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인 예루살렘 초대교회 사도회의는 십자가 처형사건 훨씬 이전부터 이미 잦은 마찰과 대립으로 분열의 조짐을 보이고 있었다. 그것은 제자들 각자가 속내를 감추고 표정관리를 하면서 내심으로는 서로 먼저 기득권을 차지하고자 열띤 자리다툼을 벌여왔다는 사실이 고스란히 드러난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스도께서는 그들을 ‘사람을 낚는 어부로 선발’을 했지만, 그들의 속내는 ‘어부를 거쳐 돈을 모아 여러 척의 배를 거느리고 떵떵거리는 선주’를 저마다 열망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열두 번째 사도’라는 별명과 함께 바울이 등장하였으니, 그들은 바울을 복음을 전파하라 하신 스승의 유지를 받들어 함께 업무를 나누어 분담할 동료로 본 것이 아니라, 혹시나 자신들이 겨우 차지한 지분을 가로챌지도 모를 공동의 적으로 판단했던 것이다.
열두 사도의 지분 확보에 가장 큰 걸림돌이던 막달라 마리아 지분을 빼앗기 위해서 스승의 눈치를 살펴가며 은밀하게 공조작업을 벌여왔던 것이 벌써 언제부터였던가? 세상 사람들이‘제자들의 실질적 리더가 막달라 마리아’라고 여긴다는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을 때부터, 어찌하던 그녀를‘여성사도’라고 부르거나 무리지어 따라다니는 것을 막으려고 별별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무던히 애를 써 왔던 것이다.
그 덕분으로 이제 어느 정도 막달라 마리아를 예루살렘 교회나 사도회의로부터 멀리 떨쳐냈다고 안심이 되던 처지에 느닷없이 ‘열두 번째 사도’라는 별명을 가진 바울이 멀고 먼 변방 소아시아에 등장했던 것이다.
사도들은 긴장했다. 바울의 등장과 그가 가는 곳마다 놀라운 업적을 세우고 있다는 소식이 들려오면 올수록 위기를 느꼈다. 결국 사도들은 내심으로 바울을 공동의 적으로 규정했다.
하여 바울을 예루살렘 교회로 소환했다.
보름동안 예루살렘 교회 초대 주교였던 예수의 형제 야고보는 바울과 함께 지내면서 그의 출신과 속내를 들여다보았고, 그의 기독교에 대한 종교관과 관심과 신념과 앞으로 펼치고자 하는 선교관에 대해서 심도 있게 파악을 하고자 노력했다.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대한 판단과 교리 해석 부분에 있어서 치열하게 논쟁을 벌였다. 바나바의 추천이나 소아시아에서 이미 차지한 절대적 영향력 때문에 바울이란 존재를 당장 어찌할 수는 없겠지만, 야고보나 사도회의의 미래를 내다볼 때 바울은 절대로 회유되거나 가르쳐서 생각을 바꿀 수 없는 존재라고 판단했다. 어쨌거나 예루살렘 초대교회나 사도회의를 위해서 바울은 언제든 기회를 보아 반듯이 제거해야만 할 공동의 적으로 이때부터 이미 결정이 난 것이다. 바울이 떠나간 후 소집된 열두 사도회의의 열띤 회의 결과 역시 야고보의 생각과 너무나 똑 같았다.
자상하고 배려심 깊은 태도를 보이며 바울의 이야기를 끝까지 경청하는 듯 했으나, 이미 속으로는 기겁을 하고 웬지모를 두려움에 치를 떨어야만 했던 야고보였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어떻게 3년 이라는 그 짧은 시간에 그 먼 거리를 옮겨 다니면서 복음을 전할 수 있다는 말인가? 잠시 쉬면서 눈을 부치고 밥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면, 오로지 걸었고 죽어라 복음을 외쳤다는 결론이 된다. 그야말로 자신들로서는 감히 엄두도 내지 못할 정도로 그야말로 죽기 살기였던 것이다. 야고보도 바울의 엄청난 노력에 저절로 치를 떨고 혀를 내둘렀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바울이 아주 정중하게 (게바의 선교활동)을 허락해 달라고 야고보와 예루살렘 교회에 정식요청을 해온 것이다. 순간 야고보의 표정이 심하게 일그러졌다. 그리고 뇌리에 섬광처럼 번쩍이는 살기가 피어올랐다. 이제 더 이상은 마냥 두고만 볼 수가 없는 극한의 상황에 도달했다는 뜻이었다.
왜 게바의 선교가 그렇게 큰 문제가 되었던 것일까?
게바(Geba)는 예루살렘에서 북쪽으로 약 10km 정도에 위치한 아주 험준한 산악지형에 위치한 작은 도시로 지금의 자바(Jaba)이며 아랍인들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구약성경에 많은 사건들의 배경으로 게바가 여러 번 등장한다.
본래는 예루살렘 왕국 성립 후 베냐민 지파에게 주어졌으나, 예루살렘이 멸망하고 주민들 대부분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가(디아스포라) 비워지자 이번엔 레위 지파의 영토가 되었다. 훗날 바빌론 유수가 끝나고 돌아온 사람들이 다시 고향을 찾게 되었으니 대부분이 베냐민 사람들이었다. 오늘날의 팔레스타인 문제가 이미 고대에 이스라엘 안에서도 벌어졌었던 것이다. 땅은 이미 레위 지파의 재산이 되었는데, 원주인인 베냐민 지파가 살아서 돌아 온 것이다. 당연히 분쟁의 씨앗은 땅에 떨어졌고 싹을 틔웠다.(이스라엘 국내 문제이겠지만)
게바는 예루살렘 인근 외곽의 아주 험준한 산악지형으로 모든 부족과 침략자들은 물론 예루살렘 사람들에게도 아주 중요한 요새나 마찬가지였다. 그러다보니 늘 그곳에 은거하면서 도적질을 일삼는 불량배들의 온상이 되었으며, 태양신을 비롯해 온갖 동방의 잡신들을 믿는 우상숭배 주의자들의 은신처가 되었다. 그 도가 지나치게 되자 요시아 왕이 이곳을 정벌하고 우상숭배의 근원을 뿌리 채 뽑고자 하였으며, 이를 계기로 예루살렘 왕국 전체의 우상숭배 퇴치를 단행하였다.
하지만, 게바 하면 가장 먼저 크게 떠오르는 것은 당연히 요한복음 1장 42절에 등장하는 게바일 것이다. ‘예수께서 보시고 이르시되 네가 요한의 아들 시몬이니 장차 게바라 하리라 하시니라’라는 구절로서, 게바는 본래 아람어로 (바위) 또는 (반석)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으니, 이때부터 베드로라는 이름 또한 (바위) 혹은 (반석)의 뜻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이후로 게바는 견고하고 굳건한 베드로의 믿음을 상징하게 되었다.
이것이 다시 어찌어찌 해석이 되고 요런조런 의미가 더해지면서 종당에 ‘바티칸 터의 반석’이 되는 것이다.
사도들의 선교활동이 시작되면서 여기 게바에 가장 먼저 관심을 가졌던 사람이 바로 베드로였다. ‘게바를 게바로 만들 사람이 당연히 게바가 아니겠는가’ 하면서 말이다.
베드로는 게바 선교에 정말로 진심이었다. 예수에게 ‘게바’라는 별명까지 얻었던 처지로, 의미가 남다르게 여겨졌을 게바의 선교를 다른 사도에게 맡기는 것이 참 이상하지 않았겠는가? 베드로는 게바 선교와 차후 관리에 열과 성의를 다했고, 야고보 또한 베드로와 함께 여러 차례 동행하면서 도움을 주었던 터라 베드로에게 게바가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었는지를 충분히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그 게바의 기독교인들이 멀고 먼 변방에서 활동하는 바울에게 여러 차례 서신과 사람을 보내 방문을 요청해 온 것이다. 예루살렘 지척의 베드로가 선교하고 관리하고 있는 게바의 교인들이 먼 타지의 바울에게 선교방문을 요청해 왔다면....... 도대체 이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도대체 무슨 사연이란 말인가?
한 번 생각해 보자. 베드로가 얼마나 열심히 공을 들인 게바 선교인지는 현지 교인들도 잘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어쨌거나 어떤 문제가 생겼다면....... 적어도 당시로서는 베드로 보다 우위에 있던 예루살렘 교회 초대 주교인 야고보에게 문의하거나 해결을 촉구해도 될 문제가 아니겠는가? 그렇지 않은가 말이다.
그런데, 베드로도 아니고 야고보도 아닌 바울을 청했다? 왜? 바울의 별명이 ‘열두 번재 사도’였으니 말 그대로 막내이거나 가장 힘을 못 쓰는 꼬붕이었을 텐데 말이다.
그렇게 까지 해야만 하는 말 못할 문제라면........ 야고보와 바울 사이에 있었던, 그리고 바나바와 갈라서기까지 해야만 했던 초기교회의 교리 문제였을 것이다.
예루살렘 유대인들만을 위한 기독교를 신봉하는 사도회의와 온 세상사람 모두에게 공히 공평한 구원을 약속하는 열린 기독교를 신봉하는 바울 사이에 놓여 진 장벽과도 같은 교리상의 문제가 대두되었던 것이다. 가장 간단하게는 여전히....... 기독교인이 되려면 무조건 할례부터 받아야 한다는 문제 같은 것 말이다. 할례와 기독교인 자격에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소식을 게바의 사람들도 어디선가 주워들었을 테니 말이다.
바울이 야고보에게 베드로의 관활 지역인 게바의 방문을 허락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야고보는 바울이 베드로의 밥줄을 빼앗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베드로의 영역을 당당하게 침범하는 것은 곧 열두 명의 사도회의를 우습게 여기고 능멸하는 것이며, 그것을 백주대낮에 당당하게 협박하는 것이라고 받아들여졌다. 게바를 빼앗으면 다음은 또 어디일까? 머지않아 야고보 본인의 자리인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차지하겠다고 나설 것이 분명해 보이지 않는가? ‘저 놈을 누가 막지? 저 놈을 어떻게 해치워야 한단 말이냐?’
이.쯤.되.면.막.가.자.는.거.지.어.디.누.가.죽.나.해.보.자.
야고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또한 베드로를 포함한 다른 사도들도 이미 모두 초대교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태와 문제점들에 대해서 소상하게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서로 쉬쉬하고 있었을 뿐이다. 아직은 기득권에 대한 배당이 분명하게 구분되어 떨어진 것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베드로가 게바 선교에 열과 성을 다한 만큼 게바 교회에는 사도회의의 최고위층에 해당하는 베드로를 추앙하는 게바파가 생겨났고, 먼 곳에서 들려오는 바울의 복음을 전해들은 사람들에 의한 바울파가 존재했으며, 그 사이에 베드로도 싫고 바울도 싫고 우리는 오로지 예수 그리스도만 따른다는 그리스도파가 또 생겨났다. 게바 교회의 문제는 21세기 교회가 당면한 교파끼리의 다툼이나 이단의 문제와 근본적으로 닮았다. 쏙 빼다가 박았다.
결국, 기독교는 태생적으로 이미 반목과 분열과 다툼(기득권 쟁취) 위에서 탄생했다고 해도 결코 무리는 아니지 싶다.(이 또한 지극히 주관적인 내 생각임을 전제로)
거기에다 고린도 교회에서 거듭해서 해결을 촉구하는 탄원서가 올라오고 있었던 것이다.
탄원서의 핵심 요지는 고린도 교회에서 버젓이 횡행하고 있는 바울파라고 하는 분파문제였다. 고린도 선교를 개척한 바울을 초대 주교에 옹립했던 소수의 열광적지지자들이 전횡을 휘두르면서 다른 분파들과 사사건건 마찰을 불러일으키고 있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바울은 이미 다른 지역 선교를 위해 떠난 마당에 그와 사전 교감이 없이 탄원서의 내용만 믿고 고린도 교회에 어떤 처벌을 명령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고린도에는 학문이 높고 성경에도 해밝으며 특유의 웅변적인 설교로 크게 명성을 떨치고 있는 아볼로라는 교회 지도자가 있었다. 그런 그를 바울이 출타하고 비어있는 고린도 교회 주교로 옹립하자는 무리들이 아볼로파를 만들어 사사건건 바울파와 정면으로 부딪치기 시작한 것이다.
예루살렘 교회의 한 측근으로부터 이런 상황에 대한 소상한 내용이 적힌 편지를 받는 바울은 실로 기가 막혔다. 분노가 치솟아 올랐다.
바울은 서둘러 모든 분쟁이 벌어지고 있는 지역의 교회에게 장문의 서신을 보냈다.
타이르기도 하고 꾸짖기도 하고 힐책을 넘어 경고하는 내용을 적어 보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몸이요, 그분께서 허락하신 사랑의 공동체 이어야 합니다. 이쯤에서 모든 다툼과 분쟁을 멈추시기를 바랍니다. 그분께서 지켜보고 계십니다.’
힘들게 복음을 전해 생겨나는 교회마다 시간이 얼마 지나지 않아 하나같이 싸움을 시작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라면 싸움이 일어나는 난장판마다 복음을 앞세워 교회를 세우면 싸움이 멈추고 사랑과 평화가 넘쳐나야만 했다.
그래서 ‘복되고 기쁜 소식’의미를 담아‘ 복음(福音)이라고 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현실은 전혀 달랐다. 그 복음에서 다툼의 불씨가 생겨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
’사랑의 공동체‘라고 부르는 (교회)라는 것을 가만히 살펴보면, 근본적으로 공동체가 가리키는 의미처럼, 모든 것은 사람과 사람간의 만남과 관계 속에서 생겨나고 교류를 통해 어떤 형태로든 엮어지는 과정을 필요로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만남의 주체인 개개인이 저마다 다 다른 곳에서 태어나고, 다른 환경에서 자라고, 다른 교육을 받고, 다른 가치관을 가지고, 다른 목표를 가지고, 다른 생각과 방식으로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그런 그들이 하나같이 다 존경받기를 원하고, 더 많은 것을 가지길 원하고, 더 많이 자기 방식이 통하기를 바라고, 부러움의 대상으로 영원하기를 바라고 있다는 점이 바로 문제가 되는 것이다.
