 불편이 증가되고 있고,  주변으로 도시가 들어서니 부동산과 물가가 치솟고 있어서 직원들의 생활물가도 급상승하고 있지.  교육 문제와 병원 문제등 복지 후생 비용이 전혀 예측이 안될정도로.........  여러모로 대단히 심각한 상황이야.'  '개선해서 수습할 사안들이 아니군.  공장 이전 외에는 달리 뾰족한 수가 없겠어.'  '그나마 부동산 가격이 오른만큼 공장 부지를 처분하는데서 어느정도 잉여 재산이 늘어난다고 생각하면........  공장 이전을 당장이라도 추진해야 할까봐.'  '이전 할 장소를 물색하기는 한 것인가?'  '산타 콜 로마 데 체 벨로(Santa Coloma de Cervello)를 생각하고 있어.'  '언덕 위에 낡은 고성이 하나 덩그렇게 놓여있던 그 시골마을 말이군.  자네가 날 그곳에 굳이 데려가고자 했을 때 알아차렸어야 했는데.........'  '당국에서 서너 군데를 추천해 주었는데  아무래도........  지금으로서야 바르셀로나에서 북쪽으로 한참 떨어져 있다고 보아야 하는데......  우선 국도 변이라 물류 수송에 용이하고,  바로 옆을 지나가는 철도를 이용할 수 있게 역사를 개설해주겠다는 거야.  그리고 그 버려진 너른 벌판이 대부분 개발이 멈춘 국유지라서 매입과 개발에 고심하지 않아도 되지.  공업 용수와 전기는 당국에서 최대한 보장해 주겠다고 했어.'  '그럼 공장 자체의 이전엔 별 문제가 없겠네만...........  여기 바르셀로나에서 공장까지 직원들의 출퇴근이 대단히 힘들어 지겠군.  출퇴근과 복지 안정이 보장되지 않는다면........  지금의 훌륭한 기능직원들을 과연 마냥 붙들어 놓을 수 있을까?  그것 또한 공장 자체의 이전만큼이나 대단히 중요한 사안인 것이야.  공장 직원들의 복지와 생활안정이 우선 보장되어야만 그들이 성실하게 열심히 일할 수 있을거야.  직원들이 기꺼이 따라나서지 않은 텅빈 공장이전은.........'  '그래서 자네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해.  자네가 해결해 주게.'  '이보게 구엘.  난 건축가야.  그냥 집이나 짓는 사람이라고.  대규모 토목 사업을 벌이고 다리를 놓고 공장을 짓는것은 내 분야가 아니야.  그것은 당국과 많은 전문 분야의 공학자들이 해결 할 일이야.'  '알아.  터를 닦고 다리를 놓고 물을 끌어 오고  전기를 끌어오고 공장을 짓는것은 내가 알아서 하겠네.  대신 가우디 자네는 우리 공장 직원들이 생활할 집을 많이 지어 줘. 학교도 지어주고  병원도 지어주고 시장도 지어주고 노동조합 사무실과 교회도 지어 주어야 해. 공원과 놀이터도 만들어야 하고.........  우리 직원들 모두가 일터에서 가까운 곳에서,  도시와 전혀 다를 바 없는 최대한의 편리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는 모든 시설을 자네가 만들어 줘. 산츠에서 보다도 더 쾌적하고 편리하게 말이야.  어디에 가서도 구엘 공장에 근무하고 있다는게 자랑스러울 정도로 만들어 줘.'  '그건 그냥 집을 짓는것이 아니지.  미래형 도시를........  최첨단 산업도시를 새롭게 건설하겠다는 뜻이지..........'  '도시든 마을이든 단지든 상관 없어.  구엘 인더스트리에 다닌다는 것이 스페인 어느 도시생활에 견주어서도 전혀 뒤지거나 부끄러울 것이 없는  그런 환경의 생활 터전을 만들어 줘.  가우디 자네가 그렇게만 약속해 준다면.........  이제부터라도 당장 공장 이전을 추진 하겠네.  진심으로 부탁하는 거야.'  '이런 상황에서 구엘 자네에게 내가 뭐라고 더 말할 수가 있겠나.  그냥 (콜) 일세.'





  구엘 인더스트리(방직공장)의 이전 사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본래의 공장이 있던 '산츠 지역'은 현재 바르셀로나의 시청사가 있고, 카탈루냐 광장에서도 그리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바로 '스페인 광장' 인근이었다.  샐내 정원과 아름다움으로 유명한 '바르셀로나 산츠 역' 바로 옆에 위치하였으니.  그야말로 노른자위 땅이었다.  하지만 대부분의 에너지를 석탄에 의존해야만 했던 시대에 도시의 팽창과 더불어 우리나라 근대 산업단지의 역사처럼 도심에서 멀리 벗어나야만 하는 시대적 운명을 맞이했던 것이다.  방치되다시피 한 한적한 시골 벌판  '산타 콜 로마 데 체 벨로(Santa Coloma de Cervello)'에 거대한 섬유방직 공장이 들어서고 주변으로 하나 둘씩 생활주거 환경이 조성되기 시작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곳 지명과 생겨난 공장의 대표성을 따서 '콜로니아 구엘(Colonia Guell)' 이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이곳을 부르고 표기하게 되었다.
  공장은 하루가 다르게 제 모양과 용도를 찾아 세워지고 있었다.  작은 도심(구엘 마을)도 점차 생활주거 단지의 모양새를 갖추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가우디의 모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여러 해가 지나 공장도 마을도 어느 정도 계획한 모습대로 서서히 완성되어가고 있었으나.........  여전히 가우디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콜로니아 구엘 어디에도 가우디는 없다.  하지만 에우세비 구엘은 묵묵히 자신의 일만을 계속해 나갔다. 






