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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이야기

가을에 대한 소회(所懷. 2014)

by 피안재 2014. 11. 25.

 

 

 

 

 

 

 

 

 

 

 

 

 

 

 

 

 

 

 

 

 

 

  '대그림자가 계단을 쓸어도 티끌하나 쓸려나가지 않고, 달빛이 호수를 뚫고 들어가도 물에는 흔적하나 남지 않는다.'

  (채근담)에 있는 구절이다.

  가지는 것, 잃는 것, 사랑하는 것, 이별하는 것, 미워하는 것, 지워버리는 것, 남겨지는 것,  가만히 살펴보노라면 이 모든것이 무언가가 다른 무엇인가를  너무도 붙잡으려하는 것의 변주들이 아닌가?

  그저 달빛처럼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 흔적조차 남기지 않는 그런 삶은 없는 것일까?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 있음에

       나는 간다는 말도 못 하고 갔단 말이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곳저곳 떨어지는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 태어나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야 만나 보겠으니

       나는 도 닦고 기다리리라.

 

 

 

 

 

  (제망매가)를 읊던 월명사의 마음은 과연 어떠했으려나?

  마음의 덧없음에 슬퍼하던 어느 옛사람은 지는 낙엽을 통해 삶의 덧없음을 보았을 것이다.

  사람의 가슴을 재봉틀에 짜여진 듯 박혀나오는 실자욱처럼 튼실하게 제대로 기웠을 일이지 어찌하여 조물주의 헤푼 손길은 사람마음의 한 구석을 덜 기운채 내려보내시어 그 덜기워진 틈사이로 가을이 헤집고 들게 하셨단 말인가?

   마음속에 갑누볐던 무수한 일들이 저마다 낡은 기억속에서 가냘프게 펄럭이고 있음에 이 가을이 마냥 안스럽고 쓸쓸하기만 하다.

 

  가을 걷이가 없는 한숨의 아비에게는 무엇인가가 한없이 서운하고 그저 마냥 쓸쓸하기만 하여 묵묵히 이 가을을 바라다 볼 수밖에..........

 

 

 

 

 

 

 

 

 

 

 

 

 

 

 

 

 

 

 

 

 

 

 

 

 

    "금년 가을은 쓸쓸한 느낌이 아니라 무언가 왜 자꾸 슬픈 생각이 들지?"

   "나이들어서 제대로 가을을 타는가 보지."

  "남들도 다 그런가?"

  "요즘은 여자들이 가을을 탄대. 남자들이 오히려 봄을 타고....... 그런데 나는 뭐야. 오지랍만 넓고 쓸데없는 자존심만 남은 남편 만나서 봄이고 가을이고 어디 타 볼 기회가 있어야지. 그런 마누라 속도 모르고 가을이 어쩌니 저쩌니....... "

  이크. 멈칫.........

  요즘은 사통팔달  사방으로 고속도로가 뻥뻥 잘도 뚫렸건만,  난 툭하면 삼천포로 빠지지? 삼천포로......... 헐.

  "아이고 내 팔자야. 당신한테 속아서 깨진 바가지꼴이 되었고,  하나 뿐인 아들에게 모든것 바쳐 헌신했더니 제 색시 만나자마자 엄마는 헌신짝 신세로 전락시키고....... 이제 어쩌자는 것이여? 어쩔것이냐고?"

  "뭘 어쪄? 아들은 제 갈길 찾아서 제대로 간거고........  너도 친정엄마에게 한 걸 생각해 봐. 장모님도 속 많이 상하셨잖아."

  "시방 그런말이 당신 입에서 술 술 나와?  당신만 내 앞에 안나타났으면 우리엄마 속상하실 일 전혀 없었어. 그런데 뭐라고?"

  "그...... 그런 뜻이 아니고.........  암튼. 아직 내가 여기 있잖아............."

  "갚어! 이제까지 모든것에다 우리엄마 가슴아프게 한 것까지 죄다 갚어.  다 갚기 전엔 내 허락없이 죽지도 마. 다 갚어. 알았지?"

 

 아!  가을은 허무함이다. 또한 절망이다.

 

 

 

 

  암튼 2014년은 참 특별하게만 느껴진다.

