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문에 부딪치는 세찬 빗소리에 잠에서 깼다.
커튼을 걷어보니 서서히 아침이 밝아오고 있다.
여행자에게 비란 녀석은 참으로 얄굿은 말썽꾸러기다.
나는 비를 참 좋아한다. 하얀 눈은 그렇게 반가와하지 않는 반면 비만 오면 마음이 괜히 들떠지는것을 느끼곤 한다.
하지만 여행중에는 아주 얄미운 녀석이 바로 비다.
마음 먹었던 모든 일정을 아주 엉망으로 만들어 놓기 때문이다. 하긴 자유여행에 딱히 고정된 스케줄이라 할 것이 뭐 별로 있겠냐만.......
그렇다해도 돌아다니는 행동에 불편함과 제약이 따르게 되는 것은 엄연한 현실이 아니겠는가.
하루를 마감하는 저녁시간에 시작해서 새벽녁에 멈추어주면 안되는걸까?
그나저나 이젠 뭘하지?
배낭을 꺼내서 예비용 비닐봉지 꾸러미를 열어 1회용 비닐우비를 꺼내 만지작 거려본다.
내 커다란 배낭에 둥지를 튼지 거진 10년을 넘겼을 1회용 우비 두개가 여전히 좋은 상태로 남아있다. 비상용이라고 십수년 전에 챙겨놓기는 했지만 이제껏 단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었다. 비가 내리면 그냥 비를 맞으며 돌아다녔지 우비를 써 본적이 없는 나. 사실 어디 비상용 우비가 내가 쓸려고 준비했던가? 이동중에 비를 만나면 배낭을 감싸려고 준비했던 것이지?
유령호텔의 이곳저곳을 모두 찾아봐도 우산은 없다.
창밖을 내다보아도 지나는 행인 하나 보이지 않고 내리는 비는 그냥 무시할 정도를 넘어서 쏟아지고 있다.
커피물을 얹어놓고 왔다갔다 서성대며 물이 끓기만을 기다리며 애꿋은 하늘만 올려다 본다.
'이넘아. 너 나하고 지금 한판 붙자는 거여? 내릴만큼 내렸으면 그만 그쳐.'
카메라를 비닐에 넣고 수건에 감싸서 작은 배낭에 넣고 기어코 골목길로 나섰다.
생각 같아서야 (24시 편의점)에 가서 우산부터 사면된다고 생각되지만........ 여기는 충주가 아니라 트빌리시다. 한참 떨어진 재래시장이나 새벽에 문을 열고 야채와 생선을 파는 머나먼 이국땅이다.
밤새 내린 비 때문인지 피부에 와닿는 비도 세찬 바람결도 매우 차다. 반팔에 반바지로 가볍게 산책삼아 나선 내 옷차림에 너무 허술하지 싶다.
'염병할...... 모두가 너 때문이여.........'
애꿋은 하늘만 원망스런 시선으로 올려다 본다. 어쩔것이여. 이미 골목을 빠져나왔고 벌써 대충 젖어버린것을.........
여행자 골목으로 들어섰다. 혹시나 여행자거리의 핵심인 '고르가살리 광장'에 가면 우산을 살 곳이 있을까 해서였다.
지난밤에 여행자로 가득 념쳐나던 카페와 와인바들이 모두 문을 닫은 채, 다 치우지 못한 테이블과 어지럽혀진 여흥의 흔적들 위로 비가 내리고 있었다. 요리조리 피해가며 발걸음을 재촉하는데 어디선가 빗소리에 실려 은은하게 들려오는 .........
Tell me that it's true, Show me what to do
I feel something special about you
Dreams are my reality ,The only kind of reality
Maybe my foolishness has passed And maybe now at last
I see how the real thing can be
망연가(望然歌) 라고 해야할까나.