 








                                                                                       ---  가우디가 제작한,  파리 국제박람회에 전시된 가죽장갑 전시 진열장.


 

 

                                                                    ----  (건물을 매달수는 없을까?)  이런 고민에 가우디는 10년을 매달렸다.  끝내 미완성.....

 

 

                                                                                                                           ---   I.M. 페이가 만든 (루브르 피라밋)

 

 

 

                                                                                     ---  조형물을 거꾸로 매달았다. (가우디가 추구했던 것이 이런것이었을까?)







 







  직선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우아한 곡선은 신의 영역이라고 여겨졌다.  그러나 가우디는 그 우아한 곡선을 인간의 세상으로 끌어내리고 싶었다.  대지에 뿌리를 두고 그 기반 위에 건물을 만들어 세우는것이 인간의 건축이라 한다.  하지만 가우디는 그 건물을 대지라는 기반이 아닌 허공에 매달고 싶었다.  '건물을 거꾸로 매달수는 없을까?'  성공한 건축가가 그 인생의 최고 정점에서 실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생각에 깊이 빠져들고 말았다.  그 후  가우디는 꼬박 10년 이라는 시간을 이런 고민속에 빠져 살았다.  모든 주변 상황과 여건을 무시 내지는 외면했다.  그의 관심사는 오로지 '어떻게 하면 건물을 거꾸로 매달 수 있을까'뿐이었다.
  그런 고민이 한참 물어익어가는 시기에 '구엘 인더스트리의 이전'이 제의되었던 것이다.  가우디는 구엘의 부탁을 진지하게 받아 들였다.  당연히 누구보다도 최선을 다해 구엘을 도와주어야 했다.  가우디 자신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안이었다.  다만.........  그 시기의 가우디는 이미 '건물을 매달수는 없을까'에 깊게 빠지고 난 후였다.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가우디는.......  이 고민이 곧 해결이 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자신의 연구가 어느 정도 완성단계 내지는 말미에 와 있다고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구엘의 부탁을 성실히 이행하기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을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자신이 당면한 고민에 너무도 깊이 빠져있었기 때문에........  잠시만 더 연구의 시간을 벌 방법을 궁리하게 되었다.  어차피 이대로 (콜로니아 구엘 마을 건설)에  뛰어든다고 해도 마음속에 이미 딴 생각이 가득하기에 제대로 집중할 수 없는 상태였다.    결국 가우디는 '컨소시엄 프로젝트(consortium project)'를 실행에 옮기게 된다.

 

