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엑소더스(신들과 왕들)을 보고...........
- 지팡이를 든 모세와 칼을 든 모세.
모세가 여호와께 고하되 주여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자니이다.... 주여 보낼만한 자를 보내소서. 여호와께서 모세를 향하여 노를 발하시고 가라사대........ 너는 이 지팡이를 손에 잡고 이것으로 이적을 행할찌니이라. (출애굽기 4장 중에서)
모세는 여호와 앞에서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이니 다른 사람을 선택해 보내라고 애원한다. 그러자 여호와께서는 화를 내시며 이미 모세를 선택하였고 이를 재고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 하는 수없이 모세는 여호와께서 주신 지팡이를 들고 유대민족(히브리족) 앞에 섰다.
이렇게 보자면 과연 모세는 어떤 사람일까?
예비된 선지자였을까?
신에게 등 떠밀린 애굽에 대항하던 열성분자로, 훗날의 젤롯당(zealot)의 시조 쯤이었을까?
아님 신의 선택에서 부터 놀라운 능력을 갖게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을까?
히브리 노예의 자식으로 태어나 애굽(이집트) 공주의 손에서 왕자로 성장한 모세. 람세스와 더불어 이집트 왕자로 성장한 그는 잘만하면 파라오(왕)에 오를 수도 있는 지위에 까지 올랐다. 그러다 어떤 사연으로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알게 되어, 그간의 모든 지위와 명예를 박탈당한 상태에서....... 마침내 온 히브리 민족을 이끌고 여호와께서 히브리 민족에게 약속한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을 향해 머나먼 광양에로의 행군을 시작한다. 장장 40년의 유랑 끝에 마침내 가나안 땅을 눈앞에 두고 요단강가에서 생을 마감한다.
종국엔 그 자신도 가나안 땅에는 발을 딛지 못하고 만 것이다.
그렇다면 모세를 어떻게 볼 것인가?
양치는 목동인가?
애굽에 대항한 혁명분자인가?
성서의 내용에 준해서 보여 지는 선지자인가?
아니면 왕인가?
왕은 분명 아니었다고 한다. 구약의 왕들은 여호와께서 허락하신 (머리에 기름부음)을 받았는데, 모세는 분명 선택은 받았으나 기름부음의 은혜를 받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은 분명 모세가 왕이다.
리들리 스콧 감독은 유대민족(히브리)의 왕으로서의 모세를 그리고자 하였던 것이며, 인간적 내면의 고뇌에 찬 왕으로서의 인간 모세를 창조해 냈다. 그 영화가 작금에 흥행과 내용면에서 찬사와 악평의 논란 중심에 서있는 영화 (엑소더스)인 것이다.
(모세는 왕이다)는 것이 바로 이 영화의 시발점인 것이다. 그래서 그는 지팡이 대신 칼을 들고 나타난 것이다.
신(야훼)와 왕(모세)의 조합과 신(태양신)과 왕(람세스2세) 조합의 대립에 각을 세워놓고 스펙터클한 대서사시를 그려나가고 있는 것이다.
“ EXODUS (GODS AND KINGS).”
원제목이 그 모든 것을 그대로 나타내고 있다.
주말 오후시간을 이용해 왕짜증여사와 나는 데이트를 겸해 영화 (엑소더스)를 감상했다. 2시간을 훌쩍 넘기는 롱타임에도 불구하고 지극히 만족스러운 재미있고 좋은 영화였다는 느낌을 받았다. 별 다섯 개(5점) 만점에 4점씩을 부여했다.
더 후한 점수를 선뜻 주지 못한 저변에는 유년시절부터 이미 여러 번 감상한 적이 있는 같은 모세이야기가 소재였던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에서 오는 각인되다시피 한 정형화된 모세 이미지가 어느 정도 작용했기 때문이리라.
그러나 (엑소더스) 역시 무척이나 재미있고 훌륭한 영화였다.
와이드스크린의 화신이라 불리는 리들리 스콧 감독은 엄청난 스케일과 압도적인 비쥬얼 속에서 환상적이면서도 장엄하리만치 아름다운 전쟁신과 추격신등을 보여준다. 스크린에서의 역동성은 이전의 (글래디에이터)를 훨씬 능가한다고 하겠다.
슬로우 모션이나 클로즈업으로 싸움이나 전투의 디테일을 강조하는 기법인 잭스나이더 감독의 (300) 이후 보편화된 표현방식을 철저하게 배격하고, 단순하게 와이드한 앵글과 빠른 편집으로 그저 단순하면서도 몰아치듯 폭풍처럼 사정없이 관객의 가슴속으로 마구 몰아쳐 들어온다.
