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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멜랑꼴리 오딧세이> 생트 샤펠과 루브르 2

by 피안재 2023. 4. 18.

 

 

  성년으로 자란 루이는 왕위에 올라 루이 왕(루이 9세)이 되었다.

  우여곡절 끝에 오랜 시간과 막대한 황금과 지극정성을 쏟아부은 결과로 마침내 성유물을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하게 되었다. 이런 업적을 기반으로 훗날 그는 성인의 반열에 오르게 된다. 그의 인생은 한 마디로 성유물을 얻기 전과 얻은 후로 나뉘어 진다고 볼 수도 있겠다. 하여 이쯤에서 부터 우리는 지금 프랑스 인들이 그를 가리키며 가장 쉽고 친근하게 입에 떠올리는 이름인 생 루이(Saint Louis)로 바꾸어 부르도록 해야겠다.

  생 루이가 성유물을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1242년) 시키고 난 이후로 하루가 멀다하고 유럽 전역으로 부터 순례자들이 물밀듯이 쏟아져 들어왔다. 순례자들의 마음 속에는 하나 같이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유물에는 어떤 알 수 없는 신기한 기운과 놀라운 효능이 있어서 유물을 향해 기도를 올리거나 만지게 되면 병든 자를 치유해 주고 기도하는 사람과 가족과 도시 까지도 영험한 기운이 보호해 준다는 믿음이 확실하게 존재했다. 그런 믿음이 어디에서 부터 시작되었고 어떻게 드러났는지에 대해서는 이제부터 차차 이야기가 되겠지만........ 그것은 더도 덜도 아니라, 누군가가 대학에 입학 좀 시켜 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면서 찰떡을 그 대학 담벼락에 붙이는 행위나, 악운이 겹치면 두둑히 복채를 지불하고 굿판을 벌이는 일이나, 흘러가는 강물에 촛불을 띄우며 기도하는 행위나, 포장마차에서 소주 첫잔을 슬쩍 흩뿌리면서 고시래를 외치는 행위나, 부처님 앞에서 백 팔배를 올리는 치성이나, 새 차를 사면 막걸리를 뿌리며 안전운전을 기원하는 등 지극히 평범하면서도 일상적인 행위들과 하나도 다를 바가 없는....... 미신으로 친다면 모두가 미신일 것이요, 우상숭배로 친다면 모두가 똑같은 우상숭배요, 그것들 모두를 다 합리적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나름 신앙 행위의 한 단면이라고 한다면 분명 그런 모든 것들도 분명 자신들의 믿을을 실행하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나는 생각하다. 유일신을 믿는 특별 종교는 괜찮고 나머지는 모두 미신이며 우상숭배라는 그런 망발을 함부로 내뱉지 말기를 나는 진심으로 바라고 있다. 지금 지구상에 그 어떤 종교이든 미신과 우상숭배의 잣대를 들이대면 온전하게 순수하고 정령 성스러운 종교는 단 하나도 없다고 나는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내로남불이 아니라 내종남종을 깨닫고 실천해야만 한다. 내 종교는 온전하고 남의 종교는 미천하다고 폄하하지 말라. 내 종교가 신성하면 남의 종교 또한 더 없이 신성한 것이다. 내 종교와 신앙이 온전하게 영원하기를 원한다면....... 남의 종교에 대해서 존경과 배려하는 마음을 먼저 가져라. '이것이 지극히 높은 곳에 계신 그 분의 가르침이다' 라고 나는 자신있게 주장 할 수 있는...... 실은 한없이 덜 떨어진 어설픈 기독교(개신교) 인이다. 모든 종교의 뿌리는 우선 나를 중심으로 한 구복신앙에서 시작되었다고 나는 생각하기 때문에..... 위에서 거론한 저러한 행위들을 대분 이해하고 받아들이려 노력하고 있다.

  끝없이 밀려드는 순례자 행렬을 지켜보면서 생 루이는 성유물을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시킨 것을 땅을 치며 후회했다.

  생 루이가 오랜 시간동안 온갖 역경을 극복해 나가고 실로 엄청난 돈을 쏟아부으면서 까지 성유물을 가지고자 했던 것은 결코....... 성유물의 신성한 기운이 찾아오는 순례자들의 병을 치료해 주고 그들의 가족이나 지켜달라고 하는 지극히 허접하고 사사로운 일에 쓰이라고 기를 쓰고 구한것이 결코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유물의 신성한 기운이 전혀 다른 곳에 쓰이기를 간절히 원했기 때문에 끝내 성유물을 차지하고 만것이다.

  생 루이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476년)에서 부터 지금 그가 살아가고 있는 13세기 까지를 진짜로 살아 숨쉬고 있는 진정한 역사라고 생각했다. 바로 우리가 흔하게 말하는 중세 시대의 최고 전성기를 말함이다. 바로 이 중세 시대 1천 년의 배경으로 등장하는 것이 그리스도 교(로마 카톨릭) 라는 사실을 누구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중앙 아시아 지역으로 남하 해 온 북방 흉노족의 침입으로 발트해 연안에 집단 부족 생활을 하던 게르만 족이 대 이동을 하면서 뿔뿔히 흩어졌다. 게르만 족의 한 부족이었던 서고트족이 이탈리아 반도로 쫓겨 오더니 얼떨결에 부패하고 타락한 서로마 제국을 무너트렸다. 서로마 제국의 영토는 약탈과 방화로 황페화 되었지만 교회(로마 카톨릭) 만은 하늘에 도우심인지 제법 온전하게 고스란히 살아 남았다. 뿔뿔히 흩어진 유민들에게 교회라도 있어서 추위를 피할 수 있었고 당장 허기를 면할 수 있었으며 공포와 피곤함에 지친 마음과 육신을 잠시나마 편히 쉴수 있는 곳이 유일하게 교회였던 것이다. 사람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새롭게 살아나갈 터전을 마련하였고 모든 일을 교회에서 회의를 통해 결정했다. 그런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그들의 어려움에 동참하며 조언을 해주고 기꺼이 힘을 보태준것이 바로 교회였던 것이다. 이제 교회는 종교적 영역을 넘어서 세속의 일에고 깊게 관여하기 시작했고 최고의 중심이 되었던 것이다. 교회(로마 카톨릭)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무한하신 사랑과 자비가 제단 앞에 나아가 무릎을 꿇고 자신의 모든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고백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성실하게 노력하는 사람들에게만 은총을 내리시고, 더하여 최후의 심판 날에 이 험악한 세상과 죽음의 공포로 부터 구원하시며 영원한 생명을 내려 주실것이라고 역설했다.

  그랬는데 그것이 정말로 기적처럼 모든 유럽 사람들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즉시 효과를 발휘하여 복음이라는 만병통치약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모든 죄를 대속하셨고, 사흘만에 부활하심으로 이미 영원히 구원의 약속이 실행되었음에도..... 교회는 아 사실을 철저하게 숨기고, 그런 이야기꺼릴랑은 두껍운 마대 자루에 담아서 그 끝을 알 수 없을 정도로 깊고 깊은 지하 동굴속에 빠트려 숨기고는 꽁꽁 파뭍어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왜 그랬을까?

  사람들이 교회의 이야기를 무조건 맹신하게 되었고 교회에 순종하는 모습들을 보이자...... 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은 어떨결에 대충 제조해서 먹인 약발이 그야말로 엉뚱한 효과를 냈다고 판단해 버린 것이다. 교회 존재의 이유와 가치와 덕목을 점차 까먹게 되었다. 부패와 타락의 달콤함이 교회 최고지도자들의 이성을 마비 시켰고 점차 세상을 아비규환 속 지옥의 구렁텅이로 끌고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성스러움은 어디에도 없었다.

  생 루이도 교회가 온 세상을 소수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제멋대로 좌지우지 하고 무조건적으로 복종하는 것이 모든 사람들의 본분이며,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고 허무맹랑한 무오류설을 앞세워 정당화 시키던 중세 시대에 그런 교육을 받았고 그런 가치관 속에서 성장한 사람이었다.

  하지만, 아랍인 장사꾼 마숑을 만났던 것처럼 신문물을 받아들이고 중흥시켰던 비잔틴 제국에서 흡수된 지식과 그곳 출신의 학자들을 만나면서, 지금의 기독교 세계(유럽) 밖에도 위대한 문명을 가진 또 다른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초기 기독교 이전에 이미 고대 그리스와 고대 로마라는 찬란한 문명이 분명 존재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으로 그리스와 로마 문명이 사라졌고, 그 사라진 자리에 초대 교회의 흔적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새롭고도 엉뚱한 교회가 그 자리를 차지하는 실로 엄청난 권력을 바탕으로 아주 특별한 교회만의 세상을 차지하게 되었는지가 무척이나 궁금했다. 하지만....... 주변의 그 누구도 그런 교회의 내막에 대해서 진실을 이야기 해주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그것은 건드리거나 파헤치면 안되는 절대 금기의 영역이었다. 교회는 그것을 사탄의 영역이라고 못을 박아 버렸던 것이다.

  그랬음에도 생 루이에게는 그런 비밀의 영역을 넘나들 수 있는 비밀병기가 하나 있었다,

  마숑이 바로 그런 비밀 병기였다. 마숑은 온 세상을 두루두루 모두 다녀 본 사람이었으며, 드러내진 않았지만 루이는 그가 과거에 상당한 경지에 이르렀던 학자라고 생각했다. 그는 고대 그리스에서 시작하여 기독교가 세계를 지배하기 시작한 그 이전의 역사를 고스란히 잘 꿰뚫어 보고 있었다. 더하여 유대민족의 역사와 이집트 문명에 대해서도 조예가 깊었다. 마숑은 소재가 무궁무진한 그야말로 타고난 이야기 꾼이었던 것이다. 그가 트로이 전쟁에 대해서 이야기의 실타래를 풀어놓기 시작했을 때, 루이는 마숑이 누군가가 지어 낸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그가 호머 자신일 지도 모른다는 생각까지 떠올렸을 정도였다. 그는 이슬람의 성지인 메카의 신전을 가 보았고, 이집트를 여행하였으며, 알렉산드리아에 알렉산더가 세웠었다는 도서관에 대해서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고대 그리스의 문염이 얼마나 찬란했는지는 한 동안 밤하늘에 별자리를 세어가면서 밤을 새워 이야기를 듣기도 했다. 리베리아 반도 에스파냐 톨레도에는 이슬람이 세운 대학이라는 것이 있는데, 그곳에선 나이어린 인재들을 발굴하여 최고의 학자들을 초빙하여 체계적인 교육을 시켜오고 있는데 머지않아 그곳을 통해 배출된 인재들이 크게 빛을 발하게 될 것이라는 대목에서는 적지않게 충격을 받기도 했다. 도대체 마숑이 무엇을 하다 파리까지 오게 된 사람이었을까가 몹시 궁금했지만 루이는 끝내 그런 질문을 입 밖에 내지 않았다. 첫 만남에서 이미 서로에 대한 신분과 과거에 대해서는 묻지 않기로 묵시적으로 합의가 있었기 때문이다. 먀숑은 본인의 말처럼 그냥 저잣거리에 흔하디 흔한 일개 장사꾼일 뿐이었다. 하지만 그가 생 루이에게 끼친 영향은 대단히 컸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영향이라면 아마도 유대의 역사와 로마에 기독교가 유입되고 지배권력이 되는 과정에 대한 것이었다. 이야기를 모두 들은 생 루이는 한동안 자신의 방에서 두문불출 깊고 깊은 고뇌에 잠겼다. 아무도 그의 곁에 다가갈 수가 없었다. 며 칠만에 문을 열고 밖으로 나온 생 루이는 그 길로 마숑을 찾아 갔다.

  '마숑. 우리 처음 만났을때 내가 꼭 가지고 싶은 것이 하나 있다고 했지요? 기억 하나요?'

  '세상에서 가장 귀한것을 가지고 싶다고 하셨습니다.'

  '그래요. 나에게 지금 그것이 꼭 필요해요. 당신이 구해 주셨으면 해요.'

  '말씀 하시지요. 무엇이든 최선을 다해 구해보겠습니다.'

  '가시 면류관을 가지고 싶어요,'

  무거운 침묵이 한동안 두 사람 사이를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고뇌에 찬 표정 끝에 마침내 마숑이 입을 열었다.

  '준비를 마치는 대로 서둘러 콘스탄니노플로 떠나겠습니다. 중간 중간에 인편으로 서신을 보내드리겠습니다.'

  '떠나시기 전에 최대한 많은 경비를 준비하겠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물건을 당장 황금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계신것은 아니겠지요? 일단은 그것이 지금 어디에 어떻게 있는지를 먼저 알아야 할것입니다. 또한 저의 생각으로는 아무리 황금을 많이 가지고 있다해도 아무나 성물을 얻을 수는 없다고 알고 있습니다. 하늘의 뜻과 인연에 맞아야만 가능하리라 생각됩니다. 우리 사이의 새로운 거래를 위해서 제가 할 수 있는 역활을 하고자 할 뿐입니다. 그리고....... 원하시는 물건이 당장 제 손에 없는 마당에 어떻게 대금을 받을 수 있겠습니까? 더군다나 제가 그 물건을 찾을 수 있다는 보장 조차도 할 수 없는 마당에 말씀입니다. 요청 하셨으니 가서 찾아 보겠습니다. 최소한 구할 수 있는 방법이라도 알아 보겠습니다. 설사 성물을 구해 가져 오지는 못하더라고, 찾아서 구할 방도라도 가지고 돌아 온다면........ 그때 이번 여정의 경비를 계산해서 요청하겠습니다.'

  '부디 몸 조심 하세요.'

