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2월 31일(화).
오늘은 태리. 세리. 할머니. 할아버지가 베트남 나짱(nha trang)에서 일주일간의 첫 해외가족여행을 마치고 귀국하는 마지막 날의 아침이 밝았다. 언제나 여행의 시계는 처음에는 아주 느릿느릿 가다가, 딱 여행의 절반이 지나는 순간부터는 폭주하는 열차처럼 무섭게 내달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시계가 빠르게 움직인다고 느끼는 순간부터 아쉬움과 안타까움과 여러 가지로 후회막급의 이야기들이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새겨지게 되는 것이다.
할머니는 이미 어제 아침부터 ‘너무 짧아. 한 3일만 더 길게 하는 것이었는데......’‘날씨만 좋았으면 달랏을 연계해서 슬리핑 버스를 태워주는 건데........’‘하루쯤은 다낭으로 슬리핑 버스로 야간 이동해서 거기서 출국해도 좋았을 텐데......‘ '두고두고 많이 아쉬울 것 같아’를 연발하기 시작했으니 말이다.
‘그러게 내가 하루만 더 있다가 1월 2일에 집에 도착하게 해주자고 했잖아.’
‘이번 여행 제목이 (겡구에게 방학을 주자)라면서? 겡구와 짱구가 어디선가 휴가를 잘 보내고 정동진이던 호미곶이든 새해 일출을 보면서 여러 가지 새해 계획들을 세웠을 것 아냐. 그러니까 새해 첫날은 녀석들 가족이 함께 모여서 새해를 맞도록 해주어야지. 우리 귀국 비행기가 아침에 도착하면 녀석들도 어디 여행지에선가 철수해서 오전 중에 다 만나게 해주고 싶어서이지. 나짱 일출도 좋겠지만...... 비행기 속에서 일출 보는 것도 좋잖아?’
그래서 결국 우리는 오늘 자정을 넘겨서 새벽 1시에 출발하는 귀국 비행기 편을 예약했다. 공항에서 제야의 종소리를 들을 것이고 비행기 창문으로 새해 일출을 맞이할 예정이다.
호텔 예약은 오늘밤까지 포함되어 있어서 밤 열시쯤 체크아웃을 하고 그랩택시를 이용해 공항으로 떠날 예정이다. 오전에 체크아웃해서 밤까지 병아리들을 이끌고 힘들게 헤맬 자신이 없어서 아예 하루를 더 사용하는 것으로 했다. 일찍 저녁을 먹고 녀석들을 조금이라도 재워주고 싶어서였다.
어제는 밤이 늦도록 까지 인근 특설 무대에서 펼쳐지는 새해맞이 콘서트 리허설 무대를 비가 내리는 창문 밖으로 구경을 하다가 잠이 들었다. 빗줄기가 제법 세차게 내리고 밤은 점점 깊어가지만 콘서트 하루 전날의 총연습(리허설)은 요란한 음향과 화려한 전광판과 현란한 레이저쇼와 함께 거의 밤 열한시가 넘도록 계속되었다. 음향과 레이저쇼가 끝난 뒤에도 자정을 넘기면서 가지 특설무대의 전광판 수리작업은 계속되었다.
이렇게 큰 콘서트 무대가 또 있을까?
간혹 잠실 운동장을 빌어서 콘서트를 벌이는 유명 가수들의 공연을 직접 참관하지는 못하고 뉴스나 기사를 통해서 들여다보고는 했었다. 그런 경우 공연장 크기는 잠실 운동장 크기가 되겠지만, 어디까지나 무대는 그 운동장의 일부로 설치되기에 그만큼 큰 것은 아니었다. 그런데 여기 (나짱의 새해맞이 콘서트)는 전혀 그런 경우와 달라 보인다. 일단 공연장의 크기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는다. 다만 콘서트 특설 무대의 크기가 그제부터 완전하게 실물을 드러냈다는 사실이다.
일주일 전 우리가 로지호텔에 체크인을 하고 창밖을 내다보았을 때, 한창 건설 중인 새해맞이 콘서트장의 공연 무대를 내려다보게 되었다. 그 유명한 나짱 해변의 한 구획을 전부 차지했다고 할 만큼 온통 검정색의 거대한 철제구조물이 한참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는데, 그 무대가 해안도로까지 툭 튀어나올 정도의 규모였으며, 이로 인해서 도로의 절반가까이가 점령당해 심하게 도로 정체현상까지 유발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콘서트를 위해서 나짱 최고의 중요 도로 절반을 일주일 전부터 가로막아서 병목현상 정체를 벌인다? 한나절 정도라면 모를까....... 사고나 자연재해가 아니라면 우리나라에서는 절대로 불가능할 것 같다. 열흘 전부터 가장 통행이 붐비는 중심도로의 절반을 막아서 극심한 정체현상을 발생시키는 행정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하지만...... 여기는 베트남이 아닌가? 당이 지시하면 그 이상도 언제나 가능한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 베트남인 것이다.
이럴 정도였으니 당연히 그 무대가 무지무지하게 큰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말이다.
놀라지 마시라. 이게 무대의 전부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이때까지 드러난 것은 무대의 절반이었던 것이다. 콘서트 무대에서 전광판을 비롯한 핵심 중요 시설과 조명. 음향. 레이저 등을 총괄 통제하는 시스템들이 들어설 장소를 위주로 지휘부만 이곳에 먼저 건설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다가 마침내 공현 사흘 전부터는 해안도로를 완전히 통제해 버리고 해안 쪽의 시설에서 연결하여 끌어내서는 반대편의 역사적 유산 건축물인 컨벤션 쎈터(Khanh Hoa Convention Center) 현관까지 이어 붙이는 것이었다. <나짱 컨벤션 쎈터>는 베트남의 중요 문화재 건축물이다. 베트남이 지금의 통일 국가로 되기까지 칸호아(Khanh Hoa) 지방의 인민위원회 사무실(도청)이었던 것이다. 그만큼 정치의 중심이었던 유래있는 건물인 것이다. 노후화를 겪게되자 대대적인 복원공사를 벌인 끝에 새롭게 문화예술의 중심인 컨벤션 쎈터로 탈바꿈을 한 것이다.
해변에 설치된 전광판 무대에서 해안도로(6차선 차도와 인도 2개)를 건너 컨벤션 센터의 주차장 겸 마당을 지나 건물의 현관 입구까지가 하나의 공연 무대가 되는 것이다. 실제로 가수와 그룹이 컨벤션 쎈터 현관에서 등장하여 무대를 걸어 다니고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거나 집단 군무를 추는 리허설을 멀리서 지켜보다가 그만....... 절래절래 혀를 내두르고 말았다.
‘여기가 베트남이 아니라 혹 중국이 아닐까? 판을 크게 벌이는 것은 중국인데..... 왜 베트남에서 중국 냄새가 나지?’
우리나라에서도 호미곶이나 정동진을 비롯해 전국 각지에서 새해맞이 행사를 벌이기는 하지만...... 이건 좀 상식에 맞지 않는 것이 아닌가.
이들에게 새해맞이 콘서트가 그렇게 중요한가?
이거야 말로 나짱이 아니라...... 국가 대행사인가? 얼핏 우리 과거사 속에서 해프닝처럼 벌어졌던 아는 사람만 알고 기억할 <국풍 81>이 떠올랐다.
'있잖아요. 할아버지?'
'응. 세리야. 할아버지한테 할 이야기가 있어? 무슨 이야기인데요? 궁금하네요?'
다른날보다 일찍 일어나서 호텔 조식을 먹으려 내려가려고 머리 정리를 하고 옷차림을 언니보다 먼저 마친 세리가 카메라 배터리 점검을 하고있는 할아버지에게 다가왔다.
'할아버지. 어제는 언니 부탁을 들어주셨잖아요?'
순.간.섬.뜩.
우리 세리는 여간 보통내기가 아니다. 수시로 이 할아버지를 섬뜩 섬뜩 놀라자빠지게 만들기 때문이다.
'도대체 어디까지 일까?' 이 녀석의 영리함을 넘어서는 영악함이라 할까? 또 절대 포기를 모르는 열정과 집요함은....... '누가 내일부터 여섯 살' 이라고, '오늘까진 분명한 다섯 살' 이라고 믿을 수 있단 말인가. 나는 이미 여러 번 그런 상황을 목격했고...... 할머니도 어느 정도는 같은 마음인 것을 알고 있다. '이 녀석은 정말로 훗날 어떤 여성으로 성장할까?' 우리 세리에게 '할아버지가 새롭게 별명을 하나 붙여준다면 그것은 (팔색조 우리 세리)' 라고 해주고 싶다. 아홉 살 태리의 성격이나 성향은 이제 어느 정도는 형성된 것으로 느껴지는데, 도대체 세리 이 녀석의 성격과 성향은 어떻게 자리 잡고 성장하게 될 것인지 너무나도 궁금하다. 하루하루뿐만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까지도 말이다.