교회 혹은 복음이 그 다름을 모두 모아서 하나로 어우르게 되는 이상향이 바로‘사랑의 공동체’가 되어져야 하는 것임에도...... 세속의 현실문제는 그런 정도를 훨씬 뛰어넘고 있기에, 복음도 전하고 교회도 이미 존재하지만 여전히 다툼과 분쟁 또한 변함없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더하여 그것이 바깥세상의 일일 뿐만이 아니라, 그것은 처음부터 교회 안에서도 이미 생겨나 있었던 것이다.
초대교회의 사정을 잠시 슬그머니 들여다본다면....... 예수의 열두 제자들의 출신에 관계해서도 이미 히브리 계통의 유대인 제자들과 헬라 계통의 유대인 제자들 사이에 근본적으로 다른 이질감이 존재했다. 이는 머지않아 주류파와 소수파로 나뉘어 갈등으로 이어진다.
연장선상에서 바나바와 바울의 갈등에서 보았던 것처럼 선교를 바라보는 시각차이가 교리 차이로 드러난다. 이것은 곧 바울과 사도회의의 시각차이자 갈등이라고 보아야 하겠지만 말이다. 그 사이에 어쩔수 없게 마가가 놓이게 된다. 마가는 바울의 이야기도 들어보았고, 바나바와 다른 사도들의 이야기도 모두 들은 유일한 사람이다. 전부는 아니겠지만, 당연히 중간에 놓인 불편한 입장도 있었겠지만....... 바로 그 마가가 사도행전을 집필했다. 사도들의 행적을 나름 세세하게 기록한 사도행전을 통해서 그렇다면 우리는...... 누가 옳고 그름을 판단할 수가 있을까? 중간에 놓인 마가의 기록은 모두 순수한 팩트일까?
앞에서 거듭 언급해 나온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선 하례를 반듯이 받아야 한다는 문제는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화 사이의 심각할 대로 심각한 상황까지 내몰리게 되는데, 예수께서 하늘로 떠나셔서 없는 마당에(카톡으로 답신도 없으니) 어느 주장에 정당성을 실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정당성은 하늘의 뜻일까? 아님 세속의 계파 싸움에서 이긴 자의 승리 메달일까? 어쨌거나 이긴 자의 정당성은 그럼 성스러운 구속력을 가지게 되는 것일까? 아닐까?
(교회)라는 이름이 연관된 이 세상의 모든 것에 ‘절대 신성’을 부여하고 싶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벽에 걸린 십자가의 앞면일 뿐이다. 십자가의 어두운 뒷면에는 도저히 다 채울 수 없을 만큼 빼곡히 ‘절대 신성하지 않은 이야기’로 가득한데 그 내용이 하나같이 기득권싸움(자리다툼)으로 얼룩져 있다. 그럼 (교회)의 반대말은 (다툼)이라는 것인가?
결국....... 바울에게 예루살렘 교회로의부터 두 번째 소환장이 발부되었다.






기독교 역사를 나타내는 성화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공생애 기간 동안 사도들과 함께하는 성화들이 많이 있다. 성화를 그리는 화가들에게 열두 사도의 이야기 또한 매우 중요하고 매력적인 소재였기 때문이다. 최후의 만찬이나 유다의 배반을 담은 소재는 적어도 종교화를 좀 그린다 싶은 화가들에게는 거의 필수 과제나 마찬가지였을 정도였다. 심지어 유다의 자살과 그로인해 빈자리를 채우게 된 마티아를 소재로한 성화도 많이 있을 정도다.
마티아의 선출로 12 사도의 자리는 채워졌지만, 그랬음에도 사도를 생각해 본다면 결코 채워지지 않는 영원히 빈자리가 느껴지는 데는 나름의 이유가 있기 때문일 것이다. 사도를 이야기함에 있어서 사도 바울이 빠진다면 그것은 결코 완전한 사도회의가 될 수 없다는 인식이 언제부터인가 우리의 가슴속에 깊이 새겨졌기 때문이리라.
베드로와 바울은 기독교의 쌍두마차이자 양대 산맥이라고 여겨져 왔다. 그 속내까지야 차지하고서라도 일단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기둥이 나란히 기독교를 떠받치지 않고서는 교회가 이 지상에서 온전하게 서 있을 수가 없음이 그 이유라 하겠다. 솔직히 표현하자면 숱한 우여곡절을 겪으면서 굳은 일은 바울이 죄다 했고, 얼떨결에 모든 영광은 모두 베드로의 몫이 되었다는 것이 솔직한 나(필자)의 고백이다. 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바티칸)의 입구에는 어마어마한 크기의 천국의 열쇠를 든 베드로와 손에 칼을 든 바울의 동상이 우뚝 서 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계셨기에 바울이 있었고, 바울이 있었기에 기독교가 만들어질 수 있었다’는 항간의 소문이 그냥 나돌았던 풍문이 아니라, 그 바울을 품거나 전면에 내세우고서야 베드로가 기독교 정통성을 겨우 얻게 되었으니 말이다. 바울을 내친 베드로는 허접떼기 로마 주교에 불과했을 것이고, 바티칸은 결코 예루살렘 보다 높이 설 수가 없었다. 기독교의 절대 성지는 여전히 예루살렘이었어야 했고, 초대 교황은 당연히 예수의 형제 야고보가 되었을 것이다. 당연히 그랬어야만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이유로 1천 700년 이상 로마가톨릭의 최고 종교지도자들과 역대 교황들은 베드로와 바울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는 성화를 끊임없이 요청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 대부분의 화가들이 그 소재를 극구 사양했다. 베드로나 야고보를 포함해 열두 사도는 모두 바울과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예수와 함께 생활한 열두 명과 일면식도 없었던 바울이라는 상황을 제외하면 그들은 같은 지역에서 서로 교류하면 동시대를 함께 살았던 사람들이다. 첫 예루살렘 방문에서 야고보를 만났고, 안디옥 선교에서 베드로를 만났고, 2차 예루살렘 소환에서는 12 사도를 모두 만났으며, 반강제로 예루살렘에 2년 동안 갇히다시피 체류하는 동안에는 마가와 거의 함께 지내다시피 했었다.
그랬음에도 교회는 거듭 거듭 베드로와 바울을 하나의 캔버스에 담아내는 그림을 요청하기에 급급했고, 벨라스케스를 제외하고는 다른 유명화가들의 베드로와 바울을 함께 담는 그림이 별로 없다는 현실이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베드로와 바울이라는 소재가 별로 재미가 없었던 때문일까? 아니면 화가들의 양심상으로도 그런 허구의 거짓을 자신의 붓끝에서 합리화 시킬 수 없다고 생각해서였을까?
신약성경의 어디에서도 바울이 베드로나 야고보나 다른 사도들과 원만하게 사이좋게 지냈다는 이야기가 전혀 없다는 사실이 새삼 피부에 와 닿는다. 마가를 제외하면 허심탄회하게 속내를 털어놓을만한 사이들이 모두 아니었다는 뜻이다.
그리스도께서 떠나신 뒤, 예루살렘 초대교회를 떠받치던 가장 중요한 열세 명의 지도자들이 전혀 원만한 사이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자칫 어떤 불길한 조짐이 엿보이는 것은 왜일까?
예루살렘으로부터 두 번 째 소환장을 손에 받아든 사도 바울의 첫 반응이 ‘드디어 올 것이 오고 말았구나. 이번에 올라가면 과연 살아서 예루살렘을 나올 수가 있을까?’하는 탄식이었다니, 옆에서 그 탄식을 전해들은 사람은 어떤 생각을 떠올렸을까?
왜 바울은 예루살렘의 소환장을 보고 가장 먼저 죽음을 떠올렸을까? 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처형을 떠올렸을 지가 몹시 궁금해진다. 소환장을 발부한 곳은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사도회의였고, 초대주교 야고보의 이름이 발신인 란에 선명하게 적혀있었는데 말이다.
확실한 것은 사도 바울의 첫 등장에서부터 이미 12 사도들과의 관계는 이미 물과 불의 관계였음이 확실해 보인다.
그런 초대교회의 역사가 너무도 뻔해 보이는 마당에 이름난 화가들에게 베드로와 바울이 함께 등장하는 엄숙하고도 거룩한 종교화를 그려달라고 하니........ 그리고 싶지 않았거나, 양심상 절대로 그릴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러던 와중에 마지못했음인지 아닌지는 알 수 없지만....... 알론소 로드리게스 (Alphonsus Rodriguez)라는 수도사 겸 화가가 중세 시대에 베드로와 바울을 한 화면에 그려 넣는 위대하고도 성스러운 작업에 돌입했다. 현재 시칠리아 메시나 박물관에 소장되고 있는 이 그림의 제목은........ 조금 성스럽게 다듬어 표현을 옮겨서 <작별 인사> 쯤으로 옮겨 적겠다. 필자 임의로 말이다.

참으로 성스러움과 거룩함이 저절로 묻어나오는 위대한 그림이 아닐까 싶다.
로마 가톨릭은 이 중요한 그림을 왜 바티칸에 전시하지 않는 것인지 나는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다.
<안부를 묻고 작별 인사를 나누는 두 사도> 라고....... 사도 베드로와 사도 바울의 표정과 자세가 어쩌면 저렇게 놀랍도록 우아함으로 가득차 보인다는 말인가? 가히 실로 위대한 성화가 아닐까 싶다. 누구도 감히 표현하지 못한 성인 두명의 찰라와 같은 소중한 순간을 화폭에 가득 담아냈다.
라파엘로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면 몰랐겠지만, 미켈란젤로에게 저 그림을 보여주었다면 그자리에서 당장 이렇게 외쳤을 것이다.
'쌔빨간 거짓말 투성이잖어. 저 양반들은 상극 중에서도 최고 상극이었어. 저렇게 살갑게 너스레를 떨었다구? 둘이 사귄거여? 저런 거짓말에다 온갖 재주로 색칠을 입혀 진실을 속이려들다니....... 하여간 그림쟁이들은 믿을게 못돼. 거짓말을 밥 먹듯이 포장질을 해 대니 말이야. 하긴 교황 노친네가 얼마나 들볶았으면 저런 거짓말을 그려냈을까? 아서라. 교회 진창에서 어서 몰래 빠져나오지 않으면....... 곧 다빈치 꼴이 나고 말것이야.'
그림의 시대적 배경을 살펴본다면 대략 AD 67년이나 68년경이고 배경 무대는 로마가 배경의 무대이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그림의 절반을 세로로 싹둑 잘라서 어느 한 쪽은 역사적 사실이고, 나머지 반쪽은 명백한 허구이자 거짓말이라는 시선이 있고 많은 학설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는 사실이다. 4세기에 활동한 유대인 역사학자 요세푸스가 기록한 역사서는 물론 유대의 역사와 로마의 역사 기록이 이를 뒷받침해준다. 아울러 사도행전과 로마서는 물론 대모데 전서와 후서에서도 그림속의 절반을 차지한 인물이 로마에서 순교하였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나머지 절반을 차지하고 있는 인물에 대해서는 세상 어디에서도 그런 근거를 전혀 찾을 수가 없다. 그냥 로마 가톨릭 안에서만 믿고 싶은 이야기들을 전승이라고 따로 구분하여 받들고 있는데, 그 전승 안에서만 나머지 반쪽 그림도 진실이라고 거듭거듭 주장해 오고 있을 뿐이다.
필자도 지금......... 바로 그 이야기를 하고 싶은 것이다. 절반의 거짓말에 대해서 말이다.
종교적 시선으로 거룩하게 보면 참으로 귀한 성화가 틀림없겠으나, 종교를 배제하고 그림을 본다면....... 참으로 가관이 아닌가? 텔레비전 <세상에 이런 일이>에나 나올법한 해괴망측한 시츄에이션이 아닌가 말이다? 참 한다 한다 해도 가지가지들 한다.
할렐루야!!!!!! 아멘. 아멘.

사도 바울은 예루살렘 교회 사도회의로부터 소환장을 받았다.
바울은 이 같은 일이 언젠가는 닥쳐올 일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소환장을 받아든 순간, 바울은 직접 목격하지 못했지만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끝내고 장차 닥쳐올 시련과 불행을 알면서도 회피하지 않고, 무릎을 꿇고 간절함으로 어떤 기도를 올리던 예수의 그날 밤 행적을 떠올렸다. 어쩌면 이제부터 벌어질 일들이 그날 밤 이후로 예수께서 걸어가신 그 길과 이제부터 자신에게 닥쳐올 일이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암울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 마침내 닥쳐왔다고 생각했다. 다만 바라기는 이 모든 일들이 그리스도께서 자신에게 기대하시고 당부하셨던 일의 올바른 결과이기를 바랄뿐이었다.
바울은 망설이거나 지체하지 않았다.
담대한 발걸음으로 에베소를 출발하여 고스와 로도를 지나 바다라와 두로와 돌레마이를 지나면서도 마주치는 모든 사람들에게 목청껏 복음을 외쳤다. 그리고는 가이사랴를 지나 마침내 예루살렘에 도착했다.
곧장 예루살렘 교회를 찾아 이제까지의 선교 여행에서 모금한 성금을 교회 주교인 야고보에게 전달하였다. 그리고 그날만은 적어도 먼 길을 온 주님의 종을 위한 환대가 벌어졌을 것이다. 성대하기까지야 절대 아니었겠지만...... 손님에 대한 예의는 있지 않았을까?
다음날, 바울은 야고보를 비롯한 사도들과 장로들 앞에서 그동안 소아시아 지역에서 벌였던 3차례의 전도여행에 대하여 상세하게 보고대회를 열었다. 모여든 모든 사람이 절로 감탄이 터져 나올 만큼 놀라운 성과였다. 하지만 기대 이하로 예배당에 모여든 사람들의 반응은 담담했을 뿐이었다. 사도들의 태도 또한 그저 형식적인 마지못해하는 칭찬이 군데군데 있었을 뿐이었다.
