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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팍스 로마나 - 로마의 탄생은 그리스의 모방에서부터 시작된 짝퉁 그리스였다.

by 피안재 2018. 2.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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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콜로세움(Colosseo)은 로마를 넘어서 이탈리아를 대표하는 뛰어난 건축물이다.

  역대 로마의 최고지도자들과 황제들은 국가적인 위기때나 자신의 정치 기반이 부족하여 쿠데타가 염려될 때마다 커다랗게 역사를 벌였다.

  오늘날에도 쿠데타로 성공한 독재자들은 민심의 동요를 염려하여 3S 사업을 벌여 민중의 관심과 정적들의 공세를 따돌리고 있는 작태의 효시격이라 하겠다.

  가장 우선시 되는 사업이 원형경기장(검투장)이나 전차 경기장을 만들어 민심을 그곳으로 쏠리게 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서기 405년 오노리우스 황제의 명에 의하여 검투사들의 잔혹한 경기가 중지되자 시선을  점차 다른곳으로 돌리게 되어 변방의 성곽을 수축하거나 수도교를 건설하거나 도로와 다리를 놓는 쪽으로 전환하게 된다.  그러나 이런 사회기반사업적인 공사들은 로마시민들의 절대적 지지를 받지 못했다.  그들은 붉고 뜨거운 피가 낭자하게 흐르는 도박과 유희에 너무 심취해 있었다. 그래서 새롭게 시선을 돌린것이 바로 교회를 새로 짓거나 증축하는 일이었다.  로마를 위시한 각지역의 대도시마다  앞다투어 경쟁하듯이 두오모(대성당)의 크기와 위용과 화려함을 경쟁하는 시대가 도래했던 것이다.  시에나와 피렌체의 경쟁이 특히 심했다.  이때가 바야흐로 르네상스가 시작되고 꽃을 피우는 시기가  되었다.

  우리는 콜로세움이라 부르지만  이탈리아 사람들은 여전히 콜로세오 라고 부른다.

  폭군 네로황제가 군중의 폭동으로 도망치다가 독한여자였던 황비가 강권하는 독배를 억지로 마시고 자결하자 성난 군중은 끝내 네로의 황궁을 불태우기에 이르렀다.  그 네로황궁의 발코니에서 아래로 내려다보면 저만치 아래에 커다란 연못이 있고 그 옆에 아주아주 커다란 네로의 동상이 서 있었는데,  그 네로 동상의 이름이 바로 (콜로세오)였다.

  네로황제의 폭정에 치를 떨었던 로마시민은 이번에는 좀 이성적이며 온순한 황제를 원했다.  그러다보니 느닷없이 후계자 서열에 끼지도 못하던 왕좌에서 까마득히 멀리 밀려나있던 베스파시아누스를 갑자기 새로운 황제로 추대 옹립하게 되었다.  황제에 즉위는 하였으나 가진 정치적 기반이 전혀 없었으며, 동서남북 사방으로 자신이 감히 가까이 가지못하고 굽실대던 귀족과 원로들에 둘러싸이는 꼴이 되고 말았다.  베스파시아누스는 단 하루도 잠자리에 편히 들지를 못했다.  언제 어디서 누가 지신을 암살할지 모르는 불안에서 한시도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것이 대 역사를 다시 벌이는 일이었다.  로마인들이 가장 기뻐하면서 환락에 젖어 즐기는 놀이는 당연히 피가 난무하는 글레디에이터들의 살인 검투 경기였다.  어느날 황제는 백성들 앞에서 성대하게 이 대역사를 선포했다.  온 로마가  일제히 열광의 도가니에 빠졌다.  다음은 원로원에 공문을 보냈다.  황제가 로마를 위하여  이 같은 생각을 실현하고자 하는데  원로와 귀족들은 이제부터 콜로세오의 완성에 적극 참여하며 기꺼이 그 비용부담에 참여해 주어야만 할것이라고........  덕분에 그는 암살 위협에서 벗어나 무사히 황제직을 마치게 되며,  후임인 그의 아들 티투스 황제가 이 콜로세오를 완성하게 된다.

  콜로세오는 라틴어로 '거대하다'는 뜻이며,  바로 폭군 네로황제의 황궁터를 메우고 그 위에 건설된 것이다.

  아치와 기둥으로 이루어진 외벽둘레 527M  높이 57M의 이 거대한 건축물은  약 5만명의 군중을 수용할 수 있었으며,  더욱 놀라운 것은  가장 높은 상층부에 '베라리움'이라는 천막지붕을 설치하여 관객을 뜨거운 햇빛으로 부터 보호한........  실로 오늘날의 돔 경기장과 같은 건축물이었다니 더욱 놀라울 수 밖에.

  지하층의 수많은 작은 방들에 검투사들과 각종 맹수들을 가두게 하였으며,  지극히 일부 복원처럼 지상층에 커다란 널판지로 바닦을 덮고 그위에 모래를 깔아서 대지를 만들었다.  또한 상부로 올라가는 관중석의 1층은 도리아식 기둥으로 거대한 장엄미를 뽐내고,  2층은 이오니아식 기둥으로 안정감을 추구했다.  나머지 3층은 코린트식 대리석 기둥을 만들어 화려함과 조형예술의 극치를 나타내기도 하였다.

  로마의 후기로 들어서면서 서너차례의 지진으로 상당히 많은 부분들이 심하게 훼손되자,  그대로 방치하다가  더 후기로 가면서 귀족들의 별장과 성벽과 도로를 보수하는데 무차별로 헐어서 가져다 쓰는 지경에 이르렀다.  로마나 인근의 교회 건축에 들어간 상당부분의 석재가 바로 여기 콜로세오의 쓰러진 건물더미에서 가져간 것들 이었다.   중세에 들어서는 병참 기지나 진지로 사용되기도 하였으며,  가장 심하게 훼손된 것은 바로 나폴레옹에 의한 이탈리아 점령의 시기에 벌어졌다.  총알을 만드는 재료부족에 시달린 나폴레옹군은 콜로세오의 외벽을 마구 허물기 시작했다.  이 위대한 건축물의 석재와 석재를 연결하는 부위에는 쐐기의 용도로  부서지거나 부식되지 않는 납을 사용했기 때문이었다.  이 납으로 만든 쐐기를 회수하기 위하여 나폴레옹군은 콜로세오의 외벽 절반 가까이를 허물었다.

  콜로세오는 현재 원형의 1/3 정도만이 보존되어 남아 있다.

 

 

  로마에 가면 여타의 유명한 관광도시들 처럼 통합입장권 제도가 시행되고 있다.  이를 (로마 패스)라 부른다.

