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빌리시에서 1번 국도를 타고 북쪽으로 약 15km를 가면 두물머리가 나온다.
터키 카스(Kas) 지역에서 발원하는 므츠바리 강(Mtkvari)과 코카서스 산맥의 빙하가 녹아 흘러내린 아라그비 강(Aragvi)이 합류하는 지역에 고대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의 첫 도읍지였던 므츠헤타(Mtskheta)가 있다. 5세기 경 고르가살리 왕이 수도를 트빌리시로 옮겨가기 이전까지 이베리아 왕국의 중심지였던 곳이다.
므츠헤타에는 조지아의 기독교를 상징하는 두개의 성당이 자리잡고 있다.
즈바리 수도원과 스베티츠호밸리 성당이다.
그리고 이 유서깊은 두개의 성당은 모두 성 니노(St. Nino)와 관계가 있다.
조지아의 대부분의 기록물과 전하여오는 이야기에는 '포도나무 십자가를 가지고 카파토키아에서 온 처녀가 조지아(이베리아 왕국)를 기독교 국가로 이끌었다' 라고 전해 내려온다. 그 성스런 포도나무 십자가는 니노의 꿈에 나타난 성모 마리아가 그녀에게 직접 전해준 십자가라고 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두가지 쯤을 미리 집고 넘어가고자 한다.
먼저 처녀라는 표현이다. 기독교사에서 처녀는 '동정녀'를 나타내기도 하며 동시에 '나이어린 처자'를 말한다. 조지아에서 성 니노는 나이어린 처자이면서 동정녀라고 인식되고 또 가이드들도 그렇게 이야기를 전한다. 아니다. 동정녀는 맞겠지만 ......... 조지아에 첫발을 내디딘 니노는 분명 할머니였다.
니노를 제외하고 34명의 수녀들이 순교를 당했던 때가 서기 290년 이었다. 니노를 포함한 35명의 수녀들 나이가 스물에서 시작해 가야네가 서른 가까웠다고 보는게 일반적인 시각이다. 그럼 유일한 생존자 니노의 나이를 대충 20살로 치자. 아르메니아가 기독교 국가를 선언했을 때가 301년 이다. 니노의 나이 31살이 된다. 이베리아 왕 미리안 3세가 기독교 국가를 공인했을 때가 서기 337년 이니까, 대충 잡아도 성 니노의 나이가 67세가 된다.
그래서 나는 정감어리고 부르기 쉽게 그냥 '니노 할머니' 라고 부른다.
에치미아진에서 34명의 수녀들이 순교를 당한 뒤 10년이 지난 301년에 아르메니아가 인류 최초로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이 소식은 카파토키아에 있는 니노 수녀에게도 전해졌다.
니노는 한걸음에 바그하르사파트(에치미아진)으로 달려가고 싶었다. 모든것을 함께하고자 약속했던 35명의 수녀 중에서 그날 밤, 자신만이 홀로 다른 계시를 받고 구사일생으로 죽음에서 빠져나왔다는 사실이 지난 십년간 그녀를 몹시 괴롭혔던 때문이다. 자신이 계시를 잘못 이해했을 것이라고 자책을 했다. 혼자 살아남은것이 부끄러움이며 죄악이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바그하르사파트로 돌아가 동료들에게 용서를 구하고 싶었다. 그녀는 떠날 준비를 서둘렀다.
그날밤 꿈에 성모께서 나타나 니노 수녀에게 말씀하셨다.
'아직은 때가 아니니 기다려라. 네가 할일이 남았음이니라.'
또다시 시간이 흘러 서기 313년에 로마 제국의 황제 콘스탄티누스에 의해 로마가 두번째 기독교 국가가 되었다.
어둠속에 숨어있던 기독교인들이 저마다 앞다투어 세상 밖으로 나왔다.
니노는 이번에야말로 세상이 변해가고 있으니 바그하르사파트에 가야겠다고 신께 기도했으나 신의 대답은 '더 기다려라' 였다.
니노 수녀는 죄책감의 터널에서 30년 이상을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신이 내린 지옥 같은 형벌을 스스로 감내하며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서기 332년 어느날 성모께서 그녀의 꿈에 현신하시어 말씀하셨다.