그때 무리 중에서 한 원로 장로가 나서서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이 지금 사도 바울의 선교 내용을 이유로 바울에 대한 암습을 모의한다는 정보를 들었다며, 매우 심각한 상황임을 거듭 강조하는 연설을 했다. 그러자 여기저기서 그런 상황의 빌미를 제공한 바울의 선교활동에 대해서 비판을 가장한 우려의 탄성이 여기저기서 끊이질 않고 터져 나왔다. 그들은 앞 다투어 바울이 유대 율법을 부정해왔으며, 신성한 유대 성전을 모독했다고 비난했다. 그런 바울의 어리석음으로해서 자신들의 예루살렘 교회가 유대인들로부터 문전박대는 물론 핍박을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힐책했다. 바울 때문에 자신들까지 이제 죽게 생겼다는 원망까지 터져 나왔던것이다. 장내는 소란스러워졌고 자정의 도를 넘어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참으로 이상한 것은 사도들의 태도였다. 야고보와 베드로를 비롯한 그 누구도 나서서 이들을 진정시키려 하지 않는다는 점이었다.
이때, 예루살렘 출신의 최고 원로 장로가 두 손을 높이 들고 앞으로 나서며 장내 소란을 진정시키고 나서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야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기독교인이 되기 위해서 굳이 할례를 받아야 한다거나 유대인의 전통과 생활풍습을 따라야 할 필요가 없다고 바울 사도가 그동안의 선교에서 주장해 왔던 말들 때문에 지금 유대 사회에 폭동 조짐까지 일으켰고, 더 나아가 지금 로마의 군대가 무력 진압을 산헤드린에 통보까지 하였기에 지금 이 자리가 이렇게까지 소란스러워 진 것입니다. 저는 예전부터 바나바 사도와 바울 사도의 논쟁이 벌어졌다는 소식을 접했을 때부터 이미 바울 사도의 교리적 해석과 활동방향에 대해서 깊이 생각해 보았고, 어찌되었건 그 내용에 대해서는 아무 때고 논의와 결론이 내려져야만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차차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연구와 논의가 벌어져야 한다는 전제하에서 말씀입니다. 저의 생각은 그랬지만...... 유대인들과 산헤드린의 생각을 전혀 달랐던 것이 문제였습니다. 저의 간절한 바람과는 다르게 유대인들의 불만과 적개심을 난로 커져만 갔는데...... 이렇게 바울 사도께서 예루살렘에 직접 모습을 드러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 사도께서 지금 이곳에 계시다는 것을 눈치 챈 유대인 불순분자들의 위험을 결코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이 지금 우리에게 닥친 당면한 가장 큰 문제인 것입니다. 다치면 바울 사도 하나만 다치는 것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끌려 나가 돌팔매질을 당할 수 있는 것입니다. 모든 논의와 연구에 앞서서 일단은 당면한 위험에 대한 대응책을 먼저 찾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휘어 감고 있었다.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따르고 실천함에 있어서 죽음이나 위험은 결코 극복할 수 없는 장애가 아닙니다. 저는 담대하게 헤쳐 나갈 것입니다.’라고 바울은 외치고 싶었다. 그런데 고개를 돌려보니 야고보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있었고, 베드로는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고, 다른 사도들도 고개를 돌려 저마다 다 다른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만 있을 뿐이었다. 바울은 그만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애초 예루살렘으로 출발하기 전부터 이제부터 닥쳐올 위험에 대해서는 이미 어느 정도 각오한 바였다. 하지만 막상 예루살렘에 도착하고 나니 그런 우려가 예상보다 훨씬 강했으며, 자신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닌 예루살렘 교회의 많은 사람들의 안위까지 걱정해야만 하는 상황을 뼈저리게 느낄 수 있었던 것이다.
‘먼저 산헤드린을 방문해서 유대 지도자들에게 사도께서 무작정 유대 교리를 무시하고 폄하나 훼손시키려 하지는 않았다는 뜻을 전하고 깊은 사과를 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바울 사도의 선교 방침이 확고하게 따로 정리되어 있다고는 해도, 그것이 아직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회의와 연구 논의 되어 결론지어진 방침이 아닌 만큼, 일단은 바울사도의 방침이 일부러 유대 교리를 무조건 무시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전달되는 과정에서 와전된 것이라고 정중하게 먼저 사과를 표명하는 것입니다. 그런 다음에 일단 시간을 벌고 위기를 모면한 상태에서 사도회의 안에서 충분한 시간과 연구와 논의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논의를 거친 후에 내려진 결론이 바울 사도의 생각과 같게 된다면, 그때 예루살렘 교회와 다른 모든 교회들이 과감하게 그런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게 되겠지요. 그러자면 우선...... 산헤드린을 찾아가 사과하고 시간을 벌어야만 할 것입니다.’
원로장로의 열변에 아무도 토를 달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사도 바울로서도 당장은 그 방법이 나름 최선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휩쓸고 지나가고 모든 시선이 자신에게 쏠려있음을 인식한 바울이 입을 열었다.
‘저도 그 방법이 가장 현명한 방법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타협이 아닌 설득하고 체계를 세울 시간이 필요하니까요. 곧바로 산헤드린으로 가고자 합니다. 먼저 기별을 해주시고 길을 안내해 주시길 청합니다.’
일단 오늘 모임의 최우선 중대 과제는 해결된 셈이다.
야고보가 산헤드린으로 사람을 보냈고, 연통을 기다리며 휴식의 시간을 갖고자 다른 건물로 사도들이 앞장을 섰고 손님인 바울이 그 뒤를 쫓아 문을 나섰다. 그 뒤를 함께 모였던 여러 장로들이 줄을 지어 문을 나서고 있는데, 장중한 연설을 끝냈던 원로 장로에게 예루살렘 소속의 비교적 젊은 장로가 다가와 주변을 살피며 입을 열었다.
‘장로께서 아주 큰일을 해내셨습니다. 사도들의 우려가 매우 크셨음에도 장로께서 기어코 맹수를 우리에 가두어 버리고 마셨습니다. 이젠 모두 끝이 났습니다. 산헤드린은 결코 바울을 이대로 좌시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이미 죽은 목숨이나 마찬가지입니다.’
‘허헛! 그 입을 다무시게. 자칫 이 일이 우리가 사전에 불손한 의도를 가지고 꾸몄다는 사실이 누설된다면...... 그 화가 예루살렘 교회 전체에 미칠 것이며, 최종적인 책임은 처음 이 방법을 생각해 내신 베드로 사도는 물론 사도회의 전체에 미칠 것이라는 것을 모르는가? 우리 모두의 파멸을 원치 않는다면 함구하시게. 죽어서 하나님 앞에 서서까지도 영원히 비밀에 부쳐야만 하는 막중한 일이야. 꼭 명심하게........ 이 모든 것이 다 지극히 높은 곳에 앉아 계시는 그분의 고귀한 뜻인 게야. 그렇게 받아들이고 순종하시게. 알겠는가?’
도대체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모든 것이 바울을 죽음으로 내 몰기 위한 흉계였다니? 거기다 이번 사태의 배후가 모두 예루살렘 교회의 의중이 뒤에서 작용한 결과라니 말이다. 그렇다면 이것들 또한 교회 안에서 벌어진 기득권 싸움이었단 말인가? 치졸한 자리싸움이란 말이야?
열두 사도들은 사도 바울을 자신들의 기득권을 빼앗아 차지할 공적(共敵)으로 보았다는 뜻이 된다.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공범(共犯) 이다.
바울은 바리새파 유대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났으나, 그는 탄생에서부터 이미 로마인으로 자랐고 배웠으며 공무원의 길을 걸었던 사람이다. 이는 그를 그저 흔하게 유대인으로만 치부할 수 없다는 뜻이다. 그는 예루살렘을 정복하고 식민지로 삼은 로마제국의 관리였으므로 삶 전체를 세상에 널리 알려진 로마인 의로서의 삶을 살아왔다는 것을 가리킨다. 로마가 유대인을 멸시하고 탄압하고 고립정책을 써 왔던 탓으로 당연히 바울이나 그의 선대들은 유대인의 관습과 차별된 삶을 추구하고 고수해 왔을 것이다.
우리가 자료나 책이나 영화에서 볼 수 있는....... 일제 식민지 시대 친일파 후손들의 생활 모습을 유추해 보거나, 유년시절 부모를 따라 해외 이민을 떠난 사람이나 해외에서 태어난 2세들의 사고와 생활방식을 상상해 보면 충분히 바울이 회심하기 이전까지 어떤 사람으로 어떤 생활을 해왔을 지가 어렵지 않게 짐작될 수 있을 것이다. 한반도의 생활풍습이나 예의범절은 물론 전통적인 가치관과 신앙관에도 큰 변화를 보이곤 한다. 심지어는 언어문제로 소통에 어려움을 격기까지 한다.
그들에게 집안의 제사에 참여하기를 강요하고, 병역문제를 강요할 수 있겠는가? 병을 치료하기 위해 민간요법을 강요할 수 있겠는가? 쉽게 말해서 먹고 자고 노는 것에 대한 모든 것이 아주 많이 다르거나, 기초적인 생각의 차원에서부터 전혀 다를 수 있는 것이다.
그런 로마의 관리 바울이 하루아침에 느닷없이 기독교 사도가 되어 예루살렘에 나타났다.
마치, 30년 이상을 어떻게 살아왔는지 별로 알려진 것이 없는 아웃사이더 유대인 예수가 하루아침에 성자(聖子)로 신분세탁을 한 후에 예루살렘에 나타난 것과 매우 유사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런 그가 스스로 메시아라고 스스로를 칭했다면 그 파장은 가히 상상이 가고 남음이 있다고 하겠다. 차이라면...... 그래도 예수는 알려지지 않은 30년의 생활을 유대풍습아래 살았겠지만, 바울은 로마인으로서의 생활방식으로 살았었다는 것이 달랐을 것이다. 하여, 바울에게 당장 유대인의 생활 방식이나 가치관 추구나 유대인의 종교적 관습이나 생활 풍습을 제대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에는 어느 정도 어려움이 현존했을 것이다. 바로 이 차이와 틈새를 사도들과 장로들은 노리고 파고들고자 했던 것이다.
바울은 두 번째 예루살렘을 방문했다.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사도회의에 출석해 열두 사도와 장로들 앞에서 그동안의 선교활동 보고를 했다. 소아시아 지역의 성도들이 모금해 준 재난 구원금을 전달하기도 했다.(사도행전 21:19) 그러자 멀리 아시아에서 온 장로들이 예루살렘에 나타난 바울을 확인하고는, 바울이 유대 율법을 허물고 유대 성전을 모독했으며 선교활동 중에 헬라인들을 유대 성전까지 끌어들여 신성을 더럽혔다고 고발하였으며(사도행전 21:28), 모여든 사람들이 흥분하여 바울을 현장에서 돌로 쳐 죽이려 했을 때(사도행전 21:30) 마침 그곳을 지나던 로마 군대의 천부장이 이를 발견하고 체포를 가장해 위기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여기까지가 신약 성경에 기록된 내용이다.
하지만 불길한 조짐의 예감은 결코 이쯤에서 끝나지 않았다. 본격적인 재난은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유대인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은 절대 신성한 지역이다. 유대민족의 존엄과 자부심은 모두 예루살렘 성전에서 나온다고 해도 결코 무리가 아닐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손수 유대민족을 택하시고 보호자가 되어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의 상징물인 것이다.
그런 예루살렘 성전을 바울이 방문하게 된 것이다. 지난날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여기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셔서는 교회의 타락을 비판하시며 한바탕 난장판을 만들고는 ‘교회를 허물라고’ 호통을 치셨던 바로 그 장소이다. 그런 지나간 사태에 대해 익히 잘 알고 있었을 바울이라 산헤드린(예루살렘 성전) 방문이 얼마나 어렵고 두려운 일인지를 그는 이미 뼈저리게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회피하고 달아나고 싶었을 지도 모르겠다.
그런 그를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산헤드린으로 보내고자 했던 사람들은 바로 장로들이었고, 그들 배후엔 사도회의가 엄연히 자리하고 있었던 것이다. 왜? 도대체 왜?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으로 배우고 자라고 생활하지 않았던 바울은 예루살렘 성전이 갖는 절대 신성의 가치와 예절과 법도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저 가르쳐주는 방향으로 마냥 걸어 갈 수밖에 없는, 낯설고 어색하고 끔찍하지만 어쩔 수 없는 첫 방문이었을 뿐이다. 바로 그것이 함정이었다. 누군가가 교묘하게 파 놓은 집요한 함정이었다.
하나님께서 거하신다고 믿는 절대성지 예루살렘 성전은 아무나 함부로 드나들 수가 없는 곳이다. 사방 곳곳에 특별히 선발된 호위 군사들이 철통같이 방어를 할 정도이다.(로마 교황청의 스위스 용병 근위대의 롤 모델) 성전의 가장 깊숙한 곳에는 오로지 대제사장만이 들어갈 수 있는 아주 특별한 성소가 있고, 다음으로 제사장들만 들어갈 수 있는 성소가 지정되어 있는가 하면, 남자들이 들어가는 공간과 여성들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구분되어 있으며, 이방인들이 방문할 수 있는 공간이 별도로 확실하게 구분되어 있다. 만약 이방인이 허용된 구역을 넘어서 다른 신성한 지역을 더럽혔다면 유대교 전통과 법률에 준하여 사형에 처할 수 있다. 성전의 곳곳에 엄격하게 그런 경고문이 붙어 있다.
