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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그리움이 차면 조지아로 떠나자.

by 피안재 2018. 11. 1.

 

 

 

 

 

 

 

 

 

 

 

 

 

 

 

 

 

 

 

 

  트빌리시 뿐만이 아니라  이 세상의 어느 도시에 갖다 놓아도 지도 한장과 한나절 정도의 시간이면 그 도시에 관해서 지리적인 점을 포함해 대부분 파악을 마치고  내집처럼 쏘다니는 사람이 바로 나이다.

  아직까지 여러 낯선곳을 돌아다니면서도 핸디폰 로밍서비스를 단 한번도 사용해 본적이 없는 사람이다.

  간혹 지도가 상세하지 않다거나  손으로 그린 지도 때문에 어려운 고초를 격은적도 없지는 않지만 로밍 서비스를 하지 않은 이유는, 여행에 대한 자신감과 또 찾아 헤매고 다니는 고충도 나름의 재미가  있기 때문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제 서서히 나이와 체력을 느끼는 지경에 이르고 보니,  마냥 자신감에 넘치는 무모함 보다는........  누군가를 잘 모시고 다녀야 하는 상황이 된다면 훨씬 수월할 수 있도록 로밍 서비스를 통해 구글 맾을 적극 활용해 볼 생각이다.

  인천공항 탑승 게이트 앞에 도착하면 핸디폰을 가지고 꼭 하는 일이 있다.  비행 모드로 전환이냐,  아니면 아예 메모리 칩을 빼느냐.

  비행모드로 전환하면 국경을 넘거나 해외토픽감의 뉴스가 발생했을 때마다  외교부에서 긴급 문자 써비스로 대처요령이나 안내 문구가 날라온다.  적어도 대한민국에서는 내가 지금 어디쯤 있다는 것을 파악하고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칩을 빼버리면 그냥 영원히 깜깜이가 된다.

  호텔. 레스토랑 등에서 무료 와이파이를 사용하기 전까지는 내 핸디폰은 깜깜이요 무용지물이다.  보조 카메라 기능만 살아있다.  내가 바로 이 경우에 해단된다.

  처음가는 세상 어느곳일 지라도 비행기에서 내리면 나는 참 마음이 푸근해지고 느긋해 진다.  다들 그런 내가 이상하다고 하지만.......

  주변에 그 누구도 나를 알거나 주시하지 않고  내가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한  어느 누구로부터도 거부나 제지를 당할 이유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오로지 나 하나.......  내 스스로만 잘 간수하고 추스려나갈 수 있다면.........  그야말로 내 맘대로 만고강산이 아니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일단 핸디폰 등 세상사와 완전하게 단절되는 것이 우선이다.  떠나기 전에 일처리 마감하고 정리하고  돌아올 기약을 하고 떠나왔으니,  그 중간의 시간은 온전히 내 시간이요 내맘대로 무한정의 자유인이어야만 하는것이 바로  진정한 여행이다.

  여행다니면서 수시로 전화받고 문제 해결하고 머리싸매고 고민하려면  차라리......  떠나지 마라.  모든 문제 다 해결하고 나서 떠나라.

  나의 실제 생활(현실)에서 잠시 벗어나  쉬기도 하고 정리도 하고 계획도 세우고 재충전 하자고 떠나는 것이 여행이라고 생각한다면 말이다.

  무료 와이파이로는 주로  다음 여행지 상황이나  항공편 기차편 버스편 검색이나 예약에 쓰고, 잠이 안오면 무료 영화보는데나 쓴다.

  내 경우는 날짜 정해서 여행을 떠나면  비행기에 타는 순간에서 부터,  여행 마치고 공항에 도착하는 순간까지 세상의 모든 관계들과 철저하게 단절되는 시간을 가진다.  도착하고 나서 급한대로 몇 군데 연락해서 없는 동안의 상황을 파악하면 또 다시 평범한 일상이 된다.

  언제나 똑같다.

 

 

  (14  Chakhrukhadze  street  Tbilish  Georgia)

  주소와 트빌리시 지도가 내 손에 들려있는 이상  문제가 될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2년 전 여행에서 이미 트빌리시 도시 전체를 거의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부러 올드타운의 중심지역에 숙소를 얻은것도 나름 다 이유가 있어서 였다.

  헤매는것 전혀 없이 흔히하는 말로 직빵으로 목적지에 도착했다.

  주소에 명기된 대로 '14번지'를 찾았다.