  가장 먼저 이 프로젝트를 위해 달려와 준 사람은 가우디의 오랜 친구이자  가우디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함께 작업했던 '프란시스 베렝게르(Francesc Berenguer)'였다.  가우디는 베렝게르에게 구엘 인더스트리 마을 건설 프로젝트의 총책임을 맡겼다.  하지만,  베렝게르는 젊어서 건축학 공부를 전공하기는 하였으나  정식으로 건축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였으므로,  대부분의 완성된 건축물 대장에 실질적인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올려보지 못한......  재야의 숨은 위대한 건축가였다.  그런 베렝게르를 알아 본 가우디는 전 생애를 걸쳐 그와 함께 대부분의 작업을 하였으며,  콜로니아 구엘 건설의 총책임자로 임명했다.  베렝게르는 노동조합 건물을 직접 지었으며,  자신의 아들을 불러들여 함께 학교를 지었다.  그리고 마을에 분포되어 있는 여러 채의 주택공사를 실제로 맡아서 진행했다.  건물의 외부로 노출되는 벽면의 독특한 벽돌 배열과 여기에 단철 작업을 통해 장식적인 효과를 극대화 시키는 역활을 특히 강조했다.  외관은 비교적 평평하고 단조로와 보이나 건물의 균형미를 중시하면서도 도자기 파편등을 이용하여 아름다운 장식에도 정성을 드린 특징을 가지고 있다.  다음으로는 가우디의 제자인 '후안 루비오(Juan Rubio)를 불러 들였다.  그러자 후안은 자신의 동생인 마리아노 루비오와 함께 달려왔다.  콜로니아 구엘 마을에 있는 대부분의 붉은벽돌 건물의 상당수가 후안 루비오의 작품이라고 보면 거의 틀림이 없다.  자신이 건축하는 건물의 주재료인 붉은 벽돌은 당연히 그 건물 전체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소재이자 주인공이며 당연히 가장 돋보여야 한다는게 그의 지론이었다.  각개의 건물마다 붉은 벽돌이 가질 수 있는 멋진 외관적 특징을 극대화 시키고 다양한 솔루션을 반영하는 하나의 멋진 조각품처럼 만들어져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하여 그의 건물은 비교적 베렝게르의 붉은 벽돌 건물보다 복잡하고 화려하다.  가능하다면 이 작은 일반 주택에도 고딕양식의 기풍을 가미하고 싶어했다.  이는 캔틸레버와 스탠드로 특히 모서리를 멋지게 장식하고 강조한것으로 나타난다.  함께 온 동생 마리아노는  군사용 엔지니어였다.  그는 자신의 능력을 콜로니얼 구엘이라는 작은 도심을 건설하는데 있어서 다양한 방법으로 여러곳에 쏟아 부었다. 
  참으로 위대한 프로젝트라 할 수 있겠다.  오늘날 우리가 작금의 현실속에서나 자주 접하게 되는 (** 도시) (## 산업단지) ($$ 신도시) 라는 용어가.........  130여년 전, 이미 바르셀로나에서 용어가 아닌 실제적으로 벌어졌던 것이다.  사업가이자 선구자인 에우세비 구엘은 이런 구상을 현실로 옮기게 되었고,  가우디는 그 실현을 프로젝트를 통해 가능케 했던 것이다.  구시대적인 산업 기반을 현대화와 인구 밀집현상으로 파생되는 여러가지 문제점들과 구분짓고 해결하기 위한 하나의 방책으로,  산업시설을 도심을 벗어난 외곽지역으로 옮기고도 생산성과 효율성을 유지 내지 향상 시키면서도,  종사자들의 생활환경과 복지생활을 쿨하게 보장해 줄 수 있는........  새로운 성격의 공간(도시)을 창조해 낸 것이다.  이 새로운 차원의 거대한 플랜 속에서도 구엘은 공장 뿐만이 아니라,  근로자들의 집과 병원과 기숙사와 학교와 시장과 상점,  그리고 극장과 노동조합과 나아가 예배당 까지 모두가 매우 중요하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는 훗날........  20세기 후반에 들어서면서........  대단위 공단이 조성되거나.......  새로운 신도시가 건설될 때에........  토목이나 건축이 모든것을 다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환경과 통계 등 거의 모든 분야를 총망라하는  하나의 복합적인 종합 예술적 접근 방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게끔 만드는 시작이 되었다.

  종합 프로젝트는 아무런 탈 없이 제대로 진행되어 갔다.  구엘 인더스트리의 이전도 어느덧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 시험 가동에 들어갔고,  도시(구엘 마을)도 어느 정도 완성 단계에 접어들어 노동조합이 먼저 입주하고  직원들도 하나 둘씩 이사를 해오고 있었다.  이 일대에 유일하게 옛 잔재로 남아있던 언덕 위의 작은 성채는 새롭게 꾸며지고 단장되어  '콜로니아 구엘 지역 관청과 치안 담당소'로 탈바꿈 되었다.  안토니오 가우디가 이곳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 것은 아마도 그때 쯤이었지 싶다.  왜냐하면.........  가우디가 '거꾸로 건물을 매다는 연구'에서 스스로 패배를 인정하고 빠져나온 시기가 바로 이때 쯤이기 때문이다.  파리의 루브르 박물관에 가면  중국계 미국인 건축가 'I. M. 페이'가 설치한 현대적 조형물 '피라미드'가 있다.  지상의 투명 유리로 만든 피라미드 아래 역삼각형의 피라미드가 매달려 있고,  그 아래에 지면을 딛고 서있는  아주 작은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닮은 피라미드가 서로 코를 맞대고 서 있다.  나는 이 조형물의 사진을 볼 때 마다  (가우디의 건축물 거꾸로 매달기 연구)가 생각이 난다. <바로 위쪽의 6장 사진은 이런 상황 설명을 위해서 구글 이미지 검색을 통해 퍼 왔음을 밝혀두고자 한다.>  아뭏튼.......  안토니오 가우디가 콜로니아 구엘이라는 새로운 지명으로 탄생한 이 지역에 다시 나타났다.  가우디는 마을을 돌아보고 있었다.  콘소시엄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 계획하고 목적했던 바 대로  도시는 착오없이 거의 완성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그때,  살며시 다가 온 구엘이 가우디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친구야.  공장도 마을도 모두 완성되었는데.........  예배당은 언제지어 줄 꺼야?  저들이 언제까지 이렇게 공터에서 비를 맞으며 예배를 드려야 할까?'  '예배당?  아직 안지었어?'  '우린 아직 예배당의 설계 조차도 모르고 있어.  그건 네 머리와 가슴속에 있지 않았니?'  '그랬나?  알았어.  삐까뻔쩍하게 단숨에 지어 줄께.'  '그런 교회를 원하지 않는다고 내가 아주 오래전에 너에게 말해주었잖아.  이곳의 우리 모두는 지극히 소박한 소시민들이야.  우리의 모습대로.......  우리의 마음가짐 그대로 가지고 편하게 드나들 수 있는 작고 소박한 교회면 만족하겠다고 분명히 너에게 말해 주었었어.  지척에 두고 누구나 마음 편하게 아무때고 드나들 수 있는.......  서민적인........  그런 교회면 충분하겠어.  거기에다 너의 노력으로 아름답기까지 하다면 더 바랄게 없고...........  해 줄꺼지?'  '콜로니아 구엘 서민 예배당.........  알았어.  지금부터 시작할께.  조금만 기다려 줘.  실망시키지 않을께............'
























