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페, 카르페, 카르페 디엠!'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 키팅 선생님은 그의 어린 학생들을 향해 로마의 시인 호라티우스의 시를 인용하여 열정적으로 외친다.
'Carpe, carpe, carpe diem, quam minimum credula postero!'
'지금 이 순간을 잡아라. 가급적 내일이라는 말은 최소한만 믿어보는 거야.'
'Carpe, carpe,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lives extraordinary.'
'카르페 디엠. 이 순간을 잡아라. 너에게만 허락된 삶을 사는거야.'
굳이 기독교적 종말론까지는 아닐지라도 모든 순간을 저렇게 절실하게 살 수는 없겠지만, 이제껏 살아오면서 과연 몇 번이나 저렇게 삶을 진지하게 성찰해 보았는지 나 스스로에게 되묻고 싶어진다. 이런 생각과 이런 느낌과 이런 시간이 나는 좋다.
왜 낯선 여행지에서 갖는 새벽산책 시간이면 어김없이 이렇게 다소 무거울 정도의 진지함이 늘 찾아오는지에 대해서는 나도 잘 모르겠다. 하지만 다소 버거울지언정 이런 긴장감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언제까지고 남은 생이 끝나는 순간까지 거듭거듭 다시 찾아주기를 나는 온마음으로 기대한다. 그런 이유로 주로 혼자하는 나의 새벽 산책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지금에서야 아주 솔직히 고백하자면....... 아주 가끔은 혼자 하는 여행이 그리울 때가 있다. 주변에서 가장 흔하게 많이 들었던 말...... ‘장기간 혼자 여행하면 외롭지 않아?’라는 질문이 내게는 아무런 문제도 이유도 되지 못했다.
처음 시작하는 목적지가 있겠고, 떠나는 날짜와 돌아오는 날짜가 정해진 비행기표만 있으면 그 외에는 전혀 아무런 어려움이나 불편함이나 두려움이 적어도 내게는 없었다. 일단 공항에 도착하면 로밍 서비스를 하지 않는 특성상, 핸디폰을 비행기 모드로 바꾸고 나서 규정된 룰에 따라 절차를 지키고 하늘로 높이 날아오른다. 지구상에 어디가 되었든 첫 목적지 비행장에 내려서 배낭을 찾아서 둘러메고 낯설기만 한 입국장을 나서면....... 그지없이 편안함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사정없이 가득 파고들어 온다. 그런 느낌을 어떻게 표현하면 좋을까? 그럴 때 내가 쓰는 말이 바로 ‘내가 가진 것이라곤 시간과 배짱뿐! 마침내 내가 왔다. 낯설음이여 서둘러 나를 영접하라!’ 이렇게 해서 생겨난 것이다.
달랑 손에 지도 한 장만 들고 나서면 이제부터 낯선 세상은 모든 것이 내 차지가 된다.
예상보다 길이 한참이나 멀어져도, 기껏 골라서 힘들여 찾아간 숙소가 내부수리중이어도,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부랴부랴 찾아들어간 식당 메뉴판이 사진이 없이 알 수 없는 언어로만 되어 있어도, 돈을 내겠다고 작정하고 찾아도 보이지 않는 화장실 때문에 체면불구하고 깊숙한 골목길 안쪽에서 몰래 일을 볼 때도, 약간의 성가신 불편함이 있을 뿐 극복하고 해결해 나가지 못할 어려움은 어디에도 없다. 길을 찾는 같은 처지의 여행자끼리 키득거리며 서로 길을 찾아주겠다고 설치기도 하고, 골목길을 헤매다 꽃과 빵을 얻기도 하고, 언어도 통하지 않는 처지에 한참동안 짜짜(60도 보드카)를 나누어 마시며 낄낄 거리고 웃는다. 왜 웃는거지?
가고 싶으면 가고, 쉬고 싶으면 쉬고, 먹고 마시고 싶으면 먹고 마신다. 그러다보면 세상살이라는 게 우연인지 필연인지, 이도저도 아니면 ‘그냥 팔자겠지 뭐’ 하는 심정이 된다.
혼자 하는 여행은 시작에서부터 이미 모든 순간과 순간들이 전부 선택의 연속이다. 하지만 그 선택에 최선이나 성공이란 애시당초 부터 없다. 대충 그냥 마음먹기에 딸렸으니까 말이다.
하지만...... 그런 허술함 속에서 스스로를 좀 더 이해하게 되고 많은 것을 알아가게 된다. 그런 단계를 지나면 어느 순간 스스로를 위로하게 되고 소중한 존재로 아껴주게 된다.
하지만...... 그러했던 나의 혼자 하는 여행도 어느 시점에서부터는 둘이 되어 버렸다.
어찌되었던 그것도 역시 내가 스스로 선택한 것에 대한 결과였다. 기분이 좋으면 ‘챠밍여사’가 되고, 마음이 상하면 ‘왕짜증여사’로 부르는 그 분이다.
솔직히 혼자 하는 여행에 대한 그리움이 어느 정도 남아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함께하는 여행에 완벽하게 적응한 상태라고 말할 수 있겠다. 아내와 내가 스스로의 두 발로 걸을 수 있는 그날까지 함께하는 우리의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어느 글에서인가 누군가가 ‘저에게는 여행이 취미예요’ 했다가 ‘사치’로 엄청나게 뭇매를 맞았다는 아주 오래전 신문기사를 본 적이 있다. 시간도 흘렀고 가치관과 세상살이도 변했다. 그 기사를 보고나서 슬쩍 또 치기가 불쑥 솟아오른 것이 아닌가?
누군가 나에게 ‘당신에게 여행은 무엇인가요?’ 라고 물어 온다면........ ‘여행은 우리에게 취미이자 특기에요’ 라고 당당하게 말해주고 싶다.
‘인생이란 누구와도 나눌 수 없는 짐을 지고 아주 먼 길을 가야만 하는 여정’ 이라는 말을 나는 기억한다. ‘그런 멀고 긴 여정에 좋은 벗이 하나쯤 있다면 어찌 행복하지 않겠느냐’고 하신 우암 선생의 말씀도 나는 기억한다. 누군가와 더불어 살아간다는 것은 참으로 멋진 일이다. 함께 걸으며 위로하고 즐거워하고 그러다보면 간혹은 목적지에 대한 수정이 불가피하기도 할 것이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배려 속에 내가 알지 못하던 세상 밖의 새로운 것들에 대해서 깨닫고 예상하지 못했던 변화를 경험하기도 할 것이다.
