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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야기

(알 럽 트래블 ; 스페인) 헤밍웨이가 <론다>로 간 까닭은 ?

by 피안재 2019. 9. 21.

 

 

 

 

 

 

 

 

 

 

 

 

 

 

 

 

 

 

 

 

 

 

 

 

 

 

 

    ' 이 세상에 여자가 하나뿐이라서 당신을 사랑한게 아니야.  당신을 사랑하게 되고 보니 이 세상에 나에게 있어서 여자는 당신 하나뿐이라는 것을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지.'  어쩜 이렇게 멋있는 말은 모두 소설이나 영화속에만 있는것인지.........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에서 주인공 로버트 조던은 마리아에게 이렇게 사랑을 고백한다.  그 영화속의 배경은 '스페인 내전'이었고,  그 소설 집필의 시작은 바로 (론다)에서 였다.  그렇다고 그 소설 전부가 론다에서 쓰여졌느냐 하면 그것은 아니다.  소설의 구상과 초기의 집필이 이곳 론다에서 머무는 동안에 시작되었다는 말이다.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곳 론다에 머문것은 불과 몇개월의 시간 뿐이었다.  헤밍웨이가 워낙 유명하다보니  론다와 연계하여 많은 루머와 낭설이 뒤따르고 있는것이 현실이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와 (무기여 잘있거라)가 론다에서 쓰여졌다거나,  피카소와 함께 노년에 론다에서 투우를 즐겼다거나,  심지어는 그가 여기 론다에서 남은 여생을 즐기다가 사망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다.  하지만 대부분 사실이 아니다.  아주 험난한 파도와 같은 격동의 시대를 질풍노도 처럼 달려갔던  헤밍웨이는 자의 반  타의 반으로 편안하게 어디 한곳에 정착해 인생을 즐길 운명을 가지지 못하고 태어난 사람이었다.  그가 인생 후반기에 가장 오래 머물고 가장 애착을 가졌던 안식처는  (노인과 바다)를 출판하였고,  실제로 바다 낚시를 즐겼던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의 시간이었다.  그런가 하면  그에겐 아주아주 지치고 힘든 시기였으나, 반면에 많은 동지(지인)들과 교류하던 파리 체류의 시간이 그에겐 아주 소중한 추억이었을 것이다.  이 시기를 그들은 스스로 '잃어버린 세대(로스트 제너레이션)'이라 불렀다.  그런가 하면 아프리카 체류의 기간 내내 무척이나 행복해 했다고 한다.  그는 그곳에서 코끼리와 사자를 사냥했다.  참을 수 없을만치 뜨겁게 달아오른 자신의  열정을 어디엔가 쏟아붓고 달래주기엔 아프리카에서의 사냥만한 것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가 영화로 만들어 졌을 때,  그가 주먹으로 감독을 코를 부러트린 일화가 유명하다.  이유는 굳이 말하지 않겠지만........  그런가 하면 헤밍웨이는 이 영화를 6번이나 보았다고 말했다.  '너무 감동적이어서?' '원작이 너무도 훌륭해서?'  '영화를 좀 보려하면 잠이 오고, 나머지 부분을 다시 보려고 하면 또 잠이 오고.......  그래서 종당에 6번 만에야 겨우 영화를 모두 보았다'라고 답했다.

 

 

  조각에 열중하고 있던 로댕에게 엽서가 한장 도착했다.

  그의 영원한 연인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가 보낸 엽서였다.

  '아주 거대한 절벽이 있는데 등에 작고 예쁜 마을을 하나 지고 있어요.  안달루시아의 뜨거운 열기에 그 마을이 더 하얘가고 있어요.  그 절벽 사이로 아주 거대한 아치형의 다리가 놓였는데 이 장엄함을 말로 어떻게 표현해야 좋을 지 모르겠어요.'

  대자연의 신비와  유구한 세월을 헤쳐나온 고귀한 인간의 숨결이 절묘하게 한데 어우러진  안달루시아 지방의 절벽 도시 '론다'를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낯선 여행자의 가슴이  무기력하게  저절로 무장해제를 당한지가 이미 한참이나 지나고 있었다.

  론다(Ronda)는 바로 그런 곳이다.

 

 

 

 

 

 

  3일간의 투우축제가 끝난  론다의 아침은 비교적 한산하고 평온했다.

  하지만 벌써 코끝으로 스며드는 안달루시아 특유의 열기를 머금은 아침 공기는  우리가 분명 스페인에 있음을 확인시켜 주기에 충분했다.

  모든 점포들이 문을 열고 하루를 시작하는 비르헨 데 라파스 거리를 지나 스페인 광장에 닿는다.

  스페인 광장 가운데 우뚝 솟아있는 동상은 근현대 스페인의 정치가이자 명연설가였던 '리오스 로사스(Rios Rosas)'의 동상이다.  그는 바로 이곳 론다 태생으로  근현대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긴 정치가였으나,  공화파와 왕정복고파들이 혼란속에 서로 왔다갔다 재집권하는 격랑속에서 끝내는 좌절을 격게되고 쓸쓸하게 혼자 생을 마감한 사람이다.  그의 표정에는 어딘지 모르게 괴뇌하는 흔적이 역력해 보인다.

  스페인 광장을 지나 만나게 되는것은 당연히 론다의 랜드마크인  누에보 다리이다.

  어제 그렇게 한참동안 인근을 배회하면서 보고 또보고 했건만,  지금 내 눈앞에 놓여진 다리는 어제 그 다리가 아니지 싶다.  진한 감동이 어제와는 전혀 다른 어떤 감흥으로 다가 온다.  가히 스페인 최고의 비경이자  뷰 포인트 라는 말이 실감이 절로 난다.

  누에보 다리는 길이가 겨우 30m  밖에 안되는 짧은 다리이다.  하지만 높이는 100m에 이른다.  다리 난간에서 내려다 보면  낭떠러지 아래의 과달레빈 강까지 120m 가가운 높이가 주는 아찔한 현기증을 실감해 볼 수가 있다.

