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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터키) 오늘은 참 이스탄불 걷기 좋은 날.

by 피안재 2018. 8. 15.

 

 

 

 

 

 

 

 

 

 

 

 

 

 

 

 

 

 

 

 

 

 

  보름 이상  누적된 여행 피로에다   서둘러 몰타에서 이스탄불로 이동하는 과정하며........  제법 피곤했기에 좀 늦은시간이 되어서야 일어나려니 했다.

  하지만 웬걸?

  태생적으로 이미 몸에 깊게 배어있는 습관이 아무리 피곤하기로서니   나를 그냥 가만히 내버려 둘리가 만무했다.

  겨울 바람이 제법 쌀쌀한 이스탄불의 날씨에 맞게 옷차림을 갖추고  부랴부랴 트래킹용 작은 배낭을 꾸려메고 엘레베이터에 오른다.

  1층 식당으로 가니  한참 조식을 준비하고 있어서 양해를 구하고 먼저 자리에 앉았다.  조식 규정보다도 조금 이른 시간이었다.

  터키가 동유럽과 국경을 맞대고 있어서 그런지  터키의 조식 또한  여타 동유럽의  호텔 조식이랑 아주 비슷한 느낌이다.  약간 다른것이라면  동유럽과 비슷한 음식중에서  뷔페식으로 내맘대로 골라다 먹을 수 있다는 점이 약간 다른점이라고나 할까.  동유럽은  커다란 접시에 미리 셑팅되어서  주로 나온다.

  바삭한 빵과  소시지에 치즈와 버터와 잼이 나오고,  꼭 삶은 계란이 하나나 둘,  그리고 방울 토마토 몇알 아니면  반개 자른것에  잘게 썬 오이 두 세조각이 나온다.  여기에 차나 커피나 우유를  선택하면 된다.  새콤하다못해 시큼한 요구르트는 어디에나 언제나  항상 놓여있다.  아주 아주 간단한 식사이지만 나름으로는  '그들이 저렇게 먹으니 대부분 장수하는구나' 라는 느낌이 절로 들게하기도 한다.  지중해쪽으로 이따금씩 절인 올리브가 몇알 올라오기도 하는데.......  나는 이상하게 절인 올리브에는 적응이 잘 안된다.

  이스탄불의 호텔 조식은  항상 동유럽을 떠올리게 한다.

  그렇게 본다면........  베트남이나  캄보디아나 말레이시아 등  동남아의 호텔 조식이  한국인에게는 조금 더 만족스럽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그건 그렇다치고.........  내가 언제 어느나라에서건 호텔 조식이 맛이 없던 적이 있었나?  아무리 여러날을 싸돌아다녀도 생전 김치 같은 한식문화를 생각조차 하지않는 완전한 서구적 식성을 가진 내가 말이다.

  이스탄불에서 다시 맞는 첫 조식.........  '난 항상 원더풀이야.  한식만 아니면 좋겠어.'

 

 

 

 

 

 

 

 

 

 

 

 

 

 

 

 

  외출 준비를 해서 내려왔겠다,  아침도 든든히 해결했겠다..........  근데 이제부터 당장 뭘하지?

  식탁 정리를 마쳐주고나서  커피를 불랙으로 한잔 더 가져다 놓고 앉아서 창밖을 내다보면서  다시 궁리에 몰두해 본다.

  어디를 갈까?

 

  '루멜리 히사르(Rumeli Hisar)'

  문득 떠오르는 곳이 바로 루멜리 히사르였다.

  지난번 여행에서 쿠루즈를 타고 보스포러스해를 돌아보면서  배위에서 올려다본  루멜리 히사르는 정말 장관이었다.  아주아주 인상적인 풍경에 압도당하는 느낌이었다.  다음에 다시오게되면 꼭  성채에 올라서 거꾸로 보스포러스해를 내려다 보아야겠다고  마음에 담아 둔 곳이기도 했다.

  '그래.  일단 루멜리 히사르까지 가는 거야.  거기에서 거꾸로 걸어내려 오면서  베벡의 스타벅스에서 커피도 마시고........  오르타쿄이를 안돌아 볼 수는 없잖아?  암 절대 안되지.  오르타쿄이에서 놀다가 다시 베식타스까지 선창가 길로 걷는 거야.  베식타스에서 배를 타고 아시아지역으로 건너 가던지,  아님  카드쿄이까지 또 죽어라 걷는거야.  그때 상황봐서 탁심으로 올라가던지  그냥 갈라타 다리를 건너 호텔로 돌아오던지.........  내가 언제 이스탄불에서 정해 놓고 다닌적 있어?  그래 일단은  무조건  루멜리 히사르로 간다.  추울바알........'

  근데 이거........  대충만 생각해보아도 도대체 얼마를 걷는다는 거야?  도무지 거리 계산이 안되네?

 

  골목을 나가다보면  골목을 휘어감으면서 아슬아슬하게 다가오는 트램을 만나게 된다.  귤하네역이나  사르케지 역이나  다 거기서 거기다.  앞으로 넘어져서 옆으로 두세번만 구르면 둘 중 하나다.  트램을 타고  갈라타 다리를 건너면서 골든혼과  보스포러스해를  두리번 거리며 살펴본다.  그냥 가만히 있다보면  카바타쉬 트램 종착역과  페리 선착장에 도착한다.

  카바타쉬 버스정류장에서서 기다리면  22번, 혹은 25번,  아니면 25E 버스중 하나를 골라타면 된다.

  버스에 오르면서 기사분께  '루멜리 히사르' 라고 하면   단박에 알아채시고는   도착하면  불러서  내려주신다.  아주 쉽다.

 

 

 

 

 

 

 

 

 

 

 

 

 

 

 

 

 

 

 

 

 

  내륙의 바다인 흑해(黑海)는  여기 보스포러스해를 통해서  지중해와 연결된다.