  개시에서 부터 48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72시간을 사용할 수 있는 것 등이 있고,  이것들은 다시 문화재와 박물관만을 이용하는 것과,  여기에 모든 대중교통을 그 기간동안 무제한으로 이용할 수 있는 권한이 추가로 포함된 것으로 나뉜다.

  내 경우는 주로 오로지 걸어서 하는 여행을 추구하기에 당연히 48시간 문화재와 박물관만 허용되는 로마패스를 구입했다.(참고만 하시고 직접 알아보시길)

  하지만 중요한 것은 교통카드는 일정 기간 무제한 이지만,  문화재 카드는 초기 1회는 무료,  다음부터는 무료가 아닌 할인이 되는 조건으로 48시간의 경우 28유로에 구입할 수 있다.  할인을 계산해 보지도 않고 상관 없다면 카드를 구입하지 않고도 여행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단 한가지,  카드를 구입하면 현지에서 표를 사기 위하여 길게 줄을 서는것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장점만은 꼭 기억해 두야만 한다.

  또한 초기 1회의 무료 권리 사용을.......  콜로세움과  포로 로마노나  팔라티노 언덕 관람에 사용하고자 한다면 엄청난 특혜가 있다.  상기 이 세곳이 통합입장권의 1회사용으로 묶여 있기에  로마패스를 이 세곳중에 한곳에서 시작할 경우,  나머지 두곳까지를 모두 꽁짜로 돌아볼 수 있다는 이야기가 된다. 득템이다.

  또 한가지.  로마패스는........  바티칸 영역에서는 무용지물이다.

 

 

 

 

 

 

 

 

 

 

 

 

 

 

 

 

 

 

 

 

 

 

 

 

 

 

 

 

 

  콜로세오의 상층부를 돌아가보다 보면 서쪽으로 가다가 우연처럼 외부의 아치 밖으로 아주 낯익은 또 하나의 아주 거대고도 미적으로도 아주 아름다운  대리석 건축물을 만나게된다.

  우리나라 서대문 옆에 서 있는 독립문이나,  파리의 개선문이나,  라오스 비엔티엔의 개선문이나........  이 세상에 멋진 문이라는 모든 문의 원조겪인 오리지날 개선문이 바로 그곳에 서 있다.  온 지구상에 있는 개선문의 완전 결정판이 바로 그곳에 우뚝 서 있다.

 

  콘스탄티누스 개선문(Arco di Constantino) 이다.

  콘스탄티누수 또한 황제에 오르기는 하였으나 지지기반이 지극히 부족하였으며 사방으로 정적들이 호시탐탐 자신의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각종 분란과 소요와 반란이 끊이지를 않았다.  그러다 마침내 서기 312년에 라이벌이었던 막센티우스가 반란을 일으키기에 이르렀고  황제는 즉각 토벌을 감행했다.  전광석화처럼 달려가 과감한 공격으로 밀비안 다리 전투에서 콘스탄티누스는 승리했고  당당하게 로마시민의 열광적인 지지속에 개선하였다.  그리고 이 전투를 기념하기 위하여 이 자리에 자신의 이름을 딴 개선문을 세웠다.  이후로 전장으로 나가는 모든 군대는 이 문을 통과해 전진하였으며,  커다랗게  공훈을 세운 장군들이 이 문을 통하여 금의환양하는 개선 행사의 전형이 되었다.

  로마를 점령한 나폴레옹은 특히 이 개선문을 몹시도 탐을 냈다고 한다.

  하여 온갖 방법을 다 동원하여 파리로 가져가려고 하였으나,  아쉽게도 당시의 기술력으로는 이 개선문을 분해하여 옮기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판단되었다.  할수없이 포기를 해야 했던 나폴레옹은  이 문의 형상을 그대로 본따서 지금 파리에 서있는 새로운 개선문을 만들었다.

 

 

  날이 개였다 흐렸다를 반복하더니  개선문을 돌아보는 도중에 굵은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굳게 잠겨있는 개선문을 둘러싼 철창에 미달려 천장의 조각들을 살펴보다가  이런 상황이라면 다음 발걸음을 어디로 옮겨야 하는지가 몹시도 걱정이 되었다.

  바람과 빗방울은 남서쪽으로 길게 늘어서 있는 아피아 가도의 윗쪽으로 부터 불어왔다.

  날씨탓을 하며 사람들도  우산을 꺼내들고는 이러저리 몰려가기에 바쁜 발걸음을 재촉하고 있다.

  사람들이 몰리는 관광지마다 테러를 방비하려고 주둔하던  무장군인과 경찰들도 차 안으로 들어가고 있다.

  어찌할까?

  아피아 가도의 저만치 앞에 언덕이 보인다.

  로마는 일곱개의 언덕을 서로 연결하며 생겨난 도시이다.

  그리고 여기 필라티노 언덕이 그중 가장 신성시 여겨지는 곳이다.

  어쩐다?

 

 

 

 

 

 

 

 

 

 

 

 

 

 

 

 

 

 

 

 

 

 

 

 

 

  서둘러 언덕길을 뛰어 올라 갔다.

  폴라타노 언덕 매표소 입구에 있는 휴계실까지 굵어지는 빗방울을 그대로 맞으며 달렸다.

  카푸치노를 한잔 부탁해서 마시며 책을 읽고 있노라니 거짓말처럼 비가 그쳤다.  하지만 하늘은 여전히 잔뜩 찌프린 채였다.

  제법 충분히 쉬었다 싶어졌을때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겨 언덕을 올랐다.  로물루스의 시선으로 언덕에 서서 오늘의 로마를 바라다 보고 싶어졌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로마에.......  그는 과연 어떤 생각을 할까?

 

 

 

  로마는 7개의 언덕을 서로 연계하여 그것을 경계로 삼고 그 안에 건설한 초기 도시국가였다.

  첫째. 팔라티노  언덕 -   쌍둥이 형제인 로물루스와 레물루스가 늑대의 젖을 먹으며 자랐다는 동굴이 있는 로마인들이 로마의 뿌리를 둔 근원지로 신성시 여기던 언덕이다.  하여 황제나 귀족들은 이 언덕에 자신들의 궁궐을 지으려고 혈안이 되었다.  이곳을 차지해야 로마인의 정통성을 차지한다고 믿었다.

  둘째. 캄피돌리아 언덕 - 이곳의 광장과 계단을 미켈란젤로가 설계하였다 하여 더욱 유명해진 곳이다.   팔리티노 언덕에서 내려가 포로 로마노의 중심으로 나있는 아피아 가도를 계속 내려가다 보면 마지막에 세베루스의 개선문을 만나게 되고,  그 개선문 뒤의 언덕이 바로 캄피돌리아 이다.

