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Gori)는 트빌리시에서 서쪽으로 약 86km 정도 떨어져 있는 도시이다.
현대사의 관점에서는 레닌의 후계자이자 소비에트 연방의 당서기장이었던 스탈린(Joseph Stalin,1879~1953)의 고향으로 더 명성을 얻고 있지만, 고리의 역사는 인근의 지하동굴도시 (우플리스치케)의 역사와 같이하여 이미 초기 청동기 시대부터 사람들이 모여살기 시작한것으로 알려져 있다.
'고리'의 어원은 '언덕' 또는 '궁둥이'의 의미로서 이는 이지역의 시작이 도심을 굽어내려보고 있는 '고리 성채'에서 시작되었음을 나타내주고 있다하겠다.
고리의 산증인이자 시작점이었던 '고리성채(Gori Fortress)'는 비잔틴의 황제 헤라클리우스가 페르시아(이란)와의 전쟁에 대비하여 탄약을 저장하는 병기창으로 지었다고 알려졌으나, 조지아의 역사학자들은 그보다 앞선 11세기 초 이베리아의 왕 데이비드 4세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계무역 도시로 급격하게 성장해 나가고 있던 고리를 위한 방어진지로 성채를 건설하였다고 주장한다. 더하여 일부 고고학자들이 이 성채 내부를 발굴하던중에 7세기경의 유물이 다수 발견된 점으로 보아서 이 성채는 이미 7세기경에 수축되었으며, 그후 시대 상황에 따라 수시로 중축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으로 짐작하고 있다.
아무튼, 11세기 초에 데이비드 4세가 이 지역을 차지하고 있던 페르시아를 완전하게 몰아내고 성채를 더욱 견고하게 수축하면서 고리는 새로운 동서무역의 중요한 거점도시로 발전해 나갔다. 특히 고리 지역은 지리적으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고리는 조지아 영토의 가장 중앙부에 놓여있다. 이곳을 차지하면 시다 카르틀리지역 전체를 손바닥 보듯이 통제할 수가 있다. 그랬던만큼 이후로도 오세티아인. 페르시아인. 비잔틴 등이 끊임없이 쳐들어 오고 주인이 바뀔때 마다 성을 새롭게 증축해 나갔다.
'에레클레 2세(Erekle)'에 의해 1774년에 지금 모습의 완전한 요새로 건설되었으나, 1920년 고리에 닥친 대지진으로 인해서 우플리스치케 동굴도시와 함께 처참하게 파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현재는 꾸준히 복원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중이다.
13세기의 문헌에 따르면 '고리 교도소(Gori Prison)로 기록되어 있던 바처럼 한동안은 감옥으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트빌리시가 오랜세월 페르시아나 오스만과의 전쟁을 치르는 동안에는 이곳 고리가 조지아 기독교의 중심역활을 수행했다. 하여 '고리 대성당 (Gori Cathedral)' 외에도 '세인트 조지교회' ' 베레 성모교회' '아테네 시오니교회' 등 중요 문화재급 유적들이 많이 분포해 있다.
'고리 성채' 뿐만이 아니라 인근으로 '베레요새(Vere Fortress)' 아테네 협곡에 들어선 굳건한 성채 '아테네 요새(Ateni Fortress)' '티세디시 요새(Tsedisi)' 들을 볼 때, 과연 이곳이 지리적 군사적으로 얼마나 중요한 위치였는지를 여실히 나타내 주는 하나의 반증이라 하겠다.
인근의 너른 농촌지역까지를 포함해 인구 5만에 못미치는 소도시로 전락했지만, 그래도 고리는 조지아의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한 역활을 꾸준히 해왔던 매력이 넘치는 도시라 아니할 수 없겠다.
도시 면적은 작아보이지만 산재한 많은 유적과 역사를 살펴보려면 적어도 이곳에서 1박은 필수로 해야만 할 것같다. 아쉽게도 나에겐 시간이 별로 없었다.
하여, '조지아 소도시 여행'이라는 제목하에 오늘은 조지아의 역사에서 부터 스탈린 인물탐구까지 활자를 통해 천천히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그루지아'는 소련이 오랜 세월동안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을 식민지배하면서 소련식으로 지어서 부른 국가의 이름이다. 2008년이 되어서야 자신들 스스로 지은 국가명칭인 '조지아(Georgia)'를 사용하게 되었다. 그런 이유로 조지아 사람들에게 '그루지야'라고 부르는 것은 대단한 실례가 아닐 수 없다. 그럴바에는 차라리 '샤카르트 벨로(Sakart Velo)'라 불러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한다.
다소 어렵거나 복잡한 듯 느껴지기도 하지만, 이를 우리나라에 대입시켜보면 아주 간단하게 이해할 수가 았다.
