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여행 이야기

<멜랑꼴리 오딧세이> 조각의 숲과 회화의 정원을 거닐며.....

by 피안재 2023. 5. 20.

 

 

 

  <밀로의 비너스>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냄과 동시에 이제까지 인류가 가지고 있던 모든 미(美)에 대한 가치판단과 기준이 달라지고 말았다. 양 팔이 잘려나간 어색하면서도 다소 불안정한 모습임에도 불구하고 이제까지의 모든 비너스에 대한 환상을 깨버리고 망각 속으로 쓸어 넣어 버렸다. 그것이 고대 그리스 고전기의 작품인지 헬레니즘 시대의 작품인지 더 이상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밀로의 비너스>는 그 자체로 오로지 <밀로의 비너스>일 뿐이었다.

  포빈(Louis Nicolas Philippe Auguste, comte de Forbin)이 포벨(Louis-François-Sebastien Fauvel)과 퀸시(Antoine-Chrysostome Quatremère de Quincy)를 끌어들이면서 까지 <밀로의 비너스> 출생 기록부를 조작하였고, 몰래 무허가 성형수술을 감행해야만 했던 의도를 실로 무색하게 만들어 버린 것이다. 하지만, 어떻게 보자면 그렇게 속이 뻔히 들여다보이고 들통이 날 해괴망측한 일을 벌이고 출생 기록을 삭제해 버리면서 생겨난 신문을 통한 온갖 의혹 제기와 뜨거운 논쟁과 어떤 호기심과 미스터리에 대한 일종의 묘한 동경이 오히려 양 팔이 없는 불완전한 조각상을 최고의 찬사와 함께 아름다움의 최고 정점으로 끌어올렸는지도 모를 일이다.

  4백년 가까이 지나도록 루브르 박물관의 한쪽 구석에 다른 그림들 사이에 끼어 걸려있는 그림에 관심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림의 제목도 몰랐고 그것이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그림이라는 사실도 몰랐다. 미술품 도둑이 크기가 알맞아(?) 그냥 쉽게 들고 나갈 수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날 그림은 루브르에서 사라졌다. 도난이 벌어지고 나서야 신문에 연일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그린 <라 조콘다(La Gioconda)>가 사라졌다고 기사화 되었다. 이 도난 사건의 핵심은 사실은 <라 조콘다>가 아니었다. <라 조콘다>가 어떤 그림인지 알지도 보지도 못한 사람이 거의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 관여하고 통제하는 최고의 보안 시설이 가동중인 루브르 박물관에서 어떻게 백주대낮에 미술품이 사라질 수 있는 것이냐에 관심의 초점이 모여졌다. 그럼 루브르에서 당시 <라 조콘다>가 가장 귀하고 비싼 등급에 들었느냐 하면 그것도 전혀 아니었다. 그런데 2년 뒤........ 르네상스의 보물창고라 할 수 있는, 미술관의 크기는 그다지 별 볼일이 전혀 없지만 소장 미술품의 가치를 따지자면 세상에서 가히 최고라 해도 무색할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라 조콘다>를 도둑이 몰래 팔려다 우피치의 신고로 경찰에 체포되었다. 결국 그림은 무사히 루브르 돌아왔다. ‘최고 완벽한 보안시설을 갖춘 루브르에서 훔쳐간 그림을 르네상스의 성지와도 같은 우피치에 팔려고 했을 정도라면 잘 모르긴 몰라도 <라 조콘다>가 잘 알려지지 않아서 그렇지 웬만큼 명품이라는 이야기가 성립되는 것이고, 그런 결과로 알아보니 다름아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 아닌가? 그렇다면......’ 이 소문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퍼져나가서 다시 꼬리에 꼬리를 몰고 사람들을 루브르 박물관으로 끌어들이게 되었던 것이다. 우리는 <모나리자>라고 흔히 부르지만, 프랑스 사람들은 여전히 <라 조콘다> 라고 부른다.

  프랑스 식으로 마담 리자는 피렌체의 부유한 은행가 조콘다의 아내 이름이다.

  <모나리자>는 조콘다의 아내를 모델로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작품이다.

  <밀로의 비너스>는 ‘Meander의 Antioch 시민인 Menides의 아들 Alexandros가 만든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상 작품이다. 하지만 세상은 작가 미상으로 기억하고 있다. 이는 이제라도 분명하게 밝혀야만 한다. <밀로의 비너스>는 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가 만들었다.

  프랑스와 루브르 박물관과 포빈은 알렉산드로스의 작품이라는 것을 지워버렸다. 그들은 이 조각상이 고대 그리스 고전 후기의 위대한 조각가 프락시텔레스의 아카데미에서 만들어진 것으로 날조를 했다가 들통이 났다. 출생 기록부를 조작해서 작품의 가치를 더 놓게 만들고, 그것이 프랑스의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영국 위에 올려줄 것이라고 판단해 저지른 인류문화에 대한 패륜적 범죄를 저지른 것이다. 이를 수습하는 것은 있었던 사실을 바탕으로 바로잡는 것이다. 하지만, 훔치고 빼앗고 강탈한 온갖 약탈 문화재를 수북이 쌓아놓고 돈 놀이(입장료 수입)를 일삼는 장물아비들에게서 그런 보편적 양심을 기대한다는 것이 애초부터 무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슬프게도 떨쳐낼 수가 없다.

  <밀로의 비너스>는 누가 소유권자일까?

  메니데스의 아들 알렉산드로스가 밀로스 섬의 신전에 자신의 작품을 그냥 전시해 놓았다가 지금처럼 되었다면...... 그 후손에게 소유권이 있는 것은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그래서 프랑스는 여전히 작자미상으로 만들어 소유권 분쟁에서 빠지려 하는 것일까?

루브르 박물관(프랑스)은 최초 발굴자 요고스에게 정당한 값을 지불하고 합법적으로 구입을 한 것이기에 루브르의 소유가 정당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터키(오스만 투르크)가 국제법상에 무효를 주장하며 반환을 요구하고 있다. 발굴 당시 밀로스 섬은 오스만 투르크의 영토였으며, 당시 오스만 투르크의 법률에 따르자면 문화재나 유적 유물에 대해서는 국가 차원에서 엄격 심사에 따라 구분과 처분을 하게 되어 있으며, 국가의 합법적 심사와 규정을 따르지 않은 발굴과 거래는 불법임으로 무효라는 주장이다. 프랑스가 나서서 불법거래와 불법 밀반출을 했다는 주장이다. 누가 보아도 불법 거래와 밀반출이 틀림없어 보인다. 국제법상 환수가 요원해 보인다. 하지만 문제는...... 터키가 유럽에 속하는 강대국이 아니라는 점이다. 유럽에는 분명하고도 확실하게 어떤 선민의식 같은‘오리지널 유럽의 백인’이라는 그들만의 리그 같은 감성이 실존한다. 터키가 EU에 가입하지 못하는 장벽이 바로 그것이라 하겠다. 터키가 프랑스 보다 훨씬 강대국이 되면 환수가 가능할 것이다. 유럽에 속하지만 최하위 약소국이기에 그리스는 프랑스나 영국에 맨날 징징거리듯이 고대 유물 유적 환수를 주장하지만 강대국 프랑스와 영국은 들은 체도 안한다. 나폴레옹과 히틀러의 전쟁이 끝났을 때 저들끼리는 무조건 돌려주기로 했으면서도 말이다. 하긴, 그리스와 터키가 자기들 유산을 모두 찾아간다고 치면,,,,,,, 루브르 박물관이나 대영박물관은 양계장. 세차장 등으로 전업해야 할 테니 말이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유럽의 백인이 결코 아니다. 소아시아 지역, 그러니까 팔레스타인 지역의 히브리인이다. 생김이나 생활방식이나 환경이 온통 근동의 아랍인인 것이다. 그런 예수그리스도를 가져다가 머리를 염색하고 유럽의 명품으로 옷을 해 입히고 성형수술은 물로 피부 색까지 바꾸어서 유럽의 백인으로 바꾸어 버렸다. 예수의 성화를 보면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 정도만 유럽의 백인 행색을 하고 있고, 주변인들은 모두가 아랍풍이다. 그것이 유럽의 백인들이 가진 가치관이자 선민의식이며 나아가 날조된 자부심으로 승화되었던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를 만든 안티오크의 알렉산드로스는 동쪽 터키 인근의 시리아 지역 출신이었으니, 우월한 백인들께서는 어떻게 해서라도 유럽의 오리지널 백인인 프락시텔레스 아카데미의 작품이라고 우기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그것으로 끝난 게 아니다.

  그리스가 1829년 오랜 독립전쟁의 결과로 터키로부터 독립을 했다. 인류 최대의 문화재 약탈 피해대상국인 그리스는 법률적으로 유네스코의 문화재 보존과 환수에 관해 비슷한 입장을 취한다. 프랑스의 비너스 조각상 반입이 불법 약탈과 밀반출이었으며, 고대 그리스의 소중한 조각상은 그리스 민족의 고유 정서와 전통이 고스란히 스며들어 있다는 주장이다. 유네스코 국제법은 그런 경우 무조건 돌려주거나 최후의 경우 매각을 통해 양도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하지만 생각해 보자. 프랑스가 파산하거나 망하지 않는 상황에서 <모나리자>나 <밀로의 비너스>를 내놓겠는가 말이다.

  거듭 말하지만 그런 기대는....... 인간이 다시 원숭이로 돌아가는 것 보다 어렵다.

  키가 204cm에 가슴둘레가 1백 21cm 이며 허리가 97cm의 결코 작지 않은 체구에 머리는 의외로 작은 <밀로의 비너스>를 내가 지금 최첨단 3D 프린터 기술을 이용해 복제를 한다면 그것이 법률적으로 어떻게 되는지가 갑자기 궁금해진다.

  그것을 내가 혼자 집에다 놓고 보는 것이 아니라 카페에 전시를 한다거나, 아니면 아예 본격적으로 전시공간에 설치해 놓고 입장료 수입을 창출하고자 한다면 어떻게 될까?

  <밀로의 비너스>에 적용되는 저작권은 어떻게 되는 것이지?

  프랑스와 다툼을 벌이는 그리스는 밀로스 섬의 미술관에 루브르에 전시되고 있는 <밀로의 비너스>를 완벽하게 재현한 복제품을 당당하게 전시하고 있다. 물론 입장료를 받고 있다.

  이걸 두고 루브르나 프랑스가 어쩌고저쩌고 하기는 좀 그럴 것 같다. 자칫 긁어 부스럼이 될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소유권을 가지고 버젓이 장사를 하고 있는 루브르박물관과 나에게도 정당한 권리가 있다며 이제 슬슬 장사를 시작하는 밀로스 박물관이 있는데........ 지금 내가 밀로스로 가서 소정의 배상을 제시하고 복제 영업권을 사서 우리 집에 버젓이 복제품을 만들어 갖는다면 어떻게 되는 것이지? 어차피 나선 김에...... 국제법상 소유건 분쟁중인 훌륭한 문화재나 회화작품이 무수히 많을진대...... 그런 방법으로 우리 고장에다 아주 커다란 전시공간을 만들어서 아예 미술관을 하나 차려 놓으면 어떻게 될까?

  한 두 작품이라면 별 볼일 없을 수 있겠으나, 세계적 명품을 백 점이상 똑같이 복제해서 한 장소에 갖추어 놓는다면........ 유럽행 비행기 표를 절약할 수 있게된다. 만지면 안되겠지만....... 코 앞에서 모나리자의 스푸마토 기법을 직접 확인해 볼 수 있는 정도가 허용된다면....... 매리트가 충분하지 않을까?

  루브르에서 <모나리자>를 제대로 볼 수 있는 사람은 큐레이터를 포함해 관리자 몇 명밖에 안 된다. 색채며 질감을 느껴보는 것은 불가능하다. 거기다가 방탄유리가 가로막고 있다. 그런 지금 루브르의 <모나리자>와 진본을 완벽하게 3D 프린터로 재현한 나의 카페에 놓아둔 실물과 똑같은 <모나리자>와 어느 것이 진정한 미술 관람이 될 것인가? 거기에 원본과 짝퉁이 굳이 필요가 있을까? 원본은 미술계를 점령한 자본주의 시장논리가 예술을 금액으로 환산할 때나 필요한 것이 아닐까?

  그래도 원본이 중요하다고?

  그럼 한 마디만 더 부연 설명하겠다.

  당신이 루브르 박물관에서 본 <밀로의 비너스>가 바로 대표적 짝퉁(복제품) 이라고 말이다. 아니 루브르뿐만이 아니라 대영박물관을 포함해 세계 유수의 모든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전시된 고대 그리스 조각 작품 중에서 작은 소품들을 빼고........ 유명한 작품은 거의 대부분이 복제품이다. 달리 말해서 짝퉁인 가짜라는 사실 말이다.

