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겨울에 티비를 통해 축구 경기를 보면서 나는 어떤 짜릿짜릿한 전율 같은것을 자주 느끼곤 한다.
베트남 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새로 창설된 '유럽 네이션스 컵' 국가대항전을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다.
정말로 스포츠는 위대하다.
특히 그 중에서도 둥근 공 하나면 그것으로 충분한 축구를 통해 보여주는 스포츠의 진면목은 자주 나를 감동의 도가니로 이끌어가고는 한다.
영국이나 프랑스, 스페인과 이탈리아의 축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몰도바. 몬테니그로. 알바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비나.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에스토니아. 리트비아. 벨라루스. 코소보 등의 국가 명칭을, 또는 그들이 유럽의 어디쯤에 붙어있는지 알고는 있으신가?
그런 그들이 오로지 자국의 명예를 걸고 공 하나 놓고 벌이는 한판 승부는 하나의 기적이며 한편의 마술이다. 불과 십수년 전에 민족과 종교를 걸고 서로 사투를 벌이며 서로를 증오하던 그들이 너른 운동장에서 공하나를 놓고 페어 플레이를 외치며 스포츠를 통한 승부를 펼친다.
그런데 참으로 이상하다.
이렇게 듣도보도 못하던 생소한 이름의 축구 국가대표가 많이 등장하는 국제 축구시합에서 폴란드. 헝가리와 더불어 올림픽 축구(아마추어)의 절대 강자였던 '유고슬라비아'라는 이름이 사라져 버린것이다.
동유럽의 축구강호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아예 축구를 안하기로 국가차원에서 작정을 해버린 것일까?
축구 뿐만이 아니다. 유고슬라비아는 이제 국제사회에서도 사라져 버렸다. 역사속으로 사라진 것이다. 어디로 갔을까?
유고슬라비아의 수도가 베오그라드 였는데....... 그러면 베오그라도도 함께 사라졌을까?
'하얀 도시'란 뜻을 간직한 베오그라드는 지금은 '세르비아'의 수도이다. 그렇다면 유고슬라비아가 세르비아로 국가 명칭을 바꾼것일까?
글쎄다.
보스니아란 국가 말고 '보스니아 헤르체코바'라는 엄연한 국가가 국경을 맞대고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바의 수도는 '사라예보'이다. 엄연한 독립국가이다.
그렇다면 '보스니아'는 어떤 나라이고, 또 '보스니아 헤르체코바'는 또 어떻게 생겨난 나라일까?
유고슬라비아는 도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발칸반도를 여행한다면 여행사 가이드는 입이 바짝 마르도록 열변을 통해 역사 강의를 하겠지만, 근 현대사를 접해본지가 까마득한, 아니 공부를 했다해도 입시를 위해 연표와 인물을 중심으로 답안지 작성을 위해서 읽고 외웠던 기억으로는 도저히 미로같은 현대사가 복잡한 퍼즐처럼 제대로 맞추어지지가 않는다. 거의 불가능하다. 하여 그냥 데려다 주는대로 뷰가 좋은 곳이나 찾아가서 인증샷이나 찍고마는 것이다. '1차 세계대전의 발원지는 사라예보' 정도의 기억만 겨우 끄집어 내게될 뿐이다. 이 지역이 소용돌이치는 격변의 현대사를 모두 직접 체험한 속내는 전혀 모르고 구경만 다니게 되는 것이다.
-- 라틴 교(Latin Bridge)는 세르비아의 도시 중심에 있으며,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게된 역사적 장소이다.
<알림> 이번 '오스만의 역사를 통해 들여다보는 보스니아 사태' 편에서는 제가 아직 방문하지 못한 지역과 가지지 못한 사진 자료를, 이야기의 이해와 설명을 위해 필요한만큼 (네이버)와 (구글)에서 자료로 사진을 퍼오게 되었음을 사전에 밝혀두고자 합니다. 오로지 이번 회차의 역사 이야기 설명을 위해서일뿐이라는 점을 분명하게 밝혀둡니다. 오해 없으시길......... 슬레마니예 이야기 등장하는 사진은 모두 제가 직접 촬영한 사진임.
라틴 교(Latin Bridge)는 '세르비아 헤르체코바'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로 수도 사라예보를 관통하며 흐르는 밀야츠카 강 위에 건설되었으며 도심의 중심도로 역활을 오래도록 수행하고 있다. 여기 이 밀야츠카 강은 사라에보 지역의 가장 커다란 강인 보스나 강으로 흘러들어간다.
기록에 의하면 라틴 교는 처음엔 목재 다리로 건설되었는데 1514년 가죽제품 제조업으로 부자가 된 시르메르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50여년이 지나 1565년에 사라에보의 유력자로 부상한 알리 아이니베그가 현재의 석교로 대체하였다고 기록되었다. 보스니아 지역에서 가장 오래된 다리이다.
이 당시는 오스만 투르크(술레이만 대제 시대)가 이지역을 점령하였을 때 이다. 그런데 다리의 건설은 피지배국으로 전락한 세르비아인에 의해서 독자적으로 건설되었던 것이다.
교량은 4개의 아치와 3개의 튼튼한 기둥과 제방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라예보의 중심을 가로지르는 도로를 연결해 주는 라틴 교는 특별히 아름답다거나 유물로의 가치 보다는 현대사의 아픈 상처를 가진 장소로 더욱 유명하다. 1914년 6월 28일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였던 가브릴로 프린치브가 라틴 교 인근의 도로에서 폭탄 테러를 감행했다. 상대는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으로 장차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황위를 물려받을 황태자 신분이었던 것이다. 세르비아의 독립을 외치며 던진 폭탄은 황태자 부부가 탄 차량의 뒷바퀴에서 터져 화를 면할 수 있었다. 황태자비가 부상 당하자 당황한 황태자는 손수 차를 운전하면서 위험지역을 벗어나 병원을 향했으나 길을 잃어버린 채 종국엔 다시 사고현장으로 되돌아오게 되었다. 황태자를 뒤쫓던 가브릴로는 마침내 라틴 교에 이르러 황태자의 차량을 따라잡게 되고 그 자리에서 권총으로 황태자 부부를 암살하고 나서 곧바로 출동한 경찰에 체포되었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은 이 사라예보 사건의 책임을 물어 사라예보에 최후통첩을 보낸다.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을 지원하는 국가들과 보스니아를 지원하는 국가들 사이에 세력다툼이 이 사건을 빌미로 벌어지게 되었으니 바로 '제 1차 세계대전'이다.
--- 보스니아 헤르체코바의 수도 사라예보의 풍경과 야경.
--- 라틴 교의 풍경과 야경.