  셋째. 에스퀼리노 언덕 - 다른 부연 설명이 필요 없는 곳이다.  성모 마리아께서 한여름에 눈이 내릴터이니 그 자리에 나를 위해 교회를 지어라 해서 지어진 산타 마리아 마조레 성당이 있는 자리의 언덕이다.  테르미니 역에서 아주 가깝다.

  넷째. 퀴리날레 언덕 - 7개의 언덕중 가장 높은 곳으로 대통령 관저인 퀴리날레 궁전이 있는 곳이다.

  다섯째. 비미날레 언덕 - 이탈리아 내부부가 들어서 있는 넓은 광장으로 멋진 분수가 있다.

  여섯째. 아벤티노 언덕 - 팔라티노 언덕에서 콘스탄티누스 개선문을 바라보고 바로 등 뒤에  고대의 대전차경기장을 안고 있는 언덕이다.  로마인의 가장많은 사랑을 맏고 있는 광장과 공원이다.

  일곱째.  첼리오 언덕 - 로마의 북쪽 경계인 포폴로의 문 우측에 있는 언덕이다.  북쪽 로마를 상징하는 콜로세오가 있다.

 

  그 중 전설속의 로물루스와 레물루스가 살았었다는,  로마의 기원이 이곳에서부터 시작되었다는 로마인의 믿음은 오늘에도 이곳을 매우 신성하게 여기고 있는 성지가 바로 여기 팔라티노 언덕이다.  황제의 부인이 살던 까사 라비아, 황제의 별궁인 도무스 아우구스티나, 도미티아누스 황제의 저택이었던 도무스 플라비아 등이 현재에도 계속 발굴작업중이다.  또한 그만큼 접근이 제한되는 지역이 많은 편이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의하면..........

  기원전 8세기 경에 이탈리아반도 북부의 알바롱가라는  고대 도시국가에서 폭동이 일어나 누미토르 왕과 실비아 공주가 쫓겨났다.  이 쫓겨난 실비아 공주가 어찌어찌하다가 전쟁의 신(神) 마르스와의 사이에서 쌍둥이 형제를 낳게 되었다.  그후 오래지 않아 공주는 반란군에게 체포되었고,  왕가의 핏줄임을 두려워한 반란군은 핏덩이 쌍둥이를 강에다 내다 버렸다.  그런데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늑대가 이 쌍둥이를 거두어  동굴에서 살며 늑대의 젖을 먹여 키웠으며,  후일 늠름하게 성장하여 반란군을 무찌르고 외할아버지의 왕국을 되돌려 주었다는 이야기다.

  여기에 덧붙이자면, 형제는 남쪽으로 내려와 이곳에 도착하여 7개의 언덕을 연계해서 경계로 하는 나라를 세우기로 결심 하였다.  나라가 건설되었으나 두 형제 모두가 서로 왕이 되기를 희망하는 바,  피를 흘리는 결투를 통해 이긴 로물루스가 동생의 죽음 위에 왕이 되었고  자신의 이름을 따서 '로마'라 부르게 되었다.  (이거야 말로.......  뭐.......  식상할 정도로 너무도 뻔한........  위대함과 신성함을 가장하고픈 나라들의 뻔한 건국 시나리오가 아니겠는가?)

 

 

 

 

 

 

 

 

 

 

 

 

 

 

 

 

 

 

 

 

 

 

 

  인류 문명의 가장 오래된 기원이 기원전 4.000년 전에 시작된 메소포타미아 문명에서 부터였는데.........  그곳에서 탄생한 바빌로니아 왕국이나 페르시아 왕국의 경우는  건국의 이야기에서 신과 인간의 태생적 신분과 역활이 분명하니........  그 중 지극히 이성적이고 나름은 가장 합리적이라 하겠는데...........

  기원전 3.000년 전에 시작된 이집트 문명에서 부터  이런 노리끼리한  요상한 냄새가 풍기는 씨추에이션들이 드디에 세상에  생겨나기 시작했다고 보는데.......  확고한 왕권의 강화와 피지배계급의 절대복종을  합리적으로 강요하기 위해서 그들은 '신정합일' 이라는 기발한 발상을 하게 되었다.  '하늘에는 지극히 존엄하고 무서운 신들이 기거하시는데.......  한없이 나약하고 버러지 간은 인간들을 불쌍히 여기시고 어여삐 여기시사........  그 매개체로 중간에 위대한 신과 선택받은 인간의 사이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케 하시고 그를 통해서 축복 가득한 세상을 여시고 펼치시려니..........  기쁘게 감사와 절대 복종을 바쳐라'  라고 근거도 없는 썰을 붙여서 인간을 현혹하고 스스로 피재비자 계급으로 전락하게 만들었다.

  '파라오는 신의 핏줄을 이어받고  태어난 최상의 존귀한 인간으로 거의 신과 동격이다' 라는 신조 유행어를 이집트 문명이 인류의 역사속에 탄생 시켰다.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되고. 가장 거륙한 명분으로 치장된. 가장 치명적인 독성을 가진.  뻔히 알면서도 속을 수 밖에 없는 흑마술 같은 것이다.  스스로 알아서 기지 않으면 불경죄요,  의문을 품거나 복종을 거부하면 신성모독이 추가된다. (국가보안법은 살아서의 육신에 제재를 가하지만,  당시의 신성모독은 죽어서 가게될 사후세계의 영혼에까지 제재를 가했다.)

  여기에 역사상 아주 신기할 정도로 요상한 집단인 (페니키아인)이 등장 한다.  이 페니키아 인에 대해서는 곧 다시 거론하여 부연 설명를 해야만 하겠다.

  이집트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신기한 흑마술을 페니키아 인들이 별반 얻어먹은 반대급부도 없이  그리스 영토에 사는 지배자들에게  고스란히 전수했다.

  가만히 그 이야기를 전해들은 그리스 지배자가 곰곰히 생각해보니.........  그거야말로 참으로 신통방통 생각할 수록 신기하기만 한,  꿩 먹고 알먹고, 삽만 들었다 놓고 가재잡고,  홍합 삶았더니 진주가 아니라 다이아몬드가 특특 떨어지는, 참으로 귀신도 자빠질 놀라운 씨츄에이션이 아닌가?