  '이제까지 오랜 세월 해 온일이 떠돌이 장사꾼이라 방금 이곳에서 이루어진 거래만 철저히 비밀에 붙혀 진다면 특별히 더 위험할 것이 제게는 없습니다. 조카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드리겠습니다.'

  '저에게 그것이 왜 필요한지, 또 어디에 쓰려고 하는지 아시지 못하지 않습니까? 제 가슴속에 담아 놓은 꿈일 뿐인데 굳이 감추고 지켜야 할 비밀이 더 어디에 있겠습니까? 혹여, 알아내지 못하신다 하여도 꼭 돌아오셔야 합니다. 제게 해주실 이야기가 아직 많이 남아있지 않습니까?

  마숑은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일년을 머물렀다.

  마숑은 콘스탄티노플을 떠나 베네치아로 갔다. 그곳에서 여섯달을 머물렀다.

  마숑은 베네치아를 떠나 다시 콘스탄티노플로 갔다. 그곳에서 다시 여섯 달을 더 머물렀다.

  파리를 떠난지 이 년을 훌쩍 넘기고서야 마숑이 파리로 다시 돌아 왔다.

  마숑이 돌아 와 생 루이를 면담한지 한 달이 지나서 왕궁의 금고에서 황금 궤짝이 어디론가 실려 나갔다. 정확히 십 삼만 오천 루블이었다.

  그리고 삼 년이 지나서 마침내 성유물(聖遺物)이 생 루이의 품안으로 들어왔다.

  프레보(Prevot de paris) 라는 직책이 프랑스 역사에 처음 등장한 것은 로베스 2세 재임시였다.

  샤를마뉴 대제가 파리(Paris)를 버리고 독일과 벨기에 국경의 아헨(Aachen)으로 수도를 옮기면서 부터 그야말로 파리는 주인없는 버려진 도시가 되어 버렸다. 그러자 대서양 건너 북쪽 끝자락 아이슬란드의 바이킹들이 남하하면서 세느 강을 따라 올라와 파리까지 침공하기에 이르렀다. 사실은 파리 침공과 약탈이 바이킹의 목표는 아니었다. 파리 상류로 세느 강을 따라 비옥한 땅과 부유한 영주들의 성이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에 그저 지나가게 길을 비켜달라는 것이 바이킹의 목표였다. 하지만 파리에 남아있는 사람들의 생활 또한 상류의 부유한 영주들과 아주 밀접하게 상호 연관이 되어있었던지라 함부로 길을 열어 바이킹의 무자비한 약탈이 마냥 자행되도록 허락할 수만은 없는 상황이었다.

  이때부터 파리 시민들의 바이킹에 대한 저항 전쟁은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바이킹은 해마다 가을 추수가 끝날 즈음이면 쳐들어 왔다. 추은 아이슬랜드에서 겨울을 나기 위하여 월동준비에 들어간 것이다. 식량 조차도 자급자족이 되지 않는 바이킹들의 겨울나기는 유럽으로 부터 얼마나 약탈을 많이 해 가느냐에 따라 따뜻할 수도, 아니면 길고 혹독할 수도 있기 때문에 무자비 할 정도로 가혹하게 수탈을 해 갔다. 파리 시민들의 저항은 어떨때는 싸워 물리치기도 하고, 패하여 상류 지역이 약탈되기도 했다. 그 피해가 커지자 상류 지역의 왕국들이 먼저 가을이 오면 군대와 전쟁 물자를 지원해 오기도 했다. 파리의 심장 시테 섬은 점점 요새로 탈바꿈하게 되었고, 강 건너에 새롭게 요새를 건설한 것이 바로 루브르 성이었다.

  이런 연합체 성격이 모여 선출직으로 위그 카페를 왕으로 추대하였고, 그 왕위가 아들 로베르에게 세습되면서 등장한 것이 카페 왕조로서 이때부터를 진정한 지금의 프랑스라고 보고 있다. 그 다음 왕위에 오른 로베르 2세는 북방의 바이킹을 감시하면서 대서양 연안까지 두루 관할하고 자주 출정을 해야하다보니 왕실이야 근위대가 알아서 스스로 지켜나가겠지만, 프랑스 왕정이 안정되고 나날이 발전하면서 하루가 다르게 파리로 수많은 사람들이 계속 모여들자 치안 부재에서 파생되는 사건사고가 끊이지를 않고 일어났다.

  이렇게 해서 생겨난 직책이 바로 프레보(Prevot) 이다. 로베로 2세는 능력있고 용맹하고 과감성을 가진 신하를 뽑아 프레보에 임명하면서, 왕궁 안에서 벌어지는 왕실 문제만은 제외하고, 파리 전체의 모든 일에 관해 정해진 벌률에 따라 엄중하게 치안을 유지하게끔 명령했다. 프레보에게는 별도의 무장 병력이 주어졌고 이를 필요에 따라 독자적으로 운용할 수 있는 권한까지 주어졌다. 지위는 장관급으로 쉽게 오늘날에 비추어 알기 쉽게 표현한다면........ 지금의 파리 경찰 서장이다.

  시테 섬을 중심으로 삼은 파리에 드나드는 사람과 대부분의 물자들은 시테 섬의 우측 너른 모래톱을 이용하는 선박편을 주로 이용하였기에 그곳이야말로 항상 사람들로 가득 불비고 넘쳐나는 당시로서는 가장 파리다운 장소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하여 당연하게 초기 프레보들은 이곳에 사무실을 차리고 상주하면서 파리의 치안을 맡아 다스렸다. 당연히 별도의 특별한 무장 군대가 주둔하는 장소이다 보니 그것은 하나의 작은 요새로 꾸며질 수 밖에 없었다. 사람들은 이곳을 요새를 가리키는 용어로 '그랑 샤틀레' 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제 프레보의 사무실에서는 파리의 치안 유지를 넘어서 벌어진 각종 민.형사 사건을 심리하고 재판까지 하게 되었으며, 나아가 심야의 치안 유지를 위해 야경대를 구성해 운영하기까지 이르렀다. 파리의 경찰서이자 법원이자 소방서이자 주민 쎈터의 역활까지 도많아서 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리는 점점 커져갔고 인구는 기약없이 늘어만 갔다. 시장이 한없이 커가면서 이제는 타도시와 다른 나라들과의 교역까지 판이 커져도 너무나 커져버린 것이다. 이제는 파리 시민들만의 치안 문제가 아니라 국제적 분쟁의 소지가 있는 문제들까지 새롭게 생겨났다. 그러자 점점 거대한 세력으로 확장한 상인들이 자신들만의 조합과 스스로의 규칙과 법을 만들어 독자적으로 활동하는 상황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제 치안 업무를 위주로 생겨났던 초기 프레보의 범주를 훨씬 벗어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를 해결하려고 뛰어든 사람이 바로 하늘이 내리신 다이아몬드 수저 루이 왕(루이 9세) 였다.

  루이 왕은 애초의 프레보에게 보다 많은 숫자의 잘 훈련된 무장 병력(경찰)을 확보케 하고 오로지 치안 확보에만 주력하도록 만들었다. 바로 지금의 파리 경찰서장이라 하겠다.

  그리고는 상인 조합과 관련된 사람중에서 상업과 세제와 분배에 대해 고른 지식과 책임의식이 있는 사람을 골라서 또 한 명의 프레보에 임명했다. 오늘날의 파리 시장이 탄생한 것이다. 치안 유지 외에 경제활동을 포함한 사회적 모든 분야가 그가 담당해야 하는 일인 것이다. 신임 프레보에게는 4명의 보자 부프레보와 독자성을 인정받는 24명의 심판관이 배속되었다. 법률부, 사회부, 경제부, 보건부서가 엄연하게 다로 분리되어 독자성을 가지고 일을 하기 시작했으며, 그를 총괄하는 프레보가 새로 생겨난 것이다.

  바로 오늘날의 정부 형태를 처음으로 갖추게 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나름으로 입법 사법 행정부의 독립을 이룬 군주가 바로 루이 왕이었다.

  그리고 그들 두 명의 프레보가 합심하여 군주를 위해 일할 수 있게끔하게 하기 위하여 만든 건물이 바로 지금의 파리 시청이다.

  파리를 여행하다가 시테 섬 건너편에 이르러 길거리 표지판에 (Hotel de Ville)라는 글자를 보고 나면 저절로 고개를 들게되고, 눈 앞에 드넓은 광장과 아주 거대한 놀랄만한 크기의 건물이 놓여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그러면 '빌라 호텔? 무슨 호텔이 이렇게나 커?' 라고 하기가 쉽상이다. 실제로 그런 푸념을 터트리는 한국 여행자를 목격하기도 했다. 프랑스의 건축물에는 호텔이 들어가는 이름이 무척 많이 있다. 그것은 '숙박업소 호텔' 이 아니라, 그냥 큰 규모의 건축물에 붙여지는 이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면 이해 하기가 쉬울 것이다. 프랑스 어권의 모든 나라에서 (Hotel de Ville)는 영어권에서 말하는 (City Hall)이고 곧 지금의 파리 시청인 것이다.

  생트 샤펠을 나와서 곧바로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하려던 것이었는데........ 시청 부근 공원 담벼락에 붙은 버스 정류장에서 우리 숙소가 있는 갈리에니까지 직접 갈 수 있는 시내버스가 있다고 해서 미리 확인해 두기 위하여 오다보니 갑자기 파리 시청사가 눈 앞에 짠하고 나타나 버린 것이다. 이왕 여기까지 왔으니 다시 오더라도 일단은 한 번 둘러보고자 하였고, 대충은 밖에서 보았으니 다시 서둘러 루브르로 가야 하겠다.

  파리 시청사의 역사와 프랑스 혁명은 다음 방문에서.........

공지! <생 루이의 역사는 프랑스 역사에서 대단히 중요하고, 생 루이 역사에서는 성유물(聖遺物)을 빼놓고는 한 걸음도 진도를 나갈 수가 없다. 그런데 이 '한참이나 심하게 불편한 성유물 이야기'를 하자니 그 이야기 꺼리의 분량 또한 상당하다는 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하여 이번 이야기에서는 상당 부분을 그냥 타 넘고 생 루이의 이야기도 함축해서 간략하게 넘어가는 것으로 일단 마감을 하고는, 서둘러 루브르 이야기로 넘어가야만 할까보다. 루브르 또한 어디까지 어떻게 어떤 선에서 짚고 넘어가야 할 지가 벌써부터 머리가 아플 지경으로 고민이 되지만 말이다. 대신 '생트 샤펠과 루브르 2' 이야기가 마무리 되는 대로 곧바로 이어서 다음 이야기엔 그 '매우 불편한 성유물의 진실'에 대해서 별도의 단원으로 짧게나마 짚어보고 나서 그 다음이야기로 넘어가기로 하겠다. 이제부터 생 루이에 대한 이야기 역시 줄이고 또 줄여서 간략하게 짚고만 넘어가고...... 혹 있을지 모르겠지만 다음 기회를 엿보아야 할 것만 같다.>

 

 

 

 

  구약의 시대(舊約聖書)가 끝나고 신약의 시대(新約聖書)가 바야흐로 도래했음에도 여전히 유대민족은 오만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창조주께서 새로운 세상을 여시기로 하시고 그의 독생자를 세상에 보내셨음에도 그 분을 알아보지 못했을 뿐만이 아니라 말씀으로 하나님의 새로운 계율을 전하였음에도 이를 모두 거부하였다. 그들은 일관되게 먼 과거에 하나님께서 스스로 유대 민족을 선택하셨다는 말만 되풀이 하였으며,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총이 오로지 유대 민족에게만 한정되어 영원히 적용된다고 주장하면서, 그릇된 선민의식 속에서 결코 오만함을 내려놓지 않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가 열렸으며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에게 골고루 영원한 구원의 약속이 내려졌음을 전하자, 피해망상에 떨던 오만한 사람들은 구세주를 끌어다가 십자가에 못 밖히도록 내몰고 말았다. 하나님께서 유대 민족에 대한 관심을 모두 거두셨다. 그러자 로마 제국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정복해 버렸다. 수 천년을 이어 내려오던 유대민족의 성지 예루살렘이 이민족의 군화발에 마구 짓밟히고 말았다. 교회는 부서지고 허물어졌으며 유대민족의 터전은 하루아침에 모두 불에 타 사라져 버렸다. 건장한 남자들은 끌려가 노예 시장에 팔렸으며 남은 가족들도 모두 예루살렘에서 쫓겨나고야 말았다. 성지 예루살렘은 참혹한 잔해만 겨우 남은 폐허로 변해 버리고 말았다.

  300 년의 시간이 흐르고 나서 예루살렘으로 사람들이 다시 하나 둘 모여들어 도시가 다시 생겨났다. 그중 상당수가 유대인들이자 다시 반란을 염려하여 로마 군대가 주둔하면서 감시와 탄압이 다시 반복되기 시작했다. 유대인들에겐 참으로 가혹한 시간이었다.

  로마에 살던 한 여인이 어떤 귀한 부름(?)을 받고 머나먼 예루살렘으로 향했다.

  로마의 군대가 휩쓸고 지난간 예루살렘은 다시 복구될 수 있다는 희망 조차도 가질 수 없을만큼 더럽혀져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고난을 당하시며 십자가에 못 박히신 골고다 언덕에는 로마 제국의 히드리아누스 황제가 아프로디테 신전을 이미 세워놓았다.

