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못 아쉽기는 하지만 우리는 니스 여행을 마치고 마르세유로 향하는 기차에 올랐다.
이제 나에게는 이 기차가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 서쪽으로 달리고 또 달려서 마르세유에 도착하기 전에 한 가지 크고 힘든 미뤄놓은 숙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것이다.
사실은....... 이 순간까지 나는 챠밍여사에게 이번 여행 전부를 통털어 딱 한 가지 숨겨놓은 사실이 있었다. 내 딴엔 부득이한 선택이었다고 하겠지만...... 어쨌든 썩 옳은 처사는 아니었다는 것을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털어놓기는 기차가 도착하기 전에 털어놓아야 하겠는데...... 혹 기차에서 죽어도 못내리겠다고 우기면...... 그땐 어쩌지?
다음 여행지인 마르세유(Marseille)가 코앞에 까지 당도했는데...... 마르세유엔 '치안부재'라는 치명적 약점이 오래전부터 따라붙어 있었던 것이다. 쉽게 말해서 좀 위험한 여행지로 꼽힌다는 사실이다. 그것을 이제까지 철저하게 감추어 왔다. 이제까지 우리의 많은 여행중에서 '자나깨나 소매치기 조심'은 늘 해왔던 것이지만, 이렇게 거창할 정도로 '치안부재'를 심각하게 고심해 본 적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느 정도였느냐 하면....... 여행 꽤나 했다는 여행고수들도 이구동성으로 하나 같이 똑 같은 말을 해 왔다.
'마르세유? 거긴 가지마. 그냥 통과해.'
'프로방스에서 낭만이니 어쩌니 하려면....... 처음부터 아예 마르세유는 빼버려. 그게 여행을 망치지 않는 최선의 방법이야.'
'그나마 치안부재에서 해방되려면 방법은 하나....... 패키지로 가서 가이드의 뒤를 쫄쫄 따라다니는 거야. 위험하기 전에 데리고 나올테니까.'
'죽어도 가보고 싶다면....... 인근의 카디스 등지에 숙소를 두고 맨 몸으로 당일치기로 잽싸게 빠져나오는 거야.'
북한이나 시리아나 우크라이나 등지의 전쟁지역이나 아프리카의 내전지역을 빼고....... 세계적 관광대국인 프랑스에서...... 프랑스 제2의 도시인 마르세유를 두고 이렇게까지 심각하게 '치안부재'가 문제가 될 줄은 꿈에도 생각치 못했다.
'아무리 그렇기로...... 거기도 분명 사람이 사는곳 아닌가?'
지독한 역마살에 적지않게 마이너리티 기질로 충만된 나의 심성은 그럼에도 기어코........ 단독 자유 배낭여행으로 마르세유행을 감행하기로 결정했다. 마눌님까지 대동하고서 말이다. 더하여........ 이런 실로 난감한 상황속에서......... 하루 이틀도 아니고 닷새 동안 마르세유에 체류하는 여행을 실행에 옮기고 말았던 것이다.(미치지 않고서야 이게 무슨 똥배짱인지........)
파리.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베네치아. 피렌체. 마드리드. 나폴리. 이스탄불 등의 유명 여행지엔 '소매치기 조심' '치안부재' 등의 용어가 늘 따라 다녔다. 심심찮게 목격하는 경우가 있었기에, 더하여 우리에게도 실제로 몇 번의 시도는 있었으나 완벽한 방어로 이제껏 단 한 번도 소매치기나 분실을 경험해 보지는 못했다. 자유 여행이던 패키지 여행이던 맨 몸으로 번잡한 도심을 걷거나 밀리는 지하철을 타고 이동하며 찾아다녀야 하는 여행에서는 항상 어느정도의 위험은 감수가 불가피하고, 그것들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방어가 가능하다고 생각해왔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도 마르세유만 등장하면 다들 손사래까지 쳐가면서 '가지 마' '그냥 패스해버려' 라고 이구동성으로 외치니 한참 당혹스러울 밖에. 전문 가이드가 인솔하는 패키지 프로그램이나 자유 여행으로 몇 번 다녀온 유경험자가 앞장서는 것이 아니면 무모하다고 하는 바로 그 '마르세유 여행'이 지금 당장 코 앞인 것이다.
'마르세유와 치안부재'........ 기차가 마르세유에 도착이 임박했음을 알아차렸을 때 나는 진진한 표정으로 아내에게 사과를 포함한 당면한 문제에 대해서 진지하게 입을 열었다. 단단히 마음에 각오를 하라고.......
바쁘게 국정수행을 하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이 급하게 마르세유를 찾았다.(2021년) 그는 사흘 동안이나 이곳에 머물면서 공관장 회의와 지역 행사를 찾아다니며 '마약 근절, 빈곤 퇴치'를 역설했다. 공무에 바쁜 대통령이 한 곳에 사흘이나 머물면서 쫓아다닐 정도로 마르세유의 치안이 심각했던 것이다. 그해들어 중반기에 이미 마약조직 간의 분쟁으로 15명이 숨졌으며, 최근 두 달 사이에 12명이 숨졌던 것이다. 희생자 중엔 10대도 포함되었다. 프랑스판 범죄(마약)와의 전쟁이 선포된 것이다.
프랑스 제2의 도시이자 최대 항구인 마르세유는 파리 다음으로 많은 인구가 모여 살고 있다. 더우기 지중해를 향해 열려있는 항구이다보니 역사적으로 오래 전 부터 교역이 활성화되었고, 또 그런 이유로 특히 이민자들로 넘쳐나는 도시의 특성을 가지고 있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아르메니아 계통의 이민자들이 많이 있고, 한때 식민지였던 알제리를 포함한 북아프리카로 부터 유입된 이민자와 더불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불법 이민자들이 계속 쏟아져 들어오고 있는 형편이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럽게 마르세유에 거주하는 인구의 약 90% 정도가 해외에 뿌리를 두고 있는 이민자들인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제도권에 정착하여 생활의 안정을 찾은 인구 못지않게 빈민자 또는 불법 체류자 신분의 사람들이 마르세유라는 한정된 공간안에서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방법으로 제각각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다보니 극심한 빈부의 격차에 문화적 종교적 갈등에 인종문제까지 더해져서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문제를 양산하고 있는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제도권의 사람들은 마르세유의 질서 유지를 위해서 더 많은 세금을 내야만 하고, 비제도권의 사람들은 당장 의료와 교육을 포함한 사회 보장제도에서 밀려나고 직업과 기본적 사회 신분제도에서도 밀려난다. 그들이 택할 수 있는 직업이 제한적이고 수입도 천차만별 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들이 먹고 살기 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겠는가? 영화 <범죄와의 전쟁. 마르세유판>인 것이다.
그러다보니 마르세유에서 벌어지는 '치안부재'의 대표적 사례는 '마약거래'와 '강도행위'가 압도적으로 많다. 마르세유의 범죄율은 프랑스 평균 범죄율 보다 거진 3배 정도 넘어선다. 파리에 이어 두 번째다. 하지만 범죄의 내용과 질이 다르다. 파리의 범죄가 주로 소매치기나 단순 폭력이라면, 마르세유의 범죄는 무기를 사용하는 폭력 이거나 강도상해다. 거기에 보복살인이 잦아지고 있다. 치명성에서 하늘과 땅의 차이를 보이는 것이다.
거기에다 종종 종교적 이유로 테러가 벌어지기도 한다.
일리치 라미레즈 산체스가 지하철에서 폭탄 테러를 벌어 두 명이 사망하는가 하면, 세인트 찰스역에서 총성이 울리고 주민의 신고로 출동안 경찰이 총을 들고 뛰쳐나오는 튀니지 출신 불법 이민자를 사살했는데, 역사 안에는 이미 두 명의 여성이 살해당한 상태였다. 지하드 테러였다.
이런 등등의 이유로 마르세유 여행에서는 '소매치기 조심'의 정도를 넘어서 '무기를 동원하는 강도행위' 심지어는 '일시적 납치'를 걱정해야 하는 정도가 되었고, 자칫 마약 조직간의 총기를 이용한 싸움에 언제 휘말리게 될지도 모른다는 사실까지 염두에 두어야 하는 상황이 된것이다.
일시적 침묵이 분위기를 무겁게 내리 누르고 있다.
내 설명을 모두 듣고 난 챠밍여사가 기차 창밖으로 시선을 돌려서는 잠시 무언가 깊은 생각에 잠기는듯 자뭇 심각한 표정을 짓는다.
'사전에 모든 이야기를 했더라면 내가 죽어도 여기까지 안 따라나섰을 것이라고 이미 당신은 판단했던 것이네? 어쨌거나 당신 이야기의 결론은? 쬐끔 괴씸하다는 생각은 들지만...... 괜찮아. 그런줄 알면서도 이렇게 감행을 했다는 것은....... 어찌되었건 사전에 많이 고민을 했다는 것이고 무언가 확신과 자신이 있으니까 여기까지 끌고 온것 아니겠어? 조금 더 긴장하면서 겪어보면 알겠지 뭐. 괜찮아. 이제와서 어쩌겠어. 적어도 우리엔 아무일도 없을거라 믿고 바라면서 이제부터 직접 부딪혀 보는거지. 알았어. 그런데........ 그렇게 위험하다는 것을 알면서 닷새가 뭐니? 닷새가? 내가 진작 알았으면 파리에다가 삼일을 보태고 마르세유에서 이틀만 하자고 했을거야. 파리가 아쉬워서 죽겠다는 사람한테 시방........ 위험지구에서 장장 닷새나 머물자고? 도대체 마르세유에 뭐가 있는데? 대신에........ 나 기차에서 내리면...... 아들에게 전화부터 한 번 더할래.'
휴!!!!!
설마 아들에게 아빠가 거의 미친것 같다고 고자질을 하는것은 아니겠지?
우리 아들이 아빠를 쏙 빼닮은 것(DNA 검사 절대 불필요할 정도)을 세상이 다 아는 마당에...... 여기까지 와서 일러본들........ 아들은 아빠꽈(?)여!
'하긴, 내가 이렇게 조금 무모하기까지 한 것에는, 적지 않게 그 아들놈 책임도 있는거야. 세리할망구야. 상황이 이렇게 된 것 모두가...... 아들이 독립한 이후로 우린 거의 아무런 걱정이 없잖아? 우리가 무슨 걱정이 있어? 그러니까 이렇게 가끔 스스로 걱정꺼리를 슬쩍 만들어 보는거라구.'
아들이 아빠에게 하는 요구는 딱 한 가지...... '아빠!!! 어디를 가시면 그게 어디인지 언제쯤 오실지 정도는 알려주고 가세요. 명색이 하나뿐인 아들인데 그정도는 알고 있어야 하잖아?'가 전부다. 우리는 아주 쿨하고 또 쿨한 부자지간이다. 지덜 엄마만 잘 챙겨서 다시 집에다 원상복구 시켜 놓으면 아무것도 묻지도 따지지도 않는 그런 관계다. ㅎㅎㅎㅎㅎ.
기차가 마침내 마르세유 기차역(Gare de Marseille-Saint-Charles)에 도착했다.
파리하고는 일단 무언가 풍경이 좀 다른 느낌이다. 이 기차역이 대단히 크고 역사적으로도 유래가 있음을 잘 알고 있었지만, 지금 당장은 그것을 둘러보고 느끼고 할 여유가 없다. 짐을 챙겨서 대합실로 들어가 커다랗게 열려진 출입문을 통해 처음 대하는 마르세유 도심을 풍경을 둘러 본다. 오랜 옛날 공동묘지였던 언덕에 건설된 기차역이기에 주변 풍경이 나름 멋지기로 유명한 장소이다. 그런데 엄청이나 싸늘한 바람이 몰아친다. 다시 안으로 돌아서니 챠밍여사는 일단 지금 어디고 잠시 짐을 가지고 앉을 자리를 찾고 있다. 아들에게 전화하는게 가장 우선이라고 거듭거듭 강조한다.
아랫층으로 내려가는 계단 안쪽으로 아주 너른 휴계실이 있다. 사람들 사이로 빈자리를 찾아 자리를 잡았다. 아들에게 전화하는 동안에 대합실 매표소로 가서 닷새후에 있을 다음 여행지 몽펠리에로 이동을 위한 열차 시간을 알아보고 가능하면 미리 티켓팅을 하여야 했기에 짐보따리(캐리어)와 내 무거운 배낭을 잘 보관하면서 꼼짝하지 말라고 신신당부하고 움직이려는데....... 우리 짐 모두를 할망구가 혼자 지키기에는 무리가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뻔쩍 들었다. 여기가 어디여? 치안부재로 유명한 마르세유 아닌가벼?
혹시나 불량배가 배낭이든 캐리어든 하나를 나꿔채 간다면....... 꼼짝없이 당하고 말 것이다. 도와줄 사람이 절대(?)적으로 없을테니....... 결국 노트북과 여권이 들은 작은 배낭을 앞에 걸고 공항에서 18kg 찍었던 큰배낭을 메고(니스에서 감자랑 사과랑 와인 한 병 추가됨) 매표소에 줄은 선다. 줄을 선지 10여 분만에 번호표를 받았는데....... 헐..... 여전히 긴 줄을 선 채 사무실 밖에서 대기하다가, 호출이나 알림판에 숫자가 뜨면 그때에서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매표원과 상담을 하는 구조인데...... 앞에 늘어선 줄이 아직도 길다. 어깨가 저리고 아파오기 시작한다.
