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의 의문사라면 바로 정조의 독살설을 우선으로 꼽는다.
만백성의 어버이요 하늘이 점지해서 낸다는 군왕(天子)의 절대적 권위에 도전하여 생명의 위협까지 가하는 자, 과연 누구인가?
군왕의 절대적 권위를 넘어 군왕의 생명마저 죄지우지 할 수 있는 세력은 과연 누구인가? 왕의 나라인 조선에서 과연 그같은 일이 가능한 것인가?
- 문득 그는 깨달았다.
- 권력에 다가가는 길은 오로지 임금에 대한 충성이 최선이라는 것을.
- 권력의 그늘에서 그는 생각했다.
- 권력이란 때론 그 임금마저도 비위에 거슬릴 때가 있다는 것을.
- 권력의 정점에서 그는 보았다.
- 이미 다른 누군가에게 또 다른 의미의 충성을 강요하고 있는 자신을.
------ 피안재의 (귀결)중에서......
창궐하듯 득세하는 권문세족들의 가혹한 수탈과 극에 달한 사치와 향락, 그리고 불교의 수많은 폐단으로 점철된 고려왕조 말의 혼란을 참다못한 일부 세력(신진 사대부)들은 마침내 역성혁명을 통해 조선(朝鮮)이라는 새로운 왕조를 탄생시켰다. 그리고 새 왕조 창업을 성취한 태조 이성계에게는 한쪽으로는 정도전을 중심으로 한 당대의 젊은 엘리트들인 신진사대부, 다른 한쪽으로는 이방원이라는 양축의 대업공신들이 있었다.
전 왕조의 수많은 폐단과 고질적 병폐들을 개혁하기 위해 이성계는 정도전에게 많은 제도와 정책을 수립하게 하였고 이를 과감하게 시행하게 하였다. 적어도 새왕조의 초기에는 국가의 개혁이라는 점에 있어서 쌍방 간에 어느 정도 교감이 이루어졌다는 뜻이 되겠다.
그러나 다른 한 축이었던 이방원의 생각은 달랐다.
이런 생각의 차이는 끝내 재앙을 불러와, 마침내 여러 왕자들과 개혁의 주체였던 정도전의 참혹한 죽음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신진사대부들의 꿈도 어느 정도는 좌절되었다.
조선이라는 나라는 유교(성리학)의 이념적 토대위에 세워진 전제왕권국가였던 것이다.
이성계라는 절대적인 왕권을 중심으로 모여 이루어진 나라였다.
그런 절대왕권위에 정도전과 신진사대부들은 ‘백성이 천하게 업신여김을 받지 않고 귀하게 존경과 대접을 받는 백성을 받드는 나라’의 꿈을 꾸었고 그 청사진들을 하나씩 하나씩 실천해나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감히 아버지와 내가 어떻게 세워서 차지한 나라인데.......’ 이방원은 왕권의 위기를 느꼈고 과감하게 칼을 뽑아들고 피의 숙청을 감행하였던 것이다. 이방원에게 있어서 백성이란 그저 ‘임금이 먼저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선정의 정치를 펼치게 되면 세상은 달라져갈 것이고, 그에 따라 백성의 삶도 자연스럽게 나아질 것이다. 백성이란 왕이 왕권을 어떻게 확립하여 정치를 잘 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그냥 자연스럽게 그들의 처우와 삶의 질이 저절로 주어지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였으니 애초부터 그들은 어긋날 수밖에 없던 운명이었다.
이방원은 혁명에 또다시 성공하였다. 마침내 왕위에 등극하게 된 세조는 강력한 전제왕권을 기반으로 강력한 패도정치를 추구하였고, 당대엔 뜻한 바대로 성공을 거두었다.
개혁초기의 정도전과 신진사대부들에 의해 흔들리던 왕권을 유사 이래 보기 드물 정도로 확고하고 강력한 왕권을 거머쥔 명실상부한 조선의 역사상 가장 강력한 임금이 되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가 이 조선이라는 왕조의 명맥을 천년만년 이어가는 가장 중요한 근본이자 기반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이방원이 꿈꾸고 일생을 바쳤던 그 강력한 절대왕권의 꿈은 어떻게 되었을까?
과연 조선은 이방원이 생각했던 임금 한사람에게 무한의 권력이 쥐어진 절대왕권을 얼마나 지속할 수 있었을까? 조선의 역사 오백년은 과연 전제왕권국가라고 할 수 있을까?
이방원의 꿈은 자신의 아들 세종 때까지는 그럭저럭 유지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바로 그때부터 시작하여 500백년의 사직이 마감되어가는 고종과 순종까지의 조선왕조사를 이방원이 하늘에서 내려다 볼 수만 있다면 그것은 아마도 너무도 처참하고 참혹한 저주가 아니었을까? 누구의 저주였을까?
개국의 과정에서 생겨난 죽음들은 이성계의 몫이라 쳐도, 정몽주와 정도전의 죽음과 왕위찬탈의 욕심에 무참하게 살해된 형제들과, 아들에게 물려줄 절대왕권의 확립을 위해 죽어간 그의 사돈과 조카들과 일부 공신들의 죽은 영령들이 퍼부은 저주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오백 열여덟 해의 조선왕조사에 있어서 스물일곱 명의 임금이 즉위하였으나, 그 중에서 적어도 열두명의 임금이 남에게 죽임을 당하였다고 한다면, 이방원이 무수한 피를 흘리면서까지 확고하고 강력하게 만들어 물려주었던 절대적 왕권은 과연 어디로 간 것인가.
학자들에 따라서는 여러 갈리는 의견이 있으나 대략 일곱에서 여덟의 임금이 독살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내 소견으로 열 둘이라 하는 것은 꼭 독살설이 뒤따르는 임금이 아니라 해도, 분명 남의 손에 의해 무참하게 죽었다면 그것은 독살과 별반 다를 것이 없다는 의미가 깔려있는 것이다. 절대 왕권을 한 손에 거머쥔 임금이 타인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면, 굳이 몰래 감행했다는 독살이나 암살과 별반 다를 것이 없기 때문이다. 왕에게 위해를 가하는 것은 여하한 이유에서건 분명 역모(逆謀)요 역린(逆鱗)인 것이다.
또한 그 중에는 비록 죽임을 당한 후에 임금에 추존된 두 사람을 포함해서 열 둘이라 보는 것이다. 추존 된 두 사람은 누군가에게 죽임을 당하지만 않았다면 당연히 임금에 등극을 하였을 사람들이다. 어느 누구보다도 성군의 자질을 가진 사람이었다니 그 자질을 시기한 자들은 과연 누구였단 말인가.
