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일찍 일어나 채 먼동이 트기도 전에 거리로 나왔다.
오늘은 미얀마의 만달레이로 이동하는 날이다.
언젠가 방콕을 다시 올 기회는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미얀마 비자문제 해결)만을 위해서 잠시 훌쩍 다녀간다는 것이 쉽게 마음속으로나마 허락되지 않았다.
그래서 시간이 허락되는만큼 어느정도의 방콕은 둘러보고 가야만 하겠다는 생각이 앞섰다.
적어도 왕궁과 올드타운 정도는 둘러보고나야 그래도 방콕을 드나들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방콕행 항공권 프로모션을 살피던 지난 10월 중순(2016년)쯤에 태국의 국왕께서 서거하셨다는 소식은 뉴스를 통해서 접했었다. 국상이 1개월에 걸쳐 치루어진다는 소식에 12월 여행에는 별지장이 없겠다고 까지는 생각을 했었다.
그제 밤에 입국할때도 공항이나 관공서등 앞에 서거하신 국왕의 커다란 사진과 함께 분향소들이 여기저기 많이 설치되어 있다는 점 외에는 별다른 아무런 느낌이나 불편이 전혀 없었다. 그저 여느때처럼 지극히 평상처럼 보이고 느껴지는 방콕의 모습들이었다.
처음 목적지로 삼은곳은 당연히 왕궁이었다. 왕궁을 찾아가면 에메랄드사원까지를 한 장소에서 모두 만날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왕궁에 점점 가까워지면 가까워워질 수록 익숙치않은 뜻밖의 낯선풍경을 만나게 되었다.
서거하신 국왕의 장례식은 분명 한달이 훨씬 지나있는 시점이 분명하였음에도, 태국은 여전히 국상 중이었다.
관공서마다 거리마다 그리고 이곳 왕궁주변에서 만나게되는 수천명의 사람들 표정에서도 여전히 국상은 진행중이었다.
곧 (국왕 서거의 애도기간이 1년)이라는 사실을 들어서 알게 되었지만, 어찌되었든 참으로 놀라운 충격적인 광경이었다.
왕궁과 옆구리를 맞대고 있는 (씨남 루앙) 왕실공원에는 온통 검은색 상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수천명은 족히 넘을 문상객들이 공원에 가득 설치된 천막들 안에서 거의 기거하다시피 하면서 서거하신 왕의 명복을 빌고 있었다. 이곳을 드나드는 수없이 많은 오토바이와 뚝뚝과 버스와 여행사버스마다 온통 검은 상복을 입을 문상객들의 왕래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마치 아침 조문을 마쳐야 하루 일과를 시작할 수 있는 사람들의 행렬로 보여지고 느껴졌다.
아!
나는 이제껏 살아오면서 이렇듯 모든 사람들로부터 절대적 존경과 추앙을 받는 사람을 본적이 없다. 그 어떤 종교가나 그 어떤 정치가나 그 어떤 사회봉사자나 공헌자를 통털어서도 말이다. 어찌보면 이것은 사람이 사람에 대한 존경과 추앙을 넘어서, 신(절대자)에 대한 존경과 추앙을 넘어서거나 초월하는 경지로까지 느껴졌다. 앞으로 남은 인생을 살아가는 동안에도 이런 광경을 다시 볼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저절로 생겨날 정도였다.
왕궁으로 향하는 모든 도로는 철저하게 봉쇄된 상태였다.
방콕의 대부분의 경찰은 모두 이곳에 집결해 있었다. 육균 해군 공군소속의 군대들도 동원되어 왕궁주변을 철저하게 에워싸고 있었다.
한달동안의 국장일이 지나면 왕궁 일부와 에메럴드사원이 다시 여행자들에게 개방될거라는 발표가 있었지만, 언제 다시 실제로 개방이 될지는 현재로서는 오리무중이었다.
새벽부터 찾아나선 길이었지만 왕궁과 에메럴드사원은 봉쇄된 상태였다.
그래서 경찰과 군의 저지선을 따라 커다란 왕궁의 울타리를 한바퀴 돌아보았다.
21세기 최첨단의 시대를 살아가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 있어서 과연 (입헌군주제)란 무슨 의미일까?
