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세유럽엔 한바탕 거대한 역사적 광풍이 휩쓸고 지나갔다.
대략 8차례에 걸쳐서 약 2백년동안 계속된 '십자군 전쟁'이 바로 그것이다.
'십자군 전쟁'은 유럽의 기독교(카톨릭) 역사에 있어서 낙인과도 같은 치욕의 역사이며 '1천년 중세 암흑기'의 한복판에서 자행된 천인공로할 만행이었다.
11세기의 유럽은 '자신만이 하늘로 부터 절대적 권한을 위임받은 최고 통치자'라고 자부하고있는 교황의 교권(敎權)과, 백성과 영토와 군대를 소유한 실제적 권력자인 황제들의 황권(黃權)이 극렬하게 대립하던 시기였다.
이 교권과 황권의 대립 사이에서 저 유명한 (카놋사의 굴욕) 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성직자의 임명권, 즉 서임권이 중세에는 최고통치자인 황제에게 있었다. 이는 곧 각지역의 황제들이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성직자들을 임명함으로서 종교의 영역을 자신들의 세속적 권력의 발아래 두려고 시작된 것이었다.
하지만 남다르게 머리가 뛰어나고 야심 또한 컸던 '교황 그레고리 7세'는 바로 이 서임권을 교황이 갖게되는 것만이 교회를 독립시키고 나아가서 교황에 입지가 황제들 위에 군림할 수 있는 최선의 방책이라는 것을 생각해내게 되었고 이를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교황이 각지역의 대주교(추기경)을 임명하는 서임권을 행사하고, 그 지역의 대주교가 성직자를 임명함으로써 교회를 세속의 권력으로부터 완전하게 독립시키고자 한 것이다.
당연히 황제들의 반대가 극심해졌고 심각한 대결양상이 펼져졌다. 가장 강력하게 반대를 들고 무력시위까지 벌인 사람은 신성로마제국의 황제 (하인리히 4세)였다.
분노에 찬 하인리히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교황을 처단하기 위하여 이탈리아로 쳐들어 갔다. 소식을 접한 교황은 두려움에 서둘러 카놋사의 성으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온 유럽에 사자들을 보내 하인리히의 행동을 규탄하고 기독교에서 파문시켜버리고 말았다. 사태는 급변했다. 심지어 신성로마제국의 귀족과 군대마저 새로운 황제의 옹립을 주장하고 나서기에 이르렀다. 교황을 지지하는 세력들이 규합하여 군대를 모으기 시작했다.
결국 하인리히 4세는 굴복하고 말았다.
이탈리아 국경을 지나 지라산맥을 넘으면서 부터 하인리히 4세는 수도사들이 입는 거친 의복과 맨발로 한겨울의 눈보라를 뚫고 카놋사까지 걸어서 갔다. 성문앞에 꿇어엎드려 자신의 죄를 회개하고 교황에게 용서를 빌었다. 3일 동안을 차가운 눈보라속에 엎드려 하인리히는 교황에게 자비를 요청했다.
교황의 권위가 세속의 권력보다 존귀하고 높다는 점을 세상에 확실하게 드러내보여준 후에야 '교황 그레고리 7세'는 꿇어엎드린 '황제 하인리히 4세'를 성안으로 불러들여 함께 미사에 참석하고 그를 파문에서 복권시켜 주었다.
목숨을 부지한 하인리히는 독일로 돌아갔지만, 결코 그를 용서하고 자유롭게 풀어줄 교황이 아니었다. 그가 독일로 귀국하는 동안에 교황이 먼저 보낸 사자는 신성로마제국의 귀족들을 움직여서 새로운 황제를 즉위시켰던 것이다. 분노한 하인리히는 피눈물을 흘리며 복수를 다짐했다.
신성로마제국은 길고 긴 내전에 돌입했다. 전 황제를 따르는 사람들과 새로운 황제를 지지하는 사람들 사이의 길고 치열한 전쟁이 계속되었다.
하지만 최종 전투에서 승리를 거머 쥔 사람은 전황제였던 (하인리히 4세)였다. 전쟁이 판가름 나자마자 황제는 여세를 몰아 곧바로 이탈리아로 쳐들어갔다. 이번엔 아무도 그의 앞을 가로막지 못했다.
교황이 미사를 집전중인 성당에 신성로마제국의 군대가 들이닥쳤다.
하인리히 4세의 최측근 기사가 미사를 집전중인 교황에게 다가가 그의 면전에 주먹을 날렸다. 땅바닥에 나뒹구는 교황의 머리채를 끄당기며 그대로 질질 끌고서 예배당을 나갔다. 너무도 처참한 복수였다.
하인리히 4세는 교황 그레고리 7세를 로마에서 쫓아냈다. 그리고는 새 교황 '클레멘스 3세'를 새로 옹립했다.
죽을 기로에 선 그레고리 7세를 노르만인 공작 '로베르토 기스카르'가 겨우 구해서 시칠리아도 도망시켰다. 하지만 오래지 않아 그레고리 7세는 홧병으로 사망한다. 또한 하인리히 4세 또한 연이어 벌어지는 반란의 와중에 비참하게 최후를 맞게된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은 1077년 1월 25일에 벌어졌다.
교권와 황권의 한바탕 극렬한 대결이 벌어진 지 겨우 20여년의 시간이 지난 후였다.
유럽은 여전히 교황과 황제들간의 대립으로 매순간 순간들이 그야말로 일촉즉발의 위기상태였다.
서서히 조여오는 황제들의 압력속에서 교황은 한가닥 희망을 발견해 냈던 것이다.
비잔틴제국의 황제 '알렉시우스 1세'가 급격하게 성장하며 비잔틴의 목을 서서히 조여오고 있는 이슬람 세력에 대항하기 위하여 지원을 요청해 온 것이다. 거기에다 일부 이슬람의 불손한 세력들이 예루살렘으로 성지순례를 다녀오던 기독교인들을 시해하는 사건이 빌미가 되었다.
교황 '우르바노 2세'는 '성전(聖戰)을 선언'했다. 이교도들을 몰아내고 성지순례자들을 보호하며 더 나아가서 예루살렘을 수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사실 교황 우루바노 2세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첫째는 유럽 전역에 퍼져있는 황제들의 군사력을 먼 외지로 떠나보냄으로써 자신의 안전 도모와 입지 강화를 위한 시간을 벌자는 속셈이었다.
둘째는 유럽의 기독교를 양분하고 있는 '로마의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의 그리스 정교회'를 이번 군사작전을 통하여 로마의 교황 중심으로 통합해버림으로써 명실상부한 절대적 최고의 지위에 오르는 종교적 정치적 야욕을 품었다.
셋째는 결국 비잔틴을 지원하는 척 하면서 상황에 따라 비잔틴 제국을 자신이 차지하려는 흑심이 있었다.
넷재는 종교적 상징성과 풍요로운 성지 예루살렘을 교황이 사유화 함으로써 독보적 지위를 확보하고, 그곳을 바탕으로하여 비옥한 나일강 유역을 넘 볼 생각까지 품었다.
2백년 가까이 8차례에 걸쳐 벌어진 전쟁에서 실질적으로 예루살렘을 탈확(성지수복)을 한것은 '제 1차 십자군 원정'에 국한 된다. 나머지는 모두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실패한 전쟁이 되고 말았다.
또한, 애초 이 전쟁이 그릇된 교황의 욕심과 그릇된 판단으로 시작되었다고 판단한 유럽의 황제들과 왕들은 아무도 '제 1차 십자군 원정'에 참여하지 않았다. 아무리 거대하고 신성한 명분이었을지언정, 파렴치한 모략꾼 교황을 뒤에 두고는 집을 비울수는 없다고 모두가 그렇게 생각했던 것이다.