몰려든 성난 군중에 에워싸인 바울로서는 경고문을 읽을 겨를도 없었고, 장로가 손을 들어 가리키는 방향으로 산헤드린 출정을 위해 그저 묵묵히 안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에서부터 선교활동은 물론 바울의 안전을 위해 가까이서 호위를 하던 젊은 헬라인 신자들이 성난 군중들과 몸싸움을 벌이며 길을 열고 있었을 뿐이다. 어렵게 바울 일행은 성난 군중들을 헤치고 마침내 71명의 재판관들이 배석해 있는 산헤드린 법정에 출두하였다. 선교 과정에서 발생한 소란을 진정시키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 사이의 원만한 교류와 종교적 이견에 대한 화해를 모색하기 위함이었다.
하지만 정작 산헤드린 법정은 시작도 전에 이미 모두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된 것이다. 그것도 심문이나 반론도 필요 없이 이미 법정 최고형인 사형이 결정 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런 상황에 반듯이 이르게 될 것이라고 사전에 이미 예견한 누군가의 노림수처럼 말이다. 아주 기가 막히게 딱 들어맞았다.
애초 바울 일행은 산헤드린 입구에서 대기했어야만 했다.
오늘의 법정이 열리고 안 열리고는 오로지 대제사장을 포함하는 71명의 재판관이 모인 산헤드린 법정이 결정할 문제였다. 산헤드린이 법정 개정을 결정하고 재판정을 열게 되면, 그 시간에 바울에 한해서만 인도자의 안내를 받아 혼자만 법정에 출두할 수가 있는 것이다. 바울을 호위하던 헬라인 신자들은 유대인 입장에선 어디까지나 이방인이자 이교도인 것이다. 그들에게 허용되는 제한된 공간은 엄연히 따로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도 바울 일행에게 이런 사실을 깨우쳐 주지도 않았고 소상하게 설명해 주지도 않았다. 여기까지 길 안내를 하던 장로는 슬그머니 뒤로 빠져 어디론가 달아났고, 안내자의 뒤를 묵묵히 바울 일행이 따라 들어갔다. 그들이 멈춰 선 곳은 예루살렘 성전의 신성한 중심부인 산헤드린 법정이었다.
순식간에 갑자기 난리가 났다.
예루살렘 성전을 이교도가 함부로 짓밟는 신성모독의 범죄가 벌어지고 만 것이다.
유대교 전통을 무시하고 이단의 죄를 범하던 바울이 재판을 받는 법정에 출두하면서, 이교도들을 데리고 절대 신성해야만 하는 금단의 지역을 넘어서는 신성모독의 심각한 죄를 저지르고 만 것이다. 재판이고 나발이 고가 필요 없는 현행법인 것이다.
성난 군중들이 들고 일어나 일제히 함성과 저주를 퍼붓기 시작했다. '죽여라. 돌로 쳐라. 십자가에 매달아라.' ‘성전을 모독한 자를 거리에 끌어내 우리 손으로 즉결 처형시키자.’
대제사장을 비롯한 70명의 재판관들이 자리를 떠나기 시작했다. 재판이 열릴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무장한 수비대 군인들이 몰려와 거칠게 바울 일행을 포박하기 시작했다.
그제야 바울은 ‘무엇인가 크게 잘못되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황한 시선으로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여기까지 길을 안내했던 장로나 사도들의 모습은 어디에서도 일절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하지만 이미 때는 늦고 말았다.
유다의 입맞춤 뒤에 들이닥친 로마 병사들에 의해 체포되어 포박 당하던 순간의 예수 모습이 바울의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사도행전22:22)
성전 근위대에 체포되어 포박당한 바울 일행을 성난 군중들이 달려들어 거칠게 성전 밖으로 끌어내기 시작했다. 산헤드린 최고 법정마저 절차적인 판결을 생략해도 좋을 만큼 즉결 처형이 허락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적어도 예루살렘 영역 안에서는 최고의 범죄를 저지른 최악의 범죄자였던 것이다.
모든 정황이 3년 전의 그 사건과 너무나 똑 같았다. 그때의 피고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지금의 피고는 바울이라는 점만 달랐다. 그때의 사건 현장 어디에도 예수가 골라서 뽑았다던 제자 열두 명이 모두 꼬리를 감추고 줄행랑을 쳤던 것처럼, 이번에도 바울을 이곳으로 보냈던 사도들과 장로들의 모습은 눈에 불을 켜고 찾아보아도 어디에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모두 다 이루었다’라고 예수는 삼년 전 그때 장탄식의 허심탄회한 심정을 토로했었다.
‘이것은 아니지? 너희들이 지금 나한테 사기 친 거니?’라고 바울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피를 토하듯 절규했다.
‘너희들 모두(열두 명)가 유다와 똑같은 놈들이야. 사도는 무슨? 양아치만도 못한 것들이......... 양의 탈을 쓴 늑대를 목자로 택하신 그분의 전지전능하심이.........’
초대교회 열두 사도의 정체성과 산헤드린(유대교)과의 관계 내지는 검은 내막.




바울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자신을 철저히 에워싸고 포박하듯 손목을 뒤로 꺽은 채 질질 끌려가다시피 성전의 복도를 지나치고 있었다. 사방에서 성난 군중들의 손찌검과 발길질이 무자비하게 날아들었다. 마치 한바탕 광란의 축제가 벌어지는 듯 했으며, 그 축제는 제물의 뜨거운 피를 요구하는 듯 보였다. 바울 자신은 이제 축제에 바쳐진 산제물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인파 저만치 너머로 자신을 따라 여기까지 온 사람들에게도 무자비한 공세가 벌어지고 있는 것이 보였다. 이것 모두가 부당한 처사라고 목청껏 외쳐보았지만, 그 소리는 이내 성난 군중들의 함성 소리에 파묻혀 버리고 말았다. 절망적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상태에서 삽시간에 끝없이 깊은 수렁의 나락으로 한없이 추락하고 있는 심정이었다.
‘주여. 어찌하오리까? 지금 저를 버리시는 것입니까?’
성전 밖으로 바울을 끌어낸 군중들은 그 자리에서 즉결처형을 결행할 생각이었다. 성난 군중들의 숫자는 무섭게 늘어나 광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았다. 그들은 성난 얼굴로 ‘돌멩이로 쳐 죽여라’ ‘신성 모독죄는 죽음이다’라고 외쳐댔다.
광장의 가운데에 강제로 꿇어 엎드려 놓고는 삥 둘러 에워싼 상태로 잠시의 침묵이 이어졌다. 군중들의 손에 저마다 돌멩이와 나무 몽둥이가 들려 있었다. 이제 누군가가 나서서 바울 무리를 죽여야 하는, 혹은 죽여도 좋은 정당성을 가진 몇 가지 죄목을 조목조목 외침으로써, 적어도 유대방식 안에서의 합법적 절차를 마무리 짓고 곧바로 이어서 참혹한 돌팔매질 사형을 실행에 옮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이교도를 데리고 신성한 성전에 들어가 성소를 더럽혔으며, 하나님을 왜곡하고 폄하시키는 신성모독의 죄를 바울이 저질러 왔으니, 산헤드린의 판결을 대신하여 유대교의 정통 자부심으로 저들을 처형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신성을 회복하고 다른 이단들에게 그 잘못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똑똑히 보여주려 합니다. 유대인 만세. 예루살렘 만세.’
거친 함성 소리가 예루살렘 지축을 울리고도 남았다.
판결문이 낭독되었으니 이제 돌팔매가 곧 날아들 것이다.
그때, 느닷없이 붉은 갑옷으로 무장한 로마의 군인들이 한복판으로 뛰어 들어왔다.
성전에서 벌어진 소요를 처음부터 지켜보던 로마군의 백부장이 아니 되겠다 싶어서 자신 휘하의 군대를 동원시킨 것이다.
예루살렘의 경찰 업무를 담당하던 백부장은 사람들이 구름처럼 성전으로 모여들고 있다는 보고를 받고는 서둘러 휘하 부대 대부분을 모아 주변에 대기시키고는 성전근처로 달려갔다. 주변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면서 유대인 협조자들을 성전 안으로 보내 상황을 파악했다. 산헤드린과 모여든 유대인들이 서너 명의 외부인들을 죽이려 한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 중의 한 명이 사도로 명망이 드높아있는 바울이라는 이야기도 들었다. 유대성전에서 유대 율법에 의해 최고 형벌인 사형까지 벌어지는 일이야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고, 굳이 로마가 관여할 필요까지는 없겠지만......... 그 사태의 핵심에 사도가 포함되었고, 더군다나 최근에 가장 뜨거운 온갖 소문들의 주인공인 사도 바울이라면......... 이건 당연하게 사태의 중대성이 달라지는 것이다.
로마는 가능하다면 유대인들의 사법체계나 생활풍습 등에 대해서 관여하지 않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다. 그들이 한데 뭉쳐서 로마에 반기를 들고 무력항쟁을 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저 지근거리에서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이들을 관찰하고 감시해왔을 뿐이다. 군중 심리란 참으로 묘해서 어느 한 순간에 하나의 이슈로 모여들고, 사소한 작은 불씨 하나로 언제든 거대한 화마로 돌변할 수 있는 것이다. 하여 항상 예의주시하고 만약의 사태를 미연에 방지하는 것이 도심 안에 거주하는 로마군의 지상 목표인 것이다.
로마군의 업무를 위해 포섭한 유대인 지지자들을 통해 지난날 예수라는 청년을 따라다녔던 무리들에 대해서 특별히 감시를 하고 있었다. 당시 자칫했다가 그 무리들이 무력봉기를 일으키기라도 했다면 예루살렘의 상황은 지금과 많이 달라있었을 것이다. 하여 그의 남은 무리들을 특별히 예의주시하고 있었고, 그동안 그들과 유대교 산헤드린과의 잦은 마찰에 대해서도 속속들이 알게 되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이 사태는 너무나 뜻밖이었다. 예수의 제자들 중에서 가장 유명하고 군중을 몰고 다니는 바울이 예루살렘에 나타났고, 나타나자마자 산헤드린을 향했는데 갑자기 그런 그를 군중들이 죽이려고 한다니 말이다. 이것은 로마의 입장에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 뜻밖의 상황일뿐더러, 장차 이 사태 이후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서 예측은 물론 사태 파악이 우선이었다.
만약 이 사태로 바울이 죽게 되고, 혹시나 예수를 따르는 무리들과 유대교 산헤드린 측과 서로 죽고 죽이는 싸움이라도 벌어지게 된다면........ 그러다가 자칫...... 어느 순간 서로 적대시하던 그들이 화살을 돌려 이런 사태의 모든 책임을 로마의 점령과 통치로 떠넘기게 된다면........ 그때는 곧바로 유혈 폭동으로 번지고 끝내는 또 다시 전쟁으로 이어이고 말 것이다.
그것을 미연에 방지하기 위하여 백부장이 지금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일단 이 사태를 진정시키고 모여든 성난 군중들을 해산시키고 나서 차차 시간을 가지고 원만하게 이 사태를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판단한 것이다.
‘모두 물러가시오. 예루살렘 도심을 소란케 한 죄로 이들을 로마 총독부가 체포할 것이요. 차차 그의 여죄에 대해서는 철저히 조사를 할 것이며, 모든 조사와 판결에 있어서 예루살렘 산헤드린과 충분한 협의를 통해 처리할 것이요. 모두 돌아가서 산헤드린의 발표를 기다리시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서 소란을 일으키고 무리한 행동을 계속한다면 로마 법률에 의거 내란 선동죄라는 최고 형벌로 엄히 처벌하겠소. 즉시 이 자리를 떠나시오.’
붉은 갑옷의 로마 군인들이 전투태세로 진입했다. 날카로운 장창을 꼬나 잡았고 번쩍이는 글라디우스를 뽑아들었다.
성난 군중들은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로마군대의 무서움을 이미 수도 없이 많이 보아왔기 때문이다. 강력한 군대의 힘을 앞세운 무자비한 폭력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재판까지도 필요 없이 필요하다면 언제 어디서든지 그들의 칼끝은 식민지 사람들의 생사여탈권을 쥐고 흔들어 댔다.
삽시간에 광장은 텅 비어 있었다.
백부장은 바울 일행을 포박하여 총독부 감옥에 가두고 벌어진 사태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예루살렘 성전의 이층 기둥 뒤에 숨어서 백부장과 로마군대의 움직임을 하나도 빼어놓지 않고 예의 주시하고 있는 눈동자들이 있었으니 바로 산헤드린의 장로와 사도회의에서 장황하게 연설을 늘어놓던 나이든 장로였다.
'다 된 밥에 재를 뿌리는구려. 저들이.'
백부장은 사도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 주둔 로마군 병영건물의 감옥에 가둔 뒤, 주둔군 사령관 직책을 대신하고 있는 천부장 글라우디오 루시아(Claudius Lysias)에게 보고했다. 루시아는 직접 감옥을 방문하여 바울과 대화를 나누었다. 바울이 왜 아시아에서 예루살렘으로 왔는지, 산헤드린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그리고 산헤드린과 사도회의는 이번 사건과 무슨 연관이 있는지에 대해서 물었다. 하지만 바울은 눈을 질끈 감은 채 침묵으로 일관했을 뿐이다. 그는 천부장 루시아란 존재의 등장에 대해서 전혀 개의치 않는 모습으로 무엇인가 깊은 상념에 잠겨 있었다.
루시아는 크게 자존심이 상했다. 예루살렘에 주둔하고 있는 로마의 주둔 사령관이면 산헤드린의 대제사장이나 예루살렘 왕국의 헤롯왕 이라 해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실세중의 실세였던 것이다. 그야말로 멀리 떨어져 있는 예루살렘의 최고 권력자라 할 수 있는 로마 총독의 대리인인 천부장을 완전히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하고 있으니 말이다.
천부장 루시아는 백부장에게 바울에게 채찍질로 고문해서 답변을 얻도록 명령한 후 자리를 뜨고 있었다. 그가 막 감옥의 문을 나서려고 할 때, 뒤에서 바울이 입을 열었다.
‘나는 로마인 사울이요. 저들은 나를 유대의 법률에 의거해 죽이려고 하였으나, 나는 엄연히 로마사람이요. 내게는 로마의 법에 의해 정식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소. 유대의 법정이 아닌 로마의 법정에서 내 죄의 유무를 판결해 주시오.’