-- 제 1차 세계대전은 참호를 파고 대치하는 장기전과 독가스가 등장하는 참혹한 전쟁의 등장이었다.
라틴 교가 가진 특별한 풍경은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그저 오랜 세월을 견뎌 온 매우 튼튼한 다리라는 느낌 뿐이다.
하지만 제 1차 세계대전을 발발케한 역사적 장소라는 점 때문에 사라예보를 찾는 여행자들이 가장 먼저 찾는 유명 여행지가 되었다.
다음으로는 보스니아 헤르체코바의 랜드마크라 할 수 있는 다리가 역시 이곳 인근의 모스타르에 있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바를 찾는 여행자들이 꼭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자, 이 다리때문에 헤르체코바를 찾아간다고 해도 무리는 아닐것이다.
스타리 모스트 다리(Stari Most Bridge)로 불리는 이 다리는 '오래된 다리'라는 평범한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이 다리가 위치한 도시의 이름인 모스타리(Mostari)는 다름아닌 '다리 지킴이'란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서로 썩 잘 어울리는 이름이다.
이 다리 역시 보스나 강의 지류인 네레트바 강 위에 건설되었다.
1566년 보스니아 지역을 포함한 발칸반도를 점령한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술레이만 대제의 명으로 오스만 최고의 건축가 '미마르 시난'에 의해서 약 9년의 공사 끝에 완공되었다. 다리만으로도 아름답지만 주변의 풍광과 어우러진 '스타리 모스트 다리'의 풍경은 가히 절경이라 할 만하다.
1992년 보스니아 내전사태때 상당부분이 파괴되었었지만, 오랜 복원 공사기간을 거쳐 2008년에 지금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스타리 모스트 다리는 유네스코 세게 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으나, 그 다리의 빼어난 풍광보다는 더 깊은 상징적 의미를 고스란히 담고 있다고 보아야겠다.
국제 사회의 전폭적 지원으로 복원된 다리는 '다민족 다종교의 공존과 화해의 상징'으로 헌정되었다.
왜 기념물의 등재에 꼭 '다민족 다종교의 공존과 화해'라는 구절이 삽입되어야만 했을까?
그것은 이 지역의 상처와 참혹함으로 얼룩진 역사가 모두 '민족' '종교'간의 대립과 반목에서 시작외었고,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나타내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지역에서의 참상을 오로지 국가간의 싸움으로 보는 것은 결코 바른 시각과 역사관이 아니다.
국가관을 뛰어넘는 더 깊은 심연엔 '민족'과 '종교'가 자리하고 있다.
대단히 어렵고 매우 복잡한 내용을 담고 있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자신들의 신을 모셔온다고 해도 이 지역의 사태를 해결하기란 결코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세상 사람들은 이곳을 '21세기의 화약고'라고 부른다.
스타리 모스트 다리를 어떤 풍광에 견주어도 손색이 없을만큼 아름답다. 주변경관과의 멋진 조화를 이루며 아름다운 풍경의 극치를 여실히 보여준다.
이 지역을 찾는 여행자라면 그곳이 보스니아 이던 보스니아 헤르체코바던 상관없이 스타리 모스트를 가장 중요한 여행지로 꼽는다.
스타리 모스트 다리와 더불어 라틴 다리를 이지역 최고의 여행지로 여행사와 가이드는 입이 마르도록 자랑할 것이다. 그들은 이곳의 지정학적 특징과 이 지역은 근 현대사를 장황하게 늘어놓게되겠지만, 그 말을 알아들을 여행자는 거의 없다. 그저 아름다운 관광지를 다녀가는 정도이고 인증샷만이 기억에 남겨질 것이다.
미마르 시난은 왜 그가 직접 이곳에 장장 9년이나 걸쳐 다리를 놓아야 했을까? 하긴 그의 명성에 걸맞으려면 저 정도쯤의 당연히 되어주었어야지.
하지만 그의 인생에서 9년이란 시간은 그리 호락호락 여길 수없는 아주 긴 시간이었을 것이다.
그는 아주아주 장수한 인물이기는 했지만........ 일생 동안 '술레마니예 자미'를 포함해서 약 1백개의 건축물을 지었다. 그런가 하면 '이스탄불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 복원'과 이즈닉의 '하기야 소피아 성당 복원' 등 일생동안 약 3백여건의 복원 내지는 부분 건축에 매달렸다. 그의 건축물 대부분은 이스탄불과 이스탄불에서 가까운 인근에 남아있다. '술레마니에 사원'이나 에디르네의 '셀리미예 모스크' 등은 1년 2년에 완성될 성질의 건축이 결코 아닌 것이다. 그렇다면 시난은 일생동안 어덯게 그 많은 건축물을 지을 수 있었을까? 그런 그가 이 멀리 떨어진 보스니아에서 9년간에 걸쳐 다리공사를 했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 간단한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미마르 시난과 슬레이만 대제의 관계 속에서 풀어야만 하는 문제인 것이다.
보스니아 지역에 오게되면 '스타리 모스트'와 '라틴 교'는 꼭 보게된다.
그리고 열정적인 가이드를 만난 여행자들은 라틴교를 누가 지었는지는 기억하지 못해도 제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한 장소라는 것은 기억을 하게된다. 더하여 아름다운 스타리 모스트를 기억하게 될 것이고, 착한 여행자는 미마르 시난이 이 다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간혹 기억하는 사람이 생겨나게 된다.
이 지역에 그렇게 의미있고 가치있는 다리가 2개만 있는것은 아니다.
또 하나 아주 중요한 다리가 이곳에 번듯이 존재하고 있다.
'마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가 바로 그것이다.
보스니아 헤르체코바의 비세그라드 지역에 건설된 마흐메드 파샤 소콜로비차 다리(Most Mehmed-pasa Sokolovica Bridge)는 드리나 강 위에 건설되었다. 11개의 석재 아치로 구성된 길이 180m의 이 다리는 오스만 제국의 다리 건설에 있어서 독특함과 건축공학적으로 무한한 가치를 지닌 기념비적인 건축물로 꼽히고 있다. 드넓은 강폭 위에 현재에도 굳건한 위용의 이 다리는 여타의 다리처럼 놓여지는 위치의 풍경이나 주변환경과의 연계성을 철저하게 배재한 채, 오로지 실용적인 목적으로 건설된 현대의 건축술에 견주어도 전혀 손색이 없는 아주 뛰어난 다리이다.
군대의 이동과 군수물자의 이송을 위해서 완성된 실용적 다리이다.
술레이만 대제가 사망한 뒤 이어서 등극한 셀림 2세에 걸쳐서 대수상(국무총리)을 연임한 마호메트 파샤 소콜로비차의 명에 의해 건설된 이 다리도 다름아닌 '미마르 시난'의 작품이다.
