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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이탈리아) 르네상스 산책 '라이벌 간의 치열한 전쟁 드라마......'

by 피안재 2019. 3. 16.

 

 

 

 

 

 

 

 

 

 

 

 

 

 

 

 

 

 

 

  <각주>

 

  피렌체는 시간이 멈춘 도시다.

  아침 저녁으로 은은하게 울려퍼지는 성당의 종소리와 함께 이 도시의 시계바늘은 아직도 15 세기를 가리키고 있다.

  거미줄처럼 얽혀있는 도심의 골목들마다 중세의 모습과 향기를 담은 길게 늘어선 건물들로 가득하다.

  마치 중세 영화의 세트장처럼 잘 꾸며진 이 골목들마다 아기자기한 오브제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다.

  골목길 안쪽으로 발걸음을 몇 발자국만 옮겨놓으면 시간은 훌쩍 수백년 전의 중세로 나를 잡아 이끈다.

  어디에선가  돌가루를 하얗게 뒤집어 쓴 미켈란젤로가 불쑥 나타날것만 같고,  허겁지겁 좁은 골목을  달려가는 사람이 단테인것을 알아차리게 되면 방금 전에 앞서 지나간 여인이 베아트리체 라는 것을 짐작할 수가 있다.

  메디치가의 사람들과 파치가의 사람들이 시뇨리아 광장에서 한바탕 칼싸움을 벌이고,  술에 취한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마차를 타고 지나간다.

  사람들의 만류를 뿌리치고 눈물을 흘리며 도시를 떠나는  기베르티의 모습도 보인다.

  투박하게 돌을 올려 쌓아 우둘투둘 담벼락을 만들고 그 위에 붉은 지붕을 얹었지만  층층이 내어 설치한 테라스와 창문은 파랑색이 아니면 초록색 일색이다.  그리고 그 작은 베란다 마다 살고있는 사람의 마음을 닮은 작은 화분과 꽃들이 놓여있다.

  중세 시대를 그대로 재현해 놓은듯한 도심 골목길은 절로 여행자의 마음을 푸근하게 만들어 준다.

  이곳은 피렌체다.

  조금은 우중충한듯 어두침침한 분위기도 연상되고 투박한 느낌이 들지만  그래도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를 간직한 상점과 카페들이 길게 늘어서 있다.

  골목골목의 카페와 레스토랑에서 사람들의 해맑은 표정과 웃음소리가 울려나오는 곳,  햇살이라도 따사로운 날에는  한겨울에도 노천에 나와 앉아 담소를 나누고 커피와 와인을 나누고 여행과 회화와 음악에 대해서 자유로운 대화가 이루어지는 이곳은  바로 플로렌스의 한복판이다.

  그러나.......  정작 이 도시가......  이 골목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른데 있다.  그것은........

  '이 도시에는 간판이 없기 때문이다.'

  이 도시의 골목에서 가장 흔하면서 네온사인이 들어간 유일한 입간판은 '약국' 뿐이다.

  어쩌다 나타나는 입간판이 희귀하게 느껴지는 유럽의 골목길들이 나는 부럽다.

  우리나라 어느 도시에서건 가장 흔한  교회 종탑의 네온사인과  모텔의 온천 네온사인이 유럽에는 없다.  도심의 골목 안쪽의 건물들은  거의 대부분이 처음 지어진 모습 그대로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접한 입간판은  도심의 '지하철' 안내 간판과 유사한 '맥도날드' 입간판이 가장 대표적이었다.

  (구찌)와 (페르가모)의 본점이 바로 이 골목 안쪽에 있다. (에트로) (발렌티노) (아르마니) (돌체)  같은 세계적인 명품 브랜드들이 이 골목 안에 자리잡고 있다.  하지만 그 어느 브랜드 매장도 입간판이 없다.  쇼윈도우가  광고의 전부이다.

  그러기에 도심과 골목이 아름다울수 있는 것이다.  초기 중세의 분위기가 그대로 유지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를 보자.(결단코,  광고 간판 업계를 비하하고자 하는 의도는 없음)

  아무리 건물의 외관을 살리고자 건축가가 심혈을 기울이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준공 후에 분양 내지  입주 점포에 따라 수십미터의 입간판이나 네온사인이 너도나도 주렁주렁 매달리게 되는것이 현실인것을.......  건물의 외관이 무슨 소용인가?  곧 간판들로 도배될 것인데......

 

 

 

  혹시나 피렌체를 여행하시게 된다면..........

  르네상스를 느껴보고자 하신다면.........

 

  적어도 다음의 네사람을 구분 할 정도의 소양은 가지고 오시면 크게 도움이 될거라 생각한다.

  물론  그냥 스치듯이  피렌체에 와서  사진 몇장 찍고,  티본 스테이크 먹어주고 곧바로 돌아 나갈것이라면 별 상관이 없을 것도 같다.

  하지만,  피렌체의 역사를 느껴보고  르네상스의 향기를 맡아보고자 하는 여행이라면  적어도 다음의 네사람을 구분 할 수 있을  정도는 되어야 비로소 피렌체와 르네상스의 역사와 향기와 깊이를 느낄 수 있게 될 것이다.

  이들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못한다면 피렌체나 르네상스에 대해서는 누구나 접할 수 있는 겉표본만을 경험하는 수준 밖에는 안되기 때문이다.

  '코시모 메디치'와 '코시모 1세 메디치'  그리고 '파치 가문'과 '피티 가문'은  구분 할 수 있어야  피렌체와 르네상스를 깊이있게 느낄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는 다분히 내 경험에서 우러나온 생각이며........  이들을 구분하는 것은 다분히  여행자인 당신의 몫이다.

 

 

 

 

 

 

 

 

 

 

 

 

 

 

 

 

  두오모 광장에 도착하고 있었지만 오는동안 이제껏 에라스무스는 일체 입을 열지 않고 있었다.

  연실 그의 표정을 살피던 홀바인이 더는 참지 못하고 스승을 향해서 먼저 입을 열었다.

  '무슨 고민이 있으십니까?  이제껏 아무런 말씀도 안하고 계십니다.  지난 밤에 팔라초 피티(피티 궁전)에서 주무시고 나오시는 길이셨습니까?'

  '그랬지?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시간이 너무 늦어져서  그 사람이 자고 가라기에 잠시 눈 좀 붙였다가 아침일찍 나온 길이었네.'

  '부오나코르소 피티(Buonaccorso Pitti)'와 계셨습니까?  그분은 어떤 사람입니까?  메디치 가문이 다시 돌아왔으니 피티 가문 또한  피렌체 최고 권력에 화려하게 복귀하겠군요?'

  '글쎄?  조부인 루카 피티(Luca Pitti)에 비하자면 부오나코르소는 대단히 겸손하고 상대를 배려 할줄아는 젊잖은 인텔리일세.  그렇게 야심이 있는 사람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네.  할아버지가 위험을 무릎쓰고 메디치가를 위해 커다란 공을 세워 그들의 후원을 받아서 성공한 은행가 집안이 되었다고는 하지만,  그 집안이 원래부터 돈이 많은 부자였던것은 부인할 수가 없지.  피에로 메디치가 도망치면서 그들을 적극 후원하였다는 이유로 피티 가문이 심감할 정도로 핍박을 받았지만 끝내 살아남았네.  할아버지와 다르게 부오나코르소가 사려 깊고 강인한 인내심을 가졌기 때문이었을 것이야.  메디치 가문이 화려하게 복귀했다고 하지만  질곡의 시간속에서 세상이 요동치는 것을  경험한 그로서는 그렇게 쉽게 함부로 권력에 다가서려 하지 않을 것이야.'

  '그의 후원을 부탁하신 것입니까?  아니면  메디치와 연줄을 놓아달라고 부탁하신 것입니까?'

  '이보게 홀바인.  이제 내 나이쯤 되면 서서히 세상살이를 정리할 때도 되었다 싶은데........  하하하.  내가 누구에게 무슨 후원을 기대하겠는가?  그리고 나와 메디치라는 사람은 결코 잘 어울릴 수 없는 서로에게 이질적인 부류일세.  그런 일은 없었네.'

  '그 점은 제 소견으로도 충분히 그렇습니다.  헌데 다른때 처럼 미리 아무런 말씀도 해 주시지 않았고,  더군다나   무엇엔가 엄청 심각하리만치 골몰하고계신 모습이라서 먼저 여쭈어 본 것입니다.'

  '어떤 한 사람의 운명에 대해서 피티 가문의 의중이 어떤지를 알아 볼 필요가 있어서 만났었네.  필요하다면 내가 나서서 그를 설득이라도 해 볼 요량이었지만,  다행히  그는 그의 할아버지와는 매우 다른 사람이었더군.  그래서 편하게 내 의중을 전달하고 나왔을 뿐이네.'

  '그 어떤 사람이 누구입니까?'

  '그 사람?  허허허허.  하루나 이틀 지나면 자연히 자네도 알게 될 것일세.  그나저나 홀바인.  자네는 이곳이 어딘지 아는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두오모) 아닙니까?'

  '두오모는 뒷쪽의 커다란 본당 건물이고,  이곳은 '산 조반니 세례당(Battistero di San Giovanni)' 일세.  하긴 뒷편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이 생기기 전까지는 이곳이 피렌체의 두오모 였네.  단테(Dante Alighieri)가 유명해지자  이곳에서 세례를 받았다고 해서 다시 한번 유명해진 곳이지.  그런가 하면  브르넬리스키와 기베르티가 대결을 벌인곳도 이곳이고,  미켈란젤로가 극찬한 '천국의 문'이 있는 곳도 이곳이지.  내가 좀 길게 시간을 필요로 하니까   이제부터 자네는 천천히 이곳을 마음대로 둘러보면서 예술적 소양을 충족 시키고 있게나.  뒷편의  본당이나 종탑에 올러가 보아도 되고......  정히 시간이 길어지고 피곤해지면 자네 먼저 숙소로 돌아가 쉬고 있게.  나중에 내가 돌아와서 둘러보아도 자네가 안보이면 나는 곧바로 숙소로 찾아가겠네.'

  '스승님께선  누구와 약속이 있으십니까?  혹시나 그 운명이 걸린 사람에 관한 일입니까?'

  '그렇다네.  그 일로 누군가를 만나려고 하네.  대단히 중요한 일이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어서 자네를 데려가지 않는 것이고..........'

