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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스페인) 카탈루냐를 위한 가우디에 의한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by 피안재 2019. 11. 11.





























  혹시.......  '오버 투어리즘(over tourism)'이란 용어를 알고 계신가요?

  그렇다면.......  지난 번에 필리핀 정부가 아예 보라카이 섬 여행을 6개월간 중단시키고 외부와 차단시킨 채 재정비 사업을 벌인것은 기억하시나요?


  오버 투어리즘은 '과잉 관광'이라는 신조어를 탄생시켰으며  국제사회 속에서 새로운 문제꺼리로 급격하게 부각되고 있다.

  바로셀로나와  베네치아가 특히 심각하며,  암스텔담. 마추픽추 등 세계적인 유명 관광지들 대부분이 심하게 몰살을 앓고 있다.

  한국과 일본의 정치적 대립속에 애매하게  한국 일본 중국의 관광업계에 요란한 광풍이 몰아치고 있는 우리 주변의 현실과는 너무나도 동떨어진 이야기다.  국가차원에서 뿐만이 아니라 각 지자체 마저 나서서 서로들 자기 지역으로 제발 여행 좀 오시라고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는 현실속에서 저런 곳도 있다니.......

  본래부터 스페인에서 최고 부자 도시로 꼽히는 바로셀로나에 연간 약 3천만명의 여행객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다.  스스로들 돈보따리를 싸들고 쫄래쫄래 모여드는 여행자들을 보는  바로셀로나 주민들은 얼마나 행복할까?(우라나라 여행업 종사자들에겐 그야말로 로또이겠으나)

  그러나........  바르셀로나나 베네치아 현지인들은 '제발 여행자들 좀 찾아오지 말아달라'고 통사정을 한다.(믿겨지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아예 여행자의 발길이 뚝 끊어지기를 바란다는 뜻은 결고 아니다. 그저 밥먹고 살 정도로만.......  지금의 1/10 이나 아니면 1/20 정도의 여행자들만 조용하게 그냥 다녀갔으면 좋겠다는 바람이다.(배가 불러서?  벌어놓은 돈이넘쳐나서?)  아니면 정부가 나서서 도시의 부동산 가격이나 치솟는 물가를  상식적인 선에서 적정하게 정리해 주기를 바라는 간절힌  열망을 담고 있는 것이다.

  바르셀로나. 베네치아. 암스텔담. 마추픽추 등의 현지인들은 누구보다 자신들의 고향이자 삶의 터전을 사랑하고 아낀다.  하지만 밀려드는 여행자들로 인해 처음에는 돈이 들어와서 마냥 행복했으나,  지금은 결코 행복해지지 않았고 종국에는 자신들 마져도 그 터전에서 점차 쫓겨나게 되는 신세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여행자들이 넘쳐나자 우선 숙박업소와 음식점이 부족했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여행업으로 전업을 했다.  사업이 된다 싶으니 다른곳에서 거대 자본을 가진 사람들이 몰려 왔다.  부동산 가격이 치솟고 물가가 자고나면 달라 졌다.  곧 오랜 세월동안 불편없이 살아왔던 도시는 교통 대란에 소음 공해와 쓰레기 공해로 몸살을 앓기 시작했다.  그나마 집 하나 있어서 현지에 거주하고 싶어도,  과거 현지의 시세에 서너배나 달하는 치솟은 물가를 현지인들도 도저히 감당해 낼 수 없는 사태가 생기고 말았던 것이다.  주변으로 온통 관광업 뿐이다.  동네 슈퍼나 짜장면 집도 어느날인가 고급레스토랑과 대형 선물코너로 바뀌었다.  현지인들의 씀씀이가 어느날 돈 싸들과 놀러 온 여행자들과 똑 같아야만 지낼 수 있는 해괴한 현상이 생겨나 버렸다.

  결국 현지인들은 바르셀로나나 베네치아나 암스텔담이나.......  물가에 치어서 집을 팔고 고향을 떠나거나,  집을 세 주고 타지에서 삭월세를 살아가게 되었다.  어느새 모든 돈은 외지에서 거금을 들고 몰려 온 일부 여행 기업들이 싹쓸이 하는 형편이 되었다.

  여행자들이 몰려들어서 수입이 마냥 늘어가던 과거에서 벗어나. 손 때 묻은 그들의 고향에서 옛날 방식과 환경으로 살아가고 싶어진 것이다.

  이런 사태는 지금 우리나라 곳곳에서도 벌어지고 있다.

 

  여행하는 내내 이런 현실을 절실하게 피부로 체감할 수 있었다.

  지난 1월의 여행에서는  베네치아에서 절실하게.........

  이번 5월의 여행에서는 바르셀로나에서 또 다시 오버 투어리즘의 병폐에 대해서 나름의 고민을 해 보게 되었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

  암튼 우리는 지금 바르셀로나에 도착했다.










  불과 보름전인 2019년 10월 17일 외교부는 스페인의 바로셀로나와 카탈루냐 지역의 여행경보를   1단계(여행 유의)에서 2단계(여행 자제)로 상향 조정한다고 발표했다. 

  외교부는 이날 “카탈루냐 독립투표 주도자에 대한 스페인 최고재판소 판결 선고 이후 카탈루냐 전 지역에서 시위가 계속되고 있다”며 “시위대와 경찰 간 물리적 충돌이 발생하는 등 치안이 악화돼 직·간접 피해 발생 우려가 높아지는 상황을 감안했다”고 설명했다.
  최근 바르셀로나 등지에서는 카탈루냐의 분리·독립을 추진했던 자치정부 지도부에 대해 대법원이 징역 9∼13년을 선고한 뒤 이에 반발한 주민들의 시위가 잇따라 벌어지고 있다. 

  하지만 이는.......  여행자가 시위에 적극 참여하지 않는 이상 그리 크게 우려할 사항은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다.
  일전에 내가 터키 남동부 산느우르파와 하산케이프(시리아 국경 지역)를 여행가려 한다고 했더니 주변에서 극구 말리던 일이 있었다.  이번에 터키군이 국경을 넘어 시리아와 한판 전쟁을 벌인 일이 생기고나니 또 그때를 먼저 이야기 꺼내기도 한다.  하지만......  난 지금 당장 그곳에 갈 자신이 있는데.......
  시리아 국경에 비하자면 바르셀로나나 카탈루냐야 뭐..........  서울이나 부산과 마찬가지지.........  쓰잘데 없이 직접 가담만 하지 않는다면........ 절.대.안.전.
  거기에다 '그들의 자치 독립 문제'는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365일.....  10년......  100년 천년의 문제인 것이다.



