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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베네치아) 아주 독특한 풍광의 베네치아를 만나다

by 피안재 2019. 2. 11.

 

 

 

 

 

 

 

 

 

 

 

 

 

 

 

 

 

 

 

 

 

 

 

 

 

 

  베네치아의 첫인상은 너무도 강렬하다.

  어떤 치장이나  수식어가 생략된채 다짜고짜 훅 하고 기습하듯이  밀려드는  느낌이 자신도 모르게 잠시 숨을 멈추게 할 정도로 대단히 자극적이다. 

  이세상 그 어디에도 다시없을 아주 독특한 베네치아만의 아름다운 풍광이 느닷없이 불쑥 나타나 시야를 가득채운다.

  아!

  카파도키아에서 처음으로 느껴보았던  그 어떤 경이로움에 대한 탄식이  다시 이곳 베네치아에서 터져나오고 말았다.  태어나서 두 번째 경험이다.

  발걸음을 옮길때마다 저절로 탄성이 터져나올만큼 아름다운 풍광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풍경은  이전부터 내가 (베네치아)를 생각하면서 떠올리던 그 아름다운 모습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베네치아의 역사가  이미 천오백년 이전부터  지중해의 한구석인 아드리아 해안가에 아로새겨져 있어왔기에  당연히  고색창연까지는 아니더라도  어느정도는  빈티지한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중세도시풍의 풍광을 기대했었다.  아니 굳이 빈티지까지는 아니더라도  근대의 모던한 분위기를 기대했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베네치아는 현대의 도회적 느낌을 고스란히 간직한 트랜디한 도시였다.  밀라노만큼이나  이탈리아에서 가장 화려한 도시가 아닐까?

  코발트빛 바다색은  천오백년전의 것이 맞는지 모르겠으나,  관광객을 태운  곤돌라는  천오백년이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베네치아는  오랜 역사위에  최신식 현대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행객이 즐겨 오가는 골목엔 온통 세계 굴지의 유명 브랜드 부띠끄들로 가득하다.  후미진 골목 아주 깊숙한 곳을 찾아들어가야 비로서 옛스런  빈티지하고 앤티크한 옛적분위기를 겨우 만나볼 수가 있다.

  이런 느낌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베네치아에서 나는 잠시 어떤 당혹스러움에 사로잡혔다. 

  방파제에 걸터앉아  적어도 오육백년 전에 이곳에서 살아가던 사람들 모습을 상상해 보지만  도무지 짐작도 이해도 되지않는것 투성이다.

 '엔리코 단돌로는 베네치아의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광적인 삶을 살았을까?'

 '단돌로가 없는 베네치아는 상상조차 할 수가 없겠는데, 베네치아 사람들은 왜 그를 그토록 지우고 싶어할까?'

 

 

  베니스(Venice)라고 영어문화권에서는 부르고,  자신들은 베네찌아(Venezia)라고 부른다.

  '물의 도시' 혹은 '운하의 도시'라고 불리는 베네치아는 운하가 도로를 대신하는 아주 독특한 도시구조 덕분에 세상에서  단 하나뿐인  아주 독특한 도심의 풍경을 여행자에게 선사해준다.  자동차가 없고  오토바이가 없다.  크고 작은 선박들과  곤돌라가 운송수단을 대신한다.

  과연 자동차가 없는 현대의 생활이 가능할까?  하지만 가능하다.  환경이 자동차를 거부하는 곳에서 인간은  새로운 수단을 찾아내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쑤저우나 일본의 야나가와를 흔히들 '동양의 베니스'라고 부른다.  그런가하면  러시아의 상트페테르부르크나  스웨덴의 스톡홀룸을 '북구의 베네치아'라 부르기도 한다.  어디 그뿐인가?  네덜란드 암스텔담이나 독일의 함부르크 등을 '내륙의 베네치아'라고 부르기까지 하고 있다.

  아니다.  모두가 허름하다 못해 시늉만 내다만 '짝퉁 베네치아'다.

  베네치아의 독특한 아름다움은  오로지 이탈리아 북쪽 아드리아해 연안의 '베네치아'에만 존재한다.

 

  가이드를 동반하지 않는  자유여행자라면 베네치아의 독특한 환경에 맞딱뜨려서 여행자들은 간혹 당혹스러워 하기도 한다.

  마치 모로코 메디나(옛 도심)의 수많은 미로같은 골목길을 탐험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걱정이 앞설 수 있기 때문이다.

  배편을 이용해 이동을 하려고 해도  흔히 웬만한 도시의  시내버스 노선보다도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기 때문이기도 하고,  배의 종류도 다양하고,  배삯 또한 만만치 않기 때문이다. 

  그런 문제에 대해서 나는 이렇게 말해주고 싶다.