`니노야. 이베리아(조지아)로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여라. 그리하면 모든 사람이 장차 주님 앞에서 커다란 축복을 받을 것이다. 내가 항상 너의 곁에서 눈에 보이거나 보이지 않는 모든 적들을 막아 줄 것이다. 내가 너에게 주는 이 십자가의 힘으로 그 땅에 굳건한 믿음으로 축복과 권능을 얻는 왕국을 세우실 것이다. 지나간 아픈 과거에 연연해 하지 말거라. 이제부턴 네가 할일이 있으니 앞만보고 나아가라.'( 이 대목에서 꿈에서 깨어보니 성모께서 내려주신 포도나무 십자가가 손에 쥐어 있었다는 이야기가 생겨난다)
니노 수녀는 카파토키아를 떠났다.
가르침대로 아르메니아의 바그하르사파트에 찾아가 가야네와 히립시메의 무덤을 찾지 않았다. 그녀는 무엇보다 말씀에 순종하고자 했다.
이베리아 왕국(조지아) 국경에 도착한 니노는 아크할칼라키라는 작은 마을에서부터 선교활동을 시작했다. 그녀의 헌신과 희생과 노력으로 점차 기독교 신앙이 조지아에 퍼지기 시작했다.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려서 그녀는 마침내 이베리아 왕국의 수도 므츠헤타가 한눈에 내려다 보이는 언덕에 도착했다. 조로아스터 교의 파간 사원이 있던 자리였다. 그녀는 그 무너져 내린 사원의 헛간에 짐을 풀었다. 그곳이 바로 '즈바리 수도원(Jvari)' 이다.
카파토키아를 떠나온 뒤로 처음으로 한곳에 마물 거처를 마련한 것이다.
니노 수녀는 카파토키아 자신의 동굴에서 처럼 나무로 십자가를 만들고자 했다. 하지만 이곳 즈바리 언덕은 사방으로 온통 포도나무밭 뿐이었다. '즈바리'라는 단어의 뜻이 바로 '포도나무' 이다. 결국 니노 수녀는 꾸불꾸불한 포도나무 줄기 중에서 그나마 곧은 가지를 자르고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끈을 대신해서 휘어진 십자가를 만들었다. 그녀는 자신의 처소 한 벽면에 그 포도나무 십자가를 걸어놓고 기도했다. 이것이 바로 조지아의 절대 보물 '니노의 십자가'로 즈바리 수도원에 보관되었다가, 1차 2차 세계대전을 격으면서 수난을 당해, 아르메니아로 소련으로 등 여기저기로 돌아다니다가 현재는 트빌리시의 시오니 성당에 보관되고 있다. 실물은 특별한 날에만 전시된다. 워낙 염험하기로 소문이 나고 수많은 기적을 행한 성물이어서 수많은 신자와 여행자들이 찾아온다.
나는 '니노 십자가의 진실'에 있어서 여기 후자를 믿는다.
니노는 이곳에 거처를 두고 언덕아래 강 건너편의 왕국이 있는 므츠헤타와 인근으로 선교활동을 펼쳐나갔다.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기 시작하고 있었다.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의 왕 미리안 3세에게는 아름다운 왕비 나나가 있었다.
그런데 그만 이 젊고 아름다운 왕비가 원인모를 중병에 걸린 것이다. 온 나라에 용하다는 사람들을 모두 불러 치료케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했다. 왕비를 모시던 하녀 하나가 저자거리에서 니노의 소식을 전해 들었다. 하녀는 곧바로 왕비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왕비는 곧 니노에게 사람을 보내 도움을 청했다.
궁으로 들어간 니노가 여러날 동인 지극정성으로 왕비를 돌보며 신에게 기도를 올렸다. 그러자 기적같이 왕비의 병이 나았다.
니노는 곧바로 즈바리로 돌아갔다. 이 기적을 직접 목격한 유대인 성직자 아비아달과 그의 딸 사도니아를 비롯한 여왕을 모시던 여러명의 사람들이 니노를 찾아와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리고 이어서 왕비 나나가 스스로 기독교인이 되었다.
당시 이베리아는 티그리스강 상류에서 생활하던 유대인들의 원시신앙이었던 아르마지와 자덴을 숭배하고 있었다.
왕비와 왕비를 모시는 하인들의 개종 소식을 전해듣게된 미리안 3세는 분노했다.
니노의 왕궁 출입을 차단했고 기독교를 버리지 않으면 이혼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분노를 삭이려고 미리안 3세는 군사들과 사냥터로 향했다. 사냥 도중에 홀로 떨어지게 되었는데 삽시간에 사방에 어두운 장막이 내려 감싸더니 타고있던 말이 놀라 마구 날뛰기 시작했다. 그리곤 그만 나뭇가지가 눈을 스치면서 실명을 하고 말았다. 눈은 말짱한데 아무것도 보이지를 않았다.
