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파로 북적이는 시뇨리아 광장에서 내가 두 사람을 만난것은 어찌 생각해보자면 하나의 꿈만 같은 일이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실로 그것은 뜻밖의 인연이었다.
그날 시뇨리아 광장은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 차고 넘쳤다. 피렌체 시민들 뿐만이아니라 인근 토스카나 지역의 주민들까지도 모두 몰려나온듯 했다.
'메디치는 곧 피렌체다.'
'메디치여 영원하라.'
모여든 사람들은 저다마 메디치를 외쳐댔다. 사람들은 팔라초 베키오를 향해 손을 흔들고 꽃가루를 뿌렸다.
베키오 궁전 앞에 임시로 설치된 연단에 피렌체에서 널리 알려진 명망있는 몇몇 인사들이 올라서자 광장은 다시 한 번 떠날듯이 함성소리로 가득 찼다. 가장 먼저 연단 앞에 나서서 입을 연 사람은 세련된 용모에 화려한 의상을 걸친 20대의 젊은 청년이었다. 모여든 사람들은 단박에 그 젊은이가 누군지 한 눈에 알 수가 있었다. 인근 토스카나의 아레초가 배출한 영재 바사리(Giorgio Vasari.1511~1574) 였다.
레오나드로 다빈치. 미켈란젤로. 브라만테. 도나텔로. 베로키오. 마사치오. 보티첼리 등 르네상스를 이끌던 피렌체 출신의 예술가들이 모두 세상을 떠난 무주공산이 된 이 도시에 새롭게 등장한 촉망받는 차세대 주자였던 것이다. 더우기 그는 보티첼리와 레오나드로 다빈치로 이어져내려온 메디치가가 후원하는 로얄 클래스의 새로운 수장으로 약관의 나이에 올라선 혜성처럼 떠오르는 존재였다.
바사리는 모여든 군중들 앞에 나서서 그동안 피렌체의 예술가들을 끊임없이 후원한 메디치가의 역사를 찬양하는 연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연설을 하는동안 그 자신도 이야기의 내용에 점점 도취된듯 목소리는 점점 켜져만 갔고 이따금 모여든 청중의 박수와 환호성이 뒤따랐다.
메디치.
메디치.
메디치.
군중들의 환호성이 어느정도 가라앉고나자 바사리가 손을 내저으면서 청중들에게 침묵을 요구하더니 이내 손가락으로 팔라초 베키오의 입구를 가리키면서 한껏 목청을 돋우며 단오하게 외쳤다. 입구의 왼쪽으로는 언제나 처럼 거대한 다비드 조각상이 우뚝 솟아 있었으며, 오른쪽으로 거대한 장막이 둘러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둘러쳐진 장막의 앞으로도 한 예술가가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이제 여기 모인 피렌체와 토스카나 시민들의 마음을 하나로 모아서 새롭게 다시 태어나는 피렌체의 영광과 메디치 가문의 공로를 기리고자 피렌체의 르네상스가 배출한 가장 위대한 조각가 바치오 반디넬리(Baccio Bandinelli.1488~1560)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새로운 피렌체의 상징물을 공개하겠습니다. 뜨겁게 맞아주십시요.'
바사리의 말이 끝나자마자 장막 앞에 방금 전에 새롭게 모습을 드러냈던 반디넬리가 손을 치켜 들었다.
허물을 벗듯이 높게 쳐있던 장막들이 쏟아져 내렸다.
그리고는 거대한 대리석 조각상이 엄청난 위용을 자랑하면서 마침내 모습을 드러냈다.
군중들의 함성이 다시 솟구쳐 오르기 시작했다.
'오호. 통재(痛哉)로다. 저 명리(名利)에 날뛰는 하루살이 같은 자들을 모두 어찌하면 좋단 말인가?'
순간 나는 매우 당혹했다.
이미 모두가 하나로 뭉친듯 일제히 열광하며 환호성을 질러대는 수많은 군중들 사이에서 난데없이 불쑥 등뒤에서 들려오는 어떤 사람의 마치 혼자 중얼거리는듯한 낯선 음성에 깜짝 놀란것이다.
'버러지만도 못한 인간들........ 바사리 네놈이나 반디넬리 네놈이나 모두가 미켈란젤로에게 적지않게 배웠고 얻은것이 있었음에도, 기껏 메디치가 던져주는 금전에 눈이 멀어 하루아침에 적당(賊黨)들의 앞잡이가 된단 말이더냐? 소위 예술을 한다는 놈들이 그깟 배고품을 못견뎌 권력의 시궁창으로 구걸하러 뛰어든단 말이더냐? 어허. 버러지 같은 놈들 눈에는 메디치가 천년 만년 이어질걸로만 보이는가보구나. 가련한 인간들 같으니라고.........'
나는 내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는 피렌체다. 거기에서도 시뇨리아 광장이다. 이곳은 메대치 가문의 안뜰이요, 지금 온통 메디치에 열광하는 절대지지자들 틈에서 아무렇지도 않은 듯 메디치를 힐난하고 그를 따르는 예술가들을 대놓고 욕할 수 있는 사람이 어디에 몇이나 있겠는가?
'너희들은 모른다. 언젠가 시간이 지나면 메디치는 잊혀지겠지만 미켈란젤로의 작품과 이름은 역사에 길이 남을 것이라는 것을....... 그리고 너희들은 감히 그와 견줄만한 위치에 결코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을.............'
호흡이 점점 가빠졌다. 도대체 어떤 사람이기에 저런 말을 마구 쉽게 뱉어놓을 수 있단 말인가? 더 없이 궁금하기에 얼른 고개를 돌려 바라보아야만 하겠지만 쉽게 고개가 돌려지지 않았다. 그저 중후한 낮은 음성을 가진 나이 지긋한 노인이 연상되고 있을 뿐이었다. 거기에 더하여 이 두렵고 황당하기까지한 노인의 음성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하는 꼬라지들을 보자니 아예 다비드 상까지 철거해버리자고 들겠구만?'
아니나 다를까? 노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군중들 어디에선가 성난 목소리로 다비드 조각상 철거를 주장하는 함성이 여기저기서 시작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 만세. 메디치 만세.
헤라클레스 만세. 메디치 만세.
미켈란젤로를 척살하라. 다비드를 철거하라.
미켈란젤로를 척살하라. 다비드를 철거하라.
----- 바치오 반디넬리 (헤라클레스 상)
--- 시뇨리아 광장 팔라초 베키오 입구.
--- 미켈란젤로 (다비드 상)
'신(神)에게서 벗어나 제대로 된 인간(人)이 되나 싶었더니......... 인간을 되찾기도 전에 세상은 모두 혼돈(亂)이요 온통 마귀(魔)들 뿐이로구나.........'
'하지만 저들이 다비드 조각상을 철거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순간 나는 아차 싶었다. 노인을 마주대하고 인사를 나눈 처지도 아닌것이 불쑥 남의 이야기를 훔쳐듣고는 참견하는 잘못을 저지르게 된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어허. 내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신게요? 그렇다면 어찌 그렇소? 왜 저들이 저 조각상을 헐어내지 못할것이라 생각하시요?'
'메디치 때문이지요. 미켈란젤로라면 로렌초 메디치나 피에로 메디치와 연관이 있다고 할까, 지금의 메디치와는 별반 연관이 없습입니다. 그런 정도의 인연을 내세워 복수를 한답시고 조각상을 부숴버리기에는 메디치는 이미 피렌체 권력의 정점에 올라있고 더 높이 오르려는 너무나 권력지향적인 사람입니다. 권력은 명분과 오랜 지속성을 가진 세간의 평판을 요구합니다. 지금의 메디치의 입장에서 보자면 미켈란젤로는 아무때고 그가 마음먹은 대로 죽이든 살리든 할 수 있는 권력자입니다. 그런 그가 지난날을 빌미로 치졸한 짓을 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거기에 한가지 덧붙이자면 메디치가는 뼛속까지 이미 장사를 통해서 돈을 벌어들이는 재주만큼이나 예술품을 통해서 부를 축적할 수 있는 방법과 세상의 평판을 얻는 방법을 잘 알고있습니다. 메디치가 돈과 권력을 추구하는 것을 멈추지 않는이상......... 적어도 그때까지는 조각상도 미켈란젤로도 안전할 것입니다.'
'허허허. 듣고보니 지극히 일리가 있는 놀라운 식견이요. 꼭 그렇게 되어야만 하겠구요'
그때였다.
어디 난리라도 난것처럼 군중들이 이리 쏠리고 저리 쏠리며 우왕좌왕대기 시작했다.
헤라클레스 동상 제막에 열관하던 군중들이 갑자기 다비드 상의 철거를 외치면서 몰려가 당장 쓰러트릴것처럼 밀어뜨리는가 하면 돌을 집어서 던지는 사람까지 등장하자, 공화국 기병대가 치안유지를 위하여 광장으로 쏟아져 들이닥친 것이다.
'로테로다무스 선생님. 여기입니다. 속히 이쪽으로 오세요. 제가 마차를 가지고 왔습니다.'
내가 고개를 돌렸을 때 검은 도포에 검은 모자를 쓴 노인은 흩어지는 군중에 이미 저만치 앞쪽에 떠밀려 가고 있었다. 비록 얼굴이 보이지는 않았지만 풍성한 검은 털모자가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저만치 앞으로 마차 한대가 서 있었고, 마차 문을 열고 살집이 풍부해 보이는 화려한 의상을 걸친 젊은 사내가 노인을 향해 손짓을 하고 있었다. 노인이 마차에 오르는 것이 보였다. 문이 굳게 닺치고 앞쪽 마부석의 마부가 말을 향해 채찍을 날려 출발을 알렸으나 밀려드는 인파로 인해 마차는 앞으로 제대로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공화국 기병대는 거칠게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있었다.
인파에 휩쓸리게되면 어디로 향하게 될지, 어떤 낭패를 겪게될지 모를 상황이었다.
차라리 마차 옆에 바짝 붙어서 광장을 벗어나는 것이 상책이지 싶었다. 마차 문에 매달리다시피 하면서 벗어나고자 했을때 웅성거리는 주변의 소음 사이로 마차 안에서 노인과 젊은이가 나누는 대화소리가 겨우 들려나오고 있었다. 소음때문에 두 사람이 큰 소리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것이다.
'이보게 홀바인(Hans Holbein.1497`1543). 자네가 이곳에 웬일인가? 영국에서 오는 길인가?'