  짝퉁이 아닌 것.......  물론 있다. 아주 약간은.......

  대영박물관의 삼미신과 엘긴 마블의 경우........ 파르테논 신전에서 뜯어내서 훔쳐 온 부조들은 진품이다.

  루브르박물관의 경우..... 내 판단으로는 단 하나........ <샤모트라스 승리의 여신상>만은 진품임이 틀림없다.

 

<Alexander Mikhailovich Golitsyn 왕자 무덤 조형물> (1777). 조각가 디데롯(Diderot) 作.
< 아르테미스 와 암사슴>(Artemis with a doe)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
<삼미신( The Three Graces)> BC 27. 작가미상(17세기 니콜라 코르디에가 머리조각 복원)
<큐피트를 태우고있는 켄타우로스>. 작자미상. 그리스 헬레니즘시대.
고대 그리스 조각 고전 후기의 대표 조각가 리시포스 作 <알렉산더 대왕 두상>으로 로마시대 복제품이다.

 

 

 

 

 

  이전의 여행기 (르네상스 산책)을 통해서 나는 ‘원본이 없는 복사본’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적이 있다. 고대 그리스 조각을 이야기 하려면 여기에 더해서 복제. 리메이크. 레플리카 같은 이야기를 반듯이 다루어야만 한다.

  그런데 이런 작업이 그리 단순하거나 간단한 것이 아니라서........ 정말 살다가 살다가 먹고사는 문제를 떠나 시간적으로 좀 자유로워지게 되면 그때 이렇게 저렇게 미루어 놓았던 소재의 이야기들을 한 번 마음껏 털어내 보려고 한다.

  하여 고대 그리스 조각에 대해서는....... 비너스 조각상에서 고전 전기. 고전 후기. 헬레니즘 시대 등으로 나누어야만 했던 내용을 아주 간략하게 소개하고, <샤모트라스 승리의 여신상> 또한 살짝 들여다보는 것으로 그리스 조각의 숲을 지나가고자 한다.

  고대 그리스 조각의 역사는 대략 두 번의 전쟁을 기준으로 나뉜다고 할 수 있다.(적어도 나는 그런 기준을 삼고있다)

 

 

​                                             << 속성 고대 그리스 미술, 그리고 고대 그리스 조각 >>

 

 

  고대 그리스 미술을 학술적으로는 대략 네 가지 단계로 분류한다.

  기하학적 양식(Geometric Style). 아르카익 양식(Archaic Style). 고전 양식(Classical Style). 그리고 헬레니즘 약식(Hellenistic Style)이다.

  하지만 기하학적 양식과 아르카인 양식의 미술품은 거의 남아있지 않은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회화와 조각조차도 거의 남아있는 것을 찾아보기 힘들 정도이며, 일부 파손된 유물과 조각에서는 고대 이집트의 무덤 유적에서 발견한 것과 같이 얼어붙은 것 같이 경직된 부자연스러운 모습들이 담겨져 있다.

  기원 전 491년 동방의 페르시아 제국이 대군을 이끌고 그리스로 쳐들어 왔다.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는 물론 북아프리카 지역까지 식민지를 건설하고, 직접 통치는 하지 않되 페르시아에 충성을 하고 세금을 바치도록 하는 식민 정책을 활용했다. 세금을 바치지도 않을뿐더러 자꾸만 지중해에서 분쟁을 일삼는 그리스를 정벌하고자 다리우스 황제가 직접 두 차례에 걸쳐 멀고먼 지중해까지 출병하였다.

  아테네의 통치자 페리클레스는 수도 아테네를 완전히 적들에게 넘겨주는 유인 전쟁을 계획했다. 페르시아 대군이 아테네를 정복했고 살인과 약탈과 방화가 이어졌다. 그야말로 아테네는 쑥대밭이 되었다. 페르시아 대군이 승리에 취했을 때,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 군의 배후를 쳤다. 그리스의 위대한 승리로 끝을 맺게 되었지만 아테네는 참혹한 폐허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페리클레스는 이전보다 더욱 크고 화려한 새로운 아테네 도시를 건설해 수호여신 아테네에게 바치기로 하늘에 맹세했다. 아테네의 재건 사업이 벌어졌다. 새로운 도시 위에 거대한 아크로폴리스가 지어졌고 그 핵심이 바로 파르테논 신전인 것이다.

  그리스 문명의 최고 전성기가 바야흐로 도래했던 것이다.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기원 전 480년)에서부터 도시국가들 사이에 내전으로 치닫게 되는 펠레폰네소스 전쟁(432년) 사이의 시기를 ‘그리스 문명의 고전기라고 별도로 구분하게 되었던 것이다.

  소크라테스. 플라톤. 아리스토텔레스가 서양철학의 터를 닦아놓았고, 헤로도투스사 페르시아 전쟁을 세세하게 기록함으로써 비로소 역사가 학문에 편입되었으며, 아이스킬로스와 소포클레스가 그리스 비극을 한 차원 높이 끌어올리면서 문학과 음악에 세련미를 추가하게 되었다.

  역사는 크레타 섬 출신의 다이달로스(Daidalos)를 고대 그리스의 첫 조각가로 적고 있는데, 고전기에 들어 파르테논 신전 건설에서 조각과 부조를 맡은 페이디아스(Phidias)와 <원반 던지는 사람>의 미론(Myron)과 인체의 비례에 대해 연구하고 책을 쓴 폴리클레이토스(Polycleitos)까지 세 사람이 고전기를 대표하는 삼두마차가 되었다.

  아테네 동맹군과 스파르타를 중심으로 하는 펠레폰네소스 동맹 사이의 30년에 걸친 참혹한 내전은 결국 그리스 연맹이 한꺼번에 모두 몰락하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그리스 조각은 더욱 다양해지고 풍부해지는 아이러니를 낳게 된다. 전쟁은 그리스 전역을 초토화로 만들었고 청동 조각상들을 녹여 창이나 화살촉을 만드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런 상황에서도 훌륭한 조각가 밑에 조각을 배우려는 젊은이 들이 모여들면서 조각 아카데미가 생겨나기도 했다. 대표적인 것이 바로 프락시텔레스 조각 아카데미를 꼽을 수 있다. 프락시텔레스는 불명의 명작이랄 수 있는 <크도니스의 비너스>를 만들었으며, 이는 앞으로 이 세상에 만들어지는 모든 비너스 조각상의 기준이자 롤 모델이 되었던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 <메디치의 비너스> <아를의 비너스. 등등 대부분 작가미상으로 남아있는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이 이렇게 <크도니스 비너스>의 짝퉁이거나 모조품이거나 리메이크 내지는 리플리카 작품으로 아카데미 학생들에 의해서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포빈이 그토록 <밀로의 비너스>을 성형수술가지 시켜가면서 프락시텔레스 아카데미의 작품으로 날조하려 한 것을 보면....... 그 격의 차이가 실로 엄청났었던 것만 같다. 고전기 후기에 해당하는 이 시기에 확약한 삼두마차는 프락시텔레스. 스코파스. 리시포스가 있다.

  하지만 정작 가장 화려하게 빛난 것은 마지막 시기인 헬레니즘 시대가 아니었을까 싶다.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등장과 함께 대부분의 그리스 고대도시국가들은 함락되고 폐허로 변해갔다. 동방 원정을 통해 새로운 문물과 문화가 교류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신에 대한 찬양과 안정과 균형미로 대표되던 고전 미술의 특징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육감적인 관능이 등장하고 거칠고 강렬한 몸짓과 고통과 수난이 반영되기 시작했다.

  <밀로의 비너스> <라오콘 동상> <잠자는 헤르마프로티트스> <샤모트라스 승리의 여신상> 등이 모두 이시기의 대표적 작품이다. 그런데 왜 이 시기의 작품 대부분이 작자미상일까? 그것은 아마도 포빈이 저질렀던 파행의 이유와 비슷한 일들이 실제로 벌어지지 않았을까?

 

 

 

1935년 복원에서는 머리와 양팔을 석고로 만들어 붙였었다. 하지만....... 본래의 상태로 다시 되돌려졌다.

  ‘파란 지중해의 세찬 맞바람을 온몸으로 가득 받으며 거대한 날개 짓을 펼치던 여신은 이내 내가 바라보고 있는 곳을 향해 날아왔다. 잠시 허공에 그대로 머물면서 온화한 미소로 나를 바라보던 여신은 이윽고 살며시 뱃머리에 내려앉았다. 계속 불어오는 바람에 여신의 옷자락은 여전히 나부끼고 있었으며 중심을 잃지 않으려 아직도 날개 짓은 멈추지 않고 있었다.

  니케(Nike) 여신은 말없이 나에게 다가오라고 손짓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 꿈을 꾼 적이 있었는데, 지금 드농관으로 올라서는 32개의 계단을 올라가면 저만치 위에 바로 그 꿈속에서 보았던 여신이 똑같이 꿈속에서 보았던 상황과 모습으로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앞으로 달려 나갈 것만 같은 역동성이 가득 느껴지는가 하면, 그러면서도 안정적인 자세로 균형을 유지하고 있으며, 나부끼는 옷자락의 주름 하나하나에서 뿜어져 나오는 생동감은 이루 형용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런 느낌과 생각을 도대체 어떻게 표현해야만 좋을까?

  태어나 처음으로 느껴보는 이 벅찬 감정을 뭐라고 해야 좋단 말인가?

  미술관이 주는 아주 독특한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최적화된 공간에 큐레이터의 창의적 노력과 최상의 가치 추구에 의해서 만들어질 수 있는 완벽함이 고스란히 실현된 장소가 바로 여기 이곳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이 작품을 위해서 제공될 수 있는 장소로는 루브르에서 더이상 이만한 장소가 없을 것이다.

  아니, 전 세계의 모든 미술품 중에서 최고의 전시공간을 혼자 차지한 작품이 바로 <니케의 여신상> 이라고 나는 소리 높여 주장할 수가 있을 것 같다.

  여기 이 엄숙한 공간에 전시될 수 있는 작품은 이 세상에서 오로지 하나 승리의 여신(Victory of Samothrace) 뿐이다. 장엄함과 엄숙함이 보는 이를 압도해 버린다.

  고대 그리스 헬레니즘시대의 최고 걸작 조각품은 <사모트라케의 니케(승리의 여신)>이다.

  실로 오랜 세월동안 최고의 자리를 지켜온 <라오콘 조각상>은 19세기 초에 <밀로의 비너스>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말았지만, 이제 진정한 여신의 귀환은 <승리의 여신 니케>로 귀결되고 말았던 것이다. <모나리자>나 <밀로의 비너스>가 일반적으로는 대단히 인기를 얻고 있기는 하나, 가장 고귀하고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을 골라야 한다면 기꺼이 나는 <승리의 여신 니케>를 꼽을 것이다.

  물론 여기의 <사모트라케 승리의 여신 니케> 또한 분명하게 프랑스가 도둑질한 약탈물이다.

  그리스와 터키의 유물을 모두 돌려준다면....... 아마도 세계 유수의 대표적 박물관의 절반 정도는 텅 비게 될 것이다.

  1862년 어느 날 프랑스 정부 문화부 장관 앞으로 한 통의 편지가 배달되었다.

  오스만 터키에 파견된 프랑스 영사 샤를 샹푸아조(Charles Champoiseau)가 발신인으로 적혀있었다. 터키의 세 번째 도시인 아드리아노폴리스(Andrianoupolis)에 주재하고 있는 외교관으로 평소 고고학 분야에 관심이 많은 아마추어 고고학자였다. 그는 시간만 나면 인근의 고대 그리스 유적을 모조리 찾아 헤매던 이미 소문난 고대유물 탐험가였던 것이다.

  불과 40년 전에 밀로스 섬에서 발견된 <밀로의 비너스> 열기는 유럽 대륙의 모든 고고학자와 미술가는 물론 보통의 일반인에 이르기까지 광풍으로 휘몰아치고 있었다. 돈이 있고 시간이 있다면 무조건 고대 그리스 영역으로 가서 무조건 파고 허물었다. 엄청난 명성과 일확천금을 누구나 꿈꾸면서 말이다. 이 열풍이 자칫 오히려 고대 유물과 유적지를 훼손시킨다는 우려도 나왔지만 식민지로 전락한 그리스와 이젠 제국으로서의 위용을 모두 잃어버리고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하나 추스르기에도 벅차기만 한 오스만 터키의 입장에선 그저 지켜볼 수밖에 달리 다른 도리가 없었기에 도굴과 밀반출이 더 기승을 부릴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의 그리스 본토 대륙과 트로이가 위치했던 지금의 터키 서쪽 해안(여기까지가 모두 고대 그리스 도시국가 연맹)의 중간쯤 지중해에 위치한 아주 작은 섬인 사모트라케(Samothrac) 역시도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샅샅이 뒤지고 난 후였다.