  그런데 닷새나 머물 예정으로 사전 예약한 호텔이 없다.

  혹 번지수가 잘못 기재되었나 싶어서 좁은 골목이 사방으로 엉켜있는 동네를 두바퀴나 돌았다.  그럼에도 예약한 호텔은 보이지 않았다.

  주소에 나와있는 '14번지' 건물은 그냥 완전 다부서져 오래 방치된 말그대로 폐가(家) 였다.  찌그러진 철문마저도 쇠사슬로 묶여있었다.

  '이게 시방 꿈이여?  생시여?''조지아판 전설의 고향이여?'

  승용차 겨우 지나갈 정도의 좁은 골목 비켜맞은편  2층 건물이 마침 작은 간판이 달린 작은 호텔이었다.

  인기척을 내니 안에서 매니저가 나온다.  주소를 보여주고 예약한 호텔 이름을 대니 고개를 갸우뚱 갸우뚱 하면서  건넨 주소를 살핀다.  주소는 분명 앞집이 맞기는 한데  그런 이름의 호텔을 이 근처에서 보지 못했단다.  십년 이상 현재 호텔을 운영하고 있는데 처음 들어보는 이름이란다.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귀신에 홀린 기분이 들었다.'

  '말로만 듣던 여행사기를 당한건가?'

 

 

 

 

 

 

 

                                

 

                                

 

   

 

 

 

 

 

  그나마 다행인것이 앞집 호텔 매니저가  매우 친절한 인텔리였다.

  물을 한잔 얻어 마신 뒤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좀 부탁했다.  내가 로밍서비스를 하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된 그는 흔쾌히 번호를 알려준다.

  담벼락에 쪼그리고 앉아서 무료 와이파이를 통해 핸디폰을 켜고 (부킹닷컴) 서버에 접속을 했다.

  소위 그래도 가장 명망을 얻고있는 싸이트가 아니겠는가?

  분명하게 내 예약 상황이 '예약 완료'로 나와있다. 주소도 맞다.  다만 현장에 그런 호텔이 없다는 것이 문제였다.

  내가 직면한 사태가 어떤것임을 대략 눈치 챈 매니저가 (부킹닷컴)에 등재되어 있는 사라진 호텔의 연락처로 자신의 핸디폰을 이용해 연락을 취해 본다.  그런데 서너번 반복을 해 보았건만  상대방에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

  '당해도 된통 난감한 상황에서 당하는구나.'  저절로 허망한 푸념이 터져나왔다.

  와이파이가 가동되었기에 e-메일을 확인해 보기로 했다.

  그런데 아뿔싸!

  (부킹닷컴)으로 부터 약 2시간 전에 여기 유령호텔 측에서 호텔 예약비용 전액을 카드결제 처리했다는 메세지가 도착해 있었다.  나는 분명 현장에서 현금 결제를 하겠다고 게약 조항에 명기를 했었는데 지덜 맘대로 카드 결제를 해서 돈을 빼 간것이다.

  이거야 말로 제대로 사기를 완벽하게 당한 꼴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우선,  어디 조지아 통신사로 달려가 유심칩을 구매한 뒤 전화를 통해 한국의 카드사에 지불 취소를 알려야 한다.

  다음으로,  (부킹닷컴)으로 메일을 통해 사실을 알리고 정당하게 예약 취소처리 요청과 더불어  이 유령 호텔을 고발하고 조치와 해명을 요구해야 한다.  헌데 그러자면 어디고 들어 앉아서 한참동안 백지를 끌어안고  영어문장과 씨름을 해야만 한다.

  급한대로 매니저에게 '당신 호텔에 방이 있느냐?  난 지금 숙소가 필요하다'고 요청해 보는데....... ㅎㅎ . 예약이 꽉 차서 빈방이 없단다.

  심호흡을 몇 번하고 상황 인식을 다시 확인하고 수습을 위해 골목에서 배낭을 열었다.  유심칩을 사러 갈 시간이 없다.  당장 핸디폰을 되살려서 일반 국제전화라도 걸어야만 한다.  근데 출국 전에 빼놓은 메모리 칩이 배낭 맨 아래 필기도구 주머니에 들었다.

  참으로 처량한 신세였다.

  여행자라는 사람이 남의 호텔 입구에서  배낭을 풀고 옷가지를 하나 둘 골목에 그냥 꺼내서 늘어놓는 폼이 그렇지 않았겠는가?

  그때  매니저의 핸디폰이 울렸다.