 

 

 

 










 






 



 

 




  구엘 성당  혹은 구엘 교회로 불리는 이 예배당의 정식 명칭은 (Cripta de la Colonia Guell) 이다.  그러니까 정확하게 표현하자면 '콜로니아 구엘 지하 예배당'이 되겠다.  여기에서 '크립타'는 카탈루냐 어로 '지하 예배당' 혹은 '지하 납골당'의 의미로 쓰인다.  스페인에서도 이탈리아의 카타콤베와 같이 교회의 지하를 무덤으로 많이 사용했기 때문이다.  에우세비 구엘이 바르셀로나 도심 산츠에 있던 구엘 방직공장을 부득이 이전해야 함에 있어서,  그는 현대 산업분야에서나 적극 활용하고 있는 새로운 공단 조성과 인근 위성도시의 신설 내지는 재개발에 있어서 최초의 실험적인 대 혁신안을 내놓게 되었던 것이다.  콜로니엘 구엘이 건설되고 나면서 부터, 이 세상은 신도시 건설과 새로운 공단이나 항만의 건설에 있어서 콜로니아 구엘의 모범적 사례를 더 깊이 연구하고 받아들이며 보다 적극적으로 활용하게 된다.  이 원대한 프로젝트를 가우디와 상의한 끝에 1898년에 시작하게 되었다.  이 이공 이전과 신도시 건설이라는 대역사는 약 10년에 걸쳐서 이루어졌는데........  가우디가 이 현장에 제대로 모습을 드러낸것이 바로 거의 10년이 다 지나간 1908년 무렵이었다.  구엘 공장은 거의 이전 완성되었고  콜로니아 구엘 마을(소도시)도 준공 되었다.  다만 가우디의 몫으로 예배당(성당) 만이 아직 건설되지 못한 상태였다.  늦게나마 부랴부랴 가우디는 '콜로니아 구엘 지하 예배당)의 건축에 심혈을 쏟았다.  완만한 곡선과  현지에서 쉽게 조달 할 수 있는 서민적 재료들을 있는 그대로의 특성을 가능하면 고스란히 살리는 선에서 착착 건축이 진행 되었다.  가우디가 심혈을 기울이고 서둘렀음 때문인지  늦게나마 착공된지 4년 정도가 지나자  성당의 지하 예배당 부분이 거의 완성되었다.  공사는 계속 진행되고 있었지만,  지역 주민들이 주일이면 예배를 드리기에 전혀 불편함이 없을 정도였다.  지하 예배당의 완공으로 이제 겨우 기초공사 작업을 마쳐가는 수준이었으나.......  작고 소박하기는 하지만 곡선의 미를 한껏 살려낸 이 매우 독특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사방으로 널리 퍼져나갔다.  사방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연일 찾아들면서 '역시 가우디'를 연발했다.  그러던 중...........  가우디가 정신을 차리고 다시 현장으로 되돌아 왔던 시간이 너무 늦었음이었을까?  지하 예배당 교회는 이제 겨우 지하층 공사만을 겨우 마쳐가고 있을 즈음이었는데..........  그만 공사가 중단되고 말았다.
  1914년,  오스트리아의 황태자 부부가 세르비아 순방 중 암살되는 사건이 벌어졌다.  국가라는 개념의 영토 분할 이면에 종교와 민족이라는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 없는 사안들이 수없이 얽히고 섥혀 복잡할대로 복잡한 발칸반도에서 전쟁이 발발했다.  제국주의 열강의 탐욕과 이슬람과 기독교(카톨릭)의 반감과 멸시.  민족들 간의 오랜 원한들이 한꺼번에 폭발하고 만 것이다.  여기에 볼세비키주의자들과 아나키스트 운동에 심취한 자들과  전쟁으로 먹고사는 군수사업자들까지 모두 끼어들어 기름을 끼얹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것이다.  유럽의 경제가 심각하게 타격을 입고 깊은 수렁의 나락으로 추락하기 시작했다.  전쟁은 국가와 국가간에 그리고 지지 세력간에 끊임없이 피를 말리는 장기전으로 돌입했고,  이 전쟁은  사상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천문학적 전쟁 비용을 필요로 했다.  아무도 예측 할 수 없었지만.......  승리를 쟁취한다 해도 결코 별반 남을 것이나 이득이 없다는 것을 모두가 잘 알고 있었다.  그라나 만약 패배 한다면  그것은 곧 지옥이라는 것도 잘 알고들 있었다.  죽을 수는 있어도 결코 항복하거나 패배 할 수 없는 전쟁이 연일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온 유럽이 경제 공황에 빠져들었다.  이 여파는 곧바로 바르셀로나에 있는 '구엘의 방적사업'에도 치명타를 입히게 된다.  모든 자원들은 우선 군수산업쪽으로 징발되었고  상품을 만들에 낸다해도 어려워진 경제로 판로가 막혀버렸기 때문이다.  사태는 대단히 심각했다.  결국.........  지하 예배당의 공사는 중단되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격으로..........  이듬해 에우세비 구엘이 사망하게 되었다.  구엘의 사망.  가우디가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한동안 가우디는 공황 상태에 빠져 헤어나오질 못했다.  이 때부터 가우디는 지난날의 활기차고 의욕에 가득찬 환하게 웃음짓던 지난날의 가우디가 아니었다.  그는 스스로 자신을 폐쇄된 공간속으로 몰고들어갔다. 
  그때 바르셀로나 시정부와 카톨릭 위원회로 부터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건축' 제의가 들어왔다.  이미 그에게 커다란 가르침을 주었던 두 명의 스승이 파밀리아 성당 건축을 맡아서 토목 공사를 마쳤고,  본격적인 본 공사를 시작하던 중에 모두 사망했던 것이다.  이루말할 수 없는 아픔과 죄절에 빠져있던 가우디는 이 시련에서 빠져나오는 한 방편으로 이 제의를 수락한다.  구엘 저택을 나온 가우디는  파밀리아 성당 작업실로 자신의 거처를 옮긴다.  그리고 죽는 날까지 오로지 '파밀리아 성당 건축'에만 매달리는 것으로 나머지 인생을 모두 쏟아붓게되는 것이다.  이 말은 곧..........  다시는 콜로니아 구엘로 되돌아 가지 못한다는 뜻이다.  '콜로니아 구엘 지하 성당'이 끝내 미완성으로 남게되는 이유가 된다.
  '가우디의 건물 거꾸로 매달기 연구'가 좀 일찍 성공했거나.......  아니면 좀 더 일찍 포기했더라면........  에우세비 구엘이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지하 예배당은 혹 완공을 보지 않았을까?  파밀리아 성당의 파사드까지는 직접 완공하지 않았을까?