  사모트라케는 좀 특이하게 아주 작은 섬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지중해 중요 뱃길의 한복판에 위치한 이유로 섬의 높은 곳에 ‘신들의 성역’ 이라는 신전지구를 만들어 BC 7세기경부터 이미 제사를 지냈던 특별한 장소였다. 다만 좀 특이했던 것은 올림포스의 12신만을 모신 것이 아니라 몇몇 사후세계나 지하세계를 관장하는 동방의 이교도 신들까지도 모셨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가 헤로도투스(Herodotus)와 용맹하기로 소문난 스파르타의 통치자 라이샌데르(Lysander)는 물론이었으며, 마케도니아의 필리포스 2세와 알렉산더 대왕이 직접 찾아와 제를 지낼 정도로 사모트라케의 신전은 그리스와 마케도니아 인들의 절대 성소였으며, 심지어는 로마제국의 히드리아누스가 소아시아와 아프리카 여행길에 직접 다녀간 것으로 알려져 있었다.

  비록 완전 폐허로 변해 돌기둥 서넛만이 남아있었지만 오랜 역사를 살펴보게 되면 누구인들 ‘신들의 성역’에 관심을 갖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말이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십 년 동안 샅샅이 뒤지고 탈탈 털어가고 난 후였다. 하지만 위치적으로 아드리아노폴리스에서 사모트라케 섬의 위치와 거리가 그렇게 먼 곳이 아니었으니, 아무리 남들이 탈탈 털었다고 해도 그렇다고 안 가볼 수는 없는 샹푸아조였던 것이다.

  그런데 하늘의 뜻이었을까? 자고로 인연이란 실로 오묘한 것이라서...... 반듯이 임자는 따로 있는 것일까?

  사모트라케에 도착한 샹푸아조는 인부를 데리고 가파른 언덕을 올라 ‘신들의 성소’에 올랐다. 부서지다만 돌기둥 서너 개만이 그곳이 먼 옛날 신전이었음을 말해주고 있었다. 돌덩이를 쌓아 제단을 만들었던 터만 덩그러니 남았으며, 온갖 부서진 돌덩이와 파편들만이 사방에 나뒹굴고 있었다. 무심한 시선으로 부서진 파편들을 살피던 샹푸아조는 그래도 인부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왔는데 아무것도 안하고 그냥 돌아갈 수는 없어서 무너진 돌담장 너머의 돌무더기 아래를 좀 파보라고 시켰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을까?

  삽질을 열심히 하던 인부가 쫓아왔다. 무언가 아주 커다란 돌덩이가 드러났는데 아무래도 조각상 같다는 말이었다. 순간 샹프아조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 아마도 그 전율은 40년 전에 올리비에 부티에가 요고스의 삽질을 지켜보다가 느꼈던 그런 짜릿한 감동의 울림과 같은 것이었을 것이다. 옆으로 누워있는 자세였지만 드러난 신장의 높이가 사람을 훌쩍 뛰어넘었으며 한 눈에 알아볼 수 있는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것 만 같은 옷 주름이 흡사 샹프아조가 루브르에서 보았던 비너스 조각상의 옷 주름을 연상시켰다. 당장 드러난 것은 여기저기 훼손 상태가 심한 거대한 몸체가 전부였다.

  인부들의 작업을 중단시키고 혼자서 한동안 넋을 놓고 조각상을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었다. 수많은 생각과 상념들이 스쳐 지나갔다.

  샹푸아주는 인부들에게 다시 흙으로 덮어서 발굴 이전의 상태로 똑같이 되돌려 놓을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그 위에 주변을 돌을 좀 더 날라다 덮고 잡초도 일부 멀리서 캐다가 위장하듯 심었다. 누가보아도 애초부터 발굴에 실패한 장소로 보이게 만드는 것이 목표였다.

  원상복구를 한 이후에 인부들을 불러 특별 상여금을 약속함과 동시에 함구령을 내렸다.

  그리고는 아드리아노폴리스 자신의 집무실로 돌아오자마자 프랑스 정부에 보고서 형식의 편지를 작성했던 것이다.

  ‘고대그리스 조각상을 발견했음. 밀로스 섬에서 발견된 조각상의 뒤를 이을 작품으로 일단 생각됨. 시모트라케 섬에 대한 고고학 조사를 국가차원에서 정식으로 오스만터키 측에 요청하고 허가를 받아내기를 원함. 보다 전문적인 인력과 차후의 대비책을 강구해 주길 강력하게 요망. 아울러 정부가 이번 발굴과 관련해 모든 권한과 책임을 최초발견자인 샹프아주(Charles Champoiseau)에게 정식으로 허가하여 주기를 요청함.’ 이라는 내용의 편지였다.

  또 한 번 프랑스 정부가 발칵 뒤집혔다. 실로 40년 만의 쾌거였던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 발견 하나로 잃었던 예술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자부심이 영원한 앙숙인 영국에 비교해 어느 정도 대등해졌다고 기뻐하던 프랑스였던 것이다. 그런데 지금 또 하나의 위대한 조각상이 프랑스인에 의하여 발견이 된 것이다. 이것마저 무사히 프랑스로 가져오게 된다면........ 명실상부 이제부터는 영국을 앞서게 되는 것이다.

  온 프랑스의 국력을 쏟아 부어서라도...... 어떤 대가를 치루더라도 기필코 이 새로 발견된 그리스 유물을 무사히 프랑스로 반입해야만 하는 것이다.

  영국의 고고학자들이 지중해 사방에서 이미 활동하고 있고, 영국의 정보망이 항상 프랑스를 주시하고 있는 만큼 어느 때 보다도 철통 보안 속에 신속하게 모든 마무리를 지어야 하는 것이다. 사전에 언론에 공개되는 것이야말로 최악의 경우가 되는 것이다.

  정부의 특사가 한아름의 서류와 비자금을 들고 아드리아노폴리스로 파견되었다. 이스탄불(콘스탄티노플) 주재 프랑스 대사가 한걸음에 달려와 합류했다.

  모든 것이 속전속결이었다.

  오스만터키의 허가증에는 어디까지나 ‘고고학 학술조사’였지만 본국의 지원을 받은 샹프아주가 사로트라케에서 벌인 것은 어디까지나 무조건적 대대적인 발굴행위였던 것이다. 수많은 인력이 동원되었고 위장으로 감추었던 조각상 주위를 본격적으로 발굴하기 시작했다.

  드러난 조각상의 훼손 상태는 아주 심각했다. 여신상의 가슴 아래쪽이 처음 발견된 몸통이었는데 그 크기와 무게가 사뭇 엄청났다.

  그러자 오스만터키 측에서 파견된 관리가 제재를 해왔다. 허가내용이 어디까지나 학술조사였다는 이유였다. 발견과 발굴에는 터키 정부의 새로운 허가와 보다 전문적인 관계자가 입회를 해야 가능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프랑스는 이런 제재를 모두 무시해 버렸다. 그들은 엄연한 현역 군인이었기 때문이다. 군인의 상관의 지시에만 모조건 복종한다. 그들이 지금 받은 명령은 무조건 서둘러 발굴을 해서 무사히 프랑스 안으로 가져오라는 것이었다. 발굴은 계속되었고 그들을 제재할 수 없는 상황을 깨달은 관리는 터키 정부에 보고와 해결책을 얻기 위하여 현장을 떠났다. 이제 시간은 관리의 보고를 받은 터키가 어떤 조치를 취해오기 전까지 모든 것을 끝내야만 했다.

  조각상의 몸통을 꺼내자 더욱 심하게 부서진 몸통 상부 일부와 그 아래에서 여신의 날개 한쪽이 모습을 드러냈다. 가뜩이나 훼손이 심각한 상황이었음에도..... 군인들은 무리해서라도 일단 끄집어 낼 수밖에 없었다. 시간이 없기 때문이었다. 하여 발굴 과정에서 여기저기 조각이 나고 부서지기 시작했다.

  일부 군인들이 서둘러 목재를 두르고 삼베 끝으로 둘둘 말듯이 감아올려 포장을 시작했다. 몸체가 그랬으니 날개를 포함한 나머지 부분들에 대한 꼼꼼하고 세세한 포장은 애초부터 기대하기가 불가능했다. 나머지 군인들이 더 깊이 더 넓게 마구 파헤쳤지만...... 머리와 반대쪽 날개를 포함한 더 이상으로 발견되는 것은 전혀 없었다.

  프랑스 군인들은 허겁지겁 조각상을 항구로 옮겼다.

  미술품 발굴에 관한 최소한의 절차와 적절한 방법모색 조차도 모두 생략되었다. 오로지 무조건 부서진 채 끌고서라도 프랑스로 가져가야겠다는 무모한 욕심이 전부였다.

  항구에서 가장 큰 배에 조각상을 실었다. 배가 항구를 막 빠져나가려는 순간에 오스만터키의 순시선이 들이닥쳤다. 파견되었던 관리가 아드리아노폴리스로 달려가 상부에 보고를 함으로써 발칵 뒤집혔던 것이다. 아드리아노폴리스의 책임자와 관리들이 대거 무장한 경찰들을 순시선에 태우고 들이닥친 것이다.

  고대 유적의 불법발굴은 물론 밀반출 현장에서 꼼짝없이 체포된 것이다.

  샹푸아주는 터키 정부의 허가증을 내밀었다. 하지만 허가증에는 순수한 고고학 조사만이 내옹이자 목적으로 분명하게 적혀 있었다. 터키 관리는 불법 발굴과 밀반출 혐의로 현행범으로 체포를 명령했다. 터키 경찰이 조각상을 실은 배에 올라탔다.

  그러자 샹푸아주는 학술적 조사 과정에 발견이 있었고, 고대 유물을 노리는 국가나 사람들이 많은데다 훼손을 방지하기 위하여 지금 아드리아노폴리스로 운송하려는 중이었으며, 그곳에서 법적인 절차를 받으려 했다고 주장했다.

  꼼짝없이 현행법으로 체포되어 조각상을 실은 배가 나포되어 이제 아드리아노폴리스를 향해 가고 있었다. 삽시간에 이런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당사자인 오스만 터키는 물론 영국과 독일과 미국의 배들이 주변으로 몰려들며 이런 사태를 예의주시하기 시작했다. 이런 와중에 이스탄불의 오스만 터키 정부로부터 하달된 새로운 명령서가 도착했다. 유물의 안전과 명확한 사태의 해결을 위하여 아드리아노폴리스 관할을 포기하고 배를 돌려 곧바로 이스탄불로 들어오라는 지시였다. 이제 사태는 파국으로 치닫고 있었던 것이다. 조각상은 터키의 소유가 될 것이며 불법 발굴과 밀반출의 죄를 들어 샹푸아주를 비롯한 관련자 모두는 엄청난 중형을 면할 수가 없게 될 것이며, 프랑스는 가뜩이나 불명예를 가뜩이나 지고 있는 마당에 또다시 몰염치한 예술품 약탈 범죄국가로 세상의 손가락질을 받게 될 것이다.

  절체절명의 위기였다.

  그런 위기 속에서 프랑스인의 뻔뻔함은 또 한 번 놀라운 기지를 발휘하게 된다.

  느닷없이 프랑스 깃발을 단 대대적인 해군 함대가 이스탄불을 향해 나아가던 순시선과 조각상을 실은 배를 나포한 것이다. 막말로 프랑스 해군의 모든 전력이 우르르 나서서 경찰 초계선을 향해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

  합법적으로 허가를 받고 학술조사와 발굴을 하는 프랑스 국민을 오스만터키가 불법적으로 체포 연행을 함으로써 부득이 자국민의 안전과 재산 보호를 위해 군사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는 명분이었다. 터키의 관리가 거세게 항의를 했지만....... 상대는 누군가의 명령을 받고 나온 군인이었던 것이다. 터키는 최종적으로 국제법과 국가 간의 외교문제로 비화될 것임을 경고하고 나왔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뒤에서 프랑스 대사가 나서면서, ‘현장에서 당장 해결되어야만 하는, 자국민의 안전과 그들의 명예회복과 재산이 보호되지 못한다면 프랑스는 지금 이 순간에 적국 오스만터키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바입니다. 라는 지시와 공문이 내게 도착했소. 당신들은 이제 모두 프랑스의 전쟁 포로가 되는 것이요. 단 한 사람만 국제법상 도리로 이 전쟁선포를 정부에 전할 수 있도록 보내주겠소. 나머지는 포박되어 프랑스로 압송될 것이요. 누가 소식을 전할 것이요?’

  그야말로 마른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진 경우가 아니겠는가?