'우리 병아리들 아무일 없이 잘 놀고 있대.'
아들과 꽤나 긴 시간 통화를 하고 나타난 아내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들 효과는 언제나 확실하고 즉각 효과를 드러낸다. 병아리들(손녀들)이 잘 논다는 말은 곧 우리 집안이 모두 무탈하다는 말이다. '아들이 별반 우리걱정 안하지?' 라고 묻고 싶었지만 차마 역효과가 두려워 입밖에 내지 못한다. 더 말하지 않아도 그냥 파노라마다. 내가 딱 나를 베이스로 해서 몇 가지 엎그레이드 버젼으로 설계해서 만들어 낸 녀석이니 안 봐도 훤 하지 뭐. 잘 생기기는 했는데..... 참 멋대가리 없는 녀석!!! ㅋㅋㅋ 그런것 까지 닮냐"
'통화 했으면 오늘은 그냥 가자. 아를이나 어디를 가려면 다시 여기를 와야 하니까 그때 표를 사면 되지 뭐. 오늘은 일단 숙소부터 찾아가자.'
그렇게 우리는 마침내 마르세유에 첫 발을 내딛었던 것이다.
우선 마르세유 지하철을 찾아 이용해야 한다. 아울러 대부분의 소매치기는 사람이 많이 붐비는 역에서 벌어지고 생 찰스역은 마르세유에서 가장 많이 사람들로 늘 붐비는 지역이다. 각별히 조심을 기하면서 지하로 내려간다. 같은 이름의 생 찰스 지하철 역은 기차역의 지하에 있는것은 맞는데 기차 역사에서 직접 내려가는 길이나 방법이 없다. 많은 시간 차를 두고 별도로 건설된 탓이란다. 우리나라 같으면 어떻게든 직접 연결했을텐데 말이다. 역사의 밖으로 나가 멋진 너른 계단을 내려가 언덕길을 조금 걸어내려가야 다시 지하철 입구나 나타난다. 하여 이 언덕길 사이를 무료 셔틀(승합차)가 노약자나 무거운 짐을 든 여행자들을 하루종일 죽어라 실어 오르고 실어 내려준다. 우리는 직접 가진 짐을 메고 끌면서 지하철 역사 안으로 들어가 더 깊은 지하로 내려가는 에스컬레이터에 오른다.
마르세유의 지하철은 단 두개의 노선이 전부다.
북쪽의 같은 종점에서 출발하여 시내로 들어오다가 도심 내부 노선과 항구쪽 노선으로 갈라진다. 그리고는 도심을 지나면서 다시 합쳐져서 반대편 다른 종점까지 함께 간다. 한 개의 노선이 도심 중심부에서 잠시 나뉘어졌다가 다시 합치는 구조다. 그런데 우리 숙소는 노선이 갈라진 부분의 라티몬(La Timone) 근처에 있다. 세인트 찰스 역에서 15분~20분 거리의 비교적 가까운 거리라 하겠다.
지하철 자동발매기 이용이나 노선도나 시내버스 이용은 나 보다도 오히려 챠밍여사가 이제는 한 수 위다. 그래서 그냥 맡기는 편이고, 어찌되었건 우리의 목적지 라티몬 역까지는 아주 쉽고도 편하게 도착했다. 마르세유의 지하철을 감히 우리나라 지하철 수준에 비교할 수는 없겠지만서도....... 파리의 지하철에 비교한다면 모든 면에서 한 열배는 좋다고 해야겠다.
지하철에서 나와 주변을 두리번 거리다가 가장 먼저 '찾았다' '확보했다' 라며 반갑게 찜을 하는것은 길 건너편에 대형마트가 좀 떨어져 두 개나 있는 것이 아닌가? '여행도 일단 배가 든든해야 하는것이여..... ㅎㅎㅎ'
마르세유에 도착해서 우리가 가장 먼저....... 혹은 가장 많이 걱정하는 것은 당초의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엉뚱하게도...... 치안부재가 아니었다는 놀라운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치안부재는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는 어떤 당장은 보이지 않는 형이상학적인 걱정이라면........ 당장 눈 앞에 현실로 맞딱뜨린 새로운 공포는 바로......개똥이었다.
더럽다. 대단히 지저분하다. 차라리 '치안부재' 때문이 아니라 '더럽고 지저분한 도시분위기' 때문에 마르세유를 그냥 패스 하라고 말했을 것이다.
도심의 핵심 중앙부와 교회와 관공서와 공공시설 인근은 그나마 깨끗한 편이지만, 그런 장소도 담배꽁초의 폐해에서는 결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 상황에 도시의 핵심적 중심부와 유명한 여행지를 벗어나 마르세유 도심의 중심만 벗어나면 대로변에도 개똥과 담배꽁초가 여기저기 널려있다. 그 대로변에서 한 블럭만 안쪽으로 골목에 들어서면 한 눈에 바라보아서 개똥이나 담배꽁초가 없는 공간을 찾아보기가 결코 쉽지 않을 정도다. 지내면서 보면 그곳에도 분명 새벽 청소와 도로정비가 이루어 진다. 하지만 매일 전지역을 고루고루 커버하는 것은 아닌것으로 보여진다. 그 뿐만이 아니라 골목길 사방으로 어떤 놈들이 무수히 소변을 갈겨대서(?) 찌린내가 한겨울임에도 나고, 가끔은 큰 볼일도 밤새 있었던 흔적이 남아있다. 대한민국에서는 볼 수 없거나 가히 상상조차 할 수 없는 풍경이 지극히 평범한 일처럼 사방에서 자행되고 있다. 이것은 우리가 머물고 있는 지역에만 국한된 일이 결코 아니었다. 우리가 워낙 도심을 걸어서 여행하기를 평소 좋아하는 편이라 여기 마르세유에서도 그랬지만....... 하루 지나서는...... 유명 여행지를 벗어난 큰 길의 안쪽인 뒷골목 투어는 포기하기로 했다. 치안부재 때문이 아니라 개똥 무덤과 찌린내에서 벗어나고 싶어서 였다.
정말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 마르세유의 도심을 벗어난 뒷골목에는 버젓이 현존하고 있었다. 오스만 백작에 의한 파리 재개발이 이루어지기 전의 화장실이 없거나 지극히 부족했던 시대의 프랑스 파리 모습이 아마도 저런 모습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캐리어를 끌고 여행하는 사람에게 마르세유 뒷골목은 그야말로 아비규환 지옥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아무리 요리조리 조심하고 피해서 길을 가고 싶어도....... 아주 수시로 번쩍 들어서 옮겨야만 하는 상황이 거듭거듭 다시 반복되기 때문이다. 설사 짐이 없어도 주변 풍경이나 하늘을 올려다 보기가 두려워 진다. 발 밑에 사방으로 지뢰가 매설되어 있는 개똥과의 전쟁터가 바로 마르세유 뒷골목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마저도 하루쯤 지나면........ 어느 정도는 눈 감아주게 되고, 어느 정도의 냄새는 무감각해지고, 피해다니는 법과, 사전에 돌아가는 방법등을 자신도 모르게 체득하게 된다. 인간의 놀라운 적응력에 새삼........ 충격을 넘어 진한 감동을 받게된다. 거기도 사람사는 곳이니까 말이다.
말하자면 모든것이 그렇게 썩 내키지 않을 정도로 좋지않은 여행 환경이었지만 막상 예약해 둔 숙소에 도착하니 그나마 마음이 조금 풀어졌다. 그동안의 제법 오랜 나의 여행 이력에서 가장 인상적인 숙소라면 시칠리아 팔레르모 첫 여행에서 묵었던 파비아의 3층 호스텔이었다고 생각한다. 숙소 컨디션이나 주변 경관이나 완전히 내 스타일에 어울리는 맞춤형 숙소였다. 그런데 여기 마르세유의 호스텔 또한 거기에 못지 않을 정도로 잘 꾸며졌고 넉넉하면서도 쾌적한 공간을 제공해 주고 있었다. 호스텔 운영자의 마음을 어느정도는 읽을 수 있을 정도로 썩 괜찮았다. 다만 한 가지 흠이라면, 여기는 대로변에서 두 블럭 정도 안쪽으로 들어선 골목 안쪽의 1층 숙소였는지라 창문을 통해 내다볼 수 있는 주변 경관이 정말로 아무것도 없었다. 조금은 아랍풍의 좁은 골목 안쪽에 갖혀있는 느낌이 솔직한 심정이다. 하지만 양쪽으로 마주보고 통해있는 아주 커다란 창문이 그마나 갇힌 느낌을 덜어내 준다. 채광과 환기는 걱정이 없겠다. 거기다 외부 안정망은 겨의 요새 수준으로 튼튼하다. 외부 출입문 또한 3중으로 되어 있다. 첫번 째 열쇠로 외부 두꺼운 철대문을 열고 들어서면, 다시 실내 현관문이 다른 작은 열쇠로 열어야 들어올 수 있다. 계단 모퉁이를 돌아서면 아주 작고 협소한 엘레베이터 옆 첫번 째 문이 우리의 숙소다. 숙소 열쇠는 우리 할머니 세대에서나 썼음직한 인상적이고 커다란 쇳대처럼 생겼다. 외벽 내벽이 아주 튼튼하고 두터운만큼 안전을 넘어 방음 효과도 아주 만점인 작은 요새처럼 생겼다. 시설은 완전 현대식으로 주방쪽은 약간 스탠드 바 분위기가 풍긴다. 실내 전체가 타일 바닥이라 우리 같은 온돌문화권 사람에게는 아주 조금은 썰렁한듯 냉랭한 분위기지만...... 방바닥에 앉을 때 무언가 두툼하게 깔고 앉아야 한다는 점 외에는 아무런 불편함을 느끼지 못하겠다. 여행을 마치고 돌아가면 차라리 우리집도 조금 이런 방식으로 개조를 했으면 싶을 정도로 나름 인상적이고 마음에 드는 숙소였다. 주방이 아주아주 실용적으로 잘 꾸며져 있다. 챠밍여사는 너른 풀장이 세 개나 딸려있고 계단만 내려가면 바다이고 하루종일 서비스가 가능한 레스토랑이 딸려있던 무이네의 방갈로 형태 리조트가 가장 좋았고, 그 다음이 바로 여기라고 말한다.
여행에서 숙소는 다른 어떤것 보다도 중요하다고 말할 수 있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 전제를 깔고 시작한 여행에서 가장 기본적으로 숙소가 쾌적하고 편안해야만 제대로 쉴 수가 있고, 다음 스케줄을 진행해 나갈 수 있는 것이다. SNS에 흔히 올라오듯....... 버그(벌레)가 침상에서 나오고 주변에 온통 해충 투성이거나, 전기가 자주 차단되거나 물이 제대로 나오지 않거나 녹슨 물이 나온다면 그건 정말로 최악이다. 거기에 더하여 에어컨이나 난방시스템의 중요성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을 정도로 중요하다. 대로변에서 아주 멀리 떨어져도 불편하고, 시장통처럼 시끄러운것도 최악의 조건에 해당된다. 관계자의 불친절과 소통부재도 커다란 문제점을 낳고는 한다.
그럼 이런 문제들에서 자유로워지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답은 돈을 많이 쓰던가 아니면 발품을 파는 등의 노력을 열심히 하는 방법밖에 없다. 무조건....... '절대로 사진빨에 속지는 말자', 장사꾼의 말이나 광고에 현혹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이다. 믿을 수 있는 정보나, 아니면 내가 직접 확인해 보는 것이 가장 좋다.
대부분의 자유여행자들이 숙소를 고르는데 가장 주안점을 두는 것은 바로 유명 여행지로의 접근이 수월한가 하는 전제를 가장 먼저 생각하는 것으로 보인다. 누구나가 그런 생각을 가장 먼저 한다는 것은 곧......... 가장 큰 함정이 되고, 장사꾼들은 바로 그런점을 가장 먼저 노린다는 사실이다.
숙소의 광고 내용에서....... 에펠탑 걸어서 5분 거리. 베르사이유 박물관 걸어서 15분 등등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아니면 쇼핑가나 유명한 카페와의 거리를 내세우기도 한다. 여행 명소와 쇼핑가와 유명한 카페와 레스토랑이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거리라고 하면...... 그야말로 최상이라고 깜빡 속아넘어가 버리기 일쑤다.
여행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고 편리하게 이용하려면....... 여행비를 넉넉하게 챙겨가면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 택시는 어디나 널려 있으니까.