  '베네치아는 그렇게 큰 도시가 아닙니다.  사람이 사는 곳에는  어딘가 안내표지판이 잘 되어있고,  아니면 길을 물어서 다니는게 여행의 지혜이지요.'

  '베네치아에서는  걷는것이  다른 대부분의 교통수단보다 오히려 빠릅니다.  열심히 걸어다닐 용기가 있다면  나머지는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베네치아는  산책길을 서성이듯이  이리저리 느릿느릿 걸어다녀야만  제대로  베네치아를 보고 느끼게 될것입니다.'

 

 

 

 

 

 

 

 

 

 

 

 

 

 

 

 

 

 

 

 

 

 

 

 

 

 

 

 

 

 

 

 

 

 

 

 

 

 

 

  베네치아는 118개의 작은섬과 177개의 운하 사이를 400여개의 다리로 연결하고있는 매우 독특하고 인상적인 매력이 넘쳐나는 도시이다.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있어서 해수와 담수가 만나는 곳을 일컷는 '라구나(석호)' 라고 불리는 갯뻘이 끝없이 펼쳐진 사람이 주거공간으로 사용하기에는 최악의 입지여건을 갖춘곳이 바로 베네치아라고 할 수 있다.

  이탈리아 반도의 최북단이자  유럽을 가로지르는 알프스 산맥의 남쪽에 위치한 비옥한 토지로 인해 모든것이 풍요로운 롬바르디아 지방에 살던 '베네티 족'이 '고트 족'과 '훈 족'의 침입을 받아 고향을 버리고 유랑에 나서게 되었다.  남쪽으로 이주하여 정착을 할 즈음이면 어김없이 이민족의 침입이 이어졌다.  더 이상 쫓겨갈곳 조차 없던 베네티 족이 마지막으로 선택한 곳이 아드리아 해 연안의 시커먼 갯벌 투성이의 척박한 바닷가였다.  처음 그들이 자리를 잡고 정착한 곳이 리알토 다리 인근의 지역이었다.  베네치아란 지명은 바로 이들 베네티 족의 이름에서 유래하였다.

  아마도 처음 이들이 이곳에 찾아들었을 때에는 동남아에서 흔하게 볼 수 있듯이  바다위에 기둥을 박고 가옥을 짓거나 배 위에서 생활하였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내 진일보한 새로운 방법의 건축술을 택하게 된다.  갯벌을 매립하여 육지로 만드는 간척술을 찾아냈다고 하기보담은,  갯벌 위에 동남아와 다른 방식의 반영구적인 건축물을 짓고자 했다.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그들이 고안해  낸 방법은 바로 나무를 이용하는 방법이었다.

  나무는 돌이나 쇠에 비하여 매우 약하다.  쉽게 뒤틀리고 부러진다.

  하지만 바닷물에 잠긴 나무는 병해충에 피해를 입지 않았고 오랜 세월이 흘러도 썪지 않았다.(우리나라 완도의 청해진을 예로 들수가 있다)

  베네치아인들은 리알토 다리 인근의 갯벌에 길이 4m의 균일한 통나무 말뚝을 빼곡히 박아나갔다.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교회를 건축할 때 박은 나무 말뚝의 갯수가 기록으로 남아있는데,  자그만치 1.106.657개의 나무말뚝이 사용되었다.  나무는 아드리아 해 연안의 몬테니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에서 조달하였다.  갯뻘에 박은 나무말뚝 위에 같은 나무로 만든 기단을 올리고,  그 위에 돌이나 벽돌로 기초석을 놓은 후에 비로소 건축이 이어졌다.  베네치아의 모든 건축물은 모두 이러한 기초작업의 과정을 거친 후에  그 위에 세워진 것이다.  그렇게 세워진 건축물과 건축물 사이를 역시 나무 말뚝을 촘촘히 박고나서 그 안쪽을 육지에서 흙을 퍼다가 날라서 메꾸어 나갔다. 골이 깊은곳이 이어져 저절로 운하가 되었고,  그 위에 다리를 놓아 사람이 오가게 했다.  운하를 오가는 배를 위하여  모든 다리는 배가 지날 수 있게 가운데를 높이 올려 만들었다.  이런 과정과 건축물이 늘어나면서 현재의 베네치아란 도시가 형성된 것이다.  그 시작은  바로 5세기경이었다.

  가히 베네치아는 바다 위에 그대로 떠있는 도시라 불러도 손색이 없을것만 같다.

 

  점차 인구가 늘어나 도시의 형태를 갖추게 되자 주변의 열강들이 베네치아를 이대로 그냥 두고볼리가 없었다.