사대부(신진사대부)란 고려 말기에 등장하는 성리학(유교)의 이념을 바탕으로 한 신문물과 신사고를 가진 당시로서는 젊은 엘리트들을 일컫는 말이었다. 이들이 추구하는 세상은 정도전으로 대변되는 ‘백성이 존중되는 민본(民本)의 나라’를 건설하는 것이었다.
이에 절대왕권의 위협을 느낀 이방원은 정도전을 참수하면서 실추되었던 절대왕권을 다시금 치켜 올려 거머쥐었다. 허나 한 나라를 다스리는 정치를 임금 혼자서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하여 사대부 세력들을 나름 추려서 포용하기에 이르렀는데, 왕권을 위협한 정도전을 완전하게 지우기 위해 이방원은 사대부들의 역사라 할 수 있는 사림(士林)계보에 엉뚱하게도 정도전 대신 정몽주를 반열에 받들어 모시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적어도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정신의 표상’이라나 모라나. 정몽주는 조선의 개국을 원천봉쇄하려 한 사람이고, 정도전은 조선 개국의 일등공신임에도 이방원은 정도전을 지우려 이런 꼼수까지 불사한다. 하여 사림의 정통계보가 정몽주(鄭夢周)-길재(吉再)-김숙자(金叔慈)-김종직(金宗直)-김굉필(金宏弼)-조광조(趙光祖)로 이어져 내려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들이 바로 절대왕권에 버금가거나 그 이상으로 오백년 역사에 숱한 사건과 피를 뿌리게 되는 새로운 권력인 당권(黨權)을 거머쥔 거대세력으로 등장하게 되는 것이다.
물론 이들 외에도 왕권을 위협하는 세력은 또 있었다.
우선이 바로 왕의 외척들이다. 파평윤씨가 바로 조선왕조에서 가장 왕비를 많이 배출한 강력한 외척세력이었다. 기타의 여러 내노라 하는 명문가들이 서로 외척이 되고자 하였다. 왕들이 하도 장가들을 자주 가니 왕족과 인연을 맺은 수많은 가문들끼리도 권력을 위해 피 말리는 싸움들을 연일 벌였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불합리한 왕위계승이나 국가의 변란에 앞장서 공을 세운 공신들의 세력이 또 있었다. 왕이 안 될 사람을 칼을 써서 왕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이제 그들에게 돌아갈 것이 무엇이겠는가.
하여, 왕의 외척들. 공신세력들. 사림을 배후에 둔 관리들. 이들 세 세력을 모두 통합하여 권력의 그늘에서 벼슬아치로 위세를 떨치던 모든 무리로 치부하여 조금 부정적인 의미를 담아 그냥 편하게 모두 싸잡아 (사대부)라 여기서는 부르는 것이다.
군권과 신권이 피 말리는 한바탕 난리굿판을 벌인 오백년에 이르는 전쟁 아닌 전쟁, 그 와중에 적어도 열 둘의 임금이 남의 손에 죽임을 당했다는 말이다.
스물일곱 중에서 열 둘의 목숨이 남의 손에 의해.......... 그것이 조선이라는 나라였다. 그들 열 둘의 죽음에 사대부가 대부분 개입되었다고 치자면....... 사대부에게 충(忠)이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임금을 위한 나라인가?
백성을 위한 나라인가?
아니면 사대부 스스로를 위한 나라인가?
내시가 굴뚝 옆으로 사다리를 걸쳐놓고 궁궐의 지붕위로 올라갔다.
동쪽 지붕 처마로 올라선 내시는 지붕 한 가운데의 마룻대 위를 밝고, 흰 무명으로 된 웃옷(속옷상의)의 옷깃을 왼손으로 잡고 오른손으로 옷 허리를 잡고서 북쪽하늘을 향하여 외쳤다.
‘상위복’
‘상위복’
‘상위복’
임금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상위(上位)란 임금을 가리키는 말이며, 복(復)은 돌아오라, 회복하라는 뜻이다.
동쪽은 생명의 방향을 뜻하며, 북쪽은 죽음의 방향을 뜻하므로 동쪽으로 올라가 북쪽을 향해 외친 것임. 복은 죽음의 길로 가지 말고 어서 돌아오라는 뜻이며, 세 번 부르는 것은 셋을 성스러운 수로 여겼기 때문이다.
천자가 죽으면 붕(崩), 제후가 죽으면 훙(薨), 대부가 죽으면 졸(卒), 선비가 죽으면 불록(不祿), 보통 사람이 죽으면 사(死) 라 하였으니, 임금의 죽음은 붕어 내지는 승하라 했다.
‘상위복’이라고 이렇게 세 차례나 혼을 부른 다음에는 의당히 그 혼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시간을 배려하였다. 이 기간을 천자는 7일, 제후는 5일, 일반인은 3일 이 (국조오례의)에 실린 바대로의 규범이었다. 하여 조선에서도 역시 3일 동안 기다리다 살아나지 않으면 입관을 하고, 세자의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세자는 선왕의 장례와 자신의 즉위식을 병행하여야만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장례가 선왕이 천수를 누리다가 승하하셔서 그가 지목하고 가르친 세자가 자연승계를 한다면 별 문제가 없겠으나, 역성혁명으로 왕위가 찬탈된다든가, 왕은 독살되었는데 후계자가 미미하거나 지목되지 않은 상황이라면 승하하신 임금의 장례는 어떻게 치러졌을까?
518년의 조선왕조 중에 스물일곱번의 임금 장례식이 치러졌는데, 그 중 열 두명의 임금이 남의 손에 의해 죽음을 맞이하였다면 그 열 두번의 장례식은 어떻게 치러졌을까?
~~~ 영화 (관상) 중에서 나오는 단종. 김종서. 수양대군 으로 분한 배우들의 모습.
첫째. 단종(端宗)의 죽음. (1441 ~ 1457)
이름 홍위(弘暐). 문종(文宗)을 아버지로 두었고, 어머니는 현덕왕후(顯德王后) 권씨(權氏)이다. 병약했던 문종의 뒤를 이어 1452년 12세의 나이로 왕위에 올랐다가 1455년 마지못해 숙부인 세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상왕(上王)이 되었다.
한마디로 단종은 출생에서 부터의 타고난 운명이 비극으로 치닫게끔 예정되어 있었던 역사의 불운아였다.
성군이자 대왕인 세종의 손자였음에도 아비인 문종이 너무도 병약하여 어린 세자를 두고 일찍 떠났으며, 어머니는 단종이 태어날 때 거꾸로 나오게 되어 부득불 배를 가르고 꺼내는 통에 죽고 말았으니 어머니의 죽음위에 태어난 생명이었다. 더군다나 할머니마저도 일찍 여윈 형편이었으니 감싸줄 어른이나 외가마저 없었던 구중궁궐 속에서 혈혈단신 고아 같은 처지였던 것이다.