  다리 우측의 타호 공원 전망대에서 비껴 보는 누에보 다리나  절벽아래 펼쳐진 너른 평원도 장관이겠으나,  다리 왼편의 꽃과 계단으로 빼곡한 작은 공원인  '자르디네스 쿠엔카 공원 전망대에서 올려다 보는 누에보 다리의 전경도 장관일 뿐더러 아래로 깊은 협곡위에 놓여진 '아랍인 다리' 또한 무척 아름답다.

  차마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뒤로하고 누에보 다리를 건넌다.

  다리의 건너편은 '사우다드(La Ciudad)'라고 불리는 론다의 구도심이다.  과거 이슬람 지배당시의 흔적이 그대로 곳곳에 남아있는 올드 씨티가 바로 이곳이다.  다리를  건너 50m쯤 나아가면 처음으로 왼쪽과 오른쪽으로 돌아가는 골목길이 모습을 드러낸다.  오른쪽은 말 그대로 좁은 골목길 이지만,  왼쪽 길은 완만한 경사를 내려가는  제법 너른 포장도로가 펼쳐저 있다.  상당히 중요한 지역이다.  13세기 아랍 시대의 이슬람 목욕탕인 '마뇨스 아라베스(하맘)'이 있고,  흔히 '무어인으 집'으로 불리는 '라 미나(La Mina)가 이 부근에 자리잡고 있다.

  바로 누에보 다리를 건너 첫번째 공목이 나오는 왼쪽 벽면에 아주 유명한  론다의 전경을 그대로 나타내주고 있는  아줄레주(타일 벽화)가 있다.  그리고 이 자리에 한낮이면  바이올린 연주로 버스킹을 하고 있는 우아한 여성을 만나 볼 수가 있다.

  이번 여행에서 내가 경험한 스페인의 3대 버스킹 명소를 꼽으라면........  첫째.  바르셀로나 스페인 광장의 분수대 공연이 펼쳐지는 시청사 앞 계단에서 펼치는 전자오르간 연주 버스킹이 최고 명당이 아닐까 생각되고,  둘째로는  코르도바 메스키타 입구 등나무 그늘에서 모녀가 펼치는 바이올린 앙상불이 압권이었으며,  셋째가 이곳 론다 누에보 다리 건너 아줄레주 앞에서 펼치는 바이올린 버스킹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거의 매일 비슷한 시간에 비슷한 레퍼토리를 연주 할 터인데,  시간이 조금 지나자 그 연주가 얼마나 혼신을 불어넣은 연주인지를 금방 실감할 수가 있었다.  우리는 쉽사리 자리를 뜨지 못했다.  현지인과 여행자들이 점점 모여들고 있었다.  바로 앞이 구도심의 가장 중요하고 차량과 사람이 빈번히 자나가는 곳이라  수시로 자리를 옮겨야만 했다.

  그때 바로.......  길 건너  계단 두 세칸 높이의 공터에 예쁜 카페가 눈에 들어오는 것이었다.

  우리는 그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이날 이후로 하루에 적어도 두번 정도는 이 카페를 들렸다.  커피도 좋았고  생맥주와 간단한 주점부리도 아주 좋았다.  더더욱 '이것이 바로 유럽의 운치 있는 노천 카페다'라고 할 수 있을만큼 아주아주 운치있는 분위기가 짱인 카페였다.

  그날 첫날은  커피를 주문했다.

  제대로 된 모닝 커피가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상하게 아직 유럽식 에스페레소는 잘 적응이 안되어서  아메리카노 한잔,  카푸치노 한잔을 청했다.

  분위기 짱 나는 카페에서  기가막히게 맛있는 커피를 마시며 바이올린 버스킹을 감상한다.  여행 간간히 누리는 최고의 휴식이자 재충전이다.

  도심 트래킹에 나서기 전에 화장실 이용을 하려하니  같은 공간에 붙어있는  호텔 화장실을 이용하면 된다고 한다.  그래서 옆에 붙어선 출입구를 같이 있는 호텔을 들어섰는데........  이거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  모던한 분위가가 그대로 살아 있는 나름 멋지고 고급스런 호텔이었던 것이다.

  후런트 데스크에는 20대 후반쯤의 귀티가 뚝뚝 떨어지는 아주 멋진 청년이 환한 미소로 나를 반겨 준다.  흔쾌히 허락하면서 화장실을 가리켜 준다.  근데 이 화장실도 품격이 전혀 다른 차원이다.  너무나 고급스럽다.  감사 인사를 정중하게 하고 호텔 내부를 이리저리 둘러보면서 나오는데.........  나와서 호텔 입구를 돌아다 보니 아!!!  글씨........  별이 4개가 붙어 있는 사성급 호텔이었다.(어쩐지 좀 다르다 했어)

  섬찟........  다시 눈을 크게 뜨고 별 네개가 그려진 호텔 현판을 뚤어져라 살펴보는데...........  (헤밍웨이 호텔)이다.  그제서야 간판을 본 것이다.

  '잉???  헤밍웨이가 여기서 불쑥 왜 튀어나와?'

  자리에 앉아서 방금 격은 상황을 챠밍여사에게 세세하게 부연 설명을 하고 있는데.........  또. 아뿔싸.  이제껏 전혀 무관심하게 앉아서  버스킹만 바라보고 있었는데........  챠밍여사의 얼굴 뒤로 카페입구의 현판이 보이기 시작하는데..........(카페 헤밍웨이)라고 써 있다.

  '헐.  여기도 저기도 헤밍웨이네?  이게 뭔 황당한 씨츄에이션이래?'

  그때부터 주변을 두리번 두리번 거리기 시작했다.

  론다가  헤밍웨이와 약간 인연이 있다는 사실은 여행 전부터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으나........  느닷없이 호텔도 카페도 모두 헤밍웨이라니?

  도저히 더 이상 이 궁금함을 참을 수가 없어서 커피값도 지불할 겸(유럽에서는 카운터로 가지않고 앉은 자리에서 점원을 부른다) 서비스맨(웨이터)에게 손짓을 했다.  40줄을 좀 넘어선 이 사내는 아까 통성명을 할 때,  자신을 이 카페의 주인이라고 소개한 바가 있었다.  계산은 계산이고.......

  '저렇게 간판을 헤밍웨이라고 한 특별한 이유가 있습니까?'

  내 질문을 뚫어져라 응시하면서 듣고 있던 매니저의 표정이 무엇인가를 오랫동안 기다려왔었다는듯이 갑자기 환해졌다.