  곧 베네치아는 비잔틴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가 7세기 말엽에 스스로 독립국가의 모습을 갖추게 된다.  698년 '베네치아 자치공국'의 초대 총독이 탄생하였으며, 좀 더 시간이 흐르게되면서 시민들이 직접 투표를 통해서 총독을 선출하게 된다.  그리고 이때부터는 총독이라는 직함 대신 베네치아만의 독특한 칭호인 '도제(doge)'라는 호칭을 사용하게 된다.  '총독'이 왕이 임명하여 식민지를 다스리는 총감독이라면,  '도제'는  시민투표에 의하여 선출되는 최고의 행정가 라고 할 수 있다.  선거에 의하여 처음으로 선출된 도제는 바로 '우르수스(726~737)' 였다.

 

  베네치아가 도시국가라 할 수 있는 '베네치아 공국"으로 자리잡기에 결정적인 계기가 된것은 바로 '십자군 전쟁'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때부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간의 치열한 경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베네치아. 밀라노. 피렌체. 피사. 나폴리. 제노바 등이 지중해를 통한 교역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서로 격돌하게 된다.

  중세시대를 통털어 가장 화려하게 역사를 풍미한것은 (피렌체)였으나,  이백년간의 '십자군 전쟁'을 통해서 가장 크게 부와 명성을 얻은것은 (베네치아)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십자군 전쟁'과 '베네치아'의 상관관계 속에 바로  '베네치아 도제  엔리코 단돌로'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십자군 전쟁이나  엔리코 단돌로가 없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베네치아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백년 간의 '십자군 전쟁'이 끝이난 15세기와 16세기가 바로 베네치아의 최고 전성기가 된다.

  이탈리아 북부의 작은 도시국가 베네치아가  지중해 일대를 상당부분 장악하고 세력을 떨치는 새로운 무역강국의 시대를 열어갔던 것이다.  뿐만아니라 피렌체에 이어서 르네상스 문화도 꽃을 피웠다.  티치아노. 틴테레토. 베로네세 등의 화가들이 베네치아를 중심으로 눈부시게 활약했다.

  하지만 과거의 피렌체외 비교할 때,  당시 베네치아의 위상에 비교하자면 문화에 대한 베네치아의 노력은 실로 지극히 미미했다고 할 수 있다.  하여 이 시기의 베네치아을 빗대서 생겨난 말이 바로 (매너리즘)으로  그 대상이 바로 베네치아였다.  오점이자 불명예라고나 할까?

  매너리즘에 젖어들고 자아도취에 빠져있던 베네치아는 영원 할 것만 같던 황금기를 이 시기에서 부터 서서히 잃어가기 시작하게 된다.  역사에서 영원한 것은 아무것도 없는것 처럼.......

  베네치아의 독주를 견제하던 이탈리아의 여러도시국가들이 '반(反) 베네치아'라는 기치아래 동맹을 맺고 똘똘 뭉쳐서 대항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베네치아는 급격하게 쇠퇴해가기 시작했다.

 

 

 

 

 

 

 

 

 

 

 

 

 

 

 

 

 

 

 

 

 

 

 

 

 

 

 

 

 

 

 

 

 

 

 

 

 

 

 

 

 

 

 

 

 

 

 

  1. 산타 루치아 역(Stazione Venezia Santa Lucia)

  2. 리알토 다리(Ponte de Rialto)

  3. 산 마르코 광장(Piazza San Marco)

  4.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5.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

  6. 탄식의 다리(Ponte dei Sospiri)

 

 

 

 

  베네치아에서의 반나절 동안 내가 볼 것은 나름 이렇게 사전에 결정하고 난 다음이었다.

  나의 관심이 온통 피렌체에 쏠려있는만큼  항공스케줄때문에 어쩔 수 없이 들른 베네치아에 더 많은 시간을 할애할 생각이 애초부터 없었다.

  베네치아를 좀 더 소상하게 들여다보고 성당들이나 박물관, 그리고 인근의 섬까지 돌아보자면 2박3일은 족히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저 들렀든 김에 널리 알려진 몇군데만을 맞보기 처럼 구경하고 피렌체로 떠날 생각이었다.  그래도 베네치아를 구경은 하는것이니까.........(평소 내 여행 스타일과는 다소 거리가 있는 선택이겠지만 말이다)

 

  산타루치아 역 바로 앞 페로비아 승선장에서 바포레토(Vaporetto. 수상 시내버스) 1번선에 올라탔다.  산 마르코 광장 선착장에서 내려 본격적인 도보여행을 시작할 생각이다.  1번선은 완행이다.  2번선(급행)을 타면 좀 더 빠르게 갈 수 있지만  베네치아가 워낙 작은 도시이기에 나름 천천히 여유를 가지고 즐겨보리고 한다.  어차피 운하를 따라 삥 돌아가는 노선이기에  도심을 가로질러 걸어가는 시간보다도  배편 이동이 더 오래걸린다는 것은 염두에 두어야겠다.

  걷는것을 빼고는 가장 저렴한 교통수단임에도  바포레토 1회 이용권이 7유로나 한다.