결국 황제나 제후 하나 없이 영주들과 기사들만으로 지도부가 구성된 십자군이 출정했음에도 예루살렘을 탈환한 것은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그렇다면 '예루살렘 탈환'으로 교황의 목표가 어느정도 달성되었느냐?
아니다.
오히려 마이너스가 되버린 원정이었다.
예루살렘을 탈환한 '1차 십자군 지도부'가 그 지역에 '예루살렘 왕국' '안티오키아 왕국' '에데사 백국' '트리폴리 백국' 등의 나라를 세우고 저들끼리 나누어먹기식으로 하나씩 차지해버리고 만 것이다. 교황도 비잔틴의 황제도 닭 쫓다가 지붕만 쳐다보는 멍멍이 꼴이 되고만 것이다.
분노한 교황은 '제 1차 십자군' 전원을 교회에서 파문시킨다.
그리고 이들을 정벌하기 위하여 새롭게 군대를 파견하니 이들이 '제 2차 십자군'이 되는 것이다. 정말로 꼬라지가 개판이 된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1차 2차 십자군은 실질적인 전투가 아닌 이동과 주둔하는 과정에서 수없이 많은 만행을 저지르게 된다.
이는 결국 뿔뿔히 흩어져서 유명무실했던 이슬람 세력들을 다시 하나로 규합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누루하딘'이라는 지도자가 출현하여 이슬람의 단결을 촉구하면서 예루살렘 지역의 기독교 왕국들을 괴롭혔다. 유럽 본토에서 지원군이 당도할 즈음에 쿠르드 족 출신의 위대한 이슬람 지도자가 출현하여 이슬람 세계를 하나로 규합하고 체계적인 군사력을 동원하여 마침내 '하틴의 뿔' 전투에서 십자군을 궤멸시키고 예루살렘 성지를 다시 빼앗아 갔다. 그가 바로 '살라딘'이다.
살라딘의 등장에 유럽은 경악했고 극도의 공포감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 사자왕 리차드와 술탄 살라딘.(제 3차 십자군 전쟁)
극도의 공포감과 강력한 적에 대한 적개심은 곧잘 사람들을 쉽게 하나로 뭉치게하는 경향이 있다.
살라딘의 등장과 이슬람의 급격한 성장은 온 유럽을 하나로 똘똘 뭉치게 만들었다.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황제들과 제후들까지 참여하기에 이르렀다.
'교황 그레고리 8세'는 이교도로 부터 성지 재탈환을 주장했다.
불과 2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이전에도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유럽 최강의 원정대가 마침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이 또한 하나의 기적이라 하겠다.
'제 3차 십자군'은 육지와 해상으로 나뉘어 진격했다.
이전의 원정대와는 차원이 다른 정규군이었다. 진격과 보급에 체계가 잡혀 있었다. 유럽의 황제와 제후들이 대거 참여했다. 그러자 위계가 저절로 잡혔다.
그 와중에 뜻밖의 참사가 발생했다.
'제 3차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인 신성로마제국의 '프리드리히 1세(당시 65세. 붉은 수염의 노르만 용사)'가 그만 소아시아를 향해 행군하여 강을 건너던 중에 빠져서 익사해버리고 만 것이다. 원정대가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적군의 총사령관은 지옥에서 온 사신 살라딘이 아닌가? 붉은 수염이라면 살라딘을 상대할 수 있겠다고 믿으며 나선 원정이었는데 어이없게 붉은 수염이 사망하고 만 것이다. 십자군의 사기는 땅에 떨어졌다. 위기였다.
소식을 접한 교황도 당황했다. 서둘러 대책을 마련해야만 했다. 그러자 평소 교황을 잘 따르던 시종이 앞으로 나서며 한마디 했다.
'신에게 이를 타개할 방도가 생각났습니다. 서둘러 잉글랜드의 리차드를 불러오시지요? 그라면 살라딘을 너끈히 상대할 것입니다.'
교황의 사자가 잉글랜드를 향해 부리나케 달려가기 시작했다.
<사자왕 리차드 : 술탄 살라딘>
두 사람은 장엄한 한 편의 대서사시 같은 무용담을 이번 전쟁을 통해서 후세에 남겨놓게된다.
'야파 전투'에서 사자왕 리차드는 살라딘의 군대를 철절하게 궤멸시킴으로써 지난날 '하틴의 뿔' 전투에서 십자군이 당한 실패를 완벽하게 만회한다.
리차드는 진격을 서둘렀고, 살라딘은 지구전으로 대항하면서 지원군을 계속 요청한다.
승리를 거듭한 리차드는 이제 하루면 예루살렘을 탈환할 수 있는 가까운 지역까지 진격했다. 위기의 살라딘은 전병력을 동원하여 최대의 방어선을 구축했다. 이제 남은 결정은 오로지 리차드의 몫이었다. 장시간 고민 끝에 리차드는 결정했다.
'이제부터 우리는 회군한다. 모든 결정은 내가 내렸으며 그 결과나 책임 또한 내가 질것이다. 이제 우리의 목표는 오로지 하나이다. 더 이상 희생을 치루지 않고 모두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성전은 계속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전쟁은 여기까지다. 예루살렘은 지척에 있다. 여러분과 나라면 하루면 예루살렘을 차지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그 다음은? 지금 우리의 주위와 예루살렘 주변으로 이슬람 세계의 전 병력이 주둔해 있다. 그들이 아무리 강하다해도 우리가 나선다면 단 하루면 우리는 성지를 탈환할 수가 있다. 하지만............ 탈환할 수는 있어도 우리의 힘만으로 예루살렘을 계속해서 지켜낼 수는 없다. 지켜낼 수 없는 성지를 잠시 탈환하자고 나는 여러분을 사지로 몰고갈 수는 없다. 모든 책임은 내가 진다. 우리의 전쟁은 여기까지다........'
'제 3차 십자군 원정'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이 때가 바로 1192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아직 십자군 전쟁이 모두 끝난것은 아니었다.
운명이었을까?
역사에는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들이 곧 잘 벌어지고는 한다.
어쩌면 이렇게 이 사람의 등장도 이렇게 절묘한 시점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었단 말인가? 실로 소름이 끼칠 정도다.
1192년 사자왕 리차드의 3차 십자군 원정의 종전이 선언되고 군사들은 뿔뿔히 흩어져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3.000km나 되는 원정길이 었으니 채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부지기수였을 것이다. 그렇게 원정 실패로 온 유럽이 어수선할 시기에 베네치아에서.......... 도제(총독)가 사망했다.
1193년 1월 1일.
조촐한 의식을 거행한 끝에 새로운 '제 39대 베네치아 도제(doge)'가 취임했다.
베네치아 시민들의 자율적인 투표를 통해 선출된 인물이었지만, 너무도 뜻밖의 사람이 새로운 도제가 된 것이다. 이제 베네치아의 운명은 모두 그에 손에 달렸다해도 결코 과장이 아닐것이다.
나이 80살이 가까운데다가 시력마저 완전히 잃은 노인이 새로운 도제에 선출된것이다. 하지만 적어도 베네치아 사람들은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이 노인이 젊은사람 못지않은 놀라운 정신력과 체력의 소유자라는 사실을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여전히 매사에 정렬적이었으며 야심으로 똘똘뭉친 사람이었다.
어찌되었던 십자군 전쟁과 함께 급변하는 유럽의 정세속에서 지금 베네치아는 심각하게 위기를 겪고있었다. 그리고 그 위기를 누구보다도 절실하게 느끼고 있는 베네치아 시민들 스스로가 이 노인을 투표로 선출했던 것이다.
