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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터키) 오늘은 어제보다 더 이스탄불 걷기 좋은 날.

by 피안재 2018. 8. 19.

 

 

 

 

 

 

 

 

 

 

 

 

 

 

 

 

 

  사르케지 도심의 건물들 사이로 겨우 한웅쿰의 겨울 햇살만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다.

  잔뜩 찌프린 하늘은  호텔을 나서는 여행자의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기에 충분하다.  도심 골목의 이곳저곳을 유심히 둘러본다.

  첫 시선이 문제다.

  첫 느낌이 중요한 것이다.

  어느쪽을 먼저 바라보고  어떤 느낌을 받느냐에 따라서 오늘 하루가 달라질 수 있는 것이다.  간혹은  그 순간에 인생이 달라질 수도 있는 것이다.

  첫 시선이 귤하네 공원의 숲 위로 내려앉은 잔뜩 찌프린 하늘이 아니었기에 망정이지  하마터면 발걸음을 호텔로 다시 되돌려 버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골목 사이로 지나가는 파란 트램을 먼저 바라본것이 참으로 다행이었다.

  트램이 지나간 철길 위의 하늘에서 한줄기 햇쌀을 먼저 보았던것이 참으로 다행이 아닐 수 없다.

  골목 안쪽에서 제법 세차고 싸늘한 바람 한줄기가 불어와 열려진 옷깃 사이로 파고든다.

  이놈의  세찬 겨울바람이란 놈은  주로 걷기를 좋아하는 여행자에겐 영 성가시기가 그만인 녀석인데,  이 이른 아침에  찌프린 하늘을 보면서 축 처진 느낌의 여행자의 가슴에 어떤 상큼한 탄산음료 같은 마법을 부려서 가볍게 발걸음을 옮기게 만들어준다.

  '그래.  이만하면 된거야.  더 무엇을 바라겠어?  여기는 무엇이든 다 용서가 되는........  이스탄불이잖아.'

 

 

 

 

 

  보스포러스 해협을 사이에 두고  유럽의 가장 동쪽 끝이자  아시아의 가장 서쪽 끝이 만나는  교차점에  건설된 도시 이스탄불.

  나는 오늘  그 보스포러스 해를 건너서 아시아 지역으로 간다.

  서둘러 발걸음을 사르케지 전철역으로 옮긴다.

  여기 사르케지 전철역에는  흔히  '교외선(By Banliyo) 이라 부르는 전철 노선이 이스탄불의 남서쪽으로 마르마라해를 따라 운행하는 노선이 있다.  예니카프 항구나,  해산물 식당들로 유명한 쿰카프,  마르마라해와 인접한 테오도시우스 성채 유적으로 유명한 예디큘레 지역으로 이어진다.  특별히 이 지역으로 여행하는 여행자가 많지 않은 노선이기에  현지인들만 주로 이용할 뿐,  많이 알려지지도 않았고  늘상 거의 한산한 그런 전철 노선이다.

  그러던 이 노선이  해저로 보스포러스해협을 건너  아시아 지역의  위스큐다르까지  연결이 되면서 새로운 변화와 활기를 되찾을 기회를 맞았다.

  수심 110m의 해저터널을 통해  전철이 이스탄불의 유럽지역과 아시아지역을  2013년 부터 연결하여 주고 있다.  하여 '마르마라이 노선'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갖게 되었다.

  이스탄불은 인구밀도가 상당히 높은 복잡한 도시이다.  그러다보니 어디서나 교통체증이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특히  보스포러스대교나 술탄마호멧 대교를 통해 유럽과 아시아지역을 오고가도록 연결하는 교통망은 언제나 지옥이었다.   이를 대신하는 것이 교통페리(시내버스 같은 배)가  상당부분을 커버해 오고 있었다.  그러던 중에  마르마라이 노선  지하철이 개통된 것이다.   그런데 의외의 사태가 벌어졌다.  이스탄불의 태생적인 지옥같은 교통난 문제를 마르마라이 노선이 어느정도 해소를 해줄것이라 크게 기대를 모았는데,  개통하고 나서보니 벌써 몇년이 지나도록  교통난은 그대로이고,   마르마라이 노선은 오늘도 한가한 편이다.  버스를 타면  두개의 대교에서 마냥 서서 기다리기가 일쑤요,  페리는 시간은 절약되나  언제나 북새통을 이루고 혼잡 스럽다.  그런것에 비교하면   지하철이 당연히  빠르고 안전할 터인데  이상하게 외면당하고 있다.

  가격 때문도 아니다.  이스탄불에서  버스나  페리나 지하철이나  편도 1회 승차권의 가격은 모두 똑 같으며  같은 교통카드를 함께 사용한다.

  그렇다면 도대체 왜 그럴까?

 

 

 

 

 

 

 

 

 

 

 

 

  혹시 러시아 모스코바의 지하철을  타보셨거나  어떤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아주 작은 목소리로 질문해 보고 싶다.  물론 문화 예술공간으로 멋지게 치장된 부분을 묻는것은 아니다.  건축공학상의 형태적인 것을 묻는 질문이다.

  아니면  (구)소련의 치하에 있었던 나라들,  예를 들자면 체코의 프라하.  헝가리 부다페스트. 조지아의 트빌리시.  아르메니아의 예레반. 폴란드의 바르샤바에 있는 지하철을 타보셨거나  들은 이야기가 있는지 거듭 여쭙고 싶다.  북한 평양의 지하철도 마찬가지다.

  이들 도시에 건설된 모든 지하철은 한가지의 독특한 공통점을  모두 똑같이 가지고 있다.

  이들은 모두  냉전시대의 산물로서,  단순히 지하철이라는 교통수단의 한 방편으로만 건설된것이 아니라  유사시에 방공호 내지는 지하 대피소(벙커)로서 건설된 것이다.  그렇다보니  적의 공격과 공습으로 부터 보호받기 위하여  무지무지 땅속 깊은곳에 건설되었다.  그만큼 접근이 매우 어려운 공통점이 있다.

  여기 이스탄불의  마르마라이 노선의 지하철에서도  (구)소련과 동유럽의 지하철 분위기가 짙게 풍겨나온다.  최근에 건설되었으면서도 말이다.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우선은  보스포러스라는 바닷속을 관통해야 하다보니  자연 깊어질 수 밖에 없었음이요.

