탑평리야 탑평리야
1
사방에서 타오르는 들불
뺨을 스치는 바람결엔 아직은 채 가시지 않은 지나간 겨울의 싸늘한 한기가 여운처럼 남아있었다. 넓적한 바위에 걸터앉아 한참을 쉬고 나니 어느새 등허리가 싸늘해짐을 느꼈다. 그 사이 배에선 꼬르륵 소리가 울려나왔다. 아무래도 다시 서둘러 발걸음을 재촉하야겠다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며 하늘을 올려다본다.
중천을 넘어선 눈부시던 햇살은 어느새 골짜기 사이로 숨어들 생각만으로 내닺고 있는지 따사로움도 줄어들고 발길에 부딪치는 그림자의 키만 점점 키워가고 있었다. 어제부터 그리도 서둘렀었건만 아무래도 오늘 안으로 길고 길었던 여정을 마친다는 것은 도저히 무리다 싶었다. 그렇다고 다시 오리 길을 되돌아가 관문현(冠文縣. 문경)에서 유숙을 하고, 내일 새벽에 서둘러 다시 이곳을 지나야 한다는 생각도 끔찍하게만 느껴졌다. 아무튼 오늘 해거름 안으로 새재(鳥嶺)을 무사히 넘을 수만 있다면 하룻밤 유숙이야 발화마을이던 냉천이던 은행정이던 상관이 없을 것만 같았다.
“도지야.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기에 한동안 아무 말이 없는 것이냐?
“말이 없는 것이 아니고 말할 기운이 하나도 남지 않아섭니다. 아재.
“그랬구나. 조금만 참아라. 예서 초곡(草谷) 주막까지 거리가 오리가 채 안될 듯싶구나. 주막에서부터 고갯길이 시작되는 것이니 잠시 요기를 하면서 고개 넘어설 궁리를 해 보자꾸나.”
“아재. 좀 전에 지나오면서 보자니 원(院. 관에서 운영하는 공공여관)도 폐허가 되었던데 험난한 고갯길에 주막이 여전하겠어요?”
“원의 수난이야 다분히 나라의 운명과 연관이 있을 터이고, 주막이야 신분이 높던 낮던 길을 가다가 보면 몸도 쉬어야 하고 배도 채워야 하는 것이니, 싸움터를 가는 군사들이거나 혹간 약탈을 일삼는 적당패거리 일지라도 함부로 없애지는 못하지 않겠느냐? 길을 지나가는 사람이 있는 한 주막은 그 자리에 있을 것이야. 그러니 거기까지만 좀 더 힘을 내 보거라.
“아재랑 집을 떠나 온지가 그새 두해가 되었네요. 그때도 이렇게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었을 때 탑들을 떠났던 기억이 어제만 갔습니다. 식구들도 다 잘 있겠지요?
“지난 가을 서신편에 모두 무탈하다고 했으니 다들 잘 있을 것이야. 그간 네 형이 장가를 들어 아들을 났다고 했으니 너도 이제 삼촌이 된 것이고........ 내일이면 모두 다시 만나게 될 것이야.”
그랬었다.
두 해전 집을 나설 때도 이렇게 진달래가 흐드러지게 피어 부는 바람에 그 연분홍 꽃잎이 마구 흩날리던 때였다. 두고 온 가족들의 모습이 하나하나씩 스쳐지나갔다.
마을 어귀까지 쫓아 나와 담장 너머에서 보일 듯 말듯 손을 흔들던 미금이 모습이 떠오르자 새삼 요동치는 심장소리가 귓전에 까지 들리는 듯 했다. 내일이면 미금이를 볼 수 있으리라. 산길 좌우로 빼곡히 무리지어 피어난 진달래 꽃망울마다 미금이 모습이 하나씩 하나씩 제각각 다른 모습으로 새겨져있었다.
“삼촌. 하늘재를 넘어가는 길이 더 수월한 것이 아니었나요?”
“글쎄다. 우리가 지나온 관문현에서 북쪽으로 발길을 돌려 여주목 고개를 지나 대의산 자락을 오른쪽으로 끼고 이번엔 여우목을 지나 중평리 계곡을 거쳐 바위산인 포암산 중턱의 하늘재를 넘었다면......... 아마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어찌보면 우리의 최종목적지가 소경(중원소경. 충주)이라는 전제하에서는 하늘재 보다는 새재가 좀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되기도 하고.”
“결국은 신풍에 들르시려고 이리로 방향을 잡으신 거잖아요?”
“응. 텃말 그분은 본인이나 가족이나 글을 아는 사람이 없다고 하니 우리가 지나는 편에 그간의 안부라도 전해주어야 하지 않겠느냐? 예서 경도(서라벌)가 쉬이 오갈 수 있는 거리도 아니고, 언제 그 분이 집으로 돌아오실지 기약도 없는 형편이니 그간의 소식이라도 전해야 하지 않겠느냐? 모두가 산사람의 처지이니 살아있다는 소식만이라도.........”
얼마를 더 그렇게 걸었을까.
등허리에 땀이 솟는 것을 느꼈을 즈음에야 저만치 앞에 주막이 마침내 모습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주막 지붕위로 높디높은 산봉우리와 깊디깊은 골짜기가 끝 모르게 펼쳐져있었다.
관갑(串岬)이라고 했었다.
험한 산봉우리들이 마치 실로 꿰어놓은 듯 빼곡하게 들어서 있어, 벼랑에 의지하여 그 골짜기 틈새를 이용 마치 사다리처럼 길을 만들었다고 했다.
북쪽으로는 우뚝하게 솟은 주흘산(主屹山)이 있고, 남쪽에는 거센 물줄기가 넘쳐대는 대탄(大灘)이 있다. 서쪽으로는 희양산(曦陽山)과 청화산(靑華山)이 있고 동쪽에는 천주산(天柱山)과 대원산(大院山)이 있다. 사방이 온통 험준한 산이다.
여기까지 허기진 배를 참고 오느라 몹시 힘이 들었던지 주막을 보자마자 도지가 서둘러 앞장서 뛰어갔다.
허름한 주막의 싸리담장을 막 들어서던 도지는 순간 주막에서 벌어지고 있는 상황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 저절로 뒷걸음질을 쳤다. 주막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던 것이다.
주막 문간안의 한 구석으로 노스님 한 분이 가부좌를 틀고 앉아 두 손을 합장하고 나지막하게 독경을 암송하고 있었다. 그리고 머리를 깎은 납자(衲子) 둘이 손을 벌려 노스님을 막아서고 있었는데 두 사람의 몰골이 가히 참혹하였다. 누구에겐가 터지고 얻어맞았음인지 머리가 깨져 피가 흘러내리고 승복은 여기저기 찢어져 너덜거리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라고. 아무리 막되어먹은 화적놈들 이기로서니 여기가 누구의 관할지역인지도 모르고 함부로 날뛴단 말이더냐? 이제라도 더 화를 입기 전에 이쯤에서 냉큼 사과하고 우리 가랑이 사이를 기어서 썩 물러간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뭐라고? 화적놈들? 꼴을 보아하니 네놈들이야말로 변변히 구실도 못하는 명색뿐인 화적 같은데 뭐가 어쩌고 어째? 어디 눈깔이 뚫렸으면 주위를 한 번 돌아보고 지껄여라. 병장기라고 하나씩 꿰차고는 있으나 어디 칼날이 제대로 들려나 모르겠다. 거기에 기껏해야 네 놈 뿐인 처지에 여기 이 형님들 숫자가 아홉이라는 것도 안보이냐? 셈을 할 줄을 아예 모르는 천치들이냐? 썩 어서 무릎을 꿇고 빌지 못하겠느냐?”
“숫자만 믿고 철없이 까부는 놈들. 뒷산에서 너희들 행태를 지켜보고 있는 우리 패거리가 안 느껴진단 말이냐? 그렇다면 어디 한 번 덤벼 보아라.”
“그런 거짓말에 속아 넘어갈 우리가 아니다. 오냐. 먼 길에 중놈들을 만나 오가는 노잣돈이나 마련 하렸더니 어디서 거랑말코 같은 놈들이 중간에 끼어들었구나. 네 놈들을 먼저 황천으로 보내놓고 뒤따라 중놈들을 하나씩 뒤쫓아 보내주마. 쳐라.”
“어디서 굴러 온 놈들인지는 모르겠으나, 괴양(槐壤) 땅의 청길(淸吉)과 신훤(莘萱) 이라는 이름은 익히 들어보았을 것이다. 산천초목도 그 이름 앞에서는 제발 살려 달라 벌벌 떨거늘, 어서 썩 항복하지 못할까?”
“괴양 땅에 쌍화적이 있단 소문도 금시초문이로구나. 괜한 허세부리지 말고 어서 덤비기나 해라. 어서.”
아홉 명의 패거리들이 주막 인근에서 노스님을 포함해 네 명의 승려가 지나는 것을 목격하고 그들로부터 재물을 빼앗기로 했었다. 하여 주먹세례를 퍼부으며 주막까지 끌고 오기는 하였는데, 먼저 주막을 차지하고 있던 네 명의 패거리가 이미 벌어진 이들의 상황을 눈치 채고는, 진즉부터 이곳이 자신들의 터전이었기에 승려들의 재물을 넘기라고 하다가 주먹과 발길질로 한바탕 싸움이 벌어졌던 것이다. 하지만 좀체 다툼은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더니만 급기야 서로 간에 칼끝을 겨누는 커다란 싸움으로 변하였던 것이다.
“멈추시오. 백주대낮에 어찌 칼부림이란 말이요? 그리고 혹여 스님께서는 곡산사(谷山寺)에 머무시던 큰스님이 아니십니까?”
두 패거리가 칼을 휘두르며 싸움을 서두는 상황이었음에도 도지의 아재라 불리던 사내는 전혀 개의치 않는다는 듯 주막 문간으로 들어서며 외쳤다.
그러나 노스님은 여전히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독경을 암송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노스님을 막아선 젊은 스님 하나가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겠다는 심정으로 외쳤다.
“큰스님이 맞사옵니다. 몇 년 전에 곡산사에 반년 가까이 머무셨던 큰스님이십니다.”
도지의 아재는 양쪽 무리를 헤집고 노스님에게 다가가 무릎 꿇고 합장을 올렸다.
“큰스님께서 어찌하여 이런 화를 당하고 계신단 말씀이십니까? 큰스님께서 어디 다치신 것입니까?”
“다치시진 않으셨습니다. 큰스님께선 곡산사에서 나오신 후 흥녕사에서 주지로 계셨는데 주변에서 민란이 끊이지를 않고 그 화가 마침내 흥녕사로 향하는 듯 보여서 저희가 부득불 잠시 조령산자락 고사리에 있는 흥천사(興天寺)로 모시는 중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보셔. 당신은 또 뭐야? 우리가 지금 살벌하게 싸우고 있는 것이 안보여? 도대체 뭔 배짱으로 남의 싸움터에 끼어드는 거야? 간이 배 밖까지 나온 거야?”
아홉 무리의 성질 급한 한 사내가 갑자기 끼어든 사내에게 짜증스런 소리로 말했다.
“경도에서 3년간 군역을 모두마치고 이제 고향인 소경(충주)으로 돌아가던 사람이요. 재를 넘던 중 우연히도 여기의 상황을 목도하게 되었소. 헌데 전에 내가 뵈었고 존경하는 큰스님이 지금 이처럼 화를 당하고 계시니 어찌 모른 체 지나칠 수 있단 말이요. 이보시오들. 오면서 보니 가히 세상은 아수라장이라 할만도 하더이다. 사람인지라 살기가 힘들다 보니 훔치기도 하고 빼앗기도 한다지만, 근본이 사람이라면 차마 그런 짓이 옳지 않다는 생각쯤은 가슴 한 구석에라도 남아있을 것이요. 그런데 어찌하여 나이 많으신 큰스님에게까지 그런 못된 짓을 거리낌 없이 할 수 있단 말이요?”
“뭐라고? 이놈이 듣자하니......”
성질 급한 화적 하나가 사내를 향해 칼을 내리쳤다.
그러나 이런 급습을 미리 예견이라도 하였던 듯이 사내는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는 듯싶더니, 칼 든 사내의 손을 낚아채서는 그대로 벽을 향해 내던졌다. 벽에 세차게 부딪친 화적이 쿵 소리와 함께 보기 좋게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실로 눈 깜짝 할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두 패로 나뉘어 서서 서로를 노려보던 사내들을 표정에 일제히 동요의 빛이 보였다. 뜻밖의 상황을 방금 모두 목격한 것이다.
또한, 이 자리의 상황이 갑자기 묘하게 변한 것이다. 두 패거리의 대립에 갑자기 두 사내가 뛰어들면서 지금의 상황이 삼파전 싸움인지, 아니면 상황에 따라 이파전이 될 것인지 도무지 분간이 되지 않는 상황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애초 아홉의 패거리는 당장 자신의 패거리 하나가 나뒹구는 꼴을 보았으니 싸움의 한 쪽은 당연히 자신들의 몫이라는 것을 알고들 있었다. 허나 네 명의 패거리는 갑자기 나타난 두 사람으로 하여 자신들에게 손해가 날리는 없겠다고 쉬이 생각이 되기는 하였으나, 중들을 잡아와 저렇게 만든 것이 자신들이고 나타난 자가 그들을 익히 아는 것으로 보아서는 이득이랄 것이 없겠다 싶기도 했다.
그때였다.
문밖에서 이제까지의 상황을 목격하며 나름 생각이 있던 도지가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며 주막 안에 대치한 사람들에게 외쳤다.
“어른들이 사생결단을 내자고 칼까지 뽑아든 상황에 그깟 좁아빠진 주막 안에서 말싸움이 무엇입니까? 말싸움이? 보아하니 말싸움으로 끝내기엔 이미 도를 넘어선 것 같은데....... 다들 너른 마당으로 나오시지요? 한 쪽은 아홉이고 한쪽은 넷이라.......... 비록 둘이긴 하나 방금 보셨다시피 내 아재의 솜씨가 누구에게 뒤지는걸 아직 본적이 없소. 또 부족하기는 하나 그 아재에게 배운 내 솜씨도 여간은 아니라오. 모두 나오시오. 어디 한 번 제대로 붙어보기로 하십시다. 어서요.”
팔을 휘둘러 휙휙 내저으면서 도지는 발걸음을 돌려 주막 마당건너 싸리문 앞으로 다가서서는 자리를 잡고 섰다. 마치 싸움판의 출입을 막아서고 있는 모습이었다.
사내들이 하나 둘씩 마당으로 나섰다. 도지의 아재가 마지막으로 나서면서 노스님을 돌아다보았다. 도지의 아재는 주막으로 들어서는 문을 가로막고 섰다.
마당 양편으로 두 패거리가 나뉘어 서 대치하고 있는 형국은 맞았으나 숫자의 우위를 점하고 있던 무리에겐 선택은 달리할 것 없이 하나였다. 다섯이서 네 명의 무리를 들이치고, 나머지 무리 중 둘이 주막을 막아선 사내를 맡고 둘이 칼을 뽑아들고 싸리문을 막아선 어린사내를 덮치는 방법뿐이었다.
쳐라.
죽여라.
모두 요절을 내 버려라.
함성과 함께 칼이 부딪치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려 퍼졌다.
주막을 막아선 사내를 덮쳐가던 화적 하나가 가장먼저 비명소리와 함께 허벅지를 감싸 안고 마당을 나뒹굴었다. 그 틈을 노려 사내의 등 뒤에서 어깨를 내려치던 다른 화적은, 아뿔싸. 어느새 돌아선 사내가 내려치던 칼을 막아내더니 왼손의 칼집을 이용해 화적의 면상을 그대로 후려쳤다. 화적은 처절한 비명소리를 내지르며 떼굴떼굴 굴렀다.
다섯과 넷의 싸움은 서로 엇비슷하게 어울리고 있었다. 양쪽의 패거리 하나씩이 칼을 맞아 싸움판을 벗어나 있었고, 좁은 장소에서 여럿이 얽혀있는 상황이라 단칼에 큰 상처를 내거나 치명상을 입히기에는 서로 힘겨워하며 요란하게 칼을 휘두르고 고함을 질러대며 밀었다 당겼다 하고 있었다.
한편, 싸리문을 막아선 도지는 두 화적을 상대로 요리조리 저들의 칼끝을 피하면서 싸리문짝을 잘도 이용해 가면서 싸우더니만 이내 서서히 공세를 취해가고 있는 형국이었다. 채 아직 아이의 티를 다 벗지 못해 보이는 모습으로 두 어른을 상대로 잘 싸우고 있었던 것이다.
“어떤 놈들이냐? 감히 우리 패거리에게 대드는 놈들이.”
어디선가 우렁찬 고함 소리와 함께 창 하나가 날아오더니 그대로 네 명 패거리 중의 한 명 어깻죽지를 그대로 관통했다. 비명소리와 함께 그대로 앞으로 고꾸라졌다.
돌아보니 털가죽 모자를 쓴 건장한 사내를 중심으로 다섯 명의 사내들이 주막 앞에 당도했던 것이다.
“소두령. 이 찢어죽일 놈들이 아우들을 상하게 하였습니다. 뼈를 갈아먹어도 시원찮을 놈들을 처참하게 모두 도륙하여 주십시오. 네 이놈들. 소두령이 오셨으니 네 놈들은 이제 죽고 싶어도 함부로 죽을 수가 없겠구나. 이제부터다. 각오해라.”
아홉 패거리는 갑자기 나타난 지원군으로 하여 더욱 의기양양해지고 눈과 입가에 잔인한 미소까지 띠기 시작했다. 반하여 이미 둘을 잃고 남은 둘마저 부상을 당한 처지의 패거리 눈빛에는 거의 절망의 빛만이 가득하였다.
그 와중에 잠시 놀라 당황해 하는 도지의 틈새를 노리던 화적 하나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도지의 등허리를 향해 칼을 찔러갔다. 실로 번개 같은 행동이었다. 이제 곧 나이어린 사내 하나가 땅바닥에 나뒹굴고 숨이 끊어지리라는 것이 당연하게 받아들여질 상황이었다. 그런데 그 찰라 같은 시간에 더 빠른 것이 있었다. 상황을 눈치 챈 도지 아재의 손을 떠난 칼이 허공을 가르며 날라서는 보기 좋게 기습을 하던 사내의 목덜미를 꿰뚫어 버린 것이다. 번개같이 빠르고 믿기 어려울 만큼 정확한 솜씨였다. 이 정황을 목격한 모두의 입이 저절로 벌어졌다. 뿐만이 아니었다. 어느 틈에 마당을 가로질러 도지의 곁에 다가서서는 잠시 혼이 빠진 도지를 잡아당겨 다시금 담장을 뒤로하고 한걸음 비켜섰다.
“이놈들. 감히." 소두령이라 불린 사내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뒤를 쫓아 험상궂은 사내 넷이 더 따라 들어섰다. 모두가 칼과 창을 들고 있었다.
다소 의외였다는 듯 그윽한 시선으로 주변을 둘러보던 소두령의 시선이 멈춘 곳은 다름 아닌 도지 아재였다. 싸늘한 시선에 냉혹하기 까지 느껴지는 차가운 음성으로 물었다.
“차림새로 보아하니 신라의 끄나풀 같은데 군인이시오?”
“달포 전까지는 그랬으나 지금은 분명 아니요.”
“달포 전이라니 무슨 말씀이시오?”
“달포 전까진 경도(서라벌)에서 진골들이 모여 사는 동네를 지키던 군인이었소. 삼년간의 군역(軍役)을 마치고 고향으로 가는 중이었소. 출세를 하려고 자원해서 군에 부역을 하던 것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내게 주어진 부역을 겨우 마친 것이니 신라의 끄나풀이니 하는 것은 적절치가 못한 것 같소. 작금의 난국에 신라의 끄나풀이라 할 수 있는 자들이 과연 얼마나 있겠소. 궁성과 지방의 고위직을 차지하고 앉아 여전히 폭정과 수탈을 일삼는 탐관오리들 말고 신라의 끄나풀이 어디 더 있단 말이요. 힘이 없어 이리저리 쓸려 다니는 가여운 백성들이 신라의 영역 안에 있다고 다 신라의 끄나풀이라고 보시지는 않으시지 않겠소?”
“맞는 말씀이요. 타지에서 모처럼 기개가 맞는 사람을 만났구려. 하지만 어쩌겠소. 당신 손에 이미 우리의 수하 여럿이 상했으니 말이요. 허니 나는 여기서 우리조직의 정해진 규율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안 되게 되었소. 당신은 절대 넘어서는 안 되는 규율을 넘어선 것이요. 그것도 아주 심하게........... 혹여, 이참에 당신이 나를 따라 나서 우리와 뜻을 합해 새로운 생활을 해보심이 어떻겠소? 그럴 의향이 있다면 내가 당신을 위해 크게 힘을 써 보겠소.”
“나는 고향으로 돌아가 부양해야 할 가족들이 있소. 또........ 아무리 어지러운 혼돈의 세상이라 할지라도 내 살고자 남을 해치는 그런 생활은 받아들일 수가 없소.”
자못 결연한 심정의 확고한 표현이었다.
소두령은 서서히 허리춤에서 칼을 뽑아들고는 마당 가운데로 나섰다. 이에 맞서서 도지의 아재도 도지 손에 들렸던 칼을 받아들고는 마당 가운데로 걸음을 옮겼다.
“안타깝기는 하나 역시 내가 당신에게 기다렸던 답이요. 이제 나는 우리의 규율을 실천에 옮겨야만 하겠소. 당신도 당신과 저들의 안위를 위해 최대한 솜씨를 발휘해주기를 바라겠소. 당신과 저들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서는 당신이 나와의 싸움에서 이겨 내 목숨을 취해야만 할 것이요. 나를 죽이고 나면 당신과 저들을 무사히 돌려보내 줄 것이요. 허나 내가 이겨 당신의 목숨을 취하고 나면 뒤따라 저들도 하나씩 당신의 뒤를 따르게 될 것이요.”
“싸움은 하고 싶지 않으나 부당한 당신의 요구가 나는 결단코 따를 수가 없구려. 하니 그 어떤 전제를 하여주지 않아도 내가 할 일은 내가 알아서 할 것이요. 부디 당신도 최선을 다하시오.”
“이런 상황에 만나지 않았더라면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었을 것만 같은데 많이 아쉽구려. 나는 진보성(청송) 태생으로 홍술(洪術)이라 하외다. 출세를 해보려 벼슬길에 나서기는 하였으나, 본시 가진 것이나 내세울 것이 변변치 못하던 중에 남을 모함하고 이간질하는 상관을 만나 뜻을 접고 황악산으로 들어가 녹림패의 생활을 하고 있소.”
“중원소경(충주) 땅, 달래강 어귀에서 고기잡이를 하는 늙은 아버지를 위해 이제 군역을 마치고 돌아가 그물질을 가업으로 물려받고자 하던 공산(供珊)이라 하외다. 군역에 나가 출세하여 노부모를 공양할 기회를 엿보기도 하였으나 세상이 너무도 하수상하여 차라리 고향에 내려가 노부모 모시고 조용히 고기잡이나 하려던 처지였소.”
“듣고 나니 더욱 안타깝구려. 부디 최선을 다하시오.”
“고맙소. 당신도 부디..........”
더는 어떤 짬도 없었다.
서로 간에 인사를 마치자마자 두 사람은 달려들어 부딪쳐나갔다.
두 세 차례 칼이 휘둘러지고 마침내는 요란한 쇳소리와 함께 서로의 칼이 맞부딪쳤다. 두 세 걸음씩 밀고 당김이 이어졌다. 참으로 팽팽한 접전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갑자기 두 사람의 몸이 서로 비껴 지나치는 듯싶더니 동시에 돌아서면서 다시 서너 차례의 부딪치는 싸늘한 금속성이 귓전에 울려왔다.
대여섯 걸음 정도 떨어져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거친 숨소리가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옷소매와 허리춤 아래 등 칼날에 의해 헤어진 부분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마주치는 두 사람의 안광 가득 짙은 살기가 가득 넘쳐나고 있었다.
“이놈들. 억만 갑자 안에서 겨우 부처님의 은덕을 입어 사람의 형상으로 내어 놓았더니만 기껏 하는 짓이 서로 간에 피 보자고 하는 싸움질이었더냐? 어서 썩 칼을 내리지 못할까?”