왕은 몸져 누웠고 병세는 점점 악화만 되어 갔다. 보다 못한 나나 왕비가 니노를 찾아갔다. 왕을 구해달라고 사정했다.
'하나님의 자비와 사랑으로 왕의 병을 치료할 수는 있으나, 왕께서 그동안 기독교를 몰아세우고 복음 활동을 규제하는 등 옳지 못한 일을 많이 해왔으므로 제가 성으로 찾아가 치료해 드릴수는 없겠습니다. 왕께서 병에서 벗어나고 싶으시다면 여기 이 십자가 까지 직접 오셔야 겠다고 전해주십시요.' 라고 대답했다. 니노는 끝내 버텼다. 그게 하느님의 뜻이라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내 깊어지는 병환에서 헤어나지 못한 왕이 왕비와 함께 마차를 타고 니노를 찾아왔다.
니노는 포도나무 십자가를 왕의 가슴에 얹어놓고 므츠바리강 상류에서 떠온 맑은 물로 왕의 얼굴을 씻기고 다친 눈에 붕대를 풀고 성수를 부었다. 신에게 자비와 사랑을 베풀어 주십사 기도를 올렸다.
'왕비에게 축복을 내리신 하나님이시라면 이제 저에게도 이 어둠에서 벗어나 신께서 허락하시는 밝은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하여 주소서. 그리스도를 섬기기 위해서라면 다른 모든 신들을 버릴 것입니다. 그것은 당신만이 유일하신 분이신것을 이제 제가 알았기 때문입니다.' 라고 미리엄 3세가 왕비의 하녀에게서 그동안 전해들은 복음에 기초해서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롤 올렸다.
그러자 그의 눈을 가로막고 있던 어둠이 한 순간에 모두 사라졌다.
정중하고 성대하게 의례절차를 갖춘 후에 미리안 3세는 조지아의 왕으로서는 처음으로 니노에게서 세례를 받았다. 서기 334년 이었다.
왕은 곧바로 비잔틴의 콘스탄티누스 대제에게 자신이 기독교인으로 세례를 받았음을 알리고 이베리아 왕국(조지아)의 기독교를 위해서 주교를 비롯한 사제들과 성경을 비롯한 복음을 공부할 자료들을 보내달라 부탁했다. 콘스탄티누스 대제는 대주교와 사제들을 파견함과 동시에 성전 건축을 요청했다.
므츠헤타의 스베티츠호밸리 성당(Svetitskhoveli)의 탄생이다.
하지만 지금의 잿빛 라임스톤으로 지어진 성당은 처음 지어진 성당(오리지널)이 아니다. 본래의 성당은 티무르의 침공 당시 완전하게 소멸되었다. 그 후 같은 자리에 여러 시대에 걸쳐 증축 복원되어서 현재에 이르게 된 것이다. 본래의 성당은 목조건물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미리안 3세는 '자신처럼 죄 많은 사람이 떳떳하게 번듯한 성당에 다닐 수 없다'고 하여 작고 소박한 성당을 지었다. 작은 목조 건물이었다.
당시 왕궁의 울타리 안인 현재의 자리엔 아주아주 커다란 삼나무가 한 구루 자라고 있었다 전한다. 이 나무에도 성르러운 전설이 서려 있었다.
골고다 언덕에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혀 죽음을 맞이하였을 때, 마지막까지 걸치고 있던 붉은 옷(성의)을 백부장에게 금전을 지불하고 사들인 이베리아 사람이 있었다. 그가 옷을 가지고 고향인 므츠헤타로 돌아와 누이에게 보여주었는데, 누이가 그 옷을 만지는 순간 그만 절명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죽은 누이의 손이 옷을 어찌나 꽉잡고 있었는지 도무지 빼낼 수가 없었다. 하여 그사람은 옷(성의)를 누이의 시신과 함께 묻었다. 그리고 그 무덤 위로 한구루 나무가 자라기 시작하였는데 바로 미리안 3세 앞에 서있는 삼나무였다.