  다음은  이스탄불 전체가  인류 역사의 거대한 보물창고라는 점 때문이다.  페니키아와 동방의 문화 유적위에  그리이스의 문명이 들었고,  로마는 이들의 상당부분을 그대로 땅속에 파뭍어 버리고 그 위에 새로운 로마를 건설했다.  로마문명 위에  비잔틴이 새로 건설되었고,  그 위에 다시 오스만(이슬람 문명)이 건설되었다.  그러다 보니 이스탄불의 어느 지역이든  땅속으로 파고 들어가다 보면 무슨 유적이던 유물이 나온다.  그러한 이유로 이스탄불에서의 개발은 아주 까다롭고 지극히 제한적이다. 

  지하철 건설로 표면에  가까운 토지를 파헤쳐서  유적을 파괴할 수가 없었다.  하여 이스탄불의 아주 먼 외곽지역에서 부터  애시당초 아예 아주 깊이 땅굴을 파는 식으로  지하철을 건설하게 된 이유이다.

  교통티켓을 구입하고 안으로 들어간다.

  물론 에스컬레이터는 설치되어 있다.  하지만 인파가 몰리는 지하철이나 공항의 에스컬레이터를 상상해 보자.

  지하 1층을 내려가면  삥삥 돌듯이  긴 복도를 지나  다시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그리고 또 다시 같은 움직임을 반복해서  지하 3층으로 내려간다.  이거 아무것도 아닌게 아니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한층을 내려간다........  맘속에......' 혹여 이 깊은 지하에서 무슨일이라도 생긴다면  인간이 생존할 확률은 거의 0 % 일거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암튼 지하까지 내려왔고....... 한참을 기다려 마침내 전차가 들어왔다.

  한산하다.

  문이 닫히고 열차가 출발하자 마자  퍼뜩 떠오르는 생각......... '바닷속이구나.........  신이시여...........'

   한참을 지나서야 마침내  위스큐다르에 닿는다. 

  여전히 깊은 땅속 지하이긴하지만 그래도 그 시퍼런 바닷속에서는 어떻게든 빠져나왔다는 알수없는  안도감이 저절로 생겨난다.   그리고 또다시 시작되는 출구로 향하는 길은  사르케지만큼은 아니지만 여기에서도 여전히 한참을  걸어올라서야 마침내 하늘이 보인다.  이곳의 종착역은 다음역인 카드쿄이역이다.

  참으로 다행인 것이 있다.

  내가 사르케지로 다시 돌아갈 계획이었다면 다시 여기 마라마라이 지하철을 타야하겠지만,  나는 다행이도  베식타스로 가는  페리를 탈 계획이기 때문이다.

  마르마라이 지하철은 오늘도 여전히 한산하다.

  그래도 다음에 이스탄불 오게되면 나는 기꺼이  마르마라이 지하철을 타고  보스포러스 해협을 건너 아시아지역으로 또 갈것이다.

 

 

 

 

 

 

 

 

 

 

 

 

 

 

 

 

 

 

 

 

             

 

 

 

 

 

 

 

 

 

 

 

  위스큐다르(Uskudar).

  보스포러스 해협의 아시아 지역에 있는 가장 번화한 주거지역이다.

  하지만 무엇인가  같은 이스탄불이면서도  위스큐다르 지역은  바다 건너 유럽지역에 비해 조금은 서민적이면서도 아늑한 느낌이 저절로 든다.  딱히 어떤것이라 꼬집어 이야기 할 수는 없어도  무엇인가가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살며시 다가온다.

  그리고 단박에 알아챌 수 있는 느낌 하나,  유독 자미(이슬람 사원)가  많이 눈에 띈다.  이스탄불의 어느지역에서도 이처럼 빼곡하다고  느껴질 만큼 사방으로  자미가  들어선 곳은 보질 못했다.

  위스큐다르는  이스탄불에 사는  보통의 서민들이 노력하며 저마다의 삶을 꾸려가는  서민적 향취가 진하게 풍겨나는 곳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여기에는 마치 유럽은 부유하고 동양은 가난하다는  그런 선입견을 모두 배재한 나만의 생각이다.

 

  위스큐다르 항구 앞으로  전망이 좋고 분위기가 상큼한  카페나 레스토랑이 즐비하다.

  이곳 저곳을 기웃거리다가 사람이 그리 붐비지 않는  3층 카페의 창가 자리에 앉아서  카푸치노를 한 잔 주문했다.

  바닷가 바람이 매서워지고 쌀쌀해질수록  따뜻하고 그윽한 커피의 향과 맛은 더해져만 간다.

  갈매기 한마리가 날아와 창가 틀에 앉아서는  당체 떠날 줄을 모른다.

  사람에 대한 두렴움도 아예 없어 보인다.  어찌나 가까이서 나를 빤히 쳐다보는지........  '내가 널 바라보는 거니  아님 너가 지금 나를 감시하는거니?'

  배낭을 뒤져보아도  그 흔하던 비스켓 하나 없다. '미안. 오늘따라 너에게  줄게 없네?'

  충분히 휴식을 즐겼다고 생각된 다음 카페를 나왔다.

  별다른 생각이나 계획도 없다.

  그냥 위스큐다르에 와보고 싶어서 찾아온 길이다.  어제처럼 선창가  해변을 걸어서  인근의 젊은이들이 사랑하는  카드쿄이 지역까지 걸어다녀올 생각이다.

  도심 안쪽의 언덕을 걸어 올라  '부육 참르자 공원'을 비롯해 이 지역의 관광지를 돌아보고도 싶지만,  오늘은 선창가 길을 따라 산책하는 것으로 만족을 해야만 할것 같다.  사실 이번여행에서  이스탄불에 머물 시간을 많이 할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아쉬움은 늘 그래왔듯이  또 다음으로 미루는 수밖에 없다.

  언젠가.......... 아마도 그리 머지않아 또 찾아올테니까.........

  선창가로 가다말고 또 발걸음이 저절로 멈추어 선다.

  구수한 빵 냄새가 인근에 자욱하다.  터키의 빵집들은 어떻게  여행자의 발걸음을 오도가도 못하게 붙잡아 버리는 마법같은 재주를 가지고 있을까?