 

 

 

 

 

 

 

 

 

 

 

                                                           --- 미완성 상태이지만 (구엘 지하예배당)은 가우디의 다음작품인 (파밀리아 성당)과 매우 닮은 모습이다.

 

 

 

 

                         

 

 

 

 

 

 

 

 

 

 

 

 

 

 

 

 

 

 

 

 

 

 

 

 

 

 

 

 

 

 

 

 

 

 

 

 

 

 

 

 

 

 

 

 

 

  하루는........   가우디가 구엘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만드는 건물이 정말로 괜찮은거야?  혹시 괜찮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의 전부가 우리 둘 아니야?'

  '확실히는 잘 모르겠지만........  나 부터도 가우디의 건축이 썩 마음에 들지는 않아.  그냥 그것들을 존경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할 뿐이야.'

  두 사람은 서로 마주보고 한참동안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둘은 언제나 그런 사이였다.

 

 

 

 

  야트막한 언덕 위에 세워진 교회는 예배실을 지하층에 둘 생각이었기 때문에 조금은 막힌듯 어두운 지하 공간을 갖추고 있다.  생긴 지형을 그대로 살리고자 하였으며, 나름은 주변의 자연적 경관이나 환경에 친숙하게 동화시키려는 노력이 충분하게 반영되었다.

  외부로 벽돌을 쌓아 올린 많은 기둥들이 서 있고,  다듬다 만것 같은 채석장에 날라온 모습 그대로의 돌기둥들이 다양한 형태와 방법으로 서로 연결되어서 천장을 받치고 서있다.  가히 우연적으로 심하게 변형된 기하학적 어떤 형틀을 올려다보고 있는 느낌마저 생겨난다.  슬쩍 귀엽기까지 하다는 이 느낌은.......

  간촐하고 소박하면서도 어딘가 지하라는 공간이 주는 어두침침함이 무겁게 다가오는  지하 예배당에 들어서면........  우리 눈동자의 조리개가 어느정도 어둠에 적을해 가고 있을 무렵에,  이 반지하 공간이 결코 암울하고 어두운 공간이 아니라는 것을 깨우쳐 주려고 따스하고 부드러운 햇쌀을 다양한 칼라로 실내에 가득 발아들이고 있는 22개나 되는 스테인 글라스 창문이 화사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 어떤 조명보다도 따스하고 아름답다.

  예배당 안의 모든 설치 조형물과 가구들도 가우디가 직접 디자인 했다.

  현지 주민들을 모셔다 의자에 낮혀놓고 그들의 체형과  습관과 필요를 반영해 책상과 의자를 만들었다.

  그리고........  한 두 걸음쯤 뒤로 물러서서........  가만히 이곳 콜로니아 구엘 지하예배당의 모습을 바라다 보면.........  또 전시장에서 여러 사진들과 기록들을 살펴보노라면...........   지하예배당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과 상당히 닮았다.