윤 세리. 도대체 이 녀석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할아버지에게 하고 싶은 것이나 가지고 싶은 것이나...... 그냥 부탁을 하면 될 것을 지금 녀석은 굳이 ‘언니’를 앞세우고 작정하고 나선 것이다. 그냥 ‘부탁해요 할아버지’ 하면 거의 대부분을 쉽게 들어주었었는데, 지금 녀석이 생각하고 있는 것은 그것만으로는 안 되겠다는 생각인 것이다. 할아버지에게 부탁도 아니고 타협도 아니고 ‘언니 부탁을 들어주셨으니 이번엔 제 차례예요. 저의 부탁도 당연히 들어주셔야만 해요.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라고 당당하게 요구를 해오고 있는 것이다.
언니와의 4살 차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고 싶은 동생의 절규와 몸부림이라고 해야 할까?
어린 시절의 4살 차이는 버겁다는 표현을 넘어서 거의 넘볼 수 없는 불가능에 가깝다고 해야 할까?
청소년으로 다 자랐다고 생각하는 언니의 무게와 힘과 경험들은 꼬맹이인 동생을 늘 무시하고 업신여기고 아니면 힘으로 짓이겨버리기 일쑤다. 하지만 이 영특한 동생은 모든 면에 있어서 언니에게 뒤지고 싶은 생각이 전혀 없다. 먼저 양보를 하고, 먼저 타협을 제기할 때도 있지만 속으로는 ‘난 언니의 동생이야. 언니랑 모든 면에서 똑 같다고. 언니가 할 수 있으면 나도 할 수 있고, 언니가 가지고 싶은 것은 나도 가지고 싶어. 언니가 나보다 유리한 것은 4살을 더 먹어서 신체조건이 나보다 크고 힘이 세다는 것뿐이야. 내가 양보해서 줄 수는 있지만 빼앗기는 것은 옳은 일이 아니냐. 나도 생각이 있고 바람이 있고 다 할 수 있다니까? 그러니까 언니라고 나에게 이래라 저래라 하는 것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이야.’라는 생각을 속으로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결국...... 자주 다툰다. 언제나 동생은 질 수 밖에 없고 통한의 눈물을 흘리며 대성통곡하는 것으로 결말이 지어진다. 그런데 그 울음 속에는 결코 패배한 것이 아니라는.... 불가항력적인 힘의 불균형에 의해서 당할 수밖에 없었다는 다짐의 눈빛을 발견하곤 한다.
그럼에도 동생 세리는 참으로 착하다.
무엇인가를 나누어 주고 양보하는 것은 주로 세리에게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언니에게서는 적어도 동생에 관한한 무관심한 태도를 보이거나, 약간은 군림하는 듯싶은 태도가 슬쩍 엿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이런 대립과 마찰이 심한 것은 또 아니다. 어느 집안이나 아이들을 기르다보면 당연한 것처럼 벌어지고 보여 지는 그런 일상일 뿐이다.
동생에게 불상사가 생기면 당연히 언니가 뛰어들어 수습을 하고 보호하려고 힘을 쓸 것이다. 그러데 반대로..... 언니에게 어떤 불상사가 생기면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의 수준이랄까, 대응 레벨의 수준이 사뭇 달라질 것이다. 세리는 언니를 지키려 애쓰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사생결단을 내려고 덤벼들 테니까 말이다. 할아버지가 느끼기에 언니가 동생을 생각하는 정도 보다는, 동생이 더 끔찍하게 언니를 생각하고 위한다는 이 아이러니한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암튼 태리는 참 좋은 것 같다. 세리같은 동생을 두었으니 말이다.
그런 세리가 지금 할아버지 어깨에 매달리면서 ‘어제는 언니 부탁을 들어주셨잖아요?’ 라고 넌지시 담판을 하자고 덤벼들고 있는 것이다.
햐!!!!! 요 쬐끄만 녀석의 머릿속에 지금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지?
‘어제는 그랬었지? 그럼 오늘은 세리가 할아버지에게 부탁할 게 있다는 말이니?’
‘네. 할아버지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요. 들어주실 거예요?’
‘무슨 부탁인지 알아야 들어주고 아니고를 판단할 수 있지? 이야기 해 보렴?’
‘언니처럼 제 부탁도 들어주셨으면 해요. 할아버지. 들어 주실 거지요?’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태리와 세리에게 언제나 차별을 두지 않고 똑 같이 사랑한단다. 언니니까 되고 세리니까 안 된다는 그런 일은 절대로 없어. 둘 다 똑같이 소중하고 사랑한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아. 어제는 언니의 부탁이 우리 모두에게 나름 좋겠다고 생각해서 들어준 것이고........ 세리가 무슨 부탁을 하던지 지금의 우리 가족여행에 있어서 모두에게 좋은지와 또 할머니와 언니에게도 어제처럼 똑같이 상의해서 가능하면 세리의 부탁도 들어주고 싶고, 모두가 좋아하는 방향으로 노력해 볼 수 있을 거야. 그리고...... 그냥 세리가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세리 생각을 말해주면 좋을 것 같아. 세리와 할아버지 사이에 해야 하고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언니랑 상관없이 충분히 할 수 있을 거야. 둘 밖에 없는 소중한 손녀들이지만, 꼭 세리가 태리랑 똑 같거나 반듯이 같이해야 하는 것은 아니지 않겠니? 소중한 가족이고 서로 하나씩 밖에 없는 언니 동생이지만 그래도 태리에겐 태리의 생각이 있고 세리에겐 세리만의 생각이 따로 있는 거야. 그러니까....... 오늘 세리가 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냥 (할아버지 저 이거 하고 싶어요) 라고 이야기 해 주세요. 알았지요?’
‘네. 그럼요 할아버지....... 저 오늘 머드 스파에 가서 하루 종일 물놀이 하고 싶어요. 그게 제 부탁 이예요. 들어주세요.’
도대체 얘가 누구를 닮았을까?
구미호 할머니를 쏙 뺐을까? 아님 칠미호인 겡구(며느리)를 닮아서 이럴까?
‘아침 먹으러 내려가서 할머니랑 언니랑 상의를 해보겠지만....... 세리야. 오늘은 우리가 이번 여행을 마치고 한밤중에 공항으로 가서 비행기를 타고 엄마 아빠에게 가는 날이거든?’
‘알아요. 내일 아침에 우리나라에 도착하는걸요.’
‘그래서 오늘은 마지막 날이라서.......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상의해 보기는....... 시내 구경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엄마 아빠 선물 주려면 쇼핑도 좀 해야 하고.......’
‘우리 엄마 아바는 선물 안 좋아하거든요?’
헐!!!! 이 녀석 봐라. 물러서거나 타협할 생각이 전혀 없네?
‘할머니 할아버지 같이 일하는 사람들 선물도 좀 사야하겠는데........’
‘그럼 선물은 공항 가서 사면되잖아요?’
‘공항 면세점은 비싸? 저렴한 기념품을 좀 사야한다고?’
‘그럼 하루 종일 말구요. 좀 일찍 나오면 되잖아요.’
이 당차고 집요한 녀석을 어찌할꼬? 이렇게까지 하고나서 관철이 안 되면 상처받는 것은 아닐까? 그런 안 되지. 암. 안 되고말고.
‘알았어. 할아버지가 세리의 부탁을 충분히 알아들었으니까, 아침 먹으면서 언니랑 할머니랑 잘 상의를 해보자. 가능하면 세리랑 머드 스파 가도록 해볼게. 알았지? 조금만 기다려 줘?’
‘네. 알겠어요. 저 머드 스파 꼭 다시 가고 싶어요.’
헐!!!!!
뭘 어째? 오늘 스케줄은 이미 결정이 난 것이지 뭐. 손녀를 어떻게 이겨???????
식당으로 가면서 할머니에게 귓속말을 날린다.
‘또 거길 가? 할 수 없지 뭐. 베이커리 가서 바게트랑 간식꺼리랑 음료수랑 미리 죄 다 사가지고 가야하잖아? 지난번처럼 애들 굶기지 말고.’
베트남으로의 겨울여행에서 나짱(nha trang)의 온천여행(머드 스파)는 이색적 체험이자 아주 탁월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열대의 나라 베트남인 탓에 한겨울에도 무더운 날씨임에는 틀림이 없겠지만, 연일 비가 쏟아져 내리는 우기인데다가 바람이 많이 부는 계절인 탓에 돌아다니기엔 덥고, 물놀이하기엔 제법 쌀쌀한 날씨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현지인들의 새벽운동인 바다 수영이 한겨울에도 벌어지기는 하지만 다른 계절에 비한다면 극히 소수의 건장한 남성들에게만 국한되어 벌어지더라는 말이다. 수영장에서의 물놀이도 가능은 하지만, 아주 쾌청한 날씨가 아니라면 어느 정도 싸늘한 추위 느낌은 감수해야만 한다.