번영을 거듭하던 베네치아의 원동력은 해상을 통한 교역이었다.
인도의 향신료가 콘스탄티노플을 거쳐서 베네치아를 통해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근자에 들어서는 실크로드를 통해 건너온 비단과 도자기들이 향신료와 같은 루트를 통해 베네치아로 들어오던가, 아니면 육로를 통해 코카서스를 지나 발칸반도를 건너 베네치아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육지에서는 피렌체가 금융업을 중심으로 부상하기 시작했으며, 영원한 경쟁 상대인 제노바가 다방면에 걸쳐서 베네치아를 압박해오고 있었다. 거기에다 나폴리가 지중해에 인접한 지리적 장점을 살려 새로운 교역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시작했다. 이 모든것이 베네치아에는 악재로 받아들여 졌다.
더하여 제노바 상단의 지도부가 교황청을 자신들에게 끌어들이려 계속 시도하는가 하면, 비잔틴(콘스탄티노플)의 귀족과 지도부들에게 접근하여 교역권을 늘려달라고 한다는 정보까지도 베네치아에 전해진 상황이었다.
제노바는 이번 십자군 전쟁에 있어서도 가장 적극적이었다. 가장 먼저 제노바 군대를 동원했는가 하면 전함 갤리선을 150척이나 참전시켰고, 모든 교역선을 동원하여 보급품을 실어날랐다. 그리고 돌아오는 배로 콘스탄티노플이 보유하고 있던 동방의 귀한 물자들을 가득 싣고 돌아왔던 것이다. 뒤늦게 베네치아도 200척의 갤리선을 투입 시켰지만, 돌아오는 선박에 실을 물건들이 이미 바닥이 난 후였다.
베네치아는 지금 심각하게 위기를 겪고 있었다. 공화국의 운명이 걸린 시기였다.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두 눈의 시력을 모두 잃은 나이 80줄의 장님 노인이 베네치아의 새로운 도제에 올랐다.
그는 대단히 특출난 걸출한 인물이었다.
그는 결코 베네치아 사람들의 기대와 열망을 하나도 저버리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베네치아 사람들은 그를 지워버리고 싶을만큼 수치스러워 한다. 그는 베네치아에 의해서 버려졌다.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서 약탈(훔쳐)해 온 네 마리의 청동기마상(콰드리가). 진품은 박물관에, 그리고 모조품은 버젓이 산 마르코 성당 출입문 위에 드러내놓고 전시하고 있다.
빈번한 도둑질까지도 신에게서 모두 면죄부를 받았음일까? 아니면 오만과 뻔뻔스러움의 극치일까?
베네치아는 인류역사상 최고 최대의 보물창고라 불렸던 이스탄불 (하기야 소피아 성당)을 탈탈 털듯이 약탈했다. 베네치이인들이 모두 훔치고 지나간 뒤의 썰렁한 모습이 바로 지금 이순간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 모습이다. 수많은 보물들은 모두 어디로 갔을까?
모두 베네치아로 가지고 갔다. 박물관에 전시되는 물품중에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해온 보물들이 상당하다. 더하여는 국제적인 분쟁 소지가 있어서 베네치아의 영토 안 어딘가에 숨겨놓고 꺼내지 않는 보물들이 더 많을것이라는 생각이다.
베네치아는 무역을 통해 번영을 구가했다고 주장한다.
베네치아가 자랑하며 내놓는것들 대부분은 빼앗거나 훔쳐온것들이다.
혹, 콰드리가(청동 기마상)를 이스탄불에 돌려준다면........ 엔리코 단돌로의 무덤이 베네치아로 돌아올 수 있지 않을까?
이스탄불 사람들은 환영하겠지만.........
베네치아 사람들은 받아들이지 않을것이다.
산 마르코 광장에서 리알토 다리에 이르기까지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이 거리를 메르체리에 델로롤로조 거리라고 부른다.
흔히 베네치아에서 가장 핫한 쇼핑거리로 불린다. 쇼핑을 좋아하는 여행자는 좀체 이곳을 벗어나기가 힘들다고들 하지만 나에게는 별반 관심의 대상이 되지 못하는 장소이다.
좁은 골목길마다 화려하고 아주 커다란 쇼핑백을 하나에서 대여섯개까지 들고다니는 사람들을 흔하게 볼 수 있다.
기웃기웃 골목길 투어를 시도해 본다. 여타 다른 지역의 골목길들과는 사뭇 다르다.
'이리 나가도 되겠지' 실어서 가 보면은 운하에 길이 막히고, '돌아가면 되겠지' 싶어서 더 나아가보면 좀 전에 내가 다녀갔던 골목이다. 당황하면 길을 잃기가 싶상이겠다 싶다.
'산 마르코' '리알토' '산타 루치아' 이렇게 세 단어만 기억한다면 누구에게든 길을 물어서 여기 이 골목길을 빠져나가는데 별 어려움이 없겠다 싶기도 하다.
아주 간간히 빗방울이 떨어지기도 하고 바닷가라서 그런지 바닷바람이 아주 세차다.
기온은 실상 그렇게 낮은것이 아니니데 체감 온도는 많이 춥게 느껴지는 그런 날씨였다.
골목길 안쪽의 나름 분위기 있는 바에 들러 요기도 하고, 화장실이 필요해지면 근처의 카페에 들어가 카푸치노 한잔을 청한다. 도심의 유료화장실을 사용하기 보담은 조금 보태서 카페에서 커피를 마시며 화장실을 사용하는 방법을 택한다.
그렇게 걷다보니 어느새 베네치아에서 가장 멋지다는 뷰 포인트 '리알토 다리에' 닿았다.
베네치아 여행을 생각할 때면 항상 그 정점에서 가장 먼저 떠올리던 리알토 다리였지만 막상 실재로 대하고 나니 무덤덤한 생각 뿐, 아침나절에 산타 루치아 역 앞에서 처음 베네치아를 마주치던 순간에 비해서 한참이나 감흥이 떨어진 느낌이었다.
책이나 방송을 통해서 너무 많이 접해보아서일까?
그저 매일 보던 풍경인 듯 너무도 익숙한 느낌에 절로 어벙벙해질 뿐이었다.
상점들과 다리난간 이곳저곳을 왔다갔다 하면서도 너무도 익숙한 풍경의 연속이다. 물론 대단히 아름답다는 점은 별개로 인정하고 말이다.
어디를 바라보아도 무척이나 아름다운 풍경이고, 누가 찍어도 이곳에서는 멋진 사진이 탄생할 것만 같다.
나만 이런 느낌일까? 오가는 여행객들의 표정을 살펴보니........ 아무래도 그들의 표정은 나완 다른것 같다.
왜 그럴까?
이럴때 어디가서 진한 커피를 한 잔 마시는게 상책이겠다.
리알토 다리에서 산타 루치아 역까지는 걸어서 20~30분이 소요되는 거리이다.
하지만 이곳이야말로 가장 베네치아다운 풍경과 멋이 어우러지는 곳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누오바 거리'는 베네치아에서도 가장 번화한 거리로 정평이 나 있다. 각종 숍들이 가득 들어차있고 곳곳에 슈퍼마켙들도 눈에 들어온다. 그런가하면 맥도널드를 비롯해 앙증맞은 젤라테리아와 구수한 향이 풍겨나오는 빵집들이 여행자의 시선을 잡아 끈다.