  고귀한 여인은 이 신전을 허물고 땅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흘간 묻히셨던 무덤을 찾아냈다. 그리고는 모두가 이제껏 까맣게 잊고 지냈던 예수 그리스도와 연계된 성물(聖物)을 여러가지 발굴해 냈다. 그리고 나서 그 무덤 위에 교회를 세웠다. '그리스도 무덤 교회(Holy Sepulchre Chuch)'가 바로 고귀한 여인이 세운 교회이다. 고귀한 여인은 발굴한 성물을 나누어 일부는 발굴 장소인 무덤 교회에 안치 시켰으며, 일부는 콘스탄티노플로 보냈고, 일부는 직접 가지고 로마로 돌아왔다. 로마 테르미니 역 남쪽 인근에 '예루살렘 성 십자가 성당(Santa Croce in Gerusalemme)'을 세우고 그 안에 성물을 안치 시켰다. 이 모두가 4세기 중엽, 그러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사건에서 300년이 지나고 벌어진 일이었다. 때는 바야흐로 지하에서 억압받고 핍박받던 기독교가 로마 제국으로 부터 공인을 받아 밝은 세상으로 나온 시기였다. 스스로 기독교의 대표성을 찬탈하다시피 거머쥔 로마 카톨릭의 세상이 바야흐로 도래했던 것이다. 로마 제국의 후원아래 천국의 열쇠를 위임 받았다는 로마 카톨릭 앞에는 거칠것이 없었다. 그들은 최고의 정점을 향해 무한 속도로 내딛는 브레이크가 고장난 자동차와도 같았다. 오만과 독선이라는 스스로가 파놓은 깊은 수렁에 빠져들고 만 것이다.

  로마 카톨릭의 오만함 또한 지난날 하나님을 진노하게 만들었던 유대민족의 오만함과 비교해 그리 다를 것이 없었다.

  하나님의 그런 불편한 심기가 고귀한 여인에게 고대로 전해졌음일까.......... 고귀한 여인은 아들을 콘스탄티노플로 떠나 보내면서 그 이사짐 속에 자신이 성지 예루살렘에서 가져왔던 유물 중에서 가장 고귀한 유물을 함께 떠나 보냈다.

  그런 이유 때문이었을까? 가장 귀한 성물을 떠나 보낸 로마는 켈트조고의 침입 앞에 제대로 힘도 써보지 못하고 허망하게 멸당 당하고 말았다.

  바야흐로 가장 많은 성유물을 보관하게 된 콘스탄티노플의 비잔티 왕국은 하루가 다르게 급성장하게 되고 번영을 누리게 되었다. 7 세기 경에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을 침략하여 위기에 봉착하게 되자 그리스도 무덤 교회에 안치했던 성물들도 급하게 모두 콘스탄티노플로 피신 시키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번에도 그런 이유였을까? 비잔티 황제 유스티아누스는 아주 취약한 세력을 기반으로 황제에 올랐던 지라 여기저기서 반란이 끊이질 않았고, 암살 위협과 쿠데타 세력에 의해서 목숨을 잃을뻔한 일이 여러번 있었을 정도로 미약한 출발을 했었는데, 어찌된 영문인지 집권 중반기에서 부터 시작하여 지극히 짧은 기간에 과거 영화를 누리던 로마 제국의 드넓은 영토를 능가하는 비잔틴 제국을 하루아침에 이루어냈던 것이다.

  하지만...... 영원한 제국은 없다고 하는 역사의 진리처럼 비잔틴 제국 역시도 왕위 계승 문재를 놓고 내분을 지나 오랜 내전이 계속되고, 그 틈을 노려 이슬람 세력들이 쳐들어 오게 되면서 급격하게 쇠락하여, 그 넚은 영토를 모두 빼앗기고 겨우 콘스탄티노플 하나만 남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제 이 정도라면 기꺼이 하나님께서도 관심을 접으실만 하지 않으셨겠는가?

  이슬람의 위협에 비잔틴 황제는 교황에게 도움을 청할 수 밖에 없는 풍전등화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되었고........ 비잔틴 황제의 간절한 바람과는 전혀 다르게 교황 독단의 지극히 성스러운 결단(?)의 결과로 마침내 십자군 전쟁이 시작되게 되었다.

교황의 철저한 사전 당부와 명령을 간직한 채 출발한 첫 십자군이 그만 어떨결에 예루살렘을 점령해 버리는 사태가 발생하고 말았다. 그렇다면 이어서 이 따끈한 전쟁의 결과물이 고스란히 교황의 손에 들어갔어야 하는데 아뿔싸....... 원정대의 지휘부가 감히 교황의 명령을 거부하고 따끈따끈한 노획물인 예루살렘을 그냥 차지해 버리고 만 것이다. 분노한 교황은 첫 번째 십자군을 토벌한다고 다시 두 번째 십자군을 파병한다. 하지만 그런 치졸한 집안 싸움이 제대로 되겠는가? 다들 역사 위에 개망신만(犬) 당하고 만다.

  그런 와중에 정신을 차리고 재무장한 이슬람 세력이 어느 틈에 다시 예루살렘을 빼앗아 버리고 말았다. 기독교와 이슬람 간에 정말로 피터지는 전쟁이 벌여졌던 것이다. 이런 와중에도 언제나 처럼 교황은 또 검은 흉계에 의한 나름의 실익을 챙기려 열심히 계산기를 두드렸고, 실이기에 관한 계산이라면 적어도 교황을 훨씬 능가하는 장사꾼이 이 전쟁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이다. 교황은 베네치아 상단을 향해 '불쌍한 놈들. 너희는 언제든 내 밥이야.' 이렇게 생각했는데, 베네치아 상단의 우두머리 엔리코 단돌로 총독은 그런 교황의 뒤에다 대고 '교활한 늙은이가 아직 임자를 제대로 만나지 못한거야. 이제 천국의 열쇠 마저도 나에게 내어 놓아야 할껄?' 이라고 맞받아 쳤다. 결국 교황은 단돌로에게 KO 당하고 말았다.

  네 번째 십자군의 예루사라렘 정복을 나서서 돕겠다고 나섰던 베네치아 상단의 엔리코 단돌로는 십자군 우두머리들을 꼬셔서 느닷없이 말머리를 돌려 비잔틴의 수도 콘스탄티노플로 돌려 버렸다. 느닷없이 들이닥친 익히 안면이 많은 교황의 수하들을 보고는 망설이는 틈을 타 이교도를 섬멸하러 떠난 성스러운 십자군이 엉뚱하게 같은 기독교 국가 비잔틴을 덮쳤던 것이다. '성지 회복은 아득히 먼 남의 일'이고 '옆 동네의 보물창고는 잠금장치가 열려있는 중' 이었으니...... 성스러워야 할 십자군 원정대는 예루살렘에 이어 두 번째 성지로 여겨졌던 콘스탄티노플을 마구 짓밟고 살인과 방화와 약탈과 강간을 서슴치 않았다. 하지만 실속은 어디까지나 베네치아 상단의 차지였다. 그들은 원정을 떠나기 전에 이미 목표를 콘스탄티노플로 정했으며, 약탈하고자 하는 목표물에 대해서 목록까지 만들어 가지고 떠난 것이었다. 두 번째 성지로 여겼던 콘스탄티노플에는 세계에서 가장 크고 화려한 보물창고인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이 있었다. 세상의 온갖 진귀한 보불이 당시에도 성당 가득 쌓여 있었다고 한다. 베네치아 상단이 하기야 소피아 대성당을 통째로 털어갔다. 돌덩이 건물만 덜렁 남겨 놓은 채 내용물은 철저하게 싹쓸이 해갔다고 기록에 남겨 있다. 그런데...... 그런데....... 단돌로가 그렇게 소망했던것....... 그곳에 있어야만 했던 성물이 보이지 않았다. 콘스탄티노플을 탈탈 털었지만 끝내 성물은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길은 모두 만들어 주고 명분까지 주었으나........ 실속은 모두 베네치아 상단에 돌아갔음을 알게 된 교황의 심정이 어떠했을까? 그 분을 참지 못하고 거듭 거듭 다섯 번째, 여섯 번째 십자군을 급조하여 파견했으니.......... 교황도 유럽의 봉건 왕조들고 그야말로 파산 직전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남의 쌈질에 실질적으로 천문학적인 이득을 보고 마냥 세력을 확장시킬 수 있었던 것은 장사꾼들(베네치아. 제노바. 나폴리 등) 뿐이었다.

  교황과 유럽은 파산 직전이라 제 한 몸씩 스스로 간수하기도 버거운 상황에 한동안 힘을 키우며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던 이슬람이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했다. 가장 위태로운 것은 당연히 비잔틴 이었다. 풍전등화의 위험이 당장 코 앞에 들이닥친 것이다.

  이번에도 비잔틴은 과거와 똑 같이 교황에게 도움을 요청 하였다. 그런데 지금 교황은 홧병에 우울증 까지 겹쳐서 거동가지 불편한 상황이었다. 비잔틴은 유럽의 모든 군왕들에게 '내가 무너지면 곧바로 다음은 너희에게 위험이 날아가는 거야. 너가 살려면 우던 시급한 나를 도와 줘' 라고 도움을 요청했지만, 유럽의 어느 봉건 국가치고 남을 도와줄 만큼 여력이 남아있는 군주가 어디에도 없었다. 하나같이 '일단 너가 버틸만큼 오래 버텨 봐. 우리는 그때 가서 방책을 마련해 볼께.' 라는 태도였다.

  마지막으로 비잔틴이 손을 내밀 곳은 하이에나 같은 장사꾼들 이었다. 하지만 상황이 상황이었는지라 이번엔 장사꾼들 마저도 모두 거절했다.

  다만 한 곳....... 베네치아 상단만이 사람을 보내 의사 타진을 해 왔는데 '네가 가지고 있는 성물을 우리에게 주면 도와 줄 수 있지' 라는 제안이었다. 이제가지의 철옹성 같았던 비밀을 열어 보일 수는 없는 비잔틴 이었다.

  '베네치아 상단 너희들이 지난번에 탈탈 털어 갔잖아? 너희가 말하는 성물이란게 뭔지 우리도 모르겠어.'

  '그럼 할 수 없지 뭐. 너희들이 망하고 나면 나중에 이슬람 애들에게 물어보면 되겠지 뭐.'

  '없는 성물을 자꾸만 내 놓으라면 어떻게 해. 지금 이 상황에 우리가 거짓말 하겠어? 그런데 너희는 왜 그토록 성물에 집착하는 것인데?'

  '집착 이라니? 지난 전쟁때 성물을 그토록 찾아 헤맸던 분은 지금은 돌아가시고 없는 단돌로 총독이었지. 그분이 젊은날 눈을 다쳐서 평생을 장님으로 사셨거든. 그러니 그분께서 성물을 찾아서 신비한 효능으로 시력을 되찾아 볼까 하셨든 거고....... 지금의 우리 상단은 성물에 큰 관심이 없어.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린 장사꾼이잖아. 우리가 너희가 원하는 돈을 꾸어주고 싶어도 뭘 믿고 꾸어주겠니? 뭔가 어느 정도는 담보라도 있어야 하는것이 아니겠니? 소문에 듣기로 성물이 그렇게 귀하고 값진것이라고 하니까........ 성물이라도 하나 담보로 받는다면 얼마라도 도와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했던 말이지. 돈은 어제든 원하는 만큼 빌려줄 수 있어. 그러니 그럴만한 담보를 찾아 보든가 구해 오든가.........'

  당장 내일이라도 이슬람 군대가 성벽을 넘어 쳐들어 온다면 성물이고 목숨이고 다 소용이 없는 무용지물이 아니겠는가?

  그렇다고 선듯 성물을 내어준다면........ 날강도나 진배없는 장사꾼들이 나중에 딴소리 하지 말란 법도 없지 않은가?

  돈을 빌려서 이 난관을 헤쳐나간 후에 어느정도 시간이 지나 돈을 다시 마련해서 담보로 내주었던 성물을 되찾아 오기만 한다면 그리 손해 나거나 못해 볼 거래만도 아니라는 생각이 비잔티 황제의 머릿속에서 잠시도 떠나지를 않았다. 어떻게 하면 그게 탈없이 가능할까?

  결국 베네치아 상단으로 부터 엄청난 구난 자금이 서둘러 콘스탄티노플로 반입되었고, 철저한 보안 아래 가장 귀한 성물 한 가지가 은밀하게 베네치아로 운송되었다.

  각자가 지금 머리속에서 빠르게 굴리는 주판알의 계산법이 제각각 서로 달랐던 것이다.

  유럽의 용맹한 용병들을 모집해서 단시간에 이슬람 세력을 물리치고 지중해의 상권을 다시 예전처럼 회복 시키게 된다면 금방 빌린 돈과 이자를 한꺼번에 상환해 버리고 성물을 다시 되찾아야겠다고 비잔틴은 생각했고, 이슬람이 승리해서 비잔틴을 함락 시키거나, 아니면 베네치아 상단이 은밀하게 나서서 이슬람을 지원하는 경우가 생긴다 해도 이번 전쟁이 질질 끌면서 소모전을 계속하게 만들어야만 하겠다는게 장사꾼들의 노련한 계산에서 나온 결론이었다. 비잔틴이 정신을 차리지 못할 정도로 전쟁이 계속되면 자금 여력이 전혀 없는 상황에서 이자가 계속 늘어가게 된다.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원금과 이자 상환을 거듭 독촉을 해서 맡겨 놓은 담보를 포기하게끔 만드는 일이 그렇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최악의 경우 빌려 준 돈을 떼이더라도 결코 손실은 아니라는 계산까지 이미 해 둔 상태였다. 확보한 성물의 가치라면 좀 더 시간이 지나고 나면 두 배가 아니라 세 배 내지는 다섯 배까지도 사려는 군주들이 줄을 설 테니까 말이다.

 

  이것이 지금 생 루이가 가지고 있는 기독교적 세계관이었고 가치관이었다.

  그리고 어쨌거나 그렇게 헤아릴 수 없을만큼 사연에 사연을 담은 성유물이 갖은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생 루이의 손에 들어왔던 것이다.

