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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베트남) 동양의 작은 프랑스 - 사이공을 가다

by 피안재 2017. 11. 3.

 

 

 

 

 

 

 

 

 

 

 

 

 

  애초 이번여행에서 최우선을 둔 목적지는 (앙코르유적)이었다.  그리고 하나를 더하자면 (호이안)이라고 말하겠다.

  지난 나의 여행기록사진들을 본 챠밍여사가 (앙코르유적)을 무척 가보고 싶다고 했고, 나는 (호이안)을 꼭 보여주고 싶었다.  거기에다 우리는 이번 동남아여행을 기점으로 일단 (아시아 투어)를 마무리 하기로 했다. 인도네시아 화산투어. 쓰리랑카. 부탄을 가보고 싶지만 다른대륙의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음부터는 유럽과 아프리카로 눈을 돌려보기로 했다.

  하여 처음에는 씨엠립으로 들어가서 다낭으로 나오는 구상을 했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동남아여행이라면 힘들더라도 좀 더 돌아보자 하는 마음으로 방콕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육로로 버스를 타고 걸어서 국경을 넘어 캄보디아 씨엠립에 들어가 (앙코르유적)을 만났고,  이제 다시 버스를 타고 걸어서 국경을 넘어 베트남 땅 호치민(사이공)에 도착을 했던것이다.

  호치민은 가벼운 경유지였다.  다음의 무이네도 가벼운 경유지였다.  나짱은 저녁식사를 하는 장도로 아주 잠시 머물고......  마침내 (호이안)으로 갈것이다.  여행의 모든 마무리는 호이안에서 할 예정이고,  하루쯤 다낭 나들이 예정이고, 그 다음은 집으로 돌아가는 여정이다.

  챠밍여사는 친정식구들과 하노이와 하롱베이를 다녀간 적이 있고,  나는 다당. 호이안. 후에(훼). 나짱. 무이네를 다녀간 적이 있다.  하지만 우리 모두에게 호치민은 처음이었다.

 

 

  제멋대로여서 그리 유쾌하지는 않았지만 아무튼 국경을 넘어서 우리를 데려온 낡은 버스는 벤탄터미널 맞은편에 우리를 내려주었다.  목적지까지 무사히 도착했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소방호수에서 거센 물줄기를 뿜어내는 듯 엄청나게 퍼붓는 폭우는 미처 위치파악을 할 틈새조차 주지를 않는다. 버스에서 내팽개쳐지듯이 내리자마자 그대로 앞의 과일야채상점 처마 아래로 들어갔다.  고개짓으로 양해를 구하는 둥 마는 둥....... 넉넉한 베트남아주머니 그냥 멋적게 웃음을 보내온다.

  잠시 마음을 진정시키고 하늘을 아무리 올려다보아도 비는 조금이라도 줄어들 낌새조차 없다.  사방으로 인도고 차도고 모두 물바다.  이거 제대로 걸려들었다는 암담함이 전신을 엄습해온다.  그런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는 챠밍여사........ '괜찮아 이정도 쯤이야' 하는 눈초리다.

  주인아주머니에서 지나가는 이사람 저사람 붙잡고 물어보아도......  그들은 영어를 모르고 나는 베트남어를 모르고........ 핸드폰이나 여행스케줄표에서 주소를 보여주고 싶어도 폭우때문에 배낭에서 아무것도 꺼낼 수가 없다.  그러다 번뜩 떠오르는 생각.......  버스에서 숙소 인근의 지도를 살펴보았는데 '버거킹'이 숙소 부근에 있어서  거기만 찾으면 스스로 찾아갈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시 버거킹의 위치를 물어보는데..... 그도 알아듣지를 못한다.  저만치 있는 여행사사무실로 달려갔다.  말이 통할까 싶어서. 아주 친절하게 버거킹 위치와 10분만 돌아가라는 안내를 해준다.  그래서 폭우속으로 배낭을 둘러맨 채 함께 뛰어갔다. 마침내 버거킹을 지나서 아주 좁은 여행자 숙소 골목에 들어가서 또 이리저리 수소문해서 마침내 내가 미리 예약한 숙소에 도착했다.  참으로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다음날 산책길에 보니 어제밤처럼 삥 돌아 올것이 아니라.  어제 버스에서 내린 곳에서 곧장 들어왔으면 더 빠르고 쉽게 올 수 있었던 길이었다.  ㅎㅎㅎㅎ  미티 미티.(초행길이 다 그렇지 뭐.........)