문종은 승하하기 전 어린 세자를 걱정하여 황보인 김종서 등에게 세자의 보필을 부탁하였고, 집현전의 학사들이 어린 왕을 보좌하고자 노력하였으나, 그에게는 이미 야심만만한 숙부가 여섯이나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도 단연 돋보이는 뛰어나게 영특하고 배짱 있는 둘째숙부가 바로 수양대군이었다. 거기에 수양에게는 권람이나 한명회 같은 모략과 술수가 뛰어나며 야심으로 가득 찬 무리들이 몰려들어있었다. 그들의 야심은 다음해에 기어코 김종서와 황보인을 제거하고 모든 권력을 차지하였으나 그들의 야심은 거기서 멈추지를 않았다.
1455년 수양 일파의 강요에 견디지 못한 단종은 왕위를 숙부에게(세조) 물려주고 상왕으로 물러나 앉았다. 하지만 이듬해 성삼문 ·박팽년 ·하위지(河緯地) ·이개(李塏) ·유응부(兪應孚) ·유성원(柳誠源) 등이 단종의 복위(復位)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모두 처형된 후, 1457년엔 상왕에서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降封)되어 강원도 영월(寧越)에 유배되었다. 그리고 이 와중에 수양대군의 동생이며 노산군의 숙부인 금성대군(錦城大君)이 다시 경상도의 순흥(順興)에서 복위를 도모하다가 발각되어 사사(賜死)되자 노산군에서 다시 강등이 되어 서인(庶人)이 되었으며, 이때부터 집요하게 자살을 강요당하여 마침내 1457년(세조 3) 10월 24일에 영월에서 죽었다.
세조와 권람 한명회에게 있어서는 단종의 생존사실 그 하나가 커다란 두려움이었던 것이다. 백성들 사이에 점차 단종에 대한 동정심이 번져나갔으며 생육신 사육신등 집현전 학자들을 무한정 제재할 수만도 없는 상황이었다. 거기에 형제였던 금성대군의 궐기까지 겪고 나니 조선의 그 누가되었던 단종의 복위를 전면에 내세우면 어느 정도 백성들의 동정심이 지지 세력으로 언제든 변질될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가 단종이라 판단했던 것이다.
세조와 그를 지지한 공신들의 입장에서는 무조건 단종을 제거해야만 했던 것이다.
하여 단종은 마침내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다.
1698년(숙종 24) 임금으로 복위되어 묘호(廟號)를 단종이라 하였다. 능은 단종이 끝내 죽임을 당한 강원도 영월의 장릉(莊陵)이다.
~~~~~~ 영화 (왕의 남자) 중에서 연산군의 모습.
둘째. 연산군의 죽음.(1476 ~ 1506)
이름은 융(漋). 성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관봉상시사(判奉常寺事) 윤기견(尹起畎 혹은 尹起畝)의 딸이니 바로 후대에 폐비윤씨(廢妃尹氏)로 불리는 사람이다.
세자시절 서연을 통해 세자 수업을 받았으며 그의 학문적 소양은 역대의 어느 임금에 뒤지지 않았다. 군왕에 즉위한 후에도 대신들과 우호를 가지며 성군으로서의 자질을 보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다 즉위 1년 후, 폐모 윤씨 사건의 전말을 알게 된 후 방치된 윤씨 능묘 천장(遷葬)두고 삼사와 대립하였으며, 이때부터 각종 비행과 패륜을 마다하지 않는 폭군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무오사화를 통해 조정과 대신들을 장악하였고 이후 국왕(연산군)은 강력해진 왕권을 바탕으로 자신의 관심인 사냥과 사치를 즐겼고 국고의 사정은 나빠졌다.
연산군의 이러한 악행과 파행은 셀 수 없을만큼 많아서 일일이 다 거론할 수는 없겠으나 이 글에서 그의 죽음을 이야기하자면 여기서 사건 하나를 집고 넘어가야겠다.
아버지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는 연산군에게는 사실 큰어머니뻘이었다.
오십이 가까운 나이였으나 부귀를 누리며 살았음인지 여느 여인들과는 다르게 기품과 미모가 여전하였다 한다. 몇 해 전 월산대군이 죽어서 과부로 있는 큰어머니를 연산군이 강간하였다. 그런데 놀랍게도 딱 한 번의 강간으로 남편이 죽은 지 몇 년 지난 오십 줄의 과부가 그만 임신을 하고 만 것이다.(요즘이야 그럴 수 있다 쳐도 그 시절엔 거의 불가한 상황) 사건은 전혀 걷잡을 수없는 사태로 비화되기 시작하였다.
유교가 국가의 통치이념이자 만백성의 근본인 시절이었다.
남녀가 유별함을 밤을 새워 강론하여도 모자랄 판에..........
어찌되었건........ 큰어머니뻘 월산대군의 부인 박씨는 자살하였다.
연산군은 그것으로 모든 것이 마무리되기를 바랐다. 그렇게 되리라 믿었다.
하지만 유림을 통하여 점점 번져나간 소문은 마침내 조정의 신하들과 온 나라 백성들의 꺼질 줄 모르고 타오르는 분노로 연결되었다.
자살한 박씨의 친정동생인 박원종은 복수에 이를 갈며 마침내 성희안 유순정 같은 하급 벼슬아치들을 규합하여 반정을 일으켜 성공한 뒤, 폐왕이 된 연산군을 강화도 교동으로 위리안치 시킨다. 이를 중종반정이라 한다.
중종반정의 결과로 연산군의 학정은 끝났으나 반정 공신들에 의한 전횡이 이어지면서 근본적인 제도개혁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들이 새로운 절대 권력을 거머쥔 사대부로 체질개선을 해갔던 것이다. 이후 50년은 여러 차례 사화(士禍)라는 유혈극이 잇따라 일어나고 그것은 이후 다시 붕당(朋黨) 및 붕당정치로 확대 악화되고, 한편으로는 임진 ·병자 등 국난으로 국운은 쇠퇴의 길을 밟게 되었다.
박원종 일파들은 반정에 성공하여 권력을 독차지하였음에도, 누구라도 다시 교동에 유배중인 연산군을 꺼내서 또 다른 반정을 일으킬지 모른다는 두려움이 매우 컸다. 하여 유배시킨 지 두 달 만에 연산군에게 강제로 독약을 먹였다. 그리고는 역질로 죽었다고 발표하고 기록하였다.