  '위험한 일이라면 오히려 제가 옆에서 모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도 그렇기는 하네만........  성당에서 나를 지켜줄 것일세.  그러니 기다리지 말고 마음껏 자유 시간을 가져 보시게.  나야 피렌체를 이미 둘러 보았지만,  자네는 이번이 아니면 언제 다시 피렌체에 와 보겠는가?  자네 같은 예술가에겐 지금 세상의 중심이 바로 여기가 아니겠는가?'

  '노파심에서 여쭙니다만.........  혹,  마르틴 루터 목사님과 연계된 일입니까?'

  '허허. 홀바인.  자네가 긴장하고 염려하는 이유를 알겠군.  하지만 아닐세.  지금 일은 루터와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 일일세.'

  '다행 입니다.  그럼 저는 말씀처럼  이곳 일대를 구경하고 있겠습니다.  돌아오시면 크게 몇번 소리쳐 주십시요.'

  에라스무스는 세례당의 입구로 다가 갔다.  홀바인은 여전히 걱정스러운 모습으로 스승의 뒷모습을 바라다보며 서 있었다.

  '이곳 피렌체에는 내 오랜 친구가 한명 있네.  마키아벨리 라는 이름을 들어 보았는가?'

  홀바인에게만 겨우 들릴 듯하게 낮은 목소리를 남기고 에라스무스는 홀연히 세레당 안쪽으로 사라졌다.

  하지만 그 소리를 분명하게 나도 들을 수 있었다.

  마키아벨리(Niccolò Machiavelli).

  마키아벨리가 피렌체 사람이라는 것을 나는 오래전부터 이미 알고 있었다.

  더하여 그가 지금 감옥에 갇혀있고  여러번에 걸쳐서 호된 고문을 받았다는 이야기도 들어서 알고 있었다.

  그런 그가 에라스무스 수도사와  오랜 친구란 말인가?

  그렇다면 이게 어떻게 돌아가는 것인가?

  마키아벨리는  피티가문의  루카 피티와 오랜 정적의 관계였다.  피티 가문과 메디치 가문은 혈연으로까지 맺어진 동업자들이다.

  피에로 메디치가 도망쳐 나폴리에 망명하고  공화 정부가 들어서자 마키아벨리가 공화정부의 외교를 15년 가까이 맡아서 공을 많이 세웠다.  그 과정에서 도망치지 않고 피렌체에 남아서 버티고 있는 부오나코루소 피티와 이래저래 원하던 원치않던 앙금과 은원이 쌓였다.  그런 중에  공화정부의 무능과 부패를 틈타 무력을 동원해 메대치가 화려하게 피렌체에 다시 복귀했다.  이번엔 공화정부 수뇌들이 서로 앞다투어 도망을 쳤다.  하지만 마키아벨리는 당당하게 남아서 자신의 일을 해온 공화정부의 마지막 공무원이었다.  결과는 당연하게  공화정부의 수뇌로 몰려 감옥에 끌려가고 고문을 당하게 되었다.

  이런 상황을 고려하면 부오나코루소 피티는 결코  마키아벨리에게 우호적일 수 없는 사람이다.  그는 아직도 어엿한 메디치 가문의 최측근인 것이다.

  그런 그를 에라스무스가 지난 밤에 은밀하게 만났다.

  그리고 오늘은 마키아벨리를 위해서 또 다른 누군가를 만나러 갔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이 정치와 권력의 다툼속에서.......  갑자기 마키아벨리라니?

  '정말 이러다가 혹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irolamo Savonarola. 1452~1498)의 망령까지 다시 되살아나는 것이 아닐까?'

  나는 혼자 중얼 거렸다.

 

 

 

 

 

 

 

                                                                                                               ---  니콜로 마키아벨리 <사진 퍼 옮>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초상. <사진 퍼 옮>

 

 

 

 

 

 

 

  한스 홀바인은 산 지오반니 세례당의 동쪽문 앞에서 멈춰섰다.

  마치 시간을 모두 빼앗겨 석상으로 굳은 사람처럼 아주 오랫동안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청동문의 부조상 하나하나에 온통 마음과 시선을 빼앗기고 있었다.

  순간 나는 결심했다.  이제야 말로 그에게 다가갈 수 있는 기회를 잡았다고 생각했다.

  '기베르티가 만든 세례당의 동쪽문입니다.  그는 이곳 세레당을 위해서 두개의 문을 제작했는데  그중에서 가장 나중에 제작된 청동문이며,  미켈란젤로가  천국의 문이라 칭하면서 새로운 이름으로 불리어지는 대단히 훌륭한 작품입니다.'

  '그렇군요.  기베르티가 두개를 만들었다면.......  솜씨로 보아서 다른 하나는 아마도 북쪽문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역시 예술가시라 작품을 보시는 안목이 다르시군요.  천국의 문은  구약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10개의 소재를 부조로 만들어서 문에 넣었고  북쪽문은 신약성경의 이야기 중에서 28개의 소재를 부조로 해서 청동문을 제작하였지요.'

  '그럼 남쪽에 있는 다른 하나의 문은 누구의 작품입니까?'

  '본래 천국의 문이 처음엔 북쪽문으로 제작된 것이고  북쪽에 있는 문이 남쪽문이 될 예정이었지요.  하지만 기베르티가 두 개의 문을 모두 완성하고 나서 보니까  모두가 감탄할 만큼 너무도 뛰어난것이라  결국......  본당으로 향하는 동문에 천국의 문을 놓았고,  다른 문이 북쪽으로 정해졌고 처음 동쪽에 있던 문은 아쉽게도 현재처럼 남쪽으로 밀려났습니다.  기베르티 보다 일백년 전에 만들어진  안드레이 피사노의 작품입니다.  세례자 요한 성인께 헌정된 세례당인지라  피사노는 세레 요한의 일생을 담은 28장의 부조판으로 청동문을 만들었지요.  또한 그분은 바로 피사의 대성당과 기울어진 종탑을 만든 건축가이기도 하지요.'

  '그렇군요?  피렌체에 사시는 분이십니까?  어떻게 그렇게 소상하게........  그러고 보니 방금 전에 저를 향해 예술가라 하셨는데  저를 아십니까?'

  '저는 피안재 라고 합니다.  베네치아의 소상공인 길드에 직인의 신분으로 있습니다.  사업적인 방문으로  피렌체를 두번째 방문하였으나  제법 여러날을 머물게 되다보니 관심있는 분야라 아주 조금 피렌체에 대해서 알게된 것뿐입니다.  그리고 에라스무스 선생님과 홀바인씨에 대해서는 이름만 아는 정도입니다.'

  '이럴 수가.......  저와 스승님에 대히서 아시고 계시는군요?'

  순간 홀바인은 바짝 긴장했다.  혹시나 스승님에게 닥쳐온 어떤 위험이 아닐까하고 본능처럼 우선 주변을 두리번거리며 살폈다.

  '우연히 어제 선생님을 발치에서 뵈었을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중얼거리시는 말씀을 우연히 듣게 되어서 관심을 가지게 되었던것 뿐입니다.  악의가 있거나 어떤 나쁜 의도로 부러 이렇게 접근한 것이 결코 아닙니다.  또한 저는 루터목사님을 지지하는 신교도도 아니랍니다.  어제 팔라초 베키오 앞에서 아주 잠깐 선생님을 지척에서 뵈었을 뿐입니다.  그때 홀바인씨께서 마차를 가지고 와서 선생님을 모시고 빠져나가셨지요'

  '선생님께서 광장에서 어떤 젊은사람을 만나셨다고 하시더니  그게 당신이었군요.  그렇다해도 스승님과  저의 이름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광장을 빠져나가느라  마차 옆에 붙어섰는데  두분께서 서로를 호칭하시는 말씀을 듣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좀 전에 제과점 앞을 지나시는 것을 보고 뒤좇아 왔습니다.'

  '저나 스승님께 무슨 용무가 있으십니까?'

  '아닙니다.  제가 여러곳을 다니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선생님에 대히서 여러 이야기들을 들은적이 있습니다.  하여 기회가 된다면 직접 뵙고 어떤 가르침이든 좀 얻고싶어서 따라왔습니다.  본의 아니게 지금 마키아벨리 선생을 위해서 가신것까지 알게되었습니다.'

  '당신은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도 알고있습니까?'

  '제 신분이 베네치아 상인조합의 직원이니까요? 몇 번 마키아벨리님을 직접 만났었습니다.  업무상이었지요.  여기 피렌체의 베키오 팔라초에서도 뵈었고  베네치아 상인조합에서도 뵈었었지요.'

  '마키아벨리님이 지금 어떤 위험에 처해있습니까?'

  '피렌체가 공화정부일때 마키아벨리님께서 외교책임자로 아주 오래 봉직하셨습니다.  그러다보니  쫓겨간 피에로 메디치와 외교적으로 많이 부딪친 사람이지요.  그러다 피에로 메디치의 형제가  교황에 오르셨고,  그후 교황께서는  사망한 피에로 메디치의 아들인 로렌초 2세 메디치를 꾸준하게 피렌체로 복귀시키기 위해 아주 많은 일을 벌였습니다.'

  '그럼 지금 돌아온 메디치가 바로 교황이 적극 후원하는 로렌초 2세 메디치 입니까?'

  '아닙니다. 로렌초는 매우 병악한 사람이었으며  향락에 빠져사는 사람이었지요.  그러다보니 생활이 무절제해져서 결국 단명하고 말았습니다.  이제 메디치의 적장자 대는 단절되었습니다.  딸 밖에 낳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메디치 가문은 다른곳에서 로렌초 메디치의 혈육을 찾아냈습니다.  그가 바로 이번에 화려하게 피렌체에 복귀한 메디치 가문의 수장인 알렉산드로 데 메디치 입니다.'

  '방금 딸 밖에 낳지 못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어디서 아들이 튀어 나왔단 말씀입니까?'

  '사생아라는 말씀이지요.  메디치 가문의 사생아 인것은 분명한데........  아프리카 출신의 노예와의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에 대해서는 과연 로렌초 2세인지 아니면 다른 어떤분(?)인지에 대해서는 소문이 여러가지로 나 있는 상황이지요.  물론 메디치 가문에서는 절대금기시 하는 부분이기도 하구요.  아뭏튼 지금 돌아온  메디치 가문의 수장은 약관 20세 나이의 알렉산드로 입니다.'

  '어떻게 그런것까지?'