‘스스로의 힘으로 자신만의 진정한 자아를 찾아라. 다른 누군가가 당신이 가야할 길을 대신 만들거나, 그로 하여금 대신 가도록 허락하지 말라. 당신의 길은 당신 스스로가 혼자 가야만 하는 길이다. 다른 누군가와 함께 손을 잡고 걸을 수는 있겠으나, 그 누구도 당신의 길을 대신하여 걸어 줄 수는 없다. 그것이 인생이다.’라는 아메리카 인디언들에게 선조들로 부터 전해내려 오는 이야기가 새삼 떠올랐다.
이런것들이 모두 내가 여행을 죽도록 사랑하도록 만드는 이유이다.
여느 때처럼 새벽 산책을 나선다.
이곳저곳 골목길 순례를 하다가 큰길가 노점에서 베트남식 모닝커피로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을 발견하고는, 그런 것들이 내게도 지극히 당연한 일상인 것처럼 자연스레 다가가 빨간 플라스틱 목욕탕 의자에 앉아서 진하고 뜨거운 커피를 마신다.
‘씬짜오!!!’
앞에도 뒤에도 옆에도 모두가 씬짜오다. 지금 나는 아주 쬐끔 낯설고 어색한 달랏 현지인인 것이다.
지나다 보면 분명 어제 아침에 오갔던 길이며 골목임에도...... 분명 같으면서도 무언가가 다른 느낌이다. 하긴, 세상 어디를 가도 늘 그런 느낌과 생각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아마도 그런 느낌과 생각들이 제법 익숙해지고 낯설지 않게 느껴지기 시작했다면........ 틀림없이 이젠 다른 곳으로 떠날 시간이 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또 떠나야할 때가 된 것이다. 이런 느낌은 항상 틀린 적이 없다!!!
오늘은 좀 바쁜 하루가 될 것만 같다.
한낮의 무더위는 피해야 하겠고...... 달랏에 할애할 수 있는 시간은 그리 넉넉하지 않기 때문이다. 랑비앙 산 트래킹과 커피농장 방문과 엘리펀드 폭포는 아쉽지만 생략해야만 할 것 같다.
산책을 마치고 돌아오니 챠밍여사와 조카 손녀는 외출 준비를 마쳐가고 있었다.
침대 옆에 쪼그리고 앉아 캔맥주를 하나 숙소 모닝커피를 대신해 마시고는 먼저 거리로 나가서 지나가는 택시를 붙잡았다.
‘케이블카 전망대까지 얼마면 될까요?’
화산 폭발로 다섯 개의 봉우리가 불쑥 솟아올라 형성된 것이 랑비앙 산(Lang Biang Mt)으로 해발고도 2.167m이다. 우리나라 대한민국의 백두산과 한라산의 딱 중간 높이라고 생각하면 틀림없다.
랑비앙 산에서 남쪽으로 내려다보면 커다란 두 개의 호수가 눈에 들어온다. 바로 아래쪽에 보이는 주변 경관과 썩 잘 어울리는 아름다운 호수가 뚜옌람 호수(Tuyen Lam Lake)이고, 호숫가에서 시작되는 포장도로를 따라 산길을 오르면 높은 언덕의 끝자락에 죽림선원(竹林禪院)이 있다. 여기에서 고만고만한 산등성이와 소나무가 우거진 골짜기를 한참 지나가면 인근에서 랑비앙 산 다음으로 가장 높은 언덕이 나타나는데, 이곳에 현지인들이 (달랏 전망대)를 만들어 놓았다.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는 달랏 도심의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답다. 전망대에서 죽림선원까지 케이블카가 설치되어 있어 현지인들과 여행객들에게 상당한 인기를 얻고 있기는 한데, 흔하게 우리가 생각하는 케이블카와는 상당히 차이가 있어 보인다. 아마도 그것은 실제로 체험을 해 보아야 실감이 가지 않을까?
전망대에서 남쪽으로 언덕을 내려가면 바로 달랏 기차역을 지나 쑤언흐엉 호수(春香湖)에 이르게 되고, 그곳이 바로 달랏의 중심이 되는 것이다.
실개천이 흐르는 이곳에 랏족이 모여 살았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달랏(Da Lat)이다. 고산족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던 개천에 프랑스인들에 의해서 도시가 건설되기 시작했고, 그 과정에서 개천의 상류를 막아 작은 댐을 만드는 과정에서 쑤언흐엉 호수가 생겨난 것이다. 그렇게 보자면 쑤언흐엉 호수는 분명 인공호수인 셈이다. 어디 그뿐인가? 사실은 전망대 넘어서 있는 뚜옌람 호수 또한 20세기 초에 만들어진 인공호수 이다. 자연 풍광과 멋들어지게 어울린 뚜옌람 호수 깊숙한 곳으로 다양한 트래킹 코스가 나있고 캠핑이 크게 사랑받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서 가까이서 바라보자니.......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었더라면 캠핑을 했을 것을..... 하는 진한 아쉬움이 쉽게 떠나질 않는다.
‘One-way or two-way?’
버스표나 기차표나 비행기 티켓을 구매할 때마다 수도 없이 듣는 질문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는 곤돌라나 케이블카 티켓을 구매할 때만은 똑같은 질문을 받았음에도, 조금은 다른 묘한 뉘앙스의 감정을 매번 똑같이 떠올리곤 한다. 나도 모르게 잠시일 만정 머뭇거리곤 하게 된다.
‘편도냐? 왕복이냐? 그것이 문제로다.’
하지만 나는 목적지에 대해서 아는 것이 별로 없다. 출발지에 서있으니 당면한 처지야 어느 정도 알 수 있겠지만, 목적지까지의 거리가 어떤지 난이도가 어떤지에 대한 정보가 전혀 없다. 그렇다면 어떤 결론을 내려야 할까? 아마도 십중팔구는 ‘왕복이요.’ 라고 답할 것이다.
한창 팔팔하던 시기에는 ‘No-way’라고 당당하게 대답하던 시절도 분명 있었다. 계룡산 동학사에서 갑사까지를 한여름에 2박3일 캠핑 도구(옛날방식 무거운 텐트 포함)와 식량과 옷가지를 배낭에 둘러메고, 더하여 20대의 챠밍아가씨 손을 잡아끌면서 넘어간 적도 있었다. 아!!! 옛날이여! 그게 리얼 이었남?
어느 날인가 문득 ‘일단은 한 방향 편도’를 외치는 멋쩍은 나 자신을 만나게 되었다. 일단은 목적지까지 케이블카로 편하게 가고 나서...... 상황을 보고나서 돌아 올 때는 트래킹을 하던 암벽 등반을 하던 그때 가서 결정을 하자는 현실적 타협을 시도하는 나를 발견할 수 있었다.
