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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이탈리아) 걷거나 혹은 쉬거나.... '플로렌스'

by 피안재 2019. 2. 24.

 

 

 

 

 

 

 

 

 

 

 

 

 

 

 

 

 

 

 

 

 

 

 

 

  예술은 무엇인가?

  무엇을 가지고 예술이라 하는 것인가?

  과연 예술이 무엇이건데,  일상에서 버젓이 예술을 입에 달고 사는 사람을 바라보는 보편타당한 우리네 보통사람들의 마음속에는 괴리감이라고 해야할까 질시라고 해야할까 하는 일종의 미움과 분노가 은근히 깔려있다. 우리의 시선과 그들의 가치기준은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다른것일까?

  '예술(art)'은 딱 꼬집어서 뭐라고 말하기가 좀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예술이 아닌것(non art)'은 우리가 좀 쉽게 알 수 있지 않을까?  예술을 빼고 난 나머지가 해답이 아니겠는가?  그럼 그것을 뭐라고 해야할까?

  그래도 여전히 한마디로 정의하기가 어렵다?

  미술관이나 박물관에 가면 눈에 띄는 하나하나가 모두다 예술작품으로  보여지고 받아들여 진다.  심지어 화장실의 변기나 비누받침 하나까지도 '혹시 미술품을 이렇게 부러 설치해 놓은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게 만든다.

  엑스포나 신상품 발표회에 가보라.  모두가 하나같이 어찌나 화려하고 고급스럽고 부티나는지........  하지만 이 눈부신 물건들을 예술품이라고는 하지 않는다.  어디까지나 '상품'이다.  독창성의 하나뿐인 작품은 '예술품'이고,  대량 생산성의 고귀한 작품은 모두 '상품'이라 부른다.  이게 정답일까?

  예술품을 생산한 사람은 '예술가'이고,  고귀하지만 상품을 만든 사람은 '기능사'이다.  최고로 존칭해서 '장인'이다.

  하나의 도요에서 '청화백자'와 '백자 매화문 병'을 굽는가 하면  생활 자기인 사발과 종재기(종지)를 굽는 사람은 '예술가'일까?  아니면 기능인인 '장인'일까?

  우리나라 박물관에는 '고려청자'와 '이조백자'가 예술품으로 사랑 받지만,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서민 부엌에서 약탈해간 이빨이 나간 최하급 생활도자기였던 종재기(작은 사발)이 최고의 예술품 '국보'로 사랑받고 있다.

  이것이 예술이다.

  어떻게 생각하면 '예술이란 의미' 보다는 '예술적 가치 판단의 기준이 과연 무엇인지'가 정말로 어려운 과제일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예술가가 아니다.

  예술가적 자질도 없을뿐더러, 애초부터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당신도 예술가가 아니라고?

  당신에게도 예술적 자질이나 유전인자가 아예 없었다고?

 

  그렇다면 우리는 아예 '예술'과는 동떨어진........  예술과는 전혀 상관없는 다른 동네에서 전혀 다른 삶을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 또한 아니다.

  절대로 그런것이 아니라고 나는 생각하고........  내게는 다른 나만의 방법이 있음을 말해주고 싶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예술가라고 하는 그런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똑같은 인간이라는 존재이다.  나는 예술가는 아니지만 나도 예술을 사랑할 수 있고 충분히 예술을 즐길 수 있다.  창조적인 자질이 없다해서 예술을 누리거나 즐길 수 없다는 말을 나는 결코 인정 할 수가 없다.

  왜냐면?

  '예술' 이라는 것이 꼭 필요로 하는 것중에 '예술가에게 없는 것'이 '나에게는 있기 때문'이다.

  내가 가진것을 예술가에게 주지 않는한 '예술'은 더 이상 없다.  그렇게 되면 나도 더 이상은  예술을 누리거나 즐길 수가 없게된다.

  여기에서 '내가 가진것'은 '당신에게도 똑 같이 있다'는 사실을 당신이 아직 모르고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당신도 예술과 전혀 동떨어진 존재는 아니다.

  다만 아직은 낯설고 접근하는 방법을 잘몰라서 다소 멋쩍고 서먹서먹할 뿐이다.

  예술이 꼭 필요로 하는 것을 가진  당신은 결코 예술과 동떨어진 무관한 사람일 수 없다.  이제부터 어느정도의 시간과 시행착오와 관심과 부단한 노력으로 당신이 예술에게 다가가는 길만이 남아있을 뿐이다.

  예술가는 결코 우리보다 우월하거나 이질적인 존재가 아니다.  그렇다고 일개 기능인으로 폄하해서 될 존재도 결코 아니다. 그들의 창조적 헌신과 열정을 우리는 존중해야만 한다.  우리가 예술가를 존중해 준다면   그가 창조하는 훌륭한 작품을 우리가 함께 공유하면서,  어느새 우리도 존중받는 존재가 되어 있을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자신의 작품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리석 속에 갇혀있는 인물을 대리석으로부터 해방시켰을 뿐'이라고.