처량하게 우산도 없이 이른아침 비를 쫄쫄 맞아가면서 도심의 뒷골목을 헤매고 다니는....... 달리 특별히 할 것도 어떤 스케줄도 가지지 못한 쓸쓸한 여행자의 깊이 감추어둔 속내를 여지없이 모두 토해내게 만드는 필살의 일격이 그만 사정없이 가슴을 파고들고 있었다.
'리차드 샌더슨의 리얼리티(Reality)'는 스나이퍼가 날린 총알처럼 그대로 나의 뇌리에 날아와 박혔다. 참으로 기가막힌 타이밍에.......
'아~~~~~~~~~~!!!!!!! 혼자 오는게 아니었어. 같이 왔어야만 했는데.........'
'시방 이게 뭔 짓이여?'
여행자 골목에서 지금 유일하게 한 집, 새벽 늦게까지 장사를 했는지 쪽문을 열어놓고 정리와 청소를 하고 있는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이었다.
처마 밑에 웅쿠리고 서서 흘러나오는 음악의 뒷부분을 듣고 있노라니 더욱 싸늘하게 불어오는 바람결에 추위가 사정없이 엄습한다.
아무런 향수를 뿌리지 않아도 향기로운 냄새가 나는 사람 생각이 난다. 가까이서 맡지 않아도 그 사람만의 독특한 향기로 존재하는 사람이 떠오른다.
'함께 둘러싸고 있는 일상으로 부터 탈출했어야만 했다. 이렇게 거리와 비의 냄새도, 나무의 푸르름에 정도도, 그리고 태양의 빛깔이 다름도 함께 느껴보았어야만 했어. 그 새로운 느낌을 함께 찾아가는 것........ 그것이 여행이고, 그것이 인생인것을...........'
그랬으면 지금처럼 청승맞게 비를 맞으며 추위에 떨지 않아도 되었을것을......... 그 사람은 추위라면 아예 질색이니까 이렇게 나오지 않아도 되었을것을.
혼자 여행을 다니면 주위에서 가장 많이 듣는 질문중에 하나가 '혼자서 여러날을 돌아다니면 외롭지 않아?' 라는 질문이었다.
'환갑이 다 되어가는 나이에 뭔 외로움?'
'이것저것 알아보고 예약하고 싸돌아다니다 보면 늘 바뻐. 정신이 하나도 없어. 외로움이고 썸이고 느껴볼 짬이 없어. 애시당초 아예 안생겨.'
'술마시다 보면 그런생각이 전혀 안들어. 그래서 포도가 품질이 좋으면서 싸고 와인이 저렴한 나라만 골라서 다니잖아. 와인이 치료제여.'
아니여. 다 뻥이여.
나는 뭐 사람 아닌감?
어쩐지? 내 이번 여행의 조짐을 비행기 안에서 알아봤다.
장거리 비행에서 심심하면 읽어본다고 인문서적 하나하고 작은 시집을 하나 배낭에 넣었는데........ 모스코바를 경유하면서 무심코 펴든 시집에.......
혼자 있을 때
빈자리가 더욱 커지는 것은
몸의 외소함 때문만은 아니다
사람사는 세상이 그리울수록
마음은 솔밭 스쳐지나는 바람소리
내가 서 있는 이 자리
산새며 풀벌레 개구리 나무 그리고 숲 울음소리
혼자였던 적 없건만
혼자 있을 때 외로운 것이 아니고
함께하지 못하는 것이 외로움이었네
나 항상 빈자리 남겨두고
내 설 곳조차 모르는 바람소리
바람소리
(박수완)님의 시집을 무심코 펴들면서 하필 그 페이지가 펼쳐졌을 때부터 벌써 이상한 조짐이더라니.......
어쩔것이냐?
이런 위기를 극복하고 다시 유쾌 상쾌 호쾌한 여행으로 돌아가는 방법은? 있다.
핸디폰 사진 저장소를 클릭해 우리 귀한 손녀(윤태리) 사진을 들여다보면 된다. ㅎㅎㅎㅎㅎㅋㅋㅋㅋㅋ 저절로 힘이 솟고 웃음이 터져나온다.
