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포루투갈) 비 때문에 여행이란게 이렇게 망가질 수도 있구나

by 피안재 2019. 6. 23.



























  누군가가 말하길  '여행은 꼭 아는만큼만 보인다'라고 했다.

  그런가 하면 '여행은 노력하고 준비한만큼,  꼭 그만큼 더 줄거워질 수 있다'라고 하기도 했다.

  나는 그말에 전폭적으로 동의한다.

  하지만 나는  여기에서의 준비와 노력이 여행을 목전에 두고 단발성으로 급하게 온갖 정보를 끌어모으는 벼락치기 형태가 결코 아니라고 말하고 싶다.

  급조된 준비와 노력은 어떻게 생각하면 아니한만 보다는 좋을 수 있겠으나......   즐거운 여행에는 별반 도움이 되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막연하게 라도 어딘가를 여행하고 싶다면........  마음속에든 메모장에든 일기장에든 그 가고싶은 곳을 적어두라.

  그목적지가 하나이든 열이든 백이든은 전혀 상관이 없다.

  그런 다음으로는  그 열망 하나하나의 장소에 관심을 가져라.  누가 그곳을 다녀온 이야기를 하면 경청하고 늘 메모를 해라.  티비 방송을 보아도 메모하고,  책자를 통해서도 정보를 얻게되면 항상 메모를 하라.  단순한 여행지만이 아니라  음식 문화 더 나아가서 그곳의 역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라.  한 분야에만 집중적인 준비 보다는 넓고 포괄적이며 단순한 관심과 노력들이 차근차근 모여지기를 나는 희망한다.  그런것들이 차곡차곡 모여져서 시간이 지나면  그 어느 열망하는 특정지역에 대해 지리 역사 문화 등의 전반적인 하나의 커다란 퍼즐이 맞추어져서 한폭의 완성된 그림처럼 당신의 가슴에 펼쳐질 때가 생길것이다.

  바로 그 때이다.

  그때 비로서 당신은 그 열망하던 여행지를 충분히 즐길 노력과 준비가 갖추어진 것이다.  그때서야  충분히 즐겁고 행복한 여행을 즐길 수가 있을 것이다.

  여행사가 이끄는대로,  그리고 가이드의 설명에만 의존해서는  결코 오래오래 가슴에 새겨지는 그런 즐거운 여행을 기대하지 말라.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의 일이다.

  한무리의 여행자들을 이끌고 현지인 가이드가 들어왔다.  가이드는 영어와 라틴어로 열심히 설명을 했다.

  그 중에 한국인 여행자도 여럿 포함되어 있었다.  아마도 한국어 설명이 없는 현지인 가이드를 택했다면 어느정도  영어나  라틴어에 조예가 있어서 가능한 투어였을 것이다.  그런데 우연히 그들 뒤를 쫓다가 실로 어이없는 어처구니를 경험하게 되었다.

  물론 나는 아무런 내색을 하지 않고 지나쳤지만.......  혼자 실소를 터트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여행을 함에 있어서  준비와 노력은 필요하지만........  중요한것은 단편적 지식의 수집이 아니라......  포괄적인 올바른 정보의 인식과 깨달음이라는 것이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의 한 장소에서 가이드는 문양이 새겨진 바닦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곳이 바로 콜럼부스가 왕을 알현한 장소입니다.  커다란 의미가 담겨 있는 아주 역사적인 장소입니다.'  그는 분명하게 (킹) 이라고 했다.

  하지만 곧 이어 엉뚱한 일이 벌어졌다.

  30대로 보이는 한국인 여성이 또렷또렷한 말로  일행에게 가이드의 설명을 통역을 하는 것이었는데 이 부분에서 오류가 생긴 것이다.

  '엄마 엄마.  이 장소가 바로 콜럼부스가 여왕을 알현한 장소래.  이곳에서 이사벨 여왕을 알현하고 도움을 청한 후에 배와 물자를 지원받아 신대륙으로 항해를 떠나게 된것이지.  그만큼 아주 역사적으로 의미가 큰 곳이래.  어디어디 이쪽으로 서 봐.  이런데서는 사진을 찍어 줘야 하는거야.  이모들도 옆으로 서.'

 


  아마도 이 여성은 포루투갈과 스페인을 한데 묶어서 여행함에 있어서 나름 열심히 사전 공부를 했음이 틀림없다.

  콜럼부스와 이사벨 여왕을 연계 시키는 예만 보아도 그렇다.  (킹)과 (퀸)의 부분에 대해서도   포루투갈 왕이 왕비와 함께 알현했을 수도 있고,  이사벨 여왕을 표현함에 있어서도 항상 남편인 페르디난도 왕과 동행했을 수도 있다보니 꼭 둘을 따로 호칭 할 필요가 없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것은 아니다.  어긋나도 한참이나 어긋났다.

  여기는 엄연한 포루투갈이다.