유럽의 파리. 런던. 로마. 바르셀로나. 베네치아 등의 이름난 여행지인 경우 아주 유명한 명소에 인접해 있는 대형 호텔은 그야말로 세계적인 체인 호텔이거나 별이 4개 5개 되는 곳들이다. 하룻밤 숙박비로 1백 만원에서 수백 만원을 넘어 천 만원을 넘는 곳들도 수두룩 하다. 그렇지 않고 배고픈 자유여행자가 고를 수 있는 호텔들은......... 사진빨은 아주 그럴싸 하지만...... 대부분 아주 낡고 시설이 떨어지고 협소하며, 심지어는 엘레베이터가 없거나 겨우 두 사람이 가슴을 맞대고 이용할 정도로 열악하다. 왜냐? 오랜 역사를 가진 유명 명소 지역은 거의 대부분 개발이 아주 오래전부터 완전 제한된 중세 이후의 낡은 건물들이 거의 대부분이다. 그 옛날에는 모두 그러려니 하면서 그렇게 살았다. 가구도 필요한 것만 있었고 특별히 싱크대나 세탁기 같은 주방공간이 지금처럼 갖춰지지도 않았고 화장실도 여행자가 아닌 가족들끼리 대충 사용하며 살았다고 생각해 보자. 세상이 변해 그런 아주 기초적인 시설을 설치는 해야겠는데 개발은 제한되어있고 확장은 절대 불가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그냥 대충 꾸겨 넣은 것이다. 여행자의 편의를 위해 좋은 시설을 갖춘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억지로 끼워 넣은 것이라 보면 된다. 건물의 외부는 역사가 느껴질 정도로 빈티지스럽고 낭만이 줄줄 흘러내리는지 모르겠지만........ 같은 비용으로 우리 생활수준보다 못한 동남아의 풀장이 딸린 리조트나 호텔을 기대하는 우려는 절대 범하지 말기 바란다. 실제로 사진빨에 속아서 게약하고 입금을 하고 찾아갔는데...... 도저히...... 도저히 머물 자신이 없어서 발길을 되돌려 번듯한 호텔을 찾아가 거금을 강탈당하다시피 하는 여행자들이 제법 많은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런 상황에서도 환불은 어림없는게 냉혹한 현실이다. 나 역시도 몇 번은 어쩔 수 없이 그 고행을 감수했던 속쓰린 경험을 가지고 있다.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여행자나, 낮선 도시를 처음 방문하는 어설픈 여행자들이 심심찮게 맞딱뜨리는 엄연한 현실이다.
지금의 우리처럼....... 어느 정도 여행의 이력이 쌓이면 굳이 여행의 목적지에서 가까워야 할 필요가 줄어든다. 언제 어디서든 대중교통 이용에 자신이 생겨나면서 부터 생겨난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 역까지의 접근만 쉽다면......... 유명 여행지에서 버스나 지하철로 30~40분 떨어진 외곽지역이라 해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하게 된다. 걸어서 20 분만에 도착을 하나, 대중 교통으로 40 분만에 도착을 하나, 가만히 따지고 보면 그것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는다. 하루에 몇 번씩 반복해서 여행 목적지와 숙소를 오갈 필요는 없기 때문이다. 아침에 나가서 하루 여행을 마치고 저녁에 들어오거나, 가끔은 두 가지 스케줄로 중간에 한 번 들렸다 다시 나가서 야경을 보고서야 들어오는 경우도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대신....... 비슷한 비용을 들여서 시내 중심가에서는 여관을 얻을 수 있겠지만, 변두리로 나가면 3성급 이상의 호텔이나 전망과 시설이 좋은 빌라 내지는 현지인들 주거지역에 너른 아파트를 빌릴 수 있는 장점이 생기기 때문이다. 하여 우리 경우는 유명 관광지로의 접근성 보다는, 거리가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다해도 숙소 컨디션과 대중교통 이용만 원활하다면 대부분 후자를 선택한다.
여기 마르세유 숙소의 경우도 나름 고심끝에 후자로 선택한 호스텔이었다. 대부분의 경우 호스텔이나 아파트를 선택하는 이유는 주방이 갖춰져 있어서 음식 재료를 사다가 직접 만들어서 먹는 방식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다. 우리는 그런 방식에 아주 익숙해져 있고 편하게 생각한다.
그런데 유럽이나 해외 유명 여행지 어디를 가든지........ 지금 여기 마르세유 처럼 제법 외곽으로 떨어진 곳에 숙소를 마련했고, 당장 내일부터 시내버스와 지하철을 이용해야 하겠지만......... 한 가지 팁을 나눈다면........ 해외에서 거리에 대한 예측을 서울을 기본으로 깔고 계산하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다. 대한민국의 서울은 전 세계에서도 탑에 꼽힐만큼 면적이 넓은 도시다. 지하철 노선만 해도 다 헤일 수 없을 정도로 많지 않은가? 유럽의 어느나라 수도나 유명 도시를 가져다가 서울에 비교하자면, 용산구나 영등포구 같은 일개 구와 비교해도 그렇게 큰 무리는 아닐 듯 싶다. 도저히 비교가 안된다. 예를 들어 마포에서 성동구를 간다고 치면....... 파리도 그렇고, 마르세유 에서는 아마도 마르세유 도시를 벗어나 인근 도시 카디스를 가는것이 오히려 더 가깝다는 생각이 들 정도이다. 고속도로 까지 타고 가는데 말이다. 그만큼 서울의 크기로 비교하면 절대 안된다.
마르세유의 숙소가 어느 정도 외곽에 떨어졌다는 것을 알고 계약을 했다.
다음날 부터 지하철과 시내버스를 타고 이동을 했다. 그 다음날은 카디스에 가는 날, 지도상으로 카디스행 버스 정류장이 그리 멀어보이지 않아서 한 번 걸어가 보기로 했다. 그래서 아침부터 열심히 걸었다. 그리고 마침내 정류장에 도착했다. 주변을 둘러 보는데 반대편 훤하게 뚫린 길의 저만치 낯익은 풍경이 나타났다. 마르세유 여행의 핵심이자 중심인 구항구(Old Port)가 보였던 것이다.
'에게게게....... 아주 먼 줄 알았더니 우리 카페가 바로 저기야?'
챠밍여사가 속았다는 표정을 짓는데...... 우리가 마르세유에 체류하는 동안 거의 하루에 두 번 이상 매일 꼭 찾아갔던 노천 카페가 바로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다음날 실제로 직접 걸어서 가보았다.
이스탄불. 로마. 피렌체. 베네치아. 파리. 마드리드. 바르셀로나. 그리고 여기 마르세유까지...... 그런 도시들을 우리는 거의 걸어서 다 둘러보며 여행을 했다. 그것은 결코 미련하게 불편을 감수하는 것만은 아니다. 도시의 골목골목을 걷는 즐거움에 빠져 본 사람만이 알 수 있는 여행의 매력이라는 것이 있다. 직선 도로가 아닌 꼬불꼬불 골목길을 직접 걸어서 돌아다녔다는 것은 더 먼길을 걸었다는 뜻이 된다. 파리에서 파업으로 대중교통이 완전 스톱되던 날...... 우리의 계측기는 삼만 이천 보를 훨씬 넘어서고 있었다. 우리의 여행 대부분은 하루 이만 보가 거의 기본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마르세유에서 맞이하는 첫 아침을 우리는 언제나처럼 부산을 떠는 것으로 시작한다.
열흘 가까운 강행군으로 여독에 누적되었음에다 연일 뼛속까지 파고드는 미스트랄(계절풍)의 횡포로 컨디션이 엉망인데다가 이제는 아예 약간의 감기와 몸살 기운을 안고사는 정도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습관처럼 내가 새벽 산책을 나서려 하자, 가만히 누워있으면 컨디션만 더 다운될것 같다면서 뜨거운 커피부터 마시고 난뒤 아예 함께 하루 외출을 시작하자고 마눌께서 요청하신다.
그러자고 했다. 작은 배낭을 챙겨 아예 본격적인 마르세유 여행을 시작하기로 한다. 뭐 별거 없다. 마르세유 지도를 펼쳐놓고 어쨌든 여기에 오면 들려봐야겠다고 생각해 두었던 장소들을 붉은 싸인펜으로 여러 번 휘갈려 동그라미를 친다. 그리곤 우리에게 알맞는 동선을 생각해보면서 순서도 써넣고 이런저런 낙서를 한다. 동시에 여행안내소에서 얻어온 지하철 노선도를 펼쳐놓고 지도에 표시한 동선을 따라가며 거기에 맞는 지하철역도 빨간 표시를 해 둔다. 지하철 연결이 안되는 구간은 걷거나 현지에서 직접 버스 노선을 알아 보면 된다. 군대에서 30개월 동안 지도(2500:1)만 보며 살았던 덕분(FDC 계산병)에 극한의 오지나 사막만 아니라면 세상 어디에 데려다 놓아도, 지도만 한 장있으면 상황 파악이랑 생존에는 자신이 있는 사람인지라...... 어제 마르세유에 도착한 직후 생 찰리 기차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라 티몬역에 도착하는 순간에 이미, 지금처럼 지도만 한 장 펼쳐놓으면 마르세유의 모든것이 속속들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에 실체를 서서히 드러낸다.
지도 한 장 펼쳐들고 한 두 곳의 기점만 확인하게되면 그 도시의 모든 실체를 삽시간에 거의 통째로 파악해 낼 수 있는 별로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이 재주가 단독 자유여행자에게는 얼마나 유익한 것인지는 아는 사람만 알수 있다. 거기에서 부터 독립적인 생존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거기에 더하여 태생적으로 겁대가리라는 것을 아예 상실한 채 세상에 나왔고, 호기심 많고, 아무것이나 잘 먹고, 아무데서나 잘 자고, 유년 시절부터 세계사와 미술사에 지나칠 정도로 관심이 많았던 좀 유별난 나의 성장 이력이 훗날 이렇게 자유 배낭여행에 아주 유익하게 쓰일 것이라고는 사실 나 자신도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다.
작은 배낭에 생수랑 뜨거운 커피가 담긴 보온병을 넣고, 머플러랑 바람막이랑 사과나 오렌지 두 개 담으면 당일 여행준비 끝. 카메라와 핸디폰만 챙기면 언제든 즉시 현장투입을 위한 만반의 태세가 모두 갖추어 진 것이다.
라 티몬 지하철역을 거대한 건축물로 병풍처럼 에워싸고 있는....... 어제는 그냥 지나쳐 버리고 말았지만....... 마르세유 종합대학과 부속 종합병원이 눈에들어 온다. 마르세유의 자랑거리 중 하나다. 우리나라로 치자면 서울대학교와 부속 병원이나 연세대학교와 세브란스 병원 쯤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그런데 좀 특이한 것은 대학과 병원의 출입문이 이중 삼중으로 아주 철저하게 완전 통제되는 시설들로 가득하다. 내가 태어나 돌아다니면서 동남아 일부 국가에서 교회를 걸어 잠구는 것은 보았어도, 대학과 병원을 무슨 교도소처럼 잠궈놓은 것은 처음 목격했다. 학교나 병원으로 들어가는 차량은 바리케이트 앞에 무조건 정지를 하고 정복 차림의 관계자가 나와서 일일이 신분 확인을 하고 트렁크를 열어보이고 나서야 안으로 진입을 할 수 있을 정도다. 앰블런스가 도착했을 때에도 정복차림 관계자 셋이 나오더니 운전자 확인하고 동승자 확인을 한 후에야 바리케이트가 올라갔다. 대학생의 등교 장면도 목격했는데, 출입문 옆의 벽에 달린 IC카드 단말기에 학생증 같은 신원확인을 하고 나서 아주 좁게 만들어진 여러개의 핀으로 구성된 회전문을 통과해 겨우 안으로 들어간다. 바로 안쪽에서 기다리던 경비원이 가방을 여는 등 소지품 확인이 끝나야 비로소 교정으로 들어갈 수가 있다. 출근 시간이 되면 길게 줄을 서서 아주 불편해 보이는데, 이미 모두가 익숙해진듯 아무도 불평없이 길게 줄을 서서 기다리고 있었다. 참으로 신기했다.
왜 그런 불편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일까? 그것은 그만큼 여기 도시 마르세유가 테러의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는 반증인 것이다.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젊은 엘리트들이 가장 많이 모여있는 대학과 병원은 테러범들이 선택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목표물 중에 하나인 것이다. 가히 그 파장과 여파는 어느 특정인을 암살하거나 관공서 하나를 완전히 폭파하는 것보다 어쩌면 훨씬 상상 이상의 효과를 드러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사태를 사전에 조금이나마 방지하는 방법은 저렇게라도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꾸준히 자신들의 생활을 영위해 나가는 것이리라.
라 티몬 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타고 구항구(Vieux-Port de Marseille) 역에서 내린다. 이탈리아나 스페인에서는 언어가 그래도 어느 정도 영어랑 비스무리 한 면이 있어서 대충 때려잡을 수도 종종 있는데, 프랑스어는 전혀 다르다. 대충 때려잡기가 통하지 않는다. 벡스 포트 드 마르셀레는 무슨 얼어죽을...... 우리가 이해하기에는 차라리 그냥 올드 포트(Old Port) 라고 하는게 훨씬 정감있게 들린다.
마르세유 올드 포트에는 아주 오래전부터 전해 내려온 명물이 하나 있다.
수산 시장이라고까지 하기에는 좀 그렇고...... 간이 해산물 판매장터라 해야할까? 매일 장이 서니 상설시장이라고 해야하긴 하는데...... 그렇다고 뭐 거창하게 매일 크게 들어서는 상설시장도 결코 아니다. 하지만 한 세기 이전의 오랜 세월 동안에 이곳에는 정말로 거대한 수산시장이 들어서 있었다고 한다. 현대에 들어서서 수산업이 줄어들고 올드 포트가 어선이나 무역선이 드나들던 항구에서 쇠퇴하여 요트들이나 정박하는 마리나 역활로 전환되면서 차차 수산시장이 축소되고 사라졌다고 한다.
