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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이탈리아) 이탈리아 소도시 여행 '오르비에토'

by 피안재 2019. 4. 25.

 

 

 

 

 

 

 

 

 

                            

 

 

 

 

 

 

 

 

 

 

 

 

 

 

  한적한 간이역에 내리면  분수대 너머로 아주 작고 허름한 건물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에서 빨간 푸니쿨라를 타고 조금만 오르면 가파른 바위벼랑 위로 아담한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지극히 한산하다 못해 적막감까지 들 정도이다.

  갈색 혹은 잿빛 라임스톤을 쌓아올린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집들은 한결같이 모두 잿빛 지붕으로 덮여있다.

  어떤 마법에 빨려들듯이 나의 시선은 온통 그 은은한 갈색과 잿빛의 파노라마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그저 시선이 잡아끄는대로 골목 언덕길을 걸어서 올라간다.

  똑같은 모양 하나 없이 천년 이상의 세월을 거뜬히 견뎌온 까만 돌을 다듬어 보도블럭처럼 포장해 놓은 골목길에서 울려퍼지는 내 발걸음 소리가 새삼스레 오늘따라 그렇게 정겹게 느껴질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골목길을 지나가고 또 지나왔을까?

  어디선가 과일이 가득담긴 광주리를 잔등에 걸쳐 멘 당나귀 한마리가 또각 또각 소리를 내며 저만치 다가오고 있을것만 같다.

  한무리의 사람들이 우루루 갈길 바쁜 여행자들이 만들어내는 발걸음이 소리와 함께 서둘러 저쪽 골목으로 사라지는데 그들에게서 익숙한 한국말이 흘러나오고 있다.

  '뭐가 저리들 바쁠까?'

  이 언덕으로 올라가는 좁은 골목길을 아주 오래전부터 꼭 한번 거닐어 보고 싶었다.

  낯설기만한 골목길을 마냥 쭉 나아가다 보면 천길은 안되어도 이백길은 족히 되는 낭떠러지가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그 아래로 포도밭과 올리브밭과 사과농장들이  비록 나무잎은 모두 떨어졌지만 주변의 어우러지는 풍광들이 겨울이라는 계절을 전혀 실감하지 못하게끔 어느정도의 푸르름을 간직하고 있다.  들판 너머의 산자락 언덕 역시 포도밭과 올리브밭이다.  그리고 아주 평평하게 잘다듬어 놓은 너른 들판은  지난 가을에 추수를 모두 끝낸 밀밭이다.

  이 마을의 화이트 와인이 아주 유명한데  온통 이 좁은 골목길 뿐이 이 마을에 도대체 와이너리는 어디있다는 말일까?  와인 셀러는 있을까?

  키안티 지역 같은 광활한 평원의 드넓은 포도밭과 들판 중간중간에 들어선 장원이 역사와 전통을 가진 멋진 와이너리라는 내 나름의 고정관념이 이 마을에서는 통하지 않는다는 사전 정보를 가지고 찾아온 길이었지만,  어느 골목에서도 와이너리는 보이질 않는다.

  다시 발걸음을 돌려 기웃기웃하면서 언덕을 오르노라니 예전에 만났던 한 여행자가 나에게 당부해 준 이야기가 생각이 난다.

  '자기 잔에 자기 손으로 따라서 와인을 마시는 사람을 그곳에서는 알코올 중독자라고  부릅니다.'

  '건배는 처음 한 번만 하고 그 다음부터는 건배를 하지않고 그냥 자유롭게 마십니다.'

  '적어도 오르비에토 에서라면 화이트 와인을 고르는것이 탁월한 선택이라고 하겠습니다.'

  1년 전 로마에서 만났던 한 여행자가 나에게 이곳을 소개하면서 일러준 말이었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빼곡하게 사전 준비된 바쁜 일정때문에 이곳을 들러보지 못했었다.  귀국해서는 여행서적과 인터넷으로 열심히 (오르비에토)를 찾아 보았다.

  '진즉이 알았더라면 다른 일정을 조금 취소하고라도 꼭 다녀왔어야 했던것을' 하는 아쉬움과 후회를 한 것이 얼마나 여러번 이었던가?  그래서 이번 여행의 일정엔 무조건 피렌체가 최우선이고,  다음으로는 이곳을 꼭 다녀가야겠다고 애초부터 작심을 했던 터였다.

  내 마음속에 담아 놓았던 모습과는 너무도 다른 첫인상이었다.

  하지만 그 첫인상과 동떨어짐은의 의미는 기대에 못미치는 실망감이 아니라  참으로 오길 잘했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우러나오는 느낌을 말한다.