왕은 그 삼나무를 잘라 일곱개의 기둥을 만들어 성당의 골격으로 사용하려고 하였는데........ 여섯개는 모두 제자리에 자리를 잡았는데, 일곱번째 나무가 하늘로 솟아 올라서는 내려올 생각을 안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매달리고 온갖 방법을 다 써보아도 떠 있는 기둥은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왕은 사람을 보내 니노 수녀를 찾았다. 니노 수녀가 와서 밤새 기도를 올리고 나서야 떠있던 기둥이 내려와 자리를 잡았는데....... 정확하게 예수께서 입었던 성의가 묻힌 자리였다.(빅터 마추어가 주연한 영화 데미트리아스에 바로 이 성의가 등장한다)
스베티츠밸리는 '살아 있는 기둥' '생명을 주는 기둥' 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아무것도 전해져내려오지 않고 있고, 현재의 성당은 11세기에 재건축된 것이다.
337년 미리안 3세는 조지아를 기독교 국가로 정식 선포한다.
한편, 스베티츠밸리 성당의 착공과 동시에 니노 할머니는 여기 므츠헤타를 떠나 시그나기로 갔다.
니노할머니는 현재의 보두베 교회 자리에 터를 잡고 인근으로 선교활동을 벌이다가 그곳에서 사망했다. 니노할머니의 묘는 보두베 교회에 안장되어 있다. 조지아의 기독교인들에게 절대 성지로 인식되어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온다.
아르메니아의 수호성인은 그레고리 일루미네이터다. 아르메니아를 기독교 국가로 이끈 사람이다.
조지아를 기독교 국가로 이끈 성 니노 할머니가 조지아의 수호 성인이냐? 아니다.
그럼 조지아의 수호성인은 누구?
---- 두물머리에 건설된 옛 수도 므츠헤타 전경.
---- 즈바리 수도원.
--- 생명을 주는 기둥.
---- 스베티츠밸리 성당.
--- 보두베 교회.
---- 니노 할머니 무덤.
보르조미 (Borjomi)
므츠헤타를 지나 북쪽으로 조금 더 올라가다보면 커다란 삼거리가 나타난다.
그대로 직진을 하면 나우누리. 구다우리. 그리고 카즈베기 산이 있는 게르게티를 지나서 러시아로 향하는 국경에 닿게 된다.
좌회전을 하게되면 고리를 지나고 쿠타이시를 지나 흑해 연안의 항구도시 바투미를 거쳐 터키의 트라브존으로 향하는 국도 1호선이다. 2년 전에 트라브존에서 야간 버슬를 이용해 11시간 걸리는 거리를 13시간에 걸쳐서 트빌리시로 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주변을 둘러보아도 모든것이 생소하고 낯설다. 같은 길을 지금 거꾸로 올라가고 있지만, 그때는 온통 칠흑같은 어둠속에서 버스만 혼자 깨어서 달렸던 때문이다.
조지아의 외곽 국도는 한산한 편이다.
지나치는 농촌의 풍경도 평화롭고 한산해 보인다. 그네들의 속사정까지는 아직 모르지만 말이다. 며칠전의 아르메니아랑은 비교할 수 없는 풍경이다.
오늘 버스 투어의 첫 목적지는 보르조미 였다.
조지아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천연 탄산수의 고장 '보르조미'에 마침내 버스가 닿았다.
조지아인 가이드는 내가 영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다. 영어를 아주 잘하는 그로서는 나와 몇마디 이야기를 나눈 끝에 나의 회화실력이 그리 썩 훌륭한 편이 아니라서 혹시나 내가 자기와 소통에 장애가 생길까봐 걱정이 되는 모양이다. 오늘 함께하는 여행자는 총 열여섯 명이었는데 절반은 러시아 사람들이고 절반은 독일 스웨덴 호주 미국 등 모두 영어권 사람들이고 동양인이며 영어권이 아니 사람은 달랑 나 하나뿐이었다. 버스에서 내리면서도 나에게 다가와 특별히 보르조미에서 유의할 사항과 집결 장소와 머무는 시간을 쉽게 재차 설명을 해준다. 고마운 배려였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한국에선 어려서 영어를 배울 때 테스트(시험)를 위해 문법 위주로 교육을 받아서 말로 표현하는데 조금 어려움이 있어요. 하지만 당신이 하는 이야기의 대부분은 그대로 알아 들어요. 부족한 부분은 당신의 눈이나 표정을 통해서 십분 이해가 가능해요. 전문적인 용어만 아니라면 충분히 알아 들어요. 이해가 안되면 그때그때 질문을 할께요. 너무 걱정 말아요.' 나는 그를 안심시키기 위해 서툴지만 장황하게 설명을 늘어놓았다.