그리고 이대목에는 널리 알려지지않은 놀라운 비화가 숨겨져있다. 오스만 제국의 제 2인자 역활을 오랫동안 누리게 되는 대수상 마호메트 파샤 소콜로비차 또한 미마르 시난과 같이 (데브쉬르메) 신분이었던 것이다. 데브쉬르메 신분이란 쉽게 말해서 어린 시절에 오스만 제국에 소년 노예의 신분으로 끌려간 사람들이란 말이다. 대수상 지위까지 오른 소콜로비차의 고향이 바로 이곳 비세그라드였다.
이를 도대체 어떻게 이해해야만 한다는 말인가?
건축공학적인 정수를 담고 오스만 특유의 민족성이 담겼다고 평가받고 있는 이 다리는 미마르 시난에 의해서 1577년 완성되었지만, 제 1차 세계대전 중에 3개의 아치를 잃었고, 제 2차 세계대전 중에는 5개의 아치를 잃게된다. 그만큼 이 지역이 격랑의 세월을 안고 살아왔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후에 복원이 이루어졌지만, 1992년 벌어진 '보스니아 내전'을 치루는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다리위에서 잔인하게 학살되는 참혹한 역사의 현장이기도 했다.
그 숱한 격변의 시기를 몸소 체험하며 바라보아야 했던 소콜라비차 다리는 오늘도 굳건히 서서 유유히 흘러가는 드리나 강을 내려다 보고 있다.
보스니아에서 위대한 오스만 투르크의 건축혼을 미마르 시난을 통해서 만나보게 되다니............
'유럽의 화약고'라고 불리는 '보스니아 내전'이나 '코소보 사태'를 다루자면 먼저 그 지역을 나타내는 '발칸'이나 '발칸 반도'에 대해서 거론할 필요가 있다.
이 세상의 어떤 지리부도나 백과사전을 뒤져서 '발칸 반도가 도대체 어디에 있느냐'고 물어보면 100% '유럽이 남동부에 있는 반도'라고 대답한다.
하지만 이는 엄연히 틀린말이다. 발칸은 유럽의 남동부에 위치해 있지 않다.
이는 21세기에 살아가면서 대답은 20세기의 지도를 펴톻고 하고있는 꼴이다. 21세기의 지도는 분명히 20세기 지도와 많이 달라져있다.
나의 대답은 '발칸반도는 유럽의 중남부에 위채해 있다' 라고 하겠다.
이에 대한 대답을 다음의 예로서 이해를 돕고자 한다.
대한민국의 모든 여행사에 문의해 보자. '동유럽 여행을 하고 싶은데 어디어디가 동유럽인가요?'
한결 같이 똑 같은 대답이 돌아올것이다. '체코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오스트리아 빈' ' 폴란드 프라하'를 동유럽 여행의 진수라 하지요..... 라고.
하지만 이 역시 틀린 대답이다. 이는 1990년 까지의 유럽 지도를 놓고 볼 때 가능한 답변이다.
당시까지는 동서냉전의 여파로 유럽에서는 (구 소련)을 유럽에 포함시키지 않았고, 대신 터키를 유럽에 편입 시켰다. 그런데 1991년 (구 소련연방)이 해체되면서 (러시아)를 비롯한 15개 정도의 신흥국가가 새로 탄생했다. 1992년 부터는 러시아와 신흥국가들이 모두 유럽지역에 새롭게 포함되었고, 터키는 넣어주기도 하고 배제하기도 하는 새로운 시대로 변했다.
지금 현재의 유럽 지도를 펴놓고 살펴보라.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 등의 국가가 유럽에 새롭게 등장함으로써 유럽의 지도는 완전히 바뀌었다.
현재 유럽에서 (동유럽)이라 부를 수 있는 나라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젠이다. 거기에다 러시아를 북유럽이나 동유럽에 넣을 수 있을 것이다.
체코. 헝가리. 폴란드 등은 유럽의 가장 중심에 위치하게 된 것이다.
또한 발칸반도는 유럽의 남동부가 아닌 중남부에 놓이게 된것이다.
하지만 여행사는 이런 드러난 사실을 시정하려 들지 않는다. 소비자가 먼저 새로운 인식을 요구하지 않는한 현재의 동유럽으로 각인된 여행 홍보가 쉬우니까 갈 수 있는데까지 그냥 이대로 가보는것이다.
'발칸반도'를 지정학적으로 어디서 어디까지로 정하느냐는 다소 의견이 분부하지만 삼면이 바다로(이오니아 해. 아드리아 해. 에게 해. 흑해) 둘러 쌓여있기에 그대로 하고, 다만 북쪽이 문제이기는 하나 대체적으로 도나우 강 이남을 경계로 하는데 의견을 같이 한다.
그리이스. 마케도니아 공화국. 보스니아. 세르비아. 보스니아 헤르체코바. 알바니아. 불가리아. 몬테니그로. 코소보. 크로아티아. 터키(이스탄불 지역) 를 발칸반도 국가라 지칭하며, 여기에 간혹 루마니아와 슬로베니아를 포함 시키기도 한다.
사실 따지고 보면 그리 넓지 않은 지역에 수많은 국가와 민족과 종교가 매우 복잡하게 얽혀있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라고 하겠다.
발칸반도의 대부분에 지역은 아주 험난한 산악지형으로 되어있다.
'발칸'이라는 이름의 어원도 불가리아의 중부에서 시작해 세르비아 동부에 걸친 험준한 '발칸 산맥'에서 생겨난 지역 명칭이다. 발칸 산맥은 남쪽으로 그리이스를 향해 로도피 산맥으로 이어지고, 북쪽으로는 루마니아의 트란실바니아 알프스 산맥으로 이어진다.
발칸지역의 최대 호수인 '슈코더르 호수'는 알바니아와 몬테니그로 사이에 있으며 람사르 협약이 적용되는 국제적인 습지이며 동시에 유럽 최대의 조류 서식지이기도 하다.
그만큼 발칸반도는 세상의 그 어느 아름다운 명승지에 비해 결코 조금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매우 뛰어나게 아름다운 명소들을 아주 많이 품고 있다.
당연히 발칸반도는 내 여행 버스킷 목록에서 상단을 차지하고 있다.
발칸을 제대로 보자면 여러가지 여건을 고려할 때 봄이 가장 적당하다고 본다. 오랜 시간과 준비도 필요하고....... 그런데 내 직업상 아직은 겨울철이 겨우 나에게 시간이 허락되기에 뒤로 미루고 있을 뿐이다. 험준한 산악지형을 수월하지 못한 교통편으로 제대로 모두 돌아보기에는 겨울은 가히 절망적이다.