  또 거기에 더하여 골목길을 안쪽으로 안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들어 갈 수록 좀 전의  첫인상 또한 다시금 바뀌어 간다.  완연히 다른 어떤 새로움이 조금씩 조금씩 어떤 마음 뿌듯한 평온함으로 다가온다.

  여행을 하면서 참으로 오랫만에 느껴보는  정겨움이자 아늑한 포근함이  낯선 여행자의 가슴에 차곡차곡 쌓여가기 시작한다.

  여기는 이탈리아의 중부 슬로 시티 운동의 발상지 오르비에토(Orvieto)다.

 

 

  오르비에토는 로마에서 북쪽으로 피렌체로 가는 길목의 120km 지점에 있는 깎아지른 바위 벼랑 위에 건설된 아주 작은 마을이다.

  이곳을 여행하자면 다분히 로마 테르미니 역을 거점으로 삼아 일일 투어로 다녀오기에 아주 적합한 곳이다.  로마와 피렌체 중간에 놓였다고는 하지만 사실은 로마쪽에서 훨씬 가깝다.  워낙 작은 지역이기에  고속 열차나 급행 열차는 모두 르비에토에 정차하지 않는다.  이탈리아 완행 열차인  레지오날레가 로마 테르미니 역과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역 사이를 운행한다.  로마에서는 1시간 30분.  피렌체에서는 2시간 30분이 소요된다.

  기차시간을 잘 활용하면  오르비에토와 '천공의 도시'로 알려진 치비타 디바뇨레조를 엮어서 1일 여행으로 누구나 어렵지 않게 다녀올 수 있다.

  이탈리아에는 중부지역에 두 개의 '치비타'라는 지역이 있다.  하여 여행자들이 주로 선망하는 '바위 벼랑 도시 치비타'에는 '디바뇨레조'라는 뒷부분 명칭을 함께 붙여주어야만 현지인들의 도움을 얻을 수 있다.

  굳이 한마디 첨언한다면........ 치비타 디바뇨레조 만이 빼어난 풍광을 가진 '바위벼랑 위의 도시'가 아니라,  사실은 오르비에토가 더 멋진 풍광과 역사와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훨씬 훌륭하고 소중한 '바위 벼랑위의 도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로 비교가 안된다.

  다만 치비타 디바뇨레조의 경우는  침식 풍화작용으로  훼손 정도가 너무나 심하고  복원 내지는 보수가 힘든 지경이어서 곧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희소성을 간직한 상징적 의미로 최근에 부쩍 사람들이 많이 찾고 있다.

  하지만,  진실로 멋지고 고귀힌 바위 벼랑위의 작은 마을(도시)은  바로 오르비에토 이다.

  작고 소박하지만 결코 오르비에토는 초라하지 않다.   마을 전체가 어떤 은근한 세월의 흔적을 담고있는 정취를 은은하게 뿜어낸다.

  살면서 한번쯤 느릿느릿 걸으면서 자신을 되돌아 볼 기회를 만들고자 한다면........  굳이 '티아고 순례자 길' 찾아가야만 할 것이 아니라,  여기 오르비에토의 좁은 골목길을 걸어보라고 나는 권하고 싶다.

  중세의 교황들은  즐겨 여기 오르비에토를 찾았다.

  하나는 휴양을 위한 발걸음이었고,  다른 하나는  환란이 닥치면 이곳을 은신처로 삼았던 것이다.

  충분히 그런 선택을 왜 했었는지 이곳을 천천히 음미하면서 거닐어 보는 사람이라면 그 이유를 곧 깨닫게 될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아시안 게임이 열리던 1986년  이탈리아 로마의 스페인 광장에 미국의 프랜차이즈 기업 '맥도널드'가 문을 열었다.  전 세계인의 입맛을 획일적으로 표준화 시키는데 혁혁하게 공을 세우고 있는 맥도널드가  '로마의 휴일'에 나오는 오드리 햅번의 손에 젤라또를 밀어내고 햄버거로 대체시킬 기세였다.

  그러자 오르비에토가 나서서 '슬로 시티 운동(슬로 푸드 운동)'을 처음 주창했고,  이탈리아의 4개 도시가 이에 동참했다.  현재는 세계 100개 이상의 도시가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신안군을 비롯해 완도. 장흥. 담양 등이 이 운동에 동참하고 있다.

  '과거로의 회귀가 아니라 느리게 살면서 삶의 질과 가치에 대해서 한번쯤 되돌아 보자'는 운동인 것이다.

  왜 그런 운동이 이곳에서 시작되었을까?

  그런 물음에 대한 해답은 아주 쉽다.

  오르비에토를 거닐다 보면 그런 해답은 저절로 깨닫게 될테니까 말이다.

