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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이야기

"베트남 역사에서 꺼내보는 (참파 왕국) 이야기"

by 피안재 2025. 2. 25.

 

 

 

 

 

 

 

 

 

 

 

 

베트남의 공식 국가 명칭은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Cộng hòa xã hội chủ nghĩa Việt Nam)’ 이다. 베트남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국가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우리나라의 많은 사람들이 (북한의 독재정부 공산당)을 염두에 두다보니 베트남을 북한과 비슷한 공산주의 국가로 폄하하는 부류도 일부 있지만 아무래도 북한과 연관시켜 이해하는 것에는 상당한 무리가 따른다고 할 수 있겠다.

베트남이 추구하는 사회주의 청치체제는 오로지 중국의 사회주의 체제를 모방 내지는 답습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러다 보니 간혹 (차이나 + 1)이 베트남이라는 다소 모욕적인 국가 위신의 평가를 받기도 한다.

하지만, 베트남 국민들의 정서 속에는 아주 오랜 역사의식에서 나온 ‘중국에 대한 극도의 거부감’이 상당한 것이 사실이다.

그런 면은 우리나라 대한민국 국민의 역사인식속에 깊이 내재된 반중정서와 놀라울 정도로 많이 닮았다. 우리가 오랜 역사동안 중국의 간섭과 침략과 압제를 받았듯이, 꼭 그만큼 베트남도 중국으로부터 부당한 역사적 치욕을 당해왔기 때문이다. 하여 언제나 중국은 반듯이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그런가 하면 일본에 대해서도 우리와 똑 같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우리가 일제 36년 동안의 처참한 식민지 찬탈을 당해 왔듯이, 베트남 또한 비슷한 시기에 비록 5년 이라는 짧은 일본의 침탈과 지배를 받았지만, 그 짧은 5년의 상처가 중국에게 2.000년 동안 당한 상처보다도 더 컸기에 베트남 사람들의 일본에 대한 악한 감정은 한국인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베트남의 해방전쟁(남북 전쟁) 기간에 대한민국이 살아남기 위하여 침략자 미국의 편에 서서 대리전쟁을 벌여 베트남에 많은 상처와 아픔을 주기도 했지만, 2.000년의 역사를 아주 비슷하게 겪으며 살아남아야 했던 베트남은 그런 아픈 과거 역사가 있었음에도 같은 처지의 약소국 설음을 가진 대한민국에게 만은 늘 깊은 유대감을 가지고 있다. 한국인이라면 더없이 반갑고 친절하게 대해준다.

그들의 정치체제는 중국을 모델로 하고 있지만, 베트남 경제의 롤 모델은 새마을 사업 이후로 놀라운 개혁과 성장을 이루어 낸 대한민국 경제체제인 것이다.

베트남이 역사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그들의 주장에 따르자면 (기원 전 2879 ~ B,C 258년)에 걸쳐 최초의 부족국가인 홍방왕조를 세우면서 부터이다. 신화속의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받는 홍브엉(雄王)이 국호를 반랑(文郞)이라 정하면서 인도차이나 반도의 동쪽 해안에 인접한 지역에서 베트남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한반도 역사에서 고조선의 역사와 내용은 물론 시기까지도 비슷하다. 단군왕검이 한반도 최초의 부족국가 고조선을 건국한 것과 때를 같이한다.

중국의 진시황이 중국 최초의 통일 국가를 건설하고 세력을 확장해 나가면서 남쪽으로 내려오자 베트남 북부의 중국과 국경지대에 살던 어우비엣족(Au Viet)dl 쫓겨 내려오면서 애매하게도 홍방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 어우락(Au Lac) 이라는 부족국가를 건설한다. 이들에 의해서 지금의 수도인 하노이 인근에 새로운 도시가 건설되었다. 이어서 또 다른 부족인 월족(越族) 진나라의 남하에 쫓겨 내려오다가 어우락을 멸망시키고 베트남 북부지역을 완전장악하면서 남비엣(Nam Viet)을 건설하였으니, 현재 국호의 앞뒤만 바뀐 부족국가의 등장이었던 셈이다. 현재의 국호인 베트남은 바로 여기에서 기인되었으며, 비엣족이라는 말은 곧 월족(越族)을 가리킨다. 대한민국이 한민족(韓民族)인 것처럼 말이다.

기원 전 111년, 진나라에 이어서 중국을 통일한 한나라 무제는 북으로는 흉노족을 몰아내었고, 동으로는 고구려를 침략하였으며, 남쪽으로 남비엣을 정벌하였다. 영토 확장을 꾀한 것이다.

결국 남비엣은 한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이때부터 천 년의 세월이 지난 10세기 초까지 중국의 여러 왕조들이 베트남을 지배하였던 것이다. 우리나라도 결코 다르지 않아서 고려시대까지 막강한 중국의 실질적 지배를 받았던 것처럼 말이다. 한나라는 관리를 파견하여 남비엣을 실질적으로 지배했고, 한반도에는 한사군을 설치하여 재배했다. 그런가하면 마침내 당나라시기에 들어서 지금의 중국이라고 볼 수도 있는 중화제국(중화사상 체계 확립)을 완성하였는데, 동으로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어 식민 지배를 하였고, 서쪽으로 간쑤성과 둔황지역에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를 세웠으며, 남쪽으로 남비엣을 멸망시키고 지금의 하노이에 안남도호부(安南都護府)를 설치하여 베트남을 차지했고, 북으로 내몽골 지역에 안북도호부(安北都護府)를 설치하여 흉노족의 재 침입을 경계하였다. 지금의 중국 영토가 확정된 것이다. 여기에 추가된 곳은 현대에 이르러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정책으로 약소국 침탈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강대국들 끼리 치열하게 다툼을 벌이고 반목하던 틈을 노려서 얼떨결에 중국이 신장 위구르 지역을 그냥 줍다시피 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아울러 캐시미르지역 분쟁의 틈을 노려 티벳과 부탄을 부분 또는 실질 점령한 것 외에는 지금의 중국은 당나라 시대에 이미 대부문의 영토 확정이 이루어졌다고 볼 수 있겠다.

이렇게 오랜 중국의 1.000년 지배가 지나고 나서 중국이 5대 10국으로 분열되는 시기를 틈타 베트남 독립운동이 벌어지더니 마침내 응오 꾸엔에 의해서 중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한 응오 왕조(939 ~ 967)가 건국되었으나 다섯 명의 왕이 교체되었고, 28년 만에 다시 멸망하고 말았다. 1.000년의 지배에서 벗어나 겨우 28년 만에 독립 왕조가 또다시 망하다니......... 28년이면 한 명의 왕이 재위한다 해도 무리가 아닐 텐데 다섯 명이나 바뀌었다니....... 왜 멸망했는지는 짐작하기가 그리 어렵지 않으리라.

나눠지고 찢어지고 망쪼가 제대로 들어 개판(犬)이 된 응오 왕조에 반란(967년)을 일으킨 장군 딘보린이 새로운 딘왕조를 세웠다.

불과 10년이 지나서 역시나 장군인 레호안이 또 반란을 성공시켜 레 왕조를 세웠다. 하지만 아들들의 왕위 계승 다툼과 부패와 폭정으로 리꽁우언이 새로운 리(李) 왕조(1009 ~ 1225)를 세워 9명의 왕이 200년 이상을 이끌어 나갔다. 1명 왕의 재위가 30년 가까이 되었다는 것은 곧 어느 정도 태평성대가 이루어 졌다는 뜻이다.

이 시기에 수도를 탕룽(현 하노이)으로 옮겼고, 개혁적인 제도를 받아들이고, 국자감을 통해 관료들 등원시키고, 불교에서 유교로 탈바꿈 시켰다.

하지만, 또다시 습관처럼 부패하고 왕권 싸움이 벌어져 당연하게 또 멸망하였고, 이어서 쩐 왕조, 호 왕조, 후기 레 왕조가 이어지다가........ 역시나 무관이었던 막당중이 반란을 일으켜 황제에 오르긴 했으나, 동업자였던 찐 가문과 응우엔 가문이 여기에 불만을 품고 다시 반란을 일으켜 막당중을 몰아내고, 두 가문이 나라를 나누어 지배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기도 했다.

이어서 떠이썬 왕조가 아주 잠시 들어서기는 했지만 또 언제나처럼 금방 쉽게 사라졌고........

이제 역사적으로 봉건시대의 막바지가 도래하여 봉건 왕조가 바야흐로 위기의 시대를 맞는 비운의 시절이 도래했는데...... 유럽 열강들의 식민지 쟁탈전이 벌어졌던 것이다.

인도차이나 반도를 점령한 프랑스 군대와 선교사들이 찐 가문과 응우엔 가문의 반목을 구실로 모두 내쫓아버리고는, 태국으로 망명해 있던 응우엔 가문의 응우엔폭안을 전면에 내세우고 새로운 거점으로 하노이를 중심으로 해서 베트남 통일 전쟁을 부추겼던 것이다. 프랑스의 막대한 자금과 무기와 군대의 지원까지 등에 업은 응우엔폭안은 마침내 전쟁에서 승리하여 베트남을 통일하였고 프랑스의 지지와 추대를 받아 자롱 황제에 오르면서 수도를 중부의 후예(Hue)로 삼고 국호를 지금의 정식 명칭인 비엣남(Viet Nam)으로 삼았다. 이것이 바로 월남(越南)으로 ‘월(越) 부족이 남쪽에 세운 나라’ 라는 뜻을 담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이마저도 그 시기뿐이었을뿐, 식민시대적 사고의 잔재때문인지 예전부터, 그리고 이후로도 베트남은 늘 중국쪽에서 부르는 호칭인 안남(安南)으로 불렸고, 자신들도 그렇게 사용했으며, 역사 기록에도 그렇게 쓰여져 내려왔다. 비엣남(월남)이라는 호칭이 제대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세기 중반이 되고나서의 일이었다. 차차 다시 이야기를 하게 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이 고스란히 프랑스가 베트남은 물론 인근의 인도차이나를 식민 지배하고 자원을 약탈하기 위하여 방패막이(꼭두각시)로 삼아 전면에 내세었던 계략이었던 것이다. 프랑스의 앞잡이로 놀아나고 끌려다니던 나던 응우엔 왕조는 13명의 황제를 배출하면서 치욕스런 역사를 점철시키다가 결국, 1945년이 되어서 비운의 비오다이 황제를 마지막으로 몰락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져 버리고 만다.

