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정호숫가에 랏족이 모여 사는 마을을 달랏(Da Lat) 이라고 불렀다.
달랏이라는 곳에 이르면 꽃과 소나무 숲으로 가득한 아름다운 호수 전경이 펼쳐져 있다. 베트남에서 가장 낭만적이고 아르다운 곳이라고 현지인들은 지금도 입을 모아 칭송을 그치지 않는다.
방문객의 절대다수는 베트남 현지인들이다. 결혼한 베트남 사람들은 최고의 신혼여행지로 달랏을 꼽는데 전혀 주저하지 않는다. 잘 정돈된 마치 파라다이스와도 같은 인공호수(Tuyen Lam Lake) 주변으로 조성된 다양한 조각상들과 꽃들로 가득한 정원에서 다양한 포즈로 기념사진을 찍기도 하고, 하얀 백조 보트를 타고 호수 저편으로 나아가기도 한다.
이 소식이 점점 세상에 전해져서 이제는 세계 도처에서 많은 여행객들이 찾아오는 베트남 관광의 명소로 탈바꿈하고 있다.
어느 날인가부터 여행자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서 달랏을 ‘영원한 봄의 도시’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런가하면 달랏을 ‘작은 파리(little paris)’라고 부르는 사람들도 속속 등장하기 시작했다.
아마도, 프랑스 식민지 시절에 식민정부의 주도로 처음부터 계획적인 프랑스풍의 산정휴양도시로 건설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 세련된 프랑스풍의 고급호텔과 리조트와 빌라를 세웠고, 나아가 교회와 여름동안 사용 할 식민정부의 관청들을 차례로 건설했다. 연평균 기온이 불과 15도에서 24도 사이를 오르내리는 청명한 날씨의 달랏은 용광로처럼 푹푹 찌는 날씨속의 베트남에서는 가히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낙원이었다고 할 수 있다.
열대의 나라 베트남이다 보니 야자수가 숲을 이루고 이름 모를 열대과일들이 주렁주렁 매달렸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달랏은 베트남 남부에서 유일하게 소나무가 빼곡하게 숲을 이루며 자라는 지역으로, 얼핏 보이는 산야의 풍경은 흡사 우리나라 자연풍경을 떠올리게 하는데, 그 아래로 꽃과 호수와 청명한 하늘이 비로소 ‘이래서 달랏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오는구나.’ 하고 이해가 되기 시작할 것이다.
여전히 달랏은 베트남에서 어느 정도 부유하고 성공한 사람들을 위한 휴양지이다. 식민지 건설정부가 애초에 세웠던 도시건설 계획처럼 말이다. 어느 정도 선택된 사람들이 무더운 베트남 특유의 날씨 속에서 이국적인 시원함을 누리고 즐기기 위해서 시간과 돈을 투자해야만 하는 조금은 특별한 장소라 해야 하겠다.
베트남은 종단 길이가 약 1.600km에 가까운 칠레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영토를 가진 나라이다. 하여 대략 3개의 생활문화권으로 구분하는데, 수도 하노이를 중심으로 하는 북부권역과, 다낭을 중심으로 인근의 호이안과 후에를 포함시키는 중부권역과, 경제적 수도 호치민(사이공)을 중심으로 하는 남부권역이다. 베트남의 관광사업 또한 이들 3개의 권역으로 나뉘어 주로 꾸려진다. 근자에 들어 남부와 중부 사이에 있는 나짱(나트랑)을 새로운 광광사업권역으로 개발과 홍보에 주력하는 느낌이 상당히 강하지만, 주관적인 나의 판단에 의한다면 나짱 권역은 왠지 모르게 달랑 외따르게 처지고 다른 역사문화 분야와 동떨어진...... 비행장이 있고, 최신식 고급 리조트들이 잔뜩 들어섰다는 점 빼고는..... 그다지 자유여행자들을 잡아 끌만한 매력이나 효용성이 지금으로서는 한참이나 부족해 보인다는 것이 나의 판단이다. 나짱을 남부여행권에 넣기에도 너무 멀고, 그렇다고 다낭 중심의 중부여행권에 끼워 넣기에는 비행기에 의지하지 않으면 절대적으로 활용성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겠다. 그렇다고 독자적인 여행지로 내세우기엔 무엇인가가 한참 부족해 보인다. 하지만 이미 하노이를 통한 하롱베이 등의 여행상품을 너무나 오래 판매했고, 다음으로 호치민을 중심으로 메콩강 하류를 이용하는 여행상품 또한 효용가치성이 점점 줄어들고, 현재는 호황을 이루고 있는 호이안과 후에를 연계한 다낭지역 여행상품이 서서히 한계를 향하고 있다고 판단한 여행사들과 베트남 정부는 새로운 관광 상품 개발의 일환으로 나짱 지역을 적극적으로 홍보에 열을 올리고 있지만...... 아무리 그렇다 해도 나의 판단은 ‘과연 그게 가능할까?’ 하는 의구심이다.
이런 상황에서 무이네와 함께 남부 여행권역에서 톡톡히 효자 노릇을 하고 있는 달랏은........ 호치민에서는 305km 거리에 위치하고, 나짱에서는 불과 134km 정도 거리밖에 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여행자들은 달랏을 호치민 방문과 여행 스케줄에 연계해서 이동하지, 나짱과 연계하는 경우는 적다. 오히려 무이네나 달랏에서 다낭(호이안)으로 이동하는 스케줄에서 중간 경유지로서 겨우 활용하고 있다고 나는 판단하고 있다.
도시와 산업의 현대화에 따라 달랏에서도 비닐하우스를 이용하는 도시근교영농이 활발하게 펼쳐지고 비약적인 발전을 보이고 있다. 호치민이라는 거대한 경제도시이자 훌륭한 소비처를 인근에 두고 있는 덕분에, 이곳에서 재배된 다양한 화훼와 온갖 채소와 과일 등이 풍부하면서도 넘쳐날 정도로 재배 생산되고 있다. 해당면적 비율 세계 최고의 비닐하우스 보유국이자 최대 생산국인 대한민국의 뛰어난 안목과 기술을 가진 영농인들이 이곳 달랏에 진출하여 달랏의 도시근교영농을 이끌고 있다. 특히, 베트남의 무더운 날씨에는 딸기 재배가 불가능한데 유독 이곳 달랏에서만은 딸기 재배가 가능했고 대단히 유명했다고 한다. 그러자 대한민국의 젊은 인재들이 우수한 품질의 딸기 종자를 가지고 이곳에서 처음 비닐하우스를 통한 품종이 개량된 딸기를 선보였는데, 지금은 달랏의 마스코트라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인기 농산물이 되었다.