 

 

 

 

 

 

 

 

 

 

                          

                         

                            

 

                            

 

 

                                                            ---  내가 오르비에토를 여행하게끔 만든 1년 전 여러 여행 홍보물에서 수집한 사진들.(5장 모두 퍼 옮)

 

 

 

 

 

 

 

 

 

 

 

  르네상스가 피어나기 시작하던 1263년에 한 가지 사건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체코 프라하 태생의 베드로 신부는 예배때마다  먹고 마시는 성체와 성혈이 과연 그리스도의 몸과 피일까 하는 어릴적부터 가졌던 의구심이 이 시기에 다시 떠올라 정신적인 고통까지 격게되었다.  신부의 처지로 차마 누군가에게 쉽게 드러내지도 못한는 고통이자 고민이었다.

 견디다 못한 베드로 신부는 급기야 로마로 성지순례에 나섰다. 주님을 세 번이나 배반했던 베드로 사도의 무덤을 찾아 신앙고백을 통해 흔들리는 신앙을 추스르기 위해서였다.

  로마로 가는 길에 베드로 신부는 볼세나를 지나던 중 미사를 봉헌하러 산타크리스티나 성당에 들렀다.  미사에 참석해 성찬전례 도중 성체를 쪼개면서 그는 불현듯 다시금 자신만의 떨쳐내지못하는 커다란 의구심에 순간적으로 사로잡혔다.

  '정말로 여기 이 성체와 성혈이 진짜 그리스도의 몸과 피라는 말인가?'

  바로 그 순간 믿을 수 없는 일이 벌어졌다.

  베드로 신부가 쪼개던 성체에서 피가 뚝 뚝 흘러나왔던 것이다. 성체에서 흘러내린 피는 사제의 손가락을 적시고 이내 제대에 깔려 있던 성체포로 흘러내렸다.   마치 사람의 몸뚱이에서처럼 피가 흘러 내렸던 것이다.

  베드로 신부는 깜짝 놀랐다.  이 믿기지 않은 상황에 대해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는 미사를 중단하고 볼세나에서 가까운 오르비에토에 거주하고 있던 교황 우르바노 4세를 찾아가 모든 것을 고했다.

  오르비에토는 로마에서 약 120km 떨어져 있는 깎아지른 바위 벼랑위의 도시로서  아주 오래전부터 로마의 교황령에 속해 있었다.  당시에는 로마 뿐만이 아니라 이탈리아 전체가 정치적으로 불안했고 또 흑사병의 창궐로 매우 위험했기에 그곳은 교황들의 임시 피난처가 되곤 했었다.

  그런 이유로 당시 교황 우르바노 4세도 오르비에토에 머물고 있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오르비에토의 지아코모 주교에게 베드로 신부가 보고한 일을 철저히 조사하도록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주교는 그것이 주님의 개입으로 일어난 기적임을 확신하고 그 성체포를 오르비에토로 모셔와 교황에게 전했다. 그리하여 그때부터 주님의 성혈이 새겨진 성체포는 오르비에토에 모셔지게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4811일 교서 <이 세상에서 건너감Transiturusn de bocmunde>을 반포하여, 성체성사를 기념하는 새대축일’, 즉 성체 성혈 대축일을 제정하면서 이를 성령 강림 대축일  다음 목요일에 전 교횡에서 거행하도록 선포했다. 그리고 이 축일의 전례를 작성하도록 토마스 아퀴나스에게 위임했다. 그러나 그로부터 2개월 후에 갑자기 우르바노 4세가 사망하면서 그의 교서는 사장되고 말았는데, 50년이 흐른 1317년 교황 요한 22세가 선임 교황의 뜻을 받들어 성체 축일을 전 카톨릭 교회에서 지내도록 하였다.

  이 사건을 계기로 오르비에토 사람들은 (볼세나의 기적)을 기리기 위해 1290년부터 성전 건립을 시작했으며, 그로부터 300년이 걸려 완성된 것이 바로 지금의 오르비에토 대성당이다.  한마디로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볼세나의 기적의 증표라 할 수 있는  성체포를 보관하기 위하여 지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성혈이 새겨진 성체포를 모셔 둘 성물함이 1339년에 당시에 유명한 금속 공예가였던 우골리노 디 비에리카의 손에 의해서 완성되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  (성체포 경당)에 가면 주님의 성혈을 머금고 있는  성체포를 볼 수 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순례자들에게 있어서  절대성지인 것이다.

 

 

 

 

 

 

                                                                                 --- 볼세나 들판 풍경(저 멀리 오르비에토가 배경처럼 보인다.  가까운 지척이다)

 

                                                                                                                                                --- 볼세나의 산타 크리스티나 교회

 

                                                                                                                       ---  베드로 신부에게 기적이 벌어진 볼세나의 예배

 

                                                                                                                                         ---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성체포 경당)

 

 

 

 

 

 

 

 

 

  오르비에토의 하늘에 모처럼 햇살이 모습을 드러냈다.

