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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칼링크 트래킹(Calanque Trekking) - 마르세유 루트를 찾다.

by 피안재 2023. 12. 31.

 

 

 

 

‘설혹 파리(Paris)를 보았다 해도 아직 카시스(Cassis)를 보지 못했다면, 그것은 곧 프랑스에 대해 본 것이 하나도 없다는 뜻이다.’

 

프레드릭 미스트랄(Frederic Mistral)이 남긴 이 문구는 너무나도 유명한 말이다.

그만큼 카시스는 프로방스의 숨겨진 보석이며 프랑스 남부 여행의 백미 라는 의미를 모든 여행자들에게 공개 선포한 것이라고 적어도 나는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다.

우리에겐 다소 생소한 이름이지만, 프레드릭 미스트랄 하면 1904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예술과 문화 방면의 자부심이기도 하다. 그의 이름인 미스트랄(Mistrai)은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겨울이면 불어내리는 차가운 계절풍을 가리킨다. 그렇게 토속적 냄새가 가득한 이름을 가진 그는 평생을 역시나 남프랑스 프로방스 지방의 토속 언어(사투리)인 오크어 연구에 평생을 바친 언어학자이자 문학가였다.

1901년 노벨상이 처음 제정되어 엄청난 관심과 화제 속에 각 분야별 수상자가 결정되었을 때, 제1회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사람이 바로 프랑스의 시인 쉴리 프리돔(Rene Francois Armand Prudhomme) 이었으니, 이것은 곧바로 문학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무한한 자부심으로 자리 잡았던 것이다. 4년 만에 다시 열린 제2회 노벨 문학상에 대한 관심은 1회 수상자를 배출한 프랑스는 물론 영국, 미국, 독일 등 나름 문학에 대한 자부심으로 똘똘 뭉친 강대국들의 한 판 경연장이 되었다. 그런데 아주 놀랍게도........ 제2회 노벨 문학상 수상자 또한 프랑스의 언어학자인 프레드릭 미스트랄에게 돌아갔던 것이다. 세계는 경악했고 미스트랄이 평생을 바쳐 연구하고 있는 오크어(프로방스 사투리)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이 사태를 프랑스인들은 단테에 비유하기도 한다. 이탈리아 사람인 단테는 당연히 로마제국의 후예였으며, 로마의 언어는 라틴어였다. 그러니까 로마의 영향력이 펼쳐진 온 유럽은 물론 소아시아와 아프리카까지 라틴어가 만국공통어였던 셈이다. 하지만 피렌체 출신의 단테는 대표작 <신곡>을 라틴어가 아닌 피렌체 지역 사투리(현재의 이탈리아어)로 작품을 썼다. ,신곡>은 공전의 히트를 쳤고, 모든 유럽 사람들의 생활은 <신곡> 이야기로 시작해서 <신곡>이야기가 끝나면 잠자리에 드는 예상치 못한 지경에 이르렀다. 단테는 처음 출간에서 전제하기를 <신곡>은 오로지 피렌체 지방언어(사투리)로만 출판해야 한다는 조항을 명확하게 적어 놓았다. <신곡>의 스토리를 일상에 반영하고 대화에 삽입하지 못한다면 아무리 권세를 지녔고 부자일지라고 결코 지식인이 될 수 없었고 대중 앞에 나설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신곡>을 읽고 또 읽고 외워야만 지식인이 되고 남들 앞에 나설 수가 있게 되었다. 세상은 라틴어 세상이었는데 지식인이 되고 대중 앞에 나서기 위해서는 사투리로 된 <신곡>을 읽고 외우고 실생활에 사용해야만 하는 아주 특별한 세계가 펼쳐 진 것이다. 삽시간에 피렌체 사람들 몸값이 천정부지로 솟아오르기 시작했다. 유럽 전역에서 피렌체어를 일고 쓸 수 있는 사람들을 개인 가정교사로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 오래지 않아서 이탈리아의 모든 사람들이 라틴어와는 별도로 피렌체어를 쓰고 읽기 시작했다. 결국 로마제국 영향권의 나라들에서 시작된 라틴어는 스페인. 북아프리카. 남미의 아르헨티나와 멕시코를 비롯한 여러 국가들에서 모국어로 사용되게 되었지만, 정작 로마제국의 심장이었던 이탈리아는 <신곡> 사태를 겪은 이후로 피렌체 지방의 사투리 언어를 이탈리아어로 공식선포하고 사용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라틴어와 이탈리아어는 뿌리는 같지만 여러 면에서 제법 다르다. 우리가 완전한 제주도 방언을 이해하기 어려운 것만큼 말이다.

이와 비슷할 정도로 프레드릭 미스트랄에 의해서 프로방스의 사트리인 오크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된 것은 사실이지만....... 머지않아 그대로 잊혀 져 가고 말았다. 미스트랄이 단테만큼 유명하지 않았고, 그에게 <신곡>에 견줄만한 대작이 없었던 탓이리라.

하지만 그래도 괜찮아.

미스트랄에게는 단테만은 못할지 몰라도 프로방스의 토속미로 가득한, 또는 오크어 냄새가 은근하게 풍겨 나오는 40년 지기 오랜 친구가 있기 때문이다. 그와 함께 늘 오크어를 이야기하고 함께 연구한 친구가 바로 <별>을 쓴 알퐁스 도데(Alphonse Daudet)였으니 말이다.

미스트랄이 카시스에 대해 저리도 극찬을 한 것을 보자면....... 그가 카시스의 모든 것을 보고 이해할 정도로 이곳에 충분히 머물렀었다는 뜻이 되며, 그렇게 따진다면 혹....... 지금 저 모래사장에 훌러덩 옷을 벗고 드러누워 있는 사람이 미스트랄이고 바다에서 겨울 수영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알퐁스 도데............?