  콜럼부스는 이탈리아. 포루투갈. 스페인을 다 쫓아다녔다.  이곳 포루투갈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콜럼부스는 왕을 만났다.  그런데 그가 만난 왕은 분명한 포루투갈의 왕이었다.

  세상의 반대를 물리치고 끝내 콜럼부스를 지지해준 이사벨 여왕은 국경 넘어 인접국인 스페인의 여왕이다.  그리고 이사벨 여왕은  평생동안  포루투갈을 방문한 적이 없다.  그런 여왕이 어떻게 멀쩡하게 남의 나라인 리스본의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콜럼부스를 알현한단 말인가?

  콜럼부스는 스페인 세비야의 대성당에서 이사벨 여왕과 남편 페르디난도 왕을 알현했다.  대서양을 가로질러 인도에 가는 항로의 개척을 주장했다.  하지만 모두가 그의 주장을 외면했다.  단 한 명 이사벨 여왕만이 그를 지지하여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세비아 항구를 출발한 콜럼부스는 마침내  서인도(중앙 아메리카)를 발견하였고,  귀국길에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포루투갈의 리스본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바로 이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포루투갈의 왕이었던 (동 주앙 2세)를 알현하게 된다.  바로 2년 전에 대항해의 지원을 요청하기 위하여 만났다가  동 주앙 2세의 거절로  콜럼부스는  스페인으로 발걸음을 옮겼던 것이다.  2년 만에 신대륙이 발견되었고,  처음 그 소식을 접하게 된 포루투갈 왕의 기분은 어땠을까?  아울러 뽄때를 제대로 보여준 콜럼부스의 심정을 어땠을까?  아쉽겠지만  주앙 2세는  콜럼부스의 배를 수리해주고  스페인으로 돌아가게 배려해 주었다.

  콜럼부스는 다시 스페인 세비야로 금의환향 했던 것이다.  그리고 두 달뒤  바로셀로나에서 신대륙 발견을 자축하는 국가적인 성대한 환영잔치를 벌였다.

  이것이 밝혀진 역사의 진실이다.

  한국인 여성의 잘못된 사전준비와는 엄청난 차이를 드러낸다.

  포루투갈은  (콜럼부스)와  (마젤란)을 극도로 싫어 한다.

  어디까지나 포루투갈 사람들에게 있어서  15세기의 '대항해 시대'는  (엔리케 왕자)에 의해서 시작되었으며,  그들 가슴속에는 (바르톨로뮤 디아스)와 (바스코 다 가마) 그리고 (페드로 알바리스 카브랄)이 있을 뿐이다.  콜럼부스와 마젤란은  15세기 대항해 시대에 그저그런 별볼 일 없는 뱃사람일 뿐이다.

  도대체 왜 그럴까?






  제로니모스 수도원은 (바스쿠 다 가마)가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 인도 항로를 개척하고 무사히 돌아온 것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건축물이다.

  몰론 '인도로 향하는 새로운 해운 항로 개척'이라는 위대한 공적을 낳기는 하였지만,  1차 항해는 사실 지극히 미미한 별 볼일 없는 결과를 남겼다.  인도에서는 전혀 환영을 받지 못하였고  겨우 목숨을 부지해서 돌아와 운항 기록을 남긴 정도로 미미했다. 바로 1497년의 일이었다.

  이보다 10년 앞서서 (바르톨로뮤 디아스)는 유럽에서 10.000km나 떨어진 남쪽의 험한 파도를 뚫고 아프리카의 최남단을 돌아나가게 되었다.  대서양과 인도양이 만나는 거대한 대륙의 끝에서 마침내 '폭풍의 곶'을 발견하게 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 '폭풍의 곶'은 곧 인도로 향하는 희망을 상징한다고 하여 '희망봉'으로 명칭을 바꾸게되고 오늘에 까지 그러허게 불리워 지고 있다.

  인도에서 들여오는 향신료에 대한 어마어마한 가치를 잘 인식하고 있던 왕(동 주앙 2세)는  바스쿠 다 가마의 항로를 따라 두번째 새로운 선단을 파견하는데 그가  바로 (페드로 알바리스 카브랄)이다.  페드로의 2차 항해 선단은 희망봉을 돌아 인도양에 접어 들면서 태풍을 만나 그만 항로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몇 달을 표류하다가 그들이 발견한것이 바로 '브라질'이다.  엉뚱한 삑사리로  그만 남아메리카를  포루투갈이 발견하게 되었고 식민지를 삼게된 것이다.

  그리고 이 와중에......  이 보다 조금 앞선 시기에  '콜럼부스가 서인도(아메리카 신대륙)제도'를 별견하는 대 역사가 벌어졌다.

  급변하는 대항해 시대의 역사속에서 몸이 단  (동 주앙 2세)는  (바스코 다 가마)로 하여금  제 3차 선단을 다시 꾸려서 다시 인도로 보낸다.  그때에서야 인도와의 어느정도 교역을 성사시키며  귀국하던  바스코 다 가마가 그만 풍토병에 걸려서 사망한다.