  간혹 진한 먹구름이 몰려 지나가면서 빗방울 떨쿠고는 달아나듯이 산자락 너머로 사라진다.

  같은 상황이 간간이 반복되면서 가뜩이나 추운 날씨에 차가운 바람이 많이 불어서 체감 온도가 뚝 떨어진 매우 스산한 날씨다.

  두오모 광장 앞으로 소수의 개별여행자들이 지나가고,  미니버스 숫자로 보아 세무리의 단체 여행객들이 지금 오르비에토를 돌아보고 있다고 짐작된다.

  아뿔싸.

  한번씩 마주치고나니 세 무리가 모두 한국 단체여행객들이다.

  '시간이 얼마나 남은거야?  아직 한참 남았네?  추운데 어디 뭐 먹으러 들어가자.'

  '쪼끄만 하네.  벌써 다 돌아본거야?  50분 밖에 안지났는데?  이제 뭐해?'

  '이게 다야? 하도 유명하다기에 와 봤는데 별거 없네.  속은거야?'

  '날씨까지 속썩이는데 괜히 왔나봐?  치비타도 이런거 아니야?'

  '그렇게 되면 오늘하루 그냥 망친거지 뭐.'

  지나치는 한국 여행자마다 죄 다 한마디씩 하며 지나는데.......  하나 같이 불만이 가득한 푸념들이다.

  '저 사람들은 오르비에토에서 과연 무엇을 원하는것일까?' 하는 의구심이 생겨난다.

  광장의 크기에 비해 대성당(두오모)의 크기가 너무 커서 카메라의 포커스 안에 다 담겨지지가 않는다.  한 포커스에 담아보자니 당연히 측면의 가장 먼 곳으로 찾아가야만 했다.  박물관 건너편의 골목입구로 가니 그곳에는 젊은 남자 두 명이 다소 실망스럽고 못마땅한 듯 역시나 푸념들을 늘어 놓고 있다.

  한국인 단체 여행자들을 이끌고 온 한국인 가이드들이었다.

  사진 몇장을 찍으며 그들의 대화를 본의아니게 엿들었던 처지라 위로라도 할 겸해서 지나치는 말로 잠시 끼어들었다.

  '유쾌한 손님들은 아니지요?  하시는 일이 많이 힘드시겠습니다.'

  '역시 한국분이셨군요.  배낭에서 태극기를 보았습니다.  아까 전부터 천천히 꼼꼼하게 여행을 즐기시는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학자신가요?'

  '어이쿠. 학자라니요? 아닙니다.  건축에 관한 현장 일을 하고 있습니다.  직업적인 관심도 있지만  서양사나 미술사에 어려서부터 관심이 많았거든요?'

  '연세도 저희에 비하면 훨씬 많아보이시는데  항상 그렇게 혼자 자유여행을 하십니까?'

  '직업상  멀리 내다보고 스케줄을 잡을 수 있는것이 아니라서,  열심히 일하다가 아무때고  짬이 나면 이렇게 불쑥불쑥 싸돌아 다닌답니다.'

  '여행을 즐기시는 모습을 보니 저희가 부럽습니다.'

  '내가 가이드였으면 맨날 여행만하니까 얼마나 좋을까 하고 오히려 제가  그쪽분들을 부러워 했었더랍니다.  제가 학창시절 수학여행 말고는 패키지 경험이 전혀 없어서요.  그런데 이렇게 옆에서 보니 그 또한 대단히 힘든 일이겠다 싶어지네요.'

  '시간이 지날 수록 점 점 힘들어 지네요.  한계에 도달했지 싶습니다.  요즘 심각하게 고민을 하고 있답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옆에서 가리고 담배를 피우던 다른 가이드가 끼어들었다.

  '로마에서 여기까지 오는 동안에 열심히 오르비에토 여행 안내를 해드렸거든요?  정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기껏 저런 이야기를 쉽게 툭 툭 던지며 지나가면  정말 어깨에 힘이 쭈욱 빠지지요.  내가 이짓을 왜 하고 있나?  여행은 아는만큼 더 줄거워 진다는 말이 아예 소용이 없습니다.  역사나 미술사 건축사를 아무리 열심히 떠들어도 듣는 척만할 뿐 사실은 전혀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다 공부를 해가지고 와서 질문을 하는 여행자를 만나면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습니다.  한국인 여행자들을 인솔하고 나가면.........  모두들 가는데 마다 콜롯세움이 있고 트레비 분수가 있고 스페인 광장이 있는 줄로만 알아요?  그러니 힘이 들 수 밖에요.......  미켈란젤로나 다빈치만 예술가로 알아요?  여기 대성당 안에 미완성인 다빈치의 스케치가 한장 걸려 있다거나,  저쪽 담벼락 뒤에 미켈란젤로가 다비드 상을 만들 때 잘라낸 돌덩이에 골리앗 발가락 흔적이라도 남았다고 해봐요.  몰려가서 줄을 서서 인증 샷 찍느라고 난리를 피우지요.......'