아울러 식민지시절 지배세력인 프랑스인들의 기호를 맞추기 위하여 들여와 재배하기 시작한 커피가 지금은 생산량 세계 2위의 커피 대국으로 만들어 버리고 말았다. 주로 지대가 낮은 지역에서 맛이 좀 쓰고 카페인이 강한 로브스타종을 주로 재배하였으나, 품종의 고급화를 시도하던 중에, 유독 달랏 지역의 기후가 고급 커피품종인 아라비카 커피 생산에 최적지라고 판명되어 집중적인 재배를 하고 있다.
달랏이 처음 시작된 장소이기도 한 도심의 중앙에는 둘레 길이가 약 5km에 이르는 쑤언흐엉 호수가 있어서 전체적 도시의 분위기를 더욱 낭만적으로 만드러 주고 있다. 흡사 우리고향 충주의 호암지를 마주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이 생겨날 정도이다. 식민시절 홍수의 범람을 막기 위하여 조성된 인공호수로 쑤언흐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베트남 시인의 이름에서 따 온 것으로 ‘봄의 향기’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니 그 호수의 자태가 더욱 고혹적으로 우리 곁에 다가오는 것만 같다.
호수를 따라 조금만 발걸음을 옮기다보면 요즈음 새롭게 핫 플레이스로 떠올라 ‘꼭 한 번은 가보아야 한다는 새로운 명소인 람비엣 광장(Lam Viet Square)이 나타난다. 흡사 달팽이처럼 생긴 달랏 전망대(Dalat View Coffee Shop)에 오르면 낮과 밤이 전혀 다른 달랏 도심의 풍경을 멋지게 조망할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는 이곳을 그대로 패스하고 서둘러 발걸음을 옮긴다.
도로 토목공사가 한창 진행 중이어서 진행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다소 위험하고 매우 불편하긴 했으나....... 걷기에는 일가견을 이룬 챠밍여사가 이런 무더위 속에서도 씩씩하게 앞장서서 언덕길을 올라간다. 택시를 탈까도 생각했었지만, 막상 잡으려 하니 나타나는 택시가 없다. 거리가 제법 된다고 통지하였음에도 챠밍여사는 서둘러 앞장서더니 오로지 직진으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뿔고를 한다. 죽어라 따라가야지 별 수 있겠나?
우리는 지금 베트남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달랏 기차역으로 걸어서 가고 있다.
슬픈 식민지 시대의 유산인 콜로니얼 건축물이지만, 세 개의 뾰족한 지붕이 하늘을 찌를 듯 솟아있는 독특한 디자인의 역은 보기에 따라 절묘하게 서구의 분위기와 동양적인 멋의 조화를 떠올리게 만들기에도 충분한 대단히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아름다운 건축물을 배경으로 사진에 담으려는 여행자들로 기차역은 붐비고 있었다.
달랏이 천상의 휴양지라고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때, 베트남의 다른 지역엔 흔하게 있으나 달랏에는 없는(無) 것이 세 가지가 있다고 말들을 했었다. 에어컨, 신호등, 횡단보도, 이렇게 세 가지가 없는 도시가 달랏이었다.
하지만, 그랬던 달랏도 몰라보게 달라졌다. 우리가 묵고있는 숙소에는 에어컨이 없이 선풍기만 달려 있었지만, 점차 에어컨이 늘어가는 추세다. 유명셀ㄹ 타기 시작하면서 달랏의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하고 있다. 거기에다 아무리 고산지대라고는 하지만 한낮의 기온과 날씨는 여타의 베트남 지역과 별반 다르지 않게 느껴지고 실제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가히 한낮의 기온은 찜통을 방불케 할 정도이다. 다만, 해질녘만 되면 가을 날씨처럼 선선해지고 현지인들 중에는 패딩이나 파커를 걸치는 사람들을 아주 흔하게 볼 수 있다. 잠을 잘 때는 선풍기도 켜지않고 창문만 열어놓고 숙면을 취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신호등과 횡단보도가 없다는 말은 이제는 맞지 않는다.
개뿔! 없기는 어디 없어. 사방 천지가 오토바이 행렬뿐이요, 길모퉁이 마다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지천이다. 하지만 별반 실효성에는 절대적으로 의문이 든다.
호치민 중심가나 하노이 중심가나 다낭 교차로랑 달랏의 길거리 풍경은 하나 같이 똑같다. 세상이 그만큼 급속도로 발전하고 변모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에서 살아남으려면...... 가장 먼저 오토바이 행렬 속으로 당당하게 무단횡단을 감행하는 방법을 터득해야만 겨우 살아갈 수 있다. 달랏도 똑같이 그런 실정이다. 오토바이 운전이라면 나도 어느 정도 자신 있다고 호언장담할 정도이긴 한데..... 그런 나도 달랏에서 오토바이 렌탈을 결국엔 포기하고 말았다. 무서워서......
짧게...... 베트남의 종교에 대해서 생각하자면...... 어쩌면 그것은 베트남이 민주주의인지 공산주의인지, 아니면 사회주의인지 자본주의인지를 들여다보는 것 보다 훨씬 아리송하고 도저히 쉽게 이해가 잘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까........ 거기에서 그들과 한동안 살아보면서 깨닫고 이해를 하던가..... 아니면 차라리 신경을 끄는 것이 더 탁월한 결정이 아닐까? 하지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을까?
아주 흔하게....... 지나가는 사람 아무나 붙잡고 ‘베트남의 종교가 무엇일까요?’ 라고 질문을 던져보자. 열에 여덟은 ‘불교잖아요. 몰랐어요? 중국의 영향이 오랫동안 깊었고, 태국이나 캄보디아를 봐요. 온통 불교국가들 이잖아요. 그러니까 불교 말고 달리 뭐가 있겠어요. 당연히 불교지.’ 라고 대답을 해 올 것이다.