(엑소더스)가 명불허전이라 할 만큼 스펙터클한 대작임에도 불구하고 가혹한 혹평이 따라붙는 것은 왜일까? 더러는 관람 도중에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어 했다는 사람까지도 있다.
왜 그럴까?
어떤 영화든 보는 관점이나 견해에 따라 다르게 볼 수 있다. 애초 스토리(원작)에 주안점을 둘 수도 있고, 화면 구성이나 편집에 주안점을 두는 경우도 있고, 아름다운 영상미에 점수를 주기도 하고, 출연배우의 연기력으로 성패가 좌우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한 평가들도 있지만 (엑소더스)의 경우는 조금 다르게 (볼만한 영화)로 보는 경우와 (볼 가치도 없는 영화)로 평가가 양분되는 경향이 있다.
도대체 왜 그럴까?
The divinity of god.(神性)
영화를 그저 영화로 보는 부류와 과연 이 영화에 (The divinity of god)이 성스럽게 그려져 삽입이 되어 있다고 보느냐 아니라고 보느냐에 따라 또 갈라서는, 평가가 엇갈리는 또 다른 부류가 있다고 보여 진다.
신성이 부족하거나 결여되었다고 보는 사람들은 (성서 내용의 왜곡) 내지는 (폄하)의 시각으로 이 영화를 지켜보면서 아예 (볼 가치조차 없는 영화)라고 혹평을 내뱉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 가치의 기준으로 세실 B. 데밀 감독의 (십계)가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영화는 어디까지나 영화다.
(엑소더스)와 (십계)는 같은 소재를 다루었음에도 전혀 다른 영화다.
모세를 어떻게 보든 어떻게 그려내든 최종 결론에서는 모세는 그냥 모세다.
나 역시 세례를 받은 기독교인이지만 (엑소더스)를 이야기하면서는 단순하게 (그냥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더 해보고자 한다.
(모세)라는 인물을 인류사적인 입장에서 이집트 역사 속에서 살펴본다면 어렴풋하게나마 등장은 한다. 이집트 왕자 중에 히브리 태생이 있었다는 이야기 정도이다. 그렇게 본다면 모세라는 인물은 다분히 (성경속의 인물) (기독교적인 인물)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에 람세스 2세는 이집트 신왕조의 세 번째 파라오로서 람세스 1세와 더불어 이집트 역사의 최대 전성기를 누린 인류사적으로 실제 많은 기록을 남긴 사람이다. 영화에 등장하는 파라오는 람세스 2세를 말한다. 그는 룩소르신전을 포함한 전대미문의 토목공사를 많이 벌여 수많은 인류문화유산을 오늘에 남기는데도 혁혁한 공을 세운 사람이다. 그에 수반되는 더 많은 문제들이 뒤따랐겠지만....... 그는 장장 60여년의 기간을 파라오로 재임한다. 그 60연년의 재위 기간 동안에 모세와의 사건이 있었다는 이야기이다. 그렇게 보자면, 영화 (십계)나 (엑소더스)의 종반부처럼 싹쓸이 식으로 모세에게(?) 패해서 역사에서 쓸려나가듯 사라진 것도 아니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모세의 (엑소더스) 이후에도 그는 오랫동안 여전히 세계 최강의 대국 이집트를 굳건하게 다스린 위대한 파라오였다는 사실이다.
이런 부분이나 이런 사실들을 더 따져보거나 심도 있게 살펴보기 싫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에게는 (십계)는 (영구불변의 진리 같은 영화)요, (엑소더스)는 (한낮 쓰레기 같은 영화)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쯤에서 세실 B. 데밀 감독의 영화 (십계)를 보자.
한마디로 말하자면 기독교적인, 기독교 교리에 의한, 기독교를 위한 영화라 하겠다.
(벤허)(쿼바디스)와 더불어 기독교영화의 삼두마차가 (십계)가 아니겠는가.
모세역의 찰턴 헤스톤. 람세스2세역의 율 브린너. 거기에 모세를 사랑하다 끝내는 람세스의 왕비가 되는 매혹적인 네프레티역의 앤 백스터.
거기에 완벽에 가깝게 성서적으로 동화된 스토리의 충실함까지 더해졌으니.........
가히 기독교적 영화의 표본이라 하겠다.
좀 더 살펴보기로 한다면.........
생김과 체격과 목소리만으로도 자신의 존재감을 거의 쎄인트(st.) 반열에 올려놓는 찰턴 헤스턴의 모세역은 가히 기독교 영화다운 품격을 한층 드높여 주었고, 거기에 람세스 역을 맡은 율 브린너의 깔끔하면서도 개성이 넘치는 연기는 다시는 없을 라이벌 역학 구도의 최고 백미였다.