  '몇 몇 유명 작가의 잘 알려진 예술작품이 아니고는  시내의 유명 카페나 레스토랑의 메뉴판 만큼도 관심을 못 받아요.........  참으로 웃기는 일이 매일 여기에서 벌어지지요.

  '힘 내시고 그럴수록 건강 잘 챙기세요.  행운을........'

  돌아서는 내 발걸음 마저 점 점 무거워지고 있었다.

  오 호.  통재라.......  요즘 귀신들은 다들 뭐 먹고 사나?  ㅎㅎㅎ

 

  < 니들이 오르비에토 멋을 알아? 까불구 있어..........>

 

 

 

 

 

  이탈리아 반도 중부를 여행하다 보면  '에트루리아(Etruria)' 라는 말을 자주 접하곤 한다.

  중세때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에게 있어서는 대단히 중요한 말이었으나  19세기 지나서 이탈리아가 통일 되고난 후부터는 그렇게 중요하게 여겨지지 않게 되었다.  하지만 지금도 이탈리아 중부의 도시들 간에는  이 '에트루리아'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는 한다.

  '에트루리아'는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지역에 세워졌던 고대 국가의 이름이다.

  BC.8세기에서 AD.1세기에 걸쳐서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거점을 두고 북부지역까지 세력을 넓혔던 고대 도시국가였다.

  디오니시오스와 이탈리아 역사학계는  '에트루리아人' 들이  이탈리아의 토착민족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나,  역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헤로도투스는 '에트루리아인의 기원은 소아시아 지역 아나톨리아 평원의 리디아 왕국 유민이 이주해온 것' 이라고 명확히 밝혀놓은 바 있다.

  이 에트루리아인들이 이탈리아 반도를 차지하던 시점에서 (고대 로마)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 했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초기 고대 로마의 7왕 중에서 3명이 에트루리아인 이었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듯이,  고대에는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지배하에 있었다는 결론에 도달 할 수 있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급격하게 세력을 확장한 로마가 강성해지면서 거꾸로 에트루리아를 흡수하게 됨으로써,  그때부터 에트루리아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말았다.

  중세에 들어 이탈리아 반도는 여러개의 도시국가 형태로 분열 되었다.

  이탈리아의 중부지역에 들어선  로마. 피렌체. 시에나. 피사. 오르비에토. 아시시 등의 도시국가들은 저마다   기원전에서 부터 시작해 로마제국을 거친 이탈리아 반도내에서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도시국가라고 자신들의 정통성을 확립하고  대외적으로 내세우기 위하여 너도나도  '에르투리아인의 후계자'라고 자칭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오늘날에도  이 같은  고대국가 에트루리아의 역사를 이탈리아 역사에 당당하게 편입시켜서,  이탈리아가 로마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훨씬 우이로 올라가 기원전 8백년 경에 이미 에트루리아를 기점으로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이탈리아의 역사를 에트루리아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보았을 때,  도시의 기로된 역사를 보나  건설된 고대 도시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보나  아마도.....  이곳 오르비에토가 고대 도시국가 '에트루리아'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절로 들게된다.

  오르비에토는 바위 벼랑위에 건설된  고대 도시국가의 전형적인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오르비에토는 기원전 3세기 무렵 로마에 합병됐다.

  이는 오르비에토가 그 이전부터 이미 도시국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는 것을 나타내며,  실로 절묘하게도 에르투리아의 역사와 궤를 같이하고 있다.

  깎아지른 절벽 위에 가부좌를 틀고 있듯이 앉아 있어서 실로 난공불락인 도시 오르비에토는  지정학적으로도  피렌체와 로마 사이의 가도를 통제하는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담당하게 되었다.  르네상스가 시작된 13세기 말 오르비에토 인구는 이미 3만명에 달했다.

   1236년 교황 그레고리 9세는 훗날 페루지아(Perugia) 대학에 통합되는 초기형태의 대학을 이곳에 설립했다토마스 아퀴나스는 1265년 교황청 신학자로 활동하기 전에 이 대학에서 강의를 했다.  그만큼 오르비에토는 이탈리아에 있어서 대단히 중요한 도시였다.