'아닙니다. 선생님. 일년 전쯤에 바젤로 돌아와서 계속 머물렀습니다. 제가 돌아오기 전에 선생님께서 유럽여행을 떠나셨다고 들었지요. 선생님께서 여행 끝나고 돌아오시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얼마 전에 헨리 왕으로부터 궁정화가로 오라는 초청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바젤을 떠나 런던으로 가려고 준비하던 중에 선생님께서 친구분에게 보내신 편지로 선생님의 근황을 듣게 되었습니다. 로마에서 피렌체로 출발하신다고 적혀있더군요. 석달 전이었습니다. 그래서 헨리 왕에게 개인적인 볼일이 남아서 좀 시간이 걸리겠다고 편지를 보내고나서 서둘러 피렌체로 향했습니다. 다행히 선생님 편지중에 피렌체에서 묵으실 여관이 적혀 있어서 찾았지요. 오늘 아침에 겨우 도착했습니다.'
'이 사람아. 영국 왕이 부르면 냉큼 달려가야지 여기까지 왜 쫓아와? 나도 바젤로 돌아가던 길에 잠시 들른것 뿐이야. 그나저나 런던에 내 친구들...... 토마스 모어나 존 콜렛은 잘 있나? 나 때문에 혹 그들이 고초를 겪지는 않던가?'
'선생님께서 마르틴 루터(Martin Luther.1483~1546) 목사에게 정면으로 맞서 대립을 하셨든 일로 존 콜렛 선생님이 한동안 곤경을 격기는 하셨습니다. 토마스 모어 경께서 중간에서 애를 쓰셨지요. 선생님께서 여행을 하시는 동안에 루터 목사께서는 핏발까지 세우시며 금방이라도 죽일듯이 선생님을 성토하셨지만 시간이 지나자 좀 잠잠해진듯 싶습니다.'
'뜻은 좋아보이지만......... 루터. 그 사람 말대로 반목하고 대립하고 싸움질만 계속한다면....... 기독교의 미래는 참으로 암담해 질 것일세. 좀 참고 견디며 함께 방법을 찾아보고 함께 고통과 어려움을 분담해야지. 믿음을 혁명으로 변질시키고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것에 나는 동조할 수가 없네.'
'로마를 떠나오신 후에 계속 여기 피렌체에 머무셨습니까?'
'아닐세. 베네치아 출신 철학자인 귈리오 카밀로(Giulio Camillo)가 오르비에토 대성당에 머물고 있다고 기별을 보내왔기에 그곳에서 달포 정도 머물다가 그제 피렌체로 돌아온 것이었지. 서둘러 바젤로 떠날 참이었는데, 자칫 했더라면 서로 길이 어긋날뻔 했구만........ 아참. 자네가 다음번엔 내 그림을 그려주겠다고 했었는데...... 어디 가져왔는가?'
'못가져왔습니다. 선생님 초상화를 그리긴 그렸는데...... 바젤에 두고 왔습니다. 마음에 드실지 모르겠지만........'
'서둘러 바젤로 돌아가야 하겠구만. 자네 그림이 보구싶어서라도 말일세.'
그 이야기를 듣는 쯤에서 마차가 떠나갔다.
마차에 매달린 사람들 틈에서 더는 버티지 못하고 밀려나고만 것이다.
젊은 사람은 화가임이 분명한데....... 그렇다면 저 노인은 누구란 말인가? 로테로다무스 라는 이름을 들어 본 기억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 신학자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 로테로다무스 초상 (1466~1536)
--- 화가 한스 홀바인 자화상(1497~1543)
흔히들 '르네상스'를 '문예 대혁명'이라고 한다.
문화와 예술 분야에 커다란 변혁이 이루어졌다는 의미이다.
쉽게 생각해서 문화와 예술이라면 정국이 안정되고 생활이 어느정도 넉넉해진 상태(먹고 살만한 상황)에서나 가능한 일이라고 여겨진다. 하지만 아니었다. 르네상스는 이탈리아의 최고 전성기나 소문처럼 메디치가 라는 부호가 세상을 좌지우지할만한 위치에 서있을때 여가생활하듯이 취미생활하듯이 선심을 쓰듯이 베푸는 와중에 저절로 생겨나고 이루어진 한폭의 아름다운 풍경화 같은 것이 결코 아니라는 이야기다.
르네상스는 화가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인 예술분야와 시인과 소설가를 비롯한 인문학자들과 철학자와 음악가와 과학자들과 비평가들까지 합세한 인류 문명사의 전방위적인 대변화였다. 차고 넘치는 천재들간의 소설과도 같은 치열한 경쟁만으로 아름답고 절묘하게 수 놓아진 것은 결코 아니다.
그것은 생존이었고 때론 매우 치졸한 싸움이었다.
절대자인 신(神)에게서 벗어나 비로소 인간(人)을 되찾는 과정이기 이전에 그것은 당시를 살다 간 모든 인간들의 절박함과 간절함이 가득 담긴 한맺힌 절규였던 것이다. 한마디로 격동의 시대를 헤쳐나가기 위한 인간들의 몸부림이 르네상스 였다. 사람들은 그것을 통해 그동안 쌓인 울분을 토로했고 속마음을 내비추었으며 그것을 통해 고된 삶의 위로를 얻었고 더 나아가 희망을 품게되었다.
그만큼 르네상스의 이면에는 치열하고도 냉혹한 격동의 시대가 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15세기의 유럽은 영국. 프랑스. 에스파냐(스페인) 등의 3국이 주도권을 가지고 세상을 호령하던 시기였다.
동쪽의 소아시아 지역으로 오스만 투르크가 급성장하여 발칸반도를 점령하고 폴랜드를 침공하던 시기였으며, 유럽의 내부적으로는 여러 왕조간의 분쟁과 민족간의 분쟁으로 단 하루도 전쟁이 끊이지 않던 격동과 혼돈의 시대였다.
이런 와중에도 유럽의 한복판이자 노른자위 땅이었던 이탈리아는 국가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고 여러 군소국(도시 자체공화국)으로 나뉘어져 그들 안에서 또 분쟁과 전쟁이 끊이지 않던 시기였다. 유럽에서 가장 부유한 나라 이탈리아는 베네치아. 피렌체. 나폴리. 밀라노. 교황령(로마)으로 나뉘어 서로간에 피 튀기는 분쟁을 일삼던 시기였다. 유럽의 모든 강대국들은 호시탐탐 노른자위 이탈리아를 차지하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쳐들어갈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이러한 국제정세를 망각한 채 이탈리아의 5개 자치공화국들은 자신들만의 살길을 도모하기 위하여 서로 앞다투어 주변국들과 동맹을 맺어 세력를 과시하고자 하니 그리 오래지 않아 이 동맹의 관계라는 것이 서로간에 얽히고 얽혀서 대단히 복잡한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이러한 속사정을 망각한 5개 자치공화국의 수장들은 인접국의 동맹관계만 믿고 전쟁을 불사했다.
이는 호시탐탐 이탈리아를 침공할 구실을 찾고있던 주변 강대국들에게 더없이 좋은 명분을 제공했고 군대를 몰아 침공할 구실을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유럽의 모든 열강들이 자신들의 군대를 몰고 쏜살같이 이탈리아 반도로 몰려들었다. 5개의 자치공화국이 애초 바란것은 이런 사태가 결코 아니었다.
역사에 기록된바 대로 (이탈리아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그것은 지극히 사소한 것에서 시작되었다.
밀라노의 통치자 자리에서 밀려난 옛 섭정인 '루도비코 스포르차'가 새로운 밀라노 통치자에 오른 조카 '잔 갈레아초 스포르차'를 몰아내기 위하여 자신의 이름으로 동맹을 맺었던 프랑스 왕 '샤를 8세'에게 원병을 요청하였던 것이다. 1494년에 벌어진 일이다.
이미 오래전부터 이탈리아에 잔뜩 군침을 삼키고 있던 샤를 왕은 기다렸다는 듯이 65.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알프스를 넘어 이탈리아로 진격했다. 애초 루도비코가 원했던 것은 이런 사태가 이니었다. 샤를 왕이 나서서 위협을 가해 조카를 굴복시키고 자신을 다시 밀라노의 통치자로 임명해 주기만을 바랐던 것이었다. 그러나 야망이 컸던 샤를이 그런 날품팔이 정도에 만족할 사람이 결코 아니었던 것이다.
파죽지세로 이탈리아로 쳐들어 온 샤를 왕은 손쉽게 가장 먼저 피렌체를 점령했다. 그 과정에서 어떤 저항도 받지 않았다. 당시 이탈리아 5개 자치공화국들은 저마다 콘토티에레(용병)을 불러들여 자신들의 정부를 수호하고 여타의 다른 공화국들과 연일 소모적인 전쟁을 벌여왔지만, 샤를이 이끄는 막강한 프랑스 군대가 등장하자 용병들은 자신들의 태생적 한계를 모두 적나라하게 드러낸 채 뿔뿔히 흩어져 달아나기에 바빴다. 이 일은 곧 '마키아벨리'로 하여금 자치적인 부국양병설의 필요성을 절감하게 만드는 계기가 된다.
이어서 샤를은 로마를 점령했고 다음해에는 나폴리까지 차지한다. 그제서야 위기를 느낀 베네치아와 밀라노 자치공화국이 연합하여 군대를 모아 대항하지만, 이미 승기를 잡은 프랑스군을 대항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베네치아 밀라노 연합군을 격파한 샤를 왕은 처음 원했던 바대로 이탈리아를 모두 통째로 수중에 넣었다. 유럽의 노른자위 땅 이탈리아를 모두 차지한 프랑스가 바야흐로 유럽 최강국으로 급부상하는 순간이었다.
(이 당시, 샤를의 프랑스 군대가 로마 교황청을 점령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교황을 위해서 죽음을 불사하며 마지막까지 싸웠던 사람들이 바로 스위스 용병이었다. 그 후 스위스 용병의 용맹함은 하나의 귀감이 되어 유럽의 각지에 팔려나가게 된다. 스위스 용병의 전성시대가 한동안 펼쳐지게 되는 것이다. 또한 그런 이유로 현재까지 바티칸의 근위병이 스위스 용병으로 오늘에까지 전통으로 이어져 내려오는 계기가 되었다.)
사태는 이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프랑스의 급성장을 멀뚱히 쳐다만보고있을 영국이나 에스파냐가 결코 아니었다.
당시 유럽의 모든 왕조들은 동맹을 맺기위하여 상호간에 정략결혼들이 성행하였는지라 그 실체를 모두 파악해서 들여다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혈연을 앞세워 에스파냐가 나폴리를 자신들의 소유라고 주장하며 뛰쳐나왔다. 패전한 베네치아와 밀라노의 수뇌부들이 평소 북부 이탈리아와 알프스의 무역로에 관심을 보여왔던 신성 로마제국 황제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프랑스의 샤를 왕이 차지한 이탈리아를 두고 신성 로마제국과 에스파냐기 끼어드는 새로운 한바탕의 유럽 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새로운 군대의 조직과 새롭게 변신한 용병 집단이 등장하고, 새로운 무기의 개발과 새로운 전쟁 기술과 함께 새로운 방어진지가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 반도는 한마디로 유럽 열강들의 한바탕 치열한 전쟁터로 변하게 된것이다.