정도전이 추구했던 나라, 왕과 신하가 서로 적절한 대립과 긴장의 관계 속에서 서로를 견제하며 정치를 펼쳐나가고자 했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의 독주가 필요 없는 세상. 그래서 언로가 열려있고 대화와 타협이 가능한 정치의 활성화를 끊임없이 추구하였다. 그런 정치 속에서 백성들을 위하고자 했던 민본의 세상은 어디에도 없었다. 여기에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민본(民本)이라는 말은 “백성은 오직 나라의 근본(根本)이니 근본이 튼튼해야 나라가 평안하다.”라는 〈서경(書經)〉의 구절에서 유래되었다.
그렇다고 이방원이 추구했던 나라, 임금이 절대적 권력을 쥐고 능력 있는 신하들을 통해 태평성대의 조선을 세세무궁토록 유지시키려던 야망도 어디에도 남아있지 않았다.
조선건국의 저변에는 불교를 철저하게 배척하는 유교이념이 짙게 깔려있다. 그리고 당대의 젊은 엘리트들인 신진사대부들의 마음속에는 유교이념 중에서도 성리학을 근본으로 하는 의리관(義理觀)을 대단히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여기에서의 성리학은 가족을 중심으로 하는 혈연 공동체와 국가를 중심으로 하는 사회 공동체에 윤리 규범을 제시함으로써 점차 사회의 중심 사상으로 발전해나갔으며 종국엔 조선의 국가통치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리고 그 결과로 충효(忠孝)사상이 그 중심에 자리 잡게 되는 것이다.
충효(忠孝)는 부(父)에게 효도하고 군(君)에게 충성하라는 뜻이지만, 그것은 그런 이론적 명제에 그치지 않고, 부당한 처사에는 불복하고 비합리적 명령에는 항거하는 정신을 핵심적 내용으로 포함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런 근본은 점차 왜곡되어 갔다.
≪효경 孝經≫ 간쟁장(諫爭章)은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옛적에 천자가 쟁신(爭臣) 7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천하를 잃어버리지 않았고, 제후가 쟁신 5인이 있으면 비록 무도하여도 나라를 잃어버리지 않았으며,……아비로서 쟁자(爭子)가 있으면 그 몸이 불의에 빠지지 않았다. 그러므로 불의를 당해서는 자식이 아비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으며, 신하가 임금에게 다투지 않을 수 없다. 불의를 당해서는 부당함에 대해서 간하고 시정을 요구해야지, 묵묵히 불의를 좇거나 묵인한다면 어찌 충이나 효라 할 수 있으랴?”
부모뿐만 아니라 천자나 제후라 하더라도 불의(不義)에 대해서는 다투어 간하고 말려서 그것을 행하지 못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정치적 억압에 맞선 역대의 충신·열사들은 충효의 이름으로 이를 감당해 왔던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러나 이미 살펴본 단종과 연산군의 죽음에선 그런 쟁신(爭臣)들 보다도 권력의 그늘에서 역천(逆天)을 마다하지 않는 이리떼의 습성을 가진 간신(奸臣)들이 더 득세를 하는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다.
자고로 선비란 잠잘 때를 제외하곤 유교경전을 손에서 놓지 않으며 길을 가면서도 경구를 줄줄이 암송하는 것을 가장 기본이자 아름다운 덕목으로 꼽는 집단이다.
그리고 많은 유교정전의 내용 중에서도 조선이라는 나라는,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삼강오륜을 그 중 가장 중요한 덕목으로 삼았다. 그리고 그 삼강오륜의 근본은 충효(忠孝)인 것이다.
그런 충효로 무장된 선비가 임금을 핍박하고 제 멋대로 임금을 바꿀 수가 있겠는가?
저 사대부들에게 충효(忠孝)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 드라마 (천명)에 등장하는 이호(인종)의 모습이다.
셋째. 인종(仁宗)의 죽음. 1515 - 1545)
이름은 호(岵)이다. 자는 천윤(天胤)이다. 중종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영돈녕부사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이다.
조선시대 손에 꼽히는 로열훼밀리 중에 노씨 가문이 있었다. 부친에 이어서 2대에 걸쳐 영의정을 배출한 최초의 집안이기도 했다. 영의정 노수신은 자신의 누이를 왕에게 출가시켜 왕실과 사돈관계를 맺었고 왕의 처남이기도 했다. 그런 그에게 혼담이 왔으니 왕의 이복동생에게 자신의 딸을 시집보내게 된 것이다. 복이 넘쳐도 넘쳐나는 광영이 아니라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너무 넘쳐났음일까? 하늘이 질투를 하였음일까?
조정 내에서 공공연하게 반정의 조짐이 드러나 현 왕을 몰아내고 새 왕을 옹립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현 왕은 연산군이요, 왕의 이복동생은 진성대군이었다.
‘누이가 중하요? 아님 딸이 더 중하오?’ 하는 반정세력의 회유에 노수신은 ‘차라리 날 죽여라’ 라는 답을 하고 저들에게 살해되었다. 노수신은 험 잡을게 없는 신하였다.
마침내 중종반정이 일어나고 진성대군이 등극하니 바로 중종이다.
중종이 대궐에 들어가고 나서 4일 만에 ‘중전은 역적 노수신의 딸이므로 결코 왕비가 될 수 없다’고 반정세력이 들고 일어나 폐위되어 궐 밖으로 쫓겨나니 바로 단경왕후이다.
하지만 중종과 단경왕후의 사랑 너무도 깊어서 몰래 사가로 찾아가기도 하는 등, 평생을 그리워하며 살다가 생을 마쳤다고 한다. 임금의 사사로운 감정과 혼사문제까지도 제 마음대로 처리하던 것이 바로 사대부들이었다.
중종은 신하들에게 등 떠밀려 새 장가를 들었으니, 제1계비(繼妃)는 윤여필(尹汝弼)의 딸 장경왕후(章敬王后), 제2계비는 윤지임(尹之任)의 딸 문정왕후(文定王后)이다. 모두가 파평 윤씨이다. 중종은 새로 맞은 왕비들을 매우 푸대접 하였다. 첫 부인 장경왕후를 잊지 못해서였다. 하지만 부부의 연을 맺은지라 제1계비 장경왕후가 임신을 하여 출산을 하였는데 산고가 너무 심해서 출산한지 7일 만에 그만 죽고 말았다. 그리고 이때 태어난 아이가 훗날의 인종이다.