대둔산 여행에서 같은 생각으로 일단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 인근까지 올랐는데, 나보다 훨씬 연세 지긋한 노부부께서 가파른 바위벼랑을 씩씩하게 올라오시더니 왈....... ‘못 올라올 정도는 아니었네? 그럼 내려갈 때는 좀 편하게 케이블카를 탈까?’ 충격이었다. 우리와는 아예 접근하는 방식부터가 반대였던 그분들의 용기와 도전에 갈채를 보낼 수밖에......
열심히 운동해서 저렇게 옛날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현실은 ‘왕복권으로 주세요.’라고 매번 나는 외친다. 물론 가면서 판단컨대 충분히 도전 해볼 만하다 싶어지면, 편도 티켓 한 장을 과감히 포기하고 트래킹을 감행하기도 여러 번 했다. 버려야 하는 티켓이 전혀 아깝지가 않았다. 지금에도 여전히 케이블카와 곤돌라만은 아직 가보지 못한 초행지라면 무조건 왕복을 선택하는 편이다.
나머지...... 여행의 과정에서 필요한 교통수단은 거의 대부분이 일방통행식 (One-way)를 과감하게 선택한다. 같은 장소로 되돌아 올 필요성을 거의 외면하면서 다니는 편이다.
겨울이 되면 어김없이 어디로든지 떠나야만 하는 우리부부의 역마살은 벌써부터 금년 겨울을 설레는 기대감속에서 기다리게 만들고 있다. 대충의 스케줄은 이미 예정되어 있다.
‘우리 소중한 손녀들에게 엄마 아빠가 없니? 할머니 할아버지가 없니? 그러니까 무조건 크리스마스는 온가족이 함께 보내야만 해.’ 이것은 챠밍여사가 우리 온가족에게 선언한 엄숙한 (가족 구성원의 권리와 의무 장전)이다. 세상없는 일이 생겨도 크리스마스만은 피해야 한다. ‘크리스마스는 소중한 두 공주의 탄생으로 해서 비로소 완성된 우리 가족의 날’ 이다. 우리집안에서 일 년 중 가장 신성하고 고귀한 날이다.
세상에 다신 없을 여행이나 축제라고 해도 무조건...... 크리스마스는 지내고 나서의 문제라고 여겨야만 한다.
2019년의 유럽여행도 크리스마스 지나고 12월 27일에 출발했다. 이유는 오로지 하나.....
2022년의 계획중인 겨울여행도...... 12월 26일 아니면 27일에 출발할 예정이다. 출발은 당연히 편도(One-way)로 체코의 프라하 이거나, 아니면 헝가리 부다페스트가 될 것이다. 프랑스 남부를 거쳐서 밀라노에서 돌아오게 되면 부다페스트일 것이고, 크로아티아에 들렸다가 조지아 트빌리시나 튀르키예( 터키의 국호가 바뀌어서) 이스탄불이라면 프라하가 될 것이다. 그렇게 따진다면 내게는 되돌아간다는 경우가 극히 드물게 오로지 ‘돌격 앞으로’ 방식으로 전개되는 편이다.
인생(人生)은 단 한번 뿐이다. 어느 누구에게도 왕복권은 부여되지 않는다. 편도(偏道)만이 공평하게 주어진 권리일 뿐이다. (once more~) (a second time)은 너무나도 인간적인 열망일 뿐이다. 종교를 빙자하는 그릇된 부류들이 다양한 의미와 해석을 더해서 마치 왕복권이 가능한 것처럼 설레발을 떨어대지만......... 글쎄다. 과연 그럴까?
‘인간이란 존재가 하염없이 고귀하고 아름다운 이유는........ 오로지 편도뿐인 길을 자신만의 걸음걸이로 꾸준히 앞으로 나아가기 때문이다.’ 라고 나는 생각한다.
인생에 리필이 있다면, 가다가 아니다 싶으면 언제고 적당히 되돌아 와서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다시 갈 수 있다면........ 그것은 인생이라 부를 가치가 없는 허드렛일 정도일거라 나는 자신 있게 말하겠다.
곤돌라나 케이블카 앞에만 서면 나는 '인생은 오로지 편도뿐......' 이라는 생각을 자꾸만 떠올리곤 한다.
베트남의 고원 휴양도시 달랏에는 아주 유명하면서도 적잖게 기괴한 모양의 건축물이 있다. 그 건축물의 이름조차 크레이지 하우스(Crazy House)이고 보면 누구라도 우선은 의아해 할 것이 틀림이 없다. 왜 하고많은 이름 중에서 크레이지 하우스라고 해야만 했을까? 그런 의문은 일단 이곳을 방문해 보면 적어도 5분 안에 나름 이해가 되고도 남음이 있을 것이다. 솔직히 고백한다면...... 콘크리트를 이용해 다분히 비현실적이면서도 어딘가 모르게 어설퍼 보이는 엉뚱한 건물이 하나 우뚝 솟아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멋지다 아름답다 보다는...... 기괴하다. 엉뚱하다는 표현이 딱 이지 싶다.
작금에야 베트남을 대표하는 건축가라고 할 수 밖에 없겠지만....... 크레이지 하우스는 당비엔응아(Dang Viet Nga)라는 여성 건축가가 만든 호텔 겸 갤러리 라고 하겠다.
‘당비엣응아’ 라는 베트남식 이름이 어렵다면, 내가 이번 기회를 이용해 그녀의 이름을 아주 아주 쉽게 기억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줄 수 있다.
베트남과 중국과 한국은 같은 한자문화권이자 같은 유교문화권에 속한다. 이는 세계 역사와 문화에서도 아주 특이한 경우에 해당되는 것이다. 이런 특수한 사정으로 인해서 세 국가가 공히 통용할 수 있는 언어로 조금만 손질을 가하게되면 아주 이해가 쉽게 될 수 있다.
‘당응아(Dang Nga)’를 한자로 표기하면 ‘姮娥(항아)’가 된다. 이를 한국어로 번역하면 ‘전설 속에 등장하는 달의 여신’이란 의미이다. 그러니까 ‘당비엣응아’ 라는 말은 ‘베트남(비엣족) 항아’라는 뜻이 그녀의 이름에 담겼다는 이야기다.
그러니까 ‘당비엣응아의 크레이지 하우스’를 적절하게 번역해 표현해 보자면 ‘베트남의 항아가 만든 도깨비 집’이 적절한 표현이지 않을까 싶은 것이 어디까지나 나의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인 것이다. 믿거나 따지거나 말거나...........(이렇게 친절한 설명이 세상 어디에 또 있을까?)