  세상의 관심과 이목을 쫌 끌어보려는 단순한 이유에서 공개적으로 노틀담 대성당에 성유물을 안치시킨 것이었는데 지금 이렇게 어뚱한 결과로 드러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한 결과였다.

  생 루이가 확보한 성유물은 저렇게 성당을 찾아오는 순례자 아무나의 지극히 개인적인 서툰 소망과 병이나 치료해 주라고 기를 써서 확보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그 성유물의 신비한 힘이 온전하게 발원하여 스여질 곳은 다름아닌 생 루이 자신에게만 한정되어야 하는 것이다. 생 루이로 하여금 헤라클레스에서 시작하여 아킬레스를 거쳐 알렉산더 대왕에게 이어져 내려오던 용맹한 영웅의 계보가 이제 생 루이 자신에게서 보다 더 눈부시게 완성되는 과업에 쓰기 위하여 그토록 성유물이 필요했던 것이다. 하여 이제 서둘러서 모든 순례자들의 성유물을 거두어 루이 자신만의 성유물로 바꾸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택한 것이 바로 생트 샤펠(Saint-Chapelle) 이었다.

  파리는 이제 머지않아 새로운 예루살렘으로 다시 태어나게 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하나님의 놀라운 은총이 언제나 찬란한 햇쌀처럼 눈부시게 차고 넘치는 그런 공간에 생 루이만을 위한 성물을 안치 시켜야만 한다.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 정도로 작고 눈부시게 아름다운 왕실 전용 예배당을 말이다. 2층으로 만들어서 시종이나 귀족들 까지도 모든 사람들은 예배당의 1층 까지만 허용되도록 한다. 2층은 오로지 생 루이 자신과 왕실의 존엄한 가족들만을 위한 공간이어야 한다. 2층이야 말로 진정한 왕실 예배당이라 할 수 있으며, 그런 성스런 장소의 동쪽 높은 자리에 성유물이 놓이게 될 것이다. 이 성소에 왕실 가족이 아니고 들어 올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왕실 예배당을 관장하는 주교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생 루이의 생각이자 바램 이었다. 그는 서둘러 새로운 왕실 예베당의 건축 설계에 매달렸고 오래지 않아서 설계도가 완성 되었다. 바로 지금의 생트 샤펠의 모습이 그대로 녹아들어 있는 바로 그 설계도면 이었다.

  설계가 완성되었으니 다음 과정은 무엇일까?

  바로 기존의 왕실 예배당을 헐어내는 일이었다. 선발된 장인급의 인부들이 시테 섬으로 전부 모여 들었다.

  그래도 오랫동안 왕실을 지켜온 전통이 서린 왕실 예베당이었는지라 주교가 나서서 일련의 기념 행사를 엄숙하게 치루고 나서 이제 막 실질적인 철거에 임하려는 찰라.......... 요란한 말발굽 소리와 함께 화급을 알리는 전령의 외침이 울려 퍼졌다.

  '툴르즈로 부터 급한 전갈이 도착했습니다.'

 

 

 

 

 

 

 

 

 

 

 

 

  파리는 예쁜 도시다.

  얼마나 예쁜가 하면 숨이 막힐 정도로 정말 예쁘다.

  잘 다듬어진 미니어쳐로 아주 정교하게 짜맞추어진 도시가 바로 파리다. 세월이 그대로 녹아들었지만 그랬음에도 고색창연함을 잃지않는 푸른 빛의 도시는 21세기의 유명 대도시들이 갖추어야 하는 최첨단의 기능성을 모두 가지고 있을 뿐만아니라 지난간 옛것들과 조화를 이루어 파리만의 아주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다. 거기에다 파리하면 떠올리게 되는 그들만의 독특한 예술세계를 품고있는 문화와 오로지 먹기 위해 사는 사람들 처럼 보이게 만드는 그들의 미식에 대한 열정과 보다 나은 삶의 질을 선택하고자 노력하는 사람들이 모여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고 있다. 여행자의 눈에 비치는 파리의 모습은 한마디로 그냥 동화속에 퐁당 들어와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세느 강변을 따라 내려가다 보면 우측으로 루브르 궁전의 외벽이 길게 늘어서 있다.

  파리의 역사하면 시테 섬을 떠올리게 되지만, 시테섬이 파리의 시작이었다면 지금의 파리는 바로 루브르의 등장과 함께였다고 할 수 있다. 루브르 요새가 세느 강변에 바이킹들의 칩입을 막기 위해 처음 건설되면서 부터 파리는 제대로 외연을 확장해 나가기 시작했으며 프랑크 왕국의 서쪽 지역을 차지한 서프랑크에서 지금의 프랑스(France)로 새롭게 시작된 역사 역시 제대로된 시작은 루브르에서 부터였다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잉글랜드 사자왕이 이끄는 3차 십자군 원정대에 그의 라이벌이었던 프랑스의 필립 2세가 합류하면서 자리를 비우게 되자 파리의 방어를 위해서 세느 강변에 요새를 세우도록 지시한 것이 바로 루브르의 시작이었다. 처음엔 작고 습하고 음침한 오로지 군사 목적의 요새에 지나지 않았다.

  프랑스가 점점 세력을 확장해 나가고 파리로 사람들이 계속 유입이 되고 근대적인 중앙집권화가 확립되고 파리가 수도로서의 새로운 위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프랑수아 1세의 결정으로 루브르 요새 자리에 새롭게 궁전을 지어 시테 궁전을 여기로 옮겨오게 하였고, 루이 14세에 의하여 다시 외곽지역의 베르사이유 궁전으로 옮겨갔고, 다시 18세기 프랑스 혁명을 격게되면서 혁명 세력에 의해서 봉건 왕조의 화려했던 궁전 역활을 끝내고 지금의 루브르 박물관 역사가 새롭게 만들어진 것이다.

  자유의 씨앗을 잉태한 프랑스 혁명(1789)은 수많은 피와 희생을 치룬 댓가로 얻어진 것이다. 또한 그것은 하루아침에 모두 이루어진 것도 결코 아니다. 그후로도 숱한 우여곡절을 격은 결과로 종국엔 프랑스 사람들의 가슴속에 자유와 관용(똘레랑스)으로 살아남았다. 그러자 전 세계의 예술가와 시인과 소설가와 혁명을 꿈꾸는 사람들이 꾸역꾸역 파리로 몰려들었다. 그곳에는 사회적 신분이나 인종이나 국가를 초월하여 모든 인간의 영혼을 해방시켜 주며 어떤 사상이나 이념까지도 무조건 허용해주는 영원한 자유가 존재하는 우일한 장소라고 생각하고 믿었기 때문이다. 자유의 정신이 살아 숨쉬고 사람들이 모여 지성을 논의하는 카페가 넘쳐나는 아주 특별한 도시 파리가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에펠탑이나 개선문이나 루브르 박물관이 없어져도 파리는 여전히 파리로 존재해 나가겠지만, 파리에서 카페가 모두 사라진다면 어쩌면 파리는 소멸해 버리고 말지도 모른다.

  미테랑 대통령은 '파리를 새로운 21세기형 문화와 예술의 중심으로 재탄생 시키는 프로젝트'를 단행하였는데(1989년), 그 일환으로 건축가 이오 밍 페이(Ieoh Ming Pei)에게 의회하여 루브르 궁전의 넓은 광장 한가운데 유리 피라미드를 설치하게 했다.

  고풍스런 파리 역사의 상징과도 같은 루브르 궁전에 철과 유리로 만든 현대문명을 상징하는 건축물이 들어선다는 사실에 파리 시민들의 의견이 반반으로 갈려 팽팽하게 대립했다. 과거 에펠탑이 처음 세워졌을 때와 영판 똑같은 장면이 재연된 것이다. 어쨌거나 저쨌거나 건축은 완성되었고 시간은 흘러갔다. 시간이 지나면....... 지극히 일상적인 생활 도구들 조차도 유물이 되는 법이고, 추악하다던 건물도 점차 눈부신 예술품으로 둔갑을 시작하는 법이다.

  에펠탑이 없는 파리를 상상할 수 없듯이........ 루브르에 가서 유리 피라밋 사진을 찍고 오지 못하면 차라리 루브르에 안 간것만 못하다고 할 수 있는 세상이 되어 버렸으니말이다.

  물론........ 우리에게도 인증 샷은 필수!

 

 

 

 

  툴루즈에서 생 루이에게 날아든 급보는 아비뇽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에 관한 것이었다.

 왕의 명령에 의해 랑그독 지방을 순시하던 종교 심문관 귀욤 아르날과 에티엔 드 상 티에리가 자신들을 수행하던 종자들과 함께 아비뇽 외곽 숲속에서 무참하게 살해되었다는 보고였다. 보고서의 말미에는 분명하게 몽세귀르(Montsegur)에서 파견 된것으로 보이는 약 50 여명에 이르는 부랑자들의 소행으로 판단되어 지금 이들을 추적중이라고 적혀 있었다.

  몽세귀르 라면 카타리 파(Catharis)의 은거지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본거지라고 할 수 있다.

  교회(교황)에 의해 이단으로 낙인 찍힌 카타리 파의 완전 섬멸을 위하여 루이 8세가 알비 십자군을 결성하여 알비 지역에서 2만 오천명에 이르는 광범위한 살륙을 저질렀지만, 이들 대부분이 무고한 죽음이었을 뿐 정작 카타리 파 신자들은 본래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왜 이토록 과도하게 무리한 살인을 교황은 지시했고, 루이 8세는 막무가내 식으로 무저항하는 사람들을 도륙하여야만 했을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자행된 그 처참한 집단 학살이 어찌나 성스럽고 숭고한 은총이었음인지....... 순수하고 착하게 살아왔던 랑그독 지방의 카톨릭 신자들이 앞다투어 카타리 파를 피신 시키고 그들의 신앙에 합류하기 시작했다. 로마 카톨릭을 배교하고 차라리 카타리 파가 되어 이들과 함께 하겠다는 사람들이 늘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루이 가문과 최고의 라이벌이었던 툴르즈의 레이먼드 백작 가문이 그런 카타리 파를 보호해야만 하겠다고 프랑스 국왕과 교황(교회)를 향해 정식으로 정면 대결을 선언한 것이다. 세상은 교황의 것이었고, 그 아래 프랑스는 루이 가문의 것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일개 백작 가문이 자신의 군대만으로 프랑스와 교황에게 전쟁을 선포하는 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그 가문 역시 오랜 세월동안 국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교황을 떠받들어 온 카톨릭 신자였음에도 말이다. 왜 절대절명의 상황에서 그들은 카타리 파를 자신들이 반듯이 지켜야 하겠다고 뻔한 불가능에 도전을 했던 것일까?

  루이 8세는 카르카손을 쉽게 점령하고 이어서 툴루즈를 압박했다. 속속 교황의 지원이 늘어가기 시작했다. 결국 레이먼드 백작과 수하들과 소수의 카타리 파 신도들은 피레네 산맥 깊숙한 곳으로 도망칠 수 밖에 없었다. 지형지물을 이용해서 바위 벼랑위에 요새를 만들고 장기전에 돌입한 것이다. 전쟁이 길어졌고, 잠시 파리에 다녀 오겠다던 루이 8세가 도중에 묘한 의문을 남긴 채 갑자기 죽었다. 13 살에 즉위한 후계자 생 루이가 성년이 될 때까지 루이 8세의 왕비는 섭정을 단행하면서 집요하게 잔존하는 카타리 파를 몰아 붙여서 마침내 피레네 산맥 깊은 곳의 에스파냐 국경지대인 몽세귀르 인근에 가두어 버리고 , 사방으로의 접근로를 차단시켜 저항세력의 고사작전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이런 아비뇽의 살인 사건이 터지고 만 것이다.

  생 루이는 즉시 군대에 출정 명령을 내렸다.

  이 얼마나 오랫동안 학수고대하면서 기다렸던 순간인가?

  자신은 이미 알렉산더 대왕에 버금 갈 정도로 숱한 전설같은 무용담들로 역사에 그 이름을 영원히 남길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충분히 그럴만큼 자신의 역량을 이끌어 올렸음이 자명한 상황에서...... 희대의 보물인 성유물을 확보하지 않았던가 말이다. 성유물의 성스러운 기운이 이제 자신에게 발복하기만 시작하면 머지않아 파리는 새로운 예루살렘이라고 불려질 것이며, 자신의 왕국 프랑스는 새로운 로마가 될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되고 나면 자신은 이제부터 알렉산더 대왕과 버금가게 될것이며 머잖아 그 마저도 추월하게 될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온 세상(유럽)이 오랜 십자군 전란의 결과로 피폐 해질대로 피폐한 상태라고 모든 왕국들이 내치에만 힘쓰면 오로지 숨고르기에 집중하고 있었던 터라........ 어디에도 분쟁이 없으니 싸움이 벌어지지 않았고, 전쟁터가 없으니 자신의 무용이 빛를 발할 기회가 없음을 한탄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밤잠을 설쳐가면서 출정 준비를 서둔 생 루이는 교황에게 지난날 알비 십자군 결성을 독촉하고 허락했던 교황의 뜻을 받들어 그 소임을 이번에 확실하게 성공시키고 돌아오겠다고 장문의 서신을 써서 보낸 뒤, 자리를 비우게 되는 파리의 통치는 어머니에게 맡기고, 총리와 내각이 모두 합심하여 하루빨리 왕실 예배당을 헐어내고 새로운 생트 샤펠을 완성시키라고 지시를 내리고 서쪽으로 툴루즈를 향해 군대를 진군 시켰다.

  만약 이 싸움에서 생 루이가 갖은 시련을 격고 좌절을 경험 했다면 그의 인생은 달라졌을 것이고, 어쩌면 프랑스를 넘어서 유럽의 역사 내지는 세계의 역사도 바뀔 수 있었을 것이다. 다각도로 조명해 보자면 충분히 그럴 소지가 있기도 했다. 그런데 하늘의 뜻은....... 달랐다.