크로아티아와 그리이스를 제외한다해도 나머지 국가는 한번에 몰아서 모두 둘러보아야만 제대로 발칸을 느낄 수 있을거란 생각에서이다.
발칸 여행 또한 내겐 강렬한 로망이다.
역사속으로 들어가보기 전에........ 내가 알고 열망해 마지않는 발칸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이 글을 읽어주시는 분들께 사진(물론 퍼옴)으로나마 선물로 보여드리고자 한다. 누구나가 한번쯤은 덜 알려진 발칸의 역사와 대자연속으로 여행을 떠나보시기를 강력하게 추천드리면서..........
'적어도 발칸반도는 이 정도 아름다움을 간직하고 당신의 방문을 기대하고 있습니다.'
지난 터키/부르사 여행에서 이미 여기 발칸지역과 연관해서 투르크 초기의 역사를 이미 거론했던 적이 있다.
고대 발칸 지역에서 시베리아에 이르는 험준한 산악지형의 드넓은 지역은 문명세계에서 버려진 땅이었다. 로마제국의 시선에서도 이곳은 유랑하는 유목민이나 겨우 살아갈 수 있는 척박한 야만인들의 지역이었다.
이베리아반도(스페인 포루투갈)와 아프리카 북부를 장악한 로마에게 점차 확장할 가능성이 있는 땅으로 서서히 발칸반도가 재평가되기 시작했고, 로마는 서서히 지금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해안(이오니아 해) 지역을 개발하기 시작했다. 황제들의 별장과 귀족들의 영지가 속속 들어서기 시작했다.
그런가 하면 북쪽에서 슬라브족이 따듯한 남쪽을 향해 서서히 세력을 뻗어내려오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곳 발칸반도 인근에서 유목생활을 하던 부족 연맹체를 흔히 '투르크'라고 불렀다. 당시의 투르크는 다양한 인종과 민족이 혼합된 집단부족 체제였다. 로마의 확장과 슬라브족의 남하로 영역이 점점 줄어들자 '투르크'는 뿔뿔히 흩어지기 시작했다.
일부의 백인 투르크들은 헝가리 폴란드 지역으로 흡수되거나 심지어 로마에 귀속해 갔다. 일부의 아시아계통 투르크들은 우크라이나 키리키스탄 우즈베키스탄 쪽으로 이동해 유목생활을 이어나갔다. 일부의 아리아계 투르크는 인도지역으로 넘어가 정착했다.
부족장 '셀주크'가 이끄는 투르크가 이란지역의 카스피해 지역으로 이동해 정착했다. '셀주크가 이끄는 투르크에서 온 부족' 이라고 해서 이들을 '셀주크 투르크'라고 불렀다. 이들은 카스피해 지역에 정착하면서 자연스럽게 이슬람 문화권에 흡수되었다. 정착 민족과 혼인들을 통해서 혈연관계로 무슬림화 되어갔고, 급변하는 시대속에서 이슬람을 대표하던 사샨왕조를 물리치고 새로운 무슬림 시대를 대표하는 '셀주크 투르크 제국'으로 성장하게 된다.
하지만 셀주크 투르크는 지극히 짧은 시간만에 급격하게 몰락의 길을 걷게된다. 황권 승계를 싸고 다툼이 계속되면서 여러 소국으로 나뉘게 되고, 점점 치열해지는 권력다툼의 전쟁속에서 다시 소규모 부족시대로 퇴보를 거듭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몽골제국이 쳐들어오면서 셀주크 투르크는 역사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몽골제국이 물러갔다.
그러자 이번엔 느닷없이 유럽 기독교 연합군이 들이닥쳤다. 제 1차 십자군 전쟁이 벌어진 것이다.
뿔뿔히 흩어져 있던 셀주크 투르크는 십자군을 상대할 능력을 상실한지 이미 오래 되었다. 십자군은 성지 예루살렘을 점령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십자군이 자행한 약탈과 살륙은 너무도 처참했다. 아무리 종교와 민족이 다르다 해도 사람이 사람에게 저지를 수 있는 한계를 훨씬 뛰어넘었다.
분노한 이슬람이 하나 둘 모여들기 시작했다.
십자군이 그냥 전쟁만을 통해서 예루살렘을 점령했다면 흩어진 이슬람은 여전히 그대로 남의집 불난것을 바라보듯이 관망했을 것이다. 하지만 십자군은 이슬람 인들을 참혹하게 살해했고 이슬람의 신앙을 짖밟았고, 더하여 알라신을 모독했다. 숨이 붙어있는 이슬람인 이라면 더이상 참기힘든 모욕이었다.
분노한 이슬람은 성전을 선포했고 하나로 뭉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중간에 쿠르드족 출신의 위대한 지도자 살라딘이 등장을 한것이다. 이슬람을 하나로 뭉치게 한 살라딘은 성전을 통한 예루살렘 탈환을 선언했다. 200년에 걸친 진짜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살라딘은 예루살렘을 탈환했다.
십자군은 유럽으로 쫓겨 달아났다. 그리고 다시 쳐들어 왔다. 하지만 그들은 다시는 이슬람과의 전쟁에 이기는 방법으로는 예루살렘을 차지하지 못한다.
살라딘이 죽고난 후에 이슬람은 또 다시 분열하기 시작한다. 또 다시 권력투쟁이 반복되고 이슬람은 또다시 소국이나 부족으로 전락하는 전철을 되밟는다.
아나톨리아 평원에 오스만이라는 부족장이 있었다.
셀주크가 부족을 이끌고 발칸반도를 떠나올 때 포함되었던 소부족이었다. 셀주크 부족장이 셀주크 투르크제국을 건설하고 대륙을 호령할 때도, 오스만의 조상들은 조용히 숨어서 유목생활을 영위하면서 시대의 흐름을 예의주시 하고 있었다. 그저 부족을 돌보고 스스로 전투 능력을 갖추어서 외부의 침입에 대비를 철저히 하는 정도에 그쳤다. 그의 조상들은 몽골 제국이 쳐들어 오자 부족을 모두 이끌고 아나톨리아 평원 깊숙한 곳으로 도망쳤다. 십자군 전쟁이 말미에 접어들었을 때 오스만의 부친은 아들과 잘 훈련된 부족민들 이끌고 전투에 여러번 참여해 눈부신 전공을 세운다.
살라딘 사후에 이슬람 전체가 작은 분쟁과 다툼으로 지리멸멸하였을 때, 원대한 포부를 가졌던 오스만이 부족을 이끌고 세상속으로 뛰어들게 된다.
이들을 후세 사람들은 '오스만 투르크'라고 부른다. 바로 지금의 터키 조상이다.