  완전히 비에 폭싹 젖어서 겨우 숙소에 도착하니  놀란 호텔직원도 구두로 예약확인만 하고......  일단 방으로 안내해 줄테니 씻고 닦고 나중에 체크인이고 계산이고 하잔다......... 매우 감사한 일로 여기고 직원 안내를 따라나섰는데.......  오.마.이.갓.......  챠밍여사 기절할 뻔 했다.

  내가 뷰가 좋은 높은곳의 방을 원한다고 메일까지 보냈던 결과로..........  아주 좁은 계단으로 5층(우리나라식이면 6층)을 올라간다.

  올라가는 내내 원망의 소리와 함께 절망의 탄식이 울려 퍼진다.(거의 페낭의 수상가옥 수준으로......)

  방에 들어가서 타올로 머리를 털어내면서도 (이건 못견디지.....   방 바꿔 달래자.  2층으로......) 연실 원망 가득한 하소연을 하는 챠밍여사.

  --- 야. 이건 정말 해도 너무한거지.......  뷰고 지랄이고 6층을 수시로 오르락내리락하려면.......... 후런트에 내려가 부탁해 봐?

  챠밍여사의 원망을 배겨 낼 자신이 없어서 무조건 후런트로 내려가볼 심산으로 아무 생각없이 그저 굳게 닫혀져있던 커튼을 확 재꼈는데........

  아.  그러니까 무엇이냐 하면........  그것이.........

  와!

  와!

  와!

  '태리할미야.  우리 그냥 이방에 있자. 다른방으로 바꾸면 이 뷰가 안나올꺼야..........'

  '그럴것 같네........'

 

 

 

 

 

 

 

 

 

 

 

 

 

  '우리가 언제 방 바꿀거라 그랬나?'

  ㅎㅎㅎ

  우린 둘 다 그런면이 좀 있다.

  샤워하고 마른 옷으로 갈아입고 내려가서 체크인하고 잠시 나가서 간단히 식사하고 되돌아왔지만........  까짓 6층 계단쯤이야.......

  ㅋㅋㅋ

  깔끔한 방이 작은편도 아니다.

  화장실도 깨끗한게 더운물과 수압도 빵빵하고.....  머리맡 벽의 그림부터 전체적으로 벽지나 커튼이나 모든것이 상당히 세련된 분위기의 방이다.

  빵빵한 에어컨에 선풍기까지......   머리말리고 양말 수건 말리기 딱이다.

  정말로 도심의 뒷모습 풍경이 압권인 멋진 뷰가 가득한 전면으로 탁트인 커다란 창으로 침대에 누워서도 시시각각 빛에 따라 모두 다른 분의기의 풍경이 그대로 내다 보인다.  그 창앞에 작은 티테이블과 의자 두개.

  정말로 정말로 내가 딱 좋아하는 분위기의 방이다.

  혹시나 누군가 호치민에 가보실 생각이시라면 여행자거리 골목 안쪽에(처음 찾아가기는 좀 힘들겠지만) 에이리언 가든 호텔(Ailen Garden Hotel) 죽어라 올라가야 하는 5층 계단위의 방을 권해드리고 싶다.  가장 꼭대기 층이며  호텔의 옥상을 철판으로 시공했는지 잔잔하게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마져 교향곡처럼 들려오는 방이다. 5층엔 방이 2개 있는데.....  꼭 다음 사진의 방을 권하고 싶다.

  침대에 누운채로.......  티 테이블에 와인이나 맥주잔을 기울이며 멍하니 턱을 괴고 내다보는 풍경이 아름다운 방.........