그런 계절적 특징을 가진 겨울 여행에서 나짱의 포나가르 탑이 있는 도심 외곽지역의 부근에는 도처에 따뜻한 온천이 솟아난다. 어쩌면 참파족으로 대표되는 옛 사람들도 이런 온천을 염두에 두고 주거지로 처음 이곳을 정한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바다 수영을 할 수는 있지만 무더운 적도 날씨를 염두에 두고 나짱을 찾아 온 한국 여행자들 중에서 바다 수영에 도전해 볼 사람은 거의(아니 절대로) 없을 것 같다. 혹 군대에서 빤빠라라는 것을 체험해 본 사람이거나 해병대 극한 생존훈련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가능하겠지만 말이다. 나는 바다에 반쯤 빠져서 실제 도전을 해 보려 했지만, 할망구와 병아리들의 강력한 제지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바다 수영을 절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우리 병아리들도 할머니도 나짱의 겨울 한복판에서 바다 수영을 했으니 말이다. 바다를 마주보고 있는 나짱 해변의 바다는 성난 파도가 무섭게 몰아치고 바람이 정말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바다 수영이 힘들다. 하지만, 빈원더스 테마파크공원 워터파크의 해변은 나짱 시내를 바라보면서 성난 바다를 등지고 돌아앉아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바다도 잔잔하고 바람도 거의 느껴지지 않는다. 이곳에서 해가 드문드문 내미는 날씨 정도면 전혀 추위를 느끼지 않고도 얼마든지 바다 수영과 물놀이를 맘껏 즐길 수 있다. 우리는 실제로 두 번 모두 이곳에서 바다 수영을 즐겼다.
이곳이 아니라면 나짱에서의 한겨울 바다수영은 아마도 어려워 보인다.
해변 호텔이나 리조트마다 멋진 수영장이 널려있지만, 그나마 지상의 수영장 이라면 어느 정도 바람을 피할 수 있기에 도전해 볼 수 있겠지만, 멋진 공중의 루프 탑 수영장에서 비키니 차림으로 물놀이를 즐기는 SNS에 올라오는 멋진 사진의 흉내를 내다가는 귀국하자마자 독감으로 병원에 입원할지도 모를 일이다.
이쯤 상황에서 온천 여행은 아주 매력적인 체험으로 다가 온다.
뜨거운 온천물에 몸을 담그고 인근 바다로 유입되는 강바닥에서 걸러 온 진흙(머드)으로 전신 마사지를 스스로 하고, 인간 세차장 기계를 통과해 일차로 씻고 나서는 다시 온천물이 쏟아져 나오는 욕조에서 바디 세척과 휴식을 취하고 나서, 잘 정돈된 예쁜 공원 안에 마련된 서너 개씩의 너른 수영장에서 하루 종일 물놀이를 실컷 즐기면 되기 때문이다. 뜨거운 온천물이 쏟아져 내리는 폭포도 있고, 따듯한 수영장과 차가운 수영장이 함께 놓여있다. 차가운 수영장에서 놀다가 비가 내리고 싸늘함이 느껴지면 따듯한 수영장으로 옮겨간다. 아무 때나 마음 내키는 대로 옮겨 다니면서 무한정 즐기면 된다. 간이 편의점과 식당도 있다. 메뉴가 한계적이기는 하지만 말이다. 여기 저기 편하게 앉거나 누워서 쉴 수 있는 편의시설들이 다양하게 잘 갖추어져 있다. 그야말로 피로 누적된 지친 여행자들에겐 가히 천국이 아닐까 싶어질 정도라고 하겠다.
두 번째 방문이다 보니 우리 병아리들도 전혀 거부감 없이....... ‘머드 스파는 20분 이구요, 자동 세차 목욕탕은 물방울이 아프니까 그냥 통과하구요, 두 번째 욕조에서는 흙탕물만 어느 정도 빠지면 그냥 수영장으로 빨리 가는 게 좋겠어요. 할머니는 폭포로 가서 물방망이 마사지를 받고요, 저는 뛰어가서 튜브부터 가져올래요.’ 라고 다음 행동을 미리 예견해 계획을 세워 둘 정도였으니 말이다.
정말로 잘들 논다. 본전을 뽑고도 충분히 뽑고 남았을 정도로 잘 논다.
언제 어디를 가던 수영장만 있으면 병아리들은 충분히 행복해 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런 온천과 머드 스파를 할 수 있는 휴양시설이 포르가나 사원 부근으로 여러 개 운영되고 있다. 아마도 그 중에서 한국 여행자들에게 가장 많이 알려져 있고, 해외여행자들이 가장 많이 찾는 곳이 바로 여기 탑바 머드스파 온천이 아닐까 싶다.
더하여, 시내의 마사지 숍에서도 머드 사파를 체험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호핑투어(스노쿨링) 프로그램 중에서도 섬에서 머드 스파를 체험하는 프로그램이 포함되기도 한다.
하지만 아무리 그러하기로....... 진짜 온천욕을 체험하고 머드 스파도 체험하고, 온천수와 지하수로 수영과 물놀이를 즐겨볼 수 있는 탑바 지역의 온천체험이야말로 진짜 소중한 여행 체험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우리 병아리들의 표정이 그것을 증명해 보여준다.
다름다운 정원 산책을 하면서 연실 열대 식물 사진을 찍어서 웹싸이트 식물도감에서 확인을 한 후에 엄마에게 카카오 톡으로 사진을 보내주기도 한다.
'윤세리. 머드 스파 좋았니?'
'네. 최고예요. 나중에 또 오고 싶어요.'
우리 가족여행의 마지막 날....... 이날은 온전히 탑바 온천에서 여행의 대미를 나름 멋지게 장식했다고 할 수 있겠다.
즐거웠고, 아름다웠고, 행복했으니 말이다. 알.라.뷰.우.리.병.아.리.들.
탑바온천(머스스파) 나들이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왔다.
시내 투어나 쇼핑 등은 아예 포기를 했던 상황에서 이제부터 당면한 시급한 상황은 오로지 귀국 준비를 잘해서 집으로 무사히 귀국 하는 것이다.
그러자면 일단은 녀석들에게 일찍 저녁을 먹이고 나서 서둘러 잠자리에 들게해서 얼마간이라도 자게끔 해야했다. 그래야 시차까지 더해서 긴 귀국비행시간 동안 좀 편해지지 않겠는가? 서툰 잠으로 피곤에 지치면 짐보따리에다가 잠에 떨어진 지친 녀석들을 어떻게 걸쳐 업고 길을 나설 수가 있겠는가 말이다. 녀석들이 제 스스로 걸어주기만 해도 우리의 구국길은 엄청 수월해 질텐데 말이다.
떠나올 때도 아들이 그점을 걱정했었다. '아빠 여름에 푸켓에서 돌아 올때, 밤비행기 타러 가는데서 부터 세리가 힘들어서 투정부리고 했어요. 유모차라도 가져가셔야 할까봐요.' 라고 했었다. '걱정 마. 아들. 내게도 다 생각이 있어. 잘 해낼 수 있을 거야. 이래도 아직 아빠는 현역이야.'라고 해주었었다. 떠나올 때 아들이 유모차를 준비해 주었는데....... 우리 병아리들이 틀림없이 할아버지를 도와 이런 정도의 어려움은 잘 극복해 낼 수 있을거라고 확신한 나는 공항에서 유모차를 그냥 내차 트렁크에 내려놓고 왔다. 올 때도 밤비행기라 할머니가 걱정했지만 우리 병아리들은 씩씩하게 제발로 걸어서 체크인을 하고 비행기에 올라 탔었다. 나는 당연히 갈 때도 그럴 것이고 아무 걱정이 없다고 자신하고 있었다.
그러자면 저녁을 일찍 먹이고 나서 어느 정도 잠을 자게 해주어야만 하는 것이다.
그런데........
헐!!!!!
베트남의 최고재벌 <빈 그룹>과 <썬 그룹>과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공화국
베트남 나짱 여행을 마무리 하는 시점이니만큼, 이전 이야기에서 끝내지 못한 이야기를 간단하게라도 마쳐야 할 것 같다.
<빈 그룹>과 <썬 그룹>은 그 시작을 같이했다. 그러니까 기업의 뿌리가 같다는 말이다.
<빈 그룹>의 창업자 팜 낫 부옹(Pham Nhat Vuong)과 <썬 그룹>의 창업자 레 비엣 람(Lê Viết Lam)은 친구이자 사업 파트너이자 운명적인 라이벌 이라고 보는 것이 아마도 정확한 표현일 것이다.