  냄새도 냄새지만.........  어쩌면 저렇게 침을 질질 흘려가며 환장하도록  먹고 싶게 진열해 놓을수가 있단 말인가?  터키의 빵집 진열대와  디저트 진열대는  그냥 지나치기가 매우 어렵다.  미치도록 식욕을 끊임없이 자극해온다.  거기다가  때론 이것들이 음식이 아니라  먹거리로 창조한  황홀한 예술작품이라는 생각에 까지  빠져들게 만든다.  이스탄불에서의  빵과  디저트의 유혹은  정말로 잔혹하다.  그래서 정신을 바짝 차려야만 한다.  이 유혹에 빠져서 헤어나오지 못하면........  그냥 이스탄불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을테니까.  단단히 굳게 마음 먹고 이 유혹들을 견뎌야만 한다.

  개뿔.......  견디긴 뭘 견뎌.  한참을 망설인 끝에  통깨다 듬뿍 뿌려진  시미즈를 닮은 빵 두개를 널름 사고말았다. 

  개뿔은 무슨.........  그럴수도 있는거지.

 

 

 

 

 

 

 

 

 

 

 

 

 

 

 

 

 

 

 

 

 

 

 

 

 

 

 

 

 

 

 

 

 

 

 

 

 

 

 

 

 

 

 

 

 

 

 

 

  보스포러스해를 바라보면서 선창가를 거닐고 있는데  저 멀리 탁심 상공위로  여객기 하나가 날아가고 있다.  아타튀르크 공항에 착륙을 시도하고 있는 모습인다.

  '저거 저러다 혹시.........  갈라타 타워에..........'

  9.11 테러가 내게도 깊은 트라우마를 남겨놓았나 보다.

  이곳이 터키라서 그런가?

 

  보스포러스 해안가는 온통 어디나가 모두 낚시터이다.

  낚시는 터키인들에게  최고의 여가생활이자  생활의 일부인 것처럼 보이고 느껴진다.

  많은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또 아쉬운 작별 인사를 한다.

 

  1923년은  터키인들에게 커다란 자긍심을 안겨준  기념비적인 날이다.

  오스만 투르크의 군주제를 페지하고  '터키 공화국이 성립'된 바로 그 해이다.  '터키 독립의 영웅' 이자 '터키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케말 아타튀르크'가 주도하여 새로운 국가를 출범시킨 것을 기념하기 위햐여  이곳에 공원을 조성하고 기념탑을 세웠다.

  내가 이 공원을 지날즈음엔 이미  위스큐다르 항구에서 샀던  빵을 말끔하게 먹어치우고 난 후였다.  그런데 이곳에서 낚시를 하던 중에 짬을 내어  아침을 먹던 친구들을 만나 인사를 먼저 건넸다.  내가 한국에서 온 여행자라는 점에 크게 환대를 해준다.  아침을 먹었느냐는 질문에 시침을 뚝 떼고  미처 못했다고 했더니만..........  터키식 홍차에다  저들의 아침인 빵까지  빼앗아 먹게 되었다.  ㅎㅎㅎㅎㅎ   역시 맛있다.  뺏어먹으니 더더욱.........

  아쉽고 미안한 마음으로 작별 인사를 건넨다.  그들도 기꺼이 환하게 웃으며 인사를 건네온다.

  - 신께서 당신들과 터키 위에 언제나 함께 하시길........

  - 즐거운 여행 되고  꼭  터키에 다시 찾아주시길.........

 

  1453년은  오스만 투르크의 용맹하고 위대한 술탄 '정복자 메메트 2세(파티흐 술탄 마호멧 2세)'가 테오도시우스 성벽을 허물고 콘스탄티노플을 함락시켜서  비잔틴을 점령한 해이다.  아마도 그때부터 지금의  터키가 시작된 날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보스포로스해를 완전 장악하게 된  메메트는  이곳에  정복 기념으로 등대를 세우고,  보스포로스 해협을 통과하는 모든 배들을  통제하면서   관리소를 두어 통행세를 징수하게 하였다.  현재는 최첨단 방식의 등대가 설치되어  보스로로스 해협의 안전항해를  도와주고 있다.

 

 

 

 

  위스큐다르에서 카드쿄이에 이르는 선창가 방파제 길은  여행객 못지않게 현지인 데이트 하는 남녀들로 항상 붐빈다.

  좀 더 세세하게 표현을 하자면,  쉠시 파샤 자미에서  하렘 부두에 이르는 해안도로를 말한다.  아마도 이스탄불 전체에서도 손에 꼽히는 데이트 또는 산책하기 좋은 장소로 말이다.  나름 운치있는 카페들이 여기저기  늘어서 있고, 야외 테이블이 마련된 카페에서  이스탄불의 유럽쪽 해안을 바라보는 환상적인 풍경을 즐길 수 있다.

  그중에서도 특히 인상적인 곳은  (크즈 클렌시)가 바라보이는  해안가 도로 방파제 위로 그대로 좌식 소파를 내놓고 간이 찻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방파제에 그대로 방석을 깔고앉아서  차를 마시며 바다를 내다본다고나 할까?,  항시 여행객과 현지인 남녀들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는 풍경이 아주 이색적이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로맨틱한 저녁 풍경을 맞이하고 싶다면  기꺼이 발품을 팔아 이곳으로 찾아가 보시라고 권하고 싶다.  가끔씩 조심하지 않고 있다가는  우아하게 폼 잡고 차를 마시던 중에 방파제를 타고 넘어온 파도에 전신을 그대로 내맡기는 낭패아닌 낭패를 제대로 겪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 또한 이스탄불에서만 겪을 수 있는 추억이 아닐까 한다.  실제 나는 운좋게 파도를 피해다녔지만,  패셔너블한 차림으로 데이트 하다가 파도를 홀랑 뒤집어 쓰는 광경을 서너번이나 목격했다.  그날  바람이 엄청이나 거셌던 때문이다.

  또한 이곳에는 어린 꼬마에서 부터 아줌마,  그리고 할머니까지  꽃을 파는 사람이  여행객 숫자만큼이나 많다.  데이트하는 사람이다 싶으면  끝까지 달라붙어 거의 강매 수준으로 꽃을 사라고 강요한다.  꽃이래야 멋진 꽃다발이 아니라  그냥 한송이를 사라고 건네온다.  지나치다 싶을 땐 거의 삐끼 수준이다.