'고녀석 참.'
나는 다시 당당한 윤태리 할아버지의 모습으로 중무장한 채 태연하게 빗속으로 걸어나간다. 할.아.버.진.이.상.무.
-- 니노 할머니의 '포도나무 십자가'가 보관된 시오니 성당.
-- 트빌리시의 랜드마크 인 므타츠민다 산 위에 성채 나리칼라 요새. 그리고 다윗 성당.
--- 평화 광장 위로 메테히 성당과 바흐탕 고르가살리 동상.
--- 트빌리시 여행의 기준점이자 시작점이 되는 고르가살리 광장. 길건너 시계탑에서 여행자 거리가 시작된다.
'트빌리시'의 어원은 '따뜻한 곳'을 뜻하는 말에서 나왔다.
고대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의 왕 '바흐탕 고르가살리(Vakhtang Gorgasali, 439~502)가 숲이 우거진 이 지역으로 꿩사냥을 나왔다.
도망치는 꿩을 발견하고 왕이 기르던 매가 뒤쫓아 날아갔다. 왕이 말을 몰아 숲속으로 달려가니 뜨거운 물이 고여있는 웅덩이에 꿩과 매가 함께 빠져 죽어 있었다. 뜨거운 온천이었던 것이다. 왕은 숲의 나무들을 모두 베어버리게 하였다. 나무가 모두 제거된 지형을 살펴보던 왕이 외쳤다.
'참으로 도시를 건설하고 사람이 살기에 좋은 지형이 아니냐? 이곳에 왕궁을 세워라. 이베리아의 수도를 이리로 옮겨야 하겠다. 오늘의 샤냥을 기려서 도시 이름을 트빌리시라 하라'
올드타운 지역에 도시가 건설되었고 므츠바리강 상류 두물머리에 있던 '므츠헤타'에서 수도를 이곳 '트빌리시로 옮겼다. 서기 5세기 경의 일이다.
강건너 바위벼랑 위에 장엄한 위용을 뽐내는 '메테히 정교회 성당(Metekhi)이 서 있고 벼랑쪽으로 트빌리시 올드시티를 건너다 보고있는 말을 탄 거대한 고르가살리 동상이 서있다. 동상의 아래로 12세기에 메테히 다리가 건설되어 강의 양쪽을 하나로 연결해 주었다. 다리 건너 트빌리시가 처음 시작되던 장소의 광장이 바로 고르가살리 스퀘어 이다.
트빌리시가 처음 시작된 뜨거운 물웅덩이가 있던 지역엔 지금도 온천수가 솟아나고 있다. 현재에도 사용하고 있는 유황 온천이다.
트빌리시의 유황온천은 이슬람식(아랍풍) 온천이다.
이슬람 국가지역에서는 이것을 '하맘'이라고 부른다. 우리가 흔히 말하는 터키식 증기탕인 '터키탕'을 말한다.
왜 세계에서 세번째 기독교 국가인 조지아에 하필 이슬람식 목욕탕 '하맘'인가?
그러자면 아주 간단하게 요약해서 조지아의 역사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고대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은 기원전 그리이스의 지배를 받았으며, 알랙산더 대왕의 침공과 로마제국의 지배를 오랫동안 받았다. 로마의 쇠락과 함께 6세기 경에는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로 비잔티움과 셀주크 투르크(이슬람)의 지배를 받기에 이르렀다. 13세기에는 몽골의 침입을 받게되고, 몽고가 물러간 뒤 15세기에는 오스만 투르크(이슬람. 터키)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이슬람식 하맘은 이 시기에 건설되었다.
로마는 식민지배를 시작하면 도로(아피아 가도)와 원형경기장(콜로세움)을 먼저 지었다. 하지만 이슬람인들은 사원과 하맘을 먼저 지었다.