하지만...... 천만에 콩떡 만만에 팥떡이다.
베트남은 공산당이라는 일당이 재배하는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는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그런 공산당이 지배하는 사회주의에서 종교의 자유? 그것 나에게 물을 문제가 아닌 것 같다. 베트남 정부에나 할 질문이 아닐까?
베트남의 최대 종교는 짐작한 것처럼 불교(佛敎) 이기는 한데...... 2.000년을 기준으로 전체인구의 약 12.2%을 차지한다. 다음이 카톨릭 교회로 약 8.3%를 차지한다. 베트남에서 탄생한 까오다이교가 약 4.8%의 교세를 확보하고 있는 실정이다. 나머지 73,2%가 대부분 무종교주의자들 이다. 여기에는 힌두교. 이슬람교. 유교. 도교. 개신교를 극히 일부 포함하고 있지만, 나머지 분포의 절대다수는 무신론자들이다. 한마디로 베트남은 의외로 뚜렷하게 내세울만한 종교가 없는 나라인 것이다.
그런 와중에 카톨릭 신자의 수가 불교도에 비슷한 수준까지 차지하고 있다는 사실에 자못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다. 결과적으로 종교를 가진 사람들 중에 하나는 카톨릭 신자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베트남의 카톨릭은 프랑스의 식민지 쟁탈을 위한 침략전쟁과 함께 들어왔다. 속된 표현을 하자면, ‘원수의 종교가 지금 그네들의 신앙이 되었다’는 뜻이다. 필리핀의 카톨릭도 그렇고 중앙아메리카나 남아메리카를 절대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침략자들의 종교였던 역시나 같은 카톨릭에 대해서도 똑같은 의문을 떨쳐내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두 번째는, 베트남의 교회는 유독 핑크색이 많다. 프랑스의 영향으로 컬러 풀 해졌다고 이해하기에는 좀...... 다낭의 교회도, 호치민의 교회도, 여기 달랏의 교회까지........ 유독 핑크빛 교회 건물이 눈에 확 쏟아져 들어온다.
세 번째는, 베트남의 교회는 정해진 예배시간을 제외하고는 항상 굳게 잠겨 있다. 유럽을 여행할 때면 수시로 아무 교회에나 들어가 잠시 기도 겸 안정의 시간을 가지곤 한다. 그런 시간이 베트남에서는 불가능하다. 교회는 언제나 휴일의 관공서처럼 굳게만 잠겨 있다. 여기저기 수소문을 해보니...... 아직은 생활경제력이 그리 높지 않은 베트남에서는 교회의 문을 열어 놓으면 부랑자들이 드나들면서 물건이 없어지기도 하고,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숙소로 쓰일 우려가 있어서 라는 답변이었다. 교회는 어려운 사람들을 보호하고 자선을 베푸는 그런 장소가 아니었나? 어린 양들이 비를 맞고 굶주림에 떠는데...... 교회가 교회의 재산을 먼저 지켜야 한다는 말이 성립이 되는 것인가? 나는 잘 모르겠다. 그래도 되는 것인지.
그런 우려 때문에 떠돌이 여행자일 지라도 교회에서 기도시간 좀 갖고자 하는데 문이 잠겨 있어서 기도실에 들어갈 수 없다는 현실을 어떻게 이해할까?
달랏의 랜드 마크로 오랫동안 역할을 해온 (달랏 대성당)이 있다.
이중에서 고딕건축 양식의 노란색 교회가 바로 (달랏 대성당)이다. 47m 높이의 뾰족한 종탑 위에 수탁 모양의 풍향계가 달려 있어서 현지인들은 수탉성당(Chicken Chuch)라고 불리며, 달랏 시내의 어느 곳에서나 대성당의 종탑이 보여 쉽게 찾을 수 있다. 베트남 카톨릭의 달랏 교구를 관장하는 대성당의 정식 명칭은 ‘달랏 성 니콜라스 대성당(St. Nicholas Cathedral, Da Lat)’이다.
본래 이 자리에는 오래된 낡은 교회가 기존에 있었는데, 교회를 중심으로 구호활동이 벌어지자 결핵환자들이 멀리에서까지 찾아들게 되었다. 치료와 요양소를 겸하게 되었고, 덕분에 교회인근으로 유럽풍의 공동묘지까지 조성되었다. 1935년에 이 낡은 교회 겸 치료시설에 ’달랏 파스테르 연구소‘가 나짱에 이어 들어섰다. 그러다가 연구소가 인근의 새로운 시설로 옮겨가게 되자, 비로소 낡은 본래의 교회를 대체하는 고딕성당을 지어서 대성당으로 삼게 되었다.
대성당에서 건너다보이는 남쪽 언덕의 뒤편으로 또 하나의 아름다운 로마네스크 양식의 핑크색 교회가 대성당에 이어서 착공되었고 완공되었다. 도메인 드 마리(Domaine de Marie)는 카톨릭 수도원이며 동시에 수녀원이다. 지역의 어린이들 교육을 위한 학교 프로그램을 수녀들이 운영하고 있다.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탄생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이었던 장 드쿠의 아내 수잔 음베르의 지원이 절대적이었다. 17세기 프랑스에서 유행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수도원은 페인트칠이 아니라 실제의 핑크색 석회암을 멀리서 가져와 시공함으로 유독 화려한 아름다움을 한껏 뽐낸다. 소박한 실내장식과는 다르게 화려한 스테인 글라스 장식의 창문이 아름답다. 이등변 삼각형을 나열하고 끼워 맞추기를 한 것 같은 교회의 외관(지붕) 설계덕분에 작은 아치모양의 여럿으로 나뉜 스테인 글라스를 통해서 창조적인 조명작업이 가능해졌던 것이다. 십자가는 수도원의 삼각형 꼭지점 위에 있다. 수도원은 드넓은 면적을 차지하고 있으며, 수도원과 수녀원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성모 마리아 수도원의 절대적 후원자였던 인도차이나 식민지 총독의 부인 수잔 움베르가 교통사고로 사망하자, 수도원 본당의 바로 안쪽에 꽃이 만발해 있는 정원 안쪽에 무덤을 만들어 안치했다.