일본의 식민지배를 36년 동안 받으면서 일본은 우리를 다소 빈정거리거나 열등 식민의 의미를 담아 '조선' 더해서는 '이씨 조선' 또는 '조센징' 이라고 불렀다. 이 호칭이 이들에겐 바로 '그루지아'에 해당한다. 그러면 우리는 당당하게 외쳤다. 우리는 '한국인' '대한민국인' 이라고 외쳤는데, 이들에겐 '샤카르트 벨로'에 해당된다. 세계속에서 대힌민국을 대표하는 호칭은 '코리아'요, 이들에게는 바로 '조지아'인 것이다.
고리의 왹곽지역을 돌고 돌아 마침내 미니버스가 텅빈 교차로의 빵집 옆 골목에 멈춰섰다.
창문 사이로 빵을 굽는 화덕이 그대로 드러나 보이고 밖에서 보이도록 설치된 선반에는 조지아 전통 빵인 내 얼굴보다도 큰 푸리라는 빵덩어리가 올려져 있다. 화덕에 장작불을 지피고 빵을 굽고 있지는 않았지만 근처에만 가도 빵집 특유의 구수한 냄새가 전해져 온다.
운전 기사나 가이드나 일부여행자에겐 썩 내키지않는 여행지였던 탓에 차가 정차했음에도 선뜻나서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다소 어정쩡한 분위기였다.
가이드는 길 건너편의 '스탈린 박물관'을 가리키면서 투어와 휴식까지를 겸해서 1시간의 시간을 허용했다.
하나 둘 느긋하게 사람들이 박물관으로 향하고...... 나를 포함한 대여섯명이 멀뚱하니 서로의 얼굴만 번갈아 쳐다보고 있다. 따로 할일이 없었던 때문이다.
젊은 러시아 친구가 영어로 묻는다.
'여기까지 와서 왜 박물관에 안들어가는 것이지요?'
'그 이유는 아마도 당신과 크게 다르지 않을거예요.'
그가 다소 멋쩍게 웃는다.
'좋지 않은 사람이기에 별로 보고싶은 생각이 들지 않아요.' 그 뒤에 있던 독일 아가씨가 하는 말에 우리 모두 한바탕 웃었다.
'네. 아주 나쁜 사람이에요. 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특히나 저 같은 한국인에게는......... 민족이 둘로 분단되는 아픔을 생겨나게한 장본인 중에 한명이지요. 독일의 통일은 한국사람들에게 커다란 국가적인 로망처럼 자리하고 있어요. 그런 이유로 저는 별로 들어가보고픈 마음이 안생겨나지만........ 저분처럼 러시아 여행자가 스탈린을 마다하는것은 상당히 아이러니한 일이 아닌가요?'
나의 서툰 영어를 그네들은 세심하게 바라보며 경청해 준다. 비록 문법이나 선택한 어휘에 다소 문제가 있음에도 하고자 하는 말의 뜻을 헤아려 들어준다.
그리고는 또 한바탕 웃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스탈린도 레닌도 러시아에선 전혀 인기가 없어요. 아픈 구시대의 산물이지요. 저처럼 러시아의 젊은이들은 모두 평화와 자유를 사랑해요.'
또 웃음이 터져나왔다. 어찌 웃지않고 배길 수 있겠는가?
'1시간이라는 시간이 이렇게 마냥 앉아만 있기에는 너무 길지 않겠어요? 스탈린은 안 만나드라도 박물관 정원을 산책하는 것쯤은 괜찮지 않을까요?'
벨기에 노부부가 앞장서서 버스에서 내렸다.
남아 있던 우리 모두도 하나 둘 따라 내려서 스탈린 박물관 정원 산책에 나섰다.
차도를 건너는데 저만치 건물 2층 창문에 커다란 스탈린 사진이 나붙어 있다.
헐.
작금의 세상에 '스탈린' 사진을 저렇게나 커다랗게 당당히 내걸수 있는 도시나 나라가 있을까? 모스코바에서도 보기 힘든 풍경일텐네?
스탈린이 당당하게 21세기에도 존재하는 지구상에 유일한 도시 '고리(Gori)'.
박물관의 후문으로 들어서면 먼저 왼편에 스탈린 전용 열차가 전시되고 있다.
비행기에 타는것을 몹시 두려워 했다는 스탈린. 그러고 보니 독재자들은 상당수가 비행기를 외면한 것인지 무서워한 것인지 암튼 죽어라 오로지 기차를 애용한 공통점들이 있다. 스탈린이 그랬고, 김일성. 챠우세스크. 카스트로가 그러했었다. 다분히 보안과 안전상의 문제였으리라. 날벼락 떨어질까봐.
스탈린 박물관 공원은 생각보다 면적이 넓었다. 분수대가 있는 정원으로서 조지아의 형편을 생각하면 상당히 잘 가꾸어져 있다.