  그들에겐 그것이 또 하나의 삶의 방편일 수도 있겠다.  이해는 가지만.......  그다지 아름다운 풍경은 아니다.  가슴 한구석이 알싸해 온다.

  그날 나는 끝내 꽃을 한 송이도 사지 않았다.

  미얀마의 만달레이 재래시장에서는 꽃파는 할머니에게서 꽃을 한움쿰 선물 받은적이 있었다.

  로마를 산책하다가는  할아버지에게서 차와 이름모를 꽃을 한송이 선몰 받은적이 있었다.

  조지아 카즈베기 여행에서는  같은 여행객 여자분에게  자신이 선물 받은 꽃다발에서  한송이를 선물 받은 적이 있었다.

  그러다보니.......

  꽃을 좋아하면서도..........

  사나흘씩 머물게 된다면  숙소를 옮길때마다 꽃을 사다가 숙소를 아름답게 꾸며보겠다던 바램도 이제껏 실천에 옮겨본 적이 없다.  거 참.........

  다음 여행에서 꼭 꽃을 사야겠다.   꼭...........

 

 

  '크즈 클레시 (Kiz Kulesi)'

  위스큐다르와  카드쿄이의 중간쯤 되는 지역에,  갈라타 다리나  갈라타 타워가 제대로 멋지게 건너다 보이는 지점에   보스포러스 해협의 불쑥 투어나온 아주 작은 바위에  아주 멋진 탑을 세워 놓았다.  그 탑의 이름이  '그즈 클레시'이며  '처녀의 탑' 이라는  뜻이다.

  또한 '처녀의 탑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슬픈 전설이 서려있기도 하다.

  어떤 왕국에 아주 예쁜 공주가 있었는데  태어날 때 신탁이 내려지길  자라서 예쁜 아가씨가 되면 뱀에 물려 죽을것이라는 예언이 있었다.  공주는 자랄수록 정말로 예쁘고 매력적이어서 가히  눈이부실 지경이었다 한다.  하지만  이미 내려진 신탁을 너무도 두려워한 왕은   딸의 죽음을 차마 볼 수가 없어서 이곳 '크즈 클레시(처녀의 탑)에 작은 성을 쌓고  공주로 하여금 이곳을 절대 벗어날 수 없게 하였다.  어떻게든 운명을 피하게 하고 싶어서 였다.  공주가 18세의 아리따운 아가씨가 되던 생일날.........  왕은 공주의 생일은 축하해 주기 위해서  커다란 꽃바구니를 만들어서 보내주었는데........  그 꽃바구니 안에 뱀이 몰래 숨어 있었다.  그래서 결국.............

  탑은 비잔틴 시대에 처음 만들어졌으며,   사실은 이곳  보스포러스 해협을 오가는 배들에게 통행세를 징수하기 위하여   관리들이  거주하는 사무소로  처음 지어졌다.

  탑의 상층부에는 보스포러스 해를 두루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설치되어 있다.

  그리고 현재에는  상당히 고가의 저녁 셑트 메뉴가 판매되는 고급 레스토랑으로 사용되고 있다.

  '피어스 부르스넌' 이 주연했던  '007 영화' (한국 개봉 이름 '언 리미티이드')에 등장하는 멋진 명소로 더욱 인기를 얻었다.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에 있는 종합터미널  '하렘 오토가르'에 도착해서 간단하게 주점부리로 점심을 해결했다.

  가장 눈에 띄는 이름이 (파물칼레)이다.   이즈미르. 보드룸. 페티에.  산느우르파. 카파토키아. 반. 트라브존. 앙카라  등등   터키의 전지역으로 통하는 장거리 버스들이 드나드는 곳이다.  물론  유럽지역에 있는  '에센레르 오토가르'에 비해서는  많은 여행자들이 낯설어 하고  불편해 하는 터미널이다.  하지만 나처럼  한번만 다녀간다면   카드쿄이의 페리도 있고,  마르마라이 지하철이  유럽지역과 연결되어있고,  이곳으로 도착해서  탁심이나  술탄마호멧 지역이나  그 어떤 지역으로라도  이동하기에 별로 어려움이 없어 보인다.  단 경험을 해보지 않았으면 낯설고 어려운 것이 여행이기에........

  카라쿄이 페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그런데........   카바타쉬로 가는 페리가 이곳에서는 없단다.  속사정까지는 모르겠지만  페리 노선도에는 분명히 있었는데..........

  에미뇨뉴로 돌아가던가,  카라쿄이나  베식타스로 가야만 한다.  나는 꼭  카바타쉬에서  탁심으로 가려고 했는데  카바티쉬행 페리가 없다.

  건너가서 이동하던가,  여기서 위스큐다르로 이동해서 카바타쉬로 가던가 결정을 해야한다.

  여기서 조금만 걸어가면   꼭 가보고 싶었던  '하이다르파샤 역'이 있다.  사르케지 유럽횡단열차 역 만큼이나 유명한 곳이다.  멀리 이란의 수도 테헤란에서 부터 소아시아지역의 모든 기차 선로가 최종 종착지로 도착하는 중요한 지점이다.  특해 해안가 방파제 위에  6층 높이로 장엄하고도 웅장하게 우뚝 솟은 이 석조건물은  독일의 빌헬름 2세 황제가 터키방문을 기념하여 선물로 지어진 건물로 너무나 유명하다.  고색창연한 스테인 글라스와  세월의 향기가 그대로 묻어나는  나무 문으로 장식된 이 역사는   '지구상에 현존하는 기차역 중에서 멋지기로 당연히 첫손가락에 꼽히는 명소' 이다.  그래서 이번 나들이에 꼭 들려보려고 했었는데.........  카바타쉬로 가는 페리가 없다면,  오늘 나들이에 수정이 불가피해 진것이다.  카드쿄이 산책과  하이다르파사 역사 방문은  뒤로 미룰 수 밖에........  오후의 시간을 아껴서 꼭 가보고 싶은 곳들이 또 있었기 때문이다.  페리만 있었다면  어느정도 시간적 여유가 더 있었을텐데..........

  아쉬움 속에 다시 왔던 해변길을 되돌아 걸었다.

  다시 출발지였던 위스큐다르 페리 선착장에 도착했다.