  '아!!!!  간판이 왜 헤밍웨이 이냐고요?  이 호텔과 카페는 증조 할아버지 때 부터 가업으로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데........  스페인 내전때  종군 기자로 참전했던  미국 소설가 어니스트 헤밍웨이가  이 호텔에서 두 달을 묶었고,  그 두달동안 우리 카페에서 주로 식사를 하고 와인을 마셨지요.  지금 올려다 보이는 2층의 국기가 걸려있는 방이 헤밍웨이가 묶었던 방이랍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소설을 집필하기 시작했는데.........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아십니까?'

  '그럼요.  제가 아주 존경하는 소설가 이신걸요.  책도 읽었고 영화도 두세번은 보았지요.  사실 그때는  스페인 내전에 대해서 잘 알지도 이해하지도 못했었지요.  게리 쿠퍼 보다  잉그리드 버그만이 너무도 예뻐서 영화를 보게 된것이라 해도 틀리진 않았을 거예요.'

  그는 신이 나서 한참동안 우리에게 이런저런 이야기를 마구 쏟아냈다.

  이를 계기로 아주 짧은 기간이었지만  우리는 그 매니저와 아주 친해졌다.  이 주위를 지나가다 보면 그가 먼저 우리를 알아보고는 '헤이 꼬레'하고 소리쳐 불러 주었다.  론다에 머무는 내내 우리도 커피 생각이 나거나 어디라도 앉아서 쉬고 싶어지면 무조건 '카페 헤밍웨이'를 찾게 되었다.

  '이 자리가 혹 헤밍웨이가  피카소와 와인을 마시던 자리가 아니었을까?' 하면서 말이다.

  매니저의 소개로  호텔 곳곳을 둘러보고 이런저런 설명도 들었는데........  정작 2층의 헤밍웨이가 머물면서 집필을 했던 방은  이미 손님이 묶고 있어서 안을 들여다 볼 수가 없었다.  이 호텔에서 최고로 인기있는 명소란다.(아무렴)

  언제 다음에 올 기회가 생기면  2층 저 방을 얻어 볼까?

 









 























 

 

 

 

 

 

 

 

 

 

 

 



  '씬 쁘리사 뻬로 씬 빠우사(Sin pris pero  Sin pousa)'
  나는 새삼스레 이 스페인 사람들의 격언을  론다에서 떠올리게 되었다.  하긴 그럴만도 하지 싶다.  나름대로 여유를 가지고 하는 자유여행이었지만........  모처럼의 여행에서 보다 많은것을  찾아보고  느끼고 싶은 열망은  바쁘게 시간을 쪼개게끔 만들고 끊임없이 이어지는 바쁜 스케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아  심신을 지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유여행에는 꼭 잠시나마 모든것을 내려놓고 여행자의 심신을 추스를 수 있는 중간 과정이 대단히 중요하다.  혼자 여행할 때는 모든 일정을 접고  어떤 공연을 보거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 쳐박혀 있기도 하고,  현지인들의 삶 속으로 시장이나 공원을 서성거리며 아무런 계획이나 행동 없이 여유를 부려보기도 한다.  챠밍여사와 동행하면.......  주로 동남아였지만.......  무조건 풀장(실내 수영장)이 있는 숙소를 골라 정하고,  가까운 시장에서 주점부리나  쇼핑을 하고  수시로 풀장에서 논다.  그게 피로회복 운동이고 나름 재충전의 한 방식이었다.  모로코 여행 계획이 모두 긴급하게 수정되었고,  덕분에 당일치기로 생각했던 론다에서 3일이나 유유자적하게 된 마당에.........  이런것이 여행이고.......  이를 기회로 재중전을 한 후에 새로운 기분으로 다음 여행을 계속하면 될 것을.......... ㅎㅎㅎ  의도를 했건.......  의도를 하지 않았건.........  론다는 최고의 휴식처였다.  이번 여행뿐만이 아니라  스페인에서도  지중해 연안에서도 최고의 휴양지이다.  그리고 오늘은  론다 주변을 트래킹하면서 지친 우리의 심신을 위로하고 무한의 자유를 만끽해 보고자 나선 길이다.  한국에서의 우리의 삶.......  그리고 한국 정치판에서 툭하면  튀어나오는 말...........  '무쏘의 뿔처럼 가라.'  '개뿔.'  무쏘는 무슨.........  개인이나 한국 현대 사회의 대부분의 병페와 부작용은  상당부분........  '그넘의 무쏘의 뿔에서 생겨났어' 라고 외쳐주고 싶다.

  '씬 쁘리사사 뻬로 씬 빠우사(Sin prisa pero  Sin pousa)'  이 말은 '안 개뿔'이다. '서두르지는 않되 꾸준히 가라'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오래전 자유여행을 하는 나에게 말레이시아 사람들이 엄지 손가락을 추켜세우면서 '칼리페  칼리페'라고 여러번 인사말처럼 덕담을 건네주던 말이 있었다.  '늘 꾸준히,  한결 같이 여행을 계속하라'는 격려의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나이 50줄을 넘어서면서 그넘의 '무쏘의 뿔'은 쓰레기 통속으로 내팽개치고 말았다.  나의 발걸음이 언제까지 이어질지는 모르겠으나.......  내게 허락된 그날까지 한결 같은 발걸음으로 계속 나아가려고 한다.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늘은........

  챠잉여사의 손을 잡고  론다의 구도심을 가로 질러 허물어진 옛 성채의 북문을 나서  푸른  론다 평원으로  트래킹을 나서는 날이다.

  안달루시아의 정취와  그새  어느정도 열기를 머금은 공기가 페부 깊숙히 자리를 차지하고 들어와 앉는다.

  론다는 아름답고 사랑스럽다.

  마냥...........

 









 

 

 

 

 

 

 

 

 

 

 

 

 

 

 

 

 

 

 

 

 

 

 

 

 

 

 

 

 

 

 

 

 

 

 

 

 

 

 

 

 

 

 

  누구든, 그 자체로서 온건한 섬은 아니다.

  모든 인간은 대륙의 한 조각이며, 대양의 일부이어라.