  문화재 도굴과 밀반출의 불법행위를 막아야겠다고 합법적으로 제재를 가했을 뿐인데......느닷없이 전쟁까지 선포하면서 전쟁포로로 체포를 하겠다니...... 이것이 약소국의 설음인 것을........ 사실 이 시기에 오스만터키는 수도인 이스탄불의 치안정도를 제외하면 대외적으로 허울뿐이 국가였지, 감히 프랑스가 아니라 어느 누구와도 전쟁이라는 것은 꿈속에서도 생각하지 못할 정도로 쇠락해 있었다. 1821년부터 그리스가 무장투쟁을 통해 독립을 추구해 왔는데, 7년만이 1828년 터키는 국제사회에서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하지만 그랬음에도 그리스 또한 독립을 주장하기는 했지만 스스로 주권국가의 체제정립에 이르지 못하였고, 그리스와 터키가 서로 종교적 영토적으로 섞여 구분되지 못했던 관계로 발칸전쟁이 벌어지는 1912년까지 유명무실하게나마 터키가 명목상으로만 지배를 유지했던 것이다.

  지금 터키주재 프랑스 대사와 정규군인 프랑스 해군을 맞아선 아드리아노폴리스의 고위관리가 전쟁을 놓고 터키를 대신해 선택하거나 결정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분명 당사국의 최고 정치가인 프랑스 대사는 전쟁을 선언했던 것이다. 그런 마당에 이 고위관리가 설사 술탄이었다 해도 당장 프랑스의 선전포고를 받아들이기는 불가능하다는 것이 뻔한 결론이었다. 막아야 한다. 살아야 한다. 그러자면 타협할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의 요구는 간단명료했다.

  프랑스 관계자 전원이 자유롭게 프랑스로 돌아갈 수 있어야 한다. 그들의 합법적인 학술조사의 결론이 채 결실을 맺기 전에 터키가 사고를 쳤으니 당연히 그 결과를 책임지고 배상을 해야만 한다. 다만 벌어진 상황에 비추어 프랑스 고고학 연구팀이 학술 조사를 계속할 수 있게 발굴된 조각상을 프랑스에게 배상의 차원에서 양도한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문제에 대해 더 이상의 이의제기나 배상을 청구하지 않겠다는 요지였다.(그야말로 날강도 짓이었다)

  이럴 땐 과연 어떻게 대처해야 하겠는가?

  뭘 어째? 샹푸아주가 부랴부랴 서류를 작성하고 터키 관리가 시키는 대로 서명을 할 수 밖에........ 이로서 프랑스가 사모트라케에서 <승리의 여신상>을 발굴하고 프랑스로 반입하기까지 모든 절차는 국제법상 지극히 합리적이자 합법적인 것으로 포장되었던 것이다.

  이 순간에도 터키와 그리스는 반환을 요구하고, 프랑스는 합법적인 서류를 내민다.

​  니케 여신상은 가슴 아래의 옷 주름이 접혀있는 부분에서 상하로 나뉜다. 다리에서 옷 주름이 선명하고 아름다운 몸체를 지내 가슴 아래까지가 하나의 거대한 몸체로 만들어졌다. 그 위에 가슴과 어깨를 포함하는 상체 부분이 올려 맞춰지면 여신의 신체가 완성된다. 머리와 두 개의 날개와 양 팔은 따로 만들어져 끼워 맞추는 방식으로 만들어졌다.

  몸체만큼이나 거대한 양 날개는 별도의 외부 지지대 없이 두 개의 큰 구슬(쐐기)를 이용해 몸체에 연결되도록 했는데, 이 부분의 엄청난 하중을 겨우 두 개의 구슬(쐐기)로 연결시켜 하중을 견디게 했다는 사실에 놀라울 뿐이며, 조각가의 고충이 실로 엄청났으리라는 경외감과 존경심마저 저절로 생겨날 정도이다.

  고대 그리스 조각은 대부분 몸체와 머리와 팔 다리를 따로 만들어서 하나로 결합하는 형태로 제작되었다. 그 과정에서 구슬(쐐기)를 아주 효과적으로 사용해 왔다. 하지만, 니케의 여신상처럼 저렇게 거대한 날개를 구슬(쐐기)만으로 하중을 견디게끔 만든 것은 실로 놀라운 발견이자 모험이라고 해야만 할 것이다. <밀로의 비너스>만 해도 왼팔이 조각상 전체를 지지해주는 어떤 형태로든 지지대와 연결되었을 것이라고 판단되기 때문이다.

  니케의 여신상에 붙어있는 날개의 하중을 견디게끔 만들어, 무엇인가 나무를 괴어놓았다든지, 다른 천사가 뒤에서 받들고 서있게 만들었다면..... 아마도 저렇게 자유롭게 하늘을 날다가 이제 막 뱃전에 내려앉는 지극히 자연스러운 생동감을 우리는 찾아보지 못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랬다면 나는..... 그리고 우리는 니케의 여신상에 감탄과 존경을 바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돌을 깎거나 다듬어 만드는 조각이나 건축물은 외부 충격에는 강하나 은근한 흔들림(지진)에 매우 취약하다. 무게 중심과 균형이 흐트러지면 그만 치명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런 상황에 대비하기 위해 조각가와 건축가들이 찾아낸 방법이 구슬(쐐기)인 것이다. 거대란 돌 건축인 콜로세움의 부서진 쪽이나 거대한 고딕건축의 돌기둥을 살펴보면 알 수가 있다. 잘 다듬어진 돌덩이 위에 또 하나의 돌덩이를 얹고 또 얹고 또 얹다보면 높이는 쉽게 얻게 되지만 쌓여진 돌덩이들은 작은 흔들림에도 서로 비틀리거나 비껴나가 곧 무너지고 만다. 그래서 제작과정에서 받침돌과 상부에 올려 질 돌의 중앙에 위아래로 같은 크기의 구멍을 내고 둥근 쇠구슬(납덩이 구슬을 주로 사용)을 만들어 쐐기 용도로 끼워준다. 쌓아놓은 돌들이 어그러지거나 비껴나가는 것을 막아주게 되는 것이다. 받침돌에 고스란히 내려오는 전체 하중의 무게 이상의 힘이 옆으로 작용하지 않는 한 원형을 고스란히 유지시켜 주는 것이다. 녹이 슬어 산화되는 것을 막기 위해선 청동구슬이 최고겠지만 제작 단가를 따져 주로 비용은 적되 부작용 위험이 있는 납덩이 구슬을 주로 사용했다.

  나폴레옹은 이집트 원정길에 부족한 총알을 보충하기 위하여 콜로세움을 헐어내면서 까지 납을 긁어모았다고 전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니케의 여신상> 최초 발굴에서 샹푸아조는 바로 이 구슬(쐐기)를 발견하지 못했다. 샹푸아조와 루브르 박물관의 최고 전문가들이 모여서 연일 연구를 했지만 끝내 여기 이 날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처음으로 아주 짧게 루브르에 전시된 <사모트라케 승리의 여신상>은 날개가 달리지 않은 상태로 몸체에 가슴과 어깨 부분만을 결합한 형태로 대중에게 첫선을 보였다.(1884년)

  여신상이 발굴되어 루브르로 반입 된지 10년이 지나도록 날개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던 것이다. 아주 일시적으로 몸체만 전시된 적이 있기는 했다. 하지만 무언가가 부족했다.

  한편, 여신상 발굴의 소식이 전 세계로 퍼져나가자 또다시 사모트라케 열풍이 불어 닥쳤다. 수많은 사람들이 사모트라케 섬으로 몰려들었다. 당연히 샹푸아조 조차도 다시 사모트라케 섬을 찾을 수밖에 없지 않았겠는가? 적어도 날개 한 짝과 두 팔이 신전 근처 어딘가에 있어야만 했던 것이다.

  그 열풍 속에서 마침내 1875년 오스트리아 고고학 연구팀이 여신상을 발굴한 인근에서 새로운 대리석 조각과 석판들을 한 무더기 찾아냈다. 그것은 여신상이 막 뱃전에 내려앉는 장면을 묘사한 조각상의 받침돌이었다. 그리고는 정교하게 잘 다듬어진 활모양(부메랑 장난감 같은)의 대리석 판과 납덩이 구슬을 찾아냈다. 연구팀의 한 명이 고대 그리스 동전에 새겨진 니케 여신상을 살피던 중에 그 활모양의 판과 구슬로 양 날개의 위아래를 고정시켜 몸체에 기우도록 했다는 사실을 찾아냈다. 그렇지 않고서는 이 거대하고 무거운 날개를 몸체에 고정 시킨다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바로 그것이 지난 십 년 동안이나 루브르의 연구진이 매달렸어도 해결하지 못했던 핵심적인 부분이었다.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은 발굴한 석조물들을 가지고 귀국길에 올랐다. 그리고 또 한 번 놀랍게도 그 배에는........ 시모트라케에 오기는 했으나 빈손으로 돌아가는 샹푸아조가 함께 타고 있었던 것이다. 우연도 이런 우연이 또 있을까?

  우연히 마주친 이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았다. 어떻게 모를 수가 있었겠는가?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은 자체적으로 오랜 시간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마침내....... 샹푸아조에게 자신들이 발굴한 것과 연구한 결과에 대해서 털어 놓았다. 샹푸아조는 조각상의 받침돌과 활모양의 대리석판과 구슬을 확인했다. 비로소 영원한 수수께끼 같았던 모든 비밀이 풀렸다.

  발굴 이후로 10년 만에 겨우 비밀이 풀린 것만이 아니었다. 또 하나의 기적이 이 자리에서 벌어진 것이다.

  배가 툴롱 항구에 정박하고 이제 육로를 통해 각자의 목적지를 향해 헤어질 상황이 되었다.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을 이끌어왔던 노학자가 샹푸아조에게 다가와 서류뭉치를 건네주는 것이었다. 자신들이 사모트라케에서 선박에 실었던 화물에 대한 서류였다.

‘인류의 미래를 향한 고고학의 진정한 헌신과 발전을 위해’ 라면서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은 그 자리에서 자신들이 그동안 발견 발굴한 유물을 샹푸아조에게...... 아니 프랑스에 무상으로 선뜻 기증하였던 것이다.

  ‘혹, 나머지 날개 하나 정도였다면 모를까....... 여신상의 몸체를 당신들이 가지고 있는데 이깟 받침돌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세상을 위해선 온전한 여신상을 선보이는 것이 합당할 텐데....... 오스트리아가 활과 받침돌을 가지고 있다고 해서 프랑스가 조각상을 내어주지는 않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조각상이 없는 받침돌은 그냥 돌덩이일 뿐이겠지요. 하지만 이렇게 해서라도 여신상이 좀 더 완성도를 높이게 되고, 세상 사람들이 보다원형에 가까운 진짜 니케 여신을 만날 수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고고학이 진정으로 인류문명사에 나름 기여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으로 우리의 길고 멀었던 여정도 끝이 나는 가 봅니다. 행운을 빕니다.’ 라며 오스트리아 고고학 팀이 떠났다.

  상푸아조의 루브르 박물관 연구팀은 1879년에 드디어 활과 구슬(쐐기)를 이용하여 날개를 여신상에 조립하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이 역시 기존 여신상의 부식과 훼손상태가 심각해 추가 보완작업이 필수적일 수밖에 없었다.

  이 과정에서 위쪽의 부분 사진에 드러나는 대로 파란색으로 칠해진...... 상체 일부와 몸체 연결부분과 찾아내지 못한 오른쪽 날개와 왼쪽 날개의 접합부문들을 석고로 만들어 채우는 봉합수술을 감행했다. 대리석판으로 된 활모양이 부서지고 부식된 상태여서 현대의 최첨단 소재로 바꾸었다.

  그리고 마침내 1884년부터 지금까지 그 모습 그대로 우리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

  그 후로도 미국 원정대의 윌리엄스와 레만 부부에 의하여 시모트라케 섬에서 새로운 발굴이 놀라운 성과를 내기도 했다.

  그런가하면 현대에 들어 2차 세계대전 중에 나찌와 히틀러의 문화재 약탈에 맞서 급하게 여신상을 이송하느라 또 한 번 심하게 훼손되기도 한다.

  이젠 더 이상 도망 다니고 쫓겨 다니는 일이 없이 그 자리에서 영원하기를 기원해 볼 뿐이다.

 

 

 

  경악된 표정으로 사람들이 많이 머무는 작품이 바로 <헤르마프로디토스(hermaphrodite) 조각상> 이다.

오래 전에 (르네상스 산책) 로마 편에서 베르니니의 조각을 설명하면서 헤르마프로디토스와 조각상에 대해서 나름 아주 소상하게 이야기를 나눈 적이 이미 있었기에........ 과감하게 생략하기로 하겠다.

 

  흔히 사람들이 루브르 박물관하면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시모트라케 승리의 여신상> 정도만을 명품중의 명품이라고 꼽는데........ 글쎄다. 유럽의 회화나 조각상만이 인류의 대표적 문화유산은 결코 아니기 때문이다.

  대영박물관 하면 영국인들은 스스로 <로제타 스톤> <람세스 2세 흉상> 그리고 다음에 <파르테논 신전의 엘긴 마블>을 진정한 예술품이라고 전면에 내세운다.