  그라나다를 출발한지 11시간만에(이른 아침)  버스는 우리를 바르셀로나 북부 터미널에 내려 주었다.
  중간에 발렌시아를 지나오던 중  발렌시아(현재 이강인 선수 소속구단) 축구 클럽이 스페인 리그 우승을 결정짓는 홈경기가 밤늦게 열리고 있었다.  버스가 발렌시아 터미널에 도차가혹 있었을 때,  축구 경기가 끝이났다.  홈팀 발렌시아가 이겨서 리구 우승을 확정짓는 순간이었다.  사방에서 폭죽과 경적소리가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고 열관하는 축구팬들이 모두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흡사 우리 2002년 모습을 유럽식으로 재현해내는 모습이었다.
  비록 버스 운행은 조금 지연되기는 했지만,  여행중에 뜻밖의 광경을 목격하는 즐거움으로 치고  밤을 새워 달리는 야경에 나름 취하다 보니 어느새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것이다.  그라나다에서 호텔을 고를 때  마드리드에서 처럼 좀 떨어져 있어도 조용하고 한적한 곳을 나름 골랐다.  야간 이동을 하기 때문에 이른 아침 체크인을 다로 부탁도 해 놓았다.
  숙소는 파밀리아 성당과 카사밀라 중간쯤에 위치한 공원옆에 놓인 곳을 선택했다.   
  바르셀로나 구도심의 북쪽 경계쯤에 해당하는 주로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조용한 지역으로 '신선 식품 시장(Mercat de l'Abaceria)' 바로 인근이었다.
  구글 지도에 의지해서 숙소를 찾아나섰는데......  역시나 그라나다에서 처럼 구글 내비가 말썽을 계속한다.  결국은 내비를 포기하고 지도와 주소만을 들고 숙소를 찾아가느라 제법 시간이 소요되고 체력은 고갈되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역시  바르셀로나였다.
  굳이 관광 명소를 찾아다닐 필요가 없지 싶다.  걸어가고 있는 이 도심의 거리 자체가 하나의 관광 명소였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고 골목을 돌아나가면 또다른 감동이 썰물처럼 밀려왔다.  우리의 발길이 그냥 바르셀로나에 들어와 있다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감격 스러웠다.
  숙소까지 땀을 흘려가면서 힘겹게 짧지않은 시간을 허비하게되었지만........  그 주변의 경치와 풍광은  시간이 한참이나 지난 이 순간까지도 그대로 눈 앞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그렇게 주체할 수 없는 감동을 가득 느끼면서 숙소에 닿았다.
  작고 조금은 낡은 느낌이었지만  나름 아주 실용적으로 꾸며졌고 주변 환경이나 풍경이 아주 쾌적하고 아름다웠다.  화교 출신의 주인은 아주 친절했다.  한달 정도의 이번 여행을 마무리 하는 시기에서 이번 숙소는 모든면에서 충분하고 아늑했다.







































  흔히들 바르셀로나를 '가우디에 의한 가우디의 도시'라고들 말한다.
  '안토니오 가우디(Antoni Gaudi)'.
  가우디는 30살의 젊은 나이로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 건축 총책임자로 임명되었다.
  그가  '성 가족 성당'의 건축에 참여하면서부터 바르셀로나는 이 천재 건축가의 전시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했다.
  최고 높이 170m에 달하는 이 거대한 건축물은 인간의 영역으로 여겨지는 (직선)을 배제하고,  신의 영역으로 일컬어지는 (곡선)을 고집하면서도 건물의 안정성까지 깊이 생각한 매우 독특한 가우디만의 구조 역학으로 인하여 당시로서는 파격에 가까운 시도였는지라 뭇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릴만큼 당시로서는 가히 충격적인 건축계의 쿠데타 였다.
  한마디로 건축물이 갖는 고유의 기본적인 기능성은 유지하되,  나머지는 인간의 상상력을 극대화시키고 또 이를 적극적으로 건축에 반영하려는 가우디만의 독특하고 매력적인 건축 스타일이 고스란히 투영되었다고 하겠다.

  바르셀로나에 왔다.
  바르셀로나는 가우디이고,  또 가우디의 대표작이  사그라다 파밀리온 성당이라고 한다면.........
  자유 여행자에게 가장 먼저 부과될 의무이자 열망은 과연 무엇이겠는가?
  무조건 우선 가자. 만나 보자. 느껴 보자.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은 그 누구도 알지 못한다.  왜냐하면 이 건축의 주인이신 하느님께서 서둘고 있지 않으시기 때문이다' 라고 가우디는 말한곤 했다.  총 소요 공사기간 200년을 한참이나 앞둔 현시점에까지 이 성당의 대공사가 언제 끝날지는 그 누구도 속단할 수가 없었다.

  상당수의 사람들은 처음 성당 건축을 시작한 1882년에서부터 착공 200년이 되는 2082년을 완공 예정일로 잡아서 당연시 하며 기다려 왔다.

  하지만 지지난 해 스페인 정부는 '가우디 사망 100주년'이 되는 2026년까지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을 완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  공사는 박차를 가하고 있다.  하지만 예정대로 공시된 '2026년의 완공'에는 다양한 우려의 목소리들이 매우 높다.

  가우디의 말 처럼........'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의 완공은 하늘에 계신 그 분의 뜻에 달려있는 듯 보인다.'

  우리 말로 '성 가족 성당'이라 해석되어지는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Sagrada Familia)'은 본래는 가우디가 아닌 그의 두 스승에 의해서 처음 착공되었던 네오 고딕양식을 추구하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세계적인 초대형 프로젝트였다.

  하지만 두 스승이 연로하시고 갑자기 사망하면서 31세의 젊은 가우디에게 총책임자의 자리가 돌아오게 되었다.

  성당은 가우디가 맡으면서부터 네오 고딕양식이 아닌, 세상의 모든 양식이 골고루 복합적으로 내재되어 있는 전혀 다른 건축물로 과감하고도 급속하게 탈바꿈하기 시작했다.  이는 당연하게 '성당 건축 위원회'와 '바르셀로나 시정부'와 건축학계와 카톨릭 교계로부터 깊은 우려와 함께 많은 지탄을 받기도 했다.  자칫 성당의 건축책임자 자리를 잃을지도 모르는 심각한 사태까지 이르렀다.  그만큼 그가 추구하는 새로운 건축 세계는 당시로서는 어마어마한 파격이었던 것이다.