삼류 매스컴이나 간혹 가십꺼리에나 등장하는 다이애너비나 엘리자베스여왕, 그리고 최초로 살아서 왕위를 물려주겠다고 나선 아키히토 일본국왕의 얘기꺼리 정도이지, (입헌군주)니 (왕)이니 (왕세자)니 하는 이야기는 우리 피부에 그렇게 썩 다가오거나 느껴지지 못한다.
영국왕실이나 스페인왕실 등이 툭하면 스캔들로 얼룩지자 그 나라 국민들이 (허울뿐이고 국세나 낭비하는 왕실제도를 해체) 하자는 뉴스도 간간히 접하는 세상이고 보면 말이다. 일본의 경우도 약간 다르다고는 하나 맨 거기서 거기인 경우가 아니겠는가.
가만히 생각해 보자면 (입헌군주)란 단어는 이제 (막스레닌 공산주의)이란 단어만큼이나 낯설고 멀게만 느껴지는 작금의 세상에 말이다.
그런중에 이번에 나는 정말로 뜻밖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비록 서거는 하셨지만....... 21세기에 멀쩡하게 살아계셨던 (진짜 왕)을 만났던 것이다.
푸미폰 아둔야뎃 태국 국왕
라마9세 라고도 불리는 왕은 2016년 10월13일 88세의 나이로 재위 70년의 생을 마쳤다.
한 나라의 왕으로서 이전에, 민족의 아버지로 살아있는 부처로 추앙을 받던 위대한 왕을 잃은 태국국민들의 슬픔은 대단히 컸다.
오늘의 현대사에서 가장 긴 재위기간과 가장 많은 재산을 가진 왕실 등의 여러 기록도 보유한 채 말이다.
의문의 총기사고로 사망한 친형이었던 아난다 마히톨 전왕의 뒤를 잇고자 스위스 유학에서 급거 귀국한 푸미폰은 19살의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올랐다.
그의 재위기간 70년 동안에 19번의 쿠데타가 태국이라는 영토안에서 벌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해 보자면 그의 재위와 통치가 결코 쉬었다거나 순타하지만은 않았던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 숱한 혼란속에서도 그는 꿋끗하게 왕실을 지켜나갔고 자신의 변함없는 애정과 소신을 온국민들에게 전달했다.
결과로 그는 불멸의 존경과 사랑을 온국민들로 부터 받았다. 그에대한 추앙은 종교를 뛰어넘을 지경이었다.
태국은 불교국가지만...... 국왕의 한마디 한마디는 국가의 법률보다도 불교의 경전보다도 국민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던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남자는 일정기간 삭발을 하고 스님의 신분으로 수행을 하여야 한다는 태국의 오랜 전통에 따라 그도 삭발을 하고 불교에 입문 하였다.
통상 왕족의 경우는 그 기간을 아주 짧게 수행하는 관례가 있음에도 그는 남들과 똑같은 기간을 수행했다.
왕자의 신분으로 남들처럼 탁발수행도 직접 수행했다. 그에게 신분상의 특별대우는 있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평범하기를 원했던 왕에게는 결코 평범하지 않은 많은 일화가 전해져오고 있다.
태국의 북쪽지방이자 유명관광지인 치앙마이가 우리에게 익숙한 관광지로 여겨진것은 그리 오래된 일이 아니었다.
치앙마이를 포함한 태국의 북부지방과 미얀마와 라오스가 인접한 지역을 지난시대에 사람들은 (골든 트라이앵글지역)이라 불렀다. 그 당시 지구상에 유통되는 마약의 80%를 생산하던 황금삼각지역이었던 것이다.
90년대중반 골든 트라이앵글지역을 지배하던 마약왕 쿤사가 미얀마정부에 투항하기까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사태의 배경엔 중국공산당과 국민당간의 오랜 내전과 또 이를 배후에서 조종하던 미국군수품사업자들과 미중앙정보국(CIA)이 직접 개입한 복잡하고도 미묘한 관계들이 배후에 깔려있었다. 쿤사왕국의 해체이후 해당 3국은 이 지역을 철저하게 통제했으며, 화염방사기등을 동원하여 마약재배가 가능한 모든 환경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렸다. 토양은 피폐해 졌고 이미 마약쟁이로 변한 사람들은 페인으로 변해만 갔다. 점차 이 지역은 아비규환 지옥으로 변해가기 시작한 것이다.