우리나라 단칸방 초가삼간 같은 스탈린의 생가는 그리이스풍의 바실리카 양식 건물안에 그야말로 전시되고 있다. 구두 수선공인 아버지와 양장점 점원이었던어머니 사이에서 한마디로 가난에 찌들대로 찌든 생활 속에서 스탈린은 태어났다. 그는 이 환경에서 벗어나 출세하기 위하여 부단히 노력했다. 원대한 야망을 성취하기 위하여 공산당에 가입하였고 혁명의 주체가 되었다. 야망을 성취하기 위한 그의 노력은 트빌리시 은행강도 사건처럼 무력이나 사람의 생명을 빼앗는 일에 추호도 망설임이나 용서가 없는 냉혈한으로 자신을 변화시켰다. 그는 그렇게 음모와 암투속에 끝까지 살아남아 스스로 최고의 권좌에 올랐다.
그런 그가 지금 박물관의 전면에 왼손을 바지주머니에 넣은 당당한 표정의 스탈린 동상이 서있다. 콘크리트 기단의 높이 때문인지 어느정도는 근엄한 표정과 품위를 자랑하려는 거만한 모습이라고 해야겠다.
스탈린(Joseph Stalin,1879~1953)의 사망으로 뒤를 이어 당 서기장에 오른 '후르시초프(Nikita Khrushchov,1894~1971)는 정권의 승계가 어느정도 안정권에들자마자 대대적으로 스탈린 격하 운동을 벌였다. 전임자와의 차별성과 전임자의 업적 지우기만이 자신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할 수 있겠다는 욕망에서 였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공로와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을 안정적인 궤도에 정착시킨 사람이 스탈린이었다. 오로지 그만이 할 수 있는 커다란 업적이었다. 하지만 새로운 집권자 후르시초프에게 스탈린은 쓰러트려야 하는 적이었고 넘어야 하는 장애물이었다.
후르시초프의 '스탈린 지우기'는 치밀하고도 대대적으로 전개되어 갔다.
이 시기였던 스탈린 사후 3주기에 조지아의 트빌리시와 고리에서 대규모 '스탈린 격하 운동에 대한 항의 시위'가 발생했다. 이는 곧바로 진압되었고 수많은 학생과 젊은이가 체포되었다.
하지만 이 지역적 한계성을 가지고 벌어진 항의 시위는 점차 엉뚱한 방향으로 크게 번져가기 시작했다.
중국의 모택동이 후르시초프의 정책노선을 '프로레탈리아식 사회주의가 아닌 수정 자본주의'라고 대대적으로 공격하기 시작한 것이다. 모택동의 중국은 '스탈린식 사회주의'를 추구한다고 선언했다. 중국이 후르스초프의 소련과 결별하면서 양국 사이의 분쟁이 전쟁발발 직전의 점입가경의 지경까지 이르게 된다.
여기에 '엔베르 호자'의 알바니아와 '티토 대통령'이 이끄는 유고슬라비아가 모택동의 선언에 지지를 보냈다. 거기에 '카스트로'의 쿠바까지 가세했다.
그들은 소련을 향하여 이구동성으로 외쳤다.
'프로레탈리아 혁명을 성공적으로 이끈 스탈린은 장차 어떻게 사회주의를 구현하고 이를 통해 공산주의로 전진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앞장서서 가장 모범적인 이론 체계와 실천의 의지를 있는 그대로 여실히 잘 보여주었다' 라고 죽은 스탈린을 찬양했다.
'후르시초프. 네가 공산주의를 위해 할 수 있는것이 무엇이냐? 스탈린을 두번 죽이는 것이 혁명이냐?' 이후로 소련은 점점 고립되었다.
이 시기인 1960년 쿠바 혁명을 통해 정권을 잡은 카스트로가 모택동 지지의사를 보이자, 당황한 후르시초프는 카스트로를 달래기 위해 모스코바로 초청을 했다. 안정되지 못한 쿠바의 내부사정과 비행기를 꺼리는 점과 신변의 위협을 느껴 카스트로는 자신의 분신이자 친구이며 영원한 혁명 동지인 '체 게바라(Che Guevara,1928~1967)'를 대신 모스코바로 보냈다. 누가보아도 게바라는 곧 카스트로였다.
후르시초프도 이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군부 수뇌부와 KGB까지 총동원하여 게바라의 안전보장과 환대에 최대한 힘쓸것을 지시했다. 후르시초프 정권에 있어서 최고의 국빈인 것이었다. 게라바는 그만큼 스탈린 이후 제3지역이나 사회주의 혁명에 있어서 최고의 살아있는 전설적인 인물이었다.
성대한 공항에서의 영접, 최고급 숙소와 최고급 음식, 향연과 접대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게바라가 원한것은 그런것이 아니었다. 제정러시아의 철권통치 아래서 억압받고 약탈이나 당하던 민중의 삶이 사회주의 공산혁명을 통해서 어떨게 나아지고 있는지, 비고프지 않고 춥지않은지가 오로지 그의 관심사였다.
체 게바라가 돌아가기 전날 성대한게 벌어진 만찬장에서 그는 자신의 속내를 수행하던 젊은 혁명동지에게 이렇게 털어놓았다.