외래침략에 저항하고 독립을 쟁취하느라 발전을 미루어야만 했던 베트남은 기아에 허덕이는 경제를 탈바꿈시키기 위하여 장기적인 국가개발정책으로 도이모이(Doi Moi) 라는 ‘베트남 방식의 새마을 운동’을 시작했다. 거기에 더하여 젊은 인재들을 외국에 유학시켜 그 개발정책에 힘을 보태기로 결정했던 것이다. 1986년 시작된 해외 유학정책에 따라 팜 낫 부옹과 레 비엔 람을 비롯한 여러 젊은 인재들이 1987년 (구)소련 모스코바로 국비 장학생 유학을 떠났다. 팜 낫 부옹이 아르바이트 삼아 모스코바 돔 재래시장에 베트남 식당을 열었고, 사업을 확장하여 식자재를 베트남 등지에서 수입해 모스코바 식당에 판매하면서 동업을 시작하면서 유학생 5명이 하나로 뭉치게 되었다. 이것을 <빈 그룹>과 <썬 그룹>의 시작으로 보면 될 것 같다. 한창 사업을 확장하던 시기에 1991년 경제 개방화 물결이 소련에 들이닥쳐서 마침내 소비에트 연방(USSR)이 해체되는 역사적 사건을 만나게 된다. 사회주의를 주도하던 소련이 몰락한 것이다. 소련 연방에 속해있던(식민지) 16개 나라가 떨어져 나가 독립했다. 체로. 폴란드. 우크라이나. 우즈베키스탄 등등의 신생국가가 쏟아져 나온 것이다. 이런 일대 변혁기를 처음 겪어본 이들 베트남 유학생들의 사업은 그만 실패로 끝나게 된다. 그들은 모스코바를 떠나 우크라이나로 자리를 옮겼다. 수도인 키예프에서 식당을 열었으나 실패하였고, 결국 우크라이나의 두 번째 도시(우리나라 부산)인 하루키우로 거주지를 옮겼다. 이들은 본국의 친척과 지인들로부터 거금을 두자 받아서 다시 식당을 열고 식자재 납품 회사를 차렸다. 나아가 수입에 의존하던 식자재들을 자체 공장을 만들어 생산하기 시작하면서 회사 이름을 (Mivina) 라고 했는데, 이곳에서 라면을 비롯한 즉석식품들을 생산하면서부터 그만 대박을 치고 말았다. 100개의 공장을 세웠고 연 매출 1억불을 달성하는 그야말로 동유럽 최고의 식품재벌로 성장했던 것이다.
롯데 그룹이 한국 경제에서 일정 지분을 차지하게 되자 극히 일부의 학자와 소비자들이 민족주의를 앞세워 ‘롯데가 한국회사냐 일본회사냐’를 따지던 사태가 있었다. ‘소비는 오로지 한국인들이 담당하고 있는데, 그 기업 이윤이 한국에 보탬이 되는 거냐 일본으로 쏙 빠져나가는 거냐’ 하는 조금은 치졸한 자본주의적 생리를 드러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겨우 독립해서 개발도상국으로 성장을 시작한 우크라이나 국민들 시선에도 이 젊은 베트남 사람들의 기업이 막대한 돈을 벌어서 어디에 쓰느냐가 도마에 오르게 된 것이다.
베트남 출신의 이들 젊은 경영자들 입장에서도 속으로 찔리기는 마찬가지가 아니었을까?
국가가 젊은 인재를 발굴해 베트남의 미래를 위해 쓰기 위하여 장학생으로 선발했고, 국비를 들여서 유학까지 보냈는데, 졸업과 동시에 자본주의 방식의 돈벌이에 빠져서 국가 보다 자신들의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 아니겠는가 말이다. 거기다 돈벌이 시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서서히 사업을 옥죄어 오는 압박에서 벗어나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이들은 세계적인 식품 기업에게 엄청난 금액을 받고 기업을 매각하였다.
그리고 그 돈을 적절히 분배하여 각자가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로 합의하였던 것이다. 그제야 그 돈을 저장하고 확실하게 쓸 수 있는 곳이 고국인 베트남뿐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개발에 박차를 가하던 베트남 경제는 돈이 필요했고, 그들은 이제 헐벗은 유학생이 아니라 각자가 기업 충수라 불릴 수 있는 엄청난 재력을 갖춘 베트남 사업가들이었던 것이다.
자본주의 자유 시장의 특성과 한계를 뼈저리게 경험한 부자 젊은이들과 공산당 일당 독재이면서도 자본주의 자유시장 경제를 추구하는 정치권력과의 만남이라........ 일단 이들끼리 마음만 먹으면 신속하고 과감하게 모든 것을 밀어부칠 수 있는 막강한 권력과 돈의 만남이 되겠지만, 그런 합법적이지 못한 방식에는 항상 불법이 자행되기 마련이고 이는 곧 부패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다낭의 바나힐(Banahill)은 베트남의 치욕이자 처절하도록 가슴이 아픈 식민지 시대의 상처이다. 베트남 중부의 바나나 나무가 빼곡히 숲을 이룬 이 가파르고 높은 언덕은 적도의 열기로 가득한 한여름에도 제법 선선한 달랏이나 사파만큼이나 아주 특별한 지역이었다. 베트남을 식민지배하고 수많은 자원을 약탈하던 프랑스 지배세력의 최고위층들이 베트남의 더위에 치치고 풍토병이 생겨나자 여기 이 바나힐 고원에 휴양지를 짓기로 하면서 개발이 시작되었다. 인부들을 노예처럼 부리고 수많은 코끼리가 공사에 투입되었다가 쓰러져 죽어 나갔다.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은 사람과 코끼리 수도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마침내 ㅍ랑스인들은 이 고원지대에 지금 모습의 관공서와 위락시설을 포함한 작은 도시를 건설했다. 식민지 약탈에서 엄청난 부를 거둔 프랑스인들은 코끼리를 타고 산 정상의 휴양지로 올라갔다. 차차 공무원들이 산 정상에서 내려오지 않고 업무를 처리하고 싶어지면서 관공서와 숙소까지도 옮겨버렸을 정도였다. 문제는 산꼭대기엔 바나나 말고는 아무것도 나는 것이 없다는 데 있었다. 식량을 날라야 했고 우편물과 서류가 올라내려야 했으며, 가장 심각하게는 물을 퍼서 날라야 한다는데 있었다. 식수는 물론 목욕물까지 산 아래 골짜기에서 퍼서 날랐다. 프랑스 공무원 한 가족을 위해서는 적어도 식민지 인부 100명 이상과 코끼리 서너 마리가 있어야만 바나힐에서의 생활이 가능했지 않았겠는가? 극단적으로 생각하자면...... 바나힐에 거주하는 베트남인 전부는 프랑스 지배층의 바나힐 생활을 뒷바라지하기 위한 노예집단 이었다고 할 만하지 싶다. 죽어나간 사람의 수를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런 상황이었으니 베트남 사람들에게 바나힐이라면 정말로 치가 떨리는 치욕이자 쳐다보기도 싫었을 것이다.
베트남 통일 전쟁이 가장 치열하게 벌어진 곳이 여기 중부지방이다. 내전 기간 동안 산 정상의 프랑스인이 만든 휴양시설은 북부해방군(베트콩)들의 거점이자 병원 역할을 했고, 미군은 수시로 비행기를 이용해 이곳에 폭탄 투하를 했다. 전쟁이 끝나고 수십 년이 지나도록 바나힐은 점점 파괴되었고 기억에서 조차 잊혀져갔다.
그랬는데...... 한 젊은이가 폐허로 변한 이 바나힐에 관심을 가졌다. 그가 바로 우크라이나에서 떼 돈을 벌어서 귀국한 레 비엣 람(Lê Viết Lam) 이었다. 람은 부동산 전문 개발회사 <썬 그룹>을 창업하고 정부와 바나힐의 재개발에 대해서 협상을 벌였다. 이 과정에 어떤 이야기가 오갔고, 어떤 부정들이 벌어졌고, 얼마만큼의 뒷돈이 오갔는지는 굳이 알 필요까지는 없어 보인다. 휴양 도시는 폐허로 변했지만 이를 재정비해서 프랑스풍의 도시로 재건한다면 유럽을 동경하는 신세대 여행객들이 꾸준히 찾아들게 될 것이고, 여기에 고급 숙박시설과 놀이시설을 겸한다면 장차 세계적인 휴양도시로 발전하게 될 것이며, 베트남 경제에 크게 기여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부각시켜 주장한 것이었고, 마침내 베트남 정부는 바나힐 개발에 대한 무한정의 개발권을 <썬 그룹>에 움켜 준 것이다. 그것이 바로 지금은 바나힐이다. 그야말로 엄청난 대성공을 거둔 것이다.