  예상한 대로였다.  육상을 걸어가면서 볼 수 있는것과  물길로 이동하면서 볼 수 있는것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다.  하지만 낡은 배와 좁은 수로,  거기다 넘실 거리는 파도,  그리고 결코 상쾌하지 못한 짭쪼름한 바닷내음까지 맡아가면서 이 낯선 풍경들을 두 눈에 가득 담아본다.  선체 요동에 카메라는 엄두도 못냄.

  30분쯤을 지나서 바포레토는  산 마르코 광장에서 제법 벗어난 노란 난간이 인상적인 승선장에 나를 내려준다.

  방송과 책자에서 보던 익숙한 풍경들이 시야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바다 저편으로 넘실대는 파도 너머에 쥬데카 섬(Giudecca)이 손에 닿을듯 하고  멀리 왼편으로 리도 섬(Lido)이 보인다.  무리노 섬과 부라노 섬은 베네치아의 반대편에 놓여져 있기에 아쉽지만 이곳에서는 볼 수가 없다.

  넘실대는 파도 너머로 금방이라도 손에 닿을듯이  산 조르노 마조레 성당(Isola di San Giorgio Maggiore)이 두칼레 궁전과 마주보고 서 있다.  틴토레토의 걸작 <최후의 만찬>으로 널리 알려진 성당이다.

 해가 저무는 서쪽방향  대운하의 끝자락쯤에 바로코 양식의 웅장한 돔이 위용을 한껏 뽐내고있는  산타 마리아 델라 살루테 성당(Basilica di Santa Maria della Salute) 성당이 자못 아름답게 느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중간쯤의 거리에 솟아오른  붉은 벽돌을 쌓아올린 녹색 지붕의 첨탑이  바로 대종루(Campanile)라는 것을 단박에 알아차리고도 남겠다.  옆으로 드러난 아이보리 색상의 웅장한 건물이 바로  베네치아 공화국의 최고 통치자였던  도제의 집무실인  두칼레 궁전(Palazzo Ducale)인 것이다.

  '여기가 바로 베네치아의 심장이야.'

 

 

 

 

 

 

 

 

 

 

 

 

 

 

 

 

 

 

 

 

 

 

 

 

 

 

 

 

 

 

 

 

 

 

 

 

 

 

 

 

 

 

 

 

 

 

 

 

 

 

 

 

 

 

 

 

 

 

 

 

 

 

  두칼레 궁전과 지하감옥 사이를 연결한  탄식의 다리를 바라본다.

  돌아올 수 없는 강(바다)를 건너던 사람들의 절망과 탄식이 들려오는것만 같다.

  도제(doge)의 집무실이었던  두칼레 궁전은  그야말로  호화로움이 극치이자 웅장하다.  이는 중세에서 근세까지를 호령하던 '베네치아 공국'의 위상을 여실히 잘 보여주고 있다.

  아이보리 톤의 아케이드와 섬세하고 풍부하게 조각장식된 아치형 기둥머리, 어떻게 구해서 맞추었을까 싶은 분홍색 대리석과 흰 이스트리아 대리석을 교차하듯 정교하게 장식한 궁전의 정문이랄 수 있는 남쪽의 풍경은 너무도 화려하고 빼어나다.

  두칼레 궁전을 돌아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한눈에 딱 금방이라도 숨이 멋을것만 같은  드넓은 광장과  웅장함의 극치를 보여주는 대성당이 나타난다.

 

 

 

  산 마르코 대성당(Basilica di San Marco)

 

  마르코(마가) 복음서의 저자 성 마르코의 유해가 안치되어 있는 교회이다.

  로마에는 예수의 제자이자 초대 교황으로 추앙받는 사도 베드로를 모시는 '베드로 대성당'이 있다.  흔히 '바티칸'으로 대변되는 장소이다.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성자나 성녀에게 바쳐진 상징성을 가진 교회들을 많이 보게된다.  이탈리아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유럽에서  가장 많이 보는 경우는 아마도 성모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들이 가장 많지않을까 생각된다.  다음으로는  처녀의 몸으로 신앙을 기키다가 순교한 성녀들에게 헌정된 교회가 참으로 많이 있다.  그런가 하면  프랑스 지역에서는  '막달라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를 쉽게 만나 볼 수 있다.

  그런 경우를 모두 감안한다 하더라도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으로 추앙받는  마르코(마가)에게 헌정된  '산 마르코 대성당'의 경우는 참으로 매우 독특한 경우처럼 나에게는 다가온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나 열두 제자나 세레 요한 등을 빼놓고  이렇게 상징적으로 어마무시하게 추앙을 받는 인물이 또 있을까?

  어느 여행잡지에는  산 마르코 대성당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다.  또 일부 가이드들도 그렇게 소개를 하고 있는것으로 들었다.