죽고 사는 문제가 걸린 이 절대절명의 시기에 전쟁터의 한복판이었던 피렌체에서 르네상스가 생겨났던 것이다. 그것이 문예부흥이다.
르네상스는 잘 가꾸어서 매만지고 잘 다듬어서 책상위에 놓여진 아름다운 꽃병이 결코 아니다.
포탄이 날아오고 총알이 튕겨나가고 군인들의 군화가 짓밟고 지나간 자리에 피어난 한떨기 고고한 야생화라고 이야기 하고 싶다. 생존과 치열한 경쟁과 고된 인생역정과 숭고한 열정들이 빚어낸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라고나 할까?
샤를 왕이 프랑스 군대를 이끌고 피렌체에 들어 오는 순간 자치공화국 내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피렌체에 대해 거의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던 메디치 가문의 통치가 막을 내리게 된것이다.
1469년 메디치 가문의 수장에 오른 로렌초 메디치(Lorenzo di Piero de' Medici)는 여러 정치 권력들과 치열한 싸움에서 끝내 승리함으로써 누가보아도 이젠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를 전부 차지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피렌체의 절대 권력자 반열에 올랐다. 로렌초 메디치가 곧 피렌체였다. 쉽게 다시 말하자면 피렌체의 절대 독재자가 된것이다. 금융업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한 메디치 가문이 이제 공식적으로 커다란 권력까지 쥐게되었단 뜻이다. 사람들은 그를 일 마그니피코(Il Magnifico) 즉 '위대한 자'라고 불렀다.
로렌초가 죽자 아들인 피에로 메디치(Piero di Lorenzo de' Medici, 1471년 ~ 1503년)에게 모든 부와 권력이 세습되었다.
이 와중에 샤를의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 온 것이다.
피에로 메디치는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샤를 왕에게 협상을 요구했으나, 이미 승리를 확신한 샤를 왕이 이를 받아들일리가 만무했다. 위기를 느낀 피에로 메디치는 군대를 모아 항전하려고 했자만, 이미 메디치 가문의 오랜 독재와 전횡에 신물이 났던 도메니코회 수도사들의 주도로 몰락한 피렌체의 엘리트들과 추방되었던 인사들이 이미 샤를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고난 이후였는지라 피렌체의 모든 행정력과 지휘계통은 이미 무너지고 난 후였다.
프랑스 군대가 마침내 피렌체에 입성하였고, 피에로 메디치는 달려나가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그는 샤를 왕이 요구하는 대부분을 들어주는 댓가로 메디치 가문의 안전과 재산보호를 요청했다. 자신들만 살겠다고 나선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피렌체를 통치하였으며 권력을 통하여 막대한 부와 온갖 치정을 다 저질렀음에도 끝내는 자신들만의 안위를 챙기려는 메디치의 전횡에 참다못한 피렌체 시민들이 들고 일어나 폭동을 일으켰다. 파장은 일파만파로 커져나갔다.
피에로 메디치는 가족을 이끌고 도망쳤다.
팔라초 베키오는 시민들에게 철저하게 약탈당했으며, 새로 들어선 피렌체 자치공화국 수뇌부는 메디치 가문 전체를 추방시키며 모든 기록에서 삭제시켜 버렸다. 메디치는 이제 피렌체에서 지워지고 만 것이다. 공화국 수뇌부는 메디치 가문에 종사하거나 충성을 했던 사람들까지도 철저하게 색출해서 모두 추방해 버렸다. 그만큼 메대치 가문이 피렌체에 남긴 상처 또한 매우 컸던 것이다.
--- 부르넬리스키의 건축으로 유명한 (산 로렌초 성당). 하지만 끝내 미완성으로 남았다.
-- 산 로렌초 성당 내부에 있는 (메디치 가문의 묘소). 미켈란젤로가 이곳에 14년의 시간을 투자했으나 여전히 미완성으로 남았다.
겨울비가 오락가락하던 어느 을씬년스러운 날 이른 아침에 한무리의 피렌체광화국 경찰들이 느닷없이 '산 로렌초' 성당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그들은 성당의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지면서 한 사람을 찾고 있었다.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가 바로 그들이 찾고있는 사람이었다.
'성무 안치실'에서 낮과 밤의 조각상 마름질을 하던 미켈란젤로는 그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다짜고짜 난입하듯이 들이닥친 경찰들은 미켈란젤로의 손에 수갑을 채워서는 거칠게 끌어내기 시작했다.
'내가 미켈란젤로요. 도대체 나에게 무슨 죄가 있다고 이러는 것이요?'
'미켈란젤로. 당신을 메디치 가문을 도와서 피렌체를 위태롭게 만든 죄로 체포한다. 시시비비는 법정에서 가리게 될것이다.'
거칠게 항의를 해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그는 그길로 감옥에 갇혔다.
그리고...... 이날의 사태로 이곳 (메디치 가문의 묘소)는 결국 미완성인 상태로 영원히 남게 된다.
(메디치 가문의 묘소)는 이날 미켈란젤로가 체포되어 연행되는 시점까지의 모습으로 지금까지 남아 있다. 당시 미켈란젤로는 묘소 작업과 병행하여 (라우렌티아나 도서관의 홀)을 건축하였다. 역시 지금의 모습 그대로이다. 다만 유명한 '도서관의 계단'은 당시엔 아예 설계에서부터 빠져 있었다. 도서관의 계단은 이로부터 약 30년 가까이 지나서 피렌체로 다시 돌아온 미켈란젤로가 새롭게 설계하여 추가로 건축한 훗날의 작품이다.
(피에타) 조각상 하나로 약관의 나이에 일약 스타덤에 오른 미켈란젤로 였으나 로마에서의 생활은 결코 순탄하지 않았다.
욕심 많고 변덕이 심한 교황 율리우스 2세와 사사건건 부딪혀야만 했으며, 그의 재주를 시기 질투하는 브라만테와 라파엘로의 모함과 음모가 끊이질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어린시절 유독 친했던 친구 지오반니 메디치로 부터 요청이 들어왔다.
'산 로렌초 성당' 내부에 '메디치 가문의 묘소'를 만들어 달라는 부탁이었다. 현재 피렌체를 통치하고 있는 지오반니의 형인 피에로 메디치 2세를 생각하면 결코 수락하지 않을 요청이었으나 편지 속에는 '너와 내가 함께할 수 있도록 돌봐주시고 이끌어주시던 내 아버지를 모시기 위한 묘지를 꼭 네가 만들어 주었으면 좋겠어'라는 지오반니의 진정성 가득한 요청이 있었다. 미켈란젤로는 고심에 빠졌다.
위대한 로렌초(Loren il Magnifico)라고까지 불리던 '로렌초 1세'를 미켈란젤로가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세상은 로렌초 1세로부터 막대한 부를 거머쥔 메디치 가문이 마침내 권력까지 차지하게 되어 피렌체를 제멋대로 주무르게 만든 장본인이라 평가했다.
하지만 낙담하고 의지할 곳 하나 없는 어린 미켈란젤로의 소질을 알아보고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한 식탁에서 함께 식사를 하면서 지내게 해주었던 사람이었다. 따로 작업실을 마련해 주고 값비싼 대리석과 도구들을 늘 풍족하게 조달해 주었었다. 뿐만 아니라 그리이스에서 초청한 플라톤 철학자에게서 철학과 인문학을 배울 수 있게 해주었다. 지금의 미켈란젤로가 있게끔 해준 모든 자양분은 지난시절 로렌초 1세의 배려에서부터 시작되었다해도 실로 무방할 것이다. 로렌초는 미켈란젤로가 먹고 자고 놀고 공부하는 그 모든것들은 자신의 아들들과 동등하게 늘 함께하도록 해주었다. 그 형제중에서 유독 지오반니가 미켈라나젤로를 배려하고 아껴주었다. 두사람은 더 없이 가까운 친구였다.
하지만 장남인 피에로의 생각은 달랐다. 아버지에게 따로 메디치가문을 이끌 후계자 수업을 받고 있던 피에로의 머릿속에는, 소위 로얄 패밀리 의식이 가득해서 이 세상의 그 누구도 감히 메디치 가문의 식탁에 함께 앉을 수 없는데, 이 작고 못생기고 덜떨어져 보이는 미켈란젤로가 항상 모든것을 함께하고 나누고 특히 아버지의 남다른 관심과 보살핌을 받는것이 죽도록 싫었다.
로렌초 1세가 사망했고 피에로 메디치가 새로운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자 피렌체를 다스리는 최고 권력자가 되었다.
그는 지난 시절의 자신의 생각을 결코 잊지 않았다. 그는 미켈란젤로에 대한 메디치 가문의 모든 지원을 단절 시켰다. 미켈란젤로는 하루아침에 다시 고아의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5년만에 메디치가에서 나왔다. 다시 처량한 유랑생활이 시작되었다. 이곳저곳을 떠돌며 생계를 위하여 허접한 수많은 작품 생활을 해나가야만 했다. 이 마지못해 생계를 위해 조각을 하던 솜씨가 로마까지 퍼져나가서 브라만테의 귀에 들어가게 되었고, 브라만테의 소개로 교황을 만나게 되었고, 마침내 (피에타)가 우여곡절 끝에 탄생하게 된것이다.
브라만테로서는 교황의 심한 변덕이 싫어서 조금 벗어나려고 자신의 대타로 슬쩍 끌어들인 미켈란젤로의 진짜 솜씨를 보고나서는 뼈저리게 후회를 했다.
미켈란젤로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하지만 고향인 피렌체라고 해서 평탄하지만은 않았다. 이곳에는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보티첼리라는 터줏대감들이 텃세를 심하게 부리고 있었던 것이다.
'로렌초 메디치 1세'를 기리기 위하여 '부르넬리스키'가 건축한 것이 (산 로렌초 성당)이다.
산 로렌초 성당은 상당부분 완공 단계에 이르러 갑자기 부르넬리스키가 사망함으로써 미완성인 상태로 남아 있었다. 내부에 묘소를 만들기 위해서는 우선 성당의 완공이 필요했다. 그 작업을 미켈란젤로가 맡았다. 돔을 비롯한 여러곳의 보수공사가 다시 벌어졌다.