달랏의 카톨릭 신자는 물론 많은 현지인들로부터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아름다운 명소이다.
해발 1.500m의 달랏은 연중 선선하고 에어컨이 필요 없다고 누가 말을 했던가?
나는 그 말을 철썩 같이 믿었다. 인터넷 검색에도 여행안내 책자에도 연평균 기온이 18~25도를 유지한다고 불변의 진리를 말하듯이 확실하게 명기되어 있었다. 해발 1.500m이면 우리고장 월악산 정상부근의 헬기장(약수터) 높이다. 젊어서 그곳에서 비박을 몇 번 경험해 본 처지로서는 당연히 한여름 무더위는 없을 것이라고 믿을 수밖에...... 하지만 결론은...... ‘그걸 믿은 내가 잘못이지’였다. 숙소에 에어컨은 설치되어 있지 않았고 선풍기 달랑 하나뿐이었는데, 잠을 잘 때는 선풍기도 켜지 않은 채 숙면을 취할 수는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한여름에도 감행해야만 하는 외출시간인 대낮이 문제였다.
베트남과 우리나라의 시차는 2시간인데, 온도계 차이는 아무리 적게 잡아도 10도 이상 차이가 나 보였다. 25도는 여간해서 넘지 않는다고? 내가 머물렀던 기간 내내 한낮의 온도가 35도 이하는 없었던 것 같다. 장담하건데 달랏의 날씨는 우리나라 한여름은 대구 날씨를 염두에 두면 별로 틀리지 않은 것 같다. 속된 표현으로 ‘쪄 죽는 줄 알았다’ ‘디지게 덥다’라고 인상 벅벅 쓰면서 강조하면 이해 끝.
온전히 걸어서 쑤언흐엉 호수를 돌아보고, 다시 걸어서 달랏 기차역을 구경하고 나니까....... 이건 숫제 여행이 아니라 강제 징용된 노역수준이라고 할까? 달랏 전망대에서 도심을 내려다보고, 케이블카를 타기도 하고, 건너편의 쭉럼 선원을 들려서 랑비앙산에 트래킹을 잠깐 하고 인근의 코피농장에서 현지에서 생산된 진짜 커피를 마시거나, 아니면 다딴라 폭포와 엘리펀트 폭포를 돌아보는 것 까지, 둘 중의 하나를 오늘 스케줄에 넣었었는데........ 말짱 도루묵...... 이러다 정말 사람 잡게 생겼다. ‘느릿느릿 여유 있고 충분한 휴식이 있는 베트남여행’ 이라고 호언장담하고 떠나온 여행인데, 자칫 식민지 약탈전쟁의 고충 체험학습장은 아닐까?
오늘 예정했던 스케줄을 중단하고 지나가는 택시를 잡아서 가족들을 숙소로 먼저 돌려보냈다. 우선 시원하게 휴식을 취하라고 당부해서 말이다. 날씨가 선선한 달랏에서는 풀장이 그리 효용성이 떨어지겠다고 생각한 나의 판단이 그렇게 후회가 될 수 없었다. 달랏을 여름에 여행한다면....... 무조건 풀장이 있는 숙소를 어렵거나 좀 비싸거나 무조건 선택하세요!!!!!!!(강추)
내가 일행과 떨어진 이유는 가능하면 오늘 중에 다음여행지로 이동하는 과정에 필요한 슬리핑 버스(Open Tour Bus) 티켓을 예매해 두기 휘해서였다. 여행스케줄숙소)은 이미 정해져있는데 만약에 차편이 없어서 이동하지 못하게 된다면, 그때는 여러 가지로 복잡한 상황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스케줄에 여유는 있지만, 혹시나 하는 우려로 이런 짬을 이용해 미리 예약을 해 두려는...... 여행 인솔자이자 경험자의 책임감이라 해두고 싶지만, 사실은 위대한(?) 마님을 성심을 다해 모셔야 하는 포터의 당연한 책무가 아니겠는가?
베트남에는 아주 많은 여행사들이 다양한 버스노선을 운행 중인데, 앞서 설명한 바처럼 (신투어리스트)와 (풍짱 여행사)가 대표적으로 양분하고 있다고 볼 수 있겠다. 신투어는 베트남 전역을 골고루 커버하는 것을 주안점으로 삼고, 풍짱은 후발주자인 만큼 전국적 커버 보다는 일부지역을 집중 공략하는 노선을 추구한다.
베트남 남부 호치민에서 중부 다낭까지를 보자면, 신투어는 야간 슬리핑 버스 위주이고 낮에는 두 세 번의 나짱까지의 부분노선만 운행한다. 하지만 풍짱의 경우 야간 버스는 신투어와 같지만, 주간의 경우 부분노선들을 하루 종일 바쁘게 빼곡하게 운행하는 시스템을 채택한다. 쉽게 말해서..... 아주 장거리는 신투어가 편하고, 단거리 여행은 풍짱이 대세라고 할 수 있다. 하여 우리의 경우 호치민에서 달랏은 풍짱이었지만, 이제 달랏에서 나짱을 거쳐 호이안으로 가는 여정은 신투어가 그동안의 내 경험에서 훨씬 유용하다는 입장을 고수해 왔었다.
그랩(Grab)을 이용해서 여행자 거리 구석의 신투어리스트 티켓 부스를 향했다. 그랩이란 우리나라에는 없지만 동남아 전역에서 아주 흔한 대중교통수단의 하나라 하겠다. 우리나라 카카오 택시에 비해 한 단계 이전 모델쯤이라 하면 이해가 쉽겠다. 길거리에 보면 사방에 초록색 쪼끼을 입은 사람들의 오토바이가 보이는데 그것이 바로 그랩이다. 영어사전을 찾아보면 ‘매달리듯 붙잡다’라고 적혀 있다. 진가는 초록색 쪼기 오토바이를 세우던가, 핸디폰에 앱을 이용해 요청하면 쏜살같이 달려온다. 목적지를 말하고 가격흥정을 하고나서 합의가 되면 뒤에 올라타 운전기사의 허리를 ‘꽉 껴안고 매달려 간다’고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교통체증을 조금은 피하고 요금이 저렴하기에 너도나도 흔하게 현재 이용되는 교통방법이다. 다만 우리나라와 베트남의 경제력 차이만큼이나 물가 차이가 분명한데, 그랩 기사들이 장난(?) 이랄까? 현지인 이용료와 여행자 이용료의 차이가 천차만별이다. 가격흥정을 잘 할 필요가 있다.