아무도 오가지 않는 이 버려진 대지에 어느날 초로의 신사 한분이 낡은 랜드로버 지프를 끌고 이곳에 불쑥 나타났다.
안경을 낀 이 초로의 신사에겐 목에는 카메라가 하나 걸려 있었고 한 손엔 확대된 태국의 지도와 다른손엔 볼펜이 들려 있었다. 아무도 그가 왜 여기에 나타났는지를 알지 못했다. 누구도 그가 누구인지 알지를 못했다. 노신사는 마을을 둘러보고 사람들과 대화하기를 원했지만 이미 갖은 세파에 시달린 정착민들의 발걸음은 뒤로 뒤로만 물러나고 있었다. 그때 옆마을에 나갔다가 돌아오던 한 젊은이가 이 초로의 신사가 누구인지 알아채고는 그에게 나아가 정중하게 엎드려 에를 갖추었다.
'이 나라의 왕이십니다.'
그는 바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었다.
이 머나먼 국경지방 오지의 자기 백성을 살피고자 노년에 접어들던 시기의 왕이 직접 낡은 랜드로버를 운전하며 홀로 찾아온 것이었다.
변방에 버려졌던 자기백성을 살피본 왕은 왕궁으로 돌아가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했다. 그리고 오래지 않아 왕은 이곳을 다시 찾았고 백성들을 설득했다. 그가 이끌고 간 트럭들에는 생필품과 교육용 책과 학용품이 실려있었고, 또 다른 트럭에는 가득 커피나무와 차나무가 실려 있었다. 그 결과로 지금 유명 여행지로 각광받는 치앙마이 일대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커피와 차의 생산지가 되었다.
이렇게 왕은 1년에 200일 이상을 태국의 전국토를 순회하며 농지를 개간하고 저수지를 만들고 시골에 다리를 놓고 학교를 세웠다. 왕실의 재산을 선뜻 내어주기를 왕은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항상 낡은 랜드로버를 손수 운전했으며, 그는 항상 카메라와 지도와 연필을 가지고 다녔다. 산간벽지 오지를 다녀오다 랜드로버가 언덕에서 그만 굴러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긴적도 있었다. 부상에서 회복한 왕은 부서진 차를 직접 손수 수리했다. 그는 한 국가의 설계자이기도 했고 자동차 엔지니어이기도 했다.
세계적인 경제전문잡지는 이렇게 평하기도 했다.
'오늘의 태국을 만든것은 태국의 정치도 태국의 경제학자도 공무원도 아니다. 지금의 태국은 왕의 헌신과 노력의 결과이다'
무더운 남쪽나라 태국의 가장 대중적인 교통수단은 당연히 오토바이이다. 중학생이 넘어서면 누구나 1인 1오토바이격이다.
이렇게 오토바이가 많아지다보니 그만큼 오토바이 사고도 급증하였다. 결국 태국정부는 국민들에게 헬멧착용을 법으로 의무화 하기에 이르렀다. 그냥 오토바이를 타고다니기에도 더워 죽겠는데 무거운 헬멧을 착용하라니...... 사람들은 동요했다. 삽시간에 험악한 상황이 벌어졌다. 수많은 군중이 총리관저로 몰려가 무력시위에 나섰다. 결찰이 동원되고 총리가 나서서 설득을 했지만 군중들의 동요는 수그러들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자칫 폭동으로 번질 조짐이 역력한 시점에...... 그 현장에 낡은 랜드로버가 나타났다.
일제히 모두가 무릎을 꿇은 군중앞에서 왕이 말했다.
'나는 항상 내가 사랑하는 모든 백성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걱정하고 신께 기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금 여러분들이 원하는 사항에 대해서 심도있게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결론적인 내 생각은........ 헬멧을 착용하는 것이 불미스러운 사고에서 여러분 스스로를 좀더 안전하게 지켜주는 방편이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말을 마친 왕은 자리를 떠났고...... 그날 이후로 모든 태국국민은 스스로들 오토바이를 타기에 앞서 헬멧착용이 의무로 당연시하게 되었다.