  윤태리 선물인 작은 분홍코끼리가 놓여있는 방........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수도는 하노이다.

  하지만 1975년 4월 30일 베트남 통일전쟁이 북군의 승리로 막이 내리는 순간까지 국제사회가 공인하는 베트남(남군)의 수도는 사이공이었다.  승리한 북군 정부(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는 수도는 하노이로 하고 사이공의 도시 이름을 통일의 영웅이었던 호치민의 이름을 따서 붙였다.  베트남 경제 문화의 중심지는 아직도 사이공(호치민)이다.

 

  베트남은 90%에 이르는 Viet족(베트남족)과 여러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불교국가이다. 다양한 소수민족이 분포해 있지만 중국에서 이주한 화교(약 100만명)가 절대적으로 막강한 경제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다.

  이처럼 베트남의 고대역사는 온통 중국의 침략과 중국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처절한 몸부림으로 전철되어 있다.  베트남족(비엣족)은 주로 중북부 지방의 산악지역을 중심으로 농업에 종사하며 살아왔다.

  여기에 2세기경에 인도네시아에서 일부의 참족이 남부지방 나짱(나트랑)에 상륙하여 생활을 시작했다.  이들은 어업문화권이었으면 뛰어난 조선술을 가지고 점차 해상무역 세력으로 성장해 간다.  본토의 원주민인 베트남족은 바다 건너온 참족을 상대로 끊임없이 전쟁을 벌였지만 번번히 패해서 북쪽의 고산지대로 거주지를 옮겨 살게 되었다.

  해상무역왕국을 건설한 참족은 앙코르지역(크메르)와 미얀마의 바간 지역에서 태국의 아유타이 지역을 포함 인도네시아 자바섬에까지 영향을 미칠 정도로 강성한 국가로 발전했다. 나트랑을 수도로 호이안의 미선유적군을 종교 성지로 삼았을 만큼 강성한 대국의 위용을 갖춘 왕국이었다.

  14세기 말에 이르러 다시 세력을 규합한 베트남족(비엣족)과의 싸움에서 번번히 패배하면서 급격히 쇠락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15세기에 이르러 참족은 멸망하여 소수민족으로 전락해 메콩강 하류에 일부가 살아오고 있으면 종교도 무슬림으로 바뀌었다.

  참족을 멸망시키고 왕국을 되찾은 비엣족은 레 왕조와 응웬 왕조를 거치면서 번성을 하다가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강탈 정책)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휩쓸고 지나가던 시점에서, 프랑스 선교사를 처형했다는 구실로 프랑스가 군대를 파견해 전쟁이 벌어지고 패배한 결과로 프랑스의 식민지로 전락한다.  천년에 가까운 중국의 지배에서 겨우 벗어나니 이번엔 프랑스였던 것이다. 쌀과 고무를 수탈했고,  수탈을 위해 철도와 도로를 확충하면서 이를 위해 또 과도한 세금을 부과했다.  이에 분노한 베트남은 또 다시 해방전쟁에 돌입하게 되었다.  프랑스를 상대로 한 수많은 독립투쟁운동가 중에 한명이 바로 호치민이었다. 이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프랑스는 사이공을 거점으로 꾹두각시 정부(남군)를 세우고 뒤에서 조정하면서 국제사회의 비난에서 슬쩍 비켜가려고 하였다.  여기에서 베트남전쟁이 프랑스를 상대로 한 해방전쟁이 아니라,  민족내 남북간의 내전으로 와전되기도 했다. 프랑스의 함정이었던 것이다.  전쟁을 지원하고 조정하면서 그들의 약탈 수위는 점점 더해져만 갔다.

  그 와중에 2차 세계대전이 벌어졌고 독일의 침공으로 영국으로 망명한 프랑스 정부는 베트남에서의 수탈이 프랑스의 생존에 더욱 중요해질 수 밖에 없었다.  2차대전 종전 후,  국력이 약해질대로 약해진 프랑스는 더이상 군대를 주둔시키며 베트남 남군을 지원할 수가 없게되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프랑스는 슬쩍 미국에게 베트남의 실질적 통치권을 이양하는 문제를 제기하였고,  이를 미국이 덥썩 물었다.