어디선가 대나무 지팡이 하나가 대치하고 있는 두 사람 사이로 특 떨어지더니 이내 성난 고함소리가 들려왔던 것이다. 일촉즉발의 대치 상황 속에서 뜻밖의 어처구니없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모아지는 곳, 그것은 주막 뒤로 돌아가는 싸리담장 너머였다. 희끗희끗한 반백의 머리를 그대로 치렁치렁하게 흘러내린 노인 한 명이 그곳에 서 있었던 것이다. 작고 왜소해 보이기까지 한 노인의 등장에 모두가 아연실색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아니. 웬 미친 영감이..........”
“영감탱이가 죽지 못해 환장을 했나?”
주위에 둘러선 화적패들 입에서 험악한 소리가 저마다 한마디씩 쏟아져 나왔다.
“어서 썩 물러나지 못하겠는가? 명귀(明貴)란 놈이 황악산자락을 야금야금 파 처먹더니 그것으로 양이 안차서 속리산자락을 넘어 보냈더란 말이냐? 이참에 아예 소백산자락까지 올라가 보겠느냐? 내가 이미 누누이 그렇게 일렀건만........ 쯧 쯧. 이제 일목대장에게 대적할 배짱이 생겼더란 말이더냐? 어디 있느냐? 명귀란 놈. 썩 내 앞에 나오너라.”
갑자기 어정쩡한 상황이 벌어진 것이 아니겠는가.
공산은 두 걸음 뒤로 물러나 칼을 내렸다.
왜소하고 깡마른 노인이 갑자기 나타나 뇌성 같은 소리로 저들을 마구 호되게 야단치는 모습에 자못 놀라울 따름이었다.
뒤로 물러나 칼을 내리기는 하였어도 날벼락을 맞기라도 한 것처럼 놀라기는 홍술이 더 했다. 분명 처음 보는 노인이 틀림없었다. 금방 쓰러질 것 같이 왜소하고 초라한 노인은 지금 인정사정없이 저주에 가까운 말들을 쏟아내고 있지 않은가. 한 치의 망설임이나 두려운 표정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었다. 그리고 노인의 그 당당한 호통보다도 더욱 그를 놀라게 한 것은 노인의 입을 통해 뱉어진 몇 마디 말 때문이었다.
노인은 분명 명귀란 놈이라 했다. 황악산 자락의 명귀란 놈에게 어서 썩 나오라고 호통까지 쳤던 것이다. 명귀는 바로 홍술 자신이 받들어 모시는 두목의 이름이었다. 거기에 더욱 놀랍게 일목대장(一目大將) 이라는 말도 서슴없이 내뱉지 않았는가. 얼마 전 분명하게 명귀두목의 입에서 일목대장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바가 있었던 때문이다.
정말로 기가차고 놀라울 따름이었다.
싸리담장 너머의 노인은 당당했다.
일체의 미동도 없이 마당안의 모든 정황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눈앞에 벌어진 상황을 당혹스런 눈초리로 살펴보다가 나타난 사람이 한 낯 늙은 노인인 것이 파악되자 어이없음만큼이나 피어오르는 분함을 참지 못하여 화적떼가 슬슬 노인을 향해 다가가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노인은 여전히 미동도 하지 않았다.
“모두 물러나 꼼짝도 하지 말고 다음 지시가 있을 때까지 기다려라.”
사태를 인식한 소두령 홍술이 부하들에게 명했다. 그리고는 몸을 돌려 노인을 향해 서너 거음 다가갔다.
“노인께서는 저를 아십니까?”
“알지. 조금 전에 네놈 자신을 홍술이라 하지 않았느냐. 전에 만나 본적이 없어 못 알아 볼 번하였는데 제 입으로 홍술이라 하는걸 보자니 영판 내가 생각했던 그놈이었더구나.”
“명귀라는 이름도 익히 아시는 분이십니까?”
“도적놈 이름이지 뭐야. 누런 옷을 입고 다니며 도적질을 하던 시커먼 옷을 입고 도적질을 다니던 도적놈은 다 같은 도적놈이지 뭐.”
“그러시면 혹여 선종(善宗)스님도 이시는 분이신지요?”
“홍술이가 꾀보라고 명귀가 말하더니만 과연 그렇군. 말을 하려면 대놓고 확실하게 할 일이지, 그렇게 슬슬 돌려가면서 하면 재미있는가? 선종스님을 아느냐고? 세달사(世達寺)의 선종이 일목대장이고, 일목대장이 선종이지. 자네가 정녕 궁금해서 그러는 것인가 아님 이 노인네를 은근슬쩍 간보려고 그러는 것인가?”
“너무도 놀라운 말씀들을 쉬이 하시기에 도대체 어떤 어른이신지 너무도 궁금하여 부러 드려 본 말씀입니다. 부디 노여워하지는 마십시오.”
홍술로서는 일단 한 발 물러나 사태를 좀 더 깊이 있게 생각해 볼 필요가 있었다. 노인의 말과 말투가 그저 허세는 아니라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는 나름으로 재빨리 머리를 굴려 많은 생각들을 되돌려 보았지만 도무지 이 노인이 누구인지 알아낼 수가 없었다.
“말씀은 무슨 말씀? 그저 지나가던 땡초 중이 지어낸 헛소리에 불과 할 뿐이지.”
“네? 그러시면 지금 말씀은....... 노인께서 스님이시란 말씀이십니까?”
“왜? 까까머리가 아니어서 중으로 안보였더란 말인가? 머리를 꼭 깎는다 해서 다들 득도를 하는 것이 아니더라고. 그런 것을 죽기 살기로 때마다 머리를 깎고 있는 꼴이 식상해 보이더라고. 하여 귀찮아져서 내버려두다 보니 이렇게 산발이 되어 버렸지. 그런데도 여러 날 세달사 안에서 땡초노릇 하는 데는 아무런 지장이 없더군. 그깟 머리가 도를 닦는데 무슨 상관이 있단 말인가. 아니 그런가?”
“세달사에 기인(奇人)이 계시다고는 들은 바가 있습니다. 바로 허월(許越)스님이셨군요. 오래전부터 뵙고 가르침 받고자 하였는데 이런데서 뵙습니다.”
그때였다.
주막 안으로부터 동자승이 뛰쳐나오면서 흙과 눈물로 범벅이 된 모습으로 소리쳤다.
“허월 스님. 소승 흥녕사에서 귀여워해 주시던 애기중이 옵니다. 큰스님 좀 살려주십시오. 큰스님과 제가 오늘 여기서 죽게 생겼사옵니다.”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내 허월스님은 그 동자승이 누구인지 기억해 냈다.
“큰스님이라니? 절중스님께서 여기 계시다는 말씀이냐?”
“네. 이곳에서 크게 화를 당하셔서 안에 누워계십니다. 도와주십시오.”
허월 스님으로서도 적잖게 놀란 모양이었다. 이내 서두는 걸음으로 싸리담장을 돌아 마당을 가로질러 주막 안으로 들어갔다.
돌아가는 사태에 골몰하던 홍술은 부하를 불러 오늘 이곳에서 벌어진 일의 세세한 자초지종을 듣기 시작했다.
한편, 공산은 도지를 불러 다친 곳이 없나 살펴본 뒤, 자신의 무기를 수습하여 구석진 곳으로 가서 도지를 돌무더기 위에 앉아 쉬게 하며 주변 살피기를 게을리 하지 않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허월이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이제까지 있었던 일을 더 탓하지는 않겠네. 하여 홍술이 자네는 부하들을 모두 데리고 당장 이곳을 떠나시게. 여기의 모든 사람들도 제 갈 길로 가게 될 것이고. 결과에 대해서는 추후에 내가 명귀를 만나서 해결하도록 하겠네.”
“녹림패에게는 나름 규율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저희 사람을 해치는 자에 대해서는 끝까지 죽음으로 갚게 되어있습니다. 헌데 오늘 이곳에서 부하 서넛이 상하고 죽은 자도 생겨났습니다. 하오니 아무리 허월스님의 부탁이 있으시다 하여도 결코 묵과할 수는 없는 상황입니다. 어려우시더라도 이쯤에서 못 보신 것으로 떠나시는 것이.......”
“명귀 그 자가 나에 대해서 이야기 하면서 어떻게 대하라 하던가? 나를 죽여 없애도 좋다 하던가?”
“어찌 그런 말씀을......... 혹시라도 뵙게 되면 정성으로 받들어 모시고 가르침을 받으라 하셨습니다.”
“정녕 그리 말하던가? 내가 참으로 고맙게 생각 하더라 전하여 주시게.”
“그런 말씀일랑 스님께서 두령을 직접만나서 드리시지요?”
“그리하고 싶으나 내가 오늘 부득이 여기에서 자네 손에 죽어야만 할 것 같으니 하는 말일세.”
“아무렴........ 제가 어찌.........”
“나를 살려주면 머지않아 자네와 명귀가 불귀의 객이 되고 말텐데. 그래도 나를 살려주시겠는가?”
“어쩌시자고 자꾸 억지 같은 말씀을 하시는 것입니까? 스님.”
“저 안에 계시는 큰스님이 누구신줄 아는가? 영월 땅에 있는 흥녕사의 주지이신 절중(折中) 큰스님이시네. 여왕(진성여왕)이 서라벌 인근의 곡산사에 초대하여 국사(國師)로 삼겠다는 것을 만류하고 뛰쳐나오신 분일세. 혼란기의 화마가 흥녕사를 덮칠 것 같아 잠시 조령으로 자리를 피해 나오신 와중에 이처럼 자네 무리와 맞닥뜨리게 되었던 것을 내 어찌 모른 체 할 수가 있단 말인가. 이럼에도 기어코 자네가 나만을 살려두고자 한다면, 내 이곳을 벗어나는 대로 관아를 찾아가 모든 전말을 고할 수밖에 없겠네. 여왕의 국사를 해쳤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수는 없을 것이네. 곧 토포사를 임명하고 토벌대를 황악산으로 보내겠지. 아무리 혼란스럽고 국운이 기울어가는 신라라 하여도 아직은 폄하 할 수만은 없는 위력의 군대가 엄연히 존재한다는 것을 자네는 알고 있을 것일세. 사벌주(상주) 경우에는 신라의 북쪽 군사요충지가 아닌가. 과연 자네들이 신라의 관군들이 체재를 갖추고 몰려온다면 제대로 상대할 수 있겠는가? 지난 해 자네의 두령 명귀가 어디서 들었는지 선종스님에 대해서 물어 온 적이 있었지. 황악산 인근에서 자네들 이야기를 듣는 것만큼이나 치악산 소백산 월악산 일대에서는 심심찮게 한쪽 눈을 가진 스님의 기행과 활약에 대해서 곧 잘 여러 소문들이 돌고 하였다네. 바로 그 선종스님이 내가 이번에 떠나오기 사흘 전에 세달사를 떠났네. 보름 전의 일이었네. 또 기행을 일삼으려 잠시 외출 할 것이 아니네. 큰 뜻을 펼칠 때가 마침내 되었노라고 소리치며 절간을 나섰네. 평소 따르던 스님들도 몇몇 따라갔네. 어디로 떠났는지 소식을 쫓다가 내가 여기까지 온 것이라네. 선종 스님이 세달사를 떠나면서 법명 대신 새로운 이름을 스스로 지었다네. 궁예(弓裔)라 지었다네. 평소 신기에 가까울 만큼 뛰어난 활솜씨를 갈고닦은 스님이었으니, 활 쏘는 사람의 후예라는 이름이 썩 잘 어울린다고 생각되어질 수밖에........... 이제 그 남다른 기운으로 똘똘 뭉쳐졌던 스님 한 분이 마침내 세상을 향하여 절간을 뛰쳐나갔네. 명귀나 자네는 잘 생각해야만 할 것이야. 기울어 가는 신라를 대적하는 것이 벅찬 일인지, 수하 몇을 거느리고 이제 막 세상으로 뛰쳐나간 궁예가 더 벅찬 상대인지........ 깊이깊이 심사숙고 하여야만 할 것일세.”
홍술의 표정은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그만큼 지금 그가 깊은 고뇌에 힘들어 하고 있다는 것을 쉽게 읽어낼 수가 있었다. 한참을 그러던 그가 고개를 들어 허월을 보며 물었다.
“그러시다면 이제 앞으로 스님께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어떻게 한다니? 무슨 말씀이신가?”
“제가 듣기로는 분명......... 허월 스님께서도 지극히 높은 신분이셨다 들었습니다. 신라의 진골이시라는 말씀이 맞는지요? 명주(강릉) 일대에서는 지금도 상당한 명망을 가지고 계신 것으로 들었습니다. 하시면서........... 지금 마냥 기울어져 가고 있는 신라의 국운을 이대로 보시고만 계실 것이 온지요? 이제 어디를 향해 가시려는지요?”
“나에 대해 그런 이야기가 있었던가? 하하하. 모두 다 부질없는 일이로세. 나야 이미 부처님께로 귀의한 땡초의 처지로 바랄 것이 더 무엇이 있겠는가? 그저 기약 없이 오늘은 이곳으로 또 내일은 저곳으로 세상 구경이나 하고 다니면서 아픈 사람 만나면 함께 아파해 보고 배고픈 사람 만나면 함께 배도 골아보고, 새로 태어나는 생명을 보면 이 험한 세상의 풍파를 잘 건너라고 기원도 하고, 지쳐 스러져 세상 떠나는 사람을 보면 그 사람의 극락왕생을 빌어도 주고........... 그저 세상을 싸돌아다닐 뿐이라네. 그러다 보면 오늘처럼 우연히 자네를 만날 수도 있고, 명귀도 만날 수도 있고. 어쩌면 궁예를 다시 만나기도 하겠지. 인연이란 갈망 한다고 해서 이루어지는 것도 아니지만, 어찌 보자면 서투르게 보거나 하찮게 여길 수 있는 인연이란 결코 없는 것이라네. 그게 바로 인연이란 것이지. 하하하하하.”
“대단히 어려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소중한 가르침으로 받들겠습니다. 하온데 스님. 저에게 한 가지 더 여쭈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소문에 듣자니 궁예라 이름을 바꾸셨다는 선종스님이......... 어렴풋이 듣기로 신라의 왕실과 연관이 있다고 들은 것 같습니다. 스님께서도 들어보셨는지요?”
“들은 바야 있었네만, 어디가지나 소문은 소문이 아니겠는가?”
“하오나 아니 땐 굴뚝에 연기 날일 있겠느냐 하지 않사옵니까? 소문의 열에 여덟이 거짓이라 하여도 개중엔 그 진정이 담기는 경우가 허다하지 않겠습니까. 그런 소문을 분명 들으셨다 하셨고, 또 세달사에 여러 날을 함께 머무시지 않으셨습니까? 거기에 스님의 가문 또한 진골이시면 왕족이라 할 수도 있을 터인데........ 적어도 스님이시라면 다른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그 사실에 대해 아시고 계실 것이 아니겠습니까?”
“듣던 바대로 홍술이 자네의 식견은 과연 놀랍고 날카롭네. 하지만 그 질문에 대해서만은 내가 뭐라고 답해 줄 것이 없다네. 몇 가지 소문은 들어본 바 있네만 근원을 가지고 추론을 해 볼만 한 것이 없었네. 또 그런 소문이 나돌고 있음에도 선종스님 자신이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단 한 번도 뭐라 언급을 한 적이 없었다네. 하지만 떠도는 소문이 아니고 늘 함께 어울려 다니는 스님에게서 또 다른 놀라운 이야기를 들은 바는 있었네.”
“그것이 어떤 이야기였습니까?”
“전혀 뜻밖이로군. 홍술이. 자네가 선종스님에 대해서 유독 관심을 갖는 별다른 이유가 있는가?”
“그....... 그것은........... 작금의 세상을 둘러보며 앞으로 펼쳐질 세상과 그 안에서 내가 살아갈 삶을 생각해 보면 도무지 오리무중, 칠흑 같은 어둠속뿐입니다. 생각한다고 해서 되어질 세상도 아니겠지만, 지금의 세상은 무엇을 할 수 있고 또 내가 하고 싶은지, 그것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만 하는지 조차도 구분을 못 하겠다 해야겠지요. 그러던 중에 기행을 일삼는 외목대장이 있다고 들었는데, 세달사의 스님이라는 소리에 더욱 놀랐습니다. 거기에 더해서 신라왕실의 핏줄이라니요? 하여 가만히 어떤 쪽으로 생각을 거듭하다가 보니 문득, 작금의 이 혼탁하고 혼란한 세상과 그 스님의 관계가 예사롭게만 생각되지가 않았습니다. 하여 여전히 여러 가지가 궁금할 뿐입니다.”
“자네가 들었던 바와 내가 들었던 이야기와 소문이 별반 다르지 않을 것일세. 더하여 신라왕실에 관해서는 나도 아는 바가 없는 바이고.......... 분명 본인이 그런 말을 했다는 전제하에 듣기로.......... 청해진을 호령하던 분의 핏줄을 외가 쪽으로 타고났다고 들었네.”
“청해진이라면 바로.......... 장보고 장군의............ 외가 쪽이라면............ 어머니가..........”
“거기까지였네.”
“정녕........ 모르겠습니다. 점점 더 미궁 속으로 빠져드는 느낌이...........”
“그러니 이제 자네가 분명하게 결정을 내리시게. 나를 죽이고 칼부림을 마저 해서 끝까지 규율을 따지고 드는 것이 자네나 명귀나 화적패가 사는 길인지......... 큰스님 일행과 저 앞의 화적들과 두 젊은이들을 모두 좋은 뜻으로 살려서 보내주고 또 훗날의 인연을 기다려 볼 것인지, 이젠 결정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좋습니다. 이 자리에서 한 발자국도 더 안으로 들여놓지 않고 이대로 돌아서서 저희가 먼저 떠날 것입니다. 모든 책임은 돌아가서 두령께 보고를 드린 뒤 제가 질것입니다. 스님께서 이곳의 뒤처리를 맡아 주십시오. 누군가가 저희 뒤를 쫓거나 다른 불상사가 생겨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이곳 주막의 피해에 대해서는 돌아 가는대로 어떤 방법으로든 응분의 보상을 치루겠습니다. 모든 것은 스님의 뜻이었다고 두령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이제 스님께서 허락하시면 저희는 즉시 떠나겠습니다.”
“참으로 다행일세. 그리고 이 상황에 누구도 자네들을 뒤쫓거나 해치고자 나서는 사람은 없을 것일세. 허니 자네가 떠날 거라면 부상자와 시신도 함께 데리고 서둘러 떠나도록 하시게. 여기는 내가 잠시 더 지체하면서 마무리를 지어보겠네.”
홍술은 허월스님을 향해 허리 굽혀 예를 표한 뒤 지체 없이 부하들을 수습하여 싸리문을 나섰다. 싸리문을 나서던 홍술은 잠시 걸음을 멈추더니 마당 한구석에서 마주보고 있는 공산과 눈이 마주쳤다.
“이보시오. 공산. 이제라도 마음이 바뀌었으면 나랑 같이 떠나는 게 어떻겠소?”
“고마운 말씀이오만, 아무래도 우리는 서로 갈 길이 다른 것 같습니다. 부디 뜻하는 바를 이루시길 빌어드리겠소.”
“잘 가시오. 먼 훗날 아무 때고 혹여 내 삶이 편해지거들랑 내 소경에 들러 달래강가 어부의 소식을 물어 수소문해 보겠소. 그럼............”
그렇게 홍술은 수하들을 데리고 숲속으로 떠나갔다.
한바탕 모진 광풍이 모든 것을 삽시간에 휩쓸고 지나간 뒤의 여운처럼 처참하리만치 무거운 침묵만이 골짜기 가득 내려앉고 있었다.
(2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소경의 관내인 탑들(탑평.중원경)에서 동쪽으로 이십 여리 떨어진 곳에 제법 여러 개의 민가가 모여 사는 촌락이 있었다.
동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계명산에서 발원한 안림천(교현천)이 흘러내려 와서는 이 촌락을 한참 지나는 지점에서, 금봉산(남산)과 대림산에서 발원한 사천(충주천)과 비로소 합세하여 서쪽의 달천으로 흘러들고 있었다.
이 두 개의 하천이 합류하는 안쪽으로 너른 들판이 있고, 동쪽의 들판 뒤쪽으로 야트막한 구릉들이 서로 고만고만한 행색으로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 들판과 구릉의 경계지점에 길게 늘어서서 촌락이 들어서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이곳을 안골(현 관아공원 일대. 성내동)이라 불렀다.
장대한 금강송이 군락을 이룬 숲 안쪽으로 비록 지붕은 초가를 얹었으나 크기가 장원이라 불러도 될 성싶은 커다란 대저택이 놓여있었고, 그 집 담벼락 어딘가에서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가 연실 울려나왔다.
쉬익. 쉬익.
팍. 파팍.
담벼락 옆에 서서 잡목 숲 안쪽으로 과녁을 설치해 놓고 연실 활시위를 당기고 있는 젊은 사내의 얼굴은 벌겋게 상기되어 있었다. 번뜩이는 눈동자에서는 얼핏 살기마저 엿보이고 있었다.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이 영감탱이. 두고 봐라. 내가 이 치욕을 반듯이 몇 갑절로 되갚아주고야 말리라. 기필코 본때를 보여주고야 말 것이다.”
빠드득.
분함이 극도로 치솟았음 때문인지 이제는 눈자위마저 벌겋게 핏줄이 서고 있었고 이마저 갈고 있었다.
분노가 극에 달해 오로지 활쏘기에만 몰두하였음인지 젊은 사내는 바로 등 뒤에까지 다른 사람이 나타나는 것조차 모르고 있었다.
이윽고 나타난 여인이 헛기침 소리를 내자 비로소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여인이 받쳐 든 작은 소반위에는 호리병에 담긴 탁배기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부침개와 술잔이 놓여있었다.
“어 어머님. 아직 바람이 찬데 여기까지 나오셨습니까?”
그러나 여인은 아무 말이 없었다. 옆에 놓여있는 넓적한 바위위에 소반을 내려놓고서는 잔을 들어 사내에게 권했다.
“적적하셔서 나오셨습니까? 소자 활쏘기에 전념하다보니 어머님 오시는 것도 몰랐습니다. 어머님께서 먼저 소자의 잔을 한잔 받으시지요.”
사내는 애써 웃음을 지어보이면서 표정을 바꾸어보려 하였으나 여전히 어색함이 그대로 드러나고 있었다. 그러나 초로의 어머니는 묵묵히 그런 아들을 응시하면서 여전히 잔을 들어 건네고 있었다. 마지못해 아들은 어머니가 건네는 잔을 받아들었다. 이내 술잔에 술이 가득 차는 것을 기다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서운하다 못해 분하였더냐?”
그 말에 화들짝 놀란 아들이 손을 떨어 술을 쏟았다.
“분하다니요? 어머님.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것인지..........”
“내가 낳은 자식인데 어미가 자식의 속을 어찌 모르겠느냐?”
“아....... 아니옵니다. 어머님. 아무 일도 없사오니 부디 걱정을 놓으세요.”
“네 아버지는 큰 일 일수록 차분하게 주변의 정황을 잘 살피고 최종의 판단을 아주 냉철하게 내리던 분이셨다. 하여 그릇된 결정을 내리시는 경우는 거의 없었던 분이셨다. 자신에게 맡겨진 소임이라면 결코 포기하지 않고 끝내 방법을 찾아내시곤 하셨지. 하지만 닥친 일이 사람의 일이 아니라 하늘의 결정이라 판단되시면 그 즉시 혼자 가슴속에 꿀꺽 삼켜버리시고 그 일을 다시 꺼내 재론하지 않으시는 분이셨다. 하지만 타고난 근골이 허약하여 일찍 돌아가시면서 까지 자식 대에서만은 기필코 강건한 아들이 태어나 유씨(劉氏) 가문을 바듯하게 일으켜 세워주기를 간절히 바라며 눈을 감으셨다. 그 바람이 헛되지 않았음인지 네가 아들로 태어났고, 어디에 내놓아도 견주어 뒤떨어질 것이 없는 건장한 남자로 자라났으니 네 아버지의 소원은 어느 정도 이루어졌다고 하여도 무방하겠으나............ 이 어미가 보기에는 젊은 혈기만 왕성할 뿐 주변의 벌어진 일에 대처하는 분별력이나 냉정한 판단에 있어서는 아비의 절반에도 못 미치는 듯 느껴지니 그것이 커다란 걱정이로구나. 부디 활을 쏘고 칼을 휘두르는 것에 정진하는 것만큼, 책을 읽고 명상을 하면서 자신의 속을 채워나가는데 더욱 정진하였으면 싶구나.”
“네 어머님. 소자가 노력을 한다 한들 어찌 아버님에 미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부단히 노력하여서 적어도 어머님의 기대에는 부응하겠습니다. 하니 너무 걱정하지 마시옵소서. 소자도 이제 어엿한 유씨 문중의 어른이옵니다.”