신약성경 사도행전 22장 22절에는 성난 군중들이 바울을 죽이려 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천부장이 요새 안으로 데려가 채찍으로 고문하려 했다는 기록 또한 22장 24절에 나와 있다. 그런가 하면 다음 25절에서 바울은 스스로 자신이 로마의 시민권자임을 밝혔다고 기록되었다. 그는 아주 특별한 최고 라이센스(특권)을 가진 사람이었다. 로마인이었던 것이다.
로마인 라이센스를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어디에서건 무슨 죄를 지었던 간에 현지(식민지)의 법률과 권력에 의해서 처벌받지 않는다. 로마인은 무조건 로마의 법률에 의해서만 판결을 받을 권리가 있다. 살인이건 종교적 신성모독이건 심지어 쿠데타에 연루되었다 해도 현지의 법률과 권력이 결코 로마인을 함부로 재판하고 처벌할 수가 없다. 로마에 정식으로 소송을 제기해서 판결에 따라야만 했다. 만약 함부로 현지의 법률을 적용해 처벌하면 이는 로마제국의 법률을 무시하고 도전한 것으로 판명되어 무참하게 보복을 감수해야만 했다.
이는 곧 로마가 법이요 진리였으며 또한 깡패였던 때문이다.
잡혀 온 죄인이 스스로 로마인임을 밝혔고 로마의 법정에 세우기를 요청했다. 식민지 예루살렘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모든 사태가 벌어졌고 공개적으로 즉결처형을 당하려던 바로 그 죄수가 말이다. 산헤드린이 그가 로마인이라는 사실을 알았는지 몰랐는지는 지금 당장 문제가 아니었다. 앞으로의 사태 추이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데 문제의 핵심이 있는 것이다. 도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인가? 만약 그가 로마인 신분으로 억울하게 죽었다면......... 산헤드린이나 헤롯왕까지 이 사실을 알면서 묵인한 것이라면......... 이것은 로마 총독을 능욕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로마제국에 전면전을 선포한 것이나 마찬가지가 되는 것이다. 그러면 다시 전쟁이다.
감옥을 나선 천부장 루시아는 서둘러 가이샤의 총독에게 긴 장문의 편지(親書)를 써서 보냈다. 그리고 백부장에게 아침이 밝으면 즉시 죄인 바울 일행을 가이샤로 이송할 준비를 갖추라고 명령했다. 오십 명의 군대로 하여금 죄인 호송을 명령해 혹시나 이송 중간에 불손한 무리들에 의한 만약의 사태에 철저히 대비하도록 시켰다. 무장한 로마군 50인이면 감히 웬만한 세력이라 해도 함부로 쉽게 넘보지 못할 것이다. 천부장은 그만큼 지금 사도 바울을 둘러싸고 벌어진 이번 사태가 대단히 중대하는 것을 직감하고 있었다.
산헤드린이나 헤롯왕의 숨겨놓은 군사력이 들이닥칠 수도 있고, 열심당(젤롯당)이 배후에 숨어서 기습을 가해 올 가능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백부장에게 주변 세력들의 동태에 대해서 추가로 사람을 파견하여 모든 정보를 수집해 오도록 추가로 명령했다.
이렇게 해서 바울 일행은 다음날 아침에 예루살렘을 떠나 가이샤로 이송되었다.
가이샤는 예루살렘에서 대략 103km쯤 떨어진 지중해 연안에 건설된 항구도시다. 메마르고 황량한 벌판과 험준한 바위 산길을 통해야 하며, 당시 사람들은 이틀 정도 소용되는 결코 순탄치만은 않은 거리와 위치에 놓여 있었다.
예루살렘 왕위에 오른 헤롯이 BC 25년경에 오늘날 이스라엘의 최대 항구인 하이파 남쪽 약 35KM 지점에 해변 휴양도시를 건설하기 위해 방파제를 만들고, 그 위로 성벽을 세우고 여러 개의 망대를 만들었다. 그러고 나서 기기에다 시장과 경기장, 원형극장, 신전, 로마식 공중목욕탕 등을 만들어 그 어느 도시에도 뒤지지 않는 항구도시 규모로 건축되었다. 그런가하면 식수를 해결하기 위하여 갈멜산으로 부터 약 9km의 수도교까지 건설하여 물을 끌어왔다. 도시의 언덕위로 화려하고 웅장하게 궁전을 지어 로마에서 파견된 총독의 관저와 행정본부를 두고 행정수도로서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감당할 수 있게끔 만들어서 로마 황제에게 바쳤다. 하여 로마 황제 시저에게 헌정된 이 도시의 이름을 가이사랴(Caesarea) 라고 불렀고, 당시의 총독이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였으니, 예수를 십자가에 매달도록 지시한 본디오 빌라도가 예루살렘 총독 임기의 말미를 바로 이곳 가이샤에서 보냈을 것이다.(26년부터 36년까지 유대총독 역임)
유대 역사를 이야기하자면 늘 헤롯왕이 등장하게 되는데, 얼핏 아주 장수한 헤롯왕이 다 같은 사람으로 여겨진다. 하지만 이는 헤롯 가문의 왕권이 세습되는 과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예수와 연계된 헤롯은 헤롯 안티파스(BC 74-BC 4) 이고, 초대교회의 대부분의 사건은 헤롯 아그리파 1세(BC11~AD44) 이며, 다음으로 찰시스의 헤롯(AD44~48)이 짧게 재위하였으며, 이후로 지금 사도 바울의 이야기를 다루는 모든 사건의 배후에는 헤롯 아그리파2세(AD48~100) 라는 배경이 놓여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유대 총독의 경우는 본디오 빌라도(26년부터 36년까지)에 이어서 펠릭스(Felix)가 장기 집권하고 있었다. 문제는 이 펠릭스가 전체 유대총독을 통 털어서 가장 악명이 높은 악랄하게 나쁜 남자였다는 사실에 있다. 한국식 표현으로 탐관오리의 전형이었던 인물이다. 매관매직은 물론 반란가담자도 돈을 받고 풀어주기도 했으며, 향응과 금품요구가 그의 전매특허였다. 그의 이런 부정부패와 파행이 예루살렘 사람들의 저항심을 크게 자극하기도 했음이 분명하면...... 결국 유대 전쟁 이후 유대 총독에서 파면되고, 알비누스(Albinus)가 새로운 총독으로 부임하였다. 어찌나 전횡이 심했음인지 알비누스가 로마 원로원에 보고된 보고서에서 조차 후임자 펠릭스는 ‘파면 팔수록 썩은 냄새가 진동한다.’고 적었다. 파면당한 펠릭스는 로마에 손을 써서 문책을 당하지 않고 유배형을 받았는데 그곳이 폼페이였다. 그는 폼페이에서 향락에 젖어 마냥 호사를 누리다가 베스비오스 화산을 폭발과 함께 화마 속에 갇혀 타죽었다고 전해진다.
헤롯이 실로 어마어마한 돈과 인력과 노력을 기울여 가이샤라 총독관저를 지은 속뜻은 너무나 쉽고도 자명해 보인다.
총독부를 가이샤로 내쫓아버리고 자신이 실질적으로 예루살렘에서 최고 왕이라는 권력과 지위를 제대로 누리기 위해서였다.
예루살렘이 로마에게 정복당해 식민지로 전락했고, 로마는 예루살렘에 뿌리를 두지 않은 비유대인 출신의 헤롯을 예루살렘 왕에 임명해 바지사장에 앉혔다. 그렇다면 예루살렘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궁전은 당연히 로마의 총독부가 되고 총독이 그곳에 상주하면서 사사건건 간섭을 하거나 직접 통치에 나설 것이 뻔하지 않은가?
하여 제법 떨어진(이틀이나 걸리는 거리) 지중해 연안에 화려하고 웅장하게 해안도시와 궁전을 지어 유대총독을 그리로 떨쳐 낸 것이다. 무덥고 척박하고 황량한 예루살렘에서 파견 근무에 고생하지 말고, 지중해 연안에 마련한 휴양도시에서 그저 휴가나 즐기다가 돌아가시라고 말이다.
대신 예루살렘에서의 지저분한 일들일랑 자신이 맡아서 말끔하게 처리하며 죽어라 로마에 충성을 다 바치겠다고 자청한 것이다. 속내는 ‘어디 한 번 제대로 왕 노릇을 해보자’라는 속셈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결과로 헤롯은 적어도 예루살렘 인근에서는 절대적인 왕권을 마음껏 휘두르고 누릴 수 있었다.
헤롯은 유대인이 아니다.
핏줄 속에는 분명 유대인의 피가 흘렀겠으나, 유대교를 숭상하지 않았고 유대 계율을 따르거나 지키지도 않았다. 무늬뿐인 유대인 헤롯은 아브라함의 자손인 것은 맞겠으나, 유대인들의 정통성이 다윗에게 있었던 반면에, 헤롯은 분명한 쫓겨난 에서의 자손이었다.
사막으로 쫓겨나 겨우 생명을 부지하던 헤롯이 운명의 동아줄을 잘 탄 덕분에 이제 예루살렘 왕국의 왕이 되었다. 다윗의 왕국과 다윗의 후손들을 모두 차지하고 말았으니....... 그 이후에 벌어진 일들이 어떠했으리라는 것은 쉬이 집작이 되고도 남음이 있다 하겠다.
무지무지하게 많은 일들을 벌였다. 무자비한 탄압이 뒤따랐다. 아마도 어쩌면 솔로몬 왕의 시대보다도 더 많은 건설사업과 변화가 헤롯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로마는 유대인들에 적대감을 가진 사람 중에서 골라 유대 왕에 세우고 대신 간접 통치를 맡겼는데....... 헤롯은 그 로마인들의 기대를 훨씬 뛰어넘는 아주 특별한 사람이었다.
대신 당연하게 예루살렘의 유대인 입장에서는 그만큼 지옥이자 죽음이었겠지만 말이다.
그러자니 작금의 그런 상황에서 헤롯에게 부패한 유대총독 펠릭스는 아주 만만한 인물이었을 것이고, 펠릭스에게 헤롯왕은 아주 그럴싸한 물주(돈주머니)였을 것이다.
로마는 헤롯을 식민지 행동대장으로 임명했고, 유대 총독을 보내 헤롯을 관리 감독하도록 했다. 헤롯은 로마에 충성하는 댓가로 산헤드린의 수장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달라고 요청해 수락 받았다. 유대인은 산헤드린이라는 최고 법정이 전통적으로 다스려 왔다. 과반수로 의결을 하되 동수 일 때는 대제사장인 산헤드린 수장이 판결하는 제도였으며, 그 대제사장을 헤롯이 추천 임명한 다는 것은, 이제부터의 유대인은 산헤드린이 아니라 그 위에 있는 헤롯왕이 실질적으로 지배한다는 사실을 가리킨다. 이제 예루살렘은 오로지 헤롯의 것이다.
하지만, 부패의 제왕 펠릭스에게는 남다르게 뛰어난 촉(?)이 있었다. 그를 지금 이 자리까지 오르게 만든 것이 바로 그 남다른 촉과 뛰어난 계산력과 빠른 추진력 때문이 아닌가?
천부장으로부터 모든 보고를 받고 바울을 직접 면담한 뒤 유대총독 펠리스가 내린 결론은 ‘무언가 있다’‘이를 잘만 활용한다면....... 일단 시간을 끌며 지켜보자’ 였다. 예루살렘이 이 정도로 들썩일 정도라면 이들 사도라는 무리와 산헤드린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 것이라는 확신이 섰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헤롯까지 연계되었다면 제법 큰 거래가 성사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업무를 시작하자마자 산헤드린의 인물들이 대거 몰려와 유대 총독과의 면담을 요청했다. 그리고 하루가 멀다고 산헤드린 장로들의 방문은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찾아 오는데만 이틀이나 걸리는 이 먼 길을 늙은 장로들이 떼를 지어 몰려오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울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습니다. 신성한 성역을 더러운 이교도의 발걸음으로 더럽히는 죄를 저질렀습니다. 이는 용서할 수 없는 아주 중대한 범죄입니다. 그를 산헤드린 법정에 세워 유대의 법률에 의해 처벌할 수 있게 넘겨주십시오. 저희 유대인들은 이 중대한 신성모독의 범죄를 저지른 바울에 대해서 결단코 이대로 넘길 수가 없습니다. 예루살렘의 자치권을 약속한 로마에 정식으로 요청합니다. 바울을 넘겨주십시오.’
언제나 하나 같이 판에 밖은 듯 똑같은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바울은 로마인이요. 원로원은 예루살렘의 자치권을 분명 약속하였으나, 로마인은 어떤 경우에도 로마의 법률에 따른 판단을 최우선으로 한다는 법률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소. 로마의 판단이 내려지기 전에 섣불리 그를 예루살렘 법정에 세우도록 허락할 수는 없소. 곧 로마의 원로원에 사람을 보내 그 판단을 받아 볼 생각이요. 돌아가서 기다리시오.’
매일매일 찾아와 바울을 넘겨 줄것을 요청하고 또 요청하였다. 이게 여의치 않자 온갖 수단과 방법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전임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도 지금과 아주 비슷한 상황을 겪었었다. 산헤드린이 잡아들인 죄수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청년이었다는 사실만 다를 뿐이었다. 그 역시도 신성모독의 죄목이었다. 성난 군중이 예루살렘 총독관저로 몰려와 극도로 험악한 분위기를 연출했었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나도 군중들의 광란은 멈출 줄을 몰랐다. 결국 빌라도는 산헤드린의 요구대로 예수라는 청년에게 사형을 판결했다. 죄목은 신성모독에서 내란선동죄로 바뀌었지만 말이다. 아마도 빌라도는 그 사건이 마냥 성가시고 귀찮게 여겨졌었나 보다. 자짓 내란 소요로 이어지는 것보다는, 못 이기는 척 산헤드린의 요청을 받아주면서 예루살렘이 평정을 되찾는 것을 우선으로 생각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펠릭스의 생각은 달랐다. 자신의 총독 관저는 지금 좁은 예루살렘의 한구석이 아닌 것이다. 예루살렘에서 이틀 거리나 떨어진 가이샤인 것이다. 소요와 폭동에 신경 쓸 것도 없다. 완전 요새로 꾸며진 이곳에서 자신을 위협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급하면 헤롯보고 직접 오라고 해’ 하면 되는 것이다.