'아니였네요. 당신 영어도 훌륭해요. 괜한 걱정을 했네요. 러시아어와 영어로 가이드를 계속해 나갈테니 의문이 생기면 망설이지 말고 질문해 주세요. 이젠 당신 걱정을 안할테니까요.' 그가 환하게 웃었다. 우리는 손을 뻗어서 하이파이브를 했다.
보르조미 광천수가 처음 발견된것은 지금으로부터 약 1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광천수가 발원하는 7개의 커다란 암반 부근에서 고고학자들에 의해 토기를 비롯해 인간이 이 광천수를 이용했던 흔적을 찾아낸 것이다.
바쿠리아니 산봉우리를 뒤덮고 있는 빙하가 암반속으로 녹아 흘러내리다 여기 보르조미 깊은 골짜기에서 분출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자취를 감추었다. 사람이 집단 거주하는 도회지와는 너무도 멀리 험난한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위치한 까닭에 점차 사람의 발길이 끊어지면서 완전히 잊혀져갔다. 근 1천년의 세월동안 그 누구도 보르조미에 광천수가 솟아난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보르조미는 완전하게 사라졌다.
1829년 재정러시아는 오스만제국과 전쟁을 벌였다.
보르조미 협곡을 통해 오스만 군대를 추격하던 러시아군 헬레나 디어 연대가 이곳에 주둔하였을 때, 한 병사가 정찰도중 우연히 보르조미 우측의 깊은 산골짜기에서 광천수가 솟아나는 샘물을 발견하였다. 당시 심한 위장병에 시달리던 사령관 파벨 포포프가 그 광천수를 떠다가 마셨는데 며칠 지나지 않아 위장병이 완치되었다. 광천수의 효능을 직접 체험한 포포프는 광천수가 솟아나는 주변을 정리하게 하였고, 작은 오두막집과 목욕탕을 지었다. 포포프의 군대는 남쪽으로 진군하였고, 후임으로 이곳에 도착하는 러시아 군대가 차례로 이 광천수와 시설을 이용하면서 그 효과를 누리게 되었다.
1837년 군의관으로 따라 온 의사 아미로비가 효능을 지켜보다가 처음으로 물 성분을 분석하여 상트 페테부르크와 모스코바로 보냈다. 삽시간에 보르조미 광천수의 효능이 전 러시아에 파다하게 퍼져나갔다. 코카서스 전역을 관할하던 총독과 그의 딸들이 유전적 원인인 피부병과 위장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보르조미를 찾아왔고 완치되어 돌아간 소식은 이제는 러시아를 벗어나 온 유럽까지 퍼져나갔다.
1850년 보르조미에 첫 미네랄 워터 파크가 생겨났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군대를 위한 휴양시설의 성격이 짙었다. 곧 이어 병 공장이 지어졌고, 기차 철도가 놓여지면서 바야흐로 보르조미 광천수가 전 러시아 지역으로 뻗어나가기 시작했다.(1890) 황실과 귀족사회의 요청으로 궁전과 공원과 호텔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황실 가족과 귀족들은 물론 사회 각계의 저명인사들이 속속 찾아들었다. 안톤 체홉과 차이코프스키도 그들중 한 명이었고, 후대에는 스탈린이 이곳을 아주 즐겨 찾았다.
1990년대에는 '불법 복제 보르조미 광천수"(가짜 광천수) 문제로 유럽 전체가 떠들썩 한적도 있다.
보르조미 광천수는 현재에도 '조지아 총 수출의 10%)를 담당하고 있는 아주 소중한 조지아의 자산이다.
구소련(소비에트 연방) 시대엔 그 사람이 얼마나 지위가 높은지, 또는 연방 안에서 얼마나 출세했는지 가늠하는 척도를...........
그가 집에서 '보르조미 광천수'를 마시고 있는지, 어떤 용도로 얼마나 사용하는 지를 보고 판단했었다고 한다.
'코카서스의 진주'라 불리는 세계 3대 광천수 중 하나인 보르조미의 천연 탄산음료 (보르조미 광천수).
그래서 나도 한번 마셔 보았다.
헐.
로마. 몰타. 이스탄불의 대형 슈퍼에서도 쉽게 찾아볼 수 있는 보르조미 광천수. 이스탄불에서는 실제 사서 마셔 보았다.
글쎄올시다.
보르조미의 명성대로라면 이곳 또한 당연히 어마무시한 관광 휴양도시로 탈바꿈 되었어야만 할것이다.
그런데 전혀 아니다.
얼핏 내고향 충주 인근의 '수안보 온천' 크기만 하고 비슷한 풍경이라고 할까? 케이블카 빼면 별로 특별한 것이 없다.