  우리는 그가 죽어있는 돌덩이를 자르고 망치와 정으로 쪼고 깍아내고 다듬어서 마치 살아있는 듯한 멋진 작품을 만들었다고 생각했다.  기능적인 그의 행위만을  주로 본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그 돌덩이에 마음과 의미를 담았던 것이다.  그뿐만이 아니라 유명 예술가들은 저렇게 멋진 표현을 곧잘 한다.

  이제 우리도 그런 멋진 말을 공부하고 되새기고 이해하려 노력하면 되는 것이다.  그것이 예술을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많은 작품을 우선 보아야 하고  공부도 해야하고 가이드나 책이나 남으로 부터 배우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결코 부끄러운 일이 아니다.

  예술에게로 다가가는  최소한의 노력이다.

 

  그럼 마지막으로 '예술이 필요로 하지만  예술가에게는 없고  우리에게만 있는것이 무엇이냐'를 이야기 해야만 하겠다.

  예술은 예술가에게서 탄생한다.

  하지만 예술가의 손길 안에서는 결코 최종적인 완성을 볼 수가 없다.

  예술이란것은 최종적 단계에서 대중(public) 이라는 것을 꼭 필요로하는 태생적 한계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의 대중은 더 넓은 의미의 '관중'을 뜻한다.

  예술가가 예술 작품을 만드는 행위는 (아주 희귀한 극소수의 예술가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누군가에게 보여주고 인정받기 위한 창조행위인 것이다.

  대중에게 보여주고 인정받아서 또 다시 제작 주문이 들어오고 후원자가 생긱고 지속적인 수입이 유지되어야만  비로소 보다 활발하고 정상적인 창조활동이 계속적으로 유지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의 작품이 보다 널리 보여지고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 예술행위의 최종 완성을 부여해주고 성취해 줄수 있는 사람은 바로 우리 같은 '관객'이다.  어떻게 생각하자면 '관객' 또한 일종의 창조행위에 의미를 부여하고 직간접 참여를 하게되는 행위활동인 것이다.

  이제 당신이나 나나,  우리는 (예술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는 사람)이 결코 아니다.

  '예술세계'라는  새로운 경험을 받아들일 어느정도의 겸허한 마음과  약간의 시간과 노력을 경주한다면,  머지않아 우리도 예술 비평가나 기타의 전문가 못지않은 경지에 오른 자신을 발견하게 될 것이다.

 

 

 

 

 

 

 

 

 

 

 

 

 

 

                                                         ---  후고 반 데르 구스作   (포르티나리. 제단화)

 

                                                                                        ***   (포르티나리  부분)  ***

 

                                                                                ***  (포르티나리  부분)  ***

 

                       

                                              --- 알브레히트 뒤러作  (동방박사의 경배)

 

                                                                ***  뒤러의 (자화상.  뮌헨 피나코테크 미술관 소장 <퍼 옮>)  ***

 

                                                               *** 뒤러의 동판화  (기사의 죽음과 악마,  보스턴 미술관 소장<퍼 옮>)

 

                                    --- 안토니오 다 코레조作   (이집트로 피신하는 길에서의 휴식.  성 프란체스코와 함께)

 

                                          --- 파르미자니노作  (목이 긴 성모)

 

                                            ---  타치아노作  (우르비노의 비너스)

 

                                                                        ***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부분도  ***

 

                                                    ---  루카 시뇨렐리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와 막달라 마리아)

 

                                         ---  라파엘로作  (검은 방울새의 성모)

 

 

 

 

 

 

 

 

 

 

 

  르네상스는 지금도 우피치 미술관에 그대로 살아서 숨쉬고 있다.

  하지만  우피치 미술관의 수많은 작품을 하나하나씩 모두 둘러보면서 세세하게 이야기를 나눌 수는 없는것이 현실이다.  하여 그 중에서 유독 눈에 들어왔던 일부 작품만을 감상해 보기로 하여야만 하겠다.

  또한 우피치 미술관 하나로만 르네상스를 모두 이야기 할 수 있는것도 아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는 비단 회화(그림)에만 녹아 있는 것이 아니라  조각과 건축,  그리고 피렌체라는 도시 환경과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삶과 역사속에 골고루 녹아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이젠 나름 의미있는 작품을  가려서 일부만 살펴보기로 하겠다.

 

  새로운 문예사조가 피렌체에서 이제 막 꽃을 피우기 시작하였을 때, 젊은 나이에 비극적 종말을 맞이했던 불우한 천재가  한 명 늦깍기 나이에 화단에 등장했다.  '후고 반 데르 구스(Hugo van der Goes)'가 바로 그 사람이다.