그리고 이제 역사는 제 2차 세계대전이라는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며, 일본의 침략과 8월 혁명과 베트남의 독립을 향해서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기록된 바에 준한 실제 베트남의 역사다.

베트남 사람들은 당연히 그렇게 알았고 교육받았고 믿어왔다. 2.000년의 역사가 고스란히 역사적 사실과 고증에 힘입어 그렇게 기록되었고 전해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참(眞)이었으며 진실이었다. 앞으로도 영원히 자자손손 이어져 내려 갈 불변의 진리였다.

하지만....... 정말로 그랬을까?

어쩌면........ 그들은 정말로 그렇게 믿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고스란히 그런 것으로만 역사를 간직하고 싶었다. 그것이 베트남이었고..... 그것이 후손에게 물려줄 진짜 베트남이기를 간절히 염원했다.

그런데 결코 아니었다.

내던져버리고 감추고 지워버리고 싶은........ 다른 역사적 사실들이 베트남에겐 버젓이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모두 비엣족(越族)의 역사만이 온전한 베트남의 역사이기를 간절히 바랬지만, 베트남 영토에는 결코 지우거나 씻어낼 수 없는 참족(Champa)의 거대한 발자국이 너무나 선명하게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이 역사에서 ‘일제 식민치하 36년’이 지극히 치욕스럽고 떨쳐내고 싶어 하는 역사인 것처럼....... 꼭 그런 의미와 느낌으로 베트남 사람 모두와 베트남 역사가 참파족의 역사를 떨쳐내고 지워버리고 싶어 했다. 이는 1990년대까지 실제로 그랬다는 말이다. 베트남에서 ‘참파왕국이나 참파 역사’를 꺼내거나 논한다는 것은, 대한민국으로 치자면 ‘친일파’나 ‘빨갱이’에 해당된다고 보면 이해가 훨씬 수월할 것이다.

 

왜?

도대체 왜?

대답은 간단하다.

베트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랑스러운 비엣족(越族)이라고 생각한다. 당연히 ‘베트남은 단일민족인 월족의 나라’여야만 한다고 생각해온 것이다.

그러면 참족(Champa)은 누구인가?

베트남 사람들 입장에서 참족은 ‘바다를 건너 온 오랑캐(海夷)였던 것이다. 아주 오래 전부터....... 그것은 생각을 떠나 뼈속까지 전부를 차지하고 있어왔던 것이다.

한국인이 일제 식민통치 36년에 치를 떠는데........ 바다를 건너 온 오랑캐가 비엣족의 나라 베트남을 1.600년이나 차지하고 통치를 했었다면........ 혹, 기원 후로 보아 2.000년 베트남 역사라는 것이 참족의 역사 1.600년에 비엣족의 역사 400년을 보탠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의구심이 생기지 말란 법이 있겠는가? 누구 주체이고 누가 보조인가 말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 이야기를 조심스럽게 해보려는 것이다.

베트남 역사속에 버젓이 살았었고 상당부분을 차지했던 (참파왕국) 이야기를 말이다.

그저 나짱(nha trang)이나 다낭(danang) 여행에서 잠시 등장하는 유적 몇 개가 아니라 진짜 (참파의 역사)에 대해서 말이다.

 

 

 

 

 

 

<공지. 이번 이야기에 사용되는 사진의 대부분을 오로지 설명과 이해를 쉽게하기 위해 (구글 이미지)를 통해 퍼 왔음을 밝혀두고자 합니다. 사사로운 목적의 사용은 없을것임을 약속합니다.>

 

 

 

 


부탄 지역의 히말라야에서 발원한 메콩강이 중국을 거쳐 인도차이나 반도의 5개국 사이를 흘러내려서 남중국해로 빠져 나간다. 바로 이 메콩강 유역에 베트남. 라오스. 캄보디아. 태국. 미얀마가 얽히고설켜 때론 공동의 그리고 때론 반목과 대결의 역사를 써내려 가고있는 것이다. 중국대륙의 남쪽이자 인도 대륙의 동쪽에 해당하는 골짜기가 흘러내리는 듯 보이는 반도를 가리킨다. 인도차이나 반도의 끝자락에 말레이시아가 육지로 연결되어 있기는 하나 메콩강 줄기에 속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별도로 떼어내어 말레이반도라고 칭하며 바다를 통해 조금 떨어져 있는 섬나라 싱가포르를 이 말레이반도에 포함 시키고 있다.

지리적 특성이 강력한 제국과도 같은 중국과 인도 사이에 놓여지게 되다 보니 당연하게 양측의 문화와 제도와 종교와 생활풍습이 자연스레 혼재해 있다고 보면 되겠다.

그 중에서 좀 특이한 경우로 베트남을 꼽을 수 있는데...... 인도차이나 5개국 중에서 베트남만이 유일하게 중국의 영향을 많이 받아서 한자 문화권(중국. 한국. 일본)에 속하며, 태국. 캄보디아. 라오스. 미얀마의 경우를 비롯해 말레이반도는 인도 문화권에 속한다. 이들 중 베트남이 유일하게 한자문화권에 속한다고는 하지만, 베트남의 약 3/2를 차지하고 1.600년이나 실질적으로 지배한 참파 왕국의 역사는 고스란히 또 힌두교를 믿는 인도 문화권에 해당된다.

중국을 뿌리로 하는 화교가 곳곳에 널리 퍼져있으며, 화교계 태국인. 화교계 말레이시아인. 화교계 싱가포르인들이 각자 그 나라의 상권을 중심으로 경제권을 좌지우지할 정도의 세력을 형성하고 있다.

티베트의 불교가 태국과 미얀마에 전파되어 굳건하게 뿌리를 내렸고, 중국을 통해 전래된 불교가 베트남에 전해졌지만, 이른 시기에 등장하게 된 참족(Champa)이 등장하면서 부터 힌두교가 무섭세 세력을 넓혀가기 시작했다. 바다를 건너온 참족의 문화는 남인도에서 전래된 힌두문화였기 때문이다. 참파 왕국의 세력이 무섭게 확장되면서 베트남의 상당부분은 물론 태국과 미얀마를 제외한(캄보디아. 라오스 지역 대부분)이 힌두교 문화권에 복속되었다. 이 와중에 비엣족과 참족 사이의 사활을 건 국가적 종교적 전쟁이 끊임없이 계속되는가 하면, 같은 힌두교인 참족과 크메르족 사이에도 영토와 지배권을 놓고 전쟁이 끊이질 않는다. 그런가하면 탸이족(태국)과 크메르족은(캄보디아)는 또 국가와 종교가 다른 이유로 허구헌날 전쟁을 벌였다. 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의 세력권이 담긴 역사지도는 비엣족이나 참족이나 크메르족이나 타이족이나 그들이 속한 왕국의 전성기가 언제였으나에 따라 엄청나게 큰 차이를 고스란히 지도에 담아내게 되었다. 하여 지도 몇 장으로는 인도차이나의 역사를 담아내거나 설명하기가 어려울 지경이 되었던 것이다. 참파왕국의 전성기와 캄보디아 왕국의 전성기와 아유타이 왕국의 전성기에 따라 전혀 다른 모양의 지도가 생겨나게 된다.

베트남(참파왕국). 캄보디아 왕국(크메르족). 미얀마 왕국(버마족). 아유타이 왕국(태국)이란 국가와 명칭은 고스란히 존재를 하는데....... 라오스 왕국(라오스족)은 14세기 이후에나 등장하게 됨으로써 그 이름이 어디에도 없다. 대신 란쌍 왕국(Lan Xang) 이나 란나(Lan Na)이 그 지역에 등장하는데, 이는 다른 이름으로도 등장하기도 한다. 루앙프랑방 왕국이나 비엔티엔 왕국 등으로 말이다. 왕국이라고 기록하기는 했지만 라오지역의 거점 도시들 마다 소수의 인원이 모여들어 스스로 도시국가를 왕국으로 칭하며 세력권 다툼에 끼어들어 벌어졌던 사건으로 이해되고, 이들 모두가 14세기 경에 이르러 지금의 라오스 왕국(Laos)으로 병합 통일되어 새롭게 등장한다고 이해하면 되겠다.

훗날 크메르 왕국(캄보디아)이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택하면서부터 인도차이나 반도 거의 대부분이 불교 세력권에 속하게 되었다.

하지만 반대로 베트남을 비롯한 일부 지역에는 여전히 힌두교 뿐만이 아니라 새롭게 기독교와 이슬람교가 전파되어 오늘날에는 결코 적지않은 종교적 기반을 차지 하고 있는 실정이다.

우리는 누구나가 기독교 외에도 중요한 종교로 이슬람은 물론이거니와 불교와 힌두교 교세 또한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불교와 힌두교가 엄연한 기성 종교라는 것을 알기는 하지만, 무엇이 다르고 또 어떤 이유로 힌두교 세력권이 불교 세력권으로 재편되었는지, 아울러 정작 불교의 발생지인 인도는 왜 불교를 버리고 힌두교 왕국이 되었는지 까지 아는 사람은 또 찾아보기가 힘들다. 그 또한 차차 살펴보고자 한다.

더하여 인도차이나 반도와 중국 대륙을 건너 불교로드를 만들면서 한반도에까지 전달되어 교리와 경전 연구등에 있어서 최고의 업적을 한반도에서 꽃피우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한반도에서 이룩한 불교 경전에 대한 학문적 발전과 발간된 책자들이 아니었으면 혹 현세속의 불교적 소양과 영향력이 엄청나게 축소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불교로드를 통해 한반도까지 전파된 불교가 체계화 되고 연구되고 발전된 새로운 불교로 다시 불교로드를 통해 서역으로 역수출되어 온 세상에 퍼져나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영양가 가득한 효과를 가까운 일본은 고스란히 누리게 되었다. 임진왜란이라는 비극적인 사건을 통해서 말이다.