그렇게 잠시 번화한 풍경에 시선을 빼앗기다 보면 이윽고 좁은 곡목길과 소운하들이 한데 뒤엉켜 초행길의 여행자들을 자주 길을 잃도록 만드는 란코네타 거리에 이르게 된다.
나는 이곳에 베네치아에서 가장 마음에 든다.
사방으로 뻗어있는 수많은 작은 골목들과 그 사이사이를 가로막듯이 흐르고 있는 소운하들, 그리고 길이 물길로 인하여 단절되는것을 막아주는 작고 예쁜 다리들이 끊임없이 새로운 모습을 드러내고 감탄이 절로 터져나올만큼 깜찍한 풍경들을 선사해 준다.
'이곳이야말로 제대로 베네치아다.'
다시 찾아가고픈 나의 여행 버킷 리스트에 베네치아는 빠져있지만......... 베네치아는 그리워하지 않아도....... 여기 람코네타 거리는 두고두고 잊지못할것만 같다. 매우 독특한 정취로 가득한 이 골목들과 소운하의 얽힘과 그 사이를 연결해주는 작고 예쁜 다리들을 나는 오랫동안 기억하게 될 것이다.
왠지 화려함의 차고 넘치는 누오바 거리 보다는 현지인들의 실생활 모습이 엿보이는 아주 좁고 복잡한 란코네타 거리가 어딘가 모르게 이탈리아적인 낭만이 느껴지고 베네치아만의 정취가 가득 풍겨온다는 느낌을 지울수가 없다.
골목 어귀에서 작은 광장을 지나 계단형 다리를 건너면 방금 전 지나온 란코네타의 분위기가 그대로인듯 하면서도 무엇인가가 좀 더 서민적인 느낌의 거리가 나타난다. 이곳부터는 대운하를 끼고 산타 루치아 역까지 나름 편하게 조금은 넓어진 도로를 따라 마냥 걸어가기만 하면 금방 닿을 수 있는 곳이다. 그나마 베네치아 지역중에서 모든 물가가 저렴할 뿐더러 배낭 여행자를 위한 저가의 숙소와 식당들이 들어서 있으며 뿐만아니라 현지의의 서민들이 실제로 지금도 즐겨찾는 거리로서 리스타 디 스파냐 거리라 부른다. 여행자들에겐 그야말로 반가운 여행자 거리라 하겠다.
호텔이나 기념품점. 식당. 카페. 옷가계 등이 가득 넘쳐나고 있으나 한 눈에 나보나 거리나 여타의 다른 베네치아와는 확실히 다른 느낌을 쉽게 받게 된다.
이탈리아는 여타 서유럽의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물가가 비싼 국가에 포함된다. A급 클라스의 물가를 자랑한다. 그중에서도 베네치아만은 아이슬랜드나 스위스. 영국 런던 등을 포함한 특A급의 물가를 자랑하는 곳이다. 그런 와중에 이렇게 베네치아에서도 저렴하다는 느낌이 확 피부에 닿는 거리를 마주하게되니 자뭇 감개가 무량하다고 할 수밖에........ 하지만 이곳도 결코 싸지는 않다. 여타의 다른 이탈리아 도시 물가 정도라 할까? 동유럽 국가들에 비하자면 대충 30% 이상은 비싼편이다. 유럽에서 행복한 물가라면 당연히 조지아. 몰타. 체코. 폴란드 등을 가장 먼저 쏜에 꼽겠다.
베네치아의 다른지역에선 볼 수 없는 노점상들이 이 거리에서만은 많이 눈에 띈다.
해산물을 파는 곳이며 야채와 고일 노점도 보이고 꽃을 파는 노점상도 보인다. 기념품이나 심심풀이 길거리 음식을 팔기도 한다.
현지인들의 실생활이 가장 피부에 와닿는 곳이기도 하다.
그렇게 걸어서 이제 베네치아의 주요한 볼거리를 대충이나마 돌러보았다고 생각될 때 그렇게 유달리 눈에 띄는 건물은 아니지만, 이대로 베네치아를 떠나기에는 무엇인가가 아주 쬐끔 아쉽다고 느껴지는 즈음에 로마네스크 양식의 종탑이 눈에 탁 들어온다.
산 제레미아 성당(Chiesa di San Geremia).
루치아 성녀의 유해 일부가 안치된 곳이다. 유해의 나머지 부분은 시칠리아 시라쿠사의 산타루치아 알라바디아 성당(La Chiesa Santa Lucia alla Badia)에 모셔져 있다. 베네치아가 훔쳐와서는 이제껏 돌려주지 않고 있다. 기독교 도시(교회)가 다른 교회에서 기독교의 성인 시신을 훔쳐다가 자신들만의 건강과 행복을 가져다주고 지켜주는 수호 성인이라고 모셔놓고 돌려주지 않는 행위를 어떻게 이해할까?
구세주의 '십자가 부활' 사건으로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신앙고백을 하는 기독교인이라면, 이미 구원과 영생을 약속받은 처지로 이승의 생활이 힘들다고 남의 시신까지 훔쳐왔어야만 할까? 그런 행위는 곧 자신의 신앙고백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행위이거나, 이교도들만도 못한 하급신앙의 모습이 아닐까?
소설가 댄 브라운은 자신의 소설을 영화화한 (인페르노) 중에서 루치아 성녀에 관해서 이렇게 언급을 했다.
'처녀 루치아의 모습이 해를 가릴정도로 아름다워서 세상의 모든 남성들의 눈을 멀게하고 욕망에 사로잡히게 만드는것이 두려워 스스로 자신의 눈을 도려냈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는 결코 아니다. 몇가지 가설이 있기는 하지만........ 댄 브라운의 이야기 처럼 되었다면 루치아는 결코 성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루치아 쳐녀는 이탈리아 남부 시칠리아의 시라쿠사에서 태어났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에 의해서 참혹하게 탄압받던 시기에 태어났지만, 그녀의 부모님으로 부터 신앙을 전해받고 기독교에 일찍 귀의하였다.
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시고 생활고가 이어지자 어머니는 딸의 장래를 걱정하여 어느 귀족 청년으로부터 들어 온 혼담을 승낙하였다. 어려서부터 이미 빼어난 미모로 인하여 뭇남성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아온 루치아였지만 그녀에게는 이미 정혼한 사람이 있었다. 그녀는 이미 오래전부터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인생을 모두 받치기로 스스로 서약하고 그에 걸맞는 동정녀(수녀)의 길을 걷기로 작정한 몸이었다. 차마 이 사실을 어머니에게도 고하지 못하고 혼담을 계속 거부했다. 어느날 어머니에게 불치의 병이 찾아왔다. 루치아는 한 세대 앞서서 순교한 인근 카타니아 출신의 성녀 아가타의 무덤에 어머니를 모시고 함께 찾아가서 어머니의 병구완을 간절하게 기도하였고, 기적적으로 어머니의 병세가 회복되었다. 그제서야 루치아는 자신이 성녀 아가타의 본받아 수녀의 길을 가려고 이미 동정 서원을 했다는 사실을 고백했다. 어머니는 크게 놀랐으나 그녀 또한 신앙심이 깊었던지라 마침내 루치아의 요청을 승낙하고, 귀족 청년의 집에는 정중하게 혼담을 거두어줄것을 청했다.
루치아에게 깊게 빠졌던 귀족 청년은 크게 분노했다.
그리고는 마침내 시라쿠사의 집정관 파스카시우스에게 루치아가 기독교인이라고 고발해 버렸다.
기독교는 로마제국에게 있어서 가장 위협적이고 위험한 범죄였다.
루치아는 감옥에 갇혔고, 신앙을 버리도록 종용 받았으며 온갖 고문이 뒤따라랐다. 심지어는 그녀를 매울굴에 보내라는 형벌까지 내렸다.