  CIA를 동원한 (통킹만) 사건으로 미국이 베트남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고  파랑스는 슬쩍 빠져나갔다.

  그리고 결과는....... 250년의 미국역사 가운데 국가간의 전쟁에서 유일하게 단 한번의 패배를 경험하고 쪽팔리는 철수를 단행하게 된다.

  다윗(베트남)과 골리앗(미국)의 싸움이랄까?  마이크 타이슨(미국)이 더글라스(별볼일 없던 지극히 미미한 베트남)의 불의의 일격에 허무하게 링위에 나자빠지던........  그런 해괴한 역사의 현장이었다.

  베트남의 해방을 위해 모든것을 바쳤던 호치민은 처음 프랑스와 전쟁을 치루었고,  프랑스의 약세를 틈타 은글슬쩍 끼어들려던 일본과도 싸웠다.  그리고 종국엔 프랑스 대타로 등장한 지구상 최고의 강대국 미국을 상대로 죽창을 들고 땅굴을 파고 끝까지 독립전쟁을 불사했다.  하지만 끝내 그는 베트남의 해방을 보지 못하고 운명했다.

  79년 80년 내가 불온서적(?)들을 통해 만났던 혁명가 중에서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 3인을 꼽으라면 호치민. 채게바라. 모택동을 꼽겠다.

  하지만 지금 베트남 어디를 가도 그 (미제국주의의 타도)를 외치며 죽창을 들고 총을 든 호치민의 모습은 찾을래야 찾을 수가 없다.  나이지긋한 턱수염을 기른 가냘프고 온화한 얼굴을 가진 초로의 노인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베트남의 온 국민은 입으로 마음으로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른다.

  자신이 죽으면 화장을 해서 베트남의 국토 여기저기에 흩뿌려달라던 그의 유언은 지켜지지 않은 채,  이 순간에도 하노이의 거대한 묘지에 온화한 모습으로 보관되어 내방객들을 맞고 있다.

  그의 사진을 볼때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한다.

  '얼마만큼의 국가에 대한 사랑이 있어야 그 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그가 사랑한 국가는 과연 어떤것이었을까?'

 

 

 

 

 

 

 

 

 

 

 

 

 

 

 

 

 

 

 

 

 

 

 

 

 

 

 

  어디를 가나 넘쳐나는 사람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오토바이의 행렬.  이것이 베트남이다.

  베트남은 젊다.(인구 평균연령 30대 이하)

  베트남은 활기에 넘친다.

  베트남에서 하루가 다르게 치솟는 고층빌딩 만큼이나 급격하게 솟아오르는것은 바로 교육열이다. 교육을 통한 창의적이고 급속한 발전을 추구하는 베트남의 롤 모델은 바로 대한민국이다. 아직은 아시아에서 중위권 정도의 경제력을 갖추었지만,  그리 오래지 않아 한국의 경제를 위협할만큼 급속하게 성장할 무한한 잠재력을 가진 아시아 국가로 나는 주저하지않고 베트남 이라고 말하겠다.  그들은 석유를 포함한 엄청난 지하자원도 보유하였다.  오랜 세월동안 잠자고 있던 베트남의 성장동력이 이제 서서히 시동을 걸고있는 판국이다.

 

  천년의 세월 이상을 거대한 중국의 지배하에서 억눌리며 살아왔다.  중국식의 의식과 사고가 그들의 정신세계 기반에 고정관념처럼 아직도 자리잡고 있다.  비록 하나의 국가로 자주독립하였다고는 하나,  소수의 화교가 거대자본을 끌어앉고 베트남의 경제를 좌지우지 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돈은 소수의 화교가 움켜쥐고 있고, 부와 명예도 그들만이 누리는  화교의 나라가 아닌 베엣족의 나라 베트남.  현대사의 아이러니가 동남아 국가에서는 흔하게 볼 수 있는 현실이다.