  '베네치아 산 마르코 대성당은 12사도 중의 한 명인 마르코의 유해를 모시기 위해 세워진 교회이다' 라고.........

 

  성 마르코(마가)가 신약성경의  '마가 복음서'를 쓴 것은 대부분의 신학자가 인정하고 있다.(이의를 제기하는 학설도 상당히 있음)

  하지만 마르코는 결코 사도(12 제자)가 아니다.

  성 루카(누가)가 신약성경의 '누가 복음서'를 쓴 것은 분명하지만,  루카 역시 사도(12 제자)는 아니다.

  반면 마태오 복음서를 쓴 마태오(마태)와 요한 복음서를 쓴 (요한)은 사도(12 제자)가 맞다.

 

  예수와 함께 생활했던 사도(12 제자)로는  베드로. 안드레아(안드레). 야고보. 요한. 필립보(빌립). 바르톨로메오(바돌로메). 토마스(도마). 마태오(마태). 야고보(알페오의 아들 야고보). 타대오(다대오). 시몬. 이스가리옷 유다(가롯 유다)를 포함하는 12명을  사도라 한다.

  이 중에서 유다가 예수를 배반하고 자살하자, 나머지 사도들이 모여 함께 예수를 따르며 생활했던 사람 중에서 (마티아)를 선출하여 12 사도에 포함 시켰다.

  그리이스 문화에서 시작되었던 12라는 숫자에 대한 어떤 상징성을 확보하기 위함 이었다.

  여기에 또 한가지의 예외가 있는데,  살아서 단 한번도 예수를 만나지 못하였지만  일생동안 기독교의 복음을 전하고 말씀을 기록하는데 있어서 그 누구도 따라올 수 없을만큼 기념비적인 업적을 남긴 (바울)을 사도의 반열에 올린 것이다.

  혹,  교황이 없는 바티칸은 어떨지 모르겠으나,  사도 바울이 없는 기독교는 결코 존립할 수가 없지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어디 그뿐이 겠는가?

  예수와 함께 생활하고 십자가 사건 이후에 뿔뿔히 흩어진 12 사도들과 다르게  가장 헌신적이고 열정을 다해 복음을 전파한 사람이  한 사람 더 있다.  실제 전해내려오는 여러 기록에서 보아도  그 사람이 예수로 부터 가장 사랑과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바로 막달라 마리아를 말한다.

  초대교회에 성차별이 너무도 극심해서였을까?

  그녀는 버려졌고  철저하게 지워졌다.  아니 더하여 심하게 왜곡되어지기까지 했다.

  누가 막달라 마리아를 왜곡하고 지워버렸을까?  왜?

  그런 측면에서 생각해 볼 때.........  마르코(마가)는 도대체 어떤 사람이었을까?

  무엇이 베네치아로 하여금 이토록 장엄하게까지 그를 떠받들록 만들었을까?

 

 

 

 

 

 

 

 

 

 

 

 

 

 

 

 

 

 

 

 

 

 

 

 

 

 

 

 

  "마르코는 예수의 제자나 목격 증인이 아니었고 베드로의 통역이었는데,  베드로로부터 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들을 순서대로는 아니지만 기억나는대로 충실하게 기록하였을 뿐망 아니라, 그 어떤것도 삭제하거나 삽입하지 않았다."

 

  서기 115년경 초대교부들 가운데 소아시아 히에라폴리스의 주교 파피아스가 밝힌 베드로와 마르코의 관계에 대한 설명이다.  평소에 요한 사도로부터 전해들은 바가 있어서 '마르코가 베드로를 통해 전해들은 예수의 말씀과 행적에 관한 내용을 기록하였다'고 저간의 사정을 나름 잘알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증언하였다.  이것이 마르코 복음서에 관하여 가장 분명하게 남아있는 기록이다.  또한 마르코가 누구인지를 잘 나타내주는 구절이다.

  마르코는 본래 리바아 근교인 펜타폴리스의 시렌 출신으로 이교도 였으며  훗날 사도들의 설교를 듣고 감화를 받아 기독교인으로 개종하였다고 전해진다.

  이집트 알렉산드리아로 전도여행을 떠난 마르코는 그곳에서 기적을 행하기도 하였으며  그곳에 교회를 세운후 초대 주교가 된다.  서기 68년 마르코의 선교활동을 못마땅하게 여긴 이교도들에 의해  끈에 목을 묶인 채로 알렉산드리아 도시 이곳저곳을 개처럼 끌려다니면서 돌팔매질을 당하였고,  끝내는 참혹하게 참살당하였다.  이교도들은  후환을 두려워하여 마르코의 장례조차 치루지 못하게 하였으며,  결국 그의 시신 조차도 아무도 모르게 내버려졌다.