  '장사꾼이니까요.  장사꾼에게는 하늘에 떠다니는 소문까지도 장사에 도움이 된다면 아주 귀한 정보로  취급하는 습관 같은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 제가 여기 피렌체에 머물고 있는것 또한  알렉산드로 메디치의 요청에 의해서이니까요?'

  '알렉산드로 메디치도 만나보았습니까?'

  '네. 닷새 전에 딱 한번 잠깐 만났습니다.  다시 연락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지요.  그 내용은 다분히 저희 상단의 사업적 기밀에 해당되는 부분이라서  더는 거론하기가 어렵겠군요?'

  '혹시.......  소문에 떠도는  베네치아 무라노 섬의  유리 공방과........  그러고 보니 당신의 생김새나 차림이.........'

  '무라노 섬에 관한 소문에 대해서도 뭐라 드릴말씀이 없고요.  저희 길드에서 무라노에서 생산되는  유리와 거울에 대한 판매권을 일부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제가 저희 길드에서 관장하는 분야는 도자기와 타일 분야의 직인일 뿐입니다.  그러면서 대상인을 모시고 이렇게 여러곳으로 영업을 하기도 하구요.  또한 제 차림과 생김새가 좀 다른것은  제가.......  아주 먼 동방의  조선이라는 나라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연이 있어서 이렇게 이탈리아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아주 먼 이국의 사람입니다.  지금은  베네치아 소상공인 길드의  직인 신분이지요.  물론 자유인입니다.'

  '그런데도 라틴어가 아주 유창하시군요?  토스카나어도 하십니까?'

  '콘스탄티노플에서 베네치아 상단에 처음 들어섰을 때가  17년 전이었습니다.  그때서부터 라틴어를 배우게 되었으니까요.  토스카나어는  대부분의 이탈리아 사람들 처럼 단테의 <신곡>을 읽어보기 위해서 조금 조금씩 배우게 되었지요.  그럭저럭 불편을 느끼지 않을 정도는 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면 르네상스라는 대 변혁에 대해서도 잘 알고 계시겠군요?'

  '지금 홀바인 선생께서 바라보고 계시는  천국에 문이 어쩌면 르네상스의 시작이랄 수도 있겠지요.'

  '이 문이 바로 르네상스라는 말씀입니까?'

  '인문학에서는  시인 페트라르카나 보카치오에서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말하지요.  단테가 크게 꽃을 피웠구요.  회화에서는 지오토로 부터 르네상스가 시작되었다고 하고 마사치오가 이를 뒷받침 했지요. 그리고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라파엘로 보티첼리가 꽃을 피웠습니다.  하지만 역사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르네상스는 이곳 피렌체에서 시작되었고,  그 시작은 바로 씨에나에 새롭게 건축된 대성당에 자극을 받은  이곳 피렌체 사람들이 씨에나 두오모를 능가하는 교회를 갖고자 하는 열망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하지요. 피렌체 두오모 위원회는 산 조반니 두오모(세례당)을 증축하기로 결정했고,  첫 사업으로 세례당의 북쪽문을 장식할 청동문 제작을 위한 경연대회를 열게되었지요.  르네상스는 바로 그 경연대회의 열띤 경쟁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감히 말씀드릴수 있겠습니다.'

  홀바인의 시선이 다시 황금빛으로 도금된 천국의 문으로 쏠렸다.

 

 

 

 

 

 

 

 

 

 

                                                                                                 ---  안드레이 피사노作     (산 조반니 세례당 남문.  세례 요한의 일생)

 

 

 

 

                                                      --- 로렌초 기베르티作   (산 로렌초 세례당 북문.  신약성서 내용 28개 부조)

 

 

 

 

 

                                                            ---  로렌초 기베르티作    (산 로렌초 세례당 동문.  일명 천국의 문.  구약성경 내용 10개 부조)

  

                                                                                                                                       --- <천국의 문> 대표적 부조  (카인과 아벨)

 

 

                                                                                                               ---  천국의 문에 등장하는 로렌초 기베르티 초상조각.

 

 

                                                                                                  ---  청동문 제작 콘테스트 응모  로렌초 기베르티作   (이삭의 희생)  <퍼옮>

 

                                                                                            --- 청동문 제작 콘테스트 응모  필리포 부르넬리스키作   (이삭의 희생) <퍼옮>

 

 

 

 

 

 

 

 

 

 

 

  서기 1400년경 이탈리아 반도의 절대강자는 밀라노였다.

  야심에 찬 강력한 군주 밀라노 대공은 롬바르디아 평원을 지나 반도의 중심부인 로마를 비롯해 남부의 나폴리에 이르는 이탈리아 전역 대부분의 도시국가들을 점령하거나 복속 시켰다.

  이런 와중에 단 하나의 소국인 피렌체만이 유일하게 밀라노의 파상공세에 당당하고도 굳건하게 대항하고 있었다.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다.  작은 도시국가인 피렌체는 군사적으로나 외교적으로나 토착민들의 똘똘뭉친 자긍심으로나  어느 하나도 밀라노에 뒤지지가 않았다.  밀라노의 군주 밀라노 대공은  강력한 권력과 군사력으로 밀라노를 비롯한 대부분의 이탈리아 전역에 평화와 질서를 지켜나가는 새로운 시대의 씨저로 불렸다.  하지만 피렌체 사람들은 이런 밀라노의 폭정을 성토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자신들이야말로 권력과 폭정에서 벗어나 자유의지를 가지고 공화주의를 실현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피렌체 사람들은 인문주의자  페트라르카를 전면에 내세워 인간의 자유의지와 평화를 숭고한 신념으로 삼고 살아가는 피렌체를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했다.  그러자 밀라노 사람들도 보카치오를 전면에 내세워 밀라노의 왕정복고주의 우수성을 알리고자 노력했다.

  이는 곧 레오나르도 부르니의 (피렌체 찬양)이라는 시를 낳게 된다.

  '이탈리아 반도의 모든 도시국가들 중에서 오직 피렌체 만이 당당하게 밀라노의 폭정에 항거하고 있는것은,  피렌체라는 도시가 가지고 있는 제도와 지리적 위치와, 역사적 정통성 위에 문화적인 성취도와 자유로운 공화국 시민으로서의 정신력을 굳건하게 지켜나가고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의  밀라노가 거대한 페르시아 제국이라면, 피렌체는 그에 끝까지 대항하여 승리하는 아테네가 아니겠는가.  이제 새로운 아테네가 피렌체에서 다시 꽃피우고 있는 것이다'

  분노한 밀라노 대공은 막강한 군사력을 앞세워 서서히 피렌체를 향하여 쳐들어 오기 시작했다.

  피렌체에 서서히 암운이 드리우기 시작하였으며  피렌체 정부는 시민들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할 그 무엇인가가 절실하게 필요해지 시작했다.

  이때 토스카나 평원 건너편에 있는 피렌체의 영원한 맞수이자 라이벌인 씨에나에서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 들려왔다.

  시에나가 이탈리아 전역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당시까지) 두오모(대성당)를 준공했다는 소식이었다.  서둘러 씨에나로 숨어들어 씨에나 대성당의 실체를 확인한 첩자들에 의하여 전모를 전해들은 피렌체 사람들은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충격에 빠져버리고 말았다.

  '피렌체는 모든면에 있어서 그 어느 하나라도 씨에나에는 뒤지지 않는다'는 자부심 하나로 이제껏 모든 수난을 견뎌온 피렌체였다.  그런데 느닷없이 씨에나에 세상 어디에도 없을 크고 아름다운 대성당이 들어선 것이다.

  피렌체 사람들은 서둘러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를 만들어 이번 사태에 대처하기로 했다.  이 위원회에 당시 피렌체를 대표하는 예술가인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보티첼리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 같은 거장들이 포함되었으며, 피렌체를 대표하는 최고의 은행가 코지모 메디치가 이 위원회에 포함되어 있었다.  메디치 가문을 유럽 최고의 은행가 가문의 지위에 올려놓게되는 조반니의 아들 코지모 메디치가 바로 그였다.

  대성당 위원회는  당시의 피렌체 두오모였던 '산 조반니 두오모'를  씨에나 두오모에 버금가는 크기로 증축하기로 합의 하였다.

  세례당 증축을 후원하기로 한 피렌체의 부유한 원단 수입업자 조합인 (칼라말라 길드)는  1402년  피사노의 청동문이 걸려있던 세례당의 동쪽문을 교체하기 위한 콩쿠르를 열기로 하였다.  같은 무게의 청동을 지급하고 같은 크기의 부조상을 만들어 제출하도록 하였으며,  제작 기간은 1년이 주어졌으며  작품의 소재는 오로지 하나 구약 성경에 나오는 (이삭의 희생)이었다.

  수많은 조각가와 목수와 건축가들이 콩쿠르에 응모했다.  하지만 거대한 청동문 자체를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청동문에 들어갈 부조판을 만드는 것이라 금속공예를 다루어 본 조각가들이 유리할 수 밖에 없었다.  1년이 기간이 지난 뒤, 위원회는 일곱명의 작품을 최종 후보에 올렸다.  당시 씨에나를 대표하는 유명한 조각가 야코포 델라 퀘르치아와 도나텔로를 포함한 다섯명의 쟁쟁한 경쟁자들을 물리치고 최종 후보에 오른것은  당시 나이 24살의 로렌초 기베르티와 25살의 필리포 브르넬리스키였다.

  이 두사람의 작품을 두고 최종 승자를 뽑는 마지막 심사는 여러가지 수많은 우여곡절을 격게된다.  자세한 그 내막까지는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심사의원들의 저마다  작품에 대한 이해와 판단이 극렬하게 양분되었기 때문이다. 2년여의 시간이 걸려 심사를 계속했지만  위원회는 끝내 심사를 마치지 못했다.  결국 위원회는 두사람의 공동우승을 선택했고 두 사람으로 하여금 함께 세례당의 동문 작업을 해줄것을 요청했다.

  기베르티는 공동우승과 공동작업을 수락했지만  부르넬리스키는 심사의 불공정성을 비난하면서 공동우승과 공동작업을 거부했다.  조각도를 부러트려 내던진 부르넬리스키는 도나텔로와 함께 피렌체를 떠나 로마로 향했다.