이제 역사의 시간을 되돌려서 베트남 역사가 시작되던 고대로 돌아가 참파 문명이 도래하던 초기의 상황을 살펴보아야 하겠는데 당시의 지도를 보자면 지금과 다른것이 눈에 띈다.

베트남 역사 속에서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의 역사를 재조명해보자면, 그보다 먼저 베트남과 중국의 고대사에서부터 시작해야만 한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국가 역사는 고대 중국으로부터 시작되는 침탈과 저항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111년 중국 한나라의 무제는 영토 확장을 위한 남벌을 시작하였다. 하여 마침내 남월(Nam Viet)를 정복했다.

아마도 중국 역사에 처음으로 기록된 베트남의 고대사가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韓書)에 적혀있는 바로 이 장면일 것이다. 중국 역사는 바로 이때부터 10세기 초까지 약 1.100년 동안 베트남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언제 어디서나 늘 상 그래왔듯이 중국인들의 주장은 허세가득 과장되고 근거도 없이 늘 자신들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뻔뻔하게 내세우기가 일쑤다.

골프도 중국에서 시작되었고, 한복도 중국 것이고, 김치도 중국 것이고, 축구도 중국에서 시작되었다고 죽어라 우겨대면서도 아직 월드컵 본선에 한 번도 올라가지 못하는 유니버셜급 쪽팔림을 감내하고 있다. ‘그렇게 억지 쓴다고 될 일도 아니고 그렇게 해서 중국의 위상이 달라지고 생활이 좀 나아지셨습니까?’ 라고 묻고 싶다.

중화사상(中華思想)으로 똘똘 뭉친 중국인들의 선민의식(選民思想)의 너무나 도를 지나쳐, 마치 이 세상이 모두 중국인의 것이거나 아니면 중국인은 지구상의 모든 사람들과는 차원이 다른 한 차원 위의 특별한 존재들인 것처럼 인식하고 안하무인으로 행동하는 버릇이 있다.

세계 기준 통화를 달러에서 원화로 바꾸고 중국이 세계의 평화와 안정과 번영을 주도하는 패권국가가 되고자 한다면, 그 밑바탕으로 일대일로(一带一路, Belt and Road Initiative) 국가정책을 실현시키고 싶다면, 먼저 중국이라는 국가의 품격을 높이고 중국인들에게 최소한의 기본 매너라는 교육부터 시켜야 하지 않을까 하고 나는 생각한다. 지구상의 모든 국가와 모든 사람들이 기꺼이 함께하기를 원하고 존경해 마지않는 공명정대한 중국과 배려심이 가득한 양심을 가진 국민이 먼저 되기를 바란다는 말이다. 안하무인격 야망과 욕심으로만 가득차고 처신하는 꼴이 시전잡배나 양아치 같아서야 어디 남들 앞에 당당하게 나설 수 있는 중화사상에 입각한 아름다운 선민(善民)이 가당키나 하겠느냔 말이기도 하다.

용(龍)의 후예이고 천자(天子)의 나라 백성이면........ 제발 좀 그 선택받은 특별한 사람다운 모습으로 지구라는 세상을 위해 헌신하는 진인(眞人)의 모습을 보였으면 좋겠다.

중국인들이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럽게 내세우는 5황제에는 진시황. 한무제. 당태종. 영락제. 강희재를 꼽는다.

진시황은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황제이고 흉노족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았으니 나름 의미가 있겠다. 뒤의 당태종 이세민은 중국역사상 최대로 영토를 확장시켰으며, 정관의 치(貞觀之治)로 대변되는 국가 제도개혁을 통해 한족(韓族)에 의한 중국 역사의 최고 전성기를 이끌었다. 하지만, 영토 확장의 야욕이 지나쳐 고구려를 넘보다가 고구려의 재상이자 당태종의 천적관계인 연개소문(淵蓋蘇文)의 휘하 장수인 양만춘((梁萬春)과 안시성에서 60일 간의 전투 끝에 참패하여 도앙친 끝에 결국 당나라 역사가 급작스레 몰락의 길을 걸어가고 말았다.

가운데의 한무제는 진시황으로부터 만리장성을 물려받아서 한평생 흉노족을 몰아내기에 전념하였다. 그만큼 흉노족은 중국인들에게 호환 마마보다도 무서운 영원한 공포였다. 북쪽의 황량한 사막과 추운 벌판에서 유목생활로 겨우 생명을 유지하던 흉노는 가을 추수가 끝나면 중원을 침범했다. 겨울을 나기 위해서는 식량과 물자가 생명줄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십년 전에도 그랬고 작년에도 그랬고 또 내년에도 때가 되면 내려올 것이다. 중국은 흉노의 공포에 결국 굴복했다. 매년 식량과 말과 소와 옷감을 조공으로 바쳤고, 심지어 공주를 오랑캐에서 시집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면서 뒤로 몰래 흉노를 대비한 군사력을 키우고 만리장성을 쌓았다. 마침내 한무제 대에 이르러 흉노 토벌에 나섰으며 그들을 외몽골지역으로 추방시켰다. 내친김에 영토 확장에 나서서 동쪽으로 고조선을 쳐서 한사군을 설치했고, 남쪽으로 남월과 위만조선을 멸망시켰다. 바로 이 시기에 베트남이 처음 중국 역사에 등장했던 것이다. 남월이라는 이름으로 말이다. 더하여 이광리를 보내 파미르 고원 북서에 있던 대완국까지 정벌했다.

이렇게 동서남북의 전 방위에 걸쳐 정복전쟁을 끝내고 나자 그곳까지가 중국의 영토임을 확고히 하면서, 중국을 벗어난 지역을 모두 오랑캐를 구분하여 동이(東夷)·서융(西戎)·남만(南蠻)·북적(北狄)으로 불렀으니 한족(韓族)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오랑캐라는 아주 지나치고 오만한 민족주의 정신을 고양시킨 것 이라 하겠다. 그것이 지금 중국의 국가적 치명적 핸디캡으로 작용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나라 한민족은 중국 역사서 삼국지〈위지동이전(東夷傳)>에 동쪽의 오랑캐로 기록되었는가 하면, 중원고구려비에는 동쪽의 신라를 동이라 적고 있다. 오랑캐 동이족이 신기하게도 활(弓)을 기가막히게 잘 쏜다는 이야기와 함께 말이다. 한국 양궁의 힘을 중국인들은 아주 일찍 알았나 보다.

 

 

 

 

이 시점에서 가장 중요하게 보아야 하는 점은 바로 위에 게재한 당시의 지도이다.

위의 지도는 후한 시대 말엽의 중국 지도이다.

중국은 한나라를 한족에 의해 건국된 진정한 중화사상에 입각한 국가의 출발이라고 생각한다. 거기에는 항우와 유방의 치열한 싸움(초한지) 끝에 아흔아홉 번의 싸움에서 연패했지만 단 한 번의 승리로 새로운 세상을 열었던 한족의 무한한 자부심이 바로 초대 한왕인 유방을 통해서 입증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 위대한 한족의 우수성을 고스란히 되살려 제국으로 발전시킨 것이 바로 한무제였던 것이다.

그런 한나라도 마침내 왕위쟁탈과 파벌싸움과 부패로 무너지기 시작했다. 사방에 도적이 출몰하고 반란이 기승을 부리면서 새로운 지방의 소수 권력이 서로 치열하게 싸움을 벌이다가 위나라(조조). 오나라(손권). 그리고 후한의 정통성 승계를 전면에 내세운 촉나라(유비)의 싸움(삼국지)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유비가 비록 한나라 왕조의 정통성을 이야기하고는 있지만......... 냉정히 말하자면 이미 한나라는 멸망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지도를 보면 조조의 위나라는 초록색, 유비의 촉나라는 노란색, 그리고 손권의 오나라는 분홍색으로 구분되어 칠해져 있다. 그중에서 초록색의 위나라를 가만히 살펴보면 우측의 끝자락이 한반도 북부에까지 걸쳐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한반도 북부는 본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나 한무제에게 멸망을 당했고 그 자리에 한사군을 설치해 지배했었다. 하지만 뒤이어 등장한 고구려의 국토회복 운동으로 한사군의 세력이 점차 무너져 물러났으나, 삼국지 위지동이전에 따르자면 중국의 북부지역을 차지한 위나라(조조)의 세력권이 아직 한반도 북부 일부에 남아 있어 나름 영향력을 행사했던 것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같은 맥락에서 남쪽을 살펴보면 오나라의 세력권이 슬쩍 인도차이나반도의 입구쯤으로 해석될 수 있는 베트남 북부까지 차지하고 지배력을 행사한 것으로 지도에 나타나 있다.

베트남....... 그러니까 월족이 세운 남월의 세력권을 한무제가 점령한 이후로 꾸준히 중국이 실질적으로 지배하였고, 당시에는 오나라의 영역에 속했다고 보여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한나라가 이 깊은 지역까지를 모두 실질적으로 지배했느냐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일례로 AD. 40년경에 쯩자매(Trung, 徵)라는 두 명의 여성이 흩어진 월족을 이끌고 한나라에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켰다가 중국에서 파견된 정규군에 의해 진압당했다. 반란의 이유는 한나라에서 파견된 관료가 온갖 구실로 너무 과도하게 세금을 징수한 데서 나온 저항이었다. 파견 관료의 폭정과 군대가 파견되어 진압까지의 시간이 많이걸린 것으로 보자면, 중국이 빼앗아 상주하면서 실질적 지배를 하였다기보다는 명목상으로 지배권을 확보하고 소수의 관리를 파견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것으로 간접적인 식민통치를 해왔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한 판단일 것이다. 이런 반란이 쯩자매 사건 이전에도, 또 이후에도 꾸준히 계속되었었던 이유도 소수의 허울뿐인 지배 탓이었으리라.

더군다나 가장 큰 핵심적 이유는 중국이 인도차이나반도를 바라보는 시선과 정책의 한계성에 있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도에서 보면 남월(베트남)의 영역이 지금의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지역 일부에만 한정되어 있다는 것이다.

