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렌체 두오모 광장을 돌아서 뒷편으로 가면 광장의 동편에 해당하는 지역에 짙은 노랑색의 건물이 금방 눈에 들어온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 Opera Duomo)이 있다. 산 조반니 세레당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내외부에 설치되었던 미술품과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하여 한자리에 모아놓은 전시공간이자 대성당의 부속건물이다. 피렌체 두오모 통합 입장권을 구입하면 두오모의 쿠풀라와 조토의 종탑과 세례당과 오페라 박물관을 모두 입장해 둘러볼 수 있다.(대성당 내부는 무료 공개)
이 박물관 건물은 본래 세례당 증축을 위한 청동문 제작 콩쿠르를 비롯한 피렌체 대성당 건축을 위한 관리 사무소(Opera dell Duomo)로 처음 설치되었던 것을 대성당이 완공되고 나서부터는 기록 보관 보수 유지하는 사무실로 쓰였다. 현대에 이르러 외부에 설치된 미술품들이 대기오염등의 환경변화로 훼손이 심해지고 심지어 파손과 도난의 위험으로 노출되자 관리사무소를 박물관으로 전환하여 내부 외부의 대부분의 미술품들을 이곳으로 옮겨 전시하게 되었으며, 현재 박물관 밖에 설치되어 있는 대부분의 미술품은 모두 복제품이다.
대표적인 것이 대성당 정면의 파사드가 통째로 이곳으로 옮겨 전시중이며 현재 설치되어 있는 대성당의 파사드는 통째로 모조품이다. 아울러 대성당의 파사드는 아직도 미완성이 채로 서 있다.
여타의 유명한 미술관에 비한다면 다소 화려함이나 소장 미술품들의 규모면에서 다소 뒤떨어지는 감은 있겠으나, 한 장소에 국한되었던 미술품이 이정도라는 점과 그 가치에 대해서는 실로 어마어마하게 귀한 소장품을 간직하고 있는 박물관이라는 것을 둘러보면서 절감할 수 있을 것이다.
왜 르네상스가 피렌체에서 시작되었는지, 그리고 왜 피렌체 두오모가 르네상스의 상징이 되었는지를 두 눈과 마음가득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다.
르네상스의 미술은 기독교에 의해 억압되고 정형화된 중세 미술양식에서 조금씩 탈피해 가는 과정이라고 이해할 수 있다.
흔히 '이콘화' 또는 '고딕양식'으로 표현되는 기독교적 미술은 작가의 상상력과 자유로운 창작의욕을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조여왔고 엄격하게 규격화 시켰으며 성스러움의 미명하에 교회의 잣대로 빗대어 규제를 가혹하게 했다. 미술가는 그저 색을 칠하는 기술자에 지나지 않았다. 기독교가 정해놓은 규격 안에서 교회가 원하는 그림을 규제와 간섭을 받으며 타일을 구워내듯이 찍어내야만 했다. 이 시기의 미술을 빗대서 미켈란젤로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향해 '판떼기 위에 온갖 색칠로써 사람들의 눈을 현혹시키는 칠쟁이가 바로 화가'라고 비난을 퍼부었던 적이 있었다.
그러던 중세에 어느날인가 인문학에서부터 서서히 인간이 스스로를 자각하기 시작했다. 이는 곧 철학과 시인과 화가와 조각가를 거치면서 세상 모든곳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하여서는 마침내 기독교 자체에까지 새로운 시대적 사조를 만들어 내기 시작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인간들은 이 변화하는 새로운 사조에 스스로 '재생' '부활'의 의미를 담아 '르네상스'라 부르기 시작했다.
르네상스의 가장 핵심은 '인간 중심' 이다.
아울러 '재생' '부활'의 의미는 고대 그리이스와 헬레니즘 문화로의 '회귀'를 염원하는 마음을 담고 있다.
고대 그리이스와 헬레니즘 시대에는 신과 인간이 더불어 공생 공존하면서 살았다. 시와 철학과 인문학과 회화와 조각과 의학이 고루 발전하였으며, 이는 곧 인간의 내적 외적으로 풍요와 행복을 고루 안겨다 주었다.
하지만 기독교가 로마에 공인되어 정치와 권력에 편승하면서 시작된 '중세 암흑기 1천여년' 동안 교회는 인간이란 존재의 가치와 존엄성을 철저하게 파괴시켜 버렸다. 인간은 탄생 자체가 죄악이라늠 명목하에 교회는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을 말살시키고 끊임없이 복종과 강요에 의한 수탈을 일삼았다. 이제 인간에겐 자유의지가 사라졌다. 무조건 교회에 순응하고 복종해야만 했다. 교회는 인간의 생사여탈권뿐만이 아니라 사후의 운명에 대해서도 좌지우지하는 무자비한 권력과 폭정을 휘둘렀다.
그러한 암흑의 1천년이 끝나갈 즈음에 서서히 새로운 변화가 태동되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시작된 이 운동은 서서히 유럽 전역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했다.
수많은 미술가와 조각가 건축가 시인. 음악가. 인문학자, 그리고 새로운 사조의 기독교 종교학자들이 대거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 중에 회화분야에서는 '평면 위에 일루션(illusion.재현)을 완벽하게 재생산 해내는것을 최고의 목표로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인체의 완벽한 해부학적 지식이나, 수학적 계산에 근거한 원근법등이 도입되면서 새로운 회화의 전성기를 구가하게 되는 것이다.
도나텔로나 미켈란젤로로 대표되는 르네상스의 조각 분야에서도 그리이스나 헬레니즘의 영향이 이어져내려오다가 이 시기에 이르러 그리이스에 못지않은 확연한 자신들만의 새로운 사조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고대의 로마인들은 조각의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
로마는 지중해 인근에 퍼져있는 고대 그리이스의 모든 지역을 차지하였고 더 나아가서 소 아시아 지역과 유럽의 북쪽 지역으로 확장해 나갔고 마침내 도우버 해협을 건너 영국까지 진출하였다. 그들은 점령지마다 도시를 건설하고 신전과 원형경기장을 건설했다. 나름의 시와 회화와 철학과 인문학은 발전을 거듭했지만 조각은 퇴보했다. 왜냐하면 사방으로 지중해 인근에 차고 넘치는 것이 그리이스가 건설한 도시와 신전과 유적이며 유물이었다. 세상 어디에나 흔하게 그리이스의 조각상들이 놓여 있었다. 필요하면 그냥 가져다 쓰면 그만 이었다. 시간과 돈을 들여서 새로 조각을 만들 필요가 없었다. 그것도 어디 그리이스 조각들이 보통의 흔한 조각이었던가?
로마인들이 세운 도시와 신전과 그네들이 거주하는 호화로운 대저택의 공간마다 그리고 정원의 분수에 그리이스의 조각들을 가져다가 설치했다.
로마가 제국으로 형성되기 시작하면서 로마의 통치자들은 고대 그리이스의 통치자들에 버금가는 자신들만의 문화를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문화가 없는 제국은 언젠가 역사에서 그저 덧없이 사라진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이스 신화를 각색해 로마 신화를 만들었다.
로마의 역사를 체계화 있게 그리고 미화시켜서 차곡차곡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앞선 역사에서 교훈을 얻고 문명의 중요성을 더울 절실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곧 국가차원에서의 문명 수탈이 계획하에 시행되기 시작했다.
이집트 문명의 상징인 오벨리스크란 오벨리스크는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내에서 모조리 싹쓸이 하기 시작했다. 스핑크스도 가져왔다.
그리이스 문화로 대변되는 아름다운 조각상의 가치를 새삼 깨닫게 된 로마는 우수한 그리이스 조각품들을 수없이 많이 복제하기 시작했다. 그 복제품들을 새로 건설한 여러 도시의 학교에 보내서 새로운 후진 양성을 하기 시작했다. 모방에서 창조가 시작된다는 진리를 그들은 일찍 깨달았던 것이다.