  당시의 건축 흐름에서 완전히 벗어난 초현실주의적 환상적인 세계를 가우디는 건축 안에서 추구했다.  반듯한 직선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었고,  동물에서 따온 듯한 곡선과 또는 식물에서 모방한 듯한 곡선들이 이제껏 보지못한 역동적인 전혀 새로운 공간을 창조해내고 있었다.  지척에서 그를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보던 경쟁자들은  가우디의 오만하면서도 고집불통인 독자성과  그가 내면에 깊이 새겨져 있는 무정부주의에 대한 열망을 가혹하리만치 비판해 댔다.

  거기에다가  가우디는 이 '초대형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도 전체적이면서도 완전한 도면을  만들지도 않았고  발주처에 제시하지도 않았다.

  하나하나 건물을 지어가면서 떠오르는 영감과  새로운 깨달음들을 그때그때 적용시키면서도 매우 자연스럽게 새로운 비젼에 다가서는 '천재만이 가진 기발한 재주'인지 '주먹구구식뿐인  쥐구멍에 어쩌다 쨍 하고 해가 뜬 것인지'  하여간 어찌되었건 성당 건축은 느리게 느리게 진행되어 갔다.

  이런 가우디만의 독선에 대한 앙갚음이었을까?

 

  파밀리아 성당은 12제자를 상징하는 12개의 종탑이 올려질 예정이고 그 중심에 예수를 상징하는 가장 크고 높은 중앙탑이 설치될 계획이다.  현재까지 4개의 종탑이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 1개만이 직접 가우디의 손에 의해서 완공되었다.

  거기에다가 가우디가 그의 스승들에게던 것처럼,  가우디가 죽자마자 그의 후대 건축책임자들은  애초 설계의 주요 골격은 유지하되  나머지 세부적인 건축 설계와 시공은 저마다 모두 자신들의 개성과 능력에 맞추어 뜯어 고쳐버렸다.  네오 고딕양식의  최초 성당 설계도면을 가우디는 싸그리 무시해 버리고 새로운 자신의 건축 방식으로 바꾸어 버렸다.  그리고 그는 전체적으로 볼 때 대략 약 12~13%의 성당 건축을 담당하다가 사망했다.

  가우디가 죽자 후임 건축가들은  '가우디 방식에 속한 기술자'이기를 거부했다.  가우디만큼은 아니겠으나  후임자 하나하나도 모두  '자신의 고유 영역을 가진 당당한 건축가'였던 것이다.  그들 모두 당당하게 파밀리아 성당에 자신의 건축혼과 자부심을 심고 남기고 싶었다.

  이들은 가우디의 골격 위에 자신들만의 옷을 입히기 시작했다.

  옥수수를 닮은 네 개의 첨탑 위에 얹은 조형물이나  새로 덧붙인 조각들은 가우디가 직접 완성한 한 개의 탑과는 전혀 다르거나 새로운 모습을 하고 있다.

  가우디가 살던 근대적 모습이 아닌 완전한 지금 이 시대를 반영한 현대적 예술품들이다.  그들은 가우디가 아닌 시간의 흐름을 반영한 지금 이 시대 방식의 건축물을 만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2026년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최종적으로 완공되어 13개의 첨탑이 모두 위용을 갖춘 채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된다면............. 과연 성당은 '가우디의 파밀리아 성당일까?'  아니면 '가우디가 시작해 놓은 여러 건축가들에 의해 완성된 성 가족 성당일까?'


  암튼.......  2026년 이던 언제든.......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이 완공된다면........  그때까지 내 발걸음이 배낭을 메고 쏘다닐 정도로 아직 온전하다면 나는 당연히 다시 한 번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찾아가고야 말것이다.


  할.렐.루.야.

  아.멘.


















                                                                                                                       --  1936년 성당 건축현장 화재 당시 사진


                                                                                                                                              --  가우디의 장례식 사진




                                                                                                           --  파밀리아 성당 지하에 묻힌  안토니오 가우디의 묘지.














  스승인 프란치스코 데 비야르가 처음 계획하고 설계했던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을 이어받은 가우디는 우선 성당의 기본 골격을 라틴 십자형으로 바꾸었다.  5개의 신랑과 또 다른 5개의 신랑이 교차하는 지역을 중심으로 구역을 나누었다.

  이렇게 구역이 나누어진 외부의 동쪽 전면엔 '나시미엔토(예수의 탄생)'이라는 주제로, 가우디가 사망하기 전까지 심혈을 기울인 거의 완성된 형태로 지금 우리에게 선보이고 있다.  서쪽의 '파시온(예수의 수난)'도 후대 건축책임자들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가장 중요한......  정문이자 상징이랄 수 있는 남쪽 정면의 '글로리라(예수의 영광)'은 현재 건설에 박차를 가하고 있다.

  결국  가우디가 생전에 완성한 것은 '지하성당'과 '나시미엔토(예수의 탄생)' 그리고  현재 완성된 4개의 종탑 중에서 한 개가 전부이다.

  지하 성당의 경우는 가우디도 차마 스승의 유지를 모두 거부할 수 없었는지, 스승이 추구한 고딕양식의 설계를 대부분 그대로 이어 받았다.  하지만 나시미엔토의 경우에는 가우디 자신의 의도대로 친자연주의적인 조각들로 모두 대신했다.  자신의 주변과 고향의 사람들을 하나하나 실제 모델로 기용하여 조각했다는 사례를 여럿 남기고 있다.

  하지만 가우디 사후 30년만에 재개된 공사에서 후대 건축 책임자였던 호세 마리다 수비라츠는 모더니즘 조각가였다.

  수비라츠의 인물상들은 가우디와 완전 반대 성향으로 각진 정형화 및 일부 추상화가 가미되며 얼굴 부분이 음각되어 있어서 어떤 방향에서 바라봐도 감상자를 쳐다보는 듯한 착시를 안긴다. 가우디가 실제 사람의 모습을 그대로 본 따 묘사했다면 수비라츠는 간결하고 직선을 주로 사용하여 묘사하고 있다. 이 때문에 널리 알려진 면의 반대쪽을 보고 실망한 사람들도 있다.(가우디에게 익숙해져서가 아닐까?) 가우디 중심으로 보자면 실망하는 게 당연할 수도 있곘지만 아직 미완성이다. 위의 발코니 부분까지 모두 완성되고 나면 또 어떨지?  가우디의 조각들이 친숙하게 다가오기도 하지만,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수비라츠의 조각상들도 눈부시게 아름답게만 느껴지는것은 왜일까? 특히 신약성경을 주제로 한 '유다의 입맞춤'은 압권이었다.