왕위에 오르기 전 푸미폰 왕자는 한 여인을 알게되었고 사랑에 빠지고 말았다.
여인은 태국주재 스위스대사의 딸인 시리킷 이었다.
왕자는 시리킷에게 청혼을 했지만, 시리킷의 어머니의 반대로 청혼은 냉정하게 거절되었다.
자신의 딸이 평범한 인간적인 삶속에서 행복하기를 바라던 시리킷의 어머니는, 왕실과 결혼 할 경우 복잡한 왕실의 제도와 속박속에서 자신의 딸이 결코 행복해 질 수 없다는 결론을 내렸던 것이다. 그러나 왕자는 매일매일 꽃을 들고 다시 찾아갔다.
이에 감복한 시리킷의 어머니는 왕자에게 결혼의 조건으로 한가지를 전제했다. '평생 내 딸만을 사랑한다고 약속하겠느냐?'
왕자는 일생동안 한 여자만을 사랑하겠노라고, 그 여인이 바로 시리킷이라고 신의 이름으로 맹세했다.
푸미폰은 88세로 서거하기까지 오로지 단 한명의 여인 시리킷 왕비만을 평생 극진히 사랑했다.
이런 왕을 사랑하고 존경하며 따르지 않을 백성이 어디에 있겠는가?
푸미폰 왕은 한 나라의 국왕이기 이전에 태국 국민들에게는 민족의 아버지요 살아있는 부처로 받아들여 졌다.
감동이 밀려왔고 감격에 목이 메였다.
부디 성불하소서. 푸미폰 아둔야뎃 국왕이시여.
이런분이 진정한 최고 통치자이다. 또한 진정한 통치자는 결코 통치자의 모습으로 우리 곁에 머물지 않는다. 때론 형제 같고, 때론 친구 같고, 때론 스승 같고, 때론 먼 여정을 함께 가는 동반자 같은 모습이다.
진정한 통지자는 결단코 확연히 드러나지 않는 손거울 같은 모습으로 늘 우리 주위에 머물면서 온정 가득한 시선을 우리에게 되돌려 주는 그런 따스한 마음을 가지신 분이다.
'아버지가 창조하고 이끌어 온 대한민국을 보다 더 융성 발전시켜서 그분의 업적을 영원히 반석에 새겨놓고, 새로운 미래의 행복을 위한 보다 분명한 청사진을 자신이 제시하겠다'던 그 어느 말장난 투성이의 철부지 같은 아줌마가 파란 기와집에 들어앉아, 오천만의 백성이 모두 엄동설한 길거리에 뛰쳐나와 자신에게 손가락질 하며 부당함을 지적한다 하여도, 자신이 허락하지 않는 자신의 부당함이란 결코 있을 수 없다는...... 말 같지도 않은 말장난이나 일삼고 있는 우리네 현실과는 너무도 동떨어진.........
많이 슬프다.
-- 요새 귀신은 뭐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저런 칠푼이 안잡아 먹고 말이다..........
왕궁에서 벗어나 착찹하고 조금은 무거워진 발걸음을 남쪽으로 옮겼다.
바리케이트를 치고 지키고 있는 경찰에게 왕궁과 에메랄드사원 방문에 대해서 물어보았는데, 언제 다시 개방될 지는 아무도 알 수가 없다는 대답이었다. 많은 여행객들에게는 커다란 아쉬움이겠지만, 이곳에 찾아와 느껴지는 이들의 분위기를 보아서는 어쩌면 그것이 아주 오래걸릴 수 있는, 하지만 지극히 당연한 일일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왕궁에서 남쪽으로 약 십여분을 걷고나면 다시 웅장하고 화려한 건축물과 마주치게 된다.
이곳 방콕에서 가장 크고 가장 오래된 사원인 (왓 포)이다.
내 키를 훌쩍 뛰어넘는 높은 담장 너머로 아름다운 왓 포의 풍광이 군데군데 들어왔다.