“오늘 아침에....... 그동안 네가 몹시 공들였던 일에 대해 이야기를 들었다. 분통이 터졌을 것이야. 암. 그 같은 경우에 분함마저 솟구치지 않는다면 어찌 사내라 할 수 있겠느냐? 어찌 보자면 밖의 일이요, 또 사내들의 일이라 하겠으나........... 그분은 어찌되었던 네게는 오촌당숙 어른이신 것이다. 종국에 남들 이목으로 보자면 유씨 문중의 집안싸움으로 보여 지게 되는 것이다. 네 아버지가 살아계시면서도 그 같이 유사한 경우를 숱하게 겪으셨지만, 어떤 경우에도 집안싸움은 피하고 막으셨다. 사물의 이치를 따져 천기를 살피고, 그에 순응하면서 때를 기다릴 줄도 아는 것이 이 어미가 보기에는 지금 너에게 필요한 것 같구나. 정녕 네가 가슴에 품은 뜻이 있고 그것을 이룰 야망이 있다면 당장 눈앞의 작은 것에 현혹되는 일들은 삼가여야만 할 것이야.”
“명심하겠습니다. 어머님. 소자가 잠시 분을 참지 못하여 어머님께 걱정을 끼쳤습니다. 다시는 그런 어리석은 일이 없을 것입니다. 마음 놓으시옵소서.”
“내 아들 긍달(劉兢達), 네가 우리 유씨 문중의 기둥임을 한시도 잊어서는 안될것이다.”
“네. 어머님.”
비로소 마음이 놓이셨는지 어머니의 입가에 잔잔하게 미소가 피어올랐다.
그때였다.
갑자기 담장너머 안채 쪽에서 왁자지껄한 소리가 들여왔다.
“누가 찾아왔는가 보구나.”
“권열(劉權說) 아우가 왔을 것입니다. 제가 무엇을 좀 알아보라고 보냈거든요.”
“그랬구나. 네가 친동생처럼 권열이도 잘 좀 보살피도록 하여라. 권열이 부친인 작은 당숙께도 우리집안이 신세진 것이 적지 않을 것이니........... 또 듣자니 권열이 무술이 인근에서 으뜸이라는 소리도 들리더구나. 아무쪼록 너나 권열이나 그 뜨거운 혈기를 잘 추슬러서 부디 유익한 일에 쓰기를 어미는 바란다. 그럼 내가 들어가서 저들을 이리로 보내주마.”
어머니가 황토담장 길을 돌아 안채로 들어가시는 듯싶게, 기다렸다는 듯이 사내들 서넛이 활터로 모습을 드러냈다.
“긍달 형님. 말씀하신대로 탑들에 들러 요모조모 살피고 왔습니다.”
“권열이가 고생했다. 자네들도 모두. 그래 오촌당숙은 만나 뵈었느냐?”
“만나 뵙지 못하였습니다. 물어보니 관아에 계신 것은 분명한데.......... 만나주지를 않습니다. 분명 우리인줄 알고 부러 피하는 인상이었습니다.”
“그랬겠지. 그렇다 치고......... 우리에게 배당된 선철(銑鐵)이 얼마나 된다 하더냐?”
“그게........ 없었습니다.”
“없다니? 마지못해 개뼈다귀 하나 던져주는 시늉으로라도 어느 정도는 줬을 것이 아니냐?”
“재차 확인을 하였습니다만, 우리에게 배당된 것은 없었습니다. 우리에게 배정될 것이라 여겼던 물건이 모두 응골 노인네 상단으로 배정되어있었습니다.”
“이런 쳐 죽일 놈을. 상단에 점포 하나 내준다고 가져간 것이 얼마며, 철광석을 달라니까 관에 규제가 심해서 정식 절차를 밟아 선철을 배당해 준다고 해서 또 가져간 것이 얼마냐? 말이 좋아 오촌당숙이지 갈기갈기 찢어 들판에 내던져 짐승의 먹이로 만들어도 시원찮을 인간이 아니겠느냐? 이런 작자가 어찌하여 너와 나의 아버지와 한 형제란 말이냐? 남에게도 이렇게 까지는 못할 짓을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런단 말이냐?”
“형님. 어찌 우리와 같은 핏줄이라 하십니까? 형님과 저는 할아버지에게 난 한 핏줄이 분명하오만, 그 영감은 할아버지가 노년에 작부 하나를 잘못 건드려서 태어난 인간말종 아니겠습니까? 당숙은 무슨 썩어빠진 오촌당숙? 이참에 아예 정리를 해 버리십시다.”
“당장은 안 된다. 그 영감탱이와 일을 주변에서 다들 알고 있는데, 대놓고 우리가 저질렀네 하고 일을 벌일 수야 없지 않겠느냐? 또 그 영감이 어디 보통내기냐? 우리에게 온갖 못된 짓은 다 하면서도 뒤가 캥겨서 무엇인가 꼼수를 미리 계산하고 있을 것이야.”
“저도 그 생각은 했습니다. 무엇인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릴 것이라고. 어차피 영감이 죽든 우리 형제가 죽든 반듯이 끝장은 봐야할까 봅니다.”
“그래. 끝장은 봐야 할 것이야.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결론으로 기필코......... 아니 되겠다. 다른 동생들도 모두 고생을 했는데 여기서 이럴 순 없지. 가까운 주막에라도 나가자. 거나하게 한잔 마셔보자. 방금 전에 어머님께서 걱정을 하고 들어가셨는데 이 상황에 집에서 술상을 차리기엔 좀 그렇지 않겠느냐?”
“큰어머니께서 제게도 몇 가지 당부를 하시더군요.”
“그래. 우린 형제니까. 자 다들 함께 나가자.”
긍달과 권열 형제가 분노하고 있는 오촌당숙은 바로 외여갑당(外餘甲幢)의 당주(幢主)를 맡고 있는 유신웅(劉伸雄)이었다.
“그래. 그놈들이 찾아왔더란 말이지? 내 미리 그럴 줄을 알고 있었느니라. 아예 호되게 호통이라도 쳐서 보낼 것이지?”
“아무리 그렇기로 당주님의 조카들인데 그럴 수야 있겠습니까? 거드름을 피우는 듯 대하여 심히 모멸감을 좀 느꼈을 것입니다.”
“조카는 무슨 조카? 쓰레기 같은 놈들이지. 이만저만해서 내가 좀 살만하다 싶으니까 어떻게든 뜯어먹자고 거머리처럼 달라붙는 놈들이지. 앞으로도 아예 근처에 얼씬도 못하게 나타나기만 하면 그 자리에서 내쫓아 버리라고. 알겠는가? 핏줄은 무슨 핏줄?”
“알겠습니다. 다음번엔 아예 버르장머리를 뜯어 고쳐놓겠습니다. 당주님.”
외여갑당 당주. 유신웅.
이름만으로 치자면 제법 그럴듯해 보였으나 기실은 전혀 보잘것없는 미관말직인 셈이었다.
중앙의 행정 군사력이 지방의 속속들이 까지 제대로 미치지 못하게 된 신라 하대에는, 지방의 행정관이 곧 군사지휘권까지를 가지고 통치를 병행하도록 하였으며, 부족 되는 군사력의 상당부분을 거주지의 농민들을 이용해 어느 정도까지는 보완을 하고자 하였다. 하여 그저 농사나 짓는 농민들로 몇몇의 별도 부대에 편성하였는데, 외여갑당의 경우도 이에 해당하였다. 해당 거주지의 농민 중에서 돌팔매질에 소질이 있는 자들을 선발하여서 대략 52명 정도를 한 부대로 묶어 농민군의 형식으로 만든 것이 바로 외여갑당인 것이다. 허울뿐인 명목상의 농민군 편재였던 것이다.
애초 유신웅은 긍달과 권열 형제 할아버지의 삼남 일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남 일녀가 본부인의 소생인 반면, 신웅은 할아버지가 노년에 잠시 데리고 놀던 기녀의 몸에서 뒤늦게 태어났던 것이다.
아버지는 늙었어도 명색이 나름 지방의 이름 있는 토호였으나 기녀의 몸을 통해 느즈막히 세상에 태어난 신웅은 한마디로 천덕꾸러기였다. 기녀와 늦바람이 났다가 저절로 생겨난 신웅을 아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그런 처지이다 보니 아비의 본부인 또한 신웅을 어여삐 볼 리가 만무하였다. 거기에다 생모마저 돌림병으로 일찍 죽고 나니 신웅의 유년시절은 참담하기 이를 데가 없었다. 급기야 신웅은 거리의 불량배가 되어있었다. 아비가 죽고 큰형이 집안의 가장이 되자 신웅의 신세는 하루아침에 변하게 되었다. 나이차가 제법 나는 막내를 불상하게 여긴 큰형은 신웅을 집안에 들이고 같은 형제로서 유씨 가문의 재산과 복을 나눌 수 있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미 저자거리의 이전투구와 노름과 계집질에 빠져본 신웅으로서는 그 같은 형제들의 호의를 이용해 더욱 못된 짓만을 일삼기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자신의 행위가 아비와 유씨 가문에 대한 복수라고 여기게 되었던 것이다.
견디다 못한 형제들은 마침내 신웅과 의절하기로 하고 어느 정도의 살림밑천을 주어 가문 밖으로 내쳤다. 그나마 가지고 나온 밑천마저 바닥이 드러나자, 신웅은 수하 여럿을 거느리고 몰려다니며 온갖 악행을 일삼는 중원경의 골칫거리로 등극하게 되었다.
그러던 차에 신라 하대의 혼란을 틈타 각 곳에서 약탈과 방화 등을 일삼는 무리가 생겨났고, 동원할 수 있는 군사력의 한계를 느껴 마침내 중원경에도 농민군을 편성하기에 이르렀는데, 평소 남들과 다르게 유독 돌팔매질에 솜씨가 남달랐던 신웅이, 제 스스로가 불량배였음에도 불량배를 소탕하겠다는 맹세를 하고 외여갑당에 가입하였고, 거기에 평소 그의 행태를 눈여겨보던 신라의 한 고관대작 집안사람의 천거로 당주의 자리까지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한마디로 가관이었다.
52명에 달하는 허울뿐인 외여갑당의 당주였으나, 오래지않아 대다수의 당원을 자신의 수하로 채우고, 항시 함께 몰려다니며 온갖 작태를 꾸며내는 그에게 대적할 만한 사람이 그리 많지 않았다. 그의 신세가 크게 변한 것이다.
신라 하대의 중원경.
신라는 이미 국운이 기울대로 기울어 변방의 곳곳을 재대로 다스리기에 역부족해 보였고, 일부 지방의 호족과 신흥 세력들이 호시탐탐 노리고 있는, 그야말로 전국시대의 한복판처럼 느껴졌다.
허물어져가는 왕조이기는 하지만 중원경은 분명 아직은 신라의 영토이며 통치하에 있었다. 서라벌을 뿌리로 한 통치권을 가진 일부 귀족과 권문세가가 엄연히 존재했다.
또한, 그 이면에는 탑들(탑평리)의 상단을 차지하고 들어앉아 상권을 거머쥔 자들이 있었다. 서해로 통하는 한강을 이용하여 수운을 통해 이들이 거둬들이고 있는 이권은 실로 엄청난 것이었다. 또한 이들의 금권이 권력과 수시로 결탁하니 이들의 세력 또한 그리 만만하게 볼 것은 아니었다.
다음으로는 이 지역의 토착민으로 거대한 영토를 소유하고 유민들을 받아들여 장원을 이루고 있는 토호(토착지주) 세력이 있었다. 이들은 어떻게 하든 탑평리로 진출하여 상권을 획득하거나 신라의 정치세력과 연계하여 자신들의 세력을 점차 확대해 나가기를 갈망하였다. 유긍달의 유씨 가문이나 어씨 가문, 또 지씨 가문이 그러한 경우였다.
다음으로는 드러내지는 않고 있지만 새롭게 떠오르는 신흥세력의 부상이었다.
먼 지방의 관리였거나 군에 나가있던 능력을 어느 정도 갖춘 자들이, 신라의 국운이 기울고 혼란이 일자 주위의 무리들을 모아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시작은 도적떼나 강도무리였다가 어느 정도 규모와 세력을 갖추게 되면 화적패의 옷을 벗어버리고, 어엿하게 고을의 한 귀퉁이를 차지하고 들어앉아 점차 세력을 넓혀가면서 때를 기다리는 부류였다. 이런 부류로 중원경 안에서 서서히 모습을 드려내고 세력권을 넓혀가는 자로서는 신훤(申煊)이 어느 정도 이름을 날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신훤의 패거리 또한 그 누구도 쉽게 보거나 함부로 대할 수 없는 처지였던 것이다.
이런 혼란을 틈 탄 군웅활거의 시대 속에서 서서히 나름의 기틀을 잡았다고 생각한 유신웅이었으니, 그는 지금 탑들에서 가장 호화롭다는 기방에서 술잔을 들면서 음흉스런 미소를 띠고 있었다.
“대장. 대장. 어디 계시유? 변고요 변고. 어서 나와 보시유.”
문밖이 왁자지껄 하더니 사내의 외침이 들려왔다. 유신웅은 그것이 자신의 수하 목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호들갑을 떨기는. 이놈아. 그래 무슨 변고냐? 춘삼월 매화나무에 감이라도 열렸단 말이더냐? 괜히 호들갑 떨지 말고 들어와 목이나 축이어라.”
“대장. 당장 나와 보시라니까유? 불이 타올랐어유. 장미산에 커다란 불꽃이 타올랐어유. 봉수대도 아닌데 불이 타올랐다니까유?”
“뭐라고? 장미산에 산불이 났단 말이냐? 어디, 어디로 번지고 있다는 것이냐?”
“산불은 아닌거 같어유. 누군가가 산성에다 불을 피웠나봐유?”
“산성에 불을 피우다니? 누가?”
신웅은 서둘다 보니 맨발로 마당을 뛰어나갔다.
너른 탑들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북쪽으로 우뚝 솟아있는 장미산의 성곽 위로 거대한 불기둥이 치솟고 있었다.
(3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드넓은 탑평들(중원경)의 어둠은 남한강이 유유히 흘러가는 북쪽에서부터 밀려들어왔다.
항상 그랬다. 서산으로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서서히 내려앉을 무렵이면, 북쪽에 우뚝 솟아서 탑들의 모든 것을 한 눈에 내려다보고 있는 장미산이 가장먼저 음산하리만치 까만 복장으로 갈아입고 저승사자처럼 시커먼 입을 벌린 채, 서서히 탑들의 너른 들판을 모조리 삼켜버리는 것이었다. 누구든지 미리 뇌리에 그런 기억들을 가지고 밀려오는 어둠을 바라보았다면 틀림없이 그것은 아주 커다란 공포였을 것이다. 삽시간에 밀려오는 어둠과 강변을 타고 불어오는 스산한 강바람은 이곳에 살고 있는 모든 주민들이 곧잘 느끼게 되는 어떤 두려움이었다.
전설 같은 이야기로 전해 오기는, 그것이 고구려 장수왕의 포효하는 기상이기도 하고 핏발서린 분노라고도 했다. 백두산 호랑이 보다 더 무서웠다는 그 장수왕 말이다.
남벌을 감행하던 장수왕이 바로 저 장미산의 정상에 있는 산성에 올라, 여기 탑들 가득 우왕좌왕하며 떨고 있는 백제의 군사들을 노려보았다는 것이다. 땅거미가 내려앉고 어둠이 찾아들 무렵, 그 어둠을 등 뒤로 하고 성문이 열리더니 철갑으로 중무장한 고구려의 기마대가 질풍처럼 탑들로 들이쳤던 것이다. 너른 탑들은 이내 아비규환 속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백제군의 시체가 산더미처럼 쌓였고 붉은 피가 남한강으로 흘러들었다.
40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지만 여전히 장미산은 북쪽에 우뚝 솟아 탑들을 위압적으로 내려 보고 있고, 그 산 정상엔 여전히 고구려 성이 튼튼한 요새로 남아있었던 것이다.
그런 장미산의 산성 성벽위로 지금 환하게 불기둥이 솟아오르고 있었다.
장미산은 봉수대가 없었다. 그러니 변방 어디에선가 나라의 변고를 알려오는 봉수도 아니었다. 한곳에서만 타오르는 불꽃을 보자니 그것은 산불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그것은 여기 중원경 안에 커다란 변고가 생겼다는 일종의 신호인 것이다.
중원경 안의 어느 곳에서도 누구나가 가장 확실하게 알아볼 수 있는 확실한 신호였던 것이다. 그것은 달래강을 건너 동쪽으로 계명산 언덕에 살고 있는 주민들에게까지도 단박에 전달할 수 있는 가장 확실한 신호체계였던 것이다.
신라의 북쪽에 위치한 가장 번창하고 있는 도시 중원경에 무엇인가 커다란 중대사태가 벌어졌단 뜻이었다.
“소경 안에 무슨 일인가 벌어졌다는 뜻이다. 누가 있느냐?”
유신웅의 동물적인 직감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태보와 고두루가 여기 있습니다.”
“태보는 서둘러 관아로 가서 살펴보아라. 틀림없이 관아에 무슨 일이 벌어진 것이 틀림이 없다. 고두루는 다니면서 우리 애들을 죄다 불러 모아라. 알았느냐? 무조건 모두 집합 시키란 말이다. 나는 이 길로 창고에 가 있겠다. 무두 서둘러라. 창고에서 보자.”
수하들을 내 보내고 발걸음을 옮기던 유신웅은 자신이 지금 맨발이었음을 깨달았는지 다시 발걸음을 되돌려 안채로 들어갔다.
중원관아의 주용 통로인 북문의 솟을 대문 앞으로 횃불이 대낮같이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그 뿐이 아니었다.
동헌이고 내아며 향청. 작청. 장청과 형옥, 그리고 마구간까지 온통 대낮같이 환하게 횃불을 밝혀놓았던 것이다.
삐이걱.
솟을 대문이 열리면서 예닐곱 명의 순라꾼들이 저마다 손에 횃불을 하나씩 들고 쏟아져 나왔다. 잠시 모여서 무슨 논의를 하더니 이내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면서 낭랑하고 곧은 목소리로 한결같은 소식을 어둠속을 향해서 토해냈다.
‘대윤께서 돌아가셨다. 모두 듣거라. 대윤께서 돌아가셨다. 모두 듣거라............’
대윤(大尹)이면 바로 이곳 중원경(中原京)을 다스리던 최고 책임자가 죽었다는 소식이었다.
이곳 탑들의 실제 주인 노릇을 해오던 신라의 진골출신 김일범이 죽은 것이다.
반도를 통일한 신라는 넓어진 영토를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하여 전국을 아홉 개의 주로 나누고, 그 안에 다섯 개의 주요 도시를 건설했다. 이를 일러 9주5소경인 것이다. 그리고 이 아홉 개의 주에는 군정관 성격을 띤 도독을 파견하였고, 그 아래로 군에는 태수. 현에는 현령을 두었다.
아울러 중요 거점 도시인 5소경으로는 금관경(金官京 : 김해). 중원경(中原京 : 충주). 북원경(北原京 : 원주). 서원경(西原京 : 청주). 남원경(南原京 : 남원) 을 두었으며, 소경의 장관을 사신(仕臣) 또는 대윤(大尹) 이라 불렀던 것이다.
그러나 이 5소경의 경우에 있어서도 그 중요성이 유독 남달랐던 것이 바로 중원경이었다.
5소경이 685년(신문왕 5년)에 비로소 설치된 이면에, 중원경의 경우는 이보다 130 여년이나 앞선 557년(진흥왕 18년)에 이미 경도(京都)인 서라벌에 이어 두 번째로 가장 중요한 도시로 중원소경이라 설치되었던 것이다. 삼한의 통일을 나라의 목표로 삼고 대업을 이루고자하던 신라에 있어서 북쪽으로 올라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거점도시이자 한강유역 진출의 교두보로 중원경을 설치한 것이다. 당시 대가야를 병합한 진흥왕은 대가야의 지배층을 신라의 귀족에 편입시키고 이들 대부분을 중원소경에 이주시켜 이곳을 다스리도록 하였다. 이때부터 중원경은 비로소 정치 경제 문화 등 모든 방면에 있어서 서라벌에 견줄만한 대도시로서의 위업을 모두 갖추게 된 것이다. 그리고 그 결과로 우륵과 강수와 김생이 모두 이곳에서 나서 성장했던 것이다.
중원경을 다스리던 대윤(大尹) 김일범(金一帆)이 죽은 것이다.
또한 어찌 보면 그의 죽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예견된 것이나 다름없었다.
예순을 훨씬 넘긴 나이로, 거기다 젊은 날을 온통 술과 계집에 빠져 살았던 결과로 배대해진 자신의 몸뚱이 하나 제대로 건사하지 못하는 꼴로 대윤 임명을 받고 멀고 먼 서라벌에서 여기까지 부임을 해 온 것이었다. 벌써 3년이 지나고 4년 가까이 지난 일이었다.
김일범은 오랜 세월동안 이 지역을 주로 통치하던 그 뿌리를 가야에 둔 진골출신이 아니었다. 여왕(진성여왕)의 등극 후에 온갖 추문에 휩싸이고 있는 상대등(上大等) 위홍(魏弘)의 친척 형제로써 아첨을 하여 노년을 평안이 보내기 위한 방편으로 중원경의 대윤 자리를 제수 받아 부임하였던 것이다. 간혹 서라벌 진골 출신들이 중원경의 대윤을 포함한 지배층으로 부임을 하기는 하였으나, 그것은 다분히 사전에 가야출신의 진골들과 두루두루 협의를 걸친 결과들이었다. 하지만 김일범의 경우는 모든 상황이 이전과 달랐다. 더욱이 그에게는 통치나 민생에 대한 기본 개념조차도 없었다. 사치와 향락과 재물을 향한 끊임없는 탐욕이 있을 뿐이었다. 점차 사람들은 출신에 상관없이 모든 진골들과 벼슬아치들을 경멸하고 피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오랜 세월동안 이 지역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가야출신에 뿌리를 둔 진골들의 반발이 점차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하였다.
이에 두려움을 느낀 김일범은 서라벌에 급하게 사람을 보내 위홍에게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그런데 대각간 위홍의 경우에 있어서도 김일범은 골치였다. 서라벌에 가까이 두면 골칫거리만 되겠기에 그럴싸한 벼슬을 주어 변방으로 내친 위홍이었기에, 못살겠다고 서라벌로 돌아오기 전에 무슨 방도를 찾아내야만 했다. 그리고 그 처방으로 등장한 인물이 바로 김필(金弼) 이었다.
김필은 용맹하고 다방면에 재주를 가진 가야출신의 진골로서 중원경 일대의 진골들 가운데 가장 명망이 높은 젊은 기재였던 것이다. 하여 당연히 김필이 김일범에게 있어서는 가장 위협적인 인물이었다.
위홍은 여왕의 허락을 받아 김필을 서라벌로 불러 들였다.
국법이 정한 바에 의하여 상수리제도를 앞세웠으니 아니 따를 수가 없었다.
길필은 하루아침에 볼모가 되어 서라벌로 끌려가는 신세로 전락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는 하늘을 우러러 원망만 하지는 않았다. 때를 기다리는 방법을 이미 체득하고 있었던 때문이다. 그는 이를 악물며 상수리제도 시한인 3년을 참고 견뎌냈다. 이제 하루빨리 고향으로 돌아가 못 다한 야망을 펼칠 날만을 기다리는 그에게 또다시 청천벽력 같은 일이 벌어졌던 것이다. 대각간 위홍은 또다시 김일범의 부탁을 받고, 날마다 남몰래 정염을 불태우던 조카인 여왕의 귓전에 속삭였던 것이다. 용맹하고 씩씩한 김필을 서라벌을 위하여 더 붙잡아 두어야만 하겠다고. 여왕으로서도 남달리 늠름하고 용감무쌍한 김필이 서라벌에 남아 있는 것이 그리 싫지 않았다. 그러잖아도 이미 한 두 차례 그에게 은근한 눈길을 주었던 바가 있었던 여왕이었던 것이다.
여왕은 다시 명을 내려 김필의 상수리를 연임시켜버렸다.
김필의 좌절과 분노는 컸다.
그간 이를 악물고 참아왔던 3년이란 세월의 부담이 너무도 컸던 때문일까.
다시 일 년이란 세월이 더 지나가자 점차 그도 자신도 모르게 허물어져 가고 있었다.