1990년에 준공된 크레이지 하우스를 방문한 여행자들의 절대다수는 이 건축물을 보는 순간 ‘바르셀로나의 건축가 안토니 가우디’를 먼저 떠올리게 된다고 한다. 크레이지 하우스는 인도 열대지방에 자생하는 반얀 나무를 뿌리에서부터 가지 끝까지를 5층 높이의 건축으로 새롭게 형상화 시킨 것으로 보인다. 충분히 그렇게 가우디의 영향을 받았다고도 볼 수 있겠지만........ 그런 부분에 대한 분석은 과감히 생략하기로 하겠다. 이 세상에 한 다리 두 다리만 건너면 서로에게 영향을 주거나 상호보완적인 관계가 형성되지 않는 경우가 얼마나 있겠는가? 지금 활동하는 건축가중에서 가우디에게 영향을 받지 않았다고 할 사람이 과연 몇 명이나 있을까?
대신........ 크레이지 하우스를 가만히 바라보고 있다 보면 가우디가 아니라...... 점 점 선명하게 떠오르는 사람이 하나 있다. 그가 크레이지 하우스에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는 눈을 부릅뜨고 찾아보아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직접적이지는 않겠지만....... 그의 존재가 있어서 크레이지 하우스가 생겨날 수 있었다고 나는 자신감을 넘어 확신할 수가 있다. 어떤면에 있어서는 말이다.
하지만, 그런 과정을 소신을 가지고 설명하자면....... 실로 엄청난 모순(矛盾)을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이율배반적인 베트남 현대사의 모순이라고 할까?
어차피..... 이번 여행기가 내 방식대로의 하고 싶은 이야기를 맘껏 풀어놓는 장이라고 서두에 분명하게 밝혔으니까...... 불현 듯 떠오르는 이야기들은 일단 짚고 넘어가기로 하자.
만약, 그 분께서 지금의 크레이지 하우스를 본다면 과연 어떤 생각을 하실까?
여기에서의 그 분은...... 호치민(胡志明) 이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면서 베트남의 자주독립을 위해 투쟁하고 헌신으로 일관했던 호치민(胡志明)의 좌우명은 ‘꿍담(함께 일한다). 꿍안(함께 먹는다). 꿍아(함께 살아간다)’였다. 청빈한 지도자의 삶을 끝까지 잃지 않은 보기 드문 정치인이 호치민이라고 할 수 있다.
베트남의 초대 주석을 지냈으며 사후에 국부(國父)로 추앙받고 있지만, 더하여 그는 세계적으로 아주 훌륭한 정치가이자 독립 운동가이자 혁명가로 평가받는 인물이다.
베트남 전쟁기간 동안 남베트남 정부와 미국은 특수부대는 물론 정보기관(CIA)까지 동원하여 호치민의 암살 내지는 제거를 끊임없이 시도했다. 그런 수많은 시도에도 불구하고 호치민은 언제나 정글 속에서 북베트남군(베트콩)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독립전쟁을 직접 선두에서 진두지휘한 아주 특이한 경력의 정치지도자였다. 그는 적들의 공세 때문이 아닌, 지병에 의해서 1969년 북베트남의 통일전쟁 승리를 불과 1년 앞두고 사망했다.
미국의 저널리스트 에드가 스노우(Edgra Snow)가 내전중인 산시 바오안(宝安)의 중국공산당 본부를 직접 찾아가 마오쩌둥(모택동)을 인터뷰하여 세상에 알림으로써, 최초로 중국의 실상을 세계에 알린 일은 두고두고 세계 언론계의 역사에서 가히 전설과도 같은 기적 같은 성과였다. 그러자 세상은 중국 못지않게 오랜 시간동안 서구에 저항하는 전쟁을 벌여온 (베트남 사회주의 공산당)과 그들의 지도자 (호치민)에 대해서 궁금증을 가지기 시작했다. 열정으로 뭉친 기자들이 너도나도 앞 다투어 인도차이나의 정글 속으로 뛰어들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호치민의 발자취를 흔적조차 발견할 수조차 없었다.
호치민의 본명은 응우예신꿍(Nguyen Sinh Cung)으로 한자 표기로는 완생공(阮生恭)이었으나, 그가 프랑스에 대한 독립운동과 공산당에 입당하여 활동을 시작하면서부터 여러 차례 수배와 체포와 석방이 반복되었든 탓에 어느 순간부터 그는 가명으로 활동을 시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일생동안 그는 약 196개의 가명을 쓰면서 활동하였고, 호치민(胡志明) 또한 그가 사용하던 가명 중에 하나였다.
호치민은 일찍부터 베트남 전체는 물론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에게도 꽤나 알려진 익숙한 사람이었다. 중국과 소련과 심지어 유럽에서도 상당히 얼굴이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랬음에도 세상은 정글 속에서 베트남 공산당을 이끌고 게릴라전을 벌이고 있는 최고지도자가 호치민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진 완생공이 호치민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했다. 그는 그냥 홍길동 같은 가상의 인물이었을 뿐이다.
이런 가상의 전설적인 혁명가를 찾아 한 젊은 기자가 끝내 정글속의 베트남 공산당 지역까지 찾아 들어왔다. 그의 소망은 오로지 한 가지, 저널리스트의 사명감을 가지고 전설속의 혁명가인 호치민을 만나서 그와 추종자들이 왜 끝까지 프랑스와 일본과 미국에 저항하는지에 대한 속사정을 직접 들어보는 것이었다.
베트콩에게 붙잡힌 기자는 자신의 소망이자 목표를 침이 마르고 피가 마르도록 설명하고 또 요청했다.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그에게 호치민에 대한 단독 취재가 허락되었다. 베트콩은 그를 데리고 몇날 며칠 동안 정글을 헤치고 강을 건너고 산을 넘는 강행군을 지속했다. 기자가 지쳐서 초죽음 직전에 이르렀을 때, 아주 깊은 산간 오지의 작은 부락 앞에서 카메라와 수첩 등의 취재 도구를 돌려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제부터 당신은 자유요. 아무도 당신을 가로막거나 해치지 않을 것이요. 저 앞에 보이는 마을에서 우리의 지도자 호치민 동지께서 당신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당신이 직접 그분을 찾아가서 묻고 싶은 것을 묻고 얻고 싶은 답을 얻도록 하시오. 그곳에서 또한 당신은 완전한 자유인이요. 당신이 취재를 마치고 나와서 당신들의 세상인 사이공에 되돌아 갈 때까지 당신의 안전을 보장한다는 호치민 동지의 당부가 있으셨소. 모두 그렇게 될 것이요. 얼마가 걸리던 그것 또한 당신의 자유요. 우리는 이곳에서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고 당신이 돌아 나올 때를 기다릴 것이요. 당신을 무사하게 되돌려 보내는 것까지가 내게 하달된 명령이기 때문이요,’
게릴라 복장으로 완전무장한 베트콩들이 나무 그들로 향하는 것을 바라보면서도 기자는 넋이 반쯤 나간 표정이었다. 기자는 한참동안 정신을 추스르고는 마침내 마을로 들어섰다.