  만일 흙덩이가 바닷물에 씻겨 내려가면 유럽은 그만큼 작아지며, 만일 모래톱이 그리되어도 마찬가지.

  그대의 친구들이나 그대 자신의 영지(領地)가 그리 되어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사람의 죽음도 나를 감소시킨다. 왜냐하면 나는 인류 속에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누구를 위하여 종이 울리는지를 알고자 사람을 보내지 말라.

  종은 그대를 위해 울린다.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기도문> 중 일부이다.

  시인은 '우리 각자는 인류라는 이름으로 묶인 공동체의 한 부분이며, 따라서 다른 이의 일이 곧 나 자신의 일이 된다' 말하며 인류의 연대를 강조하고 있다.

  헤밍웨이의 소설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는 위의 기도문의 한 싯귀에서 따온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조기 위에까지 좀 더 올라가볼테야?'  '저기 위에 울타리 쳐진게 보이는데 잘 못하는게 아니야?  위험하거나 하지 말라는 짓은 하지 말아야지?'  '비탈 엎에 공사하는 인부들 보이지?  성 안에 이곳으로 내려오는 산책로 입구를 철조망으로 막은것도 저 공사 때문이었나봐. 그렇긴 한데.......  조기 돌출부가 최고 뷰 포인트 같아.  당신 괜찮다면 올라가 보구........  누군가가 제지하면 곧바로 돌아서면 되지 뭐.'  '그럼 한번 올라가 볼까?  여기까지 왔는데..........'  대부분의 트래킹에 나선 여행자들은 이곳까지 온다.  그것도 호텔이나 여행사를 통해 차를 타고 온다.  그런데 우리는 처음부터 아예 뙤약볕 아래 걸어서 이곳까지 왔다.  하여간 걷는데는 일가견이 있다.
  다시 챠밍여사가 씩씩하게 앞장을 서서 올라 간다.  여기까지 온 것도 대단한데.........  우리가 철조망을  타고넘어 올라가는데........  미쳐 발견하지 못했던 한쌍의 여행자가 위에서 내려온다.  이제 철조망 위의 뷰 포인트는 우리 독차지다.  우리 밖에 없다.  바위벼랑 중간에 론다 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설치된 초소와 감시탑이 설치되었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다.  외성이랄까?  누에보 다리 위에서 내려다 보던 풍광과는 완전히 다르다.  환호성을 지르고 싶을만치 멋진 풍광이 파노라마 처럼 펼져진다.  그야말로 장관이다.










 

 

 

 

 

 

 

 

 

 

 

 

 

 

 

 

 

 

 

 

 

 

 

 

 

 

 

 

 

 

 

 

 

 

  한참동안 우리는 그 자리를 떠나지 못했다.

  아니 쉽게 떠나올 수가 없었다.

  세상 어디에서나 흔하게 볼 수 있는 풍광이 결고 아니었기 때문이다.

  언제 다시 론다에 올거라고 기약할 수가 있겠는가?  그래서 조금이라도 더 론다에.......  아니 꼭 지금 이자리에 조금이라도 더 머물고 싶었다.

  한 삼십분쯤 지났을까?

  우리가 이 자리에 올라온 뒤로  저 아래의 전망대엔 끊임없이 사람이 몰려왔지만,  이곳까지 올라오는 사람은 없었다.  그런데 배낭을 둘러멘 한쌍의 남녀가 마침내 여기까지 올라오는 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이제 이 자리를 비워주어야 할 때가 되었다 싶어  우리는 아래로 내려갔다.  서로 스쳐지나가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도중에..........

 

 

  헐.

  믿겨지지가 않았다.  나의 두 눈을 의심하기에 이르렀다.  챠밍여사도 같은 심정이었는지 두 눈이 주먹만하게 커져있다.

  없다.  있어야 할것이  보이질 않았다.

  세상에나........  세대의 차이인가?  아님 문명의 차이인가?

  -----  이날 벌어진 초유의 사태를 챠밍여사와 나는 (론다의 끈 팬티 사건)이라고 명명했다.  이번 여행 통털어 최고의 써프라이즈 였다.

 

  챠밍여사 :  모해?

  나 :  내가 지금 헛걸 본거는 아니지?  지금 우리가 본 것이 현실 맞는거야?

  챠밍여사 : 나도 기절초풍 할 만큼 놀랬어.  자꾸 쳐다보지 마.  눈 마주치면 서로 얼마나 민망하겠어?

  나 :  여자가 용감한거야?  아니면 뒤따라 가는 남자가 멍청하거나 혹은 거룩할만큼 위대한거야?

  챠밍여사 :  몰라.  안내려 갈꺼야?  에구에구 속물.  시커먼 속이 다 들여다 보인다.  어서 앞장서.

  나 :  속물이라니?  어디까지나 페미니즘을 신봉하는 이시대 지성인의 한사람으로서 우리와 확실히 다른 가치관과 생활이 있구나 하고 판단하는 중이었지.

  챠밍여사 : 입으로는 지성을 이야기하면서 시선은 계속 언덕위를 돌아다 보고  속으로는 시커멓게 딴 생각을 굴리냐?

  나 : 그런거 절대 아님.  여자가 그럴 수 있다손 치더라도  남들이 자기 여자를 어떻게 바라볼지를 생각하면.........  내 다시 올라가서 남자에게 물어보고 오면 안될까?

  챠밍여사 : 여기서 죽을래?  어여 앞장 안설꺼여?

  (그렇게 희대의 끈 팬티 사건은 한여름밤의 허무한 꿈처럼 잠시 그렇게 우리 앞을 스쳐 지나갔다.  오 마이 갓!!!!!!!)

 

 

 

 

 

 

 

 

 

 

 

 

 

 

 

 

 

 

 

 

 

 

 

 

 

 

 

 

 

 

 

 

 

 

 

 

 

 

 

 

 

 

 

 

 

 

  들판으로 트래킹을 시작했던 성문 밖에 이르니 포플라 우거진 너른 공원의 야외 카페에 쉬고 있는 여행자들이 제법 많이 있다.

  트래킹을 마치고 미시는 시원한 생맥주 한잔.......  가히 예술이자 거룩한 생명수라 하겠다.

  주문한 생맥주가 나오기 전에 나는 분수대에 가서 세수를 했다.