  가우디는 이 지하예배당 건설에 온 심혈을 기울였다.  거기에는 수많은 창조적인 실험정신이 포함되어 있다.  비록 이 지하예배당이 미완성에 그치고 말았지만,  이곳에서의 경험을 토대로  다음 작품인 파밀리아 성당의 설계와 초기 시공에 그대로 반영한 듯 싶다.  아마도 파밀리아 성당의 전체적인 설계 구상은  이곳 콜로니아 구엘 지하예배당의 설계를 기반으로하여 그 위에 더욱 거대하고 한차원 승화 발전된 형태로 구상되었으리라.

 

  '피렌체 두오모'를 완성하기 위하여 '부르넬리스키'는 자재를 높은곳까지 들어올리기 위하여 오늘날의 엘레베이터 같은 시설을 설치하였다.(현재의 엘레베이터 설치 공간)

  가우디는 이와 비슷한 공법을 받아들여서 전체적인 건물의 외부 골격 모형에 길다랗게 로프를 연결하고,  그 로프 위에 여러개의 작은 납주머니를 매달아서  가장 이상적인 곡선을 찾아내고자 했고, 이를 기준으로 안정성에 기반을 둔 공학적인 계산을 했다.  이를 기반으로 캔버스 위에 구조물의 아치 형태와 다양한 형태를 모양을 구성해 냈다.  그리고 이를 최종적으로 확인 하는 과정으로......  건물을 거꾸로 매다는 형체를 만들어 놓고는 하중의 무게 배분과 안정성을 먼저 확보해 놓은 다음에야 평소 상상해 왔던 다양한 형태의 변형을 시도해보곤 했다.  'hyperboloids' 같은 건축 용어가 여기에서 생겨나게 된 것이다.

 

  구엘의 사망으로 중단 된 지하 예배당 공사는 1917년 이후로는 방치되다시피 모두에게서 잊혀져 갔다.  구엘 방직공장도 운명을 같이 했다.

  1990년대에 들어서 스페인의 경제가 어느정도 안정되어가자 많은 학자들을 중심으로 근대 역사와 문화재에 대한 관심이 증대해 갔다.  그들은 방치되어 페허로 변하다시피 한 '구엘 방직공장'의 재건에 힘쓰게되었으며,  이는 곧 '콜로니아 구엘 지하예배당'에 대한 관심과 재평가로 이어졌다.

  어찌보면  안토니오 가우디가 가장 심혈을 기울인........  그의 건축 정신이 가장 고스란히 간직되어있는......  그가 가장 아끼고 사랑한.......

  학자들과  바르셀로나 당국은 결국 2.000년에 들어서  '콜로니아 구엘 지하예배당'의 복원 계획을 수립하기에 이른다.  미완성을로 방치된 이후로 설치되었던 외부의 철조망과 가림막을 철거했다.  임시로 막아 놓았던 이층으로 올라가는 통로를 막아놓았던 외벽도 철거해 버렸다.  비로소 미완성인 형태이나마  지하예배당의 완성된 부분이 나름의 제모습으로 환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지금 이곳을 방문하는 여행자들은 예배당의 지붕이자 옥상에 올라가 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잊지말아야 할 것은.........  그곳이 지붕이나 옥상이 결코 아니라는 사실이다.

  그곳은 사실은  교회의 1층 바닦이다.

  그 위로 파밀리아 성당을 닮은 예배당의 본체가 높이 올려졌어야만 했던 것이다.

  이 건물의 가치를 인정한  (유네스코 문화유산 위원회)는  2005년 미완성인 상태의 지하예배당을 '인류가 보존해야 할 귀중한 문화유산'으로 선정했다.

  언젠가........  우리가 아니면........  우리의 후세들은  애초 가우디가 구상하고 설계했던  완성된 콜로니아 구엘 교회를 볼 수 있지 않을까?

 

 

 

 

 

 

 

 

 

 

 

 

 

 

 

 

 

 

 

 

 

 

 

 

 

 

 

 

 

 

 

 

 

 

 

 

 

 

 

 

 

 

 

 

 

 

 

 

 

 

 

 

 

 

 

 

 







  스페인을 대표하는 수많은 건축가를 배출해낸 명문 바르셀로나 건축학교 졸업식장에서 엘리에스 로젠티 학장은 한 졸업생의 학위수여 차례가 오자 마이크를 잡아당기며 공개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재학기간 내내 수많은 이야기꺼리와 화제를 숱하게 만들어냈던 골칫덩어리 학생이었던 것이다.  '내가......  그리고 우리가 지금.........  한 바보에게 학위를 주고 있는것인지  아니면 어떤 천재에게 학위를 주고 있는것인지 지금으로서는 잘 모르겠습니다.  훗날,  시간이 이를 증명해 주겠지요.'  그 졸업생의 이름이 '안토니오 가우디'였다.  그리고 그는 이런 의문에 대해서 그리 오래지나지 않아 충분하게 증명을 해 보였다.