하지만, 하루 온종일 마을을 샅샅이 뒤지고 다녔음에도 그는 호치민을 만나지 못했다. 아니 찾아내지 못했다. 그의 뇌리에는 이 전설 같은 베트콩 지도자에 대한 수많은 정보와 이야기들이 이미 쌓였고, 21세 나이로 파리를 방문하고 영국과 미국을 방문했던 완생공의 젊디젊은 사진은 생생하게 저장하고 있었지만....... 그 완생공이 호치민일 것이라는 상상조차 해보지 못했으며, 이 마을을 아무리 뒤져봐도 군인 같거나 혁명전사 같은 모습을 한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십여 명 정도의 남루하고 허약해 보이는 남자들이 텃밭을 일구고 허물어진 담장을 수리하고 있었다. 아낙들은 분주히 오가면서 물을 긷기도 하고 모여앉아 옷가지들을 손질하고 있었다. 아주 작고 초라한 산간오지 화전민 마을에서 울려나오는 소리는 앳된 소년소녀들이 나무담장아래 텃마루에 걸터앉아서 글공부를 하는 소리뿐이었다. 젊은 여자선생님의 지시에 따라 읽기를 하고 있는 소년소녀들의 해맑은 눈망울이 유난히 초롱초롱해 보일 뿐이었다. 그 아이들의 집신을 정리해 주고 마당을 쓸고 있는 왜소한 노인이 마을 주민의 전부였던 것이다. 어디에도 혁명을 주도하고 베트콩들을 이끌며 게릴라전을 벌일 만큼 당당해 보이는 남자는 찾아 볼 수가 없었다. 몇 채 안되는 화전민 부락을 샅샅이 뒤져보았지만, 공산당 정부의 지휘부로 쓰여 질만한 허름한 창고조차도 보이지 않았다. 무전기도 총과 타약도 기밀을 담은 지도뭉치도 전투를 벌일만한 군대도 보이지 않았다. 그냥 지극히 일상 그대로의 아주 작은 산간벽지 화전민촌이었을 뿐이다.
허탈함과 무엇인가에 속았다는 생각이 뇌리를 감돌기 시작했다.
당장 숲으로 쫓아가 자신을 여기까지 데려온 무리들에게 따지고 싶었다. 하지만 이렇게까지 된 마당에...... 그들이 아직까지 이 숲속에 남아있을 리가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어쩌면 자신이 이렇게 허무하게 버려졌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한없는 두려움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땀에 흠뻑 젖은 텃밭을 일구던 노인이 하나 다가와 젊은 기자의 팔을 잡아끌었다. 손짓 발짓으로 보아 때가 되었으니 식사를 하러 가자는 뜻이었다. 귀신에 홀린 듯, 넋이 빠진 채 노인의 손에 이끌려 울타리 옆의 나무그늘로 가니 엉성한 작은 나무탁자가 놓여 있었는데, 한 노인이 일어나서 자신에게 어서 오라고 손짓을 하는 것이었다.
‘이렇게 먼 길을 오셨는데 피곤하고 시장하시겠습니다. 오늘은 내놓을 것이 옥수수와 고구마뿐이라 미안할 뿐입니다.’ 분명 또박 또박 영어로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고 있는 것이었다. 젊은 기자는 서둘러 자신의 기억회로를 되돌리기 시작했다. 온종일 여기저기에서 자주 마주쳤던 노인이었던 것이다. ‘그래 맞아!’ 노인은 다름 아니라 아이들의 신발을 정리해주고 마당을 쓸며, 쉬는 시간에 아이들과 함께 손을 잡고 뛰어다니던 그 할아버지가 아닌가? 그랬던 그 촌부가 지금 자신에게 분명하게 영어로 말을 걸어오고 있었던 것이다.
‘여기 이 별 볼일 없는 노인네를 만나려고 그 힘든 고생을 하셨단 말입니까? 어찌되었던 먼 길을 오시느라 수고하셨습니다. 내가 바로 호치민(胡志明)입니다.’
호치민에게 하나의 가명이자 별명이 하나 더 있는데 그것은 바로 (호 할아버지, 혹은 호 아저씨)였다. 그는 죽는 순간까지 그렇게 불리어지는 것을 가장 좋아했었다고 알려져 있다. 위의 사진 속에 가장 오른쪽 후줄근한 농민복장의 노인이 바로 호치민이다. 그리고 왼쪽에서 두 번째 인물이 호치민의 가장 측근이자 혁명동지이며, 사망한 호치민에 이어서 두 번째 베트남 주석에 오르게 되는 투리옹 친(Truong Chinh,본명 Dang Xuan Khu)으로, 크레이지 하우스를 건축한 항응아의 친부인 것이다.
항응아는 이미 출생에서부터 한마디로 베트남의 로얄 패밀리 중에서도 최상의 로얄 패밀리였던 것이다. 아주 어려서부터 호치민을 삼촌이라 불렀을 정도로 절대적인 관심과 지지와 도움과 사랑을 호치민으로부터 한 몸에 받았던 인물이라 할 수 있겠다.
학계에서는 현재까지도 꾸준히......... ‘호치민이 과연 이념에 충실한 사회주의자인가?’ 아니면 권력에 치우친 ‘공산주의자인가?’ 하는 논쟁이 계속되어 왔다. 내가 호치민에 대한 전문가 수준도 아니고, 그에 대해 오랫동안 전념해 온 것도 아니기에 단편적인 결론을 짓기에는 한없이 부족하겠지만, 나는 호치민을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하려고 학문적으로 끊임없이 접근을 시도했던, 그 사회주의 혁명을 완성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이 공산주의를 택할 수밖에 없었던...... 지극히 현실주의자’ 라고 스스로 결론지었다. 하지만 그가 완성시키고 싶었던 (사회주의 이념을 바탕으로 하는 공산주의)는 소련 방식도 아니고 중국 방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그에게서 뿌리내린 베트남 방식도 결코 아니었다고 나는 주장한다.