 

  일찍부터 '발상의 전환'을 이미 터득하고 있던 이 그리스의 지배자는  이집트에서 건너온 시츄에이션에 덧살을 붙여 새로운  시각에서 각색을 새롭게 시도 하기에 이르렀다.  올림푸스 산에 오로지 신들만이 사는 천국을 만들었고, 더하여  각자의 역활과 명분과 특기를 가진 신들을 창조해  냈다.  거기에다 당연히 그 신들과 교감할 수 있는 선택받은 자는 바로 자신뿐이라고 멋지게 영웅담처럼 그려 넣었다.   시간을 충분히 두고 습작과 개작을   더하면 더할 수록 씨나리오는 더욱 그럴싸해졌고,  자신이 코너에 몰리거나 불리해 지면 자기가 창조해낸 신들의 분노를 들먹이고 복종 서약내지는 엄청난 제물을 요구하고 그 절차와 관리를 자신이 중간에 나서서 하는 행위에 정당성과 합벙성의 조항을 삽입 했다.    놀라웠다.  실로 이 약발은 참으로 오랫동안 신통방통하게 그 효과를 지속했다.

  세월이 지나 인간 개체수가 너무 많이 늘어나면서 인간들의 상소와 요구가 어마어마하게  많아져서 신이 달아난 것인지,  중간에서 해먹은 놈들이 너무 쪽쪽 빨아가면서 해먹은것이 누적되다보니,  이제 신들 입장에선   중간에서 차 떼고 포 떼고 다 해쳐먹은 뒤에야 겨우 받쳐지는 제물을 신들끼리 그제서  뿐빠이 해보니 별반 성에 차지 않아서 그토록   오랫동안 해오던 사업을 접었음인지........  거룩하고 위대한 신들의 마법같은 힘은  언제부턴가 자취를 감추었고........  어찌되었건 어느날 그 선택받은 종족,  올림푸스 산아래 살던 그 민족은 시름시름 멸망했다.

 

  올림푸스산 아래에 살던 사람들이 망하기 전에 그들도 바다 건너 사는 늑대의 젖을 먹고 성장했다는 도시국가에 대해서 들어본 적이 있었다.  비록 망해가는 처지였음에도 그들 눈에 비친 바다건너 로마라는 동네는 거의 야만에 가까운 미개한 양치기일 뿐이었다.  새삼 거들떠 볼 가치도 없는 종족이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말로 쇠약해졌다고 느꼈을때,  로마의 양치기들은 일체의 망설임도 없이 올림푸스산 자락으로  늑대떼처럼 쳐들어 왔다.  '부자는 망해도 몇년은 버티며 먹고 산다'는  속담을  어디선가 주워 들었던 그들은 겨우 남아 있던 모든것들을 무자비하게 강탈해갔다.

  지뿔 힘이 없어서 어느 하나 나서서  대항도 못하는 주제에...... 뭔놈의 조상중에 영웅은 그렇게도 많은지..........  말로 죽을 쑤면  오천만 먹고도 남는다는 이야기가 있더니만.........  웃기고 있네.  그리스가 부강한적이 있었다고????  꼴에......... 그래도 세간살이는 부티나게 차려놓고 여전히 잘먹고 잘사는 것이었다.  그럴수록 약탈은 잔인 했다.  힘에서 우월한 자신들 보다  나약한 저들이 더 잘 차려입고 더 좋은 집에다 사방에  신전을 짓고 어마무시하게 사는 꼴이 보기 싫었다.  그래서 싸글이 죄 다 부셔 버렸다.  그러다가  우연히 목숨을 구걸하는  한 늙은 제사장으로 부터 나라를 기똥차게 잘 다스리는 비법에 대해서 어드바이스를 받게 되었다.  듣고 보니 참으로 신기하지 않은가.  이거야말로 보이스 피싱이나  피라미드식 다단계 판매 보다도 매력이 훨씬 넘치는 고급 장사였다.

  이집트에서 시작된 마술이 그리스에서 각색을 다시해서 수백년 동안이나 아무 탈없이 완벽하게 써먹혔는데........ ' 나도 한번 이걸 그대로 로마에다 써 먹어 봐?  하지 말아야 할 이유나  안될 이유가 없잖아?'

  '머리나쁜 그리스 놈들처럼 몇날 몇년을 각색을 새로 하느라 골머리 땡길 필요도 없지?  그냥 이 늙은 제사장 머릿속에 들어있는 각본을 그대로  보존하려면 일단 몰래 로마로 데려가서......  내방에 꽁꽁 가두어   아무도 접촉 못하게 하고서는...........   노인네 입에서 나오는 이야기를 그대로 우리 말로 옮겨서 전하기만 하면 되는거 아니야?   이야기 속에 나오는 등장 인물이 너무도 많아서 머리가 복잡해 지니까......  대충......  그넘이 그넘인것 처럼 이름만 우리식으로 바꾸는 거야.  그럼 세상은 이 시나리오 전체를 내가 썼는지 알거야.   저작권료 지불 안해도 되잖아?  아니지?  남들이 도용 못하게 상표권과 저작권 등록하지 뭐.'

  이렇게 해서 그리스 신화는 언어와 등장 인물의 이름만 바뀐채 그대로 로마의 역사와 신앙의 반열에 올라서고........  표지에는 원 제목인 '짝퉁 그리스'를 말끔하게 지워버리고   '로마'라고 라틴어로 새로 썼다.

 

  이것이 실제 '유럽의 문명사'다.

  인류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대부분의 인종과 종족과 민족들이 이 유구한 '신정합일'이라는 치명적 사기행위를 가운데 두고 다양한 형태로 지속 변형되어 왔다.

 

  그리고 다음의 이야기는 참으로 조심스럽고  힘들고 부담스럽고 다분히 위험스런 이야기로............

  서기 313년.

  어디까지나 제국의 황제는 신(神)이었다.  신이었던 콘스탄티누스 황제는 신의 지위를 버리고 세속의 지위를 보다 확고히 하기위해  전혀 상관관계가 없던 다른 인간의 아들을 신의 반열에 올려 놓았다.

  핍박받으며 숨어다니던 노예들의 종교가   어느날 갑자기 세상을 지배하는 제국주의의 화려하고 어마무시한 신전을 떡하니 차지하고 들어앉게 되었다.

  왜 그랬을까?

  그리고 나서.......  그 일을 계기로 바티칸이 탄생했다.

  나는 감히.......  그때부터 이미........  아무때고 바티칸은  바로 그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자리를 차지할 생각이었다고  이해하고 있다.

  나는 바티칸을 싫어한다.

  인류 역사에서 바티칸이라는 존재가 행한 그 수많은 옳지 않은 일들과,  여전히 침묵속에  성스러움으로 치장된 베일 뒤에 깊숙히 숨어있는 모습과 ,  여전히 그들에게 무한으로 허략되고 있는 특권들에 대해 많이 불편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런 이유로 일생에 한번은 꼭 바티칸에 가보겠다는 생각을.......... 이번 여행에 그곳에 들렸다.  아마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딱히 무엇이 보고 싶고 무엇을 만나고 싶어서 택한 방문은 아니었다.

  그냥 막연하나마 한번은 들러 보고 살펴 보고......  나름 가슴속의 생각들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해서 였다.