  유령호텔의 담당자인데 받아 보란다.

  이거야 원.

  심각하게 실질적인 대화가 이루어져야 하는 상황임에도........  상대편 여자의 언어 실력이 나보다도 못해 보인다.  매니저가 건네받고는  조지아어로 한참을 뭐라고 뭐라고 대화를 나눈다.

  '상대방이 거듭 거듭 사과하고 이해를 구하고 있네요.  15분만 기다려주면 여기로 와서 모두 해결을 해 준다고 하네요.  당신의 상황은 내가 전부 이야기 해 주었어요.  15분만 기다려 줄 수 있느냐고 물어보는데요?'

  하니 어쩌겠는가?  기다려 볼 수 밖에.........

  매니저가 안에서 작은 꼬마 의자 두 개를 가지고 나왔다.  마주 앉았다.  그리고 내게 천천히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트빌리시는 얼마전부터 온통 관광사업에 목숨들을 걸고있단다.  하여 다양한 형태의 숙박업이 들어서고 있는데,  최근들어 간혹 지금의 경우처럼 간판도 없이 민박집을 개조하여 영업을 하는 사례가 많이 늘어나고 있단다.  하지만 무허가는 아니란다.  간판은 없지만  관청에 등록이 되어야 (부킹닷컴)이나 (아고다) 등에 등재할 수 있기에 정식 허가는 나와 있단다.  다만 숙박업소의 규모와 시설 등에 대해 관청이 기본 요건이나 규정과 제재가 전혀 없다는 것이다.  그냥 모든것은 열악한 숙박시설 업자와  여행자 당사자간의 문제로 처리될 수 밖에 없는 것이  현재 조지아가 당면한 관광사업의 한계이자 문제라는 것이다.  그러니 내가 유령업자를 만나서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방을 직접 보고나서 어떤 결정이든 내리면 별 문제는 없을 것이라는 친절한 설명이었다.

  사전에 카드 결제가 미리 된것은  유령호텔에서  오늘 아침부터 나에게 여러차례 연락을 시도했는데(내 핸디폰이 깜깜이 인 고로) 연결이 되지 않아서,  혹시라도 무단 캔슬을 당하면 자신들만 피해를 보게되기에 부득불 선결제 처리를 했다는 설명이었다.

  시내에 몇군데의 허름한 민박집을 나름 개조를 해서 호텔이라고 간판도 없이 어찌어찌해서 유명 싸이트에 등재를 해 놓고,  예약이 들어오면  이렇게 간판도 없는 현장에서 직접 만나서 사정하다시피 설명을 한 후에 직접 열쇠를 건네고 받으며 체크인. 체크 아웃을 하는  열악한 방식으로 유령호텔을 운영하고 있다고 했다.  자신도 직접 마주친 적이 없어서 저곳이 호텔인 줄 꿈에도 몰랐단다.

  일단 사기는 안당했다는 안도는 되었지만,  무엇인가가 찝찝하고 분이 가시지를 않았다.  오면 이것저것을 따져서 일단 정상적으로 해약을 하고  좀 힘이 들더라고 다른 호텔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20분쯤 지났을 때,  그 좁은 골목어귀에 택시 한 대가 멈춰섰다.  30대의 퉁퉁한 여인이 아이를 끌어안고 내렸다.  단박에 그 여인이 문제의 유령호텔 담당자라는 직감이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과연 그랬다.

  몹시 당황한 모습의 여인은 땀까지 흘리면서 거듭거듭 상황이 이렇게 복잡하게 된 것에 대해 사과를 해왔다.  전화 연락만 되었으면 아무일이 없었을것을  시간 약속을 사전에 하지 못해 그런것이니 부디 이해를 해달란다.

  땀까지 흘리면서  서둘러 쇠사슬에 묶인 자물쇠를 열고는 안으로 인도를 한다.

  사람이 살지 않은지 한 2~3년은 족히 되어보이는  완벽한(?) 폐가였다.

  삐걱삐걱 소리까지 내며 난간의 일부가 한쪽으로 쏠리는 나무 계단을 타고 2층으로 올라간다.  이것은 집이 아니다.  헛간이다.  외양간이다.

  2층에 마주보고 있는 방이 두개가 나란히 놓여있었다.  둘 다 비었다고 골라도 된다고 하는데.......  내 표정을 살피더니  안되겠다 싶었는지  얼른 오른쪽 문을 열고 안으로 안내한다.