성당의 완공에 앞서서 미켈란젤로는 한 세기를 앞서 살다가 떠난 '건축가 브르넬리스키'를 생각했다. 브르넬리스키는 괴팍하고 고독한 천재 미켈란젤로가 평소 존중해 마지않는 몇 안되는 인물중 하나였다. 그는 브르넬리스키에서 많은 것을 배웠고 깨닭았다. 그래서 미켈란젤로는 브르넬리스키를 존경하는 입장에서 '자신의 처지와 능력으로는 감히 그 분이 생각하고 추구했던 완성을 따라가지 못하겠다'라고 하면서 끝내 성당의 완공을 거절하고 영원히 미완성이 채로 남겨 놓기로 했다. '산 로렌초 성당의 완공은 브르넬리스키가 아니면 이 세상 그 누구도 할 수 없다'라고 미켈란젤로가 못을 쾅 박았다.
성당 건물의 정문 입구를 별도의 건축물 처럼 만들어 꾸미는 것을 '파사드'라고 한다. 르네상스 성당 건축의 특징이라면 바로 이 '정문의 파사드'와 '후미 본당의 돔'이라 할 수 있다.
무엇가가 부족하고 없어보이는 산 로렌초 성당의 돔 반대편의 정문은 바로 파사드가 없어서 미완성인 채로 남아있는 것이다. 부르넬리스키가 환생하지 않는다면...........
결국 파사드만을 남겨 놓고 미켈란젤로는 (메디치 가문의 묘소)인 (성무 안치실) 작업에 들어갔다.
위협하는 듯하면서 사색에 잠긴 <낮>이나 잠을 이루지 못하는 <밤>의 조상들을 비롯해 많은 작품의 소개를 할까 싶었는데 지면이 너무 길어져서 생략하기로 해야만 하겠다. 훗날 다시 피렌체를 갈 기회가 있다면 (산 로렌초 성당)에 대해서는 그 때 다시.......
다만 한 가지....... 미켈란젤로의 수많은 조각 중에서 처음 설계에서 완공까지 제 위치에 제대로 있는 조각상은 이곳이 유일하다. 이곳은 조각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제 위치에 놓여있는 채로 제작되었다. 다른 조각상의 경우들은 모두 작업실 따로 전시실 따로가 된다.
미켈란젤로는 결국 팔라초 베키오에 있는 피렌체 공화국 법정에 끌려나가고 말았다.
이 희대의 사건을 구경하려고 수많은 사람들로 법정을 가득 채웠다. 공화국 수뇌부와 메디치 가문 사이에서 이 위대한 천재는 과연 어떻게 될것인가?
'미켈란젤로. 당신은 오랜세월동안 메디치 가문의 구은을 입은바 있으며 이에 대한 보상으로 메디치가를 위하여 물심양면으로 그들을 도와왔습니다. 하여 결국은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오랜 세월동안 독재로 다스리면서 자신들만을 위한 수많은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측척하였고 권력을 마구 휘두르는 이면에 당신의 열렬한 지지가 있었다고 우리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메디치가가 피렌체를 버리고 도망친 지금에 당신은 스스로의 죄를 인정하십니까?'
'나는 아무런 죄가 없습니다. 나는 예술가일 뿐입니다. 나는 이제껏 조각하는 일 외에는 해본적이 없습니다. 그것은 당신이나 여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이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당신은 메디치가문의 최측근이 아닙니까?"
'측근에 대한 기준이 무엇입니까? 여기계신 피렌체 시민들에게 물어보십시요. 내가 메디치 가문의 측근인지, 아니면 지금 공화국 지도부에 오른 도나텔로나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보티첼리가 메디치 가문의 측근인지를 한번 물어보시기 바랍니다. 그들은 생활의 대부분을 메디치와 어울리며 살았습니다. 그것이 예술가의 길인지 피롄체의 예술활동을 지원받기 위한 공적인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말입니다.'
'그 사람들은 오래전에 메디치 가문과 단절을 하고 은밀하게 우리 공화국 자치정부 수복에 헌신한 예술가들입니다. 하지만 당신은 체포되어 오는 순간까지 메디치 가문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지 않았습니까? 당신의 죄를 시인하세요?'
'그렇다면 제가 저질렀다는 죄를 하나하나 소상하게 들어나 봅시다. 어디 내가 무슨 무슨 죄를 지었습니까? 아울러 피렌체의 예술 활동을 지원하기 위하여 고명하신 예술가들께서는 도대체 메디치와 무슨 이야기를 나누었고 무슨 결과를 얻어냈는지도 한번 들어보고자 합니다. 과연 그들이 그렇게 공적인 활동으로 헌신할 만큼 고매한 인품의 예술가들이실까요? 프랑스 군대가 쳐들어 오고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메디치의 운명이 어느정도 막바지에 이르렀다고 판단되니까 서둘러 오래전에 알고지냈던 메디치에게 쫓겨난 엘리트와 외지로 망명한 사람들에게 연줄을 대서 신변의 앞날을 모색한것은 아닐까요? 이곳에 계신 시민들은 누구의 말이 옳다고 생각하십니까? 아니지...... 차라리 직접 들어보겠습니다. 방청석을 보니 뒷자리에 고명하신 예술가들께서도 나와 계시는 군요. 어디 다빈치나 보티첼리께서 대답해 보시지요. 당신들은 메디치와 무슨 무슨 일을 해왔습니까? 당신들이 생각하는 나의 죄는 무엇입니까?'
'이보시요. 미켈란젤로. 이 자리는 당신이 피고로 불려나온 자리요. 애매하게 다른 분들을 끌어들이지 마시요.'
'당신은 나에게 끌려오는 순간까지 메디치를 위해서 일을 했다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끌려오는 순간까지 일을 했습니다. 끌과 망치를 들고 조각을 했습니다. 그것은 내가 할줄 아는 유일한 일입니다. 나는 조각을 하는 예술가이니까요. 당신이 문제를 삼은것은 내 조각작업이 아니라 장소를 문제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장소는 로렌초 성당의 메디치 가문 묘역이었습니다. 조각가가 작업을 하는 공간이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조각 의뢰가 들어오고 여건이 맞으면 성당에서도 할 수 있고, 광장에서 할 수도 있고, 화장실에서도 할 수 있는게 조각가의 활동아니겠습니까? 그러나....... 본 법정의 판단은 지금....... 성당도 광장도 화장실도 다 될수 있지만......... 메디치 영역에서는 작업을 하면 안된다......... 이런 뜻입니까? 자치공화국 규정에 그런 조항이 있었던가요? 아니면 지금이라도 서둘러 그런 조항을 만들고 나서 나에게 죄를 물어야 하는것이 아닙니까?'
연단에서 내려보던 5인의 법조인들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면서 반문을 하지 못하자 방청석 여기저기에서 웃음소리가 터져나왔다.
'왜 내가 메디치 가문 묘역을 만들기로 하였느냐.......... 당신이 방금 전에 이야기 했고 또 세상이 모두 알고 있듯이 나는 로렌초 메디치로 부터 커다란 구은을 입은바가 있습니다. 고아나 다름없는 나를 그분이 메디치가로 데려다 먹이고 재워주고 공부를 시켜주고 조각을 할 수 있게 배려해 주었습니다. 그 결과로 지금의 미켈란젤로가 있게되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시고 지금 도망친 피에로 메디치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나는 곧 메디치 가문에서 쫓겨나게 되었지요. 거리를 헤매고 다니다가 우연히 로마로 가서 조각가로 성공하게 되었습니다. 메디치 가문에서 5년동안 로렌초 메디치의 보살핌을 받았습니다. 그냥 그분의 보살핌을 받았을 뿐이지 내가 그분이나 메디치 가문을 위해서 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여기있는 다빈치와 보티첼리 양반에게 물어보십시요. 저분들이 피에로 메디치와 함께 있으면서 '미켈란젤로는 은헤도 모르는 배은망덕한 놈이자 메디치의 배신자'라고 욕하는 소리가 로마에까지 들려왔으니까 말입니다. 그러던 중에 친구인 지오반니 메디치로 부터 부탁을 받았습니다. 아버지를 모시기 위하여 성당을 지었고 그 내부에 묘지를 만들어 모실 계획이라고....... 그 일을 아버지를 잘 알고있는 제가 해주었으면 좋겠다는 아야기를 듣고 이제껏 예술가의 긍지와 자부심을 가지고 최선을 다해서 작업을 해왔습니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정치나 권력과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받았던 은혜에 대한 기본적인 인간적 도리가 있고 자신을 인정하고 불러준 고객에 대한 예술가로서의 책임과 의무가 있었을 뿐입니다. 본 법정이 한 인간으로서의 당연한 도리를 다하고자 하는 행위를 죄라 하고, 고객의 요청에 부응하여 예술적 행위를 제공한 것이 죄라고 한다면......... 그때는 나 미켈란젤로가 죄인이다라고 시인하겠습니다. 부디 나를 정치나 권력의 다툼에 끌어들이지는 말아주십시요.'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장탄식을 터트리면서 법정을 빠져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보티첼리가 따랐다.
진술을 마친 미켈란젤로는 다시 감옥으로 돌아갔고, 피렌체 자치공화국 수뇌부는 긴급회의를 다시 열었다.
더는 대책이 없었다.
공론은 미켈란젤로는 죄가 없으며 즉시 석방시켜야만 한다는데 도달했다.
그러자 수뇌부의 회원인 한 원로가 입을 열었다.
'미켈란젤로는 이제 그 상징성이 너무나 큰 인물이요.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모든 이탈리아인들이 궁금해 할 만큼 급성장한 인물이요. 그가 메디치의 지지자가 아니라는 결론은 확인되었지만, 그렇다고 그가 우리 공화국의 지지자라는 결론도 없지 않소? 그가 어떻게든 우리 자치공화국을 지지한다는 근거를 이참에 마련해야만 합니다. 그 파장은 엄청날 것이예요. 지금이 바로 기회입니다. 지금 그를 풀어주었다가 혹여 어디론가 떠나버린다면...........'
'자치공화국의 예술지도위원장 자리에 미켈란젤로를...........'
'그 자리는 이미 레오나드로 다빈치에게 배정을 약속했소. 보티첼리를 부위원장에 올려놓았는데......... 그 괴팍한 성미의 미켈란젤로가 그런 자리를 내준다고 덥썩 앉을 사람도 아니질 않소. 다른 방도를 찾아야 하오. 방도를.'
'한가지 방도가 생각났습니다.'
'방도가 생각났어? 도대체 그 방도라는게 무어요? 미켈란젤로를 제대로 써 먹을 수 있는 방도가 있겠소?'