왜 그렇게만 보고 생각하고 지도를 그렸을까?

당시 비엣족(월족)의 베트남은 지금과 같이 영토 전부는 아니었지만 중부를 지나 메콩강에 이르는 전 지역에 고루 퍼져서 살고 있던 것이다. 물론 인구 밀도로 보자면 주로 하노이 인근의 북부지방에 퍼져 살았지만 말이다.

그것뿐만이 아니라 반도의 남쪽으로 크메르족(캄보디아)이 부족국가를 세워 살았고, 더 깊은 서쪽으로 아유타이족(태국)이 부족국가를 건설해 살아가고 있었다. 이 반도의 중간으로는 비엣족. 아유타이족. 버마족 등이 혼재해 퍼져 살았던 란쌍(Lan Xang)이란 부족국가가 등장했고, 그리고 반도의 북서쪽으로 버마족(미얀마)이 부족국가인 란나(Lan Na) 부족국가를 세웠는데, 바로 란나 왕국의 경우는 남월(베트남)과 함께 중국의 변방 오랑캐로 함께 활동하며 삼국지에도 등장하였다.

실제로 있지는 않았다고 밝혀졌지만, 삼국지에서 위나라의 간계로 촉나라의 뒤통수를 치러 등장하는 남만의 맹획이 제갈량에게 7번을 싸워 모두 패하고 제갈량이 모두 풀어주었다는 칠금칠종(七擒七縱) 신화는 비록 허구로 드러났지만, 남만이라는 부족국가와 맹획이란 인물은 실재했다고 전해진다. 그리고 여기 이 중국의 남쪽 오랑캐에 해당하는 남만에 베트남의 뿌리인 월족과 미얀마의 뿌리인 버마족이 모두 포함되는 것이다. 인도차이나반도의 역사 또한 중국 못지않게 멀리 기원전 고대의 선사시대부터 이미 이어져 내려왔으나 중국의 이해와 관심은 미처 거기까지 미치지 못한 것이다.

인도 차이나 반도를 차지했다고 보는 중국인들의 시선은 어디까지나 한무제의 시선에 머물렀고, 여기에는 하노이 부근의 베트남 북부 일부(중국의 원난성 일대까지)만이 쓸모있는 영토이며, 인도차이나반도의 전부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런 한나라에 이어 남월 부근의 지역을 차지하고 세금을 징수하며 관찰을 가장 잘해온 국가가 바로 오나라(손권)였다. 그런데 오나라의 한계도 별반 한나라와 다르지 않은 거기까지였다. 그 누구도 반도의 아래 깊은 곳에 여러 부족국가와 뛰어난 문화가 존재한다는 사실까지 깨닫지 못했던것이다.

한나라 역사서인 한서(韓書)와 오나라 기록과 훗날 당나라 역사 기록인 당서(舊唐書)까지 세세하게 잘 살펴보면......... ‘남월의 남쪽으로는 모든 것이 정글이며 늪지대로 온갖 독충들만 가득해 아무런 쓸모가 없다. 그리고 그 너머에는 바윗덩어리뿐인 섬들만 즐비하게 놓여 있을 뿐이다.’라고 기록했다. 중국 입장에서 인도차이나반도는 미개한 오랑캐들이나 일부분 거주하면서 겨우 서식하는 불모지일 뿐, 쓸만한 영토가 못되기에 신경을 껐다는 이야기가 되는 것이다. 그들은 미얀마에 수천 개의 불탑이 서고, 중국보다 더 안정적인 천년왕국 태국이 존재하고, 앙코르와트로 대변되는 거대한 문명을 소유한 캄보디아가 거기에 있을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왜?

선민사상으로 충만한 중화 세상의 주인공인 한족이 세상의 전부였으며, 그것이 곧 중국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그 시기..........

여포와 관우와 장비와 주유와 허저와 하우돈과 마초가 창과 칼을 마구 휘두르며 온 중원에 피바람을 일으키던 바로 그 시기에........ 제갈량에 의해서 신비로운 동남풍이 적벽강에만 불기 시작한 것이 아니었다.

인도차이나반도 남부 해안에도 참으로 신비한 북풍이 불면서 여기에도 또 하나의 새로운 대전이 벌어지기 시작했던것이다.

 

 

 

 


<참파족(Champa)의 등장>

인도차이나반도 베트남 지역에 첫 발을 내딛은 도래인(渡來人)이 등장한 것이다.

망망대해의 저편 어딘가에서 낯선 생김새와 옷차림과 낯선 언어를 사용하는 날래고 용맹한 사람들이 어둠을 틈 타 해변으로 수십 명이 떼를 지어 밀려들어온 것이다. 그들이 타고 온 배(카누)도 이 지역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낯선 형태로 만들어졌다. 나약해보이기만 하는 저 가늘고 길쭉한 통나무를 깎고 파내서 만든 배에 건장한 사내 예닐곱 명씩 나누어 타고 거친 바다를 건너 왔다는 사실이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저들은 누구이며 과연 어디서 왔단 말인가?

누군가 비엣족 사람이 이들이 해변으로 밀려들어오는 모습을 보았다면....... 아마도 바다 건너 저승에서 건너 온 귀신이라고 밖에는 달리 설명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익히 우리가 알고있는 베트남사람들(비엣족)과는 모든면에서 너무나 다른 모습이었으니 말이다.

저마다 쇠꼬챙이와 칼을 든 그들은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며 막 도착한 해변 일대를 샅샅이 수색하기 시작했다. 마치 잘 훈련된 군대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배를 끌어다 숲속에 감추고 야자수를 베어다가 숲속에 은밀하게 숨어서 지낼 거점을 마련했다. 그리고는 인근에서 가장 높은 언덕에 주변을 경계할 사람을 올려 보냈다. 이 모든 체계적인 질서와 명령은 온 몸에 문신을 가장 많이 한 최고 건장한 사내에게서 내려졌다. 그가 우두머리였던 것이다. 나흘이 지나서 다시 여섯 척의 카누가 도착하였는데, 이번엔 여자들과 아이들이 섞여 있었다.

마침내 인도차이나 반도 베트남 지역에 참족(Champa)이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그 시기가 2세기 후반으로, 이제 이들의 동태가 현지 원주민이랄 수 있는 베트남인(비엣족)들 눈에 띄면서 분쟁과 싸움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이런 사실들이 한참이나 북쪽에 떨어진 수도 하노이의 비엣족 고위층과 중국(오나라)에서 파견된 관리에게 처음 보고 된 것이 서기 192년의 일이고 보면, 아마도 도착은 그 조금 전으로 짐작해 볼 수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아직은 참파가 아니었다. (참파)라는 용어는 한참 더 몇 세기가 지나서 생겨나는 말이고, 당시에는 그저 도래인(渡來人) 이라고, ‘바다 저 멀리 어딘가에서 건너 온 낯선 이방인’ 이라고....... ‘야만인’ ‘모리배’ 아니면 역시나 ‘오랑캐’ 등으로 부르지 않았을까 싶다.

과연 이들은 어디서 왔단 말인가?

왜 느닷없이 불쑥 나타난 것일까? 저 사나운 바다를 어떻게 건너 올 수 있었단 말인가?

상당수의 학자들은 이들 첫 도래인이 인도네시아 북부 수마트라 섬에서 건너 온 아체네족이라고 보고 있다. 더러는 보르네오 섬에서 왔을 것이라 추정하기도 하고, 일부 학자들은 이들이 말레이반도에서 거슬러 올라온 사람들이라고 주장하기도 한다. 그들은 저마다 꾸준한 연구를 통해 수많은 가설과 학설을 내놓고 있는데........ 필자가 생각하기에는 그들의 출발지가 인도네시아가 맞던 아니던, 혹은 말레이시아 맞던 아니던 전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내 결론은 아마도 도래인들은 제기된 모든 장소에서 따로 시차를 두고 꾸준히 건너왔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고 보기 때문이다. 더 넓은 더 먼 태평양의 곳곳에서 얼마든지 더 꾸준히 몰려왔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다만 한 가지 유념하게 되는 것은...... 사방 바다 곳곳에서 시차를 두고 따로 몰려오기는 했지만, 베트남에서 운집한 그들 도래인 모두는 하나의 민족이며 같은 DNA를 가진 일가친척이자 형제자매인 가족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도저히 믿기지 않은 이 허무맹랑한 주장이....... 사실은 참(진짜)이다. 참족으로 수렴되는 바다를 건너 온 해양부족들은 모두 하나의 뿌리에서 시작된 한 민족이었으니 말이다. 그것도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은 짧은 시간 안에서 벌어진 놀라운 사건이었다. 각자가 살던 거점이 바다 저멀리 떨어져있고 일면식도 없는 완전한 타인들이었지만, 그들은 놀랍게도 동포였고 형제였고 모두가 가족이었다.

곧 그들의 뿌리, 참족의 시조에 대한 이야기를 차차 해 보겠지만....... 어떤 사람들에겐 참으로 놀라운 충격이 될 수도 있겠다.

 

이제 나는 지금 바다를 건너 인도차이나에 막 도착한 도래인들을 ‘길을 잃은 사람들’ 이라고 부르려고 한다. 아니 ‘집으로 가는 길을 일부러 바다에 내던진 사람들’ 이라는 표현이 더 정확할 표현일지도 모르겠다. 애초부터 집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이 터전을 버리고 떠나온 그들의 과감한 특성은 어쩌면 그들만의 핏줄 속에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내재된 아주 특별한 DNA 때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들 민족의 시조격인 어떤 부족 역시 ‘되돌아 갈 기약 없이 무작정 거친 망망대해를 향해 삶과 죽음의 길을 떠나야만’ 했기 때문이다.

애초엔 사냥과 농경으로 살아가던 산악 민족이었지만, 삶과 죽음의 경계에서 살아남기 위해 그들이 택한 것은 바다였다. 거친 바다의 저편 어딘가에 자신들이 살아갈 육지를 찾아서 하염없이 목숨을 건 길고 거친 항해를 계속해야만 했던 것이다. 통나무를 잘라서 파낸 카누에 모든 것을 걸고 태평양의 곳곳을 헤매던 끝에 마침내 이제 인도차이나 반도의 베트남에 막 도착을 한 것이다.