오스만의 아들 '오르한 가지'는 비잔틴을 상대로 전쟁을 벌여 부르사를 점령하면서 그곳을 수도로 정하고 국가의 이름은 '오스만 투르크 제국'으로 삼고 스스로 술탄의 지위에 오르게 된다.
여기까지가 오스만 투르크가 등장하게 되는 배경이었고, 이제 점차 오스만과 비잔틴의 대결은 발칸반도까지 확대되기 시작한다.
반명, 셀주크 부족장이 투르크 부족을 데리고 떠난 뒤부터 시간이 한참이나 흘러서 오스만 투르크 제국이 등장해서 발칸반도를 두고 비잔틴과 대결하기까지 그 오랜 시간동안에 발칸반도에서는 도대체 어떤 일들이 벌어지고있었을까?
---- 가운데 빨간 점선을 기준으로 동로마와 서로마로 로마제국은 분할되었다.
로마는 다신교를 믿는 국가였다. 주신은 태양신 미트라였다.
지중해는 물론 멀리 소아시아지역의 카스피해 연안까지 영향력을 뻗쳤던 로마의 영토 안에서는 다신교 신앙과 함께 태양신 미트라를 숭배했다.
멀고먼 코카서스 남쪽 아나톨리아 평원을 바라다보고 있는 아르메니아 가르니 사원이 그 대표적인 사례라고 하겠다.
제국의 영토는 너무나 넓어졌고, 반면에 로마의 통치자들은 넘쳐나는 풍요를 감당하지 못해 온갖 향락에 빠져들어 서서히 통치력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제국의 안위를 걱정해야하는 위기에 직면해서는 이미 자제력과 통치기반을 상실하고난 후였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은 그칠줄을 몰랐다.
몰락은 이제 너무도 자명한 사실이었다.
영민한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이를 돌파할 수있는 묘책을 찾아냈다.
사치와 향락에 빠져있는 로마의 기득권층(귀족. 부자. 카톨릭)의 기득권을 빼앗고 자신의 지위와 권위를 보다 확고히 세울 수 있는 방범을 모색한 것이다.
그것은 천도였다. 소아시아를 목전에 두고 바라보는 멀고 먼 타지로 수도를 옮길 게획을 세웠다. 콘스탄티노플 폴리스(이스탄불)이었다.
기득권층의 반발은 거셌다. 특히 이제 권력의 심장부까지 진출한 기독교 세력의 반발은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수주이었다. 하지만 황제는 이 문제에 자신의 야망과 정치적 생물적 생명를 걸었다. 330년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수도를 옮겼다. 하지만 끝내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었던 '로마 카톨릭'과 '부유한 상인' 일부와 '귀족'의 일부는 따라오지 않았다. 로마라는 지역이 가져다주는 기득권을 결코 포기할 수 없었던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권력을 향한 욕망과 부을 향한 탐욕에 치를 떨던 황제는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한 후에 '로마 카톨릭'이 아닌 '그리스 정교회'를 로마의 중심적인 기독교로 인정하고 지위를 부여해 준다. 권력에서 떠밀려난 '로마 카톨릭'과 새로운 세력으로 등장한 '그리스 정교회'의 갈등과 대결이 시작된 것이다.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노력에 대한 결과였을까, 한동안 로마제국은 다시 활기를 되찾고 새롭게 번영을 구가한다. 이는 차후 테오도시우스 황제때 까지 차분하게 이어진다.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지병인 수종으로 50세도 채우지 못하고 사망하면서 제국은 서서히 운명을 달리하게 된다.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자신의 두 아들에게 제국을 각각 나누어 주어서 통치하게 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그만큼 두 아들 모두 변변치 못하다 생각한 황제는 한아들이 이 거대한 제국을 모두 운영하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한 결과 반씩 나누어주면 나름 꾸려나갈 수 있을것이라 판단했던 결과였다.
아리카디우스(동로마의 초대황제)와 호노리우스(서로마의 초대황제)가 그들이다.(서기 395년)
이들을 보노라면 참으로 역사는 아이러니 투성이다. 이들 둘 다 황제의 깜(?)이 절대로 아니었다. 통치에 (통)짜 조차도 모르는 시전잡배들이었다. 테오도시우스는 오판을 해도 단단히 한것이다. 제국을 둘로 나누어 두 아들에게 줄것이 아니라, 쓸만한 사람을 골라서 하나인 제국을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망나니 같은 두 아들의 후사를 부탁하는 것이 로마를 위하는 일이었다.
동네 골목에서 양아치 노릇이나 하던 두 아들이 대제국을 둘로 나누어 하나씩 차지했다. 차후로의 일은 보나마나 뻔한것이 아니겠는가?
다만 동로마에는 그나마 행운이 있었는 것이....... 아리카디우스가 망나니 황제짓꺼리를 일삼다 그만 요절해 버린 것이다. 동로마의 행운이었다. 아리카디우스의 아들이 15세에 황제에 올랐다. 테오도시우스 2세다. 그가 할아버지에게서 이름만 물려받은 것이 아니라 통치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았던 것이다. 그 결과로 동로마는 앞으로도 한참 더 로마의 명맥을 이어가게 된다.
반면 서로마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쫄닥 망해서 역사속으로 사라졌다.(476년)
동서로마가 분열되어서 서로마가 멸망할 때 까지 약 80년간 서로마는 탐욕과 퇴페와 향락으로 얼룩졌다. 과거 콘스탄티노플로 천도할 때 따라가지 않고 로마에 남았던 기득권층의 기세가 하늘을 찌르던 시절이었다. 겨우 기세를 회복한 로마 카톨릭이 다시 전횡을 부리기 시작했다. 하여 동서로마로 분리된 후로 발칸반도의 서로마 지역이었던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 북부지역이 로마카톨릭의 세력권에 편입되었다. 로마 카톨릭의 영향권이 된 것이다.
반면 발칸 반도의 나머지 대부분의 지역은 모두 동로마의 그리스 정교회 지역이 된 것이다.
이 구분선은 동로마와 서로마, 비잔틴과 훈족의 등장, 비잔틴과 불가리아 제국, 비잔틴과 오스만 제국 간의 대결이 이어지는 동안에 이리 얽히고 저리 얽히고 대단히 복잡한고 미묘한 관계로 점점 혼돈속으로 발전하게 된다. 국가와 민족과 종교가 서로 실타래처럼 마구 엉켜가기 시작하는 것이다.
세상은 조용히 새로운 사조의 '봉건 시대'로 넘어가고 있었다.
서기 476년 서로마는 멸망했다.