  생 루이가 첫 난관을 비교적 쉽게 통과해 버린 것이다. 물론 그 이면에는 당찬 여제라 할 수 있는 카스텔라 왕비의 처방 덕분이었지만 말이다.

  육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했다고 해서 그가 전쟁판에서 늘 승리한다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그런데 역사상 최고의 성적으로, 그것이 지극히 당연한 것처럼 누구나에게 인식되어 왔던 전쟁놀이 천재가 요식 행위로 수석 졸업을 하였고, 어째던 첫 전투에서 놀라운 성과를 올렸다면........ 자신을 늘 알렉산더 대왕에 버금가는 용사라고 여기던 그 천재는 이제 무슨 생각을 하게 될까?

  세상은 뭐 그리 대소로울것도 특별할 것도 없는 전쟁 놀이터(게임방) 정도로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진흙탕과도 같은 피가 튀고 날리는 참혹한 현실의 전쟁은 서서히 그의 안중에서 사라지기 시작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카타리 파는 교황(교회)에 의해서 지상에서 아예 씨를 말려야 하는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왜? 카타리 파의 어떤 점이 그렇게 교황을 분노하게 만들었으며, 그들 신앙의 어떤 점이 그토록 씨를 말려야 할 정도로 이단적이었는가?

  그렇다면 도대체 '이단(異端)'이 뭐기에 그렇게들 영원히 까칠하게 대하고 박터지게 싸워야만 하는 것일까?

  사전적 의미로는 '끝(異)이 다르다(端)'는 의미로 통용된다. 그렇다면 '끝이 다르다'는 의미에는 '뿌리는 같으나 어느 순간 드러난 결과가 달라졌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겠다. 그런 정도를 가지고 꼭 죽이고 살리는 어떤 기준으로 작용해도 되는 그렇게 중요한 일이란 말인가? 여기에 종교적 의미를 더하면 '정통 이론에 어긋나는 사상이나 방법론까지를 포함하게 된다. 그러니까 흔히 말하는 기성 종교의 교리에서 벗어난 교리나 주의나 주장들을 통털어서 쉽게 이단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이 '이단' 이라는 용어가 세상에서 널리 흔하게 쓰이는 그런 용어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와 연관해서만 거의 쓰여지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나 역시도 핵심 포인트는 바로 이 점에 있다고 보고 있다.

  왜 기독교인들 입에서 만 툭하면 '이단' '이단' 또 '이단' 하는지 나는 정말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들은 정말로 '이단'이 무엇인지 알고나 툭하면 내뱉는 것인지 모르겠다. 왜 수없이 많이 널려 있는 이단은 모두 기독교 주변에만 붙어서 먹고 살아가는 것인지 모르겠다. 기독교는 이단 양식장인가?

  이단을 이야기 하자면 그 이단에 대적 할 만한 보편 타당의 기준 위에 합리적 정통성이 반듯이 필요하다. 만고불변의 진리와도 같은 확실한 정통이 사전에 분명하게 세워져 있어야만...... 거기에 비교해서 부족하다거나 그릇되었다거나 다르다거나 하는 판단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종교적 정통성에 비교하여 심하게 그릇된 주장이나 잘못된 교리나 왜곡된 신앙 행위등을 그제서야 감히 '이단' 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가 정통이고 기독교에 밉보이거나 장애가 되는 모든것이 이단이냐? 누가 그걸 허락하고 누가 그걸 판단 결정내렸는가?

  아마도 그것은 창조주 오직 한 분만이 내릴 수 있는 판단이자 결정이라고 생각한다. 아무리 기독교 역사 2천년이 스스로 합리화를 추구하고 완벽한 논리를 갖추고 체계적 교육으로 수 십억의 신자들을 현혹시켰다 해도, 그런 오만하고 교만스런 이단에 대한 편견과 판단을 내렸다면...... 감히 말하건데 그런 주둥이를 놀린 기독교 스스로가 먼저 이단의 심판을 받아야만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은 기독교인이라 해도, 기독교 최고 성직자하고 해도 감히 해서는 안되고 할 수 없는 창조주의 영역인 것이다.

  이렇게 정통(?) 기독교에 의해서 이단으로 낙인 찍히고, 거룩한 알비 십자군에 의해서 약 2만명의 카타리 파 신자들이 종교재판에 끌려나가고 끝내는 화형에 처해졌다. 그리고 단지 카타리 파에 우호적이었다는 이유만으로 20만에서 1 백만명 까지 추산되는 보편 타당한 카톡릭 신자들 역시 끌려나가 종교재판을 통해 화형에 처해졌다.

  내가 가진 하찮은 정도의 기독교적 신앙관과 가치관에 입각해 양심고백을 한다면........ 화형장에 끌려간 카타리 파의 신앙이 정통 기독교 신앙일 것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믿는다. 세세하게 논리나 교리로 다툼을 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나는 내가 가진 이런 신념으로 언젠까 이모습 이생각 이가치관 그대로 최후의 심판정에 당당하게 설 생각이니까 섣부르게 저들 편리한대로 판단하고 결정짓고 멸시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적어도 내 종교적 양심은...... 카타리 파를 이단으로 몰아 처형장으로 끌고간 사건에 티끌만큼이라도 관여된 교황을 비롯한 종교 지도자와 왕족과 귀족과 기사들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이단의 심판을 받아야 하는 죄악의 원흉이라고 생각한다. 저들이 무슨 권리로 그런 짓을 서슴없이 저지르는가?

  저들이 끌어다 죽인 사람은 이단의 죄를 범한 죄인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셔서 부활하시면서 약속과 허락을 하신 이미 '모든 죄 사함과 구원을 허락받은 의인'인 것이다. 신께서 의롭다고 구원해 주신 사람들을 오히려 온작 죄악으로 더덕더덕 덧칠을 한 파렴치한들이 어떻게 징벌을 가할 수 있단 말인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들로 부터 율법을 해친 '이단'으로 몰려 십자가형에 처해졌다. 그것이 얼마나 참혹하고 커다란 잘못인지를 기독교인이라면 결코 잊지 말았어야 하며, 어떻게 같은 죄악을 자행하는 가해자가 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리스도 인으로서 같은 악행을 똑같이 저질렀다는 것은 감히 말하건데........ 예수 그리스도가 십자가 형을 받을만큼 실질적으로 이단의 죄를 범한 범죄자였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죽을 사람이 죽은 것임을 기독교인 스스로 입증해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고 생각한다.

  유대인들에게 기독교(로마 카톨릭)은 분명 이단이었다. 그 이단이 커져서 세력을 이루고 체계적인 안정을 찾게되니까 그제부터 이단에서 벗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랬던 로마 카톨릭에 의해서 이번엔 개신교가 이단으로 낙인 찍혔다. 그 이단의 죄목으로 수없이 많은 생명이 종교재판을 통해 죽임을 당했다. 그랬음에도 개신교 교세가 커지고 역시 체계가 잡히자 이단에서 벗어났다. 로마 카톨릭과 개신교과 나란히 공생하는 관계가 되었다. 내가 너를 이단으로 몰아가면, 만만찮은 세력의 너도 나를 이단으로 몰고 갈 것이 뻔하고, 우리 모두가 이단의 늪에 빠지면 공멸하게 될테니까 적당히 공존을 모색해 보자 하는 세상이 되고 만 것이다. 개신교 이전에 비슷한게 이미 있었다. 로마 제국이 나뉘면서 서로마에는 로마 카톨릭이, 동로마에는 그리스 정교회가 주도권을 쥐었었다. 로마 카톨릭이 정교회를 이단으로 파문시키자, 정교회도 로마 카톨릭을 이단으로 교회에서 파문시켜 버렸다. 지구상에 모든 기독교인은 모두가 로마 카톨릭 아니면 정교회 였는데, 서로를 이단으로 파문시켜 버렸으니........ 이 세상에 제대로 된 기독교인은 단 한 명도 없는 이단의 세상이...... 짐승들의 세상...... 개판(犬)이 된것이다. 세상의 교회는 모두 개집이 되었고, 세상의 성인들은 모두 개들의 우상으로 전락해 버리고 만 것이다. 그러자 상호간에 슬며시 파문을 철회하고 한참 과거로 회귀해버린 것이다. 왜? 교회도 살아야 하니까? 함께 망하게 생겼으니까 속내까지는 안풀어졌어도 적당한 합의하에 십자가를 다시 버젓이 내걸어야만 밥벌이를 다시 계속할 수 있으니까 말이다. 그런 이유가 저변에 깔려 있었기에 결국 개신교도 이단에서 풀어나 자유롭게 되었다. 그런데 이런 내력을 아는 사람들이 자신의 방식대로 자꾸만 자꾸만 교리와 교회의 기본 생리에 변이를 일으키며 퍼져 나갔다. 그러자 이번에 어느새 기성 종교로 체계를 확보한 개신교가 나서서 툭하면 이단 타령을 하고 나선 것이다. 그것이 정말로 정통 기독교가 거듭나야 하는데 방해가 되기 때문일까? 아니면 밥그릇 싸움에서 기득권을 포기할 수 없어서 벌어지는 해프닝일까?

  우크라이나 전쟁의 한 측면을 살짝 들여다 보자.

  서방의 종교 지도자 교황께서 인류의 평화와 공존을 위해서 전쟁을 즉시 중단하고 더불어 사는 길을 모색하자고 거듭거듭 주장을 펼치고 계신다. 그러자 옛 그리스 정교회를 이어받았다는 러시아 정교회의 최고주교(교황)가 푸틴을 찾아가서 하나님의 뜻과 놀라우신 은총이 푸틴의 전쟁놀이에 기뻐하시며 함께하고 있다고 하는 뉴스가 방송을 타고 전세계에 퍼져 나갔다. 둘 중에 하나는 사탄이며 악마가 아니겠는가? 지극히 높은데 계신 분은 이런 뻔한 상황에서도 여전히 침묵중이시다. 양대 교파의 수장(교황. 총대주교)은 언제나 말뿐이다. 과감히 나서서 그릇된 어느 한 쪽을 질책하고 진정 올바른 종교에 대해서 기치를 세워야 하는데...... 파문을 시키던, 공개적으로 적그리스도로 낙인을 찍던, 모든 기독교인의 공적이라고 천명을 하던 해야하는데........ 그저 옅은 당부의 말씀에서만 그치고 만다. 언제나 그런식이다. 아마도 거세게 몰아부치면 더 거센 반격이 올 것이 뻔하고..... 그 결과는 기껏해야 기독교의 공멸로 닥칠것이 너무나 뻔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리고.......... 그런 말재주와 이천년 동안 쌓아 놓은 노하우 아래서 교육받고 지극히 편협적 사고와 가치관으로 무장된 계승자들은 오늘도 여전히 '이단 타령'만을 일삼는다. 세상의 모든 이단은 교회 안에서 생겨났고, 2천년이 지난 지금에도 여전히 교회 주변을 맴돌면서 기생하고 있건만 말이다. 자신도 이단의 하수인임을 모르면서 말이다.

 

  교황 이노센트 3세가 직접 카타리 파(Catharis)를 이단의 죄를 물어 기독교계에서 파문시켰으며 그들 모두의 척살을 명령했다.

  아울러 영지주의를 모방한 카타리 파가 왜 이단인지를 공개 재판을 통해 규명하고자 하였는데........ 장작불을 피워놓고 로마 카톨릭의 성 프란체스코가 사용했던 성경 책과, 카타리 파가 사용하는 영지주의 복음서를 함께 불구덩이에 던져 넣었더니 프란체스코의 성경은 고스란히 타지 않은 채 남았고, 카타리파의 영지주의 성경은 모두 불길 속에 타들어가 버렸다. 이는 곧 성령이 카타리 파의 영지주의 복음서에 임하지 않았다는 뜻인 바, 그 복음서를 믿고 따르는 모든 카타리 파의 신자들이 모두 죽여도 될 만큼 이단이라는 표식이라고 공개적으로 천명했다.

  이런 상황을 어떻게 이해해야만 할까? 적어도 교회 안에서는...... 믿음이 충만한 사람들에게만은 저런 일들이 실제로 가능하단 말인가?

  당장 여기 파리의 수호 성인인 생 드니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몽마르트 언덕에서 참수형에 처해졌는데, 땅바닥에 나뒹구는 자신의 잘려진 머리를 손에 들고 약 5km 떨어진 현재 생 드니 수도원 자리까지 뛰어가면서 만나는 모든 사람들에게 소리높여 기독교 복음을 소리높여 전했다고 한다. 이 기적을 목격한 사람들이 결국 생 드니를 성인으로 추대하기에 이르렀다.

  할.

  렐.

  루.

  야.

  아.

  멘.

  어디 그뿐 이었겠는가?

  광장에 석탄 불덩어리를 마치 수영장처럼 만들어 펼쳐놓고 종교재판을 받고 나온 카타리 사람들을 발가벗겨 맨발로 석탄 불구덩이 위를 걸어가게 했다. 만약 하나님께서 카타리 파에 은총을 내리신다면 불구덩이 위를 지나갈 동안에도 지켜주실 것이고, 아무 탈없이 불구덩이를 지나오는 사람은 살려준다는 성령 충만한 노라운 은총의 기회를 한 번씩 더 베풀어 준 것이다. 모두가 신실한 기독교 믿음 안에서 벌어진 축복의 집단 학살이었다.

  그런 신성하고 자랑스런 역사로 가득한 반석위에 굳게 선 것이 지금의 기독교이며........ 그 반석은 자신들과 다른 것들은 모두 이단으로 몰아 짓밟아 버리고 만든 반석이었다.