여행자들이 접할 수 있는 여행정보에 마르세유 올드 포트의 해산물 시장은 시칠리아 카타니아의 해산물 새벽 시장에 버금갈 정도로 명물로 유명세를 타고 있다. 하지만 속내용은 전혀 다르다. 카타니아 시장은 진짜 상설 수산물 시장이라 하겠지만........ 마르세유 시장은 솔직히 표현하자면 '올드 포트에 펼쳐지는 해산물 노점상' 이라고 해야 맞다고 나는 생각한다. 단박에 한 눈에 딱 보아서도...... 카타니아 시장의 상인들은 정당하게 시나 국가에 정상적으로 세금을 납부하는 상인들이다. 하지만 마르세유 해산물 시장 상인들은 무허가 노점상들로 세금을 전혀 내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사설시장이라고는 하나....... 마르세유 수산시장의 시작은 밤새 지중해로 조업을 나갔던 소형 어선이 작업을 마치고 새벽에 돌아와 기다리고 있던 가족들과 함께 올드 포트 어귀에 좌판대를 놓고 방금 밤새 잡아 온 어류며 해초며 조개류를 내어놓는데서 시작한다. 가장 먼저 돌아 온 어부가 물건을 내놓으면 시장이 열리는 것이다. 이어서 밤새 조업을 나갔던 어선들이 하나 둘 돌아오면서 좌판의 수가 늘어난다. 풍랑으로 조업을 나가지 못하면 당연하게 다음날 해산물 좌판은 열리지 않는 것이다. 늦게 돌아오는 어선은 해가 중천에 떠서야 좌판을 열기도 한다. 주로 어부의 아내들이 좌판대의 주인이다. 인근에 사는 현지인과 레스토랑 카페의 주인들이 여기 이 아침 시장을 이용해 그날 장사에 쓸 해산물을 주로 구매를 한다. 그런데 조금만 속을 들여다 보면 각자 조업해 온 수산물의 양이 지극히 적다는것을 눈치 챌 수 있다. 좌판대 마다 올려진 해산물의 내용이 다 다르고, 그 수량도 천차만별이다. 하나의 공통점이라면 잡아서 올려놓은 수량이 지극히 적다는 것이다. 그러니 해산물의 가격은 당연히 비쌀 수 밖에....... 유럽의 수산시장을 돌아보면서......... 우리나라 어부들이 늘 입에 달고 사는 '만선' 이라는 용어에 대한 해석을 의심케 하기에 충분하다. 나는 유럽의 어부들에게 '당신들에게도 만선이라는 것이 있소? 당신들이 생각하는 만선은 도대체 어떤 것이요' 라고 묻고싶을 정도이다. 대충...... 그냥 아주 대충........ 대충 어림 잡아서 내가 목격했던 그날의 마르세유 수산 노점상들이 내놓고 판매한 해산물 전체를 다 모은다 해도....... 우리나라 동네 어선 한 척이 만선이라며 돌아오는 조업량에 못 미칠것이라는 생각을 나는 했다.
고기가 없는 것일까? 아니면 자원고갈 방지 차원에서 크기며 시기며 조업허가 조건이 까다로운 것일까? 아니면 대충 그정도만 잡으면 그럭저럭 먹고 살기에는 크게 지장이 없어서 적당히만 작업을 하는게 이유일까? 잘 모르겠음을 넘어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유럽문화의 수도가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라는 사실을 널리 알리기위한 문화행사의 일환으로 행사 주최측은(2013년) 공공기념물을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영국의 건축가 노먼 포스터(Norman Foster)와 그의 컴페니가 제작한 '마르세유 항구의 우산(Ombrière_du_Vieux-Port_de_Marseille Liens_externes)' 이라는 대형 캐노피(canopy) 조형물 이었다.
지상에서부터 10m 높이의 공간에 가로 세로 22m x 48m의 초대형 그늘막(캐노피)를 마이크로 블라스트 스네인리스 스틸패널로 만들고, 그 위에 거울광택 스텐레스를 덧씌워 8개의 스텔리스 스틸 기둥이 떠받치고 있는 형상이다. 처음 이 조형물이 등장했을 때의 풍경은 고거 에펠탑이 파리에 처음 등장했을 때 만큼 찬성과 환호와 조롱과 야유가 뒤섞여 오랜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이 조형물에 대한 현지인들의 찬사가 뒤따르기 시작했다. 대단히 무더운 마르세유 여름날씨에 이 초대형 캐노피가 제공하는 그늘은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는 생활밀착형 공공시설물로 인식이 바뀌어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더구나 바로 코 앞에 수많은 여행자가 이프 섬으로 가기위해 표를 구입하고 배를 타는 선착장이 있다. 한여름의 여행자들에게나 인근의 섬을 드나드는 현지 생활자들에게 이 거대한 그늘이 주는 헤택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겨울을 제외한 대부문의 피키지 여행자들 집합 약속 장소로 여기보다 더 나은곳은 어디에도 없을 정도가 되었다. 마르세유에서는 '올드 포트의 그늘' 그러면 모든것이 통한다. 그냥 시간에 맞춰 거기로 가면 모든 약속이 그늘 아래서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마르세유 재개발 사업으로 해양박물관을 비롯해 놀랍도록 혁신적이고 아름다운 빼어난 건축물과 조형물들이 속속 등장하고 있지만....... 지금 마르세유의 진정한 랜드마크는 '올드 포트의 그늘' 혹은 '마르세유의 우산'으로 불리는 바로 여기 이 거울 캐노피다. 실제로 가서 만나보면 대단히 독특하고 나름 여러가지로 매력이 있으며 주변 풍경들과 어울려 무척이나 멋드러진 조형물임이 분명한데........ 이게 참 카메라에 잘 담기지가 않는다. 내가 기술이 부족해서임이 분명하겠지만...... 많이 아쉽다.
누군가가 그랬다. 마누라 말만 잘 들으면 없던 떡도 저절로 생긴다고........
'세리할머니야. 어디서 커피 한 잔 마셨으면 싶은데 당신은 어때?'
'나도 그생각 하고 있었어. 새벽 바람이 여전히 쌀쌀하네. 아침 햇쌀이 이제야 저기 포구 끝에있는 성채까지 겨우 내려왔잖아. 이번 커피마실 장소는 내가 찾아 볼 것이여. 프.렌.치.스.타.일. 그러니까 조금만 더 참고 기다려 봐. 내가 제대로 된 카페를 찾을 것이니까.'
명심!!!!!
입 꾹 닫고 쫄래쫄래 마눌님의 뒤만 쫓아간다. 그런데 이 마눌님께서 올드 포트의 이곳저곳을 모두 둘러보고 심지어 뒷쪽의 카페 골목까지 모두 돌아보았음에도 아직 결정을 못하고 있다. 하긴 뒷쪽의 레스토랑이나 카페은 아직 문을 연곳이 거의 없었기는 했다. '이거 이디까지 가려 하는거지?'
그렇게 실컷 온동네는 들쑤실만큼 모조리 들쑤셔놓고는 엉뚱하게 다시 올드 포트로 원위치 하는 것이 아닌가? 헐!!!!! 또 헐!!!!!
걱정스런 시선으로 조금 뒤쳐져서 마눌님 표정만 살피는데....... 느닷없이 손을 쭉 뻗어 항구 저쪽을 가리키면서 '저기야 저기.' 라고 외친다.
시선을 돌려보니 다른건 몰라도 딱 한가지 사실만은 단박에 알아챌 수가 있었다.
바다를 바라보고 포구 우측 모서리에 멋진 건물들이 늘어서 있는데....... 1층 대로변은 길게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선 거리다. 그런데 그 중에 마르세유 올드 포트 중에서 가장 먼저 눈이부실 정도의 햇쌀이 가장 먼저 내려앉고 있는 모서리에 이미 장사를 시작한 노천 카페가 보였다.
(따스한 햇쌀)과 (무조건 오픈 노천카페)가 챠밍여사의 선택 기준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두 개의 카페가 나란히 붙어 있다는데 있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심각한 문제라고....... 카페 앞에 가서는 이래저래 살피기도 하고 왔다갔다 하면서 고심에 고심을 거듭한다. 이역만리 타국에서 이 무슨 웃기는 씨츄에이션인가? 커피 한 잔 마시려는 카페를 두고 저렇게 고심을 아내가 할 것이라고는 꿈에도 생각해 보지 못했다.
'파리에서 노틀담 성당 앞의 카페가 정말 좋았거든........ 그때는 실내였잖아? 만약 노틀담 카페서 밖의 테이블에 앉았다고 생각하면....... 어느 카페가 더 비슷해 보여?'
눈을 한 번 슬쩍 마주치고 나서 동시에 의견을 표시하는데.......... 으싸!!!!!! 둘 다 우측 모서리의 카페 '라 사마리테인(La Sanaritaine)'을 골랐다. 아무런 이유도 없었다. 그냥 우리의 느낌이 왠지 거기가 더 좋을것 같다는 그저 막연하게 들었을 뿐이다. 방금 문을 열었음인지 손님이 몇 명 없었다. 대부분의 외부 테이블이 그냥 비어 있었다. 이럴땐 굳이 매니저나 웨이터를 기다릴 필요가없겠다 싶어 무조건 햇쌀이 따스하게 내리는 자리에 앉았다. 이건 썩 잘한 일이었다. 카페 안쪽에 직원들이 청소를 하고 유리잔을 닦고 왔다갔다 부산한데 정작 눈이 마주쳐도 10분이 훨씬 지났는데도 주문을 받으로 오지를 않는다. 우리 옆으로 현지인으로 보이는 연세 지긋한 어른들이 들어와 앉았을데도 요지부동..... 주문조차 받지 않는다. 그런데 늘 그래왔는지 그냥 앉아서 자기들 끼리 담소를 나누고 있을 뿐이다. 심지어 노인 한 분이 안쪽으로 들어가 관리자와 이야기까지 나누고(단골이 틀림없음) 화장실을 다녀왔음에도 여전히 주문 받으러 오는 사람이 없다. 장사 안하나? 이거 뭐하자는 거여?
이십분 쯤 지나서 카페 안이 어느정도 정리가 끝나고서야 웨이터가 나타났다. 턱수염이 멋진 호리호리한 전형적인 멋쟁이 프랑스 중년 남자다. 청바지에 앙증맞은 까만 앞치마를 장식처럼 두르고 있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것은....... 들어왔던 손님 순서대로 주문을 받으로 다닌다는 사실이었다. 동네 노인들 주문은 당연하게 우리 다음 순서였다. 거~~~~~ 참!!!!
거의 모든 손님이 에스페레소를 주문한다. 우리만 아메리칸 커피 스타일의 카페 알랑제를 부탁했다. 그러자 조금 큰 잔에 담긴 에스페레소에 별도 유리컵에 뜨거운 물을 가져다 준다. 그런데 이사람들 언제나 늘 거의 무표정이다. 주문에 꼭 필요한 대화만 겨우 나눈다. 아는 사람이거나 별도의 요청에만 짧게 부연 설명을 해 줄 뿐이다. 서비스 업종이니 손님 기분 좋게 환한 표정을 지어야 하느니, 친절하게 먼저 말을 걸어야 하느니 하는 이야기는 여기서는 통하지 않는다. 이게 장사의 기본을 무시하는 것인지 장사 망할려고 하는 것인지....... 우리 상식으로는 도무지 모르겠다.
그건 일단 그렇다 치고..........
따사롭고 포근한 느낌에 나른해 진다. 니스 못지않게 낮은 기온에 바닷바람이 거세고 추운 날씨지만...... 지금 여기 이렇게 햇쌀이 듬뿍 내려앉고 높은 건물이 완벽하게 바람을 막아주는 기가막힌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노라니...... 세상 모든것이 아름답고 안락해 보이기만 한다. 세상에나.......
'우리 이거 커피 한 잔씩 더 팔아줘야 하는것 아니야? 도대체 시간이 얼마나 지나간거야?'
그런 걱정이 생겨날 만큼 그날 우리는 거의 오전 시간 전부를 카페 라 사마리테인에 앉아서 멍때리기의 진수를 누리고 있었다.
(프랑스인들의 무한한 카페사랑)을 이제는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을것 같다. 이날 처음으로 제대로 맛을 보았다고 해야겠다.
(프랑스 카페문화)에 대해서는 몽펠리에 여행 쯤에서 꼭 한 번 다시 거론할 기회를 갖도록 하겠다. 왜냐하면........ 우리는 다음 여행지 몽펠리에에서 더 다앙한 프랑스식 카페문화를 접하게 되기 때문이다. 사실은 글을 쓰고 있는 이 순간에도 인상적이었던 프랑스의 카페들이 많이 그립다.
'라 사마리테인(La Sanaritaine)'은 신약성서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 '사마리아 여인'을 뜻한다.
파니에 지구(Le Panier)는 마르세유 올드 포트의 서쪽 언덕에 세어진 역사지구라 부른다.