이제 트빌리시가 시작된 온천지역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하늘은 조금씩 맑아지기 시작하고 있었다. 빗방울이 점점 작아지기 시작하더니 이젠 간간히 떨어지고 있다.
여행자들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고 있지만 바쁘게 출근길에 나서는 현지인들이 모습이 점점 늘어나고 있다. 마주치면 나는 먼저 그들에게 인사를 건넨다.
'감마르 조밧(안녕하세요). 해브 어 굿 타임.'
꼴은 꼼짝없이 비에 홀라당 젖은 이방인의 몰골이지만 미소 가득 한 톤을 높여서 건네는 아침인사에 그들도 환하게 웃으며 반갑게 맞아준다.
싱그럽고 상큼한 아침이다.
부지런히 걸어다니다 보니 어느새 활기를 되찾은 몸에선 금방이라도 다시 땀이 흐를것만 같다.
어느새 활기에 찬 여행자....... 내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온천 지역.
사실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트빌리시 전체에서........ 또는 조지아 전체에서 가장 아름답고 애착이 가는 지역이다.
도시나 국가 자체가 기독교 국가인 시선으로 보자면 어디를 가나 넘쳐나는 성당과 교회와 기독교 유적들이 즐비하고 가치있고 아름답지만, 굳이 기독교 국가 안의 색다른 아랍풍 문화가 잔존하는 희소성의 가치 때문이라고 하지 않아도 트빌리시의 온천 지역은 특히 아름답다. 요만한 크기의 지역단위로 치자면 오스만 투르크의 본산지인 이스탄불에서도 이런 정도의 매력이 넘치는 장소는 드물다.
아름답다. 정말로 혼자 보기에는 아쉬움이 너무도 큰 지역이다. 적어도 내가 가지는 느낌은 그러하다.
이런곳은 소중한 사람과 함께 천천히 거닐면서 오스만식 건축의 아름다운 특징에 취해보고, 어느 골목 아무 계단에나 앉아서 주점부리를 나누어 먹고, 또 누군가 대문을 열고 나오는 사람을 만나면 먼저 인사를 건네고 따라 들어가서 일상의 생활 공간도 구경하고, 계단을 타고 지붕 가까이 올라가서 주변의 풍광을 마음껏 누릴 수 있어야만 한다. 무료해지지 않을 정도의 한가로움과 고즈넉한 낭만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장소라고 나는 생각한다.
생각하기 나름이겠지만 굳이 신혼 여행자나 사랑하는 연인과 함께가 아닌 사람에게도 멋진 추억의 명소가 될것이라고 강력 추천하겠다.
오스만시 건축의 특징이 무엇인가요? 발코니랑 건물의 색깔을 잘 보세요. 그럼 나머지는 저절로 이해가 됩니다. 바로 그게 오스만 건축이예요.
언제였더라?
터키에 머물면서 '오스만 트르크 건축 다큐멘터리' 방송을 보고 있는 중에 터키 영토를 벗어난 최고의 '오스만식 건축물'로 바로 여기 트빌리시 온천 지역을 아주아주 세세하게 화면에 담아낸 방송을 본 적이 있었다. 젊은 여자 리포터는 서너살 된 남자아이를 등에 업고 이곳의 골목골목을 모두 직접 찾아다니면서 하나하나 아주 자세하게 소개하고 설명해주던 아주 인상적인 방송 프로그램 이었다.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게 남아있다.
역시 아름답다.
아쉬움이라면 날이 흐려서 형형색색 저마다의 빼어난 아름다움(아름다운 풍경엔 무엇보다 알맞은 빛이 중요함)을 조금 덜 하게 보게 되었다는 점과, 터키 리포터에겐 트빌리시 관공서의 적극적인 협조가 있었는데......... 비에 흠뻑 젖은 여행자에겐 슬슬 생겨나는 배고품이 전부였다.
이럴땐 어떻게 한다?
'나의 시선에 맞는 장소를 찾아서 죽어라 발품을 팔면 된다. 부러우면 지는것이라 했다.'