  방은 리모델링이 깔끔하게 되어 있었다.  겉은 완전 헛간이었지만  실내는 그다지 나빠보이지 않는 멀쩡한 호텔방이었다.  입구에 주방이 분리되어 있고  냉장고와 주방기구도 모두 갖추어져 있다.  안으로 들어서면  식탁과 미니 테이블과 커다란 소파와 벽걸이 TV가 놓인 거실이었다. 안쪽으로 분리된 침실에 커다란 더블침대가 놓였고,  그 안쪽으로 샤워시설을 갖춘  화장실이 있었다.

  내 방과 서재를 떠올리게 한다.  아니 내 방보다는 훨씬 좋아보였다.

  다만 방문을 나서면 또 헛간을 떠올려야만 하고  고양이들이 사방에 널린것이 마음에 걸렸다.  베드버그만 아니라면..........

  만약 유령호텔 담당자가 남자였다면 나는 숙소 안을 구경조차  안하고 취소 절차에 들어갔을 것이다.  내 성격대로 하자면  이정도의 상황이라면 결코 곱고 순한말로 처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땀까지 흘리는 여인을 보면서.........  차림새를 보아도 넉넉한 형편은 아니고 이제 무엇인가  희망을 가지고 새롭게 시작하는 모습이 역력해 보이고........  우리 손녀 윤태리 또래의 아기까지 보고있노라니.........  어쩌겠는가?  내 표정이 어느새 스스로 풀려가고 있었다.

  여인의 입에서 카드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을 보고  고개를 끄덕이며 안심시켰다.

  '노 프라블럼.  애브리싱 이스 화인.  마들로바(조지아어로 땡큐).'

  그제서야 그녀의 얼굴에도 미소가 피어 올랐다.

  티비. 전기렌지. 출입 등등의 설명과 함께 열쇠를 건네 받았다.

  떠나는 날이 새벽비행기라서 체크아웃에 대해서 물었더니......  문 밖에 선반위에 그냥 열쇠를 얹어놓으면 된다고 수줍게 웃는다.

  헐.

  이런게 여행 아닌가?

  여인을 돌려보내고 나서 대충 짐 정리를 한다.

  두꺼운 커튼을 걷으니 수백년도 더 된 허름한 무너져가는 고풍스런 옛골목의 정취가 그대로 시야가득 들어온다.  운치가 넘친다.  더군다나 옛 건물이다 보니 거실에 두칸, 침실에 두칸의 창문이  유럽의 고딕식 건물처럼 아주 커다랗고 육중한 나무문이다.  창틀도 40cm는 족히 될만큼 넓고 튼튼해 걸터 앉아도 끄떡이 없다.  흔히 무슨 CF 광고에나 나오는 그런 뷰를 보여준다.  창문 무게감을 그대로 전해주는 손잡이를 비틀어 밀치니  시원한 코카스스 산맥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사정없이 안으로 쏟아져 들어온다.

  우여곡절은 있었으나  나름 마음에 쏙 드는 방이었다.  밤에 베드버그만 없었으면 하고 바랄뿐........

 

  다음에 혼자 다시 트빌리시를 가게된다면 그 커다란 고딕식 창문과 가로등 조명아래 골목의 풍경때문에 또 유령숙소를 찾아갈 지 모르겠다.

  하지만 동행이 있다면 당연히 좀 더 멋지고 아늑한곳을 찾게될 것이다.

  닷새동안 나름 편하게 잘지내고 온 숙소였다.  다만,  귀국 후 부킹닷컴 사용 후기요청엔 일절 응대하지 않았다.  잠만 자는것 외에  전체적인 개선이 우선적으로 필요한 숙소였으니까.  후기를 이쁘게 썼다가 누군가 다른 여행자가 나 같은 낭패 격는것을 나는 원치 않았기 때문이다.

  결코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나름  멋진 경험이었다.

 

 

 

 

 

 

 

 

 

 

 

 

 

 

 

 

 

 

 

 

 

 

 

 

 

 

 

 

 

 

 

 

 

 

 

 

 

 

 

 

 

 

 

 

 

 

 

 

 

 

 

 

 

 

 

 

 

  유령호텔에 짐을 풀자마자 다시 밖으로 나왔다.

  여전히 아름답고 활기찬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전체적인 도시의 풍경은 그대로였지만 큰 도로의 이면으로 건설현장이 많이 눈에 띤다.  타워 크레인이 여기저가 솟아나와 있다.  개발과 변화의 활기찬 생동감이 여실히 느껴진다.