  이제 사나흘 지나면 달력 한장이 또 넘어가고,  그리고나면 달랑 한장만 남게된다.

  새해 들자마자 발 등을 다쳐 일주일은 아예 신발도 못신어 근 한달 가까이 고생했던 일.........

  여름에 화독을 입어 태어나서 가장 참혹한 여름을 보내고........

  가을의 한 복판에서 아들 장가보내느라 금년 가을을 그냥 확 지나가 버리게 만들고.........  하긴,  '아들 장가보내는 데는 내가 한 일이 별로 없구나.' '그냥 맹그는데는 큰 공헌을 했는데 저절로 크고 저절로 장가를 갔음. ㅎㅎㅎㅎㅎ'

  그러고 나서 또 발바닥을 다쳐서 한 열흘간 몹시 고생하고.........

  그러니 내가 스스로 생각해도 자못 신기할 밖에.........

 

  '그런 와중에 웬 가을타령...................?'

 

 

 

 

  어떻게든 분위기 쇄신을 해야만 한다.  생존이 걸린 문제다.

  숯불구이 집에서 쐬주를 한잔 한다.(마눌님과 나의 정량은 합이 쐬주 3병에 맥주 1병.  시작을 소+맥 으로 하기에.........)

  "그러고 보니 우리 금년엔 아예 여행에 대한 기록이 없네? 나들이만 몇 번 있었지."

  "그렇게 됐지 뭐.  당신이나 나나 스케줄이 잘 만맞았으니까? 어쩌다보니 훌쩍 한 해가 그냥 지나가네........."

  "뭐가 어쩌다 보니니? 그 와중에도 당신은 혼자 홀짝 홀짝 잘도 나녔으면서......... 허긴........  시간 난다고 그냥 들어앉았던 적이 있었니?  다쳤을 때만 신도 못신고 운전도 못하니깐 어쩔 수 없이 들어앉았던 것이지.  당신은 다 다녔잖아. 아니여?"

  "다...... 다 다니긴 뭘 다녀.........  장  장자도 한 번........  그리고........ 나 혼자 다니면 그게 어디 여행같니?"

  "잉간아.  입에 침이나 제대로 발라라....... 이구......... 저 좋은건 남이야 어떻든 말든 죄다 하면서...... 어이구........."

  "내가 그래도 당신하고....... 항상 스케줄은 미리미리 챙겨 놓고 대기한다...........  애브리 타임............"

  "작년에 마지막 캠핑이 언제였지? 그 눈길에 미끄러지던.........."

  "크리스마스 끼고 덕유대 야영장 캠핑이 마지막이었지.......... 그럼 아예 이참에 12월 계획을 잡아볼까?"

  "그러시던가. 12월 마지막주 되면 아무때고 시간이 날것 같아."

  "그럼...... 캠핑은 아무때고 어디든 할 수 있을테니까.......  상황 봐서...... 이번엔 다시 휴양림쪽으로도 예약을 미리 해볼까?  캠핑이 좋을 것 같으면 2~3일 전에만 취소하면 손해 없으니까?"

  "당신이 정중하게 부탁쪼로 나오면 그때 시간내서 갈 수도 있고..........."

  "암.  내가 부탁이 아니라 사정하는 거여. 사정.......  지금부터 여기 써빙은 내가 직접 다 한다.  뭐든 시키기만 해. 알았지?"

  마늘. 상추. 쌈장. 쐬주. 양파 가지러 발에 불이나게 쫓아다녔음. (다음날 천관산 자연휴양림 2박3일 예약 성공)

 

 

  술이 좀 거나해지고 푸짐했던 안주가 바닦을 서서히 들어낼쯤 마눌님께서 폭탄 선언을 한다.

  "나. 내년 2월 말쯤부터 한동안 아주 푹 쉬어 보려고 해."

  "알고 있는거잖아.  이참에 아주 푹 쉬어."

  "며느리에게 손주 낳으면  할미가 키워준다고 괜히 성급하게 너무 일찍 이야기 했나봐.  쉬는 김에 아예 푹 쉴것을."

  "뭐. 당장 애들이 손주를 가진것도 아니고.......  가졌다 해도 열달은 걸려야 하는 거니까  그 전까지 푹 쉬면 되지."