트빌리시에 찾아 온 모든 여행자에게 이렇게 물었다.
'트빌리시에서 꼭 한가지만이 허락된다면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전부라 해도 좋을 대다수의 여행자가 대답했다.
'케이블카를 타고 나리칼라 요새에 올라 트빌리시의 야경을 보아야지요.'
나에게도 같은 질문이 왔다. 뭐라고 대답을 했을까?
'나리칼라 요새는 못 올라가도 좋은데, 온천 지역 산책만은 꼭 해야겠습니다.' 라고 말했을 것이다.
이번 여행에서도 시간은 충분했고 기회도 있었지만......... 끝내 나는 나리칼라 요새에 올라가지 않았다.
골목길 산책이 나에게는 더 즐거운 여행이니까...........
나리칼라 케이블카를 생각하니까 갑자기 떠오르는 것이 한가지 있다. 여행 시작 전부터 나는 이 생각을 했었는데 어처구니 없게도 나는 이번 여행에서 내 스스로 하고자 했던 다짐을 까먹고는 끝내 마무리 짖지를 못하고 말았다. 나이탓인가?
위의 사진은 트빌리시 교통 카드다. 트빌리시에서 지하철을 이용할 수 있는 충전식 카드다. 카드 가격이 2라리이고 나머지 금액은 얼마든지 충전해서 사용하면 된다. 트빌리시 지하철 1회 이용 요금은 0.5 라리이다. 평화 광장에서 나리칼라 요새에 오르는 케이블카 편도요금은 2라리다. 그런데 이 카드를 제시하면 1라리로 할인이 된다.
이 카드는 내가 구입해서 사용하던 카드가 아니다.
2년 전 여행에서 터키 트라브존 버스터미널에서 야간 국제 익스프레스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우리 아들 또래의 젊은이가 땅바닥에 앉아서 배낭 위에다 노트북을 얹어 놓고 어떤 작업을 하고 있었다. 한 참 뒤에 화장실을 좀 다녀오고 싶은데 배낭을 좀 보아줄 수 있느냐고 해서 그러라고 했다. 다녀 온 젊은이는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는데........ 젊은이는 어제 야간 버스로 조지아 트빌리시에서 여기 트라브존으로 들어왔고 다시 오늘 야간 버스로 카파토키아로 갈 예정이라고 했다. 나도 강철 체력에 대한 자부심은 있지만 이틀 연속 야간 버스라면........ 역시 젊은게 좋아보인다. 나는 그제 이스탄불에서 여기로 와서 오늘 밤 트빌리시로 간다고 하니까........ 젊은이가 지갑에서 바로 여기 이 카드를 꺼내서 나에게 건네주었다.
'잠시 스쳐지나는 여행자의 작은선물' 이라며 건네 준다. 잔액은 확인을 못했는데 나름 요긴하게 쓸 수 있을 거란다. 그래서 감사인사를 건네고 받았다. 지난번 여행에서 요긴하게 잘 사용했다.
귀국 후, 짐 정리를 하다보니 지갑에서 이 카드가 나왔다.
'이걸 뭐에 쓰지? 차라리 누구 주고 올껄.'
이번 여행에 조지아를 넣으면서 서랍을 죄다 뒤져서 기어코 이 카드를 찾아냈다.
트라브존에서 내 손에 카드를 건네주던 미국 청년을 떠올리면서........ 이번엔 나도 충전해서 사용하다가 누군가에게 선물하고 와야지.
4라리를 충전하고 2라리를 사용하고........... 누군가에게 선물로 주려고 했었건만 까먹고 그냥 돌아왔다. 귀국 후 사나흘 지나 지갑에서 불쑥 튀어 나왔다.
헐.
이걸 어쩌지? 트빌리시를 또 가? 카드 땀시?
온천지역 하맘(Hamam) 가까이에 가면 벌써 매케한 유황 냄새가 코끗에 전해져 온다.