'한번 생각해 보게. 소련의 프로레탈리아 민중들이 모두 이렇게 은식기에 푸짐하게 고기를 먹고 크리스탈 글라스에 와인을 마시는 줄 아나? 스탈린이 말했던 프로레탈리아에 의한 사회주의 혁명은 결코 이런것이 아니었어. 소련 방식의 사회주의 혁명은 죽었어. 후르시초프가 망쳐버렸다고...........'
체 게바라는 쿠바로 돌아와 카스트로에게 이같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했다.
하지만....... 한 하늘에 두개의 태양은 존재할 수 없는 법. 카스트로의 생각은 점차 달라지기 시작했다. 쿠바는 쿠바인인 자신만의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카스트로는 생각했다.
미국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카스트로는 후르시초프와 손을 잡을 수 밖에 없었고......... 혁명의 순수성을 버릴 수 없었던 체 게바라는 쿠바를 떠나 볼리비아의 정글로 들어갔다. 보다 나은 새로운 사회주의 혁명을 위해서..............
---- 박물관 내부사진은 들어가지 않아서 naver 이미지에서 퍼옮.
스탈린 사후 38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산당은 몰락했다. 소비에트 연방은 해체되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레닌도 스탈린도 소련도 모두 사라졌다.
1991년, 마침내 조지아를 포함한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아잔. 몰도바. 우크라이나. 폴란드. 벨라루스. 루마니아. 헝가리. 동독. 체코 등이 해체된 소비에트 연방에서 나와 독립국가를 선포했다. '독립국가 연합(CIS)'의 탄생이었다.
사회주의 혁명이 실패로 돌아간 지금에서 내려지는 '스탈린'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악랄(극악무도)하다.
러시아 소설가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소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One Day in the Life of Ivan Denisovich)'는 스탈린이 저지른 '대숙청'의 참상이 어떠했는지를 가감없이 사실 그대로 잘 묘사하고 있다. 세계가 경악했다. 이는 모두 스탈린의 위대한(?) 업적이었다. 그는 절대 왕정 시대의 폭군 이상이었다.
레닌의 뒤를 이어 정권을 거머 쥔 스탈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사회주의 나라에서 빈번히 일어나는 개인숭배주의 였다. 북한이 바로 여기에 해당된다. 독재정권의 전유물이 바로 개인 숭배 사상이다. 신이 인간에게 부여해 준 인간의 수명이 한정적인 상황에서 개인 숭배는 당장은 어느정도 효율적이라 생각될지 몰라도, 그러한 사상은 곧 자신을 포함하여 주변과 나아가서는 사회와 종국엔 국가와 인류를 파멸로 몰아가는 결과로 귀결될 수 밖에 없다.
스탈린의 무자비하고 집요한 개인숭배도 그가 죽자마자 후르시초프가 뒤집었으며...... 후르시초프 또한 반세기도 지나지 않아 역사의 뒤안길로 소멸되어 사라졌던 것이다. 인간의 존엄을 경시하고 죄악을 서슴치 않고 저지른 악인의 오명만이 그들의 이름 앞에 선명하게 각인되어 영원히 기억될 뿐이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이런 스탈린이 이곳 '고리'에서만은 지금도 버젓이 의연하게 살아있다.
오랜 세월 스탈린과 고리 또는 스탈린과 조지아는 끊을래야 끊을 수 없는 애증의 관계였다.
소비에트 연방의 변방에 위치한 조지아의 고리에서 소비에트 연방의 최고 권력자인 당 서기장에 스탈린의 이름이 공표되었을 때 조지아는 열광했다. 최고 권력자의 고향이 조지아요 고리였던 때문이다.
그들의 기대는 컸다. 머지않아 조지아가 전체 연방 중에서 상위권의 잘사는 지역으로 부상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니 정작 고리는 어떻했겠는가? 모스코바가 부럽지 않게 될 것이라 생각했다.
하루 이틀..... 일년 이년이 지나도 전혀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하나 둘씩 차츰 배신감에 젖어들기 시작했다.
스탈린이 다른 사람을 통해 통신문을 전해 왔다.
'고향이라고 해서 특혜를 내리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프로레탈리아식 사회주의 혁명 기본 이념에 어긋나는 것' 이라고. '공산당이 계획하고 지시하는 바에 따라 어떤 다른 지역보다 열심히 실천하고 스스로 노력하는 것만이 진정한 사회주의 혁명에 동참하는 것'이라고 적혀 있었다. 모든 바램이 말짱 도루묵이 되는 순간이었다.
어디 그뿐이었겠는가?
'고스플란'을 통한 소련의 국가 계획경제를 실행함에 있어서도 조지아는 철저하게 배격되었다.
주변국인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젠이 '중공업 혁신지역'으로 지정되면서 국책사업으로 철로가 개설되고 도로가 확충되고 여기저기 공장이 마구 들어서는 시점에서도 조지아만은 아무런 시책도 변화도 주어지지 않았다. 그냥 조상대대로 이어져 내려오던 대로 농사나 짓고 목축이나 하면서 근근히 살아가라는 지시라고 밖에 도무지 달리 해석할 여지가 없었다.