  유럽지역과  아시아지역을 구분하는 경계선인 보스포러스해 중에서  가장  짧은 거리는 불과  660m  밖에 떨어져 있지 않다.  그리고 그곳은 바로 루멜리 히사르의 앞바다라고 해도 무방할 것같다.   간혹 어떤 이들은 역사성과 비추어 그곳을  보스포러스 다리가 놓여있는  오르쿄타이라 하는데  절대 그곳이 아니다.

  루멜리 히사르 성채의 바로 옆으로 보스포러스해를 가로지르는 두개의 다리중 하나인  '파티 술탄 마호멧 다리'가 있는데,  이 다리의 이름이  바로  위에 거론한 사실을 입증해 주고 있다.  오스만의 깃발을 앞세우고 처음으로  보스포러스해를 건너온 사람이 바로 메메토 2세(술탄 마호멧 2세)였기 때문이다.

 

  고대 역사속에서  가장 짧은  보스포러스해를  찾아서 건넜던 사람은  바로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황제'였다. 

  로마가 등장하기 이전까지  세계 최고의 제국을 건설한  다리우스는  사사껀껀 시비조로 나온 아테네(그리이스)를 정벌하기 위하여 대군을 이끌고  아나톨리아 평원을 가로질러 왔다.  그러자 유럽으로 향하는 원정길을 떡하니 가로막고 서있는  보스포러스해를 맞딱트린 것이다.  다리우스는  군사를 풀어서  이곳의 지형을 살폈고,  그 결과로 바로 여기 루멜리 히사르 앞바다가 가장 짧은 거리라는 것을 알아낸 후  도강을 감행했다.   수많은 거룻배를  징발하고 건조해서  바다를 가로지르게 일렬로 늘어서게 한 후에  로프로 이를 단단히 묶었다.  그 위로 배와 배 사이에 널판지를  박아  고정 시킨 후,  흙을 파다가 덮어서 도로를 만들었다.  자신이 직접 전차를 타고 건넜고,  수많은 군사와 보급물자가 건넜다.  심지어는 코끼리 부대도 부교 위로 건넜다 하니........  고대의 시대에 가히  어마어마한 건설기술 수준을 엿볼 수 있겠다.

  하지만.........  페르시아제국의 막강 군대가 그만.........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의 소수정예병에게  완벽하게 참패를 당했다.  아테네를 목전에 두고 치욕스런  참상을 목격하고 뒤돌아서서 꽁무니를 빼기 시작한 다리우스황제는  다시 여기 보스포러스해를 건널 때에는  호위병도 없이 나룻배에 몸을 겨우 싣고 죽어라........  걸음아 나살려라 하고.........  멀고 먼.......  아주 먼 이란지방의 페르세폴리스까지  뒤도 한번 안돌아보고 도망쳤다고 전해진다.

  일장춘몽 이었던가.

  여기 위치의 중요성을 깨달은 로마인들이 이곳에 처음으로 요새를 지었다.

  이곳을 굳건히 지키면 그 누구도  보스포러스해를 마음대로 오갈 수가 없다.  하지만 최강대국 로마가 소아시아지역까지를 모두 차지하면서  이곳의 중요성은 점차 수그러들었고,  로마인들과  제노바 상인 조합은 이곳을 죄수를 가두는 감옥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세월이 또 흐르고 흘렀다.

  셀주크 투르크의  뒤를 이어  오스만 투르크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였던 것이다.

  오스만의 성장과 팽창 속에서  이슬람교를 받아들인  오스만 투르크의 위력은  세기말적 중후군에 시달리고 있던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틴 제국은 물로  바티칸을 비롯한 유럽의 모든 국가들에게 심각한 위협으로 부각되기 시작했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소아시아로 통하는  모든 지역에 바리케이트(방어진지)를 치기 시작했다.  그래도 오스만의 급성장은 누구도 막을수가 없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십자군 전쟁'이 벌어졌다.  결국엔  시간과 무수한 생명만 소비 내지는 낭비되었고  결론적으론 희지부지 되고 말았다.

  유럽의 기독교 세력은  유럽 영역이나 지키면서 스스로를 추스르기에도 버거워졌고,  비잔틴 입장에선  차 떼고 포 떼고  밑천마저 다 드러났다.

  오스만 투르크 입장에선  자신들의 입지와 능력을 재확인 받는  계기가 되었고,  이제 이슬람 앞에서는 더이상 거스를 것이 없다고 생각했다.

  1350년대 쯤인 14세기 중엽에  드디어 보스포러스 연안에 오스만 투르크가 모습을 나타냈다.  거칠것이 없던 오스만 군대는  그리 오래지 않아  이스탄불의 아시아지역 전체를 점령했다.  코앞에서  콘스탄티노풀을  거너다 보면서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기 시작했던 것이다.

  비잔틴 제국의 절대절명 위기였다.  하지만  '부자가 망해도 3년은 간다'고,  보스포러스 바다 하나만을 사이에 두고 근 일백년을  콘스탄티노풀을  테오도시우스 성채를 앞세워 굳건히 버틴다.  비잔틴이 백년을  끈질기게 더 벼텨냈다는 말이다.  오스만으로서는  그만큼 억울한 일백년이었다.  세상의 모든 성채를 허물고 국가들을 차례로 점령해 왔는데.......  막판에 꼭 하나.........  콘스탄티노풀이  아슬아슬하게 잘도 버텨냈으니 말이다.

  콘스탄티노플의 점령은 결코 간단한 문제가 아니라 판단한  오스만의 술탄   바지에드 2세는  장기전에 돌입해서  1394년 루멜리 히사르의 똑바로 건너편에 '아나톨루 히사르 성채'를 건설한다.  바다를 통해 콘스탄니노플로 들어가는 모든 수송 보급로를 차단하려는 시도였다.   하지만 끝내  바지에드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지 못하고 숨을 거두고 만다.