  결국 위원회는 기베르티를 최종 우승자로 발표했고  그에게 세례당의 동쪽문을 의뢰했다.(현재의 북쪽문인 세례당의 제 2문)

  신약성서의 내용을 소재로 28개의 패널을 조각하여 완성한  제 2문은 애초 제작 계약기간이 9년 이었으나,  기베르티는 자신의 인생 절반을 소요하여 만 20년만인 1424년에야 완성하였다.

  그가 만든 청동문에 매료된 두오모 재건 위원회와 칼라말라 길드는  기베르티에게 또 하나의 청동문(제 3의문) 제작을 의뢰하면서 곧바로 계약과 착수가 이루어졌다.  제 2의문 완성으로 찬사와 함께 최고 예술가의 반열에 오른 기베르티는 새로운 청동문의 제작에 상당한 자율적 권한을 가지게되었다.  그는 과감하게 커다란 사각형의 10개 패널을 채택하여  구약성경의 내용을 소재로 청동문을 제작하기로 하였고 누구도 그의 의도를 제지할 수가 없었다.  르네상스로 대변되는 기존의 방식을 벗어나는 새로운 시도이자 과감한 변화였다.  기베르티는 남아있는 자신의 인생 모두를 이 청동문 제작에 쏟아부었다.  27년이 걸려서 1452년에야 청동문이 완성되었다.  기베르티는 세례당의 청동문 2쌍 제작에 자신의 인생 51년을 고스란히 바친 것이다.

  완성된 세례당 제 3의문 반응은 엄청났다.

  '너무나 아름다워서 언제까지고 마냥 여기 천국 앞에 이대로 서있고 싶다.'

  새로 완성된 청동문을 본 미켈란젤로의 이 한마디는  곧바로 여기 제 3의문을 '천국의 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게 만들었다.

  천국의 문을 본 세상사람들의 감탄은 끝내 천국의 문을 세례당의 중심인 동쪽에 설치하게 하였으며,  27년 전에 내걸었던 제 2의문을 북쪽문으로,  북쪽에 밀려났던 피사노의 문을  다시 남쪽으로 옮겨달게만드는 결과를 낳았다.

 

  기베르티와 브르넬리스키의 청동문 제작을 위한 콩쿠르에서의 첫대결은 르네상스 미술사에서 너무도 유명한 전설로 남았다.

  수많은 미술가와 평론가와 학자와 여행자들이  피렌체의  바르젤로 국립 미술관을 찾아서 1402년  당시 두오모 위원회에 제출되었던 두 사람의 출품 작품을 유심히 살피고 또 살펴 본다.  저마다 당시의 심사의원이 되어 보는 것이다.

  만약에 내가 당시의 위원회 소속 심사의원이었다면  나는 아마도 기베르티의 손을 들어 주었을것 같다.  나는 기베르티의 작품에 더 끌린다.

  두 작품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으면 무엇보다도 아주 셈세한 기교의 완벽함이 기베르티에게서 더 느껴진다.  전체 구성에 있어서 극적인 리얼리티가 다소 결여되어 보인다는 지적은 아마도 기베르티가 타고난 조용하고 서정적인 그의 기질때문이 아닐까 싶다.  기베르티는 이 작품에서 자신이 지오반니 피사노의 후계자임을 여실히 증명해 보이고 있다.

  하지만 대다수의 미술사가나 평론가가 학자들은 브르넬리스키의 작품이 더 긴장감을 극도로까지 끌어올리는 현장감에서 기베르티를 압도한다고 한다.  아브라함과 이삭의 배치가 정적이며 천사나 기타 다른 배경이 전혀 돋보이지 않게 평면 위에 자연스럽게 배치된 느낌을 떨쳐낼 수 없다고 평한다.

  반면 기베르티의 작품은 좀 복잡한듯 보이지만 대각선 구도를 이용하여 전면의 등장인물들이 두드러지고 활기찬 느낌을 주는 반면  배경의 인물들은 낮은 곳에 배치하면서도 살아있는 듯한 입체감을 주었다.  거기에다 이삭을 과감하게 전면 나체상으로 조각함으로써 심사 기간 내내 뜨거운 비판을 감수해야만 했다.

  현대의 감각이나 시선을 가지고 보자면 또 다른 평가도 가능하겠지만,  당시의 전해지는 평가를 보자면 대부분 부르넬리스키의 작품에 더 후한 점수를 받았던 것이 사실이었던 것 같다.  그렇게 보자면 2년씩 끌것이 아니라  그냥 편하게 부르넬리스키가 최종 우승자로 발표가 났다고 해도 별반 무리는 없었을 것만 같은데.........  다른 한편으로 공동우승의 내막에는  후원자 였던 길드의 입김이 결정적으로 작용한 때문이라는 것이 미술사의 이면에 전해져 내려오는 내용이다.

 

 

 

 

 

 

 

                                                                            --- 세례당 천국의 문 위에 있는  안드레아 산소비노作  (그리스도의 세례)   <모조품>

 

                                                                                                                            ---  피렌체 두오모 오페라 박물관에 전시된  진품

 

 

 

 

 

 

  청동을 이용해 대략적인 부조판을 만든 다음에 예리하게 조각도로 깍고 다듬어서 부조상을 완성하던 당시의 시대에  기베르티는 대단히 독창적인 기법을 창안해 냈다고 한다.  현대에선 그 기법을 할로우캐스트 기법이라고 하는데 당시에 기베르티가 이 기법을 처음 창안해 내었다고 한다.

  부조판 원형의 안쪽을  밀납으로 채웠다가 청동판이 완성되고 나면  밀납을 녹여냄으로써  청동판의 두께를 아주 얇게 완성하는 독창적인 방법이었다.

  위원회에 제출된 출품작에서  기베르티의 작품이  부르넬리스키의 작품보다 7kg이나 가벼웠다고 한다.  이는 제출된 단 하나의 부조판에 해당하는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이제 만들어질  청동문은 이런 부조판이 28개나 들어가게되는 한마디로 거대한 청동조각상이라 해도 무방한 상황이었으니까 말이다.  기베르티의 방법대로라면 약 200kg에 가까운 청동이 절약되는 것이다.  당시의 청동 가격은  그야말로 보석값에 버금가는 아주 귀한 재료였던 것이다.  이런 판단을 재정적 후원을 담당해야하는 조합(길드)이 그냥 묵과했을리가 없었을 것이다.  심사위원단 중에서 예술을 지원하는 사람들은 작품의 수준을 요구했고,  지원하는 사람들 입장에선 작품의 수준은 둘째 문제이고 부담해야 하는 경비절감을 강력하게 요청했을 것이다.

  하지만 어찌되었던.......  기베르티가 승리했고.......  '천국의 문'이 오늘의 우리들에게 위대한 유산으로 남게되었다.

  만약에 승자가 바뀌었다면.......  천국의 문이 탄생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피렌체 두오모의 돔도 얹혀지지 못했을텐데............?????????

 

  '안드레아 산소비노의 조각품 (그리스도의 세례)를 올려다 보면서  기베르티의 '천국에 문'을 열고 세례당 안쪽으로 들어가 본다.

  산소비노의 조각상에서 보았듯이 여기 '산 지오반니 세례당'은 우리에게 '세례자 요한'으로 알려진  피렌체의 수호성인 '성 지오반니'에게 바쳐진 교회이다.

  지오반니 빌라니의 기록에 따르면  고대 로마시대 이 자리에는 전쟁의 신 마르스(Mars)를 모시는 고대 로마신전이 있었다고 전한다.  아울러 신전이 건립되기 전까지의 이 자리에는 고대 로마의 성벽이 광장 가운데로 가로질러 지나갔고,  그 성벽의 초소 위에 신전이 세워졌을것으로 보고 있다.  서기 4세기 경에 마르스 신전이 지금의 팔각형 형태의 건물로 다시 지어졌다.  당시 고대로마시대에는 이런 팔각형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을 흔하게 볼 수 있었다.  6세기 경에 들어서 마르스 신전은 기독교의 성전으로 다시 재건축 되었다.  그러던 것이 피렌체의 정치와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면서 1159년에 이르러서 기존의 8각형 형태를 기본으로하는 바로 지금의 건물로 새롭게 증축되어 완공되었다.

  이는 기존의 건축물로 보자면  피렌체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 건축물이었으며,  마지막 개축의 연도로는 북쪽 성벽에 기대어 건축된 산 로렌초 성당에 이어 두번째였다.  이는 현재 두오모 자리에 먼저 있었던 산타 레파타라 성당보다도 앞선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건축물인 것이다.

  화강석 재료들은 인근의 로마광장에 있던 것들을 가져다 썼으며,  외벽을 아름답게 마감한 형형색색의 대리석들은 피렌체 주변에 들어서있던 묘지에서 가져다 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근교 피에솔레에서 가공한 대리석들을 사들여 오기도 했으나  상당부분은  인근의 고대건축물을 헐어서 가져다 쓴것으로 본다.

  산 지오반니 세레당의 안쪽으로 들어서면 그야말로 전신을 짖누르는 웅장함에서 나오는 커다란 압박감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마치 로마의 판테온에 화려한 금박장식을 입혀놓은 착각이 들 정도이다.  전체적 내부의 풍경은 상층부의 작은 채광창들을 통해 들어오는 빛의 양이 적어서 조금은 어둡고 무거운 분위기가 전신을 휘감듯이 느껴진다.  참으로 거대하게만 느껴지는 팔각뿔 형태의 전체 천장면을 단 하사람의 베네치아 출신의 프렌체스코파 수도사 한명이 아주 오랜 세월에 걸쳐 창조해 낸 모자이크 벽화라는 사실에 절로 감탄이 터져나온다.  자코포 다 토리타(Jacopo da Torrita) 수도사의 작품이다.

  신에 대한 한  수도사의 간절하고도 고귀한 사랑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절로 가슴이 뭉클해지는 순간이다.

  마치 이스탄불 하기야 소피아 성당에 있는 심하게  훼손되어 짐작조차 되지않는  모자이크의 원형을 대하고 있는 듯한 벅찬 감동이 몰려들어왔다. 

  그것은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 무명화가作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의  화형식) <퍼 옮>

 

                                                                             ---  시뇨리아 광장의  사보나롤라 화형 장소 표지석. <퍼 옮>

 

 

 

 

 

 

 

 

  '스승님께서 세례당에 계시지 않는다는 것을 어떻게 아셨습니까?'