 

  그리하여 베트남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중국에 대해서는 핏줄속까지 엄청나게 배타적이다.(우리가 의도적으로 일본을 배격하듯)

  다음으로 베트남 사람들은 일본을 많이 꺼려한다. 그들도 역사속에서 이미 쪽발이 근성에 대해서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식민시대를 겪었음에도 프랑스에 대해서는 싫다 좋다가 아닌 무덤덤한 반응을 보인다.

  참혹한 베트남 전쟁의 결과로 미국에 대한 반감은 여전히 엄청나다.  하지만 이젠 그 적대감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는다.  미국은 역사의 적이 분명하지만,  오늘날의 국제관계속에서 살아나가야 하는 현실에서 미국을 적으로 두지 않는것이 이롭다는 것을 그들은 깨달았다.  하여 미국인 관광객들을 웃으면서 맞이한다.  하지만 결코 지난 역사를 잊지는 않고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 하게도........  베트남 사람들이 반갑게 우방으로 가족처럼 대하는 나라는 단연  대한민국이 으뜸이다.  한국인에겐 엄청나게 호의적이다.  한국이 베트남전에 미국편으로 참전해 많은 아픔과 상처를 남겼음에도.......  그들은 한국인을 무척 반긴다.  역사의 아품은 미제국의 강압에 어쩔 수없이 전쟁에 참여해야 했던 또 다른 이면의 약소국가 한국의 서러움이었다고 이해한다.  반면에 베트남 사방으로 도로를 건설하고 다리를 놓고(전쟁과 작전을 위해서) 한것이 종전 이후 베트남 발전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고 오히려 칭찬이 자자하다.

  내가 다녀 본 나라 중에서  비자 면제국가는 여럿이 있지만,  한국인에 대해서만 출입국 카드 조차도 필요치 않다고 배려해주는 나라는 베트남이 유일하였다.  외국비행기로 베트남에 들어가려면 출입국카드를 작성해야 하는데  한국인이냐 물어와서 그렇다고 하면 카드작성지를 아에 주지도 않는다.  이거 돌아다녀본 사람들은 안다.  은근하게 가슴 뿌듯한 자부심으로  슬며시 다가온다는 것을.

  자랑스런 나의 조국.   대.한.민.국.

 

 

 

 

 

 

 

 

 

 

 

 

 

 

 

 

 

 

 

 

 

 

 

  지난밤의 그 참담했던 물난리도 우리의 여행에 걸림돌이 되지는 못한다.  지나고 나면 그 또한 좋은 추억이 될터이니 말이다.

  변함없이 새벽에 일어나 우리는 또 낯선 도시속으로 산책을 나선다.

  여행자 거리를 벗어나 북쪽으로 대로를 건너면 바로 잘가꾸어진 시민공원이다.

  조깅하는 사람. 배드민턴 치는 사람. 중국식 기체조를 하는 사람.  공원 한켠으로는 각자 새장을 들고나와 새 울음소리와 새벽공기를 마시며 차를 즐기는 부류의 사람들이 모여있다.

  우리는 계속 숲길이 이어지기를 바라면서 걷고 또 걸었다.  이 공원은 또 다시 가로수 우거진 길을 건너면서 통일궁이 있는 문화시민공원까지 이어진다.

  그러다 눈 앞에 쨘 하고 나타난 거대한 성당 건물. 후엔시 성당이다.

  본래는 높은 첨탑의 지붕 부분만을 빼고는 온통 흰색의 우아한 건물인데  새벽햇쌀에 물들어 아이보리색을 입은채 내 카메라에 잡혔다.

  후엔시(huyensy) 성당은 베트남현지인들의 성당으로 콜로니얼 건물이라 하겠는데,  현재 호치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모여 (호치민 한인 천주교회)로 빌어서 예배를 보는 성당으로 알려져있다.