허물어져 가는 그에게 여왕의 은근한 추파가 계속 이어졌다. 하지만 그것에 만은 넘어가지 않고 있었다. 그 배경에는 바로 미선부인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미선부인(美鮮夫人)은 김필의 본처는 아니었다. 단아한 듯, 때로는 조금 오만한 듯 보이는 부인은 어디에 내어놓아도 견줄만한 빼어난 미모와 총명함에 놀라운 기지까지를 갖춘 보기 드문 여인이었다. 비록 무상한 세월에 점차 허물어지고 있는 김필이었지만, 미선부인이 곁에 있기에 여왕은 눈에 차지도 않았던 것이다.
그런 와중에 중원경에 중요한 사태가 벌어졌음을 이들은 전혀 알 길이 없었던 것이다.
삶과 죽음의 길이 여기 있음에
나는 간다는 말도 못 하고 갔단 말이냐
어느 가을 이른 바람에 이곳저곳 떨어지는 나뭇잎같이
한 가지에 태어나서 가는 곳 모르겠구나
아아 미타찰(彌陀刹)에서야 만나 보겠으니
나는 도 닦고 기다리리라.
한 생명이 떨어졌다.
못 다 이룬 사랑에 대한 애절한 아쉬움이거나, 뼈와 살과 생명을 주신 고마운 분에 대한 그리움이거나, 또는 아무런 인연이 없다손 치더라도 떠나는 생명에 대해서는 숙연함이나 경견함이 생겨나기 마련이었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존재만이 가지는 어떤 숭고한 가치일 지도 모를 일이었다. 설사 죽이고 싶도록 미운 인연이었다 치더라도 막상 그 생명이 떨어지고 나면 쉬이 입 밖에 그런 말을 내뱉을 수가 없는 것이 사람이라면 사람이리라.
밤길을 가던 스님 하나가 관아 앞에 잠시 머물더니 (제매망가)를 읊조리며 지나갔다.
이게 무슨 일이던가.
대낮같이 환하게 횃불을 밝힌 관아의 담장 너머로 애통한 곡소리 한 구절 넘어오질 않는다. 떨어진 생명을 위로하는 선승의 독경소리 하나 담장너머로 들려오지를 않는다.
삼엄한 경계를 펼치고 있는 순라꾼들 순라 도는 모습만이 눈에 띠고, 이따금씩 귀족이나 관리의 복장을 한 사람들이 어쩌다 하나 둘씩 관아로 들어가는 모습이 전부였다.
어느 외딴 산촌 화전민 초가에 초상이 난 것이나 별반 달라 보이지 않았다.
중원경의 가가호호가 사천을 넘는다고 했다.
달래강을 건너 고을과 인근의 산 너머 촌락을 합치면 오천이 훨씬 넘는다고 했다.
그러기에 탑들(탑평리)의 저자거리는 늘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그것은 밤이 되어서도 별반 달라질 것이 없었다.
해가지면 내 거는 횃불이며 홍등과 청등들이 흘러가는 강물위에 비추는 달빛보다 더 휘황찬란하게 반짝였기 때문이었다. 탑평리의 밤은 또 다른 별천지였던 것이다.
그런데 오늘 탑평리는 완전히 칠흑 같은 어둠속에 깊이 빠져있었다. 밤늦도록 불을 밝히던 점포들이며 유곽(술집)이며 여각(숙소)이며 주막들까지도 일제히 문을 닫아걸었던 때문이었다. 등골이 오싹해질 정도의 무거운 침묵과 고요만이 드넓은 탑들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아주 간간히 어느 민가의 희미한 호롱불빛만이 창문 틈새로 겨우 새어나오고 있을 뿐이었다.
순라꾼들이 돌며 관아에 초상이 났음을 소리치고 난 직후부터였다.
이 어수선한 시기에 중원경을 다스리던 대윤이 갑자기 죽었다면, 이제부터 어디서 무슨 일이 어떻게 벌어질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을 모두가 직시했던 때문이다.
애매한 시비나 싸움에 휘말릴 수도 있고, 대윤의 장례를 빌미로 물건이나 부역을 징발당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 이런 혼란을 틈타 불량배가 활개 치거나 화적떼가 들이칠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럴 땐 무조건 안으로 문을 걸어 잠그고 숨소리마저 죽여 가며 엎드려 있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모든 사람들이 이내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어디 먼 곳에서 연실 개 짖는 소리만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그러기도 잠시, 이내 어디선가 후드득 흐드득 소리가 들판에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이내 굵어지던 빗방울이 삽시간에 장대비가 되어 내리 퍼붓기 시작했다.
그토록 여러 날을 봄 가뭄으로 사람들 속을 태우더니만, 참으로 이상한 때를 맞춰 느닷없이 비가 쏟아지기 시작하였던 것이다. 빗줄기는 하염없이 점점 거세어져만 갔다.
숨죽이고 엎드려 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불 꺼진 창문 틈새로 누가 볼세라 몰래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뭔 놈의 썩을 놈의 비가 요리도 몽창스럽게 쏟아진당가? 어여 죄다 젖어버렸네.”
“썩을 놈은 뭔 썩을 놈? 가뭄 걱정이 아니래도 시원하게 쏟아지는게 좋구만?”
“썩을 놈의 쉰소리덜랑 작작들 하고 어여 이리 불가로 와봐. 성님께서 기다리시는구만. 찬은 없지만 탁배기도 한잔씩 쭉 들이키고. 추위가 좀 가실거여.”
꾸역꾸역 사내들이 모여들고 있었다. 죄다 험상궂은 모습들이 대부분이다.
커다란 창고 안이었다. 둘러보니 마구간으로 쓰던 창고였다. 한때는 중원경 관에서 속해있던 말들이 제법 여러 마리가 있었다. 통상 많을 때는 일백여마리 이상의 말들이 관아에서 관리를 하고 있었다. 변란이나 전쟁이 있을 때는 일일이 말의 숫자를 헤아리지 못할 때도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때 부터인지 관아에 속한 말의 수가 점차 줄어들었고, 지난날 관아 내에서 다 수용하지 못해 관아 담장너머에 설치했던 마구간이 텅 빈 채 방치되어 왔던 것이다. 모여든 사내는 족히 스물은 넘어 보였다.
“모일만큼 모였는가? 모두 들었을 것이다. 대윤이 갑자기 죽었다. 듣자니 대낮부터 계집을 끌어안고 뒹굴다가 뒈져버렸다고 한다. 나이 처먹은 노인네 주제에 허구한 날 죽자고 계집 구멍이나 후비다 뒈졌으니 그것도 복이라면 복이겠지. 진즉이 뒈졌어야 할 노인네였는데........... 아무리 그렇다 쳐도 고을의 최고 높은 분이 죽은 것이니 만큼 아무 일도 없는 듯이 지나칠 수는 없겠기에 급하게 모두 불렀다. 대윤의 죽음에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하겠는가 상의를 하고 싶어서. 누구든지 자신의 생각을 말해보아라.”
모닥불 앞에 통나무 등거리를 깔고 앉아서 주변을 둘러보며 말을 꺼낸 사람은 유신웅 이었다. 그리고 모여들은 이들이 바로 외여갑당 패거리였다.
“계집 밝히고 재물 끌어 모으는 데만 혈안인 재수 없는 영감탱이였지만 반대로 생각하면 그런 족속이기 때문에 우리가 이렇게 여럿이 모이고 나름 조직을 갖추는데 크게 도움이 되었던 것이 아닐까 합니다. 제 놈 앞에 굽신굽신하고 지극히 떠받드는 듯 시늉만하면 외려 웬만한 일쯤은 다 눈을 감아주었든 것 아니겠소. 우리 같은 패거리에겐 외려 그게 편했소. 이제 그 영감탱이가 죽었으니 다음 대윤이 누가 되느냐가 우리에겐 가장 중요한 일인 것 같소. 아니 그렀소?”
“맞는 말이긴 하네만, 다음 대윤이 누가 되느냐에 대해선 이 자리에서 우리가 왈가왈부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 생각되네. 그 문제에 대해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과연 무엇이 있겠는가? 그냥 우리를 위해선 똑똑하지도 못하지도 않은 고만고만한 자가 오기를 바랄 밖에는.”
“어떻게 우리가 우리 맘에 드는 대윤을 세울 수는 없을까? 여기 우리 형님이 되면 어때서? 아니 그런가?”
갑자기 소란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박장대소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다시 유신웅이 나섰다.
“예끼 이놈아. 내가 대윤이라도 되면 네 놈도 당장 진골해달라고 조를게 아니냐? 그러면 바로 그날부터 네놈 행실이 죽은 영감탱이를 그대로 닮아 갈 터이고. 아니 그러냐? 허구한 날 네놈이 계집 가랑이에서 헤매는 꼴이 보기 싫어서도 대윤 안 할게다. 이놈아.”
“에구......... 그냥 형님이 하시지..........”
다시 한 번 배꼽을 잡고들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자. 자. 그건 그쯤하면 되었고......... 이제부터 하는 내 말을 잘 들어라. 대윤이 갑자기 죽었다. 진즉이 죽을 놈이었지만 암튼 별안간 죽어버렸다. 작금에 온 나라가 혼란한 것은 모두 알고 있을 터이고. 여기가 당장 신라의 영토고 신라가 지배를 하고 있는 것은 명백한 사실인데............ 가만히 생각해 보자. 그 발정 난 암캐 같은 계집년 여왕이 여기 중원의 왕이라는 표시는 아무 곳에도 없어. 없다고. 신라의 여왕이 이곳에 온다고 치자. 과연 여왕이 온다 해서 그 년이 여기에서도 왕일까? 그 년이 신라의 왕이라니까 이곳의 왕이라는 말은 맞아. 하지만 그년이 지 맘대로 다 할 수 있는 여기 중원의 왕은 아니라는 말이야. 진짜 왕이라면 모든 영토안의 모든 것을 꽉 움켜쥐고 지배를 해야 하는 거야. 그게 왕이지. 자기 말이면 무조건 다 되는 것 그게 왕이야. 근데 그 년은 당장 여기에 온다 해도 할 수 있는 게 별로 없어. 그러니까 왕이면서도 왕이 아니라는 말이지.”
“오늘 따라 형님 말씀이 무지 어렵게 들리네?”
“좀 쉬운 말 없수?”
“잘 들어 보라고. 저 아주 먼 곳에 있는 여왕은 아무런 힘이 없어. 힘이 있는 놈이 장땡인데............ 우습게 보여도 오늘 까지는 죽은 대윤 영감이 당장은 힘이 제일 강했어. 여기 탑들 울타리 안에서만. 다음으론 누가 힘이 셀까? 여기엔 아직도 진골이란 귀족들이 여럿이 살고 있다고. 그들은 나름 힘이 있어. 또 누가 있지? 관청에 벼슬아치들과 인근에 군사를 거느린 군관들이 힘이 있고........... 저 앞의 점포들엔 돈과 재물이라는 힘을 가진 장사치들이 있어. 알게 모르게 그들의 힘도 엄청나지. 아니 그런가? 어디 그뿐인가? 사방으로 드넓은 땅을 가지고 많은 노비를 거느린 호족들도 무시 못 할 힘을 이미 가진 자들이야. 당장은 장사치나 호족들만 보아도 서라벌의 여왕보다는 더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고 보아야겠지. 그렇다면 하나 물어보자. 우리보다 힘이 못한 자들이 과연 누구지?”
“없는데요?”
“듣고 보니 우리보다 못한 자들이 아무도 없잖아요?”
“그럼 우리가 꼬발치란 말이여?”
“우리는 몰려다니면서 억지를 쓰고 훼방을 놓고 트집을 잡고 하는 짓을 힘이라고 생각하는 정도의 부류지만........... 이 탑평리의 어디를 가서도 신훤(申煊)이라는 이름으로 지금 당장 안 통하는 곳이 있느냐? 너희들 중에 신훤이라는 자를 모르는 자가 있느냐? 아니면 나서서 신훤이와 맞대응 해볼 사람이 과연 하나나 있느냐? 지금 이대로 라면 열 번을 죽었다 깨어난다 치더라도 결코 신훤이 패거리를 넘어설 수 없을 것이다. 그럼 신훤이가 가장 힘이 세냐? 신훤이가 최고냐? 아니지. 신훤이가 죽었다 깨어나도 결코 넘볼 수 없는 사람이 둘이나 더 있지. 바로............. 죽주(竹州)엔 기훤(箕萱)이 있고, 북원(北原)에 양길(梁吉)이 또 버티고 있는 것이지. 여기 기훤이나 양길을 모르는 사람이 있느냐?”
“정말 그러네요. 그 두 사람이라면 서라벌의 여왕보다도 확실히 힘이 쎄지요. 암.”
“상단의 장사치들도 어떻게든 그 두 사람의 눈 밖에 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을 보거든요. 서로 어디로든 연줄을 대보려고 난리도 아닙니다.”
주위를 둘러보며 크게 심호흡을 한 유신웅은 다시 한 번 목소리에 힘을 주면 입을 열었다.
“너희들이 나를 믿고 따라주는 이상, 우리가 마냥 여기서 이대로 살 수는 없지 않겠느냐? 또 지금의 이 처지와 꼴로 어느 누구를 찾아간다 치더라도 선뜻 받아 줄 사람도 없을 것이고? 하지만........ 너희 모두가 하나로 똘똘 뭉쳐서 나를 믿고 잘 따라만 준다면 나는 기필코 너희 모두를 기훤이나 양길의 부하들 못지않게 해주겠다고 약속하겠다. 어때? 한 번 해보겠느냐?”
“난 따르겠소. 형님이 죽으라면 죽는 시늉이 아니라 정말로 죽을 수 있소.”
“좋소. 이렇게 버러지처럼 사느니 뭐든 형님 말씀을 따르겠소.”
이내 모여든 무술 남짓의 모든 사람들의 의지가 하나로 똘똘 뭉쳐졌다.
“좋다. 내가 기필코 보다 나은 커다란 대업을 반듯이 이루어 너희와 모든 것을 함께 나누겠다. 하여 나는 이번 대윤의 죽음을 하나의 계기로 삼고 도약하는 발판으로 삼기로 했다. 이제부터 잘 듣고 모두 따라주기를 바란다. 날이 밝는 대로 당원의 절반은 관아에 들어가 대윤의 장례 치루는 일에 전념한다. 하나에서 열까지 모두 너희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어야 한다. 외여갑당이 번듯하게 살아있다는 존재감을 저들에게 심어주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다음으로는 지척에 있으면서 저들사이에 오고가는 모든 이야기들을 낱낱이 듣고서 내게 보고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아무리 사소한 것일 지라도 빼놓지 말고 낱낱이 귀담아 듣도록 하여라. 누가 무슨 생각을 하고 누가 어떤 계획을 가지고 있고, 누구에게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는지를 모두 알아내야겠다. 관청 안에 있으면서 대윤이 가까이에 두고 품던 계집 중 하나쯤을 훔쳐내야 하겠다. 관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진 일들과 서라벌과의 연결고리를 알아내야만 하겠다. 알겠느냐?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나머지는 저자거리와 인근고을의 동향을 살핀다. 내용은 앞전의 것과 같다. 이번 대윤의 죽음이 우리에게 새로운 계기가 반듯이 될 것이다. 여기까지다. 알았으면 은밀하고도 조용하게 모두 물러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분담해서 진행하도록 하여라. 나는 계속 이곳에 머물러 있을 것이다.”
유신웅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패거리들이 둘 셋씩 무리를 지어서 삽시간에 모두 빠져나갔다.
“상돌이는 잠시 남거라. 내 따로 긴히 할 말이 있다.”
썰물처럼 사내들이 모두 빠져나가고 모닥불 앞에는 유신웅과 핵심 측근 둘에 상돌이라 불린 사내 해서 도합 넷이 둘러앉았다.
“상돌이 네가 패거리 중에서 가장 날랜 자로 하나를 골라내서 내일 새벽 날이 밝는 대로 먼 길을 좀 다녀와야 하겠다. 가장 중요한 일이다. 여행에 대한 채비도 이 밤 안으로 마쳐야 할 것이고...........”
“먼 길이라 하시면........ 몇 날이나........ 어디를 다녀오는 일입니까?”
“서라벌엘 다녀와야겠다. 매우 화급을 다투는 일이다.”
“다녀오는 거야 어렵지 않겠으나 무슨 일인지 알면 안 되겠습니까?”
“은밀히 서라벌에 가서 미선부인을 만나 뵙고 와야겠다. 떠날 때까지 내가 서찰을 써서 줄 것이니 전해 드리면 된다.”
“미선부인 이라면 김필 나리 댁의 마님을 말씀하시는 것입니까? 상수리로 가신........”
“그렇다. 상수리 처지이긴 하나 수소문을 해 보면 찾는 데는 별 어려움이 없을 것이다.”
“그래도.......... 쫓겨난 귀족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이 시국에 찾아보라 하심은..........”
“쫓겨난 진골인 것은 분명 맞다. 하지만 가장 확실하게 돌아올 귀족이고, 또 우리에게 가장 크게 힘이 되어줄 귀족이기도 하지. 하기에 어떻게든 서둘러 김일범이 죽었으니 돌아올 채비를 하시라고 미리 알려 드려야만 하는 것이다.”
“제가 듣기로는 김필이란 분이 엄한 진골로서 똑똑하기에 끌려간 것이고, 그렇기에 돌아오게 될 여지가 전혀 없다고 소문에 들었습니다. 또 그분이 대윤이라도 되면 참말로 우리 같은 패거리들은 발붙일 곳이 없을 거라고도 들었습니다. 그런데 어찌하여............”
“잘 듣고 속으로만 새겨라. 김필 그분은 네 말처럼 그런 분이다. 하여 정적들의 견제가 있는 한 절대로 돌아올 수가 없는 게 맞다. 그런데 미선부인이라면 그 분이 돌아오게 만들 것이다. 어떻게든 만들고도 남을 분이시다. 그리고 그 분은 남편인 김필 그 분과는 또 다르게 어떤 커다란 꿈을 가지고 계신 분이다. 이미 사년 전에 떠나시기도 전에 나에게 적지 않은 힘을 보태 주셨고 훗날을 약속해주신 분이시다. 큰 뜻을 이룰 분이시고 그 일에 우리를 중요하게 쓰시기로 약속이 되었었단 말이다. 김일범이가 죽었고 세상은 혼탁해져만 가고, 여기 중원경은 신라의 목줄이라 할 수도 있는데 너무도 멀어서 신라가 지켜내기에도 벅차기만 할 터이니.......... 김필 같은 분을 마냥 서라벌에 잡아두고만 있을 수는 없을 것이야. 그리고 우리는 그 분들이 돌아오고 난 다음 미선부인의 뜻에 따르기만 하면 될 것이고......... 그런 배경과 뒷줄이 있은 연후에야......... 신훤이던 기훤이던 양길이던, 한판 붙어 볼 수가 있게 될 것이 아니겠느냐? 이제 알겠느냐? 그만큼 화급을 다투는 중요한 일이다. 한 치도 어긋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야. 알겠느냐? 서둘러라”
(4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속리산에서 발원하여 먼 거리를 흘러내려온 달강(달래강)은 대문산자락 합수머리에서 영월 단양을 흘러온 남한강과 합류하여 서해를 향해 흘러간다.
일찍이 가야에서 귀화한 우륵이 바로 이 대문산자락 바위벼랑위에서 가야금을 타며 망국의 한을 달랬다 하여 그 이후 탄금대(彈琴臺)라고 불리기도 했다.
그 대문산 줄기의 끝자락인 나루터 부근에 채 날이 새기도 전인 새벽부터 사내 둘이 남들의 이목을 피해 몸을 숲속에 숨긴 채 달래강 건너편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이 기회를 그냥 지내보낼 위인이 결코 아니다. 틀림없이 어떻게든 기별을 보내려고 할 것이야. 잘 살펴야 한다.”
“꼭 이리로 오겠습니까?”
“출발은 두 길밖에 없는 것이야. 탑들에서 출발을 하면 일단 갈마까지는 외길이다. 저 건너편 갈마에서 나룻배를 타고 우리가 지키고 선 여기를 통과해 사천개와 발티를 지나 재오개를 넘어 하늘재를 넘어 남쪽으로 내려가던가, 아님 갈마에서 둑길을 타고 올라 달신을 지나 대가주의 하풍이나 상풍의 여울을 건너 노루목 고개를 돌아 새재를 넘어 내려가는 길이다. 허니 우리는 여기 지키고 서서 탑들에서 나오는 무리 중에 여갑당 패거리의 놈들을 가려내야만 하는 것이다. 잘 살펴라.”
“다행이 날은 개였으나 부락에서 나올 때부터 비를 맞은 지라 제법 춥습니다.”
“참아야만 한다. 어쩌면 이 일이 너와 나, 그리고 우리 집안에 대단히 중요한 이일 수 있다.”
“그런데 말씀입니다. 삼촌. 이런 중요한 일을 큰삼촌께 말씀드리지 않으셔도 되는 것입니까?”
“지역에서 제법 난다 긴다 하는 작자들이 탑들의 상권을 죄다 쥐고 엄청난 재물을 벌어들이고 있지를 않느냐. 소위 중원경의 유서 깊은 가문이라고 떠들어대고는 있으나 우리 유씨 가문의 가세가 기운지 이미 오래라. 하여 오래전부터 큰삼촌과 우리 일가가 탑들의 상단으로 진출하여 다시 집안을 일으키고자 오랫동안 모색하였는데 그 미친 할애비가 여전히 훼방을 놓고 있는 것이 아니더냐. 하여 큰삼촌은 어제 대낮부터 분노에 떠시다 폭음을 하셔서 초저녁에 대윤 김일범이 죽었다는 사실을 말씀드렸음에도 불구하고 사태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고 계신단다. 크게 분하셨던 모양이야. 좀 체 그런 모습을 볼 수가 없었는데......... 허나 이미 오랜 세월을 함께 지켜보며 살아왔는데 이 같은 급박한 상황을 보고 마냥 손을 내려놓고 있을 수는 없는 것이 아니겠느냐? 일을 제대로 처리한 후에 내가 소상하게 보고를 드릴 것이야.”
“지금 저들을 베겠다는 것 아닙니까?”
“흔적을 남기지 않고 감쪽같이 처리해야 하니 죽여서 어디든 묻어야지.”
“저들이 호락호락하지 않으면요? 또 누군지도 모르는데............”
“염상(廉湘)아. 훗날을 도모하기 위해선 어쩔 수 없는 일이란다. 또 너도 이미 잘 알고 있지 않느냐. 미친 할배가 여갑당이라고 몰고 다니면서 얼마나 못된 짓을 일삼고 있는지. 그 패거리들 중 하나를 없애려 하는 것이다. 그리고 뒤처리는 네가 할 것이 아니야. 넌 아직 너무 어려서 칼을 쓰는 일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이제 곧 권신(權信)이가 올 것이야.”
“사촌형이 온다고요?”
“그래 모든 일처리는 나와 권신이가 맡는다. 너는 그 놈을 찾아내는 것 까지만 나서면 되는 것이야.”
“신이 형이라면 싸움 잘하는 것을 제가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 훗날 네가 신이만큼 자라게 되면 너는 그때 칼과 창을 제대로..........”
“삼촌. 삼촌........... 보십시오. 사람들입니다. 분명 탑평(중원경 고을)에서 사람들이 오고 있습니다.”
두 사람은 적지 않게 긴장되었다.
분명 탑들 쪽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갈마나루터에 몰려온 것이었다.
달래강의 너비가 제법 넓어서 사람들의 움직임을 판단한다는 것이 그리 호락호락한 일은 아니었으나 두 사람은 온 신경을 집중하여 강 건너를 유심히 살폈다.
탑들쪽에서 온 사람 중 대다수가 거룻배에 올라탔다. 달래강을 건너 이쪽으로 건너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한 사람은 어부였던 모양이다. 그 사내는 슬슬 강변을 거슬러 나오는 거룻배 옆에서 작은 고기잡이배에 올랐다.
“삼촌. 수상한 사람이 둘이 더 있습니다. 나루터에 들지 않고 둑길을 타고 달신쪽으로 올라가고 있습니다. 걸음걸이가 제법 빠르고요.......... 괴나리봇짐을 등에 하나씩 둘러메고 있는 것이 아무래도 먼 길을 가는 사람들 갔습니다. 아마도 틀림없어 보입니다.”
“네 말대로 그렇구나. 저 자들이 분명 맞는 것 같다. 중원경을 떠나기까지는 남의 이목을 많이 꺼리는 모양새로구나. 차림이며 새벽에 나서는 것도 그렇고. 틀림없다. 하나인줄 알았더니 둘이라.............”