‘길을 잃은 사람들’을 좀 더 포괄적 의미에 담으면 ‘참파족(Champa)’이 된다. 이 참파족을 포함하는 좀 더 너른 의미의 명칭을 찾는다면 ‘폴리네시안(Polynesians)’이 된다. 여기에서 좀 더 나아가 세계의 바다에 골고루 퍼져있는 모든 폴리네시안들을 모두 포함하는 좀 더 포괄적의미의 명칭이자 처음 산악 민족이면서도 살아남기 위하여 바다를 택해야만 했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 바로 ‘오스트로네시안((Austronesian)’이다. 남풍을 의미하는 라틴어 (auster)와 섬을 뜻하는 희랍어 (nêsos)의 합성어이다. 바로 ‘도래인(渡來人)’을 서구의 인문학적 표현으로 어딘가 모르게 은근히 멋지게 풀어놓은 것 같다.

 

 


도래인들이 베트남의 중남부 나짱 인근에 처음 상류한 것은 서기 2세기 말엽이겠지만, 사실은 그보다 약 100년 전에 이미 베트남 가장 남쪽 메콩강 하구 껀터 지역(비교적 호치민과 지척임)에는 크메르인(캄보디아)과 비엣족 일부와 다른 민족들이 섞여 살아가고 있었으며, 이들은 남인도에서 바다를 통해 들어온 힌두교를 믿기 시작하고 있었다. 역사 기록에서는 이들을 푸난(Funan)이라 불렀고, 이들을 도래인들이 만든 최초의 인도에서 건너 온 힌두교 부족국가라 보기도 한다. 이 시기에 푸난은 이미 중국과 인도와 멀리는 로마제국과 국제교역을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 와중에 남중국해 저편 태평양에서 도래인들이 나짱 인근으로 들어온 것이다. 아마도 그 도래는 한 번에 끝난 것이 아니라, 사방에서 지속적으로 꾸준히 상당수의 인원이 몰려들었으며, 비록 그 출발지가 다 달랐고 서로 왕래한 적은 없지만 그들은 모두 비슷한 생김새와 생활방식과 문화가 닮았으며, 언어가 서로 통할 수 있었고 모두 힌두교를 믿고 있었다. 이런 공통분모 덕분에 낯선 지역(베트남 중부)에서 마주쳤지만 쉽게 하나로 동화되었고 하나의 부족연맹체로 활동했다고 생각된다.

나짱 인근에 쏟아져 들어 온 도래인들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세력 확장을 꾀했고 점차 부족 국가로 발전해 갔다.

도래인의 일부가 남쪽으로 내려가 푸난(funan)왕국의 영역으로 들어가 그들과 자연스레 섞여 살기 시작했다. 서로가 힌두문화를 이미 가지고 있었기에 얼마든지 공존이 가능했던 것이다.

다른 일부는 내륙 깊숙한 곳의 메콩강 중기를 찾아 이동하였으며, 이들은 차차 크메르족(캄보디아)의 힌두부족으로 살아가게 되었다.

또 다른 일부는 메콩강 줄기를 따라 상류 정글로 이동하여 그곳에 흩어져 살고 있던 여러 부족들과 섞여 살기 시작했으며, 이들이 훗날 란쌍왕국(Lan Xang, 현재의 라오스)이 된다.

이제 핵심은 나짱 인근에 거점을 확보하고 세력 확장을 모색하던 진짜 도래인(Champa)들의 발자취를 따라나서 보아야 하는 것이다. 동족이라고 볼 수 있는 도래인들이 남부지역과 내륙인 서쪽으로 광범위하게 퍼져 나갔다. 남은 지역은 북쪽이었고, 그곳은 틀림없는 베트남의 원주민이라 할 수 있는 비엣족(Viet)의 영역이었으며, 비엣족은 거대제국인 중국의 침략과 식민지배 아래서 끝없이 저항 전쟁을 벌이느라고 그야말로 정신이 없었던 시절이었다. 그러다보니 비엣족이 해안선을 따라 베트남 전역에 흩어져 살고 있었으나 사실은 중부나 남부지역까지 강력한 군사력과 정치력으로 실질적 지배를 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어느 정도 힘의 한계를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하여 푸난(funan)에 대해 전력으로 대처하지 못하고 있는 처지에, 느닷없이 중부 지역에 도래인들이 부족집단을 세우고 점차 비엣족에게 까지 위협을 가하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남쪽으로 보내 그 지역을 정벌할 군사력이 베트남 정부에는 없었다. 중국으로부터의 독립 전쟁이 먼저였기 때문이다.

그런 와중에 서기 192년 도래인(여기부터는 일단 참족이라 칭해야 하겠다) 부족이 베트남 중부지방을 다스리기 위해 트리키우에 설치한 관청을 습격해 점령하고 관리를 처형하면서 자신들의 부족국가 건설을 선언해 버렸다. 베트남과 중국의 입장에서 보면 분명 반란이었지만, 당장 그곳으로 파견해 진압할 군사적 여력이 부족해 추이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등장한 참족의 부족국가를 베트남은 람압(Lam Ap) 이라고 부르기 시작했고, 중국 기록에는 린(Lin-Yi) 이라고 적었다. 바야흐로 이제 인도차이나 반도에 최초의 참족 부족국가가 탄생한 것이다. 참족은 힌두교를 바탕으로 새로운 문자 체계를 만들어 문학을 장려했고, 불교에 대한 연구와 지식을 바탕으로 새로운 힌두교 문화를 만들어 사방으로 전파하기 시작했다. 도 하나의 새로운 토착문화가 정착되고 전파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참족의 시작을 그들은 자신들의 역사 속에 이렇게 새겨 넣었다.

 

 

“참족의 시조는 포 나가르 여신(Lady Po Nagar)이다. 여신은 칸호아(Khanh Hoa)성(나짱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지방 행정구역) 깊은 산속의 소작농의 딸로 태어났다. 커다란 물난리가 나서 하늘에서 내려 온 성스런 기운의 도움으로 백단향(白檀香) 나무 조각에 실려 중국으로 갔다. 고향으로 돌아오려던 중에 황제의 아들인 왕자를 만나 사랑에 빠져 두 자녀를 두게 되었다. 왕자는 여신의 고향에 기별을 보내 무사함을 알렸고 후에 참파왕국(Champa)의 여왕에 봉해졌다. 왕국에 어려움이 닥쳐서 여왕이 고향으로 돌아가고자 하였으나 왕자가 이를 가로막자, 여왕은 타고 왔던 백단향을 바다에 던지고는 아이들을 안고 백단향에 올라 고향(나짱)으로 돌아왔다. 분노한 중국 왕자가 군대를 이끌고 배를 타고 쳐들어오자 여왕은 하늘에 고하여 벌을 내려 왕자와 중국 함대를 모두 돌로 만들어 버렸으니, 지금 나짱의 앞바다에 흩어져 있는 섬들인 것이다.”

 

 

참족의 포 나가르 여신에 대한 이런 전설은 비엣족의 하롱베이 전설과 꼭 닮았다.

어쨌거나 포 나가르 여신의 참파 왕국이나 한참 더 아래의 푸난 왕국이나, 베트남의 중부지역 까지를 정복 지역이라고 생각한 중국의 입장에서 이런 반란과 소요가 있었다면 마땅히 정벌을 감행했어야 하겠으나, 후한의 중엽부터 이미 극독의 혼란에 빠진 중국으로서도 여력이 없었고, 오랫동안 중국과의 마찰과 전쟁으로 극도로 피폐해지고 열악한 환경의 베트남 지도부 입장에서도 쉽게 남쪽으로 전력을 이동시킬 수 없는 한계성 때문에 참파 왕국은 조금은 쉽게 정착할 수 있었고, 서서히 여세를 몰아 비엣족의 심장부인 북부 지역으로 공세를 가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면서 이제 중국을 비롯한 주변의 모든 국가들에게 참파왕국을 알리게 되었으며, 지도에도 정식으로 베트남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 명실상부한 참파왕국을 새겨 넣게 되었다.

참파 왕국이 마침내 인도차이나 반도에 버젓이 세력권을 형성하고 하나의 국가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후로도 지도는 수시로 변한다. (솔직히 시대별 언어별 국가별로 역사를 보는 호칭들이 너무나 죄 다 달라서 헛갈리고 어려운 것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포기하거나 무시할 수는 없겠다.)

참파 왕국 전성기에는 캄보디아 영영 깊숙이까지 진출하였기에 지도의 색깔이 변한다. 그런가하면 캄보디아(크메르 왕국)의 전성기에는 인도차이나 반도의 거의 대부분이 캄보디아 옷을 입기도 하게 된다.

하지만, 인도차이나반도 역사에서 가장 꾸준한 진면목을 보여주는 놀라운 나라는 아유타이왕조(태국)이다.

참파 왕국은 캄보디아(크메르족)와 힌두문화권 맹주를 걸고 오랜 전쟁을 펼치다가 끝내 패함으로써 급격하게 쇠락의 길을 걷다가, 국토회복을 노리고 남하하는 베트남(비엣족)의 응우엔 왕조에게 멸망당한다. 하지만 크메르 왕국(캄보디아) 역시도 오랜 전쟁으로 지치고 피폐해진 상태에서 아유타이족(태국)의 침략으로 하루아침에 왕국의 수도인 앙코르 와트에 쥐새끼 한 마리 돌아다니지 않는 미증유의 사태와 함께 몰락해 사라지고 만다. 아유타이족(태국)의 일방적 승리였다. 태국은 이후로도 역사에서 단 한 번도 몰락하지 않는 놀라운 저력을 보여준다. 율 브린너 출연의 영화와 주윤발이 주연한 영화 리메이크작 <왕과 나>에서 보여주듯이, 청렴하고 뛰어난 지도력을 갖춘 통치자의 복을 꾸준히 아유타이족은 받아왔던 것이다. 나의 지난번 태국 여행 시에 사망하신 푸미폰 국왕 때 까진 말이다. 푸미폰 국왕에 대한 태국인들의 존경심은 ‘푸미폰 국왕은 살아있는 부처님이다’라는 표현에서 고스란히 드러났다. 국왕의 한 마디는 법률에 우선했고 부처님의 가르침 보다 훨씬 현실성이 있었다.