  나 :  양반의 후손 체면에 못 볼것을 봤으니 세안을 해야지.  싹싹 씻었어.

  챠밍여사 :  눈만 씻으면 뭐해?  보이지 않는 속마음을 씻어내야지?

  나 : 이사람 정말 뒤끝있네?  여기 보세요.  내마음은요.  오래전부터 이미 세여자로 가득차서 다른 여유가 없어요.  챠밍여사랑 며느리랑 윤태리만으로도 꽉 차서 빈 틈이 없다고요........  아세요?

  챠밍여사 : 하여간 입만 번드르르 하고.....  말은 천상유수올시다.

  나 : 이래도 안 믿고 저래도 안 믿고...........  차라리.........  우리 구도시 돌아다니다가........  혹시 끈 팬티 다시 만나는거 아닐까?

  챠밍여사 :  본심 나오네.  이번에 마주치면 내가 끈 팬티 불러 세워서 당신이랑 기념사진 찍어준다.  약.속.

  (그러나 슬프게도 끝내 재회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ㅎㅎㅎㅎㅎㅎ)

 

 

 

 

 

 

 

 

 

 

 

 

 

 

 

 

 

 

 

 

 

 

 

 

 

 

 

 

 

 

 

 

 

 

 

 

 

 

 

 

 

 

 

 

 

 

 

 

 

 

 

 

 

 

 

 

 

 

 

 

 

 

 

 

 

 

  론다의 도심여행이 힘들어진다 싶으면  우리는 다시 헤밍웨이 카페에 들른다.

  스페인 피자에  스페인 명물이라는 오징어튀김에 샐러드와 생맥주.........  맥주는 추가에 추가를 낳게 되지만.........

  헤밍웨이 카페는 정겹다.  분위기가 짱이다.  거기다 음식맛도 가히 일품이다.

  이런데서는  독한 위스키에다  쿠바산 시거 하나쯤은 피워물고 있어야 그림이 되는건데............

 

 

 

 

 

  내가 배웠던 세계사에서는 (스페인 내전)을 그렇게 비중있게 다루지 않았다.

  그저 지구 반대편 스페인이라는 영토 안에서 벌어진 '프랑코의 독재로 얼룩진' 다소 국지전 성격의 분쟁 정도였다.

  '스페인 내전'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분쟁이었고,  거기에서  피카소의 게르니카가 탄생하게 되었다는 정도였다.  그게 전부였다.  스페인 내전은 그렇게 별 볼일 없는 사소하거나 지극히 미미한 분쟁이었을 뿐이었다.

  대학에 진학해서 소위 학생 운동쪽에 미미하나마 관여하면서 접한 제 3세계 역사에 관심을 갖게되고,  그동안 배웠던 역사의 이면을 다시 검토해보고 살펴보고 새로운 깨달음을 찾아가는 재미에 한동안 아주 깊이 빠졌던 시기가 있었다.  지금 나의 역사관이나 세계관. 종교관은 모두 그때 정립되었다 하겠다.

  그때에서야 비로소 (스페인 내전)에 관한 전모가 아주 세세하게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것은 그렇게 사소하지도 않았고  지역적 분쟁을 넘어서 제 2차 셰계대전의 실험장이자 대리 축소판 전쟁이었다.

  인류 역사를 통털어 (스페인 내전)만큼 복잡한 전쟁이 또 있었을까?  적어도 내가 알고있는 바에서는 없다.  적당히 알아서는 이해하기가 결코 쉽지 않고,  확실하게 자기 주장을 펼치기에 힘겨운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다.

  신탁에 의해 인간이 절대 풀 수 없는 실타래를 알렉산더는 운명을 거부하기라도 하는것 처럼  칼로 내리쳐 그 실타래를 풀었다.

  내 소견으로  스페인 내전은 그 신탁의 실타래 보다도 더 복잡하다.  알렉산더의 칼로  스페인 내전을 내려친다 해도 별반 그 복잡함은 달라지지 않을 것이다.  스페인 내전의 이전은 근대의 모습이다.  그러나 스페인 내전 이후의 역사는 비로소 현대의 모습으로 등장하게 된다. 

  한마디로.......  신과 인간 사이의 관계가 복잡한 미로처럼 얽혀있는  트로이 전쟁도.........  사상과 민족과 종교와 가치관의 대립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스페인 내전만큼은 복잡함이 훨씬 덜하다.

  내가 20대에 노트에 요악하여 남긴  스페인 내전에 대한 메모는 대략 이러했다.

 

 

 

 

  '외적으로는 파시스트와 공화주의자들의 양자 간 대결이라 말하지만, 그 이면의 속내막은 전혀 다르다.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파시즘 같은 당시까지의 인간이 갖을 수 있는 온갖 이념들이 극렬하게 맞부딪치는 전장이었고,  거기에다  자본가 지주계급과 노동자 농민계급이 분노를 넘어 서로에게 총을 겨누고 방아쇠를 당겼다.  몰락한 왕정의 복고를 두고 나누어진 파벌들 위에  단합된 민중과  천년동안 그들을 억압한  카톨릭이 첨예하게 대립하는  종교 전쟁이기도 했다.
  파시즘을 추구하는  독일과 이탈리아는 국민 진영인 군사 독재자 프랑코를 도왔고,  이들을 견제하려는 소련을 비롯한 몇몇 나라가 공화 진영을 지원했다.

  이 와중에 미국과 영국이 한발 물러나 관망만 하는 위치에 섰다.  파시즘의 기세도 염려스러웠지만,  이들의 주된 관심사는 혹 서방 어딘가에 소비에트 사회주의가 들어서는 것을 저지해야 하는것이 최우선 과제라는 전제하에서 중립적인 태도를 견지했다.