  좀 다르다. 문화나 예술에 대한 이해와 기준에 있어서 분명한 차이가 느껴진다.

  대영박물관이나 내셔널 갤러리에 가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는 물론 고호의 <해바라기>도 있다. <모나리자> <암굴의 성모> 등에 진위 여부를 두고 영국과 프랑스가 늘 뜨겁게 다투지만 어쩌면 둘 다 모두가 진품이거나 둘 다 진품이 아닐 수도 있다는 사실에 대해 이제는 그렇게 따지거나 다툴 일만도 아닌 듯싶다.

  영국이 다소 보수적 전통주의를 따른다면 프랑스는 진보적인 개방문화를 추구한다고 해야할까나....... 영국에도 프랑스 못지않게 귀한 그리스 조각들 미론의 <원반 던지는 사람> 이나 <에레크테이온 여신상> 등이 있다. 루브르 못지않다. 물론 영국이나 프랑스나 온통 빼앗고 훔쳐온 약탈 문화재 소굴이라는데 문제가 있다.

  이에 반해서 프랑스에도 <이집트 서기상> <함무라비 법전> 등 상상을 초월하는 위대한 문화재가 많이 있다. 그리스의 조각상 못지않게 더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는 다채로운 그리스 도자기가 있는 것이다. 거기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의 바빌로니아나 페르시아 유적 유물들도 상당히 많이 보관 전시되고 있다. 하나같이 모두가 중세 고딕이나 르네상스 시대의 회화와 조각 못지않게 더없이 귀한 인류의 유산들인 것이다.

  그것들 어느 하나도 <모나리자>나 <밀러의 비너스> 보다 못한 것들이 없어 보인다.

  문화와 예술을 잠식해 나가는 자본주의 상술에 밀려 우선순위와 가치판단 기준에서 뒤로 밀려났을 뿐이다.

  어쨌거나 여기까지 왔으니....... 살짝 지나치면서 둘러보기만 하고....... 이제 회화의 정원으로 발길을 옮겨 보기로 한다.

 

 

​  루브르 박물관은 약 7.500점의 회화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약탈문화재 소굴이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절치부심 갖은 노력을 경주하고 있는 루브르가 그나마 자랑스럽게 은근히 내세우는 것이 바로 회화의 정원이다. 소장하고 있는 회화작품의 2/3 정도를 프랑스 화가의 작품으로 채우고 있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는 폴랑드르(Flandre) 회화로 알려진 북유럽 화가의 작품이 1.200점정도 소장되어 있다. 프랑스는 이탈리아에서 시작된 르네상스 회화에 적지 않게 콤플렉스를 좀 심하게 가졌던 것이 솔직한 사실이다.   프랑스 회화와 예술의 발전은 어떻게 생각해보면, 이 콤플렉스를 극복하고자 하는데서 시작되었다고도 볼 수 있다. 프랑수아 1세와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사이에서 벌어졌던 일들이 그런 상황을 어느 정도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결국 프랑수와 1세의 노력으로 프랑스에서도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회화작품을 소장하기 시작하였으며 루이 14세는 닥치는 대로 사들였다고 해야겠다. 나폴레옹에 의해 벌어진 이탈리아 전쟁을 통해 루브르 박물관 성공의 일등공신이랄 수 있는 도미니크 비방 드농은 직접 이탈리아 전역을 돌아다니며 값진 예술품을 싹쓸이해서 파리로 실어 날랐다. 나폴레옹 패망 후, 빈 회의에 의해서 상당수의 약탈 문화재와 미술품이 반환되었지만 미처 반환되지 못한(?) 절반 정도의 문화재와 미술품이 여전히 루브르에 그대로 소장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노력(?)의 대가로 지금 루브르는 약 615.000점 이상의 소중한 인류 문화재와 예술작품을 소장한 초대형 박물관으로 명성을 떨치고 있는 것이다.

  그 중에서 약 36.000점 정도를 공개 전시하고 있으며, 온라인을 통해 약 480.000점 정도의 소장품에 대해 검색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전시되어 있는 예술품들만을 둘러보려고 해도...... 박물관 안에서 작품들을 찾아다녀야 하는 동선이 거의 60km에 이른다고 한다. 백오십 리를 걸어야만 현재 전시되고 있는 작품을 적어도 한번 씩 모두 둘러보게 된다는 산술적 수치가 나오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루브르를 가장 효과적으로 관람하는 방법’ ‘루브르에서 꼭 보아야 하는 작품 10’ ‘루브르 유명 작품들의 전시 공간 위치’등등의 안내문과 글들이 SNS 등을 통해 사방에 나돌게 되는 것이리라. 하지만 여기에 최상의 방법이라든지 별도 정도는 없다고 생각된다.

  안내 지도에 붉은 매직으로 커다랗게 별표를 그려주면서까지 어디어디에 있는 작품만은 꼭 찾아서 보아야 한다고 아무리 설명해 주어도 막상 찾아다니다 보면 매사가 그렇게 풀려나가지만은 않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다니다보니 허리가 아파오고 무릎이 욱신거리면서 화장실이라도 가야한다면....... 언제든지 상황은 엉뚱하게 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여행은 알고 노력하는 만큼만 보인다.’라는 명제는 여기 루브르에서도 어김없이 그대로 적용된다. 루브를 제대로 보고 싶다면....... 사전에 공부하고 연구를 미리미리 해두시라.

<<루브르 (회화의 정원) 산책의 시작은 2층 드농관 7실에서 부터.....>>

 

  루브르 박물관에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서둘러 찾아가는 곳은 드농관 2층의 7실이다. 실제로 95% 이상의 사람들이 실제로 그렇게 행동한다. 무조건 7실을 찾아 헤매기 시작한다. 이렇게 보자면 7실이 루브르 박물관 관람의 중심이자 출발점이라고 해야 하겠다.

  하여, 어쨌거나 일단 드농관 2층 7실을 가장 먼저 찾아갔다면....... 이제 그곳에서 시작하는 가장 효과적인 루브르 관람에 대해서 생각해보아야 하지 않을까?

 드농관 2층 7실에는 <모나리자>가 전시되어 있다.

  2005년 4월 까지는 조금 떨어진 6실에 전시되었었는데, 좁은 공간이어서 몰려드는 <모나리자> 열풍을 감당해 내기 어려웠다. 하여 일본 NHK 방송국이 비용을 대어 지금의 711실의 가장 크고 넓은 공간으로 이동 전시가 된 것이다. 이때 방탄유리까지 추가 되었다.

  하지만, 지극히 내 개인적인 주장에 따르자면 이곳은 결코 <모나리자> 전시 공간이 아니다. <모나리자> 보관 장소일 뿐이다. 모나리자를 상징하는 스푸마토 기법이나 색감과 질감을 보고 느끼기는 불가능하다. 목숨이라도 걸 것처럼 저마다 열심히들 사진을 찍기는 하는데, 작품 보호를 위해 설치했다는 방탄유리가 빛을 그대로 반사시키기 일쑤다. 그럼에도 이 같은 실효성이 거의 없어 보이는 해프닝이 힘들여 돈 들여 루브르박물관을 찾은 첫 번째 이유라니........ 헐...... 어처구니없음에 실소를 금하지 못하겠다.

 

  우리에게 <모나리자>는 언제나처럼 주요 관심 대상이 아니다.

  반대편의 <가나의 혼인잔치>에는 아침에 처음 찾아왔을 때 보다 훨씬 많은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고 올려다 보고 있다. 참으로 좋은..... 바람직한 현상이라고 해야 하겠다.

  아침에 처음 루브르에 들어섰을 때 우리는 다짜고짜 3층의 쉴리관을 먼저 찾았었다. 푸생과 프랑스 회화의 진수를 느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아뿔싸! 3층의 프랑스 회화관 전체가 휴관중이라 폐쇄 중이었다.

  하여 쉴리관 1층으로 내려가 중동지역의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페르시아 문명을 살펴보고 나서 우측의 드농관으로 옮겨가면 에트루리아 문명이 전시되어 있고 이어서 고대 그리스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다. 그러면서 이곳 루브르에서만 접해 볼 수 있는 아주 독특한 전시장 풍경이랄 수 있는.......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상 전시와 함께 이탈리아 초기 르네상스 회화작품이 같은 공간에 함께 전시되기 시작한다. 참 낯설고 이색적인 풍경이랄 수 있다.

  간혹 회화(미술품)작품 전시회를 다니다보면 갤러리의 규모나 소장 작품 수에 따라 다양한 방식으로 전시가 꾸며진다. 그림이 다양한 형태로 걸려있는 전시실에 부담스러울 정도로 텅 빈 공간이 크게 남게 된다면 거기에 조각상이나 다른 기념 조형물을 설치하는 경우를 간혹 말나볼 수가 있다. 하지만 보통의 경우는 전시실을 구분하여 조각 전시실과 회화 전시실을 별도로 분명하게 나누어 구분 짓는 것이 보통이다. 왜냐하면 자칫 그림(회화) 감상에 빠져 있다가 설치물(조각상)에 걸려서 넘어지거나 다치기라도 하게 되면, 당연히 설치 작품에도 손상이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조각상을 구경하는데 정신이 팔려 벽면에 걸려있는 그림 액자를 의식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에 회화는 회화전시실에, 조형물은 조형물 전시실에 다로 전시하는 것이 보편적인데...... 루브르 경우는 조각실에서 이탈리아 회화실로 넘어가는 과정에 간은 공간에 그리스 헬레니즘 시대의 조각상들과 이탈리아 르네상스 초기의 보티첼리 프레스코화에서 부터 함께 섞어서 전시하는 공간을 만들었다.

  참..... 어디까지나 프랑스다운 발상이고 프랑스기에 가능한 공간이지 싶다.

  ‘파리는 같은 프랑스인에게도 낮선 곳이다.’라는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었는데..... 격어보니 '과연 그렇겠구나.' 싶어지는 것이 이제야 그 말의 뜻이 이해가 된다.

  전시실 6실과 7실이 마치 하나의 거대한 전시공간으로만 느껴지는 이 장소에 어찌나 사람이 많이 몰려들었는지 이래나 저래나 사람에 치이고 밟힌다는 표현이 꼭 들어맞는 것 같다. 그런데 그 몰려든 사람들이 길게 줄을 서는 것이 오로지 <모나리자> 하나 때문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고는....... 헐.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

  ‘파리만 프랑스인에게 낮선 것이 아니라, <모나리자> 앞에 길게 줄을 선 사람들이 같은 여행자인 나도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참으로 낯설다.’

 

  모나리자 전시실엔 르네상스 후기에 해당하는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잔치>를 포함하는 베네치아 회화작품 52개가 같은 공간에 전시되어 있음에도 <모나리자>가 중앙에 떡하니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냉대와 천시를 받고 있는 것이다.

  이곳의 52점의 회화작품 하나하나가 루브르 정문만 나선다면 세상 어디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가도 당연히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을 훌륭한 작품들이다. <파리 생제르망> 축구팀에 메시랑 음바페랑 네이마르가 있다 보니 다른 선수들은 눈에 띄지 않는 것과 같은 이유라 해야겠다. 루브르도 <모나리자> <밀로의 비너스> <니케의 여신상>이 있다 보니, 그 외의 다른 작품들은 전혀 안중에도 없는 그런 느낌말이다. 차라리 루브르 모나리자 룸에서 방출을 시켜준다면 다른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서 귀한 대접을 받았을 텐데 말이다.

  ‘<모나리자>와 같은 공간에 전시되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조차 끌지 못하고 외면당한 그림들’ 중에서 정말로 안타깝게 내 가슴에 안겨 온 작품을 두 작품만 꼽는다면....... <모나리자>가 유명해지고 그토록 사랑받게 된 내막을 어느 정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모나리자> 앞에서 기다리고 서성대던 시간의 절반만큼이라도 여기 이 두 작품 앞에서 정중하게 관심과 애정을 보여주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내가 가슴아파하는 그림은 베네치아 회화의 최고 전성기를 구가한 티치아노(Tiziano Vecellio)가 그린 <프랑수아 1세의 초상화>와 앵그르(Jean-Auguste-Dominique Ingres)가 그린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임종을 지켜보는 프랑수아 1세>라는 작품이다.

  프랑스인들에게 문화와 예술에 대한 자부심을 일깨워주고 갖게끔 만들어준 가장 사랑받는 군주가 바로 프랑수와 1세라고 나는 알고 있다.

  프랑수와 1세가 밀라노에 체류 중인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초청할 때까지 프랑스에는 단 한 점의 르네상스 회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다빈치가 파리에 올 때 미완성의 <모나리자>를 보따리에 싸서 왔고, 결과적으로 쌔볐던 기증받았던 선물이었던 간에 지금 <모나리자>를 루브르에 전시하도록 만든 사람이 바로 프랑수와 1세라 하겠다.