  이후,  바스코 다 가마의 항로를 이용하여 인도와 향신료 교역을 국책사업으로 발전시킨 포루투갈은  실로 어마어마한 무역강국으로 승승장구하게 된다.

  이 향신료 교역으로 생겨나는 세금의 5%을 별도로 징수하여 세운 기념물이 바로 제로니모스 수도원인 것이다.

  길이가 300m나 되는 흰 대리석으로 지어진 수도원은 햇빛에 반사될 때 유독 아름답다.

  십자가와 선박, 혼천의가 새겨진 순백의 대리석관 안에 바스코 다 가마가 잠들어 있다.

  또한 포루투갈만의 독특한 건축양식이라 할 수 있는  (마누엘 양식)은 새로운 개척지에서 발견 된 동물과 식물과 산호와 조가비 모양과 선박의 로프 모양 등을 건물을 치장하는 소재로 채택하였다.  이러한 독특한 건축 기법을 건물 발주자였던  동 주앙 2세의 뒤를 이은 '마누엘 1세'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성당을 받치고 있는 힘차게 뻗은 나뭇가지를 연상케 하는 여섯개의 기둥은  수도원의 백미라 하겠다.  웅장함과 아름다움의 조화가 신비롭기까지 하다.









































  온통 빨간 지붕을 뒤집어 쓰고 알록달록 색칠한 담벼락들로 빼곡한 골목길이 수놓아진 7개나 되는 언덕들로 이루어진 리스본의 골목길을 제대로 모두  돌아보려면 땀 꽤나흘려야겠다고 떠나오기 전부터 다짐에 다짐을 했었다.

  덥거나 지치면 골목 어귀마다 늘어선 야외 카페에서 시원한 생맥주나 마셔주자고 다짐했었다.

  언덕을 옮겨갈 때마다  광장에 늘어선 노점에서 푸짐하게 길거리 음식을 즐겨 보리라고 벅찬 기대감에 가슴까지 설레었었다.

  미치도록 더우면  터키에서의 쭉쭉 늘어나는 쫀득쫀득 아이스 크림이나,  이탈리아의 젤라또를 맘껏 먹어주리라 기대했었다.

  그런데 개뿔........

  세상에 이런 어처구니가..........

  리스본과 포루투에는  달랑 군밤장수 하나 빼고는 노점상이 없다.  그림이나 기념품을 파는 노점도 아예 없고.......  구걸하는 사람도 아주아주 처음부터 없다.

  아이스 크림. 옥수수나 시미즈 빵. 즉석에서 생과일 갈아서 쥬스 파는 노점.......  그딴거 아예 없다.

  다 좋다.  퍼펙트 하고 원더풀이다.

  근디.......  근데서리........  문제는 비(雨)다.

  벌써 며칠째 밤새 퍼붓고도 모자라 하루종일 오락가락이다.

  거의 여행 불가능 수준이다.

  세상에 이럴수가...........

  오 마이 갓.

  미션 임파스블...........


  그렇다고 여행을 포기 할 우리가 아니지.

  새벽 산책 삼아서.........



  내리는 비를 아랑곳 하지 않고 숙소 바로 뒷편에 있는 (산타 쥬스타 엘레베이터)를 통해 언덕을 오른다.

  아파트 15층 높이에 이르는 아주 오래된 낡은 엘레베이터로 아주 이색적이다.

  흔히 엘레베이터는 건물이나 아파트의 일부분으로 내재되어 있는것이 오늘날의 보편적 인식이다.  하지만 여기 산타 주스타 엘레베이터는  자체만으로 독립된 하나의 건축물이다.  산 아래와 언덕 위를 연결해 주기 위하여 다리를 놓거나 트램을 설치하듯이  오로지 상하 이동의 수단만을 위하여 독립된 건축물로 지어진 아주 이색적인 엘레베이터 이다.  초기에는  증기를 이용해 운행다는데  엘레베이터 아래에  옛날의 증기 엔진이 그대로 놓여있는것이 들여다보여진다.

  흔히 우리나라 조금 과거에  경운기 엔진을 이용해 여러가지 기계설비를 이용하던 것과 유사한 모습이다.

  이곳을 오르면 바이샤 지구의 풍경을 사방으로 제대로 감상할 수 있다.

  그리고 산타 쥬스타 엘레베이터 옆으로 슬픈 표정의 (산 도밍고 성당)이 웅장하게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이를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까? 

  2차 세계대전 당시 연합군의 폭격으로 페허가 된 도심 한복판에 달랑 흉물스런 모습으로 살아남은 교회를 다시 보는 느낌이라고 해야 할까?

  1755년의 리스본 대지진과 1959년의 화재로 거의 소실될뻔한 상처 가득한 그 모습을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누군가 '비극의 성당'이라고 했다한다.