“이제 어떻게 합니까? 강을 건너 쫒아 갑니까?”
“아니다. 염상아. 네 강 이편의 둑길 아래로 몸을 숙이며 쫓아 올라간다면 강줄기가 이편으로 휘어있기에 뒤처지거나 쫓는데 어려움은 없을 것이야. 단 조심해서 저들에게 들키지는 말아야 한다.”
“저 혼자 저자들을 쫓는 것입니까?”
“만에 하나 저자들이 아니거나, 다른 곳으로 길을 바꾼다면 참으로 낭패가 아니지 않겠느냐? 놓치지만 않고 쫓아가고 있으면 내가 곧 뒤따를 것이야. 저들을 놓치지 않으려면 당장 누군가 뒤를 쫓아야만 하는데, 혹시나 몰라 내가 남아서 저기 건너오는 거룻배에 탄 사람들도 확인을 해봐야 하지 않겠느냐? 내게 타고 온 말이 있으니, 강 건너 오는 자들을 확인을 하고 아침에 왔던 길을 달려 발티쪽을 지켜보고 있는 권신이를 데리고 하풍의 여울 쪽에 미리 당도해 일처리를 준비할 것이야. 그러니 걱정 말고 한동안만 저들 눈에 띠지 않게 뒤쫓도록 하여라. 할 수 있겠느냐?”
“예. 삼촌. 은밀하게 뒤쫓을 것입니다. 걱정 마시어요.”
다소 상기된 표정의 염상이 입에 하얀 입김을 내쉬며 둑길 이편으로 달려 내려갔다.
지켜보는 유권열의 눈가에 안타까움과 걱정되는 빛이 겹쳐 지나갔다.
그 사이 거룻배는 강을 거의 건너오고 있었다.
턱밑까지 숨이 차올랐다.
삼촌들을 따라 무술을 연마한답시고 목검을 쥐고 휘둘러보기도 하고 토끼사냥을 핑계로 들로 산으로 쏘다닌 적은 있으나, 이렇게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누군가를 미행해 본다는 것은 상상도 해보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만약 저들이 누군가가 뒤쫓는다는 것을 눈치 채기라도 하면 낭패가 아닐 수 없었다. 더구나 저자거리에 수문이 자자한 여갑당무리라면 더 잔혹할 것이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이제나 저제나 삼촌이 돌아올 때만 기다리며 자꾸만 뒤를 흘끔거리는 염상이었다.
염상의 앞으로 소나무 숲이 우거진 강변이 모습을 드러냈다. 송림이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강 건너의 저들도 잠시 쉬어가는 모습이었다.
그때 갑자기 염상의 시야에 새롭게 들어오는 것이 있었다.
강 건너 두 사내의 뒤로 아주 한참을 떨어져서 분명 사람 하나가 뒤를 따라오는 것이 보였다. 어느새 해가 한참을 떠올라 그냥 지나치는 행인일 수도 있겠으나, 분명 뒤따라오던 사람은 앞의 무리가 잠시 쉬는 모습을 보이지 갑자기 둔덕 아래로 몸을 숨기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던 것이다. 분명 저들을 뒤쫓는 다른 사람이 있는 것이다.
“염상아.”
너무도 긴장하였음인지 인기척도 느끼지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아득한 현기증과 함께 그만 털썩 주저앉았다.
“녀석 놀라기는........ 그러다가 오줌까지 지리겠다.”
“허휴. 신이 형. 정말 놀랬잖아. 들켜서 누군가가 뒤쫓아 왔는지 알았다니까? 삼촌은? 삼촌이 형 찾으러 가셨는데?”
“삼촌은 지금 저만치 앞서 가시고 계셔. 너는 이제 되었으니 조심해서 돌아가도록 해라. 큰삼촌 댁으로 가지 말고, 일단 작은삼촌댁 부근에서 우리가 돌아갈 때까지 기다리도록 해라.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만약에 주변에서 이상한 낌새가 느껴지면 그 즉시 큰삼촌께 모든 사실을 고해드리면 될 것이야. 그 전까지는 일체 비밀이다. 알겠니?”
“그쯤은 내가 모두 알겠는데......... 형. 이 일이 어떻게 마무리 되어야 하는지 모두 알고나 있는 거야?”
“응. 지난밤 늦게 큰삼촌 모셔다 드리고 나서 작은삼촌과 심사숙고한 끝에 내린 결정이야. 이게 최선의 방책이고, 우리에게 택할 수 있는 다른 선택이 없단다.”
“형은 두렵지 않아?”
“언젠가는 이런 날이 오리라 기다리고 있었어. 맨 날 훈련만 했지 실제 싸움을 해보지 못했잖아. 거기다 삼촌은 싸움에 관한 한 일류 고수이셔. 그러니 아무 걱정 말아라.”
“나도 따라갈래.”
“넌 아직 어려. 나도 삼촌도 그것만은 원치 않아.”
“나도 뭐라도 해야지?”
“여기까지 저들을 뒤따라왔잖아. 그것만도 힘든 일이었어. 자. 내말 잘 들어. 이 길로 저쪽 소나무 숲을 벗어나면 나와 삼촌이 타고 온 말이 있어. 삼촌말의 고삐를 네 안장에 묶고, 넌 내 말을 타고 아주 천천히 태연하게 촌으로 돌아가면 되는 거야. 그리고는 아무 일 없는 듯이 지내며 우리가 돌아가기를 기다리면 되는 거야. 알겠니?”
“삼촌 말을 왜?”
“이제부터 나와 삼촌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계속 저들을 앞서가면서 살필 거야. 하니 말을 타고 왔다 갔다 하면 쉽게 눈에 띠지 않겠니? 그래서 이제 네가 말을 가지고 먼저 돌아가는 거야.”
“그것쯤은 할 수 있어. 그런데 형. 한참 전부터 저들을 쫓고 있는 또 다른.............”
“알고 있어. 삼촌도 아시고. 그래서 뒤쫓으려던 생각을 고쳐 앞서가려는 것이야. 알겠니? 그것은 삼촌과 이 형이 알아서 처리한다. 너는 조심해 돌아가는 거야.”
유권신은 동생 염상을 향해 씨익 웃어보이고는 허리를 낮춘 자세로 강둑을 향해 달려갔다.
그런 형의 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던 염상도 이윽고 소나무 숲 밖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야. 상돌아. 새벽같이 나서서 이제껏 뛰다시피 왔는데 이제 잠시 쉬어가면 안되겠냐?”
앞서서 부지런히 발걸음을 옮기던 상돌이 돌아보니 덕보가 뒤따라오는 모습이 많이 힘들어 보였다. 일단 중원경의 언저리를 무조건 벗어나고 보자하며 서둘렀던 길이었다. 자신보다 몸이 날래서 데려온 덕보였으나, 꽤나 오랫동안 답들을 벗어날 일이 없었으니, 모처럼 나선 장도에 첫 시작부터 몸이 적응되었으리라고는 볼 수 없었다. 한 이틀 지나면 그제야 자신보다도 훨씬 민첩한 행보를 보이리라. 늦더라고 열흘 안에는 서라벌에 도달하여야 만 했다. 그렇게 당부에 당부를 유당주로부터 받고 떠나온 길이었다.
“그러게 내 뭐라던. 평소에 술타령만 하지 말고 몸 좀 잘 추스르라고 안하던? 이제 겨우 얼마나 왔다고 쉬는 타령이야? 타령이. 우리가 하풍 여울을 건넌 것이 잠시 전이었으니 조금만 참으시게. 상풍 여울 지나면서 쉬기로 하지. 거기 도랑에 샘물도 있으니...........”
“샘물까지야 참을 수 있지. 그나저나 서라벌이 하루 이틀에 당도할 길도 아닌데 왜 시작부터 이리도 서두는 것인가?”
“은밀하게 다녀와야 하는 일이라고 누차 말하지 않았나? 그러니 서둘러서 고을 인근만 벗어나면 그때부터는 평소처럼 가면 될 것이야. 그러니 오늘 하루만 힘들어도 참게.”
“알겠네. 그런데 말이야. 여울 건너 저쪽에 초립을 쓰고 혼자가고 있는 사람 말이야. 아까부터 쭉 우리랑 보폭을 맞추고 따라온다는 느낌이 안 드나? 우리가 이렇게 빨리 걸어왔는데..........”
“덕보 자네 눈치도 아직은 살아있구먼. 나도 아까부터 그런 느낌이었어. 하여 우리가 하풍 여울을 건너오면서 저 자도 따라 건너오면 기다렸다 한 번 떠보려고 했는데, 저 자가 건너오지 않더군. 이제 달리 강을 건너올 방법이 상풍여울 뿐이니 조금 더 지켜보면 알게 되겠지.”
“당연히 건너오겠지. 건너오면 어쩌겠는가?”
“샘물에서 쉬면서 살펴보고, 샘물에서 노루목고개까지가 족히 오리 거리인 벼랑길이네. 내달리다 멈추고 내달리다 멈추고 하면서 좀 더 살펴본 연후에............”
“연후엔?”
“노루목 고개에서 처치해야지.”
“처치한다고? 잡아서 족치든가 확인도 안하고 무조건?”
“응. 우리를 쫓아왔던 아니던, 미심쩍어 보이면 무조건 처치해서 흔적을 지우고 서둘러 내려가야지. 이제부터 우리에겐 이편도 저편도 없는 것일세. 서라벌에 당도해서 임무를 마칠 때 까지는 주변의 모두가 적인 것이야. 하니 긴장을 한시라도 늦추지 말게.”
“알겠네. 그렇다면 꼬락서니를 보아하니 저 자는 조금 있다가 꼭 죽어야 하는 운명일세 그려? 여울을 건너오지 않고 상풍으로 들어간다면 모를까?”
잠시 지나 샘물에 도달한 두 사내는 목을 축인 후 바위에 걸터앉아 등줄기에 흘러내린 땀을 식히며 연실 뒤를 세세하게 살파고 있었다.
여울 저편에 당도한 초립의 사내는 짚신과 버선을 벗어들고는 그대로 상풍의 여울을 건너오고 있었다. 세찬 물살이 허벅지까지 차오르자 물속이 매우 미끄러운 듯 여울을 건너오느라 여간 고생스런 모습이 아니었다. 한참을 걸려서 힘겹게 여울을 건너온 사내는 고개를 들어 저만치 샘물 쪽을 살피더니 여울가의 바위에 털썩 주저 않았다.
그러더니 세수도하고 주먹만 한 돌을 주워 발바닥도 문지르고 괴나리봇짐에서 무엇인가를 꺼내 먹는 등 전혀 서두는 기색이 없어 보였다. 누가 보더라도 그저 길을 가다 잠시 쉬어가려는 과객의 모습과 다를 바가 전혀 없어보였다.
그러나 샘물에서 쉬고 있는 두 사내에게만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았다.
“틀림없구먼. 우리와 상관이 있다는 놈이라는 것이.”
“절대 가까이는 오지 않겠다는 말인데...........노루목고개 모퉁이를 돌아서서 해치운다. 내가 돌팔매를 준비할 터이니 덕보 자네는 단도를 꺼내 준비하게. 설마 목 따는 솜씨가 그새 준 것은 아니겠지? 한 번에 해치워 숲속에 감쪽같이 버리면 될 것이야.”
“저렇게 거리를 두는 것을 보니 종일 따라붙고, 우리가 묵어가게 될 만한 곳에서 다른 놈들과 합세하는 것이 아닐까?”
“그렇다면 죽이기 전에 먼저 잡아 족쳐서 물어봐야 하지 않겠는가?”
“그렇다면......... 저 놈이 수월하게 처리가 되면 잡아 족친 후에 해치우기로 하고, 호락하지 않으면 무조건 해치우고 보기로 하지. 바리때기라도 뒤져보면 뭔가 나오겠지.”
흑초립을 쓴 사내의 표정엔 무척이나 긴장한 빛이 역력해보였다. 자신이 쫓고 있는 앞서가는 두 사내에 대해서 한시도 눈을 떼지 못하고 있으면서도 혹여 누군가가 당장 등 뒤에서 들이닥칠 것만 같아 연실 뒤를 돌아다보고 있었다. 얼굴을 타고 내린 땀이 목덜미를 타고 옷깃 속으로 스며들고 있었다.
사내는 뜻밖에도 스물을 조금 넘어섰을만한 아직은 앳된 소년의 티를 말끔하게 다 벗어내지 못한 청년이었다. 좀 산다싶은 집안에서 곱게만 자란 사내이다 싶었다. 유독 뽀얀 피부에 이목구비가 준수한 청년은 키가 좀 작다 싶으며 왜소한 체구였다. 등에는 괴나리봇짐을 하나 둘러메었고 손에 지팡이 삼아 작대기 하나를 들고 있었다.
사내는 지금 안달이라도 난 듯이 발걸음을 몹시 서둘고 있었다. 숨이 가슴팍까지 차올라왔다.
벼랑길을 따라 노루목고갯길까지 부지런히 쫓아온 걸음이었는데, 고갯길 모퉁이에서 두 사내의 그림자가 시야에서 사라져버린 때문이었다. 여기서 이대로 놓쳐버리면 안 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기에 저절로 발걸음이 마치 달음박질치듯이 달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너무 어리석은 결정을 했던 것은 아닐까? 혼자 감당해내기에는 너무나 벅찬 일을 쉽게 뛰어든 것은 아닐까? 이제쯤 아버지께서 내 서찰을 보시기는 하셨을까?’
후회막급이었다. 후회가 드는 꼭 그만큼 어떤 두려움이 사정없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파고 들어왔다.
당장 돌아서고 싶었다. 처음부터 잘못 시작했다는 후회가 이제는 어느 정도 확신으로 바뀌고 있었다.
그때였다.
이 고개 어귀만 돌아보고 뒤쫓던 자들이 시야에서 사라졌으면 그쯤에서 돌아서리라고 마음먹던 그 순간이었다.
“이거 아직 새파란 애송이 도령이 아니신가? 어느 귀한 집 도령이신 것 같은데 어쩌자고 우리 뒤를 졸졸 따라오시는가?”
털북숭이에 기골이 장대한 사내 하나가 갑자기 나타나 길을 막고 선 것이다. 다른 사내 하나는 보이지 않았다.
“누 누구십니까? 뒤.......... 뒤를 쫓다니요? 저........ 는 심부름으로 고모님 댁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무슨 오해라도...........”
“오해? 오해라............. 그래? 그럼 고모님 댁이 어디신가?”
“사.......... 사......... 사벌주입니다. 그런데 왜 그러시는지요?”
“사벌주? 서라벌이 아니고?”
“서......... 서 서라벌이라니요? 저는 분명 사벌주를 가는 길입니다.”
“사벌주던 서라벌이던............ 자네도 긴박한 일로 서찰을 전하러 가는 길인가?”
“서....... 서찰이라니요? 그냥 고모님을 뵈러 가는 길입니다만. 왜 자꾸.........”
“왜? 왜라........... 그럼......... 도령은 어디 사는 뉘댁 누구신가?”
“그건 왜 물으십니까? 제가 어디 사는 누구이던 그것이 제가 지금 고모 댁에 가는 것과 무슨 상관이 있단 말씀이십니까?”
“있지. 나는 지금 서라벌의 미선부인이라는 분한테 아주 중요한 서찰을 전하러 가는 길인데.......... 혹시 자네도 미선부인을 찾아가는 길이라면 수고도 덜 겸 자네 편에 보낼까 해서 물어본 것이지. 그런데 정말 아닌가?”
“미........ 미 미선부인이라니요? 저는 그런 분을 알지 못합니다. 그런 심부름을 할 처지도 못되고요. 하오니 이만 가봐야겠습니다. 길을 비켜 주시지요?”
“정녕 김필 나리 댁 미선부인을 모른단 말인가? 잘 생각해 보면 기억이 날 텐데?”
“자네 왜 그리 쓸데없는 소리를 자꾸만 지껄이는 것인가? 어서 서둘러 마무리나 하고 가던 길을 재촉하기로 하세.”
어느 틈엔가 슬그머니 초립을 쓴 젊은 사내의 등 뒤로 상돌이란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젊은 사내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절망적이었다. 이미 저들은 자신이 뒤쫓고 있다는 것을 알아차리고 앞뒤에서 협공을 가하고 있는 것이었다. 사내 하나도 벅찬 상황에서 보이지 않던 다른 사내 하나가 갑자기 등 뒤로 나타났으니 덜컹 겁부터 밀려들기 시작했다.
“도대체 길가는 사람을 붙잡아 놓고 왜들 이러시는 것입니까? 화적패라면 가진 것은 없으나 모두 드릴 터이니 제발 이러지는..........”
“적어도 옻갓(漆枝) 최씨 댁 도령의 목숨 정도라면 값을 매겨도 제법 후하게 매겨야 하지 않겠는가?”
나중에 나타난 상돌은 이미 이 청년의 정체를 알고 있었던 것이다.
“이 도령이 그 최씨 집안 아들이란 말이여? 그런데 왜? 왜 이자가 지금 우리 뒤를 쫓고 있다는 말이여? 시방.”
젊은 사내는 자신의 정체가 탄로 났다는 것을 알았다.
이젠 정말 모든 것이 끝이구나 하고 생각을 하니 갑자기 어떤 오기가 발동하기 시작했다.
“당신들은 결코 서라벌에 서찰을 전달할 수 없을 거요. 이제 당장 내 부친께서 무리를 이끌고 이리로 들이닥칠 것이니 이제라도 서찰을 나에게 넘겨주고 당신들은 어디 먼 곳으로 도망치시는 것이 좋을 것이요.”
“후후후. 최씨 댁 작은 도령이 무골은 타고나지 못하였지만 기백이 넘치고 총명하다는 소리는 내 진작 들어봤지. 후후후. 과연 그렇군. 허나 어쩌겠는가? 내 방금 뒤를 살펴보니 아무도 쫓아오는 기색이 없고, 또 내 가만히 생각해 보니 자네의 부친이라면 결코 유약한 자네를 이렇게 앞세우지도 않았을 것이니........... 자네의 치기가 지나쳤음 이던가 이런 상황까지는 미리 예측하지 못하였음이겠지. 아닌가? 아무튼 어쩌겠는가? 일이 이렇게 된 것을.......... 우리는 서둘러 자네의 목숨을 수거하고 나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가던 길을 마저 가야만 하겠네. 그러니 너무 억울해 하지만은 마시게나. 이것도 다 운명인 것을.........”
앞을 막아선 덕보가 품속에서 비수를 꺼내들었다.
히죽히죽 기분 나쁜 웃음소리를 내며 한걸음씩 다가들었다. 커다란 손으로 젊은 사내의 멱살을 단박에 움켜쥐고 그대로 명줄을 끊어놓겠다는 심사였다.
젊은 사내는 저절로 옆걸음질을 쳤다. 힐끗 주변을 둘러보지만 어디에도 달아날 곳이 없었다. 손에 쥐고 있던 나무지팡이를 들어 사내를 겨누었다.
그러나 덕보의 발걸음은 멈춰지지 않았다. 전혀 머뭇거림 없이 바짝 다가선 덕보는 누런 이빨을 내보이며 젊은 사내를 그대로 덮쳐갔다.
쉬익.
바람을 가르는 소리와 함께 무엇인가가 날아와 덕보의 등판에 박혔다. 덕보는 어떤 극심한 통증에 시달리는 듯 눈이 뒤집히도록 크게 뜨더니 단말마 비명소리와 함께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화살이었다.
숲길의 저만치 뒤에서 두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한 사내가 걸어오면서 다시금 활에 화살을 재우고 있었다.
순간 모든 상황을 눈치 챈 상돌이의 손에서 돌멩이 하나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갔다.
날아간 돌멩이는 보기 좋게 그대로 활을 든 사내의 어깨에 명중했다.
활을 떨어트린 사내가 어깨를 감싸 쥐고 땅바닥을 나동글었다.
상돌이가 다시금 돌멩이를 하나 손에 들고는 달려오고 있는 사내를 노려다 보았다.
이쯤이다 싶었을 때 돌멩이가 상돌의 손을 벗어나고 있었다. 되었다 싶었다. 틀림없이 날아간 돌은 상대의 머리통에 작열하였고 피분수를 뿜으며 땅바닥을 나뒹굴 거라고 확신이 섰다. 이제까지의 숱한 경험이 이정도 거리에서 이런 상황에서의 결과를 확신하게끔 뒷받침 해주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아니었다.
그 짧은 거리의 찰라 같은 짧은 시간에도 달려들던 사내는 어느새 칼집을 휘둘러 날아가던 돌멩이를 튕겨내 버리는 것이었다.
“어?”
그것이 전부였다.
하얀 섬광이 번쩍인 것과 동시에 상돌의 목은 어느새 잘려나가 머리통만이 땅바닥을 내뒹굴고 있었다. 정작 피분수를 내뿜는 것은 상돌이었다.
사내는 화살에 맞고 고꾸라진 사내에게 다가와 상황을 살폈다. 아마도 절명하였던지 어떤 살아있는 기미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활을 쏘다 돌멩이에 맞았던 사내가 일어나 떨어트린 활과 화살을 주워들고 다가왔다.
최씨 도령이라 불린 사내는 당장 눈앞에 펼쳐진 상황이 전혀 믿기지 않는 다는 듯이 그대로 땅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다는 실감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신아. 괜찮으냐? 크게 상하지는 않았느냐?”
“호되게 맞아서 잠시 고통스러웠을 뿐 다치지는 않았습니다. 삼촌은요?”
“나는 괜찮다. 그럼 이제부터 너는 저자들의 품속과 봇짐을 뒤져 서찰을 찾도록 하여라. 시간이 없다. 서둘러라. 나는 저 도령을 좀 살펴보아야겠구나.”
유권신은 조금도 망설임 없이 목이 잘려나간 상돌의 품속과 봇짐을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 다친 곳은 없으신가? 나는 안골에 사는 유가로 권열이라 하네. 들어보니 옻갓 최씨 댁 자제라고 들었네만. 저놈들은 외여갑당으로 서라벌에 그 악독한 계집에게 서찰을 가지고 가는 중이었네. 하여 우리가 진즉부터 놈들 뒤를 쫒고 있었는데, 우리 말고 또 다른 사람이 또 쫓고 있다는 것을 알았네. 그게 자네였던 것이지. 그래 자네는 무슨 연유로.......”
“목숨을 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저의 아비는 최(崔)가로 율원윤(律元尹)자를 쓰십니다. 저는 집안 둘째로 정나(貞奈)라 합니다. 지난밤에 고을관아의 대윤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다방면으로 변화에 대하여 고심을 하던 중, 이런 일이 생길 거라 예측되어 부친과 형에게 상의하였으나 반신반의하는 모습이어서 부득불............ 부친께서 일어나시면 자초지종을 적은 서신을 올리라고 집사에게 맡겨놓고 나섰는지라............. 지금쯤은 부친께서도 아시고.........”
“그런 위중한 일에 감히 혼자 나서다니 기개가 대단하다만, 지금쯤 부친께서 크게 놀라셨을 것이네. 자. 자. 이미 벌어진 일. 어쩌겠는가? 서둘러 여기를 말끔히 정리하고 여기를 뜨기로 하세. 돌아가는 대로 부친께 있는 그대로를 모두 말씀 드리고........”
“삼촌. 찾았습니다. 분명 미선부인에게 가는 서찰입니다.”
“다른 것은 없더냐?”
“노자 돈이 좀 있을 뿐입니다.”
“일단은 서둘러 남의 눈에 띠기 전에 시체를 치우고 여기를 뜨는 것이 시급하다.”
“어? 삼촌. 삼촌. 놈이 도망을 갑니다.”
죽은 줄 알았던 거구의 덕보가 어느 틈에 일어나서 슬금슬금 언덕길을 내려가고 있는 중이었다.
“저놈을 살려둬서는 안 된다. 쫓아라. 단번에 요절을 내 버려야 한다. 어서.”
유권열과 유권신은 몸을 날려 덕보의 뒤를 쫓았다.
그때였다.
“여보시오. 무슨 일이요? 거기 누가 다쳤소?”
저만치 산길 아래서 누군가가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사람 살려. 사........ 사람..........”
저승문턱에서 살 방도라도 찾은 듯 비틀비틀 걸어 도망치며 덕구는 소리를 쳐댔다.
뛰면서 유권열이 저만치를 내다보니 산자락 저 아래에서 사내 둘이 뛰어 올라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 거기다가 사내 둘 모두 손에 들고 있는 것이 칼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칫하면 상황이 걷잡을 수 없는 사태로 변해갈 판이었다.