  '어디까지나 짐작이었을 뿐입니다.  선생님께서 들어가시면서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조금 위험할 수 도 있는 약속이지만  교회에서 지켜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고요.  교회에 어느이가 있어서 선생님을 위험으로부터 지켜야만 한다면 환한 대낮에 버젓이 걸어들어가시는 보습을 드러내놓으셨는데  뻔히 알면서 그곳에서 회합을 하시겠습니까?  이곳에서 약속을 잡아 들어가시기는 하셨지만 곧 남의 이목을 피해 모처로 옮기시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 저의 짐작이었습니다.  다행 스럽게 제 짐작이 맞아떨어진 것뿐이구요.'

  세레당 외관을 둘러본 후에 내가 홀바인에게 세례당 내부를 둘러보자고 요청하였을 때 그는 에라스무스가 안에 들어가셨다면서 내부 구경하는 것을 거절했었다.  하여 나는 이미 선생님이 그곳을 떠나 다른곳으로 옮겨가셨을 것이라 추측하고 그에게 강권하여 내부를 둘러본 연후에 방금 광장으로 나온 상황이었다.

  밖에는 겨울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었다.

  스산하게 쌀쌀한 바람까지 불어오니 춥게 느껴지는 강도가 이루말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홀바인과 나는 잠깐이었지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면서 구경을 하는 재미에 흠뻑 빠져있었다.  홀바인 또한 다방면으로 상당히 박식한 사람이었다.  거기에다 영국을 비롯한 유럽의 여러지역을 여행한 충분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

  잠시 추위를 피하고 허기를 모면해볼 요량으로 우리는 인근의 주막으로 들어갔다.  뜨거운 스튜 한대접에 빵 반덩어리와 장작이 타오르는 난로가 우리를 강하게 잡아당기고 있었다.

  허겁지겁 뜨거운 소고기 스튜를 연실 입안으로 퍼 나르던 홀바인의 시선이  벽면에 걸린 찬장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져 있는 그림에게로 향했다.

  얼핏 보아도 인근의 시뇨리아 광장에서 누군가를 화형식에 처하는 풍경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의 직업이 화가가 아니라고 누가 흉이라도 볼까봐서일까?  홀바인은 아주 예리한 눈초리로 뚫어져라 그 그림을 살피고 있었다.  그리고 이내 주인을 따로 불러서 그 그림에 대해서 물었다.

  '제가 어렸을 때의 일이라 자세한 내용은 잘 모르겠지만  부친에게 전해 들은바에 의하면  30여전이 조금 더 지난 시기에 실제로 여기 피렌체에서 벌어졌던 사건을 그린 기록화라고 합니다.  시뇨리아 광장에서 사보나롤라 라는 사람을 화형식에 처했는데,  그날 어마어마한 인파가 시뇨리아 광장에 몰려들어서 화형식을 지켜보았다고 합니다.  저는 당시 매우 어렸기에 기억조차 희미하지만 분명 제 부친께서 저와 함께 그 화형식을 참관했었다고 하셨지요.  그림은.......  이름을 알지 못하지만  한동안 저희 여인숙에 머물고 식당에서 끼니를 해결하던  어떤 화가가 대금을 모두 지불하지 못한 채 떠나면서 대신 남겨준 그림입니다.  제 부친의 흔적도 남아있고 해서 그냥 그곳에 올려두고 매일매일 바라보고 있습니다. 사실은 그 화형식 날에 어마어마하게 피렌체 사람들이 가득 몰려들었다고 했는데 그림에는 아주 썰렁하게 몇몇 사람만 그려져 있습니다.  그 내용까지는 모르겠지만........  그림을 그린 화가도 그 점에 대해서는 아무런 설명도 남기지 않고 떠나갔다고 하더군요.........'

  '피안재님. 저 그림속에서 화형을 당하고 있는 사보나롤라 라는 사람을 아십니까?  왠지 아실것 같은........'

  '저 역시 막연하게 전해들은 이야기지만.........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대해서 조금은 알고 있습니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가 그의 이름이군요.  그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도미니크회 소속의 수도사였습니다.  또한 시대를 앞서가는 종교 개혁가 이기도 했습니다.  신부이면서 시대를 앞서가는 인문주으자 였으니 어쩌면 에라스무스 선생님과도 어느 정도는 비슷한 면이 있다고 갑자기 생각이 드는군요.  하지만 사보나롤라는 대단히 특이한........  좀 별난 사람이었습니다.  허영과 독선도 강했고.........  더하여 그는........  정치 권력에 집요하게 집착하는 경향이 매우 강한 사람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는 대단히 위험한 사람이었다는 말씀으로 들리는군요?  그래서 저렇게 비극적으로 생을 마감하게된 것입니까?'

  '사보나롤라 수사에 대해서 말씀드리자면 저에게 조금의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많은 이야기를 전해듣기는 했었지만 나름으로 이를 정리해 본적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곳을 나가서  대성당의 쿠풀라를 오르기로 했었으니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에 나름 좀 생각을 정리해서 쿠풀라에 오르고 나서 아는바를 다시 설명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기대하겠습니다.  이유 없이 저 그림속의 상황에 강한 호기심을 가지게 되는군요.'

  '이것만은 지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사보나롤라는  마키아벨리 선생님과도 아주 밀접하게 얽혀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분들은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동지였습니다.  정치 권력을 지향한  사보나롤라는 결국 화형장에 끌려나갔고,  정치와 권력에 대해 수없이 많이 비판을 해댔지만 권력욕에 초연했던 마키아벨리 선생께서는 감옥에 갖히게 된것이지요.'

  '그렇다면 스승님도 사보나롤라를 아시겠군요?"

  '그 누구보다도 사보나롤라를 잘 아시고 계실것입니다.'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쿠풀라에 올라  내려다보는  지오토의 종탑과  피렌체 전경.

 

 

 

   

 

 

 

 

 

 

 

 

 

  지롤라모 사보나롤라(Glrolamo Savonarola, 1452~1498)는 페라라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다분히 독선적이며 과격한 성격의 소유자였던 그는 23세에 도미니쿠스 수도회에 들어가 인문학과 철학. 의학을 공부했다.  30세에 수도회의 명을 받고 피렌체의 산 마르코 수도회에 파견되었으며,  이곳에서 높은 학식과 철저한 금욕생활로 명성을 얻었다.  점차 명성이 퍼져나가면서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인근의 도시들을 돌면서  공화주의와 정치적 자유를 기반으로 하는 설교를 하기 시작한다.  1490년에 산 마르코 수도회로 돌아온 사보나롤라는  피렌체를 절대적 권력으로 지배하고 있는 메디치 가문을 신랄하게 비판하기 시작했다.  그는 비판을 넘어 로렌초 2세 메디치의 만행을 성토하고 교회의 세속화와 타락을 향한 신랄한 비판의 수위를 점점 높여가기 시작했다.

  주변 정세의 흐름에 남달리 예리한 판단력을 가졌던 사보나롤라는  머지않아  혼돈의 이탈리아를 차지하려는 강력한 외세의 침략이 있을것이라는 예언을 퍼트리고 다녔다.  메디치 가문과 귀족들은 사보나롤라를 제거해 버리려는 음모까지 꾸미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그의 예언처럼 마침내 프랑스의 샤를 8세가 6만의 군대를 이끌고 쳐들어 왔다.  삽시간에 피렌체는 점령되었고  자신만의 안위를 위해 점령군과 타협하려던 메디치를 향해 군중들이 폭동을 일으켰고  그 중심에 사보나롤라가 있었다.  로렌초 2세 메디치는 가문을 이끌고 허겁지겁 밀라노로 도망쳤다.

  하루아침에 승리자 집단의 우두머리로 급부상한 사보나롤라는  중간 계급을 주체로 하는 공화정부를 만들어 귀족정치를 근절시키고 정치적 민주화를 도입하고  종교의 세속적 타락을 금지하는 일종의 종교개혁을 실현하기 위한 피렌체의 자치 법률을 재정하기에 이르렀다.

  로마의 바티칸은 기겁을 하고 놀랐다.  피렌체에서 벌어진 이러한 일련의 행동들이 대외적으로 명분을 얻어서 퍼져나가기 시작하면 교황의 권위나 왕정정치나 귀족정치는 그야말로 심각하고도 치명적인 사태를 맞이할 수밖에 없게되는 것이었다.

  교황 알렉산드로 6세는  사보나롤라를  로마로 소환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신변의 위협을 직감한  사보나롤라는  교황의 명령을 거부했다.  교회와 정치 권력에 대한 기반을 흔들어대는  사보나롤라의 행동에 위기를 느낀 교황은 사보나롤라에게  대중 앞에서의 설교 중단을 명령했다.  하지만 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열정을 가지고 계속적으로 자신의 신념을 설파해 나가기 시작했다.  결국 교황은 그를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하지만 여기에 굴하지 않고 사보나롤라는  피렌체 시민들을 지지를 등에 업고 피사와의 한판 전쟁을 일으켰는데 크게 참패하면서 그의 입지에 커다란 상처를 입게 되었다.  거기에다 도망친 메디치 가문이 호시탐탐 복귀를 꿈꾸면서 다양한 방법을 동원해 사보나롤라를 코너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천성적으로  허영심과 강한 독선을 가졌던 그가  한동안 정치와 권력의 맛을 본 후였는지라........  결코 뒤로 물러나거나 타협하거나 양보하여 들지 않았다.  노골적인 그의 집착과 야심에 하나 둘씩 피렌체 시민들의 마음이 떠나가기 시작했다.  메디치 가문의 모략도 점점 심화되었다.

  로마 교황청의 최후 통첩이 피렌체 공화국에 도착했다.

  피렌체가 스스로 사보나롤라 문제를 해결하지 않는다면  교황의 권위로  피렌체 시 전체를 교회에서 파문시키겠다는 통지문이었다.  허겁지겁 공화정부 지도부는 사보나롤라를 체포했다.  그리고는 교회 법정에 세워서 교황이 지명한 사람들에 의해서 유죄 선고를 내렸다.

  지롤라모 사보나롤라는 1498년 5월 23일 피렌체 시뇨리아 광장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광장 한가운데 화형식 장소 표지석이 놓여있다.)

 

  현대에 이르러 지롤라모 사보나롤라에 대한 재평가 작업이 대단히 활발하게 벌어지고 있다.