  주머니에서  지하철타느라 사용하고 남은  일회용 승차권을 꺼내 들고 페리에 올랐다.  승차권은 버스나  지하철이나  페리나 공용으로 사용해서 참 편하다.

  아시아 지역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는 여행자를 배경으로  나도  떠나오는  이스탄불의 아시아직역을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음악을 들으며  보스포러스 다리를 바라보는 아리따운 여행자 아가씨의 뒷모습 너머로 나도 보스포러스해를 바라다 본다.

  이제 나는  페리를 타고 보스포러스 해를 건너서 베쉬타쉬를 거쳐서 탁심으로 간다.

  본의 아니게 한산한 탁심만을 그동안 다녀갔었는데.........  어디 제대로 한번  이스틱랄 거리를 즐겨보기로 하자.

 

 

 

 

 

 

 

 

                                                   (네이버에서 퍼옮)  하이다르파샤 역.  세계 최고의 아름다운 기차역.  이스탄불 카드쿄이 지역.

 

 

 

 

 

 

 

 

 

 

 

 

 

 

  카바타쉬 페리 선착장에 내려서  곧장 탁심 광장쪽으로 올라가지 않고  조금 윗쪽으로 우회해서 올라가보기로 했다. 

  베식타스(Besiktas) 지역을 들려보기 위함이었다.

  카바타쉬  페리 선착장과  베식타스 페리 선착장은 인근에 서로 나란히 있다.  그 중간에  바로 술탄들의 별장이었던 '돌마바흐체 궁전'이 자리하고 있으며,  내가 둘러보고 싶었던 베식타스 지역이 사실은  카바타쉬 선착장에서 더 가까운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기 때문에 나는 카바타쉬행을 선택했던 것이다.

  돌마바흐체 궁전 마당과 정문을  눈 앞에 두고 나는 과감히 발걸음을 왼쪽 언덕으로 옮긴다.  베식타스 마을로 가기 위함이다.

  가쁜 발걸음이 채 거의 5분도 걷지않았을 때에  아주 넓은 교차로가 나오고  커다란 광장과  거대하고 웅장한  스타디움이 나타난다.

  처음 방문이었지만  전혀 낯설지가 않다.

  나는 이미 이곳에 대해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보다폰 아레나 경기장.>

  터키 제일의 이동통신 업체가 운영하는  터키 프로 축구팀 '베식타스 축구팀'의 홈구장이다.

  갈라타 사라이,  그리고 페네르바흐체 들과 함께 터키 리그를 이끌고 있는  '터키 3대 명문 프로 축구팀'의 홈구장이다.

  한때 'FC 서울'을 지도했었고,  한국의 국가대표팀 감독설이 나올때 마다 빠지지않고 거론되는  (세놀 귀네슈) 감독이 현재 맡고있는 팀이다.  지난  2017~18  유럽 챔패언스 리그 예선에서 4승 2무의 놀라운 성적으로  16강에 올라 한껏 기대를 모았는데,  하필 16강 상대가..........  절대 강자 바이에른 뮌헨 이었다.  1차전  5 : 0,  2차잔 3 : 1 로 완패.  결국은 탈락하고 말았다.

  하지만 오늘은 뭐 축구팀을 응원하거나  축구 경기를 관람하려고 온 것이 아니었기에  그냥 게속해서 언덕길을 올라가 본다.  베식타스 마을을  구경해보고 싶어서 였다.  그리고 이 언덕을 모두 올라가면  '탁심 스퀘어'가 멀지 않고, 곧바로  이스틱랄 거리로 연결되기 때문이었다.

 

 

 

 

 

 

 

 

 

 

 

 

 

 

 

 

 

 

 

 

 

 

 

 

 

 

 

 

 

 

 

 

 

 

  바로 이곳이었다.  이 자리였다.

  2016년 12월 10일.  여기   '보다폰 아레나'를 홈구장으로 쓰고 있는  베식타스 FC와  라이벌  갈라타 사라이의 축구 경기가 있던 날이었다.

  축구경기가 끝나고  4만의 인파가 막 거리로 쏟아져 나왔을때,   자살폭탄 테러범이 차량을 몰고 그  넘쳐나는 인파속으로 돌진했다.  엄청난 폭발음과 함께 차량이 폭발했다.  현장은 말 그대로 아비규환이었다.  정확히 20분 뒤,  경찰과 군대가 출동하고  구급차가 출동하여 사고 현장을 수습하고 있는 도중에  두번째  폭탄 테러차량이 같은 사고 현장을 향해 들이 닥쳤다.  이상한 동향을 눈치 챈 경찰과 군인이 저지에 나서자 범인은  그대로 현장의 바리케이트를 들이받고 나서   경찰 차량에 충돌하면서 폭발했다.  그나마 사전에 눈치를 채고 저지에 나섰다가 순직한  경찰과 군인의 살신성인이 아니었다면   사고는 더욱 커질뻔 했다.  44명이 현장에서 즉사했고  149명이 부상당했다.

  그리고 20일 뒤  앞서 이야기 했던  위스큐다르 카페  총기 난입 테러가  2018년 1월 1일 새벽에 벌어졌던 것이다.

  현재 터키는  IS 테러단체와 전쟁을 선포하고 전쟁중인 나라이다.

  그 후로는 다행이 더 이상의 테러가 없었고,  터키인들의 일상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그 이전의 평화롭던 일상 그대로 이다.  하긴 예전 그대로의 일상이 아니면 어쩌겠는가?

  시내 투어중에 터키 경찰본부 건물을 지나다보니 정문 옆에 커다랗게 순직한 동료 경찰을 애도하는  커다란 표지판이 눈에 띄었다.

  숙연한 마음으로  잠시 고인들의 명복을 비는 시간을 가져보았다.

  나는 그들의 숭고한 헌신과 노력을 알고 믿기에  누구에게나 터키 여행을 권하고   어느 나라보다 안전한 나라라고 열변을 토하고 있다.

  재난의 위기를 느끼면서도 알량한 정치인들과 돈에 눈먼 기업가들의  거짓말과 그들의 편리한 셈법에 세뇌당하고 익숙해져서  자신도 모르게 재난이 그저 남의 일이라거나, 설사 안다해도  아무런 대책도 방비도 소용없는 식물인간으로 전락한  인간들이 하루하루를 그냥 일상처럼 보내고 마는 그런 나라보다는........