스탈린에 대한 기대는 포기로 변한지 이미 오래였고 이제는 절망을 넘어서 원망과 증오로 점차 확대되어 갔다.
'스탈린은 변절자다. 그의 고향은 조지아가 아니다. 고리는 스탈린을 낳은적이 없다.' 고 낙서가 나붙었다.
소련이 멸망하고 소비에트 연방이 해체되었다. 너도나도 자유를 갈망하면서 독립국가의 길을 서둘러 걸어나갔다.
그와 동시에 아르메니아에서 보았던 것처럼 탁상공론으로 가득찬 고스플란 주도의 소련식 국가경제의 허상이 그대로 낱낱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생필품이 동이 나기 시작했고 식량마저 부족해서 끼니 걱정을 하기에 이르렀다.
소련식 사회주의는 천편일률적인 방법으로 건설된 오로지 빠르고 튼튼하게만 짓고자 서둘렀던 똑같이 생긴 수많은 아파트에 그래도 중앙난방식 겨울 난방을 설치하여 유지해왔다. 독립된 나라들은 기름을 사들일 돈이 없다. 그러자 모든 아파트에 나무를 해다가 아프트 안에서 난방과 취사를 해야하는 고대 동굴도시의 형태로 아파트가 변해가기 시작했다. 아파트는 곧 연탄공장처럼 검은 그을름에 의해 변해갔다. 원자재가 없는 신생 독립국가들의 공장설비는 벌겋게 녹이슬게 방치하거나 일부 파렴치한 앞잡이들이 이런 시설을 뜯어서 해외로 빼돌리기 시작했다. 대부분의 신생독립국가들이 같은 중병을 똑 같이 앓고 있었다.
하지만 조지아만은 예외였다.
러시아와의 국교 단절로 보르조미 탄산수와 와인과 주요 농산물 수출에 막대한 타격을 입기는 하였으나, 곧 발빠른 중국과 일본이 다가왔다.
스탈린의 철저한 외면으로 조상대대로 내려온 방법대로 농사와 목축으로 그나마 근근히 겨우 먹고 살아왔는데....... 급변하는 20세기 주변국의 상황 속에서 스탈린의 외면이 오히려 전화위복이 된 것이다. 조지아는 소련의 몰락에 크게 타격을 받지 않았으며, 오래지 않아 위기에서 벗어나 오히려 최대의 호황을 지금 이순간 제대로 누리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아이러니한 일이 아니라 할 수가 없다.
스탈린은 죽었고 지워졌으며 사라졌다. 러시아에서 조차 이제 그의 행적은 쉽게 찾아볼 수가 없게되었다.
후르시초프에 의해서 대부분 지워졌고, 소련의 몰락과 함께 레닌과 스탈린 동상 철거 장면이 전세계 방송매체의 최대 이슈가 되기도 했다. 철거되고 부서지고 나머진 모두 불태워 졌다. 2010년엔 고리 시청 앞에 놓였던 스탈린의 마지막 동상마저도 무참하게 철거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세상이 어찌 변해가고 스탈린을 어떻게 평가하던 말던 단 한군데....... 여기 고리에서만은 스탈린이 버젓이 살아 남았다.
세상은 급변해갔지만.......... 미우나 고우나 그래도 자식은 자식이고........ 한번 고향은 영원한 고향이라고........ 고리 사람들은 애증의 대상이었던 스탈린의 흔적을 찾아 나섰다. 불태워지지 않은 흔적들을 모두 찾아내 한곳에다 차곡차곡 끌어모았다.
90년대 들어서 지역 기념관이었던 것을 확장해 '스탈린 박물관'으로 새롭게 문을 열었다.
스탈린은 집권 기간동안 고향 고리를 철저하게 외면 했지만, 그가 죽고 사라진 지금 그가 남긴 유산으로 채워진 '스탈린 박물관'은 지금 고리 사람들에게 적지 않게 박물관 입장료를 통해 들어오는 수익을 고스란히 되돌려주고 있다. 이 또한 애증의 관계에서 파생된 참 이해가 안되는 아이러니가 아니겠는가?
스탈린에 대해서 공부하거나 20세기 현대사를 확인하고 싶은 모든 사람은 반듯이 이곳 고리를 찾아와야만 하게 된 것이다.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드는 장소이다.
'그래도 나는 저 인간이........ 스탈린이 참 싫다.'
--- 철거 전 고리 시청 마당의 스탈린 동상.(펌)
모든 여행자가 흩어져서 이리저리 공원을 왔다갔다 하다보니 자꾸만 마주친다.
분수대에서 벨기에 노부부를 마주쳐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눈인사만 나누고 헤어지면 잠시 지나 수돗가에서 또 마주친다. 잔디밭 사이 작은 다리를 건너려하면 어느새 그 맞은편에서 건너오시는 모습과 또 마주친다. 이거 매우 어색한 씨츄에이션의 연속이다.