  일부는 그를 프로테스탄트 운동의 선구자라고 평한다.  또한 일부는 로마 카톨릭의 파행을 종식시키고 본래의 초기 카톨릭으로의 회귀를 부르짖은 정통 복귀운동자 라고 평가하기도 한다.  아울러 지극히 일부는 그를 평가하여  종교적인 신분을 이용하여 종교의 타락과 귀족계급의 파행을 성토하는것을 기회로 자신의 신분 상승과 정치권력에의 편승을 노리던 야심가로 보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그가 르네상스 시기의 종교계 뿐만이 아니라 예술과 인문학적 사상계에 미친 여향은 결코 작지않다고 하겠다.

  그를 어떻게 보고 그를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아직도 다분히 당신 개개인의 몫이다.(이 여행기에서는 다분히 나만의 주관적인 판단을 기반으로 한다.)

 

 

 

 

 

 

  '듣고 보니 마키아벨리 선생님과는  정치적 이념을 같이 나눌 수는 있겠지만  그것들을 실행함에 있어서는 너무나 큰 차이가 있는것을 느끼겠군요.  스승님에게 대입을 시켜본다고 해도  종교와  종교적 신념에 대해서도 변화와 개혁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방법론에 들어가서는 너무도 큰 차이를 느끼겠습니다.  이것은 루터 목사와 스승님 간의 상호 교통하지 못하는  차이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근본적인 문제인것 같습니다.'

  '인간에게는 신이 내려준 가르침이나 규정을 재고하거나 판단하거나 새롭게 만드는것 자체가 불가하다고 들었습니다. 그것은 엄연히 신(神)만의 고유한 영역이니까요.  신께서 스스로 개선안을 만들어 새롭게 내려주지 않는 한, 왕조가 바뀌던 인간의 환경이나 가치관이 바뀌던 그것은 영원히 불변이라고들 하지요.  하지만 과연 그럴까요?  제가 알기로 신께서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신 사건들에서 그후로 너무도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구약성경으로 치자면 욥기 이후로 신께서는 거의 인간사에 직접 개입하지 않으셨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여전히 삼위일체설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부하지만.........  구세주께서 부활하신 사건에서부터도 일천오백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 오랜 세월동안 신께서는 어떤 새로운 요구도 없었고  새로운 가르침도 더는 없었습니다.  다만 교황의 권위라는 막강한 대리권자가 있었을 뿐이지요.  자신을 낮추어 신의 대리자라고 합니다.  하지만 현실속에서 보자면  그는 신의 대리자가 아닌  신 자신처럼 생각하고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가 신을 대신해서 근본 교리를 마음대로 해석하고 심지어 새로운 규정을 신의 처지에서 만들고 믿는 사람들에게 절대적 복종하는 믿음을 강요하기에 이르렀습니다.  그 사이에서 신교와 구교의 다툼이 생겨난 것이지요.  그것이 바로 선생님의 고민이시기도 하구요.'

  '마치 스승님을 대하고 있는 듯합니다.  혹시 직인이 되시기 전에 수도사이셨습니까?  사보나롤라의 결과로 비교해 보자면  피안재님께서는 신교도 지지자 이십니까?  아니면  정신을 차리고 초기 기독교로 되돌아가야 한다는 구교도 회귀운동자이십니까?'

  '저는 신교도도 구교도도 모두 아닙니다. 신교도도 구교도뿐만 아니라 소아시아의 이슬람인들까지도  야훼라는 신을 모두 믿고 따르고 있다고 하는데........  제가 태어난 먼 동방의 조선이라는 나라에서는 상제(象帝)라는 신을 하늘처럼 받들어 모시고 있습니다.  그 분이 바로 저의 신(神)입니다.'

  '상제(象帝)라고요?  그분은 어떤 신이십니까?'

  '지극히 높은곳에 계시는 존엄하신 분이십니다.  하지만 야훼라는 분에 비하자면 많이 다르지요.  야훼라는 분은 직접 모습을 나타내기도 하시고 계율도 내려주시고, 복종을 요구하시면서 때로는 손수 엄한 징벌도 마다하지 않는 분이시라지요?  형상도 보여주셨고 이름도 가지셨다지요?  하지만 상제께서는 이름도 형상도 직접적인 지시나 요구도 없으십니다.  인간사에 직접 관여하신 바도 없답니다.'

  '이름이 없다고 하시면서  상제라고 부르지 않으셨습니까?'

  '그 분을 지칭할 아무것도 없기에 사람들이 그분을 도대체 어떻게 불러야 할까 고심끝에 결정하게된 것입니다.  상제라고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그 분은 인간들에게 무엇을 주셨습니까?'

  '기도와 명상을 통해서 인간의 참된 도리라는 깨달음을 주셨지요.'

  '너무 형이상학적인 말씀이군요.'

  '지극히 보편 타당한 진리가 아닐까 저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피렌체 대성당의 쿠풀라에 올라서 내리는 겨울비에 착잡하게 젖어들고 있는 피렌체 도심의 전경을 내려다보면서 홀바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중이었다.

  쿠풀라로 올라오는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아직 앳된 소년의 티를 다 벗어내지 못한 수도승 한명이 땀을 흘리면서 올라왔다.

  '혹시 독일에서 오신 화가님을 찾고 있습니다.'

  '내가 독일에서 온 한스 홀바인이라는 화가요.'

  '신부님께서 급하게 전하라시는 전갈이 있어서 왔습니다.  급하게 어디 먼곳으로 여러날 출타를 할지도 모르겠으니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으면 좋겠다고 전하라 하셨습니다.'

  '길을 떠나신다고?  언제 어디로 떠나신다고 다른 말씀은 없으셨는가?'

  '그렇게만 전하면 된다고 하셨기에 저는 더 이상 아는바가 없습니다.'

  말을 전한 젊은 수도승은 서둘러 올라왔던 계단을 타고 사라졌다.

  '만나자마자 저는 서둘러 숙소로 돌아가야만 하겠습니다.  스승님께 무엇인가 몹시 다급한 일이 발생한 것 같습니다.  애초 생각은 좀 더 둘러보다가 저녁에 함께 스승님을 찾아뵙고 제가 그간의 자초지종을 설명하면서 소개를 드리고 식사라도 함께 하면서 스승님과 피안재님과의 자릴 만들어 보려고 생각하였습니다만........  부득이 다음으로 미루어야만 하게되었습니다.  인연이 되면 언제 어디서고 다시 만나겠지요.  반가웠습니다.'

  '선생님의 일과 안전이 우선이지요.  살펴 가십시요.  다시 뵐 수 있기를 소망해 봅니다.'

  홀바인이 그 뚱뚱한 몸을 이끌고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한참 지나 두오모 광장을 뛰어가는 홀바인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신의 가호가 함께 하시기를...........'

  허공을 올려다 본다.

  훅 하고 한숨과 함께 한웅큼의 입김이 허공으로 솟았다가 이내 사그라져 간다.

  오랜 세월동안 이역만리 낯선 이국땅에서 파도에 쓸려 떠다니는 심정으로 살아오는 동안에도 애써 감추고 외면하면서 살아왔던 어떤 처절하리만치 쓸쓸한 감정이 페부를 헤집고 마구 쏟아져 들어왔다.

  이런날은 자신을 추스르기가 참으로 힘겹다.

  건너편의 지오토에 종탑을 물끄러미 건너다 본다.

  어쩌면 이런날은 심신을 좀 거칠고 힘겹게 마구 다루는것도 한 방법이지 싶다.  그래서 내친 걸음으로 마저 건너편의 종탑에도 올라가 보기로 한 것이다.

 

  '신의 섭리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내일은 또 무슨 일이 내 앞에 벌어질 것인가?'

 

 

 

 

 

 

 

 

 

 

 

 

 

 

 

                                                 --- 지오토의 종탑에 오르면 그제서야 부르넬리스키가 설계한  피렌체 두오모의 돔이 제모습을 드러낸다.

 

 

 

 

 

 

 

 

 

 

  르네상스 시대의 피렌체에는 바실리카 양식에 별도의 파사드를 아름답게 장식한 교회건물이나 팔각형 지붕의 돔 양식 건물만 있는것은 아니었다.  판테온에서 영향을 받은 작은 돔 건물들은 혹간 있었지만,  아직은 피렌체 두오모가 등장하기 이전의 시기로서 돔 양식이 곧 두오모의 전형이 되는 그런 시기는 시작되지 않고 있었다.

  당시 피렌체에서 가장 크고 웅장한 건물은  북유럽에서 전해 내려온 고딕양식의 전형을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는 팔라초 베키오(베키오 궁전) 였다.

  이렇게 차갑고 냉정해 보이는 건물이 또 있을까?

  이 요새풍의,  마치 작은 성채와 같아 보이는 건축물은 당시 이탈리아의 시대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아주 중요한 증거물이기도 하다.  도시 국가끼리의 다툼과 전쟁이 끊이질 않았고,  한 도시국가 안에서도 신분과 지위와 정당과 부유한 가문끼리의 반목과  대결이 그치지를 않았다. 암습과 암살과 무리를 이끈 무장 공격이 수시로 벌어졌다.  그러자 모든 가진자들은 자신들의 집무실이나 생활공간을 하나의 성채로 만들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바로 (팔라초 베키오)나 유명한 (바사리 회랑)이 바로 그런것들이다.

  시정부는 요새와 같은 거대한 흉벽위에  총과 대포를 쏘는 구멍을 배치하였고,  용병을 모집했으며 그것으로 모자라 주변을 감시하는 높은 감시탑을 쌓아 올렸다.  그들은 그 거대한 흉벽 뒤에 숨어서  언제 기습을 해올지 모르는 정적들과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가혹한 수탈에 신음하는 민중들의 분노로부터 다소나마 안심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높은 탑은 시민들의 자부심을 나타내는 도시의 상징이라고 떠들어댔지만,  기실은 자신들의 최후 방어수단이었던 것이다.

  피렌체의 팔라초 베키오나  씨에나의 푸불리코 궁전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팔라초 베키오의 경우 13세기 피렌체 시청으로 쓰기 위해 피렌체 두오모를 설계한 캄비오에 의해서 설계되고 착공 되었다. 14세기를 넘어서  공화정부와 메디치 가문의 대립과 권력의 위치가 왔다갔다 하면서 저마다 자신들의 안위를 위하여 점점 성채처럼 개축과 증축이 이루어 졌다.  높은 종탑을 추가하면서 전형적인 중세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로 자리 잡게 되었다.

 

  토스카나의 양대 자존심  피렌체와 씨에나.