로마의 대화재 이후 몰락한 네로황제의 정원에서 발굴된 '라오콘 상'이 대표적 그리이스 조각품의 하나 이다. 현재 이 조각상은 '바티칸 박물관'에도 있고, '우피치 미술관'에도 있다. 흔히 바티칸의 조각상이 진품이고, 우피치 미술관의 조각상이 로마시대의 복제품이라고 한다. 하지만 아닐 수 있다. 더하여 어쩌면 이 모두가 다 복제품일 수도 있는 것이다. '창을 든 아폴론 상'은 가장 많이 복제된 그리이스 조각상의 대표격으로 인정 받았다. 과연 어느것이 진품일까? 처음 복제가 이루어지고 나서 곧바로 진품은 부서졌고...... 복제가 다시 복제를 만들어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완벽에 가까운 복제를 그렇게 나무랄 일만도 아닐 듯 싶어진다.
이제 슬슬...... 박물관에 전시된 진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를 만나 보기로 하자. 캄비오가 처음 설계했던 두오모 파사드가 통째로 여기 실내에 들어 앉아 있다.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Museo dell' Opera Duomo).
기베르티의 제 2의 문과 제 3의 문이 모두 이곳에 진품이 보관되어 있다.
부르넬리스키의 세상을 경악시킨 신공법의 노하우가 여기에 고스란히 놓여있다.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 조각상은 여행자에게 예상치 못한 낯선 충격으로 다가올 것이 분명하다.
(세례자 요한 조각상)
--- 미켈란젤로作 (반디니의 피에타). 전체적 완성도를 놓고 미켈란젤로 작품이 아니다 논란에 한동안 시끄러웠던 작품.
--- 도나텔로作 (막달라 마리아). 가장 큰 관심과 화제의 목조 조각상.
--- 부르넬리스키의 돔 설계안과 함께 출품한 제작 모형.
--- 돔 안쪽에 바사리가 그린 천장화 (최후의 심판) 스케치를 모형 안에 그려 놓았다.
-- 부르넬리스키가 설계한 두오모의 랜턴 모형. 건축가가 바뀌고 15년에 걸쳐 워낙 많은 수정이 가해져서 부르넬리스키 작품이라 말하기 어렵다.
여행의 올바른 가치는 단순히 눈으로 보고 즐기고 쉬는것에만 있는것은 아니다.
그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일상에 뭍혀서 함께 체험하고 느껴보면서 자신만의 새로운 안목을 갖추는것 또한 참 여행의 묘미이자 가치중의 하나라 하겠다.
중요한 일들을 사소한것처럼 여기라는 말은 하지 못하겠다.
하지만, 적어도 피렌체에서라면 타임 스케줄을 내팽개치고 지도와 가이드 북을 잠시 휴지통에 넣어버려도 좋겠다고 감히 말씀드리고 싶다.
간편한 옷차림과 신발로 내 인내의 한계까지 걸을 마음의 준비를 우선 하고, 마음 깊은 곳에 꼭꼭 숨겨두었던 낯선것에 대한 약간의 두려움과 작은 떨림을 슬며시 꺼내서 내 작은 배낭에 담고서 그저 마음이 가는대로 터벅터벅 천천히 도심 골목의 이곳저곳을 살펴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이것저것 따지거나 체크하려 들지마라.
누구든지 사람을 만나면 환한 미소와 함께 가볍게 손을 흔들면서 이렇게 한마디만 하면 된다.
'차오.'
어디선가 푸치니 오페라의 부드러운 선율이 여행자를 반겨줄 것이다.
여기는 토스카나의 중심 피렌체다.
어둠이 짙게 내려앉은 피렌체의 골목길을 서성거리다보니 몸은 어느새 파김치가 되어갔고 갑자기 생리적인 현상이 적신호를 보내오고 말았다.
골목을 벗어나 번화가로 나가야 유료 화장실이라도 있을텐데......
그때, 작은 골목을 돌아서니 개나리 꽃잎처럼 샛노란 외벽의 색깔이 조명을 받아서 나무도 포근하고 아름답게 느껴지는 건물이 불쑥 나타났다. 그리고 많은 젊은이들이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타고 노란 건물을 드나들고 있다.
테라스 안쪽의 벤치에 정복을 입은 경비원이 드나드는 사람들과 무엇인가 이야기를 주고받는 것도 아랑곳 않고 다짜고짜 인파에 뭍혀 건물 안쪽으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한 젊은이를 붙잡고 사정을 이야기해서 화장실을 무사히 이용할 수 있었다.
나오면서 살펴보니 요 건물이 사뭇 궁금해진다. 무슨 대학건물이었다. 드나드는 젊은이는 강의를 듣기위해 찾아오는 대학생들이었다.
밖으로 나오면서 경비원과 마주쳤는데 나에게 아무런 제지도 가해오지 않는다.
아직은 내가 한참 젊어보이는 탓이었을까? ㅎㅎㅎ. 아니면 내 나이쯤이면 당연히 교수라고 생각해서였을까? ㅎㅎㅎ
다시 골목길로 나서기 전에 나는 그대로 복도에 놓여있는 벤치에 기대고 앉아서 좀 쉬었다 가기로 작정했다.
그러다가 옆자리에 앉은 학생에게 궁금증에 대해서 물어 보았다.
<Accademia del Disegno 1563>
1563년 미켈란젤로. 바사리. 첼리니. 브론지노 등 당대 최고의 피렌체 미술가들이 주축이 되어서 창설한 피렌체 최초의 공식 미술아카데미, 즉 미술 단과대학이었다. 코시모 메디치의 후원으로 여기 아카데미의 출신들은 여타지역의 화가들 보다 높은 지위와 특권을 부여 받았다.
이곳은 르네상스 회화의요람이었던 곳이다.
오백년 가까운 전통과 역사의 숨결이 느껴져 왔다.
오늘은 메디치와 만날 약속이 예정되어 있는 날이다.
이제 서서히 피렌체로의 업무출장이 마무리 되어가고 있는 시점인 것이다.
업무에 관한 서류들을 챙겨서 숙소를 나서려던 나는 그만 점원으로부터 제지를 당하고 말았다.
'손님. 웬만하시면 오늘은 외출을 자제하시는것이 좋을듯 십습니다. 지칫하면 크게 낭패를 당하시게 될것입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요? 도시에 무슨 사단이라도 났단 말씀입니까? 저는 오늘 베키오 팔라초에 약속이 잡혀있습니다.'
'그쪽이라면 더더욱.......... 온 도시에 비상 경계령이 내려져서 사방에서 검문검색과 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어제 저녁에 귀가할때도 아무 일이 없었건만, 밤새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살인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아니..... 아직 피해자가 살아있기는 한데 아주 중태라고 합니다.'
'살인 사건이야 간간히 벌어지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사건이기에 도시에 비상경계령까지 내린단 말씀입니까?'
'어제 저녁에 관공서 앞에서 어떤 사람을 불러세워놓고는 화승총으로 정면에서 그대로 쏘았다고 합니다.'
'우발적 살인이란 말씀입니까?'
'아니요. 복수였습니다. 얼마 전에 피해자에 의해 사망한 형의 복수를 저질렀다고 외치고는 도망쳤다고 합니다.'
'공개적인 복수였다면 사정이 복잡할 수 있겠군요. 굳이 도망칠거라면 그렇게 공개적으로 복수를 할 필요가 있었을까요? 암살을 하지요.'
'첼리니니까요. 다른 사람이라면 모르겠지만 첼리니라면 그럴만도 하지 않겠습니까?'
'벤베누토 첼리니(Benvennuto Cellini.1500~1571)란 말씀입니까?'
'네. 예술하는 금세공사 첼리니요. 다들 그를 광기에 서린 젊은이라고 부르더니만 기어코 또 사고를 치고 말았군요. 손님께서도 첼리니를 아십니까?'
'얼마 전쯤에 한번 만나서 인사를 나눈적이 있었습니다.'
'십년 전에도 살인을 저지르고는 씨에나를 거쳐서 로마로 도망을 친 일이 있었습니다. 하여 지금 씨에나 쪽으로 사람들이 몰려갔다고 합니다.'
점원은 당부에도 불구하고 나는 밖으로 나왔다.
알렉산드로 메디치와의 약속을 이런 이유로 등한시 할 수 없는것이 나의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비냐 누오바 거리를 지나 골목길을 가로질러 팔라초 베키오가지 가는 동안에 군인과 경찰에 의해서 세번이나 검문을 받았다. 그때마다 베네치아 상단의 신분증명서와 메디치 가문의 초대장을 보여주고 나서야 무사히 통과할 수가 있었다.