'골리앗을 무찌른 다비드 조각상을 미켈란젤로가 완성토록 하는것입니다. 골리앗은 몰락한 메디치 가문을 상징케 하고, 다비드는 승리한 우리 피렌체 자치공화국이 되는 것입니다. 그 상징물을 위대한 천재 미켈란젤로의 손으로 만들어 대성당(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정문 높이 올려 세상사람들이 모두 바라보게 하는 것입니다. 그 여파는 감히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파장이 클 것입니다.'
'기막힌 발상이요. 그런데 과연 미켈란젤로가 이 제안을 받아들일까?'
'받아들이게 만들어야지요?'
--- 신장 155cm의 괴팍한 천재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
---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피렌체 두오모)와 지오토의 종탑 전경.
피렌체 두오모(Basilica di Santa Maria del Fiore)는 1296년 아르늘포 디 캄비오에 의해서 설계와 착공이 이루어졌지만 1437년 부르넬리스키가 돔을 얹어서 완공했다. 피렌체의 재졍문제와 유럽을 휩쓴 흑사병등의 영향으로 140년이 걸려서야 겨우 완공을 이루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성당의 건축물 공사만 끝났다는 의미였다. 그 후로로 1백년이 지난 지금에 아직도 성당 정면의 파사드를 비롯해 실내 벽화와 조각상들은 여전히 공사 진행중이었다. 그것은 아직도 수십년이 지나서야 최종적인 완성을 맞이하게 된다.
두오모가 멀찍이 바라다보이는 광장의 한 구석에 아주 거대한 돌덩이가 하나 덩그란히 놓여져 있었다.
그냥 놓여진 바위덩어리가 아니라 아주 커다란 사각 기둥 형태로 다듬어진 대리석 덩어리였다. 또한 누구라도 그 대리석의 품질이 최고라는 것을 단박에 알 수 있었다. 1464년 부터 그 자리에 대리석 덩어리가 놓여져 있었으니 60년을 훨씬 넘도록 그 자리에 그냥 내버려진 모양새였다. 하지만 그래도 그 돌덩어리는 피렌체 정부로 부터 보호를 받고있는 귀중한 존재였다.
이 세상에서 조각 좀 한다싶은 사람치고 그 대리석 덩어리를 탐내지 않을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듣도 보도 못한 거대한 크기와 최상품질의 대리석 덩어리 위용에 눌려서 감히 누구도 선뜻 나서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 대리석의 실소유주는 바로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오페라 델 두오모)의 소유였다. 바로 두오모(피렌체 대성당)을 상징할 거대한 조각상을 만들어 성당 파사드의 높은 부벽 위에 올려 전시할 목적으로 어렵게 구해온 대리석이었다.
그동안 여러 조각가가 나섰지만 그 돌덩이의 위용에 눌려 번번히 시도도 하지못하고 중단했다.
1475년 안토니오 로셀리노가 다윗이 골리앗과의 싸움에서 이겨 골리앗의 머리를 밝고 서서 위용을 뽐내는 다윗을 조각하기 위하여 초벌작업으로 일정부분 이미 돌을 다듬어 놓응 상태였다.
아레초가 탄생시킨 르네상스의 조각가 베르나르도 롯셀리니가 있는데, 안토니오 롯셀리니는 바로 베르나르도의 동생이다. 형에게서 조각을 배웠으며 형의 제자들과 함께 한 유파를 형성하는데 이들은 거의 모두가 인물초상 조각에 열정을 쏟게된다. 이들이 등장하기 이전까지는 조각하면 전신 조각상이었으며, 이들이 등장한 이후로 초상 조각이라는 분야가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안토니오 롯셀리니 역시 그런 초상 조각가였다. 사람의 두상을 주로하는 작은 조형물에서 세상에서 가장 큰 전신조각에 도전한 그는 끝내 그 중압감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다비드상의 초벌 작업만 하다말고 사망했다.
다시 25년이 지났다.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 위원회는 정식으로 문서를 통해 그 조각상의 완성을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요청하게 되었다.
미켈란젤로 역시 이미 수도없이 그 대리석 덩어리를 보아왔으며, 자신이라면 이런 조각을 만들고 싶다고 수도없이 생각해 왔었다. 하지만 그는 지금 오페라 델 두오모(대성당 위원회)가 왜,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자신에게 다비드 상의 조각을 의뢰했는지 그 내막을 속속들이 낱낱이 모두 파악하고 있었다.
그 배후에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가 있었다. 그들은 지금 메디치 가문과의 싸움에서 이겨 메디치를 몰아낸 기념물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그들은 미켈란젤로 자신과 메디치 가문과의 인연을 이용하려고 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미켈란젤로는 이 조각상의 의뢰를 수락한다. 1501년의 일이다. 단 계약서에 몇가지 단서 조항을 붙여줄것을 단호하게 요청했다.
첫째. 구약성경의 다윗과 골리앗을 소재로 삼지만 그 조각상의 내용은 미켈란젤로 임의대로 한다.
대성당 위원회나 피렌체 정부는 당연히 롯셀리니의 구상대로 골리앗을 밟고 서서 승리를 외치는 다윗의 조각상을 원했다. 할 수만 있다면 골리앗의 이마에 메디치 라고 써 넣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미켈라나젤로는 자신이 생각하는 구도상 골리앗을 조각할 공간이 대리석의 크기에서 부족하다고 주장했다.
둘째. 어마어마한 비용을 요구했다. 안토니오 롯셀리니에게 의뢰했던 조각비용의 30배를 요구했다. 아무리 미켈란젤로가 유명하고 성공한 조각가라고 해도 이는 너무 엄청난 비용의 요구였다.
피렌체 정부가 왜 자신에게 다비드 조각상을 요청했는지, 메디치와의 인연을 상징적으로나마 이용하려는 의도를 잘 알고 있었기에 그 부분에 대한 충분한 보상을 요청하는 것이라고 당당하게 요구했다.
결국 피렌체 정부는 중간선에서 합의하여 롯셀리니에게 약속했던 금액의 15배를지불하기로 합의했다. 대신 '수시로 조각 작업 과정에 참여하겠다'는 조항을 달았다. 여기에서의 '참여'가 어떤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지는 양측이 모두 미뤄 짐작하고 있었다.
셋째. 제작 기간은 3년으로 하고 제작 기간동안에는 총 비용의 1/15 에 해당하는 애초 롯셀리니에게 약속했던 금액만을 계약금조로 받아 생활하며, 완성된 조각이 두오모 위원회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그 자리에서 파괴함으로써 쌍방간의 별다른 요구나 조치없이 그냥 계약이 해지 파기되는 것으로 한다.
넷째. 다비드 조각이 완성되고 두오모 위원회의 승인이 떨어지면 조각상은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부벽위에 설치될 것이며, 이 설치 이전까지 나머지 모든 비용을 완납하여주기로 합의한다. 그 이전까지는 조각상의 소유를 미켈란젤로가 갖는다.
1504년. 마침내 완성된 (다비드 조각상)이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두오모 위원회가 애초 롯렐리니에게 의뢰했던, 잘린 골리앗의 머리를 밟고 우뚝서서 승리의 포효를 하는 늠름한 청년 다비드의 모습은 어디에도 없었다.
미켈란젤로는 승리 직후가 아니라 싸움 직전에 긴장감이 최고조에 달한 일촉즉발의 순간에 놓인 눈이부시게 아름다운 청년의 모습을 표현했다. 근육은 잔뜩 긴장해 있고, 미간은 잔뜩 찌푸린 채 분노의 눈길을 적에게 보내고 있다. 사건의 시점을 이처럼 싸움 직전으로 잡은 것은 아직 적이 살아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적은 과연 누구이며 그 적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두오모 위원회와 피렌체 정부는 이 대목에서 미켈란젤로의 작품속에 담긴 깊은 의도를 듣고서는 찬사를 아끼지 않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그 해답은 바로 다비드상의 이글거리는 눈빛이 향하는 방향에 담겨 있다. 팔라초 베키오 정문 앞 본래의 위치에 설치된 다비드상(복제품)은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고 있다. 베키오 궁전 앞에서 다비드의 시선은 남쪽을 향하고 있다. 그 시선을 따라가면 피렌체의 남쪽으로 바로 로마가 있다. 로마는 오랜 세월 동안 피렌체를 견제하기 위해 이탈리아 주변 도시국가를 움직여 피렌체의 공화정을 위협해왔던 교황청이 있는 곳이다. 거기에다 그곳은 자신들이 축출해 낸 공화국 정부의 가장 큰 원수가 된 피에로 메디치가 망명한 곳이다. 공화국 정부는 승리를 쟁취했고 자치정부를 수복했지만 가장 큰 적들이 아직도 살아있기 때문에 아직 모든 전투가 완전히 끝난 것이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은 그런 의미를 담아 전투 직전의 긴장된 모습으로 로마를 노려보고 있게 만든 것이다.
훗날 처신을 바꾸게 되는 조르조 바사리는 '고대와 근대, 그리스와 로마의 그 어떤 조각상보다 뛰어나다는 사실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라고 했는가 하면 더 나아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를 본 사람이라면 그 어떤 다른 조각가의 작품도 볼 필요가 없다'라고 극찬까지 한다.
하지만 바사리는 그리 오래지 않아 바치오 반디넬리를 르네상스의 가장 위대한 조각가라고 외치며 메켈란젤로를 폄하하는 위치에 서게된다.
다비드 상의 조젝과정도 그리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두오모 위원회의 끊임없는 간섭이 뒤따랐으며 그 위원회 안에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보틸첼리가 회원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남성을 그대로 드러낸 나체상에 대해서 수차례에 걸쳐 치열한 다툼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 기간동안에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드로 다빈치 간의 다툼은 나이나 장르를 넘어서서 분노와 원한으로까지 승화된다. 그들은 이제 철천지 원수지간이 되었다.
다비드 조각상에 대한 반응이 하루아침에 가히 폭발적으로 일어났다. 두오모 위원회와 공화정부는 대단한 만족감을 그대로 드러냈다.
피렌체의 공화정을 위협하는 적들에 대한 시민들의 분노를 아주 적절하면서도 멋지게 잘 표현했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애초에 다비드상을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파사드 위쪽 부벽에 설치하려고 했던 계획을 바꿔 시뇨리아 광장의 팔라초 베키오 앞에 전시하기로 수정했다. 이는 모든 시민들이 오고가면서 가까이에서 다비드상을 보며 로마로 피신한 피렌체의 적에 대한 분노를 영원히 잊지 말게 하려는 깊은 의도가 담겨있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도 미켈란젤로와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피 튀기는 한바탕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공화정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다비드 조각상을 시뇨리아 광장의 팔라초 베키오 인근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오페라 델 두오모(두오모 위원회)는 확실한 장소를 정하기 위하여 위원회를 소집했다. 여기 위원회에는 레오나드로 다빈치를 비롯해 산드로 보티첼리와 줄리아노 다 상갈로 같은 르네상스의 거장들이 두루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중에 절대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였다.