  그는 다빈치의 스승인 베로키오와 연배가 비슷한 르네상스 초창기 사람으로  폴랑드르 지역에서는 일찍부터 소질을 인정받았으나 꾸준하게 정상적인 작품활동을 거의 이어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그는  정서가 매우 불안정하고 심성이 시시각각 다르게 변하는 극도로 심한 우울증을 앓고 있었다.  나이 40세가량 되었을 때,  결국은 모든것을 접고 평수도사가 되어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다소 안정을 찾은 그는 수도원에서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고  이때 탄생한 그림이  '토마조 포르티나리(Tommaso Portinari)'를 위하여 완성한 거대한 대작이다.  여기에서의 '포르티나리'는 '제단화'를 뜻한다.

  그림속의 배경에도 독특한 분위기가 정말로 살아있는것 같고 배경이나 등장인물 하나하나가 매우 사실적으로 아주 정밀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작품을 완성한 후,  그는 자살을 시도해 주위를 경악 시겼다.  겨우 목숨을 건졌으나 끝내  이 불우한 천재는  다시 얼마 지나지 않아서 끝내 생을 마감했다.

  1480년 이 그림(포르티나리)가 피렌체에 도착하였을 때, 수많은 예술가들에게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으며  여러 화가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urer)를 이야기 할 때 따라붙는 수식어는 '르네상스를 보다 풍부하게 만든 사람'이라는 표현이다.  나도 이 표현을 좋아한다.  그만큼 뒤러는 한마디로 삶이 아름다운 예술가라고 하겠다.  뒤러는 르네상스의 한복판 피렌체에서 태어난 사람이 아니다.  아울러 그는 화가이기는 하나  굳이 따지자면 그를 위대한 판화가라고 해야하겠다.

  독일 뉘른베르크 금세공 집안에서 태어난 뒤러 또한 직업이 금세공사였다.  하지만 그의 마음속에는 오로지 미술에 대한 열망으로 가득했다.

  결국 그는 미술공부를 위하여 네덜란드로 떠났는데 알세스와 바젤에 머무는 동안에 세바스티안 브란트의 책에 뒤러가 제작한 목판화가 삽입됨으로써 갑자기 유명해지기 시작했다.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와 일상에 전념하던 그에게 한 평론가가 그를 '야생적이고 아직 다듬어지지 않은 나무'라고 평했다.

  뒤러는 다시 베네치아로 떠났다. '미술도 교양 과목중의 하나이다'라는 교훈을 이탈리아 예술가들로 부터 받아들인 뒤러는  성숙되고 완성된 인간이야말로 진정한 미술의 이상에 다가갈 수 있다는 깨닮음과 함께 다시 뉘른베르크로 돌아온다.  이 때부터 그는 정식으로 화가라는 직업을 선택한다.  이 시기에 그가 발표한 작품이 바로 (기사의 죽음과 악마)라는 동판화였다.  이 작품은 뒤러의 명성을 널리 알렸을 뿐만 아니라 유럽 판화의 역사에 하나의 기념비적인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뒤러는 한번 더 베네치아에 가고 싶어졌다.  아직도 공부를 더 하고싶었던 것이다.  결국 그는 다시 베네치아에 갔고 그곳에서 '타치아노' '조르조네'를 만났다.  하지만 그가 가진 목마름을 해결해 준 사람은 따로 있었다. 뒤러는 '조반니 벨리니'를 만남으로써 더 많은것을 깨닭을 수 있었으며 '회화에서 가장 뛰어난 사람은 벨리니다'라고 고백하기에 이른다.   뒤러는 베네치아에서 왕성하게 활동했다.  그의 명성이 온 유럽에까지 퍼져나갔다.

  베네치아 공회의가 그에게 베네치아에 영원히 머물러 주기를 청하며 매년 200 두가트의 연금을 지급하겠노라고 청해왔다.

  1506년 늦가을 뒤러는 조용히 뉘른베르크로 귀국길에 오른다.

  그에게는 남은 여생동안  고향 뉘른베르크를 위해서 해야할 역활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고 생각해서였다.  그는 뉘른베르크의 소중한 자산이자  독일 미술사에 대단히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훌륭한 예술가였다.

  또한 뒤러는 자신의 모습(像)에 마음이 끌린(?) 최초의 예술가였다.  13세 이후로 그는 수많은 자화상을 그린  다분히 르네상스적인 기질을 가지고 태어난 매우 독특한 사람이었다.  그의 많은 자화상 중에서  정면을 향해 엄숙한 자세로, 마치 그리스도를 연상케하는 이상화된 표정과 용모의 자화상(1500년 작품)은 통상적 의미의 '자화상의 영역을 훨씬 초월했다'라고 평가된다.

  말년에 뒤러는 이미 브르넬리스키에 의해서 널리퍼진 '원근법'에 심취해서 여생의 말미를 온통 원근법을 이론적으로 완성하는데 쏟아붓게 된다.  조금 유치해 보이는 수많은 실험과 이 내용을 판화로 만들어 논문에 싣기도 했다.  현재에 관점으로 보자면  중학교 과학실험실의 수준으로 좀 유치해 보이지만,  그가  이때 고안한 장치가 시작이 되어 오늘날의 사진기가 발명되었다고 본다면 그 또한 대단히 흥미로운 일인 것이다.