벤치에서 현지인들과 러시아어로 한참 이야기를 나누던 영어를 하는 러시아 젊은이가 다가온다.
'캐슬(Castle) 구경하러 가시지 않겠어요? 아참. 팜플렛에는 '고리 성채(Gori Fortress)' 있었는데........'
'아까 고리 시내에 들어오다가 지나치면서 보기는 했지요. 차로 이동한 거리로 보자면 여기서 한참 먼 곳일것 같은데요? 시간이 되겠어요?'
'아니래요. 방금 저 사람들과 이야기해보고 알았는데, 버스가 시내를 외곽으로 한바퀴 돌아서 들어 온 것이라네요. 요 앞에 보이는 아파트만 돌아가면 바로 길 건너에 성채가 있다고 하네요. 30분 정도면 성채 정상까지 다녀 올 수 있다고 하는데요? 전 한번 다녀와야 겠어요. 그럼 이따 봐요.'
러시아 청년은 벌서 저만치 공원을 벗어나고 있었다.
성채 정도의 유적이라면 그냥 지나칠 내가 결코 아니지만 문제는 시간이었다. 시계를 보니 휴식시간이 25분 정도 지나고 있다. 35분 남았는데.......
어느새 내 발걸음은 러시아 청년이 방금전에 갔던 길을 따라가고 있었다.
이렇게 시간에 쫓기는 여행은 내 스타일이 아닌데...........
세상에나..........
고리 성채를 다녀가지 않았더라면 두고두고 몹시 후회 할 뻔했다.
아파트를 돌아가니 저만치 마을 주택들 위로 성모교회와 고리성채가 우뚝 솟아나와 있는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그곳을 바라보고 마을 골목을 이리저리 돌아가자 아까 우리버스가 지나왔던 도로가 나타났다. 도로 건너편으론 고리 대성당이 서있고 박물관인지 호텔인지 오스만식 아름다운 건축물이 내 시야를 잡아 끌었다.
나는 성모교회의 잔디밭을 지나 성채로 다가서고 있었는데, 성채로 올라서는 언덕의 초입에서 놀라운 조각상들을 만났다.
거대한 청동 전신상들은 모두 십자군 병사들의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얼굴이 없거나 팔과 다리가 모두 잘려나갔거나 화살이나 포탄에 맞아 구명이 뚫렸거나........ 아뭏튼 온전한 제모습인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는 모두가 참혹한 십자군 흉상들이었다.
처음 마주친(바로위 사진)병사는 두팔과 머리 뒤통수부분이 날아간 참혹한 충격적인 모습이었으며 갑옷의 등판에 초승달과 십자가와 십자성이 분명하고도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이슬람과 기독교와 유대교가 뒤섞여 한바탕 광풍같은 전쟁판을 벌였던 것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리라.
여덟개의 청동 조각상은 모두 십자군 병사의 거대 조각상이다. 모두가 이루 형용하기 어려울만큼 참혹한 모습들을 하고 있다.
'실패한 십자군 전쟁'을 나타내고자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고리(조지아)는 유럽의 중앙에서 육로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을 지나 예루살렘으로 가는 가장 중요한 교통로였다. 바로 이곳이다.
이베리아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두 왕을 꼽으라면 데이비드 4세와 그의 증손녀 타마르 영왕 시기를 역사상 최고의 전성시대로 친다.
데이비드 4세(재위; 1089~1125) 가 통치하던 그 시기에 바로 '제 1차 십자군 원정대(1096~1099)' 가 이곳을 지나갔다.
사기성 농후한 '은자 피에르'가 가짜로 만든 '민중 십자군'을 이끌고 '제 1차 십자군'에 한발 앞서서 성지탈환을 외치며 지나갔던 곳이기도 하다. 가짜 십자군이자 불한당인 은자 삐에르의 도적떼들은 '성전(聖戰)을 치루려고 먼저 떠나온 교황의 군대'라고 속여가며 가는곳마다 식량과 물품을 요구하거나 강제 징발하였고, 그러고도 부족하다 싶으면 약탈과 방화와 심지어 살인까지 자행하는 무뢰배 집단이었다.
참다 못한 데이브드 4세가 군대를 이끌고 달려가 '민중 십자군'을 토벌해 버렸다. 대부분의 민중십자군이 참살 되었다. 은자 삐에르를 포함한 극히 일부의 무리만 산속으로 도망쳤다가 시간이 지나 '고드푸로아'와 '보두앵'이 이끄는 정식 '제 1차 십자군 원정대' 가 도착하자 그쪽으로 도망쳐 숨어들었다.
기독교 국가로서 '성지 회복'이라는 대의명분에는 당연히 협조를 해야겠으나........ 현실적인 문제에서 십자군 원정대가 이베리아 왕국(조지아)를 지나가면서 남긴 상처는 너무도 컸다.