  세월이 한참이나 흐른 뒤,  서기 팔백년대 초  알렉산드리아의 한 교회에서  마르코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기독교 성자의 후환을 두려워한 이교도들이  마르코의 시신을 없애버리기로 모의하였으며,  시신이 안치되었던 교회를 헐고 이교도의 사원을 짓기로 계회기했다.  알렉산드리아 사도 교회의 신도들은  마르코의 유해를 지키기 위해서 심혈을 기울였으며,  유해를 옮겨갈 새로운 교회를 인근에 짓기로 결의 하였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베네치아 공국의  도제(총독)이 밀명과 함께 일련의 사람들을  알렉산드리아로 급파했다.

  중세시대부터 유럽의 대다수 왕이나 지도자들은  종교적인 성스러움에 대해 몹시 집착했다.

  성인의 유해를 모시면 악이 물러가고 부와 명에와 행복이 찾아온다고 굳게 믿었다.  하여 뭇사람들로부터 추앙받는 고령의 성직자들을 서로 모시고 가려고 혈안이 되었다. 자신들의 도시나 집안에 모시다가 돌아가시면 그 유해를 자신들의 거처에 안치시키고,  종교적인 신령함을 빌기 위해서였다.

  어디 그 뿐이었겠는가?

  성인으로 추대받는 성직자의 유해를 서로 빼앗고 훔쳐가는 일잉 다반사가 되었다.  모든 국가와 도시와 왕족에게는 자신들만의 수호성인이 있게되었다.

  하지만 베네치아에는 아직 수호성인이 없었다.

  시칠리아 시라쿠사 출신으로 신앙을 지키다 순교한 성녀 루치아의 시신을 두고  나폴리와 뺏고 뺏기는 쟁탈전을 벌였다.  비잔틴이 시라쿠사에 있는  루치아 성녀의 시신을 먼저 훔쳤다.  콘스탄티노플로 가져다가 수호성녀로 삼을 생각이었다.  시신을 훔쳤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비잔틴은 벌써 성녀를 모실 교회를 착공까지 했다.  그러던 와중에  콘스탄티노플로 밀반출되던 성녀의 시신을  이번엔 나폴리가 중간에 가로채 달아났다.  나폴리의 수호성인으로 성녀 루치아를 모실 생각이었다.  우여곡절 끝에 시신은 결국 나폴리에 도착했다.  그러자 여기에 또 하나의 강적이 등장했다.  수호성인이 없어서 노심초사하던 베네치아 였다. 거기에다  나폴리와 베네치아는  앙숙이었다.   지중해의 교역 패권을 놓고 심각하게 대립하던 시기였기때문이다.

  이번엔 베네치아가  사상초유의 신출기몰한 작전으로  나폴리에 안치된  성녀 루치아의 시신을 또다시 훔쳐 베네치아로 가지고 갔다.

  나폴리는 결코 포기하거나 물러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시신 하나를 두고 금방 전쟁이라도 불사할만큼 지중해 전역에 암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나폴리는  자신들과 교류하는 전 유럽의 국가와 도시들을 동원해 베네치아를 압박했다.  심지어는 거기에 그치지 않고  교황청까지 동원했다.   유럽 전체에 커다란 재앙의 도화선에 불이 붙기 직전의 상황이 되었다.  비잔틴 제국이  원소유권을 주장하며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비잔티. 나폴리. 베네치아가 지중해에서 한바탕 전쟁을 벌일판이었다.  다급한 교황청이 나섰다. 모두를 불러 놓고 중재를 나선것이다.

  해결책은 단 한가지 뿐이었다.

  성녀 루치아의 시신을  최초의 원소유주인 시라쿠사에게 돌려주라는 안건이었다.  당장 시신을 차지하고 있는  베네치아는 반대했다.  일단 치지하고나면 장땡 아니겠는가?  비잔틴과 나폴리는 한발 물러섰다.  자신들이 포기해야한다면  베네치아도 포기해야 한다는 명분이었다.

  결국 성녀 루치아의 유해는 베네치아로 돌아갔다.  하지만 온전히 모두가 돌아간것은 아니다.  베네치아는 절대 모두를 포기할 수 없었다.

   끝내 루치아 성녀의 유해는 나뉘어지고 말았다.  일부분은  베네치아에  다른 일부는  시라쿠사에 전해졌고 안치되었다.

  그만큼 수호성인에 목말라 하던  베네치아였으니  이 같은 호기를 그대로 놓칠리가 없었다.

  더군다나  복음서를 쓴 '마르코의 유해'라니...........

 

  '훔쳐내는데 성공했다'

  짧은 내용을 담은 전서구(비둘기 편지)가 베네치아의 두칼레 궁전으로 날아들었다.

  도제는 책상을 내리치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환호성을 질렀다.

  '오랜 베네치아의 숙원이 이제야 달성되었구나.  무사히 빼내오기만 하면 되는것이야. 베네치아의 모든 정예 기사들을 서둘러 파견하라.'