  잦은 재난에도  굴복하지 않고 더 낳은 미래를 향해 노력하고 헌신하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아주 조금 긴장과 두려움이 생활 가까이에 있는 나라가 오히려 더 안전하다고 믿는 사람이 바로 나 이기 때문이다.

 

  인구의 95%가 이슬람교도 이면서도,  약 2.5%으 기독교인에 대해서  배려와  나눔을 알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바로 터키인들이다.   세계 각지에서 벌어지는  테러를 종교적 이유에서 찾고 있지만,  대부분의  기독교와 이슬람의 분쟁에는  역사에 근거하여  그 중심에 이스라엘이 놓였을 때가 거의 전부이다.  거기에는 지구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이 거의 무조건  이스라엘에 대해서 우호적인 생각을  선입견 처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 교리를 따진다면  오히려  십자군 전쟁 때처럼,  가장 어울릴 수 없는 집단이  바로  기독교와 유대교가 아닐까 싶다.  상대의 종교관을 인정하게 되면  나의 종교관이 설 자리가 없어지는 관계.

  그 외의 분쟁은 다분히  이슬람 종교 안에서 종파간의 분쟁이 전쟁으로......  또는 테러로 확산되었다고 보아야 할것이다.

  그런면에서 보자면  때론 시아파 이슬람에게,  또는 이번 처럼  수니파 무장단체인  IS에게 무차별 공격을 받고 있는  터키로서는 어쩌면  억울할 지도 모르겠다.  내 소견으로는  터키인들이 가지고 있는  이슬람 신앙관이  현재의 세계에서는  그래도  가장 평화적이고 우호적이고 이상적이 아닌가 생각한다.

  적어도 터키인들이  생각하는 신앙관은  이란이나 사우디나 이라크나 요르단이나.......  여타의 이슬람국가의 신앙관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다.

  초기 무슬림의  기본 모습이라고 할까?

  기독교는 사랑을 앞세우고........  이스람은  평화를  앞세운다.  그게 바로 터키의 모습이다.

 

  물론  터키도 국제 사회에 아주 커다란 오점과 빚을 지고 있다.

  유럽 연합(EU) 가  출벌할때 부터  가입을 줄기차게 요청해왔다.  하지만 이 순간 터키는 EU 회원국이 아니다.

  만약 오늘에  '터키가 EU 회원국이었다면  팍스아메리카를 부르짖는 트럼프라 할 지라도  터키에 대해서 보복 관세를 물리거나 함부로 공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중국을 상대하느라  버거운 마당에,  터키를 빌미로 거대 유럽연합(EU)에 까지 무역 관세 전쟁을 벌이기에는.......  트럼프가 열명이라도 벅찼을 것이다.

  터키는 '아르메니아 학살'을 진정성 있게 국제사회에 인정하고 반성하고,  최선을 다해 배상에 노력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유럽연합에 가입할 수 없다.

  약 150만명(집계 주체에 따라 엄청난 숫자의 차이.  서방 언론은 200만명 학살 추정)의  아르메니아 국민을 무저항의 상태로 무참하게 학살했다.  100만명 이상의 난민이  종교가 다른 이슬람 국가  이란의 국경을 무작정 넘어갔다.  이란과 국제사회의 노력으로  지금도 이란 국경 칸토칸 지역에  약 2백만에 가까운 아르메니아 난민들이  고국으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영산(靈山) 아라라트 산을 포함하여  국토의 3/4을  터키가 점령 사용하고 있다.  현재 터키의 남동부  반을 중심으로 한 아나톨리아 평원의 상당부분이  20세기에  터키가 아르메니아로 부터 빼앗아 차지한 땅이다.

  이 순간에도 여전히  터키는 무자비한 학살을 전면 부인하고 있고,  영토의 반환 요구를 절대 불가로 일관하고 있다.(일본의 전후 처리와 비슷)

  아르메니아 학살로 국제사회로 부터 외면 당하고  완전 고립되어  고사할 시기에.......  한국에서 6.25가 벌어졌다.  터키의 지도부는 기회로 판단했다.

  국제 사회의 고립과 냉대로 부터 벗어날 수 있는 기회........  그들은 서둘러 군대를  한국에 파병했다.  유엔 참전국 대열에 선 것이다.

  한국과 터키는 피를 나눈 형제국이 되었다.  전투에 함께 참전한 양국의  하급 군인들은 실제로 피를 나눈 형제가 맞다.

  그러나 이 전쟁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국제사회의 흐름에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당시 터키의 정치인들과는 결코 형제가 될 수 없다.

  베트남과  아주 우호적으로 함께 동반 성장하고 있는  현재 시점에서......  월남  파병을 정치적 수단으로 이용한 당시의 정치인들과 다를 것이 없다.

  터키인들은  한국인에게 대단히 우호적이다.(2002년 월드컵 4강전이 이를 증명한다.)  한국인들도 터키인들을 형제국으로 반긴다.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하지만 바라기는...........  터키가 아르메니아 사태와 같은, 비록 과거사의 일이라 할 지라도  되짚을 것은 되짚고,  털어낼 것은 털어내고,  되돌려 줄것은 되돌려 주고,  국제 사회와  인륜적인 틀 속에서 당당해 져서.......  유럽연합(EU)에도 가입을 당당히 하고,  유럽연합의 힘으로 국가도 재건하고,  트럼프 같은 장사치에게 당당하게 맞서고........  대한민국과 더욱 가까워질 수 있는.......  그런 나라가 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나는 터키인들을 사랑하고  이스탄불을 좋아하지만...........  역사속에서  그리고 진실 속에서  그들을 모두 포용하고 사랑하기에는   내 가슴의 일부분이 '노. 절대 아니야.'라고 항상 외쳐댄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이며  인정을 한다.

  언제고 그런 날이 올 수 있기를...........

 

 

  그래서 여기에 왔다.

  지금 베식타스에 살고있는 터키인들의 모습이 보고 싶어서였다.

  베식타스는 평화롭다.

  여전히 그들은 축구를 사랑하고 즐긴다.

  그들은 잔인한 폭력과 테러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들의 표정은 여전히 평화로왔고  행복해 보였다.

  베.식.타.스. 만.세.