팔라초 베키오 입구에서 연통을 넣자 잠시 후에 회계 책임자가 나와서는 부득이한 사정으로 메디치와의 약속을 이틀 후로 미루어 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 전해주었다. 이틀 후에 다시 오겠다는 인사와 함께 나는 발길을 돌렸다. 이제는 숙소로 돌아가서 베네치아의 길드로 서신을 작성해서 보내는 일이 가장 시급하게 내게 남겨진 일이었다.
시뇨리아 광장을 가로질러 숙소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는 중이었다.
사방에서 요란한 발발굼 소리와 함께 여러대의 화려한 마차들이 쏟아지듯 몰려들고 있었다. 어디 그뿐인가? 팔라초 베키오 안쪽에서도 근위병과 피렌체 수비대 복장을 한 군인뜰이 쏟아져 나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시뇨리아 광장은 군대와 경찰에 의해서 겹겹이 에워싸인 형국이 벌어지고 있었다.
네마리의 말이 끄는 마차들의 앞 뒤로 호위하는 기병들의 무장한 갑옷과 창검이 햇쌀에 번뜩이고 있었다. 그중에서 가장 내 시야를 끄는것은 온통 검은색의 수수한 외형을 갖춘 마차 앞으로 휘날리는 씨에나의 휘장이었다. 피렌체의 가장 강력한 적국 씨에나의 누군가를 태운 마차가 지금 당당하게 휘장을 휘날리며 피렌체의 심장 시뇨리아 광장, 그것도 팔라초 베키오 앞에 당당하게 멈추어 선 것이다. 도대체 그 마차에는 누가 타고 있단 말인가?
다른 마차에도 모두 각기 다른 휘장이 휘날리고 있었다. 피사. 오르비에토. 산 지미냐노. 아레초. 몬테풀치아노. 피엔차. 토스카나 인근의 모든 도시국가들이 바로 지금 시뇨리아 광장에 몰려든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란 말인가?
설마하니 벤베누토 첼리니의 살인사건 하나로 이 야단법석을 떨수는 없는 일이 아니겠는가?
나의 눈을 더욱 크게 떠지게 한 일은 이어서 벌어진 광경이었다.
팔라초 베키오 안에서 계단을 타고 내려서는 화려한 복장을 갖춘 수려한 용모의 젊은이가 모습을 드러냈다. 알렉산드로 메디치였다. 시종과 호위무사에 둘러쌓여 마당에 내려선 그는 두 손을 비비며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는 모습이었다. 20세의 약관이지만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를 다스리는 최고 통치자였다. 그런 그가 지금 누군가를 직접 영접하기 위하여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차의 문이 열리고 제각각 다른 모양새의 마차에서 한 사람씩이 내려섰는데 모두가 토스카나 인근의 도시국가들의 대주교들이었다. 인근의 기독교 종교 지도자들이 모두 모여서 팔라초 베키오를 찾았고 알렉산드로 메디치와 인사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저만치 광장의 저편에서 또각또각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황금색으로 눈이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치장된 여덟마리의 말이 끄는 거대한 마차가 이곳을 향해 똑바로 달려오고 있었다. 오십명은 족히 되어보이는 번쩍이는 갑옷과 창검으로 무장된 호위군대가 마차의 앞뒤로나타났는데 복장으로 보아 스위스 용병들임이 분명했다. 그렇다면......... 아니나 다를까. 맨 앞의 기병이 들고 있는 바람에 나부끼는 화려한 휘장은 바로 교황청의 휘장이었다.
마부석의 시종이 황급히 내려서서 마차의 문을 열었다. 호위 기병 대장의 부축을 받으며 자줏빛 단소한 복장을 한 노인이 마차에서 내렸다. 알렉산드로 메디치와 인근의 대주교들이 차레로 무릎을 꿇고 손에 입을 맞추며 방문에 대한 감사 인사들 드렸다.
로마 교황청에서 특사로 에두아르도 마르티네스(가명) 추기경이 피렌체를 갑작스레 방문한 것이다.
지난밤 어둠이 내린 후에 느닷없이 교황의 특사가 피렌체 성문을 통과했다는 급보가 메디치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교황의 특사는 그길로 피렌체 두오모로 갔고, 다음날 오전에 교황의 뜻을 메디치에게 전할 생각이라는 말을 전해왔던 것이다. 알렉산드레 메디치는 자신 주변의 모든 측근들을 볼러서 특사의 방문에 대해 밤새 심각하게 다각도로 분석하고 논의 했다. 교황 특사의 방문 소식은 곧바로 인근의 주변 도시국가로 전해졌고, 이를 정치적 문제라기 보담은 종교적 문제로 판단한 여러 도시들이 대주교들을 파견해 교황특사를 알현하도록 했던 것이다. 밤을 새워 대주교들이 피렌체로 몰려 들었다. 씨에나와 워낙 갈등의 골이 깊은 상태였으나 교황 특사 알현을 하려는 씨에나 대주교를 메디치나 피렌체로서도 막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벤베누토 첼리니의 사건이 벌어졌다. 강도나 상해사건은 흔한 일이었겠으나 교황의 특사가 당도해 있는 지금의 상황은 다른때와는 너무도 달랐다. 혹시나 교황 특사와 연계되어서 어떤 불상사라도 생기게된다면 그 여파는 메디치나 피렌체로서도 감히 상상할 수 조차도 없었다.
결국 메디치는 피렌체 인근에 삼엄한 비상 계엄령을 선포했던 것이다.
메디치의 안내로 교황특사와 대주교들이 팔라초 베키오 안으로 사라졌다.
특사와 대주교들이 타고 온 마차는 저만치씩 떨어져서 자리를 잡아가고 각 지역의 무장 군인들이 마차를 지키고 서있다. 그리고 팔라초 베키오와 광장 주변은 경찰과 피렌체 군대가 철통 같이 지키고 서있었다. 무건운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정말 영문을 알 길이 없었다.
밤새 사단이 난 것은 첼리니 사건이 전부였다.
느닷없이 교황의 특사가 나타났고 인근의 대주교들이 모두 모여들었다. 그렇다면 이는 전혀 상관관계가 없는 별개의 사건이라는 말이 된다. 왜냐면 교황의 특사가 로마에서 여기까지 도착하려면 무엇인가 중대한 사안에 대해 적어도 한달 전에는 이미 계획이 이루어져야만 했다.
첼리니의 경우는 닷새 전에 우연히 만나서 인사를 나누었을 때 까지도 아무일이 없었다. 다만........ 혹시 그것 때문이란 말인가? 아무리 그렇기로 설마?
어제 첼리니가 화승총으로 쏜 사람이 교황청 소속의 근위대원 이라면............?
오늘 교황 특사의 갑작스런 방문에 비추어....... 그 근위대원이 며칠 전에 먼저 피렌체에 와 있었다면.......... 이는....... 예정된 어떤?
-- 벤베누토 첼리니(Benvennuto Cellini.1500~1571) 초상.
나는 천성적으로 첼리니 같은 사람을 아주 싫어한다.
일에서나 사석에서나 그 같은 성품의 소유자를 극도로 기피하는 성향을 가졌다. 사람이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 좋고 싫고가 분명해서 좋을 것도 없고 싫어할 특별한 이유도 없겠지만 그는 도대체 속을 알길이 없는 아주 독특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피렌체에서 카라바조의 작품을 처음 대하고 그에대한 여러 이야기들을 들었을 때 나는 참으로 안타까웠다. 그의 뛰어난 예술가적 자질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이런 안타까움은 내가 혹시나 그와 동시대를 살아가면서 서로 교루할 수 있었다면 어쩌면 그를 조금은 더 보편타당한 선에서의 일반적인 삶을 좀 더 지속할 수 있게 만들어주지 않았을까 하는 진한 아쉬움을 갖게끔 만들기까지 했다.
그런 카라바조에 대한 진한 아쉬움 속에서 우연히 벤베누토 첼리니를 알게되었던 것이다.