호치민이 추구한 베트남은 결코 지금 모습의 어정쩡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니었노라고 나는 확신한다.
호치민은 죽음을 넘나드는 혁명의 최전선에서도 항상 같은 꿈을 꾸었다.
- 외세로부터 자주 독립한 베트남 사회주의 민주공화국을 그는 가슴에 담았다.
- 토지개혁 등을 통해서 모든 동지(인민)가 고르게 배고프지 않고 행복한 세상을 그렸다.
- 그 그림 속에는 언제나 모든 아이들이 환하게 웃으며 뛰어노는, 학교교육을 통해 미래의 희망을 꿈꾸는 아이들의 웃음소리로 항상 떠들썩한 그런 베트남의 앞날을 그는 진정으로 간절하게 소망했다.
호치민의 생은 대부분을 정글에서 강대국 서구열강에 대항하는 전쟁터에 머물면서 언제나 맨 앞에서 전우들과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하며 누볐다. 수풀 속에서 지하땅굴 속에서 언제나 그들과 함께 먹고 자고 싸웠다. 안전지대에 숨어서 명령만 내리는 대부분의 지도자들과는 전혀 달랐다. 모든 전황을 직접 현장에서 확인하고 대응책을 마련하고 물러서지 않고 싸우는 야전사령관이었다. 적들에겐 그야말로 저승사자(야차)와 같은 존재였다.
하지만, 지극히 짧은 짬이라도 주어지면 그는 항상 주저하지 않고 아이들 곁으로 달려갔다. 그이 곁에는 항상 아이들이 있었다. 그가 가진 미래에 대한 희망과 간절한 열망에는 항상 해맑은 아이들이 있었다. 많은 아이들이 해맑게 웃고 뛰어노는 곳에서 우리는 자주 호치민을 만날 수 있었다. 그런 아이들 곁에서야 만 비로소 이 냉정한 혁명가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것이다. 호치민에게는 아이들이 베트남이었으며, 혁명에 성공한 사회주의 공화국의 미래였던 것이다.
그런 호치민이 통일전쟁의 승리를 목전에 두고 지병으로 사망했다. 그는 명실상부한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의 완성’을 끝내 보지 못하고 말았다. 오로지 헌신과 투쟁으로 점철된 파란만장한 삶이었다. 오로지 베트남의 미래를 생각했을 뿐, 그 자신을 위한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식도 가정도 없이 오로지 베트남의 미래만을 염려하면서 죽는 순간까지 지극히 청빈한 소시민의 삶을 살았다. 스스로에게만은 더 없이 엄격하였던 것이다.
베트남 사람들에게 호치민(胡志明)은 곧 국가(國父)다. 어찌 그렇지 않겠는가?
적어도 베트남 안에서 호치민은 신(神)인 동시에 종교(宗敎)라고 해도 결코 틀린 말이 아니다. 종교의 자유를 법률로 정한 베트남에서 최대 종교인 불교가 약 12%를 넘고, 두 번 째 종교인 카톨릭(천주교)가 약 8%를 넘게 차지한다. 힌두교. 유교. 도교. 토속신앙 등의 다른 종교가 아주 미미하게 존재하고 있지만, 중요한 것은 대략 75% 정도의 사람들이 무신론자라는 사실이다. 하지만, 베트남 인구의 절대다수는(약 99%) 호치민을 영웅이자 베트남이라는 국가와 동일시하는 숭배자들인 것이다. 베트남에서만은 특정 종교의 신도 감히 호치민을 넘어설 수가 없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만약, 베트남 사람 누구에게든지 베트남의 국어사전을 펼쳐놓고 가장 먼저 선택하여야 할 가장 거룩한 단어를 하나만 고르라 한다면 아마도 틀림없이 (호치민)을 고를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호치민)이라는 이름 속에는 ‘베트남’이라는 국가와 ‘사회주의 공화국’ 이라는 이념과 아이들이 꿈꾸는 (희망)이 모두 내포되어 있는 하나의 거룩하고 신성한 의미로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이다.
튀르키예(터키)에 가면 이와 아주 흡사한 경우를 목격할 수 있다. 튀르키예의 영웅이자 국부(國父)로 추앙받는 ‘케말 파샤(케말 아타튀르크)’의 경우를 보면서 말이다. 하지만 둘 사이에는 실로 엄청난 차이를 확연하게 느낄 수 있다. 호치민에 대한 베트남 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은 케말 아타튀르크에 대한 터키사람들의 존경과 애정에 비해서 족히 열 배 이상 엄숙하고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왜 베트남과 유사한 환경과 유구한 역사를 가진 대한민국에서는 이렇게 존경받고 추앙받는 지도자가 아무리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보이지 않는 것일까?
참으로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이 땅의 숱한 정치지도자들은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짓을 하고들 있는 것인지?
프랑스의 식민통치로부터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하여 호치민은 연맹(월맹)을 결성했고 게릴라전을 통한 투쟁에 돌입했다. 2차 세계대전 발발로 히틀러의 나찌가 프랑스를 점령하면서 베트남의 독립은 요원해지는 듯 했었다. 아지만 전쟁 말기에 느닷없이 들이닥친 일본군이 짧은 기간 동안 저지른 약탈과 만행은 오랜 프랑스의 지배기간보다 훨씬 악랄했다. 호치민은 저항의 총부리를 일본을 향해 돌렸다. 전쟁을 끝내려고 뒤늦게 참전한 미국 정부가 앞장서서 호치민의 저항군을 지지하고 물자를 공급해 주었다. 미국 입장에서 호치민의 저항군은 침략자 일본에 대항하는 연합군의 일부였던 것이다.(참 역사는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요지경 속이 아닌가 말이다.) 일본과 독일이 패망한 후의 전후 세계를 재편함에 있어서 호치민은 나름 큰 역할을 할 미국(연합국)측의 커다란 자산이라고 평가했다. 미국은 호치민에게 아낌없는 성원과 지원을 보냈고, 영국과 미국을 방문하여 민주주의를 체험할 수 있는 기회까지 제공했다. 하지만........ 하지만 말이다. 호치민이 피부로 직접 체험하고 느낀 미국과 영국의 민주주의는 한 마디로......... 프랑스와 다를 바 없는 부패한 자본주의 방식의 제국주의로 보였던 것이다.(체 게바라가 소련 방문에서 느꼈던 허구로 가득 찬 소련식 사회주의에 반감을 가졌던 것과 정반대의 현상을 가지게 된 것이다.)