장작을 쌓아 놓고 화형에 처했으나 여전히 루치아는 멀쩡하게 살아있었다. 분노한 집정관은 형리를 시켜 루치아의 눈을 도렸냈고 무참하게 단도로 그녀의 목을 찔러 죽였다. 루치아를 인도했던 성녀 아가타가 가슴을 도려내는 형벌을 받고 죽은것 처럼 그녀에게도 잔인하고 참혹한 형벌이 뒤따랐던 것이다.
결국 루치아는 순교했으며 후에 성인으로 추대되었다.
하여 루치아 성녀를 그린 그림은 도래낸 눈알을 접싱 담긴 모습이 상징처럼 그려진다. 그리고 눈에 병이 있거나 시력을 잃은 사람들이 루치아 성녀에게 간절하게 기도하면 치유되었다는 기적이 전해지고 있다.
--- 성녀 루치아.
-- 처음부터 루치아 성녀의 유해가 안치되었던 시칠리아의 '산타 루치아 알라바디아 성당'.
-- 알라바디아 성당에 보관되어 있는 '카라바조'의 (산타 루치아의 순교)
카라바조는 참으로 위대한 미술가다.
그가 없는 르네상스를 우리는 상상할 수가 없다. 그런가하면 이 천재의 해괴망측하고 기괴한 인생역정 또한 우리는 감히 상상조차 할 수가 없다.
도저히 참하고 온순한 대부분의 미술가 품성이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방탕한 부랑자이자 난폭한 싸움꾼이자 주정뱅이가 바로 카라바조였다.
하지만 그는 분명 불세출의 걸출한 미술가였다. 그것만은 틀림없다.
폭력은 이름처럼 허구한날 달고 살았다. 감옥도 제집 안방처럼 드나들었다. 하지만 그의 뛰어난 미술적 자질때문에 누구도 함부로 대하지 못했다. 그러다 끝내 살인까지 저질렀다. 교황까지도 이제는 더 두고볼 수 없다고 판단했다. 그는 감옥에 갇혔다. 곧 사형에 처해질 운명이었다.
이 풍운의 사나이는 탈옥을 결행했다. 로마를 떠나 도망자의 신분으로 유랑을 시작했다. 피난처마다 도망 비용을 벌어야 했고 임시로 먹고 자고 숨겨주는댓가로 천재적 솜씨로 그림을 그려서 모든 비용을 대신 충당했다.
알라바디아 성당의 (산타 루치아 순교) 또한 카라바조가 시칠리아로 도망와서 이 성당에 숨어 지내는 동안 호텔비 대신으로 그려준 것이다. 로마에서 추격대가 도착하자 카라바조는 이번엔 몰타로 도망친다. 몰타에서 요한기사단의 보살핌 속에 지내면서 요한기사단 교회의 (세례요한의 참수)와 (저술하는 히에로니무스)라는 명작을 또 남긴다. 이 감동이 어찌나 컸는지 카라바조는 이곳에서 '기사작위'까지 받게된다. 그러나 제 버릇이 어디갈까? 끝내 그는 몰타에서 다시 감옥에 끌려가게 되고....... 또 다시 탈옥하여 몰타에서 도망친다.
아! 카라바조를 어찌할꼬?
카라바조를 풍운아라고 한다면 베네치아를 여행하면서 첫머리에서 제기했던 또 한명의 풍운아 '엔리코 단돌로'는 어떻게 되었을까?
격변하는 풍랑속의 난파선 같은 베네치아의 운명을 걸머쥔 80줄의 장님노인 도제(doge) 단돌로 말이다.
베네치아 여행을 마무리하면서 단돌로 말년의 발자취를 짧게 살펴보기로 하자.
왜 그는 베네치아에 최고의 영광을 안겨준 구원자이면서 또 동시에 베네치아의 치욕이 되었는가?
-- 터키 이스탄불 하기야 소피아 성당 2층 구석에 있는 단돌로의 묘.
--- 명패만 있을 뿐. 무덤은 텅 비었다고 전해진다.(시신은 어디에?)
엔리코 단돌로(Enrico Dandolo).
제 3차 십자군전쟁(1189~1192)은 그야말로 사활을 걸고 모든 유럽이 하나로 뭉쳐서 치룬 총력전이었다. 이슬람의 급성장과 단합에 대해서 두려움을 느낀 유럽의 기독교(교황)와 여러제국의 황제들이 일치단결한 그야말로 전무후무한 위용을 자랑했던 전쟁이었다. 그 누구도 승리와 성지탈환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러나 전쟁은 실패로 끝났다.
성지 예루살렘은 유럽의 본토에서는 너무나 멀리 떨어신 소아시아 지역, 그것도 이슬람 세력 거점의 한복판에 덩그란히 떨어져 있는 외딴섬이었던 것이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하고, 예루살렘을 하루면 다가갈 수 있는 지역가지 쳐들어갔던 십자군은 나머지 전쟁을 포기해야만 했다. 단기전의 승리로 성지를 회복할 수는 있겠으나, 이슬람의 한복판에 고립되어서 예루살렘을 게속 지켜낸다는것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던 때문이다. 전쟁은 끝났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 3차 십자군 원정'이 끝난 것이었다.
로마의 교황은 이 전쟁을 끝낼 생각이 전혀 없었다.
이 전쟁을 어떻게든 승리로 이끌어서 이교도들을 물리쳐 성지 예루살렘을 수복하고, 예루살렘에서 이집트 카이로에 이르는 세상 최고의 곡창지대를 꼭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야심이 있었다. 이 전쟁을 통해서 유럽의 모든 황제들을 자신의 발치아래 두고서 지상 최고의 권력을 가진 명실상부하게 신(神) 다음의 절대적 권력자 반열에 오르기를 희망했다. 비잔틴을 복속시켜 유구한 역사와 함께 막대한 부의 원천을 확보하고 싶었다. 전쟁은 반듯이 계속되어야만 했다.
교황 이노센치오 3세는 곧바로 새로운 '제 4차 십자군 전쟁'을 선포했다.
그러나 예전처럼 유럽의 그 어떤 황제나 제후들도 선뜻 호응하고 달려나오질 않았다.
앞선 3차 전쟁의 여파와 휴유증이 너무도 컸던 때문이다. 유럽이 하나로 똘돌 뭉쳐서 최고의 지휘관과 최정예 군대를 모았고, 보급에서 진격로까지 이제까지 볼 수없었던 철저하게 쳬계화되고 준비된 계획에 따른 원정이었지만 모두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이제 이 전쟁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군사 1명의 원정 비용이 관료의 6년치 월급에 해당하는 비용을 필요로하는 이 전쟁의 재정부담을 누가 질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계속되는 성전'만이 기독교가 살고 교황권이 산다는 신명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교황은 연일 전 유럽을 상대로 설득하고 강요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교황은 작전을 바꿨다. 황제나 제후가 아닌 기사들을 상대로 십자군 전쟁의 당위성을 주장했다. 기사들은 1차 전쟁에서 승리한 기사들이 소아시아에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고 기사들이 왕으로 즉위했던 선례를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자신들도 전쟁에 나가 승리함으로 성지를 탈환하고 스스로 왕국을 세워 즉위(신분 세탁)할 수 있다는 희망은 기사들에게 있어서 너무도 커다란 유혹이었다. 황제나 제후들 입장에서 어떻게든 기사들을 만류하고 싶지만, 자신들이 앞장서서 참여하지 않는 이유로만도 지탄의 대상이 되었는데, 수하 기사들의 전쟁 참여 의사를 말릴만한 이유나 구실이 전혀 없었다.