  그리고 이어서.........

 

  오스만 투르크의 최고 용맹한 영웅.........  우리나라 역사로 치자면  광개토 대왕이라 할까?  조선의 태종이라 할까?

  메메트 2세(술탄 마호멧 2세)가 즉위한다.

  터키의 전 영토내에서  기념 동상이 가장 많기로는 단연 으뜸인  메메트 2세이다.  우리의 유년시절에 나부끼던  이순신 장군 동상 보다도 훨씬 더 많을 것이다.  그만큼 터키인들의  메메트 2세에 대한 사랑과 자부심은 실로 엄청나다.

 

 

 

 

 

 

 

 

 

 

 

 

 

 

 

 

 

 

 

 

 

 

 

 

 

 

 

 

 

 

 

  술탄에 오른 메메트 2세가 가장 시급하게 먼저,  그리고 가장 심혈은 기울인 것은 바로 '최강 수군의 양성' 이었다.

  아무리 막강한 오스만의 최정예 군사라 해도 발칸을  지나 유럽까지 진출하기에는  너무도 길이 멀고 험했다.  그 먼거리까지 보급로 형성이 불가능했다.  더우기 지중해로 진출해서  지중해지역을 완전 장악하지 않고서는  세상 모두를 차지하고야 말겠다는 패권야망에 치명적인 제동이 걸릴 수 밖에 없었다.  지중해를 차지하지 않고서는  유럽재패가 불가능했다.  지중해의 장악은  곧 유럽 정복의 절반의 성공이라 해도 그리 비약은 아니었으리라.

  그리 오래걸리지 않아서  오스만의 수군은  지중해 최고의 수군으로 성장했다.

  메메토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았다.

  막강 수군을 앞세워 단숨에  군사를 직접 이끌고 보스포러스해를 건너 진을 쳤다.  그곳이 바로 루멜리 히사르였다.  그리고 이날을 기념하기 위하여  이곳에 세운 다리의 이름이 '파티흐 술탄 마호멧 대교'인 것이다.

  술탄의 장막에서 메메트는 부하 장수들을 불러 모았다.

  '이곳에 성을 쌓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은 장차 우리가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기까지  우리의 전진 기지가 될 것이다.  시간이 없다.  서둘러 이곳에 성을 쌓아 비잔틴의 기습에 대비하라.'

  메메트는 자신의 심복 부하 세명을 지명했다.  감옥으로 사용하고 있는 작은 성채 외에  각자가 하나씩 맡아서  자신의 이름을 걸고  세개의 성채를 쌓아서 서로 연결하라 명령했다.  기간은 단 40일.

  군사들의 선의의 경쟁심을 부추긴 결과로  40일 만에 완성된 성채가  바로 지금의  성채모습 그대로이다.  그것이 루멜리 히사르다.

  세개의 커다란 첩탑 사이로 성벽을 연결하였고  13개의 감시탑을 세웠다.  바야흐로 흑해와 지중해를 통과하는 모든 해상교역로가  메메트의 손아귀에 굳게 쥐어진 것이다.  하여 당시의 성채 이름은  '보아즈 케센(Bogaz-kesen)'으로 '적의 목을 친다' 라는 의미를 담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힘들여 건설하고 확실한 목표가 있었던  루멜리 히사르는  그렇게 크게 쓰이지 못했다.

  두 세달이 지나서 그만.........  콘스탄티노플의  테오도시우스 성벽이 허물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메메트의 용맹함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고  비잔틴은 멸망해서 역사에서 사라져 갔다.

 

 

  인생이란.......

  역사란........

  세월아.  우리의 모든 궁휼을  너의 어루만짐으로  상처가 아물게 해주렴..........

 

 

 

 

 

 

 

 

 

 

 

 

 

 

 

 

 

 

 

 

 

 

 

 

 

 

 

 

 

 

 

 

 

 

 

 

 

 

 

 

 

 

  루멜리 히사르를 뒤로하고  해변 선창가 길을 터덜터덜 걸어간다.

  길을 잃을 염려가 전혀 없다.  거리를 몰라서 조금 걱정이지만,  이길로 쭈욱 무작정 대로 걷다보면  갈라타 다리가 나오게 되어 있다.

  한겨울 세찬 바닷바람이 사정엇이 몰아친다.  굵은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기도 한다.

  이런들 어떠랴?  저런들 어떠랴?

  이스탄불의 모든 선창엔 항상 낚시꾼들로 가득하다.  갈라타 다리의 낚시꾼들 모습은 이미 엄청난 유명세를 타고 있잖은가.

  오나가나 사방 어디든 낚시꾼들로 가득하다.  주로 정어리과의 작은 꽁치류를 잡는다.

  한번의 낚시에 여섯마리까지 걸려나오는걸 방금 보았다.  장관이다.  그 낚시꾼의 자랑스런 표정이란.............

  도로 포장공사를 하던 인부도 '꼬레?' 하면서 반갑게 맞아준다.  부러 사진촬영 포즈도 잡아준다.  시미즈 파는 사람도 꼬레를 반겨준다.

  군데군데  옛 오스만의 정취가 그대로 풍겨나오는  테라스 발코니가 예쁜 오래된 목조 전통가옥들이 자주 눈에 띈다. 카페나 레스토랑으로 이용되는 곳도 상당히 많다.  정말로 고풍스런 모습들이다.

  여기는 '베벡(Bebek)' 이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럭셔리한 커피를 마시고픈 사람들이 즐겨찾는  멋진 장소다.

  외교관이나 외국인 사업가들이 주로 진을 치고 사는 이스탄불 최고의 부촌이다.  베벡이라는 낱말의 어원은 '보스포러스의 눈동자'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여느곳과는 다른 무엇인가 베벡만의 독특한 아름다운 문화가 이곳에 사는 사람들에게 자부심을 안겨주고 있다는데.......  역시나 이스탄불에서 가장 비싼 물가를 자랑하는 동네이기도 하다.