동남아의 치명적 약점이 오토바이 사고의 다발로 사망자가 넘쳐나자 태국 정부는 계엄령만큼이나 엄한 처벌 의지로 헬멧 착용 법령을 선포했다. 걸음마를 떼고 나면 오토바이부터 배우는 태국인들에게 헬멧은 거추장스러움을 넘어 절대적 불편이었다. 전 국민이 하나로 뭉쳐 계엄반란군처럼 총리관저로 몰려갔고 경찰과 군대가 파견되었다. 화염병이 날아다니고 부탄가스통이 터졌다. 실탄을 발사하기 직전의 초긴장 사태에 도달했다. 그때 아주 낡은 쑥색의 랜드로버 차량을 손수 몰고 한 노인이 사태의 한 복판에 나타났다. 국왕이었다. 태국은 지금도 엄연히 전제왕정국가다. 왕이 국가의 주인인 것이다. 그 주인인 푸미폰 국왕이 직접 나타난 것이다. 그는 오래전부터 살아있는 부처로 온 국민의 절대적 추앙을 받고 있어왔다. 모든 사람들이 일제히 왕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여러분 모두를 사랑합니다. 자나 깨나 어떻게 하면 우리 모두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 수 있을까를 고심해 왔습니다. 티비를 보다보면 교통사고가 많이 발생하고 오토바이를 타는 사람들이 많이 죽는 것을 보며 가슴이 아팠습니다. 익숙하지 않아 상당히 불편하겠지만, 헬멧을 쓰면 죽는 사람이 많이 줄어들 것이라는 보고를 받았고, 그렇게 해서라도 생명을 구할 수만 있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나는 여러분의 안전을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습니다.’라는 말만 남기고는 조용히 현장에서 떠나갔다.

그후로 어떻게 되었을까?

다음날 아침부터 모든 태국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헬멧을 썼다는 실로 기적 같은 엄청난 뉴스가 세상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내가 실제로 목격했던 푸미폰 국왕의 존재감은 로마 가톨릭의 교황님 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결코 못하지 않았다. 적어도 태국 안에서는 말이다.

물론 푸미폰 국왕의 외아들인 현 국왕의 체제는 결코 아니다 라고 해야겠지만 말이다. 정말로 개(DOG)판도 그런 개판이 없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이제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는 역사의 전면에 우뚝 섰고, 그 역사의 뿌리가 포 나가르 여신이라는 것이 드러났음이며, 처음 도래한 발생지가 나짱(Nha Trang) 이라고 밝혀졌다.

 

 

대한민국의 여행자들이 나짱을 방문하면 반듯이 찾아가야 하는 핫 플레이스이자 사진빨이 유독 좋기로 소문이 자자한 바로 그 ‘포 나가르 사원(Po Nagar Cham Towers)’이 바야흐로 이쯤에서 등장하게 된 것이다.

‘포 나가르 사원은 오랫동안 베트남 중부지방을 지배했던 참파 족이 세운 사원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탑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여신은 사람들에게 농업과 직조 기술을 가르친 풍요와 번영의 여신입니다. 잘 살피다 보면 어렵지 않게 문 위에 새겨진 여신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정말 사진이 기가 막히게 나오는 뷰 포인트 명소입니다. 30분을 드리겠으니 좋은 사진 많이 찍으신 후에 입구로 나오시기 바랍니다.’라는 이야기를 듣고 나서 허겁지겁 이리저리 몰려다니면서 열심히 사진을 찍었던 바로 그곳 말이다.

그러니 참파왕국의 역사도 역사겠지만....... 잠시 이곳을 둘러보고 가야할 것 같다. 참파의 문화를 엿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겠는가?

 


2세기 말에 베트남 중부지역에 상륙한 도래인(참족)들은 자신들만의 독특한 힌두문화를 바탕으로 점차 인도차이나 반도에 적응해 나가면서 남부지방과 내륙(크메르 지역)으로 활동범위와 세력을 확대해 나갔다.

그들이 처음 도착한 베트남 중남부의 너른 해안지역인 칸호아 지방(Khánh Hòa) 지방의 수도가 나짱(nha trang)이다. 내륙으로부터 흘러내려서 남중국해로 빠져나가는 카이 강(카이 강(Cai River)의 하구는 미사가 흘러내려 삼각주를 이루고 있는 갈대숲에 우거진 비교적 어족자원이 풍부한 지역이었다.

인류의 거의 대부분의 문명은 강(수자원)을 끼고 발생했고, 강과 바다가 만나는 삼각주 지역은 고대로부터 인류가 정창해 적응해 나가기에 가장 좋은 환경으로 여겨져 왔다. 아직까지 방파제를 만들고 항만을 건설해 항구를 활용할 능력을 가지지 못한 고대인들은 태풍과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피하기 위해 이런 강과 바다가 만나는 포구를 활용해 태풍이 몰아쳐오면 강을 따라 내륙의 안쪽으로 배를 피신시키며 살아왔던 것이다.

이제 당시로서는 어느 누구보다도 바다에 대해 잘 알고 터득해 왔던 참족에게 나짱이야 말로 외부의 도래인 입장에서는 최고의 입지조건을 갖춘 곳이었을 것이다. 그곳(지금의 나짱 도심)에 주거지역을 건설하고 외부의 침입에 대비해 방어망을 구축하고 어업과 농업과 사냥을 병행해가며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했다.

베트남인(비엣족)은 처음부터 주로 농사를 짓거나 일부가 사냥을 하는 그런 민족이었다. 하지만 도래인들은 달랐다. 참족의 먼 조상은 가파른 산악지역에서 오로지 사냥으로 연명을 해왔던 강인하고 용맹스런 집단이었던 것이다. 부득이 그들은 살아남기 위하여 바다를 택해야만 했고, 그 덕분으로 직접 나무를 깎아 배를 만들어 아주 먼 바다까지 헤쳐 나가며 고기를 잡아 연명해야만 하는 어업에 통달하게 되었고, 어느 외진 곳에서 정착을 하는 기간에는 농사를 짓기도 한, 그야말로 사냥. 농업. 어업. 선박 제조(허접한 고대수준이었지만)와 무대포식 항해술까지 갖춘 당시로서는 나름 하이테크놀러지한 첨단 민족이었던 것이다. 그들은 나짱을 주요거점으로 확장해 나갔으며, 점차 드넓은 바다를 통해 교역(국제무역)에 나서게 되었다. 바야흐로 해양 실크로드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종이와 비단과 도자기가 실크로드를 통해 서양에 전해졌고, 동서 문화의 교류가 이어졌다고 하지만, 동양과 서양의 급격한 국제정세 변화는 고대부터 이어져 내려온 중국 장안을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험준한 파미르 고원을 지나 다시 아라비아 사막을 대상(카라반)들에 의해 건너서 바그다드를 지나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이스탄불)에 도착한 이후에 지중해를 통해서 전 유럽에 퍼져나가던 국제무역 노선의 안전을 더이상 장담할 수 없는, 실크로드 교역에 심각하게 불안정한 상황을 유발시켰다.

그러자 장안에서 출발해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면서 힌두쿠시 산맥과 우랄 산맥을 넘어 중앙아시아 지역의 이슬람 국가(키리키스탄. 우즈베키스탄 등)을 지나 발트해 연안의 루마니아나 폴란드 등을 거쳐 유럽으로 직접 들어가는 새로운 (초원의 길)이 개척되었고, 배에다 선적해서 베트남 해안과 인도를 지나 아라비아해를 건너서 바그다드나 다마스쿠스를 통해 콘스탄티노플에 이르는 (바다의 길)이 개척되었던 것이다. 이 바닷길의 중간 여정에서 참족이 뛰어들어 제대로 호황을 맞이하게 되었던 것이다. 호이안은 바로 이 과정에서 탄생하게 된 국제무역 도시였다.

이런 참족에게 가장 강력하게 대항해 오는 집단은 당연히 비엣족(베트남인) 이었고, 그들 배후에는 중국이 있었던 것이다. 참족은 이런 특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비엣족을 통하지 않은 채 중국과의 직접 소통을 추진하였다. 전쟁은 전쟁이고 장사는 장사가 아니겠는가? 어느 쪽이든 결국엔 이익을 크게 내는 쪽이 성공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참족은 해양교역 확보를 위해 수시로 중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통상 확대를 요청하면서 꾸준히 조공을 받치기까지 했던 것이다.

그렇게 세력 확장과 왕국의 번영을 추진하는 참족의 최초 가장 중요한 거점이 바로 나짱이었으며 당시 최고의 국제 무역도시 또한 나짱이었던 것이다. 호이안이 생겨나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참족은 그런 나짱을 왕국의 수도로 인정하지 않았다. 그냥 중요한 거점 도시의 하나로만 여겼다. 아마도...... 참족 지휘부의 생각으로 참족이 나짱 인근에만 머물러 주저앉을 생각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들이 더 큰 왕국을 꿈꿨고 더 큰 새로운 도시 건설을 계획했던 것은 아닐까?

하지만 당장 참족에게 동화되어 오는 주변 사람들이나, 교역을 위해 찾아오는 이방인들에게 제대로 된 참족 왕국을 보여주고 위세를 드러내야만 한다는 필요성을 깨달았다. 그들은 제대로 된 도시 건설을 시작하면서, 카이 강 건너편의 가장 높아 시야가 탁 트이는 언덕에 최고의 힌두 사원을 건설하기 시작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의 포 나가르 사원(Po Nagar Cham Towers) 이다. Yan Pu Nagara 여신(楊浦那竭羅)은 힌두교의 브라만에 해당하는 신성한 최고 신으로 모든 사람들에게 크게 존경받고 있기에 그 신을 모시기 위해 거대하고 아름다운 사원을 지어 신께 헌납한 것이다. 이제 신의 거처가 마련되었으며, 나짱은 참족의 신성한 성지로 격상된 것이다.