  어느 교회도, 어느 종교 최고 지도자도 세상에 드러나는 어떤 일에 대해서도 아무런 죄가 없다. 교회는 약 1700년 전에 이미 성 어거스틴에 의해서 무오류성(infallible) 이라는 천상의 방어용 갑옷을 얻어 입었기 때문이다. '교회나 교화을 비롯한 특별한 존재들은 하나님께서 이미 그것들을 만들거나 선택하실 때 부터 이미,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 없는 아주 특별한 존재로 이미 창조하셨기에 영원히 어떤 죄에도 해당되지 않는다'는 해괴망측한 논리를 만들어 스스로 장착했기 때문이다.

개신교는 참으로 좋은 본보기가 아닌가. 이단이면 어때? 좀 참고 견디면 되는 거지. 너희는 이단이 아니었냐? 시간이 지나고 잘 버티면 언젠가 우리도 모오류성에 입각해 신성한 정식 교단이 되고 종교 지도자가 되는 것야. 거기에는 연좌죄가 언제나 면죄되는 성스런 곳이야. 개판에서 나뒹굴고 날강도로 살았어도 반석에만 오르게 되면 성인(Saint)가 되는 거야. 새로운 신분과 새로운 생활이 시작되고 보장이 되는 것이지. 그야말로 로또이자 지상낙원인 것이지......... 물론 당장은 세력이 약하니 이단이겠지만 머지않아 우리도 당당한 성스러운 패밀리가 될 수 있다고 스스로 자기최면을 걸고 있지 않을까?

 

 

아비뇽에서의 사제 살인 사건은 생 루이를 마침내 전쟁터로 이끌고 말았다.
카타리 파는 남녀노소 없이 알몸으로 끌려다니며 종교재판을 받았고 끝내 모두가 화형에 처해졌다.

  생 루이는 짧은 시간에 위대한 전공을 세우기 위하여 물밀듯이 쳐들어 왔지만 피레네와 툴르즈 인근의 깊숙한 골짜기에 천험의 요새를 건설하고 대항해 오는 카타리 지지세력의 기반 또한 결코 만만하지가 않았다. 아길라르, 페이르페르튀즈, 필로랑스, 케리비스, 테름 등의 요새들이 유기적으로 움직이면서 생 루이의 프랑스 군대 주둔지를 기습했던 것이다. 저항군의 주력은 당연히 툴르즈 백작 레이먼드 7세와 그의 정예병들 이었다.

  요새 하나를 포위 공격하면서 가파른 산길을 올라가면 인근의 다른 성에서 저항군이 몰래 나와서 프랑스 군대의 배후를 공격했다. 그 혼란한 틈을 타서 요새의 저항세력은 산등성이를 타고 달아났다. 프랑스 군대가 거주 장악할 이유가 없어서 물러나면 다시 돌아와서 저항을 계속했다. 하여 군대는 잠시라도 정복한 요새를 철저하게 파괴할 수 밖에 없었다.

  특히 레이먼드가 주둔하고 있는 라스투르 성채는 300 미터 높이의 가마득한 바위벼랑 위에 또 가마득하게 네 개의 탑으로 철벽 방어진지를 구축하였던 터라 가히 난공불낙의 요새였다. 상황이 이쯤되자 생 루이로서도 더는 어찌해 볼 도리가 없이 포위방을 좁혀가면서 적들의 보급문자를 완전히 차단시키고 마냥 기다릴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러자 생 루이의 어머니 카스텔라 황후가 모종의 음모를 꾸며서 교황에게 재가를 요청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교황청의 특사가 은밀하게 툴르즈의 생 루이 군막을 찾아갔고, 다시 생 루이의 사신이 요새 위의 레이먼드 백작에게 파견되었다.

  사실 레이먼주 가문과 생 루이의 카페 가문은 비록 정략 결혼이긴 하였으나 서로 사돈지간 이었다. 레이번드 백작에게는 후사가 없이 달랑 외동딸 하나가 있었다. 영국 헨리 왕의 주선으로 백작의 외동 딸이 생 루이의 동생 샤를에게 시집을 간 것이다. 둘 사이에 후사도 없었고 부부로서 금슬 또한 좋지 않아서 부부라 하기도 좀 그런 상태였는데........ 어찌되었건 백작으로서는 금지옥엽인 외동딸이 지금 적국의 왕궁에 볼모로 잡혀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부모된 심정으로 어떻게 이런 상황이 불편하고 근심되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그런 약점을 안사돈인 황후가 노리고 파고든 것이다.

  교황의 친서가 은밀하게 백작에게 전해 졌다.

  핵심 내용은....... 백작으로서도 할만큼 다 한것이 아니겠느냐 에서 시작하여, 끝내 이렇게 되면 당신의 외동딸 장래에 커다란 문제가 생기지 않겠느냐는 협박으로 이어졌다. 그리고는 말미에 이 모든 사태에서 빠져나올 수 있는 해결책을 은밀하게 제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교황은 당장 출발시킬 제 8차 십자군을 모집하고 있는데, 백작이 나서서 십자군을 이끌고 성지로 달려가서 공을 세운다면 이제까지의 모든 잘못을 교황 직권으로 모두 사면해 주겠다는 제의였다. 백작의 툴루즈 영지와 권력을 예전처럼 되돌려 줄 것이며, 살아남은 카타리 파를 백작의 툴루즈 영역 안에서만은 자유롭게 생활하게 풀어주겠다는 제의였다. 아울러 토벌대인 프랑스 군대도 물러나게 하여 예전처럼 원만한 선에서 사돈가문 사이의 은원을 교황이 주선해 풀도록 해주겠다는 제의였다. 어쩌겠는가? 사면초가에 단단히 빠진 백작으로서는 달리 선택할 수 있는 다른 방도가 없지 않겠는가?

  카타리 파에서 의견이 분분했었으나 결국 백작은 교황의 제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레이먼드 백작이 자신의 친위대를 이끌고 적진으로 가서 생 루이와 만나 교황이 보내 온 새로운 십자군 총사령관의 자리를 인수 받은 후에 서둘러 성지로 출발하면 모든것이 끝나게 되는 것이었다. 산등성이 요새에 남아있던 군대와 카타리 파 신자들은 산 아래로 내려간 백작의 담판과 출발을 지켜 본 후에 내려와 툴루즈로 가서, 백작이 십자군 원정에서 승리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면 되는 것이었다.

  프랑스 군대의 주둔지 한 복판에 백작과 생 루이가 마주했다. 백작에게 생 루이는 사돈 총각쯤 되고, 생 루이에게 백작은 사돈댁 어른에 해당 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정적의 수괴들이 마주한 것이다.

  담판 자리에서 백작은 교황의 임명장과 인장을 요구했다. 그러자 생 루이가 프랑스 왕국의 국왕에게 무조건 항복을 한다는 서약서를 내밀었다. 백작이 분명하게 충성을 맹세한 국왕 생 루이에게 무력으로 저항했던 것임으로 우선 죄를 시인하고 나서 국왕의 선처로 사면을 받는 사전 절차가 먼저 시행되어야만, 다음으로 교황이 약속한 십자군 원정대 총사령관의 자리에 임명 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차마 일말의 의혹을 거두지 못한 백작은 한참을 고뇌에 찬 모습이었으나, 분명 국왕보다 한참이나 높은 교황의 약속이 있었는지라 이것도 하나의 절차라고 친다면 어서 마무리 짓고 멀리 벗어나고픈 생각 뿐이었다. 결국 백작은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사면을 요청하는 서류에 서명했다.

  하지만...... 이것이 바로 함정이었다. 약속은 교황의 일방적인 약속일 뿐이었다. 프랑스 국왕 생 루이의 입장에서는 적장인 백작이 위기에 몰리자 스스로 찾아와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항복 문서에 서명을 한 것이다. 이 항복을 받은 국왕이 어떻게 할지는 오로지 생 루이의 맘대로가 된것이다. 일단 저지른 죄에 대해 조사를 하고, 거기에 다른 책임을 묻고, 그리고나서 충분히 죗값을 치루었다고 생각될 즈음에 가서야 국왕 맘대로 교황의 부탁을 들어 죄인을 풀어줄지 아닐지를 그때가서 판단하면 되는 일이었다. 교황의 약속은 지극히 정당했으며 약속 이행 직전에..... 프랑스 국내의 문제로 군왕과 신하간에 풀어야 할 매듭이 있어서 끝까지 제대로 약속 이행이 되지 못한것이 아니겠는가? 이런게 바로 짜고치는 고스톱 아니겠는가?

  백작은 자신이 지금 함정에 빠졌다는 사실을 그제서야 깨달았다.

  하지만, 프랑스의 막강 최정예 군대가 이미 밖에서 백작의 군대를 무장해제 시키고 있었다. 백작은 반란죄로 체포되었다. 다시는 살아서 자유의 몸이 되지 못했다.

  레이먼드 백작의 체포로 이제 전쟁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 였다.

  요새의 카타리 파를 위시한 저항 세력이라 해도 백작의 군대가 빠져나간 이상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 하거나 불을 보듯 뻔한 결과가 목전에 닥쳐왔던 것이다. 일부는 항복하고 일부는 다른 곳으로 달아나 재기를 모색하기로 논의가 이루어 졌다.

  그런데 이게 어찌 개별적 혹은 부분적 항복이 받아들여 지지 않았던 것이다. 요새 안에 고스란히 엎드린 채 한꺼번에 전원 모두의 항복...... 오로지 그 한 가지 만이 해결책으로 되돌아 온 것이다.

  카타리 파의 마지막 거점이랄 수 있는 까마득한 바위 벼랑위의 요새 몽세귀르(Montsegur)가 프랑스 전체에서 몰려온 군대와 교황청의 특수 부대에 의해서 개미새끼 한 마리 빠져나갈 수 없을 정도로 철통같은 포위망 속에서 점점 다가오고 있었던 것이다. 카타리 파 스스로가 무장해제를 하고 자진해서 요새를 나가 산 아래에서 항복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런 방식의 항복 조차도 허락되지 않았다. 무조건 고스란히 요새 안에서 엎드린채 군대가 다가오기를 기다리란 명령 뿐이었던 것이다.

  왜 그래야만 했을까?

  바로 이 대목에서 참으로 중대한 전설이 한 가지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교황과 생 루이는 서로 쉬쉬하고 있었지만........ 적어도 프랑스 남부 해안 랑그독 지방에는 오래전부터 이야기로만 전해져 내려오는 비밀스런 이야기가 있었다. 비밀이라면서도 다들 그저 대수롭지 않게 아무대고 아무데서나 흔하게 떠들고 들을 수 있는 그런 허접한 이야기 하나일 수도 있었다.

  이 대목에서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의 소재가 되는 아주 중요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이 예수 사후에 로마의 핍박을 피해 마르세이유 인근으로 들어왔다는 전설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것이 이 지역만의 전설이라면 뭐 대충 그랬나보다 라고 치부해 버리겠지만, 잉글랜드의 카톨릭 역사에 분명하게 쓰여져 있는 것이, 성지로 부터 예수 그리스도와 아주 막역한 세 사람이 프랑스 남부 마르세이유 인근에 도착했으며 그곳에 자리를 틀고 살았다고 적혀 있는 것이다. 그중에 한 사람이 대서양을 건너 영국으로 와서 카톨릭 신앙을 최초로 선교했으며, 영국 교회는 그 최초의 선교사를 사도 요한으로 분명하게 밝히고 있는 것이다. 프랑스 남부에는 아주 특이하게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신앙이 매우 넓게 퍼져 있다. 중세 교황 그레고리 1세에 의해서 창녀로 폄하된 막달라 마리아는 수수께끼의 인물이며 로마 카톨릭에서 가장 꺼리는 미천한 여인이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십자군 전쟁 이후로 막달라 마리아 신앙이 급증하면서 많은 노틀담 성당이 생겨났는가 하며, 적어도 프랑스에서는 마들렌 교회(막달라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가 많이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파리의 관광 명소에 들어가는 마들렌 성당 역시 막달라 마리아에게 헌정된 교회다.

  바로 이 대목에서 가장 핵심은........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와 사도 요한 일행이 예루살렘을 떠나 예베소를 거쳐 마르세이유 인근에 도착했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성물을 하나 가지고 왔다는 전설이다. 그 성물이 바로 최후의 만찬에서 사용했다고 전해지는 성배(聖盃) 이다. 이 성배의 마지막 행적이 바로 카타리 파와 연결되었다는 가설이 오늘날, 지금 이 순간 까지도 많은 학자들 사이에서는 거의 정론으로 받아들여 지고 있다.

  그런 연장선상에서 생각해 본다면 지금......... 카타리 파의 마지막 잔존 세력이 끝까지 저항하고 있는 여기 몽세귀르에 적어도 이 순간까지는 성배가 이곳에서 이들의 손에 남아 있어야 한다는 가정이 성립되는 것이다. 그런 사정을 익히 잘 알고 있었던 교황과, 이미 성유물 중의 하나인 가시 면류관을 손에 넣은 생 루이 입장에서 코 앞에 어딘가 있을것이 확실할 성배에 대해서 무슨 생각들을 하고 있었을까?

  레이먼드 백작이 자신의 군대를 이끌고 함정속으로 빠져들어오는 순간 교황과 생 루이와 일부 고위 기사들 사이에서는 누가 먼저 성배를 찾아내서 차지하느냐가 눈앞에서 펼쳐지는 지상과제였다. 오로지 목표는 성배를 차지하는 것 뿐이었다.

  어디에 꽁꽁 숨기거나 누군가가 가지고 도망치거나 할까봐서 생존자 모두를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요새 안에서 체포하고 소지품을 비록한 철저한 조사와 수색으로 마침내 성배를 찾아서 차지하는 것이 목표였다.