이 부분에서 그럼 동로마는 언제 멸망했고 비잔틴은 언제 시작되었느냐는 물음이 뒤따르는데. 역사학계는 테오도시우스 1세의 사망과 동시에 동서로마의 분리를 비잔틴의 시작으로 본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동서로마가 분리되었다고 하는 이야기나, 로마가 서로마와 비잔틴으로 분리되었다고 보는 것이나 똑 같은 이야기라는 말이다. 그러니까 동로마의 멸망 또한 비잔틴이 오스만에게 멸망하는 때가지로 보면 된다는 뜻이다. 동로마가 곧 비잔틴이다.
테오도시우스의 두 아들을 망나니이자 황제깜이 못되었지만 다행히 장손인 테오도시우스 2세는 탁월해서 동로마의 명맥을 비잔틴 제국으로까지 슬기롭게 이어나갔다.
비잔틴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유스티아우스 황제는 불세출의 명장 벨리사리우스를 얻은 후에 '옛 로마영토 회복 운동'을 벌인다. 벨리사리우스는 비잔틴 역사뿐 아니라 전 로마의 역사와 온 인류의 역사속에서도 찬연하게 빛나는 불세출의 명장이었다. 그는 귀신도 울고 갈 용벙술의 귀재이자 타고난 전술가였다.
그가 일생동안 치룬 대부분의 전투가 항상 소수의 군대(열세)로 상대인 대군을 격파하는 역전승이었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명으로 벨리사리우스가 1천년 동안 숱한 외적의 침입으로 부터 콘스탄티노플을 수호하게 하는 난공불락의 요새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쌓았다. 또한 일생을 전쟁터를 누비며 시칠리아와 북아프리카 그리고 이탈리아 전 영토를 다시 회복하게 만든다.
하지만 말년에 들어서 점점 권력의 화신으로 변해가는 황제로 인해서 명예에 심각한 타격을 입고 모진 고초를 겪게된다.
유스티아누스 황제의 폭정으로 여기저기서 폭동이 일어나고 비잔틴이 급격히 쇠락의 기미를 보이자 북쪽에서 훈족이 대거 침입해 왔다. 훈족의 위세는 대단해서 이집트를 비롯해 비잔틴의 영토 상당부분을 점령하고 차지해 버렸다. 그리고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이 훈족의 목전에 놓이게 되는 절대절명의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를 느낀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자신이 심하게 모멸감까지 안기며 파면했던 벨리사리우스를 다시 불렀다. 무조건 훈족을 막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군대도 어떤 지원도 내려보내지 않았다. 그저 말뿐인 황제의 명령이었다.(우리나라 이순신의 백의종군이 떠오름) 이미 노년에 접어든 벨리사리우스에게는 아직 군인으로서의 무한한 자긍심이 남아 있었다. 군인은 그저 군왕의 명령을 따르고 목숨을 바쳐 국가를 수호하는 것만이 최고의 덕목이었던 것이다.
그는 단신으로 말에 올라 병장기를 차고 성문을 나섰다.
그러자 사방에서 지난날 그를 따르고 모시던 군사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급하게 군대를 편성하기는 했으나 무기와 보급물자가 절대로 부족했다. 하지만 황제는 여전히 나몰라라 외면했다. 그는 소리높여 외쳤다.
'이것이 국가를 위하여 나에게 내려진 마지막 책무라면 기꺼이 두려워 하지않고 적을 맞아 목숨을 바쳐 당당하게 싸울것이다'라고 외쳤다.
그는 힘차게 적진을 향해 달려 나갔다.
그리고 기적처럼 아주 소수의 군대로 훈족의 최정예 대군을 궤멸시켜 버렸다. 역사에 기록된 실로 위대한 기적같은 전투였다.
훈족은 다시 북쪽으로 달아났고, 귀환한 그에게 왕은 '왜 적을 끝까지 쫓아가 씨를 말려버리지 않았느냐'고 문책하며 심하게 모멸감만을 안겨준 뒤 다시 파면해 버렸다. 또다시 버림받은 벨리사리우스는 드러내놓고 욕할 수 없는 군주를 속으로 원망하다가 비참하게 죽는다.
방탕한 생활을 일삼던 유스티아누스 황제도 비슷한 시기에 죽게된다. 이후로 비잔틴은 또 다시 쇠락의 길로 곤두박질 치게 된다.
비잔틴 최고의 전성시대를 이끌던 유스티아누스 황제는 공과가 실로 극과극을 치닫는 인물이다. '하기야 소피아 성당'도 그가 건설했다.
이 시기의 비잔틴은 일부 소아시아지역을 제외하고는 로마제국에 버금가는 대제국을 형성했다.
이 시기에 기독교 교세도 널리 퍼져나갔으며 위의 지도에서 처럼 다섯군데의 중요 교구가 탄생하게 된다. 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옥. 예루살렘. 알렉산드리아 이다. 바로 초대교회가 로마의 박해 속에서 신앙을 지켜나가며 선교에 힘쓰던 그 지역들이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비잔틴의 기독교가 그리스 정교회 였다. 비잔틴의 영역엔 모두 그리스 정교회 신앙이 자리잡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의 카톨릭은 로마 안에서도 별도의 자신들의 구역안에서만 명맥을 이어나가고 있었다. 일부 로마카톨릭 추종자들은 비잔틴의 영역을 벗어난 폴란드 헝가리 체코 지역으로 이주해갔다.
지중해 연안의 유럽과 아프리카와 소아시아까지 모두 그리스 정교회 교리를 따랐다.
그런데 유스티아누스 황제가 사망하면서 부터 비잔틴 제국이 점점 줄어드는 입지와 함께 영토를 점점 상실해 가기 시작했다.
유럽대륙에 봉건영주들의 시대가 도래하기 시작한 것이다.
로마 카톨릭은 이들 봉건 영주들 사이를 파고들기 시작했다. 과거의 위상을 서서히 되찾아가기 시작한 것이다.
비잔틴의 쇠퇴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의 상황으로 확대되어갔다.
서유럽 지역을 잃었고 이어서 아프리카 지역을 모두 빼앗겼다. 소아시아지역을 모두 송두리째 신흥강국 '셀주크 투르크'에게 빼았겼다.
발칸반도의 중남부와 콘스탄티노플이 이제 빈잔틴 제국만이 소유한 영토의 전부였다.
거기에다 소아시아를 점령하고 아프리카 지역과 유럽 지역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던 셀추크 투르크의 성장 앞에서 비잔틴은 그야말로 풍전등화의 위기속으로 점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로마제국과 비잔틴 제국이 물러난 거대한 유럽이 그야말로 무주공산이 되었다. 아무나 차지하면 되는 것이다.
힘과 군사력을 가진자들의 천지가 되어버렸다.