 

  알렉산드리아가 발칵 뒤집혔다.

  '성자 마르코의 유해가 사라졌다.'

  알렉산드리아 사도교회의 신자들은 처음 이교도들의 만행으로 의심했다.

  어떻게든 성자의 유해를 파괴해 후환을 없애야겠다고 마음먹었던  이교도들은  사도교회측의 자작극을 의심했다.

  결국 시의회와 총독부(경찰)까지 합세하여 합동 공조수사에 들어갔다.

  드러난 사실은  이교도의 만행도 아니었고  사도교회의 자작극도 아니라는 결말이 돌출되었다.

  그렇다면 도대체  '마르코의 유해'는 어디로 사라졌다는 말인가?

  결국 근자에 새롭게 모습을 나타낸  베네치아 상인들과  몇몇 수도사들에게 의심의 눈초리가 쏠리게 되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베네치아 상인조합의 우두머리가 공개 선언을 했다.

  '우리 베네치아 상단은  이번 성 마르코의 유해 분실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을  여기 베네치아 공화국 도제의 이름을 걸고 분명게 밝히는 바이요.  이렇게 분명히 밝혔음에도  거듭 우리 베네치아 상단을 의심하는 것은  공화국의 명예를 불신하는 것으로 간주하고,  우리는 즉각 전쟁도 불사할 것임을 이렇게 만천하에 분명하게 밝혀두는 바이요.  베네치아는  유해 도난 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소.'

  베네치아는 기다렸다는 듯이  전쟁도 불사한다는 선전포고를 먼저 외치고 나왔다.

  대대적인 '유해 도난 사건'의 수사는 확대되었고,  이제는 전 유럽이 이 사태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하였으며,  자신들의 이익에 적합한지 판단하에 편을 가르기 시작했다.  베네치아는 겉으론 태연한 척,  이 사태와 아무런 연관이 없는 척, 수수방관하듯이 한 발 물러섰지만 속내는 전혀 그러하지 못했다.

  베네치아의 도제로부터 새로운 명령을 하달받은 후진이 속속 알렉산드리아로 들어오고 있었다.

 

 

 

 

 

 

 

 

 

 

 

 

 

                             --  마르코의 유해를 담은 광주리를  이교도들이 극히 꺼리는 돼지고기로 덮어서 감시망을 피했다.

 

 

                            -- 갖은 우여곡절 끝에 결국 베네치아 상단의 상선에 유해를 옮겨 싣고 지중해를 건넜다.

 

 

                            --  도제 관저에 도착한 유해를 도제가 개인적으로 차지하려고 하자 전혀 꿈적도 하지않는 성 마르코의 유해.

 

 

                            -- 결국 욕심을 포기한 도제가  성마르코 성당을 짓고 유해를 안치하겠다고 선언하자 비로소  유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기독교 도시국가가  자신들의 번영과 안전을 위하여 같은 기독교 교회로 부터 성인의 시신을 훔쳐온다는 것........

  이것이 정녕 신성한 종교관에 입각해서 가능한 일이란 말인가?

  계율에도 분명하게 기록되지 않았던가?

  '타인의 것을 훔치지 말라.'

  다른 사람의 것은 절대 훔치지 말되,  다른 교회의 것은 훔쳐도 된다는 해석이 가능한 것일까?

  어쩌면 신성한 성자의 유해 자체에 치명적 결함이 있는것은 아닐까?

  성자의 유해에 종교적 신성이 분명히 존재한다면.......  부정한 방법으로  훔쳐간 자의 영역에선 신비로운 효험을 보여주지 말았어야 하는것이 아닐까?  훔쳐가든 말든 아무데서나 쓸데없는 효험을 자주 내비추기에 저렇게 빼앗든 훔치든 더 혈안이 되는것이 아닐까?

  또,  창조주나 구세주가 아닌  수많은 성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들을 넘어서 시신이나 유해에까지 저렇듯 맹신하는 것은  또 하나의 우상숭배가 아닐까?

 

  이도저도 아니고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 보자면  '한마디로 개판 아닌가' '참으로 웃기는 시츄에이션을  교회가 저지르고 있는것' 이라 하겠다.

 

 

 

 

 

 

 

 

 

 

 

 

 

 

 

 

 

 

 

 

 

 

  아무튼 성서를 잡고있는 날개달린 사자로 상징되는  '마르코의 유해'는  산 마르코 대성당에 안치되었고 베네치아의 수호성인이 되었다.

  '유해 도난사건'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고 철저하게 발뺌하던 베네치아는  유해가 베네치아에 도착하는 순간부터 '마르코의 유해가 자신들을 소중한 자산'이라고 세상에 널리 알리고 자랑하였다.  더하여 대성당은 착공식과  준공식을  온 유럽의 역사에서도 손에 꼽았을 정도로 대단히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재력과 권력과 신성한 종교를 앞세우면  언제든  거짓말도 진리가 된다는 진귀한 선례를 남긴 예라고 하겠다.