 

 

 

 

 

 

 

 

 

 

 

 

 

 

 

 

 

 

 

 

 

 

 

 

 

 

 

 

 

 

 

 

 

 

 

 

 

 

 

 

 

 

 

  그렇게 언덕길을  걸어 오르다보면 넓은......... 아주아주 넓은 공간과 맞딱트리게 된다.

  사방 어디로든지 갈 수 있는 거대한  교차로가 놓여져 있다.  게단 처럼 층이 이룬  넓은 잔디밭과  수목이 우거진 공원이 널린듯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리고 그 너른 공간 너머로  현대식 거대란 빌딩들이 숲을 이루며  이공간을 감싸고 있다.

  시선을 모아 가만히 살펴보면........  유난히 많은  노란 택시들 너머로  붉은 빛을 띤  라임스톤으로 정교하고 멋들어지게 만든 기념탑이 나온다.

  여기가 바로 탁심 스퀘어,  또는 탁심 광장((Taksim Meydani) 이다.

  터키인들의 가슴속에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꽃으로 타오르고 있는  '케말 아탁튀르크'를 추모하는 광장이다.

  내가 초등학교 시절 그를 처음 만났을 때,  나에게 영원히 기억된 그의 이름은  (케말 파샤)였다.

  내가 어른이 되고 나서야 내가 알던 (케말 파샤)가  터키인들에 의해서 새로운 이름 (케말 아탁튀르크) 라고....... '터키의 아버지'로 불리게 이름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나중에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도  그를 '케말 파샤'라 부른다.

 

 

 

 

 

 

 

 

 

 

 

 

 

 

 

 

 

 

 

 

 

 

 

 

  나는 미얀마를 여행하면서  '아웅산 수지 여사'에게 엄청난 실망감을 느끼게 되었던 것을 결코 잊지 못한다.

  약간의 여행을 해오면서 내가 현지에서 그나라 국민들의 속마음을 조금씩이나마 들여다 보면서 깨닫게 된.........  진실하게 그 나라의 모든 국민들로 부터 온마음으로 절대적 신뢰와 존경을 끝없이 받고있는 훌륭한 사람으로는,  고인이 되신 태국의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과 터키의 국부 (케말 아탁튀르크)가 거의  전부였다고 말하겠다.

  왜 우리에겐 그런 존경과 사랑의 대상이 없을까?

  오죽하면 호치민의 한 길거리 선술집  한국인 여행자들의 술자리에서  '우리가  유치장에 안보내도 되는 대통령을 하나쯤 가져보자는게........  그게  그렇게 불가능한 바램이란 말이야?  그걸 인정해 버리면  우리 모두가.......  너무 불쌍해 보이잖아........'  하는 하소연을 어깨 너머로 들은 적이 있다.

  그래 맞다.

  나는 참 불행한 사람이다.  어쩌면 우리 모두는 참 불행한 세대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 나를 날카로운 시선으로 '케말 파샤'가 내려다 보고 있다.

  '불행하다고 스스로 생각하지 마.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봐.   그래도 너희는  의지의 한국인 이잖아.'

  나는 혼자 씁쓸하게 웃으면서  다소 멋적은 걸음걸이로 그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저만큼 길 건너  아주 앙증맞을 정도로 아주 작은,   마치 빨간 장남감 모양의 트램이 멈춰서 있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핫한  이스틱랄 거리가 여기서 부터 시작된다.

  우리나라로 치면  서울의 명동이다.

  '이 길을 걷지 않았다면  이스탄불의 현재를 보았다고 말하지 말라.'

  이스틱랄 거리(Istiklal Cd) 속으로 발걸음을 옮겨 본다.

  수많은 사람들로 북적이는 이스탄불이 그곳에 있었다.

 

 

 

 

 

 

 

 

 

 

 

 

 

 

 

 

 

 

 

 

 

 

 

 

 

 

 

 

  사실상의 아스틱랄 거리 길이는  1.5km 정도이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그런 거리다.

  보행자 전용도로로  한가운데로 장남감 같은 빨간 트램이 다니고, 경찰 순찰차나  앰블런스와 청소차량 정도가 출입이 허용된 도로인데  실상으론  인근의 상점과  식당들에 물건과 자재를 공급해 주는 일반 차량들과 얌체 상술에 찌든 택시들이 수시로 출몰하고는 한다.

  우리나라 명동처럼  터키 전체에서 최고의 비싼 땅값을 자랑하는 이곳은 아주 멋진 유럽식 건물들이 빼곡하게 도로의 양편으로 길게 늘어서 있다.  유럽에서도 손에 꼽는 최고급 쇼핑가인 '압디 이펙치 거리'를 중심으로 루이비통. 에스까다. 티파니. 카르티에 등의 명품점들이 눈에 띈다.  다양한 고급 상가와  고급 레스토랑과 갤러리 등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그런가 하면  고층 건물의 상층부로  자유로운 분위기의 멋진 클럽과 바들이 들어서 있어서  터키의 젊은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데이트 장소로 꼽히기도 한다.

  라이브 연주를 들으면서 가볍게 술을 한잔 할 수 있는 약간의 서민적 분위기를 풍기는 주점들도  이곳 아스틱랄 주도로와 중간중간에 뻗어나가듯이 연결된 골목 안쪽에 많이 자리하고 있다.  사방으로 뻗어나간 수많은 골목들마다 각기 나름의 개성이 가득한 특색있는 장소로 탈바꿈하여 여행자와 현지의 젊은 데이트족들을 맞이하고 있다.  그러다보니 이스틱랄 거리를 포함해 인근의  골목들을 제대로 둘러보고자 한다면  발품을 제대로 팔아야 하고  어느정도 넉넉한 시간을 할애하여야만 한다.

  좁고 길다란 골목 여기저기에 야외탁자를 내어놓고 떠들썩한 분위기 속에  맥주나 라크를 마시는 터키식 선술집을 '메이하네'라 부르는데,   특히 아스티ㅣㄱ랄 거리와 인접한  네비자데 골목이 인기다.  밤늦게까지 흥겨운 라이브 음악이 그치질 않는다. 

  네비자데 골목이 지극히 서민적 선술집이라면,  인근에 있는  소피알르 골목은 어느정도 지적이고 다소 세련된 분위기의 선술집이라 하겠다.  현지인들에게 특히 인기가 많은 골목이다.