 

 

  역사를 산책하다보면 꼭 정설이라고 할 수는 없겠으나 제법 일리가 있는 통설 중에는 '역사적으로 훌륭한 왕이나 아버지에게서는 꼭 삐닥하거나 많이 부족한 후손이 나오게 되어있다'는 이야기가 있다. 이는 곧 쇠락이나 퇴보로 연결된다.

  인류문명사에 너무도 찬연했던 르네상스가 전성기를 구가하는 정점을 넘어서면서 이런 문제가 생겨나지 말란 법이 없었던 것이다.

  미술사가들은 쉽게 이렇게 단정했다.  '미켈란젤로가 사망하면서  찬란했던 르네상스는 막을 내렸다' 라고 말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 한 사람이 르네상스의 중흥을 말년까지 이끌고 갔던 것은 결코 아니다.  그는 마지막 주자였을 뿐이다.  보티첼리. 도나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 라파엘로 등,  르네상스를 전성기로 이끌던 사람들이 하나 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대략 1525년 전후를 르네상스의 마지막이라고 본다.  이후로 약 75년이 흐른 1.600년 경에 새로운 문예사조인 바로크 양식이 등장하기 이전까지의 커다란 공백 기간을 '르네상스 이후의 공백기' '암흑기' 또는 '매너리즘의 시대'라고 부른다.

  여기서의 매너리즘은  본래의 말 뜻과는 다르게 다소 부정적인 조롱의 의미를 담고 있다.

  르네상스라는 거대 부흥기에 힘입어 거기에다 작은 손재주(기교)만을 보태서 한동안 명맥을 이어가며 빌붙어서 먹고 살았다는 비아냥조의 의미를 담고있다.  그리고 이말은 처음에  르네상스으이 소면과 함께  피렌체라는 거대상권이  베네치아로 이동해 가면서 문화의 중심도 베네치아로 점차 옮겨가게 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은 피렌체에서 활동하던 예술가들에 비해서 어떤 혁신이나 도전 같은 노력을 상실한체,  그저 전해져온 르네상스 위에다가 자신들만의 작은 기교를 얹어서 연명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당시  베네치아에서 활동하던 예술분야를 통털어서 '매너리즘에 빠진 사람들'이라고 통렬하게 비판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누구 누구가 여기에 해당되는지는 새삼 거론하지 않겠다.

  이러한 매너리즘은 광범위하게 다른 분야에도 사용됐으며,  실례를 들어서 '누구는 매너리즘이 아니다'라고 한다면 그 또한 따져봐야할 문제가 상당히 대두되게 된다.  이처럼 르네상스 이후에 등장한 매너리즘에 대한 판단이나 이해는 매우 어렵고 복잡한 문제들을 수반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연장선사아에서 등장한 것이 바로 '파르미자이니노(Parmigianno)' 였다.

  쉽게 표현하자면  파르미자이니노는 <거울에 투영된> 세상의 모든 풍경에 깊게 매료되었다.  두 눈으로 직접 바라보는 세상이 아닌 '거울'을 통해서 들여다 보이는 세상에 흠벅 빠졌다.  그래서 그는 그 거울을 통해서 보이는 세상을 그림으로 그리기 시작했다.  두 눈에 보이는 세상이나 거울에 비친 세상이나가 그렇게 무엇이 크게 다를까 생각도 되겠지만,  그는 그렇게 관찰의 보조 수단인 거울을  보편적 평면 거울이 아닌 특별 제작한 다양한 볼록 거울들을 통해 보여지는 일그러지거나 왜곡(?)된 풍경이나 세상에 매료되었던 것이다.  볼록 거울을 통해 드러난 변형되고 왜곡된 사물의 모습 또한 정상적인 사물의 형상과 다를바 없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라고 그는 주장했다. 

  건축가 '바사리'에 의하면 '파르미지아니노는 연금술에 깊이 빠져들었고, 긴머리에 수염을 기르고 기인의 삶을 살면서 사람들로부터 무시당하고 지탄받고 외면 당하면서 거의 광인이나 야만인처럼 생활했다'라고 전해진다.  그는 37세에 요절했다.

  그의 대표작 (목이 긴 마돈다)는 로마에서 파르마로 돌아 온 후에 그려졌다.  길게 늘어난 목과 상아빛의 매끄러운 육체는  힘없이 무기력하게 흐드러지듯 움직이고 배경들 또한 어느것 하나 분명한 것이 없다.  그야말로 비현세적인 모습속에서 어떤 완성을 강요당하는 느낌마저 생겨난다. 바라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무엇인가 우울해지고 불유쾌해지는 묘한 여운을 남긴다.