 

 

  이번 여행기를 마치기 전에 꼭 한번은.......  바티칸의 시작에서 오늘까지와,  그에 앞섰던 유대교와 초기 교회와,  바티칸의 주변에 머물러야 했던 또다른 참 기독교에 대해서 내 나름의 생각을 정리 설명해 보려고 한다.  이번 여행기는 여기저기 부분적으로  자주 이런 나의 시선과 생각들을 풀어나가는 하나의 과정이라고 여겨본다.

  2년 전에 그 멀고 먼   카프카스의 조지아와 아르메니아의 초대교회를 찾아나섰던 여행의 목적이  비로소 이번 로마와 피렌체와 이스탄불을 다녀보면서 어느정도는 나름 정리가 되어진듯 하다.  시간이 지날 수록 마음도 차분해져만 간다. 그 이야기는 차차 풀어나가기로 하겠다.

 

 

 

 

 

 

    팔라티노 언덕을 나서면서 다시 매표소를 통과해 아피아 가도로 되돌아가면 되겠지만,  아마도 그렇게 되돌아가는 여행자는 거의 드물다.

  아피아 가도를 따라 옆으로 난 샛길을 따라 조금 걸어내려가다 보면 뜻 밖의 멋진 광경을 한 눈에 담아볼 수가 있기 때문이다.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로마인의 광장' 이란 의미이다.

  포로 로마노의 멋진 풍광을 한눈에 담아 볼 수 있는 곳으로는 바로 이 언덕위와 캄피돌리아 광장 건물 뒤편의 테라스에서 건너내려다 보는  장소 뿐이다.

  지금은 허물어진 페허 위로 신전의 기둥 몇개와 언덕에 늘어선 허물어진  담장과 고대인들의 집터뿐이지만  로마시대에는 이곳이 전 로마에서 가장 핫(hot)한 도심이었다.  흡사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를,  또는 뉴욕 맨하튼의 번화가를, 파리의 샹젤리제를,  서울의 강남 압구정이나 명동을 연상하면 될 것이다.

  아피아 가도는 콜로세오와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개선문 안을 통과하여 여기 포로 로마노의 중심을 그대로 관통한다.  로마의 가장 번창하는 중심가를 지나 언덕에 오르면 바로 캄피돌리아 언덕이었다.  그리고 여기에서 부터 북쪽 로마의 경계인 포로로 문까지 쭉 뻗은 일직선상의 로마가도를 중심으로 양옆으로 세계 제일의 도시가 건설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번화가가 바로 여기 포로 로마노이다.  (벤허) (글레디에이터) (성서영화) 등에 나오는 로마의 본 모습이 바로 이곳이었다.  포장된 도로 양편으로 상점들이 늘어서 있고 각종 야채와 과일과 향신료와 비단과 심지어 노예를 사고파는 행상들이 도로 양편을 가득 메웠다.  마차와 나귀를 끌고 장사 나오는 사람,  낙타를 타고 나타난 여행자.  번뜩이는 무기로 중무장한 군인들과, 권력을 상징하는 느긋한 걸음새의 원로원들과 금은 보화로 치장한 귀부인들이 오가던 거리였다.  귀족과 부자들은 한참 떨어진 언덕위에 궁전과 별장을 짓고 살았으며, 이곳은  사기꾼과 소매치기가 득실대고  골목 마다에는 유곽이 들어서서 술과 매춘이 성업을 이루던 라스베가스이며 방콕 이었다.  그 골목의 안쪽으로 정말 허름하기 이를데 없는 쪽방촌이 빼곡히 들어서 있고,  권력을 쫓고 부와 명예를 위해 한탕을 벌이려는 수없이 많은 사람들의 야망이 이곳 로마로 끊임없이 몰려 들었다.  개선문이 만들어 지면서는 영광과 번영을 상징하는 로마군대의 정벌과 승자의 환히를 부추겼다.  사방으로 신전들이 들어섰고.......  로마는 세상의 전부였으며,  로마인이 된다는 것은 세상을 모두 차지할 수 있는 특권이라 여겨졌던 시기였다.

  '로마인들의 광장.'

  스퀘어나 센트럴, 혹은 파크로 광장이 표현되는 문화권에서 포로(Foro)로 불려지는 문화권에 서 있으려니 무엇인가가 매우 어색하다.

  (포로 로마노)를 내려다 보면서 나는 문득 (팍스 로마나 ; Pax Romana)를 떠올렸다.

  언덕에서 내려다 보이는......  비록 허물어지고 빛이 바래서 과거의 영광과 위용은 자취를 감추었지만,  포로 로마노의 모습은 그저 작은 의미의 '광장'으로 보여지지 않았다.  그것은 '광장'이란 표현을 넘어서 '로마 제국주의'를 나타내는 (팍스 로마나)가 딱 제격이라 여겨질 엄청난 대도시였던 것이다.

  시장과 빈민가와 유흥가가 주류를 이루던 그냥 조금 번성하던 골목이라면 '포로 로마노'도 별 상관은 없겠다.

  그러나,  여기저기 개선문과 원로원(국회의사당)과 황궁들과 도서관과 신전들이 즐비하던.........  세계를 움직이던 그 모든 정치와 경제와 군대의 모든 정책과 명령들이 수립되고 내려지던 이곳이야 말로 바로........  로마 제국주의의 핵심이었던  (팍스 로마나의 심장부) 라고 불러야 할것이다.

  물론  이곳의 위대한 업적과 유적 유산들이 쉽게 표현해 오리지날 로마의 유산이 전부가 이니것은 분명하다.

  로마는 (팍스 로마나)로 불리던 황금시대를 지나면서 쇠락의 시대로 접어들다가 ,  동로마와 서로마로 분리된다.  이곳 로마는 서로마의 중심으로 계속 유지되었지만 서기 476년 게르만족의 침공으로 멸망하여 역사속으로 사라지게 된다.  하지만 동로마는 숱한 우여곡절을 격기는 하지만 이후 천년을 더 지속 유지한다.  그리고 그 와중에 동로마의 전성기를 이끈 유스타니우스 황제의 옛 로마영토 수복 운동의 결과로 멸망한 로마가 다시 동로마의 속국이 된다.  어디까지나 점령지였다는 말이다.  그렇게 서로마를 차지한 동로마는 과거의 영광을 상징하기 위한 위대한 건축물이 바로 이곳 포로 로마노에 다시 건축되었고.......  지금 버젓이 그냥 옛 로마의 문화유물로 남아 있는 것이다.   포카 황제 기념 원주가 바로 그것이다.  동로마 황제 포카의 치세를 기념하기 위한 기념물이 여기 서로마의 유적들 가운데 버젓이 함께 놓여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흔히들 이것들을  두루 모아서 그냥 로마 역사속의 같은 유물이라고 한다.  그러나 아니다.  역사와 문화사는 동로마와 서로마를 분명하게 분리  구분한다.