사방에서 너도나도 세상을 차지하겠다고 들고 일어났다.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영토확장 전쟁이 시작된 것이다.
힘(군사력)을 가진 자만이 모든것을 차지할 수 있었다. 갑이 을을 쳐서 영토를 차자하면 그 다음날 병이 갑을 쳐서 갑을병을 모두 차지했다. 영토를 차지한다는 것은 그 영토 위의 모든것(사람. 재화)을 차지하게되는 것이 되었다. 그때부터 합종연횡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힘을 가진 우두머리들이 모여서 동맹을 맺고 강력한 적에 대해서 연합으로 대항하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는 동맹안에서 자신들의 맹주를 뽑았다.
로마나 비잔틴새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방식의 국가(왕국)이 탄생한 것이다.
신성 로마제국. 프랑스. 영국. 카스티야왕국(스페인) 포루투갈. 폴란드. 헝가리. 불가리아 왕국 등이 새로운 세력을 가진 국가로 등장한 것이다.
국가 아래로 여럿의 제후(영주)를 두었다. 왕이 차지한 국가의 모든 영토는 오로지 왕의 소유이며 세습이 가능했다. 여기에서의 영토는 땅위의 사람과 재산을 포함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후(영주)는 왕으로 부터 하사받은 지역의 영토를 관활한다. 왕이 전 국토를 다스리듯이 영주는 자신이 봉토로 받은 지역에 한해서 비슷하게 재산권권 사법권을 독자적으로 행사 할 수 있다. 하지만 제후의 지위와 영토는 왕처럼 세습되지 못한다. 제후가 죽으면 명목상으로라도 모든것을 왕에게 다시 환속시키고 일정한 절차를 거쳐서 제후의 아들이 지위와 영토 관리자로 다시 허락받는 것으로 당위성을 부여했다. 봉토와 지위를 허락받은 댓가로 제후는 왕에게 충성을 서약하고 세금을 내야만 했다. 여기에서의 충성에 의미로는 왕의 명령에 따라 군대를 동원하고 적을 쳐부수는것을 말한다.
제후는 아래로 기사를 두었다. 기사 역시 영주에게 충성을 바치는 댓가로 제후의 관할지역을 대신 다스리며 봉록을 받아 넉넉한 생활을 유지하는 것을 말한다. 봉건제도 당시의 실질적 힘은 바로 이들 기사(군사력)에게 있었다. 기사들의 뭉친 힘은 포악한 제후를 하루 아침에 뒤집어 엎을 수도 있었고, 심하면 왕에게 반기를 들 수도 있었다. 하여 봉건 영주들은 기사들의 대접을 후하게 해주었으며, 펼상시에도 그들에게 변치않는 충성심을 고취시키기 위하여 품위와 존경심으로 포장된 '기사도'를 가르쳐서 스스로의 명예를 지키고 왕이나 제후에게 오로지 충성을 다하는것이 참 기사의 최고 덕목이라 교육시켰다.
왕과 제후와 기사와 농민의 보호와 세금을 전제로하는 세속적인 주종의 관계였다면, 이들 모두를 아우를 수 있는 정신적 공동질서가 필요했으니 그것이 바로 종교였다. 국가와 국가, 국가와 제후. 제후와 기사. 기사와 농민간에 생겨날 수 있는 수많은 갈등과 반목 사이에 종교가 하나의 해결사로 등장하게 되었다.
중세 시대의 속내를 들여다 볼때 심각한 것중의 하나가 높은 문맹률이었다. 농민은 물론이고 기사의 대부분이 글을 읽거나 쓰지 못했다. 봉건 영주들의 대부분도 글을 알지 못했다. 왕이나 귀족쯤 되어야 글의 필요성을 깨닫는 정도였다. 그러다 보니 국가간의 서신이나 협약문의 작성과 인증이 원활하지 못하였다. 영토에 대한 등기나 혼인에 대한 서약등이 기록으로 남겨지지 못하다보니 시간이 지나면 또다시 새로운 분쟁으로 이어지는것이 다반사였다.
이 틈새를 이용해 수도사들의 지위가 급격하게 향상되기 시작했다. 수도사들을 성경을 읽기 위하여 가장 먼저 글을 공부하였던 것이다. 이때부터 왕이나 제후들의 옆에는 항상 수도사가 함께하기 시작했다. 문서를 대신 읽어주고 외교문서를 작성해주고 협약문의 증인 역활을 하기 시작했다. 싸움은 기사가 나가서 대신 하지만, 왕이나 제후의 통치행위 전반에 수도사가 참여하게 된 것이다. 수도사들도 왕이나 제후에게 충성 서약을 하고 봉토를 하사받고 높은 녹봉을 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는 세속적인 주종관계이며 세속적인 충성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모든 수도사들은 로마의 교황에게 충성을 맹세한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세속이 관계가 아닌 신을 대신하는 대리권자와의 관계이며 서약인 것이다. 왕이나 제후가 수도사를 위하여 수도원을 건설하고 영토를 하사하면 그것은 모두 교황의 소유가 되었다. 교회의 재산에는 세금이 부여되지 않았다.
시간이 지나자 프랑스 왕은 프랑스 영토만이 자신의 소유였고, 헝가리 왕은 헝가리 영역 안에서만 자신의 영토를 가지고 있었느나, 유럽 전역에 수많은 수도원을 통해 장원을 확보한 교황의 영토가 웬만한 왕국의 면적보다 더 크게 성장하였던 것이다. 로마 바티칸은 다시 제도권 안에서 확고하게 자신들의 영역을 차지하게 되었고, 이를 기반의 왕권 위에....... 지상 최고의 권력을 지향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교황이 나서서 이 왕국과 저 왕국을 혼례를 통해 혈연관계를 맺게 하였고, 교황의 생각에 따라 전쟁을 일으키고 불필요한 왕국을 제거해 나가기도 했다. 권력과 부와 사치에 눈을 뜬 교황들은 심지어 여성 편력을 넘어 결혼도 하고 수많은 첩을 두기까지 했다.
이제 세상은 교황의 의중에 따라 쥐락펴락을 하게 되었던 것이다.
교황의 지나친 횡포에 급기야 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했다. 왕권을 추구하는 부류와 교화아에게 빌붙어 아첨하는 부류로 나뉘었다.
'카놋사의 굴욕'과 '아비뇽 유수'로 대변되는 황권(皇權)과 교권(敎權)의 다툼이 벌어진 것이다.
초기에는 절대적 권력의 반열에 오른 교황이 이겼지만, 곧 사태는 역전되었다. 기사에게 뺨까지 얻어맞은 교황이 로마에서 쫓겨나 프랑스로 밀려나고, 거기에 더하여 다툼에서 승리한 왕들이 자신들의 생각에 들어맞는 새로운 꾹두각시 교황을 옹립하기에 까지 이르게 된것이다.