번듯한 표정으로 남들을 향해 늘 웃고있지만 그의 눈은 촛점을 늘 달리하고 있고 그의 속마음을 전혀 가늠하기가 어려운, 함께 하고있는 시간이 길면 길수록 어딘가 점점 공허해지고 뜻모를 찜찜함이 여운처럼 생겨나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이미 나이에 비해서 그의 뒤에 따라붙는 수식어가 차고도 넘치는 해괴한 이력의 소유자였다. 다만 그가 이세상 그 누구도 따라올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의 놀라운 실력을 보유한 금세공업자이자 조각가라는 사실은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내 가치관으로 치자면, 조물주나 운명이라 할지라고 그의 대단히 뛰어난 몇몇 작품을 위해서 그의 개망나니 같은 인생이 여러 사람들에게 치욕과 아품과 상처를 남기는 것을 보면 제발 어서빨리 그를 이 세상에서 완전 격리시키거나 데려가야 하는 것이 제대로된 운명이요 조물주의 할 일이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첼리니는 명사수이자 똑소리나는 군인이었으며, 뛰어난 음악가이자 금세공사이면서 조각가, 거기에다 어마어마한 도둑이었으며 두번이나 사람을 죽인 살인자였다. 동성애자이기도 했으면서 미성년자 강간을 여러번 저지르기도 했다. 대단한 호색가였다. 지구상의 모든 예술가 중에서 지구상의 인간이 저지르면 안되는 죄목에 가장 다양하게 관여한 사람이라 평해도 무방하지 싶다. 첫번째 살인을 저지르고 씨에나를 거쳐서 로마도 도망쳤을 때, 남달리 풀룻 연주에 소질을 보인 그는 로마 교황청 소속의 음악인으로 생활하면서 교황 클레멘스 7세의 사랑을 독차지 했는데, 어이없게도 교황의 보물을 훔쳐 달아나기까지 했다가 체포되고 탈옥하기까지 했다. 그래도 그의 재주를 너무도 아낀 교황의 선처로 사면을 받고 고향 피렌체로 29살에 돌아왔다.
그리고 나흘 전.
그와 성품이 크게 다르지않아 보이는 하나뿐인 형인 체치노 첼리니(Cecchino)가 늦은 시각 술집에서 낯선 이방인과 싸움을 벌였던 것이다.
술에 취해 난동수준이던 체치니를 향해 이방인 사내가 자제해 줄것을 충고했다. 그러자 화가 난 체치니가 다짜고짜 화승총을 꺼내 그 사내를 향해 발사를 했던 것이다. 땅바닥에 나뒹굴기는 했지만 체치니가 쏜 총은 사내의 허벅지를 스쳐 지나가 치명적인 상처를 내지는 못했다. 거친 숨소리와 함께 길길히 날뛰던 체치니는 이내 화승총을 재장전해서 다시 낯선 이방인을 향해 겨누기 시작했다. 그러자 넘어져 있던 사내가 자기방어의 본능으로 체치니를 향해 화승총을 발사했고, 총에맞은 체치니는 그자리에서 절명했다. 사내는 정당방위로 곧 풀려났다. 불과 나흘전의 일이었다.
그런데 어제, 벤베누토 첼리니가 귀가하는 그 사내를 찾아가 이름을 불러 돌아세워놓고 가슴을 향해 총을 쏘아 쓰러트리고는 그길로 줄행랑을 쳤던 것이다.
쓰러진 사내는 로마 교황청 소속의 근위병이었다.
그는 일주일 전에 노년의 신부 한분을 모시고 피렌체에 들어왔다. 모종의 임무를 띤 출장중인 군인이었던 것이다. 그것도 로마 교황청 소속이었다.
'피안재님을 만나고 싶어하는 분이 계십니다. 모셔오라고 하셨습니다. 저를 따르시지요?'
시뇨리아 광장을 가로질러 벗어나려는 찰라에 누군가가 내 옷소매를 잡아 끌었다.
돌아다보니 어제 두오모의 쿠풀라까지 홀바인을 찾아왔던 그 꼬마 수도승이었다. 말을 전한 수도승은 벌써 저만치 광장 안쪽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에라스무스와 홀바인이 어제 떠난 마당에 여기 피렌체에서 나를 찾을 사람이 어디있단 말인가?
나는 서둘러 꼬마 수도승의 뒤를 따랐다.
꼬마 수도승이 향한 곳은 놀랍게도 씨에나의 휘장이 걸려있는 씨에나 두오모 대주교가 타고온 마차가 있는 곳이었다. 마차를 호위하고 있는 씨에나의 무장기병중 그 누구도 꼬마수도승을 제지하지 않았다. 그리고 나를 가로막지도 않았다. 그들은 내가 마차에 다가갈 수 있게 길을 터주었다. 마차 앞까지 나를 인도한 꼬마 수도승은 이내 다시 왔던 길을 되돌아 어디론지 사라져 갔다.
이게 대체 어찌된 영문이란 말인가?
주교도 팔라초 베키오로 특사를 따라 들어간 마당에 이 텅 빈 마차에서 나를 보자고 한 사람은 도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때였다.
안에서 마차의 문이 열렸다.
-- 씸플한 씨에나 문장.
마차의 문이 열리고 고개를 빼끔 내민 사람은 놀랍게도 한스 홀바인이었다.
'홀바인. 자네 어제 떠난것이 아니었는가?'
'사정이 있어서 아직까지 떠니지 못했네. 스승님도 여기에 계시다네. 어서 오르시게. 내가 우연히 지나가는 자네를 발견햇지 무언가. 어서 오르시게. 시간이 별로 없네. 대주교께서 나오시면 곧바로 떠날걸세. 어서.'
마차 안에 홀바인 옆에 앉아있는 사람은 분명 에라스무스 선생이었다. 나는 두건을 벗고 최대한 정중하게 예를 갖추어 인사를 올렸다.
'자네가 그 동방에서 왔다는 이교도로군. 홀바인에게서 이야기는 들었네. 아주 이상하게 생겨먹은 이교도가 하나 있다고 말일세.'
'선생님에 대해서는 오래전부터 들었습니다. 한번 꼭 만나뵙고 싶었습니다. 뵙게되어 영광입니다.'
'이교도끼리 만나면 툭하면 죽기 살기로 싸워왔던 마당에 영광은 무슨 영광이란 말씀인가? 더해서 이젠 같은 기독교도 끼리도 죽기 살기로 싸우는 세상이 아니겠는가? 그런 마당에 이교도인 자네가 나나 주변의 정세에 대해서 놀라운 식견을 가졌다니 나로서도 매우 궁금하였기에 만나고자 한것이네. 어때? 소위 너그럽고 인자한척 하는 인문학자인 내가 말끝마다 이교도, 이교도 하니까 아니꼽지 않은가? 괜한 기대를 가졌던 것을 후회하고 있는것은 아닌가?'
'이미 오래전부터 선생님의 인품을 들었었고 존경하였기에 지금의 말씀은 부러 그러시는 줄로 알고있습니다. 또한 이교도 이교도 하시는 말씀은 일전에 선생님께서 퀸투스 아루렐리우스 시마쿠스의 말씀을 인용해 연설을 하신것으로 들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이교도란 단어에 대해서 어떤 생각을 가지고 계신지를 이미 잘 알고 있기에 그저 무덤덤하게 받아들일 뿐입니다. 개념치 마십시요.'
'자네가 퀸투스가 한 명문을 알고 있단 말인가?'
'왜 우리 이교도와 기독교도들은 평화롭고 조화롭게 함께 살 수 없다는 말인가? 우리는 같은 별을 바라보고, 같은 행성 위에서 인생의 길을 함께 걸어가는 여행자이며 모두에게 공평한 같은 하늘아래 살고 있는 것이다. 각 개인들이 궁극적인 진리를 찾아가기 위해서 함께 걸어갈 수 있으면 좋은것이지 어찌하여 어떤 특정한 길을 걸어가는 것만이 그토록 중요하단 말인가? 어떻게 그것을 타인에게 강요할 수 있단 말인가? 올바른 해답에 이르는 길이 오직 하나이어야만 한다고 주장하기에는 존재의 수수께끼가 너무나 크고 많이 남아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억압받는 피지배자의 입장에서는 늘 지배자에게 같은 의미로 항의할 수 있는것이 아니겠는가?'
'아닙니다. 퀸투스는 당시 지배자인 로마인의 입장에서 피지배자 신분의 기독교인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의미로 관용의 정신을 상기시키려 남긴 말입니다.'
'뜻밖의 젊은 사람을 만났구만.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세상에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완벽하게 풀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너무 빈번히 나타난단 말일세. 그것이 인류역사의 불행이자 비극이지.'