다행히 흐린 날씨 때문이어서인지 오늘은 유황 냄새가 거의 나지 않았다.
호젓해서 너무나 좋았다.
골목 중간에 호텔의 나무 문짝을 수선하고 있는 현지인 두 명을 빼고는 아무도 없었다. 항상 여행객으로 붐비는 장소인데 이런 날도 있기는 있구나?
가랑비로 변한 빗방울을 맞으며 폭포까지 걸어갔다가 돌아서 나올 때 까지 이 골짜기에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멋진 아랍풍 건물에서 창문을 열고 빼끔 내다보던 할머니 말고는...........
아마도 그것은 트빌리시가 나에게 주는 선물이 아니었을까?
누군가가 문을 좀 열어놓고 밖을 좀 내다보아주었으면 하고 바랬다.
현지인의 집이던 호텔이던 상관이 없겠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아무도 나오는 사람이 없었고 열려진 문도 없었다.
좀 더 높은 곳에서 트빌리시가 보고 싶어졌다.
산언덕 판자촌 마을 가파른 골목을 올라갔다. 골목을 돌아 높이 오를 수록 전혀 다른 풍광이 시야가득 펼쳐진다.
이쯤이다 싶으면 건물과 담장이 시야를 가린다. 다시 기진맥진하면서 더 올라갈 수 밖에........ 이게 새벽 산책이여? 등산이여? 청승이여?
원더풀을 넘어서 퍼펙트한 아침 산책이었다.
이런 산책이라면 소나기 아니라 태풍이 불어도 기꺼이 마다하지 않겠다.
비도 완전히 그치고 햇쌀이 모습을 드러냈다.
내가 편하게 이용하던 고르가살리 스퀘어의 여행사 문이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이번 여행에서 한 번 정도는 여행사의 신세를 져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세군데 마음에 담아둔 코스 중에서 교통이 불편해도 두 번 정도는 감수를 하겠는데, 한 코스는 개별 이동으로는 도저히 원하는 시간 안에 모두 둘러볼 엄두가 아니라 시간상 불가능한 코스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첫날 미리 문의를 해 두는것이 여러모로 편할 것 같아서 여행사 문을 두드리는 중이었다.
그래서 아침 산책도 원더풀 했겠다 싶어........ '오늘은 어떻게 지낸다 하더라도 아침 산책으로 이미 충분 하잖아' 하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고 골목 안쪽의 카페에 들어 갔다. 카푸치노 한잔에 잼이 들은 빵을 하나 주문했다.
쿠션 좋은 의자에 엉덩이를 깊숙히 뭍고 까칠해진 턱수염을 어루만지며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트빌리시에서의 남은 나흘의 시간을 조목조목 따져보면서 스케줄을 정리하고는 메모지에 적어본다.
여행사에 들려 내가 생각하는 프로그램에 대해 상담을 했다. 오전 9시 30분에 출발해서 저녁 9시에 도착해서 끝나는 프로그램으로 비용은 70라리(약 3만2천원 정도)라고 한다. 다른 스케줄과 선후를 정해야 하겠기에 예약은 하지 않고 밖으로 나왔다.
올드타운으로 돌아서 유령호텔로 돌아가고 있는데 젊은 여행사 직원들이 돌아다니면서 여행사 프로그램 찌라시를 돌리고 있다.
무심결에 받아들고는 아주 약간 귀찮은 마음으로 들여다 보는데........... 내 동공을 가득채우는 59라리(약 2만7천원)라는 문구가 순간처럼 눈에 확 들어온다.
귀신같이 내 낌새를 눈치 챈 여행사 직원이 바짝 붙어서 따발총처럼 마구 떠들어대기 시작했다.
'오키. 오키. 시간도 같은데 비용이 줄어든단 말이지? 여행사 커미션 차이인가? 밥을 따로 주는 것도 아니고........ 차량이 새거와 헌것 차이? 그딴거 별로 신경 안써도 되고........... 오키 오키. 내일이든 모레든 갈때는 여기를 이용하자. 그나저나 지금이 몇시지?'