  로마(서로마를 포함한)는 어디까지나 그냥 로마다.

  한참을 늦게 출발하였지만 동로마의 역사는 어디까지나 '콘스탄티노플의 역사'이다.  그것은 분명 다르다.  엄청난 차이가 있다.

  오직  기독교 역사만이 이를 분리하기를 몹시 꺼린다.  이유는..........  드러나는 과오가 매우 크기 때문이다.  무엇이????????

  중세의 역사는 온통 서로마를 중심으로한 로마의 카톨릭(바티칸)이 스스로의 정통성 확립을 위해 끊임없이 동방 정교회와 유대교회와  다른 지역의 초대교회들을 핍박 내지는 말살하려고 피로 얼룩진 감추고싶은 역사를 써내려갔기 때문이다.

  그런 중세의 역사를 학자와 사람들은 '중세 1천년은 암흑의 역사'였다고 분명하게 이야기 하고 기록하고 있다.   그 암흑의 역사를 써 내려간 주역들이 바로 (바티칸)이다.

  천년의 시간은 결코 짦은 시간이 아니다.  나는 이 시기의 암흑을 '영원할것만 같은 절망' 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건 어디까지나 그렇다 치고.........

  이제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굵은 빗방울이 뚝 뚝 떨어지고 있는 (포로 로마노) 속으로 들어가 보기로 하자.

  이천년의 세월이 흘렀어도 여전히 그대로 사용되고 있는 로마인들의 도로 포장술에 감동하며   시간의 오솔길로 발걸음을 옮겨본다.

  서울역에서 남대문을 지나 을지로 방향으로 발걸음을 옮기는 기분으로 말이다.

 

 

 

 

 

 

 

 

 

 

 

 

 

 

 

 

 

 

 

 

 

 

 

 

 

 

 

 

 

 

 

 

 

 

 

 

 

 

 

 

 

 

 

 

 

 

 

 

 

 

 

 

  기원 전 44년 3월 15일.

  (로마)를 굽어살피던  신(神)들은 다시 한 번 도시국가로 머물던 (로마)를, (팍스 로마나)라는 위대한 제국으로 도약 시키기 위하여 신전에 역사적인 제물을 바칠것을 요구하고 있었다.

  3월의 이데스(제물로 바치는 흰털의 양)는 과연 누구였을까?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란 로물루스에 의해서 세워진 (로마)는  그후 약 250여년간 7명의 왕들에 의해서 작은 도시국가의 형태로 발전해 갔다.  아마도 이 시기는 창업자인 로물루스와 관련이 있는 핏줄들이 세습왕조를 이루었던것으로 보여진다.  국력 또한 옛 그리스의 작은 국가였던 스파르타나 트로이와 흡사했을 것으로 보인다.  도시 국가의 형태를 띠기는 했으나 여전히 로마의 백성 대부분은 들과 산에서 소나 양을 치는 유목민이었다.

 

  기원전 509년. 루크레티아라는 귀부인이 왕의 아들에게 겁탈을 당한 후 자살을 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가뜩이나 여러가지 불만에 쌓여있던 로마시민들은 폭동을 일으켰다.  쿠데타에 성공한 로마시민들은 독재적인 왕정을 폐지하고,  2명의 집정관(대통령), 귀족으로 구성된 원로원(국회),  평민들로 구성된 평의회(지방의회)를 선정 선출하여  오늘날과 아주 유사한 공화정 시대를 열었다.  새로운 시대의 출현 이었다. (흔히들  그리스의 민주주의를 오늘날의 민주주의의 효시로 보는데  나는 결단코 아니라는데 한표를 주겠다.  아니다. 그리스의 민주정치는 말도 안되는 어설픈 초등학교 학예발표회용 민주주의 였다)

  이 시기에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놓고 카르타고와 3차례에 걸친 (포에니 전쟁)을 치루게 된다. (앞 편의 여행기에서 2차 전쟁까지를 다루었었다.)

  전쟁에 승리한 로마는 지중해의 패권을 바탕으로 비로서 대제국으로 가는 기틀을 마련하게 되었다.  바야흐로 제대로된 국가가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모든것이 풍요롭고 살만해지자 여기저기서 불만들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2명의 집정관이 서로 반목하고,  막강한 권력을 움켜쥐게 된 원로원이 사사건건 지나치게 간섭을 높여 나갔다.  전국 각지의 민원을 담당하는 평의회의 불만이 커지자 여기저기서 민란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국가의 체계와 번영 앞에서 로마는 다시 과거 혼돈의 세계로 빠져들어 갔다.

  이런 혼란의 시대에는 반듯이 뛰어난 영웅이 모습을 드러낸다.

  갈리아 원정을 마치고 개선하던 줄리어스 시저는 마침내 루비콘 강위에서 남들이 보라고 일부러 높다랗게 주사위를 던져 버렸다.

  그리고 단숨에 로마를 삼켜 버렸다.

  로마는 과거의 역사로 회귀 했다.  그러나 (로마)의 입장에서 보자면 퇴보라고만은 할 수 없다.  케사르(시저)의 위대한 업적이 너무도 많았기 때문이다.

  지금 우리가 쓰는 달력을 (로마력) 또는 (율리우스력)이라고 한다.  바로 케사르 (율리우스 시저)가 만든 달력을 현재의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남긴 영향력은 실로 인류 역사에 막강하다고 하겠다.

  하지만 그는 엄연하고도 엄청난 독재자 였다.

  로마의 신들은  새로운 시대 도래를 약속하면서  바로 케사르를 이데스로 바칠것을 로마에........  그리고 시대에 요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날.  BC 44년 3월 15일.  여기 이곳  (포로 로마노)에서 로마의 미래를 판가름 짓는 놀라운 사건들이 연이어서 벌어진다.  바로 이곳에서.......

 

  캄피돌리아 언덕을 바라보고 코 앞에 있는 육중한  대리석 건물이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개선문이다.  그 개선문의 우측으로 바실리카 양식의 아주 커다란 벽돌로 지어진 건물이 바로 로마을 움직이는 원로원(국회의사당) 건물이다.  그날 이 건물에서 살인사건이 벌어진 것이다.

  '부루투스.  너 마저........'  라는 유명한 말을 남기고 케사르는 이승을 하직했다.  원로원에서 암살을 당하고 만  것이었다.

  어마어마한 공포가 온 로마를 짓뭉개고 있었다.

  로마 역사상 가장 강력한 권력자이며 위대한 통치자가  하루 아침에 생을 마감한 것이다.  정치판은 요동쳤고 세상은 혼란에 휩싸였다.