  그려러니 하면서  발걸음을 옮겨보는데........  기어코 나의 발길을 붙잡고야 마는 저것............

  ㅎㅎㅎㅎㅎㅎㅎㅎㅎ

  유독 한국 여행자들에게 유명한 명소..........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스타벅스 매장'으로 정평이난  '스타벅스 인 베벡점'.

  항상 여행자와 현지인들로 북적이기 때문에  제대로 자리 차지하기도 힘들다는 바로..........  그 곳.

  비수기여서인지 그렇게 붐비지는 않았다.

  그렇다해도  바다로 이어지는 테라스나 창가 자리는  당연히 빈자리가 없다.

  '둘러 봤으니 그냥 나가버릴까'  하다가 잠시 쉬어갈 겸 바다가 저만치 겨우 보이는 반대쪽 도로면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다.

  솔직한 말로  '여기 커피나 거기 커피나 다 그게 그거라는 생각' 밖에는........  경치가 좋기는 하지만  결코 최고라 하기에는.........  특별히 좋은것은 그다지 없고,  그냥 나름은  쬐끔 좋은 편이다.  그냥 들렸으니 여기저기 구경하다가  테라스에 나가보려고 하는 즈음에........  테라스에서  촬영을 하고 있다.

  젊고 아리따운 아가시가 스스로 기타연주를 하면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  카메라 외에 녹음을 실제 하고 있어서  소란스러워질까봐  감히 문을 열고 테라스 밖을 내다 볼 수가 없었다.  터키?  아님 그리이스?

  생기발랄함과 청초함이 묻어나는 예쁜 아가씨였다.  노래를 못들어 본것은 아쉬움이겠으나........  그런것도 여행의 일부.......

  아쉬움을 뒤로 하고 베벡을 떠나 발걸음을 오르타쿄이로 옮겨본다.

  내가 그렇게 꼭 가보고 싶었던 오르타쿄이다.

 

 

 

 

 

 

 

 

 

 

 

 

 

 

 

 

 

 

 

 

 

 

 

  이스탄불을 여행하다가  보스포러스해에 인접하여 수시로 파도가 광장까지 넘실거리는 곳에  이렇게 황홀하리만치 멋지고 아름다운 건축물을 만나게 되거들랑,  거기가  오르타쿄이(Ortakoy) 인줄 알고  무조건 반나절 이상은 마음껏 편히 쉬어도 좋다고 나는 권하겠다.

  이 세상에 이렇듯 혼자라는 느낌이 싫어지게 만드는 장소가 또 있을까?

  누군가 오르타쿄이에 갈 계획이 생기거들랑,  꼭 가장 사랑하는 사람과 손잡고 함께 가라.

  굳이 부연 설명조차 필요치 않으리라.

  오르타쿄이에 가보면  저절로 알게 될것이니까.

 

 

    혼을 쏙 빼놓을 정도로 아름다운 네오 바로코 스타일의 이 건축물의 이름은  '부육 메지디에 자미(Buyuk Mecidiye Camii)'로서, 흔히들 '오르타쿄이 이슬람 사원(오르타쿄이 자미)' 라고 부른다.  오르타쿄이의 상징과도 같은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건물이다.

  이스탄불에서 유명한 '돌마바흐체 궁전'을 설계한 건축가 니코스 발얀에게 술탄 압둘메지트 1세가 의뢰해서 지은 이슬람 사원이다.  특히 스테인드글라스가  아름답기로유명한데  아쉽게도 직접 볼 수는 없었다.

 

  보스포러스해협의 유럽쪽 연안에 있는  작은 부둣가에 아름다운 자미와 아기자기한 카페들이 길게 줄은 선 작은 마을이 '오르타쿄이'라고들 말한다.

  거기에 더하여  보스포러스 대교를 바라보는 전망이 아주 뛰어나서  이스탄불을 젊은이들이 데이트 장소로  첫손가락에 꼽는 장소로도 알려져 있다.

  흡사 우리나라에 비유한다면  '이태원'쯤 된다고 말하겠다.

  터키를 통털어 내놓으라 하는 명문대학들이 이 지역에 포진해 있어서,  젊은 세대를 대변하는 갤러리나 바,  클럽들이 거리마다 즐비하게 들어서 있다.

  사람들이 붐비는 거리마다 죄판들이 벌어지고,  특히 일요일이면 학생들이 수작업으로 만든 장신구나 악세서리들을 아르바이트 삼아 판매한다.

  거기에다  이스탄불에서 가장 잘나가는  브런치 카페를 찾는다면  당연이  이곳으로 와야만 한다.  물론 유명세 만큼이나 항상 사람들로 붐비고 그런만큼 가격이 대단히 비싸다는 것쯤은 감수해야할 각오를 사전부터 미리 해야한다.

  고급스런 카페와 비싼 음식을 선호하지 않는다 해도 문제가 될것은 없다.  길거리에서만  맛볼 수 있는  오르타쿄이만의 명물 와풀과 쿰피르가 있기 때문이다.

  와풀이나 쿰피르를 손에 들고 이야기를 나누며 선창가를 걷거나  공원 구석에 앉아서  사랑을 속삭이는  젊은이들이 넘쳐나는 곳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오르타쿄이는  오스만제국 이전까지는 주로  그리이스인, 아르메니아인, 유대인들이 모여사는  조금 이색적인  마을이었다.  우연히 이곳을 들리게 된 술레이만 대제(술탄 마호멧 1세)는  코스모폴리탄적인 이곳의 분위기에 반해서,  그 후로 투루크의 지식인들이 이곳에 정착해 다른 민족들과 함께 어울려 살기를 적극 권장했다고 한다.  그 후로  이곳은  이슬람 사원과  유대교 회당과 동방 정교회 교회들이 함께 공존하는 아주 특별한 지역이 되었다.  하지만 2차대전 이후 이스라엘이 건국되면서 유대인들이 모두 떠나고, 1955년의 폭동으로  유대인과 아르메니아인등 소수민족들이 모두 이곳을 떠나갔다.