  1244년 3월 16일, 마침내 교황이 파견한 정예 부대와 생 루이의 군대가 요새 성문 앞에 도착했다. 이제까지 요새에 살아남았던 사람들은 이미 무엇인가 남다른 낌새와 예견되는 종말을 피부로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무장한 사람들은 성벽 위에서 돌을 던지며 끝가지 저항 했다. 성문이 부서지기 시작하자 생존자들은 스스로 건물에 불을 지르고 수백 명의 카타리 사람들이 스스로 화염 속에 몸을 던졌다. 마침내 몽세귀르는 함락되었다. 채 생명이 끊어지지 않은 극소수의 생존자들에게 그자리에서 참혹하게 고문이 자행 되었다. 왜냐면 침략군이 철저한 조사와 추적으로 사전에 알고 찾으려 했던 귀한 보물과 성물(성배)이 끝내 나오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문은 무자비하게 거듭거듭 잔혹하게 이어졌다. 종국에 차마 스스로 목숨을 끊지도 못하고 고문을 견디지 못한 한 사람이 자백했다.

  지난밤 칠흑같은 어둠을 이용해 오늘의 참상을 예견한 저항군 지휘부 몇 명이 큰 자루들을 엮어서 둘레메고는 천길 낭떠러지의 벼랑을 타고 아래로 내려갔다는 정보였다. 바위벼랑 위의 요새는 가히 난공부락의 천험의 요새로 특히 뒷쪽의 날카로운 깍아지른듯한 벼랑은 새가 아니라면 그 어떤 짐승도 오를 내릴 수 없을 정도로 험해서 요새를 공격하는 측이나 방어하는 측이나 별도로 예외로 치는 곳이었다. 아무도 그곳으로 사람이 오르 내릴 수 있다는 상상을 꿈에서 조차 해보지 못했을 정도였다. 그런데 그곳으로 빠져나간 무리가 지난밤에 분명히 있었다는 자백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했을까?

  생 루이는 어찌되었든 사실 확인이 필요했다.

  프랑스 군대 전체에서 공성전에 특별한 재주를 가진 군사들을 불러 모았다. 성벽을 기어 오르고 지붕을 타고 날아다니는 특수병들 이었다. 인근의 밧줄이란 밧줄을 모구 거두어다가 내려트리고 난공불락의 바위벼랑을 철저하게 조사하기 시작했다. 조사와 추격이 시작된지 며칠만에 바위벼랑 중간의 작은 동굴에서 보물이 담긴 자루가 발견 되었다. 그 보물들은 실제로 지금 박물관에 전시 보관되고 있다.

  누군가가 실제로 사람이 가지고 갈 수 있을만큼의 보물이나 재화를 가지고 이 벼랑을 통해 탈출했다는 사실이 입중된 것이다. 그 과정에 차마 다 가져갈 수 없어서 일부를 동굴에 숨겨 둔 것이다. 그렇다면 끝내 가지고 사라진 자루에는 이 보다 훨씬 중요한 것들이 담겼다는 추론이 충분히 가능해 지는 것이다. 생 루이의 성물 추적은 계속 되었다. 하지만 어디에서도 더 이상 흔적을 찾지 못했다.

  일부 학자는 그때 도망친 무리가 프랑스를 떠나 영국 해안에 상륙했다고 한다. 하여 성배가 지금 영국의 어딘가에 감추어져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만약에...... 이때 성배 마저도 생 루이의 수중에 들어갔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파리로 돌아간 루이는 생트 샤펠의 건설에 박차를 가한다. 자나 깨나 어서 성물을 자신의 처소에 옮겨 오기만을 고대한다. 그런 결과로 불과 33개월 만에 생트 샤펠은 건설되었고, 생 루이는 서둘러 노틀담 대성당에 안치되었던 가시 면류관(성유물)을 생트 샤펠로 옮긴다. 만백성을 고르게 위로하고 지켜주던 성물을 이제 자신만의 영달을 위해 사용하기 위해서 내주었다가 다시 빼앗은 경우라 해야겠다.

  육군 사관학교를 수석으로 졸업한 천재가 생애 첫번 째 전투에서 눈부신 승리를 쟁취했으며, 이제 바야흐로 성유물의 신기한 기운이 오로지 자신을 위해서만 쓰여진다면.......... 무슨 생각을 했을까?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하나......... 눈부신 승리를 자신의 경력에 보탤 수 있는 전쟁터가 더욱 간절하게 필요해진 것이다. 하지만 어디에도 전쟁터는 없었다. 그러자 이 기막힌 천재는 자신이 전쟁을 만들기로 결심한다. 자신이 스스로 나서서 교황을 부추기고 어르고 달래고 뇌물까지 먹여서 필요도 없고 생각치도 않았던 제 7차 십자군 전쟁을 스스로 기획하고 총괄 감독까지 맡았던 것이다.

  자신의 군대를 중심으로 거창하게 십자군 원정대를 꾸려서는 지중해로 떠났다. 곧장 성지 회복에 나선것이 아니라, 예루살렘을 차지하고 있는 배후인 이집트를 먼저 정복하여 눈부신 업적도 쌓고 막대한 영토와 황금까지도 차지하고 말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생 루이는 하늘이 배출한 전쟁의 귀재이자 불세출의 영웅이었을까? 안타깝게도 하늘은 금수저 집안도 아니고 육군 사관학교 근처에도 가보지 못하였지만, 아무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닥친 상황을 요리조리 어찌어찌 해가면서 극복해 나가는데는 일가견이 있는 잔머리의 대왕을 하필 그 시기에 이지비트 지역 술탄에 앉혀 놓았던 것이다. 탱크를 타고 돌진해 오는 생 루이 앞에 당나귀를 타고 막어선 꼴이라는게 딱 정확한 비유일 것 같다.

  하늘의 장난이 너무지나쳤음일까? 생 루이의 프랑스 군대가 힘 한 번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쫄닥 망해버린 것이다. 생 루이는 포로가 되었고 설상가상으로 동생이 전쟁통에 사망했다. 적벽대전에서 쫄닥 망한 조조의 심정이 딱 생 루이의 심정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황금을 몸값으로 지불하고 겨우 생 루이는 파리로 돌아왔다. 그럼 이제 정신을 차렸을까?

  자신의 사지와 정신이 멀쩡하고 용기가 아직 쌩쌩한데, 거기다가 성유물의 신성한 기운이 아직도 버젓이 자신의 손 안에 있는데..... 지난 패배는 지지리도 운이 없었던 탓이었을 뿐........ 어서 단번에 싹 만회를 해야겠다고 다짐에 또 다짐을 해오지 않았던가?

  이번에도 생 루이는 스스로 제 8차 십자군 원정대를 꾸리고 서둘러 출병했다. 지난번 같은 오류를 되풀이 하지 않기 위해서 이번엔 튀니지 지역에 상륙을 해서 곧바로 예루살렘을 향해 진군하는 것으로 계획을 수정했다. 그렇게 과감하게 돌격을 감행 하였는데.......

  이번에도 그를 막아선 또 그때의 잔머리 대왕이 이미....... 생 루이가 이런 전략을 펼칠 것이라고 예측하고 나름의 준비를 마치고 기다리고 있었다.

  잔머리 대왕의 기습부대가 소수의 병력으로 수시로 출몰하면서 사하라 사막을 가로질러 진군하는 프랑스 군대를 치고 빠지면서 괴롭혔다. 프랑스 군대는 더 이상 앞으로 진군을 해 나가지 못하는 상황에서 보급이 끊어지고, 무엇보다 물 공급이 차단되었다. 이슬람 군에게 사막은 앞마당 놀이터와 같았다. 그들은 오아시스를 중심으로 자신들이 가고자 하는 방향을 읽었고, 물 공급이 없어도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거리에 대해 손바닥 들여다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이슬람의 기습은 프랑스 군의 발목을 붙잡았고 물 부족은 사기 저하를 뛰어넘어 병사들이 하나 둘 쓰러져 갔다. 더하여 나뒹구는 시체 속에서 돌림병이 발생했다. 결국 진격을 포기하고 후퇴하는 프랑스 군에게 여러가지 악재가지 겹친 끝에 종국엔........ 생 루이가 쓰러져 사망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제 성스러운 전쟁은 어디에도 없었다. 어떻게든 생존자들은 살아서 돌아가고 싶었다. 하지만 왕의 시신을 이렇게 버려두고 갈 수는 없었다. 그렇다고 돌림병까지 창궐하는 마당에 썪어 문드러져 냄새나고 파리와 구더기가 득실득실한 왕의 시체를 무조건 가져갈 수만도 없는 상황이 아니겠는가? 결국 프랑스군 지휘부는 왕의 시신을 가마솥에 넣고 끓이고 또 끓여서 뼈만 추려서 마대자루에 쌌다. 존귀하신 다이아몬두 수저의 뼈를 제외한 나머지 부산물들에 대한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어디 대충 모래 구덩이에 쏟아붓고 파뭍지 않았을까? 어찌되었건 하늘이 내리신 천재 용사 생 루이는 어처구니 없는 전투의 결과로 허무하게 죽어 뼈만 겨우 추려서 마침내 집에 돌아왔다. 노틀담 대성당에서 성대한 장례식이 거행되었고 생 드니 왕실 묘역에 묻혔다.

  쓸데 없는 전쟁에서 동생도 죽고 마침내 생 루이도 죽게 되었으니....... 이것으로 카페 왕조의 후사도 단절되었는지라 또 한번 왕족 가문이 막을 내리고, 새로운 발루아 왕조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생 루이는 프랑스 인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군주라 해도 결코 틀린 표현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말이다....... 가만히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그가 저토록 사랑과 존경을 받는 이유를 나는 도무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뭘 했지? 적어도 파리 스타일로 끝까지 폼 하나는 그럴싸하게 잡았기 때문일까?

  <이단 사상과 카타리 파에 대한 진실>을 이야기 할 때 쯤에서 다시 루이 9세를 불러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박물관(Musee du Louvre) 하면 <모나리자>를 가장 먼저 떠올리는 사람들이 대부분이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밀로의 비너스>가 나오고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이 등장하게 된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밀로의 비너스>를 밀로라는 조각가가 만든 <비너스> 라고 생각하는 분이 나오고,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이 누구야? 내가 아는 <니케의 여신상>은 왜 빠진거야 라고 의문을 가지는 분도 솔직히 나온다. 웬만한 회화 작품에서는 작가의 이름이 작품의 앞 뒤에 따라 붙기가 쉽상인데 고대 그리이스의 조각품들은 대부분이 '작자 불명'인 경우가 허다하게 많다. 하여 작품을 구분하기 쉽게하기 위하여 최초 발견 지명을 붙이기도 한다. 그러니까 밀로스 섬에서 출토된 비너스 조각상이 되는 것이다. <니케의 여신상> 또한 발견 지명을 붙여서 새롭게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 이라고 이름을 바꾸어 부르게 된것이다. 날개 달린 천사의 이름이 (니케)인 것은 맞으나, 20세기에 들어서 유명 스포츠 브랜드가 로고와 상표를 그 이름에서 따서 쓰게되면서 생겨난 여러가지 논란을 피하고자 사모트라스 섬에서 발견된 승리의 여신상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루브르 박물관에는 항상 '세계 최고' '세계 최대' 라는 수식어가 따라 붙는다. 그런 표현들에 대해서 우선 나 부터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다. '그냥 그런가 보다' 하는 정도가 전부라 하겠다.

  좋게 말한다면 그만큼...... '귀하고 비싼 미술품이 세상에서 제일 많이 쌓여있는 보물창고'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이를 뒤집어서 달리 표현하자면 '세상에서 제일 비열한 놈들이 온갖 야비한 짓을 주야장창 일삼으면서 약탈하고 도둑질한 물건들을 어마어마하게 쌓아놓은 세계 제일이자 최대의 도적놈 소굴이 바로 루브르 박물관' 이라는 뜻이 되기도 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어쩌겠는가? 비록 장물(?)인줄 알면서도 비행기 까지 타고 와서 또 별도의 비싼 비용을 지불하지 않으면 그 귀하고 유명하다는 미술품들을 볼 수가 없으니 말이다.

  그래서 '일생에 딱 한 번쯤은 눈 딱 감고 봐주자' 하는 심정으로 어쨌든 다녀오고야 말았다. 암튼 속이 뻥 뚫리도록 시원한 구경질 이었던 것만은 분명히 맞다.

  세계 최고의 미술관으로 '루브르 박물관'과 '대영 박물관'이 서로 엎치락 뒤치락 티격태격하는데........ 세계 최고의 도둑놈 소굴이 바로 그 두 곳이라는 사실 또한 분명하게 맞다. 하여 장담할 수는 없겠지만..... 내 인생 여정에 또다시 도둑놈 소굴을 들여다 볼 생각은 추호도 없다. 그러니까 영국에도 도둑질한 미술품들 때문에 가지는 않을 것이라는 생각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는 뜻이다.