위원회는 다비드 조각상을 '란치 회랑(Loggia dei Lanzi)'에 설치하기로 결정했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의 요구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두오모 광장에서 시뇨리아 광장의 란치회랑 앞으로 조각상이 옮겨졌다. 이제 란치 회랑의 건물 안에 다비드 상이 들어가 놓여질 차례였다.
란치 회랑은 시뇨리아 광장에 접해 있으면서 팔라초 베키오를 건너다 보는 위치에 설치된 오픈된 실내 조각전시장이라 할 수 있다.
현재는 입구 양쪽으로는 피렌체를 상징하는 사자상이 놓였고, 그 유명한 '겁탈당한 사비나 연인 상'을 비롯해 '폴리세나의 약탈' '켄타우로스인 나수스를 죽이는 헤라클레스' '다르을 떠받치고 있는 메노이티오스' '고대 로마 여인들의 조각상' 등 15개의 조각상이 들어서 있는 전시공간이다. 또한 작품의 훼손을 염려하여 이곳의 모든 조각상들은 몇곳으로 분리되어 박물관에 보관 전시되고 있으며, 이곳에 전시된 모든 작품은 모조품이다. 베키오 궁전 정면의 다비드 상이나 헤라클레스 상을 비롯한 넵튠의 분수도 모두 복제품이다.
'메두사의 목을 들고 있는 페르세우스'는 이 사태 이후에 피렌체로 복귀한 메디치 가문이 다비드 상의 반격 의미를 담아 벤베누토 첼리니에 의뢰하여 후에 세원 조각상이다. 이 조각상에서 목이 잘린 메두사는 곧 피렌체 공화정부가 되고 승리한 페르세우스는 메디치 가문으로 상징된다.
다비드 조각상이 완성 전시된 이후에 만들어진 작품들이 상당수라 당시에는 빈 공간이 충분했을 것이다.
다비드 조각상을 란치 회랑에 전시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늦게 접한 미켈란젤로가 허겁지겁 달려왔다.
그는 다짜고자 '작업 중지'를 외쳤다.
그곳에는 피렌체 공화국 정치수반을 비롯하여 레오나드로 다빈치나 보티첼리 같은 예술가들과 피렌체 시민 전부가 몰려나와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런 상황에서 미켈란젤로가 조각상의 안치를 가로막고 나선 것이다.
'내 작품을 어떤 일이 있어도 저런 창고 같은 허접한 곳에 쳐박듯이 전시할 수 없소.'
그러자 이번엔 인파를 헤치코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나타나 입을 열였다.
'이보게 미켈란젤로. 자네의 작품이 매우 아름답고 뛰어나다는 점은 인정하겠네. 하지만 우리 두오모 위원회와 공화국 정부는 이미 자네의 조각상을 란치 회랑에 전시하기로 합의를 끝냈네. 그리고 란치 회랑이 허접한 창고라는 표현은 너무 지나친 것이 아닌가? 이미 뛰어난 조각가들의 여러 작품이 전시된 분명한 조각 전시장이 아닌가? 세상에 이처럼 아름다운 전시 공간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니 막아서지 말게. 자네의 작품을 충분히 이해하고 아끼기에 특별히 란치 회랑으로 전시하기로한 나름 특별한 배려가 아니겠는가? 그러니 이쯤에서 그만 비켜나 주시게나.'
'모든게 레오나드로 다빈치 당신의 비겁한 수작인것이지........ 판떼기 위에다 색칠을 해서 사람의 눈을 속이려드는 알량한 손재주나 자랑하는 그림쟁이들이 실제로 살아있는 영혼의 숨결이 스미어 들어있는 조각에 대해서 무얼 안다고 제 멋대로 판단한단 말이요? 당신은 조각에 대해서 아는게 아무것도 없잖아?'
'말이 너무 거칠고 심하구려. 미켈란젤로. 내가 듣기에 당신은 머리에 빵가루를 잔뜩 뒤집어 쓴 제빵사 같지 조각가 같지가 않다고 들었오. 회화를 혐오하는 당신의 정도가 지나쳐 마치 조각 혼자서 예술을 모두 대표하는 듯 들리는구려. 당신은 빵은 구울지는 몰라도 그림은 아예 그릴줄 모르는것 같소. 소질도 없어 보이구요. 아무리 그렇기로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말 싸움이나 하고 있을 처지는 아니지 않겠소? 두오모 위원회의 결정이 이미 났으니 우리가 백번 먼저 양보해서 회랑의 안쪽 중에서 다비드 상을 안치할 자리를 당신이 직접 고르도록 해주겠소. 그쯤이면 화가 풀리겠소?'
'잘 들으시요. 레오나드로 다빈치 선생. 어떠한 일이 있어도 내 작품은 이후로도 영원히 란치 회랑에는 단 한 작품도 전시되는 일이 없을 것이요. 내가 약속 하겠소. 란치 회랑은 내 작품을 가질 수 없고 또 당신도 내 작품의 위치에 대해서 영원히 간섭할 수 없게 될것이요. 그리고 오늘 당신의 무례한 결정이 더 큰 화를 부르게 될것임을 내가 약속하겠소. 그 화는 당장 이 자리에서 당신의 교만함과 독선때문에 더 크게 경을 칠 수도 있음을 똑똑히 기억하시요.'
긴장감과 전운이 감돌았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미켈란젤로간의 싸움만이 아니었다.
화가들과 조각가들의 대결이기도 했고, 더 나아가서는 메디치 가문과 피렌체 공화정부간 대결의 연장선상이라고 볼 수도 있기 때문이다.
피렌체와 토스카나 지역이 주시하고 있다. 아니 전 이탈리아가 주시하고 있고 온 유럽이 이 대결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자 오페라 델 두오모(대성당 위원회)의 수장으로 있는 대주교가 나서서 미켈린젤로를 설득했다.
'이보시게 미켈란젤로. 조각상을 요청한 것은 바로 우리 위원회였네. 자네가 훌륭한 작품을 완성시켜 주어서 무척 고마울 따름일세. 이제 작품은 무사히 완성되었으니 원주인인 우리가 인계받는것이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시민들의 요청이 있어서 정부와 우리 위원회는 자네가 만든 조각상을 이곳 란치 회랑에 전시하기로 이미 합의를 끝낸 상황이란 말일세. 이것이 시민들의 뜻이라니 자네도 따라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더 이상 불상사가 생겨나지 않도록 이제 그쯤해 두었으면 모든 사람들이 자네의 심정을 알고도 남았을 것이니 물러나 주시게. 이미 모두 결정된 일일세.'
'누가 무엇을 어떻게 결정했단 말씀이십니까?'
'위원회가 결정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이제는 위원회와 자치정부의 일이란 말일세. 조각가인 자네의 손에서 떠난 일이라는 것을 모르겠는가?'
'제 손에서 제 작품을 떠나보낸 일이 없습니다. 다비드 조각상은 분명히 이 순간까지 제것입니다.'
'이런 몹쓸사람이라고........ 정히 그렇다면 부득히 공권력을 행사해야만 하겠네.'
체념한 듯 대주교가 돌아섰다.
그러자 미켈란젤로가 공사를 위해 옆에 있던 마차 위로 올라섰다. 그리고는 품속에서 다비드 조각상 제작에 관한 계약서를 꺼내 들었다.
'피렌체 시민 여러분. 제가 지금 손에 들고 있는 것은 다비드 조각상 제작의 전반에 걸친 오페라 델 두오모와 미켈란젤로 사이의 계약서 입니다. 위원회가 만족하여 이곳까지 제 작품을 옮겨왔으니 조각가의 약속은 이미 충분히 달성되었다고 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작품에 대하여 계약금만 맏았을 뿐이지 나머지 모든 비용을 정산 받지 못하였습니다. 계약서에는 분명하게 모든 정산이 끝나서 작품을 인계할 때까지 그 소유가 미켈란젤로에게 있다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그렇다면 현재 여기 있는 조각상은 누구의 것입니까?'
모여든 시민들이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계약서 내용대로라면 분명히 법률적으로 아직은 미켈란젤로의 소유가 분명했다.
'위원회가 금일 중으로 모든 돈을 지불할 것을 시민들 앞에서 약속할 터이니 그럼 이제부터라도 인계를 하는 것으로 해주면 안되겠소?'
'안되겠습니다.'
'미켈란젤로. 시민들 앞에서 위원회와 자치정부의 정중한 요청을 돈 때문에 거절한단 말이요?'
'돈 때문이 아닙니다. 란치 회랑과 레오나드로 다빈치 같은 사람때문이지요.'
듣던대로 정말 괴팍한 사람이구려. 좋소. 정히 그렇다면 어디 가지말고 그자리에서 기다리시요. 사람들을 보내 위원회와 자치정부의 돈을 모아서라도 가지고 오겠소. 돈을 모두 지급한 후에는 조각상을 란치회랑에 넣든 어디에 쳐박든 상관하지 마시고 서둘러 떠나시요. 꼴도 보기 싫소.'
'위원회 어르신들. 여기있는 미켈란젤로는 돈이 문제가 아니라고 분명하게 말했습니다. 분명하게 상호간에 약속하고 서명한 계약 내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게 아니겠소. 돈 부터 내 놓아라....... 아니요?'
'작품을 완성했으니 돈은 당연히 받아야 겠지요.'
'거보시요. 다 돈때문이지. 돈을 가지고 올테니 이쯤에서 그만 끝냅시다.'
'조각상은 결코 란치 회랑에 들여 놓을 수 없습니다.'
'계산만 끝내면 당신이 관여 할 바가 아니요?'
'계약 내용엔 더하여 이렇게 적혀 있습니다. 상호간에 약속을 어기게 되면 어긴 사람의 권리는 저절로 소멸된다고 써 있습니다. 거기에 더하여 위원회가 미켈란젤로에게 조각을 의뢰하는 이유는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성당의 부벽 위에 설치하기로 약속한다는 장소까지가 분명하게 명시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다비드 조각상이 란치 회랑에 들어갈 수 없는 이유입니다. 본인 미켈란젤로는 위원회에게 여기 이 조각상이 애초의 계약 내용대로 대성당의 부벽위에 설치해 줄것을 강력하게 요청합니다. 이 요청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나는 계약 당사자이자 피해자의 권리행사로 여기 이 조각상을 산산조각내서 파괴해 버리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결정해 주십시요. 대성당의 부벽에 올려 주실것인지........ 내 소유니까 내 맘대로 부숴버리게 해 주실것인지를..........'
잔잔하게 소요가 일기 시작했다.