이 시기에 참족은 이곳을 스스로 ‘카우타라(Kauṭharā) 왕국’이라고 명명하였으며, 이는 고대 인도종교에서‘신성한 성지’를 가리키는 용어였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이들을 지금 ‘카우타라 왕국’이라고 기억하거나 부르지 않는다. 예나 지금이나 오로지 ‘참파왕국’일 뿐이다.

 

현지인들이 그냥 탑바(Thap Ba)라고 부르는 포 나가르 사원은 나짱 시내의 카이 강(Cai River) 건너편 야트막한 언덕으로 보이는 꾸 라오(Cu Lao)에 놓였다. 처음 지어지기는 분명히 힌두교 사원이었음에도 지금은 베트남 불교 유적으로 여겨진다고 해야 보다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이를 이렇게 보고 생각하던 저렇게 보고 생각하던 잠시 찾아 들르는 여행자에게는 별 상관이 없어 보이지만..... 누군가 처음 만든 사람 입장에서는 어쩌면 상당히 억울할 수도 있겠다.

이런 예를 한 가지 들어서 부연 설명을 해 본다면 바로 캄보디아의 앙코르 와트(Angkor Wat)를 실례로 들 수가 있겠다.

앙코르 와트에서의 앙코르(Angkor)는 ‘도시’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왓(Wat)은 사원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앙코르 와트)는 ‘사원들의 도시’라고 해야 맞는 것이고 다시 응용하면 ‘앙코르 유적군’이라 해야 하는 것이다. 우리가 흔히 여행 잡지나 프로그램에서 보는 사원 건물 하나를 가리키는 용어가 아니라는 말이다. 거대하고도 방대한 앙코르 유적 군에는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사원들이 들어서 있는, 그중의 하나인 중앙 사원을 앙코르 와트라고 고유명사처럼 명명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 것이다. 하나하나의 사원에는 저마다 고유한 자신만의 이름을 가지고 있다.

더 큰 잘못은 바로 이것........ 앙코르 와트는 불교 문화재가 아니라 엄연한 힌두교 대표 문화재라는 사실이다. 아직 다 발굴되지 않았으니 몇 개라고 헤아릴 수 없지만, 정글에 파묻힌 채 발견된 수백 개의 사원 중에서 정식적으로 불교사원을 목적으로 건설된 건물은 딱 두개뿐이다. 자이바르만 7세 왕에 의해서 건설된 바이욘 사원(Banyan Temple)과 랜드마크와도 같은 거인 얼굴 조각상 앙코르 톰(Angkor Thom)만이 본래 부처님을 모시기 위해 세워진 건물이다. 다른 수백 개의 사원은 모두 비슈느(Visnu) 신에게 봉헌된 힌두교 사원들인 것이다.

자이바르만 7세는 크메르 왕국의 최고 전성기를 이끈 왕이다. 같은 힌두교 문하권인 베트남의 참파왕국의 침략으로 크메르 왕국은 거의 회복 불능의 지경에 이르렀다. 앙코르 와트도 처참하게 파괴되었다. 앙코르 와트는 사원들이 빼곡히 놓여있는 유적일 뿐만 아니다 일반인들이 실제로 생활하는 일반적 도시이기도 했다. 도시 곳곳에 사원이 있고 그곳에 함께 사람들이 살았던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앙코르 와트는 놀랍게도 당시 거주 인구가 1백만 명에 가까웠다고 한다. 역사 속에서는 잉카문명의 중심지였던 쿠스코와 함께 거주 인구 1백만의 도시는 쿠스코와 앙코르 와트와 로마와 중국의 장안 외에는 찾아 볼 수가 없다. 고대의 시대에 인구 1백만이라..... 가히 상상조차 불허할 정도라고 밖에 달리 표현이 안 된다.

왕위에 오른 자이바르만 7세는 국권 회복을 위해 적국인 참파족의 종교인 힌두교를 버리고 불교를 받아들인다. 동시에 정식 불교사원으로 바이욘 사원을 건축한다. 그리고 지금의 풍경처럼 중앙 사원의 곳곳이나 다른 모든 사원에 불상을 설치하게 된다. 그리고 치세를 펼쳐서 크메르 왕국 최고의 부흥기를 이룩해 낸다. 하지만....... 아들인 자이바르만 8세가 즉위하면서 다시 크메르 왕국은 쇠퇴의 길로 접어들게 되고, 타개책으로 불교를 다시 힌두교로 바꾸어 버린다.

그 후로 현재까지 크메르 왕국(캄보디아)은 온갖 수난과 고초를 역사 속에서 겪게 되었으며, 지금 인구의 95%를 차지하는 불교 국가가 바로 캄보디아 이다.

그런 지경이 되었으니, 이제 와서 앙코르 와트가 힌두교 사원이니 어쩌니....... 나짱의 포 나가르 사원이 애초 힌두교 사원이니 어쩌니 하는 것이 다 무슨 소용이겠는가?

보로부두르(자바, 인도네시아), 파간(미얀마), 왓 푸(라오스), 앙코르 와트(캄보디아), 프라삿힌 피마이(태국)와 같은 동남아시아의 주요 사원 단지들이 모두 지금은 세상에서 가장 웅장하고 아름다운 불교를 대표하는 가장 훌륭한 건축물들일 뿐이다.

 

탑바는 참족이 나짱에 거점을 틀었던 2세기경부터 만들어 졌으나 초기 대부분의 건물들은 목재로 만들어 졌었다고 추정하고 있다. 기록에 따르면 서기 774년에 바다를 건너 쳐들어 온 사람들에 의해서 약탈되고 파괴되어, 이후로 12 시기에 이르기까지 꾸준히 복원 작업이 이어졌던 보인다. 이 재건축 과정에서 목재를 버리고 사암과 붉은 벽돌을 이용하여 지금의 모습을 만들었다. 사원 가득 23개의 탑이 세워졌었으나 모두 파괴되거나 허물어지고 4개의 건물(탑)만 남아있다.

출입문을 비롯한 장식적인 부분에는 사암을 다듬거나 조각하여 사용하였으나 나머지 전체 구조물은 붉은 벽돌을 구워 사용하였다. 그렇게 만들어졌음에도 정작 현대의 건축학자들을 놀라게 한 것은, 일체의 모르타르(시멘트)나 다른 접착제를 사용하지 않고 그냥 쌓아올린 것만으로 안정성과 미적 완성을 이루어냈고 현재까지 유지되고 있다는 점이다.

피라미드 형태로 층층이 쌓아올린 지붕과 조각으로 가득한 기둥들, 그것들이 만들 낸 성소 공간의 어둑하면서도 신비로운 분위기는..... 그 당시에는 얼마나 더 성스럽고 거룩한 분위기였을까 하는 의문을 가지기에 너무나 충분하다 섬세하게 다듬어 조각을 새긴 기둥에는 힌두 신화를 묘사함은 물론 의식과 춤과 당시 사람들의 일상생활을 새겨 넣었다.

사원의 모든 것이 해가 뜨는 동쪽을 향하고 있다. 하여 사원의 입구를 지나 10개의 기둥이 나열되어 있는 명상의 공간을 지나서야 계단을 올라 성소에 들게끔 만들어졌다.

이 사원은 힌두교 여신인 바가바티(Bhagavati)와 마히샤수라마르디니(Mahishasuramardini)와 동일시되는 참파왕국의 여신인 얀 포 나가르(Yan Po Nagar)에게 헌정되었다.

774년 바다를 건너와 사원에 불을 지르고 보물을 약탈해 간 세력은 누구였을까? 학자들은 이를 매우 궁금해 했다. 나 역시도 그랬다.

참파 왕국의 적은 북쪽의 비엣족(베트남)이나 중국뿐만이 아니었다.

남쪽으로 내려가 메콩강 하구의 토착세력에 흡수된 세력들도 시간이 지나다 참파에 대적해 왔고, 내륙으로 들어가 크메르 왕국(캄보디아)에 흡수된 힌두교 세력들도 점차 전면전을 걸어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결국엔 왕국의 운명을 걸고 철전지 원수가 되어 참혹한 전쟁에 돌입하게 되지만 말이다.

참파왕국이 반도에 성공적으로 정착을 했고 엄청난 부를 일구어 냈다는 소문을 들은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후발 주자가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하여 쳐들어 왔다고 보는 시각들이 있었다. 하지만, 참파가 이미 반도에 거점을 마련하고 확고하게 뿌리 기반을 만든 시점에서 바다를 건너 이들을 선제공격할 만큼 세력을 가진 해양민족이 당시 상황으로는 있을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결국 결론은 해적 패거리라는데 모아졌다.

놀랍게도 당시에 이미 일본 해적(왜구)의 활동은 활발해서 일본 본토와 한반도를 넘어서 중국 대륙을 뒤흔들었고 더 멀리 여기 인도차이나 반도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드러났다. 애구의 폐해가 크면 클수록 그 영향력 또한 크게 퍼져나가서 왜구와 비슷한 짝퉁 해적들이 사방 곳곳에서 출몰하는 촌극을 나았으니 말이다. 잘만하면...... 최소의 투자비용으로 로또에 당첨되는 것이 바로 해적질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소문을 듣고 활동을 시작하던 인도네시아나 말레이시아의 짝퉁 해적들이 작심을 하고 크게 한탕을 저지른 것이 바로 나짱 공략이었다고 보게 된 것이다. 참파의 정규 군대병력이 비엣족을 공략하고자 대부분 거점을 이탈한 상태에서 느닷없이 해적들이 들이닥쳤고, 당시 금은보화와 돈과 식량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장소가 신성한 사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같은 힌두교인 처지에 잽싸게 치고 챙기고 빠져나간 것이다. 금은보화는 물론 참파의 보물들이 당시 약탈되었다. 소식을 들은 왕이 해군을 보내 이들을 추적했다. 하지만 해적들은 더 잽싸게 바다건너 어딘가로 사라졌고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다. 한 탕이 간은 번호의 로또를 서너 장 샀던 것과 맘먹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뽀록이 나면 죽임을 당할 것이 뻔하고, 또 다시 모두 빼앗길까 두려워서라도 말이다.