“신아. 멈추고 활을 나에게 다오.”
뜻을 알아차린 권신이 활과 화살 하나를 삼촌에게 넘겼다.
활시위가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팽.
소리와 함께 화살이 시위를 떠나갔다.
제법 먼 거리였음에도 바람을 가르고 날아간 화살은 그대로 덕보의 목덜미를 관통했다.
성난 야수처럼 허공을 향해 처절한 울부짖음을 포효하듯 토해내던 덕보는 목덜미를 움켜쥐고는 통나무 쓰러지듯 쓰러졌다.
그리고 두 사내가 도착하여 덕보를 살피기 시작한 것은 거의 동시였다.
한 사내가 칼을 뽑아들고 쪼아 올라올 기세를 보이자 지체 없이 위쪽으로 부터 피슝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와 바로 옆의 나무에 박혔다.
“화살이다. 도지야 어서 언덕 아래로 몸을 숨겨라. 저들이 활을 가지고 있다. 어서.”
“아재. 이게 대낮부터 무슨 일이래요? 화적인가요?”
“소경이 지척이고 번듯이 관가와 관군이 있는데 이런 지척에서 살인이라니....... ”
쿨럭. 쿨럭.
“아재. 이 사람이 아직 살아있어요. 어떻게 해야 하나요?”
“등에 박힌 화살은 그렇다 쳐도........ 목구멍을 그대로 화살이 관통을 했단다. 전혀 가망이 없다. 차라리 고통을 덜어주는 편이......... 너는 고개를 돌리 거라.........”
“꺼억. 꺼어어어억. 서......... 서......... 서.........찰...........여............... 가아아.......당............ 당........ 당.........당주에..........게...............”
사내는 끝내 숨을 거두었다.
“도지야. 내가 부를 때까지 그 자리에 그대로 몸을 숨기고 있어라.”
“아재. 어쩌시려고요?”
“무슨 큰 일이 난 것이 아니겠느냐? 하니 살펴봐야만 하겠다.”
“저들이 활을 쏘잖아요?”
“백주 대낮이고 행인들이 오가는 길목이다. 저들이 필시 당당하게 살인을 저지르지는 않았을 것이야. 시간과 남의 이목에 쫓기는 것은 바로 저들이야. 하니 도망치기에 바쁠 것이야.”
“아재. 우리를 목격자로 보았다면 끝내 우리까지 해치려 들게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조금만 더 기다려 보시지요?”
“시간에 쫒기는 것은 저들이라니까? 우리를 목격자로 보았다면 벌써 우리도 죽이려 덤벼들었을 것이야. 거기서 꼼짝 말고 조금만 기다려라. 내가 가 봐야겠다.”
공산은 커다란 아름드리나무들의 뒤를 방패삼아 이리저리 돌며 앞으로 나아갔다.
어제는 새재에서 홍술 패거리들과의 싸움에 이유 없이 휘말리어 곤욕이라면 곤욕을 치렀더니만, 오늘은 또 하필 이곳을 지나는 이쯤에 무슨 사단이 나도 크게 난 모양이었다.
노루목 고개에 겨우 다다른 공산은 하마터면 비명을 지를 뻔하였다.
사내의 몸뚱이 하나가 주위를 온통 피로 적신 채 드러누워 있고, 저만치 그 사내의 머리가 나뒹굴고 있었던 것이다.
죽은 사내의 앞섶과 괴나리봇짐 두 개가 헝클어져 있는 것이 누군가 여기에서 무엇인가를 찾고자 하였다는 뜻이었다.
공산은 산모퉁이를 돌아갔다.
그리고 주변을 세세하게 살폈다.
벼랑길에도 강둑에도 강 건너에도 사람의 그림자 하나 없었다. 오늘따라 오가는 행인 하나 눈에 띠지를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면..........’
공산은 고개를 들어 벼랑길 우측으로 깎아지른 듯 우뚝 솟아있는 대림산을 올려다보았다.
당장 이곳에서 대림산을 오를 수 있는 길은 없다. 수십 길 바위벼랑이 병풍처럼 길게 늘어서 있기 때문이다. 오백 보쯤 벼랑길을 타고 가서 우측으로 골짜기를 택하는 길이 유일한 길이었다. 대림산의 정상으로는 삥 둘러 산성이 있다.
‘저들은 틀림없이 골짜기를 통해 대림산으로 숨어들었다. 그렇다면 이제 어쩐다?’
‘무슨 내용인지도 모르는 처지에 끝까지 저들을 쫓을 것인가?’
‘마냥 기다리고만 있을 도지는 어떻게 할 것인가?’
‘도지를 데려와 저들을 쫓는다면? 병풍처럼 둘러 친 바위산을 아래서부터 뒤쫓는다면 활을 가진 저들에게 노출이 너무나 많게 된다. 또 여러 개의 골짜기 중에 굳이 숨어서 도망치려 한다면 저들을 어떻게 쫓을 것인가?’
‘이 상황을 모른 체 지나칠 수도 없고.......... 돌아가서 주변을 샅샅이 살펴 무엇이든 찾아내고........... 소경의 관아로 가서 빨리 신고하는 것이 최선이겠다.’
마음을 고쳐먹은 공산은 못내 아쉬움 속에 골짜기를 둘러보다가 이윽고 발걸음을 돌렸다.
(5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이것 참. 예정에도 없던 산행이라니? 모처럼 이라서 그런가? 왜 이리 힘이 들꼬?’
평소 훈련장에 살다시피 하면서 군사들 조련에 열중하였었건만, 용도에 따라 쓰이는 신체의 근육과 활력이 달라서인지 산을 오르기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은 것 같은데 벌써 숨이 가슴팍까지 팍 팍 차오르고 연실 흘러내리는 땀이 등줄기까지 흥건하게 적시고 있었다.
돌아다보니 저만치 먼 발치아래 자신들이 타고 온 말이 매어져 있는 것이 까마득하게 멀리 내려다 보였다.
잠시 멈춰 서서 허리춤을 풀고 소피를 보는데 시원하게 내뿜는 오줌발을 보노라니 스스로 무엇인가 대견스러운 듯 헤픈 웃음을 짓고 있었다.
“시원하시겠습니다. 형님.”
“허허허. 어제 마신 술이 이제 나오는가봐? 그나저나 이보게 영규(朴英規). 배를 띄워 해로를 점검하지 않고 산행이라니? 내 하도 성화 길래 따라나서긴 하였으나 이 무슨 뚱딴지같은 짓인가?”
“제 뜻이 아니라 하지 않았습니까? 이 모든 것이 술사(術師) 그 양반의 뜻이라니까요?”
“종훈(宗訓)이가 왜?”
“낸들 알겠습니까요? 간곡하게 부탁을 하니 평소 형님이 명하신대로 저도 술사의 말씀을 받들 수밖에요. 이제 거의 다 왔을 것이니 직접 물어 보십시오?”
“만나보면 무슨 속사정이야 있겠으나......... 소싯적에는 이깟 산 몇 개쯤이야 훌쩍 뛰어넘으면서 토끼랑 노루랑 사냥을 다녔었는데 그간 나이를 먹었나? 오늘은 예전 같지가 않네?”
“아이고. 푸하하 하하하하. 형님. 여기 둘러선 산들이 웃습니다. 하하하 하하. 형님의 춘추가 금년 들어 스물다섯입니다요. 하하하. 춘추가 문제가 아니옵고 혹 지난밤에 주모랑 말리장성을 쌓으시느라 밤새 지쳐서 그러시는 것이 아니시옵니까?”
“예끼. 이놈아. 어디서 누가 들을까 무섭구나. 그런 소릴랑 다시는 입 밖에 내지 말거라. 그 펑퍼짐한 주모라니? 자네들이 나랑 대적을 하지 못하니 주모가 나중까지 술시중을 좀 들어준 것뿐인 것을...........”
영규에게 호통 치듯 다짐을 받고는 다시 돌아서서 숲길을 올라간다.
“고년이 후덕하기는 해도 속살에 뒷맛까지 있었어........... 고것 참..............”
가파른 산언덕 길에 동백꽃이 소복하게 피었다.
꽃송이가 큰 흰동백과 분홍동백이 유독 많이 눈에 띤다. 꽃잎이 옆으로 퍼진 뜰동백이다.
언덕을 지나 다시 골짜기로 들어서니 소나무 숲이다. 소나무 숲을 들어서는가 싶었더니 이내 비목나무, 졸참나무, 굴참나무 등이 빼곡하게 들어선 또 다른 숲이 나타난다. 혹독한 겨울을 잘 참고 견디어냈음인지 가지마다 파릇파릇한 새싹들을 틔워 매달고 있다. 그리고 그 아래로 조릿대가 마치 누가 길게 담장을 드리워놓은 것처럼 산길을 따라 길게 늘어서 있다.
소사나무 숲을 지나니 전망이 좋은 바위지대가 나왔다.
햇살은 화사하게 내려 비추고 있지만 아침나절의 안개 때문에 사방의 조망이 희뿌옇게 시야에 들어왔다.
숨을 잠시 고르다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려니 바위 절벽이 막아섰다. 길은 바위 절벽을 돌아 나있나 보다.
“형님. 계속 가시려우?”
“종훈이가 기다린다며? 길이 바위를 돌아났으니 저리로 돌아가 봐야지. 많이 힘드냐?”
“아뇨. 힘든 게 아니라.......... 여기서 부터는 초행이라 저도 길을 잘 모릅니다. 여기 조망대 까지 올라오면 된다고 했는데...........”
바닷바람이 매우 드셌다.
간만에 드센 바닷바람을 제대로 쏘였는지 아까부터 콧물이 흘러내렸다.
그때였다.
“여기까지 오시느라 수고가 많으셨습니다. 여기가 바로 쉬었다 가라는 심봉(쉼봉.쉰봉)입니다. 여기 완도의 오봉산 봉우리 중에서 나름으로 조망이 뛰어난 곳이기도 하지요.”
“어이 종훈이. 먼저 와 있었구먼. 근데 어디 위에서 내려오는가?”
키가 크고 가냘픈 사내 하나가 머리에 건을 쓴 채로 내려와 육척장신의 관복을 입은 사내 앞에 다가와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긴히 비장(裨將)나리를 모시고 드릴 말씀이 있어서 모셨습니다. 또한 나리를 힘들게 산행을 하시게 한 것은 다른 분의 간곡한 요청이 있기에 그리한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라니? 오늘일이 모두 자네가 주선한 것이 아니란 것인가?”
“소인의 처지로 감히 비장나리를 이렇게 힘드시게 모실 수가 있겠습니까? 그리하지 못했을 것입니다.”
“아니라면......... 나도 함부로 대하지 못하고 어렵게 대하는 자네를 이렇게 시킬 수 있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내가 확인을 좀 해야겠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방금 종훈이 내려섰던 바위 뒤에서 또 다른 사내하나가 나타났다. 그런데 나타난 사내는 스님이었다.
나타난 스님은 키는 작았으나 후덕하게 살집이 오른 그다지 고생은 하지 않았음직한 모습이었으나 차림새만은 형편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대충 나이를 어림잡는다고 처도 족히 사십 줄은 되어 보이는 스님이었다. 갈포(褐布)로 지은 승복마저도 하도 많이 기워 거의 누더기 수준이었다.
“내가 친구가 보고 싶어 불원천리를 달려와 이곳 산마루까지 오시게 하였던들 그것이 무슨 문제겠는가? 내가 저승길목에서 동무하자고 부른 것도 아닌 것을........... 허허허허. 아니 그러신가? 견훤(甄萱)이.”
“아니이게 누구신가? 용곡(蓉谷)이 아닌가? 이게 얼마만인가? 당나라에서는 언제 건너왔어? 난 아주 당나라에 눌러 앉았나 그랬지. 그리고 이 아우들과는 어떻게 아는가? 그리고 여기 먼 완도까지는 어쩐 일로..........”
“하하하. 이사람 견훤이. 세월이 당장 어디로 달아나는 것도 아닌데 한 가지씩 물어야 내 답을 하지, 한꺼번에 그리 쏟아 놓으면 내 어찌 다 기억이나 하겠는가? 하하하. 여전하긴 여전 하네 그 급한 성질머리는............ 하하하하.”
이들의 대화를 옆에서 듣고 있던 종훈과 영규가 더 당황하여 서로의 얼굴을 쳐다볼 뿐이었다. 한 사람은 족히 마흔이요, 다른 한 사람은 스물다섯이거늘 서로 맞상대를 하고 있지 않은가?
“자. 자. 여기서 마냥 이러실 것이 아니라 조그만 더 위로 오르시지요. 직심(直心)을 시켜 술과 안주를 좀 가지고 올라왔습니다. 이 자리는 하도 바닷바람이 세어서 요기 바위 뒤쪽으로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술사 종훈이 당혹스런 눈길을 거두지 못하며 손을 들어 길을 가리켰다.
“내 간만에 견훤이 자네를 만나 경치 좋은 곳에서 모처럼 회포를 제대로 풀게 생겼구먼. 이게 모두 종훈 사제의 노고 때문이지. 아무렴 고맙네 사제?”
“아이고. 사형께서 과찬이십니다. 노고라니요? 또 준비한 것도 아무것도 없사옵니다. 그저 술만 넉넉하게끔 준비를 하였사온데...........”
종훈과 용곡스님 과의 대화를 뒤에서 들으며 따르던 견훤으로서도 도무지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사형이라니? 또 종훈이 보고 사제라니.............?’
모여든 사람들 모두 벌어지고 있는 상황에 모두 적지 않게 놀라거나 당혹스런 표정이었다.
바위벼랑 뒤쪽 바닷바람이 치고 들어오지 못하는 평평한 곳에 자리를 특고 앉아 조졸하나마 술판이 벌어졌다. 그리고 족히 서너 순배의 잔들이 돌고난 후였다.
종훈이 작금의 상황을 정리하고자 나서 입을 열었다.
“제가 도선(道詵)스님을 모시고 이 땅의 구석구석을 안다녀본 곳이 없다고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그것이 얼추 두 해쯤 되었을 것입니다. 하루는 스님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너는 영판 중질 할 놈이 아닌듯하니 이쯤에서 그만 떠나는 것이 좋겠다.’ 하시더군요. 실은 제 속도 얼마 전부터 그러하였는지라 떠나기로 작정을 하고 마음의 준비를 하던 터에, 멀리 당나라에서 유학을 마치고 돌아오는 스님 한 분이 찾아오셨습니다. 닷새를 더 머물다가 제가 떠나고자 스님께 인사를 올리니, 당나라에서 오신 스님은 저와 작별을 하며 자신은 한동안 더 도선스님께 더 머물고자 한다고 하셨습니다. 그 분이 바로 여기 용곡 스님 이십니다.”
“오호. 불과 닷새를 큰스님께 함께 머물렀다고 만나자마자 사형사제라고?”
“어허. 이보시게 견훤이. 인연이라는 것이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어찌 불가에서의 시간과 세속에서의 시간이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닷새가 오십년 같을 수도 있는 것이라네.”
“오호라. 정녕 그러신가? 하하하하. 하긴 그 같은 시간 셈법은 우리에게도 있지 않았는가? 하하하. 우리 사이엔 십년이 하루쯤 되나? 그리니 십오 년이면 하루 반나절........... 그래. 나도 그 도선 스님에 대해서는 많은 이야기들을 들어왔네. 스님께서는 지금 어디계신가? 나도 한번 뵙고 싶네.”
“내가 큰스님 곁에 머문 날은 꼭 일 년 정도일세. 그리고 떠나 온지가 오늘로 석 달쯤 되었네. 그리고 큰 스님께서는 개경을 돌아보시겠다며 북쪽으로 올라 가셨다네.”
“언제 다시 오신다 하시던가?”
“큰스님께는 그런 기약이라는 것이 없으시네. 인연이 있으면 다시 뵙게 되겠지.”
“소문처럼 그렇게 용하신 분이신가? 앞날을 내다보신다고 들었네.”
“듣기 나름이요, 생각하기 나름이겠지.......... 바람 같고 구름 같은 분이시네...........”
“사형. 큰스님의 건강은 좀 어떠하십니까?”
“고령이심에는 틀림없으시나 여전히 정정하시네. 장도에 오르시면 여전히 내가 뒤쫓기 힘들만큼 발걸음이 빠르시네. 참선에 드시는 시간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점 외에는 여전하시네. 그리고 종훈이 자네의 걱정을 가끔씩 하셨네.”
“끝까지 모시지 못해 송구할 따름입니다.”
“자네를 처음 보시고 험난하게 지낸 유년시절과 순탄치 않을 앞날을 보셨다고 하시더군. 하여 중노릇이나 하면서 한평생 그럭저럭 맘고생 없이 어디에 작은 암자하나 짖고서 살아가기를 바라셨다 하셨네. 언제고 어차피 떠날 것임을 아셨기에 잡지 않으셨으니......... 부디 자중하고 자중해서 작은 재주를 앞세워 자신을 환란 속으로 이끌고 들어가지 말라고 하셨네. 부디 명심하시게나.”
“뼈 속에 새겨 잊지 않도록 하겠습니다.”
“어허. 견훤이 벌써 여기 잔이 비었네. 삼년 만에 만났다고 이리 술 인심이 변해서야 쓰겠는가? 그럼 어디 옛날처럼 서라벌의 기방에라도 다시 가시겠나? 내 맡겨둔 전답이라도 팔아서 내오지 뭐. 하하하하.”
“이런 사람하고는......... 쯧 쯧. 중이 되었으면 도를 닦아야지 여전히 술꾼일세 그려. 여기 있네. 잔이 차고 넘치도록 내 술을 받으시게나. 하하하하.”
그때까지 느닷없는 종훈의 부탁으로 지계에 술동이를 지고 여기까지 죽을힘을 다해 지고 올라와, 벌어지는 일이 온통 다 놀라운 일이라서 그간 단 한마디도 내뱉지 못하고 있던 직심(直心)이 불쑥 끼어들며 입을 열었다.
“소인이 본시 태어나길 아둔하게 태어난 고로 이해가 늦는 것은 압니다요. 헌데....... 아까부터 스님과 우리 큰 형님이 계속 서로 간에 하대를 하시는데......... 아무리 따져보아도 우리 형님은 저 보다 두 살이 많으니까...........”
“떡하니 보아하니 두 사람 간에 나이차가 제법 나는데 왜 아까부터 계속 야 자 하느냐?”
“그......... 그 그렇습니다.”
“그러기에 내가 항상 직심이 너보고 글도 좀 배우고 하라 하지 않았더냐?”
“에이. 견훤형님도 잘 아시면서 그러십니까? 우리처지에 글이 다 무엇입니까? 쌈질 잘해서 왜구나 때려잡고 전쟁 통에도 죽지 않고 살아남으면 그게 최고이지..........”
“쌈질 말고도 세상을 제대로 살아가자면 이것저것 필요한 것이 많은 법이야? 그중 으뜸이 바로 글이고. 평생 무지렁이로 살련?”
“글쎄........ 이놈은 어려운건 딱 질색이라니까요? 그리고 시방....... 나이차이 하고 글하고 무슨 상관입니까요? 상관이.”
“네 놈이 글을 알면 설명을 해도 좀 쉬울 것 같아 그런다. 망년지교(忘年之交)라면 알겠느냐?”
“망년지교요? 이보시게 영규 친구. 망년지교가 무엇인가? 망년지교가...........”
“설혹 나이차이가 많이 난다 하여도 두 사람 간의 돈독한 우정이 남달라 서로 친구가 되는 것을 말하네.”
“염병할........ 자네는 단박에 알아들었나보네............. 망년지교?”
“아무래도 내가 설명을 좀 해야만 하겠네. 여기 견훤이와 나는 지난날...........”
그간의 정황을 설명하려 나서던 용곡 스님은 목이 타는지 일단 가득 채워진 술잔을 들어 단숨에 목구멍 속으로 쏟아 부었다. 입가로 흘러내린 술을 손으로 쓰윽 문지르고는 주위를 천천히 둘러보더니, 일제히 자신에게 쏠린 시선들을 의식하였는지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 육년 전의 일이네. 어느 날 경도(서라벌) 남문밖에 키가 여섯 척이 족히 넘는 건장한 청년이 하나 나타났네. 기골이 장대하긴 했어도 아직 세상물정을 전혀 모르는 순박한 사내였지. 가세가 너무도 어려워 스스로 먹고 살길을 찾아 경도까지 오게 된 것이지. 그 시절에 스스로 먹고 산다는 것이 고관대작의 집에 스스로 노비가 되어 살아가거나 군인이 되어 공을 세워 출세하는 길 밖에 달린 방법이 없었네.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며 싸움실력마저 갖춘 사내는 곧바로 군인이 되었네. 당시 궁궐에서 연이어 벌어지던 변란......... 진골들 간의 왕위쟁탈전과 피폐해진 백성들이 일으킨 민란, 남해 바다에 출몰하는 왜구를 소탕하는 등 온갖 싸움에서 앞장서서 공을 세워 어린 나이에 제법 인정을 받는 군인이 되었네. 이제 그 사내에게는 출신이 안타까울 뿐이었네. 사벌주 가은현의 허름한 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것이 그의 출세의 장애가 된 것이지. 그가 만약 귀족의 가문에서 태어났다면 이미 화랑도 되었을 것이고 벌써 장군이 되고도 남았을 것이네. 몇 해만에 나름 출세를 했다는 것이 이렇게 남해의 한 구석에서 비장이라고 차고 들어앉아 그깟 왜구들이 언제 들이닥칠까 노심초사하는 그런 처지는 되지 않았을 것이네. 그리고 거렁뱅이 땡초의 친구도 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게 말일세........ 경도에서 그나마 좀 산다고 하는 집안이 하나 있었네. 외아들이었는데.......... 툭 하면 벌어지는 왕위쟁탈전에 네 편이냐 내편이냐 하는 와중에 역모로 부모님은 모두 돌아가시고 늙으신 할머니 손에 자란 사내가 있었지. 관작이 모두 회복되어 먹고 사는 데는 지장이 없었으나 태어나길 약골에 간질이라는 병까지 가지고 태어난 것이야. 천형이었지. 남들처럼 대문 밖 생활을 못하고 꽁생원으로 살고 있는데, 어느 날 모처럼 길을 나섰다가 저잣거리의 싸움판에 저도 모르게 휩쓸렸고, 잔뜩 겁을 집어먹자 또 간질이 발작을 한 것이지. 질척한 길바닥에 드러누워 싸움패거리들의 발길질에 이리저리 차이고 있는 중에 한 기골이 장대한 새파란 청년이 나타나 쓰러진 사내를 구하여 준 것이지. 청년이 뛰어들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싸움질이 모두 멈춰졌네. 그 청년의 싸움 솜씨가 워낙 출중해 모두가 덤벼도 상대가 되질 못했던 것이지. 나를 주막으로 둘러메고 간 사내는 내 온몸을 열심히 주물러 주었네. 주모에게 부탁해 뜨거운 물로 내 온몸을 닦아주기도 했지. 그리고 나는 깨어나서 다시 살아났던 것이지. 겨우 살아서 집으로 돌아온 나에게, 왠지 그때부터는 바깥세상이 예전처럼 무섭게만 느껴지지가 않았네. 나는 곧잘 그 사내에게 기별을 보냈고, 그 사내는 군무에서 짬이 나면 나를 찾아 주었네. 그때부터 우리는 함께 사방으로 쏘다니며 구경도 했고 툭하면 술판을 벌였지. 당시 그 청년이 열아홉이었고 내가 서른셋이었으나 이제 나이는 우리 사이에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네. 그래서 친구가 되었지. 망년지교로서......... 어느 날 그 청년이 남해의 고도로 왜구를 소탕하고자 아주 경도를 떠난다고 하더군. 그 사이에 그 청년에겐 내가 글공부를 가르쳤고, 청년에게선 약간의 무술을 배웠는데........... 이젠 서로 기약을 할 수 없는 현실이 된 것이지. 그때 문득 떠오른 것이 출가였네. 신라 땅 안에서 귀족이나 고관대작의 자제로 부와 명예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가장 좋은 방편이 바로 출가하는 길이었거든. 하여 청년은 남해로 떠나고 나는 절간으로 들어가 머리를 깎았지. 그러다 어떤 배움에 목마름이 있어 당나라에 유학하고자 떠나는 길에 남해에 들러 그 청년을 잠시 만났다가......... 오랜 세월이 흘러 이렇게 오늘 다시 만나게 된 것이지.”