  예전에 배해 여행자가 훨씬 늘어난 느낌이다.  처음 조지아 여행을 오래전에 계획했을 때는 9월~10월이 비수기의 시작으로 책에 쓰여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창 성수기로 변했다.  한겨울에도 찾아오는 여행자가 많을 만큼  이제 조지아는 나름 뜨거운 여행지로 변했다.

  핫(뜨거운)한 여행지란 곧  그만큼 새로와지는 것도 잃거나 사라지는 것도 많이 생겨난다는 말이다.

  트빌리시는 프랑스 파리나 스페인 마드리드의 모습을 상당히 많이 닮았다.  '동유럽의 리틀 파리'라 불러도 전혀 손색이 없을것 같다.

  추억을 회상하면서 도심의 거리를 걷는다.

  도심의 지반 아래로는 여전히 사방으로 멀게는 그리스와 로마에서 부터 오스만까지의 유적들이 잠들어 있다.

  막 트빌리시에 도착한 처지이면서도 한 사람을 서둘러 만나보기 위함이었다.

  2년 전에도 그 사람을 찾았었다.  그런데 전면에 마주서서 인사를 하지 못하고 멀리 떨어져서 뒷모습만 보고 발걸음을 돌렸었다.

  그러다가 지난 여름 고향 충주의 아주아주 오래된 중국집을 수리하는 현장을 지나다가 쓰레기 더미에서 그 사람을 발견했다.  그 이후로 허름한 아주 오래된 동네 이발소만 지나가게되면 나도몰래 안을 힐끔힐끔 살피는 웃기는 병이 생겨버리고 말았다.

  그 병을 치료하자면  서둘러 이 사람을 먼저 직접 만나보아야만 할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나는 서둘러 발걸음을  트리리시 올드타운의 중심가로 옮겼다.

  그는 여전히 그곳에 있었다.

  세상에 등을진채 꽉 막힌 벽을 바라보고 있었다.  2년이 지났건만 전혀 미동도 없이 그냥 그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마라.

            슬픔을 딛고 일어서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항상 미래를 지향하고

            현재는 한없이 우울한것

            모든것은 순간에 사라지고

            한 번 지나가면 그리움으로 남으리.

 

 

 

 

 

 

 

 

 

 

 

 

 

 

 

 

 

 

 

 

 

 

 

 

 

 

 

 

 

 

 

 

 

 

 

 

 

 

 

 

 

 

 

 

 

 

  알렉산드로 푸시킨(Alexander Pushkin, 1799~1837)은 1829년에 조지아의 트빌리시에 왔다.

  그는 지친 영혼을 달래주고 휴식을 가져다 줄 안식처가 필요했다.  그만큼 코카서스 산맥의 한구석에 포근히 안겨있는 듯한  분위기의 트빌리시는 정신적 영감이 충만한 천재들이 찾아들기에 안성맞춤인 곳이었다.  푸쉬킨에 이어서 톨스토이와 막심 고리키와 앙드레 지드가 이곳에 머물며 창작열을 불태웠다.  그렇게 보자면 위대한 러시아의 문학사에 트빌리시는 지대한 공로를 끼쳤다고도 할 수 있겠다.

  진보적 낭만주의자로 평가받던 그는  점차 혁명적 사상가와 운동과들과 교류하면서 변화를 격는다.

  ‘네가 주인이다 / 홀로 살아가라 / 걸어가라 자유로운 길을 / 자유로운 정신이 너를 이끄는 곳으로’ 하고 노래했던 푸시킨은 바로 그렇게 자유를 찬양하는 내용의 시가 화근이 되어 남부 러시아로 유배당했다.  국외망명을 시도하다가 적발되어 유폐에들어갔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1825년에야 겨우 유배에서 풀려났다.  이 때부터 푸쉬킨은 모스코바를 떠나 정신적 유랑생활을 시작한다.  그 와중에 트빌리시에도 들렸던 것이다.