히로시마의 원폭 투하를 끝으로 일본은 패망했으나, 멀리 물러났던 프랑스가 다시 베트남을 식민통치 하겠다고 다시 쳐들어 왔다. 호치민은 더욱 격렬하게 프랑스의 침략에 맞섰다. 그리고 이때부터 그동안의 우방이었던 미국이 아닌, 사회주의 공산정권이 차지한 소련과 중국의 지원을 받기 시작한 것이다. 호치민은 민주주의를 겉으로만 외치는 자본주의 방식의 제국주의는 프랑스나 영국이나 미국이 전혀 다를 것이 없는 ‘강대국의 약소국 지배와 약탈의 연속’ 이라고 판단했다. 스스로의 자주독립을 위해서는 ‘대다수의 인민이 직접 참여하고 생산활동을 벌이며 그 결과를 공평하게 함께 나누는 방식’의 사회주의야 말로 자주독립을 쟁취한 베트남의 미래에 훨씬 더 적합한 사회제도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20대에 생활을 위해 프랑스 파리로 가서 레스토랑에서 웨이터로 자본주의를 체험했던 호치민은 그곳에서 만연된 자본주의의 병폐와 새롭게 등장한 사회주의 이념에 대해서 깊이 있게 체험을 했었던 것이다. 프랑스에서 사회주의 공산당이 출현한 것도 이 시기였다. 동시에 중국에서 뛰쳐나온 젊은 지식인들이 ‘사회주의 공산당 중국지부’를 결성하고 자본주의 세상에 대해 저항운동을 펼치자, 호치민을 비롯한 베트남의 지식인들도 ‘중국공산당 베트남 지부’를 결성하고 투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중국의 지식인 무리에 주은래. 등소평 등(중국공산당 프랑스 유학파)이 있었다. 아울러 베트남 지식인에 호치민이 있었으며, 이들과 교류한 한국인으로 몽양 여운형이 있었다. 1926년 중국 광저우에서 열린 국민당 전당대회에서 첫 번째 연사가 호치민이었고 두 번째 연사가 여운형이었다.
우리 역사에서 여운형을 다분히 공산주의자(빨갱이)로 쉽게 치부해 버리려는 반공주의는 반듯이 제재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당시의 시대상황을 살펴보면 적어도 당시로서는 호치민도 여운형도 오늘날 우리가 극단시하는 정도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차후로 동서냉전과 한반도에서의 극한 이데올로기 대립과 6.25 전쟁의 전후 처리를 하는 과정에서부터 ‘공존할 수 없는 빨갱이 사상’이 그릇되고 어긋난 정치집단의 목적에 의해서 파생되었을 뿐이다.
매카시즘이 지배하던 미국이라는 거대 제국주의는 호치민을 ‘빨갱이 공산당의 수괴’로 치부해 버렸다. 미국은 항상 그런식이다. 어디 호치민 뿐인가? 가다피도 후세인도 오사마 빈 라덴도 아프리카의 개발도상국들도 미국 정부와 CIA가 선발하고 국비로 훈련시켜서 최신형 무기랑 공작기금까지 팡팡 쥐어주면서 부려먹다가 그들이 민족주의니 어쩌니를 입밖에 내기 시작하면, 돌변하여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죽여 없애려고 혈안이 되는게 미국이 가진 하나의 전형적인 세상을 지배하는 한 방편인것을 우리는 수도없이 보아왔다.
동서냉전의 시대를 대표하는 개념이 되어버린 (도미노 이론)에 따라 호치민은 사회주의의 남하에 꼭 필요한 존재로 급하게 부상했다. 소련은 미국과 해방전쟁에 돌입한 호치민과 그의 측근들을 소련으로 초빙했다. 우수한 사회주의 지도자로 양성하가 위해서였다. 호치민의 모스코바 대학에서 ‘프로레탈리아 혁명을 통한 사회주의 완성’에 대해서 공부했다. 시간이 지나서는 대학에서 사회주의 학문을 강의하는 교수로도 재직한다. 이당시 사회주의가 급속도로 확장해 가는 상황에서 중국공산당의 상승세가 국내문제를 어느 정도 체재 안정화 시킨 후, 다음단계로 (문화대혁명)을 벌여가는 과정에서 종주국 소련과 후발주자 중국 사이에서 미묘한 갈등이 시작되더니, 이는 점차 사회주의 주도권을 놓고 벌어지는 또 하나의 세계대전으로 확대되기 시작하고 있었다.
호치민은 베트남으로 돌아갔고, 이후로는 절대적인 친중국 노선을 견지하기 시작했다.
베트남은 공산당 일당이 모든 것을 책임지고 이끌어 가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거대한 중국을 이끌고 있는 중국공산당 일당지배의 체제와 방식을 베트남은 고스란히 전수받아 약간의 보완을 거친 후 실행하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적 국가운영 방식인 것이다. 그것들을 모방이라면 좀 그렇고........ (원조인 큰 중국)와 (작은 중국인 베트남) 이라고 생각하면 훨씬 이해하기가 쉬울 것 같다.
크레이지 하우스를 건축한 항응라(Dang Viet Nga)는 베트남 건국의 아버지 호치민(胡志明)의 최측근이자 혁명동지이자 2인자였던 당 수안 쿠(Dang Xuan Khu)의 외동딸이었다.
호치민에게 가족이라곤 일절 없었고, 당수안에게 딸이 하나뿐이었으니 베트남 혁명정부 안에서 항응라가 태어나면서부터 얼마나 어떤 관심과 사랑을 받고 자랐을 것이라는 점은 그리 예측하기가 어려운 일이 결코 아닐 것이다. 전쟁터를 끊임없이 이동하던 아버지가 외동달이 보고 싶어 어렵게 불렀을 때마다 그 옆에는 항상 호삼촌(호치민)이 있었던 것이다.
소련이 베트남에 우화정책을 펼치던 한 방편으로 베트남의 총명한 학생들을 선발해서 유학 프로그램을 제공했는데, 당시 14세의 항응아가 100명의 유학생에 선발되었다.
호치민이 소련공산당 전당대회에 참석하는 것을 계기로 최측근 당수안과 그의 외동딸 항응아가 동행하여 모스코바에 갔을 때, 항응아는 아버지에게 정식으로 모스코바에서 대학생활을 하고 싶다고 요청한다. 호치민이 옆에서 이 광경을 목격했으니 그이 마음이 어땠을까? 호치민은 즉석에서 흔쾌히 항응아의 모스코바 유학을 주선하고 나섰다.
4년 뒤, 항응아는 모스코바 대학의 건축학과를 졸업하고 베트남으로 돌아왔다.