세상이 모든 진상을 낱낱이 알아 버린 것이다.
대성당의 부벽위에 올려 전시를 하던지......... 아니면 어떤 경우에도 미켈란젤로의 허락이 꼭 필요하게 상황이 변해버린 것이다.
다빈치를 비롯한 위원회와 자치정부 수반들의 낯빛이 까맣게 타들어가기 시작했다.
공사는 중단 되었고 위원회와 정부는 긴급 비상대책회의에 돌입했다.
--- (란치 회랑)
--- 팔라초 베키오 정문.
--- 도나텔로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란치 회랑 전시를 철회하겠네.'
긴급회의 끝에 위원회의 온건파인 몇 사람이 다가와 미켈란젤로를 달래기 시작했다. 미켈란젤로는 깊은 침묵을 고수하고 있었다.
'시민들은 여전히 두오모의 부벽 높은곳에 올려진 조각상을 멀리서 겨우 바라다보기 보다는 가까이에서 자주 보기를 원하고 있네. 부벽의 높이가 50m나 된다는 것은 자네도 잘 알고있지 않은가? 자네의 작품을 가까이에 두고 보고 싶어하는 사람들 마음을 좀 헤아려 주시게나. 하여 우리의 다비드 조각상을 두오모 부벽에 올리지 않겠다는 의견을 자네가 이해해 주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네. 그런 이유로 저렇게 훌륭한 조각상이 부숴진다는 것도 원치 않는다네. 하여 위원회는 자네에게 이런 제안을 하면 어떨까 하고 생각해 낸 것이 있다네. 두오모에 올리지 않아도 된다는 자네의 이해가 가능하다면 피렌체의 어디가 되었든 자네가 원하는 장소에 조각상을 설치할 용의가 있네. 자네가 지정하는 장소를 설치 장소로 약속하겠네. 그렇게 된다면...........'
'영감탱이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란치 회랑에 쳐 넣어서 내 작품의 가치를 억누르고자 할 때 떠오른 장소가 있습니다. 그 영감탱이 덕분에 떠올리게된 영감이라고나 할까? 그곳이라면 허락하겠습니다.'
'자네 분명히 허락하겠다고 약속했네? 좋네. 위원회와 자치정부는 자네가 원하는 자리를 약속하겠네. 그래. 그곳이 도대체 어디인가?'
'저곳 입니다.'
거침없이 미켈란젤로는 손가락으로 한 장소를 가리키며 단호하게 대답했다.
악!
캭!
독한 놈!
지랄 같은 놈!
하필 거길..........
미켈란젤로가 손가락으로 가리킨 곳은 바로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인 건너편 팔라초 베키오의 정문(현재 위치) 이었다. 그리고 그 장소에는 이니 커다란 조각상 하나가 놓여져 있었다. 르네상스의 위대한 조각가 중에 한 명인 도나텔로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 조각상)이 서 있는 자리였다.
바로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가장 존경하고 따랐던 스승 도나텔로의 조각상이 있는 바로 그 자리였다. 당연히 이 조각상을 이 자리에 세운 사람도 레오나드로 다빈치였다.
그런데 하필........
뒤끝의 마왕(魔王) 미켈란젤로의 심기를 크게 다빈치가 건드렸던 결과였다.
소식을 전해들은 레오나드로 다빈치는 고래고래 악을 쓰며 길길이 날뛰었다. 고령의 연세에도 불구하고..........
한참이나 연장자인 자신을 멸시하다 못해 그의 스승까지 능멸하는 처사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욕이 터져 나오고 저주가 흩뿌려졌다.
서둘러 다빈치는 위원회에 되돌아가서 미켈란젤로와 담판을 하고 돌아 온 위원들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다.
'그 망나니 같은 놈이 감히 내 스승님의 자리를 탐내더란 말입니까? 버젓이 옆자리가 비어 있는것을 알면서요? 옆에 빈자리를 쓰라 하시지요?'
'어찌 이야기 해보지 않았겠습니까? 하지만 요지부동입니다. 부벽에 올려 놓던가, 아니면 죽어도 꼭 그 자리에 놓여져야만 한다는겁니다.'
'내 이 *놈의 새끼를....... 잘근잘근 씹어먹어도 시원찮을 놈을........ 철없는 어린 놈이라 봐주었더니만........... 내 뒤통수를 쳐? 감히?'
'레오나드로 선생과의 다툼으로 인해 앙심을 가졌다고 자신의 입으로 서슴없이 말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내 스승이기 이전에 대 선배인 조각가의 작품 전시 자리를 노리는 배은망덕한 자의 처사 아니겠습니까? 그냥 무시하고 밀어부치시지요?'
'이미 세상이 모두 알고 있고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가고 있는 중입니다. 결국은 정부에서도.......... 그 자리를 내 주라고..........'
'정부까지도요? 그럼 스승님의 작품은 어디로 옮기지요? 바로 옆자리로 꼭 옮겨야 한단 말씀입니까?'
'아닙니다. 그 옆자리는 그냥 비워두어서........ 시민들이 다비드를 가까이서 볼 수 있게.......... 그 또한 미켈란젤로의 요구사항 입니다.'
'뭐라구요? 이 찢어 죽일 놈을.......... 그럼 어디로........?'
'반대편으로 좀 멀리 떨어진 곳으로 옮겨달라 했습니다.'
으악!
끝내 레오나드로 다빈치가 쓰러져 혼절했다.
다비드 조각상은 팔라초 베키오의 정문에 홀로 우뚝서서 마음껏 위용을 뽐내게 되었다.
본래 그 자리에 있던 도나텔로의 조각상은 제자인 다빈치와의 마찰 결과로 인해 한참 옆으로 밀려나는 처참한 설움을 당하고야 말았다.
한편, 로마로 도망친 피에로 메디치는 가문의 부활을 꿈꾸었다.
피렌체의 적이었던 로마로 도망친 처지로, 교황의 지원과 군대를 앞세워 피렌체를 다시 침공하기도 했다. 그러자 메디치 가문에 대한 피렌체 시민들의 적개심은 나날이 분노의 불길처럼 타올라만 갔다.
다시 베네치아로 도망치 피에로 메디치는 피렌체를 되찾을 궁리만 하다가 나폴리와의 전쟁중 도망치다가 강에 빠져서 익사해버렸다.
피에로의 아들 로렌초 2세 메디치가 새로움 메디치 가문의 수장이 되었다.
죽은 피에로 메디치의 형제 중에서 두명의 교황이 탄생했다. 그러니까 로렌초 2세에게는 숙부가 되는 것이다.
메디치 가문 출신의 교황 레오 10세는 어린 로렌초 2세를 우르비노 공작에 임명했다. 토스카나 지역의 우르비노를 차지한 뒤, 그곳을 거점으로 피렌체를 되착게 만들어 주려는 교황의 의도였다. 하지만 고생을 모르고 살아온 병약하고 향락에만 심취한 로렌초 2세는 자신의 딸이 태어나던 날 매독으로 사망했다.
이제 메디치 가문의 남자 계보가 막을 내렸다.
메디치 가문의 적장자 로렌초 2세가 아들을 낳지 못하고 죽은 것이다.
이대로 메디치 가문이 피렌체에서 쫓겨난 상태로 막을 내리게 되는 것일까?
이 시기에 메디치 가문이 배출한 또 한명의 걸출한 지도자인 코시모 메디치 1세(Cosimo I de' Medici)가 등장한다.
코시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적장자 계보가 아니라 초대 조반니 메디치의 핏줄에서 옆으로 뻗어나간 방계의 혈통이었다. 아울러 피렌체에서 상당히 멀리 떨어진 무겔로라는 지역에서 나고 자랐기에 별로 알려진바가 없었던 전혀 생소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코시모 1세는 메디치 가문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코시모 메디치와는 분명하게 군분 지어야 하는 전혀 다른 인물이다. 그 또한 코시모 못지않게 탁월한 수완을 가진 사람이었다. 메디치 가문을 장악한 코시모 1세는 끊임없이 피렌체와 접촉하였고 이 젊고 탁월한 지도자에게 점차 피렌체에서 실제적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실세들이 빠져들기 시작했다. 코시모 1세는 피렌체 자치공화국에서 쫓겨났거나 도망쳐 나온 사람들에게 많은것을 베풀어주었다.
유럽 열강들의 이탈리아 침략 전쟁과 자치 공화국들간의 끊임업는 분쟁은 점차 경제 파탄을 몰고오기에 이르렀다. 거기에 덮쳐 피렌체 공화국 자치정부도 부정부패를 일삼게 되고 점점 세금을 걷어들이기에만 혈안이 되어가고 있었다. 시민들의 사람이 점차 피폐해져가고 자치 정부는 그 기능을 상실해 갔다.
메디치 가문이 도망친지 18년만의 일이었다.
시민들의 입에서 메디치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일부 시민의 입에서 '그래도 메디치 시절에는 배는 곯지 않았어' '도재자라고 했지만 사실 우리 피부에 와닿게 독재를 한 적도 없지않아?' 라며 지난날을 그리워하는 사람들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기회를 노리던 코시모 1세가 마침내 용병을 중심으로 꾸린 군대를 이끌로 피렌체를 점령하고 지도자가 되어 메디치 가문의 옛 명성을 되찾았다.
메디치 가문이 화려하게 다시 돌아온 것이다.
또다시 이번에 자치공화국 정부 요인들이 재빠르게 도망치기에 바쁘게 되었던 것이다.
레오나드로 다빈치와 보티첼리의 뒤를 이어 메디치 가문의 로얄 클래스가 된 바사리가 코시모 1세에게 조언하여 미켈란젤로의 다비드 조각사아에 대적하기 위하여 바치오 반디넬리로 하여금 '헤라클레스 조각상'을 만들어서 다비드 상과 나란히 서 있게 하였던 것이다. 광포하게 생긴 헤라클레스가 권력이란 검은 쇠망치로 피렌체 자치공화국 정부라는 야만인을 잔인하게 능멸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술을 통한 메디치 가문의 복수는 여기서 끝난것이 아니라 첼리니로 하여금 (메두사의 목을 쳐 든 페르세우스) 조각상을 란치 회랑 안에서도 찬란하게 빛나게끔 만들었던 것이다. 페르세우스는 메디치 가문이었으며, 메두사는 피렌체 공화국 정부나 혹은 미켈란젤로일 수도 있겠다.
피렌체의 권력과 부를 움켜 쥔 코시모 1세는 시에나로 달려갔다.
마르차노 전투에서 씨에나 군을 대파시켰고 씨에나를 포위한지 15개월만에 함락 시켰다. 영원한 피렌체의 정적 씨에나는 몰락했다. 인구 4만의 씨에나는 인구 8천명의 소도시로 전락했다.