유럽의 이름난 기사들이 '성지탈환'의 미명 아래 교황 밑으로 속속 몰려들기 시작했다. 그러자 위기를 느낀 황제와 제후들은 위기의식속에 똘똘 뭉쳐서 전쟁비용 부담을 끝까지 철저하게 외면 하기로 사전 합의 하였다. 애가 타는 것은 교황이었다. 기사들이 모여들어 군대는 어느정도 조성이 되어 가는데 전쟁 비용이 전혀 마련되지 않았던 것이다. 배(전투선)이며 무기며 막사와 식량이며 의복까지 가히 천문학적 비용이 소요되는데 황제와 제후들의 외면으로 전쟁비용은 형편없이 부족했던 것이다. 제노바. 나폴리. 밀라노. 피렌체도 마찬가지였다. 이제까지의 전쟁에 쏟아부은 비용에 비해서 소득이 별로였던 것이다. 거기다 십자군의 횡포에 질질 끌려다녀야만 했던 상황이었다. 어느 도시공화국도 운명을 걸고 다시 격랑속으로 뛰어들 엄두를 선뜻 내지 못했다.
시간은 흘러만 갔고 전쟁비용은 한푼도 더 걷어지지가 않았다.
자신의 존재와 권위를 걸고서라도 반듯이 서둘러 전쟁을 필요로 하는 교황과, 그 전쟁에 절대로 협조할 수 없는 황제들의 다툼이 이어져만 갔다.
그때였다.
세상의 흐름을 두 눈은 시력을 상실했어도 자신의 손바닥 들여다 보듯이 세세하게 파악하고 있던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베네치아의 운명을 걸고 세상과 한바탕 담판을 짓기로 작정을 한 것이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 당시까지는 그 누구도 생각한 적도, 꿈을 꾸어본 적도 없는 (2차 세계대전 이후의 현대에서나 가능했던) 사상초유의 도박을 철저한 사전 계획과 완벽한 시나리오 위에서 과감하게 판단 결정 시도를 한 것이다.
어떻게 생각한다면......... 인류역사상 최고의 금융가. 군인이자 전략가. 기업가. 발명가.행정가가 바로 엔리꼬 단돌로라고 나는 감히 말하겠다.
그는 교황에게 사람을 시켜서 한 통의 서신을 보냈다.
'교황 성하께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도움이 되고자 서신을 보냅니다. 저는 교황께서 숙원사업으로 생각하시는 예루살렘 성지탈환에 대해서 적극 지지하면서 불철주야 나름의 모색을 해보았습니다. 모든 황제들과 제후들의 협조가 없어서 힘드신 점도 잘 알고 있습니다. 오랜 고심끝에 저는 이 역사작인 십자군 원정에 대하여 모든 부분에 있어서 거의 완벽에 가깝께 철저하게 이행할 수 있는 방도를 찾아냈으며, 이시간 이후로 원활하게 나머지 전쟁을 무리없이 수행해나갈 수 있는 방법까지 찾아내게 되었습니다. 이제 성하께서 용감한 군사만 모을 수 있다면 나머지 전쟁에 대한 모든 준비는 별 탈없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이 모든것이 하느님께 영광을, 그리고 불철주야 수고하시는 교황님의 공로라 생각됩니다. 부디....... 교황 성하를 대신할 수 있는, 그리고 이번 전쟁을 책임지고 수행해 나갈 수 있는 믿을 수 있는 사람을 베네치아로 보내주십시요. 최선을 다해서 돕겠습니다. 엔리코 단돌로 올림.'
로마로 부터 '제 4차 십자군 원정대'의 총사령관으로 임명된 '빌라루드앵의 조프루아'를 비롯한 원정되 최고수뇌부가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베네치아를 방문했다. 자신의 집무실에서 80을 훌쩍 넘긴 눈먼 장님 신세의 노인이 이들 십자군 지휘부를 맞이했다.
단돌로 : 4차 십자군 원정대의 규모는 어느정도나 됩니까?
조프루아 : 3만 3천명의 군대를 이끌고 출정할 생각입니다.
단돌로 : 3만이 넘는다고요? 지금 모여든 군사 숫자는 지극히 미미하다고 들었는데요?
조프루아 : 지금 당장이라도 달려 온다는 병력이 8천은 됩니다. 여러 황제와 제후의 휘하에 있으나 전쟁 동원령이 발령되면 오히려 3만3천의 병력을 틀림없이 훌쩍 뛰어넘길 것이라 보고 있습니다.
단돌로 : 확신 하시는군요? 그것은 곧 교황 성하의 뜻이기도 하겠지요? 좋습니다. 그렇다면 현재까지의 준비는 무엇이 되어있나요?
조프루아 : 그것이......... 그러니까 그게..........
단돌로 : 당장 달려올 수 있는 8천명 군사의 보급물지 정도는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씀입니까?
조프루아 : 그게........ 사실은......... 준비라는 것이............
단돌로 : 상황을 확실하게 알아야지만 도와드릴 수 있는 방도를 찾아내고 준비를 할 수가 있습니다. 교황님께 사전에 분명하게 말씀을 드렸는데요?
조프루아 : 실은.......... 단 하나도 준비된 것이 없습니다. 그저 참여 의사를 전달해온 군사들의 숫자가 전부입니다.
단돌로 : 뭐라고요? 그럼 교황님께서는 사전에 아무런 준비도 하나 없이 8천이라는 군사의 숫자만 믿고 이번 전쟁을 선포하셨단 말씀입니까?
조프루아 : 아니....... 그런것이 아니라........ 동원 할 수 있는 군사의 예상 숫자는 3만3천이 확실한데 다만........ 다른 준비까지는.........
처음부터 도제 단돌로는 로마의 상황이나 교황이나 선정된 십자군 원정대 지휘부에 대하여 사전에 철저하게 파악하고 분석까지 마쳐놓은 상태였다.
이 때부터는 교황을 포함한 십자군 지휘부와 온 유럽이 엔리코 단돌로의 함정에 깊숙히 이미 걸려들고 만 것이었다.
엔리코 단돌로가 주도권을 가지고 협상을 제시했다.
1. 로마 교황청과 베네치아 공화국은 다음의 내용에 대하여 협약을 체결하며 계약 당사자는 교황 이노센치오 3세와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서명함으로 효력을 발생한다.
2. 제 4차 십자군 원정대의 규모를 3만3천명의 규모로 확정하며, 군대의 모집과 무기 보유와 훈련을 포함한 기초작업은 교황의 책임하에 십자군 지휘부가 대행한다.
3. 전쟁을 위해 필요한 필수 물자로 우선 전투함 갤리선 50척과, 해상 군대후송을 위한 후송선과 보급선, 그리고 그에 따른 선원은 모두 베네치아 상단에서 차질없이 훈련 대기 시킨다. 원정대가 집결하는 1202년 봄까지는 차질없이 모든 물자를 준비하였다가 십자군 지휘부에게 이관하기로 한다.
4. 원정기간은 1202년에 시작하여 1204년 까지로 하며, 그 기간동안의 의복. 약품. 소모품 무기재료와 식량을 베네치아 상단이 차질없이 꾸준히 준비 조달하기로 한다.
5. 전쟁 준비기간을 총 2년으로 하며, 베네치아가 이 준비를 하는데 들어가는 비용에 대하여 베네치아 리알토 은행으로 부터 8만5천 마르크를 베네치아 공화국이 대출을 받게 주선해 주며, 이 대출의 보증을 교황이 선다. 이 대출금의 상환 만기는 2년 후 준비된 모든 물자를 십자군 지휘부가 넘겨받는 시점과 동일하도록 합의한다.