현명한 군주 타마르 여왕(재위; 1184~1213)의 시기에 '제 3차 십자군'과 '제 4차 십자군'이 이곳을 또 지나갔다.
결과적으로 '실패한 전쟁'으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게 되지만 7차 원정으로 막을 내릴때(1254년) 까지 조지아(이베리아 왕국)가 겪게되는 아픔과 상처는 너무도 컸다. 그것은 한마디로 재앙이었다..
'십자군 전쟁'에 대해서는 이미 여러번 부분적으로나마 접근을 해 보았고, 또 앞으로도 해 나갈것이기에 여기서는 생략하겠으나.......
여기의 이 거대 조각상들로 하여 작가는 바로 그날의 아픔과 참상을 표현하고자 했던 것으로 생각되었다.
내가 이곳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 청년은 이미 저만치 성채의 정상부에 올라가고 있었다.
하지만 나에게는 이 조각상들이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한족쪽바위에 걸터앉아 조각상 하나하나를 관찰해가면서 내가 알고있는 '십자군의 진실'을 하나하나씩 꺼내서 되짚어보는 시간을 가졌다. 그렇게 한참 지났을 때, 성채에 올랐던 러시아 청년이 내려왔다. 정상에 오르면 아주 멋진 뷰가 있다는데 이젠 시간이 부족해서 올라가 볼 기회가 나에게는 이미 없다. 아쉽지만 이 거대 조각상들로 오늘은 만족해야지 어쩌겠는가.
아쉬운 마음 속에 발걸음을 돌려야만 했다.
고리를 출발하고나서 얼마지나지 않아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냥 내리는 소나기가 아니었다. 지난 밤처럼 엄청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방에서 자동차는 몰려 나오고....... 교통 신호등도 없고 교통 순경도 없고......... 여기저기 접촉사고는 발생하고....... 도로는 제 기능을 상실했다.
그야말로 무법천지다. 이런 교통상황에 대해 더이상 무엇이라 표현할 방법이 없다.
흡사 전쟁터를 빠져나가는 난민 자동차 행렬 같다고나 할까.
한 오십년은 되어보인 굴러가는게 신기해보이는 불량정비 차량 지붕에 택시 램프가 달려있다. 기절초풍할 뻔 했다. 그럼에도 요리조리 잘도 빠져다닌다.
저 상태를 보고나서도 비싼 돈을 지불하며 택시를 탈까? 나라면 차라리 걸어갈 지언정....... 패스.......
시간이 한참이나 늦어졌다. 이러다가 낼 아침 '카즈베기 트래킹'에 지장이 생기는 것이 아닐까 하고 은근히 걱정이 되기도 했다.
비록 늦기는 했지만 버스는 무사히 트빌리시에 도착했고, 아침에 태워갔던 여행자 거리가 아닌 장미혁명 광장 인근에 한꺼번에 모두 쏟아놓고는 떠나갔다.
오늘 하루를 함께했던 동지들과 일일이 악수를 나누며 작별을 했다.
다행히 비는 그치고 간혹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는 정도였다.
일단 트빌리시에 돌아온 이상 문제될것은 전혀 없다. 밤이 깊었던 말던 트빌리시는 이미 내 손바닦 안에 있다.
르스타밸리 대로를 따라 자유광장으로 향한다. 스탈린이 은행을 털고 달아나던 도로이다. 환하게 조명이 밝혀진 구 국회의사당 건물의 위용이 상당하다. 낮에 보던 모습과는 상당히 차이가 느껴진다. 시위대 몇사람이 구 의사당 건물 정면 계단에 바리케이트와 천막을 치고 장기 농성 중이다. 그 주변을 경찰들이 삼엄하게 지키고 서있다. 오세티아 문제에 대해 항의하고 있는것으로 보인다. 이들 민족 내부의 문제라서 그냥 먼 발치에서 잠시 바라보다가 발걸음을 옮긴다.
자유광장 지하철 입구에 도깨비 시장(야시장)이 열리고 있다.
우리나라에 흔한 사행성 위주의 게임장이나 사방으로 늘어선 먹거리 시장이 아닌, 대학로에서 보듯이 대부분 자신들이 직접 핸드메이드로 제작한 쥬얼리며 가방이며 장난감이며 옷이며 책가지들을 판매하고 있다. 물론 간이 스낵 카페 정도는 있다.
좀 둘러보아도 좋았겠으나 이미 오늘 일정으로 12시간 이상을 소요하여 피곤한데다가 내일 일정에 대한 부담감으로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지하철 역사 지하층에 있는 대형 슈퍼마켙에서 와인이랑 과일이랑 주점부리를 구입하고는 지하도를 통해 여행자 거리로 이동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귀에 아주아주 익숙한 노래 'Stumblin'이 들려 온다. 물론 크리스 놀만과 수지 콰트로의 보컬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이 연주는 지금 생음악이 었기 때문이다. 갑자기 내가 한창이던 젊은날의 한 새대를 풍미한 '스모키(Smokie)'의 진한 향수가 확 피어올라왔다.