물론 옛 러시아나 오스만 풍의 궁전과 귀족 별장등이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우리나라 온양온천이나 백암온천 등에 비교하자면 어이없을만치 규모도 형편없이 작고 시설이나 기타 주변 환경이 조금은 남루해 보인다.
'대한민국의 몹쓸 부동산 투기없자들이여 모두 보르조미로 떠나라. 돈벌이가 널려있다. 대한민국을 더럽히지 말고 모두 떠나라. 거긴 모두 거져야.'
'물장사만큼 이문이 좋은게 또 어디 있겠어?'
우플리스치케(Uplistsikhe)
조지아의 중심부에 위치한 '고리(Gori)'에서 동쪽으로 약 10km 떨어진 므츠바리 강 상류에 거대한 동굴도시가 있다.
기원 전 1.000년 겅인 청동기 시대에 아나톨리아 평원을 통해 유입된 이란과 카파토키아의 동굴문화가 이곳에 전파되어 처음 도시가 건설되었다.
우플리스치케는 이베리아(조지아) 지역에서 선사시대 이후로 가장 먼저 사람들이 모여살았던 첫 거주지역이었으며, 당시의 그들은 아나톨리아 평원에서 전해져 온 원시종교인 태양여신 '아르틀리'를 모시던 사원의 역활을 담당하던 장소였다.
서기 4세기 경 조지아에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부터 이곳을 중심으로 새로운 조지아의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로 발전하게 되었으며 이때부터 '주님의 요새'라는 의미를 가진 '우플리스치케(Uplistsikhe)'라 불리게 되었다.
8세기 경, 이슬람 문화로 대변되는 아랍세력(무슬림)이 조지아의 일부지역을 점령함으로써 트빌리시가 함락되자, 북쪽 산악지역으로 도망친 이베리아인들에 의해서 우플리스치케는 은둔처이자 기독교 문명의 중심지로 더욱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 동굴 도시가 더욱 확장되었다. 우플리스치케를 중심으로 마을이 형성되기 시작하고 약 20.000명의 사람이 거주하는 도시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아랍 세력이 물러가자 도시를 형성했던 사람들이 일순간에 모두 빠져나갔다. 텅빈 도시는 허물어져 갔고, 동굴 도시도 페허로 변해가기 시작했다.
13세기 경, 동방에서 몰려온 유목민족 몽골에 의해서 이베리아 왕국 대부분이 점령되어 파괴되기 시작했다. 또다시 사람들이 우플리스치케로 숨어 들어왔다. 하지만 몽골은 이전까지의 다른 민족과 달랐다. 그들은 험준한 산악지역에 건설하는 동굴문화에 이미 익숙한 사람들이었다. 이곳까지 쳐들어 온 몽골 군대는 끝내 숨겨 둔 동굴도시를 찾아 냈다. 처참한 살륙이 벌어졌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뿔뿔히 흩어져 산속으로 더 깊은 산속으로 도망쳤다.
몽골 군대는 동굴 도시를 회생이 불가능할 정도로 철저하게 파괴했다. 거주환경으로의 필수 요건들을 모두 파괴해 버렸다.
몽골군대가 물러갔으나 그 후로 동굴 도시에는 더 이상은 사람이 거주할 수 없게 되었으며 후대 사람들의 기억에서 조차 점차 잊혀지기 시작했다.
우플리스치케는 어디론가 사라졌다.
1920년 고리 지역을 거대한 지진이 강타했다.
그러면서 약 700년 동안 땅속에 숨어있던 거대한 지하 동굴 도시가 모습을 드러냈다. 우플리스치케를 감추고 있던 거대한 바위산의 상층부가 모두 허물어져 내렸던 것이다. 허물어진 바위덩이 사이로 3.000년 전의 동굴 도시가 불쑥 솟아나듯이 모습을 나타냈다.
세계 각지에서 고고학자들 몰려 들었고 점차 잊혀졌던 도시의 이름이 드러나자 이번엔 수많은 여행자들이 끊이지 않고 발길을 이어나갔다.
이것이 '우플리스치케', 곧 '하나님의 요새'라 불리는 곳이다.
커다란 바위산 하나를 통째로 파고 들어가 건설한 거대한 동굴도시는 그야말로 하나의 커다란 미스테리가 아닐 수 없다.