  이제껏 피렌체의 우피치 미술관을 세 번 다녀왔다. 언제나 처럼 항상 설레고 기대가 되는 참으로 편안한 미술관이다. 나는 우피치 미술관을 참 좋아하나 보다. 앞으로도 적어도 꼭 한 번은 더 다녀와야만 하겠기에 하는 말이다. 내 인생이 끝나기 전에 두 발이 성하고 사방 쏘다닐 체력과 정신력이 살아있을때 우리 손녀 태리 손잡고 이탈리아 여행을 하고 싶다는 것이 내 간절한 소망이자 소원이라고 하겠다. 우리 아들과 며느리가 이태리 여행을 하고 나서 어찌나 감동을 먹었는지 2세가 태어나면 무조건 '이태리'에서 따서 '태리' 라고 아예 현지에서 이름을 지어서 돌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이듬해 태어난 우리 손녀 이름이 '태리'다. 이태리 가는 비행기에서 다시 그 지어진 이름의 연유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주어야 겠다. 우리 손녀에게 이태리를 꼭 보여주어야 하겠는데....... 요목조목 아무리 따져보아도 적어도 '이태리에 관해서라면' 여기 이 할아버지 만한 안내자가 세상 어디에도 없을것만 같다. 내가 알고 있고 내가 기억할 수 있는 이태리와 유럽과 세상에 대한 재미있는 이야기를 많이 많이 손녀랑 손을 잡고 이태리 일주를 하면서 꼭 들려주고 싶다. 엄마 아빠는 베네치아와 피사를 좋아하고, 할머니는 로마를 좋아하고, 할아버지는 피렌체랑 시칠리아를 좋아한단다. 그리고 그 중에서 피렌체에 가면...... 우피치 미술관이 그곳에 있단다........ 르네상스라는 것은 말이야......... ㅎㅎㅎㅎ

우피치는 편안하고 아늑하다.

  루브르는 거대하고 화려함 뒤에..... 최첨단 자본주의 상술이 추가된 최첨단 복합산업체 라고 해도 무방할 정도의 연기 나지않는 거대한 공장으로 느껴진다. 내 솔직한 고백이다. 거대 자본은 이 공간 가득 예술의 향기와 역사에 대한 향수를 사방에 도배하듯 숨겨 놓았다. 대영 박물관도 마찬가지 겠지만 말이다.

  파리에서는 그나마 오르세 미술관이 좀 느긋한고 여유롭다고 할 수 있겠는데........ 조금만 따지고 들어가면 역시나(루브르에 비하면 그 못된 도둑질과 강도질의 농도가 한참이나 옅게 느껴지겠지만) 프랑스라는 제국이 우리나라 강화도에서 의궤를 훔쳐 가져간 것처럼, 그런 수단 방법으로 모아놓은 미술품들 중에서 시대별로 좀 구분해서 소량을 따로 떼어 보관한 곳 중의 하나 라고 생각해 보면 역시나 불쾌해 지는 것은 엄연하 사실이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오늘은 아주 단순하게 그냥...... 오로지 귀한 미술품들을 찾아서 논 호강이나 한 번 실컷 해보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찾아 온 것을 말이다.

  '뭐가 어쩌니 저쩌니 하더니만........ 괜치않네? 저만하면 유리 피라미드가 나름 쌈박한것 아니겠어? 싫으면 말해. 내가 뜯어다가 우리 고향 충주 무술공원에 설치해 버릴테니까. 알았지?'

  유리 피라미드가 루브르 박물관으로 들어가는 정문의 역활을 하고 있다. 정말 멋지고 탁월한 선택이 아닌가?

  여행에 대하여 내가 가진 지론중에 가장 자주 주변 사람들에게 당부하는 말은 '여행은 아는만큼만 보인다. 아는것이 많으면 그만큼 여행이 풍부해 진다' 라는 이야기인데, 이 당부는 특히 미술관이나 박물관을 여행하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더더욱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사실 파리를 여행하는 사람들에게 에펠탑이나 노틀담 대성당 만큼이나 사랑받고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장소가 바로 루브르 박물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여행자들이 사실은 루브르 하면 <모나리자> 만을 떠올리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가는 이유가 '파리까지 왔으니 적어도 에펠탑이랑 모나리자 그림을 배경으로 인증 샷을 찍고가야지 두고두고 파리에 다녀왔다고 할 수 있지 않겠어' 라고 생각하는 여행자들이 실제로 상당수 있다는 사실이다. 파리 여행에서 루브르 박물관이나 베르사이유 궁전은 정말로 시간이 많이 소요되는 대표적 여행지라고 할 수 있다. 프랑스 미술과 역사에 아무리 뛰어난 실력을 갖춘 가이드라 할지라도 당연히 최고의 난관은 바로 루브르 박물관과 베르사이유 궁전일 것이다. 안내하고 보여주고 설명할 것은 무척이나 많은데..... 그것을 제대로 하자면 일주일을 가져도 부족할 판에 볼게 많고 하필 거리가 뚝 떨어진 애물단지가 바로 루브르와 베르사이유인 것이다. 그런 상황에 여행자들은 에펠탑 사진도 찍어야하고, 개선문도 가야하고, 어디서 주워 듣기는 했는지 퐁피듀 센터에다 팡테온에다 앨발리드에다 오페라 하우스까지 가야만 하겠단다. 하니 어쩌겠는가? 서둘러 베르사이유에 가서는 입구에서 들여보내면서 '한 시간 반을 드릴테니 둘러보시고 시간 맞춰 나오세요' 라고 할 수 밖에 없지않겠는가? 루브르에 가서는...... 이거 사람들만 풀어놔서 들여 보내면 끝까지 <모나리자> 조차도 찾아보지 못하고 쫓기듯 나오는 사람들이 부지기수라 대충 이렇게 진행한다.

  '드농 관이라 써 있는게 보이시지요? 여기서 부터가 루브르 전시실입니다. 이제부터 시작은 이탈리아 조각상들을 보면서 시작하겠습니다. 보시면 아시겠지요? 저만 보고 따라오시고요. 계단을 올라가면 프랑스 낭만주의 회화실입니다. 하지만 별로 중요한 것은 아니지요. 정작 중요한 것은 여기 회화실이 끝나는 지점에 있는 <모나리자> 라고 할 수 있지요. 사람들이 붐비니 일단 이곳을 빨리 빠져나가서 <모나리자>를 감상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나리자를 배경으로 사진은 꼭 찍으셔야 하잖아요? 거기가 사람들로 몹시 붐빌터이니 일단 이곳을 빠르게 지나가도록 하겠습니다. 모나리자를 보고나서 다음으로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을 보게될 거예요. 나이키..... 아니 니케의 여신상 아시지요? 그러니 꼭 보아야 하겠지요? 니케의 여신상을 보고나면 계단을 통해 아래로 내려가면서 그 유명한 <밀로의 비너스>를 볼거예요. 기대되시죠? 거기에서도 사진을 찍을 시간을 드릴께요. 어이쿠..... 시간이 벌써 한 시간을 한참 지났네요, 이정도면 나름 루브르 박물관을 다 보신거라 치셔도 될거예요. 사진들 잘 챙기시고...... 이젠 개선문으로 출발 할께요. 멋진 명품 거리 샹젤리제가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때요? 루브르 박물관이 마음에 드셨나요?' 라고 너스레를 떨지도 모르겠다. 아주 약간 마음에 찔리면 박물관을 나가면서 지상의 유리 피라미드와 지하의 꼬맹이 피라미드가 마주치는 절묘한 하모니를 배경으로 패키지 단체 사진을 한 장쯤 찍어주는 서비스 이벤트를 감행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고 나서도 이동하는 내내 여행자 여러분께서 그렇게 어렵다는 루브르 박물관을 완전히 답습하고 마스터 했다고 추켜 세울지도 모를 일이다.

  이 대목에서 굳이 남들처럼 루브르의 미술작품 하나 앞에서 10초씩만 감상을 해도 박물관을 다 볼려면 며칠이 걸리느니 하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 왜냐하면 박물관 투어 내지는 미술 감상이라는 것이..... 생각하기에는 아주 쉽고 단순해 보여도, 한 두 시간만 하고나면 허리와 무릅과 어깨가 결리고 쑤시고 난리도 아닌 그야말로 중노동 못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을 격어 본 사람만 알기 때문이다. 안하던 일을 하면 안쓰던 근육을 써야만 하고, 그것으로 인해 몸에도 마음에도 어떤 과부하가 걸려서 그리 녹녹치만은 않은 부작용을 발생시키기 때문이다.

  지금 루브르 박물관에는 대략 61만 점 이상의 미술품이 소장되어 있고, 그중에서 대략 3만 6천 점을 공개 전시하고 있다. 소장품의 17% 정도만을 내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온라인을 통하면 48만 점 정도까지 소장품을 검색해서 관람할 수 있다고 한다. 나는   오래전부터 대부분의 미술품을 온라인 검색을 통해 감상하는 것을 활용하고 있고 남들에게도 권고하고 있다. 작품의 크기나 특별한 질감에서 느껴지는 압도적인 분위기만 아니라면 나는 온라인 감상이 훨씬 감동적이라고 생각한다. <모나리자>를 예로 들어보자. 가로 53cm 세로 77cm의 비교적 작은 그림에 속하는 이 그림은 대단히 독특한 유명세로 인하여 그림에 가가이 다가갈 수 조차 없을 뿐더러 안전 장치로 방탄 유리가 그림을 덮고 있어서 순순하게 그림의 색채나 질감을 전혀 느껴볼 수가 없다. 입구에 붙어있는 모나리자 포스터가 훨씬 더 사실과 기대에 가깝다고 해도 전혀 무리가 아닐 것이다. 그런데 그 앞에 꾸불꾸불 길게 줄을 서서 인증 샷 하나 건지려고 난리도 아니다. 왜 그 생고생들을 할까?  

  온라인에서 <모나리자>를 검색하면 진품보다 더 진품같은 실로 퍼펙트한 <모나리자>가 오로지 검색자 한 명을 위해서 특별 전시를 무한정 해준다. 루브르측이 양해하고 최적의 환경과 빛과 조명과 최고의 사진 촬영 시스템과 최고의 스텝진이 완전 무결한 원본을 고스란히 온라인 상에 옮겨 놓았다. 정말 좋은 세상이라는 것이 새삼 실감나는 순간이다.

  꼭 나름의 이유를 들어서 현장에서 보아야 하는 작품이 아니라 그냥...... 유명해서라는 이유라면  차라리 집에서 편안하게 온라인으로 즐겨보자.  

  아침에 루브르가 개관하는 동시에 뛰어 들어가 폐관하는 시간에 맞추어 나오면서 까지 죽어라 루브르 전시품을 쫓아다니며 감상했다고 쳐도..... 기실, 사람이 하루에 볼 수 있고 가슴에 담아 두거나 기억에 새겨놓을 수 있는 작품 감상의 숫자는 지극히 제한적일 수 밖에 없다. 따져보면 불과 몇 작품 안된다. 그렇다면 차라리...... 무조건 사전 공부를 해라.

  루브르 박물관을 찾아가기에 앞서서 공부를 통해........ 죽어도 보고 나와야 할 작품을 사전에 미리 냉정하게 조사하고 메모를 해 두라고 권장하고 싶다. 열 작품 정도도 좋고...... 죽어도 스므 작품은 보아야 하겠다고 해도 좋다. 그 명단을 작성해 놓고 더하여 가능하다면 우선 순위까지 정해 두는 것도 좋겠다. 다음은 대충이라도 그 작품이 어디쯤 있다는 것까지는 다는 아니래도 우선 순위 상위의 작품에 대해서는 알아두는 것도 좋겠다.

  그래놓고 최고 우선 순위의 작품부터 차례차례 찾아다니는 것이다. 간혹 지나가다 보면 하위 순위의 작품이 중간에 툭 하고 튀어 나오기도 할 것이다. 아니면 준비 목록에는 빼놓았지만 까먹고 있었던 작품이 나타날 수도 있다. 그렇게 진행 한다면 설혹 순위에 따라 일곱 작품을 감상했던, 아니면 스므 개 목표에서 열 세개를 보았던 충분히 의미있는 시간이 되었을 것이다.

  나 역시도 이번 루브르 박물관을 방문하면서 마음속에 그런 리스트를 만들어 새겨두었다.

  그런데 확실한 것 하나는...... 내 리스트 어디에도, 챠밍여사의 리스트 어디에도 <모나리자>는 없었다는 사실이다.  

  그럼 내가 루브르에서 꼭 찾아서 보아야 하겠다고 생각해 둔 리스트를 살짝 공개해 보기로 해야겠다. 이유는 차차 현장 관람에서 밝히기로 하고 작품을 포괄적인 의미로 범위까지를 기준으로 나열해 본다면........

 

  1.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

  2. 니콜라 푸생의 작품들.(<아르카디아의 목자>들을 포함한 루브르 소장품 전체)

  3. 파르테논 신전의 부조.

  4. 사모트라스의 승리의 여신상.

  5. 밀로의 비너스

  6. 드라크로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

  7. 제리코의 <메두사 호의 뗏목>

  8 레오나드로 다빈치 <암굴의 성모> <세례자 요한>

  9. 루브르가 소장한 카라바조의 작품들.

  10. 함무라비 법전과 이집트의 서기상.

  11. 우피치 미술관에서 내가 열심히 설명한 바 있는 <잠자는 헤르마르로디토스> 조각상.

  12. 쿠르베 <화가의 아틀리에>

 

 

 

 

 

 

 

  이런 작품들에 관심과 우선 순위를 두고 루브르 박물관 감상을 시작했다.

  물론 우리 여행 방식의 특성상...... 죽어라고 많이 돌아 본 것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어차피 루브를 모두 둘러 볼 수도 없고, 뜻밖에 만난 반가운 작품들도 있었지만...... 그것들 모두까지 모두 짚고 가기에는 너무나 분량이 넘치고 해서........ 내가 사전에 선정해 놓았던 작품을 중심으로 해서, 사진기를 들이댔던 순서에 입각해 루브르 박물관이 소장한 작품들을 살짝 들여다 보는 정도로만 <루브르 박물관> 편을 살펴보고자 한다. 차후로도 <르네상스 산책>을 계속 진행하다 보면 루브르 박물관은 자연적으로 계속 따라다니게 될테니까 말이다.

 

 

 

 

 

 

 

 

 

 

 

  -- 그럼 다음 이야기에서 부터 본격적으로 <루브르 박물관> 이야기를 이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