시계가 막 아침 9시를 넘어서고 있다.
이 젊은직원 참으로 눈치 코치 하나는 국가대표급이다.
나는 그냥 시계를 보았을 뿐인데....... 이넘 눈치로 벌써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 사람을 홀리는 재주를 가진 넘이다.
팜플렛에는 9시35분 출발로 프린트 되어 있는데, 트빌리시 안에 자신들의 여행사 사무실(분점)이 세군데가 있단다. 그중 여기 여행자 거리의 사무실이 가장 복판에 있기에 미니버스가 외곽의 두군데 사무실에서 여행객을 픽업해서 여기까지 오면 대충 9시50분쯤이 될 것이란다.
별로 궁금하지도 않고 급하지도 않고 알려고 들지도 않은 정보가 녀석의 입에서 줄줄 흘러나오고 있다.
그때 순간처럼............
전형적인 내 스타일의 완전 자유배낭여행으로 중무장한 젊은 남녀가 따발총 여행사 직원에게 '자신들은 예약을 하지 않았는데 오늘 데이비드 가레지 투어를 갈 수 있겠느냐'고 물어 온다. 나는 미완성의 고객이지만 두 남녀는 제발로 찾아든 꽁떡 고객이 아니겠는가? 녀석이 나를 바라보며 미안한 듯 웃더니만 배낭여행객 남녀를 데리고 길 건너 지덜 사무실로 들어간다.
헐.
순간처럼 솟아나는 어떤 그렇고 그런 승부욕 같은거........... 왜 배낭 걸머맨 모습만 보면 알 수 없는 기운이 용솟음 치는지.........
'나두 언제든 떠날 수 있다구....... ㅋㅋㅋㅋㅋㅋ'
순전히 요 두사람 때문..........
젊은 남자애는 여기 두사람 '데이비드 가레지'가는 티켓을 발매중이고, 나는 옆에 앉아있는 여직원을 향해 외쳤다.
'오늘 우플리스치케 갈 수가 있을까요?'
여직원은 안내 팜플렛을 펼치더니 볼펜으로 표시를 해가며 설명을 하려들었다.
'설명은 필요치 않아요. 모두 알고 왔어요. 단지 좌석이 있는지 여부만 알려주세요.'
이 여직원도 눈치가 8단쯤 된다. 내 표정을 쳐다보더니만 이내 사태 파악 끝. 컴퓨터를 두드려 보더니 가능하단다.
나는 지갑을 꺼내 즉석에서 59라리를 지불 했다. 여직원이 열심히 다른 설명을 하면서 티켓을 끊어주려고 한다.
'티켓 천천히 끊어도 돼요. 지금 내가 급한게 얼른 호텔로 돌아가서 옷이랑 신발부터 갈아신고 다시 여기로 오는거에요. 50분 까지는 도착할테니 버스 보내지 말고 잘 붙잡아 두고 있어줘요. 시간 안에 올께요.'
아가씨 대답은 듣는 둥 마는 둥 하고 서둘러 부스를 나와 내달리기 시작했다.
씨~~~.
뛰어다니면서 까지 하는 여행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허겁지겁 유령호텔까지 뛰어왔다.
벼락같이 샤워를 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 입고 다른 신발로 갈아 신고 작은 배낭을 걸머메고 왔던 길을 다시 무지무지 바쁘게 걸어서 올라간다.
걸어가면서 카메라 밧데리 점검도 하고 지갑도 다시 챙기고....... 사과 하나 질겅질겅 씹어 먹으면서 언덕길을 올라간다.
여행사 부스에 도착하니 아가씨가 티켓을 들고 다른 여행자 두명과 함께 부스 밖에서 기다리고 있다.
미니버스는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
이번 여행에서 유일했던 벼락치기 '여행사 투어'가 이렇게 시작되고 있었다.
---- 다음 이야기에서 여행을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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