헐!!!!!!!!

 

 

 

 

 

 

지금 카시스의 중심은 앙증맞도록 작은 항구지역이다. 부유한 사람들이 소유한 요트와 고기잡이 어부들의 어선들이 방파제 안쪽 마리나에 길게 늘어서 정박해 있다. 하지만 그것들은 소수이고 카시스 항구를 대표하는 것은 역시나 칼링크 바다투어를 위해 번질나게 드나들고 있는 관광선이 압도적으로 많다. 이 작고 예쁘고 평화로운 항구는 거의 대부분이 노천카페와 레스토랑으로 채워져 있다. 어디를 가나 여유롭게 휴식을 취하며 음료와 음식을 즐기고 있는 여행자들로 가득하다. 그 외에는 기념품점과 여행안내소 겸 칼링크 뱃길 투어 사무실과 곳곳에 빵집도 눈에 띈다. 하지만 이 항구의 한 블록 골목 안쪽으로만 들어가 보면, 그곳은 영판 다른 현지인들의 생활공간이 드러난다. 앙증맞을 정도로 작고 아담한 호텔들과 현지인 레스토랑과 동네슈퍼들이 여기저기 박혀있다. 확연하게 한 블록을 통해 여행자 거리와 현지인 거리의 차이가 엄청나게 다르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다. 그곳에서 마주치는 친절한 현지인들의 모습은 상당히 검소하고 여유롭다.

카시스는 이렇게 여행자들로 붐비는 항구지역과 칼링크 지역으로 나뉜다고 볼 수 있지만...... 사실은 좀 다르다.

카시스(Cassis)의 중심은 지금 우리가 내려다보고 있는 콜튼 비치가 바로 카시스의 상징이자 핵심 중심이다. 눈부신 백사장을 에워싸고 있는 주변의 작은 지역이 사실은 카시스의 시작이었고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콜튼 비치 옆구리에는 방파제 저만치 파란 등대가 설치되어 있자만 가만히 살펴보면 모래사장을 둘러싸고 있는 벼랑과 방파제와 등대까지가 모두 바위를 다듬어 설치한 인공이란 것을 알아차릴 수가 있다. 해변으로 내려가는 계단과 주변의 주택들 사이의 골목길까지가 모두 육중한 무게와 규모의 잘 다듬어진 바위덩어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다시 말하자면 기원전 1세기경에 이곳은 로마에 의해서 세워진 행궁(별장)을 위한 해양 기지와 요새를 위한 작은 성채였던 곳이다. 지중해 연안을 순시하던 로마제국의 황제가 이곳 인근을 지나가다가 부득이 체류해야만 하는 지점을 찾아서 휴식을 취하고 안전을 확보하기 위하여 설치한 별장요새로 카시스는 시작되었다. 황제 일행의 운항 안전을 위해 등대와 접안시설이 갖추어졌고, 임시 궁전이 설치되었으며, 이곳이 점차 알려져 귀족들과 부자들의 휴양지로 퍼져나가게 되자 마침내 이 작은 해안마을 카시스에 로마는 아레나(원형경기장)를 짓게까지 되었다. 그 지역이 바로 여기 콜튼 비치 주변인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 숨겨진 부자들의 별장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대부분의 지중해 연안 도시들은 하나의 전형적인 공식과도 같은 역사를 내재하고 있는데, 그런 면에서 볼 때 여기 카시스는 조금 다른 이력을 가지고 있다. 이제까지 드러난 역사에서만 보자면 말이다.

지중해 연안의 해안도시 절대다수의 역사는 가장 먼저........ 페니키아인이 등장한다. 지중해 곳곳을 샅샅이 관찰하고 누비면서 해상교역에 매진하던 페니키아 상인들은 실용성과 효율성을 따지며 지중해 곳곳에 자신들의 장사를 위한 거점을 마련해 나갔다. 배를 건조하고 수리하는 대도시를 세우는가 하면, 수많은 교역선들이 드나들 수 있는 항구와 바닷길을 여러 날에 걸쳐 오가면서 잠시 쉬거나 물을 공급하거나 지역적 특색이 있는 물건들을 따로 보관하는 창고를 설치하는 지역으로 나누어 관리를 하며 지중해 전역을 개척해 나갔다. 뒤이어 등장한 그리스인들은 페니키아인들이 개척해 놓은 해양 상권을 중심으로 식민지를 확대해 나가면서 그리스 본토에 맞먹는 대도시를 건설하기 시작했다. 지중해 해안의 마르세유를 포함하여 유명한 대도시들은 거의 대부분 이당시 그리스인들에 의해서 생겨났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이다. 그리스의 쇠퇴에 맞물려 더욱 강력한 해양왕국을 꿈꾸던 카르타고가 지중해 전역을 인수해 지배하기 시작했고, 이어 등장한 로마가 카르타고를 물리치면서 그리스가 이룩해 놓은 해양왕국은 이제 고스란히 로마의 소유가 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카시스의 경우를 살펴보면 기원전 1세기경에 로마에 의해서 콜튼 비치를 중심으로 성채가 세워졌고, 해안 접안 시설과 등대가 설치되었고, 다시 아레나(원형경기장)까지 건설되었다는 사료와 함께 수많은 로마의 유물은 발견되는데, 고대 그리스나 페니키아 유물이 전혀 발견되고 있지 않다는....... 참 특이한 케이스라 하겠다.

 

---- 글 올리는 작업중입니다. 찾아주시고 읽어주셔서 감사드리며,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