역사지구라는 제법 그러싸한 지명처럼 느껴지지만, 살짝 속내를 들여다보면 '가장 낙후된' '시급한 재개발 지구'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도시행정 계획상의 골치아픈 동네라는 속내를 담고있다. 시설낙후, 우범지대 등등의 꼬리표가 따라 붙는 동네이다. 우리나라를 포함에 거의 세계 모든 곳곳에 이런 달동네와 판자촌 마을이 존재하고 항상 현대식 재개발 계획이 뒤따르는게 엄연한 현실이다. 20 세기에 들어서 이런 재개발 대상지역에 주류에서 밀려난 가난한 예술가와 작가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마치 새로운 시대의 새로운 유행처럼 무섭게 번져 나가기 시작했다. 가난한 화가들이 이런 골목의 벽면을 화폭으로 삼아 벽화를 그리기 시작했다. 약간의 재정적 여유를 가진 예술가들이 모여 그런 장소만이 가진 아주 특이한 분위기의 카페를 개업했고 아주 작은 갤러리들을 오픈하기 시작했다. 낙후된 동네의 가난하고 힘없는 주민들을 대상으로 재개발을 밀어부치던 공권력에 나름 지명도와 인맥을 굳건하게 형성하고 있는 예술가 집단의 저항은 결코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영국의 한 달동네에 법원의 명령서가 기재된 재개발 공지가 나붙었다. 저항했던 주민들도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떠나갔다. 강제철거 삼 일을 앞두고 중장비들이 속속 몰려들었다. 그런데 하룻밤새 놀라운 반전이 일어났다. 전설로 불리는 수수께끼 그래피티 화가 뱅크시가 밤새 다녀가면서 철거대상 담벼락에 그래피티 작품을 하나 남겨놓은 것이다. 그 사건은 삽시간에 전 세계로 퍼져나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로지 전설속의 뱅크시가 남긴 그림을 직접 관람하겠다고 구름처럼 몰려 들었다. 인증샷을 찍고 돌아서는 사람들은 그제서야 왜 뱅크시가 그곳에 그런 그림을 남겨야 했는지를 알게 되었고, 재개발이 가진 폐단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개발만이 모든 능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온 영국인들이 깨닫게 되었다. 법원의 허락을 받은 공권력이었지만 구름처럼 몰려든 사람들을 떠밀치며 재개발을 강행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결국...... 재개발은 취소되었다. 동네 주민들은 모두 되돌아왔다. 재개발이 아니라 보수 보완과 리모델링이 추가되었다. 마을은 삽시간에 새로운 선망받는 명소가 되었다.
그러자 마자 하나의 유행처럼 세계도처의 낙후된 재개발 지역마다 벽화로 도배되는 진풍경이 광풍처럼 번져나갔다. 다들 비슷한 상황과 비슷한 방법의 대처로 어떻게 보자면 적지않게 너무많이 도배된 측면도 분명히 있다. 우리나 통영의 벽화마을 태백 탄광마을 벽화 묵호 어촌마을의 벽화 등등이 그런 예라고 할 수 있다. 가난하고 지명도가 낮은 예술가들에게 하나의 작은 데뷔 무대이자 연습장이 되어가는 것인가? 의미나 작품의 완성도가 심하게 떨어진 것들이 비일비재한 것 또한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그런 유행이 파급되기 전에 마르세유 파니에 지구에 하나 둘 벽화가 그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거의 아주 초창기에 벌어진 모습이었다. 그러면서 20세기 후반에 접어들면서 이런 사실들이 점점 퍼져나가더니 여행자들 사이에 소문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유럽 옛 항구지역의 역사와 향취와 어부 가족들의 삶을 엿보고 체험할 수 있는 흔치않은 지역으로 소문이 알려지기 시작했던 것이다. 21세기에 넘어서면서부터 여기 파니에 역사지구는 가장 마르세유다운 핫한 명소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몇 날이고 마냥 눌러앉아 죽치는 여행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여타의 재개발 대상 지역들과는 다르게 파니에 지구는 마르세유 시당국으로서도 함부로 재개발을 논하기가 대단히 어렵고 따는 공권려 조차도 어느정도 두려울 정도의 아픈 과거를 파니에 지구는 이미 여러차례 상처난 가슴속에 앉고 살아왔기 때문이다.
나폴레옹 3세의 재정시대 오스만 남작을 내세워 낙후되고 더럽고 복잡한 파리의 대대적인 재개발이 이루어 졌다. 경찰과 군대를 동원해 주민들을 강제로 내쫓고 주택을 폭파하고 현재의 팔각형 방사형 대로를 완성시킨 것이다. 바로 파리의 현재 모습이다.
그러자 뒤이어 나폴레옹 3세가 지원하는 마르세유 정부도 수심이 얕고 협소해 무역항으로서의 효용가치가 떨어진 올드 포트의 주변을 모두 헐어내는 대대적인 마르세유 재개발 계획을 강제로 시행하게 되었다. 그 주된 대상 지역이 바로 르 파니에 지구였다. 파니에 지구 언덕 너머의 바깥 해안에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고, 항구로의 원활한 접근을 위해 파니에 지구의 해안쪽을 마구마구 강제로 철거해 버린 것이다. 주민들은 더 높은 언덕위로 쫓겨 갔다. 주민들의 저항이 거세지자 경찰과 군인까지 동원해 3만 명이 넘는 주민을 체포해 가두거나 강제로 추방시켜 버렸다. 그런 만행에 여론을 잠재우기 위해 철거지역의 한복판에 매머드급 마르세유 주민 병원을 건설했다. 우리로 치면 철거지역의 분란을 다독거리려 시립병원을 세웠다는 것이다. 세계대전을 거치고 경제불황을 거치면서 결국 병원을 문을 닫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히틀러의 독일군은 마르세유 항구가 연합군이 노리는 최고의 지중해 항구라는 사실을 깨닫고 올드포트 주변을 또 한 번 대대적으로 개편하기에 이르렀다. 파니에 역사지구의 복잡하고 허름한 거주환경이 반정부인사(레지스탕스)들의 은신처가 되어가고 있었던 것이다. 하여 히틀러는 약 50만개가 넘는 다이너마이트를 투입하여 파니에 지구의 완전 폭파 철거를 명령했다. 나찌 친위대(SS)가 직접 지휘한 이 소멸 작전에서 수만은 사람이 체포되어 강제 추방 이나 심지어 아우슈비츠로 끌려갔다. 파니에는 완전 폭파 궤멸되었다. 당시 독일군은 자신들에게도 필요하다고 생각해 병원의 파괴만은 실행에 옮기지 못해 살아남게 되었다.
오랫동안 방치되던 병원 건물을 영국의 호텔 체인이 2013년 인수하여 대대적인 보수공사를 거쳐 현재의 마르세유를 대표하는 최고급 5성 호텔인 ( Hotel- Dieu de Marseille)가 운영되고 있다. 그 호텔의 앞마당을 지나면 작은 광장이 나오는데 '추방자들 추모 공원'으로 기념비가 설치되어 있다.
이곳에서 건너다 보는 마르세유 올드 포트의 경관은 정말 멋지다. 건너편 언덕 꼭대기에 있는 노틀담 대성당에서 내려다 보는 마르세유 전체 풍경 못지않을 만큼, 바로 코앞의 올드포트의 빼어난 경관이 카메라 렌즈가 다 담아내지 못할 정도의 압도적 풍광처럼 여행자의 동공을 전점 무한까지 확장시키고 남을 정도로 압권이라 하겠다. 마르세유에서 노틀담 대성당의 전망과 디에 인터컨티넨탈 호텔의 경관은 꼭 감상해 보시가 권하고 싶다. 특히 치안에서 조금은 안심스러울 도심 안쪽의 야경을 보기에 최적의 장소라 생각된다.
파니에 지구(Le Panier)의 (Panier)를 사전에서 찾아보면 '바구니'라는 뜻 임을 알 수있다. 버드나무 가지나 갈대나 대나무를 엮어서 만드는 그런 바구니를 가리킨다. 이 지역이 처음 생겨나기 시작했을때 지역 명소처럼 불리던 여관의 이름에서 따왔다고 한다. 그랬음인지 지금 파니에 지구 골목골목을 걸어다니다 보면 조금은 어설퍼 보이는 커다란 바구니에 얼기설기 담겨있는 현지인들의 삶과 이 언덕의 역사가 널려있는듯 담겨있다는 느낌을 떨쳐낼 수가 없었다.
무려 이천 육백년 전에 이곳은 마르세유의 중심이었다. 마르세유는 바로 이 역사지구에서 시작되었다. 페니키아인에 의해서 발견된 항구였지만 이곳을 건설한 사람들은 고대 그리스인들이다. 그들은 이곳에 도시를 건설하고 식민지를 삼았으며 마사리아(Massalia) 라고 이름지어 붙였다. 이 골목마다의 집들이 본래는 그리스 방식의 건축물이 처음 들어섰으며, 골목 안쪽의 광장 아고다에서 온갖 토론이 결렬하게 벌어졌을 것이다. 그리고 이곳저곳에 그리스 신전들이 세워졌을 것이다. 그 모든 것들이 이 역사지구의 어느 지반아래 파뭍혀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르세유 대성당이 장엄하게 우뚝 솟아있는 메이저 광장 자체도 본래는 아테네 신전의 자리였던 기반 위에 세워진 것이기 때문이다. 골목을 걷다보면 온통 쇠창살로 도배가 되다시피한 (La Vieille Charite)라는 바로코 양식의 거대한 궁전을 만나게 되는데 처음엔 얼핏 기독교적인 전문대학(칼리지)인가 싶었다. 이 건물은 본래는 워낙 빈부 격차가 심했던 마르세유에서 빈민 구제를 위한 자선단체로 세워진 건물이었다. 의료 교육 임시 숙소의 용도로 만들어졌고 당연히 수녀님들과 같은 종교인 자선가들이 운영을 담당했다. 지금은 고고학 박물관과 아시아 아프리카 민속 박물과과 서점과 카페로 운영되고 있었다. 이 지역에는 비교적 근대에 이르러 세워진 대성당 외에도 (Saint- Victer 수도원) (Saint-Catherine 예배당) 같은 여러개의 성당과 수도원이 남아있다. 그런데 그런 성당들의 지하실에서 고대 그리스의 묘지가 꾸준히 발견되는 것을 보면...... 어쩌면 이 언덕에 여럿의 그리스 신전들이 세워져 있었으며, 이미 기반이 단단하게 잘 다져져있던 그 신전들의 터 위에 교회들이 세워졌을 것으로 나는 짐작된다. 그런 발굴이나 연구에 내가 직접 참여할 수 없는 처지라는 것은 나를 다분히 슬프게 만든다.
특히, (Saint- Victer 수도원)의 경우는 유럽 전체를 통 털어서도 가장 먼저 기독교가 전파된 기도처로 유명하다. 예수 그리스도 사후에 사도들 마저 로마의 극심한 탄압을 피해 뿔뿔히 흩어지는 시기에 초대 교회를 이끌던 누군가가 처음으로 이곳에 나타났다는 것을 입증한다. 이렇게 시작된 기독교 신앙이 갈리아 변방에서 제국의 심장 로마까지 전파된 것이라는 가설도 충분히 가능하다. 그런 와중에 <다빈치 코드>에 등장하는 내용처럼 일부의 사도(요한)는 물론 성모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터키 북부 에페소를 거쳐 프랑스 남부로 오게 되었으며, 여기에서 사도 요한이 도버 해협을 건너 전도여행을 떠나 영국에 기독교를 전했다는 이야기와, 카타리 파의 전설이 생겨나게 되는 것이다.
바티칸 중심의 로마 가톨릭에 다분히 상반되는(심지어 이단으로 규정되는 여러 사건) 수많은 사건의 진원지가 바로 프랑스 남부 해안이며, 그 중심에 바로 마르세유 항구가 있는 것이다. 하긴 바티칸 이전의 시대 핵심 군력이었던 로마의 최고 정적이 갈리아 였는데, 시저가 정복한 갈리아 원정이 다들 파리에 국한 되었는지 알고 있는데, 파리 못지않게 실질적인 갈리아의 중심이 멀고 먼 변방의 여기 마르세유였다. 결국 시저는 이곳 마르세유까지 쳐들어와서 인생 최고의 위기를 격파하는 위용을 발휘하면서 정식으로 갈리아 원정을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세 이후의 역사에서 현대에까지 묘하게 로마와 파리는 앙숙 관계를 드러낸다. 그런데 드러나지 않는 많은 분야에서 사실은 로마와 마르세유가 자주 부딪친다. 묘하다.
춥지만 광장 벤치에 앉아서 보온병에 담아 온 커피도 마시고, 골목 모퉁이에 작고 예쁜 갤러리처럼 꾸며진 카페에도 들리고, 유럽의 골목길을 걷는다는 느낌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스페인 안달루시아 뒷골목을 걷는듯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뒷골목 풍경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아랍풍의 분위기가 솔솔 풍겨난다. 그라나다의 어느 뒷골목을 걷고 있는데 지나가는 사람은 유럽 본토에서 온 갈리아인 여행자들임이 단박에 느껴지고, 골목 어귀의 슈퍼나 기념품 점에는 온통 프랑스어와 현대식 프랑스 물픔들이 진열되어 있다는 것만 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묘한게 혼합된 가톨릭과 이슬림의 빈티지한 모습을 한 장소에서 모두 느껴보는것만 같다.
그렇게 실컷 역사지구를 돌아다니다 보면 언덕을 내려서는 시점에서 다시 탁트인 바다가 나타난다. 마르세유의 신항(New Port)이 모습을 드러내고, 지금 막 어마어마하게 크고 멋진 크루즈선이 입항하고 있었다.