  애초 가우디의 설계에 따르자면 파밀리아 성당의 건축기간은 200년 정도를 예상했었다고 한다.

  처음 시작때부터 모금과 성금으로만 시작되었으며,  현재에도 성당 건축에 필요한 대부분의 기금은 '사그리다 파밀리아 성당 입장료'와 '성금'으로 충당하고 있다.  그렇게 보자면 이 어마어마한 건축물을 경험할 수 있다는 자체만으로도  조금 비싼(?)듯한 입장료를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내야 하지 않을까?

  스페인 내전 기간 동안에 건축이 중단 되었다.  그리고 뜻하지 않게 벌어진 가우디의 죽음으로 공사는 한동안 중단 되었다.  1936년에는 대단위 화재가 발생했었고,  그후에도 서너차례 건축 현장에서 화재가 발생했었다.

  최근들어서  '세계 최고의 무허가 건물'이라는 등의 이야기 꺼리를 여럿 제공하고 있는  '성 가족 성당'이지만.......  137년을 훌쩍 뛰어 넘는 기간동안 공사를 벌이다 보면 숱한 우여곡절이 뒤따르기 마련이다.  2026년 완공을 에고 하였으니......  완성된 파밀리아의 모습을 기다려 볼 수 밖에.......













































 








  여행을 떠나기에 앞서서 많은 여행자들이 책자나 인터넷 혹은 경험자들의 조언을 통해 호감이 가는 목적지를 찾아내기에 열중한다.

  그 중에는 바로 이 표시........ 불변의 진리라 할까,  아니면 여행의 바이블이라 할까,  암튼 이 표시를 확인하게 되고나면  그 순간부터 이 장소는 '인간이 죽기 전에 살아서 꼭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해야 하는 여행 명소'로 둔갑해버리는 가장 확실한 보증수표를 찾아내고쫓아다니기 시작하게된다.  여행사나 가이드의 부연 설명도 필요치 않다.  이 표시만 붙어있다면 그곳은 틀림없는 명소다.  결코 여행자를 실망시키자 않을것이라는 믿음의 반증이기도 한 이 표시.........

  유네스코(UNESCO).

  하지만 이 즈음에서 여행자가 한번쯤 꼭 유념해 보아야할 면이 있다.

  유네스코는 1945년 유엔 창설과 함께 설립된 전문 기구로서 정식 명칭이 (United Nations Educational, Scientific and Cultural Organization) 이며, 이 기구의 설립 목적은 '인류의 기본적 자유와 인권 그리고 법을 통한 보편적인 정의의 구현을 위하여 국가간에 교육. 과학. 그리고 문화 교류를 통한 국제 사회의 협력을 촉진함으로서 인류의 평화와 안전에 기여하는데 있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이렇게만 본다면........  굳이 여행자와 유네스코는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이 대목에서 여행자가 눈여겨 보아야만 할 것은........  그 유네스코의 여러 산하기관 중에 (세계 유산 위원회)라는 곳을 조심스레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이집트 나일강을 가로막는 애스원 댐 공사가 1972년까지 완공되었다.

  댐이 건설되어감에 따라서 이제 댐에 물을 가두는 일만 남게 되었다.  그리고 만수위가 되면 고대 이집트 제19왕조시대 파라오 람세스2세가 만든 '아부심벨 대신전(Abu Simbel)'이 수면 아래로 수몰될 위게 처하였다.

  이 위대한 인류의 문화유산이 하루아침에 사라지게 되는것을 염려한 '해리티지 재단'이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를 구제할 방도를 국제사회에 호소하였다.  미국을 필두로 수많은 국제사회가 이 운동에 동참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는 유엔 산하의 '유네스코 교육 과학 문화 위원회'가 나서서 적극적으로 후원을 하기에 이르렀다.

  수몰 위기에 봉착했던 아부심벨 사원의 보존 운동은 과학자. 미술가. 역사학자. 건설회사 등 수많은 여러분야의 전문가 집단이 총망라하여 참여하게 되었으며  이들에 의하여 약 1만6000개의 조각으로 나뉘어진 후,  수몰 수면에서 벗어난 약 70 미터 높은곳의 언덕위에 재조립 되었다.

  실로 위대한 대역사였다.

  이 거대한 사원을 건설한 고대 이집트 왕조도 위대했지만,  그 사원을 나누고 이동시켜 다시 완벽하게 조립해낸 사람들의 노고와  놀라운 기계발전의 문명사에 갈채를 보내고 싶을 뿐이다.

  여기서 '아부심벨'은 처음 이 신전이 발견될 당시에 이 장소를 찾아 안내하던 길잡이 소년의 이름에서 따온것이다.

  '아부심벨 사원의 이전 복원사업'은 인류의 현대사에 있어서 지극히 긍정적인 찬사와 갈채를 받았으며  엄청난 국제사회 관심과 호응을 받게되었으며......  유네스코는 이런 거대한 프로젝트를 위한 본격적인 단체를 설립하기에 이르렀다.

  그것이 바로 '유네스코 세계유산(유네스코 世界遺産, UNESCO World Heritage Site)' 으로 바로 여행자들의 지극한 관심이 쏠리는 이유이기도 하다.

  일단 유네스코 세계문화 유산에 등재되었다 하면 수많은 여행자들의 우선 방문 목적지로 순식간에 둔갑하게 되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이탈리아와 중국이 현재 55개씩 최다 유산 등재국가로 되어있으며  그 뒤를 48개의 스페인이 바짝 뒤쫓고 있다.  그리고 우리나라는 2019년에 새로 등재된 '한국의 서원'을 포함하여 14개의 세계문화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시간이 흐를수록 세계의 모든 국가들이 자신들이 가진 문화재(유형. 무형)를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 시키기 위하여 국가차원에서 총력전을 펼치기 시작했다.  국가의 위상을 높이고 관광객을 유치하는데 그만한 것이 없기 때문이다.  세계문화유산의 보유 숫자를 곧 국가 경쟁력의 일부로 보는 시각까지 생겨나고 있다.  그만큼 점점 더 경쟁이 치열해 지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런 와중에서 대단히 놀라운 사실을 한가지 발견할 수가 있는데.......