갓 태어나 의지할 데가 없었던 인종은 작은어머니뻘인 제2계비 문정왕후의 손에 의해 양육되었다. 그런데 유독 독살스럽다고 까지 서책에 기록된 것처럼 ‘문정왕후는 사직의 저주이다 라고 까지’ 너무도 유별난 여인이었기에, 계비의 손에서 자라나는 동안에 숱한 애환과 고충을 겪었으리라. 더욱이 한참 지나 문정왕후마저 왕자인 경원대군을 생산하였으니, 이때부터는 문정왕후의 본격적인 권력욕이 드러나게 되었던 것이다.
세자(인종)의 나이 서른에 중종이 죽었다.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의 나이 12세였다.
효심이 깊었던 인종은 전해 내려온 예절 그대로 상제 노릇을 제대로 하기 위하여 거적자리와 짚벼개뿐인 여막에서 호곡만 하며 지내다가 그만 병을 얻고 말았다.
어느 음력 칠월의 몹시 무더운 날에 대비전으로 부터 궁녀를 통해 여막에 있는 인종에게 꿀물 한 그릇이 내려왔다. 인종은 아무런 의심 없이 감사하며 그 꿀물을 받아 모두 마시었다. 그리고 잠시 뒤부터 오장육부가 뒤틀리고 이를 악다물어도 신음소리가 계속되는 고통에 나뒹굴게 되었다. 자신이 독약을 먹은 줄을 깨달은 인종은 대신 윤인경을 시켜 모든 대신들과 계모와 이복동생을 부르도록 명령하였다. 서둘러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은 계모와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멀뚱히 쳐다보고만 있을 뿐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았다. 마침내 여러 조정대신들이 우르르 현장에 막 당도하였을 때, 이미 임금은 말을 할 수 조차 없는 지경에 이르고 있었다. 대신들 앞에서 피를 토하며 쓰러지던 임금은 마지막 힘을 보태서 손가락으로 이복동생을 가리키다가 그대로 운명하였다.
‘저....... 저 아이 때문에......... 계모가....... 계모가....... 기어코........ 나에게 독약을....... 독약을 먹이는구나. 저들을........................’ 라고 하고 싶지 않았을까?
얼마나 억울한 죽음이었겠는가.
이에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문정왕후의 친정동생인 윤원형과 그 일파들이 나서서 ‘ 전하께서 경원대군으로 하여금 뒤를 잇게 하라는 유언을 지금 남기셨다’고 나서서 설치게 되니, 등극 9개월 만에 인종은 억울한 독살을 당하였고, 문정왕후의 권력욕임 마침내 결실을 맺어 그의 아들이 등극하니 곧 명종이다.
명종이 즉위하자 문정왕후는 모후(母后)로서 수렴청정(垂簾聽政)을 하였다. 이때 남동생 윤원형(尹元衡)이 권력을 쥐게 되자, 대윤(大尹)이라고 하는 윤임(尹任) 일파를 몰아내는 을사사화를 일으켰다. 그 후로도 문정왕후의 끊임없는 권력욕은 이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치 숱한 사건들을 계속해서 만들어나간다. 이조왕조가 문을 닫을 때까지 왕비들과 외척들의 득세는 끊이질 않는데, 그때마다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 바로 ‘문정왕후는 어떻게 까지 하였는데 그에 비하면 우리는........’ 이었다 하니, 가히 짐작이 되고도 남겠다.
넷째. 선조(宣祖)의 죽음. (1552 - 1608)
어렸을 때의 이름은 균(鈞)이었으나 후에 연(昖)으로 바꾸었다. 덕흥대원군(德興大院君) 초(岹)의 셋째 아들이니 즉 중종의 손자(셋째 아들 계)이다(중종의 첫째 아들은 12대 인종, 둘째 아들은 13대 명종). 어머니는 영의정(贈領議政)에 추증된 정세호(鄭世虎)의 딸인 하동부대부인(河東府大夫人) 정씨(鄭氏).
이제까지는 왕위세습이 왕의 직계에서 나왔으나, 명종이 후세를 남기지 못하고 죽자 방계혈통인 하성군이 보위에 오르게 되어 그가 곧 선조이다.(13세) 선조는 명종의 조카이다.
후세의 선조에 대한 평가는 지극히 부정적이다.
소심하고 의심 많고 시기와 질투심이 강하고 자신의 보위(왕위)에 대하여 엄청나게 집착한다. 군왕으로 누리고 싶은 것에 대해서는 집요하리만치 탐욕스러우면서도, 군왕으로서의 도리와 책무에 대해서는 한사고 발뺌하고 타인에게 그 책임을 전가시키는, 한마디로 조선 사직의 비극 덩어리요, 애초부터 왕이 되어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임진왜란을 맞아 종묘사직과 도성과 백성을 버리고 몰래 도망치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리고 전쟁종료 후에도 실추된 자신의 위엄만을 다시 세우려 하였을 뿐 종전의 처리마저도 제대로 마무리 짖지 못하여 조정과 백성들의 원성이 자자했던 한마디로 치졸한 임금이었다.
공빈 김씨와의 사이에서 두 아들을 두었으니 임해군과 광해군이었다. 임진년 전란에 두 왕자의 남다른 공이 있었는데, 큰아들 임해군이 난폭한 성품이라 하여 둘째 광해군을 세자에 책봉한다. 허나 전란 수습과정에서 민심이 등을 돌리자 툭하면 세자에게 선위하겠다고 설치고 나서는 파행을 일 년 열두 달이면 열대여섯 번씩 저지르는 등 옥좌에 대하여 엄청난 집착을 보인다. 여차하면 아들이 열이라도 모두 벨 심보였다. 세자인 광해군으로서는 목숨 보전을 위하여 선위 이야기만 나오면 석고대죄로 불충과 불효에 대해 용서를 며칠 밤낮을 새워가며 빌어야만 했다.
거기에다 자식을 생산하지 못하던 인목왕후 김씨가 뒤늦게 아들을 생산하여 영창대군이 등장하니, 온 조정이 잠시도 잠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왕위에 집착을 보이며 절대 물러날 기미가 보이지 않는 왕과, 서자의 몸이라 할 수 있지만 이미 세자에 임명된 광해군과, 뒤늦게 적자로 태어난 영창대군을 두고 차세대 권력에 대한 각기 다른 계산들이 없을 수가 없게 되었던 것이다. 거기에 늙은 군왕은 늦둥이가 한없이 귀엽기만 하였으니.........
장차 차세대 권력이 어느 방향으로 흘러가게 될지가 아직 확실치 않은 시점에서.........