“그러게 내가 뭐라 그러던가? 용곡이 자네가 무슨 스님이 되느냐고? 스님이? 자네 집안이 진골은 아니래도 명색이 사찬벼슬이 아닌가? 십칠관등 중에 여덟 번째 일세. 허니 그냥 서라벌에 눌러앉아 자리만 지켜도 사는데 지장 없을 근본을 가진 자네가 아니었는가? 거기다 기껏 법명이 용곡이 무엔가 용곡이. 수천이란 자네 본 이름이 훨씬 부르기 좋더구먼. 아니 그런가? 하하하하 그래 중질 하니 좋으시던가? 당나라 유학하니 극락은 받아 놓은 당상이신가?”
“이보게 견훤이. 어찌되었건 비장씩이나 되었고 이렇게 유망한 동생들도 곁에 있고 하면 좀 너그러운 사람이 되었어야 하는 것이 아닌가? 막되어먹은 싸움꾼은 이제 그만두고.”
“싸움꾼이라.......... 싸움꾼............”
“왜구들은 자네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떤다고 들었네.”
“왜구? 하하하하. 어디 왜구뿐인가? 이곳 남해안에 파견된 신라의 장수들이라면 모두들 견훤이란 이름만 들어도 치를 떨지. 암 치를 떨지.”
“그 이야기도 들었네. 툭 하면 장수들에게 들이대고 쌈질하자 덤벼든다고......... 그럼 신라의 군사들도 자네....... 견훤 비장이라면 치를 떠나?”
“군사들이라........... 그건 내가......... 잘 모르겠네.”
“자네가 함께하는 군사들을 어찌 잘 모른다 하는가?”
“내가 그네들과 늘 함께 훈련하고, 함께 먹고, 함께 막사에서 같이 자고 하는데........ 그네들이 한시라도 내 험담을 할 짬이 있겠는가? 면전에다 대 놓고 욕하는 것이지..........”
“아닙니다. 군사들은 모두 견훤 형님을 잘 받들고 따릅니다.”
“비장형님과 함께라면 불구덩이라도 뛰어들 것입니다.”
“그것은 동생들 말이 맞습니다. 왜구와 장수들은 아니더라도 군사들이 비장을 죽기 살기로 따르는 것만은 확실합니다.”
주위에서 동생들이 죄다 한마디씩 거들자 이내 견훤이 표정이 매우 쑥스러워졌다.
“예끼 이 사람들......... 사람 면전에 두고 무안을 주는 것인가? 그건 그렇고........ 용곡이 자네가 이 먼 길을 불쑥 찾아 온 것은 필시 무슨 일이 있을 것만 같은데 이쯤 되었으면 털어 놓으실 때도 되지 않았는가?”
“이 사람이 눈치 하나는? 그냥 자네랑 산에도 한번 같이 오르고 술도 한잔하고 싶었다 치면 아니 되겠는가? 하하하하. 큰스님이 종훈을 걱정하시기에 내가 한번 찾아보겠다고 말씀드렸었고, 자네랑 있다는 소식은 지난해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네. 하여 종훈이만 잠시 보고자 왔던 것인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아무래도 자네를 한 번 만나 이야기를 좀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급하게 이렇게 자리를 만든 것이라네.”
“아하. 사제는 한 번 보고 가려면서도 옆에 있는 친구는 볼 생각이 애초 없었다. 지금 이 말인가? 이거 듣자니 영 서운하구만. 그럼 이 자리서 우리 망년지굔지 뭔지도 끝내버리세. 말로만 친구하면 무엇 하겠나. 아니 그런가?”
“이 사람이 정말? 하자면 내가 못할 것 같은가? 생각해 보게. 나야 친구니깐 이렇게 먼 길을 찾아오기도 하지만, 내가 멀리서 병들어 누웠다 기별을 하면......... 자네는 군무를 팽개치고 쉬이 올 수 있겠는가? 그러니 친구를 해도 내가 손해를 보면서 친구를 하는 걸세. 아시겠는가?”
“군무에 지장만 없다면..........”
“예끼 이사람. 지금 날 보시게. 나는 지금 부처님 일을 잠시 멀리하고 이렇게 친구 앞에 있지 않은가?”
“뭐야? 이 사람이 입으로 벌써 득도를 했네 그려. 득도를...........”
“자네와 함께 이 오봉산의 경치 좋은 곳에 올라 세상 구경을 하며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서 온 것이라네. 이제 푹 쉬었으니 종훈 사제가 우리를 경치가 기가 막힌 곳으로 안내를 해 줄 걸세. 우리 거기에 가서 좀 더 긴한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세나.”
“그렇게 좋은 곳이 있는가? 자네와 여기 동생들과 함께라면 나야 어디든 좋겠네. 그럼 어디 그리로 가 볼까?”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견훤의 어깨를 용곡 스님이 붙잡으며 말했다.
“목이 마르면........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때를 기다리겠는가? 아님 옹달샘을 찾아 이리저리 쏘다니겠는가? 아님 힘들여서라도 우물을 파겠는가?”
“뜬금없이 무슨 말씀인가? 가뭄이 들었으면 의당 우물을 파야지.”
“자네 목이 타서인가?”
“어찌 내 목만 타서겠는가? 무릇 세상일이란 많은 사람들에게 함께 오는 것이 아닌가? 비가와도 모든 사람들에게 두루 골고루 내릴 것이요, 가뭄이 들어도 모든 사람들이 모두 함께 힘들 것이 아닌가. 거기에 나와 남이 어디 있겠는가. 모두 합심해 우물을 파야지.”
“내 짐작대로 일세. 자고로 우두머리란 옹달샘이 차고 넘쳐도 가뭄을 걱정해 우물을 파는 사람이며, 그 우물이 아무리 깊다 하여도 그 바닥까지 두레박을 내릴 줄 아는 사람이라야 하네.”
“그게 모두 무슨 말씀인가?”
그러나 견훤의 이번 물음에 용곡 스님은 단 한마디도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먼저 발길을 돌려 산언덕을 서둘러 올라가기 시작하고 있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견훤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서 있었다.
얼마를 더 그렇게 힘든 산행을 계속했을까.
등줄기만 적신 것이 아니라 이젠 바지가랭이도 쥐어짜면 흥건하게 땀이 흘러나올 만큼 흠씬 젖어들었다.
붉은 가시나무 숲이 끝나는가 싶어지니 이번엔 다시 바위지대를 오르는 길이 나타난다. 오른쪽으로는 마치 커다란 바위덩이를 두부 모 자르듯이 잘라놓은 모양새다. 그 모양새도 가지가지다.
이 바위지대에도 유독 동백나무가 많다. 하지만 워낙 그늘진 곳이라 햇빛이 들지 않으니 쉬이 꽃망울을 터트리기는 쉽지가 않겠다. 하늘을 봐야 별도 따는 것이 아니겠는가.
이 바위지대를 이제 지나는가 싶었더니만, 갑자기 눈앞에 불쑥 나타나는 것이 동쪽과 남쪽으로 깎아지른 듯 바위 절벽이 봉우리를 가득 채우고 있다. 천 길 낭떠러지다.
바위 턱에서 목을 길게 빼고 밑을 내려 보니 높다랗게 째진 바위절벽이 아찔하게 느껴졌다. 옅은 구름이 발아래 떠있다.
그리고 저만치 바다건너 산줄기 뒤로 장도(장군도)가 희미하게나마 모습을 드러냈다.
가히 절경이었다.
시원한 바닷바람이 사정없이 폐부 깊숙한 곳까지 스며들어왔다. 참으로 오랜만에 가슴 가득 어떤 희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정녕 아름답도다. 아름다워..............”
“자네 저기 저 끝에 보이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거친 숨을 몰아서 쉬다가 조금 잠잠해진 듯싶어지자 주변 경관에 탄성을 자아내던 용곡 스님이 한곳을 가리키며 견훤에게 물었다.
“장도가 아니겠는가. 우리 수군이 그 건너편에 진을 치고 있는데 내 어찌 모르겠는가?”
“뚫린 눈이라고 저 작은 섬이 눈에 들어오기는 하는 모양일세 그려. 그래. 섬은 눈에 들어오고 그 섬이 울부짖는 소리는 안 들린단 말인가?”
“어허. 이 사람. 아무래도 내게 다른 의중이 있어 그리 심술을 떠는 모양인데......... 그냥 속 편히 이야기 하면 아니 되겠는가? 그래. 청해진이 어쨌다는 말인가?”
“자네는 청해진을 설치했던 장보고 장군이 어떻게 생을 마무리 했는지 아는가?”
“어허. 이사람 점 점.......... 그걸 모르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는가? 자네 부러 나를 부아 지르려 작심이라도 한 것인가? 이쯤에서 멈추시게. 내게 모멸감이라도 주시려는 것인가?”
“이보게. 견훤이. 무릇 사내라면 안개와 구름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하네. 오늘처럼 해가 높으면 안개가 걷힐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고, 구름이 두꺼워지면 쉬이 비가 내릴 것이라는 것을 알아야 하네. 그리고 그 마음속으로 언제든 우물을 팔 용기와 기개를 가지고 있어야 하고........”
“점 점 모를 소리만.......... 오늘 마신 그 정도로 자네 술이 과하셨는가? 나는 진채로 돌아가 진탕 한번 취해보려고 하였더니만...........”
“자네는 농부가 언제 파종을 하는지 아는가? 농부는 절대 함부로 씨를 뿌리지 않는다네. 농부는 먼저 밭을 살피고, 다음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날씨와 천기(天氣)를 살펴본 연후에야 비로소 씨를 뿌린다네. 아시겠는가?”
“어허허. 이 사람. 뭔가 단단히 작심을 하였구먼. 그래.......... 내게 하고자 하는 요점이 무엇인가. 장보고 장군과 내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대답해 보시게. 말 돌리지 말고.”
“장보고 장군은 청해진을 근거지로 멀리 당나라와 왜까지를 두루 섭렵하였으니 당장 일개 비장의 처지로 비교라 생각할 수도 없겠으나.......... 머지않아 자네도 알게 되겠지만........ 앞으로의 자네 삶이 영판 장보고 장군과 똑 같을 것이라 보여 하는 말씀일세............”
“뭐라고? 자네 어찌 그런 말을 하시는가? 어찌 내가 장보고 장군을......... 감히.........”
“이대로 라면 그 끝맺음까지도 꼭 닮은 생을 살게 될 것일세............”
“사내로 태어나 그렇게 의기 있고 호방하게 살다가 종국에 비참하게 죽는다 하여서 어찌 부끄럽겠는가. 나는 내 자신이 한없이 부족하여 안타까울 뿐, 설사 비참하게 죽는다 하여도 장보고 장군 같은 삶이라면 안타까울 것은 하나도 없어 주저하지 않겠네. 천부당만부당한 비교이겠지만..........”
“정녕 그리 생각하는가? 그럼 저 하나 목을 축이자고 옹달샘이나 찾아다니시게나. 굳이 힘들여 우물을 팔 생각일랑은 버리고..............”
“장보고 장군의 비참한 죽음과 우물이 무슨 상관인가?”
“청해진과 그 위대한 업적은 장보고 장군 혼자 이룬 것이 아닐세. 많은 사람들과 함께 이룬 것이지. 내 말씀이 틀린가? 그러나 그리 오랜 시간이 지나지 않은 지금.......... 청해진과 그 눈부신 업적들은 어디에 있는가? 자네가 어디 눈을 씻고서라도 사방을 둘러보아 가리켜 보시게나. 자. 과연 어디에 청해진의 그 눈부신 영광과 유산이 남아있어 보이는가 말씀일세. 모두 사라져 버렸네. 너무도 철저하게 파괴되었고 그 기록과 기억마저도 신라는 이승에서 철저하게 지워버리고 말았네. 그럼 장보고만 비참하게 죽어서 지워져 버렸는가? 그의 가족과 그를 따른 모든 사람들이 더러는 서라벌로 끌려가 목이 잘려 저자거리에 효수되고, 더러는 아주 먼 곳으로 노예로 끌려가고, 그를 따르던 대다수의 아이들과 부녀자와 노인들은 벽골제의 부곡으로 강제로 끌려가 천민으로 전락했네. 아시겠는가? 장보고 장군이 좀 더 현명한 장군....... 아니지......... 진정 여기 청해진의 군주였다면......... 비록 자신은 죽더라도 그 후의 청해진과 자신을 따른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것이든 대책이나 준비가 있었어야 하는 것이야. 그랬더라면 청해진은 지금도 여전할 것이요, 그 후손들도 지금 당당하게 살아갈 것이요, 더 나아가서는.......... 서라벌에서 벌어지고 있는 저 기울어져 가는 신라의 추악한 꼴들도 없었거나 줄어들었을 것이야. 정녕 그렇게 느끼지 않으시는가?”
“어찌 그것이........... 도대체 나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장보고 장군이 청해진을 세우려 생각에서 벗어나 첫 기치를 올리던 때와, 지금 견훤이 자네의 처지가 똑 같다는 말씀일세. 이래도 모르시겠는가?”
“뭐라고? 그러면 지금.......... 신라에 반기라도 들라는 말씀이신가? 정녕?”
(6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바닷바람이 자못 쌀쌀해졌다.
비록 해무가 옅게 끼었다 해도 해가 중천에 떠 있을 때에 비하면, 해가 서산에 걸리고 머지않아 서쪽 바다로 가라앉을 즈음이 그리 멀지않았음을 느낄 수 있었다.
“곧 해가 지겠구먼. 내려가려면 애 좀 먹게 생겼어.”
“두 분 말씀이 생각보다 매우 길어지는 모양일세. 이보게. 영규. 어차피 여기서 남은 술판을 마저 벌이기는 틀린 것 같으이. 대충 정리를 하는 것이 어떻겠나?”
“그러세. 올라올 때는 직심이 자네가 지고 오느라 고생했으니, 내려갈 때는 내가 지고 감세.”
“얄미운 친구로고. 음식이 남기는 하였어도 절만은 넘게 먹어치웠으니 가벼운 것은 제가 지고 가겠다고?”
“그럼. 아예 내려갈 때도 자네가 지시든가..........”
“두 아우님은 잠시만 여기서 기다려 주시겠는가? 아무래도 내가 올라가 봐야만 하겠네. 바위벼랑길을 밤에 내려갈 수는 없지 않겠는가.”
“책사형님. 들으셨나 보오. 두 분이 내려오시는데요?”
바위벼랑 사이로 난 길로 두 사람이 내려오고 있었다.
그런데 견훤과 용곡 스님, 두 사람 모두의 표정이 심상치 않게 심각하게 굳어있었다.
매우 침통하고 고충이 가득서린 표정들이었다.
“모두들 오래 기다렸구나. 모처럼 친구와 만나다보니 그간 못 다한 이야기를 좀 나누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한참이나 지났구나. 어떻게 어둡기 전에 내려갈 수나 있으려나 모르겠구나. 자. 자. 서둘러 내려가자꾸나.”
“이보시게 견훤이. 나는 예서 자네들과 작별을 해야겠네.”
“뭣이라고? 이 사람 용곡이. 그게 무슨 말씀인가? 이 산중에서 갑자기 작별이라니. 모두 서둘러 진채로 돌아가 한 잔 더 하면서 다 못한 이야기도 더 나누기로 하시게나.”
“아닐세. 더 나눌 이야기가 이제 내게는 없네. 자네들은 이 길로 내려가면 진채로 돌아가는 길일 터이고, 나는 올 때도 저 산등성이 넘어 왔으니 갈 때도 그리 가야하겠네. 바로 너머에 암자가 있어 하루 유하고 길을 떠나려하네.”
이 같이 늦은 시간에 이 험준한 산봉우리에서 작별을 하는 용곡 스님이었다.
“사형. 그럴 수는 없사옵니다. 저와 함께 내려가시지요. 며칠이라도 묵어가십시오.”
놀란 표정의 종훈이 끼어들어 간곡하게 부탁을 하였다.
“종훈 사제는 내 말을 명심하게. 자네가 견훤의 옆에 머물면서 책사를 맡았다니 나 또한 적이 마음이 놓이네만........... 어차피 모든 것은 견훤이 마음먹기에 달렸지만.......... 내 보기엔 배는 뜰 것 같네. 하늘을 살펴보자니 배를 띄우기에는 가히 최고의 호기라........... 자네는 내 친구를 잘 보필하되......... 앞으로 나감에 있어서 제아무리 순풍에 배를 쉬이 띄울 수 있다 해도........... 바다는 드넓고 깊은 곳이라는 것을 한시도 잊어서는 아니 될 것일세. 그럼 여기서 나는 이만 작별을 해야만 하겠네.”
“사형. 명심 또 명심하겠습니다. 아울러 정히 그러시면 이 밤길을 가시느니 저희와 내려가셔서 하룻밤만 머물러 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어차피 헤어지기로 한 이상, 지금이 어떻게 또 내일이 무슨 상관이겠는가? 됐네.”
“그러시면 저 혼자만이라도 사형을 따라 암자에서 하루 신세를 지며 밤새 가르침을 주시면 아니 되시겠습니까?”
“하하하하. 내 이미 종훈 사제의 마음을 알았고, 방금 전까지 견훤 친구와 세상의 모든 일에 대하여 나름 충분하리만치 이야기를 나누었다네. 이제 모든 결과는 위로는 하늘이 알아서 내려주실 것이요, 땅에서는 견훤이 결심을 하고 자네들이 합심하여 힘을 합치면 될 것이야. 모든 것은 여기 이 친구와 해결해 나가야 할 것일세.”
“궁금한 것이 너무도 많사옵니다.”
“하하하하. 종훈 사제도 이미 어느 정도 하늘도 올려다 볼 줄 알고 세상을 살필 줄도 아는 줄을 내가 알고 있네. 늘 자중하고 고심하면 혜안이 떠오를 걸세.”
“하지만........ 하지만........ 일전에 큰스님께서 혼자 지나시는 말로 하신 말씀을 얼핏 엿듣게 된 것이 있사온데.......... 아무리 생각을 거듭해 보아도 그 뜻을 헤아릴 수가 없었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허허허. 나보다 자네가 더 오래 스승님을 모셨건만 그 같은 일을 내가 어찌 알겠는가? 또 본시 자네가 부러 엿듣고자 한 것이 아니었다면, 필시 그 또한 스승님께서 자네에게 어떤 의미를 두고 하신 말씀일 것이야.”
“그렇게도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지금........ 확신컨대........ 이쯤에서 사형을 통해 제게 가르침을 주시는 것이라 확신이 섰습니다. 가르침을 주십시오.”
“그렇다면 자네가 이미 스승님의 속마음까지 읽는 경지에 들어섰다는 말씀이 아니신가? 그런 것을 아둔한 내가 해결을 할 수 있겠는가?”
“숱한 생명들을 희생한 끝에 겨우 삼한 통일을 이루더니........오호라. 머지않아 또 세상이 세 나라로 갈리겠구나.......... 그리고 또 더 많은 피를 흘리고 난 후에라야............. 거기까지였습니다. 삼한의 통일 후 명색은 여전히 신라의 나라인데......... 세상은 온통 혼돈과 혼탁 그 자체이옵니다. 이것이 새로운 세 나라의 시작이옵니까?”
“하하하하. 참으로 어려운 문제일세...........”
“신라가 멸망하옵니까?”
“아주 오랜 옛날에 높으신 선사 한 분이 신라의 운명을 살피셨는데, 천년사직이라 하셨네. 십년은 더 지나야 이제 구백년 사직이 될 터인데......... 아무리 국운이 쇠약해져 있다고 해도 구백년을 이어온 신라의 국운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기야 하겠는가?”
“그렇다면......... 신라는 국운이 쇠약해잔 상태로 한동안은 더 국가의 명맥이 유질 될 것이라는 말씀이고.......... 나머지 두 나라는 전혀 새롭게 들어서는 것이옵니까?”
“스승님께서도 말씀이 없으셨는데 내가 거기까지 어찌 알겠는가?”
“현재 각지에서 창궐하고 있는 무리의 우두머리 중에서 그런 대업을 이루는 사람이 나오겠습니까? 그렇다면 가장 유망한 인물 둘을 꼽으라면 누구이겠습니까?”
“어허. 더는 나도 아는 것이 없다하지 않는가?”
“스승님과 각지를 다니시며 그들을 대부분 만나보시지 않으셨습니까?”
“만났다기보다는 먼발치에서 살펴보시기는 하셨지.”
“누가 뛰어난 인물이었습니까?”
“글쎄......... 죽주의 기훤이라는 인물도 있었고....... 북원의 양길이라는 인물도 있었지. 다른 세력들도 여럿 있었으나, 그래도 그 중 그들의 세력이 가장 크고 어느 정도 체계도 잡혀있더라 할 수 있었겠네.”
“그들이 새로운 나라를 세울 인물들이었습니까?”
“한 나라를 세우고 왕조를 이룩한다는 것은 천기(天氣)에 관한 일일세. 나는 아직 거기에 다다르지는 못하였네.”
“왜람 되지만......... 사형께서는 이제껏 견훤비장과 함께 천기에 관하여 말씀을 나누시지 않으셨습니까? 이것이 어찌 기훤이나 양길에 관한 것과 아무런 상관관계가 없는 것이라 하실 수 있으시겠습니까?”
“허허허허................ 자네가 그리 생각했다면, 굳이 나에게 기훤이나 양길에 관하여 천기를 살펴봐 달라고 요구 할 필요가 없지 않겠는가?”
“그 말씀은........... 소인이 이제야 사형의 깊은 뜻을 알겠습니다.”
“이야기가 길어졌네. 이제 환해서는 내려가기가 틀린 것이 아닌가? 어서 서둘러 조심해서 내려들 가시게나.”
“사형. 한 가지만 더 여쭙고 싶습니다.”
“많이 늦었다니까?”
“천기에 관해서......... 제가 한 사람의 소식을 전하여 듣고는 여러 날을 고심을 해 보았는데, 결코 예삿일로 지나쳐버릴 일이 아니라 생각되어 꼭 여쭈어 보고 싶었습니다.”
“자네가 살펴 본 인물이 있다?”
“만나보지는 못하였고 오래전부터 전해오는 소문에 관한 것입니다.”
“사주를 본 것도 아니고 관상을 본 것도 아니고, 그저 풍문속의 인물에 대하여라........”
“진채에 많은 이야기꺼리를 가진 늙은 군사가 하나 있습니다. 술에 취하면 지난날 자신이 병영에서 겪었던 여러 가지 무용담을 늘어놓고는 합니다. 그가 만취하면 늘어놓는 이야기 중에 젊은 날 신라 왕실의 경호대에 속하면서 십 수 년을 신라의 왕자를 찾으러 다녔다고 합니다. 찾는 것이 아니라 쫓아가 체포하거나 주살하라는 명령 이었다 합니다.”
이야기가 이쯤에 이르자 둘러서있던 견훤이나 박영규 직심의 표정도 매우 심각하게 변해가고 있었다. 용곡 스님만은 지그시 두 눈을 감은 채 먼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찾고자 하는 사람이 신라의 왕실과 청해진의 장보고 장군 사이의 핏줄을 받고 태어난 신라의 왕자라는 이야기였습니다. 사라진 신라의 왕자가 실제 있습니까?”
종훈의 거듭된 질문에도 용곡 스님은 침묵 속에 여전히 하늘만 올려다보고 있었다.
“소문이 사실이었군요............ 스승님도 이미 그 소문을 알고 계셨군요. 제 짐작이지만 그가 정말로 천기를 타고 났습니까? 만나 보셨습니까?”
“험. 험. 험. 천기를 타고 났는지 아닌지는 알지 못하지만 그런 불행한 운명을 타고난 사내가 있는 것은 사실이네.”
“그가 애꾸라는 말도 사실입니까?”
“그렇다고 들었네.”
“만나지 못하셨다면서 사형께서는 그 사라진 왕자에 대해 어떻게 아십니까?”
“나는 만나보지 못하였네만......... 스승님께서 그 사람을 직접 만나보셨네.”
“스승님께서요?”
“도선대사께서요?”
“도선스님께서 그자를 만나셨다고요?”
둘러선 모든 사람은 열려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소문에 대한 진실이 사실이라는 데에 만도 놀라움이 컸는데, 앞날을 내다보는 혜안을 가지셨다는 도선대사께서 이미 그를 만나 보았다는 사실이 기기묘묘한 억측까지 낳기에 너무도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스승님께서 신라의 왕자를 이미 만나보셨다고요? 언제쯤 어디서 보셨다는 말씀입니까? 제가 모시는 중에도 단 한번 언급도 없으셨던 일입니다. 사형?”