그리고....... 신항의 전망을 상당부분 딱 가로막고 서있는 웅장한 교회 건물이 여행자의 시야를 가득 채우며 등장한다.
마르세유 대성당(Cathédrale Sainte-Marie-Majeure de Marseille) 이다. 로마네스크 양식을 기본으로 했다고만 알려져 있는데....... 내가 처음 마주한 대성당은 로마네스크 양식에 이슬람 양식을 드러내놓고 짜집기 한 짬뽕 건축양식이라는 느낌을 절대로 떨쳐낼 수가 없었다. 얼핏 중앙부분을 보자면 피렌체 두오모을 모방한, 또는 사전 예행연습으로 만들어 보는 미니어쳐 같은 느낌도 강하지만...... 그렇다고 돔 양식이라고 우기기에는 심히 무리가 따른다 생각된다.
그럼에도 무척이나 고혹적일만큼 아름답다.
그리고 오늘도 변함없는 대성당의 거대하고 웅장한 위용은.......... 지금 당장 신(神)이 거하시고 계실것 같은 어떤 장엄함으로 그것을 바라보거나 예배당으로 찾아 들어가는 우리를 한없이 한없이 작게만........ 신에게 간절히 구원을 간구해야만 하는 피조물의 신세로 전락하게 만들어 주기에 너무나 충분해 보인다.
파리의 역사를 기원전으로 한참을 거슬러 올라가다보면 지중에 전역에 식민지 건설과 지배를 노리던 고대 그리스인들이 등장한다. 그리스인들은 루브르박물관 근처의 늪지에 도착해 배에서 내려 가장 높은 몽마르트 언덕에 올랐다. 사방으로 드넓은 초원과 숲이 펼쳐져 있었지만, 그것들은 모두가 지반이 약한 언덕과 습지 식물이 가득한 고랑과 늪지가 전부였다. 강이나 해변을 끼고 화강암 암반이 단단한 언덕위에 거대한 석조건축물인 신전들을 빼곡히 세우고, 그 중앙에 아고라와 야외음악당을 건설하던 그리스 방식의 식민도시를 건설하기에는 온통 치명적인 약점뿐이었던지라 결국 고대 그리스인들은 파리 지역을 포기했다. 그런 쓸모없는 지역에 켈트인들이 등장했고 시테 섬 주변으로 제방을 쌓아 마을과 신전을 지을 수 있는 터전을 처음 만들었던 것이다. 그것이 파리(Paris)의 시작이었다.
점차 수많은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세느 강변에 제방을 쌓고 버드나무와 갈대로 무성한 늪지를 메꾸어나가면서 파리는 점차 도시로 성장해 나갔다.
하지만, 당시 세상의 중심은 로마였고, 제국으로 성장과 확장을 거듭하던 로마에게 파리는 당연히 정복해야만 하는 야만세계의 중심이었기에 결국 제국의 황제를 꿈꾸던 줄리어스 시저에 의해 정복 파괴되고 만다. 시저는 시테 섬에 로마의 신전을 지었고 파리의 야만족을 로마 문명의 지배력 하에 편입시킨다. 하지만....... 시저는 곧 새로운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파리 점령이 곧 야만족의 세상인 갈리아를 모두 점령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말이다. 파리가 갈리아의 핵심적 중심이라고 생각해 왔지만, 갈리아에는 또 하나의 다른 중심이 있었던 것이다. 그곳이 바로 멀고도 먼 반도 남쪽 지중해 연안의 마르세유였다.
파리는 식민도시 건설의 아주 기초적인 조건에서 조차 부합되지 못해 퇴짜를 놓은 고대 그리스인들이었지만, 험준한 산에 둘러싸인 분지 형태의 험준한 해안지형은 그리스인들이 생각하는 새로운 식민도시 건설에 딱 부합되는 최적의 조건을 갖춘 장소였다. 마르세유는 세상에서 지극히 드문 형태의 매우 독특한 지형을 가지고 있다. 마르세유의 지리적 환경을 이야기할 때 반듯이 등장하는 것이 바로 에투알 체인(Etoile Chain)이다. 이것은 내륙의 산악지역인 엑상 프로방스(Aix-en-Provence)에서부터 흘러내려온 아주 거대한 바위산맥이 생트 빅투아르 산(Mount Saint-Victoire)을 만나 합세하는 형태를 이루면서 해안 지역의 분지와 같은 마르세유의 배후를 거대한 바위요새 성채처럼 에워싸고 있는 아주 독특한 지질상태를 가리킨다. 에투알 체인이 거대한 바위 병풍처럼 철저하게 마르세유라는 해안지역을 여타의 세상과 철저하게 격리 고립시켜 하나의 완벽한 요새로 탈바꿈시켜버린 것이다. 외부 세력이 마르세유에 쳐들어가고자 한다면 반듯이 바위암벽 요새 에투알 체인을 나고 넘어야만 했는데, 당시로서는 알프스를 넘는 것만큼이나 거의 불가능할 지경이었다. 그렇다면 당연히 이런 지형은 사람이 살기에 불가능한 지역이어야만 했다. 외부 세계와 교류가 불가능해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오늘날처럼 산골짜기로 도로를 내거나 터널을 뚫기 전까지는 말이다. 하지만...... 바다는 열려있었다. 바다를 이용하는 사람들에게는 거꾸로 천험의 요새가 되었던 것이다. 바다를 자유롭게 이용할 줄 아는 사람들은 당연히 해상전투에도 능숙할 것이고, 아무리 강력한 육군부대를 가졌어도 험준한 바위산을 넘거나 해군력이 부족한 적들은 마르세유에 아무런 위협이 될 수가 없게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인들에게 그런 여건들은 최상의 조건이 되었던 것이다. 그들은 마르세유에 식민도시를 건설했다. 바로 그 고대 그리스인들이 처음 도착하고 최적의 도시건설 지역으로 선택한 곳이 바로 파니에르(Panier)역사지구, 바로 여기였던 것이다. 그들은 이 언덕에 여러 개의 신전을 건설했고, 정치토론장이자 시장인 아고라를 만들었다. 그리스인들이 이곳으로 몰려와 살기 시작하면서 마르세유는 바로 이곳에서 시작되었던 것이다.
고대 그리스 항구 중심에 메이저 광장을 만들고 식민도시를 통치하는 식민정부를 세웠다. 그것이 바로 라 마요르 대성당 건너편에 있는 현 미르세유 시청사라고 해야 하겠다. 그리스인들은 파니에 역사지구에서 가장 넓은 메이저 광장 한복판에 아테네 여신을 모시는 그리스 신전을 세웠다. 하지만 이 신전은 로마제국의 기독교 공인 이후에 기독교인들에 의해 파괴되고 그 기반 위에 마르세유 최초의 교회가 지어졌다. 이어서 고대 그리스 신전 모두가 헐려나가고 그 자리마다 교회나 수도원이 들어섰다. 광기에 빠진 기독교인들은 모든 고대 그리스 신전을 철저하게 파괴하고 헐어냈다. 다만 당시에 기독교를 믿지 않는 수많은 현지 시민들의 거센 반발로 차마 모두 헐어내지 못하고 일부 남겨둔 상태로 교회로 개축된 것이 대성당 자리에 본래 있었던 옛 교회이다. 훼손이 심하고 낡은 상태로 여전히 남아있는 옛 교회(대성당의 뒷마당에 있으나 보존 상태가 열악하고 위험해 비공개) 건물의 외벽으로 고대 그리스 신전의 기둥들이 버젓이 쓰여 진 모습들을 지금도 발견할 수가 있다.
황제를 꿈꾸던 시저는 갈리아 원정을 성공리에 완수하기 위하여 로마의 군단을 이끌고 파리에서 여기 마르세유까지 멀고 먼 원정을 나온다. 강력한 로마해군력을 동원해 바다를 통해 마침내 마르세유를 점령했다. 그때 시저가 갈리아에 대해서 새롭게 판단한 것이 그의 원정기에 나온다. 파리가 갈리아의 중심인 것은 분명하지만, 마르세유에는 파리와는 분명히 다른 또 하나의 전혀 새로운 갈리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었다. 파리가 켈트족이 세운 도시이자 국가로 갈리아를 지배하는 세력이기는 하지만, 마르세유는 그 켈트족의 지배력에 저항하는....... 요즘의 표현을 빌리자면, 갈리아에 속하는 반군세력의 집결지 같은 곳이 바로 마르세유였던 것이다. 그들은 같은 편이면서도 언제든 뒤집어엎을 적대세력이었던 것이다. 시저가 판단한 이 놀라운 식견은 모두 진실이었으며, 프랑스의 근대사에까지 실제로 그렇게 대립관계를 지속해 오게 된다.(우리나라 남쪽 지역갈등 보다 좀 더 심각한 상태)
상황판단을 제대로 내린 시저는 파리를 포용하는 제도권 안으로의 편입 정책을 택했다면, 마르세유는 철저한 군사요충지로 탈바꿈시켜 강력한 식민통치권 아래서 지배하는 정책을 택했다. 그만큼 마르세유의 정서엔 저항하는 반란세력의 집결지 이미지가 강했던 것이리라. 로마는 여기 이 마르세유 핵심지역에 거대한 난공불락의 요새(성채)를 건설했다. 그것이 바로 지금도 여전히 육중하게 위용을 뽐내고 있는 성 요한 요새(Port Saint jean)다. 마르세유 포구의 우측 언덕 전체가 로마의 군사요충지로 탈바꿈한 것이다. 카르타고와의 포에니 전쟁을 경험한 로마제국은 마르세유를 해군 요충지로 만들면서 대서양 끝인 스페인 포르투갈 지역에서 시작하여 북아프리카의 모로코와 튀니지지역 까지를 관활하고 지배할 수 있는 강력한 해군 요충지로 새롭게 건설하고자 했다. 로마는 요새 아래쪽의 바다를 메워 새로운 방파제를 만들어 로마군의 전투함 전진기지인 새로운 항구를 만들었다. 바로 지금 마르세유 신항(New Port) J4(제 4부두) 지역이 로마시대에 만들어진 것이다. 더불어 방파제 안쪽에 생겨난 거대한 호수 주변으로 배를 수선하거나 전투함선에 필요한 무기와 물자를 만들고 보관하는 병참기지까지 건설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국 로마제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밀려나고 말았다.
지중해의 새로운 주역은 이제 이탈리아 해상무역 삼총사(베네치아. 제노아. 나폴리)가 장악하는 시대가 도래 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신대륙 발견과 함께 포르투갈 리스본과 스페인 세비아와 바르셀로나가 지구상의 모든 바다를 휘젓고 다니는 새로운 세상이 되더니, 그것마저도 세계최강의 해군력을 앞세운 영국의 등장으로 런던이 급부상하고, 대서양 상권을 오랫동안 지배해온 네덜란드나 벨기에 덴마크의 동인도 회사가 등장하면서 마르세유는 점차 세상의 관심에서 멀어져 잊어져 갔다. 대신 격동의 프랑스 역사에서 빈번히(어쩌면 항상) 파리 중심의 프랑스 통치권에 저항하거나 반란을 꾀하는 분순한 무리들이 모여들고 실제로 봉기를 벌이는 반정부세력의 중심으로 확고하게 자리를 잡게 되었다. 프랑스이면서도 프랑스 정부에 노골적으로 반대하는........ 그런 골칫덩이 마르세유가 나찌 히틀러의 프랑스 점령시기에 외부세계와 소통하면서 나찌에 극렬하게 대항하는 레지스탕스의 본거지로 등장한다. 분노한 히틀러가 실제로 5만개의 다이너마이트를 보내 레지스탕스들의 은거지로 주로 이용되어온 파니에 역사지구를 일시에 완전 파괴시키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20세기 내내 마르세유 J4(제 4부두)는 폐허 상태로 방치되었다. 우범지대였을 뿐이다.
역대의 프랑스 정부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더 이상 방치하지 말고 어떻게 해야 한다고 말로만 무성하게 입버릇처럼 되뇌었을 뿐 실질적인 계획이나 실행에 옮긴 사람은 어디에도 없었다.
고대 로마제국 시절 로마에 대항하는 갈리아 인들의 최후 보루였던 마르세유는 결국 율리우스 카이사르(줄리어스 시저)에게 정복당하고 말았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황제의 자리에 야욕을 보이던 시저가 원로원과 충돌하고 정적인 폼페이우스와 내전이 벌어지자 마르세유는 기다렸다는 듯이 폼페이우스 편에 섰으나 전쟁은 카이사르의 승리로 끝났다. 당연하게 마르세유는 거센 로마의 탄압에 시달려야만 했다.
로마제국 멸망 후 봉건영주제의 프랑크 왕국이 등장했을 때, 마르세유는 독립된 봉건국가를 이룩하지는 못했지만, 프로방스 왕국 안에서 어느 정도의 자유와 지위를 보장받고 유지해 나가는 정도의 도시로서 연명해 나갔다. 북아프리카를 지나 리베리아 반도(스페인)을 점령한 이슬람의 선진 문명이 마르세유를 통해 유럽에 전해지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고대 그리스 문화와 문명이 마르세유를 통해 이슬람 세계로 역수출되기도 하는 교두보 역할을 담당하였다. 수세기에 걸쳐 끊임없이 이어지는 신흥 강대국들의 침략과 방어 전쟁의 한복판에서 마르세유는 철저하게 페허로 파괴되어 나갔다. 거기에다가 나폴리와 마르세유를 통해 들어온 흑사병이 온 유럽을 초토화 시키는 비운의 역사를 도시의 이력에 분명하게 새기게 되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마르세유가 역사의 전면에 다시 새롭게 등장하게 되는 사건은 바로 십자군 전쟁이다.