 

 

  38세에 요절한 러시아의 대문호 푸쉬킨은,  어쩌면 그냥 이곳 트빌리시에 그대로 더 머물러 살았다면 오래오래 장수하면서 더 많은 작품을 남길 수도 있었을 것이다.  모스코바로 돌아간 푸쉬킨은  그 다음해에  매혹적이면서도  끼가 많은 여인 나탈리아 콘차로바를 만나 결혼하면서 부터 불행이 시작되었다.  결혼 전부터 이미 러시아 사교게에서 수많은 염문을 뿌리고 다니는 여인에게 사랑을 느끼게 된것이다.  결혼 후에도 염문은 하루도 끊이지를 않았다.  심지어는 황제까지 연루되었다는 소문이 나돌았다.  결국 참다못한 푸쉬킨은  당시 염문설의 대상이었던 프랑스 출신의 망명 장교에게 결투신청을 하게되었고,  결투의 결과로 총에 맞아 사망했다.

  죽는 순간까지도 사랑을 갈구했고  결국 그 사랑때문에 세상과 작별했다.

 

  우리 어린시절  중국집이던 이발소던 빵집이던 어디를 가도 벽에 시화액자 하나쯤은 걸려 있었다.

  시화 하나쯤 벽에 걸렸어야 그나마 품위 내지는 교양이 드러난다고 여겨지던 시절이었다.  어디 가계뿐이었겠는가?  가정집 벽에도 걸려 있었다.  좀 살만하거나  집안을 내세울 정도가 되면야  벽에 산수화나 한문이 빼곡한 족자가 걸리고 병풍이 둘러쳐져 있겠으나,  대부분의 서민집에는 심지어 조잡한 시화가 들어간 작은 벽시계가 가장 눈에 띠는 자리에서 한껏 자랑의 뽐내던 시절 말이다.

  생황이 좀 나아지면서는 한 때 청소년들에게 시화 열풍이 불었다.

  너도 나도 앞다투어  '김춘수의 꽃' '윤동주의 서시' 등을 커다란 캔버스에 시화로 만들어 책상위에 너도나도 걸어 놓고는 그 시의 배경으로  건너마을 오빠를 생각하고 떠올리면서 꿈나라로 가기도 했다.   스케치북 표지와 연습장 표지와  책받침에도 온통 시화였던 시절 말이다.

  흑백사진에서 컬러사진이 등장하고,  사진기가 대중화 되기 시작하면서 시화는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그 자리를 대중화된 사진기 덕에 커다랗게 확대한 실사진 액자들이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시화가 하나 둘 사라지기 시작했다.

  서민의 거실에서 중국집 벽에서 빵집 벽에서 하나 둘 사라지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종국엔  우리 주변에서 유행에 가장 뒤떨어진 후미진 골목의 동네 이발소에나 잔뜩 색이 바랜채로 어쩌다 하나 걸려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유행에 뒤떨어진 장소에 가장 많이 내걸려 있던 시화가 바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였다. 내 기억으로는.......

  그만큼 우리가 함께 헤쳐온 지난 시절이 그만큼 암울하고 힘들었다는 반증이기도 하겠지만.........

  푸쉬킨 할아버지.

  활기차고 아름다운 번화가 풍경을 마다하고 분수대 뒷쪽 후미지고 깊숙한 구석에 돌아서서  콱 막힌 담벼락만을 응시하고 있는 이유는 뭔가요?

  돌려 드릴까요?

 

 

 

 

 

 

 

  올드시티의 중앙에 해당하는 이곳엔  2006년에 완공된 자유탑이 서 있다.  자유탑의 꼭대기에는 진짜 황금으로 도금된  거대한 성 조지상이 우뚝 서 있다.  강 건너편에 신도시가 건설되었지만 여전히 트빌리시 뿐만이 아니라 조지아 심장부라 할 이곳이 바로 자유 광장(Freedom Square)이다.  지나온 시대에 따라 '예레반스크 광장' ' 베라야 광장' ' 레닌 광장'으로 이름을 바꿔가며 불렸었다.  자유탑 위에는 본래 레닌의 동상이 서 있었으나 1991년 독립과 동시에 레닌 동상을 철거해 버렸다.

  이곳은 과거에 실제로 레닌과 아주 밀접한 연관이 있던 장소이다.

  조지아의 역사에 대해서는 약간이나마  2년전의 여행기에서 서술한 바가 있기때문에, 여기에서는 중복해서 다시 거론하지는 않기로 하겠다.

  고감하게 생략을 하고........  당시 지면상의 이유로 빼먹고 지나갔던 이야기나 떠오르는 대로 새롭게 서술해 보는 방식으로 해야할것 같다.

  이곳 평화 광장에서  루스타벨리 대로를 따라 조금만 가면  장미혁명 광장과의 중간지점에 웅장한 (구)의사당 건물이 나오는데 건물 지붕쪽의 전면에 아주 커다랗게 소련의 문장인 낫과 망치가 새겨져 있었는데 독립과 동시에 투박하게 패어 지워 버렸다.  그 또한 과거사의 아품이라고 하겠다.