야훼께서는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시고, 시내산 떨기나무의 타오르는 불꽃과 위엄 가득한 웅장한 음성만으로 자신을 드러낸다. 어찌 성스럽지 않겠는가. 신의 근엄한 사랑은 불길로써 석판에 십계명을 새기셔서 선물로 주시고, 사정없이 몰아치는 불기둥으로 모든 악함을 응징하신다.
거기에 모세의 울부짖음에 대답이라도 하시듯, 그의 지팡이가 내려치자 그 시퍼렇고 깊은 홍해를 가르시지 않았던가.
그랬다.
야훼(신)께서 모세에게 요구한 것은 자신에 대한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뿐이었다.
그 대신 야훼는 모세에게 지팡이를 주었다. 칼을 준 것도 군대를 준 것도 아니었다. 그리고 그 지팡이에는 기적을 행하는 무한의 능력과 온 유대민족이 절대적으로 떠받들고 따라야 하는 무한의 권위가 내포되어 있었다.
그 뿐이 아니라 신(야훼)과 인간들(유대민족) 사이에서 선지자(모세)는 참으로 절묘하고도 탁월하게 처신을 했다.
그것이 영화 (십계)가 남겨 놓은 위대한 발자취인 것이다. 다분히 기독교적인...........
그럼 이제부터는 이어서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엑소더스)를 살펴보아야겠는데.........
이미 기독교적 관점에서 (엑소더스)를 보았거나, 유사한 선입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그분들에게 하나의 과제를 선물하고 싶다.
1, 영화 (십계)를 보았고. 2. 영화 (엑소더스)를 보았는데. 3. 대단히 불편하시거나 불쾌하셨다면. 4. (제가 권하는 책을 한번 읽어보세요.)
나의 경우는 1. 영화 (십계)를 아주 여러번 보았고. 2. (그 책을 아주 감명 깊게 읽었고) 3. (엑소더스)를 보았는데. 4. 대단히 감동적이었던 경우에 속하기 때문이다.
그 책은 바로 크리스티앙 자크의 (람세스)이다.
전5권이나 되는 분량의 이 책은 평소 독서를 좋아하지 않는 사람들에게는 어느 정도의 고통일 수도 있다. 또 익숙하지 않은 이름이나 지명, 거기에 이집트 그리스 로마의 신화이야기까지 겹치고 보면 쉽게 적응이 되지 못할 수도 있다. 하지만 한번 빠져들면 완독하기 이전에 결코 쉽게 책장을 내려놓지 못할 것이다. 내 경우는 아주 깊이 빠져들었던 기억을 지금도 생생하게 간직하고 있다.
그 안에는 모세가 있고, 람세스2세가 있고, 그 두 사람을 한없이 사랑한 파라오 세티가 있다. 네프테리아의 불같은 사랑도 너무나 아름답다. 이 모든 것은 전해오는 신화의 이야기를 소설로 되살린 크리스티앙 자크의 노력이었겠으나, 번역자인 시인 김정란 교수의 공로이기도 하겠다. 번역이 얼마나 성스럽고 아름다운 작업인지 나는 이 책과 소설가이자 번역가이신 안정효 선생을 통해서 비로소 알게 되었다. 흔한 언어로 <강추>다.
종교와 논리 사이의 모호함.
(십계)에서는 그 모호함을 종교적 신앙에 입각한 성스러움으로 모두 승화시켜 나갔지만, 고통 속에 번뇌하는 세속적인 모습의 (엑소더스)에 등장하는 모세에게서는 이 모든 모호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게 그려내거나 설명함에 다소 부족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절대자이신 신께서 그 절대권능으로 인간사의 모든 문제들을 그냥 뚝딱 해치우지 않으시고 이래저래 부러 인간들을 시험에 들게 하고 혼란에 빠지게 하고.......... 어차피 최종적 귀결은 모두 (신의 뜻)일 터인데 말이다.
결국은 이들 영화에 대한 평이 달라지는 이유도 바로 그 모호함에서 출발한 것이고....... 결국은 그것조차도 결국 (신의 뜻)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닐까?
바로 그런 모호함이 바로 이 영화의 가장 크고 치명적 약점이라 하겠다.
이런 관점의 시선으로 모세를 바라보다 나는 문득 N. 카잔차키스를 떠올렸다.