1095년 교황 우르바노 2세는 파리와 마르세유의 딱 중간쯤에 위치한 클레르몽에서 열린 공회의에서 ‘신(神)께서 전쟁을 원 하신다’는 희대의 사기극을 펼친 끝에 성지 예루살렘 탈환을 위한 성스러운 군대의 파견(Crusades)을 명령한다. 언제나 거대한 사기는 성스러운 신의 이름으로 자행되었다. 그 사기에서 생겨난 막대한 부와 권력을 교황과 교회가 고스란히 통째로 삼켜 버렸다. 200년에 걸친 전쟁은 결국 실패로 끝이 났지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결과를 낳았다. 신께서 시켜서 한 일이니 책임을 따지려면 신에게 따질 일이라면서 교황과 교회는 끝까지 발뺌을 했다. 그것이 중세 교회의 모습이자 교황의 진면목이었다.
어쨌거나 교황은 희대의 사기극을 시작했고, 그 출발은 프랑스였으니 당연히 처음 동원된 십자군 병력의 절대다수는 프랑스 사람들이었다. 십자군에 참여하면 신께서 천국에 가는 열쇠(면죄부)를 준다는 말에 속아 넘어갔고, 유럽의 봉건 영주들 밑에서 출세를 위해 목숨을 걸고 무수히 많은 전투에서 살아남았던 기사들이 대거 참전했다. 이 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명성을 얻어서 자신도 봉건 영주의 지위에 오를 수 있다고 생각한 신분상승을 꾀하는 기다(군대) 무리였다. 커다란 무리의 군대가 이동하자면 수많은 물자와 운송 수단이 필요하다. 이 역사상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군대의 이동을 따라가고 이용해서 떼돈을 벌어보자는 장사꾼과 노동자와 사기꾼과 범죄자들이 십자군 원정대 행렬의 뒤에 길게 따라 붙었다.
처음 프랑스에서 수백 명의 기사와 수천 명의 군대로 출발을 했는데, 유럽 전역에서 벌어진 교황과 교회의 선동으로 합류하는 군대와 수행원의 숫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다. 허접한 사기꾼 집단이었던 짝퉁 십자군이 먼저 출발하는 소동도 있었지만, 대략 6만 명 정도의 1차 십자군 원정대가 이탈리아를 지나 발칸반도를 거쳐 터키지역으로 육로를 통해 진군했다. 군대가 6만이면 지휘관이 기사 집단이 2 천오백 명은 되었을 것이고, 그 뒤를 쫄쫄 따라다니면 횡재를 노리는 장사꾼과 시전잡배 무리가 적어도 6만 가까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리 신께서 명령을 내리신 성스러운 군대라지만 대충 잡아도 2년 가까이 걸리는 원정에서 물자는 늘 절대부족이었다. 그러자 그렇게 성스러운 군대가 역시나 신의 이름으로 지나가는 길목의 모든 마을과 도시를 약탈하며 전쟁 물자를 조달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신의 이름으로 벌어지는 전쟁을 위한 부득이한 물자 조달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도적떼보다도 잔혹한 약탈이었다. 신의 이름으로 종교가 같은 동족을 죽여서 빼앗는 학살이 연이어 자행되자 일부지역에서는 봉건 영주가 군대를 끌고 나와서 전면전을 각오하면서, 십자군을 그대로 통과시키거나 우회하도록 만드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심지어는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
원정대는 끊임없이 교황청과 자신들이 떠나온 지역의 봉건영주에게 보급물자 지원을 강력하게 요청하게 되었다. 당연히 초기 십자군 원정대의 주력이었던 프랑스에서의 지원이 가장 클 수밖에 없었다. 군대는 걸어서 진군하지만...... 그들을 먹이고 입히고 재워줄 보급물자는 수량이 엄청난 것이라 말 잔등에 실어서나 마차에 싣고 따라가는 수준으로는 불과 사나흘을 겨우 지탱하는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별도의 보급망이 군대의 이동을 따라가서나 행군로의 전후에 미리미리 보급 창고를 만들어 수급을 원활하게 해주어야만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하여 물자보급의 핵심은 해상운송을 통한 운송이 거의 절대적이다. 육상으로 이동하는 군대의 이동로에 맞추어 가장 가까운 해안 지역까지 미리미리 보급물자의 운송과 배분이 이루어져야만 하는 것이다. 하여 프랑스 전역에서 십자군 원정대의 보급물자와 추가 지원 병력이 몰려들었다. 이곳에서 배편에 실려 지중해를 통해 전쟁지역 인근으로 실어 나르게 되었던 것이다. 그 덕분에 자연스레 마르세유가 다시 호황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렇게 전쟁 물자의 보관과 선적과 출항을 단속 관활하기 위하여 역사지구의 허물어진 로마시대 요새를 새롭게 개축하여 사령부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전쟁이 끝났다가 다시 시작되고를 반복하면서 완벽하게 새로운 요새로 탈바꿈 하게 된 옛 로마의 성채에 성지 예루살렘에서 구호의료단 소속의 총사령관으로 눈부신 활약을 하고 있는 요한(존)의 이름을 따서 이곳은 ‘성 요한 기사단 장 사령관의 요새(Port Saint Jean)’라 부르기 시작해 지금까지 이르고 있는 것이다. 전하기는...... 훗날 실제로 이 성채의 설계와 완성에 요한 기사단이 참여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로도스 섬과 몰타 섬에 요한 기사단의 성채가 온전한 성채로 남아있는데, 아마도, 로마군단 이후로 인류 역사에서 가장 완벽하게 성을 쌓아 요새로 만드는데 천재들이 요한 기사단이 아니었을까 라고 나는 생각한다. 남아있는 성채 전부가 십자군 전쟁당시 만들어져 그대로 전해 내려오는 역사 현장이 바로 ‘생 장 요새’이다. 해안 경계지역에 우뚝 솟아있는 원형 전망대이자 감시탑이자 지휘본부만이 십자군 전쟁이 끝난 후 15세기에 르네 15세 프로방스 영주가 추가로 지휘부로 만든 망루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찌 히틀러의 파괴 공작으로 생 장 요새 인근의 마르세유 역사지구는 거의 폐허로 변해버리고 말았다. 중세 르네상스 이후에 요새 건너편의 니콜라스 성채(Port Saint Nicolas)와 생 장 요새를 콜라보로 이용해 새로운 마르세유를 건설해 보자는 노력이 있었으나..... 이 역시 외세의 침략으로 좌절되고 만다. 그 이후로는 전혀 다르게 엉뚱한 일이 벌어지기도 하는데...... 이 부분은 올드 포트 건너편의 니콜라스 요새 이야기에서 차차 다루어 보기로 라고 일단은 미루어 두어야만 하겠다.
어쨌거나, 2023년 현재 대한민국은 부산 엑스포 개최지 선정을 위해 온 국력을 집중시키고 있는 형편이다. 사실 만국 박람회(World's Columbian Exposition, 이하 엑스포)는 콜럼부스의 신대륙 발견 40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893년 미국 시카고에서 시작된 국제행사로 매 4년마다 열리게 되었으며, 이 행사를 통해 세계 경제발전상은 물론 새로운 상품과 최첨단 기술이 전시 홍보되며 시장 경제의 흐름을 주도 내지는 파악해 볼 수 있는 아주 중요한 행사로 평가받고 있다. 경제 분야를 넘어서 과학과 건축과 신재생 에너지 등이 중요 관심사항으로 발전했고, 국가 경제와 정치까지를 총 망라하는 스포츠를 제외한 인류 최고의 축제로 발전해 나가는 중이라 하겠다.
이와는 별도로 유럽 지역에서는 (세계 문화수도 지정) 이라는 행사를 통해, 오랜 역사가 서려있는 지역을 특별히 지정해 온 세계 문화계가 그 선정된 지역의 역사와 문화를 재조명하고 연구를 발표하고 보존하는 (경제 중심의 엑스포)와 구분되는 (문화 엑스포) 행사를 꾸준히 펼쳐내려 오고 있다.
문화 엑스포 주최 측은 마르세유와 프로방스 일부를 (2013년 유럽 문화의 수도)로 지정했다. 때맞춰 프랑수아 올랑드 프랑스 대통령이 취임했다. 프랑스는 이미 지난 1990년 말에 집권한 조스팽 정부 때부터 이미 프랑스 문화 중심지로서의 마르세유 재개발 프로젝트에 첫 삽을 뜬 이후에 벌어진 일이었던 것이다.
올랑드 정부는 프레드릭 미테랑 문화장관의 지휘 하에 마르세유 제 4부두 지역의 개발을 역사와 문화 중심으로 이끌어가도록 여러 가지 여건을 조성하고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에 나섰다.
그 핵심에 바로 MUCEM(유럽 및 지중해 박물관) 건립이 주요 프로젝트로 등장했던 것이다. 프랑스 건축가 루디(rUDY ricciotti)는 제 4부두 지역의 항만 호수 위에 ‘돌. 물. 바람과 건축’ 이라는 모티브를 가지고 호수에 떠있는 초현실주의적인 건축물을 세웠다.
새롭게 탄생한 도시 마르세유의 상징처럼 부각되고 있는 MUCEM 지역은 이제...... ‘생 장 요새 + 유럽 및 지중해 박물관(Musse des Civilisation de Europe de la Mediterranee) + 제 4부두(J4)로 세 등분되어 여행자 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고대 건축과 지중해 항구 사이에 초현대적 건축물이 생겨났고 이 역사적 의미를 간직한 세 곳으로 나뉘어져 있는 공간들이 상징적인 철 구조물 통로를 통해 서로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지중해 지역의 고고학적 유물은 물론 문화와 인류학적인 연구와 보존 차원에서 박물관을 설립 운영하고 있다. 거기에 현대 미술을 포함하는 미술사관도 포함되어 있다.
건물 외관의 멋진 전경 외에 대단히 함축적이고 복잡한 건축학적인 여러 가지 특징들을 간직하고 있다. 초고성능 섬유 강화 콘크리트(UHPC)로 만들어진 309개의 그물 모양의 몰딩 기둥 안에서 내다보는 지중해의 풍경은 가히 상상 그 이상이라고 말해주고 싶다. 해수면 위에 떠 있는 듯한 착각마저 불러일으키는 다분히 실험적 창작물인 이 건물의 옥상에서 바라보는 지중해와 생 장 요새와 니콜라스 성채 사이에 모습을 드러내는 올드 시티의 풍경은 감탄사를 흘려내기에 충분할 정도이다. 이 거대한 현대적 건물은 박물관 외에도 상설 전시관과 연구실과 휴게실 및 레스토랑으로 운영되고 있다.
J4에서 시작하여 박물관 옥상을 둘러보고 다시 10M의 하늘에 매달려 있는 통로를 통해 생 장 요새로 가려던 우리의 계획은 부득이 수정될 수밖에 없었다. 흐리고 쌀쌀한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그곳에는 인파로 가득 넘쳐나고 있었던 때문이다.
MUCEM을 둘러보던 중, 여선생님의 인솔로 박물관 견학을 나와 춥고 쌀쌀한 날씨임에도 외부 계단에 앉아서 점심 도시락을 먹으며 선생님의 강의를 듣고 있는 초등학생들을 만났는데 참으로 부러웠다. 어린 학생들이 하나같이 진심으로 선생님의 설명에 집중하고 있는 참으로 이색적이고도 놀라운 모습 때문이다. 우리나라 유치원이나 초등학교에서 절대 보기 힘든 그런 진지한 모습들이었다. 유럽 대부분의 나라가 그렇지만, 특히 프랑스의 청소년에 대한 예술과 문화와 교육에 대한 투자와 헌신적 노력은 그야말로 감동적이었다.
루브르나 오르세 박물관을 포함한 대부분의 박물관 미술관 도서관 등등이 학생들에겐 무한정 무료이다. 18세까지 완전 무료 개방이다. 초 중등 학교 선생님들과 역사 미술 예술 관련 직업을 가진 사람들에게 까지도 완전 무료 개방이다. 하여 학생들은 학교에서 슬라이드나 백과사전을 통해서 <모나리자>나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을 만나는 것이 아니라, 언제든 시간과 여건이 허락되면 직접 루브르에 가서 진품을 보면서 하루 종일 스케치를 하고 또 하며 성장하는 것이다. 데이트를 그런 곳에서 하면서 예술과 문화의 혜택을 무한정 누리는 것이다. 세계적 박물관의 의자에 엎드려, 혹은 아예 실내 바닥에 엎드려 낙서하듯 놀이하듯 즐기고 있는 어린이를 수시로 만났다. 그런 그들의 어린 절 정서에서 예술과 문화에 대한 이해와 잠재력이 무럭무럭 자라나기 시작하는 것이리라. 부러웠다. 우리 손녀들을...... 진정으로 저런 환경에서 자라나게 해 주고 싶었다.