  그런 프랑수와 1세가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그림 두 점이 하필 <모나리자> 옆에 걸리게 되었으니....... 생전의 각별한 인연을 루브르 큐레이터들은 절묘하게 악연으로 만들었지 않은가? 아예 <모나리자> 옆에 나란히 전시해 놓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한 번 SNS나 인터넷 검색을 해보시라 권하고 싶다. 그러면 생각이 날지도.......

  루브르박물관엘 갔는데 <모나리자> 전시실엘 갔는데 <프랑수와 초상화>나 <다빈치의 임종>을 본 기억이 없다면...... 혹시 당신은?

  

 

  루브르박물관이라는 공간에 들어서서 주변을 들러보면, 마치 자작나무 숲으로 우거진 광활한 시베리아 벌판에 서있는 느낌이 든다. 아름답기가 그지없고 황홀할 지경이긴 한데 도대체 어디를 먼저 가야할지 판단이 서지 않기 때문이다. 어느 천년에 이걸 다 돌아보지? 그래서 대부분의 사람들은 안내도에 빨간 펜으로 동그라미를 서너 개 쳐놓고는 죽어라 계단을 오르내리기 일쑤다.

  가이드가 없이 우리처럼 개별적으로 루브르를 관람하려는 여행자라면.... 나는 이렇게 권하겠다.

  우선 시간을 정하자. 박물관에서 머물 수 있는 전체적인 시간을 세 시간, 혹은 네 시간 이렇게 먼저 정하자. 이틀이나 삼일이 좋겠지만서도.....

  다음으로 두 사람 중에서 더 좋아하는 사람을 하나 먼저 골라보자.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이고, 다른 하나는 미켈란젤로이다. 다빈치는 회화(그림)야 말로 모든 예술의 최고봉이라고 찬사를 보낸 화가이다. 그런가하면 미켈란젤로는 화가에 대해 현란한 색깔과 붓놀림으로 사람의 눈을 현혹시키는 사기꾼이라고 했다. 조각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을 창조하고 생기를 불어넣는 진정한 예술이라고 주장한 조각가다. 누가 더 이치에 맞는 말이고, 누구를 더 좋아하는가? 그럼 그 사람을 따라 루브르를 돌아보면 된다.

  미켈란젤로를 좋아하면 쉴리관으로 들어가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에서 시작해 르네상스 조각까지를 둘러보면서 중간에 만나게 되는 바빌론. 페르시아. 앗시리아 등 메소포타미아 문명관과 이집트 문명관을 둘러보면 되겠다. 전체 루브르 방문 시간이 이미 정해져 있는만큼 서둔 걸음으로 대충 한 바퀴 돌았다 싶으면 얼추 한 시간 반은 되지 않았을까 싶다. 잠시 쉬었다가 이제 미켈란젤로와 작별하고 다음 코스로 다빈치의 발자취를 따라가며 나머지 시간을 소요하면 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우리가 바로 그렇게 루브르를 관람한 경우에 해당한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좋아한다면 일단 드농관 2층의 7전시실에서 시작해야 하지 않을까? 항상 <모나리자> 앞에서는 긴 웨이팅 시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모나리자>를 배경으로 찍는 인증 샷이 대단히 중요한 만큼, 인증 샷 성공에서부터 시작해야만 나머지 시간 체크가 가능할 듯 여겨지기 때문이다.(우리도 찍어 둘껄)

  <모나리자>를 보았으면 반대편의 <가나의 혼인잔치>는 물론, 같은 전시실에 있는 티치아노의 <프랑수와 1세 초상화>와 앵그르의 <다빈치의 임종>을 비롯한 주옥같은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 그림들을 여유를 가지고 둘러보자. 혹여...... 다음에 다시 루브르에 올 기회가 있다고 해도....... 이번에 시간이 모자라 뒷부분을 못 보았다면 다시 올 때는 거꾸로 뒤에서부터 보시던가, 시간을 핑계로 마구 건너뛰면 다음에 와서도 똑같이 건너뛰며 똑같은 동선을 유지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내 경우는 이번 루브르 방문에서 꼭 프랑스 회화를 보아야겠다고 작정을 했던 사람이었지만....... 보통의 경우라면 이곳에서 최대한 시간을 허락해 르네상스 미술의 진수를 맘껏 누리고 즐겨보시라 강추하고 싶다. 설혹 프랑스 회화를 전혀 구경하지 못하는 경우가 생기더라도 말이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진수가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에 주옥처럼 전시되어 있다면, 피렌체와 로마를 제외한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와 폴랑드르 지역에서부터 서유럽에 걸친 르네상스 미술의 모든 것이 루브르박물관에 소장 전시되어 있다고 보면 틀림이 없을 것이다. 혹, 이렇게 까지 이야기하면 영국이나 미국이 삐칠지 모르겠으나....... 우피치 미술관과 루브르박물관에 소장된 르네상스 회화와 조각을 모두 보았다면, 이제 세상 곳곳에 흩어져있는 교회가 개별적으로 소장하고 있는 미술품(성화. 조각)을 제외하고는 모두 본 것이나 진배없다. 나는 감히 그렇게 말하고 싶어졌다. '얼추 다 본거여. 더 찾아봤자 다 거기서 거기야.' 라고 말이다.

  무조건 ‘드농관 2층에서 주저앉아 실컷 놀아라. 맘껏 즐겨라.’라고 듣기 싫어질 만큼 말해주고 싶다.

  그렇게 드농관 2층을 어느 정도 마음에 새겨 넣었다 싶으면 이제 발걸음을 서서히 옮겨서 리슐리관 3층으로 자리를 옮기도록 한다. 그런 다음엔 다시 쉴리관 3층으로 가면 되겠다.

  이탈리아 르네상스에서 시작해 매너리즘 시대를 지나고 바로코와 로코코 시대를 지나서 피레네 산맥 너머의 스페인 미술까지 만나 볼 수가 있는 것이다. 더불어 알프스산맥 이북의 독특한 폴랑드르 지역의 미술에 이르기까지........ 19세기 초엽에 이르기까지의 유럽 회화작품이 총망라해 이곳에 전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 다음엔 열려진 통로 저편에 무엇인가가 전시되고 있는 공간이면 아무데나 무작정 찾아가면 된다. 어디를 가나 온통 프랑스 회화 전시실이기 때문이다. 이제까지 설명한 이탈리아와 폴랑드르, 그리고 스페인 미술까지를 모두 합친 것의 두 배를 뛰어넘는 엄청난 공간을 모두 프랑스 회화가 차지하고 있다.

  그렇다고 프랑스 회화를 꼭 프랑스 화화전시실에 가야만 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프랑스 화가이지만 다비드. 들라크루아. 앵그르. 제리코 등은 세상 어디에 내놓아도 이미 유명세를 탄 세계적인 화가인지라 당당하게 이곳 드농관 2층 르네상스 회화관에 감상하기 좋게 많은 작품을 전시해 놓았으며, 이들 못지않은 유명화가 푸생만은 콕 집어서 빼놓고는 3층의 프랑스회화관 중앙에 특별 전시실을 만들어 전시하고 있단다.(아쉽게도 이번 루브르 방문에서 푸생은 만나보지 못했다) 푸생은 프랑스 회화의 기준이자 교본이며 자부심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작품의 전시 일련번호까지 미리 알아서 따로 기록해 놓지 않았다면 몇몇 좋아하는 작품만을 따로 찾아본다는 것은 어쩌면 거의 불가능할지도 모르겠다.

  그냥, 이탈리아 전시실. 스페인 전시실. 폴랑드르 전시실을 둘러보면서 마냥 앞으로 나가다 보면 ‘어? 이 작품이 여기 있었네? 이것도 또?’ 하면서 하나 둘 뿔쑥 나타날 것이기 때문이다. 루브르 정도 되면 일일이 하나하나 찾아다니면서 끝내 보지 못했다고 해서 그렇게 험이 될 것이 없다. 시베리아 벌판에서 북쪽 7구역 경계에 빨간 끈으로 묶어놓은 7년생 자작나무를 어떻게 찾는단 말인가? 혹여 그 나무가 나폴레옹이 원정으로 기념식수로 심어서 에펠탑만 하게 표지판이라도 세워놓았다면 모를까 말이다.

  그냥 가고싶은 곳으로 가고 보고 싶은 것들을 찾아서 보자. 까짓...... 실컷 보다가 시간되면 아무때고 나가면 되지 뭐.

  ‘아이고야. 드디어 찾았다. 여기에 숨어 있었네? 그런데 이게 뭐야? 또 프랑스어야? 언 비에일야드........ (Un vieillard et un garçon) 도저히 못 읽겠다. 앤 올드맨 앤 히스 그랜드선(An Old man and his grandson)하면 대충 알아들었을 텐데 가르숑은 무슨 얼어 죽을 가르숑이래?’

  ‘당신 매직 가지고 있잖아. 옆에다 한글로 <노인과 손자> 라고 적어.’

  ‘루브르 미술작품 훼손으로 뉴스에 나갈 일 있어? 저기 저렇게 지키고 있는데.’

  ‘생각보다 작네. 우리가 피렌체에서 봤던 것과 비슷한 크기야. 그러니까 그게 사실은 실물 크기의 복사본이었던 거야.’

  ‘그때 그냥 눈 딱 감고 샀어야 하는 건데....... 그랬으면 지금 우리 집 거실 식탁 옆에 딱 걸려있는 건데. 그때 그게 얼마였지?’

  ‘6백 유로였으니까 대략 한 8십 만원 조금 넘는 정도였지?’

  ‘그럼 지금 여기 이 그림은 얼마나 할까?’

  ‘글쎄....... 아무리 낮춰 잡아도 6백 유로에다가 뒤에 억은 붙여야 하지 않을까? 최소 6백억 유로 정도.......’

  ‘컥. 그렇게나...... 그럼 우리 집에 갈 때 피렌체 들려서 지금이라도 더 늦기 전에 사가야 하는 것 아니야?’

  ‘벌써 팔렸을 거야. 그게 여적 안 팔리고 있으면 그 미술상들은 다 굶어죽었게?’

  ‘힘들게 찾아오긴 했지만 결과적으로 오길 잘했네. 기를란다요의 진품이잖아. 오리지널이 좋기는 좋은가봐. 전해오는 느낌부터가 다르잖아. 이 그림은 가만히 보고 있으면 있을수록 마음이 차분해지고 너그러워지는 것 같아. 복제품이라도 꼭 하나 가지고 싶어.’

  ‘다시 알아보지 뭐. 기를란다요를 사실주의 화가라고 하는데 적어도 이 작품에서 만은 사실주의 보다 가족주의나 온정주의 화가라 부르고 싶어.’

  ‘그때 피렌체에서 3개월 할부로 카드를 긁었어야 했는데........ ’

 

 

  50대 초반으로 보이는 한국인 부부가 우리 옆으로 다가왔다.

  우리가 기를란다요(Domenico_Ghirlandaio)의 작품 <노인과 손자>를 보고나서 전시실 통로 가운데 설치된 의자에 앉아서 잠시 쉬려던 참이었다. 뜻하지 않게 뒷전에서 이들 부부의 대화를 그만 엿듣게 되고 말았는데 순간적으로 나의 뇌리에 떠오른 생각은 ‘앗, 고수로구나’ 하는 감탄사였다. 아마도 이들은 부부교사가 아닐까 싶다. 여자 분은 초등학교 남자 분은 중고등학교 선생님이 틀림없을 것이라는 생각이 거의 확신처럼 들었다. 더하여, 이분들은 자유여행과 예술과 역사에 대해서도 일가견이 있는 분들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왜냐면....... 고수는 어쨌든 고수를 알아보게끔 되어 있다니까? 미술 작품을 대하는 태도나 나누는 대화에서 이미 고수 분위기가 물씬 풍겨 나오지 않는가 말이다.

  부부 중에서도 특히 여자 분이 <노인과 손자> 그림에 매료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들 대화중에 등장한 ‘3년 전 피렌체 여행 중에 노인과 손자 작품을 보았다’는 대목에 주목하게 되었고, 그게 무슨 뜻인 줄을 이미 충분히 공감하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기억하기로 기를란다요 작품 <노인과 손자>는 나폴레옹이 이탈리아 전쟁을 일으켜 쳐들어가서 온갖 예술품을 싹쓸이 하며 휘젓고 다녔을 시기에, 동행했던 비방 드농이 피렌체의 미술상을 통해 정식으로 구입한 작품으로 기억하고 있다. 하여 전쟁이 끝나고 난 후 예술품의 환수 대상에서 제외되어 루브르에 당당하게 소장된 작품으로 어쩌면 기를란다요 작품 중에서 최근에 들어 가장 사랑을 받고 있는 작품이 아닐까 생각되는 작품이다. 그런데 이들은 분명히 3년 전에 피렌체에서 같은 크기의 유화작품을 보았고, 심지어 8십만원 정도에 구입을 할까 고민했었다고 했다.