 

 

 

  1907년 코카서스 지역 일대를 넘어 러시아까지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엄청난 사건이 여기에서 벌어졌다.

  '티플리스 은행에 강도가 침입했다.'

  현재 조지아의 수도인 '트빌리시(Tbilisi)'의  옛 지명이 '티플리스(Tiflis)' 였다.  그러니까 우리로 치자면 세종로에 있는 한국은행에 강도사건이 발생했다는 이야기가 되겠다.  같은 시기에 비슷한 예를 들자면 지구 반대편 미국에서 실제로 부치 캐시디와 선댄스 키드가 여러 은행들을 털어가던 비슷한 시기에 실제로 모두 벌어졌던 사건이다.  미국에서 벌어진 은행털이 사건은 영화 <내일을 향해 쏴라>를 통해 세간에 잘 알려지게 되었지만,  '티플리스 은행강도 사건'은 아는 사람이 별로 없다.  차차 시간이 지나면서 이 은행강도 사건의 전모가 밝혀지면서 세상은 또 한번 경악하게 된다.  이 사건을 제대로 수사하고 범인들의 책임을 제대로 물었더라면  인류의 현대사는 완전히 달라졌을 것이다.

 

  두명의 주동자와 약 스므명의 행동대원들이 1907년 6월 26일 이곳 예레반스크 광장(현 평화광장)에 집결했다.

  '러시아 제국 은행 티플리스 지점'에서 돈을 실은 마차가 거리로 나왔다. 무장 경호원과 경찰이 철통 같이 보안을 했다.  그리 멀지않은 장미 광장 인근의 우체국으로 돈을 이송하는 중이었다.  이 돈은 모두 러시아 제국(황제)의 재산이었다.  강도들은 바로 이 막대한 자금을 노린것이다.

  인파가 넘치는  루스타벨리 대로에 접어들었을 때 수류탄이 투척되고 총알이 알아들기 시작했다.  마차를 향해 폭탄이 연이어 폭발했다.  삽시간에 광장 일대와 루스타벨리 대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전에  준배해 대기하던 마차가 부서진 마차로 다가갔고  범인들은 돈자루를 꺼내서 옮겨 실었다.  돈을 옮겨실은 마차는 주저 없이 대로를 향해 달려 나갔다.  그러자 이내 저만치서 이 사태를 보고받은 우체국 주재의 경호대와 군인과 경찰이 달려오면서 이들을 가로막았다.

  하지만 이런 상황을 예견하고 있던 범인들 중 하나가 이미 기병대 장교의 복장으로 마차를 몰고 내달리며 외쳤다.

  '다행이 돈은 모두 안전하다.  이대로 우체국 금고로 곧장 가야만 한다.  그러니 당신들은 모두 서둘러  광장으로 달려가 범인들을 모두 체포하라.'고 외쳤다.

  경찰관 군인들은 허겁지겁 길을 열어주고 광장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범인들은 유유히 마차를 몰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실로 상상을 초월하는 전대미문의 용의주도하고 대범한 강도행각이었다.

  삽시간에 이 소식은 코카서스 지역을 벗어나 온 유럽으로 퍼져나갔다.  유럽의 모든 은행들이 이들을 잡기 위해 협조를 서슴치 않았다.

  러시아 제국의 모든 경찰과 군대가 이들 강도를 잡기위해 거미줄처럼 철통 같은 경비방을 구축했다.

  이날 탈취해 단 돈의 액수는 무려 31만 루불에 달했다.  오늘날의 금액으로 환전 한다면 약 400만 달러쯤 된다고 보겠다.

  러시아 제국의 정보부와 밀정들이 온 유럽에 퍼져서 강도들을 찾아내기에 혈안이 되었다.

  그러자 이에 불안을 느낀  행동대원중 하나가 그만 러시아 밀정에게 밀고를 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주모자 중의 한명인 카모(Kamo, 1882~1922)가 베를린에서 체포되었다.  그는 곧 러시아 모스코바로 이송되었다.  조사와 추궁과 고문이 이어지자 마침내 그는 입을 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가 늘어놓은 이야기는 또 한번 세상을 경악시키기에 충분했다.