“아주 오래전의 일이었다고 들었네. 죽산의 칠장사에서 외눈박이 애기중을 만났는데 활을 아주 기가 막히게 쏘더라는 말씀이셨네. 얼마 지나놓고 생각하니 범상치 않은 느낌이 들어 다시 찾아보니 그때는 그 애기중이 이미 어디론가 사라지고 난 후였다고 하시더군. 그가 사라진 다음날 신라왕실의 근위대가 들이닥쳤다고 하니, 위험을 예감하고 다시 어디론가 피신을 한 것이었지. 사라질 당시 열세 살이었다고 들었네. 갓 태어난 아기를 한 부녀자가 안고 와 맡긴 것이었는데, 한쪽 눈마저 다친 갓난아기라 모두가 불길하다 외면하였는데 당시 주지스님께서 부처님이 보내주신 생명이라 하시며 거두어주셨다는군.”
“그러면 그 왕자는 지금 어디에 있습니까? 그 후에 스승님께서 다시 만나셨습니까?”
“스승님께서는 아무 말씀 없으셨고, 나도 더는 질문을 드리지 않았네.”
“그러면 버려진 왕자의 아비와 어미는 과연 누구입니까?”
“훗날 그가 스스로 세상에 나와 이름이 나게 되거나, 어쩌면 그 스스로 자신의 출생에 대해서 밝힐 때까지 일절 그 부분에 대해서는 함구하라는 스승님의 다짐이 있으셨네.”
“그럼 사형께서도 그 왕자의 출신내력과 이름 정도는 아시고 계신다는 말씀이군요?”
“더는 해줄 말이 없네. 나 역시 그를 한번쯤은 꼭 만나보고 싶은 사람이니까.”
“정말 외눈박이라는 말이 맞습니까? 외눈박이라면 찾으려고 하면 못 찾을 것도 없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늘아래 외눈박이가 지천인 것도 아닐 것이고.”
“왕실 근위대가 수십 년을 쫓아 찾지 못하였네. 거기에는 또 그럴만한 사유가 있지 않겠는가?”
“쫓겨난 신라의 왕자라.............”
“그럼 난 이제 그만 가야겠네.”
말을 마치기도 전에 용곡 스님은 어스름해져 가는 산등성이를 향해 발걸음을 돌려갔다.
미처 붙잡을 새도 없이 사라져갔다.
(7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도읍의 한가운데 야트막한 야산이 하나 있다.
가만히 살펴보자면 산인가 싶을 정도로 나지막하고 펑퍼짐하기까지 한 것이 그저 시골 아무개 동네의 정겨운 뒷산으로 여겨질 정도이다.
한번 오르고자 마음먹기에도 부담이 전혀 없게 생긴 흔한 야산이지만 구백 년 가까운 세월이 흐르는 동안에도 신라인에게는 신령스러운 산(神遊林)으로 숭앙받는 산이었다.
낭산(狼山).
‘실성왕 12년 8월에 구름이 낭산에서 솟아났는데, 그 생김새가 산위에 세워진 누각 같아 보이고 사방에 아름다운 향기가 퍼지더니 여러날 동안 사라지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는 신령스러운 산이었다.
신라의 도읍지인 서라벌은 소금강산과 명활산, 선도산, 토암산 들이 사방을 둘러싼 가운데의 분지를 이루고 있다. 아울러 남천과 북천 그리고 서천이 도성을 감싸듯 하면서 항시 수량이 풍부한 맑은 물을 흘러내려 형산강 줄기를 이루어 동해 쪽으로 빠지고 있는 것이다.
그 낭산 자락의 한 커다란 저택에서 삐걱 소리와 함께 대문이 열리더니 한 사람이 나왔다. 문 안으로 여러 명의 하인들이 도열하듯 늘어서서 마중을 하고 있는 모양새로 보아 꽤나 권세가 있는 집안인 모양이었다.
지금 한 여인이 화랑교를 바쁜 걸음으로 건너고 있었다. 바로 잠시 전에 낭산 자락의 대저택에서 나온 여인이었다.
탑골 입구 못미처 갯마을로 접어들더니 대나무 숲을 가로질러 미륵골로 접어들고 있었다. 다소 길을 재촉하느라 힘에 부쳤음인지 잠시 멈추어 서서 주위를 한번 둘러보는데, 갯마을 앞으로 남천이 흐르고 마을 뒷산으로는 대숲이 빼곡한 것이 채 겨울이 다 지나지도 않았음에도 온 마을이 푸르렀다. 잠시 숨을 고른 여인이 다시 발걸음을 재촉하여 삼리 정도 산등성이를 타고 오르니 산등성이쯤에 사찰이 하나 모습을 드러냈다.
보리사(普提寺).
지척에 사천왕사나 보리사, 보문사 등 여러 사찰들이 있으나 보리사는 좀 다른 의미를 간직하고 있는 아늑한 사찰이었다. 바로 비구니들이 수도하는 절간이었던 것이다.
보리사의 경내로 들어서니 마당 한쪽으로 사람 키를 훌쩍 넘기는 아름다운 연화대 위에 앉아있는 석불좌상이 모습을 드러냈다.
걸음을 멈추고 두 손을 모아 잠시 합장으로 예를 갖추던 여인은 절간마당을 그대로 가로질러 남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산비탈로 다가갔다.
그 여인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경사가 급한 산허리였으며, 갑자기 시야가 확 트여지며 발아래로 서라벌의 중심지라 할 수 있는 배반평야가 한 눈에 가득 들어왔다. 그리고 그곳, 어른 둘이 서 있기에도 비좁아 보이는 그 협소한 곳에 사람 키의 절반은 조금 넘긴 크기의 마애여래좌상이 바위에 새겨있었다.
보리사 마당의 석불좌상에 비하자면 다소 초라하게 보일수도 있는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부처는 여인이 보기에는 여타의 다른 그 어느 불상보다도 더 자비 넘치는 미소를 양쪽 뺨 가득히 머금고 늘 여인을 옅은 미소 속에 맞아주는 부처님의 현신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여인은 가슴이 답답하거나 무엇이든 기도할 요량이 생기면 늘 이곳을 찾았었다.
왠지 마음이 차분히 가라앉고 막힌 가슴이 뻥 뚫리는 느낌이 들었다. 항시 그랬다.
이 협소한 공간에서 몸을 돌리고 바위에 새겨진 부처님의 시선으로 바라보면 발아래는 느껴지지 않고 마치 하늘에 떠있는 느낌이 드는 것이었다.
멀리는 선덕여왕이 잠들어 있는 낭산 자락이 남북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고, 사천왕사며 13층의 목조쌍탑이 서있는 망덕사며, 황룡사의 구층 목탑도 모두가 한 시야에 들어왔다. 거기에 17만 호가 넘는 서라벌의 기와집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 모습이 가히 장관이었다. 그렇게 여기 이 보리사 마애여래좌상은 오랜 세월 서라벌의 안전을 굽어 살펴 오신 분이었던 것이다.
여인은 마애여래 앞에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합장한 채 기도를 올렸다.
그러나 여인의 기도는 여타의 다른 사람들과는 전혀 달랐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손을 마구 비벼대며 금방 비명이라도 지를 듯이 애걸복걸하는 그런 기도가 아니었다.
가슴 앞으로 다소곳하게 두 손을 모은 여인은 분명 기도를 하는 중이었음에도 눈을 뜨고 있었다. 눈을 뜨고 있는 것이 아니라 뚫어져라 마애여래의 두 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하소연 하는 기도가 아니라 마애여래와 대화라도 나누는 듯 그런 모습이었다.
‘이틀씩이나 같은 악몽을 꾸었습니다. 지난밤의 꿈은 그제의 꿈을 이어서 꾸는 꿈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불길한 징조이겠습니까?’
‘지난 아침에 하녀가 요강을 내가다가 섬돌에 떨어트려 깼습니다. 하온데 오늘 아침에 일어나 마당에 나서려는데 갑자기 안채 지붕에서 기왓장이 떨어져 산산조각이 났습니다. 이 또한 무엇인가 닥쳐올 환난을 예고하는 것이겠습니까?’
‘혹시나 하여 그 사람을 찾았더랬습니다. 사흘째 집에 들어오지 않았으니까요. 돌아온 하인 대답이 기방에서 계집질을 하고 있다는데 무탈하다 하더군요. 그런데도 화는 나지 않고 솟아나는 웃음을 참느라 애를 썼더랬습니다. 어차피 서로 간에 죽자 살자 좋아서 살을 섞고 한집에 살아온 것은 아니었으니 이쯤에서 그만 접고 싶다는 생각도 했었더랍니다. 그 사람은 아니어도 무방하겠으나......... 아직은 진골이라는 그 품계가 필요하겠으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근자에 살인을 여럿 저질렀습니다. 하지만........ 저의 복수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그들은 당연히 죽을만한 죄를 저에게 지은 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날수록......... 피를 보는 저의 시선이 너무도 담담해져 가는 것이 못내 싫어지는가 하면, 매사에 점점 잔인해져 가는 제 자신이 두렵기까지 합니다. 세존이시여. 어찌하면 좋겠사옵니까? 부디 굽어 살펴 주소서.’
‘어느 정도는 이루었고 나머지들에 대한 준비도 마쳤습니다. 이제........ 이제 중원경으로 돌아가고 싶습니다. 그 방도를 제게 가르쳐 주시옵소서. 세존이시여.’
‘세존이시여. 종명이 살아있겠습니까? 부디......... 부디........ 그가 아직 이승에 살아있다면.......... 그를 지켜 주시옵소서.............’
여인의 눈자위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키며 떨고 있었다.
옅게 갈색이 묻어나는 풍성한 머릿결. 오뚝한 코와 발그레한 뺨. 유난히 까맣고 반짝이는 커다란 눈과 뽀얀 턱 선이 그대로 살아나는 긴 목이 여인의 빼어난 자태를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었다.
서른 줄에 접어들었을까?
그러나 가까이에서 가만히 살펴보자니 그건 아니었다.
눈자위 옆으로 희미하게 잔주름이 드러나 보였다. 올린 머리 아래로 희끗희끗 흰 머리카락이 유심히 살펴보면 아주 조금 눈에 띠고 목덜미에도 옅게 잔주름이 배어있었다. 족히 마흔을 넘긴 여인에게서 보여 지는 세월은 흔적이라, 하지만 여전히 살짝 치켜 올라간 눈꼬리와 도톰한 입술이며 군살하나 느껴지지 않는 여인의 자태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갓 서른을 넘어섰다고 우긴다 해서 넘어가지 않을 남정네는 세상에 없을 듯하였다.
그렇게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그러나 그때까지도 이곳에 나타나는 다른 사람의 모습은 일절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이곳이 그렇게 한적한 것을 여인은 이미 잘 알고 있었기에 나름 호젓한 기분으로 저렇게 부처님과 마냥 독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꽤나 시간이 지난 후에야 여인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빼어난 미모에 비단으로 만든 옷을 걸쳤으니 뭇 사람들의 시선을 끌고 다니기에 충분하였을 것이지만, 그런 차림이었음에도 여인은 지금 하인이나 시종 하나 거느리지 않고 발걸음만을 재촉하고 왔던 길을 재촉해 산비탈을 내려가고 있었다.
화랑교를 건너 우측으로 발걸음을 옮기다 보면 사방으로 너른 모래밭이 펼쳐진다. 흔히들 장사(長沙)라고 부르는 곳이다. 이 모래밭을 따라 길게 논과 밭들이 들어서 있는데 양지버들이라고 하는 벌지지(伐知旨)라고들 불렀다. 신라의 명재상인 박제상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지명들인 것이다.
여인은 벌지지의 둑길위에 서서 애처로운 시선으로 너른 모래밭을 건네다 보고 있었다.
“이제 우리는 어떻게 되는 거야?”
“뭐가 어떻게 돼? 이제부터 너는 내 낭군이 된 것이고 나는 너의 각시가 된 거지.”
“실제로 그럴 수는 없잖아.”
“내가 너에게 약속 했잖아. 내가 이미 약속을 했으니 다 그렇게 될 것이야.”
“남자는 나야. 그런 약속은 남자가 해야 하는 거라고........ 그런데 나는............”
“나만 믿어. 내가 널 지켜 줄 거야. 알겠지? 나만 믿어. 널 지켜 줄 거야.........”
어느새 한 줄기 눈물이 여인의 뺨 위로 흘러내렸다.
‘종명아............’
‘그때는 널 지켜주지 못했지만.......... 지금은 세상의 그 무엇으로 부터도 내가 너를 지켜줄 수 있는데...........’
여인은 둑길에서 모래밭으로 내려섰다.
쪼그리고 앉아서 모래를 한 웅큼 손에 쥐어 올렸다.
아직은 쌀쌀한 한기가 손끝으로 전해왔지만 고운 모래가 손가락 사이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아주 오래전의 이야기였다.
당시 힘이 약했던 신라는 보해와 미해 두 왕자를 고구려와 왜국에 인질로 보내놓고 차차 국력을 길러 미래를 계획하고자 하였다. 십여 년의 세월이 흘렀으나 신라의 국력은 여전히 미미하였고, 두 동생을 그리워한 나머지 눌지왕은 자리에 눕고 말았다. 왕을 구할 처방은 볼모로 잡혀가 있는 동생들뿐이었다. 이때 나선이가 박제상이었다. 박제상은 고구려에 혼자 가서 우여곡절 끝에 보해왕자를 구하여 돌아왔다. 이어 다시 왜국에 가려 하는데, 당시 왜국과의 사이가 극단으로 치닫고 있었는지라 이번에는 결코 다시 돌아올 수 없는 길이라는 것을 그는 이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결심을 굳힌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왜국을 향해 출발했다. 뒤늦게 소식을 접한 부인은 단 한번이라도 남편 얼굴을 보기위해 급히 뒤를 쫒았으나 끝내 만나지 못하였다. 절망에 빠진 부인은 돌아오는 길에 망덕사 문 남쪽 모래위에 기다랗게 드러누워 대성통곡을 했다. 그 통곡 소리가 온 서라벌에 울리고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그날 이후로 그 모래밭을 장사(長沙)라고들 불렀다. 이에 소식을 접한 친척 두이 나타나 부인을 부축해 일으키려 하였으나 부인의 다리가 움직이지 않아 일으킬 수가 없었다고 하여 벌지지(伐知旨)라 불렀다고 한다. 그리고 마침내 이 부인은 동해바닷가의 바위벼랑에서 돌아오지 않는 남편을 기다리다 망부석이 되었다고 한다.
‘나 죽으면 화장해서 뼛가루를 여기 장사에 뿌리고 영원히 너를 기다릴 거야..........’
장사 너른 모래밭에서 한참이나 머물며 눈물을 흘리던 여인이 마침내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젠 집으로 되돌아가야만 하는 시간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애초 이른 아침에 집을 나섰을 때는 반월성 왕궁 근처에서 누군가를 찾아볼 요량이었지만 보리사에서의 기도가 생각보다 길어졌고, 장사에 들를 마음이 애초부터 없었던 것을 갑자기 찾아서 한참을 머물렀기 때문이었다.
아무래도 내일쯤 반월성에 사람을 달리 보내거나 북천 구황교 부근으로 발걸음을 한번 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아이고 마님. 미선마님 아니십니까? 여기까지 어쩐 일로.........”
중인 복장에 길게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중년의 여인 하나가 화들짝 놀라더니 급하게 다가오며 허리 굽혀 인사를 하였다.
“아니 중원 댁이 아닌가? 자네가 여기 장사에는 어쩐 일인가?”
바로 중원소경에서 시집을 왔다고 하여 중원 댁이라 불러왔던 여인이었다.
사년 전 처음 김필을 따라 서라벌에 상수리 처지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낙담으로 날을 보내던 중, 왕궁 근처의 저자거리에서 한 중년 여인이 자신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중원소경에 살면서 몇 번인가 미선부인을 본 적이 있었기에 알아보았다는 것이었다. 하여 그 후로 곧 잘 왕래를 하면서 미천한 살림을 어느 정도 보살펴 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미선부인이 중원 댁을 여타 다른 가솔이나 지인들보다 유독 챙기는 데는 적지 않게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이다.
바로 중원 댁의 남편인 희면(熙面)이 군역을 치르고자 병사가 되어 저 멀리 북쪽의 중원소경으로 파견되어 관아에 소속되었었는데 그곳에서 중원 댁을 만나 첫눈에 반하여 혼례를 치루고 가정을 이루었던 것이다. 시간이 흘러 군역을 모두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간 희면은 학문에 더욱 정진하였고, 학자였던 스승의 추천과 친분이 있던 진골의 천거로 인해 서라벌에서 관리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 그가 점차 나은 자리로 이동을 하더니, 지금은 관리들의 관리감찰을 담당하는 사정부(司正府)에 속해 있었다. 비록 지위가 그리 높지 않다 하여도 사정부라는 감찰기관의 위세는 상당한 것이었다. 중원 댁으로부터 아내의 고향인 중원소경에서 상수리라는 허울아래 볼모로 끌려오다시피 하여 서라벌에 머물고 있는 진골 출신의 김필과 미선부인에 대하여 어느 정도 들어왔는지라, 나름으로 그간의 보살핌에 대한 보은이라는 차원에서 서라벌의 귀족들의 동향이나 왕궁 주변에서 일어나는 변고나 또는 중원소경에서 보고되어 오는 소식들에 대해서 거르고 걸러서 약간의 언질을 꾸준히 보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배려들이 인질로 잡혀와 있는 처지의 미선부인에게는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밑천이었던 것이다.
“봄나물을 좀 캐어볼까 하고 나왔사옵니다. 냉이를 좀 캤사옵니다. 저야 집이 남천 부근이니 여기서 지척이오나 마님 댁은 낭산 부근이시온데 여기까지 어쩐 일이시온지...........”
“그러신가? 내가 요 며칠 가슴이 답답하여 부처님께 기도를 좀 올리고 돌아가는 길이었다네. 일전에 내가 자주 보리사에 들른다고 하지 않았던가?”
“아! 그러셨지요. 쇤네가 자주 깜빡 깜빡 하옵니다. 보리사엘 다니신다 하셨지요? 그러시면........ 혹여 댁으로 돌아가시는 길이시라면 누추하지만 잠시 저희 집엘 들르셔서 쉬어 가시지요?”
그러고 싶었다.
어쩌면 그렇게 될 수 있지 않을까 하고 여기까지 왔던 걸음이었다.
우연처럼 중원 댁을 만나 그녀를 통해 어떻게든 남편인 희면을 만나보고 싶어서 애초 나선 길이었다. 희면으로 부터 무슨 소식이든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나 쉽게 자신의 속을 드러낼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것이 그녀가 이 험난한 세상을 오랫동안 슬기롭게 극복해 나온 장점이자 무기였던 것이다. 쉬이 남을 믿지도 쉬이 남에게 자신의 속을 드러내지도 않는 철저한 그녀였다. 그러나 표정과 행동에서는 늘 차분하고 넉넉하고 자비가 가득하다 못해 차고 넘치는 그런 일관된 태도를 항상 유지해왔다.
“이리 중원 댁을 낯선 곳에서 갑자기 만나게 되니 반갑기가 그지없네만 함부로 폐를 끼칠 수야 없지 않은가? 아이들도 편하게 놀고 있을 터이고......... 바깥분이 모처럼 쉬고 계시는데 갑자기 불쑥 불청객이 들이치기라도 한다면...........”
“폐라니요? 마님의 보살펴주심이 얼마나 크신데 그깟 일로 저희에게 폐라니요........ 그리고 애 아범은 아침에 나갔으니 하루 관청에서 야숙을 하고 내일 해거름에나 퇴청을 할 것입니다요. 하오니 아무 걱정 마시고 저희 집으로..........”
중원 댁의 간절한 요청이 있었음에도 미선 부인의 마음속에는 이미 결론이 나 있었다.
그녀의 남편이 집에 없는 지금 그녀의 집까지 따라갈 이유가 없어졌던 것이다.
혹시나 남편인 희면이 집에서 쉬고 있기라도 하면 우연을 가장해 못이기는 척 따라가 무엇이라도 좋은 소식을 좀 얻을까 하였던 바람이 일시에 모두 무너졌던 것이다.
“아닐세. 오늘은 내가 기도하는데 시간을 많이 지체하여 서둘러 집으로 가야만 하겠네. 자네 집에는 다음 기회에 한번 들르기로 하지. 말씀만으로도 고맙네. 아무 때고 자네가 내 집에 한번 들러주시게. 그러잖아도 자네를 본지 여러 날이 지난 것 같아 내 사람을 한번 보내려고 벼르던 참이었네.”
“아이고. 쇤네가 마님을 자주 찾아뵙지 못하여 오히려 송구하옵니다요. 혹시 쇤네에게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시면 아무때고 기별만 보내 주십시오. 쇤네가 쏜살같이 달려가겠습니다요. 마님.”
중원 댁의 바느질 솜씨가 유독 뛰어나서 처음부터 일감을 맡겨온 처지였다.
남편 희면의 벼슬이 올라가고, 이제는 제법 그럴싸한 기와집과 하인도 둘씩이나 거느린 처지였음에도, 남편 희면이 너무도 청렴하고 강직한 고로 생활형편 자체가 썩 나아진 것은 아니었다. 그리하여 지금도 중원 댁은 스스로 소일거리를 찾아 생활의 보탬을 찾았고, 소탈한 관리인 희면은 그런 아내를 오히려 대견스레 바라볼 뿐이었다.
미선부인은 순간처럼 뇌리를 번득이며 스쳐지나가는 느낌이 있었다.
‘오늘 당장 희면으로 부터 어떤 소식을 접하지는 못하였지만 보다 분명하고 확실한 다음을 기약하기 위해서는 중원 댁을 여기서 이대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라고.
“이보시게 중원 댁. 자네가 괜찮다면 지금 예서 나랑 반월성 근처까지 함께 가주지 않으시겠는가? 모처럼 나왔던 길이니 장터에 들러 물품 몇 가지를 살펴보고 괜찮다 싶으면 사야 하겠는데 물건을 보는 눈썰미야 아무래도 중원 댁이 나보다 훨씬 낮지 않겠는가? 시간이 괜찮다면 날 좀 잠시 도와주시면 고맙겠네.”
그냥 이대로 보내면 다음 기약이 어렵겠다고 미선부인은 마음의 결정을 내린 것이다. 아무래도 반월성 부근의 장터에 데리고 가서 옷감이며 고기든 술이든 좀 낮게 사서 보내야만 하겠다고 생각하고 중원 댁의 의중을 물었다. 장터를 돌면서 은근하게 자신의 처지를 내비치고 그녀의 남편 희면을 한번 직접 대면할 구실을 찾고자 하였다.
반면 중원 댁의 얼굴에는 가득 환한 미소가 피어올랐다.
결코 마다할 일이 아니었던 것이다. 마님이 요청하시니 따라 나서서 무슨 일이든 도움이 되어 드렸으면 하는 것이었고, 그간의 예로 보아서 장터를 그냥 자신의 일로만 지나칠 마님 또한 아니었던 것이다. 무엇인가 한 아름 선물보따리를 안겨주실 것 이라는 사실을 이미 그녀는 느낌으로 충분히 알 수 있었던 것이다.
(8회. 다음 이야기는 곧 이어서.......)
(공지 사항)
알려드립니다.
연재하고 있는 소설의 열람 싸이트를 변경하고자 합니다.
15년 이상 함께해온 지인들의 카페가 있습니다.
그 시작은 (people475) 였는데, 사정으로 피플 475가 폐쇄되자 안타까워 하던 일부 지인들이 포털싸이트 다음 카페에 (475사람들) 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이어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카페이 카페지기님이신 존경하는 기윤님(kjyoon)께서 저에게 다시 소설을 써볼것을 권유해 주셔서 망설이던 끝에 다시 소설을 써서 연재하기로 하였고, 그 소설을 여기에 지금 써 내려가던 (탑평리랴 탑평리야)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여 약간의 수정 보완을 하여 (475사람들)에 연재를 시작하였습니다. 열심히 써보려 합니다. 글이 마음에 드신 분들은 다음카페 (475사람들)을 방문하셔서 (피안재의 역사이야기)를 열람해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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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윤 14.11.07. 14:43
그는 언제라도 소설을 쓸 수 있는 능력과 열정을 지녔습니다.
특별히 우리 역사에 대한 시대적 인식과 이를 바탕으로 보는 혜안이 또한 남 달랐습니다.
이에 우리는 475별관에 '피안재의 역사이야기'라는 란을 만들어 그 만의 공간을 제공합니다.
그리함으로 그동안 잠시 침체된 '475별관'에 새로운 활력과 전기가 나타나기를 기대합니다.
피안재의 소설 형식의 역사이야기에 주목하면서
뜨거운 격려와 관심을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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