  프랑스 본토의 건물들을 모방하거나 프랑스의 건축 기법을 살려 식민시대에 건축한 많은 건물들이 호치민 곳곳에 산재해 있다.  호치민의 주요 공공건물들은 대부분 프랑스식민시대가 남겨준 콜로니얼 건축물들이라 하여도 전혀 틀린말은 아닐 것이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자신들의 식민지거나 자신들의 여향력이 미치는 곳에 직접 프랑스에서 건축가와 건축자재들을 실어날르면서까지  프랑스풍의 건물들을 짖기를 즐겨하였다.  사방에 늘어선 당시의 건축물들은 유독 아름답다.  정말 프랑스에는 가보지 못했으면서도 프랑스를 느낄 수 있을것만 같다.

  호치민(사이공)은 정말 동양에 남아있는 작은 프랑스다.

  그렇게 그렇게 걷고 또 걷다보니 통일궁의 옆면을 스쳐지나가면서...... 마침내 또 다른 거대한 성당의 뒷모습이 희뿌연 아침 안개속에서 나타난다.

  프랑스 쎄느강변에 있는 어느 커다란 성당의 모습이 저절로 떠오른다.

 

 

 

 

 

 

 

 

 

 

 

 

 

 

 

 

 

 

 

 

 

 

 

 

 

 

 

 

 

 

 

 

 

 

 

 

 

 

 

 

  베트남에 있는 콜로니얼건축의 백미로 일컬어지는 노틀담사원과 현재도 사용중인 중앙우체국을 둘러보았다.  기념품 가계어서 베트남 하면 떠오를 기념품도 샀다.  건너편에 있는 카페빈에서 이른 아침부터 분주하게 성당과 우체국 주위를 오가는 베트남 사람들과 오토바이행렬을 바라다 본다.  세계적인 체인점임에도 커피맛이 영 좀 그렇다.

  새벽부터 덤벼드는 무더위도 식힐겸 해서 제법 오랜 시간을 느긋하게 야외 테라스에 앉아서 망중한을 즐겨본다.

  카페빈에서 나서서 채 20미터도 옮겨가지 못했는데  바쁜 모습의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 사서 들고들 가는데......  그것이 궁금하다.

  달랑 자전거에 중간크기 아이스박스가 전부였다.  그 옆에 땅바닦에 젊은 처자가 쪼그리고 앉아서 이상한 기계로 커피를 추출하고 있다.    ㅅ상에서 최고로 간단한 소규모 스&벅스 같다고 할까?  연이어 지는 사람들을 보니 방금 카페빈에서 커피를 마셨음에도 또 마시고 싶은 충동이 강하게 일었다.  그래서 나도 줄을 서서 주문을했다.  쪼그린 처자가 검게 추출된 커피원액을 플라스틱 용기에 조금 담아서 내주면 젊은 사내가 아이스박스에서 얼음을 꺼내 가득 담은 다음  옆에 플라스틱 통에서 연유를 듬뿍 뿌려 손님에게 내어준다.  가격도 어찌나 저렴한지 방금 나온 카페빈의 1/7 수준이다.

  잠시 흔들어 젖다가 빨대로 한모금을 마셔보았는데.......   오.마.이.갓.

  내가 이제껏 동남아를 다녀보면서 마셔본 커피중에서 최고로 맛있다.  챠밍여사도 내 생각에 기꺼이 동의 했다.  정말 기가막힌 (쓰어다)를 노틀담 성당 건너편 카페빈 옆구석의 자전거 스&벅스에서 맛 볼 줄이야...........  와! 우!

  그렇게 감탄하면서 쓰어다(연유가 든 아이스커피)를 마시고 있는데 챠밍여사의 손이 또 길건너를 가리키고 있다.

  바라보니 또 거기에도 사람들이 줄지어 서있다.

  그러니 또 어떻하겠어.......  무단횡단하면서 쫓아갔지.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들여다 보니 다름아닌 반미(베트남식 빠게트빵 샌드위치)를 파는 노점상이었다.

  그래서 또 줄을 서서 샀다.