어리버리 임금께서 임란으로 급하게 의주로 도망치듯 피난을 떠나던 길에, 그 와중에도 눈에 확 들어오는 색시 하나가 눈에 띄었다. 어찌나 첫눈에 반하였는지 전란이 끝나고 환궁한 뒤에 기어코 그 색시를 찾아서 상궁 나인을 시키게 되었다. 상궁 나인이 된 김개똥(김개시)은 늙은 임금의 사랑을 한 몸에 받으며 궁중생활을 즐기고 있었는데, 뒤늦게 인목왕후가 생산을 하여 영창대군을 낳으니, 그때부터 임금의 모든 사랑과 관심이 오로지 인목왕후와 영창대군에게만 쏠리게 되었다. 선조는 김개똥 같은 첩을 제외하고도 왕비와 빈 만으로도 이미 여덟명의 부인을 두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하루는 인목왕후가 임금에게 ‘광해군이 곱지 않은 시선으로 영창대군을 자주 째려본다.’고 고자질 하였다. 하여 문안인사차 임금을 찾았던 광해군은 느닷없는 임금의 호령에 내치듯 쫓겨나고 만다. 생명의 위협을 느낀 광해군은 추운 엄동설한에 눈보라 속에서 대전 앞에 석고대죄를 하여야만 했다. 혹한의 추위 속에 엎드려 머리를 찧으며 죄를 빌던 광해군은 그만 쓰러져 기절을 하고 말았다.
처소로 옮겨진 광해군을 임금의 눈치를 보느라 누구도 함부로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임금의 숨겨둔 첩인 김개똥이 나서서 정성스레 세자를 병간호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어느 순간 상황이 예측불허로 흐르더니만......... 한창 젊은 혈기의 남녀가 몇 날을 스킨십을(치료하다보니) 하며 지내다 보니 그만..........(19禁)
어느 순간 정신을 차리고 되돌아보니.......... 아뿔싸.
그동안 겪어왔던 모든 정황과 냉담한 현실과 불확실한 앞날을 모두 머리를 맞대고 궁리해 보니.......... 아무리 궁리에 궁리를 더해 봐도 결과는............ 어차피 죽음 뿐.
그러면 그럴수록 살아야겠다는 집념이 점점 독하게 강해질 뿐............ 그렇다면 살아날 방법은......... 단 하나.
선조는 주전부리 중에서 유독 약식을 좋아하였다. 하여 광해군과 김개똥은 특별한 정성과 비법을 섞어서 참으로 맛나 보이는 약식을 만들었다. 그리고 그것을 김개똥이 직접 들고 임금에게 가져갔다. 좋아하던 약식이었고 아끼는 김개똥이 직접 만들어 가지고 왔으므로 임금은 아무런 의심 없이 맛있게 가져온 약식을 모두 먹었다.
그리고 그날부로 선조는 병이 발작하여 그대로 죽었다.
이어서 광해군이 새 임금으로 즉위하였으며, 그 후로도 재위기간 내내 새임금과 아비가 거느리던 첩과의 불륜 소문은 끊이지 않고 궁궐담장을 넘어 퍼져나갔다.
훗날 인조반정으로 이귀. 김류 등에 의해 왕위에서 끌어내려진 광해군이 당시 왕실의 최고어른인 인목왕후에게 끌려갔을 때, 인목왕후가 광해군에게 따져 물은 첫 번째 죄목이 바로 ‘아비를 독살한 죄’였던 것이다. 하여 인목왕후가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을 보위에 올리니 그가 바로 인조인 것이다.
어리버리한 선조의 죽음과 패륜으로 이루어진 광해군의 등극. 피를 부른 반정과 인조의 등극....... 이 모든 사건 뒤에도 권력에 눈 먼 사대부들의 탐욕과 줄서기와 모략과 파당이 짙게 깔려있었던 것이다. 어쩌면 애초부터 그들이 이런 결과를 뻔히 알면서도 부러 자초한 일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다섯째. 소현세자(昭顯世子)의 죽음. (1612 ~1645)
오백년 조선왕조의 역사에 있어서 비운의 왕세자로 늘 회자되는 인물로 이름은 왕이다. 사도세자와 함께 왕세자의 신분이었음에도 특이하게 선왕의 견제를 받고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비참하게 요절한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소현세자는 인조의 장자이자 효종의 형이며, 어머니는 한준겸의 딸 인열왕후(仁烈王后)이다. 1625년 세자로 책봉되었고, 부인은 강석기(姜碩期)의 딸인 민회빈강씨이고 보통 강빈(姜嬪)이라고 부른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 삼전도에서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 아우 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갔다.
이후 8년간 심양(瀋陽)의 세자관에 머물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다. 동시에 조선과 청나라 사이에서 창구역할을 맡아 조선인 포로 도망자의 속환문제, 청나라의 조선에 대한 병력 ·군량 ·선박 요구, 각종 물화의 무역 요구 등, 정치 ·경제적 현안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 청나라 인사들이 벌인 대부분의 행사에 참여하고 청나라 황제의 사냥 등에도 동행하였다. 당시유럽에서 신문물이 쏟아져 들어오고 열강대국들의 흐름을 유심히 살피던 세자는 청나라와 어느 정도 우호적인 관계를 확보하는 것이 조선에 유익하다 생각하여 호의를 보인 것에 감격하여 저들 청나라에서는 세자를 소군(少君)’으로 부르기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세자관으로 들어가는 조선 정부의 재정 부담이 커졌고, 동시에 부왕 인조의 의구심을 사게 되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소현세자를 즉위시키고 자신을 몰아내려는 공작을 펴는 것으로 의심하고, 그를 감시하였다. 게다가 인조를 폐위시키고 회은군 이덕인(李德仁)을 옹립하려는 역모가 일어나자 인조의 경계심은 더욱 커졌다. 친부인 인조에게는 청나라와 가까운 인물로 혹시나 자신 밀어내고 왕위에 오를 위험한 인물로 인식되었고, 서인 세력들에게는 왕권을 강화하고 척신을 배척할 극히 위험한 인물로 점차 각인되어갔던 것이다. 권력의 최고봉을 향해서는 부자지간이고 군신간이고 처절한 생존경쟁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 소현세자가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잡혀간 지 8년 만에 귀국하였다. 그리고 귀국한 지 두 달 만에 갑자기 사망하였다. 오한이 나서 병을 치료 받은 지 불과 4일 만이었고, 34세의 젊은 나이였다.
공식적인 병명은 학질, 즉 말라리아였다. 학질은 대개 모기에 의해 발병이 되는 것으로 오한과 발열이 반복되고 땀과 갈증이 심해지며 주기적인 발작 증세와 함께 심하면 사망에 이르기도 하는 병이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의 말라리아는 어린이나 노약자가 아니면 급사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소현세자의 병명이 학질로 진단을 받은 이후 의원들은 그에 적절한 처방을 진행하고 있었다. 침과 함께 소시호탕과 같은 탕약이 처방되었다. 그러나 세자의 증상은 급격히 나빠져 갔다. 더욱이 소현세자가 학질로 진단받던 4월 23일은 한여름의 무더위가 아닌 아직도 쌀쌀한 계절이었던 봄이었다. 봄에 모기로 인한 학질에 걸린 것이다.