그랩을 이용해서 여행자 거리 언덕 아래에 위치한 신투어 티켓 부스로 향했다.
‘오 마이 갓!!!!!’
‘왜 불길한 예감은 늘 틀리지 않는 것일까?’하는 푸념처럼....... ‘가는 날이 장날?’
티켓 부스가 굳게 잠겨있다. 풍짱의 경우는 전용 터미널까지 있고(집중노선이기에) 거의 24시간 터미널이 오픈되어 있는 실정이었는데, 신투어의 경우는 야간버스와 새벽버스만이 있는 탓인지....... 부스 운영 시간이 한나절에서 오전 정도로 제한된 서비스를 하고 있다. 사무실이 잠겼는데 업무를 보기가 불가능해 졌고, 결국엔 내일 아침 지정된 시간에 다시 올 밖에.........
여행자 거리 쪽으로 언덕을 올라가면 달랏의 중심부로 여겨지는 반탄시장이 나온다. 시간은 해질녘으로 자가서고 있지만 여전히 더위는 기승을 부리고 있다. 한참을 걸었다고 땀이 흘러내리고 숨이 턱턱 가빠져 온다. 달랏시장 근처에 캔터키 할아버지 매장(KFC)이 있다. 대형 호텔건물 1층에 입점해 있다고 보아야 하겠다. 전면으로 테라스 겸용 휴게소가 정원처럼 커다랗게 설치되어 있어서, 오가는 여행자들이 쉬어가면서 인증 샷 명소로 꽤나 유명한 명소다. 인근 카페에서 아이스커피를 테이크 아웃해서 잠시 쉬었다 가려고 하는 중에........ 근처 호텔에서 수학여행중인 듯 보이는 학생들 한 무리가 몰려나와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으려 모여들고 있었다. 한 학생이 내 배낭의 태극기를 보고는 ‘사랑해요 코리아’라며 손을 흔들어 준다. 그래서 ‘나도 베트남의 모든 것을 너무너무 사랑해’라고 큰 목소리로 화답해 주었다. 순간 주변사람들의 모든 시선이 쏠릴 정도로 엄청난 함성이 울려 퍼졌다.
학생들 단체사진을 나도 기념으로 옆에서 찍겠다고 하자 모두들 기꺼이 함성과 함께 포즈를 취해준다. 소단위로 나뉘어 사진 찍기에 응해주고, 나와의 기념사진을 요청하기도 했다. 인솔 선생님들까지 나서서 적극적으로 응대해 주신다.
부러 ‘내가 BTS 큰삼촌이야’라고 뻥을 치는 순간.....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참으로 헤어지는 게 아쉬운 순간이었다. 어떻게든 좀 더 대화를 해 보았으면 좋았을 텐데........
자본주의 옷을 입고 민주주의 방식으로 생활하면서도, 학교에서는 공산주의자들에 의해서 사회주의 이상을 공부하는 학생들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베트남의 국호는 분명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국호에 ‘사회주의’를 선명하게 표기하는 나라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북한. 소련. 중국. 쿠바. 캄보디아 등이 대표적이다. 이중에서 베트남. 중국. 북한 등의 국가를 시작으로 대부분의 사회주의 국가를 ‘공산주의 국가’라고 불러도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이 나의 주관적 생각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공산주의’를 이야기하면 흑백논리의 이분법적 사고를 가진 반공주의자거나 철지난 구시대의 이념적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한 백해무익한 사고를 가진 사회악처럼 치부해 버리게 되었다. 하지만 대신으로 ‘사회주의’는 하나의 자연스러운 이념이자 이해해 주어야할 어떤 배려의 대상으로 신분세탁이 된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절대로 그것은 아니다. 일상 속에서 쉽사리 공산주의를 꺼내거나 논의하지는 않는 현실이지만, 따지고 보자면 오늘날의 사회주의 국가의 다른 이름과 실체는 엄연히 공산주의 국가이기 때문이다.
사회주의(社會主義)는 어디까지나 민주주의(民主主義) 토양위에서 자유 시장경제를 모태로 해서 탄생했다. 하지만, 거대자본가들의 등장과 함께 시장에서 생겨난 모든 부를 소수 자본가만이 독점하게 되고, 절대다수의 생산노동자 계층은 그저 상품을 생산하기 위한 도구로 전락해 버리고 말았다. 자본주의의 한계가 드러난 것이다. 신자본주의자들은 이런 폐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강력한 통제력을 가진 국가를 내세우고 되었고, 국가들이 모여서 자유 시장경제에 대한 체계와 제도장치를 마련하였다. 개선된 자본주의는 다시 발전을 계속하리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거대자본이 국가와 로비를 통해 거래를 하게 된 것이다. 세상은 여전히 거대금융자본이 지배하게 되었다. 극소수의 거대금융 자본과 부패한 국가통치자들만이 모든 이익과 혜택을 여전히 누리게 되었다. 생산을 증대되었고 수요증가로 시장은 폭발적으로 비약적 성장을 계속하게 되었지만....... 절대다수의 노동자계급 사람들의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 가기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생겨난 것이 바로 사회주의 공화국이다.
자본가와 부패한 권력자들은 절대로 자신들이 이미 차지하고 소유한 부와 권력을 내놓을 생각이 없다. 묘하게도 부와 권력이란 놈은 아무리 가져도 끝이 없이 더 기지고 싶은 중독성이 유독 강하다. 그렇기 때문에 사회주의 공화국의 시작에는 반듯이....... 부패가 만연한 자본주의와 혁명이 필요해 진다. 혁명을 통해야만 모든 사회악을 쓸어내고 제대로 된 절대다수의 노동자를 위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토지로 대표되는 자본가와 권력이 가지고 있던 모든 재산과 지위와 권력은 박탈된다. 절대다수의 모든 노동자들이 공정한 시장경제 운영은 물론 모든 수익의 배분에까지 공평하고 정대하게 참여하는 한 차원 높게 진보된 세상이 바로 사회주의인 것이다. 여기까지가 순수한 마르크스의 ‘사회주의 이론에 따르는 것 이라고 할 수 있겠다.