덕분에 사원은 보다 웅장하고 화려하고 장엄하게 지금의 모습으로 새롭게 복원 건축되기 시작했는데....... 아뿔싸!!!!

인드라바르만 3세가 세운 석비에 따르면 황금 동상을 세워 여신에게 바치라는 계시에 따라 북쪽의 탑에 황금으로 만든 남자의 얼굴이 새겨진 무카링가(남근상)을 만들어 세웠는데, 참파를 침공한 크메르 왕국의 드라바르만 2세에게 약탈당하고 말았다. 링가는 이 사건 이루로 유실되고 말았다. 자야 인드라바르만 1세가 이 자리에 돌로 만든 요니를 세월다고 전한다.

힌두교에서는 남자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링가(Linga·남근상)가 있고, 여자 신을 상징하는 것으로 요니(Yoni, 여근상)이 있는데, 이것들은 봉안될 때 결합된 상태로 봉안된다. 이런 현상은 힌두 조각상을 살펴보면 노골적인 성행위를 묘사하는 것들도 있지만, 신을 조각해 놓은 불상 같은 것에서 보기에 따라 신기할 정도로 남자와 여자가 섞여있는 듯 보이는 모습들을 발견할 수 있다. 링가는 힌두교의 신 가운데 최고신인 시바(파괴의 신)의 남근을, 요니는 시바신의 부인인 샤크티 여신의 성기를 각각 표현한 것이다. 링가(남근상)와 요니(여근상)는 합일된 상태, 그것은 바로 모든 존재의 가장 완전함을 나타내며, 종국에 궁극적인 해탈을 상징하는 것이다. 남신과 여신이 결합된 상태로 하나의 신체에 표현된 것이다.

참파족의 언어로 보자면 ‘포나가르(Po Nagar)라는 말은‘세상 만물의 어머니’를 가리킨다. 하여 힌두교 사람들은 이 여신이 씨를 뿌리고, 쟁기질하고, 베를 짜는 법을 가르쳐 주어서 자신들의 삶에 부와 위안을 가져다주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한없는 숭배와 존경의 대상으로 여겨왔던 것이다.

 

<베트남 역사에서 꺼내보는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 이라는 글을 써서 올리면서 왠지........ 어쩌면 생각한 것 보다 훨씬 길어질지도 모르겠다는 슬픈 예감이 불현 듯 생각나는지 모르겠다. 나에게 있어서 그런 슬픈 예감은 노래 가사처럼 한 번도 틀린 적이 없는데 말이다.

책을 많이 읽으면서 온갖 잡다한 이야기들을 많이 주워듣는 편인데다가, 떠오르는 의문과 가정과 기묘한 상상들을 또 엄청나게 메모를 하는 편이다. 치명적인 약점으로 서두르고 휘갈겨 내려쓰는 대부분의 메모들이...... 헐! 내가 본시 태어나기를 글씨 치에다 지독한 악필러로 태어났으니....... 사나흘 지나면 내 글씨를 잘 추측으로도 읽지 못할 정도이다. 고등학교 때 글씨 쓰는 대신에 타자기를 사면서부터 필체에는 아예 포기를 했었던 처지가 바로 내가 아니었던가 말이다.

그냥 소설을 쓰듯이 쭈욱 자판을 두드려 내려갈 때도 있지만, 칼럼이나 역사 이야기를 할 때는 근거가 있어야 하고 확실해야하기 때문에 수십 년 전의 노트와 수집한 자료를 찾아보기가 일쑤인데........ 그게 때와 상황에 따라 여간 고역이 아닐 수 없다. 거기에다가 근자에 들어 시력이 엄청나게 떨어졌지, 기억은 점차 희미해져 가지, 몇 날밤은 끄떡없이 버텨내던 체력도 바닥을 치기 시작하지, 벌어놓은 돈이 없어서 일은 계속해야 하지........ 어떤 분야로든 전업 작가 노릇 몇 년 만 할 수 있었으면....... 그 후로는 아예 책 근처에도 가지 않겠다. 연필을 만지는 일도 결단코 없을 것이다.

오죽하면 이젠....... ‘옛날처럼 밖에 나가서 쏘다니고 놀러 좀 다녀.’ 라는 아내의 비아냥을 다 듣게 될 줄을 어찌 알았겠는가?

그러면 ‘이제껏....... 평생 놀러 다니면서 할 짓 못할 짓 할 것을 이미 다해버려서 이젠 정신 차리고 반성하면서 들어앉아 책이나 읽고 글이나 써볼래. 집 잘 지키고 있잖아.’ 라고 답해준다. 습쓸해 지는 가슴을 달래면서 말이다.

 

어제 글을 쓰려고 책상에 앉다보니 문득........ <3.1절>이란 생각이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기념일이 되면 그 기념일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고 앞서 사셨던 많은 분들을 생각하게 되고 의미를 되새겨 보고는 한다. '106주년 3.1절' 이라........

이런저런 생각들을 하다가....... 책장에서 아주 오랜 메모장들을 뒤적거리다가......... 낯익은 영화 제목을 하나 발견했다.

 

‘Warriors of the Rainbow(무지개 전사).’

 

영화는 (3.1절)과도 연관이 있다면 있을 수 있고 (참파 왕국)의 역사와도 아주 깊은 연관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대단히 길고 좀 복잡하고 어려기도 한 영화겠지만, 이 영화를 제대로 보기만 한다면 (3.1절)에 대한 생각과 깊이도 확실히 다를 것이라 말할 수 있다. 하여 다음 지면이나 참파왕국 역사를 써 내려가면서 어디쯤에서인가는 반듯이 이 (무지개 전사)를 좀 더 심도 있게 꼭 다루어 볼 생각이다.

그래서 어제 밤에는 글 쓰는 것을 포기하고 이 영화 (무지개 전사)를 다시 보았다.

Warriors of the Rainbow(무지개 전사).’를 지금 유튜브에서 검색을 통해 다시 볼 수가 있는데, 러닝 타임이 2시간 26분 39초로 올라와 있다. 그런가 하면 영화관 상영에 비교할 수 없을 만큼의 번역에 대한 아쉬움이 분명히 있다.(내 능력 밖의 언어적 한계 때문) 더하여 더 큰 아쉬움은 이 영화가 본래 2부작으로 총 4시간 36분짜리를 거의 절반으로 뚝 잘라서 응축시켜 놓았다는 데 있다. 그러다보니 영화는 당연하게 무척이나 어렵다. 얼핏 명작이랄 수 있는 리들리 스콧 감독의 <킹덤 오브 해븐>이 과도하게 필름을 싹뚝 해버려서 스토리 맥락조차 이어지지 않는 편집으로 초기 상영에 참패는 물론 온갖 개망신을 당한 후에, 감독이 작심하고 재편집을 해서 지금의 감독판 <킹덤 오브 해븐>을 재개봉했고, 그 결과 엄청난 찬사와 함께 엄청난 성공을 이루었었다. 나 역시도 (무지개 전사)의 통합판을 제대로 본 것이 아니라 그 점을 크게 애석해 하고 있는 사람 중 하나이다.

1930년대의 대만 역사를 다룬 영화라는 것 외에는, 추후에 반듯이 다룰 예정이라 스토리나 다른 설명은 여기서 생략하기로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2014년 극히 일부의 극장에서만 2부로 나누어 상영에 올렸는데......... 처음 개봉시 1부를 본 관람객이 대략 8.000 명 정도였다. 그리고 추후에 다시 2부 상영에서는 40명 정도만이 이 영화를 굳이 찾아서 관람했다. 그야말로 폭망도 제대로 된 폭망이 아니었겠는가?

한국인들의 관점에서 보자면 대만의 역사와 대만 민족의 특수성에 대해 거의 알려진 것이 없어서 이질감이 심하게 생겨났을 것이며, 그 결과로 너무도 뻔한 일제의 침략에 따른 반일 정서에만 매달리는 그저 그런 영화로만 인식되었기 때문이라는 평가가 뒤따랐다.

그런 만큼 이 영화는 더 어렵다. 무척이나 많이 어렵고 복잡하다.

그런 만큼 더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한다. 기대 이상으로 많은 것을 배우고 깨달을 수 있다. 많은 국제 영화제에서 엄청나게 찬사를 받는 아주 훌륭한 작품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추천한다.

대만의 이야기를 다룬 만큼......... 대만에서는 거의 종교적 영역만큼 찬사를 받았고, 서구에서는 이 낯선 역사와 소재와 해석으로 인해서 지대한 관심과 무한한 갈채를 받았다. 반면에 중국과 중국의 영향권이 미치는 세계에서는 극혐의 대상이 되었다. 거의 탄핵을 당했을 정도였다. 역사를 나름의 시선과 가치관에 입각해 역사로 보고 평가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와 민족과 정치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달리 적대시하고 극단으로 평가내리는 현실세태가 그대로 드러났다고 하겠다.

이 영화를 제대로 감상하고 감동을 받은 많은 사람들은 이 영화를 멜 깁슨이 주연하고 스코틀랜드의 독립을 다룬 영화 <브레이브 하트>나, 다니엘 데이 루이스가 주연하고 신대륙의 독립을 다룬 영화 <라스트 모히칸>과 같은 반열에 <무지개 전사>를 올려놓는다.

그만큼 볼만한 영화이고 그만큼 깊은 울림과 오랜 여운을 남기는 명작이다.

 

 

 

 

나는 이번 (3.1절)을 영화 ‘Warriors of the Rainbow(무지개 전사).’MF 보면서 나름 의미있게 보냈다.

<베트남 역사에서 꺼내보는 참파왕국(kingdom of Champa)>의 이번 이야기는 지면 관계로 이쯤에서 단계 마무리를 하고, 다음 이야기에서 <참파 왕국의 영토 확장과 몰락> 이야기로 이어나갈까 한다.

 

--- 찾아주시고 긴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다시 이어가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