 

  하지만 오르타쿄이는 분명 지금 이 순간에도  이스탄불에서 가장 로맨틱한 부둣가이자  젊음과 낭만이 살아 숨쉬는 곳이라 하겠다.

 

 

 

 

 

 

 

 

 

 

 

 

 

 

 

 

 

 

 

 

 

 

 

 

 

 

 

 

 

 

 

 

 

 

 

  쿰피르(Kunpir)의 생명은  토핑이다.

  오븐에 구워낸 커다란 통감자를 대충 4등분해서 속을 꽉꽉 눌러서 대접처럼 넓게 편다.  펴진 감자의 속살 위로 버터와 치즈는 물론  샐러드. 피클. 옥수수. 소시지를 비롯한 수십가지의 토핑중에서 선택해 얹어서 섞어(비벼서) 먹는다.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만 하면 푸짐하게 얹어준다.

  맛이 정말 기가 막힌다.

  위 사진의 젊은이가 나를 대신해 토핑을 선택해 주어서 황홀할 정도의   오르타쿄이만의 맛을 경험할 수 있었다.  다음에 누군가의 도움 없이......  토핑을 실패하게 된다면........  단맛  신맛 짠맛 이 혼합된 새로운 내지는  참혹한 맛을 경험하게 될지도 모르겠다.  쿰피르는 오르타쿄이만의 독특한  길거리 음식이다.

  강추이다.

 

 

 

 

 

 

 

 

  <아직도 아픈 상처를 간직한  오르타쿄이>

 

  터키를 여행한다고 하면  주위에서 곧잘 이런 질문을 해오곤 한다.

  '터키의 치안은 믿을만 해?'

  '테러와 전쟁을 치루는 나라가 터키 아니야?'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한다.

  -  나는 터키의 안전을 믿어.

  - 지금 지구상에서 테러나 전쟁으로 부터 안전한 나라가 어디가 있을까?  터키 사람들은 오히려 한반도에서의 전쟁을 염려해주고 있어.

  -  이상하게 우리는  남들이 다 걱정하는 북한과의 일촉즉발의 위기는 남의 집 불구경 하는 듯한 태도로 일관하고,  어쩌다 타국에서 벌어지는 테러와 전쟁에는 극도로 민감해 한단 말이야?  왜 그러지? 

 

 

 

  2017년 1월 1일  새벽 2시반경.

  새해맞이 축제가 한창인 한 파티장에  산타크로스 복장을 한 괴한이 침입했다.

  즐거운 마음으로 축제를 즐기던 500~600명의 젊은이들을 상대로  무장 괴한은 아무런 꺼리낌 없이 자동 소총을 난사했다.

  39명이 그자리에서 즉사했고  69명이 총상에 의한 심각한 부상을 당했다.

  도망친 괴한은 보름이 지난  1월16일에  총동원령을 내린  경찰에 마침내 체포되었다.

  아프가니스탄에서 테러 교육을 받은  IS 소속의  우즈벡 출신  마샤리 포프였다.  그와 동시에 공범으로 4명을 추가로 수배했다.

  이 무장테러의 장소가  바로 여기 오르타쿄이 였다.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이 골목의 어느 멋진 카페나 클럽이었을 것이다.

  불과 1년의 시간이 지난 지금.........

  오르타쿄이는 다시 평화롭다.    여전히 젊음과  싱그러운 낭만이 넘쳐난다.

  그들은 아픈 상처를 결코 잊지 않는다.  하지만 상처를 아픔으로 표출하지 않는다.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고 있을 뿐이다.

  그리고 그들 못지않게......  낮선 여행자인 나의 가슴도 지극히 평온하다.  샬롬.

  이슬람은 평화를 말한다.

  기독교는 사랑을 말한다.

 

 

 

 

 

 

 

 

 

 

 

 

 

 

 

 

 

 

 

 

 

 

 

 

 

 

 

 

  이거야 원.

  나도 지금 내가 얼마 정도 걸어왔는지를 전혀 알지 못하겠다.

  '오늘은 참  이스탄불 걷기 좋은 날' 쯤으로 여기며 아침엔 그냥 가볍게 시작했다.  그런데 지금.........

  '오늘은  무작정 걷다가  딱 죽기 좋은 날' 이라는 생각이 불쑥 튀어 나왔으니.........  내가 미친다.  '정말로 이러다 객사하는거 아니여?'

 

  루멜리 히사르에서 오르타쿄이 까지는  굵은 빗방울에  바닷바람이 좀 차가왔지만  나름으로는  상쾌하게 걸을만 했다.

  오르타쿄이를 나와서  처음으로 인적이 뜸한 한적한 선창가를 계속 걷다보니  베식타스선착장이  나왔고  옆으로 돌마바흐체 궁전이 나타났다.  이번 여행중에 하루쯤은 아시아 지역을 갈 생각이었기에,  그러자면 여기 베식타스 선착장을 이용할 확률이 높기에   다음으로 미루고 그냥 패스를 했다.

  표현은 그냥 설렁설렁 걷는 것이지만........  때를 걸러가면서 걷는 것이 어찌 대충 걷는것이라 하겠는가.  죽어라 걷는 것이지. 

  '쫌 만 더가서 뭐든 먹어야지.'

  개뿔.  쫌만은 무슨 얼어죽을 쪼금만이여.......

  카바타쉬 선착장에서 뭔가 먹어야겠다고 여기저기 기웃거리는데.........  다들 사람들로 붐빈다. 처량한 씽글이라서 또 그냥 통과......

  '쬐끔만 더 가서 먹어야지.'