  평론가들은 이 그림을 보고 '기교적인 면'에서 접근을 시도했고,  역시 매너리즘에 깊게 빠져든 본보기로 판단하기에 이르렀다.

 

  '티치아노 베첼리오(Titian)'는 라파엘로 이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르네상스 전성기의 화가이다.  그는 반세기 이상을 베네치아를 대표하는 미술가로  약 600점이 넘는 작품을 만들었다.  각 유럽의 황실과 귀족들로부터 주문이 끊이지 않았던 '꼭 소장하고 싶은 그림의 작가'로  언제나 최정상에 올라 있었다.

  르네상스 시대에 나체를 그림으로 표현하단는 것은 애초부터 대단히 위험한 발상이었다.

  하지만 르네상스라는 새로운 사조에 힘입어 마침내 '조르조네'가 미의 여신인 비너스가 목가적인 자연을 배경으로 잠들어 있는 누드화를 처음으로 세상에 선보였다. 여성이 나체로 드러누워 잠들어 있는 모습을 자극적인 성적 표현과 함께 과감하게 드러낸 최초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잠자는 비너스)가 그것이다.

  티치아노는  조르조네의 (잠자는 비너스) 작업에 직접 참여했었다.  조르조네와 함께한 작업에서 티치아노는 엄청난 충격과 감동을 받았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같은 주제와 비슷한 구도를 가지고 새로운 비너스를 창조하기로 마음 먹었다. (우르비노의 비너스)가 바로 그 작품이다.  그림의 구도나 느낌은 같은 작가의 작품이라해도 믿길만큼 상당이 비숫하다.  자연의 배경이 실내로 바뀌었고,  잠에서 깨어난 비너스가 자신의 요염함을 한껏 발산하고 있다. 이런 구도의 누드화 중에서 가장 완별하게 여성의 아름다움을 표현했다고 평가받은 이 그림은,  훗날  벨라스케스. 앵그루. 마네 등의 누드화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누드화에 대해서는 성(性)의 상품화라는 논란이 뒤따랐지만, 당시의 시대적 풍토속에서 표현의 자유를 얻기 위한 예술가들의 과감한 도전이었다고 보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라파엘로 산치오 산티( Raffaello Sanzio Santi)'가 37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하였음에도 그가 '르네상스 3대 거장'으로 손꼽히는 것을 보면 겉으로 드러난 드라마틱한 그에 관한 이야기는 별로 없어도  그가 작품을 통해  르네상스 미술사에 기여한 공로가 무척이나 크다는 것을 잘 알수 있다.

  라파엘로는 항상 미켈란젤로에 상반되는 인물로 비교되어 왔다.  미켈란젤로고 고독한 천재형이라면  라파엘로는 지극히 세속적인 풍류를 알고 즐길줄 아는 젊은 화가이자 꽃미남이었다.  결국 그는 술과 여자와 유흥에 깊이 빠져 요절하고 말았다.

  서정적이면서도 동시에 극적이고, 조소적 견고함과 회화적인 풍부함을 고루 갖추고 자신만의 독특한 회화적 아름다움을 펼쳤던 세속적 천재였다.  라파엘로에 대해서는 후에 어디에선가 좀 더 심도있게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우피치의 '바사리 회랑'은 모던한 분위기라는 것이 어떤것인지를 적나라하리만치 여과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애초 이 건물의 용도가 '트리뷰나'를 제외하고는  관청 건물로 지어졌으며,  바사리 회랑을 통해서 팔라초 베키오에서 피티 궁전까지 출퇴근 하는 통로였다고 생각하면 지금 이 회랑을 거닐고 있는 여행자의 심정으로서는 매우 오묘한 기분이 들 뿐더러,  마음은 지금 육백년 전 저만치 앞서 걸어가고 있는  코시모 메디치의 뒤를 따라 걷고있는 기분이 든다.

  'ㄷ'자로 지어진 우피치에서 양쪽의 전시실을 이어주는 회랑의 창을 통해서 밖을 내다보면 또한번 피렌체만의 멋진 풍경에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온다.  북쪽으로 건물의 안쪽을 바라보면  그야말로 웅장하고 멋드러진 우피치 내면의 모습이 보이고,  그 사이로  팔라초 베키오와  두오모와 종탑이 보인다.  남쪽으로 난 창문으로는 아르노 강 건너편의 언덕과 피티 궁전이 보인다.  서쪽 창문으로는  베키오 다리가 그림처럼 놓여있다.

  바사리 회랑을 통해서 오고가던 메디치 가문 사람들은 이곳에서  피렌체의 모든것을 바라볼 수 있었다.  언제나 피렌체의 모든것을 바라볼 수 있었고,  그리하였기에 메디치는 곧 피렌체였으며 이곳이 바로 피렌체 르네상스의 산실이었던 것이다.

  아름답다는 표현만으로는 여기 우피치를 이야기 하기에 무엇인가가 많이 부족한 느낌이 든다.