지하도로 한 블럭을 더 나아가야했음에도 참을 수가 없어서 서둘러 계단을 올라갔다.
흐리고 늦은 시간임에도 자유광장 인도에 가득 사람들로 넘쳐났다. 모두가 몸을 들썩들썩 리듬을 타고 있다. 아예 신나게 춤을 추는 사람도 보인다.
락 밴드가 버스킹을 하고 있다.
설혹 내일의 스케줄이 모두 헛탕이 된다고 해도 내가 어떻게 이런 상항을 그냥 지나칠 수가 있단 말인가? 난 결코 그렇게 매사에 똑부러지는 그런 사람이 아니다. 지치고 방금 슈퍼에서 산 먹거리 비닐봉투로 손이 아파오지만 그런것이 나에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한다. 이미 필이 꽂혀버리고 만것을.......
어느새 내 두 발이 서서히 리듬을 타기 시작한다. 버스킹 연주에서 크리스 놀만의 파트를 내가 대신하고 있었다.
캬...... 밴드의 리드보컬이 나보다 쫌 노래를 못한다.
다음곡으로 핑크 플로이드의 'another brick in the wall part 2'를 연주하는데도 보컬은 영 나만 못하다.(여기 눌러앉아 객원 싱거나 할까?')
'내가 이십년만 젊었어도 밴드 결성을 해보겠는데......... ㅎㅎㅎㅎㅎ ㅋㅋㅋㅋㅋㅋㅋ'
서너곡 연주를 더 듣다가 시계를 보니 밤 11시가 넘어서고 있다.
이건 여행자의 처지로 시간관념에 대해 어느정도 한계를 이미 넘어서고 있는것이다. 아쉽지만 이쯤에서 물너 날 밖에........
이 버스킹이 이들의 상시 공연인지 오늘만의 특별한 공연인지를 알아보지 못하고 유령호텔로 발걸음을 옮길 수 밖에 없었다.
'카즈베기'가 되었든, '데이비드 가레지'가 되었든........ 전체 일정을 생각하면 트빌리시에서의 시간이 나에겐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이번 여행의 마지막 스케줄을 '이스탄불에서 귀국 비행기에 오르는 것'으로 잡아놓지만 안했어도........ ㅎㅎㅎ
아직 여행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왜 나에게는 18일 이라는 기간이 한없이 짧게만 벌써부터 느껴지기 시작하는지.......
가을 공사 스케줄만 아니었으면 이번 여행 스케줄을 최소 한달은 잡았을것을........ 겨울 여행은 짧아도 한 40일 정도는 해야겠다.
자정을 한참이나 지난 시간에 와인에 취해서 겨우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다섯시가 되기도 전이다. 도대체 몇시간을 잔거야?
커튼을 재쳐보니 눈이 부시도록 환한 가로등 불빛만이 어둠 속에서 빛나고 하늘을 살피니 아직 칠흑같은 어둠속의 새벽이다.
다시 침대에 누워보지만 정신이 점점 맑아져 갈 뿐이다.
커피물을 얹어놓고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고국의 뉴스를 보고 있다. 대통령께서 백두산에 오르셨단다.
백두산?
내 여행 버킷리스트에 없는 지명이다. 북한을 통해서 차를 끌고 간다면 한번 쯤 고려해...............
대충 짐 정리를 해 놓고 방도 깔끔하게 느껴질 정도로 정리랑 청소를 한다. 식전 댓바람에..........
오늘은 유령 호텔을 그냥 비워놓는 날이다.
침대 옆에 덜렁 큰 배낭만 놓아두고 작은 배낭만 둘러메고 해발 3천미터 고갯길을 넘어서 다른 도시로 가서 게스트하우스에서 1박을 하고 올 계획이다.
2년적의 아쉬움이 너무도 컸었기에 벼르고 또 별렀던 1박2일 나들이를 감행한다.
'기다려라. 카즈베기야. 대가 기어코 다시 왔어. 제발 이번엔 맑은 얼굴 좀 제대로 보자꾸나.'
'너만 허락해 준다면 너의 품까지 내가 직접 걸어서 올라갈거야. 부탁해............'
날이 밝았다.
티끌 하나없이 마냥 푸른 하늘이 내 발걸음을 반겨준다.
유령 호텔을 나선다.
오늘도 새벽 산책은 변함이 없다.
'굿모닝. 트빌리시야. 밤새 별일 없었지?'
----- 일정상으로는 아침에 일어나 산책하고 '카즈베기'로 떠나야 하는 스케줄이지만, 트빌리시를 돌아 볼 시간이 부족하네요. 그래서 다음 이야기에서는 우선 트빌리시 도시 투어를 먼저하고 다다음 여행기에 카즈베기로 떠나도록 해야겠네요. 트빌리시에서 뵙지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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