'유대인에게 기독교인(카톨릭)은 모두 이교도였습니다. 그들은 그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했고 그 결과로 로마제국이라는 기득권을 가진 반열에 올라섰습니다. 그런데 지금에 또다시 그 존재의 수수께기를 푼 사람들이 프로테스탄트(개신교)라고 등장했고, 카톨릭은 그들을 이교도라고 단죄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선생님께서는 존재의 수수께끼를 푸는 일이 여기서 끝날것이 아니라고, 루터 칼빙 목사님의 입에서 또 이교도라고 지칭받을 새롭게 존재의 수수께끼를 풀었다고 등장하는 사람이나 무리가 끊임없이 계속적으로 생겨날 것을 암시하는 말씀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놀라운 일이로군. 마치 자네가 아주 오래전부터 내 속을 훤히 들여다 보고 있었던 것으로 느껴지기 시작하였으니.......... 좀 일찍 만났더라면 좋았을것을....... 자네가 모신다는 상제(象帝)에 대해서도 더 이야기를 나누고 싶네만............'
'종교적인 전쟁이나 침탈을 걱정하시는 것입니까? 그런 미래 예측이 두려우신 것입니까?'
'루터가 날보고 겁쟁이라고 한다더니만 자네도 그런 의미인가?'
'전혀 다른 의미입니다. 이백년의 십자군 전쟁에서 보았듯이 존재의 수수께기를 사이에 두고 이교도 간에 종교적 신념의 다툼은 그 어떤 인간이 가진 분쟁보다도 치열하고 참혹한 결과를 낳게합니다. 앞섰던 역사에서 보았듯이 그 결과는 불보듯 뻔한 것입니다. 그러기에 선생님께서는 그 반목과 대결에 앞서서 인간의 이성과 지헤를 모아서 선택할 수 있는 방법론을 모색해보고 최선이 안되면 차선책을 더 모색해보자는 견해이시고, 루터 목사님의 결론은 서로간에 더 이상 대화나 해결의 모색이 여의치 않으면 언제든 전쟁이라도 불사해야 한다는 주장이 아니십니까? 승리자는 곧 정의가 되고 승리자가 모든것을 독차지하게 되는 것이지요. 패배는 정의롭지 못하고 이교도적이며 야만적이 되는 것이지요. 소멸되어야만 하는 존재로 전락하겠지요. 그렇다면 인간은 희망을 잃게되는 것이지요. 인류는 영원히 끊임없는 종교적 소모전만이 계속 반복될 것입니다.'
'아쉽네. 참으로 시간이 아쉽구만. 언제고 자네를 꼭 한번 다시 만났으면 좋겠네.'
'바젤로 돌아가신다 들었습니다. 계속 그곳에 머무신다면 제가 시간을 만들어서 조만간 꼭 다시 찾아 뵙겠습니다.'
'내 나이로 보아 쉽게 앞날을 약속할 처지가 못되니 더욱 안타까운것이지........ 혹시....... 베네치아로 돌아가는 길에 씨에나에 들려갈 수는 없겠는가?'
'지금 씨에나로 가시는 길이십니까? 메디치와의 약속이 미루어져서 쉽게 약속을 드리지는 못하겠습니다.'
'유럽 여행에서 내가 로마를 거쳐오면서 여러 대주교들을 만난끝에 교황 성하께 마키아벨리 구명운동을 내가 벌였네. 여러 지식인들의 연판장을 만들어서 추기경을 통해 교황께 올렸지. 그리고 피렌체와 주변 도시들의 정황도 수집하고 파악을 했지. 그러고 나서 교황 성하를 직접 뵈었네. 그래서 교황께서 특사를 파견하여 마키아벨리의 사면 복권을 요청하는 친필서명이 든 공문을 메디치 앞으로 보내시기로 한 것이네. 일주일 전에 교황청의 대주교 한분이 은밀히 피렌체로 들어 오셨네. 특사 도착을 앞두고 여러가지 사전 준비를 했네. 메디치가 받아들일 경우와 받아들이지 않을 경우를 대비해서 말일세. 특사가 오늘 오전에 도착하기로 하여서 나는 서둘러 하루 전인 어제 저녁에 피렌체를 벗어나기로 했던 것이다. 어떻게 정보가 새어나가 메디치가 사전에 내막을 알아차리게 되면, 그 배후에 내가 일을 모의했다고 잡아들이거나 다른 여러사람이 불려다닐 수 있기에 미리 피해서 미연에 사고를 방지하기 위함이었지. 어디까지나 이번일은 교황청과 교회의 자발적인 석방운동으로 비춰지기를 바랬기 때문이지. 그런데 어제 야음을 틈타 피렌체를 벗어나려고 한 시도가 그만....... 첼리니라는 망나니가 대주교를 로마에서 여기가지 모셔온 호위무사를 총으로 쏘는 사태가 발생하면서 삽시간에 계엄령이 선포되고 도시의 출입이 통제되면서 떠나질 못하게 되었네. 씨에나 대주교와는 처음부터 이번일을 상의하였던 고로 새벽에 그가 타고 온 이 마차에 몰래 타고 있었던 것일세. 이제 특사와 메디치의 만남이 끝나고 나오면 곧바로 대주교와 함께 마차를 타고 씨에나로 향할 것이네. 지금의 상황에 대주교의 마차를 함부로 검문할 수는 없을 것이네. 교황의 특사가 저기 나오고 계시는군. 우린 이제 떠나야만 하네. 피안재군 만나서 반가웠네. 인연이 되면 다시 만나세.'
아쉽지만 이대로 헤어질 수 밖에 없었다.
마차에서 내려 선 나는 저멀리 교황 특사의 마차가 떠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씨에나 대주교가 마차로 다가오고 있는 것을 보고 있었다.
'선생님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마키아벨리님의 (군주론)을 읽었습니다. 그리고 두 분이 친하지는 않았지만 같은 정부 아래서 오랫동안 한솥밥을 나누어 드신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마키아벨리님이 생각하시는 정치와 권력에서는 지롤라모 사브나롤라 수도사의 실천적 종교관이 좀 더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적이 있었습니다. 지극히 단편적인 작은 부분에 관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사브나롤라 또한 자네가 좀 전에 이야기했던 존재의 수수께기를 완벽하게 풀어냈다고 생각한 사람이었지. 아니 그렇겠는가?'
'마키아벨리 선생님께서는 지롤라모 사브나롤라에 대해서 어떻게 평가하셨습니까? 아울러 선생님도 동의하시는 평가셨습니까?'
'우리는 똑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더군. 그게 궁금한가?'
'네. 몹시 궁금합니다.'
'그럼 그 대답은 마키아벨리에게 듣도록 하게.'
'저 또한 길드에 속한 사람으로 앞으로 일을 약속할 수 없는 처지라 마키아벨리 선생님을 뵐 기약을 할 수가 없습니다.'
'자네가 혹시 씨에나엘 들러서 갈 수 있다면 우린 참으로 많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을 것이야. 잠시 귀한 만남을 가졌던 것을 기쁘게 생각하면서 내가 그 일에 대해서 대답을 마키아벨리 대신 해줌세.'
'고맙습니다.'
'마키아벨리가 나에게 이렇게 말하더군. 지롤라모 사브나롤라는 망상에 사로잡힌 광대라고 말일세. 잘있게.'
---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 전경.
산타 마리아 노렙라 약국(Officina di Santa Maria Novella)은 가죽제품과 더불어 피렌체를 대표하는 또 하나의 명물이다.
중세때부터 피렌체의 도미니크회 수도사들은 정원에 온갖 약초를 재배하면서 약제 신부를 따로 두면서 의약품을 개발해 수도사들의 건강을 스스로 살폈다. 피렌체 주변의 시골 언덕에서 재배되는 약초들만을 사용하여 자연에서 얻을 수 있는 천연약제의 성분을 연구하였는데 이 약제들의 효능이 점점 널리 일반 대중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하면서 마침내 1221년 산타 마리아 노벨라 약국의 문을 열었다. 지금의 약국은 400년 전에 설립된 그 자리에 그대로 있다.
주로 향수와 비누, 에센스, 방향제, 바디용품과 화장품, 그리고 꿀, 티, 허브, 시럽을 판매한다. 한국어로 된 안내 팜플렛도 비치되어 있다.