  바사리 회랑을 거닐다 보면 저절로........ 우피치가 여행자를 엘레강스하게 만들어 주는것만 같다.  이곳을 걸어나가면 내 신체의 어디에선가 저절로 모던함이 풍겨나올것만 같다.

  이런 감동과 느낌을 언제 다시 가져볼 수 있을까?

  우피치는 여행자의 가슴에 영원히 소중한 기억으로 남게될 것이다.

 

 

 

 

 

 

 

 

 

 

 

                                                  --- 미켈란젤로作   (성 가족.  Tondo Doni)

 

 

                                             ----  카라바조作    (이삭의 희생)

 

 

 

 

 

 

 

 

 

 

 

  '성 가족(Tondo Doni)'는 대단히 소중하고도 희귀한 작품이다.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가 이 세상에 남겨놓은  단 한점의 회화작품이기 때문이다.

  미켈란젤로는 평생동안 자신은 화가가 아니라 조각가 라고 천명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 같은 그림쟁이는 벽에다가 화려한 물감으로 치장이나 하는 사람들이고,  조각가야 말로  작품에 영혼을 불어넣는 진정한 예술가라고 할 수 있지'라고  늘 다빈치를 빗대서 낮게 평가했다.

  부득이한 사정으로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천지창조)와 벽화(최후의 심판)  두 점을 그리기는 했으나 그는 자신을 늘 조각가라 생각했다.  그림이나 그리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늘 저급으로 대하였으며,  이 세상에서 자신에 견줄 사람은 자기자신뿐이라는 신념으로 가득찬 매우 특별한 천재였다.

  세상은 이 두 명의 천재를 그냥 내버려둘리가 만무하였다.  결국 팔라초 베키오의 같은 방에 양쪽면으로 각자 그림을 그리게 하였는데......  미완성인 상태로 결국은 사라지고(?) 말았다.

  미켈란젤로의 유일한 회화작품  톤도 도니의 실제목은 (성가족)이다.  그의 특징인 인체의 과학적 접근에서 나오는 근육질의 신체묘사와,  선이 굵고 밝고 화사한 분위기를  그대로 잘 드러내고 있다.  이 작품은  피렌체의 부유한 상인이었던  도니(Agnolo Doni)의 주문을 받고 제작한 둥근(Tondo) 작품이란 뜻이 제목처럼 받아들여지고 있다.  회화를 극구 만류해오던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상이 아닌 그림을 꼭 주문해야했다면.......  과연 얼마 정도를 지불해야 했을까?

 

 

 

  내가 처음 (이삭의 희생)이라는 회화작품을 대하였을 때,  나는 이 작품이 당연히 '렘브란트'의 작품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카라바조(Michelangelo Merisi da Caravaggio) 만큼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다간 천재 또한 매우 드물것이다.  그러고 보니 그의 이름 앞에도 미켈란젤로가 붙는 것을 보면  천재이면서도 괴팍하고 훌륭한 예술가가 되려면 우선 먼저 이름에 미켈란젤로를 붙여야 하는것은 아닐까?  여타의 다른 예술가들처럼 그도 역시 자신이 태어난 곳의 지명을 이름으로 삼았다.  이탈리아 북부 페르가모 지역의 카라바조에서 태어났다.

  흔히들 카라바조를 이야기할 때,  그가 16세기 르네상스 시대의 마침표를 찍고 17세기의 바로코 시대를 연 화가로 평가한다.

  그런가하면 미술사를 통털어 가장 악마적이고 광적인 재능을 가졌던 비운의 천재 화가라고 기억한다.

  르네상스의 전성기를 지나면서 카톨릭 교회는  종교 개혁 이후 활발히 벌어졌고 파생되어가는 프로테스탄트(개신교) 활동으로부터 흔들리는 전통적 교인들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하여 회화를 통하여 기독교적 환상을 심어주는 활동에 주력했다.

  하지만 카라바조는 전면에 나서서 카톨릭의 전통을 부정하고 세속적이며 현실적인 인간 본연의 모습을 그의 작품속에 그려냄으로써,  카톨릭의 그릇됨을 통렬하게 그림을 통하여 비판했다.  불량배나 거지,  그리고 매춘부까지 자신의 그림속에 끌어들였으며  더하여  그들의 모습을 통하여 예수. 성자. 막달라 마리아를 표현해 내기까지 이른다.  곧 이는 엄청난 파란을 몰고 오기에 이른다.

  이런 그에 대하여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렸다.  예술가들이나 미술 애호가에게서는 뜨거운 갈채를 받았지만,  교회나 부유한 상인이나 실제 그림을 사 줄 사람들에게서는 외면 당하였다.  부와 권력이 아직은 교회(카톨릭)에 집중되어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그림에 등장하는 서민이나 하층 사람들에게서도 질시와 배격을 당하기에 이르렀다.   불량배와 거지와 매춘부들은  비참하기까지 한 자신들의 처지가  저렇게 버젖이 그림으로 드러나는 것이 극도로 꺼려지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다채롭과 화려한 르네상스의 시대적 화풍과는 달리, 주로 어두컴컴한 배경을 두고  그림의 중심이 되는 인물에게만 강한 스포트라이트를 비추어 극단적으로 뚜렷하게 명암이 대비되는 키아로스쿠로(Chiaroscuro) 기법을 창시했다.  이러한 독특한 기법은 바로코 시대의  루벤스나 렘브란트에게 영향을 끼치게된다.