  결국 이 사태는 다각적인 면에서 살펴볼 때 이미 세계사를 바꾼 국제전이었고 2차 세계대전의 발발을 예고하는  암시였다. 한쪽에서는 적군지역 민간인에게 폭격을 가하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그 적군에게 무기를 팔았다.   아군도 적군도 피하간의 식별이 불가능한 사태를 예고하는 전초전이었다.
  국제법을 들먹이며 중립을 취한다던 나라들은 내전의 어려움에 처한 스페인을 이용하여 어떻게 하면 더 많은 이익을 챙길까 호시탐탐 호기를 노렸다. 패배한 공화 진영의 변명은 독일의 조직적인 군사지원이 결정적이었다고 하지만, 많은 학자들은 공화진영 내부의 분열과 공화 정부의 무능력이었다고 평가한다. 그것은 스페인 내부의 문제만이 아니라 주변국을 넘어 온세계의 이권다툼이 되었던 것이다.
  이런 비극적인 사태 속에서 헤밍웨이를 비롯한 일부 지성인들이  인류역사 속에서 정의를 실현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자각하고,  또 전쟁 속에서 인간이 얼마나 잔인해지며,  인간의 존재가 얼마나 나약하고 비참한 존재인지를 깨닫고 역설하게 되었다.'

 







                                                                               --  헤밍웨이가  론다에 머물던 1939년 집필 모습.

 





  헤밍웨이는 신문기자로 사회생활을 시작하였으나 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지원하여 하사관으로 참전하였으며  치명적 부상을 입기도 하였다.  이때의 공적으로 그는 무공훈장도 수여했다.  (무기여 잘 있거라)를 발표하여 이때부터 세계적인 소설가 반열에 올라섰다.  이후 신문사 특파원 자격으로 오랜 시간을 파리에 머물게 된다.  파리에 머무는 동안에 많은 지인들을 사귀게 된다.  스콧 피츠제럴드를 비롯해 거트루드 스타인에서 파블로 피카소와도 인연을 맺게된다.  하지만 이 시기는 모두에게 지적 영적 방황기에 해당된다.  지나간 세대가 남겨준 암울함과  1차 세계대전이 안겨준 전쟁의 참혹한 참상 위에 다가올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비젼의 상실이 이 시대의 지성인들에게는 좌절과 상실의 아픔으로 자리했다.  이들은  스스로를 '잃어버린 세대(로스트 제너레이션)' 이라 칭했다.  하지만 그게 전부는 아니었다.  당시 파리의 지성인들은  신흥 부국 미국에서 들어오는 달러로 흥청망청 호화로운 생활을 영위하면서 퇴페적인 쾌락을 즐겼다.  암울한 현실을 토로하면서 퇴페적 문화에 탐닉하는 이중적 생활관을 대부분 향유하고 있었다. 위선을 증오하고 멀리한다면서 그들 스스로가 위선적인 삶을 즐기고 있었다.  어쩌면 스스로 지어 부른 '로스트 제너레이션'은  '퇴페한 지성인들 때문에 비젼을 잃어버리게 된 역사'를 저들 스스로 가엽게 표현한 것이 아니었을까?  최소한의 자각이나 양심은 있어서.  이 와중에 1936년 스페인 내전이 터졌다.  스페인 내부 사정 뿐만이 아니라 제각각의 모든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온 유럽이 이 전쟁에 뛰어들었다.
  '정의도 패배할 수 있고, 무력이 정신을 굴복시킬 수 있으며,
  용기를 내도 용기에 대한 급부가 전혀 없을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바로 스페인에서.'
  --- 알베르트 까뮈.