  자미(이슬람 사원)가 연속해서 나오고  도로의 저편에  갈라타 타워가 모습을 드러냈다.

  '카라쿄이(Karakoy)' 지역에 당도한 것이다.

  휘어진 대로의 모퉁이를 조금만 돌아가면  보스포러스 다리가 보이고....... 다리를 건너면 숙소가 있는  사르케지 지역이 된다.

  '이거 미친거 아니여?  도대체 얼마를 걸어 온거여?'

  '오메.  배고파 죽겠다.'

  '갈 때는 트램 타고 버스 갈아타고 가더니만,  올때는 오로지 죽어라 걸어서..........  차비 그만큼 아끼셔서 생활에 보탬이 좀 되셨습니까?'

  개뿔.  보탬은 무슨 얼어죽을 보탬...........

 

  그러면 왜 그렇게 죽을지 살지도 모르면서 기를 쓰고 여기 '카라쿄이'까지 이렇게 서둘러 와야만 했는가?

  (이거?   내가 내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임.)

  '물론 이유가 있지.  있기는 있는데........  있는 그대로 표현하면  또 미쳤다고 할 까봐서..........  ㅋㅋㅋㅋㅋㅋ'

  아침에 트램을 타고 여기 카라쿄이 지역을 통과하고 있는데.......  갑자기 창밖으로 내 시선을 일방적으로 강탈해 가고 있는 것이 있었으니.........

  단지 그것 때문에........

  - 그게 뭔데?

  - 있어. 그런게.  그게 꼭 보고싶어서 온거야.

  - 그게 뭐냐고?

  -  그냥 있다니까?  카라쿄이에서만 볼 수 있는게......

  - 사전에 알고 온거야?

  - 아니.  차 창에 스쳐 지나가는거를 봤어.  아주 잠시지만...........

  - 이쁜 샥시를 봤냐?

  - 미쳤어?  난 그딴거 관심 없다니까?

  - 그러니까  그게 뭐냐고?

  - 보여 줄테니 따라와.  나중에 딴 소리 하기 없기.

 

 

 

 

  이스탄불의 역사적 중심은  올드 타운이 차지하고 있다.

  그러니까 테오도시우스 성벽으로 둘러 쌓인 황궁과   불루 모스크와  하기야 소피아와  그랜드 바자르가 있는   술탄 마호멧 지역이 핵심지역이다.

  하지만 그곳은 제국이 형성된 후에 번영을 누리던 상징적인 지역이지,  감히 이스탄불이 시작된 지역이라고는 할 수 없다.

  이스탄불이 실제로 처음 시작된 곳은 바로 여기 '카라쿄이 지역' 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크로드를 타고 동양으로 부터 진귀한 향신료와 비단과 도자기들이  아시아지역의 포구인 위스큐 다르 지역에 몰려 들었다.  나룻배에 옮겨실은 진귀한 물건들이  처음으로 유럽땅에 도착하는 곳이  바로 여기 카라쿄이 선착장 이었다.

  수많은 유럽의 상인들과 개인 장사꾼들이  이곳에서 교역을 시작했다.  동서의 교역이요  동서 문화의 교류가 시작된 것이다.  베니스나 베네치아 같은  유럽의 거대 상단들은  이곳에 자신들의 무역 사무소를 차려놓고  사들인 물건들을  커다란 상선에 싣고  본국까지 지중해를 통해 항해를 시작했다.  다른 대상들은  이곳에서 사들인 물건들을 다시 골든혼의 갈라타 다리를 건너 그랜드 바자르로 가지고 가서  유럽에서 몰려든 중소 상인들에게 도매로 판매를 하게 되었다.

  하여  이곳 카드쿄이는  수많은 무역상들의 사무소와 은행과 보험사들로 넘쳐나게 되었던 곳이다.  비잔틴 제국과 오스만 제국등  막강한 국력을 앞세운  나라는 이곳에 세관을 설치하고  무역거래에 따른 세금을 징수하게 되었다.  밀무역을 근절시키기 위해서 군대를 동원해 감시를 했다.  국제 무역항이 된것이다.

  관광명소인 '갈라타 타워'만 해도  이곳을 주요 거점으로 삼은 제노바 상단이  자신들의 인적 물적 재산 보호를 위해 성채를 쌓고 감시탑을 세웠던 결과에서 생겨난 유산인 것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에서  가장  큰 국제 무역 시장으로 성장하게 된 것이 바로 이스탄불이었다.

  비잔틴 시대부터 금각만 북쪽 연안의 항구지역을  갈라타 지역이라 불렀고,  그곳이 바로 지금은 카라쿄이 지역이다.

  1917년 볼세비키 혁명을 피해 남하한 러시아인들이 대거  항구 노동자로 일하면서 카라쿄이 지역에 넘쳐났고,  항만 주위로 그리이스인들이 운영하던 선술집이 여행자들에게 호감을 크게 얻었던 추억의 명소이다.

  갈라타 다리를 기준으로  서쪽은 어시장이 서고,  동쪽은 해산물 식당이 성업중이다.  이곳에서 맛볼 수 있는  발륙 에크멕은  그야말로 환상적이다.

  해군 본부.  선박 해운회사. 은행. 보험사등의 금융기관으로 넘쳐나던  카라쿄이는,  시대가 변해감에 따라   해운에 의존하던 상당부분의 교역이 항공기의 등장으로 줄어들었고,  비슷한 이유로  금융기관과 보험사와  대형 무역회사들이  신도시 지역인 탁심 지역의 고층건물로 이사함에 따라  급젹하게 쇠락의 길을 걸었다.

  카드쿄이는 화려했던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낡고 허름하고 후미진 버려진 도시가 되었다.  현지인들 조차도 함부로 카라쿄이 안쪽으로 들어가기를 꺼렸다.

  그러던 카라쿄이에 재개발의 열풍이  날아들었다.