  더하여 오르비에토는 일찍부터 교황청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았으며 1860년 통일된 이탈리아에 병합될 때까지 교황청의 소유였다.   역대 여러 교황들이  즐겨 오르비에토를 찾아 휴양과 안식을 찾고자 했으며,  유사시에는 아주 중요한 피난처 이기도 했다.

   13세기에 들어서 이탈리아에 교황의 궁전 3개가 세워졌다.   이때 오르비에토에도 교황의 궁전이 세워졌다.  로마 밖에 교황궁전이 있는 곳은 유럽 전체를 털어서도 오르비에토와 비테 르보(Viterbo)  그리고 아비뇽뿐이다프랑스 트루와 출신으로 추기경을 거치지 않은 교황 우르바노 4세는 1262년부터 1264년까지 아예 여기 오르비에토에 살았다.   거기에는 이탈리아 출신이 아닌 교황으로서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로마 교황청 관계자들로 부터 한발자욱 벗어나려는 의도도 있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은 볼세나의 성체포를 모시게 된 것을 기념하기 위해 1290년 건설을 시작해 1607년 최종적으로 마무리됐다. 무려 300년이 넘게 공사가 진행되면서 로마네스크양식에서 고딕양식으로 건축의 역사가 진화하는 과정이 고스란히 반영됐다.  가히 수수한 고딕양식의 전형으로 나는 생각하고 있다.

  높고 뾰족한 첨탑과 화려한 장미창이  고딕양식의 특징을 추구하면서도 반아치형의 문과 정면을 장식한 모자이크 등을 통해 로마양식의 전통 또한 버리지 않고 있다. 14세기 이탈리아에 지어진  가장 대표적인  로마네스크 고딕양식인 것이다.

  피렌체 대성당을 설계한 아르놀포 디 캄비오의 설계에 따라 페루자의 베비그나테(Bevignate) 수사가 건축을 맡아 시작했다.   두 사람의 건축 책임자 유고에 따라  1309년에는 시에나의 조각가이자 건축가 로렌조 마이타니(Lorenzo Maitani)가 이어받았다

  대성당의 파사드는 마이타니가 가장 공을 들인 작품이다. 박공에는 체사레 네비아(Cesare Nebbia)가 디자인한 모자이크화로 성모 마리아의 생애에서 중요한 장면을 담았다. 중앙에 있는 박공의 모자이크화는 성모의 대관이다.

   세 개의 박공 사이의 공간에는 조각가이자 건축가인 오르카냐(Orcagna)1354년에서 1380년 사이에 만든 커다란 장미창문이 있다. 창문 위로는 12사도를 조각했다.  아울러 장미창 양쪽에는 구약에 등장하는 12명의 선지자를 쌍으로 조각했다벽감에 동상을 세우는 것은 프랑스풍의 고딕양식의 전형적인 멋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실로 압권이다.

  아래에  있는 세 개의 출입구에 서 있는 네 개의 홍예받이 위에는 4명의 복음서의 저자, 마태(Matthew), 누가(Luke), 마가(Mark), 요한(John)을 상징하는 천사, 황소, 사자, 그리고 독수리의 청동상을 세웠다.  그리고 중앙출입구 위에는 안드레아 피사노가 1347년에 만든 성모상을 세웠다.

  대성당의 파사드를 아름답게 장식한 것과는 달리 옆면은 흰색의 석회암과 청회색의 현무함을 번갈아 사용해 소박하게 단순화시켰다.

  대성당의 내부는 2개의 통로가 있는 십자가형으로 6개의 구획으로 나뉘게 된다. 아치를 받치는 기둥들은 석회암과 현무암을 교대로 쌓았다.  그리고 제단 정면의 애프스(apse)는  베네치아 무라노의 유리장인 지오반니(Giovanni)1328년에서 1334년에 걸쳐 제작한 스테인드 글라스를 중심으로 프레스코화가 그려져 있다.   한편 제단 위의 커다란 나무십자가가는 마이타니의 작품이다.

   성체 예배당(Cappella del Corporale)은 제단의 왼쪽에 자리하고 있다볼세나의 성체포를 보관하기 위해 1350년에서 1356년 사이에 만들었다. 예배당의 왼쪽 벽에는 성체의 역사를, 오른쪽 벽에는 피가 흘러내린 기적에 관한 이야기를 프레스코화로 그려 넣었다. 제단 중앙에는 성체를 담은 작은 상자가 있다.

   오르비에토 대성당의 예배당은 프라 안젤리코(Fra Angelico)와  베노조 고졸리(Benozzo Gozzoli)가 그린 천정화 심판의 그리스도(Christ in Judgment)’와 로카 시뇨렐리(Luca Signorelli)의 걸작 최후의 심판(Last Judgment)’이 특히 유명하다.