아직 로마로부터 아무런 답신을 받지 못하였다고 마냥 기다리라고 총독부는 이제 문전박대를 하기 시작했다. 애초부터 로마로 보낸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무엇을 기다린다는 말인가?
부패의 제왕 펠릭스의 속셈은 그랬다.
산헤드린 측이 다급해지면 비공식 루트를 통해 접촉을 해 올 것이고 이 건에 상응하는 보답을 가져올 것이라는 확신이었다. 마지못해 반응을 좀 보이면 그 상대인 예루살렘 교회 사도회의 측에서도 그에 상응하는 조건으로 거래를 제의해 올 것이다. 충분하다고 판단이 서지 않는 한 한쪽에 치우치지 않는 선에서 지긋이 밀당을 계속하다 보면, 산헤드린의 배후에 헤롯왕이 있다면 결국 언젠간 그가 직접 나서서 펠릭스가 내민 미끼를 덥석 물어버릴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헤롯이 내어놓는 보상은 상당해야만 하는 것이다.
바울을 저들에게 내어주고 그 결과를 적당히 얼버무리거나 덮어버리는 일쯤은 펠릭스 입장에서는 아무것도 아닌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적어도 이번만은 아니었다.
펠릭스의 촉(?)이 완전히 빗나간 것이다.
산헤드린은 하루도 빼놓지 않고 먼 길을 달려와 ‘신성 모독과 자치권 인정’을 요구했다. 하지만 은밀한 거래를 요청하지 않았고, 헤롯도 나타나지 않았다. 거기다가 사도 회의 측의 어떤 반응도 나타나지 않은 것이다.
맹탕이었다. 헛발질을 제대로 한 것이다.
그저 허망하게 시간만 흘려보내고 말았다.
그런데........ 그 시간이 장장 2년이나 그냥 흘러가 버렸다니........ 바울은 2년을 가이샤의 감옥에서 갇혀 보냈다. 외출이 허가되지 않는 것을 제외하고는 그리 크게 불편하거나 신변의 위협 없이 무료한 나날을 보내야 했지만, 그는 한시도 쉬지 않고 서신을 통한 선교 활동을 계속해 나갔다.
그렇다고 산헤드린이 포기를 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그들은 헤롯의 인맥을 통해 로마와 직접 소통을 시작했다. 펠릭스이 부패와 월권과 직무 유기에 대해서 끊임없이 탄원을 올렸다. 결국 원로원 회의에서 조차 펠릭스 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했다. 결국 원로원은 순회 판사를 파견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암행어사 같은 제도라고나 할까? 기회를 틈타 산헤드린은 이 순회 판사와 접촉을 했고 목표한 바를 어느 정도 얻어냈다.
가이샤에서 2년 만에 사도 바울 일행에 대한 신성모독의 죄에 대한 재판이 열렸다. 순회 판사를 가운데 두고 왼쪽으로 고소인인 산헤드린이 벌떼처럼 자리를 차지하고 앉았다. 그 앞 피고인석에 바울이 혼자 앉았고 뒤로 그를 따르다 체포된 일행이 자리 잡았다. 예루살렘 교회의 사도들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야고보도 베드로도 요한도 없었다.
왜 그랬을까?
상식적이라면 사도 회의가 모금을 해서라도 예루살렘 최고의 변호사를 모셔왔던가, 열두 명이 직접 나서서라도 적극 해명을 하고, 동료이자 같은 사도인 바울의 구명운동을 했어야만 했다. 하지만 열두 명 중에 단 한 명도 가이샤 재판정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예루살렘 초대교회 사도 회의와 관련지을 수 있는 사람이라곤 전혀 뜻밖에 의외의 아주 젊은 두 사람이 법정의 가장 끝자리에 떨어져 앉아 이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이날 이 법정에서 벌어진 일을 신약성경에 고스란히 옮겨서 기록할 두 사람이었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다는 말인가?
열두 사도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무책임인가? 수수방관인가? 묵인인가? 동조인가? 아니면......... 공범인가?
아니나 다를까?
장소는 멀쩡히 가이샤의 로마 총독부 재판정이었지만,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광경은 예루살렘 산헤드린 재판정과 전혀 다를 것이 없었다. 순회 재판관은 침묵으로 일관했고 원고 측인 산헤드린 장로들의 외침과 주장만이 재판정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바울이 변론에 나서면 방청석에서 야유의 함성이 끊어지지 않게 터져 나왔고 재판장은 이를 저지하지 않았다. 재판은 여러 날 계속되었지만 이미 결론은 뻔하게 내려진 재판이었다. 필요한 절차와 시간이 지나면 가이샤 재판정은 바울을 내어줄 것이고, 산헤드린은 바울을 끌어다가 예루살렘 광장에서 돌팔매로 참혹하게 살해하던가, 아니면 끓는 가마솥에 삶아지거나 십자가 처형을 재현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예루살렘(산헤드린)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승리를 확신했다.
바울은 최후 변론에 나섰다.
오랜 침묵 끝에 결심한 듯 그는 마침내 입을 열었고, 로마의 관리 출신답게 로마제국의 법률 조항을 조목조목 꺼내 들었다.
‘저는 로마인입니다. 로마인에게 주어진 로마 법률에 근거해 공정한 정식 재판을 거듭 요청합니다. 지금 자행되고 있는 이 불법적이고 위협적인 유대의 법률이 선제적으로 허용되고 있는 재판을 저는 결코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저를 로마로 보내서 공정한 로마의 법정에서 재판받도록 허락하여 주십시오. 이는 로마인 신분을 가진 저의 정당하고 확고한 요청입니다. 이 재판의 기록부에 저의 최후 진술을 있는 그대로 기록으로 남겨서 로마의 원로원까지 전달되어 언제고 모든 진실이 명백하게 밝혀지기를 원합니다. 로마로 보내 주십시오. 로마의 법정에서 정당한 재판을 받고 싶습니다.’
간절한 요청이자 일종의 협박이 아닐 수 없었다.
재판은 기록으로 남겨진다. 로마인이 억울하게 죽었노라고 하소연한 최후 진술이 기록으로 남아 로마에 전해진다. 불공정한 것으로 판명이 나면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
그 책임을 누가 져야만 하는가? 왜? 나와 상관이 없는 일에?
순회 판사는 다급하게 판결을 내리고는 서둘러 법정을 떠났다.
‘피고 바울을 로마로 압송한다. 그는 로마의 법정에서 다시 재판을 받을 것이다.’
멍!!!!!!!
닭 쫓던 개들은 황사 가득한 뿌연 하늘을 올려다 볼 수밖에 없었다.
여기에서의 개(?)는 과연 누구일까? 단수는 결코 아니겠고 복수는 한참 넘어 서너 무리 집단일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신약성서를 열심히 읽어보신 분들은 그 개(?)가 누구인지 충분히 알 수 있을 것이다.<아멘!>


사도행전 24장에 기록된 것처럼 사도 바울은 가이샤라에서 유대총독 펠릭스에게 재판을 받았다. 이는 신약성경뿐만이 아니라 로마의 재판기록에서도 확인된다.
‘피고인 바울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왜 그를 처벌해야 하는가?’
‘거룩한 하나님의 신전을 이방인들과 함께 침범하였고 유대교의 율법과 전통을 훼손시키는 신성모독의 죄를 저질렀습니다. 유대율법에 따르면 그것은 곧 사형에 해당합니다.’
‘그것은 너희 유대인들의 법률과 전통이 아니겠느냐? 하지만 바울은 로마인이다. 로마인은 오로지 로마법에 의해서만 처벌이 가능하다. 로마법에는 하나님이나 유대 율법에 대한 규정이 없으며, 로마인이 유대의 신전에서 어떤 행위를 하였거나 율법을 지키지 않았다고 하여 로마법을 어겼다고 볼 수는 없다. 너희가 말하는 하나님에 대한 신성이나 유대 율법이 로마법에 의해서 인정되고 있지 않기에 신성모독으로 볼 수가 없다. 그가 로마의 판테온에 들어가 신전을 훼손한 것이 아닌데, 로마법의 어디에서도 그에게 신성모독 내지는 율법 위반의 죄를 물을 수가 없다. 하여 그는 로마법에 의하여 무죄로 석방될 것이다.’
‘가이샤 황제(시저)는 예루살렘의 자치권을 약속하셨습니다.’
‘로마법이 우선이라는 전제 하에서 민족과 종교와 생활풍습에 대한 자치권을 허락한 것이다. 자치권을 허락하되 로마법과 대치하게 된다면 언제 어디서든 로마법이 최우선 덕목이자 절대적 기준이며, 그 로마법의 허용선 안에서의 자치권을 일컬음이다. 아무리 유대인들이 하나님의 신성과 율법의 존엄을 중시한다고 해도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마법의 이해와 배려 안에서만 가능해 지는 것이다. 분명이 말하겠다. 바울은 로마법에 따라 처벌해야 할 근거가 어디에도 없다. 굳이 따진다면 로마가 인정하고 허락하지 않은 유대교의 신을 믿고 따랐다는 죄로 처벌을 할 수는 있을 것이다. 그렇게라도 바울을 처벌하기를 원한다면, 나는 고발인인 너희 모두도 체포하여 같은 죄로 똑 같이 처벌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아가서 예루살렘의 유대인 모두를 체포 할 수도 있다. 신전을 폐쇄하고 유대율법을 불법으로 규정하고 로마가 허락하지 않은 이교도들의 종교로 처벌하기를 너희들이 지금 원하는 것이냐? 예루살렘 유대인들의 신앙생활과 전통을 유지하도록 허락해 준 것이 로마가 너희에게 베푸는 진정한 지치권의 허락임을 잊지 않았기를 바란다.’
‘하나님을 모독한 바울을 이대로 무조로 석방한다면 어쩌면 폭동이 일어날지도 모릅니다.’
‘그것은 곧 로마에 대한 반란이 아니겠느냐? 너희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이 그 모든 책임을 지게 될 것임을 잊지 말아라. 로마법은 관대하지만, 반란은 절대로 용서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이다.'
펠릭스 유대 총독의 재판에서 분명하게 바울은 무죄라고 밝혀졌다.
순회판사의 재판에서 판도를 뒤집으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결국엔 로마법을 기준으로 어디에서도 그의 위법성을 찾아 낼 수가 없게 되었다. 다만 어떻게 해서라도 그를 죽이고자 하는 사람들(?)의 억지에 의해서 2년씩이나 시간이 흘렀음에도 여전히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서라도 바울을 죽여야만 한다고 물고 늘어졌던 것이다. 그들은 여전히 신성모독과 자치권을 주장했고, 바울은 자신이 로마인이라고 주장했다.
그만큼 (로마인 라이센스)의 위력은 상당했던 것이다.
그런 바울이 이제 재판정을 로마로 옮기게 된다면...... 거기서는 유죄가 나올 수 있을까? 모두가 알고 있었다. 로마에 가면 100% 무죄가 나올 것이라는 것을. 심지어 기소조차 안 될 수가 있을 것이라는 섣부른 판단도 충분히 가능해졌다.
로마의 군대가 로마인 바울의 안전에 만전을 기하면서 로마까지 호송해 간다. 재판정이 옮겨지는 것이다. 바울의 홈그라운드로 말이다. 재판정이 옮겨진다는 것은 고발인(산헤드린) 측도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변호인과 법률 대리인단을 이끌고 로마까지 가서 새로운 재판을 벌여야 한다는 뜻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기를 쓰고 예루살렘에서 끝장을 보려고 했던 것이다. 누구를 로마로 보내지? 몇 명이나 보내지? 보낸다고 이길 수는 있는 거야?
거기다가 정말로 미치고 팔딱 뛰게 만드는 것은......... 시간을 끌면 끌수록, 재판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온 세상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이 집중되어졌고, 사도 바울의 인기가 하늘을 찌를 정도로 솟아 올라간다는 사실이었다. 소아시아 지역에서 기독교를 받아들인 사람들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갔다. 그런 그들에게 바울은 감옥에서도 서신을 계속 써서 보내서 선교활동을 눈부시게 펼쳐나갔다. 바울은 그야말로 BTS급이었던 것이다.
이런 상황이었으니 정말로 그들은 감옥을 습격해서나 무장투쟁을 벌여서라도 어떻게든 반듯이 바울을 죽이기를 원했다. 왜 그렇게까지 나왔을까?
바울이 산헤드린이나 유대인들에게 그만큼 위협적이었던 것일까? 왜? 도대체 무엇이 그렇게 두려웠던 것일까?
다른 한 가지, 왜 열두 사도들은 동료인 사도 바울을 구명운동을 벌이지 않았으며, 사도 바울을 변호하고 두둔했다는 구절이 단 한 구절도 성경에 기록되지 않았는가? 바울의 수감생활 2년 동안 초대교회 사도회의가 한 일이 아무것도 없는 이유는 왜일까?
사도회의가 한 일은 딱 하나, 베드로의 수행비서나 다름없었던 마가(마가복음 기록자)를 바울에게 보냈다는 사실 뿐이다. 이 일로해서 마가는 사도 바울의 당시 행적을 모두 목격하였고 기록으로 신약성서에 남기게 되는 것이다.
그럼 베드로는 왜 마가를 바울의 감옥에 보냈을까?
적어도 내가 내린 결론은 베드로가 가장 믿을 수 있는 심복 마가를 보내 사도 바울의 생각과 그가 장차 벌이게 될 모든 활동에 대한 첩보를 얻어내기 위해서였다고 판단된다.