  세계문화유산 3위의 보유국 스페인(48개)이 가진 유산 중에서 7개가 한 사람에 의해서 만들어졌고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어있다는 엄연한 사실에 대해서 말이다.  단 하나의 문화유산을 등재하지 못한 나라도 부지기 수 있다.  또 우리나라 서원의 경우처럼,  한 건의 문화재로 등재되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노고와 피와 땀과 시간이 투자되어야만 했는지를 뼈저리게 느끼게해주는 유산이 비단 서원뿐만이 아니라 세계적으로 얼마나 많이 있는가?

  그런데 단 한사람에 의해서 7개나 되는 세계유산이 만들어졌고 그것을 보스란히 보유하게되는 나라라니.......... 그 대부분이 바르셀로나에 있다니......

  안토니오 가우디는 무려 7개나 되는 세계문화유산을 창조해 낸 사람이다.  아마도 이런 경우는 앞으로도 영원히 불가능할 것이다.  실로 믿을 수가 없다.

  (비센스 주택 1878-1880) (구엘 저택 1885-1889) (구엘 공장단지 내 지하경당 1898-1914) (구엘 공원 1900-1914) (카사바트요 1904-1906) (밀라 주택 1905-1910) (성가족성당 탄생 입면 및 지하경당 1884) 등이다.

 

  세계 최고 건축가로 인정받는 안토니오 가우디.
  그리고 이제 스페인의 자랑이자 최고의 예술적 가치를 지닌 건축물로 평가받는 바르셀로나의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La Sagrada Familia)의 내부를 한번 둘러보게 된다면.........  사람들이 왜 가우디......  가우디......  하는지를 충분히 느끼게 될 것이다.
  '나 어떻하면 좋아?  이대로 주저앉아 펑 펑 울고 싶어.  이게 정말........  이게 정말 사람이 만든 건물이야?  믿겨지지가 않아?  어떻게 해..........'
  챠밍여사의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어가고 있었다.





































  리서치 대상이나  방법에 따라서 약간의 차이는 있을 수 있겠지만  어느정도 공신력이 있는 한 조사기관에 따르면.......

  유럽인들이 가장 살아보고 싶어하는 도시는?

  세계의 예술가들이 가장 사랑하는 도시는?(파리가 아니었음)

  유럽 여행 후 언젠가 다시 또 가고픈 사랑스런 도시는?


  바로셀로나(Barcelona).  유럽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파리와 로마와 런던을 제치고 바로셀로나가 뽑혔다.

  아마도......  예술. 문화. 건축. 쇼핑. 음식. 자연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종합적으로 높은 점수를 받았고,  거기에 더하여 연중 따사로운 햇살로 가득한 지중해성 온화한 기후가 크게 한 몫을 더한것 같다.

  스페인에서는  마드리드에 이어서 두번째 도시이겠으나,  여행자들에게 있어서 바르셀로나는 지중해의 수도인 것이다.


  2019년 11월 17일부로 대한민국 외교부는 바르셀로나 여행자들에게 (여행지에 대한 조심)의 단계를 한차원 높여서 (우려와 자제)의 경보 문자를 발송했다.

  하루 전날 스페인 대법원이 카탈루냐 독립을 추진한 바르셀로나 자치정부 지도자들에게 9~13년의 징역형을 선고하자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카탈루냐 전지역에서 거센 반정부 시위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격정적인 시위로 돌발한 이번 사태는 스페인뿐만이 아니라 유럽사회 전체를 극도의 긴장속으로 몰아가고 있으며 전 세계인들의 우려를 자아내고 있다.  카탈루냐의 독립 문제는 이미 오래된 시대를 넘어선 스페인이 안고있는 가장 큰 정치적 사회적 문제이다.  어제 오늘의 일도 아니고.......  대단히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 문제를 풀어내고 해결하기난 결코 그리 요원한 일이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하지만........  자국내의 오래된 숙원문제를 제외하곤  스페인의 치안은 대단히 안정적이다.  여행자가 무리하여 시위에 직접 참여하지 않는다면  그리 걱정할만한 사태는 아니라고 생각된다.

  정작 여행자에게 조심하라고 당부하고 싶은것은.......  카탈루냐의 독립에 관한 정치 사회적인 시위사태가 아니라........  과도한 여행자의 유입과  거기에서 파생되는 여러가지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오버 투어리즘'에 대한 문제로,  여행 업계를 제외한 바르셀로나 현지주민의 대부분은 여행자의 방문을 그리 달가와 하거나 고운 시선으로 바라보지 않는다는 문제가 더 크다고 하겠다.  최소한의 예의와 겸허함으로 조용하고 가뿐한 바르셀로나 여행이 이루어지기를 당부드리고 싶다.











                                                                                      















  바르셀로나는 비교적 인근에 있는   프랑스 마르세이유 항구랑 닮은점이 많이 있다.

  지중해의 커다란 항구인  두 도시는 모두 고대 페니키아인들에 의해서 항구도시로 생겨났다는 공통점이 있다.

  이어서 카르타고인이었던 한니발 바르카가 이곳에서 군대를 양성하여 피레네 산맥과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침공을 감행한 전초기지이기도 했다.  카르타고를 점령한 로마는 지중해를 장악하기 위한 해상전진기지로 바르셀로나를 요새화하였다.  이후로 오랜 세월동안 바르셀로나(카탈루냐 지방)는 로마 해군의 전진기지였을 뿐 별다른 발전의 변모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12세기 카탈루냐 백작과 아라곤 여왕이 결혼을 통해 아라곤 왕국이 성립하면서 부터......  바로 지금의 카탈루냐와 카탈루냐만의 독특한 문화와 정서가 정착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는 이 아라곤 왕국의 수도로 번영을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정작 바르셀로나를 역사속의 주인공으로 부상하게만든것은 바로 '대항해 시대의 등장' 이었다.

  새로 발견된 신대륙으로부터 어마어마한 물자가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처음 그 중심에는 안달루시아의 세비야가 있었지만,  차츰 무역과 경제의 중심이 세비야에서 바르셀로나로 옮겨오게 된 것이다.  그 중심에는 유럽의 본토와 훨씬 가까운 곳에 위치한 바르셀로나의 위치와 사계절 내내 온화한 지중해성 기후에 있었다. 신대륙에서 쏟아져 들어온 자원을 가공하여 다른 유럽의 도시에 내다 파는......  바르셀로나는 스페인 최초이자 최대의 산업도시로 급속하게 성장해 갔던 것이다.  지중해 최대의 국제무역항으로 발전했다.  더불어 해운업.수공업.금융업의 중심지로 발전해 갔다.