  과거 피렌체가 팔라초 베키오를 세우자 경쟁 도시인  씨에나도 서둘러 팔라초 푸불리코를 완성했다. 거기에다 씨에나 시민들은 높이 102m나 되는 만자의 탑을 세워서 피렌체의 베키오 팔라초를 위에서 내려다 보게 되었다고 자랑했다.  이런 과거의 상처가 다 아물기도 전에 씨에나가 거대하고 아름다운 두오모를 완공했던 것이다. 시에나는 자랑스러운 함성을 질러댔고  피렌체는 경악과 분노에 치를 떨었다.

  결코 씨에나에는 뒤지며 살 수 없다고 결사의지를 불태우던 피렌체는 산 지오반니 두오모(세례당)을 씨에나의 두오모 보다 더 크고 화려하게 증축하기로 하고  그 첫사업으로 두오모의 동문을 교체하는 콩쿠르를 열었다.  기베르티가 청동문 제작에 들어갔지만..........  곧 그들은 깨닫게 되었다.

  두오모의 증축만으로는 결코 시에나의 두오모에 앞설수가 없다는 사실을 그들은 인정할 수 밖에 없게되었다.

  피렌체가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도는 없었다.

  무조건 씨에나 두오모를 능가하는 두오모를 피렌체가 가져야 한다는 결론 외에 다른 방도는 없었다.

  마침내 그들은 시간과 비용에 구애받지 않는......  오로지 씨에나 두오모를 능가하는 위대한 새로운 대성당을 꼭 완공하고야 말겠다는 집념으로 다시 뭉쳤다.

  피렌체는 팔라초 베키오를 건축한 바 있는  훌륭한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1240~1310)에게 새로운 대성당의 설계와 건축을 맡겼다.

 

  '꽃의 성모 마리아'라는 뜻을 간직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Cattedrale di Santa Maria del Fiore)의 탄생은 이렇게 캄비오의 손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기록에서 또 한명의 위대한 천재의 기상을 엿보게 되었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그리고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은 모두 같은 시기에 같은 건축가에 의해서 시작되었다.

  각기 전혀 다른 양식을 바탕으로 하는 건축이었다.  전형적인 고딕 양식의 재현과  새로운 돔 양식의 탄생을 예고하는 순간이었다.

  캄비오 또한 부르넬리스키에 버금가는  위대한 르네상스의 건축가였다.

 

 

 

 

 

                                                         ---  팔라초 베키오는 관청이기 이전에 애초부터 요새화된 성채로 지어진 대표적 고딕양식의 건축물.

 

 

                                                                                    --- 전형적인 고딕양식의 멋을 은근히 내보이는  산타 크로체 성당(캄비오 설계)

 

                                                                         --- 새로운 돔 양식의 전형을 보여주게되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캄비오 설계)

 

 

 

 

 

 

 

  르네상스 시대 피렌체 고딕양식의 대표적 건축물은 팔라초 베키오이고  가장 대표적인 교회 건축물은 바로 부르넬리스키가 설계한 산타 크로체 성당(Basilica di Santa Croce)이다.  당시의 겉으로 드러나는 고딕양식은 정문으로 상징되는 파사드를 고딕양식으로 꾸미는 일이었다.  하지만 산타크로체 성당의 경우처럼 파사드 위에 뾰족한 탑이 몇개 올려졌다고 그것이 곧 고딕양식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커다란 오해이다.  산타크로체 성당의 경우는  파사드의 뾰족탑 보다도 내부의 장식이 전형적인 고딕양식이다.

  피렌체의 경우가 그러하다는 예이고,  르네상스 새대의 대표적 건축양식이라면 당연히 피렌체에게 커다랗게 충격을 안겨준  (씨에나 대성당)이 가장 대표적인 고딕양식이라 하겠다.  그리고 이 기풍은 마침내 세계에서 가장 크고 아름답고 뛰어난 고딕양식 교회건물인 (밀라노 대성당)으로 귀결된다.

  하지만 일부 건축학계에서는  밀라노 대성당의 경우 매너리즘적인 회화처럼 대단히  화려하고 웅장하기는 하나 고딕양식 특유의 장점을 살린 진정한 멋은 부족하다고 평가하면서,  오히려 씨에나 대성당이야 말로 장엄하면서 우아하기까지한 이탈리아의 대표적 고딕양식 교회건축물이라 평가한다.

  그런가하면  씨에나 대성당 보다도 1백년이나 앞서서 유럽의 북쪽에서 전해내려온 고딕양식을 비로소 본격적으로 이탈리아에 흡수하고 재창조한 대단히 멋지고 값어치 있는 고딕양식의 교회건축물이 바로 여기 토스카나 지역에 번듯하게 자리잡고 있다.

  지극히 내 개인적인 소견으로는 웅장함에서는  씨에내 대성당에 비견할 바가 못되겠지만,  소소한 아름다움과  고딕의 전형을 따르거나 충실하고자 하는 노력적인 면을 살펴볼 때 씨에나 대성당 보다 1백년이나 앞서서 처음으로 이탈리아에서 전형적인 교딕양식이 자리잡게 되었음을 나타내주는 산교본 같은 교회 건축물로 바로 (오르비에토 대성당)을 꼽겠다.  세월의 가치가 그대로 묻어나는 대단히 아름다운 건축물이다.(다음이나 다다음 지면에서 소개할 예정)

 

 

  산 조반니 세례당의 증축만으로는 씨에나 대성당을 앞지를 수 없다고 판단하던 시기에 현 두오모 자리에 있던 산타 레파라나 성당(Santa Reparata. Florence)이 심한 훼손을 넘어 붕괴직전에 놓이게 되었다.

  대성당 재건을 위한 피렌체 두오모 위원회는 마침내 레파라나 성당의 자리에 시에나 두오모를 능가하는 새로운 교회 건축을 하기로 결정했다.  위원회는 피렌체를 대표하는 건축가 아르놀포 디 캄비오(Arnolfo di Cambio.1240~1310)에게 새로운 교회의 설계를 의뢰했다.

  1296년 설계된 최종안에는 세개의 거다란 중랑이 놓였으며, 마지막 중랑은 팔각형의 커다란 돔 아래에서 이루어지도록 설계되었다.  비록 처음 설계는 지금의 크기보다 작았고,  후에 건축되는 과정에서 설계가 여러번 변경되고 크기도 커졌지만,  캄비오는 설계에는 분명하게 지금 형태의 돔이 처음부터 설계 되어 있었다.  바야흐로 바실리카 교회 건축물에서 고딕이 첨가되었고,  다시 새로운 돔 양식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었다.  다만,  캄비오로서는 바실리카풍의 중랑 세개의 건축은 세세하게 설계하고 착공하고 진행을 시도 하였지만,  돔에 대해서는 외형적인 설계만 그렸을 뿐  실제 준공에 따른 세부 설계는 이루어지지 못했다.  돔 건축은 자신의 영역이 아니라 판단하고   후대의 누군가에게 숙제로 남겨 둔 것이다.  착공된지 6년만에 설계자이자 건축총책임자인  캄비오가 사망했다.  공사는 약 30년간 중단되었다.

  양모 상인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가 독점적 후원자로 나타나면서 지오토 디 본도네(Giotto di Bondone)의 주도하에 일부 설계변경과 건축이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세례당의 청동문(처음의 동쪽문)을 제작했던 아드레아 피사노가 참여하게 되면서 여유가 생긴 지오토는 대성당과 함께 종탑(지오토의 종탑)까지 설계와 동시에 착공했다.  동시에 산타 크로체 성당까지 함께 건축이 진행되어 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3년 후에 지오토가 사망하자 이 3개의 프로젝트는 이번엔 피사노의 지휘하에 실행되었으나  곧 유럽 전역에 불어닥친  흑사병으로 인해 모두 중단되는 위기를 맞게된다.

  140년이나 걸린 두오모의 건설은 책임자가 계속 바뀌어 나갔다.  피사노가 사망하자 탈렌티가 맡아서 우선 종탑을 완성했다.  탈렌티의 뒤를 이어서 조반니 라포 기니가 뒤를 이었고 또 다시 설계가 변경되었다.  이 후로는 여러명의 건축가들이 함께 프로젝트 그룹처럼 팀을 이루어 진행을 이어갔다.  라파라타 성당이 헐렸고  그 자리에 네이브(신랑)이 만들어졌다.  결국 1418년  돔을 제외한  피렌체 두오모가 완성되었다.  남은것은 이제  돔 뿐이었다.

 

 

 

 

 

 

 

 

 

 

 

 

 

 

 

 

                                                                     ---  도미니코 디 미켈리노作  (단테의 신곡.  초기의 벽화를 현재의 캔버스화로 옮겼다)

 

 

                                                                                     --- 캄비오의 파사드 설계안.  19세기 재 공모에 의해서 현재모습으로 완공.

 

                                                                                                                     -- 피렌체 두오모 지하에 잠든  돔 설계자  브르넬리스키.

 

                                                                                                                                                   --  부르넬리스키의 돔 설계안.

 

 

 

 

 

 

 

  1419년 양모 상인 길드인 아르테 델라 라나(Arte della Lana)가 후원하는 두오모 돔 완성을 위한 콩쿠르가 열렸다.  산 조반니 세례당의 동문을 위해 열렸던 콩쿠르에 이은  피렌체 두오모 위원회가 주관하는 두번째 콩쿠르였다.  첫번재 콩쿠르로 부터는 18년 만이었고,  캄비오가 두오모의 설게와 착공을 한지는 어언 117년의 시간이 후른 뒤였다.

  첫번째 콩쿠르에서 낙선한 부르넬리스키는  도나텔로와 함께 로마로 떠났었다.  곧 피렌체로 돌아온 도나텔로는 이때부너 기베르티의 청동문 제작에 합류하였다.  그러다가 훗날 돔 응모때에는 다시  부르넬리스키를 돕는다.   한편 로마에서의 브르넬리스키는  판테온에 주로 머물면서 고대 건축을 연구하였다.  그가 로마에서 돌아 온지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다시 콩쿠르가 열린것이었으며,  기베르티는 한참  청동문 완성을 눈 앞에 두고 마무리 작업이 한창이던 시기였다.

  신의 장난이었을까?

  두번째 콩쿠르의 마지막 결선에도 역시  기베르티와 부르넬리스키가 남았다.