  나도 피렌체에서 실제로 저분들과 똑 같은 경험을 했었다. 다만 금액에서 엄청 차이가 났다. 저분들은 카드로 긁지 못한 것을 못내 아쉬워했지만...... 당시에 나는 내가 가진 카드로는 도무지 감당이 안 되는 정도의 액수 때문에 포기해야만 했던 아픈 상처라고나 할까?

  하긴...... 그림의 사이즈 차이가 나도 엄청 나게 났으니 당연히 금액도 차이가 나겠지......

  저분들이 원한 <노인과 손자>는 원본 크기가 가로 47cm X 세로 63cm의 작은 크기지만, 정작 내가 탐냈던 그림은 가로 150cm X 세로 260cm나 되는 아주 커다란 대작이었으니 말이다. 거기다가 그림에 대해 웬만큼 알 만한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다 탐낼만한 결코 녹녹치 않은 화가의 작품이었으니........ 당시 미술 중계상이 내게 제시한 금액이 일 만 유로였다. 요즘 시세로 천 사백만원 정도 가까운 금액이다. 복제품에다가 액자 없이 대형 캔버스 그림형태로 건네주는 조건이었다. 설사 구입을 했다손 쳐도.... 이걸 한국으로 어떻게 가져가지? 누구의 그림이었는지는 곧........

  피렌체 베키오 다리를 건너서 피티 궁전에 이르는 좁은 골목길 양쪽으로 화방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다. 굳게 잠겨있거나 실내가 몹시 어둡게 되어 있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처음 보는 그림들뿐만이 아니라 눈에 아주 익은 유화들이나 조각품들이 산만하게 느껴질 정도로 여기저기 마구 놓여있고 쌓여있다. 심지어는 이불가계에서 모포를 쭉 펴서 수북이 쌓아놓고 파는 것처럼, 유화 그림들이 신문지를 펼쳐 쌓아놓은 것처럼 쌓여있다. 그런데 놀랍게도 하나하나 들춰보면 우리가 미술 백과사전에서나 보던 아주 유명한 그림들이 그곳에 쌓여있는 것이 아닌가? 유화 복제품들이다. 어느 공방의 재주가 비상한 기능인들이 거의 원본을 무색하게 만들만큼 정교하게 복제를 해 놓았다. 감탄사가 저절로 튀어 나온다.

  이런 작업 기술이나 과정 또한 미술이 시작되면서부터 이미 생겨난 문제점들이었던 것이다. 회화의 복제. 리플리카. 리메이크 등도 그리스 조각에서와 똑같은 문제를 안고 있는 것이다. 하여 언제 그리스 조각의 복제를 다시 논할 때 회화의 복제에 대해서도 함께 다루어보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해야만 하겠다.

  당신은 누구의 어떤 작품이 가지고 싶습니까?

  여기 이곳의 화방에 들어가서 원하는 작품을 말해주고 크기와 복제품의 등급 정도와 금액에 대해 흥정만 잘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의 어떤 작품이라도 진품이 부럽지 않을 정도의 완성도가 높은 그림을 소장 할 수가 있다.    그런데 상상외로 거기에 들어가는 비용이 비싸다.

  공방의 숨은 그림 실력자는 왜 불법적인 복제품으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을까? 그런 실력으로 왜 정식 화가의 길을 걷지 않을까 궁금해 한 적이 있었다.

  양지의 그림쟁이와 음지의 그림쟁이 간에 그림 그리는 기능인으로서의 재주와 실력은 별 차이가 없다. 다만 양지의 그림쟁이에게는 확실한 자기만의 개성과 철학이 있는 반면에...... 음지의 그림쟁이에게는 개성과 철학이 부재인 반면에 도전과 모험에 대한 강한 의욕까지도 결여되어 있다. 그런 차이 또한 다음에 기회가 되면 재론해 볼 계획이 있다.

  여자는 지금 한 손으로 턱을 고인 채 갸웃거리듯 고개를 약간 옆으로 재끼고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 오가는 애정 어린 눈빛의 교감에 푹 빠져있다. 세속의 삶에서 와전 무장해제 당한 듯 어떤 여유로움과 넉넉함으로 충만한 표정이다.

  어디 날카로운 칼이라도 있었으면 얼른 벽에 걸린 액자의 모서리를 북북 찢어서 그림을 꺼내 둘둘 말아서 몰래 건네주면서 어서 집으로 가지고 가라고 보내주고 싶다.

 

 

  이렇게 넓디넓고 유명한 작품들이 차고 넘쳐나는 루브르에서 저 작은 그림 하나를 찾아 기어코 드농관 그랜드 갤러리 710호 전시실에서 하염없이 망중한에 빠져버린 사람들.......

  아니나 다를까? 상당한 고수였다. 아마도 부부 교사쯤으로 여겼는데 여기에 더해서 남편의 담당 과목이 미술이 아니면 음악이 아닐까? 암튼 예술 분야인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그림의 내용과 배경을 설명하는 모습이 영판 내 스타일과 비슷하게 느껴지는 것만도 충격이었는데....... ‘우리가 지금 할아버지와 손자가 마주보고 있는 같은 공간에 서서 열려진 창문을 통해 저렇게 아름다운 바깥 풍경을 내다보면서 살랑거리는 작은 바람결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해 봐. 어디선가 바흐의 선율이 저절로 흘러나올 것 같지 않아? 그 음악은 아마.......’

  이 대목에서 나는 그만 백기를 들고 투항하고 말았다. 바흐의 어떤 작품이 흘러나왔어야 하는지를 미처 다 알아듣지 못했다. 내가 가장 취약한 분야가 바로 클래식 분야였기 때문이다. ‘왜 하필 클래식이냐고?’ 이런 분위기라면 대충 스위트 피플의 <Wonderful Day> 정도로 가늠하면 안 될까? 어디까지나 나는 대중적인(pop) 취향이라고.....’

  이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면 이제까지의 그 어느 화가나 그 어느 작품에서도 보지 못했던 등장인물의 성격과 인품까지 고스란히 드러나고 있다는 점에 있다. 그 점이 바로 르네상스인 것이다. 병색이 깊은 노인의 주름살, 사마귀, 그리고 병든 코가 덕지덕지 흉물스럽게 드러나 있지만, 노인의 모습은 결코 추악하거나 흉측한 모습이 아니다. 온통 너그러움과 자비로움으로 가득한 생생하게 살아있는 모습인 것이다. 어린 소년은 그런 할아버지의 본마음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표정이다. 애정이 가득한 눈빛으로 할아버지를 올려다 보고 있지 않은가? 할아버지의 병이 다소 걱정이 되는지 약간 근심어린 표정이다.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에만 공유할 수 있는 한없이 소중하고 따듯한 인간적인 감정만이 흐르고 있다.

  어느 날 문득 나는 이 그림을 보면서 ‘혹 기를란다요가 미켈란젤로에 대한 아쉬움을 담아 이 그림을 완성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졌던 적이 있었다.

  만약 그랬다면 노인의 표정은 그려져 있는 그대로 기를란다요의 모습이 되었을 것이다. 다만 미켈란젤로의 모습은 완전이 새로 다시 그려야 하겠지만 말이다. 유년 시절의 짧은 기간 동안 미켈란젤로가 과연 무슨 일을 겪었기에 스승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게 되었을까? 미켈란젤로는 스승인 기를란다요의 실력이 형편없다고 혹평을 했지만, 저렇게 그림 속에 그 사람의 생각과 성품까지 묻어나오게 표현해내는 당대의 실력자가 아니었느냔 말이다.

  베로키오는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제자로 두어 명성을 얻었고, 필리포 리피는 독실한 제자 보티첼리를 두어서 오명을 씻는데 도움을 얻었지만, 기를란다요는 미켈란젤로를 제자로 두었다가 그만 똥바가지를 뒤집어쓰고 말았다. 글쎄다. 지극히 내 개인적 소견으로는 미켈란젤로의 성품이 워낙 독특한테다가 인격적으로 미처 성숙하지 못함에서 생겨난 해프닝이라고 여기고 싶다.

  '어때? 새삼 세상이 참 넓다는 생각이 들지 않아?'

  ‘이곳이 지금 르네상스잖아. 희대의 천재들이 동시에 같이 등장한 것이지. 천재들끼리의 만남이란 게 반듯이 필연일 필요는 없는 것이니까......’

  ‘잘도 둘러대는 것을 보니까 천재는 천재인데...... 길을 잘못 접어든 잔머리 대왕이지 뭐.’

  흔치않은 그 작은 틈새를 놓치지 않고 비수를 꼽아대는 마눌님의 처사에 실로 기가차고 어이가 없음일 뿐이다.   함께 산 날이 바야흐로 40년이 다되어가는 마당에 아직도 남편을 적당의 수괴나 파렴치한으로 치부해 버리려 안달이니 말이다. 헐. 내 팔자여!!!!

  다른 전시실을 향해 가는 부부여행자를 쳐다보면서 ‘베토벤이라면 혹 모를까? 바흐라니? 내가 바흐나 헨델하고는 안 친하잖아?’ ‘그런데 말이야. 우리도 한 십년 전에는 저런 모습이었겠지?’ 라고 씁쓸한 표정을 담아 챠밍여사를 쳐다보았다.

  ‘두 사람이 가면서 하는 이야기 들었어? 여자가 바로 옆에 그림을 보면서 얼핏 보티첼리 그림 같다고 하니까 즉석에서 남자가 같은 기를란다요 작품이라고 하던데, 사실은 나도 보티첼리 그림이라고 생각하고 있었거든? 누구 말이 맞아? 당신은 저 그림도 알아?’

  ‘응. 기를란다요의 <방문(Visitation)> 이라는 작품이야. 참 묘한 작품이지? 기를란다요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화려한 색채나 구도가 우피치에서 흔히 보던 보티첼리 그림 같고, 보티첼리 그림이라고 하기엔 원근법이나 인체 구도가 비교적 안정적이거든, 테두리 구분선도 거의 보이지 않고..... 거기다가 보티첼리 그림과는 다르게 손이 예쁘게 잘 그려졌잖아. 기를란다요가 프레스코화에서는 전혀 다른 표현력을 보이지만 유화에서는 저렇게 필리포 리피나 보티첼리의 그림과 구분하는 게 쉽지 않을 만큼 전혀 다른 느낌의 유화를 보여주고 있단 말이야. 보면 볼수록 보티첼리만큼 어딘가 어색하지가 않고 리피에 비해서는 강렬한 터치감이 떨어진다면 아무래도 기를란다요의 유화라고 보는 게 타당하다고 생각했던 그림이야. 나도 처음엔 보티첼리라고 속았던 그림이 바로 저 그림이야.’

  ‘옆에 <노인과 손자>가 기를란다요의 대표적 작품이라면, 전혀 화풍이 다른 느낌의 <방문>은 갖다 붙여줄 사람이 보티첼리 밖에 더 있겠어? 두 그림이 어떻게 같은 작가의 그림이라고 누가 생각이나 하겠어?’

  ‘충분히 그럴 수 있어. 그렇기에 기를란다요 대표작 목록에선 거의 빠지는 것 같아.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하거나 괜한 혼란을 피하려는 뜻일지도....... 그런데 루브르에서는 이렇게 나란히 걸어놓았네?’

  ‘보면 볼수록 헷갈리네.......’

  ‘기를란다요가 굳이 왜 이 그림의 소재를 택해서 그렸을까 하는 데에도 처음부터 의문이 있었던 그림이야. 제목도 좀 아리송하고......... 여러 가지로 오해를 낳기에 딱 좋은 그림이랄까?’

  '저 그림의 내용이 무엇인데?'

  '그냥 지극히 평범한 내용의 이야기일 뿐이야. 신약성경 누가복음 1장 39절에서 시작되는 이야기가 그림의 소재가 된것이지.'

 

 

  신약성서 누가복음을 소재로 기를란다요가 그린 <방문>에는 ‘마리 야코베와 마리 살로메의 방문’ 이라는 부제가 분명하게 따라 붙어 있다.

  그럼 그림에 등장하는 네 명의 여인을 소개해 보기로 하자. 나이가 가장 많아 보이는 노란색 옷을 입은 여인의 이름은 엘리자벳이다. 머리 뒤에 광배가 그려진 것으로 보아 기독교에서 추앙받는 대단히 중요한 여인이 틀림없다. 그 앞에 짙푸른 색의 옷차림에 역시나 광배가 그려진 고귀한 여인은 누가 보아도 어머니 마리아가 분명하다. 모든 성화에서 진한 청색의 옷은 성모 마리아만의 상징이다. 그림 왼편의 붉은색 옷차림의 여인이 마리 야코베이며 오른쪽 회색 드레스를 입은 여인이 마리 살로메이다.