로마에도 지점이 있고 국내에도 인터넷 매장을 이용해 젊은 여성들에게 매우 인기있는것으로 들었다.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Hospital of Santa Maria Nuova)은 단테가 그토록 사랑했던 여인인 베아트리체의 아버지가 1288년 설립한 피렌체 최초의 병원이면서 중세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아주 유서 깊은 르네상스 시대의 병원이다.
하지만 이 병원이 이토록 유명세를 타게된 이면에는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있다.
밀라노 대공의 초청으로 18년간을 밀라노에 머물렀던 다빈치는 나이 48세에 고향 피렌체로 다시 돌아왔다., 이미 르네상슬르 대표하는 화가로 명망이 넘쳐났던 다빈치에게 사방에서 작품 제의가 쇄도했다.
하지만 다빈치가 돌아온 피렌체는 상당히 뒤숭숭한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자치공화정부와 메디치 가문간의 끊임없는 분쟁과 다툼이 도시 전체의 분위기를 절망의 나락으로 몰아넣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의 다빈치는 작품 제작 의뢰는 쇄도했으나 정서적인 문제로 미술활동 보다는 과락적인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시기였다. 특히 이 시기에 다빈치는 인체 탐구에 심취하게 된다.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의 해부학자인 마르칸토니오 델라 토레와 각별한 친분을 쌓으면서 인턴으로 해부학실을 드나들면서 인체 해부와 생리학적 연구에 실험정신을 가지고 열중했던 때문이다. 이곳에서 다빈치는 이니체 해부를 통한 실증적 연구자료를 스케치로 만들어 방대한 량의 자료를 남겼다.
하지만 이러한 다빈치의 인체 연구는 곧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된다.
로마의 교황청으로 부터 심각한 경고장을 받은 것이다. 이는 미켈란젤로에게도 해당되는 경고였다.
신의 피조물인 인간의 신체는 인간 마음대로 함부로 해부하고 연구의 대상으로 삼을 수 없는 존재였던 것이다. 미켈란젤로와 다빈치는 실제로 인체를 해부여 인체의 신비를 탐구한 연구자들이었다.
이 경고를 받은 후에 낙심한 다빈치는 또다시 훌쩍 밀라노로 떠나게 된다.
제작중이던 '앙기리아 전투' 등 손을 댔던 모든 작품들을 내팽개치고 말이다.
그런 사연들로 하여 이 작은 병원인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은 오늘도 여행자들로부터 크게 각광을 받고 있다.
그리고 여기 산타 마리아 누오바 병원을 나와서 골목을 지나면서 세르비 거리와 알피니 거리가 만나는 교차점에 '산 마르코 미술관'과 마주보고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이 모습을 드러낸다. 산 마르코 미술관(Museo San Marco)에는 중세 도미니크회 소속 프라 안젤리코 수도사의 최고 걸작 프레스코화 (수태고지)가 안뜰과 맞닿아 있능 회랑의 계단 위 정면에 놓여있다.
미술관을 지나 광장에 들어서서 여행자들에게 '산티시마 안눈치아타 광장' 이라고 하면 잘 모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고고학 박물관' 이라고 하면 상당수는 알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아예 '부르넬리스키의 고아원' 하면 아마도 므르는 여행자가 거의 없을 정도로 피렌체 여행의 필수 코스가 되는 장소이다.
--- 산 마르코 미술관 전경.
--- 프라 안젤리코作 (수태고지)
--- 기를 란다요作 (최후의 만찬)
--- 프라 안젤리코作 (성모와 성인들)
코시모 메디치의 요청에 의해서 필리포 부르넬리스키가 1445년에 완공한 유럽 최초의 고아원(Spedale degli Innocenti)은 피렌체가 내세우는 또하나의 자랑거리이다. 9개의 아치로 구성된 건물의 정면에는 배네옷에 감싸인 아기를 묘사한 10점의 부조가 에다용(원형의 틀) 안에 새겨져 있다.
이 건물은 건축에 대한 부르넬리스키만의 탁월한 감각과 특징을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 건물의 포티코(현관)는 피렌체 건축사에 새로운 의미를 부여해 주었으며, 그 이전에 지어진 중세의 모든 건축물들과는 확연하게 대조를 나타내 준다. 부분적인 형태상으로는 아직 바실리카 양식에서 진보한 로마네스크와 후기 고딕양식의 특징이 다소 배어있기는 하지만, 당시의 시대상에서 보자면 가히 혁명적인 건축물이라 하겠다.
여기 피렌체의 (고아원)에 대해서는 한참 전에 다녀온 나의 첫 피렌체 여행기에서 아주 소상하게 다룬적이 있었기에 이번 여행기에서는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해야겠다.(자세한 고아원의 이야기가 궁금하시면 한참 전의 피렌체 여행기를 참조해 주시길)
대신....... (코시모 메디치)와 (코시모 메디치 1세)에 관해서 부연 설명을 잠시 할 필요성을 느끼게 되어 잠깐 설명을 하고자 한다.
내가 지금 이 여행기를 이끌어 가는 시점은 대략 1530년 전후의 시기를 택했다.
이 시기는 부패한 피렌체 공화국 정부가 밀려나고, 쫓겨났던 메디치 가문이 복귀하여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역을 지배하고 통치하던 시기였다.
코시모 메디치가 죽은지 약 70년 가까이 흐른 시기였다.
이 시기에 '코시모 메디치 1세'는 청소년이기는 했으나 그는 피렌체와 전혀 상관이 없는 먼 타지에서 가난에 찌든 삶을 살고 있었다. 자신의 존재가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과 어떤 상관이 있는지도 전혀 모르는 힘든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그는 앞으로도 7~8년이 더 지나야 비로소 처음 피렌체에 들어오게된다.
이때까지 등장하는 '메디치 가문을 부유한 최고 은행가 집안으로 급성장 시키고' '권력까지 차지하여 피렌체를 통치하고' '도나텔로를 비롯한 수많은 미술가를 후원하고' 하는 등의 수많은 일화에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원조 (코시모 메디치) 이다.
그런데 피렌체를 여행하거나 책자를 읽거나 가이드 북을 보거나 여러 여행기들을 접하다 보면 이미 지나간 이 당시의 이야기에 툭하면 '코시모 메디치 1세'가 등장하곤 한다. 이는 크게 잘못된 것이다. '코시모 메디치'와 '코시모 메디치 1세'는 분명하게 다른 사람이다.
어디서 이런 오해가 생겨났을까?
나는 '나폴레옹'을 예로 들어서 이를 부연 설명해 보고자 한다.
코르시카에서 태어나 프랑스 황제에 오르고 워털루 전투에서 패하면서 엘바섬으로 귀향을 갔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역사연대표에 '나폴레옹 1세'로 기록되고 불려지게 된다. '나폴레옹'이 그 이름을 처음 사용하였기에 후대에 똑 같은 이름을 쓰는 후세들과 구분하기 위하여 '나폴레옹 1세'라 이름 붙여서 구분을 했던 것이다. 대부분의 교황이나 왕이나 황제나 유명인들이 이런 예에 따라서 '본인이 1세" 후손이 순서대로 '2세' '3세'로 내려가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르네상스 시대의 '코시모 메디치'와 '코시모 메디치 1세'만은 동일 인물이 아니다.
'코시모 메디치'와 '코시모 메디치 1세'는 일면식도 없는 아주아주 먼 친척 정도라 할 수 있겠다. 아주 먼 친척으로 증조부나 고조부 정도 되는 차이가 있다.
--- 코시모 메디치 초상화와 조각상<퍼옮>
“그는 사려가 깊고 중후하며 예의가 바르고 덕망이 넘쳤다. 고통과 유배와 신변위협을 겪으면서도 관대한 성품으로 모든 정적들을 물리쳤고 마침내 사람들의 인기를 한몸에 받았다. 부자이면서도 생활 모습은 검소하고 태도는 소탈했다. 당대에 그처럼 정치에 통달한 이는 드물었으니, 그는 변화무쌍하고 복잡한 피렌체를 실질적으로 지배할 수 있었다.” - 코시모 메디치에 대한 마키아벨리의 평가.