  이와 동시에 바르셀로나는 철저한 계획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지금의 도시 규모와 구역 정리와 도로망 확충은 모두 당시의 철저한 사전 조사와 설계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구시가라 부르는 동쪽 지역에 남아있는 중세풍의 도시건물 주위를 '론다스'라고 하는 성벽의 둘레 터를 그대로 반원형의 대로가 시원하게 뚫려 사방으로 연결되어 있고,  그 바깥쪽으로 쭉쭉 뻗어나간 직선 도로망을 중심으로 그 주변에 새로운 도시가 첨가된 초현대적인 신도시 형태가 탄생했다.

  그러다보니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바르셀로나의 도심 전경은 그야말로 한폭의 예술작품처럼 느껴진다.

  바르셀로나의 눈부신 성장 이면에 16세기 중반부터 이미 카탈루냐 문화에 대한 긍지와 진보적 시민자치의 전통 및 강력한 상공업을 기반으로 번번이 독립을 요구하고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다가 17∼19세기에 들어서는 프랑스의 침공을 여러 차례 받았으며, 한때 북부 카탈루냐 지방을 프랑스에 빼앗기기도 했다.

  근대에 들어서는 스페인 사회주의와 무정부주의자들의 중요 거점이 되었으며, 스페인 내전 당시에는  공화 정부(인민전선 정부)의 마지막 거점으로 피를 뿜는 격전지였다가 끝내 1939년 프랑코군에게 함락되었다.  그 후로도 카탈루냐는 끈질기게 분리 독립을 주장하였고......  스페인 정부 차원에서는  최고의 경제 무역지구를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바르셀로나 시가의 중심이랄 수 있는 '람블라스 거리()'는 '카탈루냐 광장'에서 시작된다고 할 수 있겠다.

 언제나 수많은 여행자들로 붐비는 람블라스 거리에는 은행. 무역상사. 고급 백화점 들이 줄지어 서 있고  수많은 거리 예술가와 음악가와 꽃집과 기념품 상점과 레스토랑과 노천 카페들이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그리고 이 거리가 끝나는 남단인 지중해에 연한 항구 인근의 '푸에르타 데 라파스'에는  바르셀로나의 상징과도 같은 '콜럼버스 기념탑'이 우뚝 솟아 있다.





  바르셀로나에 도착하자마자 서둘러 '사그리다 파밀리온 성당'부터 찾아보아야만 했던 우리는......  그 뜨거운 감동의 열기를 차분하게 가라앉힌 후에,  이제 본격적으로 바르셀로나를 여행하기 위하여 지하철에 몸을 실었다.

  중간에 환승을 해가면서 우리가 찾은 첫목적지는 바로 '카탈루냐 역'이었다.  이곳에서 지하도를 오르면 '카탈루냐 광장'이 나온다.

  카탈류냐 광장은  바르셀로나의 뜨거운 심장이라 할 수 있는 람블라스 거리가 시작되는 곳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여행자의 해방구'가 우리를 반기고 있었다.


  이.곳.이.야.말.로.진.정.한.바.르.셀.로.나.가.아.니.겠.는.가.













































  •   바르셀로나는 대각선 도로(Avenida Diagonal)에 의해서 남쪽의 구시가와 북쪽의 신시가지로 나뉜다.  여기서 벗어나 별도의 몬주익 언덕이 있다.

      여기에서 구시가는 다시 라발 지구. 고딕 지구. 보른 지구로 나뉘고,  구시가 전체를 설명 보완하기 위해서는  앞서 거론한 지역 외에 에이삼플라 지구와 바르셀로네타 항 주변 지역이 추가된다.  바르셀로나의 볼거리는 모두 이 구시가지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 중에서도 핵심적인 볼거리는 대부분 라발 지구와 고딕 지구에 모여 있다.  그리고 이 두지역을 구분지으면서 가운데로 가로질러 나 있는 항상 여행자들로 북적거리는 통행로가 바로 람블라스 거리인 것이다.

      람블라스의 아랍어 어원은 '물이 흐르는 곳'에서 유래하였는데,  지금의 대도시가 들어서기 전에 이곳은 강물이 바다로 흡수되는 수로(하구)였다는 의미가 된다.  거친 파도를 피해서 수많은 배들이 이 수로를 따라 지금의 바르셀로나 구도심 중간까지  거슬러 올라와 신대륙에서 가지고 온 물품들을 하역하고  인근에서 가공된 공산품들을 다시 배에 실어서 지중해를 통해 유럽의 각지로 펴져나갔을 것이다.  람블라스 거리 주변의 중세풍 큰 건물들은 세관이었고  은행이었으며 선박회사와 무역회사들이 상주했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수많은 노천카페와 레스토랑과 선물코너와 꽃집과 거리의 음악가 예술가들과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이 거리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아득한 시간 저 너머의 중세 풍경은 잘 상상조차 되지 않는다.

      람블라스 거리를 거닐면서 여행자로 보이는 사람들이 우루루 몰려가는 뒤를 쫄쫄거리며 따라서 이골목 저골목을 따라다니다 보면은 바르셀로나의 명소란 명소는  굳이 일부러 책자를 뒤지고 인터넷을 검색하고 구글 지도를 살펴가면서 찾아다니지 않아도 저절로 모두 구경 할 수가 있다.  그저 느긋한 마음의 여유와 약간의 눈설미에다 임기웅변식 재치가 있으면 된다.  운이 좋으면 한국 패키지 여행단을 뒤따라 가면서 한국어로 가이드의 설명을 귀동냥 할 수도 있다.


      이제 람블라스 거리를 향해 씩씩하게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가장 먼저 '카날레테스 람블라'가 모습을 드러낸다.