관광객들에게 출입문으로 허용되는 남문쪽에 다다르니 청소가 한창중이었는데 출입문 앞에는 제지팻말이 분명하고도 확고한 모습으로 가로막아 서고 있었다. '문에 한발자욱만 들이밀고 사진 한 두장만 찍을 수 없겠느냐'고 부탁을 해보았는데, 안전요원으로부터 대돌아 온 냉정한 대답은 '절대 불가' 였다. 여덟시반에 개방하니 그때 표를 사서 들어가라는 대답이었다. 시계를 보니 일곱시를 조금 넘어서고 있었다.
비행 스케줄때문에 그렇다고 사정해도 되돌아 온 대답은 '불가'였다.
이런 상황의 연속이라면 한마디로 방콕여행 그 자체가 모두 허망함 뿐이리라. 하지만 어쩌랴.......
(왓 포)의 담장을 따라 걷노라니 (왓 포)는 하나의 독립된 커다란 사원이지만 뒷쪽으로 좁은 골목길을 사이에 두고 다른 커다란 건물과 연결된 모습이었다. 골목길 중간에 바리케이트와 경비초소를 두고 사원과 다른 건물 사이에 작은 문이 마주보고 열려 있었다. 아마도 (왓 포)를 관리하는 행정적인 부속건물로 보였다. 그 골목을 가로질러 지나가려는데 BMW 차량이 골목을 들어오더니 경비초소 앞에서 멈춰서고 양복을 입은 깔끔한 중년의 사내가 서류가방을 들고 내렸다. 차를 다시 주차장으로 간다. 중년의 사내는 주변의 사람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더니 행정건물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나는 무심코 그 중년 사내에게 지나는 말처럼 말을 건네보았다.
'멀리서 온 여행자인데 비행스케줄 때문에 개방 시간까지 기다릴 수 없는 처지가 되었습니다. 그냥 살짝 입구에서 사진 몇장만 찍을 수 없을까요? 입장권을 사지 않으려는 것이 아니라 시간이 부족해서 입니다.'
'어디에서 오셨습니까?'
'한국에서 왔습니다. 낮비행기로 미얀마엘 가기로 되어 있습니다.'
'이곳은 관계자들만 허락하는 구역인데 들어오셨군요?'
'그렇습니까? 죄송하게 되었군요. 국왕께서 서거하셔서 왕궁과 에메럴드 사원을 돌아볼 수 없다는 사실은 아쉽지만 당연하게 받아들이겠는데...... 시간이 부족하다는 현실적 문제로 방콕에서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떠나야 한다고 생각하니 많이 아쉽습니다.'
'왕궁에 다녀오셨습니까?'
'네. 애도 기간이 1년이라는 사실도 오늘에야 알게되었습니다. 푸미폰 국왕님의 명복을 빕니다.'
합장으로 인사를 대신하고 돌아서는 중이었다.
'잠시만 기다려 보십시요.'
지난 생각에는 다분히 '진심으로 고인의 명복을 빈다'는 느낌이 전해져서였을 것 같다.
중년의 사내가 경비실의 사내에게 무엇무엇이라고 이야기를 전했다. 그러자 경비원 한명이 내 앞으로 다가와 나를 이끌어갔다.
'관계자에게 제가 부탁을 해 놓았습니다. (왓 포)의 어디든 마음대로 들어가시고 사진을 찍으셔도 무방하겠습니다. 그럼......'
사내는 건물 안으로 사라졌고 경비원은 나를 (왓 포)의 출입문을 지나 경내의 한가운데에 데려다 놓고 웃으며 사라져갔다.
이제부터 이 고귀하고 드넓은 사원을 내마음대로 프리패스다.
17세기에 조성된 (왓 포) 사원의 본래 용도는 불교경전을 공부하기 위한 개방대학이었다.
하여 약 500여명의 승려와 750여명의 수도승들이 거주하면서 공부를 하던 장소였다. 책이 없던 초기에는 석판을 이용해 공부를 했다고 전해진다.
길이 46미터 높이 15미터의 열반에 드는 부처의 모습을 형상화한 와불상이 이곳의 대표하는 유적이었지만, 이곳을 외부인에게 개방하기 전 청소에서 정리정돈까지 부지런히 움직이는 사람들을 보면서 건물의 안쪽까지 들어가볼 생각까지는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이번에 와불상을 직접 만나보지는 못했다.