종일토록 겨울비가 오락가락 내리더니 저녁무렵이 다가오자 빗줄기가 제법 거세게 내리기 시작했다. 바람마져 세차게 불어오고 있었다.
매서운 추위가 옷깃 사이로 스며들어오고 있었다.
비내리는 밤거리는 화려한 도시의 풍경도 스산하듯 을씬년스럽게 만들어가고 있다.
두 번째 방문이지만 지난 겨울은 마치 늦가을 날씨처럼 화사하고 포근했었는데, 이번 겨울은 제대로 세찬 한파가 몰아닥친듯 느껴진다.
플로렌스의 추위를 제대로 격어보게 된것같다. 한참 북쪽의 베네치아 보다도 훨씬 춥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다.
어린시절 하얗게 눈이 내려 쌓이던 고향 생각이 문득 눈 앞을 스쳐지나간다. 나의 고향 꼬레가 그리워진다.
어두워지는 밤거리를 향해 걸음을 재촉해본다.
춥다.
낮에 만났던 로테로다무스는 누구일까?
또 그분을 선생님이라 부르던 홀바인은 또 누구란 말인가?
피렌체의 중심에 남북으로 길게 뻗어있는 칼차이우올리 거리에 들어서면 저만치 앞에 피렌체 두오모(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이 장엄한 위용으로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한다. 길드에서 정해 준 여인숙이 여기 칼차이우올리 거리의 중간쯤에 있기에 서둘러 찾아가는 길이다.
이 시간이면 피렌체의 길드를 찾아 유럽의 각지에서 찾아온 수많은 사람들이 식당에 모여 와인이나 음식을 즐기는 시간이다. 다양한 직종을 가진 유럽 전지역의 사람들이 모여드니 혹시 그 두사람에 관해서 무슨 소식이든 듣게 될지도 모를 일이었다. 아울러 왜 유독 그 두사람이 이토록 내 관심을 끄는지도 차차 알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보게 피안재. 쌀쌀한 날씨에 어디를 그렇게 쏘다니는 것인가? 이리로 와서 함께 저녁이나 하세. 소고기 스튜를 주문했다네. 빵에다 와인이나 한잔 곁들이면 대충 한끼를 때우지 않겠는가?'
밀라노에서 온 양모업자 알베르토였다. 양모 장사를 통해서 제법 부를 쌓았다는 것이 그의 넉넉한 풍모나 차려입은 의복에서 저절로 풍겨져 나왔다. 지난해 베네치아의 길드에서 업무차 잠시 만났다가 우연히 여기 피렌체에서 다시 만났던 것이다.
'고맙네. 알베르토. 그래 양모 수입 계약은 잘 성사되었는가?'
'가격을 적어서 올렸으니 곧 답장이 오겠지. 한 이삼일은 더 피렌체에 머물러야만 할까봐. 그나저나 상공회의(길드 조합 회의)는 여간 난항을 격고있는 것이 아닌가보던데......... 세상이 점점 장사하기가 힘들게 변해가고 있다네. 여기 피렌체를 한바퀴만 둘러 보아도 먹고 살기가 점점 힘들어 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지. 메디치가 돌아왔으니 혹 새롭게 변할지도 모를 일이고..........'
'글쎄. 코시모 1세 또한 야심으로 가득찬 사람이니...... 어쩌면 더 가혹하게 세금을 걷어들일지도 모를 일이고........ 또 언제 공화자치 정부를 그리워하게 될지 누가 알겠나?'
뜨거운 국물의 스튜가 때마침 나왔다. 추위와 허기를 메꾸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것이 없었다. 거기에 갖 구워낸 빵은 언제나 구수하고 맛이 있다.
와인 몇잔을 마시고 나서야 나는 참고있던 궁금증을 알베르토에게 털어 놓았다.
'자네 혹시 로테로다무스 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이 있나? 아니면 홀바인 이라는 화가에 대해서 들어 본 적은 있는가?'
나는 내가 낮에 격었던 일에 대해서 소상하게 아라베르토에게 설명해 나갔다. 하지만 그의 표정은 마냥 아리송하다는 표정이었다.
그러던 알베르토의 표정이 갑자기 환해지면서 마치 다그치듯 내 손을 잡아 끌었다.
'방법이 생각났네. 방금 스위스에서 온 양모업자 소쉬르가 들어왔네. 나와 거래를 가끔 하는 동업자이기도 하지. 바젤 이야기가 나왔다고 하니 그에게 물어보면 뭔가 대답이 있겠지. 그리고 함께 들어온 옆 사람은 린넨 직조공 및 판매업자 조합의 후버야. 후버가 영국의 수입상들을 주로 상대하고 몇 번인가 영국을 왕래한것으로 들은바 있었으니 그들에게 한번 말아보자구. 어서 날 따라와.'
둥근 원탁에 둘러 앉아 통성명을 한 후에 나는 내가 궁금해 하고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 최대한 아는바를 소상하게 이야기 했다.
그리고 마침내 명쾌한 해답은 후버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로테로다무스(Roterodamus)는 그분이 네덜란드 로테르담에서 태어났다는 의미로 붙여진 이름이야. 본명은 아마 들어 보았을걸? 데시데리위스 에라스무스(Desiderius Erasmus)가 그분의 이름이야. 로마 카톨릭의 서품을 받은 성직자인데 평생 성직자 옷을 입지 않고 일반 사람들 처럼 살고있는 분이지. 인문 학자라고 하기도 하고 신학자라고 부르기도 하지. 개신교(프로테스탄트)의 루터 목사와 종교 개혁에 대해서 크게 싸웠다고 하는데....... 그것은 우리 같은 장사치들이 이해하기에는 너무도 난해하고 어려워서 처음 그런 이야기를 듣는 도중에 난 저절로 잠이들고 말았다니까? 한곳에 머물지 않고 유랑하면서 사신다고 들은바가 전부야.'
듣고보니 낮에 만났던 사람이 에라스무스 그분이 맞다는 결론이 들었다. 오래전부터 종교 개혁에 대해서 에라스무스 그분과 마르틴 루터 목사의 논쟁에 대해서 들은 바가 있었는데 바로 그분이 에라스무스 였던 것이다.
화가 홀바인에 대해서는 스위스 양모업자 소쉬르가 기대이상만큼 소상하게 알고 있었다.
'한스 홀바인(Hans Holbein)은 독일에서 태어난 초상화가야. 화가인 아버지에게서 그림을 배웠다고 전하지. 그림 공부를 하며 떠돌아 다니다가 스위스 바젤에 한동안 머물게 되었지. 그는 상당히 젊은 화가야. 아마도 당신들 또래쯤 되었을거야. 바젤에 머물면서 이웃집에 살던 어떤 학자를 만났다고 들었는데, 아마도 방금 이야기 했던 에라스무스 그분인것 같아. 그분은 종교인이었고 홀바인에게 교양과 인문학과 철학과 신학에 대해서 가르침을 주었고 그분과 바젤에 머무는 동안 많은 작품활동을 했지. 우리 외갓집에서 그의 그림을 직접 본적이 있어. 그림을 사랑하는 우리 외숙모께서 바젤엘 들렸다가 우연히 그의 그림에 감동을 받아 구입하셨다고 했지. 상당히 섬세하고 사실적인 초상화 였던 것을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해. 그림 공부에 대한 갈증과 한곳에 오래 머물고 있자니 좀이 쑤셔대는 젊은 혈기를 보고 스승께서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에게 소개장을 써서 유학을 보내 주었다고 했어. 그분이 토마스 모어경이 맞을것 같아. 유명한 정치가이자 귀족집안 이었으니까. 홀바인이 영국에서 크게 성공한 화가가 되었다는 소식은 들었는데...... 그가 돌아와서 여기 피렌체에 있다는 소식은 나도 금시초문이야. 그가 이자리에 있다면 당장 내 초상화 하나 그려달라고 하고싶어.'
그날 밤 끝내 나는 쉽게 잠이들지 못했다.
한번쯤 꼭 다시 만나게 해달라고 높은 분에게 기도했다.
밤새 잠을 설치다시피 한 나는 지친 몸을 이끌고 새벽 산책을 나섰다.
오늘은 두오모의 쿠풀라(돔 천장)에 올라가 볼 생각이었다.
밤새 내리던 한겨울 빗줄기는 많이 줄어들었지만 여전히 비가 내리는 아침이었다. 잔뜩 찌프린 하늘을 올려다보니 오늘도 하루종인 흐리고 비가 오락가락 할 것이라는 확신까지 들었다. 다행히 아침 산책길에는 매서운 바람이 사그라지듯 사라지고 없었다.
여전히 추웠다.
싸늘한 한기가 뼛속 깊은곳까지 후벼파고 들어왔다.
새벽 산책길에 내린 비는 사람의 기초체온을 삽시간에 모두 빼내가고 말았다.
지난밤에 잠을 못이루고 설친것과 몇날동안 게속되는 겨울비를 맞으며 돌아다닌 탓인지 몽의 상태가 썩 좋지않았다. 두통이 생겨났을 정도였다.
여인숙으로 돌아가려는데 맛있어 보이는 케익과 쿠키와 빵이 시야에 들어오고 빵집 특유의 향기가 코끝을 간지럽혔다.
이 집 또한 피렌체 제빵조합의 장인이 빵을 만들고 있는 집이리라 믿어 의심치 않고 나는 가계 안으로 들어갔다.
따뜻한 유유 한잔에 빵 한개나 케익 한조각이면 몸도 마음도 따뜻해지는 한결 여유로운 아침을 맞이할 수 있을것만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나 다를까?
내가 이제껏 이렇게 맛있는 케익과 따뜻하고 구수한 우유를 먹어본 적이 있었던가 싶을만치 무척이나 맛이 있었다.
장작이 활활 타오르고 있는 난로 곁에서 몸도 어느정도 녹였다고 생각되었을 때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여인숙으로 돌아가 잠시 드러누워 쉴 참이었다.
그때였다.
빵집 창문 밖으로 휙하고 지나치는 두 사람을 볼 수 있었다.
검은 풍성한 털모자에 털외투를 걸친 노인과 황금색 모피코트로 몸을 둘둘말고 있는 젊은이의 모습이 아주 잠시 느껴졌다.
틀림없는 그들이었다.
에라스무스와 홀바인이 틀림없어 보였다. 지난밤의 내 기도가 통했는가보다.
나는 서둘러 밖으로 나가 그들이 향한 방향으로 쫓아가기 시작했다.
저만치 앞에 나란히 걸어가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고 그 너머로 두오모와 종탑과 함께 세례당이 모습을 다시 드러냈다.
--- 다음 이야기에서 (르네상스 산책)을 계속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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