여기에서 대두되는 가장 큰 문제는....... 고대 그리스의 민주정치처럼 수십만, 수백만, 수천만 명의 모든 노동자가 직접 참여하는 사회주의 방식의 시장경제 운영이 현실적으로 절대 불가능하다는데 있었다. 당장 현실적으로 대두되는 수백만 가지의 의견이나 방침 하나하나를 매번 모든 노동자의 의견이 직접 참여의 방식으로는 해결될 수 없다는 데 있었다. 모든 사람의 요구를 모든 사람이 만족할 수 있는 선에서 모든 사람의 토의와 결정으로 다 이루어질 수는 없는 것이다. 다수의 결정이 적어도 누군가에게는 최선의 바램이 되지도 않을 수가 있지 않겠는가? 하지만, 사회주의는 항상 모든 사람을 위해 최선만을 찾아내고 선택해야만 이룩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사회주의가 자본주의와 다른 점이기도 하겠지만, 가장 치명적인 한계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 절대다수의 노동자를 누가 어떤 방식으로 수렴하여 이상적인 사회를 펼쳐나갈 것인가? 자본주의는 이런 상황에서 강력한 국가를 선택했고 그 결과는 부패한 권력으로 드러났다. 사회주의 혁명가들 또한 이 대목에서 발목이 잡히고 만 것이다. 그 결과로 사회주의 혁명가들이 찾아내고 선택한 것이 바로 (공산당에 의한 일당 지배)였다. 노동자 출신 중에서 사회주의 이론에 충실하고 비전을 제시할 수 있는 사람들로 통치기관(공산당)을 세우고, 그들로 하여금 이상적인 사회주의 국가와 사회주의 방식의 공정하고 공평한 시장경제를 이끌어 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로 하여금 생겨난 모든 부를 공평하게 모든 노동자들에게 배분토록 하는 것이다.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노동자 계급 속에서 뽑아낸 인재들이기에, 그들은 절대로 거대자본가들의 폐단과 권력자들의 부패를 답습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이때부터 혁명으로 시작된 사회주의(社會主義) 국가 체재가 공산당이라는 일당이 지배하는 공산주의(共産主義) 국가체재로 바뀌게 된 것이다. 사회주의가 한 차원 진일보 한 것이 공산주의라 할 수도 있겠고, 이념적인 사회주의 국가를 지배하는 통치체제가 공상당이므로 그들을 공산주의 국가라 불러도 잘못된 것은 결코 아니라는 것이 나의 생각이다. 그들 국가에는 공산당 외에 다른 야당은 존재할 수도 존재하지도 않는다.
그랬음에도....... 자본주의는 탐욕과 분열로 망하고, 공산주의(사회주의)는 부패로 망한다고 누군가가 말했다. 지금 중국과 베트남은 (부패와 전쟁) 중이다. 그것은 자본주의 국가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부패와는 사뭇 정도와 차원이 크게 다르다. 좀 더 솔직하게 내 방식으로 표현한다면......... 현실적으로 지금이 사회주의(공산주의) 한계가 어느 정도 목전에 이르지 않았나 하는 것이 내 솔직한 고백이다. 2050년 쯤을 나는 사회주의의 한계로 보고있다.(그것은 어디까지나 중국을 포함한 비슷한 방식의 사회주의 국가의 한계를 일컷는다)
‘부패가 근절된 사회주의 국가는...... 완전한 허상이다.’
21세기 초를 기반으로 중국의 인구를 대략 17억이라 가정하고 생각해 보자.
국가가 국방 인프라 구축을 위하여 인구 1인당 1천 원씩을 세금에 추가징수 한다고 치자. 선동에 유달리 강한 일당 지배국가에서 국가안전을 위해서 1인당 1천 원의 추가징수는 아무런 반향이나 물의를 일으키지 않을 것이 자명하다. 그렇게 한 달 안에 세금으로 추가적으로 거둬들이는 돈의 액수가 1조 칠천억 원이 된다. 아주 쉽게 말이다. 그 돈이면 최신형 비행기 몇 대를 살 수 있을까? 이런 일이 당연하듯 아주 쉽게 흔하게 벌어지는 사회가 바로 중국을 비롯한 사회주의 공화국(공산국가)들이다.
그런 사회의 최고 지도충의 권력자나 기업가가 이따금씩 세상을 놀라게 하는 부패 스캔들을 일으킨다. 17억의 인구를 가진 중국에서 한 부패한 사업가가 대충 잡아 1인당 만 원 정도의 폭리를 취해 비자금을 해외에 은닉했다고 치자. 요즘 흔한 게 핸디폰인데 작정하고 이익에서 한 대당 일만 원을 몰래 빼내서 은닉하는 일이란 언제든 벌어질 수 있는 일이다. 한사람이 두 세대의 핸디폰을 사용하기도 하니까 그냥 쉽게 일 년 동안 17억 개의 판매를 했고 비자금을 조성했다고 치자. 그 금액이 17조원이 된다. 우리나라 경제 시스템 안에서의 경제단위와 중국에서의 경제단위는 차원이 다른 것이다. 그럼 이 삼년에 걸쳐서 꾸준히 비자금을 은닉했다면....... 17억이 아니라...... 17조. 30조, 50조가 되는 것이다. 단시간에 세계적 거부가 될 수 있다. 기발한 생각과 어느정도 자본과 최고위층의 비밀스런 협조가 이루어진다면 언제든지 말이다.
그런 결과가 뻔히 눈에 보이는데........ 어떻게 부패를 외면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 자금이 해외로 빠져나가는 것을 감시하는 관리에게....... 은행 담당자에게 1%, 세관원에게 1%씩을 주자. 1~3년 모른 체 눈감아 주고 나서 자녀를 해외 유학 보내는 것을 빌미로 온 가족이 이민 길에 오른다. 바하마군도 비자금 은행에 수백억을 가지고 말이다.