      카날레테스는 람블라스 거리 이곳저곳에 설치되어 있는 여러 식수대(수도) 중의 하나이지만,  적어도 ' FC 바르셀로나' 축구 팬들에게는 절대적인 성소이다.  바르셀로나 축구팬들이 이곳에 모여 응원단을 결성한 이후로  축구 클럽의 명성만큼이나 이곳도 세계적인 명소가 되었다.  FC 바르셀로나의 축구 팬이라면.......  아니 스페인 라리가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꼭 찾아가보아야 할 명소이다.  거기에 더하여 이곳의 수돗물을 마시면 꼭 다시 바르셀로나를 찾아올 수 있게된다는 전설이 서려있단단.(믿거나 말거나)  혹,  이 수돗물을 마시면 FC 바르셀로나에 폭 빠지게 만드는 마법의 약이 섞여있는것은 아닐까?

      람블라는 거리는 꽃시장과 새시장이 열린다.  실로 이국정인 낭만과 정취가 묻어난다.

      연극 전용관이 폴리오라마 극장의 배우들이 기묘한 분장과 행위예술로 관객을 끌어모으고 있다.  흡사 우리나라 대학로 소극장 주면 풍경을 떠올리게 한다.

      플라멩코 전용관이 있어서 매일 공연을 펼친다.  마드리드 세비야 그라나다와 더불어 가장 멋지고 스페인다운 공연이 매일밤 펼쳐진다고 한다.

      마드리드의 산 미구엘 전통시장과 가히 쌍벽을 이루고 있는 '바르셀로나 보케리아 시장'이 거리의 중간에 위치해 있다.  잘 정돈된 깔끔한 느낌은 미구엘 시장이 앞섰다고 하겠지만,  사람 냄새 풍기는 시장다운 시장으로는  보케리아 시장이 가히 스페인 최고가 아닐까?  우리는 하루 건너 이곳을 찾아다녔다.

      '랄블라 거리의 고깔모자.'

      스페인이 자랑하는 미술가 미로의 모자이크가 람블라스 거리 길바닥에 그대로 설치되어 있다.  노천 미술관이라고 할까?

      수많은 여행자들과 현지인들이 이 훌륭한 작품 위를 그대로 밝고 지나간다.  어느 미술관에 설치전시되고 있다면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다.  이 모자이크가 람블라스 거리의 랜드마크라는 사실을.......  그리고 후안 미로의 대표작 중에 하나라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대로 밝고 자나간다.

      작품의 가치를 아는 사람들은  주변의 행인들 툼새에서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레 사진을 연실 찍는다.

      한밤중에 몰래 와서  여기 보도 블럭을 좀 걷어다가........  내 고향 충주 관아 공원 인근에 슬쩍 박아놓으면 안될까?

      시끌벅쩍한 람블라스 거리 인파를 벗어나 골목 안으로 들어가니 너른 광장이다.  그것도 나름 분위기가 짱나는 아주 멋진 휴식처다.  중앙에 분수가 있고 사각형의 광장을 둘러싸듯 야자수가 무성하게 자라나 있다.  광장 주변은 온통 레스토랑과 카페와 바와 클럽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젊음과 유럽의 분위기가 물씬 풍겨나온다.  광장을 성벽처럼 에워싸고 있는 신고전주의 양식의 낡은 중세풍 건물이 은근한 매력으로 다가온다.  정말 멋진 장소란 느낌이 든다.

      이 '레이랄 광장'의 한 켠에 그 유명한 '안토니오 가우디의 대학 졸업 작품인 가스등'이 설치되어 있다.  눈 씻고 일부러 찾아보지 않으면 그냥 지나치기 십상이지 싶다.

      길 건너 반대편 골목 안으로  가우디의 대표작 품 중의 하나인 '구엘 저택'이 있다.

      하지만.......  온통 신경을 집중해 가면서 서둘러 부랴부랴 쫓아다닐 필요는 없다.

      바르셀로나에는.......  그리고 람블라스 거리 인근으로는........  넘쳐나는게 작품이고 예술이다.

      굳이 책자에서 열심히 찾아 공부하면서 익혀 놓은 '가우디의 작품'이 아니더라도  사방으로 그에 못지 않은 건축물과 미술품들이 지천에 널려 있다.

      '가우디를 잊어라' '가우디를 제외한 바르셀로나를 제대로 찾아보자'라고 나는 역설하고 싶어졌다.

      '가우디의 도시 바르셀로나'가 아니라.........  '여행자의 천국  바르셀로나,  그 도시 안에 가우디가 살았었다'  라는 시선으로 적어도 나는 바르셀로나를 즐기고 싶었다.  하지만......  그 바램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다.

      어디를 가나.......  어느 순간에서나.........  사방에 온통 가우디 천지였으니까.........  비행기가 이륙하고나서야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바르셀로나는 언제나 상큼한 행복감으로 살며시 찾아오고  오랜 그리움으로 가슴에 남는다.'



























































































      '보케리아 시장(Mercado Boqueria)'은 여행자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에게도 크게 사랑받고 있는  바르셀로나의 명소이다.

      마드리드 '산 미구엘 시장'과  발렌시아 '중앙 시장'과 더불어 스페인 3대 재래 시장으로 꼽힌다.  그렇다고 재래시장이라 해서 우리나라의 전통재래시장 쯤으로 생각해서는 결코 안되겠다.  시대에 맞게 현대화로 재개발 내지는 리모델링이 이루어져서  현대식 푸드 마켙이나 푸드 코트라  생각하면 되지 싶다.

      이곳을 현지인들은 '산 호세프 시장' 혹은  그냥 '바르셀로나 중앙 시장'이라고 부른다.

      보케리아 시장 입구의 오른편에는 '산 호세프 수도원(Sant Josep)'이 있는데  이는 곧 현재의 보케리아 시장이 수도원의 광장이자 앞마당이었던 곳에 들어섰다는 의미를 내포한다는 뜻이다.  가난하고 먹고살기 힘들었던 중세 시대에,  흑사병이 온 유럽대륙을 휩쓸던 시대에  교회나 수도원은 곧 수많은 민중들이 의기하고 기댈 수 있는 거의 유일한 장소였다.  귀족이나 부자들의 헌금과 기부를 교회나 수도원들이 앞장서서 인근 광장에서 서성대는 민중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서 이런 공간들은 대부분 시장으로 형성 발전되어 갔다.

      보케리아 시장도 가난한 백성들이 하나 둘 모여들어 수도원에서 제공하는 빵과 의약품을 고대하던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의 집결지였다.  이곳에 어느날인가부터 고기를 사고 파는 정육시장이 생겨나더니 점차 종합적인 전통 재래시장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근대에 들어 보케리아 시장은 바르셀로나는 물론 스페인에서 가장 크고 번성하는 시장으로 발전했다. '보케리아에 없으면 세상 어디에도 없다'라는 말이 생겨날 정도였다.