동굴 도시 대부분을 주거지역이 차지하고 있으며, '타마리스 다르바즈(Tamaris Darbaz)'라 이름지어진 대형 홀이 교회 예배당 역활을 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때론 주거자 대표들이 모여서 회의를 하던 장소였다. 제물을 바치던 희생의 제단이 있고, 빵을 굽던 장소와 죄수를 가두던 감옥과 별도의 식량이나 무기를 보관하던 지하 창고들이 상당 수 있었다. 로마의 원형극장과 비슷한 용도를 갖춘 건물도 있고, 이 모든 건물과 건물 사이로 물길을 만들어 생활용수가 항상 흘러들고 흘러 내려가게 만들었다. 외부의 적이 침공하여 포위당하였을 때를 대비하여 외부와 연결하는 지하 비밀통로도 만들었다. 이 통로는 므츠바리 강과 인접한 곳에 출구를 만들어 비상시 식수와 식량을 조달할 수 있도록 설계하였다. 그야말로 하나의 은폐 밀폐된 지하 요새였다고 할만하다. 와인을 만들던 시설이 여러군데 있었으나 주조된 와인은 모두 타마리스(예배당)와 붙어있는 거대한 와인 저장고에만 보관하게끔 되어있었다. 최고 성직자에게만 절대적 사용권한이 있었나보다. 와인이 그만큼 모든면에 있어서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리라. 술이 오남용 되면 사고가 생기니까.
이 모든 시설들은 터널과 계단을 이용해 모두 하나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
모든 시설이 동굴을 아래로 아래로 파들어가면서 건설되었으나 일부 건물은 삼각형 형태의 외부 건물에서나 볼 수 있는 지붕의 문양을 양각해서 만들어 놓았다. 익살스런 장난꾼처럼. 그런가 하면 거대한 홀은 돌을 다듬어 샇아올려서 기둥처럼 천장이자 상부를 떠 받치게 만들기도 하였다. 일부 건물의 천장과 벽면에는 특별한 목적을 가지고 무늬나 형상으로 마감을 한 흔적들이 남아있다.
이곳에서 발견된 수많은 중요 유물들은 현재 대부분 트빌리시의 국립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으며, 극히 일부의 유물이 입구이자 매표소 뒷편의 갤러리에 보관 전시되고 있었다.
호쾌한 가이드는 꽤나 장황하게 이야기를 늘어 놓고 있다.
차량이 주차장에 정차한 이후로도 한참이나 더 우플리스치케에 대하여 열심히 설명을 이어나갔다. 아마도 조지아인 입장에서도 이런 고대로부터 내려온 역사와 유적에 대해서 상당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느껴졌다. 제법 넘칠 정도의 충분한 시간이 여행자에게 주어졌다. 거기에다 거의 매일이다시피 다녀갔던 장소임에도 오늘 특별히 여행자들고 함께 동굴도시를 오르면서 자세한 설명은 그때 그때 보충해 주겠다고 까지 나왔다.
시간이 충분하고 모두 둘러보자면 가파른 언덕을 오르내려야 하기때문에 사전에 좀 충분히 쉬면서 매표소 안쪽의 휴계소에서 아예 식사를 하고 올라가는 것도 좋겠다고 한다.
몇몇 사람은 그길로 언덕길을 곧바로 올라갔고, 나는 간단하게 요기도 좀 하고 뒷편의 갤러리도 좀 들리고 나서 올라가기로 했다.
휴계소는 작은 레스토랑이라 해도 좋을만큼 여러가지 음식을 팔고있다. 갤러리는 깨진 항아리 파편들과 사진들로만 전시되어 매우 초라해 보였다.
이제 슬슬 '주님의 요새'를 산책하러 나서려는데.......... 여기 유적지를 배경으로 웨딩 촬영을 하고 있다.
지나치면서 축하 인사를 건넨다.
부케를 뒤로 던지는 것은 한국이나 조지아나 같은 풍습인것 같다. 여자들은 신부 뒤에 길게 늘어서고 남자들은 신랑 뒤로 길게 늘어선 다음 신부가 뒷쪽으로 부케를 던지는 시간이었다. 때를 놓칠세라 내가 잽싸게 신랑 줄의 맨 뒤에가서 앞사람 어깨를 잡고 섰다.
순간 좌중에서 폭소가 터져나왔고 부케 던지는 것도 웨딩촬영도 중단 되었다. 그야말로 한바탕 난리가 났다.
아가씨 한명이 나에게 다가와 어쩔줄을 몰라하면서 나를 떼어 놓았다. 여기 줄은 미혼인 총각과 처녀만 서야하는 것이란다.