  지진과 화재 이후에 복원을 하지 않아서 지난 세월의 아픔과 그을음의 상처를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다.  살며시 여행자의 옷깃을 여미게 만드는 풍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누군가는 '기적의 성당'이라고 부른다 한다.  재앙 속에서도 자리를 굳건하게 지켜내고 되살아 난 희망의 상징이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렇게 자신의 생각이나 위치에 따라 다른 느낌 다른 가치를 느끼고 가지게 되는 존재이다.

  작은 동네 교회들이 끊임없이 모습을 드러내고  전망대도 나타난다.

  차분하게 내리는 빗속에 차분하게 숨을 고르고 있는  리스본은 역시 아름답다.

  우중에 상관없이 하루를 시작하는 현지인들 모습이 지나간 뒤로.......  하나 둘.......  비와 상관 없이 여행을 계속하는 여행자들이 점차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알.럽.트.래.블.













































































 여러가지 이유가 았을 수 있겠지만.........  '내가 유럽을 좋아하는 아주 특별할 이유'를 꼽으라면 나는 '멋진 노인들이 많아서......'라고 하겠다.

  이제 환갑을 코 앞에 둔 내 입장이나,  석달밖에 차이가 나지않는 챠밍여사나......  우리가 결코 적은 나이는 아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참 노인들을 많이 본다.

  선진국의 부귀영화를 누리는 호사스런 노인들의 모습이 결코 아니다.

  더 없이 겸손하고,  타인을 배려하고,  느긋하게 자신들의 삶을 하나 둘 정리하면서 남은 시간을 충분하게 즐기고자 하는 진정한 여행자들을 말이다.

  어디에서건 시간만 나면 책을 읽는다.  항상 사랑하는 사람과 나란히 걷는다.  손을 잡고 걷는 사람은 의외로 드물다.  어디에서건 코를 맞대고 진지한 대화를 한다.  불편함이나 거북스러운 상황을 내색않고 항상 양보를 한다.  노인으로 대접 받기를 한사코 거절한다.   작금의 시대에  책 한권 사면 될것을  복사기로 프린터 해서  밑줄을 긋고  깨알같은 글씨로 주석을 달고 색연필로 별도 표시를 하고 확인하고 또 확인한다.  인터넷 검색보다는 지도를 펼치고 주변사람에게 길을 물어가면서 힘들게 찾아가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다. 새로운 경험을 우선으로 하지,  화려하거나 편리함이나 고급을 고집하지 않는다.

  내가 만나 본 유럽의 노인분들이다.

  가이없이  한없는 애정과 존경을 그분들에게 보낸다.  갈채를 보낸다.

  나 또한 그렇게 살고 싶기 때문이다.

  몰타에서 만난  아일랜드계 83세 할아버지,  론다 기차역에서 만난  할머니가 열심히 메모를 하시던 노부부,  장거리 기차에서 밤새 책을 읽으시던 할아버지. 내게 행운의 꽃을 정원에서 꺾어주시던 로마의 할머니, 이스탄불에서 만난 알바니아 노부부, 조지아의 보드카에 코가 빨갷던 노화가 부부, 오르비에토를 거닐던 노부부,  아르메니아 가르니 계곡에서 만난 벨기에의 한동네 노인 주민들..........

  혹여.......  신께서 나에게 보너스 쿠폰으로 시간을 되돌려 주겠노라 하셔도........  나는 정중하게 거절할 것이다.

  나는 지금이 좋다.  더하여는  좀 더 날씬한(?)  젊은날의 내 모습이었으면 좋겠다는 바램 한가지 빼고는 말이다.

  내 삶이 과거로 돌아간다면.........  챠밍 여사는?  내 아들은?  딸과 손녀는?

  난 지금 이대로가 좋다.  그들과 지금의 모습으로 함께 있는 이 순간의 이모습 그대로면 충분하다.  우리 태리가 어서 크기만을 기다리면 된다.

  찬란한 햇쌀을 맨얼굴로 바라다보며  내 나이에 맞는 당당한 모습으로 늙어가고 싶다.














                                                                                                                                             (모 여행사 홈페이지에서 퍼 온 사진)











  원래대로라면  저련 그림들이 무수히 나왔어야만 했다.

  그런데 전혀 아니올시다 였다.  오죽하면 멀쩡한 사진 하나 없어서  샘플이라고 퍼왔겠는가마는..........


  영국의 낭만파 시인 (바이런)은 스페인. 포루투갈. 그리스를 여행하던 중에 친구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신트라는 아마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틀림없을듯 하네.  지금 나는 이곳에 머물고 있어서 행복하다네.'  그는 이곳을 '위대한 에덴' 이라고 까지 칭송했다.

  인류의 조상들은 대부분 태양을 숭배했다.  태양을 중심으로 사고했고 태양을 중심으로 생활해 왔다.

  하지만 이곳 신트라 사람들은 태양보다 달을 더 숭배했다.  그리하여 '달의 산'이라는 뜻을 품은 세라산 곡대기에 (페나 성)을 세웠다.  아마도 그들은 어둠속에 깨어있는 달을 숭배하는 사람들에게 어떤 메세지를 전하고 싶었나 보다.