  지금 카라쿄이의 전 지역이 공사 중이다.  중장비가 돌아가고  덤프트력의 행렬이 꼬리에 꼬리를 문다.

  카라쿄이는 지금 변화의 시간을 맞고 있다.

  카라쿄이 사방으로 전지역에서 벌어지고 있는 대역사(큰공사)의 결과로 도심 전지역에 걸쳐 방호펜스(안전망. 방호벽)가 설치되어 있는데,  우리나라의 방호벽에는 주로  멋진 풍경 사진이나 광고성 그림이 나붙는데........  여기에는  이스탄불 내지는  보스포러스 해,  아니면 이곳 카라쿄이의 지난 역사에 근거한 과거의 사진들이 대형 현수막처럼 나붙어 있다.

  그것들을 아침에  트램을 타고 지나면서 아주 잠깐 차창을 통해 발견했던 것이다.

  그것은 역사이다.

  실제의 살아있는 역사이다.

  박물관이 되었던,  도서관이 되었던.......  한동안 아주 열심히 파고들어야 겨우 만날까 말까 한  여기 이스탄불의 살아있는 실제 역사인 것이다.

  그래서 나는 부랴부랴........  죽어라 걸어서 여기까지 왔던 것이다.

 

  공사장 방호벽에 붙어있는  흑백 사진들을 보려고.........

  난 결코 미치지 않았다.

  이게 내 방식대로의........  내가 추구하는 여행이다.  이런게 내 본모습이다.

  이제 나는 훅백 사진속으로  추억 여행을 떠나려 한다.

  이스탄불의.......  보스포러스 해협의........  그리고 카라쿄이의 과거 속으로.........

  그 속에.......  진실한 터키인들의 진솔한 삶이 녹아들어있을 것을 나는 알고 있고........ 믿는다.

  나는 그네들의 뛰는 심장소리와  한숨과 눈물과  노력과 땀이 묻어나는 모습을  직접 보고 만나고 싶다.

  알.럽.이.스.탄.불.

  알.럽.터.키.

 

 

 

 

 

 

 

 

 

 

 

 

 

 

 

 

 

 

 

 

 

 

 

 

 

 

 

 

 

 

 

 

 

  알수없는  무엇인가가  가슴을 탁 탁 치면서 솟구쳐 올라온다.

  저절로 눈물이 난다.

  빛바랜 흑백 사진 속에서  나는 저들의 삶을 느낄 수 있다.

  이토록 가슴에 사무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도 같은 추억이 있기 때문일것이다.

  내 아버지 세대의 삶 또한 저러했다는 것을 나는 잘 알고 있다.

  나는 지금 진짜 터키를 만나고 있다.

  진짜 터키인들을 만나고 있다.

  서너번이나  다시 찾은 이스탄불에서  이순간처럼 감동적인 시간은 없었다.

  그래.

  무작정 여기까지 걸어오길 잘했어.

 

 

 

 

 

 

 

 

 

 

 

 

 

 

 

 

 

 

 

 

 

 

 

 

 

 

 

 

 

 

 

 

 

 

 

  더 많은 사진들이 방호벽에 걸려 있었으나  모두를 찍지는 못했다.

  무엇엔가 걸려 심하게 찢어진 것도 있었고,  흑탕물이 튀어 알아보기 힘든 사진도 있고,  인도가 없는 지역엔  공사차량이 연속해서 지나다보니  미처 사진을 찍을 짬을 주지 않는 곳도 있었다.  물론  내가 제대로 찍지 못한 사진도 있다.

  저들에겐 지금 이곳이 아주 중요한 일상의 생활 터전이지만........  나는 모처럼 우연히 찾아든 이방인이다.  저들의 삶을 존중한다면.......  내가 방해가 되어서는 절대 안되겠다.

  하여 나는 아쉬운 발걸음을  이쯤에서 멈추어야만 했다.

 큰 도로쪽에 가까이 위치해 번성하던 옛모습을  여전히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골목과  재개발이 어느정도 완성되어 새로운 상권이 들어서는 지역과,  한참  공사가 진행중인 곳을 골고루 살피면서  카라쿄이의 안쪽으로 안쪽으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그렇게 걷다보면  보스포러스 건너  에미뇨뉴 선착장이 건너다 보이는  카라쿄이 선착장에 닿을 것이다.

  보스포러스의 유럽지역 반대편에서서  갈라타 다리와  톱카프 궁전과  예니 자미를 배경으로  멋진 이스탄불의 올드시티를 조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 어쩌겠는가?

  마저 또 걸을 수 밖에........

 

 

 

 

 

 

 

 

 

 

 

 

 

 

 

 

 

 

 

 

 

 

 

 

 

 

 

 

  지치고 힘들만도 한데.........

  오후 하고도 한나절이 지나도록 죽어라 걷기만 했으니........

  오르타쿄이에서  주점부리로 굼피르마저 없었다면 벌써........

  '이거 죽어라 걷다가 객지에서 길에 쓰러져 딱 죽기 좋은 날이 아닐까?'  싶다.

  이제 남은 힘을 내서  저 앞에 갈라타 다리를 건넌 다음 우측의 배 위에서 파는 '고등어 케밥'을  시원한 캔맥주 하나랑 우선 해치우고 나서.......  군옥수수. 삶은 옥수수를 하나씩 사서 또 주점주점 먹으면서 숙소로 돌아가 푹 쉬면 되겠는데........   밤에 다시 배가 고파지면  다시 밖으로 나오면 되겠는데.......

  마음은 굴뚝 같이  그러라고 시키는데.........

 

  요놈의 두 눈이 가라는 갈라타 다리위로  곧장 건너가지는 않고  훌러덩.........  갈라타 다리를 가로질러  카라쿄이 어시장 골목을 벌써 저만치 지나서   허름해도 너무너무 허름한  그리이스인들이 주로 운영하는  선술집(우리나라 포장마차 골목) 골목 어귀로 돌아나가고 있다.