  퇴페적 쾌락에 빠져있고  방황하던 유럽의 지성인들에게 전쟁은 하나의 새로운 돌파구를 제시했다.  앙드레 말로. 조지 오웰. 생 떽쥐베리. 파블로 네루다. 옥따비오 빠스. 세사를 바예호 같은 지성인들이 직접 스페인 내전에 뛰어 들었다.  거기에 더하여 20세기의 위대한 여성 지성인이라 일컬어지는  시몬드 베이유(불꽃의 여자)까지 총을 들고 전쟁터로 나섰다.  (내 20대 청춘을 사로잡은 여성이 2명 있었는데,  시몬느 베이유와 전혜린)  헤밍웨이도 뒤질세라 종군 기자의 자격으로 스페인으로 달려 갔다.  부상을 입기도 했지만,  종군 기자는 총을 들고 전재을 할 수가 없는 신분이다.  스페인에서 헤밍웨이는  전쟁의 참상을  취재하는 기자였을 뿐이다.  그가 직접 전투에참여했다는 말은 낭설이고,  후에 그의 이력에 스페인에서 직접 전투에 뛰어들지 않았다는 이유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이 비판은 헤밍웨이에게 아주 뼈아픈 상처였다.  훗날,  그는 2차 세계대전에도 종군기자로 참여하여 노르망디 상륙작전 때부터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는데.......  그때 기자의 신분임에도 직접 총을 들고 여러명의 독일군을 사살하게 된다.  스페인 내전에서의 비판이 뼈에 사무치게 아팠든 모양이다.  하지만 이는 곧 국제법 위반이라는  새로운 문제로 비약하게 된다.  종군기자는 여하한 경우에도 아군이던 적군이던  무기로 위해를 가할 수 없다는  국제법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스페인 내전이 신기하고 중요한 것은 더 있다.  위에 열가한 유럽의 지성인 말고도 쟁쟁한 인물들이 대거 참여해 있었다.  20세기 역사를 쥐락펴락 하는 인물들이 대거 이 현장에 있었다.  그들중 누구든지 내전에서 운명을 달리 했다면.......  아마도 20세기 역사의 판도도 크게 달라졌으리라.  또 그만큼 이 내전이  그 중요 인물들에게 끼친 영향 또한 대단히 컸다는 결론이 된다.  그것이 오른쪽이던 왼쪽이던 말이다.  지금 역사에  유고연방은 사라지고 없다.  민족과 종교와 언어와 풍습이 전혀 다른 거대 영토를 유고 연방이라는 하나의 울타리로 묶어서 수십년을 아무 탈없이끌어 온 영웅이 있었다.  그의 사망과 동시에  유고 연방은 수많은 내전을 통해 분리 되었고,  겨우 소련의 패망 이후에야 그나마 어느정도 잠잠해 졌다.  그 영웅이 십념만 더 살았더라면  유고 연방은 오십년에서 일백년은 더 평화를 유지할 수 있었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영화 '나바론'의 배경이 되는  빨치산 유격대로 히틀러의 나찌를 가장 괴롭힌 사람이 바로 유고 연방의 영웅 '요시프 티토'로서  그가 여기 스페인 내전에 직접 참여해 총을 들었다.  불가리아의 독재자 '게오르기 디미트로프'도 이 전쟁에서 군대를 다루고 국민을 이용하는 법을 터득하게 된다.    IRA(아일랜드 독립 무장단체)의 시조격인 '제임스 코놀리'가 이 전쟁에서 혁명과 국가의 독립을 공부하게 된다.  '우리 가운데 제 5열이 있는것 같아.........'  제 5열이라는 말이 스페인 내전에서 생겨났다.  사회주의. 공산주의(우리가 흔히 말하는 사회공산주의와 전혀 다른). 무정부주의(아나키스트). 자유민주주의. 왕정복고주의(왕당파).  파시스트. 카톨릭. 거기에다 이해를 달리하는 온 유럽국가들의 이해관계가 얽히고 섥힌것이 바로 (스페인 내전)인 것이다.  스페인 내전이 종지부를 찍기도 전에  2차 세계대전이 터지고 말았다.  히틀러의 나찌가  프랑스를 도모하기 위하여 먼저  체코와 헝가리를 침공한 것이다.  스페인 내전을 승리로 이끈  프랑코 총통과 히틀러 사이에 상호불가침 조약을 맺고,  스페인은 2차대전 내내 은근히 독일을 지지하면서 겉으로는 철저하게 중립을 내세운다.  이 결과로  프랑코가 죽고 다시 민주질서 하의 왕정이 복고되어 현재에 이르기까지.......  전후 처리때 부터 스페인은  유럽과 세계의 모든 국가에게  '상대치 말아야 할 불량 국가'로 낙인 찍히게 된다.  미국은 스페인 내전이 끝나고  2차 세계대전의 말미까지(진주만 사태) 철저하게 방관자 입장을 고수했다.  스페인 못지않게 비겁하고 부끄러운 처사였다.  하지만 미국은  스페인 내전에서 깨닫고 배운것이 있었다.  그 결과로 그들은 (매카시즘) 이라는  중세 스페인에서 생겨나 온 유럽으로 광란의 칼부림을 있게한 (20 세기식 종교재판)을 탄생시키게 된다.  이 매카시즘이라는 비정하고 불행한 (악마)는  스페인 내전에 직접 뛰어든  유럽을 비롯한 세계의 지성인들에게 '잠재 공산주의자'라는 영원한 낙인을 찍게 만들고 벗어날 수 없는 영원한 족새를 채우게 되는 것이다.  낙인 찍힌 20세기의 지성들은 이제 발 붙일 곳을 모두 잃어버렸다.  2차대전 이후에 세계는  미국과 소련이라는 냉전의 시대가 도래하고 정착되었기 때문이다.  민주의식을 가치관처럼 소중히 여기는 그들에게 공산주의 소련은 감옥이나 지옥과 진배 없었다.  소련이 아닌 세상은 모두 미국의 지배력이 차지하고 있었고,  그곳에는  매카시즘의 족쇄가 이들을 숨 조차 쉴 수 없는 곳으로 만들었다.  미국과 소련의 대결속에  비교적 자유스러운 곳은 멕시코 이남의 중남미 지역밖에 없었다.  스페인 내전을 경험한 유럽의 지성들이 대거 중남미로 달아났다.  헤밍웨이도 이때 이런 이유로 쿠바의 하바나로 사실은 도망친 것이다.  그리고.......  볼리비아의 정글로 도망친 유럽의 지성인에게서  가르침을   받고 마침내 (체 게바라)라는 혁명가가 탄생한 것이다.  체 게바라가 배우고 체득하고 실천한것 모두가 (스페인 내전)의 경험에서 나온 것들이었다.  카스트로는 사회주의 이상 실현을 위해 공산주의의 필요성을 인정했지만.......  게바라는 공산주의를 끝내 신뢰하지 않았다.  그는 영원한 사회주의자였다.







 



 

 

 








 





 



 

 

  20세기 이후 모든 여성 사회운동가들의 영원한  롤 모델이 된 '시몬느 베이유(불꽃의 여자)'.  그녀는 한 여성이기 이전에 진정한 '행동하는 지성인'이었다.
                                                                    -- 직접 총을 들고 스페인 내전에 뛰어든 '시몬느 베이유'

                                                     

 

 

 

 






  론다 누에보 다리 공방전은 스페인 내전 말미의 최대 격전지였다.

  다리를 사이에 두고 양군은 빼앗고 빼앗기기를 바꿔가면서 치열하게 접전을 벌였다.  당시까지도 다리 중간의 공간은 정치범들을 가두는 감옥이었다.  상황에 따라 다리를 빼앗기게 되는 상황이되면  정치 죄수들을 살아있는 채로 계곡아래로 내던져 버리곤 했다.

  1939년.  마침내 스페인 내전이 끝을 맞았다.

  미국의 외면 속에 국제사회의 지원을 받지못고,  자기네들 끼리 사분오열하면서 내분으로 치닫던 공화파가 프랑코의 반란군에게 회복불능의 상태로 패배한 것이다.  그러자 언제나 그렇듯이 제편들끼리 물고뜯고 싸우던 공화파 지휘부는 잽싸게 보따리를 싸서는  프랑스로 도망쳤다.  파리에 스페인 망명정부를 세우고 서로 제 살길만 모색하다가,  망명정부의 공산주의자들이 패전의 책임을 물어 하나하나 숙청을 가해오자  아나키스트와 공화파가 남의나라 임시정부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서로 자신이 대표라며  본토의 프랑코 반란군에게 협상을 요구했다.  프랑코의 외면과  임시정부를 불신하게된 프랑스의 태도로 마침내 망명정부는 스스로 와해되고,  스페인 내전은 이제 완전한 프랑코군의 승리로 막을 내리게 된다.

  이 전쟁의 막바지에  헤밍웨이는  종전 취재를 위해 론다에 머물고 있었다.

  스페인 내전이 끝났다.  하지만 전쟁은  헤밍웨이가 지원한 공화파의 승리가 아니라,  반란군인 프랑코파의 승리였다.  헤밍웨이는 패전한 것이다.

  승리한 프랑코군은 우선 스페인 전체의 상황파악과 요동치는 민심의 안정과 질서가 가장 시급하게 필요했다.