그랬는데...... 마가복음과 사도행전을 따르자면 이 시간을 통해 마가가 스승인 베드로의 신앙관과 가치관 보다 사도 바울의 신앙관과 가치관이 더 올바르다고 생각되어 이후로 점차 사도 바울 쪽으로 기울어졌다고 보고 있다. 성서에 기록된 마가의 심정을 들여다보면 그가 정말로 바울에 대해 우호적이었으며 존경심을 가졌고 받들어 모시게 되었다는 것을 쉽게 공감할 수가 있다. 대신 이후로 스승인 베드로에 대한 기록을 더는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게 된다.
그렇다면...... 베드로와 야고보와 사도회의는 왜 그렇게 바울에게 뒤로 적대적이었으며, 도를 넘어서 산헤드린과 한 패가 되었을까? 왜 그들은 공범이 되었을까?
산헤드린이야말로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게 만든 장본인들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를 같은 죄목의 신성모독과 율법훼손으로 체포하고 고문을 가한 무리가 바로 산헤드린이었다. 그리고 그 책임을 회피하기 위하여 슬며시 로마의 법정(유대 총독)으로 떠밀어 넘긴 것이다. 그 로마 법정(본디오 빌라도) 역시 예수의 무죄를 판결하였으나, 산헤드린이 폭동의 가능성으로 거듭 협박을 가해왔고, 결국 기세에 눌린 빌라도는 예수에게 군중 선동의 죄를 물어 사형에 처해 십자가에 매단 것이다.
너무나 똑 같았다.
산헤드린은 같은 죄와 같은 방식으로 바울을 체포했으나 도중에 얼떨결에 로마가 폭동 예방차원에서 가로채 붙잡아 갔다. 어차피 그렇게 되기를 애초 계획했던 터라, 다음 단계로 로마에 의한 바울을 사형을 청했다. 예수 그리스도와 똑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역시나 포동 우려를 내세워 협박을 했다. 이번에도 성공이 목전에 있었다. 바울도 예수처럼 죽게 될 것이 확실했다. 그런데 바울에겐 예수에게 없었던 (로마인 라이센스)가 있었다.
예수는 로마법에 의해 사형될 수 있었지만, 바울은 로마법에 의하면 여전히 무죄였다. 적어도 로마인이라면 예루살렘에서 그 정도의 죄를 설령 지었다고 해도, 아무도 따지거나 처벌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혹 예수처럼 바울이 예루살렘 성전을 부시거나 파괴했다고 해도 자기변호만 어느 정도 할 수 있다면 그저 경고나 경범죄 스티커 발부 정도로 넘어갔을 것이다. ‘아니꼬우면 너희도 제사장 집어치우고 로마인 라이센스나 취득해.’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말로....... 열두 사도들은 왜 산헤드린과 손을 잡았을까?
어떻게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매달아 죽였고, 자신들을 감시하고 탄압한 산헤드린과 함께 이 거룩한(?) 역모의 공범이 되었을까?
적어도 필자의 주관적인 생각과 판단 하에서 그 이유는 아주 간단하다.
열두 사도도 산헤드린의 제사장과 장로들도 모두 100% 순수 유대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이유 때문에 그들과 바울은 다른 처지에 있었고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바울 역시 핏줄은 유대인이 분명했으나, 그는 그들과 다른 로마인이었던 것이다.
유대인과 로마인....... 혹은.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처지가 달랐던 것이다.
그것이 곧, 유대인 열두 사도들의 정체성과 이방인 사도 바울의 정체성의 차이가 되는 것이다.
예수와 바울은 유대인의 핏줄을 가지고 태어나기는 했으나 탈유대, 모든 세상을 하나로 지향하는 새로운 노선의 정체성을 가졌으며, 이것이 기독교의 정체성이 되는 것이다.
열두 사도의 경우는 예수께서 선택하시고 모범을 보이셨으며 가르침을 내리셨음에도 하나같이 모두 예수 그리스도가 추구하는 진정한 정체성을 깨닫지 못했고, 예수를 직접 보지도 만나지도 가르침을 받지도 못한 사도 바울만이 그 참 진리를 깨닫고 체득한 것이다. 그런 바울에게서 기독교의 참 진리가 나오게 되는 것이다.
적어도 이 시점까지 열두 사도는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결코 아니었다.
아직 그들은 유대인 이었다. 기독교 정체성의 진실을 깨닫지 못한 아직은 유대인이었다.
선민사상에만 젖어있는 흔하디 흔한 그런 유대인 출신의 아주 쬐끔 어설픈 기독교인 이었을 뿐이었다. 적어도 이 시기까지는 그것이 확실해 보인다. 그들은 아직은 유대인이지 기독교인이 아니었다.
기독교의 씨앗을 뿌리신 분은 예수 그리스도다. 거기에 새싹을 틔우고 줄기를 풍성하게 자라게 만든 사람은 바울이다. 시간이 지나 그 줄기마다 향기로운 열매가 달리기 시작했는데........ 어떤 과정을 거쳐서 그 열매의 상표권에는 ‘베드로표 기독교’가 등재 되었다.
이는...... 아는 사람은 웬만큼 다 아는 이야기인 것이다.




유대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다. 그저 평범하게 살다가 범죄를 저질러 사형을 받아야만 했던 일반적인 유대인 남자일 뿐이다.
하여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란 이단이며 뿌리 채 사라져야할 악(惡)인 것이다.
그들에겐 유대민족을 선택하신 하나님과의 약속이 있을 뿐이지,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삼위일체 역사가 존재하지 않는다.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지 않는다면 기독교는 존재할 수가 없다.
그런 유대인 특유의 선민사상이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우리나라의 많은 기독교인 중에서 이유없이 그저 막연하게 이스라엘을 두둔하고 호감을 가지는 사람들이 유독 많이 있음에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기독교가 구약과 신약 성경 모두를 정경으로 받들고 있고, 그중에 구약성경의 내용 전체가 하나님과 유대민족 사이의 이야기들로 채워져 있다 보니 너무도 당연하다싶게 하나님을 유대교와 기독교 사이를 이어주는 매개체(?) 정도로 인식함에서 생겨난 어처구니 없는 씨츄에이션이 아닐까 싶다. 지나간 시대의 일부 목회자분들과 가톨릭의 어르신들께서 어떤 그릇된 신앙관과 역사관과 가치관으로 결코 선하지 않은 목자의 길을 걸어들 오셨는지 개탄스럽다고 해야겠다.
참 진리가 그리 필요치 않았고, 오로지 성도의 머릿수를 늘리고 성금을 거두어들이고 남들보다 커다란 교회와 높은 종탑을 올리기에만 혈안(?)이 되었던 결과라 하겠다. ‘말로는 하나님께 영광’을 외쳤지만, 지상에서의 ‘목회자의 능력과 명망’을 추구해 온 결과이다. 지난날 온 유럽의 군대가 성지 회복을 외치며 소아시아까지 쳐들어가서 숱한 죄를 저질렀음에도 ‘모든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외쳐댔던 경우와 별반 다르지 않다. ‘모든 명분과 책임은 하나님의 몫, 빼앗은 영토와 재물과 명예는 모두 교회(교황)의 몫’이 되는 거룩한 사업을 벌였다.
‘교회(기독교)는 언제나 죄를 짓지 않는다. 아니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다. 모두 전지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사전에 미리 대비하시고 허락하신 일들임으로 죄나 잘못은 생길 수가 없다.’는 무오류성을 교회역사 초기에 만들어서 천사의 갑옷처럼 교회(교황)가 스스로 장착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무오류성도 유대민족의 막가파식 선민사상은 뛰어넘지 못했다.
혹, ‘지구상의 모든 유대인을 싹쓸이 할 수만 있다면....... 더 이상 유대 선민사상에 따른 하나님 소유권 주장은 사라지지 않겠는가?’ 라는 상상을 하고 행동에 옮기려던 교황의 성스러운 사주가 십자군에게 내려진 적은 분명히 있었다.
모순이다.
세상에서 모든 것을 뚫어버리는 창과 모든 것을 막아내는 방패가 싸움을 벌이면 어떻게 될까? 유대교와 기독교는 바로 그런 관계에 해당되는 것이다.
어쨌거나 2천 년 전에 가나안 땅 나사렛에 한 혁명가가 등장했다.
그는 유대인 소유의 신(神)을 회수하여 온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동등하게 골고루 나누어 새롭게 분양을 해주었다. 재산권을 침해당한 유대인들이 반발하자, 그동안의 불합리한 약속이 사라졌음이요, 이것이 새로운 계약이라고 선언했다. 아울러 혁명가 자신이 먼 과거에 유대인들과 약속을 했던 그 장본인이 보낸 대리인이자 또한 본인이라고 주장했다.
유대인들은 분노를 넘어 거룩한 약속의 폄하자로 거짓 선동가로 혁명가를 고발해 사형을 받게 만들었다.
혁명가는 십자가에 못 박혀 죽었고, 그를 따르던 무리들은 뿔뿔이 흩어져 꽁꽁 숨었다.
그렇게 혁명가를 추앙하고 따르던 열두 명의 심복은 물론 예수를 따르던 많은 무리들 또한 모두가 하나같이 유대인들이었다.
사람들은 메시아(구세주)가 미카엘 대천사나 알렉산더 대왕처럼 백마를 타고 눈부신 갑옷으로 무장한 용맹스럽고 날랜 모습으로 나타나 단칼에 이 세상의 모든 죄악을 쓸어버리고 낙원을 이룩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바랬다. 다시 건설된 에덴동산에서 선발된 기독교인들만이 행복을 누리며 영원히 살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아니 믿고 싶었다. 그랬음에도 신약 성서에 기록된 바에 따르자면, 사도들 안에서도 그 새로운 천국에서조차도 더 많은 것을 차지하고 더 높은 곳에 머무르기를 원하면 자리싸움을 벌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거기에 더하여............
기껏 다시 오신 메시아는 미카엘 천사나 알렉산더 대왕의 모습이 아니었다. 밀려난 사람들의 방치된 도시 나사렛에서 온 목수의 아들이었다.
몇 가지 사건들이 있기는 했으나, 힘없이 산헤드린에 끌려가 신성모독의 재판 끝에 사형을 언도 받고 채찍질에 가시면류관을 선물 받았고, 로마에게 넘겨져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 처형을 받고 비참하게 죽었다.
사형이 있기 전 날이나, 그 다음날이나......... 세상은 언제나처럼 똑같은 모습으로 다시 시작되었다. 변하거나 달라진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오늘도 일을 해야 했고 로마에 세금을 바쳐야 했으며 중간에 예루살렘 성전을 위해 삥땅(성전세)을 뜯겨야만 했다.
‘도대체 이게 뭐야?’
‘이 땅에 오신 구세주(메시아)를 믿고 따랐고 그분에게 세례까지 받았는데 어제와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잖아? 구원은 도대체 어디로 간 거야? 이거 혹시 사기 아니야?’
그것은 모두 일상에서 벌어진 실제의 엄연한 현실이었다.
열두 사도는 물론 여러 장로들과 그들과 함께 생활해 온 수많은 사람들 모두의 공통된 심정이었다.
‘다들 꼴좋다. 그러게 그렇게 아니라고 해도 듣지를 않더니....... 사기꾼을 십자가에 매달고 나니 이제 제대로 현실이 느껴지지? 각오 단단히 해라. 이제 혹독하게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거야. 이단의 죄를 지은 대가가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주마.’라고 모든 유대인들이 대놓고 윽박지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고스란히 생명의 위협으로 다가왔다.
살 방도를 찾아야 했다.
결국 열두 사도는 그 해결책을 모색한 끝에 야고보를 앞세워 산헤드린의 문을 두드렸다.
중간 정도의 선에서 적절한 타협을 선택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들 모두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그런 타협책이 나올 수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아주 특별한 과거시대의 선민사상에 젖어있던 유대인들에게 보다 더 크고 넓은 의미의 구원을 약속하고 새로운 세상이 열렸음을 알렸지만, 유대인들은 이를 거절했다. 거절을 넘어 예수를 적(이단)으로 몰아붙이고 마침내 십자가에 매달았다.
예수는 그 고난을 통해 새로운 계율을 선포했고 죽음으로써 고립된 세계인 유대와 드넓은 세상 사이에 사랑의 가교를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예수의 숭고한 뜻은 그가 선택한 열두 명의 제자들에 의해서 유지 발전해 나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 역시나 아니었다. 예수는 제자들에게 기독교의 목자가 되어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여 모든 사람이 구원받을 수 있게 하라고 가르쳤다. 그랬음에도....... 그들은 아직 참 기독교인이 되지 못했다. 아직 그들은 모두 유대인이었던 것이다.
예수는 선민사상에 젖어 스스로 고립된 예루살렘과 세상 사이에 사랑의 가교를 놓았다. 모두가(온 세상이) 새로운 기독교 하늘 아래서 구원을 받고 행복하게 더불어 살기를 바랬다. 예수가 택한 고난의 십자가 죽음 댓가로 설치된 사랑의 가교에 유대인들은 바라케이트를 쳤다. 세상과의 소통의 단절을 감행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열두 제자는 여전히 예루살렘에 머물기를 택했다. 다리를 건너면 스승인 예수 그리스도가 약속한 새로운 세상이 있었음에도 여전히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예루살렘의 유대 율법에 머물렀다. 이율배반이며 스스로 모순된 처신을 택한 것이다. 저 다리 건너 광야에서 사도 바울의 외침이 없었다면....... 어쩌면 그들은 영원히 예루살렘에서 유대인으로 살았을 것이다.