헐.
몇년 전 까지만 해도 내 외모 정도면 대충 그런대로 그냥 먹어줬었는데.........이제는 안먹힌다. 세상에......... 영락없는 윤태리 할배다.
거듭 축하 인사를 건네며 물러났다. 모두가 환호성과 함께 손을 흔들어 준다. 여행은 이래서 항상 즐겁다.
몇 발짝 떼어놓았을까.
사람들이 모여서 호두나무를 털고 있다. 할머니 한분이 길다란 장대를 들고 털고 계신데 아무래도 힘에 겨워 보인다. 조지아 호두는 아주 유명하다.
허니 어쩌겠는가? 오지랍 너른 내가 나설밖에.......
장대를 넘겨 받고 열심히 털어댔다. 사방에 호두 떨어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어디선가 박수소리가 나더니 젊은 남자가 다가온다. 사내는 영어를 못하고 조지아어로 내게 열심히 말을 하는데....... 눈빛만 봐도 대충 이해가 간다.
가끔씩 일가 친척들이 이렇게 모여서 음식도 만들고 놀이도 하면서 즐거운 시간을 갖는단다. 오늘도 이렇게 모여서 여자들은 안에서 음식을 장만하고 아이들과 남자들이 모여 호두를 수확하는 중이란다. 조지아 호두는 품질도 좋고 맛이 아주 기가막히단다. 차를 내어 준다기에 여행사 투어중이기에 시간이 별로 없다고 하고 작별 인사를 나누었다. 사내가 내 손에 호두 다섯알을 쥐어 준다. 그의 아내가 다가오기에 사진을 찍어 주었다.
호두는 유적지를 돌아다니면서 하나씩 하나씩 모두 까먹었다. 무지무지 고소하고 맛있다. 호두를 깬 돌맹이는 3.000년된 유적으로....... ㅎㅎㅎ
모두가 모두가 더없이 친절하고 고마운 사람들........... 모두모두 건강하시고 행복하시기를...........
자. 이제 어디 슬슬 '주님의 요새'에 올라가볼까?
--- 파노라마 촬영 부작용. 머리없는 사람이 앞장서고....... 그림자가 아니라 몸체 없는 발들이 뒤따라 다닌다. 잘 보아야만....... ㅎㅎㅎ
우플리스치케를 뒤로하고 버스는 왔던 길을 되돌아 달려가기 시작한다.
다음 목적지인 '고리(Gori)'로 이동한다.
시간이 많이 지체된 까닭으로 가이드는 여행자들에게 고리에 들리자는 안건과 그냥 거르고 트빌리시로 돌아가자는 의견을 물어본다.
열 여섯명 중에 아홉명이 잠시라도 고리에 들려보기를 원했다. 차는 조지아의 시골길을 달려 고리로 향했다.
차창밖으로 조지아의 자연과 농촌 풍경이 스쳐 지나간다.
무척이나 아름답다. 두고두고 기억에 남을 풍경들이다.
아르메니아의 풍경과는 확연하게 무엇인가가 다르게 느껴진다. 우리나라에 비할 바는 아니겠으나, 조지아의 농촌은 그래도 풍요로움이 느껴진다.
다만 고리를 지나 트빌리시로 향하는 제대로 된 도로에 올라서기까지....... 조지아의 도로사정은 지극히 열악하다고 하겠다.
그래도 이곳이 조지아의 국도 1호선이다.
국도에서만 내려서면........ 장담할 수가 없다.
그냥........ 아름다운 풍경이나 느끼면서 지나가자.
10여분 남짓을 달리자 마침내 고리에 도착했다. 도로에 내려서서 시내로 삥 돌아 들어가는 시간이 제법 길게 느껴졌다.
고리는 소리에트 연방 서기장을 지낸 독재자 '스탈린'의 고향이다.
---- 조지아 소도시 여행은 다음에 이어서 고리에서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여행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트빌리시는 아찔한 유혹이다. (0) | 2018.11.12 |
---|---|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투명한 햇살과 푸르름이 가득한 조지아 소도시 여행 2 (0) | 2018.11.09 |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트빌리시에는 고즈넉한 낭만이 가득 흐른다. (0) | 2018.11.06 |
(알 럽 트래블 / 조지아) 그리움이 차면 조지아로 떠나자. (0) | 2018.11.01 |
(알 럽 트래블 / 아르메니아) 떠나자. 조지아의 트빌리시로....... (0) | 2018.10.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