  간혹 어떤 가이드는 눈앞에 펼쳐지고 있는 장면을 보고는 당연히 가장 존귀하게 보이는 어머니 마리아에게 황금빛 옷을 입은 여인이 찾아와 무릎을 꿇고 문안 인사를 올리고 있다고 표현을 하는 것을 들은 바가 있다. 하지만 아니다. 성서의 내용대로라면 찾아 온 사람은 오히려 어머니 마리아인 것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내용이 신약성경에 기록된 무엇이기에 이렇게 기를란다요가 작품의 소재로 삼아야만 했느냐에 맞추어질 수가 있다. 그런데..... 특별한 게 아무것도 없다.

  오히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신기할 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기를란다요는 왜 그림에 분명하게 ‘마리 야코베와 마리 살로메의 방문’ 이라는 부제까지 붙여놓은 것일까? 그녀들의 이름이 왜 중요했을까? 도대체 그녀들은 누구인가?

 

  성서(聖書)는 구약과 신약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대에 들어 모든 기독교(천주고. 개신교 포함)는 함께 성경을 연구하고 편찬하여 통합 성경을 같이 사용하고 있다.

  그런데 좀 더 깊이 들어가면...... 천주교의 경우에 정경(正經)과 외경(外經)으로 나누어져 있는 로마 가톨릭만의 교리를 필요에 따라 꺼내 쓰기도 하고, 다시 폐기처리하기도 하는 이해도 용납도 될 수 없는 종교적 행태를 취하고 있다. 거기에 (기독교 전승) 이라는 로마 가톨릭만의 교범이 하나 더 추가된다. 흔히 연옥(煉獄)에 관한 사항이나 성모 마리아에 대한 경우가 그 같은 예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유대교. 개신교에서는 연옥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톨릭에서는 연옥이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 할 수 있다. 연옥의 개념은 중세시대 로마 가톨릭이 존재하고 다시 부활하는데 가장 커다란 밑거름으로 작용했기 때문이다.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자.

  신약성경 전체를 통 털어서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구절이 얼마나 등장하는가 한번 살펴보기 바란다. 거의 없다. 전무한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 정도도  못될만큼 실로 형편없는 정도일 뿐이다.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구세주가 태어났고 십자가에 죽음을 맞으시고 부활 승천하기까지 가족이자 어머니 입장에서 슬픈 모습으로 조금 등장하는 것이 전부라 하겠다.

  하지만 십자군 전쟁 이후에 부각된 ‘자비로운 어머니상’은 어머니 마리아를 하루아침에 예수 그리스도 못지않은 또 하나의 구세주로 성경 속에 보이지 않은 확실한 영혼의 글자로 새롭게 각인시켜 버리고 말았다. 그 결과로 지금 가톨릭은 어머니 마리아가 동정녀로 예수를 임신해 낳았으며 그 이후로 죽는 순간까지 영원히 동정녀로 살았다고 믿고 있다. 그럼 요셉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더하여 수많은 성화에 그려진 것처럼 어머니 마리아 또한 예수 그리스도처럼 부활 승천했다고 믿고 있는 것이다.

  개신교 신앙에서 이게 용납이 가능한 것일까? 어머니 마리아는 또 한 명의 새로운 신이란 말인가? 그럼 성 삼위일체설은 이제 성 사위일체로 바뀌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런경우를 보면서 유럽의 교회를 순회하다 보면 '과연 무엇이 우상숭배이며 어디까지가 우상숭배인지에 대한 의문'이 마구마구 생겨난다.

 

  신약성경 4대 복음서의 저자인 마태. 누가. 요한. 마가가 하나님의 말씀으로 기록했다는 성경의 내용을 빌어 어머니 마리아에 대해 살펴보자.

  마태복음의 저자 마태는 예수의 십자가 사건을 이야기하면서 어머니 마리아가 그곳에 있었으며 크게 슬퍼했다고 적었다. 그게 전부다. 어머니 마리아가 그 후에 어떻게 지냈으며 하늘에서 아들의 부름을 받았는지 어떤지 더 이상 아무런 기록이 없다. 심지어 마리아에 죽음에 관해서 조차도 말이다. 그러나 기록조차 없음에도 로마 가톨릭은 어머니 마리아의 부활 승천을 기정사실화 하고 있다.

  누가복음은 저자 누가는 마태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만 늘어놓는다. 길 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기간을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그런데 전혀 그런 사이가 아닌 것처럼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한 공생의 기간에 대한 이해와 말씀 전달에도 큰 차이를 보인다.

  요한복음의 저자 요한의 경우는 더 엉뚱하다. ‘가나의 혼인잔치’에서도 거론한바 있었지만, 그가 전하는 이야기는 대부분 혼자만 목격했거나 경험한 이야기를 늘어놓기 일쑤다. 가나의 혼인잔치 예처럼 요한만이 예수와 어머니 마리아와 열 두 제자가 모두 함께 가나의 혼인잔치에 참석해 포도주가 모자라는 난처한 경우를 목격하고 항아리에 물을 채워 포도주로 변하게 하는 기적을 예수께서 일으켰다고 적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런 중요한 사건을 요한을 제외하면 아무도 입도 뻥끗하지 않고 있으니 말이다.

  마가복음의 마가를 보자면....... 복음서 전체를 아무리 샅샅이 뒤져보아도 어머니 마리아에 대한 특별한 이야기가 아무것도 없다. 그저 스승인 예수의 어머니가 마리아라는 정도일 뿐이다.

  그렇다고 정경에서 배제된 외경의...... 도마서나 막달라마리아서를 찾아보면 새로운 이야기가 나오느냐? 그런 내용이 있었다면 2천 년 전에 벌써 정경에 포함시켰을 것이다.

  <마리 야코베와 마리 살로메의 방문> 이라는 부제가 붙은 기를란다요의 그림은 과연 어떤 의미를 담고자 그렸던 것일까? 가로 167cm X 세로 172cm의 이 그림은 결코 작은 그림도 아닌 데 말이다.

  이 그림의 내용을 이야기하자면 신약 성경의 누가복음만으로는 이해가 절대 부족하다.

  외경의 이야기는 물론 가톨릭만의 기독교 전승도 필요하고, 또 당시 예루살렘지역 유대인들에게서 전해져 온 소문까지도 필요해진다. 아마도 기를란다요도 그랬을 것이다.

  그림속의 노란 옷을 입은 엘리자벳은 세례자 요한의 어머니다. 그녀는 사내아이를 임신했는데 계시 받기를 자신의 몸속에 아이가 장차 오실 메시아를 영접하고 안내하기 위해 길을 열고자 왔다고 했다. 그 정도 계시였다면 장차 자신의 아들이 걸어갈 길과 그 길의 끝에 대해서 어느 정도 충분히 알 수가 있었으리라.

  어느 날, 어머니 마리아가 불쑥 나타났다. 바로 기를란다요가 그린 그림의 내용이다.

  성서의 내용에 따르면 눈앞에 나타난 마리아의 모습을 보고나서야 마리아가 임신했음을 알아차렸다고 적혀있다. 동시에 그 아이가 장차 태어날 메시아라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했다. 어느 학설에는 엘리자벳과 어머니 마리아가 친자매라고도 하지만, 내 생각엔 아주 가까운 일가친척 자매였을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사촌지간 자매정도가 아니었을까? 두 사람은 함께 자랐고 함께 어머니가 되었다. N.카자나차키스의 표현을 빌리자면 그런 덕분에 세례 요한과 예수는 함께 장난치고 함께 나뒹굴며 함께 자라난다. 다빈치의 <암굴의 성모>를 비롯한 수많은 성화에서 그렇게 형제처럼 언제나 함께 등장한다.

  이날의 어머니 마리아 방문에는 두 여자가 동행했다.

  부제에 적혀있는 것처럼(La Visitation avec Marie-Jacobie et Marie-Salomé), 마리 야코베와 마리 살로메가 등장한다.

  당시부터 전해 내려온 여러 가설들을 종합해 보면 어머니 마리아의 친정 엄마인(예수의 외할머니) 안나(앤)에게는 세 명의 딸이 있었다고 한다. 바로 지금 등장하는 세 여성이다.

  큰딸 어머니 마리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어머니가 되고, 마리 야코베는 바로 사도 야고보의 어머니가 된다. 다른 여성 마리 살로메에 대해서는 더 이상 전해지는 기록이 없다.

  근데 여기에서도, 일부 학자에 의하면 야고보는 사실 예수의 친동생으로 알려져 있다. 이 때문에 어머니 마리아가 영원히 동정녀일 수 없다는 증거로 제기되기도 해왔던 것이다. 예수와 야고보가 친형제와 사촌인 경우의 차이는 곧...... 어머니 마리아가 영원한 동정녀인지 아닌지의 구분에 크게 작용할 수가 있는 경우가 되어버린 것이다.

  이 상황은 결코 어떤 (루크레치아의 죽음)과 같은 신화적인 소재를 가지고 있거나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기독교적 위대한 사건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 전혀 아니다.

  그럼에도 기를란다요는 왜 이 소재를 저렇게 큰 그림으로 남겨야만 했을까?

  나는 그것이 참으로 궁금했다.

혹....... 엘리자벳이 장차 태어날 자신의 아들 세례 요한의 삶이 조카인 예수의 성공을 위해 반듯이 희생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야코베와 살로메를 통해 어머니 마리아에게 정해진 운명에서 요한을 빼내달라고 강력하게 요청하자, 이날 어머니 마리아가 엘리자벳을 직접 만나 설득하기 위하여 찾아왔다고 하면........ 좀 상황이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어쩌면..... 내 생각이 맞는 것일까?

  N.카잔차키스라면 내 생각에 동의해 줄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댄 브라운에게 물어볼까?

 

  루브르 박물관은 기를란다요의 (La Visitation avec Marie-Jacobie et Marie-Salomé) 작품에 ‘MR 240’의 고유 번호를 붙이면서 별도의 란에 ‘군사정복(1812)’ 라고 적어 놓았다. 참 재미있는 표식이다. 참으로 ‘프랑스다운 발상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솔직함도 있겠지만...... 이 얼마나 뻔뻔스러운 프랑스다움인가 말이다.

  ‘군사 정복.(1812)’

  나폴레옹을 따라서 이탈리아 정벌 전쟁을 벌였던 1812년에 강제로 빼앗아 루브르 박물관에 들어온 작품이라는 설명인 것이다. 워털루 전쟁에서 패한 후, 빈 협약에 의해서 모든 것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되돌리도록 결정되었는데, 그 환수 과정에서 절반 이상의 약탈 문화재와 미술품들이 원주인에게 되돌아가지 못했던 것이다. 훼손이 심한 상태였거나, 상속자의 사망으로 찾아갈 주인이 나타나지 않거나, 너무나 방대한 물량이었던 관계로 빼앗긴 사람들이 본래 자신의 소유임을 스스로 입증해야만 하는데 미처 입증을 할 수 없는 문제가 다반사였기 때문이다.   현재 루브르 소장 유물과 미술품의 절반 이상이 이때 주인이 찾아가지 못한 것들이다. 바로 여기 이 기를란다요의 그림이 그런 경우에 해당한다.

  그것을 저렇게 당당하게 드러내놓고 자랑하다니.......‘군사 정복(1812)’ 이라고 말이다.

  갈채와 찬사를 보내야 하는걸까? 아니면 침을 뱉어 주어야 하는 걸까?

 

  '아이고, 저 눈빛 좀 봐. 교회를 비판하고 비방할때는 눈이 아주 번쩍번쩍 빛나요? 아주 신바람이 났어요?'

  '그럴리가........ 나도 엄연히 세례받은 기독교인인걸.'

  '무늬만 기독교인 이면서...... 그딴 소리 자꾸 들으면 나는 또 밤새 우리 마귀를 용서해 주십시요 하고 백번 천번 기도해야 하니까...... 오늘은 그런 이야기 여기서 그만.'

  '이제 카라바조를 보러 가야하는데........ 카라바조가 성모 마리아 그림만 그렸다 하면 작품 인수가 거부되네. 그 이야기를 이제부터 해야하는데......'

  '그건 시라쿠사에서 들어서 기억하고 있지. 모델이 문제인 거여. 모델이......'

  '헐. 어느새 우리 마누라도 고수가 되어 버렸구나.'

  '우리집에도 카라바조 작품 하나 걸을까?'

  '내가 피렌체에서 벌써 알아봤어. 비싸.'

  '얼만데?'

  '캔버스상태로 복제품이 일만 유로. 천 삼백 오십만원!'

  '카라바조 빼고. 다른것으로......'

  '조르조네.'

  '조르조네는 얼만데?'

  '평생 그린 그림이 다섯 작품 밖에 안 남았어. 그게 문제야.'

  '빼. 무조건 비쌀거 아니야?'

  '그냥 내가 그려서 걸어 놓을께.'

  '어느 세월에?'

  '괜찮은 모델만 구하는 대로.....'

  '죽을래?'

 

     --- 다음 이야기에서 이어 나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