  '콜로니아 구엘 지하예배당'을 나와서 다시 구엘 마을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입장권을 샀던 안내소를 다시 들려보기 위해서있다.  빨리 지하예배당을 만나고 싶어서 표를 구입한 뒤 서둘러 예배당으로 발길을 옮겼었는데........  이 매표소는 안내소임과 동시에 '가우디 기념관'으로 꾸며져 있었다.  그리고 입장권에는  여기 기념관의 관람 비용도 이미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우리는 그곳에서 살아있는 가우디를 다시 만났다.  그의 발자취를 따라 함께 걸으면서 많은 이야기를 나눈다.  아마도.......  그에게 졸업장을 수여하면서 우려했전 학장의 마음이  10여년 뒤에는  지금 나의 마음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우리가 가우디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기념관을 돌아보는 내내.......  우리의 곁에서 함께 따라 걷고있는  구엘을 느낀다.  구엘이 가우디고,  가우디가 곧 구엘이니까.........  이 마을이.......  그리고 가우디의 작품들이 영원히 보존되고 존경의 대상이 되는 한.......  그들의 우정과  그들의 삶도 영원히 존경받으리라.
   삼가 두 사람의 거룩한 발자취 앞에 옷깃을 여미고 한없는 존경과 사랑을 보내 드린다.





 

 

 

 

 

 

 

 

 

 

 

 

 

 

 

 

 

 

 

 

                                                                               --- ' 나 어떻게 해.  어쩌자고 이렇게 이쁜거야?  집에 가기 싫어.  나 여기서 살고싶어.'

 

 

 

 

 

 

 

 

 

 

 

 

 

 

 

 

 

 

 

  작은 마을이지만 콜로니아 구엘은 아담하고 고즈넉하고 여유롭고 깨끗하며........  지극히 아름답다.

  이제것 내가 다녀 본 도시나 마을중에서 단연 돋보이는 손에 꼽히는 주거환경을 한가득 고스란히 품에 안고 있다.

  먹고 살아가야 하는 문제만 해결된다면......  정말로 눌러앉아 살고싶은 그런 마을이다.

  푸근하고 넉넉한 마을 주민들은 반갑게 인사는 물론  하나같이 자신의 정원이나 집안을 고스란히 개방해 준다.  다소 초라해보이기까지 하는 마을의 유일한 구멍가계이자 슈퍼는 어찌나 정감이 넘치는지........  이곳에서 먹는 도너츠와 생맥주는 가히 일품이었다.

  조금은 시대에 뒤떨어지고 조금은 낙후된듯한 전체적인 느낌의 마을 풍경이지만.........  현지인들의  카탈루냐에 대한,  그리고 자신들이 살고있는  콜로니아 구엘에 대한 자부심만은 그 어느 내놓으라하는 대도시에 조금도 뒤떨어지지 않았다.

  훗날 언제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공되어서  내가 바르셀로나에 돌아오게 된다면.........  지하 예배당의 재건이 궁금해서이던,  아니 어쩜 그 보다는 이 아름다운 마을을 잊을수가 없어서 꼭 다시 찾아올것만 같다.  아니.......  다시 오고 싶다.

 

 

 

 

 

 

 

  지중해를 건너 어느날 불쑥 리베리아 반도에 나타난 아랍인(이슬람)들은  그 후로 수세기에 걸쳐 오랜세월동안 리베리아 반도(스페인. 포루투갈)를 점령하고 통치하였다.  그들은 서유럽 영토에 영원한 이슬람 왕국을 건설하고자 노력했다.  수많은 메스키타와 알카사르와 알함브라 궁전 같은 위대한 유산을 남겼다.

  그러면,  그들이 지배하던 시기(약 780년 기간)에 토착민(스페인 카톨릭)들의 문화와 예술은 완전히 멈추어 버렸거나 소면되었느냐?  아니다.  새롭게 등장한 이슬람의 강력한 문화적 색채 아래에서도 그들은 꾸준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계승하고 발전시켜나갔다.

  리베리아 반도의 토착문화였던 서고트족으로 부터 시작된 문화 위에 로마와 비잔틴 양식을 거치면서 고착화되었던 스페인 카톨릭 양식의 문화에다가, 이번엔 아랍의 문화가 어느정도 혼재된 새로운 기독교 건축 양식과 문화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를 역사 건축학자들은 (모사라베 양식)이라고 한다.  기독교식으로 만들어진 건축물에 화초나 기하학적인 모양의 기호등이 장식으로 쓰여지기 시작한 것이다.  교회(성당) 등의 커다란 건축물에 이슬람 모스크에서 따온 돔 형태가 이때부터 쓰여지기 시작한다.  이렇게 등장한 모사라베 양식은 점차 두꺼운 벽과 둥근 아치,  그리고 작은 창문으로 대표되는 로마네스크 양식에 절대적인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런가 하면 '레콩키스타(카톨릭 주도의 국토회복운동)'의 성공으로 아랍인(이슬람)들은 리베리아 반도에서 몰아낸 후 벌어진 대대적인 카톨릭 문화운동과 건축기간 동안에 (모사라베 양식)이 주류를 이루는 동안에,  차마 반도를 떠나지 못했던 이슬람 사람들의 문화와 예술 활동은 정지했거너 소멸되었느냐 하면......  그것도 역시 아니다.  반도에 남아있게 된 아랍인들은  카톨릭의 탄압과 박해 속에서도 꿋굿하게 자신들의 문화를 계승 발전 시켰다.  예전처럼 드러내놓고 대규모의 역사를 벌일 수는 없었으나,  그들은 작고 소박한 건물에 벽돌이나 석고를 이용해 대단히 셈세하고 아름다우며 창의적인 실내 공간을 창조해는 방향으로 눈을 돌렸다.  이를 (무데하르 양식)이라고 한다.