 

 

 

 

 

 

 

 

 

 

 

 

 

 

 

 

 

 

 

 

 

 

 

 

 

 

 

 

 

 

 

 

 

 

 

  세월이 켜켜히 쌓여있는 것처럼  돌을 쌓아 만든 벽들과 돌을 깔아 만든 골목길을 걷노라면 오디선가 은은한 오르비에토의 향기가 묻어 나오다.

  숲속 오솔길을 걷는 것과는 전혀 다른 어떤 새로운 감흥이 전신을 살포시 감싸 안는다.

  어디에서 이런 느낌을 경험할 수 있단 말인가.

  여행자의 마음도 한없이 포근해 진다.

  이 골목을 돌아나가면 거기엔 어떤 풍경이 펼쳐있을까?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니 여기까지 걸어 온 내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벌써 저만치 앞서서 골목을 돌아가고 있는 꼭 나를 닮은 모습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단테의 (신곡) 연옥편에는  여기 오르비에토에 살던 가문들의 이름이 거명된다.  그렇다면 단테도 이곳을 다녀갔다는 추론이 가능하다.

  나의 시선은 어느새 돌로 포장된 골목길의 바닦을 흩어서 단테의 발자욱을 찾고 있다.  나의 걸음 걸이는 벌써 단테를 닮아가고 있다.

  여기는 오르비에토이니까.............

  오르비에토의 골목길에선  단테의 체취가 느껴진다.

  오르비에토의 골목길에선  세월의 향기가  묻어 나온다.

 

 

 

 

 

 

 

 

 

 

 

 

 

 

 

 

 

 

 

 

 

 

 

 

 

 

 

  골목 어귀를 돌아가니 작지도 크지도 않은 광장이 나타난다시민광장(Piaza del Popollo)이다광장 한 켠에 중세풍의 위풍당당한 건물이 서 있는데 문이 잠겨있다.

  포폴로궁전은 폰첼로 오르시니(Poncello Orsini)가 수장이던 1315~1316년 사이에 완공됐다.  16세기 말에는 법학, 신학, 논리를 가르치는 대학이 들어섰다가 17세기 초에는 예수회가 설립한 대학으로 소속 이전되었다.

  오르비에토의 골목을 무작정 이리저리 걸어다니다 보면은  수시로 좁은 골목 위로 솟아있는 시계탑을 볼 수 있다모로의 탑(Torre del Moro)이라고 하는 47m 높이의 이 탑은 13세기 말 건립된 것으로 보인다. 고대에는 델라 테자 (Della Terza) 가문의 것이었다가 교황청의 소유로 넘어갔을 때는 교황의 탑이라 불리다가 다시 모로의 탑이라 개칭되면서  교황 레오10세가 오르비에토시에 양도했다.

모로의 탑은 타원형인 오르비에토 마을의 장축과 단축이 서로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였으며,  그 오르비에토를 대표하는 4개의 마을은  세란치아(Serancia), 코르시카(Corsica), 올모(Olmo)4개의 구역이다.

  탑은 일반에게 무료로 공개돼 있으며 올라가면 마을의 전경을 360도 파노라마로 볼 수 있다멀리 서쪽 바다에서 부터 동쪽으로는 아펜니노산맥까지 그리고 북쪽으로는 케토나(Cetona)산과 아미아타(Amiata)산을 볼 수 있다.  또한 이곳에 오르면  중세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르비에토 시가 어떻게 변모하고 확장되어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모로의 탑에서 다시 오르비에토 대성당으로 가는 두오모길(Via Duomo)을 따라가다 보면 왼쪽으로 작은 광장이 나온다. 공식적으로는 필리포 안토니오 구알테리오(Filippo Antonio Gualterio)라는 이름이 붙어있지만, 오르비에토 사람들은 간단하게 작은 적십자광장혹은 작은 성 요셉광장이라고 한다.

 

 

 

 

 

 

 

 

 

 

 

 

 

 

 

 

 

 

 

 

 

 

 

  오르비에토는 기원전 부터 외부로부터 적의 침입을 막기위해 까아지른 벼랑위에 건설된 요새도시이다.

  오르비에토 지하에는 3천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1,200여개의 인공동굴들이 마치 미로처럼 뻗어 있으며  이를 오르비에토 언더그라운드'라 부른다.   이 지하동굴은 지상의 시가지 면적보다도 오히려 넓다고 한다.   실타래 처럼 얽혀있는 지하동굴은 별도의 투어가이드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며, 붕괴 방지를 위한 점검은 물론 지금 현재 발굴이 진행 중이다.