한 시대에 두명의 교황이 양립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쫓겨간 교황은 힘이 없고, 새로 옹립된 교황은 왕과 제후들의 눈치보기에 급급했다.
중세시대 1천년의 암흑기사 태동되더니 어느새 걷잡을 수 없는 진흙탕 속으로 빠져들고 있었던 것이다.
온 세상이 한마디로 요지경 속이었다.
신(神)의 뜻은 그 어디에도 없었다.
정의라는 개념은 꿈속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던 시대였다.
권력과 탐욕과 약탈과 전쟁과 사치와 향락만이 인간 생존의 목표였던 암흑의 시대였다.
'신의 의미'가 상실된 시대에서는 '인간의 가치'를 찾아볼 수가 없었다.
부와 권력을 가진 지배자와...... 그를 위해 수탈을 당해야만 하는 피지배자가 있을 뿐이었다.
유럽을 여행하다보면 중세때의 장엄한 성곽과 성채와 왕궁과 교회(성당) 등의 화려하고 압도적인 아름다운 유산들이 수없이 많이 산재하고 전해져 내려오고 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절대지배권력이었던 교회와 왕과 제후(봉건영주) 등, 소수의 지배자들이 남긴 유산인 것이다.
약 95% 이상을 선회하는 대다수 피재배자들의 삶은 그야말로 짐승과 다를바가 없었다.
유럽의 봉건시대와 비슷하게 중국이나 일본이나 우리나라나 비슷한 시대상황을 겪게된다. 하지만 분명한것은 여타 아시아권 피지배층의 삶이 유럽의 피지배층에 비해 한결 형편이 나았으며 수탈도 덜했다. 우리나라 고려시대의 평민들 삶에 비하자면 당시의 유럽에 살던 대다수의 피지배자들의 삶은 개. 돼지의 삶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교회와 왕과 귀족들과 제후(봉건영주)들의 삶만이 화려하고 사치스럽과 향락문화의 정점을 향해 치닺기 시작하고 있었다.
왕은 교회를 부러워 하지 않았다.
제후에 따라서는 왕을 상급의 존재라고 여기지 않았다. 풍요로운 지역을 차지한 영주의 삶이 왕보다도 더 화려했기 때문이다.
기사들은 이제 한명의 영주나 한나라의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지 않았다. 언제든 자신들도 영주가 되거나 심지어 한 나라의 왕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기사들은 필요에 따라 이곳 저곳에 은밀하게 연줄을 맺어 다양하게 그 충성 맹세를 이용하는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기사도는 멋지게 포장된 말 뿐이고, 이제 돈과 군력을 향해서 언제든 배반하고 새로운 조건을 찾아나설 수 있는 용병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 시대의 영주들(지배자)의 호화롭고 풍요로운 생활을 다음의 사진들을 보면 여실히 느껴볼 수가 있다.
교회는 왕들을 견재하거나 거세하고자 했고, 왕들은 제후들을 견제하거나 제거해야만 했고, 제후들은 믿을 수 있는 기사를 선별할 수 있어야만 했다. 기사들은 피지배자(농민)를 설득하여 지지를 얻은 뒤 역성을 통하여 언제든 제후나 왕의 지위로 도약할 꿈을 꾸게되었던 것이다.
어느 기가막히도록 아름다운 산자락이나 깍아지른 바위벼랑 위에 웅장하면서도 황홀하리만치 아름다운 성을 하나 짓고 들어앉아서 거의 왕과 같은 생활을 영위 할 수 있다며 이 세상 그 무엇이 더 부럽겠는가?
봉건 영주(제후)와 귀족들은 그런 생활을 영위했다. 너머치는 풍요를 누렸다고 해야겠다.
기사도로 무장한 기사들이 성채와 영지를 지키고, 수많은 소작농들이 자신의 영토를 개간하면서 한없는 존경과 충성과 세금을 받쳤다.
젖과 꿀이 흐른다는 성경 속의 가나안 땅이 이만했을까? 천국인들 이곳에서 이들의 생활만 했을까?
그들은 연맹체 속에서 우두머리를 뽑아 왕을 앉혔다.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독차지한 듯 보였지만, 왕의 자리라는게 결코 영주(제후)의 자리보다 낮다고 볼 수만도 없는것이 엄연한 현실이었다. 왕의 수많은 책무와 업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국가간의 분쟁과 교황과의 대립과 자체적으로 후계자 문제나 수많은 내환과 외환에 항상 골머리를 썪었다. 충성을 서약한 제후와 기사들을 동원해 해결하면 모두 될것 같으나......... 그렇다고 언제나 왕의 맘대로 처리되는 문제는 아니었던 것이다.
왕이 다소 허울뿐이 권좌였다면, 제후들의 생활은 그야말로 알짜배기 실제적인 기득권층이었다.
이런 틈을 노려 로마 카돌릭의 교황이 부활했다.
철저하게 준비를 잘 갖춰서 영주를 몰아내고 기득권을 차지한 능력있는 기사가 출현 한다면, 교황은 쫓겨난 영주의 헛점을 노려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리고, 쿠데타를 성공한 기사에세 정당성을 부여해 줬다. 반대급부는 영원한 충성이었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수많은 기사와 왕들이 교황의 수하로 몰려들게 되었다.
교황의 야심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수많은 왕들과 영주들과 기사들을 모두 자신의 발 아래 두어야만 직성이 풀린다 생각이 미치자 온갖 수단방법을 동원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시작된것이 '십자군 원정'이다.
'성지를 탈환하자.'
사방에서 호시탐탐 교황의 권위를 넘보는 군사력(왕.제후.기사)을 '성지 탈환' 이라는 명분하에 일단 유럽지역에서 멀리 쫓아내 버리자.
------ 차마 못다한 이야기는 혹 다음에 기회가 된다면........ 기다려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 베네치아) 아주 독특한 풍광의 베네치아를 만나다 (0) | 2019.02.11 |
---|---|
(알 럽 트래블) 언제나 내 가슴을 설레이게 만드는 세 도시 이야기 (0) | 2019.02.04 |
(알 럽 트래블 / 터키) 역사의 향기로 기억되는 도시 '이스탄불' (0) | 2018.12.17 |
(알 럽 트래블 / 터키) 수천 년을 이어온 역사의 숨결이 고스란히 살아 숨쉬는 곳 '이스탄불' (0) | 2018.12.14 |
(알 럽 트래블 / 터키) 이렇게 아름다운 사람들과 풍요로운 도시가 또 있을까? (0) | 2018.12.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