  "매일 산에 갈꺼야."

  "다녀.  나도 시간이 나면 죽어라 따라 다닐께."

  "요가 함께 배울래?  구정 전에 요가 시작하려는데......."

  "내가 이 체형에 뇨자들 틈에서 요가 하게 생겼냐?  나 헬스 회원권 끊는다니까?"

  "또 석달씩 끊어놓고 한달도 못채우려고?  이번엔 한달씩 끊고 다녀. 습관처럼 봄에 배이면 그땐 석달이든 일년이든 끊고. 알았지?"

  "그리고.........  삼월이 땡 하고 시작하면,  한 달만 시간 내줘라."

  "돈 벌어 오라고 족치지도 않는 처지이니 통장 잔고 바닥만 아니라면 한달이야 시간 못 만들겠냐?"

  "알았지?  당신도 백만원 쓸 생각만 해.  나도 백만원 쓸테니...... 물론 한 달간 일을 안하면 총 비용 손실은 그 배가 넘겠지만...... 그래도 해."

  "알았어.  겨울동안 내년 3월 스케줄 조정해 놓을께."

  "어디서 출발할 건데?"

  "목포가 좋겠어."

  "고성 아니고?"

  "여기서 고성 가기가 교통편이 좀 그렇잖아.......  고성서 동해안 타고 포항쪽으로 걸어 오느니........  목포서 출발해서 해안도로 끼고 부산까지만 가자."

  "한 달이라니깐?"

  "암튼. 목포서 출발하면 남해고,  부산서 부터는 위로 동해안이니까...... 일단 며칠이 걸리던 부산까지로 잡으면 되지.  너 말이다.  지도상으로 직선도로 생각하지마.  진도도 들어가면 이삼일이고,  남해도 해안도로 걸으면 이삼일 이고. 거제도도 그렇고..........  가는데 까지 일단 가보는 거야."

 "목포?"

 "그럼.  집에서 기차타고 쨘 내려가서....... 걷고 또 걷다가 부산서 기차타고 쨘 하고 올라오면 되는거야."

 

 

  일은 이미 터져 버렸다.  지난 달부터.......

  우리 왕짜증여사.  2월말쯤 부터 국토순례 장정에 들어가신단다.

  나를 시종으로 데리고.........

  걷고 또 걷고...... 오로지 걸어 보신단다.  가다가 여관에서 자고 식당에서 사먹고 또 걸어보신단다.

 

  2015년은 아마도...........  죽음일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만이..........

 

 

 

  카메라 메모리카드를 정리하다 보니.

  2014년의 가을이 어쩌니 저쩌니 하면서도........ 왕짜증여사 말대로 나 혼자서도 다니기는 제법 싸돌아 다녔구나. ㅎㅎㅎㅎ

  여행이라긴 그렇고....... 나들이 정도의 기록들........

  함께 한 기록도 있고...... 나 혼자의 기록도 있고.........

  그냥.  '그런 2014년의 기억도 있었노라 기억하기 위해서 블로그에 사진이라도 남겨야겠다'는 마음으로........

 

 

 

 

 

 

 

             세상의 모든 아름다운 추억들은,

             아득한 기억 저 편의 못 이룬 첫사랑처럼 짧기 마련이다.

            그런 안타까움을 가지고 늘 길을 떠난다.  그리고 그것은 또다른 출발이자 시작이다.

            중도에 돌아서서 일상으로 되돌아간 자의 눈망울을 가만히 살펴보면,  시작에 대한 망설임, 후회, 설레임, 두려움 등이 나름 제각각의 빛갈과 모양으로 살며시 드러난다.  나는 결단코 그리하지 않으리라.

             내 삶의 마지막 날,  차안을 벗어나 피안으로 드는 마지막 언덕(피안재)에 서서 지나온 나의 삶을 되돌아볼 때, 설혹 때 늦은 후회가 있다손 쳐도 나는 지금 또 낯선것을 찾아 길을 떠나련다.

              그 날까지 나는 거듭 거듭 새로운 출발이 내게서 한시도 떠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고 기도한다.  나의 사람과 함께.......... 피안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