  그리고 챠밍과 반씩 나누어 먹었다.  그 맛이.........  정말로 정말로  기가 막히다.  반미 또한 이제껏 먹어 본 중에 최고의 맛이었다.

 

  역시.......  아무래도 우리는 로컬 체질인가봐.

 

  새벽산책의 기분을 제대로 내면서 발걸음을 옮기는데..........

  '와!  이런게 정말 콜로니얼 이구나.' 하고 감탄사가 절로 나오게 하는 노란 건물이 나의 시선을 잡아 끈다.  책자에서도 보지 못했던 건물이다.

  정말 멋졌다.

  카메라 촬영 금지라는 팻말이 보여지기에 얼른 누가 볼세라 몰래 셔터를 눌렀다.  그리고 안쪽에서 청소를 하고있는 사람이 보여서 '도대체 이 건물이 무슨 건물이냐' 물어보면서 다가서는데....... 영어를 못알아듣는 아주머니가 불쑥 나타나 뒤로 물러서라고 고함을 쳐댄다. 정색을 하고 다자고짜 나가라는 표정이다.  다소 멋쩍은 기분으로 물러설 수 밖에.......

  지나와서 생각에는 아마도 어떤 나라의 영사관이나 대사관이 아니었을까 싶다.  아무리 뒤져보아도 같은 건물 사진을 보지를 못하겠다.

  얼핏 그리스 신전이 떠오르던 멋진 콜로니얼 건축물이었는데 말이다.

  아직도 그건물의 정문 양쪽으로 서있던 새하얀 멋진 용사의 조각상이 떠오른다.

  가다가 힘들면 쉬고.....  쉬다가 지루해 지면 또 걷고........ 그러다 또 힘들어지면 카페에 들어가 쓰어다 마시고.......

  이번여행 14박 중에서 유일하게 수영장이 없는 호치민에서의 이틀......

  그리고 나서 우리는 길건너 저편에 있는 호치민 시립박물관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같이하여 물오른 나의 베트남을 비롯한 인도차이나의 근현대사 강의가 이어진다. 

  새벽 산책이 길어져서 아침나절이 지나가는 시점이 되고 보니 무더위의 기승이 보통이 아니다.  산책 치고는 오늘 좀 무리했지 싶었다.

  박물관을 대충 둘러보고 나서 반탄시장으로 갔다.  이미 시장은 사람들로 붐비다 못해 혼잡을 이루고 있다.  모든게 힘겨워진다.

  그래도 발걸음을 옮기며 서너가지 쇼핑을 하다보니......  어느새 해맑은 웃음을 피우고 있는 챠밍여사. 

  '쇼핑은 다 죽어가는 여자도 벌떡 일어나 백화점으로 길을 나서게 하는 힘이 있다.'

  헐.

 

 

 

 

 

 

 

 

 

 

 

 

 

 

 

 

 

 

 

 

  호텔에서 충분한 휴식을 취한 다음 다시 거리로 나왔다.

  우선은 내일 아침 무이네로 떠날 버스편을 에약하는 일이 우선이었다.  여러 여행사가 들어서 있는 거리로 나가서 풍짱투어를 찾았다.

  신투어리스트(신카페)와 풍짱투어리스트(풍짱카페)는 베트남 전역을 커버하는 베트남 여행사의 양대산맥이다. 그 외에도 여러 여행사가 있지만.

  가장 먼저 시작하고 자리잡은 신카페가 베트남 전역을 커버하고 있는 여행사라면,  풍짱은 뒤늦게 출발하여 쾌적한 신형버스유입과 다양한 컨텐츠개발로 맹렬히 뒤를 좇아가고 있는 형국이라 하겠다.  대다수의 한국인 여행자들은 신카페(신투어리스트)를 주로 이용한다.  신투어를 이용하면 베트남 전역의 이동이 무조건 가능하고,  각 지역별 숙소문제와 다양한 지역적 투어 프로그램들이 완비되어 있기 때문이다.  베트남 여행의 모든것은 신투어에서 시작하고 신투어에서 끝난다는 말이 나올 정도이다.  그런 이유에서라면  물론 나도 그렇다라고 동의한다.