이리하여 소현세자의 죽음에는 끊임없이 독살설이 뒤따르고 있는 것이다.
독살설의 배후를 살펴보자면 바로 소현세자의 친부인 인조가 후궁 조씨와 김자점에게 시켜 소현세자를 독살한 것은 거의 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소현세자의 주검은 까맣게 변해있었고 7군데 혈(穴)에서 출혈이 있었다고 전한다. 이것은 사약을 마시고 사망한 사람들에게 나타나는 현상이었다. 또한 세자가 사망하면 치료를 맡은 어의가 문책을 받게 되는데 인조는 오히려 그를 두둔했다고 전해진다. 소현세자가 병에 걸렸을 때 담당 의원은 이형익이라는 자였다. 이형익은 3개월 전에 의관으로 특별 채용된 자로 소현세자 내외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인조의 애첩 조소용의 친정에 출입하던 자였다. 대신들이 의원 이형익을 국문하여 처벌해야 한다고 여러 번 간청했으나, 인조는 그런 일은 다반사이므로 굳이 처벌할 필요 없다고 했다. 게다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례마저 거의 박대에 가까운 수준으로 간소하게 했으며, 그 예법마저도 세자의 지위에 걸맞지 않는 것이었다. 그 이후에도 자식의 죽음을 대하는 인조의 태도는 더 의아했다. 볼모로 잡혀있던 기간의 고초를 인조에게 고하는 자리에서 봉림대군은 청 세조를 멸시했고 볼모로 잡혀간 조선인을 데리고 왔다고 고했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청 세조는 도량이 넓은 군주이며 새로운 서양문물을 내보이며 그가 아끼던 벼루를 얻어 왔다고 고했다. 이 때문에 소현세자는 인조의 노여움과 의심을 받게 되었고 야사에 의하면 인조는 화를 내며 벼루를 소현세자 얼굴에 집어 던졌다고도 전해진다.
이렇게 부친에 의해 억울하게 독살을 당한 소현세자의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를 않았다.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왕권강화 차원에서 세손(世孫:소현세자의 장자)을 폐위하고 봉림대군(효종)을 세자로 책봉하였다. 인조는 소현세자의 부인인 강빈에게도 강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고 그녀 역시 임금의 수라상에 독을 넣었다는 혐의를 씌어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효종 때 두 아들마저 의문의 죽임을 당했다.
왕세자로서 국가 경영을 고민하고 탁월한 외교 감각을 지녔던 소현세자가 조선의 왕이 되었다면, 조선 역사는 달라졌을까. 소현세자의 죽음은 여러 가지로 안타까운 점이 많다.
어진 임금의 자질을 충분히 가지고 있었음에도 그 뜻을 펼치지 못하였고, 왕세손이었음에도 왕위에 오르지 못하고 비운의 죽음을 맞이한 점에서도 소현세자와 사도세자의 죽음은 진실로 너무도 아까운 죽음이 아닐 수 없다.
여섯째. 효종(孝宗)의 죽음. (1619 ~ 1659)
바로 소현세자의 동생이다. 이름은 호(淏). 자 정연(靜淵). 호 죽오(竹梧). 시호 명의(明義). 인조(仁祖)의 둘째아들. 어머니는 인열왕후(仁烈王后) 한씨(韓氏). 비는 우의정 장유(張維)의 딸 인선왕후(仁宣王后)이다.. 효종은 어려서부터 글 읽기를 좋아하고 도량이 넓었으며 장난치거나 노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하니 보통 사람들과는 행실이 무척 달랐다고 하는데 자신의 속마음을 잘 드러내지 않는 냉정한 모습은 부친인 인조와 비슷하다. 또한 효심이 극진하여 채소나 과일같이 흔한 음식도 먼저 부친에게 올린 뒤에야 먹곤 했다. 인조는 효종을 두고 항상 인성이 훌륭하고 효심이 지극하다고 칭찬하여 주위의 사랑과 기대가 각별했다고 전한다. 1625년(인조 3)에 일곱 살 위인 형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가 먼저 왕세자로 책봉되었고, 이듬해 효종이 봉림대군에 봉해졌다. 형인 소현세자와 함께 청나라에 8년간 볼모로 함께 생활하였다. 인조의 미움을 받은 소현세자가 청나라에서 돌아와 1645년 갑자기 변사(變死)하자 세자에 책봉되어 1649년 인조가 죽자 왕위에 올랐다.
인조의 뒤를 이어 즉위한 효종은 종통(宗統: 맏아들의 혈통) 상의 약점을 안고 있었던 왕이었다. 이 같은 약점에도 불구하고 그는 친청파인 김자점의 주도로 적장손인 소현세자의 아들을 제치고 왕세자에 올랐다. 이 무렵 효종은 자신을 왕세자로 명한 성명을 거두고 소현세자의 아들인 원손을 왕세손으로 할 것을 울면서 간청하였다. 효종이 왕위에 있으면서 형인 소현세자의 두 아들을 살려내기 위하여 무던히 애를 썼으나 사대부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조카들을 비참하게 죽음에 이르게 하였으니, 이를 두고 두고두고 숱한 오해와 역사의 왜곡을 부채질하는 화근이 되기도 하였다. 그는 왕위에 올랐음에도 형인 소현세자의 일가가 모두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막지 못하였다. 그러나 역사는 그가 마가기 위해서 무던히 애썼음을 기록하고 있다.
왕위에 오른 효종은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에서의 8년간 볼모생활 중 그 설욕에 뜻을 두어, 즉위 후 은밀히 북벌계획을 수립, 군제의 개편, 군사훈련의 강화 등에 힘썼다. 그러나 북벌의 기회를 얻지 못하고, 청나라의 강요로 러시아 정벌에 출정하였다. 대동법(大同法)을 실시했고, 상평통보(常平通寶)를 화폐로 유통시키는 등 경제시책에 업적을 남겼다.
효종과 송시열의 북벌론은 목표는 같았지만 목적이 달랐다. 두 사람의 북벌론은 동상이몽에 불과했다. 효종은 송시열과의 정치적 제휴를 통해 사림세력의 반발을 억제하고 이들 세력들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효종은 송시열을 전면에 내세워 불안한 정국과 민심을 추스르려 했고, 송시열은 효종의 지지를 앞세워 정치적 입지를 다질 뿐이었다.