  평생 건축을 해본적이 없던 기베르티였지만  항상 자신의 천재성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고  또 부르넬리스키가 돌아와서 콩쿠르에 응모한다는 소식에 라이벌 의식때문에 기어코 동 설계 응모에 참여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역시 기베르티의 응모 소식을 들은 부르넬리스키 또한 강한 라이벌 의식에 불타올랐다.

  수성과 탈환.  다른 말로 하자면 복수와 건재함의 과시.

  결론은 이번엔 코시모 메디치의 절대적 지지를 받고있는 부르넬리스키가 아슬아슬하게 이겼다.

  기베르티는 부르넬리스키의 제출안이 전혀 입증이 안된 허망된 계획이라고 신랄하게 비판을 가했다.  하지만 부르넬리스키는 자신의 설계안을 자신했다.

  부르넬리스키의 기획안은 건축역사에서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혁신적인 방법이었다.

  기둥이 즐비하게 늘어선 하나의 바닥면 위에 돔을 얹는것이 아니라, 이중벽 구조의 8각형으로 디자인된 독특한 형태의 돔이 스스로 드럼이라는 공간 위에 올라앉는 참으로 기가찰 획기적인 방안이었다.  세간의 혹평이 쏟아졌다.  참혹한 실패가 에견되었다.  하지만  위대한 건축가는 이 새로운 공법을 자신했다.

  지면으로부터 받침 기둥도 없고,  작업을 위한 높은 비계(작업 받침)도 없이  돔이 스스로 자신의 모습을 만들어 가는 것이 어디 상상으로라도 가능한 일이겠는가?  예상되는 돔의 무게만도 37.000톤이 넘었다.  이 세상에서 37.000 톤의 무게를 지탱할수 있는 기둥이나 장치는 무엇이 있을까?

  그야말로 기둥이나 비계 설치 없이 37.000톤의 무게를 하늘에 매달겠다는  부르넬리스키의 생각은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그때까지는 이 세상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원을 통해 스스로를 지탱하는 수평아치의 기술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거기에 그는 무거운 건축자재들을  그 높은 곳까지 나르기 위하여 새로운 기계장치를 밟명하게 되었는데,  바로 오늘날의 엘레베이터의 효시라 할만하다.

 

  이번에도 위원회는  최종 결선에 오른 두 사람의 공동작업을 추천했다.

  승자인 부르넬리스키는 허락했다.  하지만 1차전에서 패자로 거절했던것과는 다르게,  이번엔 패자인 기베르티 또한 흔쾌하게 조수역을 자진하고 나섰다.

  <이유와 결과는 예전의 여행기에서 이미 거론한 적이 있어서  생략.......>

 

  1420년에 시작된 돔 공사는 1436년에 완성되었다.  로마의 판테온이 지지구조물 위에 세워진 원형돔이었다면,  피렌체 두오모 돔은 지지구조물 없이 지어진 세계에서 가장 큰 석재돔이다.  어쩌면 이 돔이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건축중의 가장 인상적인 작업이 아니었을까?

  흔히 사람들은  브르넬리스키가 이 돔을 완성함으로써 비로소  피렌체 두오모가 완성을 보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파사드의 부벽을 조각으로 채우는 일이나  두오모의 내부 인테리어는 물론 미완성인 상태였지만,  분명 두오모는 아직 완성되지 않았다.

  필리포 브르넬리스키(Filippo Brunelleschi)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최종 완공자가 절대로 아니다.  아직 대성당은 완공되지 못했다.

  돔 위에 설치할 랜턴(빛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돔 위에 설치하는 작은 첨탑)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다.

 

  두오모 위원회는 또다시 세번째 콩쿠르를 열었다.  돔 위에 얹혀질 랜턴 설계 응모였다.

  이번에는 세 사람이 최종 결선에 올랐다.

  돔의 완공자인 브르넬리스키와  두사람간 1승1패의 전적을 안고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로렌초 기베르티와 새로운 도전자 안토니오 차케리가 가세했다.

  이 경연에서도 부르넬리스키가 돔의 완공을 배경으로 아슬아슬하게 승리했다.

  그런가하면 이 대목에서 아주 묘한것이  부르넬리스키의 절대 지지자였던  코시모 메디치의 마음이 돌아서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하지만 그 정확한 이유는 전하여 지지 않는다.  이 경쟁에서 심사위원회 소속이던 코시모 메디치는 예전처럼 열렬하게 부르넬리스키를 지지하지 않았다.  대신 일찍 낙성했지만 별로 알려지지도 않은 아주 젊은 새로운 건축가 미켈로초(Michelozzo)를 적극 후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는 틀림없이  부르넬리스키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터인데 결국 그 속내막은 밝혀진 것이 없다.  얼마 지나지 않아  코시모 메디치는 자신의 궁전인 (메디치 리카르디 궁전) 건축을 공표했고  수많은 건축가들의 설계안이 접수되었다.  하지만 최종 경쟁에서  코시모는  부르넬리스키의 설계안을 거절하고  젊은 신예 건축가  미켈로초에게 리카르디 궁전 건축을 맡긴다.  피렌체에 새로운 신데렐라의 탄생이었다.

  아무튼,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 위에 얹을 랜턴의 설계자는 부르넬리스키로 최종 낙점 되었다.

  부르넬리스키는 곧바로 랜턴 완공작업에 돌입했다.  그런데 몇달 뒤 브르넬리스키가 갑자기 사망했다.

  그 후로 약 15년 동안 랜턴 공사는 전혀 진척을 보이지 못했다.  잦은 건축가의 교체와 또 건축가가 교체될 대마다 설계안이 변경되었던 때문이다.  전하여 지기는 최초의 부르넬리스키 설계안이 그만큼 어려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기는 한다.  1461년 부르넬리스키를 대신해 코지모의 지지를 받았던 미켈로초가 끝내 랜턴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8년의 세월이 더 흐른 후에 랜턴의 꼭대기에 십자가와 구리 공을 베로키오가 만들어 올림으로써 최종적으로 왕성되었다.

  이때 베로키오의 조수로 구리공 작업에 참석하였던 젊은이가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였다.

 

 

 

 

 

 

 

 

                                                                                                         -- 자신이 만든 돔을 올려다보고 있는  필리포 부르넬리스키 동상 

 

                                                                                                                                  -- 피렌체 두오모 설계 건축가  아르놀로 디 캄비오. 

 

 

 

 

 

 

 

 

 

 

 

  피렌체 두오모의 돔(쿠플라)은  돔의 양식이 어떻든 또는 건축의 역사가 어떠하든지 당시 중세시대상에 비추어 획기적인 구조와 건축 기술상의 이유로  르네상스를 대표하는 하나의 아이콘으로 당당하게 자리잡고 있다.  부르넬리스키를 르네상스를 가장 대표하는 위대한 건축가의 반열에 올려놓은 걸작이다.

  내부와 외부의 두 개의 궁륭을 사용해서 서로 상호간에 힘을 보강해 줄 수 있게 절묘하게 결합을 시도했다는 부분에서 실로 어마어마하게 중량이 감소된다는 점에 있어서 놀라운 충격을 받았다.  전통이라 치부되는 과거의 성공적인 결과물에 만족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세밀한 관찰과 연구 후에 과감한 시도로 연결시키고자 하는 그의 숭고한 창조정신에 매료된다.  물론 여기까지 오기 이전에 코지모 메디치라는 든든한 후원자를 만나서 이미 이전에 산 로렌초 성당의 성물 유치실을 층축하면서 충분히 중간 단계를 잘 거치는 과정을 밟게되었다.  그는 커다란 성당을 추상적인 공간체들의 집합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추상적 공간체들을 단순화 시키면서 단순 배수가 되도록 변형시켰다.  혁신적인 사고와 발상의 전환이었다.

  부르넬리스키는 곧 잘 주변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훌륭한 건축이란  건물의 중요한 척수(尺數)........ 즉 모든 구조마다 올바르고 정확한 비례(단순화 시킨 정수 비율)를 부여하는 것이 가장 기본이다.  고대인들보다 우리가 더 진보했고 발전했다고 믿고 있지만 실은 이러한 비결에 있어서는 고대인들이 지금의 우리보다 훨씬 완벽했다.  하여 나는 부단히 고대의 건축들을 보는것에 만족하지 않고 정확하게 측량하고자 했으며,  그것으로 부터 새로운 것을 얻고자 노력했다.  판네온은 나에게 커다란 스승이었다.'

  훗날 미켈란젤로는 당시의 도나텔로가 이미 조각을 공간의 구속으로부터 해방시키고 있었다고 평가했다.

  또한 건축을 음악적 조화와 시각적 대체물로 세분하여 생각하는 부르넬리스키 건축관으로 부터 깊은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부르넬리스키에 의해  일대 혁신을 몰고 온 원근법의 활용을 통해 건축에 다가서는 과학적 접근 방법은 마사치오와 같은 초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에게도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조각과 회화에 있어서도 원근법의 활용이 점차 보편화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브르넬리스키는 르네상스의 위대한 선구자 중에 한 사람이었다.

  아울러 기베르티와의 만남과 경쟁이 서로에게 커다란 창작의욕을 불러 일으키는 결과를 낳았고  열정으로 승화된 이들의 경쟁이  찬란한 결과를 낳았던 것은 아닐까? 

 

 

 

 

  중세 건물이 늘어선 피렌체의 도심 구석구석에는 미처 사람의 손길이 닿지 못한 허름해 보이는 세월의 흔적이 호히려 나름의 운치를 자아내고 있다.

  지금 피렌체의 오후는 일년 전 내가 처음 이곳을 방문하던 때와는 완연히 다르고 친숙하다.  평온하다.

  큰 도로에는 이따금씩 트램이 오가고 간간히 자전거나 오토바이를 탄 사람들이 지나간다.  굿은 날씨 때문인지 길을 걷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무척이나 빠르게 느껴진다.

  후두두둑.

  갑자기 다시 떨어지기 시작하는 굵은 빗방울에 전신을 내맡긴 여행자의 어깨위로 무거운 추위가 내려 앉는다.

  무척 춥다.

 

  6백년 전 이곳엔..........

  피렌체와 씨에나,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드로 다빈치, 그리고 기베르티와 부르넬리스키, 메디치 가문과 파치 가문, 마키아벨리와 피티 가문,  그리고 카톨릭과 개신교 간에 치열한 경쟁과 다툼이 즐비했었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다.

 

 

 

 

 

 

 

 

 

 

 

 

                             ----  (르네상스 산책)은 다음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