그 접근하기조차 힘들었던 산 정상까지 오르내리느라 얼마나 많은 사람과 코끼리들이 지쳐 쓰러지고 낭떠러지로 떨어져 죽었었는가 말이다. <썬 그룹>은 베트남 최초이나 동남아 최고의 케이블카를 설치하였고, 이 케이블카만으로도 이 부동산 개발 사업은 온 세계의 엄청난 관심을 받기에 이미 충분하였다.
그러나, 이 역시나 허가 과정과 개발 과정에서 실로 엄청난 부정이 자행되었다. 케이블카 성치 공사 과정에서 <썬 그룹>은 바나힐 외곽지역까지 전부를 엄격하게 통제했다. 개발 허가권을 앞세워 무차별 산림 환경을 파괴하면서 길을 만들었고, 광활한 국가 소유의 임야를 마구 파헤쳤다. 그러면서도 더 넒은 지역을 뺑 돌려 철조망을 치고 사유화 해 버렸다. 철조망 안쪽의 민간 거주 지역에 사건 사고가 생겨 출동한 경찰을 가로 막았다. 바나힐 개발 지역 안쪽의 자원보호와 실태 조사를 위한 산림청 직원의 탐방까지 가로 막았다. 미런 무법적 행태는 곧바로 새로운 사회문제로 대두되기 시작했다. 돈을 가진 부자들의 횡포와 여기에 달라붙어서 뇌물을 받기에 혈안이 된 공산당을 비판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결국, 경찰이나 산림원의 방문 시에는 <썬 그룹>의 직원이 반드시 동행하며, 드러난 결과를 공표함에 있어서는 반드시 <썬 그룹>과 협의한 결과에 따른다는 방식으로 귀결되고 말았는데........ 이게 어디 사회주의나 민주주의에서 가당키나 한 일이겠는가? 봉건시대에서 가능한 일이지...... 재벌이 옛날의 군왕처럼 무소불위의 권력자로 변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바나힐에서의 성공을 발판으로 <썬 그룹>은 사파(Sapa)와 푸꾸억(Phú Quốc) 등의 베트남의 천혜의 자연 지역을 찾아내 썬월드(Sun World)라는 테마파크를 건설해 새로운 시대의 베트남 관광 산업을 이끌어 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이처럼 (바나힐)의 성공은 모든 부자들에게 부동산 개발의 꿈을 불어 넣었다.
애초 우크라이나 사업의 창시자였던 <빈 그룹>의 팜 낫 부옹(Pham Nhat Vuong)은 히르키우에 머물면서 베트남 남부에 해당하는 나짱(nha trang)에서 라면과 같은 즉석식품 공장을 지어서 사업을 확장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오랜 시간 동업자이자 라이벌 이었던 친구 람의 <썬 그룹>을 남들과는 다른 시선으로 지켜보았을 것이다.
부옹 역시나 제조업 보다는 부동산 사업이 훨씬 미래지향적이고 크게 이익이 남는 장사라는데 동의할 수밖에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하여 그의 개발 연구실 산하에 부서를 신설하고 박차를 가해 뛰어든 첫 사업이 바로....... 나장 앞바다에 떠있는 대나무만 가득한 ‘혼째 섬’을 개발하는 프로젝트에 뛰어든 것이다. 나짱 앞바다에 수많은 섬이 있는데 그 중에서 혼째섬은 가장 크고 넓은 비교적 지척에 가까운 섬이다. 그는 이 섬에 현대적인 최고급 리조트를 건설하고 놀이시설 테마파크를 세워서 바나힐을 능가하는 베트남을 대표하는 신세계를 건설하겠다는 야망을 불태웠던 것이다. 최고의 걸림돌은 그 시설에 접근하는 방식이 문제였다. 하여 그는 혼째섬에 방파제를 건설해 부두를 만들었고, 본토 해안에 하버 개발에 나섰다. 그리고 쾌속선을 도입하여 인부와 시설 자재를 실어 날랐다. 더불어 하버와 섬을 연결하는 케이블카를 건설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시나 당시에는 불가능에 가까운 최고 최대의 시설이었다. 차후에 이는 다시 <썬 그룹>이 푸꾸옥을 개발하면서 당시로서 세계 최대의 길 케이블카를 건설하는 경쟁구도로 이어지게 되지만 말이다.
2006년 베트남을 발칵 뒤집는 엄청난 사건이 벌어졌다.
나짱 하버에서 4km 떨어진 혼째 섬(빈펄 랜드 건설현장)의 케이블카 정류장 건물의 한축이 그대로 허물어져 버린 것이다. 쉽게 말하자면 부실공사였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현장에 대해 알고 있는 베트남 사람들이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있었다. <빈 그룹>이 미래의 사활을 걸고 추진하고 있는 이 사업에 대해 공무원들은 물론 언론사와 일반 국민들까지 거의 모르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허가를 내준 최고위층 정치권력과 가진게 돈 밖에 없는 재벌 사이에서 벌어진 비밀 프로젝트였다고나 할까? 온 세상이 쉬쉬하면서 이 거대한 사업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기업과 정치권력의 타협과 부패’에 대해서 꾸준히 조사하고 여론에 알려오던 한 신문기자에 의해서 이 놀라운 뜻밖의 사건이 시작되었고, 그가 보도를 한 다음날 모든 베트남 언론이 대서특필 하고 나선 것이다.
다음날 <빈 그룹>에서 공식발표가 나왔는데......... 케이블카 터미널 붕괴에 따른 해명이 아니라 ‘법적 대응을 할 것이며, 모조리 감옥에 잡아넣겠다’는 협박성 기자회견이었던 것이다. 실제로 일부 언론인이 구속되는 지경에 이르렀다. 아울러 모든 언론과 매스컴에서 기사가 삭제되기 시작했으며, 더 이상의 취재와 보도가 금지되는 지경에 이르고 말았다.
거듭거듭 말하지만, 이런 사태가 가능한 세상은........ ‘공산당 일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 세상’에서만 가능한 일이라는 사실이다.
재벌과 부패한 고위층은 그렇게 강압을 가했지만....... 베트남이라는 사회는 이미 급변하고 있었다. 자유 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물을 온 국민이 이미 먹은 만큼 먹었더라는 사실이었다. 공산당에 의해서 삼엄한 통제는 예전처럼 가능하다고 하겠지만........ 그 현장에 시간을 투자한 노동자와 물자들 외상의 댄 중소사업가와 베트남 국내 주식시장은 물론 국제 증권시장에서 하나하나의 사건에 따라 득락이 벌어지고, 거기에서 파생되는 금전적 규모가 상상을 초월한다는 사실이다. 전 재산을 빈 그룹에 투자를 했는데 이런 사건이 정당하게 해명이 되지 않고 덮으려 애쓴다고 해서 해결이 날 문제가 아니라는데 핵심이 있는 것이다. 국민 대다수가 점점 재벌을 부패의 온상으로 보기 시작하고, 공산당을 재벌에 기생하는 타락한 집단으로 인식하면 할수록 ‘선택받은 소수의 공산당에 의한 사회주의 이상 국가 건설’은 허상이 되어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대로 넘어가자니........ 점점 스스로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꼴이 아니겠는가?
국민들의 기억엔 아직도 수도 하노이에 재벌 사옥을 짓다가 부정과 부패의 말로가 어떻게 퍼져나가는지 생생하고 기억되고 있던 시점에 발생한 사건이었으니 말이다.
공산당 최고 지도부와 빈 그룹 사이에서 은밀하게 벌이진 ‘혼째 섬 개발 합의서’가 전부였던 상황에서 섬 전체와 육지의 하버까지 마구 파헤치고 들쑤셨었으니........ 개발 사업 전체가 통째로 무허가 사업이자 부정 허가된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이다. 달리 말한다면 ‘베트남이라는 한 국가의 정치와 경제가 그야말로 개(dog)이요, 시궁창이나 진배없다는 말이다.
정부는 대대적인 조사와 더불어 책임자를 처벌하고 법적 절차에 따라 엄중하게 조치하겠다고 나왔다. 빈 그룹은 자체 조사는 물론 당사자 처벌과 환경훼손 최소와 절차 준수와 정부의 모든 조치를 수용하겠다고 발표했다. 짝짜꿍을 좀 더 조심해서 차근차근 진행하겠다는 합의이자 다짐이라고 보면 되지 않을까?
<빈 그룹>은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었을까?
그룹의 이름을 바꾼 것이다.