  그런 의미대로라면  태양이 작열하는 한낮에 페나성을 바라보는것 보다는,  둥근 보름달이 차올랐을 때 바라보는 페나성이 진정한 참모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아주 잠시 해보았지만.........  이도 저도 모두  깨몽......... 

  해도 달도 없이  소나기만 주룩주룩 쏟아지고 세찬 비바람이 몰아치는  아주아주 은혜스런(?) 날씨속에 페나성을 방문하게 될 줄이야.......


  리스본 호시우 역에서  신트라. 호카 곶. 카스카이스를 모두 돌아볼 수 있는 통합 교통권 '리스보아 카드'를 구입하면 1일 동안의 교통문제는 모두 해결된다.

  여기에는 신트라 역에서 내려 페나 성이나 무어 성까지 이동하는  시내버스 이용료까지 모두 포함되어 있어서 참으로 편리한 제도였다.

  리스본 시내 새벽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서  따끈한 커피를 끓여서 마시고 나서  신트라 여행을 감행하기로 하고  호시우 역으로 향했다.  리스보아 카드를 구입하고  기차에 오르기까지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리스본 근교 여행을 시작한 것이다.

  비는 아주 조금씩 내리고 있다.  오늘도 어제 포루투 같은 기적이 우리에게 내려주려나?

  45분 정도 걸려서 기차가 신트라 역에 우리를 내려주었을 때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고 있었다.  지도를 꺼내들고 이런저런 망설임 끝에 첫방문지로 (페나 성)을 선택하고는 마을 버스에 올랐다.

  길게 늘어선 줄을 서서 페나성 입장권을 막 구입하였는데.........  갑자기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하늘의 은총은 무슨.........  기적은 또 뭐?

  거기다 세찬 비바람과 어디선가 마구마구 짙은 안개가 밀려오기 시작했다.

  '이래서야  어디 신트라 여행을 계속 진행 하여야만 하나?'
















































  편백나무과의 침엽수와 열대지방 정글에서 보았던 까마득히 키가 큰 고목들이 울창하게 들어선 아름다운 숲길 위로 운무가 짙게 내려갈리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느낌마저 들었다.  운무는 숲 사이로 불어오는 바람결에 따라 밀려갔다 밀려오기를 반복하고 있다.

  그리고 그 숲과 운무 사이로 빼꼼히 모습을 드러낸 노랑 파랑 주황 흰색의 피스텔톤으로 치장한 뾰족 탑들이 인상적인 페나성은 꽤나 깊은 인상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지금 당장 문제는  내리는 소낙비 보다도 몰아치는 싸늘한 바람이 더 문제였다.  점차 싸늘한 한기가 엄습하기 시작했다.

  우리는 일단 성 내부로 들어갔다.

  전시실 겸 기념품을 팔고있는  간이 매점에서  따끈한 커피를 한잔씩 손에 들고 한모금씩 마시고 나서야 몸이 한결 개운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유럽 여행을 많이 해본 사람이나  여행 책자를 많이 접해본 사람들이 여기 페나성을 구경하고 있자면 혹간은  또 하나의 다른 성을 떠올릴 수도 있을 것이다.

  유럽은 물론 세계적으로도 가장 아름다운 성으로 꼽히는  독일의 노이슈반슈타인 성을 페나 성이 어딘가 모르게 닮아보인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을것이다.  그런 느낌에는 나름  그럴만힌 이유가 따라 붙어있다.

  아름다운 건축에 유독 조예가 깊던 독일의 루트비히 2세는 심혈을 기울여 마침내 '노이슈반슈타인'이라는 동화속에나 나올법한 아름다운 성을 건축했다.  그 과정에서 서로 협력하고 조언을 아기지 않고 적급 협조한 사람 중에  사촌 동생인 '페르난두 2세' 왕자가 있었다.  건축뿐만이 아니라 여러 예술적 분야에 다방면으로 뛰어난 재질을 가진 페르난두를 사촌 형인 루트비히 왕은 'Artist King' 별명을 붙여 주었다.  하여 세상은 그를  별명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더 많다.

  그 독일의 페르난두 왕자가  포루투갈의 마리아 공주와 결혼하고 포루투갈을 여행하던 중에 신트라에 들렸다가  이곳의 빼어난 경관에 매료되어서,  페허가 된 수도원 자리에 독일에서 건축가들을 불러다가 고딕. 마누엘. 르네상스 풍의 요소들을 모두 결집하여 아름다운 성을 건축했다.  페나 성이다.

  하지만 직접 살펴 본 성은  생각했던 것보다 많이 작게 느껴진다.  아주 작은 궁전이었다.

  정교한 아라베스크 문양의 타일들로 벽을 꾸몄다.

  너무도 정교한 스테인글라스에 저절로 매료된다.  스테인글라스에 명암까지 새겨 넣을 수 있는 저들의 빼어난 솜씨에 저절로 혀가 돌아갔다.