  암살의 배후이며 주동자가 원로원(국회)이었으며,  거기에다 케사르의 양자이자 공식화 된 후계자였던 부루투스가 직접 케사르의 심장에 칼을 꼽았다는 사실이었다.  살인자가 분명하였음에도  누구 하나 나서서 부루투스를 제지하거나 체포하지도 못했다.  그만큼 부루투스의 영향력과 지지 기반은 확고했다.

  권력에 야망을 감추고 있는 모든 자들이 제각각 자신에게 유리한 쪽으로 모리굴리기에 여념이 없었다.

  왜냐하면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해 아무도 아무런 예측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순간의 선택이 부와 명예냐  아니면 파멸이냐를 가름 하기 때문이었다.

  온 로마는 숨을 죽이고  서로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아무도 나서서 이 초유의 사태를 수습하려는 자가 없었다.

  바야흐로 로마는 무주공산 상태였다.

  선수를 치고 나온것이 바로 살인자인 부루투스였다.

  그는 케사르의 이름과 명망에 걸맞게 엄청나게 성대하고 장엄하며 엄숙한 장례식을 준비했다.  살인자가  아닌 고인의 양아들이자 후계자의 입장에 서서 누구보다도 슬퍼하면서 애도를 표했다.

  케사르는 바로 위의 사진에 표시한대로  자신이 칼을 맞은 원로원 코 앞의 너른 공터에서 화장으로 장례를 치뤘다.  한 명도 빠지지 않고 전 로마시민들이 이곳에 모여서  영원의 세계로 영원히 떠나는 케사르를 배웅했다.

  부루투스는 이 때를 기다렸다.  다시는 이런 기회가 오지 않을 것이다.  온 로마시민들 앞에서 자신의 정당성에 대해서 쐐기를 밖고 인정을 받아두지 않는 다면 앞으로 자신의 입지를 마냥 보장받지는 못할 것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하여 누가 묻지도 따지지도 않았음에도 그는 로마 시민들 앞에서 스스로 이 암살 사건에 대해서 입을 열었다.  면죄부를 받게 될것인지,  자충수로 스스로 범죄를 진술 자백하게 되는 것인지.....  스스로 판단한 결과로  그는 도박을 결심했던 것이다.  그는 승리에 대한 확신이 있었다.

   사진에 표시한 세베우스 개선문의 옆에는 높은 연단처럼 위치가 형성되어 있고 검은 돌덩이가 연설 무대로 썩 안성맞춤이었다.  거기다가 일장 연설에는 이미 도사가 된 부루투스였다.

 

  ' 왜  여기 이 부루투스가 카이사르에 대항하여 그를 죽여야만 했는지 로마가 그 이유를 나에게 요구한다면......  저는 이렇게 대답하겠습니다.......... 그것은........  그것은........ (흑  흑)........ (흑  흑).........   카이사르에 대한 나의 사랑이 결코 부족해서가 아니라..........내가....... 내가........ 로마를 더 사랑했기 때문이었다고 대답하겠습니다............... (침묵 일관).'

 

  광장은 한없이 깊은 침묵과 고요 속으로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렇게 얼마만의 시간이 흘렀을까........  여기 저기서 "부루투스' '부루투스' 하는 외침이 흘러나오기 시작하더니 이내........  로마는 온통 부루투스를 연호하는 환호성으로 넘쳐나기 시작했다.

  부루투스의 눈가에 아주 짦은 찰라에 회심의 미소가 스쳐 지나갔다.

  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표정을 지으면서 휘청거리는 발걸음으로 연단을 내려가기 시작했다.  군중들의 연호는 수그러들 기미조차 보이질 않고 있었다.

  '대박'

  그의 도전은 보란듯이 완벽하게 성공을 거둔 것이다.

  이 순간,  그는 로마로 부터 케사르 암살에 대하여 완벽하게 면죄권을 부여 받은 것이다.  또한 케사르의 양아들이며 공인된 후계자의 신분과 권위도 여전히  온전한 상태로 다시  인정 받은 것이다.  그렇게 부여된 자신의 지위와 권위가 온전한 지금에........  윗사람이 유고되어 공석이 되었다.......  이것이 무엇을 뜻하는가?

  '로마는 이제 이 부루투스의 것이라는 명제인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하며 계단을 내려섰다.

  그의 발걸음이 원로원 안으로 사라질 때까지 '부루투스'를 연호하는 로마시민들의 오침을 좀 처럼 사그러질 기미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그가 자신의 집무실 의자에 앉으며 포도주로 축배를 들려는 순간.........  일순간에 자신의 이름을 연호하던 함성 소리가 거짓말 처럼 끊어진것을 느꼈다.

  찰라처럼 어떤 불길한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사람을 보내 밖의 동향을 살폈다.

  '방금 내려오신 연단에 안토니우스가  올라갔습니다.  아직 아무런 말도 꺼내지는 않고 있습니다.'

  안토니우스 라는 이름을 듣는 순간 부루투스는 괜한 자신의 우려였다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이쯤 이루어진 상황에 안토니우스가 할 수 있는 역활은 없어.  기껏 앞으로 죽지 않으려고 로마시민들에게 눈도장이나 찍으려는 어리석은 수작이겠지.  모든것은  이미 판가름이 난 것이야.  이제 안토니우스 정도로는 나의 상대가 안돼.  어림 반푼어치도 없는 수작이지.  혹시나 나의 연설에 감동하여 칭찬을 하려고 올라간 것이라면 내가 아량을 베풀어 조금 편하게 여생을 보내게 해 줄수는 있겠지..........'  그는 남은 포도주를 쭈욱 들이 켰다.

 

  시작된 안토니우스의 연설은 딱히 특별할 것이 없었다.

  이미 떠나간 그분의 지난 업적들을  끄집어 내서 떠올리게 하여 시민들을 더 깊은 슬픔에 빠지게 하는 정도일 뿐이었다.  그렇게 애도의 시간이 조금은 지루하다 싶을만치 길어지고 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그를 유심히 살피던 원로들도 하나 둘씩 원로원 안으로 떠나가고 있었다.  아뭏튼 이제 정치에 발을 담군 사람들은 누구도 안토니우스의 연설에 더 이상 귀를 귀울이지 않게 되었다.

  이어가던 말을 중단한 안토니우스가 연단의 끝 모서리로 나섰다.  그로 좌 우로 천천히 아주 천천히 좌중의 로마시민들 한명 한명을 흩듯이 쏘아보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선 더 이상 아루런 말도 튀어 나오지 않았다.

  이상한 기류가 흐르고 있었다.  모여든 시민 모두가 이 무겁고 마냥 칙칙하기만 한 낯선 분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적막함과 공허함..........