69년 항응아는 다시 박사과정 이수를 위하여 모스코바로 향했는데, 그만 이 시기에 그녀의 영원한 후원자였던 호삼촌이 사망했다. 박사학위를 취득하고 베트남으로 돌아 온 항응아는 호삼촌의 배려와 호의와 유지를 잊지 않고 받들어 건설부에 들어가 평생 동안 국가재건의 일환이랄 수 있는 건축에 전념하였다. 수많은 베트남 정부의 관공서와 학교와 병원 등의 공공기관 건축에 능력과 시간 전부를 바치다시피 했다.
휴가 중에 달랏에 들렸다가 이곳의 정취와 환경에 심취한 그녀는 50대 후반에 접어들어 그동안의 모든 지위에서 물러나 이곳 달랏에 안착을 시도한다. 그렇게 시작하여 1990년에 (크레이지 하우스)를 세상에 선보였다.
크레이지 하우스는 아직도 미완성의 상태이다. 항응아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꾸준히 개축과 증축을 이어나갈 것이다.
항응아가 베트남 현대화의 일환으로 많은 공공건축에 기여한 공로는 분명 지대할 것이다.
그럼에도....... 과연 그녀만한 로얄 패밀리가 베트남에 또 더 있을까 하는 의구심도 떠날질 않는다.
베트남은 분명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사회주의 공화국에는 로얄 패밀리 같은 계급사회가 존재하지 않는다. 아니 존재할 수가 없어야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중국이나 베트남을 살펴보매 과연 로얄 패밀리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 평등사회인가?
자본주의 사회는 독점 자본가들에 의해 생겨난 돈에 의한 새로운 계급사회가 생겨났다. 소유한 돈의 많고 적음에 따라 극소수의 지배계급이 다수의 노동자 계급을 착취하는 세상으로 전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빈곤층에 의한 사회혁명을 두려워 한 민주주의 체제는 자본의 독점을 억제하는 방편으로 국가, 곧 강력한 권력집단의 정부를 내세워서 형평성에 적합한 자유 시장경제를 안정적으로 유지시키고자 했다. 신자본주의가 등장한 것이다. 부가 줄어들고 빼앗길 것을 두려워한 거대자본은 국가(권력집단)에게 로비를 통한 타협으로 자신들의 막대한 이득을 유지하려 했고, 그들이 펼친 로비에 걸려든 부패 정부와 국가가 부패하기 시작했다. 창출되는 이익(돈의 액수)은 천문학적으로 커져는 가는데, 이상하게도 대다수 노동자(시민)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만 갔던 것이다.
이것을 대다수 시민(노동자)들의 혁명을 통해 구태를 과감히 부숴버리고 새롭게 개혁하자는 것이 바로 사회주의다. 대다수의 노동자가 함께 일하고 함께 먹고 마시고 더불어 함께 행복하자는 것이 핵심 요지다. 모두가 공평하게 함께 일해서 생산하고, 그 이익을 공정하면서도 고르게 나누어 가지고, 모두가 똑같이 행복하자는 것이 사회주의 이념의 요지다. 다만, 이러한 전 과정에 모든 사람이 직접 참여할 수는 없겠기에 특별히 선발한 소수의 정예요원들에게 전반적인 관리와 책임을 맡기자는 것인데..... 그 소수의 특별히 선발된 사람들이 바로 공산당원 이어야만 그러한 거대한 프로젝트 실현이 가능하다는 전제로 시행하고 있는 사회가 바로 (공산주의)인 것이다.
공산주의를 가장 대표하는 한 마디는 (동지)다. 왜? (동지) (동무)라는 표현에는 어디에도 계급주의 의식이 포함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다. 사회주의(공산주의)는 계급이 없는 사회이다. 모두가 똑같은 신분 똑같은 처지의 동지일 뿐이다. 그들에 혁명은 돈에 의해 만들어진 계급사회를 타파하는 혁명에서 시작되었다.
그런데, 지금......... 중국, 베트남, 소련, 북한에 과연 계급이 없을까?
아이러니하게도 지금 사회주의의 최상위 포식자는 바로 공산당(共産黨)이 아니겠는가?
20세기라는 거대한 이데올로기의 시험장에서 마오쩌둥(모택동)과 덩샤오핑(등소평)은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사상초유의 실험을 완성시켰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총망라해서 하나로 융합시키는 프로젝트를 과감하게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그럼 이제부터...... 그 결과물을 우리는 어떻게, 무엇이라 불러야 하는 것일까?
중국의 공식 명칭은 중화인민 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이다.
하나뿐인 유일정당인 공산당이 지배하는 정치조직상 구조로 볼 때 분명히 (공산주의) 국가로 구분 지어야만 한다. 하지만 중국의 경제는 거의 완벽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자유경쟁의 시장, 개인적 부의 추구를 허락, 사유재산을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 전형적인 자본주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거기에다 중국인들은 뼛속까지 철저하게 민족주의적이라 할 수 있다. 공산당의 지도부는 중국 사회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 시스템이 부작용을 일으키거나 사회주의의 한계성이나 모순이 드러낼 때마다 절묘하게 민족주의 감정을 불러일으켜 애국심에 호소함으로써 빈번히 난국을 타개해 나가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화합’ 이라거나 ‘절묘한 하모니’로 보는 학자는 어디에도 없다. 실로 그 결과도 그 끝도 알 수 없는 엄청난 모순(矛盾)덩어리며,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을 끌어안고 그날그날 땜질처방 하듯이 겨우겨우 위기를 모면하는 정도라는 것이 대부분의 시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은 잘 나아가고 있으면서 거듭거듭 새로운 비상을 준비한다.
그것을 지켜보는 베트남으로서도 지금 다른 선택이 있을 수 없다. 그저 따라 할 수 밖에, 이제는 되돌릴 수가 없는 처지가 되고 만 것이다.
사회주의의 가장 커다란 적은 고위공직자(공산당)의 부패로 드러났다. 중국은 지금 공산당의 사활을 걸고 ‘부패와의 전쟁’에 돌입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베트남의 뉴스에도 연일 고위공직자의 부패 소식이 등장한다. 판박이처럼 중국 사정과 똑 같다. 이젠 베트남도 부패와 전면전에 돌입했다.
인류가 감기 바이러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어쩌면 인류는 영원히 부패를 박멸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혹시나 말이다....... AI(인공지능)가 지배하는 세상이 도래한다면..... 부패가 사라질까?
헐!!!!!
갑자기 그것이 무척 궁금해진다.
--- 너무 길어져서 다음 이야기(호이안으로 가는 오픈 투어 버스)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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