  궁전의 테라스에서 내다보이는 테주강과  멀리 리스본의 풍경과  배경처럼 둘러 산 대서양의 모습이 압권이라 들었지만,  지금은 창문 밖으로 쏟아지는 빗줄기와  뿌연 운무만이 가득할 뿐이다.

  커피를 마시고,  앙증맞고 예쁜 궁전의 내부를 천천히 둘러보았지만.......  정작 바깥의 날씨 상황은 좀처럼 바뀔 기미조차 보이질 않는다.

  어쩐다?

































































  내리는 소낙비가 아무리 거세어도,  옷과 신발이 젖어서 다소 꿉꿉하고 불편해도  여기 이 태리할망의 오매불망 여행욕구는 수그러들줄 모른다.

  마음 먹었으면 길을 나서야 하고,  길을 나섰으면 끝장을 보아야 하는 할미다.

  심하게 내리퍼붓는 소나기 속에서도 페나 성을 나와서 숲길과 공원을 끝내 모두 돌아보고야 만다.

  어디 거기서 끝이었겠는가>

  가파른 언덕길,  자동차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선 빗속을 걸어서 뚫고 마침내 (무어성) 입구에 다달았다.  입장권을 구매하기 전에 입구에 서서 저만치 산언덕 위에 허물어진 바위성터를 올려다 보는데........  아뿔싸.  소나기는 고사하고 내려앉은 운무 때문에 아무것도 보이질 않는다.

  비바람만 더욱 거세어 지기 시작한다.




 

                                                                                                                                                                                      (퍼온 사진)





  원래의 (무어성)은 윗 사진과 같아야만 했고,  그곳에서 멋진 페나 성을 건너다 보았어야만 했다.

  그런데 야속하게도 바램과 현실은 너무도 동떨어져 있었다.

  결국  무어성을 포기하고 신트라 시내로 내려왔다.

  온통 젖었고 추위가 엄습해 오고 있던 터라  시내의 중국식당으로 가서  따끈한 국물이 있는 음식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신트라에는  (무어성) (페나성)  외에도  (신트라 왕궁)과 여행 방송을 통해서 유명해진 (헤갈레이라 별장) 등 많은 볼거리들이 더 남아있다.  그 중 헤갈레이라 별장은 꼭 찾아가 보려고 별러왔던 장소였다.

  그런데 여러가지 여건이 상당이 안좋아졌다.

  비는 더 거세어졌고  이미 온통 젖은 옷차림 사이로 싸늘한 한기가 찾아들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우리는 리스본 인근 나들이를 접어야만 하는 상황에 직면한 것이다.

  하지만..........

  유럽의 땅끝까지 와서 오늘의 나머지 일정을 접을 수는 있겠지만.........  언제 우리가 다시 여기를 올 수 있을지 기약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죽어도 포기 할 수 없는 한가지........  그 한가지가 아직 남아 있었다.

  호카 곶.

  유럽 대륙의 땅끝.

  그곳마저 포기할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는 신트라를 출발해 카스카이스로 향하는 버스에 몸을 실었다.

  그 중간쯤에 호카 곶이 있으니까..........

















  이랬어야 했다.

  '여기가 유럽 대륙의 땅끝이란다'  하면서 점프샷도 찍고 그랬어야 했다.

  한없이 푸른 망망대해  대서양.......  유럽의 끝이자  저 건너 아프리카의 시작?

  개뿔.

  땅끝은 무슨 얼어죽을 땅끝.......

  말짱 도루묵이었다.

  대서양에서 불어오는 세찬 바람은  대관령에서 맞이했던 비바람에 비하면 그 느낌이나 차이가 엄청나다는 사실만 깨닫기에 충분했을 뿐.......

























  다시 버스를 타고 카스카이스로 향했다.

  도심을 구경하고  해안가 절벽에서 바위에 난 커다란 동굴을 구경할 참이었다.

  그런데 여기 카스카이스에서도 달리 특별히 할 것이 없었다.

  그저 비바람을 맞으면서  버스 터미널에서  기차 역까지 겨우 걸어서 이돌하는 것이 전부였다.

  허망하다는 표현이 적절한 바로 그런 날이었다.

  리스본으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리스본에도 여전히 비가 내리고 있었다.

  빗줄기도 가늘어져  구질구질 비가 내리는 날씨로 그나마 다행스럽게 세찬 바람은 멈추어 있었다.

  어처구니 없는 하루를 맞이한 꼴이 되긴 하였으나.......  이대로 여행중의 하루를 마무리 하기는 싫었다.

  우리는 젖은 옷차림 그대로 다시 우산을 쓰고  벨렝 지구로 향했다.

  대항해 시대의 리스본을 만나보기 위해서였다.

  제로니모스 수도원에서  바스코 다 가마를 만난 이야기는 앞부분에서 했었으므로  건너 뛰고.......  테주 강가의  벨렝탑으로 향했다.









































  십자군 전쟁 전후의  유럽은 동방(동양)으로 부터 아주 귀한 물품들을 공급받기 시작했다.