어쩌면 리들리 스콧 감독은 이 영화 (엑소더스)의 기획 단계에서부터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시선으로 모세를 그려내고자 한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카잔차키스의 시선 속에서 인간은 한없이 나약하고 번뇌하고 방황하는 신의 피조물이다. 하지만 그 인간은 피조물에 그치지 않고 선한 의지를 가지고 인간다움을 위해 끊임없이 노력한다. 인간을 창조한 신이 그 나약한 인간에게 관심을 가지고 자비를 베풀고자 하지만, 인간은 신의 배려가 아닌 순수 인간의 의지로 모든 것을 극복하고자 한다. 간혹 인간이 신을 배격하고 부정하는 것으로도 보여 지지만....... 종국에는 신에 대한 무한한 사랑으로 귀결되는 것이 카잔차키스의 시선이다. 어디까지나 내가 생각하는.
여기에 또 한 가지의 느낌은.......... 영화 중반부에까지 내용 중에서 모세가 지팡이가 아닌 칼을 들고 애굽에 무력으로 저항하는 반복되는 영상속의 모습에서 떠오른 것이 있었다.
내 청소년시절 아주 두꺼운 겉표지도 없는 낡고 헤진 소설책을 주워서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하느님의 말씀을 믿고 유대민족을 로마의 폭정에서 구해내기 위해 칼을 들고 무력으로 저항하는 사람이었다. 무척이나 신명나고 재미있게 빠져들었던 소설이었는데 그 소설의 주인공 이름은 요세푸스였다. 훗날 세계사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나는 그 이름을 다시 만날 수 있었다. 유대의 역사 속에서 아주 위대한 역사학자이자 유대민족의 지도자였으며, 또한 로마에 항복하여 로마를 위해 눈부신 업적을 남긴 최고의 변절자가 바로 요세푸스였다. 당시의 소설에선 요세푸스가 로마에 무장 항거하다가 대패하여 겨우 살아남은 소수를 이끌고 수백 킬로에 달하는 지하 수로에 숨어들어 최후를 앞둔 것으로 후반부 페이지가 찢겨져 나가있었다. 훗날 알게 된 결론은..........둘씩 끌어안고 비수로 자진을 하고......... 또 남은 자들이 둘씩 끌어안고........ 로마의 포로가 되지 않으려 집단 자진을 하였는데......... 마지막에 남은 자가 바로 최고 우두머리 요세푸스였고, 그는 자살을 하지 않고 동굴을 빠져나가 혼자 로마에 항복하였다. 이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그것 까지도 (신의 뜻)일까? 어떤 논리를 들여대야만 풀릴 수 있을까?
여기서 나는 단지 유대나 로마에 대항하는 혁명전사의 시선으로 신과 인간사와 당면한 과제에 대해서 고뇌하는 요세푸스의 심정들이 모세에게서 언뜻 비춰지더라는 의미로 한 말이다.
이러한 시선이나 느낌들은 결국, (엑소더스)가 성서에 나오는 이야기의 흐름대로 서술하듯이 그려나가고 있기는 하나, 그 흐름의 중간에는 성스러운 (신) 보다 끊임없이 저항하는 역동적인 (인간)이 비중 있게 자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부 사람들에게 거부반응을 일으키는 것이라고 본다.
최종적 귀결은 결국 (신에게의 귀의)이지만 그 귀결은 별반 아무런 비중도 보이지 않게 무심한 듯 지나가 버리고, 그 마지막 귀결 직전까지의 긴장된 연속의 상황들은 전혀 (신성)이 무가치와 무관심으로 아무데나 방치된 것처럼 느껴지기까지 한다.
영화의 종반부까지 모세의 시선을 따라가 보지만 거룩하고 절대적인 (신성)은 그저 마냥 미미하기만 하고, 오히려 람세스의 시선은 토템이나 미신일망정 애굽의 신에게 절대적인 믿음과 복종과 헌신을 보여준다.
야훼에게 선택받은 모세가 보여주는 기독교 신앙적인 관점의 모습은 어딘가 어색하고 많이 부족하게만 보인다.
하지만, 유대민족의 지도자 모세(왕)로서 고뇌하고 과감하게 싸움터에 뛰어들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전쟁을 불사하는 그의 모습은 틀림없는 지도자요 왕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왜 그런 그의 모습에서 거부감을 느끼는 것일까?
나는 영화 (엑소더스)에서 선지자가 아닌 왕의 모습을 더 강렬하게 느끼며 보았다.
신의 뜻?
어쩌면 그것은 갖다 붙이기 좋아하는 사람들의 궤변?
아무리 그렇기로........ 이 영화에 대해서는 어디까지나 (엑소더스)를 관람한 당신의 몫. 당신의 뜻대로 하소서.
영화는 어디까지나 그냥 영화일 뿐...........
나는 참 좋은 영화로 느꼈을 뿐이다.
그럼 당신은요?
--- 2014. 12.08. 55회 생일을 하루 앞두던 날에.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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