6. 기타의 대출에 대한 이자와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잉여금에 대해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동안 교황과 십자군 지휘부와의 삼자 협약에 의해서 적절히 배분하기로 협약한다.
계약은 성사되었다.
교황의 입장으로서는 더 따지고 생각해 볼 겨를이 없었다. 무조건 서둘러 전쟁을 시작하는 길만이 교황과 교회가 사는 길이었다. 또한 당장 군대도 돈도 없는 상황이 아니었는가. 어떻게 어렵게 군대를 모았다 해도 설사 그제서 돈을 모을 수 있다해도, 전쟁 준비에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그런 상황하에서 베네치아의 제의는 그야말로 달콤하기 짝이없는 디저트가 아니었겠는가? 2년이란 시간을 벌었지 않은가? 군대를 모으는 것은 별반 어려운 일이 아닐것이다. 지상에서 가장 성스럽고 막중한 기도교에 내려진 과업이 아니겠는가? 또 면죄부를 범위를 넓혀서 팔면 충분히 가능하단 판단이 섰다. 군대가 모여들고 조직이 되어가면 적지않게 위협을 느끼게된 황제들과 제후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 것이며 지난 과오를 만회하기 위하여 서로 앞다투어 전쟁부담금을 싸들고 찾아올 것이다. 그렇게만 된다면 그깟 대출금 정도를 갚는것은 별반 문제꺼리도 아니것이다.
교황은 기쁜 마음에 모처럼 환한 웃음속에 축배를 들었다.
엔리코 단돌로도 축배를 들었다.
베네치아 리알토 은행은 이미 베네치아 공화국에 속한 도제의 관활내에 있는 은행이었다. 모든 주주는 100% 유대인으로 구성되었으며 단돌로에게 충성을 다하고 있는 사람들이다.(오늘날 골드만 삭스 같은 세계 금융시장의 최고 큰손들은 대부분 유대인으로 바로 이 베네치아 리알토 은행 주주들의 후예들이다)
당시로서는 꿈도 못꿀 8만5천 마르크의 천문학적 대출금에는 이미 베네치아 공화국의 이익은 물론 위험 부담금과 더하여는, 자신들이 가진 자원과 기계설비와 인력을 포함하는 제반비용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기에, 베네치아가 더 이상 금전적으로 실제 부담할 비용은 그리 큰것이 못되었다.(플랜트 수출)
그리고..........
엔리코 단돌로의 야심은 엄청난 대출금의 상환과 전쟁준비에서의 이윤추구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가 생각하는 이익은 다른곳에 더 크게 아직 남아 있었다.
인류 최초의 (군산 복합체)를 지금으로부터 8백년 전에 이미 베네치아에서 엔리코 단돌로가 탄생시킨것이다.
국가는 오로지 훈련된 군사만 데려오면 된다.
전쟁에 필요한 모든 물자는 특정 기업에서 담당한다. 무기. 의복. 식량을 포함한 전반적인 모든 분야를 커버한다. 특정한 무기를 주문하면 별도 옵션에 의해 제작하여 언제든 새로 납품한다. 심지어 아주 불리한 싸움이 벌어지면 군대를 대신하여 기업에 속한 특수부대가 출동하여 작전이나 부분전쟁가지 대리 수행하여 준다. 적의 교란이나 요인 암살도 보수만 넉넉하면 언제든 대리 수행하여준다.
오늘날 미국에서 시작하여 세계적으로 널리 퍼져있는 (군사 기업)들의 효시가 바로 베네치아의 도제 엔리코 단돌로였던 것이다.
지중해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무역 전쟁의 한복판에서 이제 바야흐로 새로운 최첨단의 상업적 분야가 탄생한 것이다.
오늘날에도 모든 분야를 총 망라한 최첨단 하이테크 산업분야가 바로 (군산 기업)에서 시작되고 벌어지고 있다. 그야말로 지구상의 모든 최고가 집약된다.
이 얼마나 위대하고 기발한 착상의 천재인가?
그가 바로 도제 엔리코 단돌로였다. 하지만 그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가 베네치아를 위해서 준비한 그 다음은 더 엄청나고 위력적이었다.
2년 후, 베네치아는 모든 준비를 마쳤다.
하지만 황제들과 제후들의 비협조로 십자군은 겨우 2만의 군대만을 모아 베네치아로 몰려 들었다. 한편 교황은 대출금을 상환할 8만5천 마르크는 커녕 이자도 마련하지 못하였다. 그럼에도 교황은 이미 세상에 널리 예고한대로 십자군 원정을 재촉했다.
서둘러 바다건너 원정을 떠나려는 십자군 수뇌부와는 다르게, 단돌로는 준비한 물품의 인도를 거부했다. 대출금이 상환되지 않았다는 이유였다.
교황의 재촉과 단돌로의 거부 속에 십자군 지휘부는 그야말로 지옥 불구덩이속이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는 수렁에 그만 깊이 빠져버린 것이다.
그때 엔리코 단돌로가 십자군 총사령관 조프루아에게 은밀하게 한가지 제안을 했다.
이자를 탕감해 주는 대신에 두 가지를 대신 이행해 달라는 조건제시였다.
첫재는, 베네치아 지역이 습지에다 협소하여 늘 영토부족을 통감하던 단돌로는 아드리아 해 건너편 (현 크로아티아의 자라 지역) 지역을 빼앗아 달라고 요구한다.
둘째는, 대출금 상환이 이루어질 때까지 베네치아의 군대가 십자군에 합세할 것이며 자신을 포함하여 일부 수뇌부가 십자군 원정 지휘부에 합류하도록 허락한다는 조건이었다.
십자군 총사령관으로서는 더 이상 따지고 생각해 볼 겨를이 전혀 없었다. 그는 선뜻 이 제의를 받아들였다. 우선은 전투함과 물자를 인수 받아서 당장 바다로 나가고 본 후에 다시 생각해 볼 일이었다.
며칠 후, 헝라리 왕국 영토였던 자라 지역에 십자군이 느닷없이 들이 닥쳤다. 십자군은 우방인 헝가리 기독교 군대를 철저하게 궤멸시켜 버리고 나서 그 지역을 베네치아에게 양도하였다. 이교도를 치라고 내보낸 십자군이 아무 이유없이 우방인 기독교 도시를 침공해서 싹쓸이 해버린 것이다.
유럽 사회가 시끌시끌해졌다. 교황이 분노했다.
그러나 베네치아를 출항한 십자군은 이미 지중해를 건너 소아시아로 향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지중해를 건너면서부터 스스로 궤멸해 가기 시작했다.
앞섰던 원정에서 보았듯이 이교도의 반격이 상당할진대, 애초 3만3천의 군대를 호엄장담했던 지도부는 어디로 가고 겨우 2만 남짓의 군대로 예루살렘을 향하다니.......... 이것은 이미 불가능한 싸움에 억지로 끌려나가고 있는 분위기였다.
탈영병이 늘어만 가고 행군은 점점 늦어지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이런상황까지를 미리 예측하고 남다르게 사전 준비해 온 인물이 있었다.
단돌로였다.
다른 한편으로 그는 비잔틴제국 안에서의 왕위쟁탈전으로 도망나온 알렉시우스 4세에게서 20만 마르크의 보상금을 전제로 비잔틴 제국의 현 황제인 자신의 삼촌을 몰아내 줄것을 요청 받는다. 십자군 원정대의 총 전쟁비용이 8만5천 마르크 인것에 비해 알렉시우스가 제안한 20만 마르크는 실로 어마어마한 보상금이었다.