      하지만 산업과 교통이 눈부시게 발전한 현대에 들어서 재래시장은 점차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고 어느날엔가 급속도로 몰락의 길을 걷고 말았다.  여기저기에 대형백화점와 초대형 현대식 시장들이 생겨난 것이다.

      보케리아 시장도 거의 페허나 다름없을 정도로 쇠락하여 부랑자나 노숙자들의 은신처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젊고 열의에 찬 바르셀로나 공무원들이 나서서 '보케리아의 재개발'을 추진하게되었고.......  바로 지금의 모습으로 성장 발전했다.

      이 역사적 현장을 말없이 지켜보고 서 있었을 '산 호세프 수도원'을 둘러 보았다.

      수도원 입구에 펼쳐든 성경 위로 해골을 받쳐든 수도사가 하늘을 향해 구원을 외치고 있다.  무언가 아주 심오한 의미를 담고 있는것만 같아서 한참을 서서 바라다 보았다.

      임구를 들어서면 메두사의 목을 방패에 새겨넣은 페르세우스가 창을 들고 서있는 동상이 눈에 들어 온다.   그런데 온간 풍상과 수난을 헤쳐온 그리이스 신화의 용맹한 전사 페르세우스가 가슴이 봉곳한 여자 모습이다.(이건 또 어떻게 생각해야 할까?)  그래서 결국엔........  모험의 길을 모두 완수한 페르세우스는 아테네 여신을 찾아가 메두사의 머리를 비롯한 모든 신비한 영물과 영광을 모두 반납내지는 받치고 돌아와 고향으로 돌아갔다는 대목을 빌어서.......  신화속의 모든 영물을 되돌려 받고 슬쩍 폼을 한번 잡아보는 아테네가 아닐까  하고 생각해 보니.......  아마도 후자가 더 그럴싸 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보케리아는 바르셀로나의부엌이다.

      입구에서부터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로 항상 사람들로 서로 엉켜있다.

      과일. 채소. 생선. 육류. 햄과 치즈. 그리고 하몽에다가 각종 향신료와 조미료와 쵸컬릿 가계들이 빼곡하게 들어서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커피와 간단한 간식을 먹거나  술과 간단한 안주를 즐길 수 있는 타바스 전문점들이 문전성시를 이룬다.  시장의 주변으로도 비슷한 상점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고,  맛과 가격이 착한 분위기가 멋진 카페와 레스토랑들로 가득한다.

      그냥 시장의 이곳저곳으로 인파에 떠밀리며 돌아다니는 재미만으로도 꼭 찾아가 보시라 권하고 싶다.

      간단한 음식과 술로 식도락의 묘미를 만끽할 수 있는 장소이기는 하지만........  결코 가격이 싼 곳은 아니라는 것을 꼭 유념하도록 하자.  한개 한개의 가격이 만만하다고 이것저것 심심풀이 삼아 고르다가는........  인근의 웬만한 고급 레스토랑에서 즐기는 음식값보다 오히려 쉽게 비싸질 수 있는 곳이 또 이곳이다.

      유럽의 시장 대부분이 그렇지만.......  보케리아나 산 미구엘 시장 같은데서는........  특히  문어.  굴.  등등의 요리가 무척 비싸다.  문어나 굴 같은 요리는 차라리 한국에서 먹자.  보기에도 그렇고  가격도 우리나라가 훨 싸다.  고급 수산물은 대한민국이 실로 천국이다라고 나는 외치고 싶다.(물론 품질도)

      그리고 한 가지 더............  인파가 북적이는 딱 이런 분위기의 장소에서는 항상.......  소매치기에 조심하자 !!!!!!!


      한참을 돌아다니면서 이국적인 시장 탐험에 슬쩍 질릴때가 되었다던가........

      이것저것 먹어 본 타파스에 물리거나 배가 터져 죽을것 같아지면.........

      밖으로 나가자.  다시 람블라스 거리를 거닐어 보자.

      2.000cc 내지는 족히 3.000cc는 되어 보이는 아주아주 커다란 유리잔에 형형색색으로 멋지고도 화려하게 치장된 샹그리아(약한 과일 탄산주 칵테일?) 한잔 쯤 쭈욱 들이키는데 도전해 볼만한 시간이 되지 않았을까?  스페인에.......  바르셀로나에 왔으니까 말이다.

      람블라스 거리 투어를 더 줄기면서 이골목 저골목을 기웃기웃거려 보기로 하자.

      라발 지구를 돌아보고  고딕 지구와 보른 지구로 발걸음을 옮겨보자.

      '올라!  올라......  올랄라....... 올라리 올라.......... 올라...........'

      지나치는 사람들과 끊임없이 환한 미소로 인사를 주고 받는다.

      바르셀로나라서 전혀 이상하지가 않다.  왜?  여기서는 다들 그러니까.........

      그러다가 또 다시 배가 고파지면........  우리는 통닭을 먹으러 간다.

      대한민국에서도 한번도 가보지 못한..........  ㅎㅎㅎ......  KFC........ 를 바르셀로나에서 다 가보다니.........  ㅎㅎㅎ

      어떤 음식을 시키던 음식의 가격대나 양에 맞추어 사람 수만큼의 종이 컵이 나온다.  캔터키 한마리엔 아주 커다란 종이컵이 2개다.  그럼 나올때까지 여러가지 음료수가 무한 리필이다.(고것 참 신통한 써비스다)  단 양대 콜라 회사 중에서 한 회사것만 취급한다.  내가 익숙한 콜라 회사가 아닌게...... 흠.

      돌아다니는게 힘이들고 지쳐갈 때 쯤이면........  슬쩍 '쇼핑 타임 프로그램'을 가동시킨다.

      무조건 인내와 끈기를 가지고 쫄래쫄래 따라다닌다.(빚 갚아나가는 심정으로)  그러다가 무조건 억지로 떠맡기듯이.....  슬쩍 선물을 하나 골라드리면......

      완존히.........  사람 얼굴 표정부터 달라진다.  헐!!!!!!!!(누가 챠밍 아니랄까봐서리....... ㅋㅋㅋ)


      '자유 여행자로 여러날 머물면서 다양하게 즐기기엔 이제껏 내가 다녀 본 도시중에서 바르셀로나가 단연 1등.'



























































        --   더 풍성한 바르셀로나 여행기는 다음 이야기에서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