대신 (왓 포)의 또 다른 볼거리인 95개의 쩨디(불탑)를 맘껏 둘러볼 수 있었다.
쩨디의 외부는 온통 도자기 조각들로 치장되어 있다. 아름다운 모자이크로 치장된 화려한 불탑인 셈이다.
녹색의 쩨디는 라마1세, 흰색은 라마2세, 노란색은 라마3세, 그리고 파란색은 라마4세에게 헌정된 불탑들이다. 완조 초기의 선왕들에게 헌정된 것이다. 푸미폰 왕이 라마 9세였으니 한참 전의 조상들이다.
(왓 포)를 나와 방콕 시청쪽으로 발걸음을 옮긴다.
시청청사 주변의 골목에서 낡은 건물들을 통해 방콕의 옛모습을 느껴볼 수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사람롬 공원 인근의 운하 옆길에 온갖 물건들을 가득실은 트럭들이 한치의 틈도 없이 빼곡히 서있다. 어떤 차에는 아직 잠을 자고 있는 사람들도 보인다. 이 운하를 따라 날이 새면 벼룩시장이 형성되는것으로 보인다. 하나 둘씩 차에서 짐을 날라다 좌판을 벌리기 시작하는 모습들이다.
방람무앙로드를 따라 걷노라니 탁발하는 승려, 공양하는 여인의 참으로 엄숙한 모습도 보이고, 시청 청사에서는 모든 사람이 광장에 나와 아침조회를 통해 서거하신 왕에게 조문기도하는 의식을 거행하고 있었다.
방콕을 여행하면서 가장 많이 마주치게되는 민주기념탑. 태국 민주화항쟁의 기념비로 혁명기념일인 7월 24일을 상징한다.
그리고 이 민주기념탑 남쪽의 로타리에는 태국의 중요 여섯개 사원중 하나인 (왓 쑤탓) 사원이 있고, 사원의 입구에 아주 높은 상징적 조형물 같은 (싸오 칭차)가 우뚝 서 있다. (짜오 칭차)는 무슨 불교사원의 입구가 아니라, 힌두교의 행사때 실제로 이용하던 그네이다. 행사도중 사망사고가 곧잘 일어나서 현재는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타논 랏차담넌 끄랑 공원) 또한 약 3분 거리의 지척에 있다. 공원 입구 왼쪽으로는 라마3세의 동상이 있고, 동상 오른쪽으로는 왕실에서 태국을 찾아오는 귀빈을 맞이할때 사용하던 (뜨리묵 궁전)이 있는데 무척이나 화려하면서도 아름답다. 전체적으로 조형미가 대단히 뛰어난 모습이면서도 그중에 단연 압권인 것은 뾰족한 첨탑이 인상적인 (로하 쁘라쌋)이다. 37개의 첨탑을 간직하고 있는데, 바로 해탈의 경지에 이르려면 37가지의 선행을 실천에 옮겨 베풀어야 한다는 의미를 상징하고 있다.
라마3세 동상을 지나 운하를 건너기 전에 눈에 확 띄는 흰색 건물은 바로 (마하깐 요새)이다. 방람푸에 있던 (타 파이팃 요새)와 함께 방콕의 북쪽 외곽을 지키던 대단히 중요한 방어요새였던 것이다.
그리고 인근의 아주 작은 동네 재래시장도 둘러보고, 이곳저곳 골목길을 돌아다니면서 방콕의 오늘을 살아가고 있는 서민들의 세세한 아침일상을 들여다 본다. 아침이란 느낌은 어느나라 어느 사람에게나 늘 신선하고 활기가 저절로 전해져 온다.
이것이 태국이다. 이것이 방콕이다. 이것이 이곳 사람들의 삶의 모습이다.
길을 걷다보니 다시 마주치게 되는 이른 아침의 카오산로드는 한산하다.
그리고 떠나는 자와 다시 찾아오는 자가 교차한다.
그래. 누구는 오고 누구는 다시 떠난다.
진정한 여행을 하는 자들은 어느정도의 망가짐과 불편은 못내 감수를 한다.
캐리어를 끌지도 않고 이쁜 드레스에 샌들도 없다.
자유로움과 편리함이 우선일 뿐이다.
굿바이 방콕.
굿바이 카오산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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