 

  아들의 목을 짖누르고 칼을 들고있는 아브라함의 표정은 단호하다 못해 근엄하기까지 하다.  장적더미 위에 벌거벗은채 비명을 지로고 있는 이삭의 표정에서는 두려움이 역력하다.  천사는 손을 뻗어 칼을 든 아브라함의 칼을 저지하면서 다른 손가락으로  이삭의 머리위에 있는 숫양을 가리킨다.  천사의 손과 아브라함의 칼을 든 손과 이삭의 표정에 집중된 밝은 빛으로 인해서  살아있듯이 그림은 아주 드라마틱하게 전개되고 있다.  마치 우리 앞에 펼쳐진 드라마를 보고 있는것 처럼 모든것이 사실적으로 잘 표현되어 있다.  (이삭의 희생)이란 소재의 작품이 수없이 많음에도  유독 이 작품이 내 시선을 잡아끄는 것은 왜일까?

 

 

 

 

 

 

 

 

 

 

                                                        --- 카라바조作  (홀로페르네스를 참수하는 유디트)

 

                                                           --- 카라바조作   (메두사)

 

                                        ---    카라바조作  (성녀 루치아의 장례식.   시칠리아 시라쿠사  성 루치아 성당)

 

                                                       ---  카라바조作  (세례 요한의 참수.  몰타 요한기사단 성당)

 

                                                                      *** 세례 요한이 흘린 피 속에 감춘 작가의 서명  ***

 

 

 

 

 

 

 

 

  짧은 생을 사는동안 온통 광기에 사로잡힌 이 비운의 천재는 이 세상에 있는 온갖 모든 범죄라는 범죄는 모두 경험하고도 모자라 끝내는 로마에서 살인을 저지르고 붙잡혔다가 탈옥을 하여 멀리 도망친다.  예술가중에는 자유분방함이 넘쳐서 방탕한 사람들이 더러 있지만,  카라바조는 가히 막장 중에서도 최후의 막장이랄 수 있는 최악의 광기 가득한 범법자였다.  천재적 예술가 기질은 가진.......

  나폴리를 거쳐서 몰타로 도망쳤다.  몰타에서 그는 (세례 요한의 참수)등 몇몇 미술사에 길이 남을 작품을 그려서  요한 기사단으로 부터 작위까지 받기에 이르렀다.  카라바조에게는 이 '요한기사단의 작위'가 대단히 중요했던 것이다.  카라바조는 몰타에서의 업적과 작위를 이용해 교황에게 사면 요청의 편지를 썼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터 그의 마지막 생애에 대한 이야기가 두 갈래로 나뉘게 된다.

  첫째는  교황의 조카로 부터 작품을 전제로 사면권 보장을 약속 받는다.  카라바조는 사면을 받기위하여 열심히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바로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우피치 미술관 소장)이다.  카라바조는 희망에 부풀어  그림을 들고 로마로 향하는 배에 올랐다.  이 시점에서 교황의 사면령이 떨어졌다.  그런데 중간 기항지에서  카라바조의 사면 사실을 통지받지 못한 관원에게 그만 체포되고 만다.  그림을 실은 배는 그대로 떠나고  카라바조는 감옥에 갇혔다.  며칠 뒤 풀려난 카라바조는 앞서 떠난 배를 따라잡아 그림을 되찾기 위하여 무리하게 강행군을 하다가 그만 병을 얻어서 객사했다.  그림속의 골리앗에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앞날을 미리 예측했던듯 비참한 최후를 암시하는 표정이 섬뜩 하다.

  둘째는 제버릇을 못버린 카라바조가 제대로 또 사고를 쳤다.  몰타 기사단의 임원과 싸움을 벌여 중태에 빠트린 것이다.  카라바조는 야음을 틈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친구에게로 도망쳤다.  이곳에 숨어서 (성녀 카타니아의 장례식)을 그렸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서 몰타의 추격대가 시라쿠사에 들이닥쳤고,  끝내는  몰타의 자객이 카라바조를 붙잡았는데  그의 얼굴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상처를 입히고 돌아갔다.  오래지 않아 카라바조는 엄청난 고통속에서 생을 마감했다.

  그의 나이 37세였다.

 

 

 

 

 

 

                                                       ----  카라바조의 유작  (골리앗의 머리를 들고 있는  다윗)

 

 

 

 

 

 

 

 

 

 

 

 

  플로렌스에서 풍겨나오는 르네상스의 향기가 아무리 매혹적이고 향기롭다해도 하루종일 벽과 천장만을 바라다보는 일은 결코 녹녹한 일이 아니다.