어쩜 저렇게 어린 아이들이 저토록 선생님 말씀에 집중할 수가 있을까?
그 진심어린 표정들을 나는 이 순간에도 결코 잊을 수가 없다.
뮤셈을 돌아 본 우리는 저만큼이나 왔던 길을 삥 돌아서 다시 올드 포트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안에서 그물망을 통해 내다보는 풍경이 아주 멋지던데, 안에 들어가 쉬면서 커피 한 잔하고 가는 것 어때?’
‘저기 성벽 너머로 보이는 곳이 아까 우리가 처음 시작했던 올드 포트 아니야? 마리나 따라 조금 올라가면 유리 우산 앞에 있는 그 카페가 있는 곳이고........ 커피는 그 카페에서 마시고 싶어.’
‘그 카페에 뭐 붙여놨어?’
‘그 턱수염 아저씨가 멋있잖아. 뭐든지 테이블에 턱 하고 내려놓고는 무심하고 팍 돌아서는 그 씨크 함이 상당이 멋있던걸?’
헐!!!!!!
역사지구를 빠져나와 올드 포트의 부둣가에 이르니 마르세유 역사 사진전(1043~현재)이 열리고 있는데, 거의 상당부분이 나찌 독일의 침공시 탄압과 역사지구 파괴에 대한 가슴아픈 현장을 흑백사진에 담고 있다.
그 어떤 이유에서 건 전쟁은 커다란 상처이자 재앙이며 비극이다. 권력과 영토와 재물에 욕심이 있는 못된 야심가는 온갖 무기를 들고 나와서 또 다른 야심가와 저들끼리만 목숨을 걸고 싸우면 되지 않을까? 그런데 그런 인간일수록 남의 뒤에 숨어서 모략을 일삼고 전투는 대리전을 시킨다. 그리고 그 파국에서 생겨나는 손톱만한 잉여물은 몰래 혼자 독차지해 버린다. 정말로...... 귀신들은 다 뭐 먹고 사는지 모르겠다. 그런 쓰레기들 안 잡아먹고 말이다. 히긴....... 2천 년째 오로지 침묵으로만 일관하시며 절대적 존재로 추앙받고 있는 모오류설의 최대 수혜자인 지극히 높은 분도 계시니 말이다.
어찌되었건 프랑스는 세계대전 동안 연합군에 속했고 결과적으로 승전국이 되었다.
그런 처절한 아픔의 역사 위에서 겨우 새롭게 독립을 쟁취했고 자유 시장경제 기반의 민주주의를 되찾았다면, 적어도 프랑스가 가장 앞장서서 인류의 공생과 번영을 모색했어야만 했다. 나라를 빼앗겨 영국 런던에 망명 정부를 세워야 했고, 프랑스 민중의 처절한 레지스탕스 운동으로 저항정신을 이어나갔으며, 전쟁이 끝나면서 다시 문화와 예술의 중심이자 명실상부 유럽의 중심 세력권에 다시 복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온 나라가 황폐화 되었고 아우슈비츠 가스실로 이웃들이 끌려가는 것을 목격하지 않았던가? 정치권력에 몰입한 극단의 지도자가 이끄는 제국주의 폐단이 얼마나 충격적인 비극을 초래하는지 누구보다 절실하게 경험했을 프랑스였기 때문에 더욱 그래야만 했다. 그런데 새롭게 주권을 되찾은 프랑스는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열강의 식민지 찬탈에 앞장섰던 그 못된 버릇을 전혀 고치지 못했던 것이다. 전쟁 전에 프랑스는 인도차이나를 점령했고 베트남에서 온갖 약탈을 감행했다. 프랑스인들의 호의호식이 전부 베트남에서 훔쳐오고 빼앗아 온 것들로 가능했다. 호치민(호지명)의 망명정부가 독립을 외치며 타도를 부르짖은것이 바로 프랑스 제국주의 였던 것이다. 나찌 독일의 침략으로 국가의 존립마저 위태로왔던 시기동안만 프랑스의 대 베트남 약탈이 잦아들었을 뿐이었다. 2차 대전이 끝나기가 무섭게 프랑스는 다시 베트남 식민지배를 꾀했고, 2차 세계 대전으로 군사력이 미미해진 프랑스는 베트남 국민 저항군의 반격에 제대로 대처하기도 힘들 형편이 되었다. 그러자 통킹만 사건을 조작해서 슬그머니 식민지 통치권을 미국에게 양도하고 슬며시 꼬리를 내리고 도망을 친 것이다. 이제 적 프랑스에 대항했던 베트남의 독립전쟁은 대 미국을 향한 전쟁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이 우리나라도 억지로 끌려 참여하게 되는 베트남 전쟁인 것이다.
하지만, 베트남에서 불가항력으로 쫓겨나오기는 했지만 제국으로서의 프랑스 야욕은 결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그것이 바로 알제리 사태다. 프랑스 식민지였던 북아프리카 알제리가 1960년 독립하는 시기에 맞물려 프랑스는 마르세유를 중심으로 하는 남프랑스 지중해 연안에 거대한 산업단지 벨트가 건설되기 시작했다. 석유. 조선. 철도. 화학 중심의 중공업 단지가 만들어지기 시작한 것이다. 중공업 산업에는 공장건설. 자재와 완성품의 철도운송. 물. 전력 등이 필수요소가 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많은 인력을 필요로 한다는 사실이다. 프랑스는 새로운 산업 인력 확보를 위해 식민지였던 알제리 사람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기 시작했다. 힘들고 위험하고 다소 지저분한 일을 하려는 프랑스인들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북아프리카 사방에서 이민자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더불어 프랑스의 산업정책은 눈부시게 성장을 가속화하게 되었다. 이에 발맞추어 70년대 후반부터 불법 이민자들이 지중해를 건너 몰려오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인적 자원의 공백을 메워주기도 하는 효과가 있었기에 관망하는 분위기 였으나. 80년대에 들어서 불법 이민자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고 그들중의 절대다수가 주거가 일정치 않고 뚜렷한 직업이 없으니 수입이 없고, 사회복지 헤택을 받을 수 없는 처지들이다보니 범죄가 무섭게 증가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범죄자들이 모여서 카르텔을 형성하여 조직간 부두의 노동자들과 마찰이 잦아지는 시기에 마약이 점차 대중화 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순간에도 극도로 열악한 북아프리카의 생활기반을 버리고 목숨을 걸고 지중해를 건너는 불법 이민자들이 넘쳐나고 있다. 바다에서 단속에 걸리면 그 자리에서 출발지로 송환을 시킨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든 유럽의 해안가에 발을 내딪은 상태로 체포되면 국제법에 의해서 난민촌으로 이송되고 재판을 받게된다. 이 체류기간 동안에 탈출을 하기도 하고, 이런 저런 이유를 들어 망명을 요청하기도 한다. 이런 사태가 어제도 오늘도 끝없이 반복되고 있는 것이다. 끊임없이 불법이민자는 바다를 건너 쏟아져 들어오고, 땅에 발을 디딘 사람들은 어느 누구도 다시 아프리카로 돌아갈 생각이 없다. 프랑스 남부 마르세유 인근과 그리스 남부 해안과 이탈리아 시칠리아 섬이 이 불법이민자들로 극심하게 몸살을 앓고있는 대표적 도시들이다.
원주민과 불법 체류자, 허가를 받은 체류자 신분과 도망자 신세의 불법 체류자, 출신 국가들 사이의 뿌리깊은 불신과 적대감, 종교적 마찰, 마약을 비롯한 불법 거래자들끼리의 영업적인 경쟁과 보복살인, 인종차별 문제 등등이 매우 복잡하게 서로 얽혀있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 현재 북아프리카의 불법 밀입국자들이 쏟아져 들어오는 유럽의 많은 도시들의 현재 진행형 문제점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 시범적인 도시 마르세유가 있는 것이다.
여행자의 시선으로 그런 것들을 바라보는 것은 상당히 가슴아픈 일이다. 하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우리는 아주 많은 상황을 목격했다.
우리나라 제주도에서도 한동안 뜨거운 이슈가 되었던 것처럼.......... 불법이민자 문제는 이제 결코 유럽 등의 특정한 지역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결코 아닌것이다. 그것은 유럽과 아프리카의 문제만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우리의 문제이기도 한 것이다.
현실로 이루어지지는 않았지만....... 6.25 전쟁이 부산만을 남겨두고 낙동강 전선에서 끝이났다고 가정해 보자. 아마도 피난민의 절반 정도는 어디로든 이민을 떠나야만 했을 것이다. 거기에 국제사의의 배려가 있고 없고 하는 정도의 차이만 존재했을 뿐일 것이다. 장개석의 중국이 모택동의 중국공산당에게 밀려 좁디 좁은 대만이라는 섬으로 쫓겨나게되자, 수많은 이민자들이 막연하게 목선을 타고 바다로 나갔다. 말레이시아와 필리핀과 인도네시아 지역 해변에 수상가옥을 짓고 생활을 영위해 나갔다. 점차 그들은 그 나라에 동화되어 갔고 국민이 되었다. 성실 근면함을 앞세워 장사에 소질을 보였고 커다란 부를 일구어 향우회 성격으로 시작해 세계적인 경제적 거물단체인 화상(華商)으로 거듭난 것이다. 이들의 일부가 아주 먼 오세아니아 반도까지 바다를 건넜다. 20세기 중후반까지의 호주는 완전한 백호주의 나라였다. 국가의 이념 자체가 백인들만의 국가를 이룩하는데 있었던 것이다. 그런 백호주의 호주 조차도 낡은 목선에 목숨을 걸고 그 험하고 만 바다를 건너온 피난민들을 외면하지는 못했던 것이다. 호주 원주민을 제외하고 호주 땅에 발을 들이고 정착한 사람들은 중국 본토에서 쫓겨온 피난민이 전부였다. 중국인들은 백인 중심의 호주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고 도시 인근의 들판으로 쫓겨나가 주로 야채를 재배하는 농사일에 종사했다. 그들이 지금 호주의 농업경제를 꽉 거머쥐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학연수를 시작으로 호주에 발을 내디딘 한국인들은 주로 카페. 레스토랑. 편의점으로 시작을 했다가........ 일부는 정착을 했고, 일부는 소고기 스테이크에 와인만 마시고 골프에 빠졌다가 쫄당 망하는 사례가 넘쳐나고 있는게 엄연한 현실이다. 한국 땅에서도 힘든 일이 싫어서 떠났는데....... 세상에 그렇게 놀고 그냥 먹여주고 재워주는 세상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을 나중에 깨닫고 후회해 보니 이미......... 동남아시아의 보트 피플이 오래전의 아득한 이야기만은 아닌것이다. 이 순간에도 보트 피플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있다.
유럽의 대도시를 다니면서 많은 불법체류자를 만나기도하고 그들의 처지와 생활을 엿보기도 한다. 그 때마다 어떤 거리감이나 두려움 보다는 솔직히 어떤 안스러움과 안타까움이 교차한다.
입장을 한 번 바꾸서 생각을 해보자.
내가 아프리카에 목숨을 걸고 유럽으로 향하는 배에 커다란 웃돈을 주고 올라타 건넜다고 치자. 고향에 아내나 자식이나 부모 같은 가족이 남았거나, 일가족이 함께 바다를 건넜다고 치자.
마르세유에 천우신조로 무사히 도착을 했는데 당장 배가 고프고 잠을 잘 숙소가 없다. 가진 돈도 없다. 막일 이라고 해고 싶은데, 오랜 세월동안 가장 만만했던 부두노동은 노동조합이 철저하게 관리를 하고, 식당 웨이터는 이미 먼저 건너 온 체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 마르세유의 어디든 마찬가지다. 아프리카에서 건너 오기 전 학교 교사를 했던 은행원을 했던 공무원을 했던....... 불법체류자의 신분으로는 어떤 직업에건 가장 기초적인 취업의 조건마저 허락되지 않는 것이다. 차리리 혹...... 아프리카에서 노가다 현장에서 용접을 잘했던가, 자동차를 잘 고치는 기술이 있다던가 하는 등의 특별한 재주가 있다면 비록 불법체류자 신분때문에 정당한 보수는 받지 못하겠지만 일단 직업을 가질 수는 있을 것이다. 그게 아니면 허접한 북아프리카 토산품이나 옷가지를 들고 거리를 배회하면서 이사람 저사람에게 파는 거리 장사치가 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어느 정도 자본이 모이면 야채나 과일을 파는 노점상으로 발전하고, 실제 그렇게 돈을 모아서 서녀 명이 동업으로 야채과일 가계나 작은 식당을 운영하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요즘은 구두닦이나 신호대기중인 차량 앞유리를 닦아주는 일은 거의 자취를 감춘것 같다. 이게 아니면....... 폭력배에 가담하여 불법적인 을들을 저지르며 소매치기나 강도나 나아가 마약장사를 하게 되지 않겠는가?
정상적인 삶을 원하는 현지인들과........ 어떻게든 살아야 하는 불법체류자 간의 애해관계가 다르고 적대적 마찰이 생겨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치안부재가 되는 것이다.
마르세유의 꼬리표가 되어버린 (치안부재)........ 이제 다음 이야기에서 실제로 목격을 해 보기로 한다.
--- 감사합니다. (마르세유 여행)을 계속 이어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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