  인도의 향신료와  중국의 바단과 도자기류 였다.  물론 화약 제조법.  종이의 발명이 이 시기와  몽골의 유럽 침략이라는 사건과 맞물려 벌어진 일이기도 했다.

  대단히 중요한 교역이기도 했으며  그만큼 한 국가의 사운을 걸만큼 막대한 이문을 창출해내는   당시로서는 최첨단 산업이었던 셈이다.

  중국의 물품들은  산넘고 물건너고 사막을 건너는  카라반의 행렬(실크로드)을 통해 이루어 졌고,  인도의 향신료는  카라반의 행렬과 인도양의 인근해를 오가는 선박을 통해 이루어 졌다.  이러한 귀한 동양의 모든 물류들이 집결하는 곳이  바로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 이었다.  이스탄불은  그야말로 동서 무역의 교통로이자 핵심이었다.  이러한 지리적 잇점에서 자연스럽게 생겨 난  막대한 부가 바야흐로 천년제국  비잔틴을 이룩하였던 것이다.

  십자군 전쟁 이후에 새롭게 탄생한 신생부족국가 (오스만 투루크)간 짧은 시간만에 소아시아 지역을 통일시키고 마침내 1453년  유규한 역사를 자랑하던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했다.  비잔틴 제국이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 것이다.

  이슬람 신앙을 신봉하는 오스만 투루크(터키)는 기독교 세계인 유럽 정벌을 시작했다.

  이 전쟁의 발발로 인하여  모든 유럽은  동양에서 교역을 통해 들여오던  향신료와 비단과 도자기의 수입이 완전 단절되기에 이르렀다.

  밀라노나 나폴리 상단이 나서서 오스만의 타락한 무역상인들을 통해 밀무역을 시작하였다.  지중해를 장악하고  역사사 최고의 수익과 번영을 누리던 이탈리아의 도시공화국들이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타개책으로  베네치아 상단은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비단과 도자기를 키리키스탄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를 통해  크로아티아를 거쳐 베네치아로 수입하는  먹고 험한 새로운 교역로를 개척하여야만 했다.

  하지만 정작 문제는  인도의 향신료였다.

  동서양의 교차로인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한 오스만은  점차 지중해를 장악해 나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제 인도와의 통로는  모두 오스만이 차지하고 말았다.  오스만을 통하지 않고는  향신료 한 줌을 확보할 수가 없게 된 것이다.

  향신료와 금의 무게를 달아  같은 무게로 거래가 이루어질 만큼........  향신료 값이 곧 금값이었다.  향신료 1kg은 곧  금 1kg 이었다.


  이 혼돈의 시대에 리베리아 반도 끝자락의 손바닦만한 작은나라 포루투갈에 한 아이가 태어났다.

  왕이 될 수 없는  후계자 서열에서 멀리 밀려난 세번째 왕자의 이름이  바로 (엔리케) 이다.  '해양왕 엔리케 왕자'라고도 하고,  왕이 될 수 없는 서열을 뜻하는 '엔히크 엔리케 왕자'라고도 부른다.

  태생적으로 모험심이 강한 탐험가의 자질을 가진 엔리케 왕자는  오스만에 의해 장악되어 더는 나아갈 수 없는 지중해에서 시야를 돌려 영원한 망망대해  대서양을 향해 꿈을 키웠다.

  저 드넓은 바다 너머에는 무엇이 있을지,  미지의 세계에서는 무엇을 얻을 수 있는지,  혹은 인도의 향신료가 그 미지의 세계에서도 나는지,  무어인(아프리카계통 이슬람부족)의 영역은 어디까지인지,  저 바다 건너에도 하나님을 믿는  카톨릭 국가가 존재하는지에 대한 호기심이 끝나지가 않았다.

  성년이 된 그는 새로운 선박을 건조하고  새로운 항해술을 개발하였으며,  막강한 에스파냐(스페인)의 호시탐탐 도발로부터 포루투갈을 지켜내기 위한 방안을 연구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리베리아 반도를 벗어난 새로운 포루투갈의 거점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그는 형인 왕을 설득하여  군대를 이끌고 직접  지중해를 건너 아프리카 모로코 지역의  세우타를 정벌하고 점령했다.  처음으로 포루투갈이 해외에 거점을 마련한 것이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이 점령지역으로 부터 실로 어마어마한 소식이 전해져 온다.

  엔리케 왕자의 인생과  모루투갈의 운명을 바꾸어 놓게 되는 낭보가 찾아든 것이다.

  그게 무얼까?