  신체적인 체력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있는 나 이지만, 지극히 일상의 내 모습이랑 내 태도랑 내 습관이랑 전혀 다른 행동은 한나절을 하고나니  이미 허리 쑤시고 다리저리고......  이래저래 장난이 아니다.  그래도 어쩌겠어?  돈도 시간도 아까운 생각에 어떻게는 반듯이 본전뽑아야겠다는 일념밖에......... 세월이 원망스러울 밖에........  내가 본래는 이런 사람이 아니었는데.........  야속한 세월이로고.........

  우피치를 벗어나 밖으로 나오니  싸늘하게 세찬 바람이 불고 겨울비가 제법 내리는 오후의 깊은 시간이 나를 반긴다.

  헐.  거의 하루를 우피치에서 보낸 결론이 나오는데.........

  우피치 미술관 끝부분에 위치한 카페테리아에서 낮에 카푸치노 한잔에 빵 하나로 점심대신 요기를 하긴 했는데 시장기가 요동을 친다.  거기다 날씨까지.....

  어차피 내리는 비를 한참을 더 맞고 싸돌아 다녔다.

  그럴밖에.......  우산은 없지. 숙소로 향하던  남은 계획대로 투어를 마저 하던........  어차피 패렌체는 어디로 향하던지 가는 곳이 모두 르네상스가 아니가?

  좀 심하게 내리는 비를 고스란히 맞으며  한참을 더 돌아다녔지만.........  오늘은 그이야기는 여기서  생략해야만 하겠다.

  춥고 비오는데 어쩌냐고?  이런것도 다 여행의 일부 아닌가?  고난도 즐기면 머지않아 추억이 된다고 누가 그랬다.

  그래서 비를 맞으며 한참을 더 돌아다녔는데......  그 이야기는 다음으로........

  이렇게 고난의 하루를 보낸 여행자에게는  스스로의 위로가 필요하다.  무엇으로?

  여행의 몇가지 즐거움 중에는  먹는 즐거움이란게 있다.  당연히 내가 아주 특별하게 여기는 분야이다.

  그래서 중간에 들렀던 여행지들을 모두 생략하고...........  중앙시장으로 향한다.

  중앙시장은  로렌조 성당의 근처에 있는,  근자에 들어서 여행자들에게 대단히 핫 플레이스로 떠오른 지역이다.  특히 이곳에서 한국여행자들에게 인기 있는 음식은  소(牛)의 내장을 이용한 햄버거가 대단히 인기가 있다.  유럽에서도 스페인과 이탈리아는 소의 부속물을 이용한 요리를 다양하게 요리해서 즐겨 먹는다.  우리와 매우 비슷한 음식 취향을 발견할 수 있다고 하겠다.  지난번 방문때는  그냥 지나쳐서 맛을 보지 못했는데 오늘은 한번 먹어 보아야 하겠다.

  로렌조 성당의 주변 골목으로는 길게 상설 노점이 항상 문전성시를 이루는데,  피렌체의 대표 자랑인  가죽제품 상권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여행자들이 꼭 들러보는 필수 코스이긴 한데,  내가 전해들은 전문가의 조언에 의하면........  우선 철이 지난 재고 상품이 주류를 이루고,  짝퉁이 넘쳐나고,  가격대가 속칭 바가지선이라는 것이다.  그 나머지는 오로지 소비자의 몫이라나 어쩌나.......

  그 가죽시장 노점의 한 복판에 바로 중앙시장이 위치해 있다.  거대한 건물 중에서 2층만을 리모델링해서 사용하고 있는 느낌이 든다.  우리나라 티비에서도 간혹  창고 건물을 의기투합한 젊은이들이 모여서 새로운 청년상권으로 리모델링해 장사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이 있었듯이......  속 내용까지는 모르겠으나  다분히 그런 분위기다.  1층이나 빈 점포는 버려졌거나 페허된 느낌인것을 보면 아마도 내 생각이 맞지 싶다.

  그런데 이 중앙시장 2층 푸드코트.........  생각보다 훨씬 매력있다.  소 부속요리 햄버거가 다가 아니다.

  그래.  이제부턴 오늘 고생한 여행자를 위해 스스로 위로하는 시간이다.

  알만한 사람은 이미 잘 알고 있자만, 여행의 즐거움 중에 아주 중요한 한가지가  맛있는 음식을 풍성하게 경험해 보는 즐거움인 것이다.  알 럽 트래블.

 

 

 

 

 

 

 

 

 

 

 

 

 

 

 

 

 

 

 

 

 

 

 

 

 

 

  이런게 여행 아닌감?

  알 럽 트래블.

 

 

 

 

 

 

 

 

 

 

 

 

 

 

           ----  피렌체에서의 다른 이야기는 다음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