‘빈펄 랜드’가 혼자서 이 모든 책임을 감당하기엔 국민들의 정서가 이미 도를 넘어서 부정적으로 생각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 자칫 공산당까지 연루 사실로 이어지면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무너질지도 모르는 것이다. 사회주의 공화국 이념이 무너지게 되면....... ‘소수의 공산당 특권’도 모두 물거품으로 사라지게 되는 것이다.
팜 낫 부옹(Pham Nhat Vuong) 일개인이 창업하고 소유한 <빈 그룹>을 국제적으로 확장 상장하여 더 많은 외부 자본을 끌어들이면서도 자신의 지배권만 확보할 수 있다면, 이제 국민의 여론은 부옹의 부정부패와 재산축적에서 벗어나, 베트남 국가 경제의 차원에서 손익을 따져야 하는 새로운 국면으로 전환되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제부턴 이런 재벌의 행태를 국익차원에서 쉬쉬하고 감춰주어야지 드러나 봤자 국가와 국민의 차원에서 별로 이익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민의 애국심을 볼모로 삼기 시작한 것이다.
<빈 그룹>은 빈 펄 랜드를 빈 원더스로 개병하면서 별도의 법인 기업으로 만들었고, 리조트 사업도 별도로 만들었고, 케이블카와 파구공원 내의 놀이시설과 사업시설을 관리하는 또 하나의 별도 기업을 만들었다. 이렇게 별도 기업의 미래를 걸어놓고 끊임없이 해외자본을 마구 끌어들였으며...... 그 자금으로 푸꾸옥 섬의 빈펄 랜드를 만들었고, 그런 방식으로 문어발식 확장을 해 나간 것이다. 국가 공산당의 비호와 배려 속에서 말이다. 언제나처럼 대가 지불은 엄청난 돈으로 말이다.
이런 모든 개발 사업과 인허가 과정에 실무를 담당하는 공무원(공산당 간부)에게 우리나라 유명 연예인이나 기업가들이나 산다는 서울 강남의 롯데 캐슬을 한 채씩 분양해 준다고 치면......... 대한민국에서도 안 될 일이 무엇이 있겠는가? 그런데 우리나라는 일당 독재가 아니어서 최소한 양당이면 한 채가 아니라 최소한 두 채씩 줘야 한다면........ 좀 계산기를 다르게 열심히 두드려 봐야 하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그랬음에도 나짱의 빈원더스 테마파크 공원과 리조트 사업은 건설되었고 호황을 누리고 있다. 그 여세를 몰아 정치와 경제의 합작으로 푸꾸옥 개발에도 박차를 가하고 있다. 바로 겉만 번지르르한 푸꾸옥 경제특구 말이다. 아는 사람만 안다. 그 내면을.....
그뿐이 아니었다.
2002년 우크라이나 하리코프 시의 바라바코바 재래시장에서 장사를 하는 약 4.000의 시민들이 고발장을 작성하여 <빈 그룹>의 팜 낫 부옹(Pham Nhat Vuong)과 <썬 그룹>의 르 비엣 람(Le Viet Lam)을 베트남 애국위원회에 정식으로 고소했다.
이들이 우크라이나 하리코프시에서 사업을 벌여 재벌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모임(상인 조합)을 결성하고, 공공사업(새마을 금고)을 벌이면서 베트남인과 아시아인들을 포섭 가담시켜서 정부의 주자를 이끌어 내는데 이용 내지는 동업자로 참여시켜서 엄청난 부를 챙겼으면서도, 그 얻어진 부를 자신들만의 사유재산으로 둔갑시켜 부를 취득하는 과정에서 법을 어겼으며, 매각해 자신들이 소유함으로써 수천 명 회원 회원들의 재산을 강탈하고 착취해 도망쳤다고 고소장에 기록했다.
이런 사태가 끊임없이 반복되는 사태 속에서 가족 중 팜 낫 부(Pham Nhat Vu)가 뇌물 공여 혐으로 체포 구속되었다. 가족들의 구태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온갖 부정을 저지르면서 ‘돈이면 다 해결 된다’라는 부류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 돈을 받고 모든 것을 해결해 주는 부패한 절대 권력이 버젓이 존재 한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그것이 지금 베트남의 엄연한 민낯인 것이다.
베트남은 경제적인 롤 모델로 ’대만민국 경제‘를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이 그렇게 요원해 보이지는 않는다.
대한민국 경제에는 남다르게 헌신한 훌륭한 분들이 많이 있었고, 우여곡절과 아픔은 있었지만 결코 짧지 않은 고난의 민주화 행진이 이었다.
베트남에는 아직 그런 준비가 되어 있지 못하다. 올 곳은 공권력 보다, 국가의 미래야 어떻게 되든 말든 내 주머니부터 채우고 보자는 부패한 절대 권력이 여전히 건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주의 이상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재벌들은 자본주의 사업가들 보다 더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고 인민들의 고른 행복은 안중에도 없다. 그런 와중에 새롭게 티어나 성장하는 젊은 세대들은 인터넷상의 물질만능중의에 현혹됨을 넘어서 이미 중독되고 말았다.
그런 베트남에서 진정한 본격적인 경제성장과 고른 인민의 행복은 결코 그렇게 요원해 보이지 않는........ 어쩌면 거룩한 허상일지도 모르겠다.
베트남에서 부자가 되는 방법은......... 부동산 투자. 주식 투자. 향락적 문화사업. 엔터테인먼트 사업 등이 누구나가 생각하고 추구하는 사업이다. 단기간에 쉽고 빠르게...... 운만 맞으면 가능한 사업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한 국가가 살기 좋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는....... 다양한 분야의 고른 발전이 꼭 필요하다. 이탈리아나 프랑스나 스페인처럼 조상님들의 문화유산으로 살 수 있는 나라가 아니라면....... 농업도 필요하고, 제조와 생산업도 필요하고, 어업도 필요하고, 중화학 공원과 첨단 산업은 물론 써비스업에 이르기까지 고른 발전이 필요하다. 하나는 되고 다른 하나는 수입에 의존하면 된다는 방식은 언제고 엄청난 데미지를 얻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너도나도 다 연예인이 되고 유튜버가 되어서 살고 싶다면....... 도시 청소는 누가하고 쓰레기 처리는 어떻게 하고 분위기 짱나는 카페 서비스는 또 누가 하겠는가 말이다. 이국인 노동자를 들여와 다 처리하겠다고?
그 이후에는 꾸준히 지속적인 성장이 반듯이 필요하다. 급속한 성장 보다는 중단 없는 꾸준한 발전이 중요한 행복 요소인 것이다.
다음에는 그런 사회에 대한 공통의 이해와 관심과 배려가 필요하다. 법률이 복잡하고 법의 판단이 많이 요구되는 사회는 결단코 행복한 이상적인 사회가 되지 못한다. 그만큼 다툼이 많고 끊임없이 사움(재판)이 벌어져야 하고, 그 판단에 따라 삶ㅂ의 질이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법과 주먹 싸움 없이 대화와 타협과 이해로 살아가는 사회가 진정한 문명 선진국인 것이다.
그렇게 따지자면..... 썩 내키지 않는 표현이겠지만, 대한민국은 그런대로 굴러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지만, 베트남은 아직 멀었다는 생각이다. 이제 걸음마를 뗀 정도라고 할까?(지극히 내 주관적인 사사로운 생각과 판단 하에서 내린 결론)
한 국가의 경제가 온통 부동산이나 엔터테인먼트에만 쏠려있다는 것은 실로 엄청난 아킬레스건에 해당한다. 언제 어떤 순간에 그 치명적 약점이 작동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최근의 코로나 사태가 이를 여실히 증명해 보여 주었다.
그리고 몇 사람에 의한 짧은 기간 동안에 이룩한 실로 엄청난 부가 한 국가 경제에 있어서는 그리 반가운 일만도 아닌 것이다. 그렇게 생긴 재화가 전체 국가경제 발전의 마중물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경제에는 이를 이끌어 줄 분야의 원동력(마중물)이 필요하고, 이것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꾸준히 유지되어야만 하는 것이다. 건설회사는 계속 아파트를 짓고 있는데(지어야만 먹고 사는데) 한쪽에서는 미분양이 속출하고 이제 국가가 관여를 해야만 하는 지경에 도달하고 말았다. 인구는 급속하게 줄고 있는데 말이다. 이참에 아예 사회 제도적으로 1인 1 아파트 정책을 펴야하지 않을까 걱정된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 이야기는 애초부터 신화속의 동화 같은 이야기였다.
코로나 사태 기간에 <빈그룹>과 <썬 그룹>의 케이블카는 섰을 정도로 힘겨웠다. 무료 셔틀 버스는 당연하게 멈춰 섰다. 기업과 국가 경제의 새로운 패러다임 생성과 혹시 또 벌어질지도 모르는 코로나 사태 같은 것을 염두에 두고 걱정해야만 하는 세상인 것이다.