단돌로는 바로 위 사진에서처럼 예루살렘까지 갈 의사도 아예 없고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의 십자군을 선동 설득했다. 차라리 비잔틴으로 쳐들어 가자고 주장했다. 천년 가까이 부를 누리고 있는 비잔틴을 쳐서 재화를 획득한 후에 당당히 고향으로 돌아가자고 군일들 앞에서 열변을 토했다. 이것은 애초부터 그가 가졌던 계획의 일부였다.
십자군은 느닷없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천년의 사직을 지켜온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여전히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여러날이 지났지만 성벽은 허물어지거나 함락당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당시 나이 90살의 눈먼 도제가 갤리선의 부러진 돗대 마스트를 타고 테오도시우스의 첫번째 외곽방어벽에 오른 이야기는 하나의 전설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정말로 그는 날아오는 화살을 뚫고 부러진 돗대를 타고 넘어 성벽에 기어올라 베네치아 군사들을 독려했다.
하지만 끝내 성벽은 뚫리지 않았다.(이 성벽은 1453년 오스만의 메메트 2세에게 처음으로 뚫렸으며 그 일로 비잔틴은 멸망했다.)
그런데 어이없게도........ 아주 웃길 정도의 사소한 일로 비잔틴의 황제는 성문을 열고 십자군에 항복을 했다.
도심의 약탈을 염려해 십자군의 지휘부와 일부 군대가 테오도시우스 성벽 안으로 들어갔다. 황제를 페위하고 보상을 제의했던 알렉시우스 4세의 아버지가 황제에 복귀했다.
엔리코 단돌로는 알렉시우스에게 20만 마르크의 보상을 요구했다. 그러나 알렉시우스에게는 당장 내어줄 돈이 없었다.
야음을 틈타 베네치아의 정예군대가 성벽 안으로 몰려들어갔다. 그들이 향한곳은 인류역사상 지상 최고의 보물창고라 불리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 이었다.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성당의 문을 부수고 안으로 들어갔다.
'소피아 성당 안의 모든 물품을 가져다가 배에 싣고 베네치아로 옮겨간다. 어느 하나라도 빼놓지 말라.'
알렉시우스가 군대를 몰고 달려 왔다. 베네치아 군대와 한바탕 전투가 벌어졌다. 성밖으로 나간 베네치아 병사가 십자군 지휘부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콘스탄티노플의 약탈을 허락했다고 외쳤다. 모든 군대가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갔고 참혹한 약탈과 방화가 벌어졌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 안의 모든 보물이 하나도 남김없이 베네치아 상단의 선박에 실렸다.
마지막 보물이 군사의 손에 들려 밖으로 나가는것 까지를 성당 구석에서 직접 모두 진두지휘한 단돌로였다.
베네치아에서 가장 용맹한 호위무사의 부축을 맏으며 하기야 소피아 성문을 나서던 엔리코 단돌로가 걸음을 멈추고는 물었다.
'광장 저쪽으로 히포드로무스(Hippodromus. 대전차 경기장) 입구에 네마리의 청동기마상(콰드리가)이 있었다. 아직도 있느냐?'
'네. 도제 어른. 실제 살아서 뛰고있는 것 같은 청동 기마상이 확실하게 보이고 있습니다.'
'내가 젊어서 여기 콘스탄티노플에 대사로 다녀간 적이 있었는데 그때 처음보고 이것만은 꼭 가지고 싶다라고 생각했었다. 또 이곳에서 그때 사고를 당해 이렇게 두 눈을 실명하기도 했지. 저 청동 기마상을 꼭 가져가야 하겠다. 내 눈에 대한 보상이라 생각하고라도 꼭 가져가야만 하겠다. 알겠느냐?'
'네. 도제 어른. 지금 즉시 군사들을 데리고 와서 제가 직접 배로 나르도록 하겠습니다.'
콰드리가는 이륜 전차를 끄는 네마리의 말을 실제 크기의 청동으로 제작한 기마상이다. 실제 보게되면 그 생동감에 절로 탄성이 흘러나오게 된다.
본래는 그리스 히오스 섬에 있던것을 테오도시우스 2세때 하기야 소피아 성당 건너편에 대전차 경기장을 건설하면서 장식을 하기 위하여 옮겨온 것이다. 이것을 1204년 제 4차 십자군 원정대가 콘스탄티노플을 침공하여 약탈해간 것으로 엔리코 단돌로가 직접 약탈을 지휘했다고 한다.
1254년부터 산 마르코 대성당 정면 위쪽 테라스에 설치되었다가, 나폴레옹이 베네치아를 침공하면서 프랑스로 빼앗겼다. 루브르 궁전 안뜰 카르젤 광장 중앙에 카르젤 개선문을 세우고 그 위에 올려 놓았었다. 나폴레옹 패망후 다시 베네치아로 반환되었는데, 대기 오염으로 부식이 진행되자 똑 같은 복제품을 만들어 원자리인 테라스에 설치하였고, 원품은 대성당 내부에 전시하고 있다.
처음 이 기마상들은 어떤 치장도 하지않은 순수 기마상이었는데, 콘스탄티노플에서 약탈할 당시 기마상의 크기와 무게로 운송이 힘들어지자 엔리코 단돌로가 분해해서 운반할것을 지시했다. 하여 네필의 기마상 모두가 목이 잘린 채로 베네치아로 이송되었다. 오랜시간 정교한 복원작업으로도 원형 복구가 어려워지자, 베네치아 장인들이 말안장 목걸이를 만들어 붙여서 복원했다.
십자군 전쟁사의 가장 커다란 오점인 콘스탄티노플 약탈을 주도한 엔리코 단돌로는 그 후로 또다시 십자군을 이끌고 이번엔 불가리아를 침략했으나 실패했다. 이때부터 그의 악명이 죽는 순간까지 줄기차게 따라붙게 되었다.
1453년 이교도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서 비잔틴의 최후를 목격했던 사람들의 증언과 기록에 따르더라도, '오스만 투르크의 약탁이 적군에 의한 약탈이었다면 1204년 같은 기독교도인 베네치아의 엔리코 단돌로가 저지른 약탈은 지옥의 악마들과 같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베네치아의 번영과 명성을 있게해 준 장본인이었지만 어느 순간부터 베네치아는 단돌로를 꺼리기 시작했다. 결국 그는 다음해(1205년)에 베네치아로 돌아가지 못하고 자신이 약탈했던 콘스탄티노플에서 병으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비잔틴인들은 이 약탈의 수괴에 연민을 느껴 그를 자신이 철저하게 약탈했던 하기야 소피아 성당 2층 전실 대리석 무덤속에 안장시켜 주었다. 명패에 도제의 모자와 산 마르코의 문장을 새겨서 말이다. 하지만 현재 그의 무덤은 텅 비어있는 것으로 확인 되었다.
일설에 의하면 오스만 투르크 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을 함락하고 비잔틴 제국을 멸망시키면서 엔리코 단돌로의 실체를 알아채고는 무덤을 파헤쳐서 남아있는 그의 뼈를 개들의 먹이로 내어주었다고 전해진다.
참으로 씁쓸한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몇발자욱 옮기고보니 어느새 아침에 출발지였던 산타 마리아 역 광장에 도착했다.
광장 한 켠으로 '순결한 처녀'라는 제목의 성녀 루치아 동상이 서있다.
짧았지만 이제 베네치아 걸어서 여행을 마무리 해야하는 시간이 된 것이다.
이제 기차를 타고 피렌체로 이동한다.
--- 다음 이야기는 피렌체에서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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