코시모 메디치는 막대한 부를 배경으로 피렌체의 권력까지 장악했다. 종종 치러진 투표에서도 그가 가진 부가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했음은 물론이다. 정치 분야에서 그는 매우 영리했다. 공식적으로는 관직을 자주 맡지 않음으로써 정치적 야심이 크지 않은 인물이라는 이미지를 연출했던 것이다. 그러나 피렌체의 중요한 모든 결정은 코시모가 막후의 실권자로서 좌지우지했다.
'코시모의 저택 안에서 전쟁과 평화가 결정되고, 누가 공직을 맡을 것인지 선택된다. 그는 공식적인 칭호만 제외하면 사실상 제왕이다.' 당대 사람들은 코시모를 이렇게 ‘무관의 제왕’으로 여겼다.
그는 메디치 가문을 처음 열었던 사람인 (조반니 메디치)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코시모 메디치는 시와 그림과 음악을 좋아하는 다분히 내성적이고 차분한 사람이었다. 그는 지극히 검소하고 소박한 삶을 원했다. 파리에서 정말로 사랑하는 여인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랑은 끝내 이루어 지지 못했다. 아버지가 나서서 그 여인을 돈으로 매수해 쫓아버렸던 것이다. 코시모는 자신이 원치않는 새로운 인생을 시작해야만 했다. 이유는 오로지 단 하나....... 장남이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조반니 메디치가 꿈꾸는 유럽 최고의 은행가 가문을 이루기 위한 후계자는 당연히 장남으로 이어져야만 후대에 문제가 생기지 않는다는 아버지가 만든 원칙 때문이었다.
아버지가 죽고 난 후에 메디치 가문을 떠맡은 코시모에세 당시의 정치와 권력과 교황청과 시민세력들 같에 수많은 다툼과 분쟁과 암투와 살인까지 뻘어지는 것을 뼈저리게 체험한 코시모 메디치는 막대한 자금은 이용해서 권력을 찬탈하고, 그 정치 권력을 이용해서 신분 상승과 보다 더 어마어마한 부와 권력에로 접근할 수 있는 길을 깨닫고 맹열하게 그 길을 향해 나아간다.
정치적 음모에 죽을 고비도 넘기고 권력을 차지하기 위해서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잔인한 면모까지 갖추게 된다. 하지만 종국에 그는 자신이 원했던 모든것을 이루어 낸다. 메디치 가문은 그에 의해서 유럽 최고의 은행가 가문(교황을 2명 배출)에다가 피렌체의 확고한 최고 통치자의 자리를 세습까지 하게 만들었다.
예술과 학문 후원 활동을 통해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철학적, 사상적 기풍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건축가 미켈란젤로 바르톨롬메오, 필리포 브루넬레스키, 조각가 로렌초 기베르티, 도나텔로, 화가 안드레아 델 카스타뇨, 프라 안젤리코, 프라 필리포 리피, 베노초 고촐리 등등 코시모 메디치는 이렇게 당대 최고 수준의 예술가들에게 작업을 맡겼다
르네상스의 이면에는 메디치 가문의 적극적 후원이 있었다고 말하곤 하는데. 그 실질적 후원자 였던 사람이 바로 (코시모 메디치) 였다.
케이블 티비 채널을 통해 미드 프로그램으로 메디치 가문의 탄생에서 부터 전성기를 다룬 드라마가 방영 되었었다.
메디치의 창시자인 조반니 메디치 역으로 '더스틴 호프만'이 캐스팅 되어 더욱 화제를 모았었다. 미드의 주인공은 바로 '코시모 메디치'였다. 정말 재미있게 보고 있었는데....... 어느날 갑자기 방송이 중단되었다. 참으로 안타까웠다.
코시모 메디치는 훌륭하게 성공을 거두었다.
메디치 가문은 부유한 은행가 집안으로 자리 잡았고, 피렌체의 실질적 통치자가 되었다.
하지만 코시모의 후계자인 장남 피에로 메디치는 아버지가 이루어 놓은 업적을 성장 시키기는 커녕 지켜나가기도 힘에 겨운 여러모로 많이 부족한 리더였다. 하지만 그는 가문을 위해서 마지막 한가지 큰 일을 해내게 된다. 일찍 사망한 것이다. 그의 요절이 메디치 가문에 전화위복이 되었다. 피에로가 가문을 위해 아주 크게 공헌한 한가지는....... 아버지(코시모)를 쏙 빼어닮은 손자를 남겨 놓은 것이다. 그가 바로 (로렌초 메디치)로 메디치 가문의 최고 전성기를 이룬 사람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그를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즉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
로렌초 메디치 이후로 메디치 가문은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이 후로 메디치 가문의 남자로 태어나는 사람들은 대부분 쇠약하고 병사하고....... 결국은 남자를 낳지못해 대가 끊기게 된다. 사생아 까지 등장한다.
이번 여행기의 시점인 1530년 경 메디치 가문의 수장은 '알렉산드로 메디치'였다.
어머니는 메디치 가문의 하녀였던 흑인 이었다. 로렌초 2세 메디치가 아버지라고 하지만....... 로렌초 2세 메디치는 일찍 딸 하나만을 낳았고, 그후로 여성 편력은 많았지만 아이를 생산하지 못하는 병을 앓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여 알렉산드로 메디치의 친아버지에 대해서 구구한 소문들은 많았으나 확인된 것은 하나도 없다. 하지만 그는 분명하게 메대치 가문에서 인정한 메디치 핏줄이었다. 어머니가 흑인 있던 관계로 그는 혼혈의 피를 받고 태어나 생김새나 피부 색갈이 여타의 다른 메디치 가문 사람들과는 상당히 달랐다 가로 전해진다. 그의 별명이 '무어인(아프리카 흑인 부족 중의 하나)' 이었다니 쉽게 짐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이 알렉산드로 메디치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자객에게 암살 당했다. 이제 메디치 가문에 남은 남자가 없다. 더 이상 사생아도 등장하지 않는다.
--- 코시모 메디치 1세 초상. 우피치 미술관.
알렉산드로 메디치가 갑자기 죽었다. 1537년에 '로렌자치오(Lorenzaccio, 나쁜 로렌초)'라는 별칭으로 불리게 되는 그의 먼 사촌 로렌치노 메디치가 권력을 탐해 알렉산드로를 암살하였다. (이 사건은 알프레드 드 뮈세의 희곡 로렌자치오의 대상이다). 로렌치노는 그의 자매이자 아름다운 미망인이였던 라우도미아(Laudomia)로 하여금 알렉산드로를 유혹해 성접대를 하도록 시켰다. 그리고는 밀회중인 그를 자객을 시켜 암살했다.
로렌치노 메디치는 세력을 이끌고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 하지만 메디치 가문 지지자들에 의해서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권력 장악에 실패하자 베네치아로 도망쳐 망명했다.
하지만 불과 십년 후, 로렌자치오 메디치 또한 자객에 의해 아주 참혹하게 암살된다.
이번 암살은 복수였다. 그 배후에는 (코지모 메디치 1세)가 있었다.
(코시모 메디치 1세)는 콘도티에로(용병)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를 아버지로, 르네상스 시대에 아주 유명한 여인이었던 마리아 살비아티를 어머니로 사이에 두고 태어났다.
그는 피렌체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무겔로 라는 지역에서 피렌체의 번영와 풍요와는 동떨어진 생활을 하고 있었다.
1537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를 통치하던 알렉산드로 메디치가 암살 당했다. 베네치아로 도망친 로렌자치오 메디치를 빼고는 이젠 메디치 가문에 남은 남자가 없었다. 가문의 대가 끊긴 것이다.
메디치 가문에 속해있던 많은 사람들이 회의 끝에 메디치 가문의 족보를 파헤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일찍 피렌체에서 여러가지 불미스러운 일을 저지르고 추방당했던 메디치가의 핏줄을 찾아내게 되었다. 바로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 였다. 말썽꾸러기 이기는 했으나 타고난 군인이었던 그는 메디치 가문 출신 교황 레오 10세의 후원으로 자신의 군대(용병)를 조직하고 교황을 위하여 여러번 전쟁을 치루었다. 자신의 복장과 군대(용병)를 늘 검은 복장으로 통일시켰기에 그의 이름이자 별명인 '조반니 달레 반데 네레'는 '검은 군대의 조반니'라는 뜻이다.