  한참을 더 침묵속에 좌중을 흩어보기만 하던 안토니우스가 천천히 자신의 품속에서 하얀 두루마기 하나를 꺼내 쳐들었다.  모든 로마시민의 시선이 오로지 한곳에 쏘려들었다.  유난히 느리고 낮은 목소리로 안토니우스가 말랬다.

  '줄리어스 시저께서 로마 시민들에게 남긴 유언장 입니다.'

  이 짧은 한 마디에 온 로마제국은 얼어 붙었다.  숨이 막혔다. 어쩌면 이것이 꿈이거나....... 어쩌면 아직 시저가 죽지 않았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들을 했다.

  '듣고 싶으십니까?  나는 그 내용을 모릅니다.  다만........  시저 께서는 사람의 앞날은 아무도 알수 없다고 하시면서  혹시나.........  로마 시민들에 대한 나의 속마음을 전하지 못하게 되면 어쩌나 하는 마음에서 한번  글로 적어 본다고 하시면서.......... (흑 흑)........  자신에게 무슨 변고가 생기더라도..........  당신의 깊은 마음만은 꼭 시민들에게 알려달라고 저에게 당부하시면서 남기신 유언장 입니다.'

  사방에서 애써 속으로 삭이면서 삐져나오는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가고 있었다.  이 대목에서 로마시민치고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다.

  '사랑하는 로마 시민 여러분..........  로마를 위하여 해야할 일은 수없이 산적해 있는데  눈은 점점 침침해져 가고......  내게 남은 시간이 그리 많지 않을 것만 같아 도무지 잠을 이룰수가 없습니다.  로마의 군복을 입고 갈리아 원정을 떠나 눈보라 속을 달릴때만 해도 추위라는 것을 몰랐는데....... 어느새 초가을 작은 바람결에도 모포를 걸쳐야 할만큼  쇠약해져 가는 자신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전쟁터도 다닐만큼 다녀 보았고,  명예와 지위도 쌓을만큼 쌓아봤고,  부 라는 것도 살아서 다 쓰지 못할 만큼 가져보았습니다.  히지만 그것이 다 무슨 소용 이겠습니까.  지금 내가 가진 모든것이 로마와 로마의 시민들이 나에게 선물로 안겨준 결과들인것을 너무도 잘 알고 있는 처지로.......  조금이라도 더 로마를 사랑하고 로마의 시민들을 위해서 무엇이든 더 헌신해야 한다는 것을  절심함으로 깨닫고 있으면서도   다 그렇게 실행하지 못하고  흘러가는 시간만을 한탄하고 있는 자신이 원망스럽습니다.  내가 더 무엇을 원하겠습니까?  더 가져본들 무엇을 하겠습니까?  더욱 굳건해진 로마에서 모든 시민들이 안전하게 풍족하게 행복해 지기만을 바랄 뿐입니다.  저의 남은 소원이랍니다.  하여 나는 다음과 같은 결심을 하였습니다.   만약 내가 죽게 되면 나의 집은 사회 복지시설로 활용될 것이며,  나의 농장과 땅들은 로마시민들에게 모두 기증하겠습니다.  공원을 조성하여 로마 시민이라면 누구나 자유롭게 와서  머물고 쉬는 공간이면 좋겠습니다.  아울러 내가 가진 재산 전부를 내놓아서 모든 로마시민 1인당 75 드라크마(중급 공무원  넉달치 월급 정도)씩을 지급하겠습니다............ (중략).................'

  모여든 군중 모두가 자리에서 일어서서 '씨저' '씨저'를  연호 했다.  좀 전에 외치던 '부루투스'의 함성은 지금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느 순간 군중들의 분위기를 살펴가면서 유언장을 읽어 내려가던 안토니우스의 표정이 순식간에 흙빛으로 변했다.

  사실 그는 이 유언장을 연단에 오르기 전에 대충 흩어 보기는 하였다.  그러나 아쉽게도 끝까지 세세하게 읽어 보지를 못했던 것이다.

  대충 읽어 본 것 만으로도 안토니우스는 승리를 확신했다.

  이제 이 유언장이 낭독되고 나면 부루투스는 끝장이다.  그는 즉시 살인자 신세로 전락헤게 될것이 확실했다.  부루투스가 제거되고 나면   그 다음은 당연히 자신의 차례가 된다.  무주공산에 무혈입성 하는 경우가 된다.  그런 미래를 그는 확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시저는 거기까지 이미 내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이 대목은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혼쭐을 내던 삼국지의 대목을 떠올리게 한다)

  읽다가 중단할 수는 없었다.

  그는 떨리고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차마 더 이상 읽어내려가고 싶지 않은 유언장의 말미를 읽어내려갈 수밖에 없었다.  시저를 연호하는 시민들의 눈빛이 결코 용서 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느낄수 있었다.

  '........  내가 생각하고 바라는 후계구도에 대해서 로마 시민들께 간곡하게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위대한 로마를 사랑하고 이끌어가는 일은 나 줄리어스 시저에게도 힘들고 벅찬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주 오랜 시간동안 밤잠을 설쳐가면서 고민에 고민을 거듭 거듭하였습니다.  누가 로마를 잘 이끌어 나갈 수 있을까?  누가 로마를 더 번영 시킬 수 있을까?  누가 더 로마에 평화를 줄 수 있을까?  누가 더 시민들을 행복하게 해 줄 수 있을까?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 끝에 나는 결정하였습니다.  이 로마를  위하여 내가 자신있게 나의 모든 지위와 권리와 책무를 넘겨주고자 하는 사람은 바로.......  나의 양아들인 '옥타비아누스'입니다.  로마 시민 여러분.  바라건데  옥타비아누스를 지켜봐 주시고  그와 함께 빛나는 로마의 번영을  함께 해 주시기 바랍니다.............(생략).

   --  모든  게임 끝. --

  케사르에게 어린 철부지 같은 양아들이 있다는 것은 세상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아직 정치판에 발도 들여 놓지 않은 상태였다.

 케사르 사후는 당연히 부루투스의 시대라고 예견했다.  다음으로 호시탐탐 안토니우스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그 외에도 권력을 노리는 자들은 더러 있었으나 이런 대반전이 있으리라고는 그 누구도 꿈엔들 생각해 본적이 없었다.  그러나 사태는 벌어졌고 모든 결과는 죽은 케사르의 바램대로 되었다.

  그리고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로마의 공화정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되었다.

 

  옥타비아누스는 '아우쿠스투스(존엄한 자)' 라는 칭호와 함께 로마제국의 초대 황제에 등극하게 된다.

 

 

 

 

 

        --------------------  다음은 세번째 이야기에서 이어서.........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