이것이 지금 중국과 베트남이 골머리를 앓고 있는 사회주의 공화국의 민낯인 것이다.
자본주의는 국가와 강력한 규제를 선택했고, 사회주의는 절대로 부패하지 않을 것 같은 공산당에게 무제한의 일당 지배를 허락했다. 하지만....... 부패는 이념과 체재를 가리지 않고 사방에서 우후죽순처럼 자라기 시작했다.
갑자기 등소평의 흑묘백묘론(不管黑貓白貓,能捉到老鼠就是好貓)이 불현 듯 떠오른다.
사회주의적 원칙적인 고정관념에만 갇혀있을 것이 아니라....... ‘흰고양이든 검은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가 좋은 고양이다’라며, 등소평은 ‘사회주의이던 자본주의이던지 간에 인민(노동자)이 모두 고르게 잘 먹고 잘 사는 나라가 좋은 나라이자 정부다’라고 주장해 지구상의 모든 공산주의자들을 놀라게 했었다.
그렇다면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 자본주의(민주주의)이던 사회주의(공산주의)이던 누가 먼저 제대로 부패(腐敗)를 척결하는가 일 것이다. 그것이야 말로 좀 더 나은 세상을 위한 최선의 방책일 것이다.
체제 논리나 이념 투쟁은 ‘부패와의 전쟁’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룬 후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지금 저 학생들이 10년 후에는 모두가 베트남 사회의 중심에 속해 있을 것이다. 30년 후에는 저들 중에 일부가 베트남의 지도층에서 한 나라의 미래를 좌지우지 할지도 모를 일이다.
미래에 대한 선택의 기준은 대략 둘로 나뉜다. 기업에 취직을 하던 직접 장사에서 시작하던 부자가 되겠다는 부류가 다수를 차지한다. 그들은 이미 자본주의의 옷을 입고 생활해 왔고, 자본주의 자유 시장경제 속에서야 그런 부자의 꿈이 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좀 더 민주주의 국가들이 실행하고 있는 만큼의 자유로운 경쟁의 도입과 규제의 철폐와 시장의 개방을 요구한다. 그들에게 사회주의 이념이나 체제는 꼭 그리 달갑거나 자신들이 이룩해야할 책임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일부의 자질이 뛰어난 인재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그들에게 있어서 출세란 관리가 되어서 국가에 애국하며 사회주의 이상 국가를 이룩하는 것이다. 누구에게나 고르게 열려있는 관리의 길만이 사회지도층으로 부상할 수 있는 최선의 방편이라 생각한다. 여기에는 이들의 지극히 보편적 일상에서 보고 느끼는 권력의 속성, 동네 경찰이나 동사무소 경리에 이르기 까지 크건 작건 공권력에 속한 신분이 되면 일단 무언가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는 주변 환경에서 벌써 권력탐닉에 쇠뇌 된다고 보여 지기도 한다. 그들은 공산당원이 되어야 하고, 공산당의 사회적 이념과 제도를 어떤 식으로든 자본주의에 만연해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반영해야만 하는 것이다. 혼란이 오고 신념이 무뎌져 가고...... 쉽게 부패에 빠진다.
누가 지금 베트남 사회를 사회주의 이념에 충실한 공산당이 일당 지배하는 국가로 보겠는가? 그들은 모두 자본주의의 옷을 입고 민주주의 방식으로 생활하고 있다. 체제이념과 현실적 생활이 전혀 다른 이질적인 모순된 사회가 바로 베트남이다. 이는 점차 현실적인 수많은 문제를 일으키게 될 것이다. 한 국가의 체제이념과 실질적 문화생활이 다른 방식으로는 절대로 미래에 대한 비전이나 확신이 설 수가 없게 된다. 어느 순간은 결정을 해야만 한다. 베트남의 모든 국민들은 이제는 자유 시장경제를 토대로 하는 민주주의 방식의 자본주의 없이는 단 하루도 살 수가 없다. 하지만, 베트남의 공산당 정부는 사회주의 이념을 토대로 하는 공산당 일당의 지배 방식을 절대로 포기 할 생각이 없다. 비록 인권이 어느 정도 침해당하고 시장개방이 더뎌지고 부강한 나라로 가는 발전이 늦어진다고 해도 그들은 공산당을 포기할 생각이 전혀 없다. 그들은 모든 것을 ‘공산당의 우선적 존립’이라는 전제하에서만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중국 정부와 똑같은 원칙론적 입장이다. 중국이나 베트남 같은 국가가 설령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 해도, 그 마지막 순간까지는 적어도 자신들인 공산당에 의한 지배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국가도 인민(노동자)도 모두 공산당을 위해 공산당에 의해 존립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것이 곧 절대로 양보할 수 없는 공산당의 기득권인 것이다. 우리에겐 정당이 국가에 속한 아래의 기관이지만, 저들에게 공산당은 곧 국가 위의 신성한 개념이 아닐까?
유럽의 도시를 여행하게 되면 어떻게든 벼룩시장(도깨비시장)은 방문해보려고 노력한다. 오랜 세월동안 그 도시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숨결과 역사와 생활풍속이 고스란히 담겨있기 때문이다. 가끔은 작은 소품을 구입하기도 하지만, 그냥 그네들의 시간과 일상 속에 잠시라도 머물러볼 수 있다는 호기심 가득한 체험의 장이기 때문이다.
동남아의 도시를 여행하게 되면 어떻게든 야시장만은 꼭 방문하려고 애를 쓴다. 그네들의 일상이 녹아있다는 사실에 기필코 찾아가려는 것은 동일하겠지만, 야시장에는 그 외에도 수많은 볼거리와 먹을거리가 넘쳐나기 때문이다. 낯선 먹거리가 풍부할뿐더러 가격까지 저렴하니....... 배낭여행자가 호사를 누려보기에는 정말로 딱 소리 나는 장소가 바로 야시장이다. 도시를 옮겨갈 때마다 같은듯하면서도 쪼금씩 다른 것 같은 야시장의 매력과 정취에 흠뻑 빠져보는 것 또한 동남아 여행에서 결코 빼놓을 수 없는 즐거움이다.