여기에는 베트남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라 온 세계가 해당되겠지만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한민국의 저력은 코로나 사태와 유사한 경우가 또 재발되더라고 지구상의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굳건하게 헤쳐나가리라는 자신감이 있다. 하지만 베트남처럼 불균형 적이며 한쪽으로만 치우친 경제와 사회는 고난 앞에서 자칫 무참하게 허물어져 내릴지도 모를 일이다. 자칫 부동산 업계의 파산은 그 나라의 금융시장에 치명적 상처를 남기게 되고, 그것은 곧 개개인의 가정생활 파탄으로 이어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극단적으로 베트남을 (차이나 +1)으로 이해하고 판단하는 사람과 학자들이 있다. 베트남 자립 국가 경제가 아니라 ‘중국의 일부분' 내지는 '중국에 속하는 번외지역’ 정도로 해석하는 경향을 가리킨다.
이를 어떻게 극복하고 꾸준히 성장 발전하는 베트남 자립경제가 될 수 있으려는지....... 그것이 자못 염려되는 것이 사실이지만......... 잘 헤쳐 나갈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내가 앞으로도 거듭거듭 찾아갈........ 나.는.베.트.을.참.좋.아.하.는.사.람.이.니.까.
호텔 창문 밖을 내다보니 비가 오락가락 하는 상황에서도 인파가 무섭게 몰려들고 있다. ‘새해맞이 콘서트’감 곧 막을 올릴 예정인가 보다.
그나저나...... 지금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병아리들의 저녁 문제를 먼저 해결하고 난 후에 서너 시간이라도 잠을 재우는 것이다. 그래야만 밤 열시쯤 깨워서, 어설픈 잠 탓에 좀 투정을 부릴지도 모르겠지만 깨워서 체크아웃을 하고 그랩 택시를 불러서 나짱 공항으로 가야지만 하는 것이다. 택시로 대략 한 40분 걸린다고 예정하면, 새벽 1시 5분 비행스케줄이니까 10시쯤 나서면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체크아웃 후에 타고 갈 미니 밴을 알아볼 까 하고 프런트 데스크로 가면서 밖을 내다보니 밖으로 지나가는 차가 한 대도 보이질 않는다. 심지어 오토바이들도 간간히 지나가는 게 전부다. 그래서 밖을 먼저 내다 보았다.
아뿔싸!!!!!
처음 도착하는 날은 해변 도로의 절반이 바리케이트로 가로막혀 병목 현상이 생겼었다. 사흘 전부터는 도로가 완전 가로막혀 통제되었다. 어제부터는 이차 저지선이 생겼고 경찰이 상주하면서 지키고, 리허설을 참관하려는 인파가 몰려들었었다. 오후에 머드 스파에서 돌아왔을 때도 이차 저지선 그대로 상태였는데, 지금 내려와 보니 호텔에서 약 500m쯤 떨어진 다른 블록의 교차로에 까지 저지선 바리케이트가 확대되어서 우리가 묵고 있는 호텔의 근처까지는 모든 차량의 출입이 통제되고 있다.
‘오늘 밤에 체크아웃하고 비행기 타러 가야 하는데...... 그럼 택시를 어떻게 부르나요?’ 했더니 안내 아가씨 대답이 ‘십분 전부터 주변이 완전 통제되었어요. 걸어서 통제선 밖까지 걸어가는 방법 외에는 달리 다른 방법이 없어요.’ 하는 것이 아닌가?
해외 여행객인 만큼 경찰에게 부탁할 수 없느냐고 했지만, 행사장의 안전 때문에 일제히 완전 통제 외에는 없다고 한다. 앰블런스도 이미 상주해 있고, 경찰차도 곧 대부분 외부로 빼낼 것이라고 한다. 몰려드는 인파가 상상 이상이라는 설명이다.
헐!!!!
이를 어째? 왜 하필 우리에게 이런 일이........
‘할망구야. 그러기에 처음에 하루만 더 연장하자고 했더니만....... 그랬으면 밤새 콘서트 보고 일출보고 내일 편하게 나갈 수 있었을 것을.........’
‘내가 부러 그랬니? 그럼 당신이 잘 알아서 호텔을 저쪽 해변에 잡았어야지. 막판에 정말 해보자는 거여?’
‘내가 언제 해보자 그랬니? 상황이 그렇게 되었다는 이야기지? 암튼 일단 어디가서 저녁부터 해결하고 보자. 내가 다른 방법을 찾아볼게.’
그나저나 나짱에서의 마지막 저녁 한 끼.......... 달랑 한 끼뿐이겠지만, 그것이 우리 병아리들을 먹게 해야 한다는 상황쯤 되면....... 또 복잡해진다. 도대체 뭘 먹어야 하지?
그냥 무조건 쉽게 가자면 이미 두 번이나 다녀왔으면서도 좋았던 리스그릴(Lee’s grill)을 가면 되겠지만, 지금 이 상황과 시간에 택시를 타고 갔다고 오면서 까지 다녀오기에는 좀 멀지 싶다. 간단히 먹고 일단 잠을 좀 재워야 했기 때문이다.
협의 결과 결론은 역시나 ‘자장면’으로 종결지어진다.
그래서 가장 가까운 자장면 집을 검색해 길을 나선다. 맛 집으로 두 군데가 뜨는데....... 그중에 걸어서 갈 만큼 가까운 식당으로 결정해 찾아 나섰다. 한참이나 걸어서 기어코 찾아가기는 했는데........ 아뿔싸!!!!!! 정말 왜이래? 문이 잠겼다. 내부 수리중이라나 뭐라나....... 부랴부랴 다음 집을 검색했는데 여기까지 온 것만큼 또 제법 떨어져 있다. 택시를 잡으려는데 교통 통제 때문인지 택시가 잡히지 않는다. 그랩택시도 마찬가지다.
결국엔....... ‘그냥 한 끼니까 아무데서나 간단하게 먹고, 이다가 공항 가서 뭐라도 해결해 보자.’ 라고 하고 주변을 둘러보는데....... 저만치 한글 간판이 걸린 식당이 보인다. 한국인 가이드가 인솔하는 한 무리 여행객들을 이끌고 막 식당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거 오히려 잘되었네.’ 하면서 따라 들어갔다.
병아리들 입맛을 고려해 간장 찜닭을 시켰는데, 메뉴판에 짬뽕육개장이 보이기에 추가로 주문했다. 다들 배가 고픈 표정들이라 주방 쪽을 계속 살피다가 마침내 주문한 음식이 나왔는데........ 테이블에 놓인 음식을 보자마자 세리고 고개를 가로 젓는다. 아니나 다를까? 태리도 음식 냄새를 맡아 보더니 고개를 흔든다. 무언가 한국에서 먹던 찜닭과 향이 다르다. 베트남 특유의 향신료 탓이겠거니 하는데...... 입맛 까다로운 우리 병아리들에겐 역시나...... 별로다. 다른 무언가라도 시켜주려 하는데....... 마땅한 것이 없다. 할머니가 나서서 쌀밥에 찜닭의 간장맛 국물에 비벼주는 정도로....... 녀석들 그리 녹녹치가 않다.
할머니는 평소만큼 먹었고........ 나머지 전부를 할아버지가 해치우고야 말았다.
‘할아버지한테는 괜찮았는데 말이야?’
호텔로 돌아오는데 주변 풍경은 정말로 장난이 아니다. 화려한 무대 조명과 현란한 전광판에 레이져 쇼가 돌아가고 연실 폭죽이 터진다. 가수들이 그 넓은 무대를 뛰어다니며 노래를 부르고 춤을 추고 귀가 먹먹할 정도로 높은 음량이 해변을 가득 채운다. 아주 이따금씩 나름 익숙한 연주와 한국어 노래가 나온다. k-pop을 누군가 부르는 모양이다.
그렇게 호텔로 돌아와 이제...... 병아리들을 재워야 하겠는데........
도통 잠자리에 들 낌새조차 보이지 않으니 장차 이를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지금 이렇게 쌩쌩하게 버티다가, 정작 공항을 가려는데 잠이 쏟아지기 시작하면....... 배낭에다 큰 캐리어가 세 개이고 미니 캐리어가 두 개가 더 있는 상황에서....... 졸리기 시작하는 병아리가 두 마리쯤 되면........... 택시나 미니 밴이 호텔 앞에서 기다려 줘도 힘들 상황에서 교통 통제로 다음 블록 교차로까지 가야하는 상황이고 보면.........
또 헐!!!!!
이를 도대체 어쩌지?
제발 잠 좀 자주라. 할아버지 부탁이야. 제발......
할머니가 그렇게 설명을 하고........
할아버지가 그렇게 통 사정을 했지만........