  동굴안으로는 작고 네모난 구멍들이 줄줄이 파여 있는데, ‘콜룸바리오(columbario)’ 즉 비둘기 구멍이다. 통신용 전서구를 키웠겠지 싶었지만옛 사람들은 비상시에 대비해 동굴에서 식용 비둘기를 키웠다.  그 문화가  아직 남아있어서인지 이곳에선  비둘기 요리를 하는 식당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다.

  기원전 에트루리아인들이 주거용으로 파놓은 동굴은 이후 중세시대에는  올리브유 작업장, 마굿간, 창고, 물탱크 등 다양한 용도로 사용됐했다가 20세기 세계 2차대전 당시에는 주민들의 피신처로도 사용 되었다.  현재는 일부가 와인 저장고로 사용되고 있다.  이곳은 하루 두차례 가이드 투어로 방문할 수가 있다.

 

  그런가 하면  푸니클라에서 내리면 나타나는 카헨 광장(Fiazza Cahen)에서 우측으로 조금만 올라가면 매우  독특한 유적을 접하게 된다.

  16세기 피렌체 메디치 가문 출신의 클레멘스 7세 교황이 지시해서  팠다는 깊이 62m성 파트리치오의 우물(Pozzo di San Patrizio)’이 바로 그것이다.  5세기 아일랜드의 가톨릭 성인 성 패트릭이 하나님께 기도하고 나서 오르비에토를 방문해  '마침내 이곳에서 땅 깊은 곳의 연옥을 보게 되었다.  오르비에토의 이 우물은 마치 연옥처럼 깊다' 하여  그때부터 이 우물에 성 패트릭의 이름이 별명처럼 따라 붙었다.

  적의 침입을 받고 장기간 고립되었을때 비상 식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만들어졌다.  지하 우물이라기 보담은  차라리 지하 감옥이 더 잘 어울리는 곳이다.

 

 

 

 

 

 

 

 

 

 

 

 

 

 

 

 

 

 

 

 

 

 

 

 

 내가 오르비에토를 이번에 여행하게 된 계기에는  도보여행가  권오경씨의 '파세자타의 도시.  오르비에토'라는 신문에 연재된 글을 읽어보고 나서  십년이 넘도록 습작 노트에 끼워놓고 이제나저제나를 끊임없이 되뇌이었던 때문이었다.  그분의 글을 옮겨 보면서  (오르비에토 여행)을 마치고자 한다.

 

 

  "오르비에토는 로마에서 북서쪽으로 한 시간반 정도 달려가면 나온다.  해발고도 200M의 바위산 위에 새둥지처럼 틀어 앉은 독특한 지형이다.

  전쟁이 잦았던 중세의 유럽에는 이러한 요새 같은 마을이 많았다.  오르비에토는 한국인들에게는 아직은 낯선 마을이다.

  오르비에토 역에 도착하면 딱 하나 고민거리가 있다.  어덯게 저 산 위에 있는 '창공의 마을'에 닿을 것인가.

  차를 타고 마을로 진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답은 하나다.  무조건 걸어야 한다.

  관광지로 널리 알려지면서 이곳을 통행하는 차량이 마구 증가하자 어느날 바위 벼랑의 지반에 균열이 발생하는 것을 목격한 주민들은   최소한의 챠량 통행만을 허락하고,  관광을 위한 차량 사용은 제한하기로 합의하기에 이르렀다.  그들은 디지털 시대의 속도전에서 한참 떨어져서 자연과 함께 더불어 공존하는 느릿느릿한 삶을 선택했다.  최초의 '슬로 시티'가 탄생한 것이다.

  이곳 사람들은 파세자타를 무척 중요하게 생각한다.  우리말로 하자면 저녁산책이다.  여기 사람들에게는  시간을 따로 내서 운동을 한다는 개념이 없다.  밥을 먹고 잠을 자는 것처럼 당연히 해야하는 생명활동의 하나로 여긴다.  사람들은 매일 저녁 식사를 하기 전후해서 시내 중심가를 향해 걷는다.  대부분이 마을 주민들이다.  에너지를 아끼고 밤의 정취를 더 만끽하자는 의미에서 불의 거의 밝히지 않으니,  석양을 바라보며 걷다보면 어느덧 캄캄한 길 위에서 대화를 하고있는 자신들을 발결하곤 하는 것이다.  그곳이 바로  오르비에토 이다."

 

 

 

 

 

 

 

 

 

 

 

 

 

 

 

 

 

 

 

 

 

 

 

 

 

 

 

 

 

 

 

 

 

 

 

 

 

 

 

 

 

 

 

 

 

 

 

 

 

 

 

     --- 오르비에토 여행을 마칩니다.  다음 이야기는  로마나 몰타에서 이어나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