산간오지 달랏이 이제는 베트남에서도 유명한 고급 휴양지로 발전하면서, 필요 없다던 에어컨이 설치되고, 아예 없다던 횡단보도와 신호등이 도심 사방에 우후죽순처럼 생겨나는 전혀 다른 엉뚱한 세상이 되어 버렸다. 도심의 어느 곳을 가든지 사람들과 오토바이로 홍수를 이루고 있는 것이 엄연한 현실인 것이다.
대충 어림잡아....... 달랏에 근거지를 두고 얽힌 채 살아가는 사람들의 숫자가 어림잡아 40만에 이른다고 한다. 내가 사는 충주시의 두 배에 가까운 엄연한 대도시인 것이다. 우리 고향은 불과 2~3년 사이에 인구가 눈에 띄게 줄어드는 형편인데........ 달랏은 도시의 반경을 마냥 확장해야만 할 것으로 보인다.
도시설계공학을 전공한 내 지인의 말씀에 의거하자면........ 반듯이 대한민국이라는 전제를 규정하지 않는다 해도......... 한 도시의 인구가 30만 정도일 때 가장 살기가 좋다고 한다. 경제적 자립이 어느 정도 가능하고, 그 정도 인구는 되어야 다양하게 문화생활의 장이 마련될 수 있다고 한다. 계획도시로서의 안정성과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거주민들에게 양질의 문화적 혜택과 복지가 가장 효율적일 수 있는 크기의 도시가 약 30만의 인구에다가 홍수나 가뭄이나 지진 등의 자연재해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지리적 환경을 가지고 있으면 금상첨화라 했다. 도시 스스로 쓰레기와 환경오염 문제까지를 스스로 자정할 수 있는 크기의 도시가 바로 그런 곳이라고 했다. 나는 아주 오랫동안 그런 전제하에서 살기 좋은 도시를 찾아왔는데........ 최종적 결론으로 선택한 장소가 바로 충주(忠州市)였다. 충주는 일단 홍수와 가뭄이 없다. 태풍도 거의 없다. 지진은 아예 모른다. 동서남북 어디로든지 자동차로 10분만 나가면 어디든 숲이고 강이고 산이다. 채 아직 오염에 찌들지 않은 푸른 대자연의 품속이다. 다만..... 다만...... 인구가 이십만을 조금 넘어서는 수준에서 늘지를 않고 있어서 경제적 자립과 복지에 조금 뒤떨어지고, 예술과 문화생활의 혜택이 좀 부족하고 접근이 용이하지가 않은 편이다. 대한민국을 아무리 요리조리 뜯어보고 뒤져보아도....... 살기 좋은 도시로서의 조건을 이만큼 갖춘 곳이 드문 것이 아니라 없지 싶다. 인구만 30만을 채운다면 말이다.
그런데 시방....... 여기 산간벽지 달랏의 인구가 주변지역을 합쳐서 40만을 넘어선다고 한다. 우리가 좋은 도시로서 우선적으로 갖추어야 할 기본 인프라가 구축되지 않은 선에서 거주자가 40만을 넘어선다는 것은........ 살기 참 힘든 곳이라는 결론이 내려지는 것이다. 온통 사람에 치어서 이리저리 쏠리면서 아둥바둥 살려고 몸부림치는 도시라는 말이다. 도시로서의 순기능이 이미 상실되었다는 뜻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모두가 흔하게 달랏하면 가장먼저 떠올리던 그런 이미지와 그런 기대들이 머지않아 모두를 배반하게 될 것이라는 엄연한 사실이다.
분명 지금의 달랏은...... 나를 이곳으로 오게끔 만든 수많은 정보들과 너무나 달라져 있다. 달랏이나 호치민이나 하노이나 다낭의 풍경과 다른 것이 거의 없어 보인다. 그저 그런...... 고만고만한 베트남의 한 도시로 느껴질 뿐이다. 한 3년쯤 지나면 그나마 희미한 달랏의 이미지와 풍경도 또 무섭게 변해가고 또 사라질 것이다.
다만, 좁은 도시에 인구가 급속도로 늘어가다 보니...... 유일하게 노점상(야시장)만 점점 더 커져가고 번창하는 것 같다. 현지인들에게 저렴한 생필품을 보급해주는 소중한 공간이겠지만, 여행자에게는 볼거리 먹거리 놀거리가 풍족한 흥미로운 장소이기 때문이다.
따지고 보면 우리나라 재래시장과 별반 달라 보이지 않는다.
모여든 사람들의 생김새가 좀 다르고, 왁자지껄 떠들어대는 언어가 다르고, 거래되는 물품들이 다소 우리에게 낯선 것 일뿐....... 흥정이 오가고 돈이 오가는 것은 어느 재래시장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 보인다.
신투어를 다녀서 언덕에 올라서 캔터키 할아버지 치킨 가계를 지나면 달랏의 중심가이자 재래시장이 서는 광장이다. 저만치 계단 아래로 광장 한가운데 분수대가 놓였고, 밤이되면 수많은 여행 잡지와 티비 방송에도 나왔던 유명한 달랏 야시장이 환한 조명과 함께 형성되는 것이다. 아직 해가 지기 전임에도 야시장 주변으로 이미 수많은 노점들이 물건들을 꺼내서 진열하기 시작하고 있는데...... 실로 그 규모가 장난이 아니다.
그래서 먼저 숙소로 보내서 쉬고 있을 마님에게 카톡을 보낸다.
‘슬슬 준비들 하고 나와서 택시를 잡아타고 달랏 마켓에 있는 캔터키 할아버지네 튀김가계로 와. 여기서 기다릴래. 오늘 저녁은 야시장 구경하고 여기서 저녁을 해결하는 것으로 하자. 천천히 와.’
야시장은 무조건 재미있고 배가 터질것 같은 포만감을 가득 안겨준다.
대신 지갑은 아직 여유가 생겨난다.
그렇게....... 달랏에서의 우리 여행은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 다음 이야기에서 달랏 여행기를 조금 더 이어가도록 하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피안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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