  다만 한곳......  호치민과 무이네를 오가는 구간만은 상황이 좀 다르다 하겠다.  내가 내린 결론으로는 아마도 호치민 무이네 구간을 신카페는 페석 내버리듯이 가장 무관심하게 등한시 하고 있는 구간이 아닐가 하고 생각된다.  이 틈새를 새로운 하나의 돌파구와 발판으로 삼기위해 풍짱이 거꾸로 가장 역점을 두는 구간으로 인식 했다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이유는 이러하다.  신카페는 호치민 무이네 구간을 하루 4차레 왕복한다. 아침과 낮은 일반버스로 운행하고,  저녁과 심야에는 슬리핑 버스를 보내면서 운임을 차등해 심야버스비가 좀 더 비싸다.  하지만 풍짱은 하루 7회 이상을 모두 슬리핑버스로 이 구간을 운행하면서 요금은 신카페의 일반버스요금 수준으로 운행한다.  확실히 풍짱의 버스들이 신카페에 비해 신형이고 편안하다.  그리고 더 친절한 배려를 해준다.  그것은 분명하다.

  이런 이유로 당연히 무이네까지의 구간은 풍짱(풍트랑) 버스를 이용하기로 했다.

  아침 7시45분까지 다시 여행사 후런트에서 비행기처럼 보딩패스를 하고 8시에 출발한다.  무이네로.......

 

  노틀담성당 건너편의 자전거에서 파는 쓰어다 커피가 너무도 먹고 싶어서 부랴부랴 무더위속을 걸어서 거기까지 찾아갔다.  그런데 없다.

  반미 가계에 찾아가서 물어보니....... 그 스&벅스 쓰어다 카페는 오전에만 반짝 장사하는 점포란다.  아이스박스에 얼음 떨어지면 바로 문을 닫는 아침 가계인데도 인근에서 그렇게 손님이 몰려온단다.

  헐.

  그 사람들 낮엔.....  또 저녁엔 도대체 뭘하나?

  그 정도 인지도면 인근 점포 얻어서 냉장고를 들여 놓던지,  시간대 별로 추가 얼음 배달을 시키던지.......  장사 제법 될 터인데.......... 부자되기 싫은가봐. 아무래도.

  헐.  쓰어다 한잔 마시려고 이 무더위속에 여기까지 쫓아 왔더니만.......  내일은 다시 올 수가 없는데.........

  우.이.씨.

 

  도심에 어둠이 찾아들고 하나 둘 불이 켜지는 야경을 구경하면서 또 걷는다.

  곧 시간이 되면 노틀담성당과 중앙우체국에 화려한 조명이 켜져 멋진 야경이 펼쳐진다고 여행자들이 하나 둘 모여든다.  그건 우리 타입이 아니다.

  돌아오는 길에 아침에 건너뛰었던 통일궁도 슬쩍 들여다보고........

  반탄 시장에 다시가서 쇼핑도 하고.......

  호텔에 돌아와 샤워를 마치고 다시 여행자 거리로 나선다.

  여행에 뭐 있어?

  맛난거 찾아다니며 실컷 먹고 또  실컷 노는거지.......... ㅎ

  일단 가볍게(?) 저녁을 해치운 뒤  잠시 여행자 거리를 거닐다가.......

  본격적으로.........

 

  하이라이트는 뭐니뭐니 해도 사이공맥주 병나발 아니겠어?

 

 

 

 

 

 

 

 

 

 

 

 

 

 

 

 

 

 

 

 

 

 

 

 

 

 

 

 

 

 

 

 

  그리고 다음날 아침......

  뚝 뚝 떨어지는 빗방울을 벗하면서 우리는 무이네로 향하는 슬리핑버스에 몸을 실었다.

  챠잉여사로서는 처음 경험하는 말로만 듣던 슬리핑버스........ ㅎ

  신기하면서도 제법 신나해하는 모습이다.

  무이네야 기다려라.  이제 너를 만나러 우리가 간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