  ㅎ

  ㅋ







































  중세 이전부터 이미 지중해의 유명 무역항으로 알려진 세우타(모로코 탕헤르 인근)가 기독교의 지배하에 들어갔다는 소식에  멀리....... 아주 멀리  아프리카의 동서로 반대쪽(이집트 바로 아래)에서 교역을 청하는 사절단이 세우타를 찾아 온 것이다.  더우기 놀란것은  그들은  유럽에 기독교가 전파되기 한참 전,  기원전부터 하나님을 믿어온 아프리카의 흑인 민족이었다.  엔리케 왕자는 친히 나아가 그들을 맞이했다.  그가 아직 가보지 못한 미지의 세계에 이미 기독교 왕국이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에다 또 한가지 놀라운 일은..........  경천동지 할 일은 바로...........

  그들이 교역을 청하며 내어놓은 물품중에  (인도의 향신료)가 포함되어 있었던 것이다.

  엔리케 왕자가 받은 충격은 대단히 컸다.  세상에는 그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일들이  산재해 있었던 것이다.

  포루투갈 보다 훨씬 먼저........  기원 전에 이미 기독교를 받아들인 아프리카 왕국은 바로 (에디오피아)였다.

  포루투갈과 에디오피아는 정식 교역을 맺었다.

  엔리케 왕자는 왕에게 청해  상당수의 군대를  에디오피아 상단과 함께 지중해를 건너게 해주었다.  군대가 그들을 호위하면서  에디오피아까지 가서 지리적 탐구는 물론  인도 향신료를 들여올 수 있는 육상 교역로를 확보하기 위해서 였다.

  그런데.........  그런데.......   이 육로로의 여정이  그리 만만하지가.........  사하라 사막이 가로막고,  만년설에 뒤덮인 아틀라스 산맥을 넘어야 했다.  하지만 지중해를 차지한 오스만의 방해를 받지 않으려면 이 교역로의 확보가 그만큼 중요했다.

  원정을 다녀 온  군대의 출혈은 너무도 컸다.  하지만 그렇다고  인도의 향신료를 들여올 수 있는 이 교역로를 포기할 수는 없었다.  엔리케는  새로운 상단을 꾸려  또다시 군대를 딸려 보냈다.

  그러다가는.........  에디오피아 상인들의 입을 통해 전해들은  아프리카 라는 지리적 특성과 지형이..........  그의 호기심을 또 자극하기에 이르렀다.

  '뱃길만 개척할 수 있다면  엄청난 양의 향신료를 마음것 실어올 수 있을텐데...............'

  엔리케는 새로운 선박 제조와  항해술 개발에 박차를 가했다.

  ' 저 대서양을 따라 계속 내려가다 보면 어딘가 끝이 있을 것이고,  그 끝을 돌아서면 반듯이 반대편의 에디오피아가 나올것이야.  뱃길로 에디오피아만 찾아낸다면..........  인도까지의 해로는 에디오피아인들이 앞장 서 줄꺼야.  갈 수 있을까?'

  고심에 고심을 한 끝에 마침내 엔리케 왕자는  당시 포루투갈의 뛰어난 해군 장교였던  (바르톨로뮤 디아스)에게 자신의 심정과 고충을 토로했다.  왕자의 깊은 속내를 전해 들은  디아스가  마침내 새로 건조된 선박과 항해술에 뛰어난 군인들을 이끌고 미지의 바다로 나아갔다.  그들에 의해 희망봉이 발견되었다.

  자신을 얻은  엔리케 왕자는  이번엔 (바스코 다 가마)를 앞세워 '인도로 향하는 해로를 개척' 하라고 지시했다.

  바스코 다 가마는  인도를 향해 출항했고..........  아쉽게도 엔리케 왕자는 인도로 향하는 뱃길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지 못하고 생을 마치게 된다.

  하지만 그의 도전과 노력과 헌신이  포루투갈을 해양강국으로 성장시키는 굳건한 토대가 된것은 분명하다.

  그는 포루투갈의 영원한 첫번째 영웅이다.






































   빗줄기는 잦아들었다.

  리스본은 한산하고 거리는 심지어 적막해 졌다는 느낌이 들 정도였다.

  며칠이나 계속된 험악한 기상이변은  모든 사람을 발걸음을 밖으로 부터 되돌리게 만들었다.

  그래도 그 중에도 여기저기로는 의욕으로 활활 타오르는 여행자들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거의 모두가 나이 지긋하신 자유여행자들이다.

  그리고 이 굿은 날씨에도 언덕길 한켠에서  성악을 전공한 거리의 악사가 부르는  오페라 리골레토 중에서 (여자의 마음)은 정말로 압권이다.

  이 순간만은 그가  도밍고요  호세 카레라스다.

  침울하고 눅눅했던 오늘 여행이  그의 노래 한소절로 충분히 화사해짐을 느낀다.  이런게 여행의 기쁨이요 생활속의 환희가 아닐까?

  저절로 행복하단 생각이 들고  미소가 피어 오른다.

  이런것이 유럽이다.

  나는 지금 유럽에 있다.  행복한 마음으로 여행중이다.

  알. 럽. 포. 루. 투. 갈. 알. 럽. 리. 스. 본.















   ---  다음 이야기에서 (포루투갈 여행)을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스페인으로 가야겠지요?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