  '수호 성인'에 대한 갈급함이 어느정도였는지는  대성당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아주 절실하게 느끼게 된다.

 

  '오.  성스러운 베네치아의 약탈질이여.  그대들의 거짓말과 도둑질에 신의 은총이 영원히 가득하기를...........'

 

 

 

 

 

 

 

 

 

 

 

 

 

 

 

 

 

 

 

 

 

 

 

  이제 서둘러 발걸음을 돌려 산 마르코 광장을 빠져나가려고 한다.

  하지만 시선과 발걸음이 자꾸만 서성이게 되는것은 아직 무엇인가 이 광장에서 개운하도록 모두 둘러보지 못한 아쉬움 때문일까?

  산 마르코 광장을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응접실'이라고 칭송한 나폴레옹의 말은 액면 그대로 베네치아 입장에서 생각해 볼때 가히 영광스런 평가였다고 말할 수 있을까? 

  따지고보자면 여기 산 마르코 광장의 시작에서부터 모든것이 도적질(약탈)에서부터 시작된 것이었으며,  이를 평가한 인물 자체도 정복자이기 이전에 위대한 약탈자로 이곳을 차지한 사람의 망언이었기 때문이다.

  본래 채소밭이었던 이곳은 도제의 집무실이 딸린 정부 청사가 들어서면서부터 세방향으로 주랑에 둘러쌓이는 건축 형태로 발전을 거듭하면서 거대한 홀 같은 공간이 창조되었다.  이곳은 베네치아 공화국의  정치와 무역이 이루어지던 공적인 장소였다.

  하지만 이곳을 점령한 나폴레옹은  정복한 땅의 유력자들을 달래고, 목숨을 받쳐 전쟁을 승리로 이끈 부하들을 위로하기 위하여 이 드넓은 광장에서 연일 파티를 열었다.  정복자에겐 자축의 의미가 담긴 성대한 파티였으며,  정복당한자에겐 억지로 끌려나와야 했던 치욕스런 장소였을 것이다.  그런 장소에 대해서 나폴레옹은 찬사를 보낸것이 아니라  어쩌면 '나름 꽤 쓸만한 사교장' 이었다고 에둘러 표현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어디 그뿐이었는가?  이곳엔 인과응보(因果應報)나 후안무치(厚顔無恥)라는 표현에 딱 어울리는 기념물(유물)이 버젓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당연히 '베네치아 공국'이나 '나폴레옹'에게도 해당되는 이야기다.

  더불어 이 약탈물의 실체에 접근해 보면........ 참으로 아리송하고 어느정도는 난감한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산 마르코 성당의 입구 위 난간에 올려진 네 마리의 청동기마상을 일컬음이다.

  이 조각상의 이름은  콰드리가(Quadriga)라고 불려진다.

  베네치아가 콘스탄티노플에서 뺏어 온것을,  베네치아를 점령한  나폴레옹이 다시 빼앗아 프랑스로 가져가 버렸다.

  나폴레옹이 패망하자 베네치아는 끈질기게 프랑스에게  콰드리가의 반환을 요구했다.  그리고 끝내는  콰드리가를 되찾아  산 마르코 성당 안의 박물관에 보관하였고,  복제품을 만들어  산 마르코 성당의 입구 지붕에 설치하였다.

  만약에 이스탄불(옛 콘스탄티노플)이 소유권을 주장하며  콰드리가의 반환을 정식요청한다면  베네치아는 과연 이를 수락할까? 되돌려 줄까?

  나는 이렇게 생각한다.

  '도둑놈은 목숨은 버릴 수 있을지언정  훔쳐온 물건을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라고 말이다.  베네치아는 절대로 돌려주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청동기마상(콰드리가)의 실제 주인은 과연 누가되어야 할까?

 

 

 

 

 

 

 

 

 

 

 

 

 

 

 

 

 

 

 

 

 

 

 

 

  그렇게 따져본다면  베네치아는 한마디로 '약탈 공화국'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그리고 이 모든 약탈이 신성한 신(神)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네마리의 청동기마상(콰드리가)를 둘러싼 흑역사............

  그리고 비로소 등장하게되는  '도제(doge)  엔리코 단돌로'의 역활............

 

  도제  엔리코 단돌로는 오늘의 베네치아를 있게끔 만든 장본인이었음에도 왜  베네치아에 의해서 철저하게 버려지고 지워져야만 했을까?

 

 

 

 

 

 

 

 

 

 

 

 

 

        ------  생각보다 이야기가 길어져서  다음회에서 베네치아 이야기를 좀 더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