열두 제자들은 멀리 있는 로마 보다는 가까이 있는 산헤드린(유대교 율법과 전통)이 더 무서웠던 것이다. 그들은 산헤드린이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하고 고문하고 십자가에 매달아 죽음으로 몰고 가는 것을 고스란히 목격했다. 구세주(메시아)를 자청하면서 온 세상의 구원을 약속하던 예수가 산헤드린 앞에서 어떻게 처벌과 처형을 받았는지를 모두 지켜보았던 것이다. 산헤드린의 힘과 공포는 이 세상의 그 어느 것 보다도, 심지어 먼 곳의 로마 보다 강력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십자가 처형을 통해 예수를 제거한 산헤드린은 차후의 절차에 대해서 회의를 했다. 이단의 뿌리인 예수는 제거했으나 그의 제자라 일컬어졌던 사람들과 그들을 쫓아다니던 많은 무리를 어떻게 조치해야 할 것인가에 대한 논의였다. 엄격한 제재는 필요하겠으나 상당히 많은 사람들 무리여서 모조리 뿌리를 뽑자면 적지 않게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판단이 섰다. 하여 결론을 내리기를...... 예수가 죽었으니 그의 최측근이었던 제자들 까지만 제거를 하거나, 아니면 그들을 포섭하거나 협박하여 스스로 나머지 무리들까지 회유되거나 저절로 뿔뿔이 흩어지게 만드는 것이 최선책이라고 결정한 것이다.
산헤드린은 제자들을 수배했고, 두려움에 떨며 아직 예루살렘을 떠나지 못하고 숨어있던 제자들은 결국 산헤드린에게 발각이 되고 말았다.
열두 제자들 중에서 초대 주교인 야고보와 베드로가 산헤드린 법정에 섰다. 예수 그리스도를 체포해 끌고 갔던 엊그제의 그 상황처럼 말이다. 죽일 것이냐 살릴 것이냐 하는 칼자루가 산헤드린 손에 쥐어졌고, 목이 잘릴 것이냐 십자가에 매달릴 것이냐 하는 공포가 제자들 마음속에 가득했다.
산헤드린은 그들의 스승인 예수가 어떤 죄를 저질렀으며 그 최후가 어떠했는지를 거듭 거듭 강조했다. 그럴수록 야고보와 베드로는 두려움에 떨 수밖에 없었다.
결국....... 야고보와 베드로는 산헤드린 앞에 무릎 꿇고 목숨을 구걸할 수밖에 없었다. 문제가 되는 예수의 가르침을 두고 산헤드린과 타협을 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산헤드린의 질책과 판결은 존중하겠으나 저희들에게 쏟아진 죄목에 대해서는 오해가 있어 너무나 억울합니다. 저희는 모두 유대인으로 태어났습니다. 지금 이 순간까지 하나님만이 유일신이심을 믿고 따랐으며 유대의 계율과 전통을 고스란히 따르고 섬기며 살아왔습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순순한 유대인입니다. 스승인 예수로부터 새로운 구원에 대한 복음을 전해 들었습니다. 저희같이 미천한 어부나 세리 같은 신분의 처지로도 랍비나 귀족이나 부자들과 똑같이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놀라운 소식이었습니다. 그래서 따랐던 것입니다. 미천한 신분으로도 심판의 날을 거치지 않고서도 천국에 갈 수 있다는데 어찌 따르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유대인의 거룩한 하나님을 온 세상의 미천한 것들과 함께 나누겠다고 하지 않았느냐? 그것이 신성모독이며 유대 율법을 훼손한 것인지를 몰랐더냐?’
‘하나님께서 손수 유대민족을 선택하셨는데 어찌 그것이 가능한 일이겠습니까? 스승께서 그리 말씀하셨다고 전해졌는데...... 저희들은 그리 듣지 못하였습니다. 저희들이 들었고 기억하는 바는.........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구원은 오로지 유대인에게만 국한해서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저희도 분명하게 이 순간까지도 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 유대인들 중에서 저희들처럼 신분이 미천하거나 성전세를 내지 못할 정도로 가진 것이 없거나, 낮은 처지로 살다보니 많은 죄를 지었던 처지로도 장로님들이나 귀족들처럼 똑같이 구원을 받아 하늘나라에 올라 갈 수 있다는 말씀에 믿고 따랐을 뿐입니다. 저희는 이전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유일신이신 유대의 하나님을 믿고 따르며 할례를 받고 유대의 율법과 전통을 고수해 나갈 것입니다.’
산헤드린의 사제들 눈가에 희미하게 미소가 번져나가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체포되던 날 밤에 베드로가 새벽닭이 울기 전까지 세 번이나 예수를 부인하더니........ 골고다 언덕 사형장에서 꼬리를 감추고 내뺐던 제자들이 지금 산헤드린 법정에서 또 예수를 부정하고 폄하하기에 열을 올리고 있었던 것이다.
야고보와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모두 부정함으로써 산헤드린으로부터 처벌을 피할 수 있었다. 산헤드린은 그들에게 과거의 예수와 같은 행위로 문란함을 야기시켰을 때 보다 더 엄중하게 처벌받을 것임을 거듭 강조하면서 그들을 방면 시켜주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민족의 아주 특별한 선민사상속에 갇혀있는 하나님의 구원의 약속을 회수하여, 온 세상의 모든 기독교인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기 위해서 고난의 십자가를 지셨다. 제자들에게 간곡하게 그 당부를 남기고 눈을 감으셨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제자들에게 온 세상의 구원은 어디에도 없었다. 예수께서 당부하신 기독교 정신의 실종이었던 것이다. 무늬뿐인 유대인 전용의 기독교가 사도들 가슴에 남았었을 뿐이다.
그들은 여전히 유대인들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사람들만......... 유대인중에서 자신들처럼 처지와 신분이 미천한 사람들인, 여전히 유대인 핏줄을 가진 사람들만이 구원의 복음을 통해 천국에 올라갈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었던 것이다. 이를 예수의 가르침이 부족했었음인지, 아니면 너무 무식하고 천한 사람들을 잘못 골랐음 때문인지, 결코 탈색되지 않는 유대 핏줄의 특성 때문인지........ 필자로서도도무지 가늠할 수가 없다.
열두 사도의 기독교인이란......... '유대인 핏줄을 가진 사람들 안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인 한정된 사람들'만 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단코 예수 그리스도가 이야기한 진정한 기독교가 아니다.
사도들은 스스로 깊은 딜레마에 빠져들었다. 어쩌면 그네들 속 마음은 스승의 가르침을 깨닫고 이해했을지도 모르겠다. 다만 현실적인 벽이 너무나 크고 무서웠을 것이다. 스승도 해결하지 못한 일을......... 그래서 부분적으로만 수용하고 적당한 타협을 꺼내들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결국, 세상을 향해 열려진 기독교가 아닌......... 유대세상 안에서만의, 자신들처럼 미천한 사람들의 신분 세탁 정도만을 유지하는 것이 살아남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말이다.
하지만, 어찌되었건 그렇게 다소 불완전한 타협 방식의 기독교일 지라도......... 신분세탁이 모두 완성된 유대 속의 기독교가 되었다 쳐도, 거기에는 또 그들을 이끌 지위가 높은 사람이 필요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된다면 당연히 그 지위에 따라 구원의 상급도 달라지지 않겠는가? 하여 그들은 예수가 살아 있을 때나 떠난 후에나 여전히 서열에 대한 자리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그날이 오면....... 사도에겐 적어도 헤롯만한 신분과 권위가 내리지 않겠는가 하고 말이다. 그것은 목자의 길이 아니라 마왕의 길임을 그들은 모르고 있었다.
이런 와중에 멀고 먼 소아시아 지역에서 바울이라는 새로운 사도가 나타났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의 참 가르침과 구원의 약속을 이해하고 받아들이고 있었으니, 바울 이야말로 진정한 첫 번째 기독교인이었던 것이다.
그런 사도 바울의 복음이 세상 끝까지 퍼져 나가면 나갈수록, 유대인 출신이 아닌 기독교인이 생겨나면 생겨날수록 열두 사도들의 입장과 처지가 곤란해졌다.
예루살렘의 기독교(소위 열두 사도의 기독교)와 변방의 기독교(사도 바울의 열린 기독교) 사이에 사사건건 부딪힘이 생겨났고, 교리와 명분을 포함한 모든 면에서 예루살렘 사도교회는 뒷걸음질 칠 수밖에 없게 되었던 것이다. 안디옥 교회에서 처럼 말이다.
열두 사도의 속마음은 정말로 사도바울의 가르침이 틀렸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것이 예수의 참 가르침임은 알았으나 예루살렘에 빌붙어 사는 처지로 하루하루 살아남기 위하여 그런 처신을 할 수밖에 없었을까? 감히 단언하건데...... 예수의 최측근 제자 중에서 참 기독교인은 하나도 없었다. 기독교 행사에 단체복 차림을 하고 사도라는 명찰을 단 어설픈 유대인들이 있었을 뿐이다.
그러던 참에 멀고 먼 변방에 진짜 기독교인이 등장했다.
그의 가르침과 소신 발언들이 하나하나 예루살렘 사도들의 가슴을 콕 콕 찌르기 시작했다. 세상의 소문과 눈초리가 달라지기 시작하더니 언제부터인가 같은 예루살렘의 기독교인들조차 ‘너희들이 진짜 사도야? 예수 제자가 맞아?’하는 눈초리를 보이기 시작했다.
정말 미치고 팔짝 뛸 처지였다.
‘혹 이러다 사도라는 장자권 마저 바울에게 빼앗겨 버리는 것 아니야?’하는 우려가 생겼을 정도였다.
더 이상 이러면 안 되겠다 싶어서 정신들을 차리고, 다시 열두 명이 단합을 하고, 전선을 재정비하고 사방으로 나아가 조금 더 용감하게 바울의 주장에 비슷한 수준의 복음을 전하기 시작하였는데.......... 그 소식이 산헤드린 귀에 들어갔다. 산헤드린은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을 사도들의 배신이라고 판단했다.
산헤드린 공회의는 열두 사도에 대한 체포령을 발부했다. 스스로 유대인이라고 자처하며 생명을 부지하던 처지라 유대 최고 재판소인 산헤드린의 명령은 절대적이었다. 열두 사도들은 체포되어 산헤드린 법정에 섰고 재판을 받았으며, 채찍형을 언도받아 열두 명 모두가 심하게 채찍질을 당한 뒤, 다시 같은 죄를 범하지 않겠다는 서약과 함께 방면되었다.
바른 소리를 하자니 산헤드린에 끌려가 죽을 판이고, 가만히 있자니 사도 바울의 등쌀에 굶어죽을 판이니 도대체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바울만 없으면 우리가 이렇게 수난을 당하지는 않을 것이 아닌가?’
문득 떠오른 생각에 사도회의는 이 사태의 모든 배경에 항상 바울이 있다고 밀고하였고, 더하여 어떻게 하면 바울이 입을 다물게 할 수 있는지에 대하여 산헤드린과 모종의 밀계가 있었던 것이다.
사도회의가 사도 바울을 소환했고, 늙은 장로가 바울 일행을 예루살렘 성전으로 안내하여 불경죄를 저지르게 만들었다. 때를 기다리던 산헤드린이 바울을 체포했고 재판에 세워 사형을 내릴 판이었다. 모든 게 순조롭게 그렇게 돌아갔다.
그때까지 그들은 미처 몰랐다.
바울에게 로마인 라이센스가 있는 줄을 말이다. 바울이 라이센스를 들이밀었고 그 효과는 실로 엄청났다. 로마인은 무조건 로마법정에서 로마의 법률에 의해서 정당하게 재판을 받을 권리가 있었던 것이다.
그 권리가 어찌나 대단했던지...... 바울이 로마에 가서 재판을 받고 싶다고 요청했고, 그 요청이 받아들여졌다.
바울이 로마 군대의 호위까지 받으며 예루살렘 인근 가이샤 항구에서 로마 해군 군함에 올라탔다. 철저한 호위와 로마인 대우까지 받으며 지중해를 건너 시칠리아를 통과해 메시나에서 내려 육로를 통하던가, 로마 인근의 항구까지 배로 계속 항해할 예정이었다.
바울의 요청으로 마가(마가복음 저자)와 누가(누가복음 저자)가 수행원으로 함께 배에 올랐다. 공식적인 재판의 연장선상이었기에 안전을 위해 당사자 외에는 다른 누구도 함부로 함선에 태우지 않았다.
산헤드린의 사제단 대표와 장로들은 재판을 위해 멀고 먼 로마까지 자비를 들여 따로 다른 배를 구해서 타고 로마까지 가야만 했다. 재판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그 고충이 실로 엄청났을 터이니 그 원망 또한 상당했을 것이다.
산헤드린이 그런 처지였다면....... 예루살렘 초대교회의 사도회의는 또 어떠했을까?
열두 사도들도 역시나 허겁지겁 은밀하게 모여서 대책을 고심하기 시작했다.
‘무슨 수단과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이번에 반듯이 사도바울을 끝을 내야 합니다.’
‘로마의 호위 하에 이송을 시작하지 않았습니까? 어찌해 볼 도리가 없지 않습니까?’
‘쫓아가야지요. 가는 도중이던, 아니면 로마까지 쫓아가서라도 반듯이 이쯤에서 끝을 내야만 합니다.’
‘이송 노선이나 과정을 모르지 않습니까?’
‘그래서 마가를 딸려 보낸 것이 아닙니까? 마가는 오래전부터 여기 베드로 사도의 최측근 수행원이 아닙니까. 마가가 수시로 교회나 베드로 사도에게 연통하기로 약속이 되어 있고, 연통을 전달하기 위해 또 다른 사람들이 거리를 두고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누군가 책임을 질만한 사람이 뒤쫓아 가서 최종 상황 판단과 결정을 내려야 하지 않겠습니까?’
‘적임자는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모든 만반의 준비도 갖추어져 있습니다. 하여 지금 우리가 모인 뜻은........ 그 적임자의 판단과 결정이 여기 있는 우리 열두 명 사도들의 하나같은 공통의 뜻이었다는 것을 다짐하기 위해서 모인것입니다. 모든 책임과 결과는 곧 우리 모두의 공동책임인 것입니다. 동의하시겠습니까?’
모두가 순서대로 나서서 동의를 확고하게 표명했다.
‘이번 사태의 적임자로 바울을 뒤쫓을 사람은 바로........ 베드로 사도입니다.’
열한 명의 시선이 일제히 베드로에게 쏠렸다.
--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부족한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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