‘우리 잠 안자도 다 잘 해낼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시라니까요?’
끝내 쪽잠을 거부하고 할머니를 따라 저희들 짐을 하나씩 하나씩 찾아다 손수 싼다.
도대체 이 녀석들을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정말 너희들 누굴 닮아서 이러니?’ 라고 하고 싶지만........
그냥 이렇게 된 것 어쩌겠니? 짐 싸다말고 세리 데리고 마트에 가서 아이스크림도 사오고 캔 맥주도 사오고......... 캐 세라 세라 왔 윌비 윌비..........
대신 예정보다 30분 정도를 앞당겨 체크아웃 준비를 한다.
그런데 정말로 신통방통 귀여움 덩어리 우리 병아리들....... 제 옷을 스스로 챙겨 입고 제 짐들을 스스로 챙겨서 미니 배낭을 메고 캐리어를 손수 끌고 보부도 당당하게 엘레베이터로 향하는 것이 아닌가?
‘오!!!!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분이시여. 땡큐입니다. 댕큐여유. 우리 병아리들 그새 다 컸네요. 할아버진 이제 아무런 걱정이 없어요.’ 라고 한 것 까지는 좋았는데...... 없긴?
호텔 밖이 당장 저렇게 전쟁터를 방불케 할 정도로 난리통인 판에 다음 블록 교차로까지 이 커다란 짐들과 어린 병아리들을 어찌 몰고 거기까지 무사히 간단 말인가? 그리고 그 북새통 틈에서 어떻게 그랩 택시를 부르고 기다렸다 탈 수 있단 말인가? 당장 이곳을 탈출할 고민에 앞이 캄캄해지는 판에 말이다.
열쇠를 건네고 체크아웃을 요청했다. 관리 직원이 우리가 사용한 객실을 이상이 없나 확인하는 동안 기다리고 있는데 야간 근무 책임자가 다가오더니 상황을 물어온다. 그래서 걱정 꺼리를 이야기하자 무전기로 사람들을 불러온다. 건장한 남자 세 명이 다가와 우리의 짐을 도로까지 내려주더니 한 명은 올라가고 두 명이서 캐리어를 나누어 끌고 우리를 직접 다음 교차로까지 이끌어 준다. ‘세상에 이처럼 고마울 데가.........’ 큰 배낭을 멘 채 병아리들을 양손에 꼭 쥐고 뒤를 따라간다. 할머니도 죽기 살기로 인파 숲을 헤치고 따라온다. 여전히 콘서트 장으로 몰려가는 인파와 집으로 돌아가는 인파로 그야말로 난장판이 따로 없다. 병아들 안전이 우선이고, 짐도 지켜야하고, 소매치기 조심도 해야 한다. 땀이 흐르기 시작하고 긴장감이 극도로 솟아오른다. 바리케이트가 쳐져 교통이 통제되는 다음 교차로는 그야말로 아비규환 같았다. 호텔 직원들은 계속 프런트 매니저랑 뭔가 교신을 계속했다.
그러더니 프런트 맨이 아는 택시를 불러준다고 하는데 괜찮냐고 물어왔다. 당장은 택시비를 두 배로 준다 해도 그래야함 할 것 같은 상황이 아니겠는가? 그러라고 했다. 5분 정도 걸린다고 했고 잠시 후에 그 택시가 우리를 찾아 왔다. 짐을 트렁크에 싣고 할머니랑 병아리를 뒷자석에 태우고 차에 오르기 전에 감사 인사를 전하려는데 ‘저희 호텔을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일 년에 겨우 한두 번 벌어지는 행사로 이처럼 힘들어지게 해서 미안합니다. 호텔 입장에서는 나름 노력한다고 했는데 부디 무사히 돌아가셔서 나쁜 기억이 아니었으면 좋겠습니다. 택시비는 우버에서 평균적으로 검색하면 나오는 ***동에 약속해 놓았으니 그 금액만 지불하시면 될 것입니다. 무사히 귀국하시길 바라겠습니다.’라고 하나하나 친절하게 설명까지 해 주는 감동적인 배려를 받았다. 별도의 팁을 주려 했지만 이 마저도 거절했다.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덕분에 행복한 여행이었습니다. 다시 올 기회가 생긴다면 꼭 여러분을 다시 찾아가겠습니다.’ 라는 인사를 전하며 작별했다.
그날..... 나짱 롯지 호텔의 친절하고 배려는 아마도 내가 여행을 계속하는 한 결코 잊지 못할 것이다. 정말로 특별하고 고마운 경험이었다.
공항에 도착하고 출국 수속과 함께 짐을 부치고....... 탑승을 기다리던 중에 공항이 떠나가라고 커다란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해피 뉴 이어.’
2025년이 새롭게 시작된 것이다.
비행기에 오르기까지....... 워낙 사람이 많아서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고 했건만....... 우리 병아리들 꿋꿋하게 할머니 할아버지 손잡고 걸어 다니면서 여권을 제시하고 땡큐를 외치면서 제발로 걸어서 스스로 다 통과했다.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 할아버지의 심정은...... 이건 정말로 아는 사람만 안다.
‘아들. 아무리 너희의 자식이지만 말야......... 다 컸다. 할아버지 옆에 있을 때는 적어도 네가 그 나이 때 보다 훨씬 의젓하단다. 너도 그것 까지는 모를 거야. 맨날 어린 꼬맹이로만 보이지? 아빠가 호언장담 했잖아. 우리 병아리들 이미 다 커서 유모차도 필요 없고 이젠 다 스스로 잘 해나갈 것이라고 말이야. 자칫 잘못되면 모두 옴팡지게 생고생 할 거라고 걱정했겠지만........ 아빤 지금 너하고 다니는 것 보다 훨씬 더 편해. 너도 나중에 할아버지가 되어 보면 그땐 저절로 알게 될 거야. 사랑하는 우리 병아리들은 벌써 다 자랐고 할아버지는 아직 현역이야. 그럼 알겠지? 앞으로도 절대 아무 걱정하지 마.’
다음날 아침에 우리는 무사히 인천 공항에 도착했다.
이제 녀석들을 인계하러 이천으로 향할 것이고......... 에미 애비도 어디에선가 새해맞이 일출 여행을 떠났다가 현지에서 출발하려고 한단다. 하여 결국 이천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우리가족 전부가 모이는 가족 모임이 성사되었다.
올라가서 아침준비를 한다는데......... 겡구야. 짱구야. 너희는 이제 짐 들고 집에 올라가면 여행을 마치는 게 되지만........ 우리는 아직도 한 시간 이상을 달려서 집에 가서 혹시 명절이라 주차공간이 없으면 아파트 밖 언덕길에 세워두고 짐을 하나씩 옮겨서 집에 들어가야만 여행이 끝나는 것이거든? 아지직 우리는 한참 멀었어. 갈 길이 한참이나 남았다고........
‘겡구야. 어서 병아리들 데리고 올라가서 씻기고 옷 갈아입히고 뭐라도 먹이렴. 새해고 뭐고...... 그딴 것은 차차 나중에 하자. 알았지. 우리도 일단은 우리 집에 가고 싶어.’
그렇게 해서 어쩌구 저쩌구 일단 지하주차장에서 이대로 병아리 인수인계식을 끝내고 헤어지려는데........ 아들이 불쑥.......
‘엄마. 그럼 다음 여행은 언제야? 아무 때나 그냥 편하게 생각하시고 이야기 하면 애들 은 아무 때라도 내가 데려다 줄게.’
‘야. 겨우 이제 막 도착하는데 벌써 또 언제 데려갈 것이냐고?’
‘엄마. 신경 좀 써봐. 엄마 손녀들이 좋아한다는데.’
‘아빠가 돈을 잘 벌어와야지? 어디든 또 가든지 말든지 하지? 그넘의 이탈리아는 언제 갈려나?’
‘이 사람이 정말? 거기서 내가 왜 나와?’
‘아빠. 손녀들 또 데리고 가실거지요?’
‘아들. 아예 태리 세리 그냥 충주로 전학 시켜. 교육은 우리가 알아서 할 테니 애들이 보고 싶으면 너희들이 왔다 갔다 하렴.’
‘에이. 아빠. 아무리 그래도 애들은 엄마 아빠하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시면서?’
그러자 손이 크고 통이 큰 할머니가 작금의 이 모든 상황을 일갈에 종결한다.
‘방학 끝나기 전엔 어디든 한 번 더 가야하지 않겠어?’
헐!!!!!
이게 우리 가족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더 무얼 어쩌고 더 무얼 바라겠는가?
사랑하는 우리 소중한 병아리들아. 할아버진 아직 현역이야. 맘껏 기대도 된단다. 알지?????
--- 찾아 주시고 긴 장문의 글을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곧 다음 이야기를 시작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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