효종이 즉위한지 8년째 그의 북벌정책은 사대부의 반대로 위기에 봉착하였으며, 특히 송시열(宋時烈)이 주도하여 군비확장으로 인한 백성의 생활고를 거론하며 비난하였다. 효종은 사대부의 지지를 받지 못하게 되자 정책의 동력을 상실하게 되었었다. 이에 송시열, 송준길 등을 중용(重用)하여, 사대부의 지지기반에서 북벌정책을 추진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당시 이조판서로 실권을 장악한 송시열과 병조판서 송준길(宋浚吉)이 추진하는 북벌정책은 명분만 있고 실질적인 정책으로 추진되지 못했으며 사대부의 지지를 이끌어 내지도 못했다. 1659년 5월 4일 효종이 갑자기 급서하자 그가 추진했던 북벌정책도 소멸되었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練藜室記述)]에 따르면, 효종의 귀 밑에 종기가 심각했고 이에 침의(鍼醫) 신가귀(申可貴)가 침을 놓아 처음에는 고름을 조금 짜내었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몇 말이나 되는 엄청난 양의 피를 쏟고 그 충격으로 사망했다고 한다. 아침에 침을 맞은 효종이 사시(巳時: 오전 9시에서 11시)에 승하하였다고 하니 침을 맞자마자 운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대궐 뜰에 있던 송시열과 정태화가 비보를 듣고 뛰어 들어갔지만, 효종의 싸늘한 주검만을 응시할 뿐이었다. 모든 것이 순식간이었다. 효종은 한마디 유언도 없이 승하했다. 이런 이유에서 효종의 갑작스런 죽음은 ‘타살설’에 무게를 두게 된다. [조선왕조실록]에 따르면 효종의 종기를 터트려 죽게 만든 신가귀는 수전증이 심한 의원이었다. 그런데 종기를 터트리도록 명을 내린 사람은 효종 자신이었다. 이전에 효종이 말에서 떨어져 낙상으로 볼기에 종기를 앓았는데 신가귀가 침을 놓아 고쳤고, 이를 신뢰한 효종이 이번에도 그에게 침을 놓게 한 것이다. 그러나 수전증이 있었던 신가귀는 혈맥을 범하였다. 일설에는 신가귀가 혈맥을 잘못 범한 것이 아니라 종독(腫毒: 종기의 독)이 심하여 이것이 흉부에까지 퍼졌고 혈도(血道)가 종기에 집중되었는데, 함부로 침을 놓아 터뜨렸다고도 한다. 결국 효종을 죽게 만든 신가귀는 참형은 면하고 교형(絞刑)에 처해졌다.
그리고 송시열과 그를 따르는 사대부들은 실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북벌을 효시로 내세운 효종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한 군왕이었다. 인조에 이어 왕위에 오른 뒤부터는 좋아하던 술도 일체 끊고 심기일전, 복수설치의 의지를 다져나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효종은 서인과 남인은 물론 재야 사림의 지지를 상실하여 갔다. 이를 타개하기 위해 재야의 영수인 송시열을 중용하였지만, 왕권과 신권의 충돌은 불가피했다. 조선시대 왕위에서 쫓겨나거나 혹은 타살설이 도는 군왕의 공통점은 전제왕권을 추구했다는 점이다. 왕권과 신권의 충돌에서 신권은 항상 승전가를 불렀다.
이런 사대부들에게 있어서 충효란 과연 무엇이었단 말인가?
그들이 원하는 것은 왕의 자리가 결코 아니었다.
허수아비 같은 왕을 앉혀놓고 온갖 파행을 제들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영원한 권력만이 필요했던 것이다.
저들에게 충효란 그럴싸하고 거창하게 내세울 수 있는 최상의 명분이었을 뿐이었다.
왕권은 그 화려하게 치장된 명분위에 올려 진 허상이었을 뿐이었다.
조선은 과연 누구의 나라였던가.
군왕인가? 백성인가? 아니면.........
영화 (명량)에서 그려진 이순신은 말한다.
‘참혹한 전쟁에서 꼭 이겨야만 하는 충정은 임금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백성에 대한 충성이었노라고.’ 그러나 과연 그랬을까?
그는 (공자)와 (맹자)를 읽었다. 어쩌면 (노자)를 읽고 깊은 사색에 잠긴 적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 그가 과연 임금이 아닌 백성에 대한 충성을 생각했었을까?
적어도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백성에 대한 무한한 사랑과 안타까움이야 있었겠으나, 이순신이 가진 충성은 미우나 고우나 어쩔 수가 없어도 오로지 임금(선조)을 향한, 이미 군왕에 대한 충성을 서약한 조선의 무장이었을 뿐이다. 죽어도 그게 아니었다면 그는 임금을 갈아치울 생각을 했어야만 한다.
적어도 ‘임금이 아닌 백성에 대한 충성’을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조선왕조 오백년의 서열 일 이 삼위의 반열에 오른 ‘만고의 역적’ 쯤으로 치부된 사람정도여야만 할 것이다.
‘왕권은 명예직이요, 고른 신권의 세상’을 추구하던 정도전. 도저히 썩어 들어가서 더 이상 어찌할 수 없는 조선이라면 새로운 이상향의 율도국을 건설하자며 은근히 역성혁명의 정당성을 주창하던 허균. 모든 백성이 실제적 주권을 가지는 세상을 꿈꾸던 대동계를 주창하고 실천하던 정여립. 거기에 더한다면 동학교를 세운 최재우나 최시형 정도는 되어야 백성을 위한 충성을 되새겨 보았을 만한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다들 삼족을 지나 구족이 멸문지화를 당한 사람들이다. 그만큼 왕권에 치명타를 가한 사람들이다. 아울러 그만큼 백성을 사랑한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저들 사대부들이란 과연 무엇이란 말인가?
임금이 말하는 충효와 사대부가 말하는 충효와 백성들이 생각하는 충효는 모두가 다른 것인가?
그렇다면 정녕 충효(忠孝)란 무엇이란 말인가?
---------- 너무 길게 사려되어 2부로 나누어 곧 이어집니다.
'나의 이야기' 카테고리의 다른 글
9.000원에 영화관을 통째로 빌렸어요. (찰리 컨트리맨) (0) | 2014.08.29 |
---|---|
의 암살..... 그리고 조선.(2) (0) | 2014.08.29 |
명량. 그 위대한 전쟁.... (0) | 2014.08.05 |
영화 (군도)를 보고나서........ (0) | 2014.08.04 |
충령채취의 시기로다. 건강생각을 좀 해 볼까나. (0) | 2014.08.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