  떠들썩한 '메이하네' 선술집의 분위기가 식상해졌다면  바로 옆에 있는  '파노 샤랍하네시' 골목으로 발걸음을 옮기면 된다.   아늑하고 고풍스러운 와인하우스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그렇게 한잔 두잔의 술로 어느정도 분위기가 엎되었다고 생각되면,  멋진 빌딩의  옥상 테라스나 가장 높은층에  클럽이나  바가  기다리고 있다.

  이스탄불의 밤,  그 유명한  이스틱랄 거리의 밤문화는 오늘도 지칠줄을 모르고 계속된다.

 

 

  차가 다니지 않는 이 긴 해방구에 마법처럼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면  어디에서 쏟아져나왔는지 모를 수많은 사람들이  밀물과 썰물처럼 파도가 요동치듯  흘러다닌다.

  울퉁불퉁한 돌을 다듬어 놓은  골목의 포장도로 위로  열려진 파커 안쪽으로  짧은 겨자색 원피스가  유독 시선을 끄는 아주 매혹적인 아가씨가  또각또각 구두 발소리를 내며 걸어간다.  수많은 인파가 모두 다 제각각의 발걸음 소리를 내고 있건만,  왜 또각또각 그 소리만이  이렇게  유독 선명하게 들리는 걸까?

  '임마.  이쁘면 모든게 다 허용되는거라니까?'

  그래.  어쩌면 오랜 술친구인 그 선배의 말이 맞는것 같다.  적어도 이순간 여기 이스탄불의 이스틱랄 거리에서는.........

  서둘러 그 수많은 인파들의 발걸음 사이로  또각또각 소리를 내며 걸어가는  겨자색 구두를 찾아내려  나도 모르게 이스틱랄 거리속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갈라타 타워를 만나면 언제나 마음 뿌듯해 지는것이 무엇인지 모르게 든든한 느낌이 든다.

  이스탄불의 어디에 있든  갈라타 타워는  거의 보인다.(발렌시아 수도교 너머로  이스탄불의 남서쪽만 제외하고는  유럽지역이나 아시아지역이나)

  '돈 워리.  내가 항상 지켜보고 있어.  그러니까 마음 놓고 편하게 여행을 즐겨.'  라고 마치 내 귓전에 속삭여 주는것만  같다.

  탁심 광장이나 아스틱랄 거리를 오갈때면  대부분  이 가파르고 좁은 언덕길을 통해 오르내린다.  그러다보면 늘 칼라타 타워를 만난다.

  나는 이 언덕길 좁은 골목에 유독 마음이 끌린다.

  그 좁은 골목을 걸어 내려오면  카라쿄이 선창가다.

  가던 발걸음으로  갈라타 다리위에 오르면  언제나 수많은 사람들이  짙푸르고 성난 파도가 넘실대는  보스포러스해에 낚시를 드리우고 고기잡이에 한창이다.

  참으로 신기한 풍경이다.

  걷다가 구경하다  잠시 이야기를 나누다가 미끼를 낄때 잠시 낚시대를 잡아주기도 하고,  낚시를 내던질대 조금 비켜서서  고개를 숙이기도 한다.  미끼래야 시미즈 빵쪼가리나 옥수수 낱알이나  절로 실소가 터지기는 모두 마찬가지지만  신기하게도  싱싱한 정어리과 꽁치같이 생긴놈들을  쑥 쑥 잘도 잡아 올린다.

  잠시 기웃기웃 거리며 걷다보면은 어느새  갈라타 다리도 건너고,  어디선가 매쾌한 연기와 함께 구수한 냄새가 진동을 한다.

  흔들리는 배 위에서 만들어 파는 고등어 케밥으로 유명한 지역이다.

  어쩌겠는가?  이곳을 지나려면  항상 배가 고픈 느낌인걸.  길게 줄을 늘어선 집이 당연히 맛집이렸다?

  그러다 보면 어느새 시야가득 '예니 자미(Yeni Camii)'가 반갑게 다가와서 '멜하바' 라고 내게 인사를 건네온다.  언제나 반갑다.

  내가 이스탄불을 찾을 때 마다  가장 많이 만나고 늘 새로운 느낌으로 다가오는  이슬람 사원이 바로 여기 '예니 자미다'  이스탄불의  그 어떤 사원보다도 항상 새가 많은 사원을 찾는다면 당연히 예니 자미다.  넘쳐나는 비둘기뿐만이 아니다.  그 이유는 모르지만.........

  이스탄불의 이슬람 사원중에 최고의 관광 명소야  당연히 '블루 모스크'가 최고라 하겠으나,  나에게 있어서는  첫째가 여기 '예니 자미'요,  두번재가 '술레이마니 자미(Suleymaniye Camii)' 이며, 세번째가 '블루 모스크'라고 나는 말하겠다.  어디까지나 내 주관적인 판단에서 말이다.

 

  어느새 땅거미가 이스탄불 위로 제법 짙게 내려앉았다.

  이제 오늘의 걷기 여행도 서서히 마무리 할 때가 되지않았나 싶다.

  어제도 그랬다.

  비록 날씨는 빗방울이 오락가락하고 바람결이 제법 세차게 불었지만  그래도..........  참 걷기에는  좋은 날이었다.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걷다가 걷다가 죽기에 딱 좋은 날이 아니었을까?'  싶을 정도로  이스탄불을  마구 쏘다니는 여행자가  나 말고 또 있을까?

  내게는 그게 일상인걸..........

  그게  나만의  여행 방법인걸...........

  오늘도 무사하게........  유익하고 즐겁게...........  나와 함께 걸어 준 나의 두 발에게 절절히 고마움을 표하고 싶다.

  '고마워........  근데........  나  내일도 또 걸을거야.  알지?  내말이 무슨 뜻인지?'

 

 

 

 

 

 

 

 

 

 

 

                 -----  다음 이야기로 이스탄불 걷기여행을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읽어주셔서 감사 합니다.   피안재.

 

 

 

 

  PS  : 숙소 인근에 도달했을 때,  내가 머물고 있지 않는 다른 호텔의 후런트 벽면에  이슬람의 민속화가 액자에 걸려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찌 그냥 지나칠 수가 있겠는가?

          불쑥 찾아들어가 매니저에게 양해를 구하고 카메라에 담아 본다.  돌아나오는 내 발걸음이  절로 더없이 뿌듯한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