  카모 일당은 일련번호가 매겨져 추적당하기쉬운 500루블짜리 고액권은 이미 전 유럽의 은행들이 협조를 하고 있기 때문에 사용이 어렵다고 생각하고 모두 소각해 버렸다.  남은 돈은  소액권으로 9만 1천루불 뿐이라고 실토했다.  그리고 그 돈은 현재 핀란드에 숨어있는 공범에게 보관되어 있다고 자백했다.  카모는 이 돈으로 무기를 구입하기 위하여 유럽의 이곳저곳으로 무기밀매상들을 찾아다니던 중에 체포된 것이다.

  더하여 이번 강도 사건에 실제 행동대장으로 참여한 주동자는 두명이었으나,  실제로는 공모 주동자 네명을 더 합쳐서 모두 여섯명이 사전에 철저하게 모의하여 사건을 진행하였음잉 드러났다. 

  그들 여섯명은 모두 '볼세비키 혁명 전위대'였다.  나머지 스므명은 이들에게 충성을 서약한 당원이자 동지들이었다.

  그들은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이었으며,  은행강도를 통해 자금을 마련한 뒤,  무기를 대량으로 구입하여 무장 봉기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러시아는 물론 온 유럽이 들끓기 시작했다.  러시아의 곳곳에서 볼세비키 유혈혁명 소식을 빈번하게 접해오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재판에 회부된 카모는 정신병자로 위장하여 정신병동으로 이감된 직후에 구사일생으로 탈옥에 성공했다.

  러시아 제국은  카모를 비롯해 나머지 다섯 명을 거액을 걸고 온 유럽에 지명 수배했다.

 

 

 

 

 

 

 

 

 

 

 

 

 

 

 

 

 

 

 

 

 

 

 

 

 

 

 

 

 

 

 

 

 

 

 

 

 

 

 

 

 

 

 

 

 

 

 

 

 

 

 

 

 

 

 

 

 

  은행을 털었던 행동대 대장 이름이 바로  '요세프 스탈린(Joseph Stalin,1879~1953)이었으며,  핀란드에서 자금을 관리하고 있던 공범의 이름이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Vladimir Ilyich Lenin,1870~1924)' 이었다.  그 외에  리트비노프(Litvinov,1876~1951), 크라신(Krasin,1870~1926)과  마지막으로 보그다노프(Bogdanov,1873~1928)  이렇게 여섯명이었다.

  모두가 하나같이 역사에 커다랗게 기록되어 있는 '러시아 혁명'의  주역들이었다.

  그 날.......  은행강도 사건이 실패로 돌아갔거나  이들이 모두 현장에서 체포되었다면 20세기 역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트빌리시의 젖줄인 므츠바리강이 화려한 조명아래 유유히 흘러가고 있다.

  나리칼라 성채도, 메테히 성당도, 시오니 성당과 사메바 성당도,  그리고 평화의 다리도 모두 므츠바리 강물위에서 넘실거리고 있다.

  '동유럽의 작은 파리' 트빌리시는 여전히 아름답고 낭만이 넘쳐 흐른다.

  올드타운을 순회하고 카페에서 가볍게 저녁을 해결하고 슈퍼에 들려서 숙소인 유령호텔로 돌아온다.

  여행자 거리 카페 골목 노천에서 연세 지긋하신 어른께서 곱디 고운 선율로 피아노 연주를 하고 계신다.  어느 시월의 마지막 밤에 낯선 골목에서 창문 틈새로 흘러나오는  '이용'의 노래를 듣는 기분이 든다.  잠시 멈춰 서서 그 선율에 취해본다.

  이곳은 트빌리시다.

  그리고........  트빌리시 여행은 내일 아침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커튼을 걷으면 수은등을 닮은 주황빛  가로등 조명이 그대로 실내로 쏟아져 들어온다.

  그리 멀지 않은 여행자 거리에서 사람들이 큰소리로 떠들때마다  간간히 새소리처럼 들려온다.

  열어 놓았던 고딕식 육중한 창문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 다가가보니 툭 툭 툭 비가 시작되고 있다.

  시간이 지나자 비는 소나기로 변했다.

  새벽녁에는 천둥소리와 함께 벼락이 치면서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그렇게........  조지아에 찾아든 첫날 밤에 하늘은 무심하게도 밤새 엄청난 폭우를 쏟아 내렸다.

  조지아에서 맞는 첫 아침......... 여전히 비가 내린다.

  헐.

  우.이.C..............

 

 

 

 

 

 

 

 

 

                                      ----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