  전쟁은 끝이 났지만 전분야에서 제대로 정리와 정비가 이루어지지 않은 시점에선 당장 동요할만한 조치가 뒤로 미루어지기 쉽상이다.  세상은 조용했다.

  하지만 불확실한 미래는 모두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이 짧은 '내전의 진정기' 동안 헤밍웨이가 론다에 그대로 좀 더 머물렀던 것이다.

  내전에 참전한 대다수의 지성들은 대부분은 파리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헤밍웨이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미 또다른 전쟁은 시작되었고.......  유럽은 바람 앞의 등불이요 함난한 바다에 내몰린 조각배 신세였다.  아무도 앞날을 예측할 수 없었다.

  바로 이 시기에 론다에 머물면서 헤밍웨이는  자신이 직접 목격한 (스페인 내전)을 돌아보고 정리할 필요성을 느끼게 된다.  그는 이곳에서 (누구를 위하여 종을 울리나)를 써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가깝다면 가까운 말라가 출신의  피카소를 다시 만나게 된다.  함께 많은 이야기를 나누고 술도 마시고  투우 구경도 하게 된다.

  두달 정도가 지나자 내전의 진통을 어느정도 수습하고 안정을 찾은 프랑코군이 모든 면에서  반대파의 목을 서서히 좁혀오고 있었다.  헤밍웨이나 피카소나  다른 지성인들 모두가 이젠  스페인을 떠날 때가 되었다.  일부는 멕시코를 비롯한 중남미로......  일부는 파리로 떠났다.

  그리고 얼마지 않아서 마침내  히틀러의 독일이  프랑스를 침공한다.  패망한 프랑스 정부는  영국으로 달아나서 망명정부를 세운다.

  나치즘의 지성인들은  파리에 그대로 남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상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티토를 따라 동유럽과 소련으로 달아났다.  헤밍웨이는 조국인 미국으로 갔지만,  이미 매카시즘이 판을 치는 미국 땅에서는  편하게 발을 뻗고 쉴 한평의 공간도 그에게 허락되지 않았다.  그는  쿠바로 옮겼다.

  소련의 우방국이자 사회주의인 쿠바의 수도 하바나에서  그는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수많은  지성인들과 어울린다.  (노인과 바다)를 써서 크게 성공한다.  

  하지만 여전히 미국은 그를 공산주의자로 의심했고  CIA를 통해 그를 점점 궁지로 몰아붙이게 된다.

  마침내 그는 스스로 자신의 인생을 결정하기로 마음 먹게된다.

 

 

 

 

 

 

 

 

 

 

 

 

 

 

 

 

 

 

 

 

 

 

 

 

 

 

 

 

 

 

 

 

 

 

 

 

 

 

 

 

 

 











 

 

 

   

 

 

 

 

 

 

 

 

  '우리가 오늘 그라나다로 가려고 하거든요.  똑같이 2시간반 정도 걸린다면  기차로 이동하는게 좋을까요?  아니면 버스로 이동하는게 좋을까요?'

  아침 산책을 나서면서 카운터의 아가씨에게 물어 보았다.

  '각자 견해의 차이는 있겠지만  제 경우는 기차여행이 더 편리하고 좋았던것 같애요.'

  무얼 더 따져보고 망설일 이유가 있겠는가?

  나선 걸음을 직빵으로 기차역으로 가서는 오전에 그라나다로 가는 기차표를 구입했다.  이동 준비 끝..........

 

  그런데.........

  스페인 여행이 끝나고도 한참 지나........  이 여행기를 쓰고있는 이 순간까지도,  나는 그 아가씨가 왜 기차여행이 더 좋다고 했는지 이유를 모르겠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그 이유를 정말로 나는 모르겠다.

  ㅎㅎㅎ

  생각이 나면  그라나다에 가서 다시 한번..........

 

 

 

 

 

 

 

 

 

 

 

 

 

 

 

 

 

 

 

 

 

 

 

 

 

 

 

 

 

 

 

 

 

 

 

 

 






 

 

 

 

  너무도 아쉬운 발걸음으로 일단은.........  헤밍웨이 카페로 간다.

  안달루시아의 향기와  론다의 맛을 듬뿍 담아서 아쉬운 작별의 모닝커피샷을 날려본다. (베리 베리 꾸~웃)

  마음의 눈과 가슴으로 론다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는 숙소로 돌아와 배낭을 꾸린다.

  체크 아웃을 하고 걸어서 기차역으로 다시 향한다.

  부럽다~~~~~~~~~~~.

  기차를 기다리며 무엇인가를 열심히 적고 있는 할머니와 독서를 하는 할아버지가 우리 두눈 가득 쏟아져 들어온다.

  그 정겹고 고귀한 풍경에 우리는 서로 눈짓으로 '저기 좀 봐'라고 사인을 주고 받는다.

  연륜이 묻어 난다.

  평온함과 진지함과 자연스러움 행복감이 스며 나온다.

  할아버지는 댄 브라운의 내가 알지 못하는 제목의 소설(아마도 신간일 듯)을 읽고 계셨다.

  할머니는 '산타 마리아 라 마요르 성당' 사진이 든 엽서를 꺼내들고 노트에 정말 깨알같은 글씨로 이곳 론다 여행중에 격었던 마요르 성당의 추억을 갈무리 하고 계신것으로 보여진다.

  정말로 여행을 소중히 생각하고  진실로 여행을 즐길줄 아시는 모습이다.  두 분의 모습 가득 진한 연륜이 자연스레 가득 배어있다.  부럽다.

  나도......  우리도.......  십년 후........  아니 허락되는 그때까지 저런 모습으로 나이를 먹어가고 싶다.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해도 넉넉해지고 무엇인가 배우고 깨닫는 심정으로  그분들과 기차 여행을 시작했다.

  약 한시간 정도 지나서 까지..........

  지금도 두 분의 모습이........  그 순간에 가졌던 어떤 경건함이........  그대로 내 가슴으로 전해져 온다.

  부디 오래오래 건강하시고........  좋은 여행 계속하시기를...........

 

 

 

 

 

 

 

 

 

    --- 론다 여행을 마칩니다.  다음 여행은  그라나다에서 이어지겠습니다.  감사합니다.    피안재.