  미술 역사 학자들은 '모사라베 양식'과 '무데하르 양식'을 구분하는 것을 대단히 중요하게 다루고 있으나,  기실은........  우리와 같은 보통의 여행자들로서 이들을 분명하게 구분짓는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하겠다.

  이탈리아 시칠리아나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에서  특히 이렇게 카롤릭과 이슬람 문화가 혼재하여 새롭게 탄생한 복합적인 문화와 예술을 쉽고도 많이 접할 수가 있는데,  이곳 바르셀로나에서도 마찮가지였다.  바르셀로나의 골목 곳곳마다에서 역시 이런 복합적인 요소를 듬뿍 풍기는 문화재급 건축들이 많이 눈에 띈다.

  거기에 더하여........  그런 독특한 복합문화의 토대 위에 더욱 톡특한 가우디만의 매력이 듬뿍 덧칠하여 탄생한 곳이  바로셀로나다.

  누군가는 바르셀로나를 그렇게 불렀다.  '가우디 공화국'이라고..........

  바르셀로나는 아름답다.  더하여 대단히 고혹적이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나 구엘 공원이나  카사 밀라나 카사 바트요만이 바르셀로나에 있는 가우디의 대표작품이 아니다.

  그 외에도 바르셀로나 곳곳에 녹아있는 가우디의 손길은 더 많이 있다.

  (핀카 구엘)이 바로 그런곳 중의 한곳이다.  핀카 구엘을 요즘은 (핀카 파빌리온)이라고 부른다.

  구엘은 한적한 외곽지역이었던  사리아라는 작은 마을의 페드랄베스 공원 바로 옆에 아담한 집을 하나 짓고 싶었다.  구엘이 처음 건축을 요청한 사람은  가우디의 스승인 마르또렐 이었다. 마르또렐은 이곳에 캐라비안 풍의 깜찍한 모양을 갖춘 집을 거의 완성했다.  그때 마르또렐이 사망했다.  구엘은  가우디에게 마지막 리모델링 마감 처리와 집을 둘러 싼 담장을 지어달라고 요청했다.

  결국 핀카 구엘은  가우디에 의하여 완성되었다.

  가우디는 인형왕국에나 등장할지 싶은 유려한 곡선이 아름다운 담장을 설치했다.  여러군데의 출입구와 함께 마름모 형태로 다듬은 돌로 담벼락을 쌓았고 중앙 정문에는 그리이스 신화에 등장하는 용을 연철을 이용하여 형상화하였으며 유리로 눈을 장식했다.  실로 동화에나 나올법한 파격적인 디자인이었다.

  그리고 쾌적한 공간의 완성을 위해서 내부 곳곳에 정원을 만들었으며 그 중심에 헤라클레스 분수대가 놓여졌다.

  이곳은 현재 칼탈루냐 공과대학 연구소로 이용되고 있어서 외부에 개방이 되지 않고있는 장소이다.

  어렵게 이곳까지 찾아간다 해도 입구에서 기념사진을 몇 장 찍는 정도 밖에는 다른 일체의 행위가 제약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아쉬울 수 밖에.......

 

  다음은 바르셀로나 외곽에 있는 (포르탈 미랄레스)이다.

  바르셀로나의 부동산 사업가 '에르메네질도 미랄레스'는  건축가  '호세 안토니오'에게 의뢰해서  경관이 수려한 외곽지역에 (레스 고체레스)라는 고급 빌라촌을 건설하게 되었다.  고급 빌라촌을 완성한 미랄레스는 '화룡점정(畵龍點睛)'을 더하기 위하여  가우디에게 빌라촌의 입구에 대문을 만들어줄것을 정중하게 요청하였다. '미랄레스의 정문'  '미랄레스의 담벼락'이 비로소 가우디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현재 이 빌라촌은 건축물로서의 가치보다도  '가우디의 작품을 소장 보존'하고 있다는 이색적인 가치로 재평가되고 있다.

 

 

  그런가 하면 (로사리오의 기도)라는  가우디의 작품이 전해지고 있다.

  이 작품은 바르셀로나에서 한참이나 떨어진.......  몬세라토 수도원 지역에 있다.

  산 정상 부근에 있는 산타 코바 성당을 오르노라면  여러 작가들이 만든 '로사리오 기도'라는 동명의 제목하에 만든 작품들을 여럿 만날 수 있다.

  그리고 그 중에서 우리는.........  안토니오 가우디의 조각작품을 만나 볼 수가 있다.

  하여.......  그 작품은  다음 이야기인 '몬세라트 트래킹'에서 만나보기로 한다.

 

 

 

 

 

 

 

 

 

 

 

    ---  다음 이야기를 기다려 주세요.  몬세라트 수도원을 찾아갑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