  '쫓아가지 않고 뭐하고 있어? 다리를 건너면 '골든 혼'이 시작되는 거라구.  올드시티에서만  바라다 보았지  어디 골든 혼 안쪽에서 갈라타 다리나 보스포로스해를 바라본 적이 있어?  바로 저기야.  저기가 골든 혼이라고?   지금 무지하게 배고프다면?  그리스인 선술집 골목에 가봐.  무지 무지 맛있는 음식들이 널렸다니까?  그래도 안가볼테야?  다음에 온다고?  개뿔 다음은 무슨............'  이젠 마음까지 합세를 해서 다그치기 시작한다.

  그러자 이내.......  애초의 내 바램과는 상관없이  두 발이란 놈이 어느새  지하도를 통해 갈라타 다리를 가로질러  건너가기 시작하고 있다.

  '내 안에서 따로 노는  너희들은 도대체 누구냐?'

 

 

 

 

 

 

 

 

 

 

 

 

 

 

 

 

 

 

 

 

 

 

 

 

 

  그리스 선술집 골목이고 뭐고  지금 당장은 술 생각도 없다.  뱃가죽이 달라붙어서 민생고 해결부터 해달라 아우성인데........

  그러던 중에 골목 모퉁이에서  아주 허름해 보이는 케밥집을 만났다.

  맛이고 분위기고 위생이고 따질 겨를이 전혀 없다.  길게 줄서있는 사람들 뒤에 서서  내 차례만 기다려본다.  이정도면 맛집임이 틀림없다.

  그런데........

  우리 한참 전의 지난시절처럼........   푸대 종이라 하나?  누런 두터운 종이에 케밥과 야채가 듬뿍 들어간  긴 빠게트 모양의 샌드위치를  그냥 둘둘 말아 싸주듯이 내게 건네 주는데.........  우와.......  정말 놀라 자빠지겠다.  우리나라 슈퍼 왕버거의 두배 내지는 세배쯤 되는 어마어마한 크기다.

  근처 마트에서 캔맥주 큰거를 하나 더 사서 들고는  인근의  페허가 된 유적들 위로  최첨단 현대식의  다리를 놓아  지하철이 금각만을 건너다니는 철교 아래의 공원 잔디밭에 앉아서  멋진 금각만을 바라보면서  늦은 점심을 먹는다.

  이거야 말로 이스탄불에서 제일 멋진 야외 테라스가 아니겠는가?

  거기에다  이 케밥 샌드위치..........  천하의 명물 케밥이다.  내가 그동안 먹어본 많은 케밥중에서 단연코 최고다.  어쩐지 후미진 골목에  별볼일 없어 보이는 가게에 길게 줄을 섰더라니..........  거기다 내 식성을 기준으로 해도  족히 2인분은  넉넉히 되고도 남겠다.

  '그래.  이게 바로  여행의 맛이야.'

  '괜히 이제껏 쫄쫄히 굶고 다녔겠어?  다 이유가 있었던거야. 그럴만한 이유가. ㅎㅎㅎ'

 

 

  이스탄불의 골든 혼에는 4개의 다리가 설치되어 있다.

  입구쯤에 있는 것이 바로 갈라타 다리다.  보스포러스해의 상징과도 같은 유명한 다리다.

  갈라타 다리 안쪽으로 골든혼(금각만)을 바라보면서 다음에 위치한 다리가 지금 내가 쉬고 있는  지하철 교량이다.  이 교량의 딱 중간에 지하철역이 설치되어 있다.  그러니까  철로의 양쪽 아래로 사람이 오고가는 인도교가 합께 설치되어 있는 것이다.  갈라타 다리에서  금각만 안쪽으로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것이 무억이나 아름답다고 하는데.......  여기  철교에서 바라보는 노을 또한 아주 아름다울 것 같다.

  다시 그 안쪽으로 '아타투르크 다리'가 놓였는데,  갈라타 다리의 운송량을 분할해 주는 역활을 톡톡히 해니고 있다.  탁심을 비롯한  이스탄불의 핵심지역과 연결하는 아주 중요한 다리이다.

  금각만의 가장 깊숙한 곳에 하리크 다리가 있는데 이는 고속도로 전용 다리이다.

  철교의 높은 교각에서 내려다 보는  갈라타교와 아타튀르크교,  그리고 주변의 풍광은 대단히 빼어나다.

  가히 일출 일몰의 아름다운 풍경이 상상이 되고도 남았다.

 

 

 

 

 

 

                                                                                                     -- 철교에서 건너다 보는  아타튀르크 교.

 

                                                                -- 철교에서 내려다 본 갈라타교.  배경 저만치  예니자미와  하기아 소피아 성당이 보인다.

 

                                                                                         ---  파티 술레이만 자미(술탄 마호멧 1세 사원)

 

 

 

 

 

 

 

 

 

 

 

 

 

 

 

  걸어도 걸어도 끝이 없을것만 같은  내 방식의 자유여행.

  오늘 하루 걸었던  시간들을 기록해 보면서도  이렇게나 길 줄이야.......    남아있는 오늘 하루는 아직도 한참이나.........

  남은 발걸음은  아무래도 다음 이야기로 남겨두어야만 할 것 같다.

  너무 길어져서.........

  카라쿄이에서 골든 혼을 건너온 발걸음은 이제  '발렌시아 수도교'를 향해 다시 걸어갑니다. 

  '발렌시아 수도교'를 포함한 이날의 나머지 여행기는  이번 여행기 마지막 부분에  '테오도시우스 성채 탐방'과 엮어서 그때  기록으로 올려보려 합니다.  다음 이야기는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으로 건너가 보겠습니다.  기대해 주세요.  감사합니다.  피안재.

 

  여기는 여전히 이스탄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