교황 레오 10세가 죽자 그는 전문적인 용병회사를 설립했다. 국가 민족 종교를 뛰어넘어 돈만 주면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움에 뛰어드는 전문 콘도티에로(용병) 시대를 개척한 사람이었다. 그러다보니 사방으로 친구보다는 적을 많이 두게 되었다. 얼마 후 그는 포탄에 맞아 불구가 되었고 패혈증으로 사망하였다. 콘도티에로(용병) 조반니가 죽자 그의 유가족은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하지만 메디치가의 사람들은 메디치의 다른 핏줄을 찾는 모험을 계속했다. 그리고 마침내 '콘도티에로 조반니'의 아들이 무겔로 지방에 살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그는 피렌체 공화정부에 쫓겨나 밀라노로 도앙친 피에로 메디치의 손자가 되는것이었다. 바로 (코시모 메디치 1세)이다.
하지만 그는 피렌체는 몰론 메대치 가문에도 전혀 알려진 바가 없었던 존재였다.
하지만 가문에 속해있던 사람들은 그를 만나자마자 한 눈에 그가 메디치 가문의 핏줄이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그는 영락없는 코시모 메디치의 환생이었다. 생김새며 풍채며 남다른 식견이며 강직하며 곧은 신념까지 어느하나 코시모 메디치와 다를 바가 없었다.
그를 피렌체로 데려오자 모든 피렌체 시민들이 달려나와 그를 환영했다. 몰려나온 사람들은 그를 통해서 코시모 메디치가 다스리던 그 찬란한 영광의 시절로 되돌아 갈 수 있겠다고 희망을 품기까지 이르게되었던 것이다. 가문의 여인들과 가문에 속한 사람들에 의해서 그가 새로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결국 코시모 메디치를 쏙 빼닮았다는 이유로 그에게 '코시모 메디치 2세'라 불렀으면 좋겠다는 주청이 들어왔다. 하지만 그가 거절했다.
스스로 '코시모 메디치 1세'라고 자신을 칭했다.
'코시모'라는 이름이 좋아서 자신이 사용은 하되, 증조부 할아버지와 자신은 전혀 다른 별개의 존재로, 새로운 메디치 가문의 '코시모 메디치 1세'의 시대를 열어가겠노라고 선언했다. 그의 아들이 '코시모 메디치 2세'가 된다.
코시모 메디치 1세는 직계가 아닌 방계의 신분으로 가문의 수장에 올랐으나, 강한 의지, 영악함으로 당당하게 자신의 야망을 증명하였고, 군사력을 앞세운 전쟁을 마다하지 않았다. 피렌체에서 망명한 세력들과 로렌자치오 메디치가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로 쳐들어 오자 직접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적들을 물리 쳤다. 또한 계속 이어지는 분쟁의 핵심인 로렌자치오 메디치를 자객을 보내 암살해 버렸다. 피렌체와 매디치 가문의 명에와 자부심을 위한 성스러운 복수을 자신이 치루었다고 당당하게 피력했다.
또한 직접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의 영원한 앙숙인 씨에나를 포위 공격해 마침내 점령함으로써 씨에나 공화국을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버린것도 '코시모 메디치 1세'였다. 이렇게 다분히 호전적이고 용맹스러운 면은 그의 아버지를 빼박았다.
권력의 독점으로 독재자의 길을 걷기도 했지만, 오스만과 유럽의 마지막 근대 전쟁이었던 '레판토 해전'에도 기사단을 이끌고 직접 참여했다.
우피치 미술관으로 사용되는 건물을 지은 사람이 바로 '코시모 메디치 1세'이다.
그는 또한 메디치 가문의 본거지로서 피티 궁전 건설을 끝냈고 피티 궁전 뒤에 보볼리 정원 또한 만들었다. 그는 조상들이 해왔던 것보다 더 예술 후원가였고 여러 예술가들을 지원했는데, 그들 중에는 조르조 바사리, 벤베누토 첼리니, 폰토르모, 브론치노, 건축가 발다사레 란치, 역사가 스키피오네 아미라토, 베네데토 바르키 등이 있다.
피렌체의 심장부인 시뇨리아 광장에 잠볼로냐가 1598년에 만든 코시모의 거대한 청동 기마상이 서 있다.
그가 바로 '코시모 메디치 1세' 이다.
'피렌체 여행' 하면 한국인 여행자들에게 하나의 로망처럼 자리잡고 있는것 중에 (피렌체 티본 스테이크)가 있다.
젊은 여행자들이나 특히 여성분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어쩌면 티본 스테이크 때문에 피렌체를 가는 사람이 생겨날 지경이다.
과연 그럴까?
그래서 나도 먹어봤다.
소고기를 주재료로 하는 티본 스테이크라........
지극히 내 개인적인 주관으로 평가를 하자면 이렇게 말하고 싶다.
육질. 식감. 맛. --- 단연 일본 소고기가 최고 으뜸.
식감. 맛 --- 대한민국 소고기가 최고급.
육질 --- 피렌체 뿐만 아니라 유럽의 대부분 소고기의 육질이 월등.
육질과 식감과 맛까지를 모두 고려한다면 당연히 소수 일등품 주의를 표방하는 일본의 소고기가 정말로 맛있다. 대신 무지 비싸다.
마블링 마블링 하는 대한민국의 소고기 식감과 부드러운 맛은 최상급이다. 부위별 천차만별로 가격대 차이가 심하지만, 국내산 최고급 소고기는 맛이 뛰어난 반면 역시 엄청나게 비싸다.
육질 하나만은 피렌체를 비롯한 유럽의 소고기들이 월등하다. 우리나라의 소고기와 돼지고기의 중간쯤이라 할까? 그리고 생각보다 많이 저렴하다.
왜 그럴까?
한국이나 일본의 경우 소를 기르는 주된 목적은 고기 때문이다. 질 좋은 소고기를 얻기 위하여 시설 안에서 철저한 관리하에 양육한다. 내장이나 가죽은 모두 고기를 생산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부산물이다.
피렌체에서 소를 방목하는 주된 목적은 바로 가죽 때문이다. 질 좋은 가죽을 얻기 위해서 좋은 목초지에서 마음대로 풀을 뜯고 운동을 하도록 완전 방목을 한다. 스위스 같은 산악지역에서는 우유를 채취해 유제품 생산을 목적으로 소를 방목한다. 소고기와 내장 부위가 부산물이 되는 색다른 경우가 피렌체이다. 그러다보니 한국이나 일본에 비하여 소고기 가격이 매우 싸다. 오로지 풀만 뜯어먹고 운동을 열심히 하는 소들 이기에 마블링은 애초부터 기대도 하지 않는다. 철사처럼 길고 강한 심줄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다.
그런데도 너도나도 피렌체에서 최고로 식감좋고 맛있는 티본 스테이크를 먹었다고 호들갑을 떠는 사람들이 있다.
아마도 제대로 된 한우로 만든 태본 스테이크를 못 먹어본 때문이 아닐까 싶다. 물론 방송에서 나오는 최고급 일본산 소고기 스테이크는 아직 나도 먹어보지 못했다. 높은 퀄리티에 기가 죽어서 그냥 차라리 돼지고기를 푸짐하게 먹는 것으로 급선회를 자주 한다.
'가성비를 조목조목 따져보았을 때 피렌체 티본 스테이크가 맛있다' 한다면 어느정도 그말에 동조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냥 피렌체 티본 스테이크가 정말 최고로 맛있어' 라고 한다면, '제대로 된 한국산. 일본산 티본 스테이크에 비하면 정말 형편 없어' 라고 톡 쏘아붙여 주고 싶다.
피렌체 인근 토스카나 지역에서 방목된 소고기로 만든 1kg 정도의 티본 스테이크를 우리 화페로 약 9만원이 넘는 정도에 맛있게 먹을 수 있다면(하우스 와인과 샐러드 포함), 아마도 한국산 소고기로 만들어 먹자면 적어도 두배 가까운 15만원 정도 이상은 주어야 하지 않을까? 만약 일본 최고급 소고기로 먹어본다면 아마도 25만원 가까이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실제 먹어 보았지만 (소고기)라는 인식하에서 '가성비는 왔따였다' 피렌체 티본 스테이크 가...........
역시 여행도 맛있는 음식으로 배를 우선 불려 놓아야 모든것이 아름답게 느껴지기 시작한다.
---- 다음 이야기에서 (르네상스 산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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